2019-03-10

회고록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 3 《세기와 더불어》의 세계화 담론


2. 《세기와 더불어》의 세계화 담론

  
《墾島》에 가다 《看島》에 살다 《間島》에 죽다

글을 시작하며

지금 룡산철거민유가족들은 망루에 《살려고 올라갔다가 죽어서 내려왔다.》고 절규하고있다. 한세기전 우리 민족은 간도에 《살려고 갔다가 죽어서 돌아왔다.》 이 글은 《墾島에 가다 看島에 살다 間島에 죽다.》로 요약된다. 이 세가지 간도의 이름속에 왜 우리가 그곳에 살려고 갔다가 죽어서 돌아왔는지의 리유가 다 담겨져있다. 적어도 간도에 대한 이 세가지 이름을 설정해놓지 않고는 간도에서 겪었던 우리 민족의 운명과 수난을 바로 리해할수 없다. 룡산참사와 일제에 의한 간도에서의 대학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은유적비교이다. 이런 세가지 간도의 각기 다른 의미는 1791년 제라미 벤담이 구상한 판옵티콘을 일제가 간도라는 땅에 침략야욕을 성취하려 그대로 적용한 결과이고 룡산참사는 대재벌의 리익추구에 힘없는 민중을 희생시킨 결과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민생이고 복지인가?
소설 《북간도》의 첫 장면은 조선인인삼장사군들이 간도땅에서 서로 싸움을 하다 일제순경과 중국관리가 서로 끌고가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곳에 왜 갔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잘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할것이다. 이렇게 《비옥한 반달모양의 땅(fertile crescent)의 이름 <팔레스티나>》같은 우리 민족의 젖과 꿀이 흐르는 민생복지의 땅으로 우리는 간도에 墾島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것이다. 1881년 두만강바닥에 흙모래가 쌓여 길이 5리가량의 모래톱이 만들어져 여기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런 개척의 땅을 墾島라 한다. 1903년 조선관원 리원범은 땅을 조선사람이 개간하였으니 조선땅이라 하였다. 이에 청은 동의하지 않았다.
1904년 청은 조세를 바치고 조선사람들이 농사를 짓도록 했다. 1907년 일본은 사이또를 우두머리로 룡정에 총감부 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한인의 생명재산보호소》를 설치, 간도의 범위를 연길, 화룡, 왕청 등지로 확대한다. 그리고 주요교통로에 14개 헌병분주소를 둔다. 이런 《보호와 보살핌》의 대상이 된 간도를 看島라 할것이다. 이렇게 일본이 우리를 중국에 대하여 《보호하고 생존권을 보장해준다.》는 《민생단》이 看島에서 출현한다.
이제 더 나아가 1909 9 4일 《중조도문강변무조항》 즉 간도협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의해 일제는 길회철도부설권과 조선인에 대한 령사재판권을 얻어내고 청나라는 룡정, 국자가, 훈춘, 백초구, 이도구 등 5개 지역을 일본의 통상지로 개방하고 통상지에 일본령사관 분관을 세운다. 이제 간도는 완전히 정치적으로 일본과 중국사이에 끼여있는 間島가 된다. 모래톱으로서 간석지인 사이섬이 아닌 정치적분쟁지역이 되였다. 이제부터 마치 가자지구의 팔레스티나사람들같이 처참함을 우리 민족은 경험하게 된다. 반《민생단》마녀사냥에 휘말렸던 땅으로서 間島는 우리에게 더이상 墾島도 看島도 아니다. 

간도라는 이중감시탑속의 조선인

1931 9 18일에 일본은 자해공갈단같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로 둔갑하는 소위 《만주사변》을 조작한다. 이는 근현대사에 손꼽힐만 한 일본이 자행한 위장기발사건이다. 진주만, 바크보만 그리고 만주사변 이 3대사건은 미, 일이 조작한 《위장기발》이라고 미국 그리핀교수는 이미 지적한바 있다. 이 조작극에 놀아나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는》 피해를 고스란히 조선열혈공산주의자들이 떠안았다. 회고록에 의하면 《민생단》혐의가 있는자들은 고작 89명정도였다. 그 소수의 밀정들때문에 수많은 애국자들이 학살당한다.
1932 2월 만주 간도는 봄을 기다리고있었다. 조선족 100만은 9. 18사변의 최대희생자가 될 운명이였다. 일본군대는 조선족 한교만 보면 자기들을 피해 도망온것이라 보고 즉 《부정선인(不呈鮮人)》이라 하고 체포총살하였다. 일본측 적구로 오지 않는 부락은 방화략탈하였다.
현대프랑스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주저 《존재와 사건(Being and Event)》에서 《사건(event)》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의하고있다. 여기 공백인 0이 있다고 할 때를 이를 (0)으로 표시하면 이것은 사건이 된다. 0은 완전공백이지만 이것을 일단 두개의 괄호사이에 넣어버리면 《한개》라는 개수가 되여 《1》이 된다. 2 000년동안 수학자들이 1을 사용하면서도 1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몰랐다고 하면서 (0)은 공백인 무이면서 동시에 1이라는 유라는것이다. 이를 《공백의 가장자리》 혹은 《사건적장소》라고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간도에 살고있던 조선사람들은 공백의 가장자리 그리고 사건적장소속에 있었던것이다. 일본과 중국이 이런 사건속에 있었다고 할수는 없다. 이런 가장자리에서 생긴것이 바로 《민생단》이며 이는 분명한 하나의 《사건》으로 조건을 갖추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이를 《민생단》사건으로 부르기로 하는 리유이다.
간도의 조선인청년들은 자신이 어느 세계에 속한것인지 극심한 정신적혼돈을 겪지 않을수 없었다. 그 모호함은 가장 견결한 항일투사를 일제의 개인 《민생단》특무로 몰아죽이는 그 순간마저도 삼켜버렸다. 《부정선인》 혹은 《소귀자》라는 이름이 우리한테 붙게 된것은 0과 같은 존재가 사건적이 될 때에 공백의 가장자리에서 따르는 불가피한것이였다.
이러한 사이로서의 間島를 한홍구교수는 《희망의 땅, 비극의 땅 간도》 그리고 《빛과 어둠 그리고 운명과 의지》라고도 했다. 《그것은 동원인 동시에 참여였고 혼돈인 동시에 진보였으며 어둠인 동시에 빛이였다.

오가작통법과 십가련좌법

룡정에 일본령사관이 생기고 만주철도가 부설되고 드디여 1930년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墾島는 間島로 심화되면서 변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도 5. 30폭동, 곧 이은 백색테로사건, 공산주의자들의 《주구청산투쟁》 등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살아오던 우리들에겐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격랑의 세월을 안겨다주었다.
일본은 《토벌대》를 간도에 보내 반일 혹은 항일유격대를 《비적》 혹은 《공비》라 명칭하고 이잡듯이 마을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집단으로 죽였다.드디여 1932년 일본은 《조선군》으로 가장된 군대를 간도에 보내여 조선인을 그리고 중국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여기서 진정한 의미의 사이적존재의 비극이 시작된다. 그래서 중국인이 볼 때에 조선사람들은 자기들과 같이 일본의 피해자인 동시에 일본과 같은 가해자로 보게 된다. 조선사람은 이렇게 가해자로서, 피해자로서 간도에 살게 된것이다. 이를 두고 墾島에 살러 왔지만 間島로 살아가게 된것이라 한다. 間島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것인지 우리가 그렇게 이름을 붙인것인지 간도의 밤만이 알고있을것이다.
이밤의 노래를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아래 글은 회고록 4 140142페지의 내용을 요약한것임.)

《간도의 항일근거지들은 1935년에도 물샐틈없는 봉쇄상태에 놓여있었다. 이해에는 적들의 봉쇄가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가 로선을 바꾸어 혁명에서 대단원을 이루어보려고 결심하였다면 그들은 봉쇄망을 최대한으로 조이여 <공비>숙청에서 결정적승리를 달성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일제는 수천수만명에 달하는 정예무력을 동원하여 유격구를 겹겹이 포위하고 매일같이 항일근거지의 모든 생물체들을 지상에서 쓸어버리기 위한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혁명군과 인민들사이의 련계를 끊어버리기 위한 적들의 책동중에서 기본으로 된것은 바로 집단부락정책이였다. 이 정책에 따라 인민혁명정부의 관할밖에 있는 모든 행정구역의 주민들은 싫건좋건 토성과 포대로 둘러싸여있는 밀집부락에 들어가서 오가작통법이나 십가련좌법과 같은 악법들과 중세기적인 질서의 지배밑에서 두더지같은 생활을 해야 하였다.
적들이 만주각지에 널려있는 수천수만개의 산재부락들과 가가호호들에 불을 지르고 최후통첩적인 철거령을 내리고 그 주민들을 벌방의 토성촌들로 무자비하게 이주시킨 목적은 군대와 경찰, 무장자위단이 상주하고있는 <안민촌>들에 올방자를 틀고앉아 편안한 통치를 하자는데도 있었지만 주요하게는 토성, 포대, 물홈, 울타리, 탐조등, 철조망과 같은 인공적인 장벽들로 <공비박멸>에서 가장 큰 장애로 되고있던 군민일치의 피줄기를 영원히 끊어버리자는데 있었다. 유격대가 인민의 보호자이고 인민이 유격대의 후방이며 중요한 정보원천이라는것은 적들도 잘 알고있는 상식이였다.
인민을 토성속에 모조리 걷어넣으면 도로건설과 군사시설의 설치를 비롯한 여러가지 부역에도 집단적으로 동원시킬수 있었고 그 비밀도 철저히 보장할수 있었으며 로력과 자금, 물자의 징발도 어느때나 용이하게 할수 있었다.
적들은 집단부락건설을 계기로 반공선전을 강화하였다. 너희들이 정든 고장에서 살지 못하고 집단부락으로 가게 된것은 다 공산당때문이고 혁명군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들과 내통하면서 치안을 교란시키기때문에 당국은 부득불 산재부락들을 없애고 백성들이 <공비>나 마적들의 성화를 받지 않고서도 살수 있는 <안민촌>들을 건설하게 된것이다라고 지껄이였다.(필자주: 이것이 바로 看島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적들은 토성을 네모나게 쌓고 한 토성안에 100호 또는 200호의 집들을 밀어넣었다. 집은 군경들의 감시에 편리하게 현대공장지구 사택들처럼 줄을 맞춰 지었다. 한동네에서 온 사람들도 집단부락에만 들어가면 서로 추녀를 맞대고 살지 못하게 갈라놓았으며 친척친분관계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앞뒤집이나 아래웃집에 있게 하지 않고 동서남북에 각각 분산시켜 배치하였다. 그것은 뜻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치안유지에 방해되는 모의를 하거나 비밀결사를 시도하지 못하게 하자는 조치였다.
적들이 집단부락안의 주민들의 분렬과 리간을 얼마나 꾀하였는가 하는것은 오가작통법 한가지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적들은 다섯집으로 한개 조를 뭇고 그중 한집이라도 유격대와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면 조안의 모든 세대들에 꼭같은 처벌을 주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그 다섯집의 주민들을 전부 학살하군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악명높은 오가작통법이다.(필자주: 이것이 바로 판옵티콘의 구조이다.)
《집단부락을 통치하는 행정관리들과 무장군경들은 인민혁명군의 수중으로 한되박의 쌀이라도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식량에 대한 통제를 무섭게 하였다. 그들은 주민들이 토성밖으로 일하러 나갈 때마다 <공비>들에게 줄 여분의 밥이 담겨있지 않는가 하는것을 조사하려고 점심보따리까지 헤쳐보았다. 점심그릇도 한사람몫이 넘으면 무턱대고 빼앗아냈다. 집단부락의 농민들은 밭일이 묵어서 새벽작업을 하고싶어도 날이 밝기 전에는 성밖으로 나갈수 없었고 날이 저물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혁명군은 집단부락인민들의 식량상방조를 거의나 기대할수 없었다.(필자주: 지난 전기간에도 《공비토벌》이란 말은 그대로 적용되였으며 같은 방법으로 초토화내지 《토벌》을 하였다.)
《유격구에서 재배하는 곡식으로는 군민에게 필요한 식량을 충당할수 없었다. 게다가 적들이 줄곧 농사를 방해하였다. 그들은 사람과 함께 농작물도 초토화대상으로 삼았다. 싹이 돋아나는 곡식은 군화로 짓밟았고 성장기의 작물은 불을 질러 태워버리였으며 다 익은 낟알은 무장대가 우마차를 끌고와서 모조리 실어갔다. 이것은 총과 대포로써도 멸살시킬수 없는 유격구역의 군대와 인민을 완전히 굶겨서 죽이기 위한 비렬하기 짝이 없는 기아작전이였으며 목을 조이는 봉쇄작전이였다.
<민생단>은 해체되였지만 혁명대오를 안팎으로부터 분렬와해하기 위한 적의 파괴작전은 종전보다 더 악랄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였다.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들에는 미인들의 라체사진이나 추잡한 남녀관계를 그린 눅거리춘화들까지 나타났다. 돈에 매수된 미녀들이 로자 룩셈부르그나 쟝느 다르크의 탈을 쓰고 우리 대오에 침투하여 군정간부들의 넋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경찰서나 헌병대로 데려가기 위한 부식공작을 열심히 벌리였다.
이 모든것은 간도의 유격구들을 인간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절해고도의 세계로 만들어버리고 그것을 철저히 초토화하고 질식시키기 위한 대살인광대극이였다.

스낭제염소마을과 프렌감옥 그리고 간도(看島)

그러면 일제는 어디에서 오가작통과 같은 방법을 배워왔을가? 우리는 이미 일본은 《명치유신》직후부터 판옵티콘을 도입하여 일본내에서 성공한 사례를 소개하였다. 서구에도 오가작통과 같은 구조로 마을을 건설하려는 생각이 없었던것은 아니다. 벤담보다도 먼저 17751779년 왕립제염소를 위해 세운 아르케 스낭마을이 그 례라 할수 있다. 정중앙에 관리자의 집은 토대가 높게 망루같이 설계되였고 내부에 교회가 있고 눈을 상징하는 둥근 창을 내였다. 이는 마치 성경 창세기속의 에덴동산같은 구조이다. 동산의 중앙에 생명나무가 하나 있고 그 둘레에 다른 과일나무들이 서있다. 《생명나무》가 원어로는 《모든것의 모든것(all of all)》이라고 한다. 두말할것없이 신이 거주하는 곳이고 신의 두눈은 동산안의 모든것을 간호, 감시한다. 인간이 죄를 짓는지 않는지, 인간이 다른 존재에 의해 상해를 당하는지 안당하는지 등등.
스낭마을은 설립목적이 이런 에덴동산같이 리상향을 만들기 위한것이였다. 그러나 스낭마을은 원래 원형으로 건설하려는 취지가 다 이루어지지 못하고 반원이 되고말았다. 사실 벤담의 판옵티콘은 그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다. 18세기 유럽의 합리주의사상과 인간의 도덕성이 완성되면 인간사회는 저절로 리상향이 이루어질것으로 믿었다. 판옵티콘이 이런 리상향의 반응이라 할수 있다. 19세기말에 와서는 원형판옵티콘이 사라지고 중앙탑이 없는 프렌감옥은 중앙공간축에 수직으로 수용실건물을 배치하였다. 건축가 푸생이 1898년 설계해 프랑스 빠리근교에 세운 프렌감옥은 넓게 정착된 방사형평면과 함께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있는 평면이다.
생각키로는 일제가 간도에 만든 오가작통마을구조는 프렌감옥의 변형된 판옵티콘에서 유래한것이 아닌가 한다. 일제가 《명치유신》이후 판옵티콘을 생산로동현장에 적용하여 효과를 본 결과를 역으로 악랄하게 우리에게 적용한것이 오가작통방법이라고 본다. 그것도 조선사람들을 《공비》로부터 돌본다는 미명하에 말이다. 벤담은 수감자들이 어떻게 로동을 생산적이고 효률적으로 하도록 할것인가? 어떻게 수감자들을 유용하게 만들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다가 감옥안에서 무엇보다 필요한것은 수감자들을 분류, 구분하는것이라 생각하게 되였다. 지금까지 감옥안에서 효과를 보지 못한 리유는 수감자를 무작위로 가둠으로 효과적인 로동조직을 하지 못하였고 통제도 어려웠다는데서 착안한것이다.
이 정도면 일제가 간도땅에서 유격구해체이후 오가작통구조를 만든것이 얼마나 판옵티콘과 닮았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벤담은 통제를 위해 인구조사만큼 유용한것은 없다고 보아 《극빈자분류표》를 만들어 년령, 성별, 건강의 등급 등을 포함한 47렬의 분류표모델을 작성하였다. 그래서 인구의 분류에 따라 일의 종류도 분류하여 그 사람에게 알맞는 일을 무엇이든 분담시킨다. 례를 들어 앉아서 일어설수 없는 수감자에게는 실뜨개같은 일을 시키면 된다. 벤담은 이를 《모든 팔을 사용하는 원리》라고 했다. 모든 팔이란 신의 팔같은것이 아닌가. 불교의 돌봄의 자비의 손 천개와는 정반대인 감시의 천수가 간도에 마수같이 뻗치고있었다.
감옥의 죄수를 개인고립화할것인지 아니면 집단화할것인가는 아직 론난거리이다. 전자의 방식이 펜실베이니아모델이라 하고 후자를 어번모델이라고 한다. 벤담은 물론 이 량자를 종합한 제3의 방식을 취하였다. 일제의 오가작통법도 제3의 모델이다. 일제는 집단화된 유격구내 사람들이 집단행동하는데 위협을 느꼈으며 그렇다고 개인별로 고립화시킬수도 없었다. 관리와 비용이 엄청나기때문이다. 이런 제3의 모델을 악리용한것이 회고록이 전하는 일제의 오가작통같은 《집단부락정책》인것이다. 그안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벤담이 선의로 구상한 판옵티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것이였다.

드디여 間島에서 우리는 죽어가고있었다

이렇게 벤담의 판옵티콘이 역기능으로 진화할줄은 그자신도 몰랐었다. 19세기말20세기에 들어 18세기 합리주의와 도덕주의는 빛이 바래고 권력의 성격과 구조자체가 변했기때문이다. 이에 착안한 푸코는 판옵티콘의 감시와 처벌의 기능만을 엿본것이다. 그리고 그의 감시와 처벌의 리론은 일제의 식민통치론리를 보기에 더 적합한것이였다. 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오늘날 신자유시대에 《최대소수의 최대행복》으로 변한것에 대해 그는 지하에서도 놀라고있을것이다. 여기에 간도락토의 꿈은 산산이 무너지고 墾도가 看도로 그리고 다시 間도로 변하면서 우리 배달조선족은 서서히 죽어가고있었다.
이런 구조속에서 발생한것이 《민생단》사건이다. 사이적존재로서의 기구한 운명은 간도에서 표본같이 나타났다. 거듭 말해 마치 팔레스티나안의 가자지구같이 말이다.
만주땅안에서 이런 일본이 만들어놓은 마을과 같은 처지와 신세는 다름아닌 우리 민족자체 그리고 국가라는 그자체의 신세와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세울수 없었던 그것이 이것과 무엇이라도 한점, 다른 점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지금 또 다른 오가작통, 십가련좌라는 구조속에 들어있지 않다고 장담할수 있는가? 사이적존재로 강대국들사이에 끼여 이쪽저쪽에서 감시와 감독을 받아야 하고 의심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어제가 아닌 현재 우리의 민족적운명이다.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윁남에서 우리의 의사에 상관없이 요청만 하면 파병을 해야 하고 모든 경제주권은 미국딸라의 힘앞에 맥을 쓸수 없는 우리는 지금 국제적으로 혐오와 의심과 증오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것이다.
항일유격대는 여기서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유격구지역을 이렇게 오가작통방식으로 전환시키려 달려드는 일제의 대규모적인 침략에 대처하여 새로운 조치를 취할수밖에 없었다. 유격대는 협소한 지역에서 벗어나 광활한 지역에 진출하여 일제와 전면대전하는 한편 유격구해체문제를 상정시켜 새로운 론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김일성사령관의 이에 대한 결단은 또 하나의 력사적기록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평등사회에서만 바로 《본다》
 
흉악범얼굴 공개할건가 말건가

련쇄살인범의 얼굴을 공개할것인가 말것인가? 《한국》언론재단이 2 9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쎈터 12층에서 언론의 범죄피의자얼굴 공개와 인권에 관한 토론을 벌렸다. , , 동 등 《한국》의 보수신문들은 강력범들의 얼굴공개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진보성향의 언론 및 방송들은 이를 반대하고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선 이런 론쟁이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흉악범들자신들이 자기들 얼굴이 언론에 공개되는것을 개의치 않기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피의자자신이 먼저 얼굴을 들지 않고 혹은 못하고 스스로 감추려 하는데서부터 문제의 원인이 생긴다. 얼굴공개반대에 대한 가장 큰 리유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흉악범과 인상착의가 같은 사람이 선의의 피해를 입을수도 있기때문이라고 한다.
이 두가지 리유모두가 《한국》과 서양에서 얼굴을 《본다》는데 대한 인식차이때문이라는것이 분명해진다. 즉 동양에서는 흉악범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가족공동체와 동일시하거나 같은 인상착의의 모든 인간을 같은 동류로 보는 이것, 모두가 결국 《나》라는 개인의식이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에 제압당하기때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문제의 관건은 근본적으로 《본다》는 말의 의미의 차이에서 생각을 정리하는것이 순서일것이다.

동양의 《본다》와 서양의 《본다》의 차이

서양에서 흉악범들이 자기 얼굴공개를 꺼리지 않는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말에 그대로 나타나있다. 영어의 see look watch 등은 모두 주객이 선명하게 나뉜 상황을 전제한다. 보는쪽과 보이는쪽이 분명하게 나뉘여져 그사이의 혼동이란 있을수 없다. 그래서 내 얼굴이 네 얼굴일수 없고 네 얼굴이 내 얼굴일수 없다.
《판옵티콘》은 《옵티콘》의 《본다》와 《모두(pan)》의 합성어이다. 서양철학에서 《본다》는 기능은 지금 혐오와 청산의 대상이다. 그리스의 《에이도스(eidos)》로서 이 말에서 플라톤의 idea 즉 관념이란 말이 유래한다. 옵티콘은 눈이 대상을 일방통행적으로 보는 행위로서 이 말은 결국 서양철학을 주객이원론의 함정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다. 사실 푸코의 판옵티콘에 대한 강한 거부감도 서양철학의 이러한 본다는 행위의 감시자기능때문이다. 다시말해서 감시자가 피감시자를 일방통행적으로 본다는, 다시말해서 감시한다는데 그 리유가 있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의 녀류신학자 일리가리는 보는 《시각》을 《촉각》으로 대치할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있다.
서양의 이러한 《본다》에 대하여 한문의 본다에는 《견(), (), (), 《망(), 《간()》 등이 있다. 한의사가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진단하는것을 망진(望診)이라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본다는 말이 한문에 많은것은 인간이 보는 시야의 범위와 차이때문이다. 견은 주견이나 견해에서 보는바와 같이 보는 주체에 방점을 두는것이고 시는 주시나 감시같이 보이는 대상에 방점을 두는것이다. 바로 판옵티콘의 본다에 해당하는것은 시이지 견이 아니다. 그러나 견이나 시모두 일방통행적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주에서 객으로 향하든 그 반대이든 비대칭적일방통행적이다.
서양에서는 본다에서 주객을 상호교통시킬수 있는 본다라는 말이 없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를 본다고 할 때에 본다는 말의 비대칭적인 구조라 한다. 범시가 진화를 하면서 대칭적구조로 바뀌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생긴다. 대칭성이란 보면서 동시에 보이는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감옥에서 간수가 죄수들을 보는 동시에 죄수들에 의해 간수가 보인다는것을 두고 대칭적이라고 한다. 이제 범시 혹은 판옵티콘이 벤담과 푸코를 넘어 또 다른 진화를 할 리유가 여기에 있는것이다.
그런데 동양에는 본다는 의미의 관()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시와 견을 상호련관을 시켜 비대칭적구조를 파괴하는 구조를 암시하고있다. 불교 반야심경 첫 구절인 《관자재(觀自在)》라고 할 때에 이 말은 《스스로의 자기를 본다》를 의미한다. 여기서 견이나 시를 사용하지 않고 관이라고 한것이다. 관은 시와 견과 달리 자기가 자기자신을 본다는것이다. 그럼 객관적대상을 보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자기가 자기를 먼저 대상화하여 먼저 보고 다시 그렇게 본 자기를 대상과 겨냥하는것을 두고 관이라고 한것이다. 시와 견과는 달리 중층구조를 가지고있는것이 관이다.
이러한 관은 360°전체 방향을 다 보는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시와 견은 그 반정도의 시야를 갖는 말이다. 시와 견은 자기자신의 봄, 자기 공동체안의 봄이라는 내재화를 할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재화는 범시의 의미를 벤담이나 푸코를 넘어서게 한다.
지금까지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판옵티콘》이란 말은 《범시(凡視)》라고 하는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판옵티콘은 《다봄》이라는 뜻이지만 비대칭적으로 보는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서양언어의 본다는 말의 일방통행적비대칭성은 판옵티콘의 진화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즉 범시로서 판옵티콘은 1990년대이후 감시로서의 판옵티콘이 전자통신의 혁명과 함께 초()-범시(superpanopticon), ()-범시(synpanopticon) 그리고 역()-범시(reversepanopticon), ()-범시(postpanopticon) 등으로 진화한다.
이렇게 말을 비교해놓고보면 우리가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 못하는 리유도 분명해졌다. 그것은 다름아닌 저 흉악범의 얼굴이 다름아닌 나자신의 얼굴이라는 주객비분리적 관의 립장에서 보면 흉악범얼굴공개는 나자신의 얼굴공개와 같기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관이 없는 서양에서는 나-너의 분리가 분명하기때문에 너를 나와 동일시할 아무런 리유가 없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이 아무리 닮았다 하더라도 서양에서는 아들이 범인이라고 해서 아버지도 그럴것이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친한 가족이라도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같은 가족성원이 고발한다. 동양은 이미 일찌기 주객이 쌍방향적으로 보는 역-범시와 등-범시에 익숙해져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탈-범시의 순간에 서있다.

자본주의사회에 먼저 찾아온 《1984년》

오웰이 1948년 소설을 쓴 곳은 먄마였고 당시 먄마는 《사회주의》체제였다. 그래서 그는 먄마《사회주의》체제를 눈으로 목격하면서 이 1984년을 썼다고 한다. 1984 1948을 뒤집은 수자이다. 소설에 나오는 태형(Big Brother)은 공산주의사회의 독재자라고 하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오웰이 예언한 1984년은 자본주의사회에 더 먼저 찾아왔다. 그의 예언이 적중한 곳은 차라리 자본주의국가에서였다. 소설을 쓴 직후인 1950년대부터 콤퓨터에 의한 자료감시(dataveillance)라는것이 가능해졌고 이런 감시망은 자본주의정부, 기업, 은행 등에 적용되였고 심지어는 상용화까지 된다. 미국의 경우는 이런 전자감시망을 FBI가 리용하기 시작한다. 이런 콤퓨터에 의한 감시이외에 1984년의 원거리감시경(telescope)에 근접한것은 전자기기에 의한 감시이다. 그 대표적인것이 바로 페쇄회로감시 CCTV이다.
지금 우리는 거리의 CCTV가 련쇄살인범을 잡는데 수훈을 세운 이후 더 많이 설치해야 한다고 공감대를 이루고있다. 이에 《정부》 여당은 박차를 가하고있다. 지금 리명박《정부》의 독재가 성공 못할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그 반대로 성공할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지금 거리데모현장은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소위 채증이라는것이 있어서 시위군중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감시카메라에 잡힌다. 채증에 의해 불법시위고지서가 집에 날아올 때에는 시민들이 앞이 캄캄해진다고 한다. 100만원 내지 200만원은 보통이고 단체 같은 경우는 수천만원의 고지서에 시달리고있다. 19601990년대 시위는 차라리 랑만적이였다.
공산주의사회가 아닌 자본주의사회에서 오웰의 예언은 적중하고말았다. 2001년 《남한정부》는 한 개인의 혈액형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는 전자건강보험증을 만들려 하다 거센 여론에 직면하여 포기하고말았다. CCTV란 일명 페쇄회로TV이다. 1967년 포토스캔회사에서 발명했다. 한자리에 고정돼있으면서 근거리를 감시하는 TV이다. 그러나 GPS 즉 위치추적장치는 24시간 지구주위를 도는 24개의 위성으로 우리가 어느곳에 있든지 모두 감시할수 있어서 2002 3월 미국 남가주에서는 처음으로 성폭행 가석방범을 24시간동안 이 항법장치가 감시할수 있었다. 거기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기도 당할지도 모른데도 말이다.
영국에서는 500개이상 도시에 모두 2백만대이상의 CCTV가 작동중이다. 9. 11이후 미국은 지하철과 학교에만 500만대이상의 CCTV를 설치하였다. 이제 남《한》에는 뻐스기사의 삥땅까지도 감시할 정도이고 병원은 간호원의 손놀림까지도 감시하고 공장에서는 RF(Radio Frequency)라는것을 도입해 50m이내에서 인간이 움직이는 모든 행동을 감시할수 있다고 한다. 벤담이 꼭 중앙감시탑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필요없다. 례를 들어 기동순찰경찰은 길거리에서 차량번호만 입력을 하면 그것이 도난차량인지 아닌지를 그자리에서 확인할수 있다. 모든 곳이 중심이 되여버린 범시가 등장한것이다. 이 정도면 서울이 아닌 평양을 가야 더 자유를 만끽할수 있다는 소리가 나올법 하게 되였다.

역-범시의 등장과 초-범시

조지 오웰도 예측하지 못했던것은 그의 텔레스코프가 적어도 3단계로 진화하고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 디스토피아적인것만은 아니라는것도 암시하고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감시를 당하면서 감시를 해달라고 자기 정보를 감시자에게 스스로 주고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벤담도 푸코도 알지 못했던 점이다. 지금 휴대전화나 인터네트를 사용하자면 가입등록을 해야 하는데 그때에 나의 많은 정보를 주어야 한다. 그러다가 해킹을 당할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감시당하는 사람이 감시에 필요한 정보를 스스로 주는것》, 이것을 소위 수퍼-판옵티콘 혹은 초-범시라고 한다.
초-범시는 벤담과 푸코의 판옵티콘개념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놓는다. 두사람은 모두 감시자의 립장에서 보는것에만 관심을 기울였지만 1960년대이후부터 전산 그리고 전자산업의 발달로 피감시자의 립장에서 보는 혹은 감시하는 기능도 함께 발달등장하기 시작한다. 거듭 말해 피감시자가 자발적으로 감시행위에 참가하는것이다. 감시를 즐겨 받음으로써 돌려받을 리익이 더 크다고 생각하여 자기에 관한 신상정보모두를 감시자에게 즐겨 넘기는것이다.이런 초-범시를 정의하면 《보는것에 심취한 나머지 보이는것에 신경쓰지 않음》과 같다. 디즈니랜드 놀이터나 유명연예인을 보기 위해 깔려죽을 각오를 하고도 모여드는 《리얼리티 쇼》같은것이다. 이를 《중인환시(衆人環視)》 혹은 《스펙터클(spectacle)》이라 하며 초-범시라 번역한다.
오웰이 못본것 가운데 하나가 인간은 스스로 감시당하고 보이기를 원하는 본능이 있다는것이다. 이런 감시당하고싶은 본능에서 스펙터클이 가능해진다. 연예인들일수록 중인환시에 환장이 날 정도이다. 그래서 사생활을 고의로 언론에 흘리기도 한다. 푸코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들어 스펙터클사회가 감시사회로 변했다고 했다. 그런데 20세기에 와서는 전자, 전산사회로 변하면서 스펙터클과 감시의 사이가 불분명해지고말았다고 한다. 둘이 하나로 뭉개지면서 범시는 등-범시가 된다. 등-범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것이 바로 역-범시이다.
이번 룡산참사에서 용역깡패의 살수장면촬영은 역감시의 좋은 례이다. 백인경찰의 로드니 킹이란 흑인구타장면을 촬영한 장본인은 일개 시민이였다. 이 사진 한장이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덮여지고말번 하였다. 역감시의 좋은 례이다. 《청와대》에서 이메일발송발각도 모두 역감시의 덕분이다. 벤담도 쇠관을 통해 간수가 죄수와 통화하는 통로를 만들려 했지만 역으로 죄수가 간수에게 말할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페기하였다. 벤담의 판옵티콘은 결코 이런 역감시를 허용하는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감시는 있어도 역감시는 없다. 그러나 전자산업은 역감시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그의 판옵티콘은 비대칭적일방통행적이였다. 역감시는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려 출발했지만 지금 조, , 동은 오히려 감시의 대상이 되고말았다. , , 동을 감시하는 언론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서프라이즈》 등 전자매체언론은 역감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한국》의 《참여련대》나 《경실련》같은 시민단체의 역감시역할은 세계적이다. 리명박《정부》와 《한나라당》은 이 역감시장치의 뿌리를 뽑으려고 지금 서두르고있다.

《우리가 오히려 당신 태형(Big Brother)을 감시하고있다》

범시가 감시자에서 피감시자에로 향하는 일방적감시라면 역감시는 그 반대로서 일방적이다. 여기서 쌍방향적보기와 감시가 자연히 대두될수밖에 없다. 이런 쌍방향적인것을 바로 《신-판옵티콘(synpanopticon)》 혹은 《등-범시》라고 한다. 역감시는 공개되는 정보에 한에서만 감시를 할수 있다. 힘과 권력을 모두 가지고있는 상황에서 역감시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2001년 정보공개법개정안을 놓고 론난이 된적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찬성할리 없었다. 미국 FBI의 도청장치를 카니보어나 에쉘린이라고 하는데 시민들은 이의 공개를 강력히 요청했지만 FBI가 말을 듣지 않자 199910 22일을 《에쉘린파괴의 날》로 정하고 전세계해커들이 총동원하여 인터네트를 마비시키고 주요정보를 파괴하고말았다.
《한국》에서 리명박《정부》가 지금 시도하고있는 《정보통신법》이 얼마나 성공할지는 미지수이다. 앞으로는 《한국》내뿐아니라 전세계전자시민들(네티즌)이 공동으로 등-범시를 만들어나갈지는 큰 과제가운데 하나이다. 등-범시는 결국 힘의 균형과 권력과 경제력 등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가 평등해야 하고 평균적이여야 함을 전제한다. 다시말해서 서로 쌍방향으로 감시하자면 감시도구와 장치조직력 등이 균등해야 하는데 지금 《실용정부》는 이를 파악, 시민단체들에게 돌아가던 모든 예산을 삭감 내지 페기하고있다. 그리고 초불시위에 참가하였다고 하여 무려 1 400여 시민단체들을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있다. 쌍방향감시의 균형이 엄청나게 무너져내리고있는 순간이다.
2009년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역-감시를 해낼수 있느냐의 시금석의 해이다. 지금 MB가 점점 태형으로 변해가고있다. 1998년 메히꼬에서 반군지지자들은 《우리는 당신 태형을 감시하고있다.》라는 구절로 정부전자집을 해킹해버렸다. 시위현장에서 경찰들의 한무리는 시위자를 채증한다. 시위자들도 역으로 채증을 한다. 그러나 한쪽은 힘을 가지고있지만 다른쪽은 그렇지 않다. 이런 힘의 불균형속에서 쌍방향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결국 범시의 문제는 한 사회의 평등과 균등의 문제로 귀착되고만다. 

중인환시속 《아리랑》축제

여기까지와 우리는 벤담이 18세기말에 좋은 의미로 구상한 판옵티콘이 결국 《본다》는 철학의 근본문제와 우리 사회의 구조문제와 련관이 되는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오웰의 《1984년》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니고 차라리 자본주의국가에 해당되는 예언이라는것도 새삼 알게 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1984년》의 영사라는 사회는 북 사회, 태형(Big Brother)은 수령 그리고 평양거리에는 텔레스코프로 치장되여있을것이라 생각했을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반대로 되여가고있다.
이 마당에 북의 생각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이란 말을 판옵티콘과 련관시켜 한번 생각해보자. 감시와 처벌이 가장 심한 사회는 군대병영사회일것이다. 병역기피를 하려는 가장 큰 리유는 아마도 개인의 사생활이 감시당하고있는것이 싫어서일것이다. 그러나 보라. 항일유격대원들은 징병도 모병도 아닌 본인들스스로가, 남녀로소가 자진해서 참가한 대원들이다. 심지어는 10살전후의 소년대원들은 부모의 만류와 유격대장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유격대에 합류한 대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항일유격대는 초-범시 혹은 수퍼-판옵티콘의 사회였다. 해방후 이런 유격대원들이 입국하여 이들이 주축이 되여 나라를 세웠다. 그런 의미에서 초-범시적 대스펙터클사회이다.
이들이 만드는 정치는 그래서 《리얼리티 쇼》와 같았다. 깔려죽을 각오를 하고 공연장에 몰려드는 젊은이들같이 인민대중들은 나라세우는데 신명나있었다. 《아리랑》축제에 어린아이들을 강제동원했다고 하지만 이들은 공연을 초-범시적으로 자기 정보를 주고 스스로 관람하고 공연도 하는 중인들의 환시속에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이들이 과연 감시속에서 공연을 하는 벤담의 원형감옥 혹은 판옵티콘속에 있는 광대라고는 보지 않는다. 마치 서커스단의 단원같지는 않다고 본다.

정치생명공동체와 탈-범시

그리고 수령과 인민대중은 얼마나 쌍방향적인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에서와 같이 전체와 하나는 서로 상호교호작용을 하면서 서로 바라보는 수평적관계이다. 하나는 전체를 하늘같이 여기는 《이민위천》의 정신으로 그리고 전체는 하나를 태양같이 여기는 그래서 등-범시 혹은 신-판옵티콘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전체와 하나를 묶는 띠는 《일심(一心)》이다. 일심단결, 그것은 전체와 하나가 다시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있는 단위생명체라는것이며 이를 두고 《정치생명체》라고 한다.
《본다》의 문제로 결국 다시 돌아왔다. 감시이든 주시이든 환시이든 본다는 문제는 이미 주관에 중점을 두는 견과 객관대상에 중점을 두는 시사이의 관계도 애매하고 확정을 지을수가 없다. 그리고 감시주체와 감시대상의 한계도 결정지을수 없다. 전산, 전자시대의 《본다》의 의미가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이것이 감시와 스펙터클의 관계도 서로 불가분리적이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본다의 구조는 전체와 하나의 관계로 귀결되고만다.
벤담은 자기의 판옵티콘구상이 실현되지 못함을 비분강개하면서 생을 마쳤지만 푸코는 말년에 와서 자기의 감시리론의 한계를 절감한 나머지 주저 《감시와 처벌》이후 결국 문제는 인간의 주체문제라는 착안, 《자기 개발(technologies of the self)》에 열중하다 생을 마쳤다. 그래서 푸코는 자기의 기술을 《통치의 기술(technologies of government)》과 조화시키려 노력했지만 결론을 보지는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푸코의 《자기 개발》은 고대밀교에 해당하는 령지주의에서 영성개발하는 기술과 류사한것으로 결국 《본다》는 문제가 자기를 본다는 내면화와 대상을 본다는 외면화와 분리될수 없음을 발견하고 주객합일의 자기 개발없이 통치의 기술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이는 결국 공자가 이룩하려는것이고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로 요약될수 있을것이다. 수신제가(자아의 기술)와 평천하(통치의 기술)를 조화시키는 요체는 《이민위천(以民爲天)》이다.
이것을 두고 푸코사상의 전진인지 후퇴인지는 속단할수 없다. 다만 그의 사상에 잘못이 있었던것이 아니라 이 글의 모두에서 본바와 같이 《본다》의 감각이 가지고있는 구조적인 숙명이라고 할수 있다. 본다의 애매성은 판옵티콘 그자체를 해체시키고만것이다. 그러나 이 해체의 자리는 공백이지만 거기서 주체가 움터올라오고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자아의 기술과 통치의 기술을 조화시킬것인가. 인간내면의 주체를 개발하는 기술과 천하국가통치의 기술을 어떻게 련관시킬수 있을것인가?

《평등해야 건강하다》

평등해져 감시하는자와 감시받는 그자체가 없어져 판옵티콘자체가 무용지물이 된 상태를 사회학자 보인은 《탈-범시》 혹은 《포스트-판옵티콘(postpanopticon)》이라 했다. 탈-범시가 나오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힘의 불균형과 불평등을 전제로 해야 하기때문에 결국 등-범시를 이룬다는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벤담이 구상한 판옵티콘은 이러한 자본주의사회구조를 그대로 전제하고야 가능한 구조이다. 거의 250여년간 그 수명을 유지해오면서 지금 해체에 직면한 리유도 쌍방향적감시가 가능한 전자매체때문이다.
판-범은 전체와 하나의 관계의 문제 그리고 옵티콘-시는 전체와 하나사이의 관계작용이다. 그래서 판옵티콘의 철학적문제성은 전체와 하나사이의 작용의 문제이다. 판옵티콘이 문제가 되는것은 다름아닌 하나와 전체가 분리되여 서로 객관시하면서 보고있기때문이다. 하나가 전체를 감시하는 범시 그리고 그 반대인 역-범시 그리고 서로 쌍방적인 등-범시로 진화했다. 결국 하나와 전체가 력동적상호작용을 하는 관계는 전체가 하나를, 하나가 전체를 위하는 작용관계이다. 이는 이미 본다는것자체도 없어진 작용 그자체만 남는 관계이다. 이를 탈-범시라 한다.
이러한 탈-판옵티콘은 《유격대가 고기라면 인민은 바다》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될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회고록은 이렇게 쓰고있다.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였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였다.(1권 머리글 2페지)
1937년 천도교 교령 박인진은 김일성사령관에게 《장군도 숭상하는 대상이 있느냐?》고 묻자 《물론 나에게도 신처럼 숭상하는 대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민이다. 나는 인민을 하늘처럼 여겨왔고 인민을 하느님처럼 섬겨오고있다. 나의 하느님은 다름아닌 인민이다.(5 369페지)라고 대답한다.
남《한》보수들과 세계렬강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북의 진정한 힘은 핵무기도 미싸일도 아닌 지도자는 한없이 낮은 곳에 림하고 인민을 하늘같이 모시라는 이 《이민위천》, 《통치기술》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주체사상은 다름아닌 《자아의 기술》이며 《이민위천》은 《통치기술》이다. 이러한 《이민위천》과 주체사상의 결합은 인민과 지도자가 일심동체가 되게 하여 이 지구상의 무적함대로 등장하고있다.
로작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는 《인민대중이 력사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하자면 반드시 지도와 대중이 결합되여야 합니다.인민대중은 력사의 창조자이지만 옳은 지도에 의하여서만 사회력사발전에서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할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지도자의 통치기술과 인민의 주체간의 력학적관계가 설정돼있으며 이에 대한 규명이 주체사상연구의 근간이라고 할수 있다. 지도자와 인민사이는 결코 감시와 처벌이란 판옵티콘적관계가 아니다. 인민과 지도자는 상호작용 그자체만의 관계이다.
통치의 기술과 자아의 기술의 어우러짐,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사회의 눈의 가시이다. 벤담의 범시이든 전자시대의 등시이든 그 자체가 이미 인민과 대중으로부터 유리와 괴리를 전제한것이다. 《하나》와 《전체》사이의 균렬을 전제한것이다. 그 균렬자체가 없어진다면 이미 그것은 범시자체가 없어진 탈-범시이다. 인민대중을 하늘같이 여기지 않고 소모품같이 여기고 선거철만 되면 여론 조작의 수단으로 당선만 되면 공권력의 이름으로 인민대중을 폭압하는 구조속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그런 곳은 감옥의 구조이다. 감옥이 없는 곳엔 사회자체가 감옥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할것이다.
차별자체를 인정하지 않고는 생명유지가 불가능한 자본주의는 병든 사회이다. 리처드 윌킨스는 《평등해야 건강하다》(후마니타스, 2005)에서 인간의 평등과 불평등은 수명과 질병의 종류까지 결정한다고 하면서 평등하지 않으면 건강한 사회가 될수 없다는것을 주장하고있다. 끊임없이 감시하고 감시받아야 하는 구조속에 우리는 지금 로출돼있다. 누가 누구를,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두고 지옥같은 동토의 나라, 감옥이라고 하는가? 인민대중이 지도자와 원쑤지간이 되고 나아가 이것이 내면화되여 인민이 인민을 서로 감시하는 그곳이 지옥이고 감옥이다.
그래서 북의 사회는 초이든 역이든 공이든 《판옵티콘》자체를 적용하는것이 무의미하다. 하나와 전체의 경계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누가 누구를 감시한다는것자체가 없기때문이다. 그곳에서 감시와 처벌의 대상은 이런 정치생명체 그자체를 파괴하려는 그 모든 외부세력과 내부세력이다. 그래서 북에서 말하는 감시라는 말자체가 남과는 다른것이다. 남에서 지도자가 국민들을 감시하거나 국민들(시민단체)이 당국자를 감시하는것으로서의 역-감시로서의 감시이지만 북에서는 그런 감시가 아닌 생명체로서의 정치공동체를 지켜내는 의미의 감시이다. 범시자체를 감시하는 메타-범시같은 CCTV가 평양에 없으라는 법은 없을것이다. 이를 체제유지라고 비난하는것은 자본주의가 보는 또 다른 눈일뿐이다. 이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뿐이다.





밀림이 설레인다, 장군님 오신다고!

《민생단》문제는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를 함께 그리고 동시에 바라보는 안목이 없는 그 누구도 풀수 없는 성격의것이였다.
회고록전반에 흐르고있는 주요내용의 하나는 김일성사령관의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의 량면성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민생단》혐의자들을 조금만 동정을 해도 마녀사냥의 겨냥이 되는 마당에 이 혐의자들을 변호한다든지 심지어는 갇혀있는 이들을 일거에 풀어 해방시킨다는것은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수 없는 일이였다.
김일성주석이 1935 2월말3월초 다홍왜회의(일명 동만당단특위 련석대회)에 달려가 담판을 지은것은 이미 앞에서 소개하였다. 이번은 마안산으로 달려가 《민생단》혐의로 잡혀있던 아동단원들을 모두 풀어 한품에 안고가는 그 장엄한 행진에 관한 기록을 소개하려 한다. 회고록에 담겨있는 수많은 장면가운데 가장 멋있고 감격적인것으로 여겨진다. 이날을 기억하여 아마 《밀림이 설레인다》(리범수 작/유명철 곡)가 지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실로 그날은 백두밀림이 설레였고 밀림의 긴긴밤은 밤새도록 노래하였다. 그리고 마안산은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하라, 만고의 이런 영웅이 또 있느냐고 울음울었다. 회고록에 적혀있는 그이상의 표현을 할수 없어서 애쓰다 결국 그대로 여기에 전재할수밖에 없었다.
 
《밀림이 설레인다》

1936년 초봄 아직 마안산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여있었지만 밀림은 설레기 시작하였다. 마안산밀영에는 《민생단》혐의로 몰려 이름도 얼굴도 없는, 그래서 인격이 없는 어린 아동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있었다.
회고록은 이렇게 쓰고있다.
《마안산 서쪽밀영에서 좌경분자들이 <민생단>보따리를 뒤적거리고있을 때 새봄의 눈석이조차 시작되지 않은 마안산 동쪽밀영의 음달밑에서는 수십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병마와 기한에 떨며 울고있었다.(4 354페지)
이 소식이 김일성장군이 이끄는 유격대에 알려진것은 4월 상순이였다. 유격대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백두밀림은 파도쳐 설레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장군이 다가오고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밤부터 낮까지 끝없이 밀림은 설레였다.
김일성사령관의 유격대일행이 밀영에 도착하자마자 제일먼저 달려나온 아동들은 《장군님!》 하고 부르며 앞을 다투어 귀틀집에서 쏟아져나왔다.
회고록은 이렇게 쓰고있다.
《밀영의 하늘에 부딪쳐 은방울처럼 굴러가는 아이들의 웨침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불길처럼 확 타오르는 격정에 온몸과 마음을 송두리채 내맡기며 아이들앞으로 바삐 걸어갔다. 저 아이들, 저 아이들이다. 적에게 맞아죽고 찔려죽고 불타죽은 부모형제들의 원쑤를 갚으려고 천산만악과 림해설원을 지나 천신만고의 가시덤불길을 헤치며 혁명군을 따라온 아이들, 바로 저 아이들이 철조망없는 수용소와도 같은 이 몰인정하고 을씨년스러운 산중에서 <민생단>련루자의 억울한 감투를 쓰고 겨우내 설음속에서 우리를 기다려온 아이들이다.(4 364페지)
당시 마안산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한 부대에 의하여 건설된 밀영이 있었다. 이 마안산밀영에는 유격구가 해체되면서 갈데올데없이 문전걸식하다 찾아온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온 아이들을 좌경기회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은 유격활동에 부담이 된다고 귀찮게 여기면서 돌봐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이들을 《민생단》원 련루자로 몰아 박해하였다.
이를 회고록은 이렇게 쓰고있다.
《인민의 리익우에 초혁명적인 <원칙>의 구호, <계급성>의 구호를 올려세우고 대중을 우롱하고 학대하는데 습관된 민족배타주의자들과 좌경기회주의자들은 혁명군의 짐이 된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외면하였다. 그 아이들이 가까이에 있으면 적들에게 밀영의 위치가 드러날 위험성이 있다고 자기들만의 보신을 위한 소왕국을 따로 짓고 깊은 수림속에 들어가 별거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 수림언저리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그 이붓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아이들이 엄동설한에 풀뿌리를 우려먹으며 기한에 떠는것을 보면서도 쌀 한토리 가져다주지 않았고 의복 한벌 해입히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련민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 아이들의 상처에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는 사람들, 아이들의 언손과 언 볼을 입김으로 녹여주는 사람들, 아이들이 귀엽다고 쓰다듬어주는 사람들, 아이들이 설음에 겨워 울 때 함께 붙안고 우는 사람들은 례외없이 <민생단>명부에 오르고 박해를 받았다.(4 364365페지)
이 아이들을 돌본 녀성유격대원이 바로 김정숙녀사였다. 김정숙녀사는 자기 몫으로 돌아오는 밥을 먹지 않고 남겨두었다가 이 아이들에게 밤에 몰래 먹이군 하였다. 김정숙녀사는 해방후 그때를 기억하며 자주 눈물을 흘리군 하였다 한다. 조국에 돌아온 이 아이들은 이미 장성하였지만 김정숙녀사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남쪽에서 혹자들은 이를 김정숙우상화라 한다. 진실은 만주벌 눈바람과 백두밀림만 알고있다. 밤은 노래한다. 무엇이 거짓인가를. 마안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이 산만이 진실을 알고있을것이다.

밀림이 설레인다 폭풍처럼 분노에 설레인다

눈덮인 마안산밀림은 폭풍처럼 분노에 설레였다. 좌경사대주의자들은 이 아동들에게 조금의 동정의 련민을 보내면 《민생단》으로 몰아 가차없이 처단해버렸다. 윤창범이 죽은 후 대리련대장이며 명사수인 김락천은 아동단원들을 데리고 마안산으로 들어오다가 아이들의 헐벗은 몰골을 보다 못해 련대후방부 일군들이 간수하고있던 군복천으로 그들에게 옷을 해입혔다.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련대장에게 감사를 드리였다. 그러나 이런 선행으로 하여 김락천은 《민생단》의 모자를 쓰고 처형되였다. 아이들을 동정하는것이 죄가 되고 랭대하는것이 오히려 공으로 되는 이 밀영에서는 참다운 인간적향취, 공산주의적향취를 느낄수 없었다.
회고록은 이렇게 쓰고있다.
《주먹을 부르쥐고 내앞으로 밀물처럼 육박해오는 수십쌍의 눈물에 젖은 눈동자들은 인간성을 저버리고 초보적인 인간적도리마저 저버린자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고있었다.(4 365페지)
《나는 아이들의 옷차림에 주의를 돌리였다. 옷이란 명색뿐이였지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나 다름없었다. 불에 타고 찢겨지고 닳아떨어진 그들의 옷은 옷이라기보다도 차라리 넝마나 걸레짝에 가까운것이라고 말할수 있으리만큼 람루하였다. 수개월동안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주림과의 싸움을 부단히 벌려온 아동단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백지장처럼 창백하였다.(4 366페지)
《그런데 혁명을 하겠다고 이 산중에까지 따라온 아이들에게 어떻게 <민생단>의 껍데기를 함부로 뒤집어씌워놓을수 있단 말인가. 그래 그 모지락스럽고 얄미운 인간들한테는 저 아이들이 <민생단>이 아니고 <민생단>일수도 없다는것을 판단할 능력조차 없으며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돌보아줄 한가닥의 자비심이나 동정심마저 없단 말인가. 인간해방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할 결심이라고 맹약한 사람들이 인간중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자립성이 약한 어린이들을 어쩌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방임해둔단 말인가.(4 367페지)

밀림이 설레인다 폭풍쳐 설레인다/ 백두의 밀림이 폭풍쳐 설레인다/ 수령님품에 자란 억만의 대오처럼/ 대지를 뒤덮으며 장엄하게 설레인다(《밀림이 설레인다》 3절중에서)

밤이나 낮이나 끝없이 설레인다!

밀림은 고발한다. 몸속에 피 한방울 없는 좌경사대주의자들을 고발한다. 《어른은 아이의 아버지》인것을,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저 자칭 공산주의자들은 혁명할 자격이 없다고 고함친다. 저런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면 저런자들과는 혁명은커녕 한상에 밥도 같이 먹지 않을것이라 다짐한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사령관이 다른 공산주의와도 스스로 차별화하는 진정한 주체사상의 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회고록은 이렇게 쓰고있다.
<아이들이 없는 세계는 태양이 없는 세계>라고 한 명언속에는 후대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격조높이 고동치고있는가.(4 368페지)
《인류가 기억하고있는 동서방의 모든 위인들은 누구나 다 후대들에 대한 사랑을 미덕중의 미덕으로 간주하여온 아이들의 진정한 벗이였고 스승이였고 어버이였다.
그런데 귀족도 아니고 부르죠아지도 아닌 마안산의 주인들, 입만 벌리면 인간성을 운운하고 인간해방을 념불처럼 외우는 이 밀영의 공산주의자들은 어찌하여 아이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는단 말인가!
《나는 치미는 분노를 걷잡을수 없었다. 혁명 그자체를 생명보다도 더 신성시해온 어린것들의 깨끗한 신념이 망울채로 저렇게 무참히 짓밟힌다는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일이였다. 나는 저 아이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사람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저 어린것들이 처창즈에서 어른들과 함께 어떻게 기아를 이겨냈고 내도산에서 인민혁명군을 도와 어떻게 주먹밥을 날랐고 어떻게 철야보초를 섰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아이들이 엮어온 그 개개의 자서전은 소설의 줄거리처럼 내 머리속에 죄다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4 369페지)
큰 아이들의 겨드랑이밑에서 비에 젖은 햇병아리처럼 온몸을 오들오들 떨며 언 손으로 무르팍의 살을 가리고 서있는 백초구출신의 아홉살내기 리오송의 경력만 보아도 마안산의 아이들이 겪어온 천신만고의 준엄성을 능히 판단할수 있을것이다. 그 아이는 벌써 처창즈에 있을 때 집단적인 아사를 체험하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리오송도 배가 고플 때마다 동면중의 개구리를 잡아먹든가 봄파종을 한 밭들을 돌아다니며 씨종자를 파먹었다. 김정숙녀사는 그때에도 처창즈현장에서 이 아이들과 같이 있었다. 하도하도 먹을것이 없어서 처창즈일대의 식물이든 동물이든 살아있는것은 다 잡아먹었다고 한다.처창즈산하의 풀뿌리를 후벼잡고 흘린 눈물은 강물이 되여 흘렀다.
리오송의 아버지도 처창즈에서 아사로 인생을 마쳤다. 오송이가 밭에서 보리이삭을 잘라다가 거스러미를 비벼없애고 줌에 채 차지도 않는 낟알을 아버지의 입에 놓아드리였지만 죽음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리오송은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초근목피로 보리고개를 넘기다가 내도산으로 철거하는 인민혁명군을 따라 처창즈를 떠났다. 그러나 그도 김락천의 처남이라는 리유로 《민생단》혐의를 받고있었다.

밀림이 설레인다 폭풍처럼 설레인다

백두의 밀림이 폭풍쳐 설레인다. 대지를 뒤엎으며 장엄하게 설레인다. 손명직을 단장으로 하는 14명의 아동단원들은 내도산으로 가는 수백리 로정에서 조직생활을 통하여 부단히 련마해온 백절불굴의 투지와 혁명에 대한 충실성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앞에서는 허리를 치는 눈무지와 가파로운 산고개들이 길을 막아나서고 뒤에서는 《토벌대》의 무리들이 발목을 물고 늘어졌다.
행군의 첫날에 먹을것은 바닥이 나고말았다. 배고프면 솔잎을 뜯어 씹든가 눈빵을 빚어 그것을 한입씩 떼먹으면서 허기를 달래군 하였다. 강냉이떡 한개를 가지고 14명이 한끼를 굼때는 날은 그래도 잘 먹는 날이라고 할수 있었다. 밤에 야숙을 할 때마다 손명직, 주도일, 김태천을 비롯하여 체통이 큰 상급반 아이들은 10살미만의 나이어린 아동단원들을 엄지닭처럼 품고 앉아 몸으로 바람을 막아주며 잠간씩 눈을 붙이고는 교대로 주변을 감시하군 하였다. 이들은 여기서 동지애를 길렀으며 조국이 해방된 후에도 이때에 안은 동지애는 동포애로 변하였고 민족애로 승화되였다. 《우리 민족끼리》가 결코 한갖 관념에서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죽어도 혁명군을 따라다니다가 죽겠다고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이 깊은 산중에까지 찾아온 아이들, 부자집 아이들이 자개를 박은 밥상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풍청거릴 때 우등불옆에서 가랑잎을 덮고 쪽잠을 자면서도 광복된 조국을 그려온 이 아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과연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귀여운 꽃봉오리들에게 금의옥식은 마련해주지 못할망정 왜 수수한 광목옷같은것이야 못해입히며 콩죽같은것이야 못해먹이겠는가.
회고록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얘들아, 얼굴을 들어라. 너희들이 헌옷을 입고있는건 너희들의탓이 아니다. 어서들 이리 오너라!>
나는 두팔을 크게 벌리면서 아이들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수십명의 아이들이 올망졸망 나를 둘러싸고 엉엉 소리를 내며 목놓아울었다.
나는 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병실로 들어갔다. 며칠째 병에 걸려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는 네댓명의 아이들이 모포도 없이 방 한쪽구석에 쪼그리고 누워있었다. 무슨 병인가고 물었으나 아이들은 하나같이 대답을 피하였다. 밀영을 지키고있던 대원들도 골병이라고만 하였지 정확한 병명은 대주지 못하였다. 그것이 마음속의 병이라는것을 아는 사람은 박포리밖에 없었다. 아무 죄도 없는 청옥같은 아이들에게 <민생단>이라는 표쪽을 달아놓았으니 무슨 병을 앓는다고 대답하겠는가.
나는 전령병을 불러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라고 하였다. 그것은 왕청시절에 일본군수송대를 치고 로획한 나의 단매모포였다. 그 한장이나마 앓고있는 아이들에게 덮어주면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것 같았다. 나의 의도를 알아챈 대원들이 저마다 자기의 모포를 꺼내느라고 부산스럽게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포들을 임자들의 앞으로 밀어놓았다.(4 371372페지)

대지를 뒤엎으며 장엄하게 설레인다

《나는 오늘 여기서 혁명가의 가치관을 두고 다시한번 심각한 음미를 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혁명을 시작했고 지금도 무엇때문에 만난을 무릅쓰고 혁명을 계속하고있는가. 우리는 그 무엇을 파괴하고싶어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기때문에 혁명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온갖 불의와 페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적인것을 옹호하며 인간이 창조해낸 모든 부와 아름다움을 지켜내기 위하여 우리모두가 이 저주로운 세상을 향해 반기를 든것이 아니겠는가. 학대받는 계급에 대한 동정이 없고 망국의 설음속에 울고있는 민족에 대한 련민이 없고 가난과 무권리속에서 헤매는 부모처자들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곤난을 하루도 참아내지 못하고 따뜻한 온돌방으로 돌아갔을것이다.(4 372373페지)
《후대들은 계급의 꽃이고 민족의 꽃이며 인류의 꽃이다. 이 꽃을 잘 가꾸는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신성한 임무이다. 후대들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따라 혁명의 장래가 결정된다. 혁명은 한세대에 끝나는것이 아니라 여러대를 두고 완성되게 된다. 오늘은 우리가 혁명을 담당한 주인으로 되고있지만 래일은 저애들이 자라서 혁명을 떠메고나가는 주력군으로 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선혁명에 끝까지 충실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피줄기를 이어갈 후비대를 튼튼히 키워야 한다. 더구나 저애들은 우리의 전우들이 남기고간 유자녀들이 아닌가. 우리는 그 전우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저 아이들을 아끼고 따뜻이 돌보아주어야 하는것이다.(4 373페지)

밀림의 긴긴밤아 이야기하라

《나는 지금이야말로 어머니가 림종을 앞두고 나에게 유산으로 남긴 그 20원을 소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금전이 없이는 도저히 뚫고나갈수 없는 역경에 처했을 때에만 쓰라고 당부하시던 20원이였다. 손끝에 피가 나도록 삯일을 하여 한푼두푼 힘겨웁게 벌어들인 로력의 열매였다.
나는 어렸을 때 돈을 모르고 살았다.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자식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학습장이나 연필을 사는것도 어머니에게 맡기고 나를 상점이나 장마당같은데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돈맛을 알기 시작하면 사람이 자라서 수전노가 되고 조국도 모르고 민족도 모르는 속물로 될수 있다는것이 돈과 관련된 아버지의 지론이였다.(4 377페지)
《나는 어머니의 풍랑세찬 일생이 몇장의 지전으로 압축된것 같은감을 느끼며 그 돈을 소중히 받아안았다. 20,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호신부와 같은것이였다. 그 돈을 품고있으면 배고프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항상 내곁에 계시면서 온몸과 넋으로 나를 지켜주는것 같았다. 내 개인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쓰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던 20원이였다. 가능하다면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표적으로 영원히 남기고싶었던 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준엄한 현실은 이 결심을 여러번 뒤흔들어놓았다. 나는 그 돈을 쓰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뺐다하며 동요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우리에게는 돈을 쓰지 않으면 안될 정황이 수없이 생기였다.(4 380페지)
《그 돈으로 헐벗은 아동단원들에게 옷을 해입힌다면 어머니도 기뻐하실것이다. (어머니, 이 돈을 가지고 어머니의 곁을 떠난지도 네해가 되였습니다. 그동안 딱한 고비를 여러번 겪으면서도 장래를 생각해서 그럭저럭 보존해왔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이 20원을 소비해야 할것 같습니다. 세상에 살붙이가 하나도 없는 저 불쌍한 아이들에게 옷을 해입혀야겠습니다. 장차 이보다 더 험한 고비가 있을수 있으리라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마음먹고 택한 결심이니 어머니도 지지해주십시오. 아이들을 류달리 좋아하는 저의 성미를 어머니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멀리 토기점골의 차디찬 산등성이에 홀로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향해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뇌이였다.(4 381페지)

밀림에 차고넘쳐 소리높이 설레인다!
김일성사령관은 《어버이》라고

《사실 20원이 무슨 큰돈이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때 후련한 심정을 금할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 다음에 우리는 마안산을 떠나갔다.
새옷을 입고 기뻐서 어쩔줄 모르던 밀영의 아이들이 모두 따라가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나는 여러 사람의 반대를 물리치고 아이들의 그 청을 쾌히 받아들이였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우리를 따라다닐수 없는 유년기의 아이들과 병든 아이들 약간명을 내놓고는 대부분이 남하하는 우리 대오와 함께 간고한 장정의 길에 들어섰다. 유격전으로 동분서주하는 혁명군이 10대의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데리고다닌다는것은 일종의 모험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비록 유격전의 력사에 없고 상식에 어긋나는 처사라 하더라도 아이들을 데리고다니면서 불길속에서 단련시켜 그들전부를 강철같은 인간들로 키우려고 결심하였다. 제일 힘든것은 진대나무를 넘고 강을 건느는것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싸움할 때와 행군할 때 아이들을 보호할데 대한 분공을 따로 주었다. 우리 대원들은 실로 아이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였다. 진대나무는 안아넘기고 강물은 업어건늬였으며 적들의 총알은 몸으로 막아주면서 그들을 자래웠다.
그때 나를 따라 백두산지구로 나왔던 아이들은 그후 빠짐없이 혁명군에 입대하였고 가렬처절한 유격전을 통해 훌륭한 군정간부들로 성장하였다. 종군이 허락되지 않아 얼마간 대첨창밀영에 가있던 9살내기의 리오송까지도 손장상의 전령병으로 복무하다가 후에는 장백에 나와 나의 전령병으로 되였다. 1939 5월에 우리가 부대를 이끌고 무산지구로 진공할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였다. 그는 물이 깊어 강을 건느지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를 안고 강을 건네주었다. 그때 그렇게 병아리처럼 품에 안아 키운 아이들이 지금은 우리 당과 국가와 군대에서 핵심적역할을 수행하고있다.
마안산에서 헐벗은 아이들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던 그때의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조국이 해방되면 어떻게 하나 아이들에게 국가가 무료로 옷을 해입히는 제도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령락된 나라를 재건하던 1950년대 후반기에 벌써 우리는 국가가 옷을 지어 공급하는 력사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안산에서의 고뇌를 체험한 조선공산주의자들만이 창조할수 있었던 하나의 기적이였다. 우리는 해마다 아이들의 옷을 해입히는데 수천수억원의 돈을 지출한다.(4 382383페지)
그래서 한홍구교수는 《민생단》사건이 남긴 《트라우마는 주체사상, <어버이수령>과 인민들간의 독특한 혈연적뉴대관계, 자주로선, 정치적생명론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것이라 본다.
2004년 개천절행사로 평양에 가 우리 일행은 보통강호텔에 머물렀다. 호텔에는 다른 호텔과 달리 노래방이 있었다. 우리가 《아침이슬》을 부르고 북 도우미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곡을 한곡 불러달라고 하니 《장군님 찬 눈길 걷지 마시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 노래말은 다음과 같다.

1. 눈오는 이 아침 우리 장군님/ 그 어데 찾아가십니까/ 찬눈을 맞으며 가시는 길에/ 이 마음 따라섭니다/ 이 땅의 눈비는 우리가 다 맞으리니/ 장군님 장군님 찬 눈길 걷지 마시라

2. 우리를 잘살게 하여주시려/ 수령님 한생 맞으신 눈/ 오늘은 장군님 헤쳐가시니/ 이 가슴 젖어옵니다/ 충효를 다하여 맡은 일 더잘하리니/ 장군님 장군님 눈바람 맞지 마시라

3. 장군님 찬눈비 맞으시면서/ 험한 길 더는 걷지 않게/ 날마다 기쁨을 드리는 길에/ 이 한몸 바치렵니다/ 우러러 바라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장군님 장군님 부디 안녕하시라

마치 교회에서 찬송가 71장을 부르는듯 한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진정성을 의심도 하였다. 노래말그대로 한 정치지도자에 대하여 이렇게도 진정어린 생각을 가질수 있을가 하고 의심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정치인들은 다 사기군들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회고록은 정확한 답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노래말이 차라리 모자랄 정도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였다.




운하(運河)를 파랴? 은하(銀河)를 쏘랴?

평화는 총대에서 나온다

19세기는 바다의 세기였다. 바다를 점령하는자가 온 세계를 지배했다. 우리는 19세기 《병인양요》, 《신미양요》 그리고 《운양》호사건 등 모두가 바다를 건너온 군함앞에 무릎을 꿇고말았다. 그러나 20세기는 공중을 지배하는자가 땅을 지배하였다. 일본도 원자폭탄을 실어나른 《B29》앞에 맥없이 항복하고말았다. 지난 6. 25전쟁당시 미국이 보여준 공중전앞에 우리 땅은 초토화가 될 지경이였다.
그러면 21세기는 무엇이 세계를 지배할것인가? 그것은 우주공간을 지배할 무기 즉 미싸일이다. B29》없이도 무인승유도탄이 장거리로 핵을 실어나른다면, 이런 가정하에 만들어진것이 미싸일이다. 중간에 주유공급을 받을 필요없이 대륙간을 횡단할수 있는 무기, 그것이 미싸일이다. 대륙간뿐만아니라 우주공간까지 올라갈수 있는것이 유도탄(미싸일)이라고 한다.
드디여 21세기는 《우주별전쟁(star war)》의 세기라 할수 있다. 2차세계대전이 아시아의 경우 미, 일전쟁이였다면 앞으로 세계대전은 북, 미간의 전쟁이 될것이다.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러나 앞으로의 전쟁은 어느 한쪽이 이기고지는 전쟁이 아니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공멸할지도 모르는 전쟁이다. 그래서 전쟁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그러한 전쟁을 해야 한다. 역설적이라 할수 있다. 이를 두고 북은 《평화는 총대에서 나온다.》고 하면서 미국과는 다른 목적으로 미싸일을 1970년대부터 개발하였다.
미국은 천하무적의 핵과 미싸일대국이라고 스스로 뽐내고 이 지구상에 자기들을 당할자는 없다고 오만하다못해 방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2003 8 1일 펜타곤에서는 북미가상미싸일전쟁을 실험하였다. 결과는 《우리는 참패하고만다.》였다. 우리는 처음에 엄살인줄로만 알았다. 지구상에 《경제대국》으로 자처하는 나라가 기아선상에 있다고 선전해온 북에 진다는것을 그 누구도 믿지 않으려 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그럴만한 리유라도 있어야 할것이 아닌가? 구한말에 그렇게 믿고 사대해온 중국이 서양렬강앞에 련전련패하는것을 보고 《입술이 무너지니 이가 시리다.》고 했다. 《한국》의 보수들은 지금 아마도 미국이 북에 힘없이 끌려다니는것을 보고 같은 심경을 느끼고있으리라. 믿고싶지 않아도 펜타곤의 실험결과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가? 그 리유에 답하는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지금 북이 개발한 미싸일은 미제의 그것을 릉가하고있다는 이 엄연한 한가지 사실, 쉽게 이 사실을 믿는 방법은 이란을 비롯한 제3세계나라들이 왜 북의 미싸일을 사들이느냐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것이다. 두번째로는 그렇게도 코대높던 부쉬가 왜 말기에(2006 7 4) 협상탁에 나타났느냐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것이다. 세번째로는 북이 미싸일을 발사하면 공중요격하겠다고 해놓고 왜 슬그머니 뒤꽁무니 찾느냐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여기서 일일이 하지 않아도 알만 한 사람들은 말귀를 파악했을것이다. 미국이 지금 지구상 그 어느 나라에 대해서도 이런적이 없었다는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지 않는가? 력사가 200년 겨우 되는 나라가, 160여번 남의 나라를 침략한 력사를 가진 미국이 이렇게 순한 양같이 된적은 없었다. 여기에는 북의 미싸일에 무슨 의미소가 있기때문이다.

천하무적 《백두산》호랑이는 웃을줄 안다

북이 2009 2 24일 발표한바에 따르면 4 48일사이에 쏘아올릴 발사체를 《은하2호》라 하고 거기에 탑재할 위성을 《광명성2호》라 명명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 이름에서부터 왜 북이 미싸일을 개발했고 그것을 어디에 쓰려고 한 리유를 다 발견하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백두산은 민족의 령산이요, 백두산호랑이는 웃을줄 아는 령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나우면서도 해학적인 령물, 그것이 백두산호랑이이다. 《백두산》도 그렇게 맹수와 같으나 평화로운것일것이다.
북측은 1998 8 31일 무수단리에서 3단형위성발사체인 《백두산1호》를 쏘아올렸다. 《백두산1호》에 달린 인공위성은 《광명성1호》이다. 2008 8 31, 평양방송은 《우리 나라는 마음만 먹으면 목적한 실용위성을 성과적으로 임의의 시각에 쏴올릴수 있는 수준에 있다.》고 했다. 《백두산2호》와 《광명성2호》를 예고한것이다. 《백두산2호》는 몇단이 될지 모르지만(아마도 4단이상) 1호보다는 훨씬 향상된것이 되지 않을가 여겨진다.
그런데 《백두산2호》의 명칭을 두고 미국, 일본과 남측은 《대포동2호》라 고집, 선전하고있다. 자연히 무수단리것은 《대포동1호》가 될것이다. 그러나 《대포동》이 아니고 《백두산》이란 명칭이 정확하다. 백두산을 대포동이라 명칭을 바꾸려 하는것은 그 성능이나 전술적가치에 있어서 폄훼 내지 실패작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깔려있는 이소프우화의 신 포도와 여우정도로 보면 될것이다.
그러면 북측은 왜 《백두산》이란 이름을 발사체에 붙였을가? 이름에 있어서 남다른 의미가 있을것이다. 김일성항일유격대는 1936 5월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보천보전투를 신호탄으로 백두산진격을 본격화하였다. 백두산은 민족의 어머니산이기때문이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발표한 후 끊임없이 조국진출교두보로 백두산진격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드디여 백두산밀영을 건설하였다. 그래서 백두산은 북으로서는 민족의 자존심의 상징이다. 이렇게 북에는 그 어느 하나의 이름에도 력사와 철학이 없는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도 삼위 태백산 혹은 백두산이다. 그래서 백두산은 민족의 령산이다. 만약에 《백두산2호》가 4단이라면 이것은 보통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지금 개발에 사용하고있는 위성발사체가 4단짜리이기때문이다. 서로 맞먹거나 더 우월할지도 모르기때문이다. 북이 미국과 같은 성능의 발사체를 개발했다는것을 의미하며 이는 미국의 자존심을 넘어선 미국의 생존에 관련되는 문제이다. 부쉬가 2006년 북의 미싸일발사소식을 듣고 밥상머리에서 잡은 포크를 놓을만 한 일이다. 최근 2007 4 24일에 미국이 발사한 최신형정찰위성을 실은 《미노터(Minotaur)1호》가 4단형위성발사체라는 사실은 신문지상을 통해 널리 잘 알려졌다. 그러나 놀랄 필요는 없다. 조선의 백두산호랑이는 웃을줄 알기때문이다. 까치를 희롱할줄도 아는 동물이 백두산호랑이다. 민화에 나타난 우리 호랑이는 백두산에서만 볼수 있는 온 세계의 명물가운데 명물이요, 평화의 상징이다.

《백두산》은 백두산일것이다

미국이 지금 북의 미싸일과 핵에 안절부절 못하는 리유는 나변에 있는것이 아니다. 2차대전이후 미국은 UN, IMF, GATT, NATO와 같은 수도 없는 국제기구를 만들어 세계를 한손에 주물러왔는데 그 비결은 막강한 군사력때문이였다. 전세계군사비의 46%를 미국이 차지하고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에 어느 나라가 미국에 맞설만 한 미싸일과 핵만 갖는다면 이 많은 군사비를 하루아침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수 있다. 구축함, 순양함, 전차, 잠수함, 비행기를 아무리 많이 갖는다고 하더라도 미싸일 몇대만 있으면 이 많은 재래식무기들을 쓰레기로 만들어버릴수 있다. 그러나 지금 북이 겨냥하는것은 어떤 인명도 재산도 살상하거나 파괴하지 않으면서 전쟁을 막는, 바로 그러한 호랑이 《백두산》을 개발하려 한것이다.
북이 미국과 같이 지구촌을 지배하고 장악하고 착취하려고 미싸일개발을 했느냐고 하면 그것은 미국이 범한 잘못을 같이 범하는것이며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아 마땅할것이다. 이것은 《백두산》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는것이다. 바로 이렇게 북을 몰고가려고 이름에 있어서 《백두산》대신에 《대포동》을 지금 미국, 일본과 남측은 고집하고있는것이다. 비렬하고 야비한 여우가 포도를 쳐다보는 빈정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시 우리는 《삼국유사》로 돌아가서 민족의 령산이요, 우리 민족의 어머니산인 백두산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은 여러차례 아버지에게 땅에 내려가고싶다고 하니 땅에 《弘益人間(홍익인간)》할수 있는 땅을 찾다가 그곳이 바로 백두산아래 땅이였다고 한다. 《홍익인간》이란 《인간세계를 널리 리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환웅의 아들 단군의 통치리념은 홍익인간 그리고 《在世理化(재세리화)》였다. 재세리화란 세상을 다스리되 리치로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단군자손 배달민족의 심성이요, 통치자의 통치리념이다. 이 원리를 어기면 그것은 《백두산》이란 이름을 어기는것이다. 즉 《백두산》은 역시 백두산일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없다》

북은 1994년에는 평양근처 대박산기슭에 단군릉을 건립하였다. 가시적인 릉건립이 그렇게 중요한것은 아닐것이다. 단군이 세운 조선의 건국리념인 홍익인간과 재세리화 그것이 더 중요할것이다.
북에서 개발한 《백두산》발사체는 첫째도 둘째도 홍익인간리념에 충실한것이여야 할것이다. 이것이 북남 혹은 남북민모두의 념원이다. 북은 《조선이 없는 지구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지금 이 지구상에 조선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핵으로라도 지도상에서 싹 지워버리고싶어 한다. 일본 도꾜의 도지사란자가 《한》반도에 핵을 사용해서라도 인구의 반을 몰살시키면 《한》반도가 영구히 일본땅이 된다고 공공연히 말했으며 최근 이시하라란자는 북을 궤멸시켜 중국에 합병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남《한》의 어느 누구도 일본에 항의하지 않았다. 지구상에 없어져야 할 당연한것으로 남의 정치인들은 여기고있기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북에서 하는 말이 있다. 《주먹이 약하면 그 주먹으로 눈물을 닦을 날이 올것이다.》라고. 그렇다. 우리 배달민족은 한번도 남의 눈에 먼저 눈물을 흘리게 한적은 없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에도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은 수양제(隋煬帝)를 청천강이북으로 쫓아낸 다음 도덕경의 다음말 《그칠줄을 알아야 한다.(知止也)》고 하면서 어느 선에서 공격을 멈출줄을 알았다. 욕심이 과하면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주먹을 쓸데 쓸줄 아는 용기야말로 참된 용기이다. 주먹 한번 안 쓰고 그 주먹으로 눈물이나 닦는 그러한 민족은 이 지구상에 살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 주먹을 멈출줄 아는것이야말로 참된 지혜이다.
그러나 저 미제국주의의 본성을 보라. 전세계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커피재배하는 곳에선 커피를, 설탕을 재배하는 곳이면 설탕을 닥치는대로 FTA 운운하면서 국제조약을 체결하곤 공룡같이 집어삼켰다. 그러나 지금 가슴에, 위에, 대장에, 소장에 모두 고장이 났으며 드디여 항문이 막혀 진드기같이 스스로 피가 터져 죽게 생겼다. 금융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칠줄을 알았어야 할것이다. 미국에 건국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카우보이 쌍권총밖에 없었다. 이는 미국의 운명을 예고한바다. 약소국가를 침탈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래서 모든 제조업은 제3세계에 떠넘기고 마우스 하나로 금융만 굴리다가 저 꼴을 당하고있는것이다. 금융에 금융을 퍼붓는다고 경제가 살아나는것은 아니다.
경제가 파탄난 마당에 미국이 만약에 미싸일앞에 군사적으로도 북에 밀리게 되면 세계를 지배착취할 도구는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되고만다. 얼마나 초조하고 답답하겠는가? 그래도 이런 가련한 존재에 친구가 되여줄 유일한 존재가 있으니 역설적이게도 그것도 우리 배달민족이다. 남《한》말이다. 다 낡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기 사주고 광우병소고기 사주고 거기다 전쟁하라면 전쟁까지 대신해주니 이것도 홍익인간정신인가?
그러나 남은 알아야 한다. 이것은 절대로 재세리화가 아니다. 리치에 당치않은 홍익인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것이다. 홍익인간과 재세리화는 항상 칼의 량날과 같이 가야 한다. 남《한》의 단군을 찾는 보수우익들이 재세리화없는 홍익인간 운운하며 웨치는것이 설득력없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헌법조항에 재세리화는 없으면서 홍익인간만 있는것이 문제란 뜻이다. 리치에 맞지 않는짓 하는 미국에 대해 한마디 말도 못하는 남《한》의 단군족들이 정신차려야 한다는 뜻이다.

왜 《백두산》에서 《은하》로

북이 이번에 새로 발사할 발사체의 이름을 《백두산2호》에서 《은하2호》로 바꾸었고 탑재할 위성의 이름은 《광명성2호》이다. 왜 이름을 바꾸었을가? 그 리유는 무엇일가? 주행거리가 길어진때문일가? 속도가 달라진때문일가? 그 모든것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평양에서 워싱톤까지 거리는 11 70km이다. 이만한 거리라면 《대포동2호》로도 미국전역 어디든 갈수 있다. 그렇다면 구태여 《은하》라 이름을 변경할 필요가 없다. 지금 개발한것만으로도 미국전역이 사정권안에 들어오는데 말이다. 다른 유색인종의 생명을 개, 돼지보다 못하게 여기는 저들이라면 얼마든지 이 정도의 미싸일개발에 만족했을것이다. 이라크에서 수십만명을 죽여놓고도 눈섭 하나 움직이지 않던 미국이 자기 군사 하나 죽을 때마다 언론이 대서특필하는것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가? 우리자신의 피부가 백색이라고 착각이라도 하지 않았나?
여기서 북의 배달민족 단군자손들은 을지문덕장군과 같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수 없었다. 과연 핵무기를 인구가 밀집한 대형도시에 사용하여 인명을 살상하는것이 옳으냐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것이다. 일본에 락하한 그 핵폭탄을 상상만 해보아라. 과연 인간이 인간에게 그런짓을 할수 있을것인지를.그러나 미국은 한다. 했다. 유색인종은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기때문에 같은 전범국가인 도이췰란드에 사용하지 않고 일본에 사용한것이다. 같은 종교(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인간들은 사탄이기때문에 그런짓을 한것이다.
우리 단군배달민족의 피속에는 이런 흡혈귀적본능은 없다. 무고한 미국시민을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심지어는 재산의 피해도 전혀 주지 않고 다만 미국의 그 잘못된 제국주의근성만 고쳐주는 방법이 없을가? 핵이든 미싸일이든 인공위성이든 상관없이 이 지구상에 이런 기술을 개발하는 고민을 먼저 했어야 한다는것이다.
여기에 답은 나왔다. 미국, 저 워싱톤과 펜타곤에 앉아있는 전쟁광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것이다. 그 방법이 나왔다. 그 방법이 나왔기때문에 《백두산》에서 《은하》로 변한것이 아닌가 한다. 2차원공간(백두산)안에 있던것을 3차원공간(은하)으로 변화시키는것이다. 그것도 순수한 우리 말그대로 《은하2》로 바꾼것이다. 미국은 구태여 영어로 《GALAXY2》라고 한다.
대륙간을 횡단하여 인구많은 어느 도시의 한복판에 핵을 떨어뜨려 대량으로 인명을 살상하자는것이 아니고 미국의 저 전쟁광들의 눈과 귀만을 잠시 멀게 하자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발사체와 탑재물을 고안한것이다. 그것은 저 우주공간속에 있는 미제인공위성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그러한 방법이다. 

《섬멸적타격》은 홍익인간사상의 발로

《한》반도상공에는 404개의 인공위성이 돌고있다. 초저녁 남동쪽하늘을 보면 전에 보지 못하던 별같은, 그러나 유난히 밝은 발광체를 육안으로도 확인할수 있다. 남《한》의것 4개를 포함하여 미국것이 140, 로씨야것이 90, 일본것이 28, 중국것이 16개 하여 무려 400여개의 인공위성이 돌고있다. 이 위성을 통해 통신, 자원탐사, 기상예보 등을 할수 있다. 무엇보다 군사작전상 통신교환도 모두 이 위성을 통해서이다. 지금 하고있는 《키 리졸브》도 인공위성없이는 불가능할 정도이다. 바로 북이 겨냥하는것이 이 기능을 마비시키는것이다. 미국의 눈과 귀와 같은 우주공간에 있는 이 반도를 위협하고있는 통신망을 마비시키자는것이다. 핵탑재물을 땅에 떨어뜨리는것이 아니고 공중에서 폭발하면 인명을 전혀 해치지도, 환경도 파괴하지 않고 통신시설만을 마비시키는 기술을 개발했다는것이다.
이 기술은 훨씬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어가고 주행거리도 멀어야 한다. 지금 있는것을 두고 예산에 상관없이 이 기술을 개발하여 《은하》라고 한것은 우리 민족의 피속에 흐르고있는 홍익인간정신 아니고는 다른 생각을 할수 없을것이다. 백두산은 땅별 지구에 있는것이고 은하는 우주공간속에 있는 별들이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땅으로 그리고 땅에서 우주로 자유자재로 왕복하는 천지를 관통하는 우리 민족의 천지인합일의 큰 정신적틀의 반영일수 있는것이다.
우리의 신들은 땅이 그리워 하늘에서 내려오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천지왕복하는 신들이다. 단군이 3 15일에 하늘에 다시 돌아갔다고 하여 어천절을 지낸다. 땅으로, 우주로 종횡무진하는 유도탄이 있다면, 그래서 우주공간에서 깡패짓하는자들을 잡아 눈귀를 멀게 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신들의 전쟁일것이다. 강증산은 신들의 전쟁이 먼저 있고 인간들의 전쟁들이 있다고 했다. 파괴의 서양신과 홍익인간하는 우리 하느님과의 전쟁, 이것이 21세기 전쟁의 본질이다. 그래서 맥아더도 미래의 전쟁은 신학적이라고 했던가.
《은하2호》는 그것에 무엇을 탑재하느냐에 따라서 그 기능이 달라진다. 《은하2호》에 탑재되는 《광명성2호》라는 시험통신위성이 탑재되느냐 아니면 핵탄두가 탑재되느냐가 지금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있다. 후자일 경우는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위성미싸일이 된다. 이런 위성미싸일의 경우를 두고 북은 지금 《섬멸적타격》이라고 한다.
다시말해서 《은하2호》는 대기권을 벗어난 우주공간에서 핵폭발을 함으로써 사람을 죽이지 않는 비살상무기(nonlethal weapon)이다. 그리고 방사능으로 지구환경도 오염시키지 않는다. 이런 《섬멸적타격》은 미국의 통신위성과 항법위성을 일시에 마비시켜버려 그 결과로 미국군은 작동을 멈춘 위성방송을 할수밖에 없게 된다. 히틀러가 대국민방송을 라지오를 통해 하듯이 그렇게 1930년대로 되돌아가고만다. 이 얼마나 《멋진 신세계》인가.
10년만에 다시 《은하》를 쏘아올리는 준비기간은 다름아닌 인류에 대한 무한책임과 자연에 대한 최상의 배려를 하는 기간이였다. 어떻게 하면 미국이 이 지구상에서 그 어느곳에서도 자의적으로 전쟁을 도발하지 못하게 하고 만약에 전쟁을 도발한다고 하더라도 일시에 눈귀를 멀게 하여 전쟁을 중지시킬수 있는 방도와 방법을 강구한것이다. 그 결과 나온 전략이 바로 섬멸적타격이다. 단군의 후예들이 아니고는 그리고 고구려 을지문덕의 상무정신이 아니고는 상상도 할수 없는 전략전술이라고 할수 있다.
이 땅에서는 한사람의 생명도 다치지 않고 전쟁은 종식되고 핵우산은 철거될것이며 풀 한포기 다치지 않는 인류력사상 류례없는 전쟁이 될것이다. 미합중국 대통령이 자기 군대를 스스로 자기 집으로 귀가시킬것이라는 담화를 듣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그리고 《한》반도뿐만아니라 지구촌은 영구평화를 누리게 될것이다. 이러한 섬멸적타격은 전세계인들뿐만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사람들까지도 대환영을 하고 북조선에 대하여 감사해할것이다. 일본의 도죠(東條)나 미국의 부쉬같은 전쟁광들은 하시 하처에 있기마련이다. 이런 사이코 패스 전쟁광들을 이 땅에서 축출해내는것은 우리 민족만이 해낼수 있다.
1998 8 31일 《백두산1호》가 발사된지 만 2년만에 클린톤정부가 북미최고위급회담을 추진한것을 보아도 북의 미싸일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6 7 4(미국시간)에 미싸일발사이후 부쉬가 즉각 태도를 바꾼것을 보아서도 섬멸적타격작전이 한갖 허풍이 아닌것을 알수 있다. 지금 《실용정부》는 일본의 아소 다로와 손을 잡고 유엔안보리 운운하며 대응에 고심하고있다. 그러나 이것은 헛수고이다. 하루속히 마음을 고쳐먹고 북의 미싸일전략을 옳바로 파악하는 길만이 정답이다. 《한》반도를 재더미로 만들고 영구정복을 꿈꾸고있는 일본에게 리명박《정부》는 그들의 전령사같은 노릇을 할것인가.
섬멸적타격이 성공하는 순간에 우리 민족의 통일은 순간적으로 온다. 우리는 지금 《은하2호》가 무엇을 탑재할지를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 지구촌평화를 깃들이게 하는것이고 미국의 잘못된 제국주의전략을 포기하게 하는것이다. 이같은 포기는 곧 미국과 전세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공동체, 다시말해서 홍익인간, 재세리화를 실현하는 세계가 실현되는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진화정도가 아닌 후천개벽이 될것이다.

천부인 3개와 우리 민족의 슬기

지금까지 론의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최대의 의문은 도대체 북이 어디서 이 엄청난 핵과 미싸일개발기술을 얻었느냐이다. 우리는 지금 구약 에스겔서의 환상과 다니엘서의 묵시를 보는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즉 네발바퀴달린 이상한 비행체가 하늘을 날고 그것이 사방 자유자재로 움직이는것을 보는 환상말이다. 이 환상을 본 에스겔은 사막의 골짜기에 묻혀있던 해골들이 생기를 얻어 다시 살아나고 메마른 광야에 생수가 흘러내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도 묵시도 아니다. 현실 그대로이다.
《은하2호》를 타고 우주공간으로 올라가는 《광명성2호》는 《조선》의 밤하늘과 온 누리를 밝게 비추이는 큰별 즉 《한별》일것이다. 《크다, 높다, 밝다, 넓다, 가득차다》와 같은 20여가지의 의미를 지닌 《한》이란 말은 이 별을 명명하기에 가장 적합할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고분벽화에서 우리는 섬멸적타격의 정체를 한눈에 볼수 있다. 고분벽화가운데 수박도는 두 씨름군이 서로 마주보고있는 그림이다. 막 씨름을 하려는 자세이다. 서로 눈만 마주보고있다. 서로 몸을 부여잡고있지 않는 자세이다. 다시말해서 수박이란 무예는 씨름을 하기 전에 상대방끼리 마주보면서 기싸움을 하는것이다. 여기서 지면 씨름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섬멸적타격작전이다. 전쟁을 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는 끝내기작전이다. 그래야 서로가 피해가 없고 기의 소모가 없다.
지금 북이 쏘아올리려는 《은하2호》의 전략적의미는 수박도에 그 비밀이 모두 담겨져있다. 제발 싸움하지 말고 이쯤에서 서로 화해하자는것이다. 이 눈치와 말귀도 못 알아듣고 이 민족의 철천지원쑤 일본을 들고나오지 말라는 신호이다. 서로 마주보고 눈에서 나오는 정기로 승부를 결판짓자는것이다.
고구려고분벽화의 다른 그림은 말을 타고가면서 맹수를 사냥하는것이다. 사수는 고정된 자세에서만 정조준을 할수 있지만 우리 민족은 사수가 움직이면서 움직이는 물체를 겨냥하는 그야말로 大弓(대궁)의 민족 즉 東夷(동이)족이다. 북이 개발한 미싸일과 핵은 바로 이런 대궁의 겨레슬기의 산물이다.
그러면 움직이면서 움직이는 물체를 정조준하는 기술은 어디서 온것일가? 그것은 다름아닌 《삼국유사》로 되돌아가 다시 생각해볼 때에 환웅이 하늘에서 가지고 내려왔다고 하는 천부인 3, 거울, , 방울에 있다고 본다. 모두 주술적도구인 이들 천부인 3개가 현대첨단기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고 물을것이다. 그러나 있다. 거울은 인간이 자기 의식을 자기스스로 반성하는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칼은 인간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를 타자와 구별하고 분별하고 차별하는 도구이다. 그리고 방울은 하늘과 땅을 련관시키는 도구로서 이는 인간이 신기성을 만들어내는 도구이다. 이를 인간의 의식성, 자주성 그리고 창의성이라고 련관지을수 있다. 주체사상의 3대원리가 바로 거울, , 방울로 련관되는것으로 련관지어본다. 그래서 위성발사체 《백두산》의 의미소를 더 심화시켜본다.
북이 미싸일을 개발하기 시작한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라 하지만 회고록을 한번쯤 읽어본다면, 특히 3권의 《숲속의 병기창》을 읽어보면 1930년대 유격활동기간에 숲속의 밀림에서 이미 줄칼과 같은 원시적인 도구로 온갖 병기와 화약을 만들어낸 기록을 읽을수 있을것이다. 이를 《주체병참병기》라 할수 있다. 최첨단미싸일과 핵기술의 발달은 다름아닌 밀림속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주체적삶속에서 싹트고있었던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원리가 바로 의식성, 자주성, 창조성이다. 그래서 북이 개발한 《은하》계렬의 미싸일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원형에서 나온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남인들 이를 못하란 법이 없다. 그런데 너 무엇하고있는가?

운하(運河)를 팔것인가, 은하(銀河)를 쏠것인가

우리 민족은 지금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남도 인공위성을 개발했다고 하지만 발사체가 없어서 그것을 들고 로씨야로 온데 돌아다녀야 한다.부속품의 80%를 비싼 지적소유권을 주고 외국에서 사와야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4년간 60조의 예산을 들여 운하를 파겠다고 한다. 남도 다 같은 단군자손인데 지능지수가 북과 다를리 없다. 그러나 한가지가 없는것이 있다. 지금 최첨단산업은 모두 핵과 미싸일개발의 부산물이다. 휴대전화, 콤퓨터, 심지어는 화장품마저 핵개발과정의 부산물이다. 미국이 지금 핵확산을 방지하고 중국과 로씨야 등 핵보유국가들이 다른 나라들의 핵개발을 저지하는 진정한 저의는 다름아닌 군사적인것은 부차적이고 모두가 경제적이고 상업적인데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북은 지금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킬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있으며 2012년이면 모든 면에서 강성대국이 될수 있다고 자신하고있는것이다. 2006년 공동사설에서 북은 이를 두고 《경제의 단번의 비약》이라고 했다.
최근 MB《정부》는 일본의 미쯔비시중공업을 《아리랑3호》위성발사사업자로 선정했다고 한다. 미쯔비시는 우리의 고혈을 빨아먹고 성장한 기업이 아닌가? 제국주의침략전쟁을 수행해온 일본최대의 군수업체이란 사실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아니면 알고도 그러자는것인가. 수많은 조선녀성들을 《근로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동원한, 그리고서는 뻔뻔스럽게 무직소녀들에게 일자리 만들어주었다고 사과나 배상 그 어느 하나도 하지 않는 기업체가 아닌가. 주체, 이것이 바로 남이 하나 가지고있지 않는것이다. 우리는 주체적으로 핵도 미싸일도 개발할수 없다.
끝까지 시대착오적인 운하나 파면서 외세와, 그것도 일본이란 가장 악랄한 외세와 결탁하여 북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앞서나아가는것을 저지하고 방해만 할것인가? 아니다. 우리 민족은 서로 공조를 해야 한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꿈의 지구촌을 건설해야 한다. 로케트발사체는 북의것으로, 거기에 탑재한 위성은 남의것으로, 아니 그 반대로도 서로 협조를 해나가면 그리고 그 목적을 홍익인간, 재세리화정신에 헌정한다면 그 순간 신천지가 열리고 후천개벽의 새날이 우리앞에 쉬 올것이다. 누가 이 길을 막을것이며 방해할것인가. 우리는 끝까지 마주 손잡고 이 험난한 길을 헤쳐나가야 할것이다.






, 일에 부화뢰동, 손원금은 통곡한다

북의 핵, 미싸일문제를 두고 《정부》여당과 《진보신당》이 한목소리를 내고있다. 언젠가는 합당을 할 징조라고밖에는 볼수 없다. 리명박《대통령》은 G20회의참가차 영국으로 떠나기 전 《어느 나라가 보호무역을 하는지 그 명단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북의 로케트발사에 대해서는 《군사적대응은 반대한다.》고 했다. 우리 국민들은 갈피를 못잡고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에서 무슨 말이 나올 때마다 말이 달라지고있어서 이런 경우를 두고 부화뢰동이라 하지 않는가 걱정스럽다.
한 나라 지도자가 중심을 잃고 이렇게 부화뢰동하면 온 국민들이 불안할것은 당연하다. 경제문제에 있어서 그렇게 큰소리 한번 하자면 그것이 정치군사문제를 떠나서 생각할수 없거늘 미국의 군사적패권주의에서 해방되지 않고 어떻게 경제적굴레에서 벗어날수 있단 말인가? 바로 북의 핵, 미싸일은 미국의 군사적패권주의를 단번에 무력화시키는것이거늘-이를 《섬멸적타격》이라 함-그렇다면 북의 핵과 미싸일은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주권을 세우고 지키는 지레대가 될것은 명약관화하지 않는가? 그렇게 북이 신호를 보내고있건만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부화뢰동하고있다니. 이번 려행을 하고 돌아올 때에는 중심을 한번 잡아서 오기 바란다. 

강도 일제 타도만이 이 민족의 지상명령이다

《한나라당》과 《진보신당》이 북의 핵과 미싸일문제에 대하여 같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극하면 반한다고 하더니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어쩌면 이렇게도 같아져버렸는지? 《한나라당》은 미, 일에 공조하며 UN안보리에 간다고 하다가 《세종》함까지 동해에 파견해 요격이나 할 자세이다. 한수 더 떠 《진보신당》은 북에 대해 모욕적인 말까지 대변인을 통해 서슴없이 발표하였다.
《종북(從北)주의》론난끝에 민주로동당과 갈라선 《진보신당》이 《심각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수천억이 들어가는 인공위성을 발사한다는것은 납득할수 없는 일》이라며 북의 미싸일발사움직임을 정면비판했다. 《진보신당》은 3 27일 북이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는 《광명성2호》발사가 림박한것과 관련, 《북은 자신들의 인공위성발사주장이 (국제사회에)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신당》 대변인은 이날 발표한 론평에서 《북의 경제상황이 매우 어려운것이 주지의 사실인데 수천억으로 추정되는 로케트발사비용을 들여가면서까지 인공위성을 발사한다고 했을 때 이를 납득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며 이같이 지적했다.
대변인은 또한 《이미 북이 핵무기보유를 공언한 상태에서 발사하는 로케트에 대하여 이것이 순수한 우주기술개발을 위한것이라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라가 몇이나 되겠느냐.》며 《우리는 이런 점에서 북의 강경립장은 합리적설득력을 잃고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정도라면 《한나라당》보다 더 강한 론평이고 미일보다 더한 시각이라 아니할수 없다. 더이상 진보라는 말도, 신당이란 말도 포기하고 조갑제를 차라리 당수로 맞아들이는것이 나을것이라 본다. 필자는 여기서 《진보신당》의 막 나가는 남북문제진단에 더이상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이지만 마지막까지 의도적이 아니라면 북의 무기개발은 1930년대 강도 일본놈들 때려잡기 위해 피눈물흘리는 고난의 과정속에서 오늘까지 왔다는것을 먼저 리해하기 바란다. 저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다시 부활하고 언젠가는 우리 남북민족이 강한 무기를 갖지 않으면 또 당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진보신당》은 알아주기 바란다.
항일유격대가 만든 무기앞에 떼죽음을 당한 악몽이 있어서 일본이 저렇게 발광에 가깝게 광분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진보신당》이 저런 성명서는 발표하지 않았을것이다. 먼저 북의 핵미싸일은 1932년 마촌의 병기창에서 소리폭탄-고추폭탄-연길작탄-핵미싸일이라는 진화선상에서 탄생한 사실 하나만이라도 바로 리해하기 바란다.
여기서 연길작탄이 얼마나 간고한 고난끝에 만들어졌는지를 한번 보자. 유격대원들은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 잃고 드디여 20대 젊은 나이에 부모처자식 다 먼저 보내고 마지막에는 자기 몸까지 산화하면서 조국을 위해 희생한 피눈물의 씨앗이라는 사실앞에 옷깃을 모두 여미기를 바란다. 《진보신당》은 일루의 민족적량심으로 돌아오든지 진보의 기발을 내리든지 금명간 결단을 해야 할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울산에서 《한나라당》과 단일화를 하는것이 나을것이다. 북은 이보다 더 간고할 때도 일본놈 때려잡는 무기를 만들었고 그래서 이 나라를 찾았다. 가난하기때문에 무기를 만들수 없다는 아니,해서는 안된다는 론리야말로 모든것을 자본주의론리로 보는 실로 진보답지 않은 목소리가 아닌가?

미국무성 불문률 《자기 조국을 배신하는 놈은 인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한나라당》보수들에게도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다. 《한사람의 철학은 그의 인생을 결정하지만 한 국가대통령의 통치철학은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이 말은 《No라고 말할수 있는 한국》(1996)의 저자의 말이다. 저자는 미국방성산하 륙군성에서 20년간 근무한 UC버클리대 박사출신이다. 책을 자세히 읽어보면 저자는 미국통으로 북에 대한 남《한》의 체제적우월성을 주장하는 학자인것 같다.
우의 인용구는 그의 책 첫 구절이다. 그는 이어 서슴없이 남《한》이 핵을 개발하지 못한 리유는 정통성없는 전두환《정권》이 미국으로부터 정통성윤허를 얻기 위해 그 대가로 핵과 미싸일을 포기했기때문이고 그것은 민족의 운명에 치명타를 안겨주었다고 한다.(21페지) 전두환《정권》은 미국의 눈치를 보는것을 넘어 알아서 기는 《정권》이였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13년이 지난 지금 MB는 선거에 의해 당선된 《정통성》있는 《대통령》인데 왜 저렇게 눈치보고 기고있는지 리해할수가 없다.
《이렇게 미국과 북에 질질 끌려다니게 된 우리 외교의 맹점은 바로 핵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도 대북정책과 마찬가지로 <한국>을 쉽게 무시할수 없는 상대로 대할것이며 북도 <벼랑끝외교>, 소위 <막판외교>정책으로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넘보지 못했을것이다. 실제로 북은 항공, 우주, 통신분야의 기술만은 <한국>을 릉가한다. 핵개발은 엄청난 최첨단과학기술발전을 부차적으로 낳기때문이다.
전두환《대통령》의 정통성없음이 결국 핵과 맞바꾸게 되였고 그 결과 미국의 엄청난 압력에 못이겨 약소국의 설음을 국민과 함께 억누르며 살게 되였다는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통치철학은 그래서 중요한것이다. 미국에 대해 대통령이 라고 말할수 없을 때 우리의 운명은 캄캄한 밤길을 걷는것과 마찬가지가 될것이다.(같은 책 23페지)
무슨 리유인지 최근 백락청교수는 현대사에 경륜을 가진 《대통령》은 박정희와 김대중 2인뿐이라고 했다. 아마도 박정희는 나름대로 핵을 개발하려 했기때문이고 김대중은 남북의 물고를 처음으로 텄기때문이라고 본다. 김대중은 핵개발은 하지 않았어도 6. 15정신속에 우리 민족끼리 해나가는 민족공조정신에 의한 낮은 단계의 련방제를 말함으로 북의 핵미싸일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민족공유의 자산이 될수 있을것이란 점을 암시하고있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지금 북의 미싸일발사를 앞두고 리명박《정부》는 미일과 공조하여 UN안보리에 이 문제를 상정하려 하고있다. 앞의 글에 의하면 《핵이 없는 국가는 캄캄한 밤길을 걷는것과 같다. 이 말은 장님이 길안내자손을 잡지 않고는 대로를 걸을수 없는것과도 같다.》는것을 의미한다. 민족공조의 길을 걷지 않고 미일공조하는듯 한 《정부》여당의 태도는 한마디로 말해서 《부화뢰동(附和雷同)》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미정보기관에는 하나의 불문률이 있다.
년전에 어느 《청와대》 수석이 조국을 배신하고 미국에 망명을 하려 했을 때에 미국이 NO라고 하면서 망명신청을 받아주지 않은적이 있다. 그 리유는 미국무성의 불문률 《자기 조국을 배신하는 놈은 인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리유때문이다. 이 불문률은 동양의 고전 《삼국지》에도 나오는것이다.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미일에 부화뢰동할 때에도 이 불문률이 여지없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같은 민족을 배신하고 부화뢰동할 때에 미국으로부터 점수를 딸것이라 생각하는것은 오산이다. 하루속히 인간답게, 지도자답게 대접받고싶으면 민족적량심과 자존심부터 찾아라.

최무선의 후예 손원금

앞의 글의 필자가 비록 민족공동체정신을 저버리고 북을 적대시하는 시각에서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가 북의 핵미싸일의 실체는 정확하게 인식하고있었으며 나아가 항공, 우주, 통신같은 최첨단산업에서 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한것은 놀랍다. 북은 2012년에는 《도약적비약》을 한다고 장담을 하고있다. 북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것을 립증하는것이다. 만약에 그가 북의 핵미싸일을 민족 공유의 자산으로만 리해했더라면 탓할것이 없고 하자도 없는 바른 진단이라 할수 있다. 그가 글을 쓴 때가 1996년이고보면 아직 그때에 6. 15도 없었을 때이다. 《진보신당》의 무지를 질타하지 않을수 없다.
지금 북핵미싸일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자는 일본이다. 《이지스》함을 동해에 급파하고 요격 운운하며 나오고있다. 역설적으로 일본우익들이 동북아전쟁분위기를 조장하며 자기들내부의 결집의 수단으로 이만큼 좋은 기회는 없다고 한다.
북이 핵미싸일을 개발하는것의 의미는 《섬멸적타격》과 《2012년 경제적대도약》에 있다고 했다. 섬멸적타격이란 핵이 공중에서 폭파하여 미일의 인공위성을 마비시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섬멸해버린다는것이다. 그래서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지 않고 전쟁을 사전에 방지하여 평화를 지키겠다는것이고 대도약은 핵미싸일을 통해 최첨단기술을 개발한다는것이다.

북핵미싸일의 태생적비밀

우리는 북의 핵미싸일개발의 주역들이 누구인지 확실히 모른다. 그러나 자기 몸 하나 내던지고 이름도 빛도 없이 오직 《한》(조선)반도를 지키려는 과학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것은 이미 1932년에 소왕청 마촌밀림에 병기창을 만들어놓고 자체병기를 생산해낸 력사적유래때문이다. 북이 무기를 만들어낸 목적과 수단은 여기서 명백해졌다. 미국과 강대국들은 약한 나라를 협박해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정치적으로 지배하자는것이 목적이지만 북은 그 태생적비밀에 있어서도 강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국을 해방시키자는 그 일념 하나에서 무기생산을 자체적으로 하였을뿐이다.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모든 일들은 그 태생적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북핵미싸일의 태생적비밀은 《조국해방, 강도 일제타도》, 바로 그것이다.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라는것이 북의 지도자의 정치철학이고 인민들의 생활철학이다. 이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것이 일본이다. 이 민족의 진정한 지도자라면 이런 일본에 절대로 부화뢰동해선 안될것이다. 집안으로 쳐들어오려는 강도가 무기가 없으면 안들어오겠다는 말을 믿는 천치바보는 이 세상에 후쎄인 하나로 족하다. 1992년 나라안에 핵도 미싸일도 대량살상무기도 없다고 후쎄인이 자기 집무실까지 다 열어젖혀 보여준 결과는? 미일강도가 황야의 무법자같이 종횡무진하는 쟝글의 세계에서는 총대에서만 평화가 나올수밖에 없다.

손원금의 후예들

유격구에는 손원금이란 조선조 최무선에 버금가는 화약제조의 귀재가 있었다. 회고록에 의하면 김일성사령관은 손원금을 직접 만나지는 못한것 같다. 그러나 최근 연변대학 리광인과 림선옥이 펴낸 《이 땅에 피뿌린 겨레장병들, 항일편》(2007) 《달라자유격대》장을 보면 손원금에 대한 얘기가 상론돼있다. 화룡현 달라자에는 김호철을 중심으로 달라자유격대가 조직되였는데 금곡의 손원금, 박영순을 협조하여 사수평아래 수리봉동굴에 가서 병기공장을 꾸리도록 하였다.
《양철운의 주요과업은 물자공급이다. 그는 집의 놋대야, 놋숟가락, 놋잔아무것이든 놋자 들어가는 그릇은 모두 가지고가 작탄 제조용으로 쓰게 하였다. 일제놈들을 혼쌀내준 연길작탄인 소리작탄, 고추가루작탄, 돌쪼박작탄, 쇠쪼박작탄 등은 이렇게 이들의 자그마한 병기공장에서 만들어졌다.(리광인, 2007, 2223)
이렇게 항일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은 주고받는 혼연일체가 되여 온갖 병기를 자체생산하였다. 자력갱생 말 그대로였다. 리광인교수의 현지답사조사보고서는 회고록과 일치를 한다.
《우리는 실패에 주저앉지 않고 실험을 거듭하여 끝내 리상적인 배합비률을 얻어냈다.
그때 화약제조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잊을수 없다. 손원금이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원래 나는 손원금이와는 별로 인연도 없고 서로 만나서 통성을 한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손원금의 경력이며 활동내용을 십년지기 못지 않게 잘 알고있었다.(3 271페지)
손원금을 김일성항일유격대에 소개한 사람이 박영순이다. 마촌에 와 박영순은 김일성사령관과 마을 사랑에서 숙식을 같이하면서 손원금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고 한다. 박영순의 보증하에 손원금은 유격대에 가입을 하게 된다.
여기서 김일성주석은 사람이 유명해질수 있는 3가지 비결을 《사람은 업적으로써도 유명해질수 있고 재능으로써도 유명해질수 있으며 사건으로써도 유명해질수 있다.(3 271페지)는 덕담을 회고록에서 남기고있다. 아마도 손원금은 이 3가지 모두를 다 갖춘 인물인것 같다.
손원금은 사건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1932년 손원금은 약장사로 가장하여 바이올린을 들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통신련락임무를 수행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가 온갖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 된 몸을 이끌고 경찰서를 탈출한다. 구정물이 허리를 치는 하수도구멍으로 빠져나와 하루낮을 강물속에서 보내다 경비가 철통같은 적의 소굴을 탈출한 놀라운 사건으로 널리 유명해진 인물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살점이 떨어져나간 몸으로 어떻게 하루해를 꼬박 물속에서 보냈는지 사람들은 원금의 강철같은 인내심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손원금은 재능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맨손, 맨주먹으로 저 유명한 연길작탄을 만드는데 참가하였다. 금곡촌의 신성덕 수리바위골 장대는 박영순이 책임진 화룡병기창이 자리잡고있던 곳이다. 리광인교수의 글 역시 회고록과 일치한다. 《달라자유격대는 산이 높고 수림이 무성한 알미대, 서리골, 사수평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그곳 병기공장에서 만들어낸 연길작탄은 그 위력이 대단하였다.(25페지)
이에 대하여 회고록은 《이 병기창 일군들이 처음으로 만든 작탄을 소리폭탄이라고 하였다. 소리폭탄은 그후 고추폭탄으로 발전하였다가 연길폭탄이라는 위력한 작탄으로 완성되였다.(3 272페지)고 기록하고있다.
폭탄이라는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다. 실험과정에서 오랜 시행착오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북의 핵미싸일도 우연스런것이 아님은 여기서 말하는 폭탄의 진화과정을 살피지 않고는 결코 오늘의 그것을 바로 리해할수 없을것이다.

연길작탄이란?

연길폭탄을 제작하는데 많은 자재가 들어갔다. 이 자재를 병기창에서 일하는 사람들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번은 소리폭탄을 만들다가 큰 난관에 봉착한 일이 있습니다. 장약함을 만들 종이와 천이 거덜났거든요. 모두가 방도를 찾느라고 머리를 썩였지요. 그런데 원금동무는 어느새 마을로 뛰여내려가 자기 집 문창호지와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뜯어오지 않았겠습니까. 재밤중에 헐떡거리며 병기창으로 돌아온 그를 보니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겠지요.…
손원금은 철사가 모자라 작탄제작이 중단상태에 빠졌을 때에 수십리밖에 있는 남양평에 가서 300m나 되는 전화선을 끊어왔다. 류황도 무쇠쪼각도 양철판도 손원금이 구해왔다.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치는 어느날 밤 양철판과 무쇠를 한짐 지고 병기창으로 돌아온 손원금의 뒤로는 주소도 이름도 알수 없는 생면부지의 할머니 한분이 무쇠가마를 이고 따라들어왔다. 이 할머니는 자기 집 솥가마를 머리에 이고와 병기창에 바친것이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만주벌 한겨울 밤에 나이많은 로인이 눈을 맞으며 솥가마를 머리에 이고 들어온것을 본 병기창사람들은 감격하지 않을수 없었다. 늙은이의 돌발적인 출현은 일군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 할머니는 원금이가 지어준 약을 먹고 며느리병이 나은 감격때문에 이런 돌출행동을 한것이다. 이렇게 인민들의 숨은 협조속에 렬악한 환경속에서도 당시 유격대가 사용하고 남을만큼의 연길작탄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낼수 있었다.

두눈을 잃은 손원금

손원금은 안타깝게도 폭탄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그만 두눈을 잃고말았다.
마촌작탄강습을 계기로 손원금은 전동만이 다 아는 인물로 유명해졌다. 화약을 제조하는 과정은 항상 위험을 동반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제일 위험한것은 작탄이나 총탄에 화약을 재우는 일이였다. 박두경, 박영순, 강위룡은 다같이 화약을 제조하다가 중상을 당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곤경을 겪으면서도 작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손원금이도 실명의 쓰라린 아픔속에서 락심하거나 비관에 잠기지 않고 《동지들, 슬퍼말라. 비록 두눈은 잃었지만 나에게는 심장이 남아있지 않는가. 두팔이 있고 두다리가 있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동지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는 손더듬으로 쇠줄을 자르고 작탄을 조립하면서 항상 코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한많은 세월의 바람받이에 아버지를 묻고 형을 묻고 누이를 묻고이제는 또 자신의 광명마저 잃은 손원금! 그는 아직 반생에 이르지도 못한 젊은 나이였다.
손원금은 유격구가 해산되자 전우들의 짐이 되지 않으려고 부대를 떠나 금곡촌으로 내려갔다. 그의 귀에는 날마다 유격대를 헐뜯고 공산당을 헐뜯는 적의 념불소리가 들려왔다.(3 275페지)
원금이가 앞을 못 본다고 친일매국노들은 그를 의기저하시키려고 온갖 말을 늘어놓았다. 마치 오늘날 북의 핵미싸일을 험담하듯이 《유격대는 산에서 전멸되여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근거지사람들도 다 굶어죽었다. 처창즈에 가보라. 백골뿐이다.》라고.
그러나 손원금은 지팽이에 의지하여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오히려 열변을 토했다.
《아니다. 유격대는 살아있다. 살아서 더 넓은 지역으로 나갔다. 지금 남북만도처에서 적들을 치고있다. 몇십명으로 출발했던 유격대오가 지금은 대포와 기관총을 가진 수백수천명의 대오로 자라났다. 동포들, 형제들! 적들의 선전에 속지 말고 항일유격대를 더 잘 원호하자. 항일전쟁은 반드시 우리의 승리로 끝날것이다!
손원금의 발자국은 금곡촌의 범위를 벗어나 수백리밖에 있는 연길과 룡정에도 찍혀갔다. 이전날처럼 바이올린을 둘러메고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서 더듬더듬 걸어가는 이 《소경걸인》을 군경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로상에서 보천보전투소식을 들은 그는 연길의 거리거리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목멘 목소리로 웨쳤다.
《조선동포 여러분, 6 4일 김일성장군이 부대를 거느리고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오매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진출하였다. 혁명군의 위력앞에 혼비백산한 적들은 지금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있다. 일제의 멸망은 확정적이다.
그의 불같은 연설에 연길시가는 죽가마처럼 들끓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손원금은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화형을 당하였다. 화형을 당하기 직전 손원금은 《여러분, 나에게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산천이 환히 보입니다. 승리의 날까지 굳세게 싸워주십시오! 조선혁명 만세!》라고 웨쳤다. 이것은 그가 사형직전에 남긴 마지막말이였다. 당년 25살의 자력갱생의 선구자 손원금은 이렇게 한생을 마쳤다.
박영순은 손원금을 추억할 때마다 《원금이는 장가도 못가보고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일 손원금이 지금까지도 살아있다면 후대들앞에서 자력갱생을 두고 좋은 말을 많이 할것이다. 그의 경력자체가 자력갱생의 산 교과서로 되고있을것이다.
남《한》의 《진보신당》사람들은 들어라. 진보의 기발을 내리든지 북 공부를 제대로 하든지 하기 바란다. 당신들의 머리속에는 진보의 유전자가 아예 없다. 먹을것이 없으니 미싸일도 만들수 없다는 그 정신이야말로 썩은 자본주의정신이 아닌가. 모든것이 돈 아니면 되는것이 없다는 그런 정신이야말로 딴나라당사람들의 소리이지 너희들이 차마 할 소리가 아니다. 자력갱생의 정신이란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것이다. 너희들은 진보할 자격 없다.

조선의 정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것이다

단군사상의 진수인 천부경의 첫 구절에서는 《무에서 하나가 나온다.(一始無始)고 했다. 밀림에서 무기생산은 자력갱생의 생활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자력갱생은 이처럼 우리 민족의 민족해방투쟁사에서 처음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 자력갱생은 투쟁과정에서 주체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방도의 하나였으며 자력갱생을 떠나서는 주체에 대해서 생각할수도 론할수도 없다. 주체사상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것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상이다. 먹을것이 없으니 미싸일도 만들지 못한다는 저 사대주의에 찌들린자들이 진보의 탈을 쓰고있다는 사실에 격분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자력갱생만이 우리 민족이 근대정신생활에서 큰 질곡으로 남아있던 사대주의를 궁극적으로 추방하고 자주, 자강, 자립의 리념밑에 민족재생의 활로를 성공적으로 개척해나갈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자력갱생은 주체가 선 인간과 주체가 서지 못한 인간을 가르는 시금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일전쟁을 개시하는 첫날부터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으로 대중을 꾸준히 교양하였다. 남들이 도와주면 좋고 설사 도와주지 않아도 자기 힘으로 나라를 찾아야 하며 또 찾을 수 있다는 사상, 우에서 해결해주면 좋고 해결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만사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사상은 대중을 쉽게 공감시키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힘을 믿지 않거나 과소평가하는 낡은 사상잔재를 그대로 가지고있었다.(3 283페지)

핵미싸일을 민족공유의 자산으로

이를 지레대로 평화와 통일로 단숨에 가야 한다. 리명박《대통령》이 북의 로케트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하자 《한국》의 보수언론과 단체들은 지금 벌집이다. 한발 더 나아가 핵미싸일을 민족공유의 자산으로 삼아 이를 토대로 최첨단기술을 개발하여 늘 말해온 선진화의 날을 앞당겨야 할것이다. 발사체는 북의것으로, 거기에 장착할 인공위성은 남의것으로 아니, 그 반대로도 하여 저 멀리 은하의 세계로 함께 날을 생각만 해도 가슴벅차다.
저 강도 일본놈들이 이렇게 발광인것은 이들이야말로 항일유격대원들이 자체생산한 무기가 얼마나 무서운줄을 1937 6 30일 간삼봉전투에서 체험을 했기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죽은 일본군머리가 하도 많아 마차에 시체를 실어나르다 창피하여 시체라 하지 않고 《호박》이라고 했다고 한다. 간삼봉전투에서 일본최정예라 자랑하던 74련대는 거의 전멸을 당해 죽은 시체를 가마니에 넣어 실어나르는데 동원된 한 농민이 달구지에 싣고가는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일본병사가 하는 말이 《가보쨔》(호박)라고 대답했다.
농민은 이를 놀리기 위해 《가보쨔농사가 대풍이군요. 좋은 국거리니 많이들 자시우.》라고 했다고 한다. 간삼봉전투이후 일본놈들을 두고 《호박대가리》라는 은어마저 생겨났다. 호시탐탐 재침략의 기회만을 노리고있는 일본이 지금 북의 핵미싸일앞에 저렇게 날뛰는것도 그 리유를 알만 하다. 이런 일본에 부화뢰동하는것은 매국노나 할짓이 아닌가?







《은하》, 《광명성》은 지구촌의 묵시록
 
《팍스 로마나》와 《팍스 아메리카나》

4 12일은 전세계그리스도교인들의 최고절기인 부활절이다.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온 사방에 퍼지자 가장 당황한자들은 그를 죽이는데 공모했던 무리들이다. 로마제국은 말할것도 없고 빌라도와 헤롯당들 그리고 가야바와 산헤드린에 속한 바리새인들과 세리사두개인들이 그들이였다. 물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기뻐 어쩔줄을 몰랐다.
2009 4 5일 오전 11 20분 《은하/광명성2호》가 하늘우로 치솟아올랐다. 북의 로케트발사에 놀라하는자는 누구이고 기뻐하는자는 누구인가? 예수의 부활에 놀라 기절초풍한 인간군상들의 무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것이 없어보인다. 당시 지중해연안 온 천하는 로마제국우산아래에서 평화를 누렸다고 하여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한다. 로마제국은 예수가 군중들을 선동하여 권력을 잡을것이라는 두려움때문에 예수를 잡아 처형했다. 그래서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은 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헤롯당들은 이런 로마제국의 앞잡이노릇을 하며 팔레스티나 유다지방을 통치하던 분봉왕 헤롯의 무리들이다. 이들은 사대주의자들이며 자기들의 배와 자기들의 기득권지키기에 급급한 매국노집단이였다. 헤롯당들이 정치적야욕때문에 동족을 배반했다면 사두개인들은 경제적인 리익때문에 로마제국의 앞잡이노릇 하며 세금을 갈취하던자들이다. 바리새인들은 유태교라는 종교적인 제국이 예수때문에 위협받고 무너질것이 두려워 예수를 처형하는데 가장 앞장섰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지구촌의 지형변화는 거의 달라진것이 없는것 같다. 로마제국은 미국제국주의이고 그래서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구축해놓고 전세계를 지배하고있고 헤롯당들은 이런 미제국주의앞잡이 사대매국노국가와 정권들이고 사두개인들은 신자유주의덕분에 미국을 등에 업고 돈벌이하는 재벌들이고 바리새인들은 한기총-뉴라이트무리들이다. 이렇게 상호 대차대조 표를 만들어 이 《한》(조선)반도에 옮겨놓으면 2000년이 지난 지금 그 세력판도는 하나 달라진것이 없어보인다.

헤롯당들의 일란성쌍둥이 사대매국노들

북의 로케트가 발사되자 이들 신판권력자들이 보이는 반응마저 같다. 그동안 숨겨져 나타나있지 않던 이들 무리들의 속셈들이 적라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은 이번 로케트발사로 위기의 조기진단을 받는 소득을 얻었다. 로마제국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입을 틀어막고 사정없이 박해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것은 미국이 북의 로케트발사를 두려워하는 리유와 한치의 차이도 없이 같아보이는 점이다.
북의 로케트가 하늘로 올라갔건 바다에 추락했건 사정거리가 이 정도라면 백악관은 긴 탄식을 하지 않을수 없다. 지금까지 누려오던 제국의 꿈은 앞으로 물거품이 되고도 남음이 있기때문이다. 상상만 해도 미국으로서는 소름이 끼칠만 한 일이다. 온 지구주위에는 404개의 위성이 돌고있지만 북이 이번 쏘아올린 《광명성2호》는 미제국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놓고있다는 점에서 예수가 부활해 하늘우로 올랐다는것과 진배 다를것이 없어보이는 효과를 내고도 남음이 있다.
일본은 1931 9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효과를 이번에도 얻어보려고 발광수준이였다. 가해자가 피해자인양 둔갑하여 《위장기발(false flag)》을 한번 흔들어대보았다. 일본은 여러번 이런 위장기발흔들기에 성공하여 제국주의의 기초를 닦은 재미를 붙인자들이다.
이러한 미일의 전략과 전술앞에 헤롯당같은 이 땅의 지도자들이 이번에 보여준 태도는 여기서 할 말을 잃게 한다. 우왕좌왕, 부화뢰동, 오락가락, 거기다 정보전시대에 어느 하나도 자기스스로 파악한 정보도 없이 미일이 발표하는대로 따라움직이는 모습은 차라리 측은하다 할 정도였다. 미일의 야욕이 우와 같거늘 어찌 이들이 주는 정보에 의존해 수족같이 움직일수 있단 말인가?
북의 로케트발사가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추호라도 생각했었다면, 하물며 저들은 성상납이나 받으며 밤새는줄도 모르고 주지육림속에서 헤매고있지는 않았을것이다. 헤롯당들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다. 이런 말에 미움을 사 예수는 처형당했고 이런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은 이들을 사시나무떨듯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었다.

사대주의는 길러지는것이다

지금은 작고한 장공 김재준목사가 미국 인디안보호지역의 학교를 방문했을 당시의 회고담은 늘 머리속에 남는 일화가운데 하나이다. 미국백인선생들이 백인들과 인디안추장들이 싸우는 영화장면을 보여주자 인디안아이들이 모두 백인을 응원하는것을 본 장공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하고있다. 자기들의 추장들이 백인들의 총칼에 맞아 쓰러질 때마다 손벽을 치고 환호성을 지르더라는것이다. 그 리유를 알고보니 백인선생들의 종교와 교육덕분이였다는것이다.
백인교사들이 인디안아이들에게 너희 조상들은 모두 악마 사탄의 종교를 믿었고 백인들이 모두 잘해주려 했는데도 은혜를 배신한 너희 조상들이 이를 거부하고 백인들을 학살했기때문에 인디안들을 죽일수밖에 없었다는것이라고, 죽어 마땅하다고 교육했기때문이라는것이다. 소수의 너희 조상들의 이러한 악질적행동때문에 너희들도 지금 어려움을 겪고있다고 가르친 결과였다는것이다.
무엇 하나 다른가? 오늘날 《한국》그리스도교인들이 교회안에서 설교하고 교육하는것과 무엇 하나 다른가? 그리고 학교에선 교사, 교수들이 가르치고 강의하는것과 무엇 하나 다른가? 북 하나에 미일이 달라붙어 달려드는것을 보고 지금 《한국》의 그리스도교와 장로《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가? 김재준목사는 인디안학교방문에 평생 충격을 받고 살았던것 같다.
장공은 돌아가기 불과 6개월전 로령에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단군제단에 올랐고 말년에는 그의 신학이 《한국》중심적이 되여 그리스도교의 기원은 《수메르》이고 《수메르》는 《한국》에서 간 문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세운 교파가 《그리스도교 장로교회》이고 그가 세운 한신대학교에서 문익환목사와 같은분이 나온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번에 이 나라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미국백인들에 세뇌된 인디안들과 하나 다른것이 없어보인다. 위성발사가 실패했다는 헛소문에 저렇게 박수갈채를 보내는것이나 세뇌된 인디안아이들이 하는짓이 무엇 하나 다른가? 지구촌의 수많은 나라들이 남《한》이 같은 동족인 북의 로케트발사에 미일과 같이 저렇게 한타령인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할것이다. 마치 김재준목사가 인디안아이들을 그렇게 생각했듯이. 이렇게 사대주의는 길러진것이다.

예수가 부활했는가? 은하가 은하수로 갔는가?

예수가 부활하던 장면을 목격했다는 루가라는 제자는 《구름이 그를 가리여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있는데 흰옷입은 두사람이 그들곁에 서서 이르시되》(사도행전 1 9)라고 기록하고있다.
이런 목격담이 소문이 되여 사방에 퍼져나가자 사실여부에 관한 시비가 일기 시작했다. 《예수부활은 거짓말이다. 사실이 아니다.》라고 로마제국은 사방에 방을 붙여놓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치 로케트발사이후에 성패여부에 시비가 생기듯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잉크자욱(INKBLOT)》이란 이런 시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벽에 잉크를 뿌려놓고 무엇같이 보이느냐 물으면 다 다르다.
우의 성경기록도 자세히 읽어보라. 예수가 부활했다는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 구름이 가리여 보이지 않았다 해놓고는 제자들이 자세히 보니 흰옷입은 두사람이 그들곁에 서있었다고 한다. 서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초대그리스도교회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오늘과 같은 그리스도교가 될수 없었을것이라는 점이다. 그럼 예수부활이 객관적사실이냐 아니냐, 이 질문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아니, 앞으로도 끝나지 않고 남겨지고말것이라는것을 의미한다. 남겨지기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생명력있는 종교로 되여갈(becoming Christianity)것 이다.
그래서 부활의 객관적사실여부는 영원히 확인할 길이 없다.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은 예수는 육체적으로 부활하지 않았고 예수는 자연사를 했으며 그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 어느것도 그리스도교의 종교성을 훼손할수는 없다. 주관의 개입이 없는 객관은 아무 소용이 없기때문이다. 《은하2호》의 성공여부는 그 객관적성공여부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예수의 부활과 같이 지금 성공하고있다. 우리는 지금 그 성공을 부활절을 맞아 말해야 한다는것이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은하2호》의 성공여부를 증빙하려 할 필요가 없다. 할만 한 능력도 정보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것은 하늘에 있는것이 아니라 땅에 있다. 다시말해서 미일제국주의적근성과 그밑에서 신음하는 이 지구상의 모든 민중들의 가슴속에 은하는 영원히 저 멀리 은하수깊숙이 날을것이라는 점이다.
예수의 부활이 력사가 끝나는 날까지 시비거리로 남아야 그리스도교의 생명력이 계속되듯이 《은하/광명성2호》 역시 그렇게 되는것 자체가 결코 실망스런것만은 아니다. 은하에 대한 관심자체가 사라지는것보다는 《한》미일 저들이 자꾸만 시비거리를 만드는것자체가 은하를 더욱 성공스럽게 만들것이다.
과연 달속에 계수나무와 토끼가 있는가? 그렇다고 없는가? 우리 민족의 가슴속 깊은 곳의 잉크자욱은 이렇게 노래한다. 달속에 계수나무가 있건없건 이렇게 노래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이란 제자는 예수부활의 소문을 퍼뜨리다 체포되여 밧모라는 섬에 갇히게 되였다. 그는 환상속에서 글을 남겼는데 이를 《요한계시록(Revelation)》 혹은 《묵시록(默示錄)》이라고 한다. 성경속에 있는 묵시문학의 글들은 세상의 처음과 끝을 말하고있는 글들이다. 그중 요한묵시록은 백미를 장식한다.
그런데 지난 19701980년대 《한국》그리스도교인들이 민주화투쟁을 할 때에 가장 많이 읽힌 글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그 리유는 요한이 로마제국에 대해 저항하는 독설들을 모두 은유적인 표현을 빌려서 말하고있기때문이다. 례를 들어 네로황제를 수자 666이라 한것도 바로 이 묵시록에 나온다.그래서 《묵시록》이란 책제명과는 달리 가장 정치적인 글이다.
이 글속에서 요한은 《만국이 그 빛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시록 21 24)고 했다. 로마제국 하나만 있고 모든 나라들은 그밑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할 때에 요한이 이런 글을 쓴다는것은 자기 목숨과 맞바꾸는것과 같았다. 모든 나라가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갈것이라는 말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로마제국의 우산아래에 있는것이 아니고 자기나름대로 자주권을 가지고 살수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그러할것이라는 묵시이다.
보라. 지금 미국과 강대국만이 미싸일과 핵을 만들수 있고 미국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그렇게 할수 있다는것은 로마제국이 하던 소리짓과 무엇 하나 다른것이 있는가. 이런 판도에서 예수가 부활을 했다는 소식은 만국이 평등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는 정치적선언이였다.
이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도 그 나라의 고유한 영광이 있는 법이다. 자기 나라의 말, 자기 나라의 언어, 자기 나라의 풍속, 자기 나라의 힘, 그 무엇이든 자기것을 가지고 자립, 자강, 자력으로 살수 있고 이것은 천부의 권리이다. 이런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것은 천부의 권리를 포기하는것이요, 신의 지상명령을 어기는것이다. 이런 자주권이 없는 나라는 나라자격이 없으며 자살이 죄인것처럼 이런 나라들도 죄를 저지르고있는것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하늘과 처음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것이나 곡하는것이나 아픈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계시록 21 14) 요한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수 있는 조건을 갖춘 나라와 사람들은 반드시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나와야 한다고 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란 말이 이를 증명한다. 과연 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고난을 받은 백성은 누구일가?
이란이 같은 미싸일을 발사했을 때에 전세계가 이렇게 란리는 아니였다. 왜 이번 북의 미싸일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야단법석인가? 거기에는 리유가 있다. 그 리유는 《은하2/광명성2호》가 단순한 로케트가 아닌 그것을 초월한 이 지구상의 모든 한맺힌 민중들과 약소민족의 《한()》을 한몸에 담고 하늘높이 솟아올랐기때문이다. 이 마당에 은하의 성패를 론하는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예수가 과연 부활해 하늘에 올라갔느냐 안 올라갔느냐가 그렇게 중요한것이 아니라는것이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온 사람들의 한의 잉크자욱은 분명히 예수가 흰옷을 입은채로 하늘구름속으로 올라간것으로 가슴속깊이 심어진것이다. 이 확신과 믿음은 물리적로케트보다 미싸일보다 더 강한것이다. 그래서 유엔결의를 천번만번 해도 이 지구촌 민중의 뇌리속에 심겨진 은하/광명성은 지워질수 없을것이다.
그래서 미일이 무서워할것은 이 억압받는 민중들의 한이다. 이 한이 광명성으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무서워해야 할것이다. 로마제국이 아무리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사방에 퍼뜨리는 사람들을 잡아죽여도 결코 로마제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313년 꼰스딴찐황제는 그리스도교에 굴복하고말았다. 힘없던 민중들의 가슴속에 환히 비추이던 광명성을 결코 지울수는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더러운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흉측한짓과 거짓을 일삼는자도 결코 들어가지 못할것이다.(계시록 21 27)
《불의를 행하는자는 불의를 행하도록 내버려두고 더러운자는 그냥 더러운채로 내버려두어라.(22 11)
여기서 불의한자들, 더러운자들이란 우에서 말한 로마제국, 헤롯당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저들은 앞으로 올 환란을 견디여내지 못하고 자멸하고말것이라는 환상을 보고 요한은 글을 끝맺고있다. 이것이 2009년 부활절 아침의 명상이다.





주체사상과 《은하》의 비밀

시작하는 글

《주체사상》없는 북을 생각할수는 없다. 그런데 남《한》일각의 주체사상에 대한 편견과 그 리해의 부족함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상대방이 가지고있는 정신세계의 진수도 파악하지 못하고있는 남《한》보수우익들이 당장이라도 주체탑은 무너지고 자기들 세상이 곧 올것이라 망둥이들같이 날뛰고있는 모습을 보고 철학을 공부한 한몫으로 이들을 교양학습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였다. 어디까지나 필자가 리해한 한계내에서 주체사상의 내용을 검토해보는것이기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과 자유로운 토론을 환영한다.
최근 우리의 최대화두는 《은하/광명성》이다. 여러 시각에서 주체사상을 리해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지만 우리 관심의 표적이 되는 쟁점으로부터 시작하는 리유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감대의 폭을 넓게 하려는 의도때문이다.
쉽게 말하여 로케트/미싸일의 생명력은 사정거리에 있고 사정거리는 무게와 속도에 달려있다는 이 간단한 공식에서 이 무게(m)와 속도(v)를 조절하는 제3의 요소를 발견하는 비밀이 그 나라의 과학기술과 국력에 달려있다는것이며 무게와 속도만을 생각하는 과학을 2수분화적 그리고 여기에 조절자를 첨가하여 생각하는것을 3수분화적이라고 한다.
주체사상의 핵은 바로 3수분화적인데 있다는것이며 이런 3수분화적인 사고방식과 문화는 우리 민족 고유한것이라는것, 그래서 주체사상은 우리 민족공유의 3수분화의 문화적뿌리에 근거해 발전한 사상이라는것이 아래 글의 요약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의 뿌리는 김일성주석의 가문에 전승된것이라고 본다.

로케트의 역설

아직 빛보다 빠른것은 없다. 빛이 가장 빠른 리유는 빛은 자기자체의 질량 혹은 무게를 전혀 가지고있지 않기때문이다. 그러면 자연히 생기는 의문은 자기 무게가 없는것이 어떻게 움직일수 있느냐이다. 그런데 빛만은 그렇게 할수 있다. 질량없이 움직이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귀신이나 도깨비일것이다. 우리는 빛을 통해 속도는 질량과 관계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달리기에서 뚱보가 뒤지는 리유도 이와 통하는 말이다. 질량이 큰 뚱보로케트는 빨리,멀리 날수 없다.
여기서 질량과 속도의 관계가 과학자들의 최대관심사가 될수밖에 없으며 량자간의 관계는 반비례적이다. 다시말해서 어느 실체가 무거울수록 속도가 늦어질수밖에 없다. 만약에 골프공을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치면 어떻게 될가? 이런 실험을 할수만 있다면 속도가 점점 줄어진다고 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골프공의 질량은? 질량이 커지면 속도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남겨두고 로케트의 무게와 속도의 관계를 알아보는것을 통해 이 문제를 주체사상을 리해하는 지름길로 삼아보기로 하자.
우리가 차에 넣는 가솔린(혹은 《기름》, 《에네르기》라고도 함)가운데 막상 차가 달리는데 소모되는것은 겨우 0. 02%밖에 안된다. 나머지 대부분은 차를 달리게 하는데 소모된다. 즉 차의 몸무게가 대부분의 에네르기를 다 사용한다는것이다. 여기에 자동식창문여닫이 등에도 가솔린이 소모된다고 생각하면 이 말이 리해될수 있을것이다. 그렇다면 에네르기절약을 위해서는 차의 몸무게를 줄여야 할것은 당연한 리치이다. 경차가 나오는 리유이다.
1970년대 중반 에네르기파동때 미국은 《베가(Vega)》나 《핀토(Pinto)》라는 소형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말았다. 당시 가난한 《한국》류학생들이 이 소형차를 샀다가 모두 손해를 보고말았다. 물론 필자도 례외는 아니였다. 실패한 리유는 무게를 너무 적게 하려 차체를 알루미늄으로 한 결과 엔진의 틈새에서 기름류출이 너무 심했기때문이고 접촉사고시 운전자의 피해가 컸기때문이다.
로케트나 미싸일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번 북에서 발사한 《은하2호》는 무게 79t, 길이 35. 8m, 지름 2. 2m. 그런데 《광명성2호》의 무게는 비공개이다. 그 리유는 《광명성2호》의 무게(질량)는 로케트의 속도를 말하는것과 같기때문이다. 만약에 타자가 속도와 발사시점 그리고 장소만 안다면 요격은 쉬워질것이기때문이다.
다만 트럭 한대가 실을수 있는 짐의 무게가 4t정도이고보면 이번 로케트의 무게를 짐작할수 있다. 과연 이만 한 자기 무게를 가지고 초속 7. 3km의 속도로 어떻게 궤도에 진입할수 있을것인가? 진입에 성공하려면 아무리 적어도 250300t정도는 될것이라 짐작이 된다.
그래서 로케트의 사정거리를 늘이는 기술은 곧 로케트의 무게를 줄이는 기술이라 할수 있다. 물론 빛과 같이 빠르게 하자면 질량을 전혀 없게 해야 하지만 말이다. 은하의 질량을 아무리 적게 해도 《광명성2호》를 실을만큼의 질량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발사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기때문이다. 은하는 수단 그리고 광명성은 목적, 그렇다면 질량과 속도의 관계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로 또 변한다. 이 정도면 벌써 로케트발사의 철학적인 문제가 등장한것이다.

자체권과 소유권의 문제

아무리 은하의 질량을 줄여도 광명성을 싣고갈 정도의 질량은 있어야 한다. 로케트의 무게를 좌우하는 결정적인것은 바로 로케트를 나르게 하는 연료자체이다. 여기서 미싸일전문가들은 무게가 적은 연료개발에 열을 올리지 않을수 없다. 이번에도 고체연료냐 액체연료냐 하는것도 바로 여기에 그 리유가 있다.
차도 마찬가지로 가솔린자체는 차를 달리게도 하지만 자기자체의 무게때문에 차를 달리지 못하게도 한다. 여기서 차가 달리는것을 《자체권(ownship)》이라고 한다면 달리는것자체는 질량을 소유해야 한다. 이를 《소유권(ownership)》이라고 하자.
하이데거는 전자를 《존재자체(Sein)》 그리고 후자를 개별《존재자(Seiendes)》라고 했다. 이제 철학의 본령인 존재론의 문제로 비화되였다. 있다고 존재하는것가운데 이 두가지 문제에 걸리지 않는것은 없다. 서양에서 《존재한다》를 existere라고 한다. ex》는 《밖》이란 뜻이고 《istere》는 《있다》라는 뜻이다. 밖에 있다는 의미가 존재한다는것의 의미이다. 무엇이 무엇의 밖에 있다는 뜻인가? 쉽게 말해서 존재권은 소유권밖에 있다는것이다. Sein(이데아 같은)은 개별존재자(Seiendes)밖에 있다는 뜻이다.
이를 순수와 불순으로 나누어 순수한 존재권으로 존재자체는 불순한 개별사물들을 소유하고있는 사물들의 밖에 있어야 한다는것이다. 이 말속에는 《있다》 혹은 《존재》한다는것은 오직 존재자체일뿐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자체는 우리의 관념속에 있다. 이를 두고 맑스는 관념론이라 하며 이런 존재자체가 밖에 있으면 객관적관념론이고 주관안에 있으면 주관적관념론이라고 한다.
여기서 자체권과 소유권의 량자를 심각하게 분리시키는 철학인 이원론적철학, 즉 플라톤철학이 등장하게 되고 이런 철학이 2 500여년간 서양사상계를 지배하였다. 자체권과 소유권을 매개하는 제3의것은 아예 없고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가 전자를 중요시하는 관념론과 그 반대인 유물론이 갈라지게 되였으며 그 분렬의 최대희생자가 바로 우리이다.
관념론과 유물론의 동시극복의 과제와 함께 현대철학자의 고민이 있다. 현대철학의 알랭 바디우는 《inexistere》라는 신조어를 만든다. 안에 그리고 밖에 동시에 있는 존재자란 뜻이다. 이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동시조화,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할수 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저서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세계를 관념이나 정신의 세계로 보는 관념론자들은 더 말할것 없고 지난 시기 세계를 물질의 세계로 본 유물론자들도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관점과 립장을 밝히지는 못하였던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당마크에 나타나있는바와 같은 다른 공산권에서 볼수 없는 낫과 마치가운데 붓대가 함께 있는것으로도 상징된다. 그리고 이는 바로 《상해림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관념론적철학과 동만일대에서 엠엘파 그리고 화요파와 같은 극좌맑스주의를 동시에 극복해나가는 투쟁과정에서 얻어진 행동적소산이라 할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주체사상의 기원은 1930년대 전후가 옳다고 본다. 북의 과학기술 역시 이런 주체사상적구조를 떠나 리해할수는 없다.

철학자들의 고민과 과학자들의 고민

추진체가 가벼우면 연료가 적게 드나 멀리 날수 없고 무거우면 멀리 갈수 있으나 연료가 많이 들고. 여기서 말하고있는 로케트를 하나의 《실체(substance)》라고 한다면 발사체의 무게 그리고 연료가 액체냐 고체냐 하는것은 실체에 대한 《속성(property)》이라고 한다. 실체는 속성없이 운동할수 없고 운동을 하면 속성이 운동을 방해하고. 그래서 실체와 속성은 서로 상보적관계이면서도 서로 상반적관계이기도 하다.
다시말해서 속성없이 실체가 운동을 할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속성들때문에 실체가 운동을 할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로케트를 만들자면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잘 조절되도록 해야 하는 중간적요소를 발견해야 한다. 이런 역설적관계는 뉴톤물리학의 거시세계속에서도 발견되는것이다. 그러나 둘사이를 조절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위치와 열량의 역설과 프랑크상수

20세기 현대물리학은 미시세계에서 이런 역설이 나타나는것을 알게 되였다. 만약에 빛이란 실체의 속성을 알기 위해 다른 빛으로 빛을 비춘다고 하자. 그러면 비추는 빛의 열량이 너무 크면(너무 밝으면) 관찰하려는 대상을 파괴시켜버리고(보이는 대상보다 보는것이 너무 커서) 그렇다고 열량을 줄이면(너무 흐리면) 어두워져 위치를 관찰할수 없게 된다. 그래서 관찰위치(position)와 열량(energy)은 서로 상반적이면서 상보적이다. 이는 뉴톤이 알지 못하던것으로서 여기서 1927년 닐스 보아에 의하여 상보성리론이 나오고 하이젠베르크에 의하여 불확정성리론으로 발전한다.
이는 대립물의 갈등이 지배하는 맑스의 세계관이나 이분법이 지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과는 거리가 먼것이다. 이를 두고 쿤은 과학혁명이라고 했다. 구쏘련의 붕괴의 중요원인이 고르바쵸브가 이런 신과학의 량자력학의 리론을 도입했기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신과학의 리론은 맑스의 모순률을 쓰나미같이 휩쓸기에 충분했기때문이다.
현대과학의 3대과학혁명은 상대성리론, 량자력학의 불확정성리론, 카오스리론이라고 할 때에 이 3자는 모두 전통서양의 이원론 혹은 이분법적사고와는 상반되는것들이다. 그러나 20세기 과학, 심지어는 미싸일로케트발사의 리론까지 망라하여 이런 현대과학의 리론없이는 불가능하다.
북조선에서는 사찰과 평양의 단군을 모신 숭령전 등이 모두 복원 및 복구되였다. 주체사상이 갖는 붓대정신때문이다. 여기서도 주체사상의 사람중심사상이 구별되게 나타난다. 김일성주석의 주체사상은 1930년대에 유격현장에서 체험으로 획득했던것이다.
빛의 위치와 열량의 관계를 조절하는 상수가 1900 12 14일 도이췰란드의 과학자 막스 프랑크에 의하여 발견되였다. 20세기 성탄절선물이라고까지 알려지게 되였으며 우의 3대과학혁명모두 이 상수 혹은 프랑크상수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이다. 빛과 열량과 위치를 조절한다는것은 옛 도공들이 빛의 밝기정도를 육안으로 구별하여 도자기를 굽는것과 같다고 할수 있다.
이 제3의 요소인 프랑크상수는 물질의 질량과 속도의 관계를 설명할 때에도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즉 질량 m, 속도 v, 물질파 L, 에네르기 E의 관계로 이 상수를 리해한다고 해보자. 아인슈타인은 1914년에 공식 Ehmv로 노벨상을 탔다. 에네르기와 질량과 속도는 비례하며 이 비례를 조절하는것이 h이다. 빛의 공식덕분에 자동문이 발명되였다. E m으로 바꾸면 mhv도 가능하다. 이는 또한 로케트가 자기 질량과 속도를 조절하는 문제이기도 하며hm/v라고 할 때에 로케트가 자기 몸무게와 속도의 관계를 조절할 때에 사용되는 공식이다. 그후 1929 Lh/mv란 공식으로 드 브로이로는 노벨상을 탔다.
이 공식덕분에 어떤 물질속에 불순물유무를 확인할수 있고 이는 공항검색대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고있다. 드디여 1929년 하이젠베르크는 적당한 운동량 x와 위치 p의 곱은 프랑크상수보다 같거나 커야 한다는 공식으로 노벨상을 탄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20세기 과학혁명을 가능하게 한것은 프랑크상수(6. 625×1027erg/sec)이다.
뉴톤과학이 질량과 속도 그리고 위치와 속도의 2수분화적관계만으로 관찰한 과학이라면 20세기 신과학은 바로 여기에 프랑크상수를 첨가한 3수분화적과학이라고 요약할수 있다. 그래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적구조란 2수분화에서 3수분화로 달라진것이라고 요약할수 있다. 량극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에 제3의 수(h)같은것이 나타나 이를 중화, 조화시키는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를 두고 3수분화문화 혹은 2수분화문화라고 한다.
이번 하늘을 날은 《은하2호》도 이 3가지 법칙가운데 어느 하나도 빠짐없이 적용되여 수행된것이다. 3가지 법칙은 블랙홀주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례를 들어 블랙홀에서 화이트홀로 에네르기가 빠져나갈수 있는 리유는 프랑크상수만큼의 빈틈은 블랙홀같은것속에도 있기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수 있는 빈 공간이 바로 이 상수이다.
여기서 실체와 속성의 관계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2분법적사고이다. 그리고 여기서 둘을 조절하는 요소까지 생각한다면 3분법적사고가 된다. 소위 말하는 데까르뜨-뉴톤적세계관이란 이런 2분법적사고방식이 철학과 과학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전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서구에는 오래동안 이런 2분법적사고가 발달하여 사물을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만 파악해왔다. 이것은 오랜 서구전통속에 고질적으로 있어온 사고방식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사물의 관계를 량분화시켜놓은이래로 그 피해는 지금 우리 《한》반도에 와 병목현상을 만들어내고있다.

상수는 주체에서 나온다

우리는 주체사상을 읽는 가운데 맑스사상에서 일탈하는것을 실체와 속성의 관계에서 읽을수 있다. 실체와 속성은 운동과정속에서 변해나간다는것이며 이 과정자체가 속성을 변화시키고 그래서 실체도 바꾼다는것이다. 그래서 어느 물질도 고정된 고유한 실체와 속성을 가질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상론할것이다.
문제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창의성이 결코 인문사회과학과 별개의것으로 생각할수 없다는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자연과학의 사회과학적배경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는다. 례를 들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리론만 하여도 이미 19세기 중엽 기하학, 특히 비-유클리드 기하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된바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교통수단의 발달과 함께 지구촌이 서로 상대적인 관계속에 있다는 사회적현상에 힘입어 아인슈타인이 이를 1914년 일식때에 상대성리론을 증명, 발표하게 된것이다.
불확정성리론도 보어나 하이젠베르크 등이 동양사회를 려행한 후 동양의 역리론같은데서 확신을 얻어 상보성리론을 확정, 발표하게 된다. 그래서 보어가 노벨상을 탈 때에 음양마크를 들고 시상식에 나타난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와 같이 과학리론이 정치사회 그리고 문화환경적요소와 별개인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조선의 《은하2/광명성2호》발사라는 독창적인 최첨단과학기술앞에 모두 놀라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사회구조의 변화가 자연과학을 앞지르고 인간의 내면적주체의 세계가 자연과학의 현상을 앞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리학자인 카프라나 쥬커브 같은 물리학자들이 결국 동양의 정신세계에 몰입해버린 리유도 바로 자기들 필생의 과학기술이 인간의 의식세계를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광명성에 나타난 첨단과학을 기계기술에서 찾기 이전에 북의 주체사상속에서 그 비밀을 찾아야 할것이다. 주체사상을 다방면으로 말할수 있지만 가장 쉽게, 가장 보편적으로 정의해 일단 말해본다면 필자는 《3수분화》라고 해두고싶다.
우에서 물질의 운동량과 위치 그리고 질량과 속도 등에는 반드시 제3의 상수가 그 사이에서 작용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수 (常數)에 해당하는것이 바로 《주체(Juche)》이다. 그래서 주체가 없거나 바로서지 못하면 아무 일도 안된다. 마치 프랑크상수가 없이는 아무 작용도 불가능해지는것과 같이 말이다. 주체의 담지자는 《사람》이며 사람은 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운동의 주인이 사람이다. 관념이나 물질에 노예적삶을 살아왔기때문에 사람이 주인행세를 하지 못한것이다.
3수분화 혹은 3원주의는 북의 사회주의헌법(1998)에 잘 반영되여 있다. 주권은 《로동자》와 《농민》 그리고 《근로인테리》에게 있다.(4조와 제8) 각급 주권기관은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원칙에 따라 비밀투표를 한다.(6)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벌리며 자주, 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통일을 실현한다.(9) 특히 이 제9조의 경우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의 구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자주, 평화, 친선으로 한다.(17) 그리고 주체사상의 3대원리인 의식성, 창조성, 자주성은 3수분화의 대미이다. 북의 한의학자 지만석과 지성광은 《고려의학원리》(2002)에서 인체에서 이러한 3수적조화의 원리를 《부반결합조절》이라고 했다.

3수분화의 유래는?

그러면 이러한 3수분화의 구조가 어디에서 유래했느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회고록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김일성주석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두말할것없이 선친 김형직선생이다. 회고록 1권에서 김형직선생은 김주석에게 혁명가의 3대각오라고 하면서 《혁명가는 어디 가나 항상 3대각오를 가져야 한다. 아사, 타사, 동사, 다시말하여 굶어죽을 각오, 맞아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를 가지고 처음 먹은 원대한 뜻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김일성주석은 회고록에서 《나는 아버지의 이 말씀을 깊이 새겨들었다.(1 126페지)고 썼다. 김형직선생의 《지원(志遠)》사상에 기초한3대각오, 동지획득에 대한 사상, 두자루의 권총을 두고 유산이라고 한다.
김일성주석은 회고록에서 《<지원>의 사상, 3대각오, 동지획득에 대한 사상, 두자루의 권총, 이것이 내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의 전부였다. 그것은 모진 고생과 희생을 전제로 하는 유산이였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 훌륭한 유산이 없었다.(1 129페지)라고 술회하고있다.
이런 유산은 화성의숙시절 천도교의 3수분화문화에 접목이 된다. 최동오선생은 중국의 3민주의에 류사한 국본, 민본, 인본의 삼본주의를 강의했다.그리고 천도교는 3대개벽인 정신개벽, 민족개벽, 사회개벽을 말한다. 그리고 조국광복회를 조직할 때에도 3명정도이면 1개의 분회를 만들고 3개의 분회가 상위조직을 만들어나가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 모든 3수분화의 정신을 《백두정신》으로 요약하면서 김일성항일유격대는 백두산을 향해 나아가고있었다. 백두산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령산이고 3원철학의 본산지가 아니던가?





빨리 망하려면 사대주의를 해라

단군릉이 우상화를 위한 급조물인가?

남《한》학자들은 단군릉건설을 두고 허구 혹은 우상화 운운하며 헐뜯는것이 학자되는 자격이 되는양 하고있다. 백두산을 민족의 종산이라고 한것은 바로 우리 시조 단군이 이곳에서 나라를 처음 펴신 곳이기때문인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1993 1월 김일성주석은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에 있는 단군묘를 발굴할것을 지시하였다. 단군묘의 년대가 1993년 기준으로 5011±267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덤근처에 고구려 장군총과 모양이 같은 피라미드모양의 무덤을 건설하였다. 기본무덤을 보면 밑단 한변의 길이 50m, 높이 22m이다. 초대형단군릉은 1994년 준공되였기때문에 1 994개의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남《한》의 력사 그리고 종교학계는 총동원되여 즉각 《단군》이란 책자를 만들어내여 단군릉에 대해 총공격 내지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공격의 내용인즉 왜 조사방법에 있어서 방사성탄소년대측정법을 사용하지 않고 전자상자공명법을 사용했느냐의 과학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왜 단군릉을 고구려식무덤으로 만들었느냐, 관대의 주인공은 누구냐에 이르기까지 고고학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알아들을수조차 없는 문제들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2001년 금강산에서 있었던 6. 15 1주년 기념행사에서 사회과학원 허종호박사와 고 김시민박사 등 북의 력사학자들을 만나 남《한》의 단군학회와 함께 개천절행사를 공동주최할것과 우리 고대사서인 《규원사화》와 《한단고기》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를 할것을 제의하였다.
다음해에 개천절 공동행사와 단군관련 학술대회가 대박산 단군릉앞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되였다. 당시 북측학자들은 한결같이 단군릉의 력사성과 그리고 고대사서들의 력사적가치성에 대하여 긍정적인 발표를 하였다.
김일성주석은 서거 이틀전인 1994 7 6일 단군릉건설 최종형성안을 검토하면서 남과 해외동포들이 볼수 있는 단군릉이 속히 건설될것을 독려하였다. 그 이전에도 무려 수십회이상의 독려를 직접 할 정도였다. 이렇게 단군릉건립이 김일성주석생애의 마지막 마무리업적이 되고말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군릉을 남《한》학자들은 단 한마디의 말로 폄하부정하고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김일성주석 서거직후 7 13일에 개천절전 완공지시를 하여 그해 10 11일에 준공되도록 하고 10 29일 개건된 단군릉을 찾아 민족의 대경사라고 치하했다.

서울 《중앙박물관》은 사대주의교양교육관이다

그러나 이러한 남《한》학자들의 단군릉과 고력사사서에 대한 비판은 리병도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제자들의 렬등감에 가득찬 반민족사대주의 비학문적주장에 불과하다. 이런 매국노적사관이 서울대학교에 그 진원지를 두고있다는것은 천추에 씻을수 없는 대과인 동시에 어쩌면 력사가 계속되는 날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 우리 력사의 악수가운데 악수이다.
이런 식민지사학의 후예들이 둥지를 틀고있는 서울대학교에서 리영훈과 안병직 같은 뉴라이트 주동인간군상들이 배여나온다는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일본의 이시하라 같은 인물이 저런 망언을 하는데는 이런 원군들이 주리를 틀고 남《한》 구석구석에 박혀있다는것을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있기때문이다. 그의 망언배경의 원인제공은 우리 국립대학교에서 제공하고있는것이다.
이들 남《한》력사학자들이 얼마나 비학문적이고 사대매국노적인가는 룡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확인할수 있다. 필자는 이 박물관이 개관되던 날 감격에 차 첫 방문을 하였다. 그러나 입구에서 더이상 보지 않고 돌아서 나오고말았다. 단군고조선력사는 겨우 한줄정도로 있는둥마는둥 눈을 비비고야 겨우 찾아볼수 있었고 우리 력사는 삼국시대 중엽부터 시작하는것처럼 기술을 해놓았기때문이다.
그 이후 필자가 회장으로 있던 단군학회와 시민단체들의 항의로 단군고조선이 복원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또 반가와 금년 4월 중순에 다시 찾았다. 그러나 이것은 고조선복원이 아니라 마지못해 가져다찍어 발라놓는 정도였다.
그래도 참고 더 안으로 들어갔다. 록음안내의 말을 들어가며 원삼국앞까지 갔다. 그러나 또 더 볼수 없어 돌아오고말았다. 리유인즉 거기까지 소개하는 안내말들에 의하면 우리 문화유산이 대부분 중국에서 온것이고 자생적인것은 없는것처럼 되여있었기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앞 입구에서 방문소감을 적는 글에 당시에는 《중국》이란 나라이름자체가 없었는데 어떻게 이럴수가 있느냐고 적고 돌아왔다. 박물관측에서 며칠후에 전화를 주었다. 그리고 자기들나름대로의 변을 설명하였다. 설명내용인즉 지금 압록강이북의 땅이 모두 《중국》이란 나라에 속해있으니 그렇게 하였다는것과 국제외교정치관례상 지금국호를 사용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것이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였는가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상식적으로도 쉽게 판단할수 있을것이다.
만약에 이런 식의 설명이라면 설명을 듣는 모든 외국인들이 당시에도 《중국》이란 국호가 있었고 우리 문화와 력사는 모두 중국에서 건너온 아류격이며 파생적인것에 불과한것으로 리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2세아동들도 그렇게 우리 력사를 리해하게 되고 그렇게 알게 될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력사는 차라리 알지 않는것이 옳고 좋다고 본다.
미국에서 자란 《한》인2세학생들이 여름방학때 국제학교에 와국사강의를 듣고는 어깨가 모두 축 처져 되돌아간다는것은 이미 보편화되였다. 미국에 있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매우 실망한다고 한다. 이렇게도 우리 력사가 모멸스런것이였나 하면서.
2004년 개천절행사로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일행은 평양 중앙력사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입구에서부터 100만년전 검은모루유적에서부터 시작하여 덕천사람 그리고 우리 첫 조상인 승리산인간유물을 비롯하여 우리 력사와 문화가 이동한것이나 류입된것이 아니라는것과 고조선과 고구려가 모두 동북아일대를 차지하고있었다고 설명전시되여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고대사서인 《규원사화》나 《한단고기》의 문헌적가치를 인정한 후 이에 근거하여 단군 49대왕들의 이름을 모두 도록을 만들어 전시하고있었다. 이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 그리고 이런 력사관의 대조가 지금 어떤 작용을 하는가? 지금 서울에 있는 《중앙박물관》은 사대주의교양교육관으로 딱 알맞는 곳이다.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실감날것이다.

빨리 망하려면 사대주의를 해라

회고록의 대종을 이루는 력사관은 망국의 첩경이 사대주의라는것이다. 종파주의, 사대주의, 교조주의는 김일성주석 필생의 극복과제였다.(2 163페지) 망국의 원인이 바로 이 3대악페때문이라고 판단했기때문이다.
김일성주석은 회고록에서 력대로 사대주의를 일삼아오던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때에조차 큰 나라들의 조종밑에 당파싸움만 하였다, 그러다나니 오늘 친일파가 득세하면 일본군대가 왕궁을 지키고 래일 친로파가 득세하면 로씨야군대가 임금을 호위하고 모레 친청파가 득세하면 청나라군대가 대궐의 파수를 서는 판이였다고 하면서 이렇게 술회하였다.
《그래서 한 나라의 왕비가 궁궐안에서 외국테로단의 칼에 맞아죽고(1895 <을미사변>) 왕이라는것이 다른 나라 공사관에 가서 1년동안이나 갇혀있는가 하면(1896 <아관파천>) 임금의 당아버지가 외국에 랍치되여가서 귀양살이를 하여도 오히려 사죄를 해야 되는 판국이였다.
왕궁을 지키는것도 남의 나라 군대에 맡겼으니 이 나라는 누가 지켜주고 돌보겠는가.(1 3페지)
북이 지금 남에서 하는짓가운데 가장 꼴보기 싫어하는것이 사대주의행각이다. 리명박《정부》가 지금 당장이라도 북과 대화를 하려면 사대주의하는 태도부터 버려야 한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행동을 하면 백번 말하는것보다 효과가 있기때문이다.
김일성주석이 사대주의에 대하여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였는가는 회고록 초반부부터 토로를 하는것을 보아서도 알수 있다. 남북의 혹은 북남의 동질성회복은 사대주의청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좋은것이라도 북에서 하는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것이 철칙이고보면 이런 말이 소귀에 경읽기인것을 모르는바 아니다.
일본이 우리를 삼킬 때에도 세계앞에 내놓은 명분이 조선은 큰 나라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나라라는것이였다. 조선조 500년의 명과 청에 대한 사대주의행각을 확대재생산한 각본이다.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얄따와 까히라에 모인 4대국 정상들도 한결같이 조선은 독립을 바로 시킬수 없기때문에 신탁을 할것인가 말것인가 토론을 하였으며 신탁을 하는것은 모두 동의를 하되 그 기간을 얼마나 할것인가만을 토론하였다.
지금도 변한것이 있는가. 지난 전쟁기간에 리승만은 아예 《국군통수권》을 미국에 통채로 내주고말았다. 그 여파는 60여년이 지났지만 점점 더 큰 파장을 만들어내고있다. 아예 사대예속에 습관화되여버렸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젖떼기 두려워하듯 미국에 매달리고있다.
그렇다. 빨리 망하려면 군을 포기하고 더 빨리 망하려면 사대주의를 해라. 그렇지 않고 우리 력사, 우리 땅을 지켜내려면 사대주의부터 먼저 포기해라. 사대주의는 적의 손바닥안에서 적과 싸우자는것과 같은것이기때문이다.






《잃어버린 10년》의 반을 잃어버린 2MB의 위기

정치가의 생명력은 잘 만들어진 구호와 그것을 통한 대중선동에 있다. 다시말해서 한 정치가의 선동적인 구호는 그 정치가의 생명과도 같다. 《한나라당》과 리명박《대통령》(아래 《리명박》으로 통일)이 지난 《대선》때에 만들어낸 《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만큼 성공적인것도 없었을것이다. 1950년대말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한것만큼의 효과를 낸것이 바로 이 구호였다.
로무현 전 《대통령》(아래 《고 로무현》으로 통일)의 죽음의 가까운 원인은 검찰조사이지만 먼 원인은 《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에 있었다고 진단해본다. 김대중과 로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통치기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청산과 부정이 이 구호에 담긴 의미였다. 리명박과 《한나라당》은 《정권》을 잡은 다음에도 이 구호를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하면서 구여권세력들을 사정의 칼날앞에 줄세우기 시작했다. 물론 그 앞줄에는 고 로무현이 서있었다. 재벌들앞에서는 그렇게도 무디던 검찰의 칼날이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들앞에서는 말그대로 서슬이 시퍼랬다고 하는것이 적당한 표현일것이다.
그런데 리명박은 지금? 로무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잃어버린 10년》의 반을 잃어버리게 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더이상 로무현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지지세력을 결집시킬 대상을 상실하고말았다는것이다. 그래서 이번 로무현의 죽음에 가장 큰 손실을 입은 사람은 바로 리명박자신이다. 로무현이 죽지 않고 살아 버티여야 구호의 약효가 발할터인데 그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말았다. 로무현이 해놓은것을 생이뽑듯이 하나하나 뽑아내는 일환으로 검찰조사라는 전가의 보도를 하나 꺼내들었으나 인간 로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말았다. 리명박은 자기 지지층을 결집시키던 수단이 하나 없어진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이제 남은 임기동안 잃어버린 남은 5년의 보도를 휘둘러야 할 판이 되였다.
고 로무현의 죽음은 지금 몇가지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를 내고있다. 먼저 로무현의 승부수는 늘 적중했고 그의 승부수에 그의 적들은 번번이 당하고말았다. 지난번 탄핵때에도 그의 적들은 로무현을 권좌에서 끌어내릴줄을 알고 행동을 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줄줄이 당하고말았다. 이번에는 자기 몸을, 아니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던지는 승부수를 두었다. 승부수치고는 너무 큰것이였다. 삼손이 마지막카드를 빼들었을 때 건물의 기둥이 빠져 건물안에 있던 사람들이 몰살을 당하고말았듯이 지금 로무현의 적들도 혹시나 삼손의 효과가 나지나 않을가 전전긍긍하고있다.
다음으로 이번 추모행렬이 보여주는 효과는 대외적으로 지대하다. 미국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던 《대통령》이 이렇게 《한》국민들에 의해 존경을 받고있는 모습을 추모행렬을 통해 가시적으로 확인한 미국, 나아가 일본으로서는 《한》국민들의 진정한 정치의식 내지 력사의식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하고있다. 고 로무현은 10. 4선언을 성사시켰고 군사분계선(MDL)을 자기 발로 걸어서 넘는 첫번째 《대통령》이였다. 추모행렬의 모두가 그의 정치적견해를 지지하는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죽음이 가져오는 효과에서 이 점을 빼놓을수는 없을것이다.
실로 이번 로무현의 승부수는 머리털이 잘린 삼손이 자기도 죽음을 각오하고 적들과 함께 죽음을 선택한것과 비교할수 있을것이다. 그의 유서에는 일언반구도 담기지 않은 자기의 시체를 밟고 넘어 《산자여 따르라》는 숨은 언어는 지금 전국 방방곡곡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퍼져나가고있다. 봉하마을의 추모인파는 어디로 발길을 돌릴지 모른다. 리명박은 지금 전전긍긍하고있다. 서울광장을 열지 않는것이 바로 그의 초조한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고있다. 그의 초조한 이 심사가 그대로 반영된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26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전면참여라는 급작스런 결정에서 여실히 나타나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선택이고 결정이다.
왜냐하면 그가 결정해야 할 일은 다른데 있었기때문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10년》이 얼마나 잘못되였는가에 대한 대()국민사과와 반성 내지 성명을 먼저 발표하는것이였어야 했다. 지난번 초불정국때와 같이 이번 조문기간동안에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또 한번의 기회를 놓치는것이 될것이다.정녕 사과를 하지 않을진대 초불이 아니라 홰불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살길을 제시해주는 말도 벌써 쓸데없을줄로 안다. PSI참가선언자체가10. 4선언을 깡으로 무시하고 나가겠다는 신호이기때문이다. 전혀 반성하지도 않고 진단도 제대로 하지 않고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있다는 말이다. 27일 추모제의 열기는 정동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타고넘쳤다. 북핵실험에 랭기가 돌고 추모발길은 줄어들줄 알았는데 전혀 약효가 나지 않고있다. 그래서 여당 원내대표는 국민들이 안보불감증에 걸려있다고 했다.
리명박의 눈에는 로무현의 죽음이 《잃어버린 10년》 하나 청산한것으로 여기고있는것 같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청산의 일환으로 보는지 고인의 뜻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였다.
리명박은 지금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이 자기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정책이 송두리채 뿌리뽑힌다는것을 외국이 이젠 다 알고있다면 리명박의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모르고있다. 그래서 이 구호는 자기를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위험천만한것이라 아니할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 나라 지도자로서 력사관과 시간관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 처사라 아니할수 없다. 오죽하면 공자마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했겠는가?
이런 사실을 조금이라도 모를리 없는 리명박이 지금 이렇게 막 나가는것은 리유가 있을것이다. 다시말해서 자기부터 《대한민국》의 력사는 다시 쓰이고 나라는 새로운 건국을 해야 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자체에 위험성이 있는것이 아니라 리명박《정부》를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들고 이를 지켜, 다시말해서 자꾸자꾸 《정권》을 재창출해야 한다는 아집과 고집에 사로잡히지 않을수 없게 하는것이 바로 구호에 담긴 화두이다.
우려된다. 이 나라의 하늘에 재앙의 먹구름이 몰려오고있지나 않는지 우려가 된다. 단군이래 나라의 최고통수권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으로 생을 마무리한 인물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나라가 빼앗겼을 때에도 고종은 자살을 하지 않았다. 단종도 자살을 하지는 않았다. 신하들과 대신들이 그랬을망정 왕자신이 그러지는 않았다. 아무리 퇴임한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통수권자가 후임자의 압박에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것은 상스러운 일은 아니다. 말을 바꾸어 《정치적타살》에 의한 자살이란 말이 지금 별별 의혹을 야기하고있다.
대한문앞 조문행렬가운데 있는 자라나는 이 나라의 어린 눈망울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부디 이 못난 어른들의 선택이 불행한 결과로 돌아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뿐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년》의 반을 잃어버린 리명박에게도 더 잃을것이 없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그의 불행이 곧 이 나라의 불행이라는것을 안다면 부디 온고이지신의 교훈을 잊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29일 영결식이 끝난 다음에도 깨닫지 않는다면 인간 로무현의 죽음은 실로 이 땅에 불행을 불러올것이다.






부엉이바위의 《나비효과》가 두렵다

시작하는 글

한 나라의 전직 《대통령》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한 사건이 그 나라에 어떤 후과를 가져올지 상상하기조차 두렵고 무섭다. 일본의 자객에 의하여 타살당한 명성황후의 죽음과 그 결과를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있다. 베이징하늘우의 나비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이 대서양을 지나가는 허리케인의 진로를 바꾼다고 하여 이를 현대과학에서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고 한다.
심지어는 그러하건대 일국의 전직 《대통령》의 비명의 죽음이 어떤 나비효과를 만들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다. 명성황후서거이후 망국과 같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케 할지 아니면 나라의 앞날에 오색령롱한 무지개가 떠오르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불안하고 두렵기만 하다. 나는 2009년 나비효과를 《부엉이바위 나비효과》라 이름붙여 우리 현실을 짚어 생각해보려 한다.


부엉이바위에 선 우리모두들

서양에서는 새가 《노래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운다》고 한다. 울어도 청승맞게 우는 새가 부엉이이다. 내가 자라던 시골 고향마을에서는 부엉이가 울 때면 동네사람들이 이렇게 따라불렀다.

《부엉 부엉 부엉
지집* 죽고 자식 죽고 논밭 천지 다 팔아먹고
부엉 부엉 부엉》
    (* 여기서 《지집》이란 강원도 남부지방의 《계집》의 방언이다)

이 노래말이 고 로무현《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다시 나의 뇌리속을 맴돌고있다. 하필이면 로무현 전 《대통령》이 마지막삶을 정리한 바위가 《부엉이바위》라고 하니 이 노래말이 다시 귀전을 울리며 가슴저미게 한다. 시골동네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처량한 자기 삶의 처지를 이 노래에 투사하고있었다. 어떤 불행한 사나이가 계집 잃고, 자식 잃고, 가지고있던 논밭마저 다 팔아먹고 이제 하루 세끼 풀칠도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이 노래를 불렀던것 같다. 그런데 이런 인간군상들이 한두사람이 아닌 마을, 동네 온 사람들이 비슷한 처지가 아니였나 하고 추억해본다.
부엉새는 우리 대중가요가운데 《천둥산 박달재》 그리고 《울고넘는 고모령》 등의 노래말에도 등장한다. 우리 서민대중이 가장 애창하는 가요속엔 빠짐없이 부엉새가 등장한다. 5 29일 서울광장에 모여 로제를 지내던 날 추모인파가 모여 구성지게 우는 모습을 보면서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진 로무현 전 《대통령》의 처지와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는것만 같았다. 마치 서글픈 부엉이우는 소리를 자기 신세에 대응시키듯이 말이다.
이에 대하여 김근태 전 의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로 전 《대통령》을 조문한 배경과 관련, 《국민들이 로 전 <대통령>모습에서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때문》이라며 《끊임없는 구조조정과 일자리조차 몽땅 비정규직인 상황 등에 내몰린 국민의 처지와 로 전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다르지 않아서 눈물을 흘린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부엉이바위에 선 로 전 <대통령>의 짙은 외로움이 바로 국민의 마음》이라고 했다.
6 5일 낮 쌍룡자동차 평택공장앞에서 한 로동자의 안해는 서럽게 울었다. 그는 도로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아 품에 있던 갓난아이를 꼭 끌어안은채 흐느꼈다. 아기도 엄마를 따라 울었다. 또 다른 안해도 드러누웠던 길바닥에서 일어나 눈물을 훔쳤다. 다른 10여명의 안해들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안해들은 <일한 죄밖에 없다>, <정리해고를 철회해달라>고 웨쳤지만 박영태관리인은 용역의 힘을 빌려 안해들을 뿌리치고 공장을 떠났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쌍룡차로동자들은 안해에 대한 미안함과 회사에 대한 분노에 긴 한숨을 내쉬였다.(오마이뉴스 6 5) 이것은 이 사회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부엉이바위앞에 선 우리모두의 사회적성격

김대중 전 《대통령》도 김 전 의장과 비슷한 말로 사람들은 지금 자기들의 처지와 신세를 부엉이바위 낭떠러지앞에 서있는것 같이 여기고있다고 했다. 이러한 사회심리적현상을 에리히 프롬은 《사회적성격(social character)》이라고 했다. 그렇다. 앞으로의 우리 력사는 이 사회적성격이 어떻게 방향을 잡느냐에 따라서 나비효과가 다르게 나타날것이다.
즉 나라의 운명이 비참한 비극으로 끝날지 아니면 희망으로 승화될지는 바로 지금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사회적성격이 어떤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느냐에 달려있다. 로무현《대통령》이 자기의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 자기의 죽음이 어떤 나비효과를 이 나라에 가져올지를 생각하지 않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말이 없다. 그의 유서에도 미래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운명》이라고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선택은 이 나라를 건강하게 만들었다는것을 믿기때문에 그의 부엉이바위우의 나비효과는 건강한 날개짓을 할것을 믿어의심치 않을뿐이다. 락관적인 미래는 바로 우리의 사회적성격에 대한 옳바른 진단과 선택에 달려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회적성격의 두 얼굴

다시말해 프롬은 력사변혁은 개인적성격이 사회와 일치할 때 가능하며 이를 《사회적성격(social character)》이라고 했다. 만약에 어느 영웅이 력사를 바꾸어놓았다면 그것은 그 영웅의 《사회적성격》때문이라고 말할수 있다는것이다. 《로무현》은 희대의 풍운아인가 영웅인가? 이 나라를 지키는 바다의 룡으로 남을것인가 아니면 소에 갇혀있는 이무기로 남을것인가? 점쟁이에게 점이라도 쳐보고싶은 심정이다. 프롬은 《사회적성격》에 관해 그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부록 《성격과 사회과정(Character and Social Process)》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사회적성격은 개인이 지니고있는 특성속에서 어떤것을 빼낸것으로서 한 집단의 성원이 대부분 가지고있는 성격구조의 본질적인 핵심이며 그 집단에 공통된 기본경험과 생활양식의 결과로 발달된것이다.(프롬, 1984, 245페지)
개인마다 태여난 출생신분에 따라 이질적요소가 있겠지만 일정한 상태에서 인간의 에네르기가 하나의 생산적인 힘으로서 어떻게 형성되여 작용하는가를 리해하려면 그때에 《사회적성격》은 우리의 주요한 관심사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성격이 야누스의 얼굴과도 같이 사악한 면과 선량한 량면성을 가지고있다는 점이다. 전자에 해당하는것이 히틀러의 사회적성격이고 후자에 해당하는것이 루터나 최제우 등의것이다. 그렇다면 로무현의것은?

히틀러의 사회적성격과 나치즘의 등장

어떤 사상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수 있는가를 알려면 그 사상의 담지자자신의 사회적성격이 사회에 부응하는가를 고찰해보아야 한다. 례를 들면 도이췰란드에서 나치즘이 등장하는 배경도 히틀러라는 개인의 사회적성격을 규명하지 않으면 리해될수 없다. 당시 도이췰란드의 로동자들은 좌익에 속해있었지만 결국 히틀러의 나치즘에 끌려들고말았다. 그 리유는 그들의 사회적성격이 《고립된 권위주의를 뿌리깊게 갈망하고 그것을 존경하고있었기》때문이라는것이다. 결국 그들은 히틀러의 강력한 지도력에 매료되고말았다. 그리고 히틀러의 사회적성격이 이들의 성격에 부합될수 있었다. 《다시말해서 사상이 강력해질수 있는것은 그것이 어떤 일정한 사회적성격에서 현저하게 보이는 어떤 특수한 인간적욕구에 부응하는 한에서이다.
프롬은 도이췰란드인들이 나치즘에 빠져든 요인들을 다음과 같이 렬거했다.
1918년에서 1923년에 걸쳐 그 정신적상태가 울분에 가득차있었고 사디즘으로 된 중하층계급이 존재했다는것, 1929년초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 의하여 묵인되였던 도이췰란드군국주의적세력의 힘의 증대, 반자본주의적운동의 발달에 따른 중공업자본가들의 두려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그들의 적으로 삼은 공산주의자들의 전술, 재능은 있었지만 반미치광이이고 기회주의자인 선동가가 있었다.(프롬, 1992, 205페지)
이것이 나치즘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며 당시 대다수 도이췰란드인들의 사회적성격은 히틀러의 사회적성격과 일치했다는것이다. 개인 히틀러의 성격은 그 당시 도이췰란드의 중하층계급의 성격에 일치했으며 이런 합치점에서 도이췰란드나치즘은 등장한다. 륙군하사라는 경력이외에 특별하게 내세울만 한 학력도 경력도 없었던 히틀러가 칸트와 헤겔을 낳은 3 500만명 게르만민중의 지도자로 떠오를수 있었던 리유는 《20세기의 불가사의》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사회적성격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불가사의도 리해할만 한것으로 여겨진다. 즉 제1차 세계대전패망이후 베르사이유조약에서 도이췰란드에 부과된 가혹한 배상금에 대한 부담으로 고통을 겪고있던 도이췰란드인들은 히틀러를 통해 《옛 게르만의 영광》을 다시 찾을수 있다고 착각했다. 이는 마치 우리 나라에서도 IMF사태이후 박정희향수가 되살아나는 현상과 같으며 이것이 바로 2007년 리명박의 《경제살리기》구호에 빠져버린 리유이다. 히틀러는 그 당시 도이췰란드인들의 심리상태를 샅샅이 읽을수 있었고 이를 리용하여 그는 집단최면을 걸었으며 도이췰란드인들은 그 최면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갔던것이다. 이러한 독재에 대한 향수를 마조히즘적인 현상이라 하며 이를 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서구식민주주의의 관건이라고 할수 있는 다수결의 원칙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33년 히틀러는 그의 나이 겨우44살때에 최면에 걸린 대다수의 지지속에 다수결원칙에 의해 합법적으로 총리자리에 오른다. 리명박의 어린시절의 고생담 그리고 TV화면의 그의 로동자다운 험한 손 등은 서민들로 하여금 어떤 최면에 걸리도록 하는데 주효하였다. 나치즘보다 더 원초적인 최면이다. 박정희는 이 최면으로 《정권》을 18년동안이나 유지할수 있었고 지금도 이 최면에서 깨여나지 못한 대중들은 리명박에게로 접목되였다.
이렇게 1929년에 도이췰란드인들은 히틀러와 사회적성격이 일치하여 나치즘에 빠져들게 할만 한 요소들이 있었다. 히틀러는 주로 사람들이 흥분하기 쉬운 밤 8시이후 집회를 열었으며 그의 카리스마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에 주력했다. 19201923년사이에 도이췰란드 중하층계급은 사디즘적울분과 분노로 가득차있었다. 《잃어버린 10년》 그리고 《경제 꼭 살리겠습니다》라는 구호는 로무현에 대한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드디여 투표에 의한 다수결로 일을 내고말았다. 지난 5 29일 대한문앞에서 어떤 한 시민은 리명박을 찍은 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싶다고 할 정도였다. 로무현의 죽음이 집단최면에서 해방돼나오기 시작하는 한 장면이였다.
도이췰란드의 중하층계급의 사회적성격에 대하여 히틀러의 그것은 잘 어울릴수 있었다. 즉 히틀러의 모험성과 투쟁성은 1930년대 중하층 도이췰란드인들의 사회적성격과 리상적으로 들어맞았다. 히틀러의 사회적성격은 중하층계급의 가치관과 변화된 가치관사이를 비집고들어가 설자리를 찾았던것이다. 이것이 나치즘이 발생한 배경이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에 페병 등 온갖 질환을 앓았으며 또한 극심한 가난과 사병생활의 경험을 통해 개인적성격이 과도하게 투쟁적이며 모험적으로 변했다. 그의 사디즘적인 성격은 유태인학살로 이어졌으며 그의 이러한 광적인 성격마저도 그 당시 평균적중하층 도이췰란드인들의 사회적성격과 부합되여 정치적으로 그 격이 올라갈수 있었다. 히틀러의 성격은 일반대중에게는 상식적인것이였고 합리적인것으로 통해있었다. 이를 《사악한 사회적성격(malicious social character)》이라 할수 있으며 이러한 사악한 사회적성격이 2007년 《한국》사회에 팽배해있었던것이다.
다시말해서 2007년 《대선》때에 이런 집단최면에 걸려있었으며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단행했던것이다. 독재를 해도 좋으니 경제만 살려라 하는것이 특히 자영업자들사이에 확산돼있었고 이 집단최면적사회적성격은 지금도 유효하여 《리명박다음은 박근혜이다.》로 이어지고있다. 진보진영이 이런 대중집단을 최면에서 풀어내는 작업, 이것이 운동의 최대과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말해 군말이 될 그것은 로무현 전 《대통령》의 부엉이바위에서의 투신은 이런 집단최면상태를 일시에 씻어내기에 충분했다는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2007년 집단최면에서 풀려나 자기를 최면에 걸게 한 주인공들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기 시작한다. 《속았다.》라는 말 한마디로. 그래서 그의 죽음의 나비효과는 일단 이 나라를 건강하게 할것이라 진단하게 된다. 

선량한 루터의 사회적성격

사회적성격이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산하여 력사발전에 크게 공헌한 례도 있다. 에릭 에릭슨의 《청년 루터》는 이런 점에서 필독의 양서이다.루터 역시 어린 성장기에 엄격한 아버지밑에서 성장하였고 루터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에 대한 저항심과 반항적인 성격으로 일관된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성격이 그 당시 새로 등장하던 계급인 중소상인들의 성격과 완전히 일치했다는것이다. 다시말해서 상인들은 로마카톨릭의 권위에 압살당해 사회적인 모든 리익과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당시 교회의 권위에 맹종하면서 리권을 누리던 계급은 상인들이 아니고 농민들이였다.
이러한 신흥상인들의 성격은 루터의 성격과 합의점을 찾게 되여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였다. 카톨릭의 립장에서 볼 때에 종교개혁을 보는 시각이 다르겠지만 세계력사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차지하는 신선한 충격은 무시할수 없다. 루터의 《아버지》라는 상징은 바로 카톨릭교회였으며 이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루터의 성격과 상인들의 성격은 일치되였다. 루터의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저항이 중소상인들의 카톨릭교회에 대한 저항과 일대 일로 대응하여 종교개혁이 가능하게 되였다는것이다. 그래서 이들 상인들은 루터를 특별보호하고 은신처에 숨겨 생계비를 도와주고 심지어는 성경을 도이췰란드어로 번역하는데 모든 비용을 부담하였다. 당시 이들 상인계급이 없었더라면 종교개혁은 공념불이 되고말았을것이다.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이후 루터가 농민들을 그렇게 박해하였고 그 리유로 도이췰란드에서 농민전쟁이 발발한것으로 보아서도 사회적성격이 력사변화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를 짐작할수 있다.
구한말 조선의 최제우의 사회적성격은 당시 농민들의 그것과 일치하였다. 어린시절 조실부모하고 살던 집마저 갑자기 화재로 소실된다. 나라안은 삼정이 문란하여 민중들은 도탄에 빠져있고 국운은 말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때에 수운의 개인적처지는 당시 민중들의 그것과 합일되여 동학농민혁명을 가능케 했던것이다. 이와 같이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리고 수운의 동학농민혁명은 모두 한 개인의 사회적성격이 그 사회의 어느 계층과 일치하여 사회변혁을 건강하게 유도한 례들이라 할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성격을 히틀러의 그것과 대조하여 《선량한 사회적성격(virtuous social character)》이라 할수 있다. 력사와 사회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회적성격이라고 할수 있다.
인간 로무현이 자신의 몸을 던지는 투신을 통해 이룩해놓은 사회적성격은 누가 지울수 있는 성격의것이 아니며 《한국》현대사의 한 장면은 새로 형성된 사회적성격과 함께 만들어져나갈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후-사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있다.

스스로 기발이 된, 바보 로무현

지금 보수우익들은 한편으로는 가장 두려워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부러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렬등감을 가지고 로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을 바라보고있다. 이들은 봐라, 좌파《대통령》이란것이 이렇게 비도덕적이였으니 좌파나 우파 갈아보았자 똑같다. 그러니 아예 좌파《대통령》 뽑을 생각하지 말고 《정권》교체같은것은 생각도 하지 말라는 대국민경고장을 보내기 위해 소위 로무현가족비리를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들은 자기들자체의 도덕성을 내세울 근거도 리론도 없이 국민들이 정치허무주의에 빠져들기만을 정치생명줄로 삼고있다.
그들은 1997년과 2002년 두차례나 좌파《대통령》이 선출되는것을 보고 아예 《정권》교체란 희망자체를 절단시켜버리려 했었다. 그러나 이번 로무현《대통령》앞에 모여드는 추모행렬을 보고 자기들에게는 왜 저런 인물이 하나 없나 하는 렬등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두환, 로태우, 김영삼장례식에도 저렇게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룰가 상상적비교도 해본다. 이 보수우익들은 민중민초들과 사회적성격이 같은 지도자를 갖기란 앞으로도 절대 불가능하다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다. 이렇게 서울광장은 실로 세기와 더불어 영광스런 사회적성격의 현장이였다. 세계 어느 혁명보다 못지 않은 인파가 운집하였다.
만약에 로무현《대통령》이 살아서 기발을 들고 리명박《정부》를 향해 정면승부를 거는 싸움을 한판 벌렸다면 과연 어떤 효과를 내였을가? 어느 정도의 효과를 낼수 있었을것인가? 나비효과는 유기체적구조를 전제하지 않으면 리해 안되는 측면이 있다. 과연 모든 베이징하늘의 나비날개짓이 대서양을 지나는 허리케인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이라도 할수 있단 말인가?
이 증명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있는 콤퓨터를 여는 순간 알수 있게 된다. 만약에 전산망에 들어가 인터네트를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자편지를 보낼 때에 상대방주소의 점 하나, 철자법 단 한자만 틀려도 전혀 련결이 안된다. 바로 이것이 나비효과이다. 전산망속에서는 점 하나가 온 세계이고 우주이다. 전산망이 그만큼 하드나 소프트가 모두 유기체적이기때문이다. 이 말은 전산망같이 빈틈없는 유기체적이 아닌 곳에서는 나비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것이다. 그래서 모든 나비날개짓이 효과를 내는것은 아니다.
답은 주어졌다. 부엉이바위우에서의 《대통령》의 투신이 나비효과를 내자면 전산망같은 유기체적구조속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는것이다. 로《대통령》의 죽음이 지금까지는 검찰총장 하나 자진사퇴케 하는 효과를 내고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이런 유기체적현상, 즉 나비효과가 일어나는것일가?
다시 우의 질문으로 돌아가 만약에 로무현 전 《대통령》이 서울광장에 나타나 혁명아로 자처하면서 기발을 흔들고 우리를 향해 자기를 따르라고 했다고 해보자. 과연 수백만의 군중을 그가 동원해낼수 있었을가? 생각건대 불가능했을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성격을 형성하기 힘들었을것이 분명하다. 그렇다. 그가 이렇게 많은 군중을 동원할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기발을 흔든것이 아니라 《자기스스로가 기발》이 되였기때문이다. 이를 두고 《자기 귀속적(selfbelonging)》이라고 한다. 완전한 유기체적세계는 이렇게 기발흔드는자가 기발자체가 되여야 그것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혁명자체만을 사랑한 혁명아는 종종 자기자신이 기발을 흔드는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기발이 되여버린다. 6일 세상을 떠난 강희남목사의 자결도 이런 맥락에서 리해되여야 한다. 자기 조직하는 우주나 유기체적생명체에 필수적인 조건은 바로 자기 귀속이다. 그런데 우리 시위현장에는 기발이 너무 많고 기발을 흔드는자만 있을뿐이다. 그래서 안 변한다. 자기 귀속이 없는 곳에 나비효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자기 귀속적일 때만 《사건(event)》이 발생한다고 했다. 사건이란 부엉이바위에서 자기자신의 몸을 던짐으로써 자기자신을 사건속에 스스로 귀속시키는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개인에게 엄청난 희생을 의미한다. 혁명적영웅이 기발을 흔들다가 자기자신이 스스로 기발이 되여버리는것을 두고 《사건》이 발생한다. 쉽게 말해 고양이목에 방울을 달기 위해 쥐가 고양이의 밥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것과 같다고 할수 있다. 혁명의 영웅들은 이렇게 자기자신이 기발자체가 됨으로써 혁명을 성공시킨다. 성공한 혁명은 이런 자기 귀속으로만 가능하며 이를 두고 사건화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4. 19 5. 18 모두 사건화되였다. 로무현《대통령》은 스스로 사건의 객체이면서 주체가 되였다. 이것이 사회적성격이 형성되는 배경이다.
여기서 사악한 사회적배경과 선량한 사회적배경의 차이가 분명해졌다. 전자의 경우 히틀러에게서 보는바와 같이 자기 귀속없는 군중우에 군림하는 사회적성격은 력사의 큰 오유를 남기게 된다. 리명박《정부》가 집단최면을 통한 위장된 사악한 사회적성격은 바로 약자속에 자기 귀속을 못하였기때문에 실패로 끝날것이 명약관화하다. 《비즈니스 프랜들리》, 이 한 말로 리명박의 모든것은 종말을 고하였다. 국민우에 군림하는 경찰통치는 이의 자연스런 연장이다.
이제 남은것은 산자의 몫이다. 기발이 된 로무현의 뒤를 얼마나 따를것이냐, 이것이 남겨진 우리의 화두이다. 그리고 그가 《원망하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고 한것은 자기자신이 기발자체가 되였기때문에 더이상 너희들은 기발이 되지 말라는 말이다. 기발인 자기 자신을 마음껏 흔들어 좋은 세상 만들라는 신호이다.
혁명의 기발은 흔들어도 자신이 기발이 되지는 않는것이 현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로무현은 락선을 각오하고라도 지역주의타파를 위해 부산에서 3번이나 출마를 했다. 이를 두고 《바보》라고 한다. 자기 귀속을 하는것을 두고 《바보》라고 한다. 아감벤이 말하는 례외자가 되여야 하는데, 즉 남더러 하라고 하고는 자기는 빠지는것이 현명한 태도인데 로무현은 정말 바보였다. 보수우익이 하나 하지 못하는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귀속이다. 절대로 자기희생을 치르려 하지 않는것이 우익의 특징이기때문이다. 그래서 로무현과 강희남의 선택은 좌파만이 할수 있는 선택이다. 자살과 자결과 자진도 구별 못하는 우파종교인들은 이들의 죽음을 훼손하는 네거티브전략밖에는 무기가 없다.

북부조선의 등장과 사회적성격

지금 남《한》의 보수우익들은 로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을 통해 좌파를 리해할수 없듯이 북측인민들이 그렇게 김일성주석의 서거에 애도하는 분위기를 리해할수 없다. 역시 분노와 두려움과 시기의 눈으로 바라보고있다. 왜 자기들에게는 이런 지도자가 없는가 하고 탄식도 해본다. 역시 마찬가지 론리이다. 사회적성격은 나비효과의 일환이며 결국 자기 귀속이라는 기발을 흔드는 주체가 아니라 기발자체가 되여버리는 리유이외에 아무 다른 리유가 없다고 했다. 하나가 전체가 되고 전체가 하나가 되는 유기체적인 집단생명체란 리유때문이다. 집단생명체란 바로 사회적성격이 있은 다음에 따르는 현상이다.
이렇게 사회적성격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북의 현대사도 바라보지 않을수 없다.
김일성주석은 평양 만경대에서 태여나 어린 10, 20대에 이미 부모를 다 잃고 삼촌과 동생들이 모두 일제에 의하여 희생당한다. 외가도 모두 같은 경우를 당하였다.
김주석의 사회적성격은 당시 나라잃은 인민대중들의 그것과 같았으며 이러한 사회적성격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라는 량날을 동시에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성격이 지금까지 북조선사회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이다.
떠밀릴대로 떠밀린 당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은 10대의 김주석의 사회적성격과 하나였다. 이룩한 업적은 실로 혁명적이였다. 토지개혁과 반민족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완벽한 청산은 이러한 사회적성격없이는 불가능했었다. 단군이래 고착된 계급을 한순간에 뒤집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을것이다. 병안에 고인 물은 자주 흔들어주어야 썩지 않듯이 고착화된 계급 역시 력동적인 힘을 주기 위해서는 뒤집기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어느 한 개인의 사회적성격이 당시 억압받던 계급과 합일점을 찾아야 그것이 가능해진다.
김형직선생은 《나라를 독립시키지 못할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내 몸이 찢기여 가루가 될지언정 일본놈들과 싸워 이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합니다.》라 했다. 대를 잇는다는 말이란 자기자신은 물론 자기 자손들까지 자기 귀속을 하겠다는 말이다.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기발이 되는것을 의미한다.
북에서의 사회적성격은 이렇게 대를 이어 전승된다고 본다. 그래서 단순히 권력승계나 왕통을 이어가는 세습과는 다르다. 《대를 잇는다》는 말은 일본이라는 외세와 대를 이어 싸운다는것을 의미하며 아직도 이 땅에서 외세가 물러가지 않는 한 대를 이어서라도 싸워 이겨야 한다는 말은 유효하다는것이다. 김형직선생은 일본형사들의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3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바디우는 프랑스혁명이 성공할수 있었던것은 그것의 《계승》에 있었다고 본다. 이를 《후-사건(afterevent)》이라고 했다. 력사속에는 수많은 혁명이 있었지만 후-사건이 만들어지지 않았기때문에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고 짧은 시간안에 끝나고말았던 례도 있다. 예수도 자기 귀속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만들었으며 바울이란 인물이 《후-사건》을 만들어내였기때문에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가능하게 되였다. 바디우의 《바울》이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고 카톨릭교회의 교황제도같은것도 모두 혁명의 후-사건을 만들기 위한것이다. 《대를 잇는다》는 말의 의미란 바로 이런 《후-사건》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제 남북은 모두 이런 《후-사건》을 만들어내는 중차대한 기로에 서있다. 선거에 의해서건 아니면 대를 이어서건 문제는 《후-사건》이다.
그러면 어떻게 《로무현의 사망》에 대한 《후-사건》을 만들어 나갈것인가? 여기서 한가지 당부는 부디 뜻을 멀리 잡아보라는것이다. 항상 락관적으로 생각하고 불의는 반드시 망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시선을 멀리 두고 발밑을 보라는 당부이다.






핵미싸일은 대동강문화론의 자존심발로이다

시작하는 글

이 글은 북의 선군정치 그리고 핵미싸일이 갖는 문명사적리유와 그 리유의 타당성을 고찰한 글이다. 미국을 비롯한 추종세력들은 《벼랑끝전술》 혹은 《체제안정》 운운하면서 핵미싸일문제를 거론하고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북이 선군정치를 내세우는 리유를 아래 다이어몬드박사의 《총, , 쇠》에서 그 설득력을 얻게 될것이며 결국 북핵은 지구촌의 무기의 비대칭성을 허물고 상호간에 대등한 대칭구도를 만들기 위한, 다시말해서 지구촌의 영구평화를 이룩하고저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이에는 미국의 문명사관에 맞설수 있는 나름대로의 사관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단군릉건립에 이어지는바 《대동강문화론》이라고 할수 있다. 4대문명권이외에 그것과 같거나 더 오래된 문명권이 대동강류역에 있었다는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더이상 상전을 모시고살 아무런 리유도 없고 종살이는 우리 당대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자랑스런 주인의식을 심어주어 당당하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것이 핵미싸일갖는 의미라는것이다. 주먹이 약하면 그 주먹으로 눈물을 닦을 날이 올것이라는것을 각오하라는것이다.

평화는 총구에서 나올뿐이다

2009년으로 넘어와 벌써 반을 보냈다. 금년 지구촌의 3대화두는 《핵, 돼지독감, 금융》이다. 제라드 다이어몬드는 인류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요소가 《총, , 쇠》라고 했다. 이 세가지 단어는 그의 책제목이기도 하다. 즉 그는 《총, , (Guns, Germs, and Steel)(1997)(김진준 역, 1998)1997년도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나는 이 세가지 단어를 《핵, 돼지플루, 금융》으로 바꾸어놓으면 그대로 2009년 금년의 지구촌의 담론을 도출해낼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왜 이렇게 불평등하고 비대칭적인가? 다이어몬드박사는 현대세계의 불평등의 기원을 1500 C. E. 년을 기점으로 지금의 유라시아인들과 아시아인들이 남북아메리카인들, 아프리카인들 그리고 오스트랄리아원주민들을 복속시켜 지배하는 소위 비대칭적으로 지배해왔다고 하면서 왜 그 반대는 아니였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그 리유로서 무기, 즉 총을 꼽는다. A. D. 1500년경부터 철제무기를 가진 제국들이 아직 돌과 나무로 만든 무기를 가진 부족들을 정복하거나 몰살시킬수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
11 000년전까지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수렵채집을 하였지만 B. C. 11000A.D. 1500년사이에 대륙마다 그 발전속도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게 되였으며 드디여 1500년은 무기의 차이에 엄청난 불균형을 낳게 되였다는것이다. 다시말해서 이때부터 유럽인들과 나머지국가들사이에 월등한 무기의 차이가 나도록 만들어버렸다는것이다.
1592년 일본이 유럽에서 수입한 조총을 들고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에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례를 생각하면 다이어몬드박사의 주장에 동의할수 있을것이다. 미국은 지구촌무기의 불균형을 만들기 위해 핵확산금지조약(NPT)이란 그럴사한 자기중심적조약을 만들어놓고 제도적으로, 법적으로 무기의 불균형 내지 비대칭적구조를 즐기고있으며 미국의 이러한 엉터리론리에 반기를 들수 있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북뿐이다. 《평화는 총구에서만 나올뿐이다.

병균은 이제 만들어지고있다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대륙에 건너갔을 때에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의 병원균에는 견디여낼수 있었지만 반대로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병원균에는 약했다. 그래서 인디안원주민들이 멸종해가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총다음으로 병원균이라는것이다. 2009년 돼지독감이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아시아인들에게 급속히 전파되는 리유도 병원균이 지구촌의 불균형을 만드는 리유가운데 하나인것은 두말할것 없다. 병원균에 따라 강한 인종이 있고 약한 인종이 있다. 병원균마저 지구촌을 비대칭적이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것이다.
이제 미국은 네바다에서 핵실험을 한 후에 원주민들을 시켜 말을 타고 핵실험지역을 달리게 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핵오염이 인체에 미치는 생체학적실험을 하기 위해서이다. 마샬 비키니군도에서는 이웃섬에서 핵실험을 하고는 옆의 섬에 사는 원주민들을 실험용으로 사용하였다. 미국은 지금 이들 원주민들로부터 900건이상의 피해보상소송에 걸려있다. 1945년 일본투하핵폭탄도 모두 인체실험용이였다.
다 망해가는 일본에 항복문서를 받기 전에 한번 실험해본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앞으로 세균은 퍼져나가는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보급된다는것을 의미한다. 한 인종을 멸종시키기 위해서는 흔적없이 사용할수 있는 무기가 바로 균이다. 그래서 균도 총의 일종이다. 《아이슬랜드》라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미국의 음모가 얼마나 소름끼치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마우스 하나로 세계를 주름잡는 이 재미

총과 균으로 세계를 제패한 미국은 마지막무기인 월가의 금융으로도 세계를 미국의 지배하에 넣어두었다. 그것이 바로 딸라를 기축통화로 만들어 세계금융을 장악하고있는것이다. 지금 미국의 흔들림, 즉 비대칭구조의 흔들림은 금융에서부터 시작되였다. 이제 만약에 총, 다시말해서 무기에서마저 밀리면 자기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3가지가운데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총은 물론 미싸일과 핵이다. 그 이전의 모든것은 재래식무기라 한다. 한때 기마족인 몽골인이 세계를 정복할 때에도 말타는 안장기술 하나가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말을 타고도 발을 거는 기술이 없었지만 몽골인들은 그것을 알고있었다. 이 기술 하나로 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스한)은 세계최대의 영웅이 될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북핵문제를 세계문명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그것을 1500년이후 구축된 지구촌의 축을 흔드는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존립을 그 기반에서부터 흔드는것이라 할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북핵 그리고 미싸일문제는 단순한 동북아평화라는 차원을 넘어선 문명사의 대전환을 의미하는것이다. 북의 선군정치는 총, , 쇠가운데 처음것의 중요성을 간파한것이라 할수 있다. 단순한 호전성에서 나온것이 아님을 먼저 직시해야 할것이다.
북의 김인옥교수는 그의 저서 《김정일장군 선군정치리론》에서 사대주의가 극심했던 리왕조 말기에는 남의 나라 군대만 믿고 자체무기를 준비해놓지 않아서 망국의 길을 갈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선군정치의 배경을 리왕조의 전철을 다시는 밟지 말아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있다.
《당시 군제도인 령장제도는 령을 단위로 한개 령에 1 51 6천의 군사가 소속되였는데 전국에 5개의 령이 있었다. 5개 령에 속한 군대가 약 10만정도였다. 10만도 직업군인이 아니고 농사를 짓다가 순서가 되면 지적된 장소에 가서 일정한 기간동안 복무하는 군인들이였다. 상시적으로 복무하는 군인들은 고작 3천명정도였다. 정미7조약이 날조되고 1907 8 1일 일본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에게 군통수권을 모두 내줄 때에 병력은 고작 9천명이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것은 병력수가 아니였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것은 땅크나 군함같은것은 생각조차 할수 없었고 고작 가지고있는 무기란 창과 칼,활이 전부였고 화력무기는 화승대가 고작이였다. 1875 <운양>호를 끌고 일본이 영종도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에 조선군은 사거리가 700m밖에 안되는 구식소구경포 몇문뿐이였다. 이를 안 일본은 700m 밖에 군함을 세워놓고 함포사격을 한 다음 쳐들어와 마구 살상을 일삼아도 속수무책이였다. 1905년 우리 나라는 해군 한명, 함선 한척도 없었다.
선군사상의 제1성은 바로 사대주의때문에 나라가 망했고 사대주의때문에 남에게 자기 운명을 맡겨놓고있다가 고스란히 당하고말았다는데서 비롯된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상전을 모시고살아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상전을 안 모시고살려면 총을 앞세워 지구상에 당할자 없는 무적함대를 편승해나가야 한다는것이 바로 선군사상의 취지라는것이다. 그러면 사대주의가 결국 망국의 제1원인이라면 이 사대주의를 어떻게 청산할것이냐가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찬란한 문화와 뿌리를 발견하고 발굴하는것이다.

대동강문화론과 선군사상

《미싸일개발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권국가의 자주적권리이다.(최한욱, 전영호 5)라고 한다. 그리고 북의 미싸일개발은 인류문명사를 변화시켜온 3대요소를 간파한것이며 이렇게 간파할수 있는 혜안은 바로 북의 력사관 내지 문명사관에 근거를 두고있다. 북은 1998년 《대동강문화론》을 발표했으며 1994년에는 단군릉을 발굴, 건립하였다. 그것은 인류문명사에서 우리 민족이 처해있는 위상과 사명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 고대민족사서, 즉 우리 고대사를 인류문명의 려명기와 그때를 같이하는것으로 기술해놓은 《규원사화》나 《한단고기》 같은 고사서들의 력사적가치를 인정하고 이에 관한 론문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남《한》학자들가운데 권오영(한신대 국사학과)은 이를 두고 《연구방법론의 파탄이다. 그동안 위서로 간주되여온 <규원사화><단기>고사를 사료로서 인용할뿐만아니라 고조선고유문자라는 신지글자(창힐글자)의 존재를 주장하는데 이르러서는 력사연구방법론에서 최소한의 과학성과 실증성마저 포기한 남<>내 재야국수주의사학자들과의 차별성을 확인하기 곤난할 정도이다.(《북한》력사연구 50, 98페지)라고 혹평을 한다.
이에 대하여 북의 학자들은 《단군이 실재한 인물로서 밝혀지고 단군조선이래 조선민족이 단일한 민족으로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꿋꿋이 살아온 사실이 확증됨으로써 단군의 후예로서의한피줄을 이은 동포들이 조국통일의 성업을 이룩하는 길에서 더욱 굳게 뭉쳐 싸울수 있게 되였다.》고 한다. 북의 주장은 단군이 민족의 피줄을 이어주고 통일을 이룩하는데 필요충분조건임을 강조하고있다.
여기 남북학자들의 력사관 내지 연구방법론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크다고 할수밖에 없다. 우선 우의 문제에 있어서 북의 학자들은 《규원사화》와 《한단고기》 등을 력사기록속에 신비로운 요소들이 있지만 력사성을 부정할수는 없다는 견해인 반면 우의 권오영교수의 글에서 보는바와 같이 연구방법론의 파탄이라는것과 최소한의 과학성과 실증성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에 대하여 북의 허종호교수는 가뜩이나 연구사서들이 부족한데 있는것마저 이렇게 부정하면 우리 고대사를 어떻게 복원할것이냐고 개인적으로 필자에게 말하였다.
권오영교수의 주장은 개인의 주장인 동시에 지금 남《한》력사학계의 통념적인 주장을 반영하고있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서울대학 력사학과로부터 만들어진 교조적인 주장이다. 그럼 이들의 주장에 무엇이 잘못되였는가? 권오영교수의 주장은 매우 감정적이라는 점이다. 재야에서 주장했기때문에 소위 위서라는 사서는 연구가치조차 없다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그리스도교에는 성경이외에 수많은 위서들이 있다. 그러나 현재 성서신학의 주류는 이들 위서들을 중심으로 예수의 생애를 복원하는 추세이다.
연구방법론을 달리하면 이들 위서속에서 참력사가 나타나더라는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리스도교에서 중세기적으로 이들 위서에 대한 접근자체를 금지했더라면 이런 성과는 나오지 못했을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남《한》학자들은 중세기적사고방식을 하고있는것이다. 《위서》라는 말자체가 그리스도교의 경우 정통이 이단을 막기 위해 만든 용어이며 《한국》의 경우 일제가 자기들이 만든 식민사관에 대하여 만든 용어이다. 그렇다면 이런 위서속에 우리 력사의 진수가 실려있을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6 6일 자결하신 강희남목사님은 만년에 《한단고기》를 비롯한 고대사서들에 대하여 새롭게 주석한 책들을 펴내셨다. 북이 핵과 미싸일을 통해서만 문명전환 내지 비대칭성을 극복하려 한것이 아니다. 북의 학자들은 고고학과 력사연구를 통해서 같은 시도를 하고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것이다. 이제 통일운동이 기존학계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것도 중요한 한 과제로 삼을 때가 왔다. 그리고 《실증성》과 《과학성》이라는것도 얼마나 전근대적인 용어인가? 현대과학에서마저도 객관적실증성은 부정되고있고 더우기 과학적이란 말도 모두 《불확정성》, 《비결정성》이란 말로 변하고있다는 사실을 이들 남《한》력사학자들은 지금 모르고있는것이다. 주체의 개입없는 실증성, 과학성이란 잠꼬대에 불과하다.
북의 학자들은 1997년 드디여 대동강류역에 인류4대문명발상지보다 더 오래된 문명권이 있었다는 《대동강문화론》을 제시하였다. 1998년 고고학 50년력사를 전망하는 글에서 대동강문화는 세계5대 문명중 하나로 정립될뿐만아니라 지난 50년간 북의 고고학이 정립한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하였다. 이를 뒤받침하여 《조선고고학연구》(19991)가 발간되였다. 리순진 등 11명의 교수들이 동원되여 특집호로 발간된 글들의 내용은 한결같이 대동강류역은 고조선의 중심지일뿐만아니라 민족의 발상지이고 세계최초의 고대문명의 발상지로 립증되였다고 주장하고있다.
이 방면의 전공자들이 아닌분들이 이러한 북의 주장을 선뜻 납득하기란 어려울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우리 《한》반도와 동북아일대가 보통 중요한 곳이 아니라는 단서를 쉽게 리해할수 있는 한가지만 지적하고싶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한》반도에만 무려 3만개가 있으며 만주일대에만 있고 만리장성만 넘어서면 고인돌은 점점 사라져버린다. 고창고인돌을 비롯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고인돌이 평양 대동강류역에 밀집돼있는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심지어는 호태왕릉우에도 고인돌이 확인돼있지 않는가?
그러면 고인돌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사실 지금 세계문명의 시초라는것은 청동기의 등장부터이다. 전세계신화의 천지창조설화는 모두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오는 그 과정을 려명기로 그려놓은것이다. 청동기는 수많은 문화코드를 가지고있는데 남신-가부장제-도시국가 등 지금의 거의 모든 문화코드가 이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것이다. 남신들이 신석기시대의 녀신들을 몰살시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면서 도시국가를 건설한 시기가 바로 B.C. 2000년경의 청동기시대의 등장이다.
단군 고조선이 B. C. 3천년이라는것은 결코 이런 문명코드와 별개의것이 아니고 별도로 생각할수 없다. 환웅 그리고 단군이란 남신의 등장과 사용한 무기와 도구가 청동거울이나 칼이라는 점, 이 모든것이 세계문명코드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 모든것들을 총칭하는것이 바로 고인돌이다. 고인돌이란 거석을 운반하는데는 엄청난 인원이 동원되였어야 하며 그것은 이미 주종의 계급사회가 형성되였다는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죽어 영생한다는 래세를 생각했다는것은 의식이 지금과 같은 수준에까지 올라와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무덤과 무덤속에서 나오는 청동비파형단검 등은 당시의 철학과 종교관이 지금과 같았다는것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래서 고인돌은 주요문명발상지가 어딘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물론 고인돌은 유럽에서까지 확인되는 전세계 광역지역을 포함하고있다. 그런데 문제는 무려 3만개이상 되도록 고인돌이 최밀집돼있다는것은 례사로운 일이 아니다. 북의 력사학자들이 대동강문명론을 말할 때 이 고인돌을 빼놓을수 없는것은 물론이다.
대동강문화론은 결코 우상화도 아니고 아닌 밤에 홍두깨같이 갑자기 나온 주장도 아니다. 북의 김일성종합대학과 사회과학원의 력사고고학학자들은 1930년 항일유격대원들의 정신에서 출발하고 시작을 한것이다. 다시말해서 민족의 종산을 향해 진군할 때에 밀림에서 밤을 지새우며 은하를 바라보았고 종산마루우에 뜬 광명성을 바라보았으며 평양일대의 땅을 파 그속에서 또 다른 광명성을 바라본것이다. 그것이 금년 4월에 발사된 《은하/광명성》이다.
김인옥교수는 남쪽의 력사외곡을 두고 이렇게 결론한다. 《기둥이 뽑히고 서까래 무너져내린 집에 성한 그릇 없다.》고.

MB식《실용주의》 알고보니 사대주의

리명박《정부》 1년 반이 지나가는즈음 그의 국정시책의 지표였던 《실용주의》가 그 정체를 거의 드러내고있다. 즉 그가 말하고있는 《실용주의》란 사대주의의 다른 표현임이 분명해졌다. 《잃어버린 10년》을 《실용주의》로 되찾겠다던 그의 약속은 미국에 《퍼날리기외교》로 그 전모가 드러나고있다. 그가 적용한 《실용주의》는 어느 하나 제대로 된것 없이 그 모습이 드러나고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을수 있는 남북경협을 파산 내지 파탄지경으로 내몰고는 걸핏하면 미국에 전화하고 일본에 전화하고, 전화하다 안되면 안달박달 달려가고, 실로 이것이 그의 《실용주의》외교방식이라면 우리는 참담함을 금할수 없다.
백남주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원의 리명박《정부》의 대결정책이 부른 《한국경제손실》에 의하면 남북경협이 완전 차단되면 《한국》경제가 입을 손실이 무려 7 4천억원에 달하고 8 800명이 일자리를 잃을것이라고 했다. 개성공단사업이 중단되면 총손실이 1 3 600억원이라고 한다. 이것은 직접적인 손실이고 간접적인 손실 역시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외신인도추락은 말할것 없고 미국이 강요하는 군수물자를 사들이자면 국방비를 증액해야 하는데 만약에 남북화해협력을 하면 총 181. 6억원을 줄일수 있다. 중소기업이 입을 손실은 여기서 계산도 안한것이다. 여기에 남북철도를 련결했을 때에 가져올 리익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계산에 누구보다 밝을 리명박은 왜 이 엄청난 효과를 내는 남북교류에 그의 《실용주의》를 적용하지 않는것인가? 삼척동자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리유는 있었다. 그의 《실용주의》의 적용대상이 딴 곳에 있었기때문이다. 다름아닌 리명박《정부》는 자꾸자꾸 《정권》을 재창출하고 다시는 《좌파빨갱이》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으려면 보수우익지지층을 차돌같이 단단하게 묶어놓아야 하고, 그 방법은 북에 강경대응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사대주의외교를 펴는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리명박의 《실용주의》는 헛발질을 하고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이 분명해진다.
그의 《실용주의》는 서민경제를 위하자는것도, 민주주의를 지키자는것도, 남북화해를 하자는것도 아닌 철저한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것임이 그 용도가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난 1년동안 바로 이것을 확인한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실천과제는 무엇인가. 강희남목사님의 유언말씀 《리명박을 내치자.》대로 하는것이다. 우리 나라 《대통령》의 외교는 어떤 면에서 간단하면 간단하다. 그것은 일본이 하자는 그 반대로만 하면 되고 민초들이 퍼뜨린 《미국 믿지 말고 쏘련에 속지 말라, 일본이 일어난다.》이다. 이 한구절만 머리속에 명심하고 실천에 옮기면 그것이 우리 외교의 전부이다. 그러나 리명박《정부》는 사사건건 그 반대로만 하고있다. 도대체 그 지독한 사대주의가 어디서 유래한것일가? 《삼국사기》에는 《류명환-리명박 조》와 일란성쌍둥이같은 조가 있었으니 바로 《김유신-김춘추 조》다. 

류명환-리명박 조는 김유신-김춘추 조와 닮았다

류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참가를 해낸것이 무슨 큰 공로나 세운것처럼 자랑하고있다. 그리고 한수 더 떠 유엔안보리결의안을 성사시킨것도 자기 실력때문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리명박주변에서는 이런 일들이 모두 수훈과 전공감으로 여겨지는것 같다.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류명환-리명박을 한심하게 보고있는데도 말이다. 지금 리명박과 류명환이 한조가 되여 노는 꼴은 마치 김부식이 써놓은 《삼국사기》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한조가 되여 노는 꼴과 너무 흡사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돼있는 김유신과 김춘추의 사대주의 행각을 류명환-리명박의 그것과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한번 읽어보자. 625년 당태종이 즉위할무렵 신라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모든 실권을 한손에 거머쥐고있을 때이다.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으로 나중에 태종무렬왕이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의하면 김춘추는 나이 60이 되였는데도 중국황제앞에 무릎을 꿇고 백제와 고구려를 칠것을 요구했는데 그 모양이 측은하기 그지없다고 기록하고있다. 신라는 임금을 당나라 황실친척으로 바꾸라는 요구까지 수용하면서 당의 군대파병을 간청한다. 이 사대주의의 DNA1 5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수시로 출몰하고있는것이다.
그러자 당은 두가지 조건을 내건다. 고구려를 칠 경우는 료동지방을 당에 내주고 백제를 칠 경우에는 신라의 임금을 당나라황제의  친척으로 바꾸고 동시에 당나라군대의 신라파견이 이루어져야 한다는것이였다. 648년 김춘추는 직접 당태종을 찾아가 고구려뿐만아니라 백제까지 치도록 애걸한다. 이에 둘사이에 비밀협정이 이루어져 평양이남 백제땅은 신라가, 그 나머지 모든 땅은 당이 차지한다는 밀약이 이루어졌다.
나라를 분단해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오늘날 보수우익들의 유전자가 이렇게 1 500여년전에 만들어졌던것이다. 《한》반도분할통치의 력사는 사실상 이때부터 거론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옷을 바꿔입고 스스로 사대를 청해

참으로 되돌아볼 때에 이 모든 하나하나의 사건이 모두 오늘 우리 후손들이 짊어지고있는 수난의 씨앗이 되고말았다. 당태종이 죽고 그의 아들 고종이 황제가 되자 사대주의외교는 더 극성을 부린다. 법흥왕이후 115년간 사용돼오던 년호를 당의것으로 바꾸고 옷도 당의것을 착복하기 시작한다. 복종,복속, 항복 등 모두가 옷에 관계되는 말이고보면 옷을 바꾼다는것은 굴종을 의미하는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춘추는 당나라를 찬양하는 사대주의의 극치인 오행시 《태평송》을 지어바친다. 태평송의 내용은 당나라황제의 위업을 훼손하는 고구려를 《오랑캐》라 지칭하며 단칼에 쳐물리쳐달라는 내용이다. 651년 김춘추는 모든 제도를 당나라의것으로 바꾸고 지명도 순 우리 말에서 한자로 바꾸는 동시에 유교를 적극 도입하여 국학이란 교육기관을 세운다. 성균관의 전신과 같은것이다. 유생들이여, 이런 력사를 알고있는가?
드디여 당고종은 소정방을 최고지휘관으로 하여 10만대군을 이끌고 660년 백제를 향한 대공격을 단행한다. 김유신은 신바람났으며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내가 지금 죽기를 서슴지 않고 험난한 판에 달려온것은 큰 나라()의 힘을 빌려 두 나라를 없애버리는데 있다.(《삼국사기》 42권 김유신렬전)라고 의기를 토하고있다.
진평왕은 원광법사에게 출사표를 지으라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없애버리는것은 승려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왕의 나라에 살면서 어찌 명을 어길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지식인의 고뇌를 토로한다. 원효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주장하며 신라만이 아니라 세나라가 같이 살아 평화공존을 해야 한다고 력설한다. 저 유명한 원효의 《불난 집의 비유》는 집에 불이 났는데도 방안에서 어린아이 셋이 철모르게 놀고있다면 수레를 사준다고 소리쳐 다 밖으로 나와 위기를 피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원효의 이 말을 듣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만을 방에 남겨두고 뛰쳐나왔고 그래서 나머지 두 친구는 불에 타죽게 하고말았다는 비유이다. 그렇다. 류명환-리명박은 들어라. 파산당하는 배안에서 축배의 잔을 드는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민족앞에 대오각성하라.
이러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두고 현대《한국》의 학자들은 천추에 남을 명외교관 그리고 충신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에 찬양을 하고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660년 소정방의 10만대군은 백마강을 타고 올라와 무방비상태에 있던 백제를 단숨에 함락시켰다. 고구려도 668 9월 이 땅에서 사라지고말았다. 그후 당은 백제에 웅진도독부, 고구려에 안동도독부 그리고 심지어는 신라에까지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려 한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사대주의의 결과가 빚어낸 뼈저린 교훈을 그제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막상 당나라군대를 몰아내는데 선봉장이 된 사람들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였다. 대당 10년항전끝에 고작 찾은 땅이란 대동강이남의것이였다. 그조차도 신라의 령토령유권이 인정된것은 60년후인 736년이였다.

사대주의는 민족의 존립을 위협

이 얼마나 생각하고싶지 않고 한줄의 글로 남기고싶지도 않은 우리 력사의 처참한 시기인가. 어찌 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 운운하면서 칭송할수 있단 말인가? 그때 우리 피속에 만들어진 사대주의 DNA는 지금 온몸에 퍼져있다. 전직《국방장관》들이 지금 늘어놓고있는 장광설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가 물려준 《한국》사대주의세력의 잔재가 1 50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어도 조금도 수치와 모멸을 느끼지도 않으며 자랑스럽다는듯이 기염을 토하고있다.
신라사대주의는 두 이웃친구를 불사른데 그치지 않았다. 고구려유민들이 세운 발해는 신라에게 목구멍의 가시와 같았다. 계모에게 전처의 자식은 자기의 정통성을 비웃는 존재일것이다. 해동성국 발해는 신라로부터 721년 그리고 733년 공격을 당하였으나 의젓하게 물리쳤다.
결국 사대주의는 우리 《한》민족을 종자까지 말리고마는 독소이다. 지금 《한》반도정세가 과연 1 500년전과 무엇이 다른가? 사대주의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자주권은 한 나라의 생명줄과 같은데 이를 되찾는 일을 반대하는것은 사대주의가운데 극치이다. 물론 《전작권》을 갑자기 되돌려주겠다는 미국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지혜롭게 간파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전작권》 제발 다시 가져가달라고 애걸복걸

작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환수론의 중단을 요청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한나라당》 2차방미단 단장 리상득부의장(리명박당선자의 친형)2007 9 20일 워싱톤특파원들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우리가 옛날에 중국에 죽지 않으려고 조공도 바치고 책봉도 받아가면서 살아남지 않았느냐.》면서 《(미측 인사들이 만나기)귀찮다고 해도 국익에 필요하면 귀찮게 할것》이라 고 말했다. 난형난제란 말이 이런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는 마치 김춘추와 김유신이 당나라에 구걸외교를 한것과 다를바 없어보인다.
《한나라당》 방미단의 한 의원은 《미국과 동맹관계인 나라가운데 야당이(당시) 이처럼 미국에 찾아와 외교를 하는 경우가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일본이나 오스트랄리아에는 로무현<대통령>이 없기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로무현은 가고 없다. 이렇게 쓸만 한 말하는 사람들은 비극이라는 유전인자를 갖고 이 땅에 태여난다. 1949 6 26일 김구선생도 그 유전자때문에 죽었다. 김원웅《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장(당시) 2007 10 24일 《21세기판 모화(慕華)주의자들이 동맹과 예속을 분별하지 못하는 서글픈 사대주의로 나라 망신시키고있다.》고 비판했다.
김원웅위원장은 《지난날 사대주의에 찌든 지배층이 조선의 안위와 중국의 안위를 분별 못하고 자주적인식을 결여해 병자호란을 자초했다.》며 《자국국익에 충실한 외국군 장성 등에게 <전시작통권>을 되받아가달라고 애원하는건 력사의 평가를 두려워않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리상득부의장의 우의 《조공외교》발언에 대해 《그러면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연개소문도 바보짓을 했단 말이냐.》며 《살아남기 위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환영한 리완용도 지하에서 <나도 당시 같은 생각이였다.>고 할것》이라고 비꼬았다.


리명박은 《리명박문》을 자처하고있는가?

조선 민씨일가 수구세력들이 청나라에 통수권을 청하자 일본이 상관하며 간섭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여 1894년 청일전쟁이 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의해 궤멸당하고만다. 일군(日軍)은 총구를 남에서 북으로 돌려 조정으로 올라와 민비를 시해하고 결국 우리 국군통수권은 모두 일본군에 넘어간다. 그다음 결과는? 1905년 을사5조약, 1910년 한일합방, 1919년 고종사망(고종도 일본의 시해라는것이 정설임). 외세를 끌어들인 최대피해자는 결국 민씨일가와 고종자신이다. 고종과 민비는 앞다투어 외세를 끌어들였지만 그들은 결국 그 외세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류명환-리명박은 지금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자기들 기득권수호에 급급하고있다. 《정권》만 유지 내지 재창출만 하자. 이것이 구한말 민씨일가들과 무엇이 하나 다른가? 회고록은 말한다. 국망의 제일원인이 사대주의이고 사대주의는 청원외교로부터 시작한다고.
류명환-리명박 조는 들어라. 과연 미국과 일본이 통일을 시켜준 다음에 그 통일을 우리에게 선물로 안겨줄것이라 믿고 이런 언행을 하고있는가? 다시 말한다. 일본이 하자는 그 반대로만 하면 틀림없이 외교는 성공한다. 진정으로 북을 이기고싶은가? 몸속에 있는 사대주의유전인자부터 제거수술해라. 그엔 절대로 못 이긴다. 아니 이겨서는 안된다. 정권은 순간이지만 민족은 영원하기때문이다. 김유신-김춘추 조는 그래도 당나라를 몰아낼 의지라도 있었다. 나라의 주권을 통채로 가져다 내바치고있는 리명박은 《리명박문》을 자처하고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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