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4

김대호 - 한기홍 선배 뵌 지 한 2년 됐나? 심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지!! 아니 도반!! 진짜 운동권. 나는...

김대호 - 한기홍 선배 뵌 지 한 2년 됐나? 심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지!! 아니 도반!! 진짜 운동권. 나는...

한기홍 선배 뵌 지 한 2년 됐나? 심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지!! 아니 도반!! 진짜 운동권. 나는 NL/주사를 한 적이 없지만, 한 선배는 NL/주사이 핵심이었던 듯. 그래서 1997년까지 철도청을 다녔다.

나는 1983년 5월 13일 시위로 무기정학을 맞았기에, 대학 2학년 때부터 (학내활동을 접고) 야학을 하고, 노동/민중 교회를 나갔다. 그 때문에 이후 여름방학, 겨울방학은 1~2주간 공장에 반드시 갔다. 물론 위장취업. 다른 가투는 빠져도 11월13일 가투와 청계피복 합법화 가투 등은 필참이었다.

그래서 1985년 11월 13일 청량리-제기동 시위 주동이었다. 원래 이 날 감옥을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시위대가 최루탄, 지랄탄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나도 상가로 잠시 피했다. 그런데 다시 대오가 형성되지 않으니, 제발로 걸어서 경찰서로 갈 수도 없고..... 이후 사당동 가투 까지 더 하고 2월에 구속되었다.

그 땐 운동에 낭만 아니 사치가 있어서, 감옥 가기 전에 대체로 면회 와서 책 넣어줄 여자(약혼자라고 해야 면회가 허용 되었다)를 만들었다. 나는 지금 아내가 그 역할을 했지만, 선배의 부탁으로 가짜 약혼자 노릇을 한 여학생도 제법 있었다.

나는 전태일을 불우한 이웃, 사회적 약자를 위해 몸을 불사른 사람으로 기억하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자칭 진보)들은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권 강화를 주장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노동권 강화가 진보요, 개혁이요, 전태일 정신인 줄 안다.

최저임금 급상향, 비정규직 제로화, 근로시간 단축, 산재 엄벌 등 노동규제가 과도하면, 노동권이 강화되는 사람도 있지만, 노동권 자체가 없어지는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얘기다.

1985년 11월13일 가투 주동했던 선수들 지금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나처럼 바다에 쟁기질 했다는 느낌일까?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예수처럼 전태일도, 장사하는 인간들에 의해 시멘트 감옥에 갇혔다.

"예수님, 누가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라는 문둥의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오직 저희들만을 위하여, 저희들만의 신전에 나를 가두었다. 내가 너 같은 가난한 백성들에게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은 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그러나 나의 이름으로 그들은 나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들은 나의 제자임을 자랑한다. (…)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는 의로운 사람들의 고통스런 외침에 귀를 막는다. 그리고 그들은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탓에 그들의 귀에는 나의 말도, 너희들 가난한 백성의 외침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이 나를 가두었다."

<전태일 분신 50년>

오늘, 전태일 열사 50주기다.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고 산재 등에 무방비로 방치된 경우도 많다고 안다. 청년들 상당수는 아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을 늘 외치는 민주노총이 진짜 어려운 노동자들을 대변하는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이미 중산층이 된 대기업 노동자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기득권자의 조직이라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지 않을까? 만약 전태일이 살아 돌아온다면 오늘의 노동운동을 어떻게 볼까?

나는 1981년 대학 입학 후 잡지에 실렸던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읽으며 가슴 아파했다. 이후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보면서 공장에 들어가리라 결심했고, 84년부터 13년간 그런 인생을 살았다. 부평에서의 용접공을 거쳐 86년 초부터 을지로 충무로 일대의 인쇄공장에 다니다, 87년에는 노동자투쟁의 영향을 받아 ‘서울지역인쇄노동조합’을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88년 여름부터 91년 초가을까지 3년간은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출판부장으로 일했다.

처음 맡은 일이 ‘전태일문학상’이었다. 87년 여름부터 격렬하게 전개되던 노동자들의 투쟁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전국의 노동현장을 다니면서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이 지은 시와 수필 등을 투고 받았다.

돌이켜 보면, 당시 소설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던 소설가 고 박태순 선생과 인사동 입구에 있던 막걸리집에서 여러차례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노동과 문학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내 후임으로 일했던 시인 김명환 선배와는 낡은 전태일기념관 한옥 툇마루에서 여름 장마가 계속되는 한밤에 밤새도록 맥주를 마시던 기억도 난다.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도 더 돈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지 모르겠다. 아직은 청춘이었던 20대의 끝자락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신봉하던 사회주의가 망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이었는지...

나는 97년 말 철도청 기능직을 끝으로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북한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13년의 노동운동 때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20년을 보냈다. 그러나 북한민주화운동을 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이길을 선택한 것도, 자기도 어려운데 주머니돈을 털어서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에서 창동까지 2시간을 걸어 집에 갔던 전태일처럼 “약자에 대한 동정과 연대”라는 내 나름의 ‘전태일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전태일 50년을 지나면서 옛 기억의 한자락이 떠올랐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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