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4

말로만 “전태일 계승” 외치는 정치권 - 경향신문

말로만 “전태일 계승” 외치는 정치권 - 경향신문



말로만 “전태일 계승” 외치는 정치권
김형규 기자2020.11.13 18:3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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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 ‘중대재해법’ 외면, 국민의힘은 ‘주52시간제’ 유예 주장

전태일 50주기를 이틀 앞둔 지난 11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묘역의 동상에 마스크가 씌워져 있다. 연합뉴스

13일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여야는 앞다투어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하지만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전태일 3법’ 중 하나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주 52시간제 중소기업 적용 유예’를 주장하고 있다.


정치권이 입으로만 전태일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방관하거나 오히려 부추기는 표리부동한 행태를 보인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태일 동판’ 깔면 열사 정신 계승?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 모두발언에서 “오늘은 전태일 열사 50주기다.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떠한지를 부끄럽게 되돌아보게 된다”며 “노동존중사회 실현 결의를 다시 다져야 한다. 취약 노동자들의 노동권 신장과 차별 해소 등을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2일 오후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묘역을 찾아 묵념한 뒤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면서 이 대표는 “전태일기념사업회가 12월까지 서울 청계천 전태일 거리에 동판 깔기 사업을 하고 있다. 시민들이 자기 이름을 새긴 동판을 설치해 전태일 정신을 기억하자는 것”이라며 “이 운동에 우리 당도 참여하자”고 제안했다. 이 대표는 원내대표와 사무총장, 최고위원 등 지도부 4인을 직접 거명하며 사업 추진을 지시했다.


하지만 정작 민주당은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핵심 법안으로 꼽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미온적이다. 정의당이 법안 발의를 주도하고 국민의힘도 최근 동참 의사를 밝히며 나선 것과 대조적이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정의당 제공

영국·호주 등의 ‘기업살인법’을 본뜬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기업이 위험방지 의무를 소홀히 해 노동자 사망 등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경영책임자를 형사처벌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지우는 게 핵심내용이다. 산재 발생시 실제 관리·감독 책임이 큰 원청 대신 하청업체에만 책임을 묻고, 그나마도 낮은 액수의 과태료 등으로 손쉽게 빠져나가는 현실을 바꾸자는 것이다.


■“노동계 출신 의원들이 오히려 더 기업 대변”


민주당은 당초 이낙연 대표가 취임 직후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해마다 2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희생되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빨리 처리되도록 소관 상임위가 노력해달라”고 언급하는 등 의지를 보였다. 그러다 최근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을 개정하는 쪽으로 기류가 바뀌었다. 김태년 원내대표와 한정애 정책위의장 등 원내 지도부가 방향을 바꿨고, 이는 재계의 반발을 의식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전태일 5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12일 국회 앞에 ‘전태일 3법’ 입법을 촉구하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김영민 기자

민주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외에도 특수고용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노조 결성권을 부여하는 ‘노동조합법 개정안’과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 전태일 3법에 모두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민주당의 이같은 ‘후퇴’에 당내에서도 반발이 나온다. 민주당 한 의원은 기자와 통화하면서 “21대 국회 들어 당이 너무 보수화되는 것 같다. 국민의힘도 찬성하는 수준의 개혁을 왜 당론으로 추진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훈장 추서식에서 유가족에게 무궁화장 훈장증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전태일 열사의 셋째 동생 전태리, 첫째 동생 전태삼, 문 대통령, 둘째 동생 전순옥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연합뉴스

김종철 정의당 대표는 이날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산안법 개정으로는 (산재 사망) 개선이 벼로 없을 것”이라며 “민주당의 노동계 출신 의원들이 오히려 더 기업 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매해서 만든 근로기준법” VS “전태일의 지옥을 다시 원하나”


국민의힘도 이날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전태일이 줄기차게 주장한 ‘근로기준법을 준수해야 한다’, ‘노동자 인권이 있다’는 그 정신은 고양되고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승민 전 의원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고용안전망과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를 없애주는 일이 우리 정치의 사명이고, 전태일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라고 적었다.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50주기 추도식’에서 열사의 동생 전태삼씨가 전태일 동상에 얼굴을 맞대고 있다. 권도현 기자

하지만 당내 ‘경제통’으로 꼽히는 초선 윤희숙 의원은 “52시간 근로제 중소기업 전면 적용을 코로나 극복 이후로 연기하는 게 전태일 정신을 진정으로 잇는 것”이라고 밝혀 논란을 빚었다.


윤 의원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전태일의 ‘근로기준법 준수’ 외침을 지금의 ‘주 52시간 근무제’와 비교하면서 둘 다 비현실적이고 무리한 요구라고 주장했다. 윤 의원은 ‘1일 8시간 근로’를 규정한 근로기준법에 대해 “후진국에서 정책을 현실적으로 설계하지 못한 우매함” “현실과 괴리된 법” “시대의 한계” 등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그나마 있는 일자리를 없애 근로자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도록 52시간 확대 스케줄은 코로나 극복 이후로 유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서울 청계천 전태일다리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김 대표의 손에 ‘노동법편람’이 들려 있다. 정의당 제공

윤 의원의 주장에 정의당은 “전태일 열사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며 강력 비판했다.


조혜민 정의당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전태일 열사가 지옥처럼 벗어나고자 했던 그 세상을 바로 윤희숙 의원은 원하고 있다”며 “전태일 열사 50주기에 찬물을 끼얹는 무지몽매함의 극치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말”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아직도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는 장시간 노동으로 기업 경영이 이뤄져야 한다는 식의 저열한 인식이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대한민국 경제를 후진적으로 만든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김재하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전태일 3법 대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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