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1

[길을찾아서] 정경모 자서전 49-51

中・上級者向け韓国語勉強(間違い易いハングル)


[길을찾아서] ‘인내천’ 사상, 일본 언론인 앞에서 열변 / 정경모 49

1985년 2월 6일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오른쪽)와 와다 하루키(왼쪽) 교수가, 미국 망명에서 귀국을 강행하는 길에 잠시 일본 나리타공항의 호텔에 묵고 있던 김대중씨를 방문했다. 야스에 편집장은 필자의 일본 집필 활동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요시다 루이코 제공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49

월간지 <세카이>(世界)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를 처음 만난 것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인 1973년 2월쯤이었는데, 그가 <아사히>에서 나온 나의 첫 책을 읽은 뒤 내게 박덕만씨를 보내 ‘한번 만나뵙기를 원한다’고 정중한 전갈을 해온 것이외다.
융숭하게 차려진 저녁상을 두고 마주앉아 두 사람은 많은 말을 나누었는데, 대화의 중심 화두는 우연하게 갑오농민전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이 전쟁은 본래 인내천(人乃天)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수운 최제우 선생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운동이 그 시발점이 아니었소이까. 이 운동이 정치성을 띠고 일대 혁명운동으로 팔도강산 방방곡곡으로 퍼지게 되자, 조정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도 군대를 파견해 혁명운동을 궤멸시키는 동시에 조선을 아시아 전역에 대한 침략의 발판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 이는 일본 자체에도 불행한 전쟁이었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소이다.

‘수운 선생의 인내천 사상은 당시 우리나라 사회의 병폐를 혁명적으로 뒤엎는 뛰어난 사상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 점에서 인간 평등을 누구보다도 더욱 구체적으로 갈파한 것이다. 또 비단 우리나라 조선뿐만 아니라 전 인류사회에 대해서조차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은 선진적인 사상이었다.’ 약간 취기도 돌고 해서 나는 퍽 흥분한 어조로 첫 대면인 야스에에게, 말하자면 웅변을 토한 셈이었소이다. 그가 수첩을 꺼내 내가 하는 말을 열심히 기록하던 모습도 벌써 30여년이 지나간 옛일이지만 지금 기억에서 떠오르고 있소이다.

수운 선생과 <기독교의 본질>을 쓴 포이어바흐는 거의 같은 시대를 산 인물인데,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저서에서 ‘호모 호미니 데우스’(homo homini deus)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소이다. ‘사람은 사람 자신에 대해 신이다’라는 뜻의 이 라틴어는 그가 무신론을 주장하는 가운데서 나온 말이고, 수운 선생이 말한 인내천과는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니지만, 인간이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발상은 공통된 것이어서, 종교사상적인 견지로도 퍽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까 싶은데, 그 전쟁 때, 즉 청일전쟁 때 일본 사람들은 이를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외다.

하기야 동학농민군은 짚신을 신었고 기껏해야 무기는 화승총 정도가 아니었소이까. 이에 비해 일본군은 쇠가죽 군화를 신었으며 들고 온 무기는 최신식 무라타 연발총이었으니, 5만 농민군은 폭풍에 휩쓸린 싸릿가지처럼 스러졌겠고, 폭풍같이 몰려온 그들의 긍지는 얼마나 기고만장했겠소이까.

그런데 말이외다, 그 당시 일본인의 종교는 ‘근대화’였고 동학농민군의 믿음은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인내천이었으니 실상 따져 보면 어느 쪽이 문명이고 어느 쪽이 야만이었는지는 역사가 증명해준 것이나, 통탄스러운 것은 청일전쟁 때 가장 앞장서서 ‘문명 대 야만론’을 주장한 사람이 우리나라 기독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우치무라 간조 선생이었다는 사실이오이다.

내가 이 얘기를 하면서 표정이 상당히 격해 있었던 모양이겠지요. 야스에는 일본이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세례를 받은 비극의 출발점이 바로 그 갑오농민봉기에 대한 간섭으로 시작된 청일전쟁이었다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혹시 그 전쟁 당시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남긴 회고록 <건건록>을 아는가고 묻더이다. 무쓰라는 이름쯤은 기억하고 있으나 그의 회고록은 읽어본 일이 없노라고 하니까, 자기가 그 내용을 대강 내게 설명해주더이다.

‘일본이 중국을 잠식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선이라는 발판이 필요한데, 청국은 조공관계를 통해서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첫째, 때마침 일어난 ‘동학란’을 구실로 청국으로 하여금 조선에 병력을 파견토록 하고, 둘째, 이것을 빌미로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여 청국과의 전쟁을 도발하며, 셋째, 전쟁에 이긴 다음 조선을 조공관계로부터 이탈시켜 명목상 독립국가를 자처하게 한 다음, 넷째, 서서히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 전략을 치밀하게 세우고 실천한 인물이 무쓰 무네미쓰인바 일본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건건록>은 필독서라는 것이외다.

그날 저녁 야스에와의 만남은 뜻깊은 자리였고 일본에서 꼭 만나야 될 사람을 만났다는 감회를 느꼈소이다. 밤이 늦어 헤어질 무렵 그는 다시 정중하게 말을 건네더이다. “선생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좋으니 잡지 <세카이>를 이용해달라”고 말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2012/10/26 11:04] | 한계레-정경모 선생님 | トラックバック(0) | コメント(0) |

[길을찾아서] 재일 청년들에게 첫 강연…‘한민통’ 인연의 시작 / 정경모 50
골목과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왼쪽)과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옛 한민통·오른쪽)의 오사카 본부. 1973년 필자가 동포 젊은이들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며 첫 인연을 맺은 한국청년동맹(한청)도 오른쪽 건물에 들어 있다. 사진 <프레시안> 제공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0

야스에 편집장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부터 그가 필독서라고 일러준 <건건록>을 탐독하는 한편 부지런히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요청받은 에세이의 집필을 시작했소이다. 그렇게 해서 400자 원고지 54장에 이르는 장문의 원고를 넘겨주었는데, 제목은 ‘한국 제2의 해방과 일본의 민주주의’였고, 그때가 1973년 5월께였다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그런데 참으로 기묘하게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날 8월 8일, 전국적으로 발매가 시작된 <세카이> 9월호에 내가 쓴 그 글이 실려 있었으니, 이건 또 얼마나 불가사의한 기적이었겠소이까.

<세카이> 9월호가 일본 사회에 준 참으로 거대한 충격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나, 아무튼 그 무렵, 배동호씨에게서 갓 창간된 민족통일협의회의 기관지 <민족시보>에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곧 ‘케이(K)군에게 보내는 편지’도 연재를 하기 시작했으니 별안간에 일복이 터졌다고나 할까, 얼마나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겠소이까.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사람 네다섯 명이 집으로 찾아와 정중하게 큰절을 하더니 자기들의 연수회에 와서 강연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소이다. 내가 쓴 아사히신문사의 책도 읽었고 <민족시보>에 연재되고 있는 ‘K군에게 보내는 편지’도 읽었는데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이어서 감동했노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민단을 빠져나와 배씨 그룹과 합류한 ‘한청’(한국청년동맹)의 맹원들이었소이다. 한민통의 모체가 바로 이 그룹이었던 것이지요.

선선히라고 할까 흔쾌히라고 할까, 강연 요청을 승낙하고 그들을 보낸 다음, 나는 나대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소이다. <논어>에 나이 마흔이 넘도록 무문(無聞)이면, 즉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면 부족외야(不足畏也)라, 즉 별로 대단치 못한 인물이라는 말이 있소이다. 내가 한국을 떠났을 때의 나이가 마흔여섯이었고, 그때까지 암흑 속에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공자 말씀 그대로 아니었겠소이까. 한국에 있었다면 어느 젊은이가 내 말씀을 듣겠다고 찾아오는 일이 있을 수 있었겠소이까.

도쿄 교외의 작은 도시 이쓰카이치라는 곳에 있는 한청의 건물 ‘화랑대’에서 연수회가 열리고 있었으므로, 약속한 날 나는 정성 들여 작성한 강연 텍스트를 가지고 그곳을 찾아갔소이다.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맨 밑바닥에 깔려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의 생활에 대해 나 자신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터이라, 그날 강연에서는 비단 일본뿐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과제로서 저변층을 구성하는 사회 계급이 지녀야 할 기개라고 할까, 마음가짐이 주제였다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그때 참고로 인용한 것이 이탈리아 작가 이그나치오 실로네가 남긴 말이었는데, 그것은 “사회의 최저층이 새로운 가치관을 획득하면 그 사회 자체가 변혁을 일으킨다”(When the lowest stratum of a society acquires a new value, the society itself will undergo changes.)는 유명한 얘기외다.

한청 회원들 중에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있고 해서, 영어로 번역된 실로네의 말을 칠판에 써 보이며 한창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그때 뜻밖에도 배동호씨가 어떤 낯모르는 사람과 같이 회장 안으로 들어왔소이다. 그가 먼 데까지 일부러 내 강연을 들으러 와 준 것이 내게는 퍽 고마웠소이다.

강연이 끝난 뒤 나는 그날 밤은 젊은 사람들과 같이 화랑대에서 묵을 작정이었는데 배씨는 같이 시내로 돌아가자면서 자기가 타고 온 차에다 나를 태우더이다. 뒷자리 맨 오른편에는 그 낯모르는 사람이 앉고 나는 왼편 자리에, 그리고 배씨는 가운데 자리한 채 차가 달리기 시작했는데, 오른편에 앉아 있던 그가 무슨 말인지 중얼중얼 내뱉고 있었소이다.


나는 일시에 피곤이 닥쳐오는 바람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참인데 얼핏 들어보니 그 말이 내게 대한 욕지거리가 아니오이까.

“짜~식 건방지게 한국놈이면 한국말을 할 것이지, 돼먹지 않게 영어를 씨부렁거리고!”
그날 강연은 일본말이었는데, ‘한국놈이면 한국말 운운’은 터무니없는 생트집이 아니오이까. 그자가 도중에 인사도 없이 차에서 내려 사라지기에 배씨에게 물을 수밖에요.

“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청 위원장이외다.” “이름은요?” “곽동의지요.”

‘곽’의 그 욕지거리는 내게 대한 질투였는데, 그 뒤 30여년 동안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한민통과의 악연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2012/10/26 11:03] | 한계레-정경모 선생님 | トラックバック(0) | コメント(0) |

[길을찾아서] DJ 향한 ‘기대와 실망’ 엇갈리고… / 정경모 51
1972년 10월 도쿄 시내 프린스호텔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김대중(오른쪽)씨와 김종충(왼쪽)씨. 그즈음 필자를 만난 김대중씨는 자신의 소학교(초등학교) 동창생인 김종충씨에게 ‘월급’을 받아 신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1

김대중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가 망명을 선언했던 1972년 섣달 어느날이었소이다. 그분께서 사람을 시켜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은 앞으로 신문을 낼 계획이니 힘이 되어 달라는 뜻이 아니었겠소이까. 둘 다 망명객으로 이국땅에 와 있는 처지요, 나는 얼마나 뜨겁게 그 일을 위해서라면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겠노라고 마음속에서 느꼈겠소이까. 나야 일본에 와서 겨우 책을 한 권 낸 것이 전부인, 말하자면 문필가로서는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애송이 글쟁이에 불과하니, 설사 천하를 호령하는 대문장을 써서 세상에 발표했다 한들 그것이 무슨 뜻을 지닐 수가 있겠소이까.
그러나 내가 만일 박정희와 겨룬 끝에 권토중래를 기해 한때 일본으로 망명해 온 김대중 선생을 등에 업고 그의 입을 빌려, 비단 남쪽만이 아니라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 전체를 향해 우리가 처한 현황을 말하고, 외세의 강요로 부당하게 분단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민족으로 하여금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이 길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 방향을 제시한다면, 그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겠소이까. 김 선생을 만나고 온 다음 나는 뛰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약속의 땅을 향해 바야흐로 홍해를 건너려 하는 모세와 김 선생의 모습을 겹쳐서 생각하면서 얼마 동안을 참으로 원대한 꿈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소이다.

그러다 두번째로 김 선생을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은 확실치가 않으나, 장소는 배동호 그룹이 그의 영입을 위해 마련한 상당히 호화찬란한, 도쿄 한복판 간다의 4층짜리 빌딩이었소이다. 배동호 그룹과 김 선생의 협력관계는 어떠한 경로를 밟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그 사무실을 드나들 무렵에는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외다. 아무튼 그 빌딩 사무소에서 전날 영어를 씨부렁거렸다고 내게 맞대놓고 욕지거리를 퍼붓던 곽동의도 다시 만났고, 또 얼마 안 있어 ‘김대중 수석비서관’이라는 큼직한 명함을 들고 으스대며 다니게 되는 조활준, 또 김 선생의 소학교 동창이라는 것으로 측근을 자처하며 특권이나 되는 듯 행세하고 있던 김종충 등 여러 인물을 만나게 되었소이다.

그런 어느날 김 선생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데 ‘곽’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저게 뭐 기독교인?” 하고 못마땅한 듯이 그를 턱으로 가리킵디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식의, 어디서 ‘주서’들은 사회주의적 지식을 내게 피로한 것인데,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듭디다. 이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김 선생이 가엽기도 하고 말이외다.

아무튼 그 사무소의 구성원들은 그래도 내가 존경심을 품고 대하던 배씨를 별도로 한다면 하나같이 함량미달의 인물들뿐이었으며, 망명을 선언한 김 선생이 과연 동지로 지내도 무방한 인물들인지 의심스러울뿐더러, 걱정스러웠소이다.

그런데 김 선생이 처음 만났을 때 얘기했던 신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일체 말이 없고, 약간 답답하기도 해서 어느날 물었소이다. 그 시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민족시보>에 관여하고 있지는 않았소이다. “그때 말씀하시던 신문은 내실 겁니까?” “아, 내야지요.” “그럼 그 신문은 우리말 신문이겠지요?” “아니, 일본말이외다.” “누구에게 읽히는 것인데요?” “앞으로 나는 미국을 오가면서 활동을 개시하겠는데, 내 동향을 일본 국회의원 아무개, 아무개 선생들에게 읽힐 신문이외다.” 그러고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돈 얘기를 꺼내시더군요. “한달에 10만원은 지불하겠으니 내 소학교 동창생인 김아무개로부터 받아 생활비로도 쓰고 신문도 내 주시오.”

그 당시 김 선생이 분주히 일본 국회를 출입하면서, 우쓰노미야, 고노 등 자민당 안에서는 그래도 양식파라고 할 수 있는 약 10명가량의 ‘에이에이’(AA) 그룹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는 있었사외다. 그러나 그 몇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서 ‘신문’을 내라고 하니 내가 느끼는 실망이 어느 정도였겠는지 알 만하지 않소이까. 자기 측근이니 김아무개한테서 얼마씩 받아 생활도 하고 ‘신문’도 내라는 말은 내게 또 얼마나 모욕적으로 들렸겠소이까. 그때 내게는 김대중 선생과 손잡고 뛴다면 그 돈의 10배, 100배의 자금을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소이다. 차라리 김 선생이 “내게 무슨 돈이 있겠나. 그렇지만 생명보험료로 한달에 5만원은 보장하겠으니 목숨 걸고 함께 뛰어주겠는가” 했다면, 내가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2012/10/26 11:00] | 한계레-정경모 선생님 | トラックバック(0) | コメント(0) |

[길을찾아서] 내가 무정부주의자? 어쨌든 ‘영광’이외다 / 정경모 52
1972년 10월 유신헌법 공포 직전 도쿄로 건너온 김대중씨는 필자에게 일본과 미국의 정치권을 상대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데 활용할 신문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 무렵 김씨가 의원 신분으로 후지야마 이치로, 다가와 세이이치 등 일본 정객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 김종충씨 회고록 <현해탄 파도는 아직도> 중에서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2

1972년 김대중 선생과 두 차례 만나고 나서, 사람은 우선 겉모양으로 상대방을 헤아리게 마련이고 김 선생이 그 정도로 나를 봤다 해도 굳이 탓할 수는 없노라고 나는 느꼈소이다. 내게 무슨 대학교수쯤의 직함이 있었다든지, 혹은 국회의원이라도 한 차례 지냈다는 경력이 있다면 또 모르되, 논어의 말마따나 나이 사십이 넘도록 무문이었으니 ‘부족외야’로 비쳤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다음번 어느날 사무소에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궁금도 하고 실례가 되지 않도록 말을 낮추면서 김 선생에게 물었소이다.

“선생께서는 앞으로 무엇을 하시겠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그 대답은 ‘제2의 4·19’였소이다.

“내가 앞으로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면서 두 나라의 정계를 움직인다면 본국에서 제2의 4·19가 발생할 것이며, 그때는 내가 들어가서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4·19에 대한 김 선생의 인식이 틀린 것이 아닐는지, 약간 의아스러운 느낌이었소이다. 4·19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결과적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은 사실이나 빗발치는 총탄을 무릅쓰고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학생들의 투쟁은 결코 민주당을 차기 정권의 담당자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소이까.

‘4·19’의 시인 신동엽이 무어라고 부르짖었소이까?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4·19 학생혁명의 정신은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한 김 선생의 이해는 빗나간 것이 아닐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더구나 그가 ‘혁명위원회’를 운운하시니, 나는 쿠바혁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쿠바와 우리나라는 비록 역사적 배경이나 놓여 있는 상황이 같은 것은 아니나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는 절규에서는 4·19와 쿠바, 두 혁명의 정신은 공통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소이다.

그러면서 김 선생은 역시 한민당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민당 정객임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한민당이란 김구 선생의 말투를 빌린다면, ‘적들이 항복하던 전야까지 그들의 본거지를 제 집 드나들듯이 하면서 그들의 승리를 위해 모든 정성을 바치던’ 인사들의 집단이 아니오이까. 그 한민당이 민국당, 민주당, 신민당으로 여러차례 간판을 바꾸기는 했으나 그들의 사대주의 사고는 뿌리깊게 살아남아 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소이까. 하기야 김 선생이 그런 흐름 속의 정치가 중에서는 한국 문제를 민족 차원에서 거론한 최초의 인물이었다는 것쯤의 인식이 내게 없지는 않았소이다.

그러나 미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을 설득해서 제2의 4·19를 일으켜 그것을 바탕으로 혁명위원회를 조직한다니, ‘연목구어’도 유만분수요,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만한 발상이 아니었소이다. 약간 화도 나고, 또 혁명을 운위한 김 선생 자신의 말도 있던 터라, 문득 쿠바혁명 때 볼리비아에서 총에 맞아 죽은 체 게바라가 떠올라 좀 격한 말투로 한마디 하고는 밖으로 나와버렸소이다.

“김 선생, 나더러 신문을 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총을 쏘라고 하시오.”

그런 며칠 뒤 이시카와 모라는 일본 사람이 김 선생의 심부름으로 집으로 찾아왔습디다. ‘정경모’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보고 오라는 뜻이었겠지요. 그 사람을 적당히 다루어 보낸 다음 상당히 심기가 불편합디다. 김 선생께서 ‘정경모 당신이 뭘 생각하고 있는가’ 묻고 싶으시다면 나를 불러 직접 묻든지, 삼고지례는 아닐망정 당신께서 나를 찾아오시든가 할 일이지, 아니 그래 민족운동을 같이 할 동지를 찾는 분이 일본 사람을 시켜 내 맘을 떠보게 하다니 그게 무슨 노릇이오이까.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지나 ‘정경모는 무정부주의자니 절대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지방 순회중의 김 선생께서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그러시더라는 말이 내 귀에도 들려오더이다.
옛날 진짜 무정부주의자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상해 임정의 초대 대통령으로 있던 이승만씨로부터 공산주의자로 혹심한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나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요 무정부주의자도 아니지만 김 선생으로부터 그렇게까지 미움을 사고 있다면, 이제 나는 단재 선생과 같은 위상으로 사람값이 격상된 것이 아닐까 하고 쓴웃음을 웃었을 뿐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2012/10/26 10:59] | 한계레-정경모 선생님 | トラックバック(0) | コメント(0) |

[길을찾아서] ‘재침략’ 노리는 일본에 ‘굽실굽실’ 박 정권 / 정경모
중국의 신해혁명 4년 뒤인 1915년 만주 군벌 위안스카이가 일본의 원조를 등에 업고 황제로 등극하고 있다.(왼쪽) 72년 12월 유신쿠데타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회의 투표를 거쳐 사실상 ‘총통’으로 취임하고 있다.(오른쪽)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3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제라도 자기가 하는 <세카이>(세계)에 써달라는 야스에의 말을 듣고 신들린 사람처럼 글을 써서 에세이 원고 ‘한국 제2의 해방과 일본의 민주주의’를 넘겨준 것이 1973년 5월말께였다는 것은 이미 앞글에서 말한 바와 같지만, 한국의 제2의 해방을 운위한 그 글의 시대적 배경을 약간이나마 미리 여기서 소개해 두는 것이 옳을 듯하오이다.
우리는 해방된 국민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또 일본인들은 자기 나라가 민주화된 평화 지향의 국가라는 점에 거의 의심을 품지 않고 있으나, 실상은 어떠한가?

1965년에 발간된 <일한문제를 생각하다>는 일본에 와서 거의 첫번째로 읽은 책인데, 여기에는 ‘일본의 통치는 조선인을 위하여 유익한 것이었다’는 제3차 한-일 회담 대표 구보타의 그 유명한 망언을 비롯해,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다시 한번 조선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는 62년 요시다의 망언은 물론, 읽다 보면 섬뜩해지는 망언이 수도 없이 나열되어 있었소이다.

특히 그중에는 ‘현재의 일본이 일청전쟁과 일로전쟁의 뒤를 이어 삼세번째 다시 한번 일어나 38선을 압록강 저편으로 밀어내지 못한다면 저승에 가서라도 무슨 낯으로 조상들을 뵈올 수 있겠는가’라는 것도 있었소이다. 58년 제4차 한일회담 때 수석대표인 사와다의 이 발언은, 어느때이고 일본은 메이지시대처럼 조선을 말굽으로 유린해 보겠다는 야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인데, 그러면 사와다의 발언을 아무 근거도 없이 내뱉은 허튼소리였나 하면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었소이다.

일본 자위대가 작성한 비밀문서 ‘미쓰야 작전’이라는 방대한 문서가 있어요. 이것은 제1동(動)에서부터 제7동까지 조선에서의 군사행동을 상정한 면밀한 작전계획서인데, 제7동에 이르러, 미군이 원자폭탄을 북조선에 떨어뜨려 승리를 거두게 되면, 일본군은 유엔군의 일부로 조선에 주둔을 계속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소이다. 이것이 완성된 것은 한일조약(한일협정) 2년 전인 63년이었으니까 58년 사와다 발언의 시점에서 ‘미쓰야작전’의 윤곽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고 봐야 옳지 않겠소이까. 이 비밀문서는 65년 2월 사회당 오카다 하루오 의원이 폭로하는 바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오. 민주화되었다는 일본이 이렇게 호시탐탐 조선에 대한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판국에, 65년 6월 21일 한국의 외무부 장관이라는 자(이동원)가 사토 총리에게 허리를 굽히면서 “일본을 형님의 나라로 모시겠으니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는가 하면, 이어 9월 19일에는 명색이 육군총장이라는 자(민기식)는 사토를 향해 “일본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으니, 한국을 남의 나라로 여기지 말고 도와달라”는 쓸개 빠진 말을 했다니, 한국 꼬락서니도 그렇고, 또 일본도 그 꼬락서니니 어찌 부아통이 터지지 않겠소이까.

역사는 되풀이된다던가, 그 옛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족이 만주족 지배의 굴레는 벗었다고 하나, 그게 진짜 해방은 아니었소이다. 그 4년 뒤 실권을 쥔 군벌의 두목 위안스카이(원세개)가 황제의 지위를 노리면서 일본이 제공하겠다는 경제원조에 눈이 멀어 중국 전토의 식민지화를 노리는 21개조의 요구를 덥석 물게 되오이다. 일본은 또 교환조건으로 황제로의 등극도 지지해 주겠다니, 자신을 얻은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등극 여부를 ‘국민대회’에 걸어 참가인 1993명 전원의 만장일치로 황제로 인정되었소이다.

한편 일본을 등에 업은 박정희도 유신쿠데타 뒤, 72년 12월 영구집권의 가부를 ‘국민회의’에 걸어, 이른바 체육관식 투표를 통해 참가인 2359명 중 무효표 2표를 뺀 2357명의 찬성으로 ‘총통’ 자리에 앉게 되지 않았소이까.

신해혁명 후의 중국과, ‘해방’을 맞이했다는 한국의 모습이 왜 이렇게까지 닮았을까,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중국의 문호 루쉰 선생은 당시 자기 나라의 상황을 보면서, 제자이며 애인이었던 쉬광핑(허광평)에게 띄운 편지(兩地書)에 다음과 같은 한탄의 말을 남겼소이다.
‘최초의 혁명은 단지 만주조정을 뒤엎는 것이었으니 비교적 쉽게 성취될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다음 개혁은 국민 스스로가 스스로의 나쁜 근성을 개혁해야 되는 것이니 훨씬 어려웠는데, 불행하게도 거기서 뒷걸음질을 치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앞으로 더욱 중대한 것은 국민성을 고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전제라고 하나, 공화제라고 하나, 그 외의 또 무엇이라고 하나, 간판을 갈아서 거는 것뿐이고 내용이 그대로이면 희망은 없노라고 해야 되겠지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2012/10/26 10:57] | 한계레-정경모 선생님 | トラックバック(0) | コメント(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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