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8

나이 들어가는 일본의 ‘빈집 메우기’ 대작전 - 시사저널

나이 들어가는 일본의 ‘빈집 메우기’ 대작전 - 시사저널


이인호 "문재인 대통령과 주변 386세대들 역사관 위험하다"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승인 2019.06.11 16:09
호수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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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특별 기획] 대한민국, 길을 묻다 (20회)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국내 최초 여성 대사 이인호 “지나친 친일 청산 작업은 소모적”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⑩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⑪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⑫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⑬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⑭이종찬 전 국회의원 ⑮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⑯박관용 전 국회의장 ⑰송기인 신부 ⑱차일석 전 서울시 부시장 ⑲ 임권택 감독 ⑳ 이인호 교수

“우리는 길고 굴곡진 역사의 한 부분이자 소재인 동시에 증인이기도 합니다. 경험을 정확히 증언하고 가르치는 일은 어른이자 지식인으로서 당연한 책임이에요.”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여든셋 역사는 줄곧 도전과 모험의 연속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삶을 설명할 땐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이 심심치 않게 따라붙는다.

6·25전쟁 이후 나라가 채 수습도 되기 전인 1956년, 이 교수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여성 최초로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10여 년 외국 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서울대 교수로 지내던 1996년, 또다시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핀란드와 러시아 대사직을 연이어 맡았다. 여성이 대학교육을 받고, 외국에 나가 국가의 얼굴이 되는 일에 색안경이 진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그는 정통으로 거슬렀다. 이 교수는 자신이 ‘처음’이 된 데 대해 “시운(時運)이 잘 따라준 덕”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누구라도 했을 일을 조금 일찍 태어나 먼저 기회를 얻게 됐다는 자세다.


50여 년간 교수, 대사 등 여러 직함을 거쳐왔지만, 이 모두를 포괄하는 그의 대표적 타이틀은 바로 ‘역사학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에 진학할 때부터 역사학도의 길을 택한 그는 하버드대에서 러시아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줄곧 한 우물을 팠다. 그 후 서양사 교수로 30년 가까이 교단에 섰기 때문인지 오늘날 현장의 역사 교육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깊다. 역사적 사건들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갈등을 반복하는 모습에도 할 말이 많다. 지난 6월3일 월요일 오후 이 교수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자신의 자택으로 취재진을 초대했다. 2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동안 그는 여러 조직·신분을 거치며 쌓은 다양한 일화를 비롯해, 현 정부의 역사관 및 교육관에 대해 가감 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요즘에는 주로 어떻게 지내십니까.
“근래엔 무난한 일과를 보내고 있어요. 지인들 모임이나 여러 강연에도 꾸준히 다니고 있습니다. 매일 신문 읽고 저녁엔 CNN을 비롯한 외국 뉴스도 챙겨 봅니다.”

유튜브도 자주 보십니까.
“자주, 꽤 많이 봅니다. 워낙 사회가 다양해 유튜브를 안 보면 정보를 제대로 알 수가 없어요. 보다 보면 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서 많이 놀라요.”


일제 강점기와 전쟁 시기를 거치는 중에도 학업을 꾸준히 이어 나갔습니다. 서울대 진학부터 미국 유학까지,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가정환경부터 좀 특별했나요. "그건 아니었어요.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우리나라가 해방되면서, 난 한글로 공부를 한 첫 세대가 됐어요. ‘여성 최초’라는 이름이 따라올 수 있었던 것도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시운(時運) 덕이었죠. 가정환경은 오히려 전통적인 유교 집안으로 증조부모와 다함께 살았어요. 어릴 적 책 읽느라 어른들 부름을 한 번에 못 들어서 ‘여자가 가는귀먹으면 안 된다. 빨리 일어나 심부름해라’라는 꾸중을 많이 받기도 했어요. 내가 미국 유학하고 귀국했던 197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엔 ‘여성에게 대학교육을 시켜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 공공연히 있었어요. 이 부분에 있어 우린 참 오랜 기간 후진국이었죠.”

미국 유학은 어떻게 결심하게 됐나요. 반대는 없었나요.
“6·25전쟁 이후 미국은 우리에게 굉장히 동정적이었어요. 장학금도 많이 줬죠. 당시 서울대에 입학해 있었는데 우연히 미국에 유학 가 있던 친척이 ‘미국 웰슬리대학이 장학금도 많고 생활비까지 다 줄지 모르니 지원해 보라’고 제안했어요. 부모님께 미리 얘기도 안 하고 준비를 했고, 당시 종로에 가서 미국 군인들 속에 섞여 SAT시험도 쳤어요. 웬만한 상황이었으면 부모님도 반대하셨을 텐데 워낙 좋은 조건으로 가게 돼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이후 11년 동안 운 좋게 생활비와 장학금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어요. 탁월한 결정이었죠.”
미국 유학 시절 이 교수의 모습 ⓒ 이인호 제공
1998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 러시아 대사 임명장을 수여받는 모습 ⓒ 이인호 제공

“때려잡기식으로 역사 바로잡아선 안 돼”

미국 유학 중 이 교수는 역사 중에서도 ‘러시아 역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을 연구해 온 그는 국내 공산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매우 부족해 왜곡된 인식이 만연하다고 연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학교 현장에서의 역사 교육은 물론, 문재인 대통령과 그 주변 386세대들이 가진 역사관 또한 위험한 수준으로 치우쳐 있다“고 지적했다. ‘친일 청산’ 등 현 정부가 꾸준히 강조해 온 ‘역사 바로잡기’ 작업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오늘날 잣대로만 평가하려다 보면 되레 역사가 왜곡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많은 분야 중 ‘역사’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연스러웠어요. 아버지 서재에 늘 역사 종류 책이 많았고, 어린 내가 읽을 만한 한글책이 그 외엔 거의 없었어요. 특히 주변에서 늘 듣고 자랐던 게 ‘약소민족의 설움’이었어요. 우린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서양 사람들이 가진 건 다 좋아 보이던 시절이었잖아요. 왜 그럴까 하는 호기심이 깊었어요. 당시 여성들은 역사를 교양으로 얕게 공부하는 정도였어요. 서울대 면접시험에서도 내가 사학과를 가겠다고 하니 ‘여자가 무슨 역사 공부냐. 차라리 고고학 쪽으로 바꿔보라’는 교수들의 말을 듣기도 했죠.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요.”


오랜 교육자로서, 한국과 미국 교육 방식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장 큰 차이는 ‘경쟁’의 개념이었어요. 미국은 ‘상대 경쟁’을 하는 게 아니라 나만 최선을 다하면 되는 ‘절대 경쟁’ 분위기가 갖춰져 있었어요. 우리 교육에선 ‘서로 잘될 수 있다’는 문화가 아주 상실돼 버렸잖아요. 난 우리 교육이 아주 근본적으로 비뚤어져 있다고 봐요. 지원제도부터 잘못돼 있어 부담이 많고, 요행이 작용해 억울하게 탈락하는 학생들도 많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가 문제라고 보십니까.
“잘못된 입시제도에 기생하는 입시 산업이 계속 커지는데 교육 당국이 그걸 제대로 바로잡지 못해요. 사교육을 다스리겠다고 내세우는 방법 자체도 매우 잘못됐어요. 시장경제 사회에선 돈을 벌어서 어떻게 쓰는지 국가가 규제할 수 없잖아요. 돈 있는 사람들이 품질 좋은 자녀 교육을 위해 돈을 쓰는 걸 강제로 막아 사교육을 차단하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그 옛날 국가가 과외 금지령을 내렸을 때도 그렇고, 참 우스워요. 아버지들 저녁 술자리에서 몇십, 몇백만원 쓰는 건 제어 못 하면서, 그걸 학비에 쓴다고 하면 막아버리고 범죄시하니까요. 차라리 미국처럼 잘사는 사람에게 비싼 학비 받아 어려운 학생들 장학금을 많이 주는 순환구조를 만드는 게 낫죠. 지금 우리는 그걸 인위적으로 막으려다 보니 공교육도 피폐해지고 사교육도 자꾸 음지화되는 거예요. 진보 교육감들의 사고 깊이가 부족해 대증요법만 쓰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러워요.”

특히 ‘역사 교육’에 더 관심이 많으실 것 같아요. 지금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의 역사관 정립, 제대로 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역사 교육은 잘못된 지 굉장히 오래됐어요. 과거엔 역사를 주로 집에서, 역사를 직접 경험한 어른들의 얘기를 들으며 배울 수 있었는데, 사회가 변하면서 이런 배움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잖아요. 그렇다면 학교에서 역사를 더욱 정확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치는 이들부터 역사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국민의 역사인식이 점점 더 비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오랜 역사학자이자 선생으로서 나도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 국민의 역사관이 어떻게 비뚤어졌다고 생각하시나요.
“분단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힘들게 지켜졌는지 지금 국민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공산주의에 대해선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 만연해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민족이나 국가를 일시적인 방편으로 보지, 결코 절대적인 가치로 보는 체제가 아니에요. 진짜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애국자들은 공산주의와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공산주의가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니까 좋지 않냐고 많이들 착각합니다. 잘못된 인식으로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나라’라는 말을 하며 우리 국가를 부정해요. 안타깝게도 우리 대통령과 주변 386세대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러시아(소련)의 역사를 전공하신 것도 특이한 이력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 길을 택했고 어떤 배움을 얻으셨나요.
“웰슬리대 2학년이던 1957년, 소련이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쐈어요. 스페이스 경쟁에서 뒤처진 미국이 깜짝 놀라 러시아 연구를 시작했어요. 우리 학교에도 그때 러시아 역사 강의가 처음 개설됐어요. 들어보니 러시아사가 우리랑도 비슷하고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전공으로 택하게 됐고 공산주의에 대해 깊게 배울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선 공산주의에 대한 학습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 때 반공 교육이라고 하면서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쁘다, 안 된다고만 했잖아요. 왜 나쁜지, 왜 안 되는지는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지식인들을 설득시켜야 했는데, 그냥 군대 다루듯 제압하며 공산주의자라면 그냥 마구 색출했어요. 그러니 소위 운동권 세력이 이처럼 억압하는 국가에 반기를 들고 민주화운동을 벌이면서, 오히려 북한 등의 잘못된 공산주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됐어요. 소련에서도 스탈린 사망 후 소각됐던 책들이 상당수 1980년대 우리 운동권의 교재로 쓰이기도 했어요. 아쉬운 부분이죠.”

지금 정부는 출범 때부터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뭘 어떻게 바로잡는지가 중요해요. 분단의 역사 속에서 남한에선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선 반공주의자들이 핍박을 많이 받았어요. 억울하게 당한 이들을 이제라도 돕는 것은 역사 바로잡기의 긍정적인 방향입니다. 그러나 마치 우리가 당시 반공을 외친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주장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에요. 또 하나, 일제하에서 맹렬하게 독립운동했던 이들 중 지배체제가 길어지면서 결국 일본과 타협해 친일파로 묶여온 이들이 많아요. 이들에 대해서도 평정심을 갖고 재평가를 해야 합니다. 무조건 그때 사정도 고려하지 않고 오늘날 잣대로 다 때려잡아야 한다는 발상은 역사를 오히려 날조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진작에 제대로 친일 청산을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문제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데요.
“솔직히 나도 할아버지가 친일파라는 얘길 들어왔는데, 결코 자랑스럽게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부끄럽게만 생각하지도 않아요. 당시 보통 사람들이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방법을 따랐을 뿐이죠. 이승만 대통령도 당시 나라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게 친일 청산보다 우선이란 생각이었고요. 정치적 결단이란 게 늘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 아닌가요.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단편적으로만 알고 청산을 외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소모적인 일입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건으로 시끄러웠습니다. 역사 교육을 획일화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난 사실 국정화를 반대했어요. 국정화하면 반발이 일어날 게 뻔하니까. 그런데 당시 국정화하려 했던 건, 국가가 주관해 해당 분야의 권위자들을 모아 우리 교과서의 잘못된 부분들을 제대로 고치려는 의도였어요. 국가의 이런 의도를 곡해한 이들이 갈등에 불을 붙여 상황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든 겁니다. 세계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이후 우리나라 교과서들은 오히려 북한 교과서를 점점 더 닮아갔어요. 시중의 교과서를 쭉 분석해 보면 내가 어릴 적 배웠던 것과 내용이 너무나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니 국가에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강행하려 했던 건데, 결과적으로는 안타깝게 됐죠.”
1996년 여성 최초로 대사에 임명돼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는 이인호 교수 ⓒ 연합뉴스

“정치화된 공영방송, 국회만큼 아수라장”

30년 가까이 교단에만 서 온 이 교수는 1990년대 이후 두 개의 큰 자리를 깜짝 제안받았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당시 핀란드와 러시아 대사직을 연이어 맡았고, 박근혜 정권 들어선 KBS 이사장으로 임명됐다. 이 교수는 “대사직은 내 전공 살려 즐겁게 한 반면, KBS 이사장 때는 기대보다 결실도 없고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두 기억을 풀어내면서 드러낸 표정이나 어조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이 교수는 KBS 조직에 대해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1970~80년대 독점적 권위를 유지하며 흥청망청 조직을 운영하던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서 “1년에 수천억원 예산을 받아서도 적자 체제가 고착화돼 있으며, 정치권력이 내부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 공정성도 잃은 지 오래다”고 지적했다.

국내 여성 최초로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 대사까지 맡았습니다. 처음 제안받았을 때 어떠셨나요.
“1995년 중국 북경에서 세계 여성대회를 했는데, 우리가 그 자리에서 망신을 당했어요. 유엔총회가 발표한 ‘여성 세력화 지수’에서 110개국 중 91등인가 한 거예요.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이 충격을 받아서 여성 1호, 여성 최초 타이틀을 붙여 적극적으로 여성들을 요직에 보냈어요. 그때 대사직 제안이 왔어요. 당시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여성계 인사들이 많이 지원해 줬어요. 내 전공을 살려 러시아로 가고 싶다고 했는데, 여성에게 러시아 같은 큰 나라를 맡겨도 되느냐는 분위기가 있어 핀란드로 먼저 가게 됐어요. 다행히 그 후 러시아 대사로도 이어 일할 수 있었죠.”


당시 여성 대사로서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그때 사람들이 내게 ‘여성으로서 대사 하기 어렵지 않느냐’고 물으면 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늘 얘기했어요. ‘대사 부인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없어서 힘들다’고요. 대사 부인이 사실 대사 못지않은 1인분의 역할을 하거든요. 그런데 난 그런 서포터가 없으니 2배로 힘들었죠. 그래도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러시아사를 전공한 특징이 활동하는 데 아주 큰 장점이 됐어요.”

핀란드는 대표적인 복지국가입니다. 우리도 이런 ‘북유럽식’ 복지를 추구하고 있는데요.
“그들은 버는 돈의 절반을 소득세로 내요. 내가 대사로 있을 때 우리 대사관에서 일하는 직원들만 봐도, 적은 월급에서 세금 절반 떼고 나면 정말 기본적인 생계를 할 정도로 남았어요. 그래도 이들은 불만이 없어요. 교육이나 의료 등 삶의 전반을 국가가 ‘제대로’ 챙겨줄 거란 믿음이 충분하니까요. 우리나라도 이런 방향으로 가길 원하는데, 문제는 우리 공직사회가 그들만큼 정직하고 믿음이 두텁냔 말이에요. 세금을 투명하게 쓰는지, 복지 혜택을 정말 누려야 할 사람들에게 제대로 제공하는지를 생각했을 때 우리 상황은 아득해요.”

여러 직함 중 가장 무거웠던 건 무엇이었나요.
“타이틀에 비해 가장 결실이 없고 힘들었던 건 KBS 이사장직이었어요. 처음 그 자리에 갈 적엔, 공영방송에서 잘못된 역사 교육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방송이 이미 굉장히 정치화돼 있어 국회나 다름없는 아수라장이더라고요. 이사회도 실질적인 힘이 없고, 어떤 계획도 펼칠 수 없었어요.”

공영방송은 매 정권마다 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한다는 비판이 있는데, 문제가 뭐라고 보시나요.
“내부에 정치세력이 들어와 있고 방송 자체가 완전히 권력화돼 버렸어요. 그러니 사장 바뀔 때마다, 대통령 바뀔 때마다 왔다 갔다 눈치 보기 바쁘죠. 특히 새 정부 들어와서 친정부적인 노조가 들어와 있으니까, 정권에 불리한 내용 있으면 아예 안 내보내거나 편파적으로 보도해요. 그러니 사람들이 외면하고 유튜브 쪽으로 대거 이동하잖아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에요.”

여성 리더로서 오늘날 여성 혐오, 차별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평등을 추구하는 건 좋지만, 차이 자체를 거부하고 기계적으로 평등을 이루려 싸움을 일으키는 건 역작용이 일어날 수 있어요. 예컨대 최근 순직한 해병에 대해 일부 여성들이 비하하는 행위는 정말 잘못된 방식이에요. 어느 쪽이든 다른 성은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는 태도는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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