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이 파시즘이면 민족해방은 특급 파시즘
반공이 파시즘이면 민족해방은 특급 파시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4)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6-28)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막 14:22-25)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 11:23-25)
1. 독일 파시즘
⑴ 하층 중산층의 심리를 이용 ⑵ 독일 민족주의의 이방인혐오증으로서 反유대주의 ⑶ 후진 봉건사회의 반영 ⑷ 자연의 신성화와 비합리주의 문화 ⑸ 선전 선동 ⑹ 교회의 저항
2. 반 유대주의
⑴ 반유대주의의 역사 ⑵ 유대인반대의 명분들
3. 일본 파시즘
⑴ 동북아 사회 산물 ㈎ 국가신도 ㈏ 가족국가 ㈐ 종교적 성격 ⑵ 친일문제
4. 북한공산체제
⑴ 공산당 중심의 권위주의체제 ⑵ 수령주의와 대중의 소외 ⑶ 전쟁 사회주의 ⑷ 북한 사회주의 선동의 파시즘과 유사성 ⑸ 친일 반동
5. 북한공산당 (조선노동당)
⑴ 중앙집중제 ⑵ 통일전선전술 혹은 마을 연합
6. 아기장수설화
⑴ 민중 꿈의 투사로서 英雄 ⑵ 대중영웅의 정치적 의미 ⑶ 민중영웅과 恨 ⑷ 한국 사회 적용 현장 : 민주화운동 관련
7. 정치적 낙인으로서 파시즘
⑴ 중화주의 동북아 문명의 오랑캐 낙인으로서 ⑵ 공산 좌파의 정적 낙인 ⑶ 적색공포와 인종주의가 파시즘?
8. 계몽의 변증법
⑴ 도구적 합리성 ⑵ 계몽은 신화다 |
반공이 파시즘이면 민족해방은 특급 파시즘
⑴ 군주제로 시민사회가 왜곡되거나 부재한 공간에 엘리트는 시민사회로 책임을 지려고 하기보다 관료를 꿈꾸기 쉽다. 그리고 대중은 군주제와 관료주의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길든다. 이는 파시즘, 전체주의, 권위주의의 토양이다.
일본 파시즘은 천황제 봉건정치 기반으로 일본 민족의 이익을 위하고 천황제 부족 神을 섬기고, 국가신도 강제교육으로 사무라이 관료층의 지배체제를 젇당화한다.
독일파시즘은 봉건전제군주 기반으로 존재한 문화 바탕으로 게르만민족의 이익을 위하고 지도자 숭배하며 선전선동을 통해서 게르만 나치에 복무하는 관료의 일반 대중 장악을 정당화한다.
소련공산주의는 짜르전제주의 기반으로 존재한 문화 바탕으로 러시아 민족의 이익을 위하고 지도자를 숭배하며 선전선동을 통해서 공산당 관료의 일반 대중 장악을 정당화한다.
반공주의는 조선왕조와 일제체험이란 이중의 봉건제 체험을 전제로 하고, 반공마을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며 지도자 숭배를 하고 선전선동을 통해서 반공체제 관료의 일반대중 포획을 정당화한다.
민족해방주의는 조선왕조와 일제 체험, 그리고 반공체제 체험을 기반으로 한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공산마을 출신의 이익을 위하고, 지도자 숭배를 하며, 선전선동을 통해서 민주화(민족해방)체제에 복무하는 관료의 일반 대중 장악을 정당화한다.
⑵ 반공체제와 민족해방(민주화) 체제는 순교자 신화에 기반한다. 순교가 희생이고 피해의식 공유를 통한 연합권력을 지향한다.
반공체제를 받쳐준 6.25 전쟁 공산 피해 순교 신화는 종결됐다. 반공체제에 기반된 이분법적 배타주의 때문이다. (김대중의 정신적 스승인 함석헌은 신의주 반공의거의 주역이다. 50년대 후반에 사실상 돌아섰다. 반공논거를 장기간 보여주었던 장준하는 72년 이후 돌아섰다. 화해지향적으로 전체를 반영한다 하더라도, 돌아선 그들이 지향했던 '적화통일'까지를 포함하는 통일 지상주의 목적의식을 인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왜 돌아서게 하는 면을 보수는 반성하지 못하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민주화체제는 광주항쟁 강경진압을 노태우정권 때 청문회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새로운 '순교신화'를 썼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 때 공안피해자 고문 문제로 확대 확산하며, 민주화 피해자들을 '아기장수 설화'에 덧 대어 쓰는 대중선전 작업으로 법질서의 정당성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제시대 공산마을 관계자들에 이익이 돌아가는 '갑질'이 불가피했고, 상당수의 반공출신의 민주주의의 보편적 구현을 위해서 참여했던 이들을 등돌리게 했다.
⑶ 민주화 체제 순교자 신화의 원형은 아기장수 설화다. 희생자는 마을 사람인데 官의 폭거로 희생됐으니, 환상의 세계나마 억울함을 달래준다는 차원이다.
민주화유공자 차원으로 좌파 데모의 반공체제 피해를 다룬 대부분의 논거에서는, 아기장수 설화에 기초해서 관련된 마을 사람 시점의 '피해의 억울함'만 나오고, 공정한 역사적 현실은 사라져 있다. ('신화'가 원래 '현실'을 망각시키며,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영구히 지속될 '자연감정'으로 조작하는 효과가 있다)
민족해방운동의 '희생'의 강조는 반공시대에 억울함을 느낀 공감연합의 상징화다. 이는 민족해방운동에 줄 댄 마을의 '마을적 정당성'만 논하며 공정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를 차단한다. 공정한 성찰이 가능하다면, 아기장수 설화가 대중심리조작에 덧 씌워질 수 없다.
민주화 자료중에는 피해자 정당화 논리로 유대교 희생자를 주장하나, 유대교 희생자 신화와는 안 맞다. 일차적으로 공산마을 관계는 유대교가 아니고, 또 유대인의 생활사와 민족해방운동의 한국영향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1948년 이후 WCC가 반 유대주의 비판을 선언했는데 그에 편승해서 한국정치에 영향입히려는 의도로 설정한 담론이라 생각된다.
⑷ 한국 근대성은 두 개의 역설에 빠졌다.
한국 민족성에 각인된 무교의식으로 무조건적 마을사람끼리의 해방을 바라는 것이 고쳐지지 않은 체, 박정희 정부의 억지로 만든 씨족주의별로 쪼개지는 비 생산성을 고치는 방식은 굉장한 억압처럼 다가왔다. 당시, 한국교회는 반공설교로 공존하기 위한 인내의 불가피 주제로 '공동체주의' 설교가 많았다. 그러나, 이를 끝내 거부했다.
결국, 혼자만, 가족만, 파벌만을 외치는 50년대로 모든 사회가 복귀하고 나자, 한국 국민은 자신들이 민주팔이에 홀려(?) 쳐부숴 버린 체제가 무엇이었는지를 느기게 됐다.
한국인의 정서에 각인된 무교의식 속에 감성은 지역주의에 갇혀 있다. 한국인은 포용적이라고 자기의 인정을 과시하려는 면이 있는데, 불가피하게 포용을 내세울 수록 이분법적으로 배제하는 양이 커지게 된다. 포용정치가 벌어지는 동시에 배제정치가 벌어진다.
마을별, 씨족별, 파벌별로 쪼개지는 현상을 박정희가 힘으로 얽어맨게 근대화체제다. 이 체제를 해체한 것이 87년 6월 항쟁이다. 문제는 그렇게 해체하면 시민사회질서로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려는 책임의식이 있어야 하나, 대중은 반공엘리트에서 권력을 빼앗아 민주팔이 엘리트에 권력을 안겨주고는 다시 옛날 처럼 세상에 신경을 꺼버렸다.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지 못함은, 좌파 폭동의 기회를 크게 하고 있다.
군사정부는 하향식 정경유착이고 억압기구에 의존했다면, 민주화체제는 언론과 파벌정치와 금권주의적인 대중세뇌와 연관된 소비사회와, 상향식 정경유착으로 드러난다. 상향식 정경유착은 군사정부에 이어서 민주화체제도 일본식 정치가 작동하기에 빚어지는 일이다.
⑸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 친일파시즘이 고려연방제 종북평화 종북 파시즘으로 변했다. 민족해방(민주화)인사는 싫어할지라도 친일담론과친북담론은 대단히 닮아 있다.
일제 파시즘이 일본 국가신도 천황제 교육에 한국민족성의 소멸을 지향하는 통합을 지향했듯이, 종북연방제가 도교적 정서로 북한공산주의가 주도하는 종북 민족주의에 대한민국 국민성이 사라지는 남북통합을 의도하고 있다. 김일성 연방제의 국가연합제 요소로 공존하는 기간은 과도기일 뿐이며, 남북한 영역에서 종북세력의 숫자를 늘려 최종적으로는 적화하려는 의도다.
반공체제 희생자로서 민주화인사는 중보자로 신과 인간의 매개로 본다. 그런 차원이 민족해방진영이 통일운동을 신성화하는 계기다. 여기에 예수신앙이 쓰여진다. 이는 게르만 민족 이기주의로 설정된 파시즘 독일의 자연이성 남용과 연결돼 해석된다.
일제시대는 기독교였다 해도 독립의 우선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일제시대는 신학서적이 없었다. 삼위일체 신앙을 부정하며 공맹순 등 아시아 종교로 성경을 읽는 작업이 일제시대는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삼위일체 신앙을 피해가는 모든 시도는 인간적으로 설정된 정치적 목적에, 예수 그리스도를 핫바지로 만들려는 시도와 불가피하게 연결된다.
일제 파시즘에 부역한 한국교회의 천황제 파시즘 긍정에서도 삼위일체 신앙의 파괴를 수반했다고 여겨진다.
보수세력에 파시즘 낙인이 붙는 계기는 71년 박정희-김대중 대선의 박정희 영웅화가 선거에 적용된 것이 크다. 그러나, 이후에 김대중 노무현의 영웅화는 상당한 크기로 벌어지고 있다. 똑같은 차원인데 한쪽은 덮고 한쪽은 때리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고 본다.
민족해방운동은 공산민족이 자본주의 민족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6.25 남침 전쟁은 그런 차원으로 이승만체제에 억압당한 공산당원을 구제하려는 김일성의 의도라고 설명하며, 그런 취지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일 수 있다. 지금 제도권 학술문서는 '민족해방운동=독립운동'이란 기호가 남발된다. 곧, 제도권 학술문서는 공산주의 기준으로 '인종주의'적 분리주의를 작심하고 하겠다는 의미를 말한다.
(한국교회는 반공은 회개하면서 민족해방을 회개 왜 안하나!!! 반공의 죄악보다 민족해방주의의 죄악이 크면 컸지 모자라지 않다. )
일제 말 천황 앞에 모든 종교 줄세우듯, 6.15 선언 2항에 맞춰서 종교를 줄 세우며 그 과정으로 ‘국교금지 정교분리 종교중립’ 헌법 조문을 대놓고 엿먹이면, 그것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평화적 통일인가?
⑹ 예수님은 누구신가? 먼저 기독교인은 主를 바라봐야 한다.
한국민족에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과 맺은 계약과, 그 계약의 완성자로서 ‘화해자’로서 예수인가? 반공체제 피해자, 혹은 공산체제 피해자의 2세, 3세의 배설감으로서 화해를 담은 예수인가?
소명 받은 기독교인의 화해로서 세상참여인가? 이미 정치적으로 특정방향으로 계획된 정치참여에 예수 도덕 사탕발림인가?
예수는 민족해방적 혹은 반공적인 외방향성인가? 예수는 특정한 대한민국 정치 통일방안과 겹쳐지는 발언을 단 한 개라도 한적이 있는가? (= 기독교인의 소망은 특정한 정권과 겹쳐질 수 있는가?)
유대교와 화해할지라도 기독교고유의 독자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가르침의 변별성은 유지돼야 하는가?(바르트, 본회퍼, 몰트만의 경우) 무속신앙 계열의 新종교에 담긴 도교 요소가 하나님이며, 예수 신앙의 독자성 없이 예수신앙은 도교 요소에 포개어 질 수있는가? (민중신학 및 최근 잘못 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경우)
행동은 예수 신앙의 발로인가? 매저키즘적 대중을 압도하려는 의도로서 ‘사디즘적 욕망’을 보여야 하는 접신 환각의식의 발로인가?
WCC 계열 석학 몰트만이란 사람은 민중교회가 한국의 고백교회라고 지적했다. 즉, 게르만 신화를 도구적으로 사용한 파시즘에 부역한 독일 기독교(파시즘 시대 주류)와 달랐다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이미, 예수 신앙 밖에서 형성된 목적의식이 먼저 있고, 기독교 용어는 포장 수준 아닌가? 물론, 반공보수교회가 신앙적으로 바르기만 했다는 말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 異敎的이었다는 판단에서, 몰트만은 비록 세계 기독교 석학이라도 한국에선 철저하게 헛다리 집지 않았나?
만유화해론이 정통신학을 깨뜨려서 문제인가? 아니면 붕당 파벌 가족주의 상태를 ‘표준’으로 인정한 한국교회 관습에, ‘시민사회’의 정상기능을 전제로 한 것에 낯설음이 문제인가? 지방자치 및 갖가지 분권 정치를 한 연후에도 한국교회는 ‘두 왕국론’에 의존하여, 교회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정치지도자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전방위적 매스미디어의 대중 심리 선동극이 있는 공간에 ‘신학’을 배제한 축자영감설은, 온전히 예수 말씀 보존에 힘이 있는가?
道敎에 왜곡된 기독교는 1965년 민족복음화운동 출범 당시 붕당 망국론을 극복하자는 차원의 ‘복음화’와 정신이 일치하는가? 아니면, 김대중 진영에 봉사하는 차원에 과거 기독교 전성기 기억을 惡用하는가?
성경에 비춰본 통일은 민족교회가 하나라는 소명의식에 호출된 예수제자들의 책임과 의무를 공유하는 공동체적 관계인가, 아니면 神과 인간을 중보하는 중보자로서 정치인이 속을 뻥 뚫어주는 차원으로서 선택하는 정책에 의해서 구현되는 ‘呪術’인가? |
0. 반공이 파시즘이면 민족해방은 특급 파시즘
⑴ 군주제 + 관료주의 + 순응적 대중 = 파시즘, 전체주의, 권위주의의 토양
일본파시즘 | 독일파시즘 | 소련공산주의 | 반공주의 | 민족해방주의 | ||||
천황제 봉건정치 | 봉건전제군주 | 짜르 전제주의 | 조선왕조+일제 체험 | 조선왕조+일제 체험+군사정부체험 | ||||
수동적 대중 + 관료지향형 엘리트 = 시민사회 미 형성 (혹은 아주 약한 수준) | ||||||||
이익 + 민족주의 | 이익 + 게르만 인종주의 | 이익 +러시아민족주의 | 이익 +반공마을주의 | 이익 + 공산마을주의 | ||||
부족신(일본천황)숭배 | 지도자숭배 | 지도자숭배 | 지도자숭배 (반공지도자 영웅화) | 지도자숭배 (민주화지도자 영웅화) | ||||
국가신도 강제 교육 (이익추구 사무라이의 대중포획) | 선전선동 (게르만 나치 관료의 일반 대중 포획) | 선전선동 (공산당 관료의 일반 대중 포획) | 선전선동 (반공 관료의 일반 대중 포획) | 선전선동 (민주화 관료의 일반 대중 포혹) | ||||
㉠ 일본 메이지 계몽주의 : 천황제 보호를 위한 사무라이 관료의 서구 문명 카피
㉡ 독일 계몽주의 : 전제군주제 속에 관료제 속에 약한 시민사회 기반의 근대화
㉢ 소련 계몽주의 : 유럽의 후진 국가 독일에 의존했던 차원에, 전제군주 사회에 흔한 관료제 의존
㉣ 반공주의 : 해방공간 및 권위주의 시기의 관료제 기반 엘리트주의
㉤ 민족해방주의 : 민주화 이후 ‘위원회’등 비 간접 차원의 관료제를 추구한 엘리트주의
- 해방공간의 공산당 : 엘리트는 공산주의 문건의 중화주의 해석. (소련을 명나라로, 공산주의 문건에 성리학적 형이상학으로, 그리고 파벌화된 관료 지향 꿈꾸기.) /// 대중은 샤머니즘의 非도덕주의 적응 (물질이익만 얻는다면 충성 해드립져)
⑵ 반공 /민족해방(민주화) = 순교자 신화
㉠ 순교 = 희생 = 피해 공유(공감) = 연합권력
㉡ 반공 순교 神話의 종결 → 반공체제의 이분법적 배타주의 (=갑질)
- 공산피해자가 반공 체제의 피해자로 분열되어 버림
㉢ 민주팔이 순교 神話의 와해 → 민주화체제의 이분법적 배타주의(=갑질)
- 민주화 형성층이 민주화 체제의 피해자로 분열되어 버림 (2012년 대선에 박근혜 투표층은 거의 대부분 87년 6월에 민주화 형성층이기도 했음)
⑶ 민주화 체제 순교자 신화의 원형 → 아기장수설화
㉠ 희생자(=영웅) → 우리 마을 사람으로 무조건 잘 돼야 할 사람. 희생은 모두 억울
官 (= 법의 집행자)→ 나쁜 놈. 고의, 혹은 작위로 애꿎은 사람을 희생했을 것.
※. 민주화운동 관련 인물 영웅 스토리구조는 천편일률, 아기장수 설화 기반하여 반공시대 피해자의식 공유와 민주화영웅의 도교영웅주의 띄우기와, 그에 수반되는 법질서의 비하로 드러난다.
㉡ 민족해방운동에서 ‘희생’ → 반공시대에 억울함을 느낀 ‘공감 연합’의 상징화
법질서 해체 → 금지된 소망
희생자 긍정적 보상 → 금지된 소망
금지된 소망의 완성으로서 ‘종북 연방제 통일’
※. 보수층은 ‘반공세력’을 ‘反반공’으로 돌려세우는 과정은 반성을 해볼 이유가 있다.
그러나, ‘민주화연대층’을 ‘反민주화’로 돌려세우는 진보층에게도 똑같은 반성의 필요가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 유대교 희생자처럼 주장하기는 했으나, 유대교 희생자 신화는 안 맞는다. 1948년에 WCC가 '반 유대주의 비판 선언을 한 것에 편승하여 국내정치에 적용하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
⑷ 한국 근대성의 역설 : 민족성에 각인된 ‘무교적 나르시시즘’으로 인한 두 갈래의 잘못된 길
㈀ 문명의 성공 → 공존하기 위한 인내 필요 (= 쇠우리)
- 한국 사회는 ‘혼자만’ ‘가족만’ ‘어떤 파벌만’ 잘되려는 파원의 부패를 중앙차원의 규제를 하던 권위주의 시대에서, 시민사회 기준으로 비억압적인 시스템을 건설하는데 실패했다.
반공 권위주의 체제 | 민족해방(민주화)체제 |
붕당(파벌) 망국 제어 문제의식은 정당 | `붕당(파벌) 망국이 아니라 견제속 발전 주장 |
방법에서 과잉 | 20여년 국민과 같이 실험 끝에 ‘완전한 거짓말’임이 드러남. |
현실원칙(권위주의) 對 쾌락원칙(마을주의) | 쾌락원칙의 난맥상으로 노답과 ‘책임전가’ (현실?) 對 쾌락원칙(마을주의) |
- 누구는 파벌망국을 느끼는데, 누구는 파벌이 긍정적이라 주장하고
- 누구는 망국적 증세를 느끼는데, 누구는 민주라고 느끼고
- 누구는 실험 뒤에 지긋지긋해서 환멸을 느끼는데, 누구는 이 체제가 꾸준히 지속되라고 원하고
※. 한국 新자유주의는 脫규제만 하면 신바람 경제가 일어난다며 주장한다. 英美식을 빙자한 일본의 번안물을 수입하되, 그것을 민주팔이식으로 꼬아 버린 흔적이다.
일본 新자유주의는 욕망중심으로 한다 해도 상징천황제 속의 일본 국가종교를 의지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의 新자유주의는 법치도 깨뜨리고 중앙권력도 병신 만들고, 도대체 어떻게 시스템이 돌아가는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 포용(감성) 정치 (지역 감성 내재)→ 타 지역 배제 → 타 지역의 적대세력화
◆. 희생자 정치는 그 희생 감정을 통해서 공유되는 이들 까지만의 포함.
나머지는 배타적 배제.
◆. 배타적 배제된 사람들에겐 자신들은 또다른 가해자 유발
㈐ 군주제적 국가중심의 해소로서 87년 6월 항쟁 → 국민은 ‘사회계약주의’에 의거한 보편적 시민사회를 건설했어야 함. (대체하지 못함은 좌파 공산혁명의 가능성을 키움)
→ 현실은 ‘언론’ + ‘파벌정치’ + ‘소비사회’ : 상향식 정경유착
(군사정부는 하향식 정경유착 = 공보처 + 서열정치 + 계획주의)
군사정부의 권위적 법치주의를 대체하여 시민사회의 공론장 법칙이 적용돼야 한다고 87년 6월 항쟁을 치뤘지만, 5.31교육개혁으로 비정상적으로 커진 ‘서연고’대학을 장악한 좌파 출신의 학연 지연이 ‘파벌정치’와 ‘언론’과 ‘대기업’사회를 소비사회 중심으로 대중을 일차원적으로 지배하며 보편민주주의 가치를 피해가는 상황이다.
즉, 서연고 엘리트가 국가 관료주의의 옷에서 파벌언론재벌 연합의 갑질의 옷으로 옷 바꿔 입은 것 뿐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적인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특정인들에 꼭 맞는 분파주의의 존재이지, 공론장 공적 법칙의 작동은 아니었다.
㈑ ‘통일안’이라면서 지도자에 뻥 뚫어주는 차원의 주권을 맡기고, 자신은 책임과 의무를 안하려는 자세. (군사정부의 ‘국가’에 맡기다에서, 민주화시대는 자기가 믿는 정치인에 맡기다로 바뀐 수준)→ 대중들의 감성을 ‘뻥 뚫어’만 준다면 反민주주의 요소에 무관심한 요소 = 좌파 통일안의 악마성 논증의 어려움 및 보수에 파고든 좌파 문제의 설명의 어려움)
⑸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 친일파시즘이 고려연방제 종북평화 종북 파시즘으로
㈎ 친일 = 친북
- 일제 파시즘이 도교적 정서로 결국 우리 민족성이 사라지는 한일 통합을 의도했듯이
- 종북 연방제가 도교적 정서로 대한민국 국민성이 사라지는 남북통합을 의도하고 있다. (김일성 연방제의 국가연합제 요소로 공존하는 기간은 과도기일 뿐이며, 남북한 영역에서 종북세력의 숫자를 늘려 최종적으로는 적화하려는 의도다. )
천황제 국가신도 교육 | 천황제 숭배 | 내선일체 (최종적 우리 민족의 소멸) |
↓ | ↓ | ↓ |
통일교육 (도교적, 무속신앙적, 非시민사회적) | 6.15 선언 2항으로서 은폐된 고려연방제 주권 숭배 (개념화된 ‘천황제’, 혹은 무속신앙 新종교로 해석된 ‘천황제’) | 종북연방(최종적 대한민국 소멸로서 통일) |
㈏ 반공체제 희생자 민주화인사 = 중보자 (도교자연주의) = 예수 신앙 (삼위일체 신앙이 사라지고, 정치적 방향성에 맞춰짐) / 게르만 민족 이기주의로 설정된 파시즘체제 부역 독일 교회와 뭐가 다름???
민주화 진영은 유영모, 함석헌을 따라서 노자의 道인 自然을 민중이자 하나님으로 부르고, 삼위일체 신앙을 부정한다. 따라서, 이미 정해진 좌파가 무조건 이기는 도식에 기독교회를 정치적으로 줄세워 붙인다. 그리고, 이를 해독 못하는 다수 일반 국민과 他 문명권 기독교인에게 보편타당한 시민문명이라고 거짓말 치는 방식을 취한다.
일제 파시즘에 부역한 한국교회는 천황제 파시즘을 긍정하기 위해서 사실상 삼위일체 신앙을 포기해야 했다고 본다.
민족해방(민주화)통일방안 | 파시즘 체제 부역한 독일교회 |
도교자연주의에 기반된 민주화 영웅주의 -감정적, 도구적, 파벌적 | 서구 자연주의에 기반된 지도자 영웅주의 -계산적, 도구적, 억압적 |
민족해방(민주화)인사의 반공인사에 대한 맺힌 것의 배설감 (지배가치) 에 협력 | 게르만 민족의 유대인에 대한 도구적 지배가치에 협력 |
※. 71년 박정희-김대중 대선 때 박정희가 지도자 영웅주의를 취한다고 파시즘이라 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민족해방(민주화)진영의 김대중, 노무현 지도자 영웅주의는 명백하고 분명함.
㈐ 민족해방 이념은 정확히 말해서 ‘공산민족’의 ‘자본주의 민족’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로 6.25 남침 전쟁도 북한공산집단에겐 민족해방전쟁이다. 공산주의 이념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이 권위있는 단체가 하는 발언을 무조건 믿는 대중들의 관행을 악용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민족해방 = 독립운동”이란 논리를 엘리트 체제가 무자비하게 도배한다.
→ 민족해방이데올로기는 ‘좌파’의 대놓고 하는 人種主義다! (90년대 신한국당 이후 민주화출신 엘리트가 보수정당에 와서 민족해방이데올로기로 좌파를 인종주의적으로 섬기며 보수유권자에 피눈물을 선물하면서도, 보편타당한 일반정치를 구현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정확한 의미의 십계명 중의 ‘9계명’의 위반이다.)
(한국교회는 반공은 회개하면서 민족해방을 회개 왜 안하나!!! 반공의 죄악보다 민족해방주의의 죄악이 크면 컸지 모자라지 않다. 1988년 KNCC선언의 반공회개가 있었다면, 민족해방주의에도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교회가 좌파 뒤봐주기 한다는 의혹 받기에 충분하다!!)
㈑ 일제 파시즘의 일본 천황을 둘러싸고 친일파 라는 특권계급을 위한 한일 통합이듯, 종북연방제(김대중의 3단계 통일방안)은 남북관계에서 (일제 내선일체로 보면‘개념적 천황’이라 파악될 수 있는) 고려연방제 주권의 구현체로 보여지는 6.15 선언 2항을 둘러싸고 ‘민족해방파’라는 인종주의적 특권계급을 섬기며 나머지를 피눈물을 선물하는 불법적인 통일방안이라 보여진다.
→ 일제 말 천황 앞에 모든 종교 줄세우듯, 6.15 선언 2항에 맞춰서 종교를 줄 세우며 그 과정으로 ‘국교금지 정교분리 종교중립’ 헌법 조문을 대놓고 엿먹이면, 그것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평화적 통일인가?
⑹. 예수님은 누구신가?
㈎ 한국민족에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과 맺은 계약과, 그 계약의 완성자로서 ‘화해자’로서 예수인가?
반공체제 피해자, 혹은 공산체제 피해자의 2세, 3세의 배설감으로서 화해를 담은 예수인가?
㈏ 소명 받은 기독교인의 화해로서 세상참여인가?
이미 정치적으로 특정방향으로 계획된 정치참여에 예수 도덕 사탕발림인가?
㈐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인가?
교회는 좌파 목회자의 말을 복면복창할 수동적 교회 대중으로서 하나님인가? (즉, 한치 건너 좌파 목회자 지가 하나님이란 말)
㈑ 예수는 민족해방적 혹은 반공적인 외방향성인가?
예수는 특정한 대한민국 정치 통일방안과 겹쳐지는 발언을 단 한 개라도 한적이 있는가? (= 기독교인의 소망은 특정한 정권과 겹쳐질 수 있는가?)
㈒ 유대교와 화해할지라도 기독교고유의 독자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가르침의 변별성은 유지돼야 하는가?(바르트, 본회퍼, 몰트만의 경우)
무속신앙 계열의 新종교에 담긴 도교 요소가 하나님이며, 예수 신앙의 독자성 없이 예수신앙은 도교 요소에 포개어 질 수있는가? (민중신학 및 최근 잘못 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경우)
㈓ 행동은 예수 신앙의 발로인가?
매저키즘적 대중을 압도하려는 의도로서 ‘사디즘적 욕망’을 보여야 하는 접신 환각의식의 발로인가?
㈔ WCC 계열 석학 몰트만이란 사람은 민중교회가 한국의 고백교회라고 지적했다. 즉, 게르만 신화를 도구적으로 사용한 파시즘에 부역한 독일 기독교(파시즘 시대 주류)와 달랐다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이미, 예수 신앙 밖에서 형성된 목적의식이 먼저 있고, 기독교 용어는 포장 수준 아닌가? 물론, 반공보수교회가 신앙적으로 바르기만 했다는 말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 異敎的이었다는 판단에서, 몰트만은 비록 세계 기독교 석학이라도 한국에선 철저하게 헛다리 집지 않았나?
㈕ 만유화해론이 정통신학을 깨뜨려서 문제인가? 아니면 붕당 파벌 가족주의 상태를 ‘표준’으로 인정한 한국교회 관습에, ‘시민사회’의 정상기능을 전제로 한 것에 낯설음이 문제인가?
지방자치 및 갖가지 분권 정치를 한 연후에도 한국교회는 ‘두 왕국론’에 의존하여, 교회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정치지도자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전방위적 매스미디어의 대중 심리 선동극이 있는 공간에 ‘신학’을 배제한 축자영감설은, 온전히 예수 말씀 보존에 힘이 있는가?
㈖ 道敎에 왜곡된 기독교는 1965년 민족복음화운동 출범 당시 붕당 망국론을 극복하자는 차원의 ‘복음화’와 정신이 일치하는가? 아니면, 김대중 진영에 봉사하는 차원에 과거 기독교 전성기 기억을 惡用하는가?
㈗ 성경에 비춰본 통일은 민족교회가 하나라는 소명의식에 호출된 예수제자들의 책임과 의무를 공유하는 공동체적 관계인가, 아니면 神과 인간을 중보하는 중보자로서 정치인이 속을 뻥 뚫어주는 차원으로서 선택하는 정책에 의해서 구현되는 ‘呪術’인가?
1. 독일 파시즘
주로 1980 ~ 90년대에 출간된 이들 역사가의 대표적인 파시즘 연구는 제각기 독자적인 탐구의 결과로서 서로 부분적인 시각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축으로 일반적 파시즘의 성격에 대한 느슨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즉, 파시즘은 근대적 대중 정치의 한 부류로서 특정한 민족 혹은 종족(ethnic) 공동체의 정치/ 사회문화에 대한 총체적이고 혁명적인 변화를 그 목적으로 삼는다. 이데올로기, 지지세력, 운동으로서의 조직, 정치체제 면에서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파시즘에 내적 응집력을 부여하고 그것에 대한 대중의 온전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힘은 파시즘이 갖는 신화적 측면에 있다. 그리고 그 신화의 핵심 내용은 몰락과 쇠퇴의 위기에 직면한 민족 공동체가 곧 도래할 포스트- 자유주의적 질서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 재생하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특정한 정치 이념, 운동, 체제가 다양하고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각양각색의 면모(예컨대 지도자 숭배, 권위주의, 반자유주의, 반사회주의, 생물학적 인종주의, 반유태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등)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것에 파시즘이라는 일반명사를 부여할 수 있는 근거는 그것이 극단적 민족주의의 혁명적 형태로서, 몰락하고 있는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새로운 엘리트가 취하는 극단적인 행위에 대한 온전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중을 동원하는 일종의 대중주의(populism) 의 차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혁명적 부활을 꿈꾸는 극단적 민족주의 자체의 역동성과 그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기본적인 힘은 바로 그것의 신화적 성격에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새로운 합의 의 파시즘 정의는 대략 3개의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신화가 그것이다. 여기서 신화가 의미하는 바는 상식적 의미에서의 잘못된 믿음이나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에 대한 비전과 이미지의 마력을 통해 강한 감정적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신화의 이러한 측면은 소렐(Georges Sorel)의 신화이론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소렐에 의하면 신화는 이미지의 총체로서 인간의 온갖 감정을 촉발하는 직관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신화는 본질상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분석과 추론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신화가 발휘하는 막대한 힘의 원천이다. 소렐이 볼 때 인간은 그 진위 판단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어떤 것을 믿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신화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제로서 인간의 상상력을 철저하게 장악하고 그 감정을 자극하여 실제 행동에 나서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그와 같은 신화의 예는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나타났던 예수재림의 신화, 1789년 프랑스혁명이 만들어낸 다양한 신화들, 이탈리아 통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마찌니의 통일된 이탈리아 민족의 신화, 그리고 부르주아지에 맞서 전 노동자들이 일으키는 총파업의 신화 등이다. 요컨대 소렐에 의하면 이러한 신화는 대중의 정서와 감정에 호소하여 이들의 온전한 지지를 확보하고 또 이들을 동원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합의는 이러한 소렐식의 신화적 측면을 파시즘의 최소요건(fas-cist minimum) 으로 삼음으로써 기존의 파시즘 해석과 결별한다. 먼저 새로운 합의는 파시즘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라는 입장과 아울러 파시즘은 서로 본질적인 관련성이 없는 단편적 주장과 구호들의 집합체이므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볼 수 없다는 견해 모두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합의 의 입장에서 볼 때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논리의 표면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서 움직이는 신화의 구조적 수준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며, 이러한 신화야말로 특정한 시간적, 공간적 환경 속에서 어떠한 내용의 주장이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 결합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책, 선전, 문화, 의식(儀式), 상징 등의 수준에서 어떻게 구현될 것인지를 결정해주는 것이다. 파시즘의 정치사상은 전통적인 정치이론과 같은 맥락에서 판단될 수 없다. 그것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같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구축된 체계와는 공통점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파시스트 정치사상을 관찰하고 그것의 모호함과 애매함을 비난하는 많은 연구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 스스로는 그들의 정치사상을 체계가 아니라 태도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상 민족 숭배의 틀을 제공하는 일종의 신학인 것이다. (김용우, 120-122쪽)
물론 파시즘이 이끌어낸 대중의 동의의 정도와 그 층위를 밝히는 일, 그리고 이른바 파시스트 망탈리테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은 여전히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파시즘을 경험한 토리노 노동자 70명을 상대로 6년에 걸쳐 이루어진 구술사 연구는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측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들 70명의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파시즘에 대한 태도는 예컨대 동일한 사람이 파시스트 체제의 어떤 측면은 수용하면서도 다른 측면은 거부하는 식의 대단히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비참한 최후와 패전의 참담함이 여전히 사람들의 생생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1945년 무렵 한 반파시즘 저항운동가 출신 여성이 기차 여행 중에 겪은 경험은 파시즘이 대중들의 마음속에 각인시킨 인상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나는 여섯 아니면 일곱 명의 사람들과 같은 칸에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차례차례 파르티잔들을 도둑, 살인자, 광신자라 저주를 퍼붓고 있었습니다. … 만약 파르티잔들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파시스트들이 이들을 결코 죽였을 리가 없다는 식이었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와 울고 말았습니다. 파시즘은 과거의 구조들을 척결하고 그것을 새로운 망탈리테로 대체하며 사생활 속으로 깊숙이 침투하려 하였다. 대중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영토화 하려는 파시즘의 시도가 가장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대상은 아마도 파시스트 지배 시설 탄생한 젊은이들이었을 것이다. 저는 파시스트 체제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 저는 파시즘을 믿고 그 체제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대단히 확신에 찬 파시스트였습니다. … 그리고 당연히 늑대의 아들단(Figli della lupa) 과 바릴라단(Balilla) 그리고 다음 단계의 단체에 차례차례 가입하였습니다. 산촌 출신의 평범한 이탈리아 젊은이가 고백한 자신의 삶의 행적이지만 이러한 식의 삶이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946년 한 이탈리아 언론인의 지적처럼 파시즘 시절의 젊은이들은 창 없는 집 에서 자라나 파시즘 외에 다른 도덕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될 기회가 애초부터 박탈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파시즘의 과거와 결별하는 일, 그리고 파시즘의 부활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은 대중의 의식 속에 알게 모르게 내면화된 파시스트 망탈리테를 드러내고 분석하며 비판하는 작업 없이는 완결될 수 없다.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에 대한 새로운 합의는 그와 같은 작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 분명하다.(김용우, 138-139쪽) |
⑴ 하층 중산층의 심리를 이용
종교적 경험, 특히 신비적 경험의 본질인 세계와 하나이며 융합되어 있다는 느낌(대양적인 느낌)과 사랑하는 사람과 일체가 되는 경험은 ‘프로이트’에 의해 초기의 ‘무한한 자기도취’의 상태로 퇴행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에리히 프롬 1, 187쪽)
일차적 자기 도취는 어린이의 정상적인 생리적 발달 정도와 일치하여 나타나는 하나의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자라나는 어린이가 사랑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거나 그 능력을 잃어버릴 경우 자기도취가 나이가 들었을 때 나타난다.(프로이트는 이를 2차적 자기도취라고 불렀다) 자기도취는 중증의 모든 정신병리의 본질이다. 자기 도취에게 빠진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한다. 즉 자기자신의 사고, 감정, 욕구만이 존재한다. 외부의 세계는 객관적으로 인식되거나 경험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외부세계에 있는 그대로의 형태나 욕구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심한형태의 자기 도취는 여러 형태의 광기에서 나타난다. (에리히 프롬 1, 39쪽) |
나찌즘은 아무런 순수한 정치적 및 경제적인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로 나찌즘의 원리가 극단적인 기회주의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이다. 문제되는 것은 정상적인 발전 과정에서는 금권과 권력을 획득할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한 수십만의 소시민이, 이제는 나찌 각료의 구성원으로서 상층계급을 강요하여 상당량의 재산과 위신을 그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찌기구의 구성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태인들과 정적으로부터 빼앗은 직장이 주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록 그들은 더 많은 빵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구경거리들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디즘적인 모습 및 그들 이외의 인류 위에 서는 우월감을 부여하는 이념에 의해서 생긴 감정적인 만족은—적어도 잠시 동안은—그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빈곤하였다는 사실을 보상할 수 있었다.(에리히 프롬, 272쪽)
어떤 이유 때문에 나찌의 이념이 하층 중산계급에게 그토록 호소할 수 있었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층 중산계급의 사회적 성격 속에서 탐구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들의 사회적 성격은 노동자 계급, 그리고 상층 중산계급과 1914년의 전쟁 이전의 귀족이 가졌던 사회적 성격과는 명백히 다르다. 사실 이러한 하층 중산계급에게는 전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즉 강자를 사랑하는 것, 약자를 증오하는 것, 비열함, 적개심, 돈에 있어서나 감정에 있어서나 인색한 점, 그리고 본질적으로 금욕주의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삶에 대한 견해는 좁아서 이방인을 위험하게 보고 증오하며, 자기들이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들의 질투심을 도덕적 분노로 합리화하면서 호기심과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삶은 결핍이라는 원칙에—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바탕을 두고 있었다.(에리히 프롬, 262쪽)
삶을 향한 충동이 방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파괴를 향한 충동은 더욱 더 강해지며, 삶이 실현되면 될수록 파괴성의 힘은 더욱 더 적어진다. ‘파괴성’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삶의 결과이다. 삶에 대한 억압을 형성하는 그러한 개인적․사회적 조건은, 말하자면 특수한 적대적인 경향-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이 발육되는 저장소를 형성하는, 파괴를 위한 열정을 만들어낸다.
사회 과정 속에서의 파괴성이 가지는 동적인 역할을 인식하고 파괴성의 강도를 위한 특수한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도 또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략)
현대에 들어와서 하층 중산계급의 파괴성은 나찌즘의 대두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나찌즘은 이러한 파괴적인 노력들에 호소하여 그러한 노력을 적과이 싸움에 이용하였다.(에리히 프롬, 228-229쪽)
대중심리는 어중간하고 유약한 것에 대해서는 감수성이 둔한 법이다. 마치 여성과 같은 것이다. 그녀들의 정신적 감각은 추상적인 이성의 근거 등에 의해서 결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힘에 대한 정의하기 곤란한 감정적인 동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한 자를 지배하기 보다는 강한 자에게 굴복당하는 것을 한층 더 즐겨한다. 대중 또한 애원하는 자보다는 지배하는 자를 더 좋아하고 자유주의적인 자유를 시인하는 것보다는 다른 교설의 병존을 허용하지 않는 교설에 의해 속으로 한층 더 만족감을 느낀다. 그들은 또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유를 주면 이내 버림받을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렴치한 정신적 테러를 당하고 있다거나 울화가 터질 정도로 인간적 자유를 학대받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목적이 확실한 이 방약무인한 힘이나 잔학성 앞에 언제나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만일 사회민주당 앞에 좀더 진실성 있고 동시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잔학한 실행력을 갖춘 교설이 나타난다면 설사 그 투쟁이 험난하고 길더라도 후자가 이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아돌프 히틀러, 171-172쪽)
정치적 지도자에게는 자기 민족의 종교적인 교의나 제도가 항상 불가침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정치가가 아니며, 만일 그에게 그 능력이 있다면 종교개혁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밖의 태도는 특히 독일에선 파멸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나는 범독일의 운동과 로마에 대한 투쟁을 연구할 당시 그리고 특히 그 뒤에 다음과 같은 확신에 이르렀다.(중략) 범 독일주의 운동이 만일 대중심리를 조금만 더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이 운동은 이런 실패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성과를 빼앗아 가지려면, 순수하게 심리적인 고려를 해서라도 결코 대중에게 둘이나 또는 그 이상의 적을 제시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투쟁력을 완전히 분열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운동의 지도자가 알고 있었다면, 이 이유만으로 범 독일주의 운동의 칼 끝은 오로지 하나의 적에게만 향했을 것이다. 어떤 정당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경우 지극히 하찮은 일조차 실제로는 도달할 수 없는데, 모든 것을 욕심내는 만물박사에 의해서 지도되는 것 이상으로 정당에 있어 위험한 일은 없다. (중략) 사람들은 역사에서 바로 현재에 대한 이용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정치적 지도자라고 자만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사람은 실제로 자만하고 있는데, 비록 매우 공상적인 바보이고, 아무리 좋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상의 무능을 보충하지는 못한다. 대개의 경우 어떠한 시대에서나 참으로 위대한 민중 지도자의 기술이란 첫째로 민중의 주의를 분열시키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어떤 유일한 적에 집중시키는데 있다. 민중 투지의 쏠림이 집중적이면 집중적일 수록 운동의 자석적 흡인력은 더욱더 커지고 타격강도도 강해지는 것이다.(아돌프 히틀러, 243-245쪽)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 많이 나를 생각하게 한 것은 개개인이 대개 책임감을 분명히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의회는 무엇인가를 결의한다. 그 결과가 아무리 엉뚱한 일이라고 해도 아무도 그것에 책임을 지지 않고, 아무도 책임을 꾸짖는 일이 없다. 도대체 파탄에 그것에 책임을 자지 않고, 아무도 책임을 꾸짖는 일이 없다. 도대체 파탄에 직면하여 정부가 총사직하는 것만으로 무슨 책임을 졌다는 것인가? 또는 내각을 바꾸고 의회를 해산하는 것만으로 해결된다는 말인가? 도대체 다수의 우유부단한 인간들에게 어느 세월에 책임을 지울 수 있을 것인가? 책임감이라는 것은 본디 개인에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주로 다수의 인간 의지와 기호를 고려하면서 입안하고 수행한 행동에 대해서 정부의 지도적 인사에게 실제로 책임을 지게할 수 있을까? 또는 지도적인 정치가의 과제는 창조적인 사상이나 계획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기획의 독창성을 텅빈 두뇌를 가진 양떼에게 이해시키고, 그들의 호의어린 찬성을 얻기 위한 기술에서만 볼 수 있는 있는 것일까? 정치가의 기준은 그가 큰 방침을 정하거나 커다란 결단을 내려 정치가다운 영리한 기술과 같은 고도의 설득 기술을 갖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인가? 지도자의 무능이란 이리하여 어떤 일정한 이념에 대해 우연히 모인 군중의 과반수를 얻지 못한다고 하는 일로 증명되는 것인가? 실제로 이 군중이 애당초 그 성과가 그 위대함을 나타내기 전에 그에 관한 이념을 이해한 일이 일찍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이 세상의 모든 독창적인 사업은 대중의 타성에 대한 천재의 눈에 보이는 항의가 아닌가? (아돌프 히틀러, 207-208쪽) |
권위주의적인 성격은 활동과 용기, 또는 신념을 결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성질들은, 복종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그것이 가지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그에게 대하여 가진다. 권위주의적인 성격에 있어서 활동력은 그것이 극복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무력감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활동력은 자기 자신의 자아보다 더 높은 어떤 것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중략)
권위주의 철학에는 평등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관습적으로 또는 그것이 자기의 목적에 맞기 때문에 평등이라는 말을 사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평등은 정서적으로 경험이 도달할 수 없는 것에 관계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에게 실제적인 의미나 비중을 가지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힘을 가진 사람과 힘이 없는 사람, 즉 우월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의 새도 메저키즘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오로지 지배나 복종만을 경험하며, 결코 연대성은 경험하지 못한다. 성적인 차이라든가 인종적인 차이와 같은 차이는 그가 볼 때, 우월이나 열등의 필연적인 징표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 차별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새도 매저키즘적인 노력과 권위주의적인 성격에 대한 묘사는 보다 극단적인 형태의 무력함을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숭배의 대상 및 지배의 대상과 상리 공생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무력함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형태를 말하고 있다.(에리히 프롬, 213-215쪽)
사디즘적인 인간은 매저키즘적인 인간이 그의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잡아먹힘으로써 안정을 추구하는 대신에 사디즘적인 인간은 어떤 사람을 잡아 먹음으로써 안정을 추구한다. 두 가지 경우 다 개인적인 자아의 전체성은 상실된다. 매저키즘적인 경우에 있어서, 나는 외부적인 힘 속에서 나 자신을 해체시켜 나 자신을 상실한다. 사디즘의 경우에 있어서는, 나는 다른 존재를 나 자신의 한 부분으로 만듦으로써 나 자신을 확장시키며, 그렇게 하여 나는 개인적인 자아로서 결여하고 있던 힘을 획득한다. (에리히 프롬, 196쪽)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파시즘은 산업화 과정에서 패배한 자들의 운동이었다. 경제성장의 관점에서 분석하자면, 그들의 급진화의 정도는 틀림없이 산업화의 정도에 비례하는 것 같다. 한 사회가 고도로 산업화되어 감에 따라 그 과정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반응도 격렬해진다. (H.S 휴즈, 142쪽)
개인적인 자아를 근절시키고, 그렇게 하여 참을 수 없는 고독감을 극복하려는 기도는 단지 매저키즘적인 노력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일면은 자기의 외부에 있는 보다 더 크고 강력한 전체의 일부분이 되어 그 속에 스며들어 거기에 참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힘이란 인간이나 제도나 신이나 국가나 양심을 말하며, 또는 정신적인 강제도 있다.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며, 영원하고도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힘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인간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과 영광에 참여하려고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굴복시켜 그와 연관된 모든 힘과 긍지를 포기하여 버린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스며드는 권력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안정과 긍지를 획득한다. 또한 인간은 회의의 고통을 벗어나 안정을 얻는다. 매저키즘적인 인간은 그의 주인이 그의 외부에 있는 권위이든 아니든 간에, 또한 양심이라든가 정신적 강제로서의 그 주인을 그가 내면화했던 안했든 간에,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부터 면제되었으며, 자기 자신의 운명을 위한 최종적인 책임을 벗어났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할 것인가 하는 회의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 192-193쪽)
우리가 이 章에서 설명하려고 했듯이, 소외된 인간은 건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와 타인들에 의해 조종될 수 있는 하나의 사물, 하나의 투자대상으로 체험하기 때문에 그는 자아의식이 결핍되게 마련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자아의식의 결핍은 깊은 불안을 낳게 마련이다. 허무라고 하는 깊은 나락에 직면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안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훨씬 더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다. (중략) 그는 가치판단의 기준을 타인들과의 동조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타인들의 인정에 두기 때문에 자신이 이탈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회의를 느끼게 하는 어떤 사상행위등에 의해서 자기감각이나 자존심에 위협을 느끼게 마련인 것이다.(에리히 프롬 1, 193쪽)
이와 같이 욕망을 억제하려는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은 공공연한 권위가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결과적으로 자아가 마비되고 파멸상태에 빠지게 된다. 만약 내가 욕구의 충족을 연기하지 않는다면(그리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만 원하도록 조건지어져 있다면) 나는 갈등도 회의도 없고 결정을 내릴 것도 없다. 나는 자신과 함께 혼자 있는 일이 결코 없이 일을 하거나 즐기거나 항상 바쁠 뿐인 것이다. 나는 항상 쾌락에 열중해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나 자신으로 의식하고 반성할 필요가 없다. 나는 말하자면 욕망과 충족의 기관일 뿐이다. 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해야 하고 또 이 욕망들은 경제적 장치에 의해 항상 자극받고 지배된다. 이들 대부분의 욕망은 인공적인 것이다. (중략)
쾌락은 주로 소비와 획득의 충족에 있다. 상품, 경치, 음악, 음료, 담배, 대중강의 책, 영화 등 모든 것이 소비되고 삼켜져 버린다.(에리히 프롬 1, 157쪽)
만하임은 히틀러의 지배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근본 구도를 바꾸지 않았다. 물론 이 체험이 그의 정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은 더욱 단호해졌다. “현대사회의 근본 악은 다수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구조물이 대사회에 꼭 필요한 유기적 조직체를 형성하지 못한 사실에 있다.” 만하임에 의하면 근본원인은 19․20세기가 비합리주의의 오류의 기능화가 가능하게 했던 기초민주화를 이룬데 있다는 식이다. 이것은 대중화된 사회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형식화되지 못하였고 사회구성체로 정립되지 않은 비합리주의들이 정책속으로 파고 들게 되었다. 이런 상태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대중도구는 합리적인 선도가 필요한 그 자리를 비합리성으로 뒤집어놓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나친 민주주의와 결핍된 민주주의, 요컨대 민주적 체험과 전통의 결핍이 독일에서 파시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근본원인이었다는 결론을 끌어냈던 것이다. 요컨대 만하임은 제국주의적으로 영락한 수많은 반민주적 자유주의의 대리인들과 똑같은 형태를 보였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결과를 두려워하여 민주주의에 반대했고 그러면서 가면을 쓰면서 반우익, 반반동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구태의연한 방어물로 이용하면서 히틀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던 것이다. 이때 이들은 소위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공동의 적으로서 파시즘과 볼세비즘을 동일시한 사회민주당의 선동정책을 그야말로 무비판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게오르그 루카치 1, 702쪽)
히틀러는 사회적 민족적 선동을 동원하여 독일 대중들을 유혹하여 장악했었다. 이것은 극단적 비합리주의를 토대로 하여 생겨난 그의 신화가 두 가지 면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로 그가 만든 신화는 그 자체로 인정받은 독일 국민의 특이한 민족적 감정을 제국주의적 국수주의의 이데올로기, 즉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학살하는 제국주의적 침략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둘째로 그 신화는 독일 독점자본주의의 무한한 권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면에서는 극반동적, 극야수적 방식을 동원하여 가능했고 형식적으로는 선동 방식을 빌려 완전히 새로운 혁명적 사회질서를 구현한다는 이름하에 이루어졌다. 소위 새로운 사회질서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안고 있는 딜레마를 극복한 사회라는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1, 837쪽)
⑵ 독일 민족주의의 이방인혐오증으로서 反유대주의
그런데 나는 여기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사이의 차이점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종주의가 민족주의로 환원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파시즘을 이해하는데 인종주의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나치즘이 ‘정통’ 파시즘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파시즘과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이유로 나치즘의 생물학적 인종주의와 반유태주의를 들고 있는 주장들은, 나치즘의 생물학적 인종주의와 반유태주의가 민족주의의 이방인혐오증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파시즘에서 발견되는 여러 유형의 민족주의를 개별적인 특징을 통해 포착한다고 하더라도, 통합적 민족주의, 급진적 민족주의, 초민족주의 등이 형용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들은 민족주의 논리와 인종주의 논리라는 근본적인 특징을 공유한다.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이방인 혐오증의 요소가 있다. 다시 말해 이방인 혐오증은 민족주의 논리의 일부다. 그리고 또한 민족주의는 항상 반 유태주의와 인종주의를 불러들일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마크 네오클레우스, 86-87쪽)
사회민주당의 신문을 유대인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차차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상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다른 신문의 상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내가 받은 교육과 이해력이 미치는 한에서 정말 국가주의적이라고 부를만한 신문 중에는 유대인이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라도 이런 종류의 마르크스주의 신문기사를 읽으려 했지만, 읽을 수록 혐오감만 커지므로 이번에는 이 총괄적인 나쁜 일 제조업자들을 좀더 자세하게 알려고 했다. 이들은 발행인을 비롯해서 모두가 유대인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다 손에 넣은 사회민주당의 팸플릿에서 그 편집자에 대해 조사했다. 유대인이었다. 나는 거의 모든 지도자에 대해서도 살펴봤다. 의회의원이든 노동조합 서기이든, 또 단체의장이든 거리의 선동자이든 그 대부분이 한결같이 ‘선택된 민족’에 속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같은 불쾌한 현상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아우스테를리츠, 다비드, 아들러, 엘렌보켄 등의 이름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한가지 사실은 분명해졌다. 몇 개월 동안 나는 어느 정당의 시시한 대표자들과 심한 논쟁을 벌여왔는데, 그 당이 주로 특정 이민족의 지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자신들이 독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속으로 기뻐한다는 것을 내가 결정적으로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아돌프 히틀러, 190쪽)
마르크스주의라는 유대적 교설은 자연의 귀족주의적 원리를 거부하고, 힘과 강력함이라고 하는 영원한 우선권 대신에 대중의 수와 그들의 공허한 무게에 집착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그처럼 인간에게 있는 가치를 부정하고, 민족과 인종의 의의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와 함께 인간성에 있어서 그 존립과 문화의 전제를 빼앗아가고 만다. 마르크스주의는 우주의 원리로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질서를 마지막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 인식할 수 있는 최대의 유기체에 그런 법칙을 적용한 결과는 단지 혼돈뿐인 것처럼 지상에서는 이 별의 주민에게는 오직 자기 파멸이 있을 뿐이다.
유대인이 마르크스주의 신조의 도움을 받아 이 세계의 여러 민족을 이긴다고 한다면, 그들의 왕관은 인류의 죽음을 상징하는 화관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이 행성은 다시 수백년 전처럼 아무도 살지 않는 에티르 소을 회전할 것이다.
영원한 자연은 그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를 가차없이 처벌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날 전능한 조물주의 정신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을 마곡 주님의 일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193쪽)
이제 ‘민족(Volk)’이라는 낱말의 사용에 대해 알아보자. 나치언어에서 이 낱말은 가장 핵심적인 낱말이다. 이 낱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첫째, 시민적 데카당스와는 반대로 원시 그대로의 순수성이 들어 있으며, 둘째, 정치적 단위로서의 국민이라는 뜻과, 셋째, 계급과는 반대로 인종적으로 통일된 단위라는 뜻이 들어 있으며, 넷째, 피와 대지에 의해 역사적이고 운명적으로 규정된 관념이 들어 있다. 따라서 민족이라는 낱말의 개념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강하게 갖는다. 나치는 이를 이용하여 독일 민족이라고 하는 위대한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를테면 그들은 유태민족이나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민족을 독소와 세균으로 은유화 하여 독일민족과 대비시켰으며, 독일민족이라는 말에 놀라운 신앙의 힘과 끝없는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족이라는 낱말에는 강한 호소 기능이 자리하게 된다. 이 낱말은 낱말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보다는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격정적 내용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이 낱말은 자신을 단념하고 소위 외국인에 대한 공격적 입장을 불러일으킨다. ‘동포’, ‘외국의 독일민족’, ‘민족국가’ 그리고 다른 많은 낱말결합은 늘 반복해서 이러한 표상을 상기시킨다. 민족이라는 말은 오로지‘독일민족(ein deutsches Volk)’을 위해 사용되도록 언어유도 되었다.
‘민족’이라는 낱말은 많은 합성어와 파생어를 만들어 낸다. 이를테면 ‘민족성(Volkstum)’, ‘민족적인(volkstümlich)’ 등의 파생어를 비롯하여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 ‘동포(Volksgenosse)’, ‘위대한 민족(Großvolk)’ 등의 합성어가 당시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에서 ‘민족공동체’라는 낱말은 사회 각계 각층의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독일인들이, 피와 대지로 묶이는 운명공동체로 만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동포(Volksgenosse)’라는 말은 나치언어에서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을 말한다. 원래의 이 낱말에는 중립적, 사회적, 인종적 관점의 세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나치언어에서는 이 세 가지 의미가 서로 뒤섞이어 사용되지만, 주로 인종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가 강조되어 사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1933년 이전에는 여러 진영에서 사용되어 왔던 ‘동포’라는 말은, 나치가 집권한 이후 그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급기야 이 말은 연설이나 포고문에서 일반 대중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굳어져 사용되었다.(김종영, 236-237쪽)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1933년에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시작되어 유대인 상점의 약탈, 간간이 있던 폭력, 유대 기업에 대한 불매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1933년 4월 1일 전국적인 규모의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이 발생했다. 이 운동은 돌격대(SA)를 위시한 당의 급진주의자들의 압력으로 나온 것이었다. 이들은 그전까지 나치가 “유대문제”해결책으로 표방한 법적 차별과 시민권 박탈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한 히틀러는 불매운동으로 돌격대의 공격적 성향에 활로를 터 주고자 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에 대한 법적 조치, 특히 영업에서의 제재 조치가 필요함을 보여주길 원했는데, 이것은 영업에서 유대인과 경쟁하는 중간계급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매운동은 외국의 부정적 반응,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적인 권력 엘리트들의 소극적 반응, 무엇보다도 독일대중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실패로 끝났다.
유대인에 대한 다음 조치는 1933년 늦봄에서 1935년 사이에 유대인을 각종 직업에서 추방한 것이었다. 공직, 사법, 의료, 공립학교, 대학, 군대, 문화단체, 출판, 기타 직업에서 유대인 채용이 제한되었다. 또 유대인은 각종 직업 단체, 스포츠 단체, 노동 조직에서 회원이 되지 못했다.
나치는 1935년 봄, 여름에 다시 한 번 반유대 운동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선동은 아래로부터, 즉 대관구와 그 이하의 수준에서 활기를 띠었다. SA의 축출이후 분명한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 있었던 나치 활동가들에게 반유대 폭력은 그들의 존재이유를 제공하고 울분을 발산하는 통로가 되었다. 당과 제국의 지도부는 선동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며 폭력을 방치했다.
1935년의 새로운 반유대 운동은 유대인에 대한 분노에 여론을 주목시킴으로써 제3제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만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1935년 여름의 반유대 폭력은 대중의 불만을 유대인에게로 돌리게 하는데 성공하기는커녕 당과 당원에 대한 비판의 토대를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당에 대한 불만을 고조시키기만 했다. 평당원들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울분을 쏟아 내는 운동은 대중으로 하여금 나치당을 지지하게 하기보다는 외면하게 한 것이었다. 1935년 나치의 인종주의 선전은 유대인과 경제적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위협했지만 대다수 독일인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들의 행동은 경제적 이익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치가 불매운동에서 행사한 압력은 여론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와 같은 단체로부터 그 어떤 조직적인 저항에도 부딪치지 않았다. 그 결과 나치의 선전은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동안 유대인의 상업 활동을 위축시켰다. “불매운동”에는 폭력이 수반되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을 공공연하게 구타하고 고문하는 식이었다. 나치 당원이 아닌 사람들은 이러한 폭력을 크게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은 유대인에 대한 동정심에서보다는 평화를 어지럽히는 데 대한 분노였다. 프라하로 망명한 사회민주당 지도부에게 보내 온 베를린 발보고서에 의하면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테러를 거부했다. (방청야, 19-20쪽)
히틀러는 유대인을 뿌리 뽑아야 할 악의 근원으로 간주하였으며 전세계의 유대인을 멸절시키려한 계획은 동방에서의 영토확장을 위한 반유대주의의 기조가 되었다.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5단계로 나뉘어 진전되었고 더욱 폭력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첫 단계는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시작되어 유대인 상점약탈, 폭력, 유대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 주를 이루었으며 법률의 제정으로 유태인은 행정관서와 법조계로부터 추방되었고 기타 직업에서 유대인의 채용이 제한되었으며 각종 단체, 조직에서 회원이 되지 못하였다.
2단계는 1935년 뉘른베르그법을 제정함으로 유대인을 모든 공공생활과 사회생활에서 몰아내고 정치적 권리를 박탈시켰다. 이로 인해 유대인은 독일 국적을 박탈당하고, 종속민의 지위로 전락했으며, 유대인과 아리아 민족의 결혼의 금지등 뉘른베르그법은 실제상 나찌 인종주의를 규정하였고, 나아가 반유대주의 규정들과 선언들에 관한 원리로서 공헌하였다.
3단계는 유대인을 대규모 검거하면서 조직적인 폭력과 집단수용소에 대규모 감금시키는 사태로 발전되었다. 1938년은 유대인을 향한 나치정권의 최악의 시간으로 나치에 의해 독일로부터 폴란드로 추방된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던 젊은 유대 청년그린츠판이 독일 대사관에 침입하여 독일 참사관 한명을 암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나치로 하여금 본격적인 유대인 박해를 촉진시켰다. 이 사건후 돌격대원들에 의하여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테러가 행해짐으로 독일내의 유대인 거주지역은 방화되었고 유대인 묘지는 파혈되었으며, 유대인의 문화행사의 출입금지, 그리고 물건의 구입이나 소유도 금지되었다.
제4단계는 유대인 이민의 단계로 나치당은 독일유대인의 이민을 제촉하고 제한했으며 유대인 대량의 조직적 박멸이 독일 국토 밖에서 일어났다. 이민은 수용하는 나라들은 제한성을 가졌고 유대인들은 적응, 의사소통의 장벽, 제정적 고민등의 문제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마지막 제5단계는 최종 해결로 2차 세계대전에 들어서면서 유대인 박해는 유대인 추방과 유대인 학살로 변했다. 이는 히틀러 자신이 채택한 조치로 1941년에 시작되어 집단수용소의 목적이 구금에서 처형으로 변질되어 무자비하고 조직적인 계획으로 제거되어졌다.
유대인에 대한 미움의 뿌리는 오랫동안 역사적 문제로 존재해왔으며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Holocaust)를 통하여 하나의 실체로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사건은 유대인들의 문제를 ‘집단적 사건’ 또는 ‘실체적 현상’으로 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나치에 의한 박해는 생사의 문제로서 그들은 민족의 피난처를 찾을 필요가 생겼으며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은 유대인들의 독립을 위한 이념 확립 및 시온주의 운동을 통하여 그들의 역사적인 본향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1933년 이후의 반유대주의는 국가이데올로기로 국가사회주의가 고안해 낸 사상초유의 야만이었다. 그리고 반유대주의를 기조로 한 나치주의는 단순하게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반인류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인종차별사상을 바탕으로 시도된이러한 집단적인 만행은 계획적이었으며 그것은 인종청소를 위한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방청야, 33-34쪽)
1933년 이전의 독일 여성들은 직장이나 공공 영역에서 활동이 가능했지만, 히틀러의 집권이후 여성의 영역은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되었고, 공공 영역에서의 정치 활동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진 것은 여성과 남성의 생리학적 차이나 생물학적 운명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 ‘인종’적으로 감성적인 성격을 지녀 남성과 차이가 있다는 관점 때문이었다. 나치는 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일어났던 여성해방과 권리신장이 국가적 위기를 불러온 원인이라고 보았으며, 사적 영역에서 탈피해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에 관심을 가지다보면 가족이나 공동체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나치정권은 아리아인들에게 개인의 권리보다는 국가가 우선한다고 강조했으며,여성의 모성 본능을 강조해 출산율을 높이려는 출산정책을 추진했다.
이렇듯, 나치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본성과 역할을 강조하고 여성의 영역을 결정한 인종정책이었다.특히 나치는 출산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출산장려정책 뿐만 아니라 출산통제정책을 동시에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여성의 사적영역까지 깊숙이 개입해 가족제도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한편으로 나치는 출산장려정책을 통해 순수한 독일민족, 즉 ‘가치 있는’아리안 인종의 증가를 위한 제도를 시행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되었던 유대인과 집시들을 출산통제정책을 통해 제거하려고 했다. 더 나아가 아리안 종이라도 가치 기준에 미달되거나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인식된 여성들, 특히 여성 동성애자, 미혼모 등은 재교육을 통해 교화시키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비아리안 인종과 더불어 잔인하게 다루어졌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나치독일시기 여성정책, 특히 출산정책은 ‘차별’과 ‘배제’라는 이중적인 코드를 통해 자행된 명백히 비윤리적인 측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김영임, 45-46쪽)
나치당은 1919년 결성한 독일노동자당으로 출발하여 1920년 이를 나치당의 정식명칭인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 Socialist Workers Party, the Nazis)으로 개칭했다. 이를 나치(Nazi) 또는 NSDAP(독일 명칭;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로 줄여 표기했다. 나치당은 대독일제국의 건설, 베르사유 조약 반대, 반유대주의를 중심 이데올로기로써 25개조의 강령을 발표하였다. 1921년 히틀러는 나치당의 과격파의 지지를 얻어 총수가 되었고, 이후 히틀러는 당의 선전활동에 힘쓰며 나치당의 대중적인 성장을 도모하였다. 히틀러는 일관된 정치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이념의 강령은 1923년 뮌헨에서의 봉기가 실패하고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하던 시기, 즉 나의 투쟁 을 저술하던 시기에 확립하였다. 이러한 강령에 대한 기반은 독일 혁명 시기에 나타났고 히틀러는 ‘1918년 11월 독일에서 다시 혁명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 결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관을 형성했고 이는 1)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하는 국수주의적 독일의 이념과 체제성립 2) 대외적 침략 전쟁의 필요 3) 혁명세력의 주장과 잠재력을 제거할 수 있도록 헌법을 수정 4) 자유 및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제거하고 노동자들을 국가민족주의로 흡수 5) 마르크스주의의 제거 6) 유태인 제거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서 히틀러와 나치당의 민족사회주의와 반유태주의적 목표를 볼 수 있다.
역사가인 로버츠(John Roberts)에 따르면 민족주의는 “시장 사회가 갈수록 사람들을 고립된 존재들로 만들어 갈 때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점점 만들어지는 집단 이기주의를 뜻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나치당은 민족주의를‘사회적 대안, 유토피아적 비전의 제시, 사회와 현실비판을 위한 근거’로 제시하였다. 국가주의․반공산주의․반유태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나치당은 이런 집단 이기주의의 종족론을 극단적으로 표방하고 나섰다.
히틀러의 세계관은 “사회적 다위니즘으로부터 파생된 두 이념체제인 인종론과 영역론”을 바탕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치당은 새로운 사회의 개념을 순수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공동체 또는 ‘민족공동체’로 설정하였다. 당시 “독일의 제 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 경제 불황과 대량 실업으로 인한 사회 분열”은 민족공동체 개념이 퍼져나가기에 충분하였다. 히틀러는 당시 독일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국가민족주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고 유대주의를 배척함으로써 이런 민족사회주의의 이념을 달성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업이라고 생각했다.(정희강, 16-17쪽)
나치는 히틀러라는 개성을 중심으로 발달했지만 아리안 민족이라는 틀 안에서 사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결국 민족주의라는 개별적인 발상에서 표준화와 보편화, 대중설득을 통해 급진주의적 성향으로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나치는 그들이 추구했던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한 정치 선전 방식으로 당대 디자인 사조의 양식을 빌어 자신들의 선전 포스터에 표현했던 것이다. 나치 이전에 그로피우스는 이미,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방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표준화의 원리를 하나의 미적인 이상으로 격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이를 위해서 ‘디자이너의 개인적 표식’들을 억누르고 마치 요술처럼 기계적 과정 그 자체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스타일은 한 시대의 모든 작품을 활기 있게 하는 원리의 통일이며, 자신의 특별한 특성을 갖는 마음 상태의 결과”임에 ‘스타일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근대 디자인의 출발은 개인을 지워내고 사회적 공동체의 이상적 규범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민족사회주의의 나치당과 그 이념을 같이 했으며, 나치당의 개별적인 국가 이념은 디자인의 표현에 있어서 시민사회적 규범과 구분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구세대에서 벗어나려던 근대 디자인의 선구자들은 기계를 통해 미래를 보았고 모더니즘의 특성들을 형성해갔다. 나치를 모더니스트로 판명하는 이유는 그들이 ‘민족주의적 정치 디자인’을 전제로 나치 선전 포스터에서 나타나는 표준화와 보편화, 대중설득, 급진주의, 계몽이라는 발상적 특징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나치당의 디자인 표현이 근대 디자인의 규범적, 기계적, 계몽적 성격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치는 이처럼 직접적으로 디자인에 표현되지 않았다. 근대 디자인은 정치적 이념보다는 디자인의 시대사조로서 자신을 주장했던 것이다.(정희강, 60-61쪽)
비유대계 독일인은 나치 집권 전에는 유대인에 대해서 대놓고 비난하지 못했지만 나치 집권 후에는 유대인 면전에서 비난하고 모욕을 주었다. 정부가 비유대계 독일인이 유대계 독일인에 대해서 분노를 발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빨리 인지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당황했고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장 아메리는 자신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 받는 것에 대해서 억울한 입장을 토로한다. “내 얼굴 생김새는 지중해 셈족의 생김새도 아니었고, 내 연상 작용의 범위가 마법에 의해 갑자기 히브리 관련 체계로 바뀐 것도 아니었으며, 크리스마스트리가 마술적으로 일곱 개의 가지 달린 촛대로 변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유대인에 대한 생물학적, 문화적 특성도 갖지 않고 독일에 동화되어서 살고 있는 그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이러한 부분을 이미 다수의 유대인들은 동감하고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입장에 직면해서 다수의 유대인들은 가치관이 흔들렸고 이성적으로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중세 때도 유대인 박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면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도 영혼을 갖고 있는 존재이므로, 잘못된 종교에서만 벗어난다면 동등한 인격과 구원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반유대주의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서 프랑스는 국론이 분열되었고 반유대주의 성향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유대인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사회주의 사상을 퍼뜨리고 볼셰비키 계급을 은밀히 지원한다는 소문도 퍼졌다. 상업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전통적으로 상업을 했던 유대인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비유대인은 아무 이유도 없이 유대인에 대해서 “죽어야할 존재”라는 선입견과 편견을 생산하면서 그들을 박해했다.(신종락, 140-141쪽)
히틀러의 “인종주의”와 “문화의 계급적 구분”은 그의 초기 글들(Mein Kampf)에서 이미 독일 내의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직접 드러내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1933년 히틀러의 정권장악 후 유럽 내의 대외정책의 기본 골격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1935년 2월 4일부터 같은 해 11월 27일까지 진행됐던 제국언론협의회(Reichspressekonferenzen)에서 불가리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등이 두 번째 지위를 차지하는 인간(Menschen zweiter Klasse)으로서 나치독일의 동맹국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은 것은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세계관이 여과 없이 외교에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외관계에서 나치의 인종주의 원칙은 1935년 9월 15 일에 시작되고 같은 해 11월 14일에 발효된 뉘른베르크 인종법(혈통보호법과 제국시민법 Blutschutzgesetz und Reichsbürgergesetz)에 의해 성문화 되었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인종법의 발효는 나치독일 국내법과는 달리 국제관계에서 세부적이며 구체적인 조항들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대외 관계에 대한 뉘른베르크 인종법의 구체적 법률조항의 부재가 오히려 1938년 전․후로 외교관계를 넓히기 위한 나치 정부의 대외선동정치의 다변화를 열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국제관계의 정세변화에 따라 그들이 생각하는 두 번째 계급에 해당하는 민족의 대상이 어느 정도 유동적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추축국정책 내에서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개별국가들의 정치, 경제, 문화적 요소들을 나치즘이 추구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조건 (반유대주의, 반공산주의, 반민주주의 등) 아래 묶어 둘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의 사상적 추구를 위한 정치적 관계를 조건으로 상대국에 대한 나치의 문화적 평가는 철저히 인종주의와 결합한 파시즘적 문화관(文化觀)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문화의 질적 차이가 인종적 차이에서 온다고 믿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을 촉진하고 성장시키는 힘의 원천으로써 “피와 땅”(Blut und Boden)은 그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도 “인종문화(Rassenkultur)”라는 새로운 문화운동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인종적 문화관은 국내적인 차원에서 국민적 통합과 시스템의 유지등으로 작동했지만, 외교영역에서 국가 간의 관계를 생존을 위한 투쟁(Daseinskampf)의 장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게르만 민족의 피를 보존하기 위한 그들의 투쟁은 유대인에 대한 극단적 폭력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파트너와의 관계에서도 섞여서는 안 되는 “피의 순수성”을지켜야만 했다.
이러한 피의 순수성에 따라 나치 정부의 대외정책에서 그들의 인종주의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1차 4개년 계획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이 시기는 국내적으로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통폐합(Gleichschaltung)”이 끝나고 반공산주의의 세계불럭(Weltblock des Antikommunismus)을 만들기 위한 일본과 이탈리아와의 외교적 협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와도 맞물려 있었다. 물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계기로 국내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노골적인 인종주의가 잠시 자취를 감추었지만, 1936년 후반 일본과 반공협정(Antikominternpakt)을 맺은 후 나치의 선동구호였던 “문화의 축(Kultur‐Achse)”이 그들의 외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아젠다로 등장했고, 일본과의 관계가 고려되어 나치의 인종주의는 반유대주의로 포장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문화의 축”은 그 시작부터 반유대주의를 원칙으로 한 문화제국주의가 나치의 외교정책에서 구체화한 개념일 수밖에 없었다.(황기우, 649-650쪽)
동아시아에서 나치의 반유대주의활동은 그들의 문화정책에서 시작되어 게슈타포의 직접적 개입을 이끌어냈다. 12년간의 나치의 동아시아정책에서 끊임없는 유대 난민에 대한 추적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선 홀로코스트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또 다른 범죄행위에 대한 망각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이징어를 비롯한 일본군 점령지 내의 수많은 나치당원과 부역자들의 수상한 행동은 끔찍한 유럽의 홀로코스트를 닮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1945년 종전 이후 상하이 외곽에서 집단수용소와 유사한 시설물들이 발견되었다. 그것을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연결하는 것은 아직은 조심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1942년 중반부터 시작된 마이징어와 그의 사람들의 활동은 정황상 단순한 유대인통제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그의 구체적 목적이 불명확했던 것은 다행히도 가시적 결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럽 내에서와는 다르게 작업을 위한 노동력의 확보, 설비를 위한 재료의 획득 등 여러 제반 조건들은 매우 열악했으며, 따라서 작업의 진척은 유럽의 상황과 비교할 수 없이 느렸을 것이다. 더욱이 1943년 후반부터 유럽과 동아시아의 전세는 이들 추축국 회원들에게 총력전 이외의 것에 에너지를 쓰기에는 결코 녹록한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나치독일의 점령지에서 벌어진 광기에 찬 학살드라마는 그들의 전세와는 상관없이 2차 대전 종전까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우만(Z. Bauman)의 주장대로 홀로코스트가 단순한 지배층의 의지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근대적 관료제의 조직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때문에 일본과 식민지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조가 없던 상황에서 소수 인원으로 수 많은 유대 난민을 죽음으로 몰아 널 가스시설을 계획할 수는 있었어도 행동으로 옮기기엔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전쟁기간 동안 일본의 반유대주의 목적은 유대인 박해에 있지 않았다. 식민지개발을 위한 인질로서의 가치가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사라졌다 하더라도 일본인들에게 있어 그들은 여전히 상인으로서, 은행가로서, 의사로서, 수공업자로서 자신들의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을 채워줄 대상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나치로 하여금 일본의 유대인정책에 끊임없는 개입과 영향력을 행사하게 했다.(황기우, 667-668쪽)
반공협정(Antikominternpakt‐Abkommen) 이후 나치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의 문화협정은 문화투쟁을 상호 경쟁이 아닌 그들의 적대국들에 대항하는 공동의 투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그 중심 내용은 반민주주의 공동노선(gemeinsame Linie gegen Demokratie)이었고 그 이면에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us)와 반공산주의(Antikommunismus)를 위한 공동외교가 외교내용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반유대주의정책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던 율리우스 에볼라(Julius Evola)와 파리나치(Farinacci), 민족의 파수꾼(Völkischer Beobachter)의 로마주재 통신원이었던 필립 힐테브란트(Philipp Hiltebrandt),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Goebbels) 그리고 로베르트 라이(Robert Ley)가 1937년 말부터 1938년 초까지 베를린에서 유럽 내의 반유대주의를 위한 정책적 공조에 대해 지속해서 회담을 했다. 회담의 결과는 이탈리아 인종정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38년 11월에 있었던 나치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의 문화의 축을 위한 문화협정에 직접 반영되었다. 특히 당시 NSDAP(나치당) 내에서 인종정책을 이끌었던 발터 그로스(Walter Gross)는 회담의 결과를 로젠베르크(Rosenberg), 힘러(Himmler) 그리고 헤쓰(Heß)와 함께 앞으로 있을 추축국정책의 기본 원칙으로써 설정했다. 나치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서 이러한 일련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위한 협력관계는 이탈리아 언론과 정부의 선전활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그것으로 인해 1941년 이후에 이탈리아의 반유대주의 정서는 대중적 기반이 공고화됨으로써 정점에 달했다.(황기우, 652-653쪽)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았을 때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으로 정치화된 많은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히틀러라는 새로운 독일의 구세주를 진심으로 환영했다. 개신교도들은 이제 루터 이후 시작된 민족적인 “종교개혁이 완성되었음”을 고백했다. 곧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실망하게 될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마저도 당시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로는 독일 대중들 중 상당수가 1933년의 감격에서 냉정해져갔음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가톨릭교도들이 그러했다. 성직자들과 교회공동체에 충실했던 평신도들이 나치체제에 대해 비공식적인 저항의 태도를 견지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전통적인 가톨릭 민족주의 및 이로 인해 당연시된 세속권위에 대한 충성이라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국가관과 가톨릭 반유태주의는 존속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가톨릭 하위문화에 속한 다수의 대중 사이에서, 그들이 때때로 나치당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강하게 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당과는 별개로 히틀러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그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1930년대 이후의 개신교도들의 태도는 편차가 심했다. 나치에 대해 아직도 변함 없는 짝사랑을 노골적으로 고백했던 급진적 “독일기독교도(Deutsche Christen)”에서부터 짝사랑이 조금씩 식어갔던 온건파 “독일기독교도” 그리고 제3제국에 대한 저항의 역사에서 영웅적으로 묘사되는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하지만 저항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고백교회 마저도 민족주의적이고 반유태주의적인 아비투스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음을 근래의 연구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고 있다. 일례로 고백교회의 영웅 마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역시 “유대인의 현저한 증대”를 두려워하여 “독일민족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한” 나치의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에 찬성했음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여기서 가톨릭 교회나 고백교회가 볼셰비즘의 위험성에 대해 나치 못지 않게 민감했음을 지적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고백교회에 모인 보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이었던 전통적 사회엘리트들의 태도는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나치체제에 대한“동의”와 “저항”의 유기적 결합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그렇다면 다수의 가톨릭 교도와 고백교회는 무엇에 저항한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 우리는 나치 대중독재의 한계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가톨릭교도와 일부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비록 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은 아니었지만, 공공연한 저항을 하도록 몰아간 것은 바로 나치의 종파 의식과 종파대립이라는 시민사회의 전통을 깨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민족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모든 이해대립은 해소되고 정권의 주도 하에 “획일화(Gleichschaltung)”되어야 했다. 종교의 영역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기성의 종교는 모든 공적영역에서 사적영역으로 퇴각되어야했고 궁극적으로는 없어져야 했다. 특히 바이마르 시기까지 독자의 정당을 지녔던 가톨릭 ‘환경(Milieu)’은 민족공동체 건설의 커다란 벽이었다. 독일민족의 공동체는 국가가 주도하는 단 하나의 세계관만이 존재해야 했다. 그 것이 바로 나치의 정치종교, 즉 인종종교였던 것이다.(나인호, 396-398쪽)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일의 보통사람들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독일 민족국가를 위한 시민종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여러 종교적 하위문화들 속에서 사회화되어왔다. 이러한 사회화과정이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는 온갖 형태의 민족주의적이고 반유태주의적인 이데올로기들이 그것이 비정치적인 보통사람들의 사적인 생활공간과 유리된 정치이념 내지 공적 영역에서 연출되어야할 국가적인 그 무엇으로서 다가온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던 비정치적인 혹은 탈 정치적인 개인적 믿음의 신조(credo)로서 기능 하였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신성성을 부여받아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국가와 민족공동체, 그리고 지도자의 신성화, ‘절대악인 유대인’과의 성스러운 인종투쟁의 역사에서 주역으로 선택된 독일민족의 신화화와 같은 나치의 정치종교적 설계는 대중을 충분히 매혹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종교로서의 나치독재는 한계점도 명백했다. 그 한계점이란 나치가 자신이 의도했던 바와 같이 기존에 형성되어있던 종파 및 종교적 하위문화의 대립을 일소하고, 자신의 정치종교 속으로 결코 모두를 개종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독일의 보통사람들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나치와 공통적인 믿음을 공유했으면서도, 배타적 도그마를 통한 나치의 정치종교적 독점의 시도에는 여러 형태로 거부반응을 나타냈던 것이다. 과연 정치종교로서 나치는 충분히 성공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독자들 각자의 몫이다. 반면 이 글이 주목하는 바는 원자화된 소비자 대중과 무소불위의 현대적 민족국가 시스템으로 구성되는 대중민주주의 정치는 그것이 갖는 역사적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으로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의 신성화와 신화화라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치의 전체주의적 독재의 사례는 이러한 위험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경우일 것이다.(나인호, 401-402쪽)
독일에 의해 피해를 입은 국가들은 분단된 독일의 통일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독일의 분단이 책벌성 징계의 의미도 있지만 주변국들이 통일된 후 독일의 막강한 힘과 독일이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런 주변국들의 독일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불식시키기 위해 분단된 독일은 지속적으로 국제사회에 히틀러의 전쟁범죄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전후 독일은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의 서방정책과 빌리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의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전쟁으로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독일은 우선적으로 프랑스와 신뢰 회복과 우호관계를 맺었고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이스라엘과 폴란드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하였다. 그리하여 독일이 전쟁을 일으켜 다른 나라에 큰 상처와 피해를 준 국가라는 인식을 다소 누그러뜨릴 수 있었고 독일이 국제사회에 새롭게 기여할 자세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김기련, 146쪽)
이어서 히틀러와 나치는 경제적인 이유로 유대인들을 제거하는 정책을 세웠다.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경제적 ․ 사회적 ․ 정신적 측면에서 상당한 대립이 있었다. 독일인들에게는 유대인들이 고리대금과 폭리를 취하는 사회 기생충이라는 왜곡된 상(像)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것이 바로 반유대인정책에 있어서 정치-사회적인 도구로 이용될 수 있었다.
나치의 반유대인 학살정책의 또 다른 원인은 히틀러의 인종주의에 기인한다. 히틀러는 그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그가 빈(Wien)에서 체류하는 동안 반유대주의로 전향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를 유대인들의 불결, 민족의 도덕적 오점을 발견하고 혐오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또 그는 유대인들의 신문, 예술, 문학, 연극 등은 여러 분야에서 가식적이고 혐오스러워 마치 페스트보다 더 무서운 질병으로 여겼다.
더구나 매음 제도와 소녀 매매를 자행하는 매음업의 포주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전율과 분노가 치밀었다고 말하였다. 독일인들은 아리안인의 우수성을 신봉함으로써 이를 반유대주의 정책의 논거로 삼았다. 히틀러와 나치는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거부감과 반감, 민족 간의 반목이 독일 국가 발전의 커다란 장애 요소로 보고 점차 유대인을 독일인들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히틀러는 “유대인은 게르만족의 위험스런 적대자로서, 독일 사람의 일자리 확보와 순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유대인들을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반(反)셈족 이데올로기를 결단코 숨길 수 없었던 독일의 나치정부는 1933년 4월 유태계 사람들의 시민적 동등권을 박탈하는 첫 법률을 발표하였다. 1933년부터 유대인 상점들에 대한 불매운동이 전개되었고 히틀러는 4월 7일에 ‘직업공무원법’(Gesetz zur Wiederherstellung des nationalen Berufsbeamtentums)을 제정하여 모든 유대인들을 공직에서 추방시켰다. 히틀러는 또한 ‘뉘른베르크 인종법’(Nürnberger Rassegesetz)을 제정하여 유대인들을 점차 독일 사회에서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독일 국민은 ‘광신적 애국주의’에 빠져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집단적 히스테리를 발동하였다.(김기련, 150-151쪽)
아울러 나치는 동성애의 전염성이 민족의 퇴화를 야기할 수 있음을 우려하기도 했다. 동성애와 법적 처벌 강화는 전염의 예방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동성애의 전염성을 운운하는 나치의 모습은 박해와 학살에는 근대적 수단을 동원한 나치체제가 정신세계에서는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지극히 전근대적 체계였음을 보여준다. (윤용선, 99쪽)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 용인되었던 동성애가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원인은 일반적으로 기독교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러한 정의에 대해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가 직접적 혹은 간접적 요인인가를 둘러싼 견해의 차이일뿐 기독교가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박해의 원인을 찾는 연구나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윤용선, 84쪽) |
독일 유대인들의 학살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집요하게 제기된다. “유대인들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저항하지 못하고 독일 사회에서 배제되었으며 결국 제거되었는가?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필사적으로 탄압에 대항하지 못하였는가?” 이러한 일반적인 질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나치의 범죄를 생각하면 일견 당연한 것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이러한 의문은 사실 독일 유대인들의 주변세계와의 관계들을 이해하지 못하여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독일 유대인은 동질의 한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독일민족과의 명백한 선을 그으며 살았던 폐쇄적인 집단이었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독일 유대인들은 대부분 독일인들과 다르지 않게 독일정당에 가입하고, 독일단체에 회원으로서 활동하면서 스스로를 독일인으로 인식하고 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유대인들은 나치의 위협에 대해 대부분 반 나치주의자들처럼 유사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즉 나치의 절멸정책이 유대인종에 집중하였다는 것이 확실해지면서 비로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고백하며 유대인으로 행동하는 변화를 겪었다. 이 시점이 유대인 저항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적지 않은 독일 유대인들은 나치가 기대한대로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인 거부형태의 저항의 모습을 보였다. 절망적인 시기에도 유대인 공동체와 지도부는 대부분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용기를 내보이고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획일적이고 전형적인 조직적 저항은 딱히 없었다. 그 이유는 유대주의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성향의 다양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이 유대인 집단 내부의 통일적이고 획일적인 저항의 태도를 가로 막았다고 할 수 있다.(최형식, 282-283쪽)
많은 유대인들은 마지막 순간, 즉 나치가 유대인들을 절멸하려 한다는 확신이 섰을 때야 비로소 몸을 피해 은신하였다. 특히 주변의 유대인들이 강제 이송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은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은신하였던 유대인들 중 1/3은 집단수용소로의 강제이송 통보를 받고도 이를 거부하였던 자들이라면, 나머지 2/3는 이러한 통보 이전에 은신하였다. 당시에는 연합국의 승리가 매우 불투명하였기 때문에 은신이라는 지하에서의 불법적인 생존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저항하는 것은 무모한 모험으로 보였다. 잠적한 유대인들이 언제까지 도피할 수 있을지, 돈이 언제 바닥이 날지 그리고 허위신분증명서가 언제까지 들키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였다. 독일 유대인의 적극적 저항의 가능성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다든지, 그들의 은신을 돕는다든지 그리고 스스로 연명을 하는 것조차가 나치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나치시기에 유대인들은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더욱더 많은 것을 잃었으며 해외이주에 대한 결정도 더 늦게 나타났다. 상층부에 속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계급의식 때문이었는지 또는 독일사회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는지 때때로 정치적 위험을 과소평가하였다. 1933년에 이미 생존가능성을 상실하였던 사람들은 1938년까지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보다 더 일찍 국외로 이주하였다.(최형식, 298쪽)
독일의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는 모두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파시즘이다. 20세기 초반의 비슷한 시기에 지구상의 동과 서에서 각각 발흥한 두 파시즘의 공통적인 정책으로는 ‘인종주의’와 ‘확장주의’를 들 수 있다.
독일은 아리안주의(Arierparagraph)를 바탕으로 독일 민족만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1933년 1월,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한 이래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으로 알려진 “독일인의 혈통과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법”을 제정한다. 이로 인해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결혼이 금지되었다. 이후로 나치는 자국 내에 살면서 아리안 종족의 혈통을 흐리게 하고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이유로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획책했으며 결국 2차 세계대전 동안 약 600만여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holocaust)하고야 말았다.
1938년 11월 9일, 나치들은 유대인 회당에 불을 질렀을 뿐 아니라 가게를 부수고 유대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 날 수 없이 깨진 유리창들이 불빛에 반짝여 수정처럼 보였기 때문에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라고 부른다. 이 날은 독일에서 유대인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점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유대인 수용소와 인종말살 정책으로 대규모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로는 제 3제국 하의 독일국민들이 전제적인 지도자 원리에 따라 히틀러의 명령에 맹목적인 순종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다. 나치는 시민들에게 복종의식과 의무이행 그리고 희생정신을 강요했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의 삶 모든 영역에서 관철되어졌다.
한편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로 일본은 전통적인 신도와 천황제를 근간으로 하여 서양의 기술과 문명을 받아들인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모순된 정책을 실시했다. 나아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탈아입구(奪亞入歐) 정책을 수행하고자 국가와 국민이라는 관념을 창출해야 했고 이를 가능케 하고자 만세일계 황통에 의한 천황제 국가를 꿈꾸었다. 근대 일본의 민족(民族)이란 개념은 일본열도의 주민이 천황제 국가의 창출과 얽혀 일본인으로서 조형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 국민은 천황과 가족이라고 하나 사실상 군신의 관계이고 도덕적으로는 충군애국의 관념을 주입받게 된 것이었다. 이는 유교의 덕목 중에서 충(忠)과 효(孝)만 남긴 채 모두 제거한 것이었다. 일본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정점으로 천황 아래 모든 일본인들이 한 가족임을 표방하는 가족주의를 주창하고 이것을 또한 한국을 포함한 주변 식민지 국가를 대상으로 적용을 했다. 한국병탄을 전후하여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이 빈번히 주장되어 온 것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역사적․인종적․언어적 공통성을 강조, 조선인에게 일본인으로서의 동화를 찬미, 긍정하려는 것이었다. 이 일선동조론의 최종목표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의 달성이었고 그 점에서 일본민족은 고대부터 야마토[大和]민족을 기초로 융합 동화를 반복해온 세계에서 으뜸가는 민족이라고 강조되었다. 따라서 천황제 아래의 가족국가론은 평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로서의 가족이 아니라 수직적인 가족이었고 사실상의 기만이었다. 일본의 속내는 유럽의 문명을 계승하여 아시아에서 중국을 대신해 새로운 문명의 중심에 서는 것이었다.(김일석, 88-89쪽)
오늘날의 생명정치가 인간 본성에 대한 학문적 기술적 변환에 대해 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푸코는 이러한 기술적 동력에 앞서 이의 배경, 이를 추동하는 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푸코에게서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주권권력이 근대적 생명권력으로 전환하면서, 정치적-군사적 담론은 인종적-생물학적 담론으로 바뀌게 된다. 푸코가 강조한 바, 주권권력이 생존의 문제를 놓고 지역적, 언어적, 종교적 혈통이 다른 인종간의 싸움에 바탕해 존재했다면, 생명권력은 인종의 문제를 놓고 싸우는 계급투쟁이지만, 그 계급투쟁이 두 인종간의 충돌이 아니라 한 사회, 동일한 인종 안에서의 싸움, 우월한 종족과 나머지 종족, 권력을 쥔 종족과 권력 없는 종족 간의 싸움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과거 생명정치가 갖았던 생물학적 결정론이 근거가 없음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전략이었고, 근대적 권력의 특별한 형식이었음을 폭로한다. 이는 기존의 지배관념을 흔드는 불온한 문제제기이다. 그는 근대를 계몽의 시대에서 연결된, 그리고 포스트모던으로 이어지는 특정한 시대, 혹은 한 시기가 갖는 특성의 총합으로 보지말고, 일종의 행태(Haltung), 즉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고하고 느끼는 방식, 행동하고 자세를 취하는 방식, 자신의 소속을 드러내고 하나의 과제로서 상정하는 현재성(Aktualität)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이처럼 근대성을 상대화시킴으로 써, 그는 우리로 하여금 산만하게 흩어져 있어 특별히 관련성 없어 보이는 대상들을 어느 순간 갑자기 통일적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특히 그는 근대 초기 합리성의 제도화와 사회적 통제를 새롭게 해석 하였고, 분과학문 간의 경계를 넘어 공간, 권력적 지식, 주체등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와 논의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방법론적 반성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그의 계보학적, 생명정치적 사고는 현대 우리의 상황에서 여전히 현재성을 갖고 있다. 푸코의 이런 인구에 대한 접근이 오늘날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그가 제기한 생명권력을 지렛대로 삼아 현재의 권력구조에 대한 전복적 사고로 확장시킬 가능성이 있는가? 푸코가 강조하는 바는 그것이 규율사회가 통치사회로 대체되는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대상이 되는 이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복속토록 하는 그 구조에 있다. 특히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생명정치의 보편적 틀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은 그 본질에서 권위적이지도, 억압적이지도 않다. 비록 과거 우생학과 현대적 인간유전학의 차이가 권위주의적 강제와 개인의 자기결정에 있는 듯 보이지만, 이미 결정의 여러 옵션들에는 자유의지로 포장된 거부하기 힘든 강제가 작동한다. 푸코가 지적했던 개인적 규율화와 사회적 통제는 오늘날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생명정치의 탄생, 발전은 자본주의의 발생, 발전과 괘를 같이 했으며, 오늘날의 생명정치가 갖는 형태는 인간 생명의 억압이나 절멸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더 뽑아내기 위한 도구를 사용해 자신을 유지하고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인구의 관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와 강화에 기여할 뿐이다. 원치 않는 생명을 치료를 통해 다시 받아들이는 대신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거나, 경쟁과 각자 개인의 능력 혹은 자본이 요구하는 바에 따르는 사회적 자율에 맡겨버린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사회적인 것의 경제화를 목표로 하며, 국가적 복지시스템과 안전시스템을 해체하고, 자기책임을 강조하며, 개인화, 사유화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진행된다. 계급투쟁은 이미 개인의 내적 싸움으로 변화한지 오래다.(이진일, 335-337쪽) |
하지만 경제는 국가가 처음부터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잘못된 바탕에 서 있지 않는 한 결코 국가의 원인도 목적도 아니다. 국가 그 자체는 전제 조건으로서 영토적 한계를 갖는 것을 절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으로도 확실해진다. 이것은 스스로 종족 동포의 부양을 확보하려 하고, 따라서 자신의 노동으로 생존경쟁을 이겨낼 각오가 있는 민족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수벌처럼 다른 인류 속에 잠입할 수 있고 온갖 핑계를 내세워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부릴 수 있는 민족은 독자적인 일정한 경계를 가진 생활권 없이도 국가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첫째로 그 기생성 때문에 특히 오늘날 정직한 모든 인류가 고뇌하고 있는 민족, 곧 유대민족에 해당하는 것이다.
유대국가는 지역적으로 한번도 경계가 있었던 일이 없고, 공간적으로는 보편적으로 제한이 없고, 오로지 한 인종의 집합이라고 하는 점에 제한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민족은 언제나 국가안에 한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 국가를 종교라는 깃발 아래 항해 시키고, 그리하여 아리아인이 종교상의 신조로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너그러움에 의해 자신의 안전을 확보해 온 것은 지금껏 본 일이 없는 가장 천재적인 속임수에 속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모세의 종교는 유대인의 보존을 위한 가르침,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종교는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보존을 위해 문제가 될수 있는 사회학적․정치적․경제적인 지식 분야를 거의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277-278쪽)
(b) 차츰 그들은 생산자로서가 아니고 오로지 중개인으로서 완만히 경제활동을 시작한다. 1천년에 걸친 상인으로서의 노련함에 의해 그들은 아직 서툴고 한없는 정직성을 가진 아리아 인종보다는 훨씬 우세하다. 그리하여 상업이 단기간 내에 그들의 독점 아래에 들어갈 위험에 처해진다. 그들은 돈 놀이를 시작하는데, 그것도 여전히 고리대로 시작한다. 실제로 그들은 그것에 의해 이자를 도입한다. 이 새로운 제도의 위험성은 처음에는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당장의 편리성 때문에 환영받기 조차 한다.
(c) 유대인은 이제 완전히 그곳에 정착해 버린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도시나 마을의 특수한 구역에 정착해서 차츰 국가안에 국가를 형성한다. 상업도, 모든 금융업도 그들에게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특권으로 생각되며 그들은 그것을 가차없이 이용한다.
(d) 금융업과 상업은 남김없이 그들의 독점물이 되어 버린다. 그들의 높은 이자는 마침내 반항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증대해가는 그 밖의 뻔뻔스러움은 격노를, 그들의 富는 늘 시기심을 불러온다. (아돌프 히틀러, 441-442쪽)
⑶ 후진 봉건사회의 반영
1945년 독일에는 아직 민족 공동체를 대체할 시민적인 문화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한 대체 문화는 의견의 불일치가 불가피할뿐더러 가치 있는 것이란 견해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요구할 뿐 아니라, 과거에 정부에 맡겨졌던 이들을 이제는 시민들이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공동의 사업으로서 지식의 추구라는 이상은 관용과 저항의 권리와 한계, 개인에게 정치적 능력이 있다는 신념 등의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에 대한 탐구와 분리될 수 없었다.(제임스 D 윌킨슨, 246쪽)
독일은 유럽 열강의 이해관계의 싸움터로 그리고 희생물로 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도 파멸하여 간다. 이 일반적인 몰락은 나라의 일반적인 궁핍화와 황폐와, 농업 및 공업 생산의 후퇴, 과거 번창하였던 도시들의 쇠퇴 등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또한 독일 민족 전체의 문화적 면모에서도 나타난다. 독일은 16세기와 17세기의 커다란 경제적 문화적 약진에 참가하지 못했다. 생성되고 있는 부르주아 인텔리를 포함하여 독일의 대중은 거대한 문화국들의 발전에 뒤에 쳐져 있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이유가 있다. 이 이유들은 그러나 또한 이러한 독일 발전의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독특성을 규정하게 된다. 첫째로, 독일의 소군주들에서의 생활이 영국이나 프랑스에서의 생활과는 반대로 전대미문의 자잘함, 협소함, 무지평의 것이라는 점, 둘째로 이것과 밀접하게 결부된 것으로서, 서구 국가들과 비교하여 군주 및 그의 관료기구에 대한 신민의 의존성이 훨씬 더 크고 명백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의 태도나 혹은 비판적인 태도조차 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여지가 훨씬 더 좁다는 점이다. 또한 이것에 덧붙여서, 루터주의가 (그리고 후에는 경건주의 등이) 이 여지를 주관적으로 좁게 하여, 외적 예속을 내적 예속으로 전화시켰고, 그리고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노예근성이라고 이름한 바의 그러한 신민심리를 배양하였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교호작용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교호작용은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이 여기를 언제나 협소화하는 것이었다. 이에 상응하여 독일인은 자신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했던 절대군주제라고 하는 정부형태를 자본주의의 보다 선진된 발전에 더 잘 일치하는 보다 고차적인 국가형태의 수립의 이해관계에 대체하고자 하였던 부르주아 혁명운동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서로 경쟁하고 있는 열강들의 존립을 교묘하게 보지하였던 독일의 소국들은 이들 열강의 용병으로서만 존립할 수 있을 뿐이며, 그리고 강대한 모범들과 외적으로 유사하게 되기 위해서는 오직 노동하는 민중을 가장 가차없이 그리고 가장 반동적으로 착취함에 의해서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나라에서는 자연히 부유하고 독립적이 강력한 부르주아가 발생하지 못하며, 그러한 발전에 상응한 진보적, 혁명적 인텔리도 발생하지 못한다. 부르주아층과 소부르주아층은 통상 서구에서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에서 경제적으로 의존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부르주아층과 소부르주아 층에 있어서는 당시의 유럽에서는 거의 발견되기 어려운 비굴함, 좁은 마음, 저열함, 파렴치함 등이 형성된다. 또한 경제발전의 정체로 인해 독일에서는 봉건적 신분위계 바깥에 서 있으며 근대초엽의 혁명들에서 가장 중요한 추진력을 이루었던 그러한 서민층이 전혀 혹은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과거 농민전쟁에서는 이 층이 뮌쩌의 지도하에 결정적인 역할을 연출하였지만, 이 시대에 이르게 되면 이들은, 존재하는 한,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비굴하고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회층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16세기 초엽의 독일 부르주아 혁명은 확실히 통일적인 근대적 文語에서 국민문화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이 문어는 이러한 가장 극심한 국민적 굴욕의 시대에는 퇴화되고, 경직화되고, 야만화되는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57-58쪽)
그러나 부르주아 진영 내부에서도 동일한 불리함이 나타난다. 혁명의 중심문제로서의 민족적 통일은 도처에서 계급적 타협에 기울고 있는 대부르주아의 헤게모니를 더욱 용이하게 하며, 18세기의 프랑스와 19세기의 러시아와 비교하여 이 헤게모니 장악을 덜 위협받게 한다. 대 부르주아의 타협의도에 대항하여 소부르주아의 서민의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독일에서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혁명의 중심문제로서의 민족적 합일은 서민대중에게 있어서는 이를테면 농민문제의 경우와 비교하여 훨씬 더 고도로 발달한 의식성과 경계심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농민문제의 경우에는 다양한 계급들의 경제적 대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게 나타나고, 따라서 서민대중의 눈앞에 직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반면에 중심 문제로서의 민족적 통일은 외견상 전적으로 정치적인 성질의 것으로 보임으로써 흔히 직접적인 혹은 직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경제적 문제들을 은폐하고 있다. (게오르그 루카치, 63-64쪽)
이 모든 이유에서 독일에서는 다른 나라들에서보다 훨씬 더 급격하고 강렬하게 대중이 쇼비니즘의 선전에 영향을 받는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정당하고도 혁명적인 민족적 열광이 반동적 쇼비니즘으로 이처럼 급격하게 전화함으로써 한편에서는 군주제와 결합된 융커층과 대부르주아가 대중을 대내정치적으로 손쉽게 기만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동맹자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1848년의 독일 부르주아는 폴란드 문제를 반동적 쇼비니즘의 의미에서 이용할 수 있었지만, 서민대중은 - 이 경우에도 <신 라인신문>의 시의에 맞는 정당한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이것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리고 폴란드를 혁명적 독일의 자연적 동맹자로부터 독일적 및 국제적 규모의 반동세력에 대한 전쟁에서의 현실적인 동맹자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65쪽)
그런데 독일의 상황은 오랜 시민민주주의의 전통을 갖고 있는 보다 발전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상황과는 전혀 딴판이다. 무엇보다도 독일에는 경제학 원전이 없었다. 1875년에 맑스는 이와 같은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독일의 정치 경제학은 아직까지도 외래학문이다.… 그것은 완제품으로써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수입되었다. 때문에 독일의 정치경제학 교수들은 여전히 배우는 입장에 있었다. 외국 현실의 이론적 표현이 그들의 손에서 하나의 교의집으로 전화하였고 그들에 의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소시민적 세계의 의미대로 해석되었다. 요컨대 곡해되었던 것이다.… 1848년 이후 독일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오늘날에는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 전문가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 이들은 정치경제학을 편견없이 연구할 수 있었던 당시에 독일적 현실에는 근대적 경제관계가 존재치 않았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실현되자마자 이들의 편견 없는 연구는 시민적 시야 내부에서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과학적 사회주의가 바로 독일 사상가들에 의해 창안되었으며 필연이지만 그것도 바로 독일의 땅에서 맨 먼저 학술로 작용하기 시작한 점이다. 결국 독일 사회학의 성립상황이 복잡하게 된 데는 독일의 부르주아가 프랑스에서처럼 정치계급으로서 미주혁명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봉건절대주의와의 타협, 즉 비스마르크의 지도아래서 융커와의 타협을 통한데 있다. 요컨대 독일 사회학은 이런 타협을 변론하는 틀안에서 발생하였다. (게오르그 루카치, 650-651쪽)
2차 대전에서의 패전과 전범 국가라는 부담감 그리고 동서독의 다소 급작스러운 분단의 상황에서 건국된 동독(DDR: 독일민주주의공화국)은 완전히 새로운 국가질서를 내세우면서 새 공동체의 ‘정체성’과 통합을 위한 정치 신화가 절실히 필요했다. 나치에 대항한 공산주의자들과 망명자들을 중심으로 한 동독 지도부는 독일 땅에서 첫 “노동자-농민국가”라는 기치를 내걸면서 건국 초기에 무엇보다 국가사회주의와의 철저한 단절을 통해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에서 나타는 것이 ‘반파시즘’ 국가라는 동독의 건국신화이다.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Erich Honecker 당서기장은 1988년 동독이 기울어가던 시기에 건국 시기(1949년)를 회고하면서 당시에는 “반파시즘적, 민주적 관계를 공고히 하고 사회주의로의 혁명적 변혁을 속행할 것인가, 아니면 반제국주의적, 민주주의적 업적을 포기하고 독점 자본주의적 관계의 회복을 허용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었고, “우리는 당연히 전자를 선택하여 우리의 노동자-농민국가를 건국했다”는 소회를 밝혔다. 동독의 이러한 자기이해는 동독이 국가로서 존속하는 동안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때까지) 반복되었다.
동독에서는 물론 ‘반파시즘’ 신화 외에도 역사 속에서 새로운 국가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전통을 역사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종교개혁과 농민전쟁(1517-1526) 그리고 나폴레옹에 대항한 해방전쟁(1813/14) 같은 것이 휴머니즘과 진보적 전통을 계승한 국가라는 정체성을 위해 고려되었다. 실제로 농민전쟁은 종교개혁과 더불어 “초기 시민혁명”으로 선언되고, 초기의 농민혁명이 실패한 혁명이었다는 비관적 역사관 대신, 독일의 역사에서 사회주의 국가로의 노정에서 긍정적인 유산으로 재평가되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반파시즘 건국신화를 보완해주는 신화에 해당되는데, 해방전쟁 역시 보완신화의 지위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동독에서 가장 중요한 건국신화로 자리 잡은 것은 무엇보다 반파시즘이라는 저항 신화였다. 그리고 1989년 가을 위기의 징후가 농후해지고 사회 질서가 붕괴 조짐을 보였을 때 초기 시민혁명이나 해방전쟁과 같은 보완신화는 별 기대를 낳지 못한 반면, 반파시즘이라는 건국신화는 다시 한 번 효과를 발휘했다. 이것은 1989년 10월 26일 그리고 10월 28일의 기자회견에서 31명의 동독 작가와 지식인들이 마지막까지 동독의 몰락을 막고자 발표한 호소문 「우리나라를 위해 Für unser Land」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독과의 통일을 반대하며 사회주의 국가 동독의 보존을 지지하는 이 호소문에서는 동독의 반파시즘 건국신화를 거론하면서 동독의 자주성, 심도 깊은 내부의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권혁준, 30-31쪽)
한편 서독의 경제기적 신화는 전후 서독의 정치발전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독의 경제기적이라는 서사는 선거에서도 확인되었는데, 선거공약과 정치 주역들이 이 서사에 표현된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었다. 초기에는 이 신화는 기민당(CDU: 기독민주당)과 기사당(CSU: 기독사회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경제기적이 기민당 출신의 경제장관 에르하르트라는 인물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이르자 에르하르트 당시 수상조차 저지할 수 없는 경기침체가 나타나는데, 사민당(SPD: 사회민주당)의 첫 집권 기회는 이러한 상황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에르하르트 내각이 무너지면서 독일에서는 경제기적 신화 외에 경제발전의 합리적 기획, 물자와 기회 배분의 균등 등 케인즈 경제학을 바탕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복지와 사회정의(“독일식 모델”)를 주창하는 칼 쉴러 Karl Schiller나 헬무트 슈미트 같은 인물이 부상했던 것이다. 빌리 브란트 수상은 서독이 이룩한 복지를 기반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 독일의 과거청산 등을 통해 제2의 건국을 시도하지만, 1973년 가을 ‘석유위기’와 더불어 위기를 맞는다. 전체적으로 사민당 집권기에도 경제기적의 신화는 통합 내지 방향제시의 기능을 유지하는 경향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 집권한 기민당의 헬무트 콜 수상의 “정신적-도덕적 개혁”이라는 초기 정치 구상은 다름 아닌 경제기적에 기여한 덕목들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동독이 정치적, 경제적 붕괴 조짐을 보이자, 서독의 건국신화는 “콘라트 아데나워의 손자”를 자처한 콜 수상에게 더욱 결정적인 방향 설정의 자산이 되었고, 국제적 여건이 형성되었을 때 신속, 단호하게 정책을 추진하게 해주었다. 통일헌법에 관한 토론이나 독일국민 전체의 의사 형성 대신 콜 수상은 간단명료하게 우선 화폐통합과 “번영하는 동독지역”을 약속했는데, 이것은 서독의 건국서사를 재활성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건국신화에 대한 신뢰는 통일 과정에서 ‘통일수상’ 콜의 정당(기민당)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독지역에 확고한 기반을 갖게 해주었다. 물론 콜 수상은 성급한 통일 추진으로 통일비용이나 사회적 문제 등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실책도 범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선택 중 분명한 방향 설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화의 기능이며, 또 19세기와 20세기 독일의 모든 신화 중 “화폐개혁과 경제기적이라는 건국신화가 가장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권혁준, 43-44쪽)
⑷ 자연의 신성화와 비합리주의 문화
이러한 사정에서 당연히 발생하는 것은, 셸링이 자신의 주요한 공격을 헤겔철학에 겨냥한다는 점이다. 이 공격은 지금 철학적으로는 그의 청년기의 유사한 노력들보다도 훨씬 더 포괄적인 연관 속에 있는 것으로 된다. 그 당시의 증오와 경멸은 이를 테면 로크 이래의 계몽사상에만 향해져 있었다. 이 시점에서 데카르트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근대 부르주아 철학의 全발전이 정도로부터의 커다란 일탈이라고 낙인찍어진다. 헤겔은 이러한 잘못된 경향의 정점으로 다루어진다. 이것에 의해 셀링은 직접적인 선구 파시스트와 파시스트의 힘이 크게 강해진 비합리주의의 시대에 있어서 철학사의 해석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되어야 할 하나의 방향을 잡아 나아간다. 그렇지만 동시에-그리고 이 점에서 우리가 위에서 말한 저 어중간함과 과도적 성격이 나타나는 것이지만-그 청년기 철학은 그가 거부해 마지 않았던 데카르트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사상발전의 비본질적이지 않은 한 부분을 객관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서, 결코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게오르그 루카치, 190쪽)
독일 나치즘의 문화정책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첫째, 그들은 모든 매체의 동원을 통해 국가의 최고 정점에 홀로 서 있는 지도자를 신비화하고 그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강요했다. 그것은 일당독재 체제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획일적 통합을 이루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을 거대한 기계조직으로 간주하면서 국가는 강한 자연의 힘과 섭리 그리고 운명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하였다. 마술적인 것이 파시즘 문화에 있어서 주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는데 마술적 연출들은 지도자를 신비화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뮌헨의 붉은 깃발을 만지는 행위와 지도자와 접촉하는 행위 등은 신비한 지도자와의 일체성을 일깨우는 마술적 행위가 되었다. 괴벨스 Joseph Goebbels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기 위한 신화를 창조했으며, 당의 행사 및 시위의식을 제정하고 정력적인 연설을 행함으로써 독일 대중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제국문화부의 의장을 맡으면서 모든 문화정책을 기획, 검열, 통제하였고 예술 활동을 제제하였다. 그는 미디어 조작과 상징 조작의 창시자였다. 정치가로서 미디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먼저 눈을 뜬 그는 미디어 조작을 통해 단 시간 내에 독일 국민의 정신을 지배했다. 대중매체 중에서 라디오와 영화는 정치 집회를 심미적으로 미화시키고 지도자를 신적인 메시아로서 연출해내는 전략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특히 영화는 대중을 조직하는 데 있어 그 전의 예술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획득했고, 이것을 가장 처음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나치였다. 나치는 자신들의 집회모습과 히틀러의 대중연설 장면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고, 나아가 대중 집회 자체를 한편의 영화처럼 연출했다. 그들은 지도자의 숭배 의식과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아주 적절하게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미학의 수준으로 승화시켰고 그들의 정치에 예술적 아우라를 부여했다. 무솔리니는 전쟁 중에 베니스영화제를 인정하였고 히틀러는 레니 리펜슈탈 Leni Riefenstahl을 통해 국책영화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1934)와 <올림피아 Olympia>(1938)를 완성했다. 리펜슈탈은 <올림피아>를 통해 괴벨스가 선전했던 제3제국 이데올로기를 스펙터클하게 형상화시켰다. 민족적 이상을 추구하는 강인한 육체와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력한 지도자에 의 복종은 영상 속에서 그 고유의 아우라를 얻었다. 히틀러는 민족의 위대함에 대한 신념을 연극적 시뮬레이션으로, 그리고 현실을 행사, 연출, 무대장치 그리고 맹세로 허구화했다. 파시즘이 대중 매체를 통해 대중들을 탁월하게 조직해 내는 것을 본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은 “파시즘은 지도자(총통)의 숭배라는 명목으로 대중을 능욕하는데, 이러한 대중에 대한 폭행은 제의가치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봉사를 강요당하는 기계에 대한 폭행과 쌍을 이룬다.”고 말했다. 둘째, 독일 나치즘은 민족성의 신화화를 추진하였는데 자연적인 운명 연관성을 토대로 하는 민족개념과 집단성을 부각시켰다. 또한 그들은 내적인 문제점들을 호도하고 대외적인 문제로 대중들의 시각을 돌리기 위해 모든 문화 분야에서 군사적인 행동규범들, 독일 운명공동체에 있어서의 생활공간의 확장, 그리고 독일의 승리에 대한 찬양을 표현했다. 또한 이에 반대하는 모든 저항이나 비판들은 금지조처와 테러에 의해 말살되었다.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는 정치적 수단에 의해서라기보다 국민에 대한 이념적․미학적 정화(淨化)에 의해 그것을 실현해 나갔다. 정치적 지배도 정치강령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관념적이며 낭만적인 운동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러한 나치즘의 비합리적 운명공동체나 낭만적 유미주의 담론들에 대해 토마스 만은 1933년 이후의 망명생활에서도 부단히 비판을 가했다. 그는「유럽이여 경계하라! Achtung,Europa」(1938)에서 당시 독일인들, 비합리적이며 낭만주의적인 군상들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비판했다.(권경희, 28-30쪽) |
나치즘이 명백히 자연을 신성화하는데 반해서, 다른 파시즘들은 절대적 자연의 존재를 거부하는 대신 자연과 관련되는 개념과 독립된 정신 개념과 문화 개념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자연의 개념화와 관련해 나치즘과 파시즘은 근본적으로 분리된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브람웰은 자연과 문화의 구분에 지나치게 강하게 집착함으로ㅆ 파시즘이 설정하는 자연의 위상을 잘못 이해했다. 나치에게 숲은 자연일 뿐 아니라 문화다. 자연의 신화는 민족 신화이기 때문에, 숲에 대한 신화적 매혹은 자연에 대한 찬양인 만큼이나 문화적 과정이기도 하다. 더욱이 파시스트들의 실제 정책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자칫 그 정책의 배후에 놓인 공통된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망각하기 쉽다. 확실히 자연의 신성화는 파시즘에서는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이 요소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파시스트의 개념으로 흘러 들어 갔으며, 다른 방식으로 파시스트의 실천을 결정지었다. 하지만 파시스트라면 인간이 자연의 철칙에 맞서 반란을 시도했다면, 그 사람은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존재감을 부여해준 원리 자체와 투쟁하는 것“이라는 히틀러의 주장에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는 문제는 자연 개념이 정책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가 아니라, 파시스트의 신화에서 자연이 얼마나 중요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철칙에 호소한다는 것은 곧 공통의 신화, 그러니까 자연의 유동성-끊임없는 변화, 투쟁과 영구적 전쟁-과 자연의 부동상-자연의 법칙(보편적 법칙)-에 관한 공통된 신화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목표는 ‘실제성’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화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중심이 된다. 파시스트 신화는 자연에 의지해 실제성을 정당화하는데, 이를 통해 역사적 의도에 자연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우연성을 영원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파시스트 신화는 현실에서 역사를 제거하고 거기에다 자연을 채워 넣는다. 민족, 국가, 사적 소유권과 가부장제의 역사성은 사라지고, 대신에 자연은 사회보다 우선하며 의심할 나위 없는 기정사실로 인식된다. (마크 네오클레우스, 175-176쪽)
즉 사태가 절망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신의 은혜를 받은 천재(비스마르크, 빌헬름 2세, 히틀러)는 ‘창조적 직관’을 통해 ‘기어코’ 탈출로를 찾아낼 것이다는 것이다. 또한 보장이 위협받으면 받을수록, 개개인의 생존 자체가 더욱 직접적으로 위험에 처할수록, 이 경신성과 기적기대는 더욱 강렬해진다는 점도 명백하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독일 중간층의 오랜 전통적 약점이다. 이 약점의 범위는 니체의 철학으로부터 맥주속물의 평균적 행동의 심리학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독일 민족의 거대한 대중이 어떻게 히틀러와 로젠버그의 유치한 신화를 믿음을 갖고 자신 안에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하는 경악의 질문을 종종 듣는다면,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 있다. 즉 “가장 교양 있는, 지적으로 최고의 지위에 있는 독일의 인사들이 어떻게 쇼펜하우어의 신비적 ‘의지’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의 고지 그리고 서구 몰락의 역사신화등을 믿을 수 있었는가?”고. 그리고 우리는 그렇다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지적 및 예술적 수준이 히틀러와 로젠버그의 조야하고 모순적인 데마고기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높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니체에 의한 쇼펜하우어의 개작의 뉘앙스를 인식론적으로 추구할 수 있고, 니체의 데카당스 비판의 뉘앙스를 미학 및 심리학의 전문지식을 갖고 평가할 줄 아는 정도의 철학적 문학적 교양인이 짜라투스트라 신화와 초인의 신화 그리고 동일물의 회귀의 신화에 대해 신앙처럼 태도를 취한다면, 근본적으로 그것은 당조직 안에 한번도 없었거나 혹은 오직 일시적으로만 있었고, 도제시대를 끝낸 후에 거리로 내던져진, 별로 교양이 없는 청년노동자가 절망 상태에서 히틀러가 ‘독일 사회주의’를 실현하리라는 것을 믿는 경우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게오르그 루카치, 100-101쪽)
그렇다면 근대 비합리주의의 특수성은 무엇에 있는가? 무엇보다도 특히 근대 비합리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것의 특수한 계급투쟁의 기초 위에서 처음에는 봉건제와 절대군주제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진보적 권력투쟁의 기초 위에서, 후에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반동적인 방어투쟁의 기초 위에서 발생하였다고 하는 점에 그 특수성이 있다. 이들 계급투쟁의 다양한 단계들이 비합리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내용적으로 그리고 형식적으로 문제제기와 해답을 마찬가지로 규정하면서, 어떠한 결정적인 전환을 초래케 하였는가, 또한 이 전환이 비합리주의의 외관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하는 점을 이 책 전체의 서술이 앞으로 구체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지금 우리의 철학적 문제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갖는 이러한 근본적 의의를 요약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자본주의적 발전과 前자본주의적 발전 사이의 하나의 중요한 차이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의 문제이다. 노예제 사회에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우리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체계의 위기점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것은 생산력이 더욱 더 강력하게 후퇴되고 위축되고 그리하여 이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기초인 노예제의 존속을 계속하게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러한 과정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게오르크 루카치, 120쪽)
<독일적 인간의 새로운 전형은 무엇이었나? (중략) 처음에는, <당 문학>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정치적 투쟁이 찬양되고, 국가 사회주의 독일노동당을 위해 사용되는 폭력과 야만성이 찬미되었다. 1935년부터 2차 세계 대번 발발까지의 기간에 나치 작가들은 낭만적 취향이 매우 강한 농촌문학으로 쏠리게 되었으며 독일 농민들의 불변하는 미덕과 <피와 흙>의 유기적 통합을 묘사했다. 1939년 이후에는 군사적이며 영웅적인 주제가 다시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명백히 전시의 사기를 높이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중략) 투쟁 돌격대의 대원, 고향땅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농민, 그리고 견실한 방위군의 군인 모두가 공동체적 연대의식에 호소하고 있었다. (제임스 D 윌킨슨, 193쪽)
국가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국가목적은 같은 인종의 공동사회를 육체적․정신적으로 유지하고 조성하는 데 있다. 이 유지라는 것 자체는 첫째로 인종적 존립을 담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 인종 속에 잠자고 있는 모든 힘을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능력 가운데 일부는 언제나 첫째로 육체적 생활의 유지에 봉사하고, 다른 부분만이 정신적 발전의 촉진에 봉사한다. 그러나 사실 언제나 전자는 후자의 전제를 이룬다. 이 목적에 봉사하지 않는 국가는 잘못 만들어진 것이며, 실로 기형아이다. 이러한 국가가 사실상 존재한다고 해도, 해적단의 성공이 약탈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상태를 바꾸지 못한다.
우리 국가사회주의자는 새로운 세계관의 주장자로서 이른바 ‘용인된 사실’-그 점에서 잘못되어 있는-을 바탕으로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이미 새롭고 위대한 이념 주창자가 아니라, 오늘날 거짓말쟁이 쿨리(하층노동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형식으로서의 국가와 내용으로서 인종 사아의 차이를 매우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이 형식은 그 내용을 유지하고 보호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가지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민족주의 국가의 최고 목적은 문화공급자로서 보다 높은 인류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만들어내는 인종의 본원적 요소 유지에 힘쓰는 것이다. 우리는 아리아 인종으로서 이 민족의 유지를 보증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그 정신적․이념적 능력을 한층 더 키움으로써 최고 자유에 까지 이끌어가는 민족의 살아있는 유기체로서만 국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를 속이고 국가로서 믿게 하려는 것은, 대개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수반한 가장 깊은 인류의 실책에서 태어난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오늘날 세계에서 혁명가로서 서 있으며, 또한 혁명가로서 낙인찍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상과 행동은 결코 우리 시대 찬성과 반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한 진리에 연관되어 있는 의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또 우리는 후세의 보다 더 높은 통찰이 우리의 오늘날 행동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존경하리라고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528-529쪽)
오늘날 붕괴하여 다른 나라의 유린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 독일 민족이야말로 자신 속에 있는 저 암시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신은 이미 어릴 적부터 젊은 동포에게 내면화되어야 한다. 모든 젊은 동포의 교육이나 훈련은 전체적으로 보아 자신들이 남보다 절대로 뛰어나다는 확신을 주도록 시도되어야 한다. 젊은 동포는 자기 체력이나 힘의 강인함에 있어, 민족 전체가 무적이라고 하는 신념을 다시 획득해야 한다. 왜냐하면 독일 국으로 하여금 승리로 이끈 것은 각 개인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전체적으로 그들 지도부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의 총합계였기 때문이다. 독일 민족을 다시 높여준 것은 다시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이 확신은 몇 백만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똑같이 느낀 결론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착각에 빠져서는 곧 우리 민족의 붕괴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언젠가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 또한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클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 민족이 안녕과 질서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오늘날 부르주아적 교육활동에 따라서 우리의 몰락을 의미하고 있는 오늘날 세계 질서를 언젠가는 깨고,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노예 사슬을 적의 얼굴에 내동댕이 치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오로지 국민 의지력과 자유에 대한 갈망과 최고 열정이 흘러넘침으로써만이 일찍이 빼앗겼던 것을 다시 빼앗아 올 수 잇을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548쪽)
그리하여 새로운 비합리주의는 대체로 종교적인 세계관의 인식론적 모티브를 부르주아화․속인화된 방식으로 수용하게 된다. 즉 신성의 인식은 신에 의해 선택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이미 선사시대의 마술에서 사제계급의 특권으로 시작되었고, 동양의 종교들을 특히 바라문교를 지배하며, 그리고 또한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중세에서도 지배적이었다. 물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래 부르주아화의 강한 영향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은 이 모티브가 파스칼에게서는 거의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귀족적 개인주의에도 불구하고 야코비 자신도 그의 직관주의의, 즉 직접적 지식의, 귀족주의적 성격을 특히 과시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생각지 않는다. 왕정복고시기의 사이비 역사철학, 사이비 변증철학과 함께, 즉 프랑스혁명의 세계관으로서의 계몽사상의 철학에 대한 반동적 반격과 함께, 처음으로 인식론상의 귀족주의는 철학적으로 다시 중심적 위치를 점하기 시작한다.(게오르그 루카치, 163쪽)
생철학은 반동을 철학적으로 도왔다. 생철학의 상대주의는 역사의 진보와 거기에 따른 철저한 독일 민주화의 가능성과 가치에 대한 믿음을 매장했다. 생철학의 극단적 원현상인 살아있는 것과 고정된 것의 대립구조는 힘들이지도 않고 이러한 문제의 난맥성을 해결하는데 이용될 수 있었고, 이 철학을 통해 민주주의를 기계적이고 고정된 것으로 음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중요한 관계는 여기서는 다만 암시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독일 사회학, 법철학, 역사기술 등등이 담당한 역사적 역할은 차후 우리의 문제와 연관이 있을 경우, 그때 그때마다 다룰 것이다.
생철학은 인식론에서 경험을 중심문제로 놓으면서 필연적으로 귀족주의를 세련되게 양성하기에 이른다. 경험철학은 오직 직관일 뿐이며- 따라서 선택된 자, 즉 새로운 귀족의 일원만이 직관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식이다. 그후 사회적 모순들이 더욱 첨예하게 나타났던 시기에 와서는 오성 및 이성의 범주는 민주폭도들의 범주이고 반면에 현실적으로 품위있는 사람들은 직관의 토대 위에서만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생철학은 원칙적으로 귀족주의적인 인식론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1, 477쪽)
파쇼의 호전적 생철학은 시민문화라고 일컫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날카롭게 공격하면서 자신의 생철학을 뻔뻔하게 비합리주의적 허무주의, 불가지론이라고 고백한다. 물론 이때도 허무주의와 불가지론으로부터 신화적인 동시에 실증적인 어떤 것을 찾아낸다는 어투로 고백한다. 이제 생철학의 새로운 단계는 신화적인 것을 인식론의 주안점으로 돌리는데 있다. 파쇼 철학도 보엠은 이렇게 상술한다. “탐구의 대상일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독일적 사유를 결정짓는 한계가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독일적 사유의 실증적 정의다. 신비성이 우리 현실 전체에 손을 뻗어 그것은 가장 미세한 것과 가장 거대한 것조차 주재한다. 우리 현실을 연사처럼 얽고 있는 해결할 수 없는 이 신비성은 본질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것을 무엇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지한다. 그것은 우리 생 속에서 움직이며 우리의 결정을 결정짓는다. 그것은 우리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 심층적인 것, 그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게오르크 루카치 1, 599쪽)
집단행동에 대한 아도르노의 불신은 강박적인 공포로까지 발전한다. 그는 학생들과의 갈등이 첨예화되던 1969년에는 강의하는 것 자체가 언제든 "폭탄과 총격을 각오해야"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두려움을 토로한다. 나치 시대의 지식인 박해에 대한 기억도 아도르노가 학생운동에 거리를 두게 한 또 다른 요인이다. 그는 학생을 비롯한 지식인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적대감, 오늘날의 보편화된 지식인 박해를 거론하면서 대학 위기의 근본원인을 대학생에 대한 일반인들의 점증하는 적개심에서 찾는다. 그는 학생운동에 대한 대중의 이러한 적대감을 독일사의 거시적 맥락에서 파악한다. "학생들이, 그리고 지식인들 전체가 반동적인 독일 역사의 플랫폼에서 유태인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선민집단(지식인, 유태인)'에 대한 대중의 억압이라는 무의식적 두려움이 깔려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심지어 대중들의 반전, 반미데모에서도 파시즘의 징후를 본다. 그는 '오늘날 독일에서는 반미주의가 전반적으로 반유태주의의 기능을 하고 있다"면서, 하버마스가 급진적인 베를린 대학생들의 행태를 좌익 파시즘이라고 평한 것은 옳다"고 옹호한다. '반유태주의가 우익파시즘의 작품이듯, 반미주의는 좌익파시즘의 작품'이라는 식의 궤변은 파시즘 트라우마가 프랑크푸르트 학파 수장의 의식세계를 얼마나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뜨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김누리․오성균, 242쪽)
니체는 자신의 사상 구조를 세우는 방법론적인 원칙을 쇼펜하우어로부터 물려받았고 이 원칙을 시대에 맞게 변형하여 계승 발전시켰다. 그는 일체의 쇼펜하우어적인 표상과 의지의 이원성을 배제하여 ‘의지신화 Willens mythos’를‘힘에의 의지 der Willezur Macht’로 대체하였다. 그는 “우리의 총체적인 충동의 생을 한 의지의 근본형태(힘에의 의지)가 형성되고 분화된 것으로 설명하게 된다면, 또 우리가 유기적 기능을 모두 이러한 힘에의 의지로 환원할 수 있고, 그 힘에의 의지 안에서 생식과 영양 섭취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도 찾아낸다면, 작용하는 모든 힘을 명백하게 힘에의 의지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내부에서 보여진 세계, 그 예지적 성격을 향해 규정되고 명명된 세계 이는 바로 힘에의 의지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자연철학의 강령을 공식화했다. 힘에의 의지는 결국 더 이상 근대를 지배하던 이성, 도덕이라는 도구에 의해 세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의해 세계가 움직인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지 개념들을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의 선전과 선동을 위해, 그리고 철저한 지배를 위해 변형하여 사용한다.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서‘의지’의 개념은 개인의 주관적인 욕구나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휴머니즘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자기 노예화’내지 ‘복종을 향한 의지’를 의미한다. 그들은 원래 내재되어 있는 의지 개념에 대한 이해를 배제한 체 단지 표면적으로만 그것을 사용하면서 모든 문제가 의지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실제 독일 국가사회주의에 있어서 절대 복종과 자기희생의 의지는 가장 중요한 이념이었다. 또한 국가 사회주의가 표방하는 의지의 담론은 국가사회주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국가의 최고 정점에 홀로 서있는 지도자를 신비화시키고 절대적 복종을 의식화시키는 것은 독일 문화정책의 중요한 목표였다.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는 끊임없이 의지의 사용을 선전 선동 하면서 그것을 자신들의 권력에 철저히 이용했고 자신을 의지의 화신으로 연출해 냈다.
슈테른 J.P Stern은 쇼펜하우어에서 니체로 전승되어온 의지철학이 어떻게 파시즘으로 상속되어졌는지, 그리고 전투적인 의지주의 속에서 어떻게 해석이 바뀌었는지를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 Mein Kampf>(1925)을 통해 설명 했다. 그리고 더 강력해지는 의지를 제어하는 힘은 히틀러의 정치적 수사학에 있어서 주요 관점 중의 하나였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슈테른은 동시대인들에게 히틀러의 숙명적인 암시력으로써 경험되어졌던, 정말이지 악마적인 힘을 가진 그의 동맹에 대한 증명으로써 경험되어졌던 그러한 강력한 의지의 예들을 인용하였다. 히틀러의 관점에 따르면 위대한 정치가는 보통의 인간성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천재의 창조의지 수단으로 낙인찍는다고 한다.(권경희, 16-17쪽)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 <하얀 리본>은 독일 파시즘의 문화적 기원을 근대 가족 문화의 폭력성에서 찾고 있는 대단히 특이한 영화이다.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권위적인 가부장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얼룩진 근대 독일의 가족 문화는 상호 신뢰와 사랑에 기초한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자녀들은 불량 아버지가 휘두르는 신체적 폭력, 언어적 폭력, 종교적 폭력, 정신적 폭력, 심지어 성폭력, 그리고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노출되어 신체적 및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고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가부장의 폭력에 맞서지 못하고 정신적 불안상태에 놓여 있었고, 클라라처럼 종교적, 상징적 수단을 통해 부친을 살해하며 복수하는 아이들까지 나타났다. 심지어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아이들이 불특정한 타자를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사회적으로 재생산하는 가해자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살벌한 풍경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독일 사회의 가족 문화의 실제 모습이라고 영화는 고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이러한 폭력적인 가정 문화의 자궁 안에서 파쇼적, 폭력적 인간이 조용히 배태되고 있었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20세기 독일의 문명화된 야만화 과정의 탄생 국면을 가족 문화의 폭력성이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재현해내는 데 성공한 수작(秀作)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오로지 폭력적인 가족 문화만이 파쇼적 폭력적 인간을 잉태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일까? 이 영화가 비록 가족 문화의 폭력성을 강조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 문화와 연관된 가족 외부의 다른사회적 조직들과 완전히 분리시키고 있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가족 이외에 교회와 병원, 그리고 학교가 나온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사회적 공간이 가정 폭력에 희생당한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회적 공간조차도 이미 가정과 똑같은 폭력적인 가부장들이 이미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교회는 지나친 엄숙주의 신앙관을 갖춘 목사 아버지의 지배 공간이고, 병원은 성도착증에 빠져 자신의 딸까지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의사 아버지의 지배 공간이며, 학교는 그늘진 아이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에는 무지한 미래의 가부장인 교사의 지배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교회는 엄숙주의적 개신교의 교육관에 따른 아이들의 폭력적 훈육을 미화시키는 장소가 되고, 병원은 하얀 가운으로 가린 성도착증 환자인 의사 아버지의 은밀한 폭력을 은폐하는 장소가 되며, 학교는 가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무관심하여 가부장의 폭력을 자유방임하는 장소가 된다. 결국 이 영화는 교회와 병원, 그리고 학교를 비롯한 사회적 공간은 가부장들이 휘두르는 가정 폭력을 직간접적으로 미화하고, 은폐하고, 방임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네케의 공간적 재현의 미학을 음미해 보면, 이 영화의 시선은 단순히 폭력적인 가족 문화의 내부 영역에만 그치지 않고 그 외부로까지 확대되어 근대 독일의 가정 폭력의 작동 방식의 내포와 외연을 동시에 재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된다.(최용찬 1, 87-88쪽)
나치는 대중을 설득하고 조종하여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적 무기로 언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낱말이 갖고 있는 기존의 의미를 변화시켜, 사람들의 주의를 끌도록 했으며, 이러한 낱말은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표제어가 되어 선전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이 언어에는 감정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많다. 나치는 강하고 격렬한 의미를 갖는 은유적 표현, 일상 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어법, 청중의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비스러운 낱말을 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상황이든 간에 그 상황을 언어적으로 이용하여 국민을 선동해나갔다. 나치는 표현의 의미를 상승 고조시키기 위해 여러 부가어가 겹겹이 쌓여 나타나는 구조를 선호하였다. 이는 나치언어의 통사구조가 갖고 있는 독특한 표현 집적(集積) 특성이다. 다양한 부가어가 결합되어 나타나다보니 때로는 그 표현의 의미가 모호해지기도 한다.
나치시대에는 언론의 통제로 말미암아 획일적이고 규범에 맞추어진 기사만이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었고, 개별적으로 사용되는 낱말 또한 정부기관의 지침과 단속 하에서만 통용될 수 있었다. 제3제국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가장 독일적인 색채를 풍기는 낱말이 사용되어야 했으며, 그런 낱말은 독일 이외의 사항들을 지칭할 때에는 사용될 수 없었다. 그리고 독일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위기 시에는 국민들에게 부정적인 어감을 주는 표현들이 금지되었다. 나치는 대중의 불만을 탐지하고 언어유도를 통해 국민의 정치적 결속을 유지하고자 했다. 계층간의 불화는 민족공동체 담론 속에서 녹아 내리고, 경제적 곤궁의 문제 또한 언어가 제시하는 비전의 뒤켠에 가려져서 현실적인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와 같은 언어적 일체감 속에서 대중은 나치가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한 선봉에 서게 되었다.(김종영, 242-243쪽)
⑸ 선전 선동
이와 같은 사상적 빈곤에 반비례하여 그 대중조작은 고도로 세련된 것일 필요가 있었다. 나치는 상징을 매우 중요시하여 사용하였다. 대중의 관념이란 단순한 것이 조금만 있으면 된다는 파악에서 각종의 상징조작과 심리조작을 통하여 대중의 비합리적인 에너지를 정치과정에 흡수하였고, 돌격대, 친위대 및 비밀경찰의 폭력에 의하여 이를 뒷받침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권위주의적인 인격을 핵심으로 하는 의사공동체의 조직화를 강행하여 원자화되고 무력화하여 하나의 새로운 영웅을 갈망하는 대중의 심리를 만족시킴으로서 강제적 동질화를 꾀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치즘은 허위의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에 냉정한 이성에 의한 토론이 될 수 없었다. 고로 나치는 개인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억제하여 가능한 한 개인의 고립화와 원자화를 기획했으며, 항상 대중 집회의 열광적인 분위기속에서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나치즘의 교화를 수행하였고 특히 라디오를 비롯한 모든 메스미디어는 완전히 독점하여 대중조작에 크게 이용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나치의 대중조작은 선전과정에서 이성에 입각한 합리적 설득보다는 암시적인 성격을 농후하게 내포하고 있는데, 이렇게 볼 때 나치체제의 대중조작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으로 무력한 대중, 산업화, 분업화, 거대화된 대중사회에서 소외된 개인을 대상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며 그것을 위해 중간집단과 가족의 구속력까지 파괴하여 개인의 철저한 원자화를 목표했던 것이다.(조승섭, 34쪽)
한편 나치스는 체계유지에 역기능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모든 매체로 하여금 보도를 금지시키는 함구전술, 즉 침묵선전을 행하였다. 침묵선전이라 함은 변칙선전의 일종으로 특정사건, 즉 당국에 유리한 사건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표명하여 모든 매체와 선전수단을 총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취급하는 반면, 국가나 지도자, 당국의 정통성 유지에 불리한 사건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여 아무런 보도나 관심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여론의 비등과 진작을 무마시킴과 아울러 여론을 왜곡, 조작하여 선전의 방향을 조정하려는 선전기술을 말한다. 히틀러의 이러한 술책은 여론의 조작은 물론 政敵을 견제하여 그들을 대중의 뇌리에서 떠나도록 하는 효과도 노린 것이다. 나치는 보도금지를 위시하여 집회 및 토론의 금지는 물론 사실의 무마와 말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대내외적 통제조치를 취하면서 침묵선전을 전개했던 바 그 대상은 군사와 관련된 중공업분야, 농업문제, 국제협력관계, 적대국에 대한 실정, 유태인과 정치범 탄압문제, 권력분포, 요인의 비위행위, 이익단체의 활동, 사회악에 관한 내용, 종교의 정치참여 문제, 기타 언론의 조작에 관한 내용 등이었다. 나치의 집권 기간 중 언론매체의 하달된 약 5만 종류의 보도협조 사항 중 25%에 해당하는 것들이 침묵을 지켜달라는 지시였다. 이러한 침묵선전은 대외선전에도 자주 이용되었던 바, 우방국에 대해서는 독일에 유일한 여론을 조성하는 반면 비우방국에서는 침략의도를 은폐시킴과 아울러 전쟁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뜻에서 침묵선전을 강화하였으며 이해관계가 깊은 인접국과 적대국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자료제공과 병행하여 협박과 뇌물공세를 전개하여 親獨的 분위기를 조성코자 했다.
그러나 침묵선전은 정치이념과 선전에 역행하는 요인들을 제거하고 여론을 임의로 유도, 조정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반면 진실을 은폐하고 위선을 합리화시키는 후속의 침묵선전술이 수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침묵선 전술은 보다 적극적이고 강도 높은 방향으로 발전되게 마련이며 이는 바로 통제를 위한 또 다른 통제의 등장을 유발하여 계속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말았다.(조승섭, 38-39쪽)
그것은 주로 그가 행했던 심리조작에서 노정되어진 오류에서 기인되었다 할 수 있는바 그의 심리조작 과정에서 노정된 오류들을 지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히틀러는 다변적인 시대적 흐름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가지지 못했다. 특히 그의 심리전술은 평시를 전제로 한 것이었던 바 독일국 자체의 위기상황에는 그 효력이 반감되었다. 아울러 전시와 같이 국민전체가 위기적 심리를 가진 상황에 있어서는 표면적이고 조작되어진 승리로 大敗를 무마시키려는 구태의연한 상투적 선전이 통하지 않게 됨으로써 국민들의 체제에 대한 불신감이 증대되는 결과를 양산했다. 특히 그는 말기에 들어 대중앞에 서기를 꺼림으로써 대중을 스스로 피했던 점에서 이런 면에서 처칠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둘째, 선전지상주의 일변도의 정책이 상대에게 자기의 의도를 탐지하게 하여 조작의 음모가 노출되게 됨으로써 오히려 역조작을 당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즉, 감추면 감출수록 드러나게 마련이듯 작전의 이행 이전에 매스컴 등을 통해 예비적 전조가 나타남으로써 선전, 선동에 성공하고서도 逆宣傳에 패배하는 자승자박의 우를 범하게 되었다. 그의 심리전술은 공격적 심리전으로서는 우수했으나 방어적 심리전술로서는 실패작이었다.
셋째, Nazi 심리조작 특히 정치선전의 대부분이 경제적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모호했던 바 그 중에서도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근본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생산적이며 적극적인 대안을 갖지 못했다. 이러한 미봉책적인 기반 위에 튼튼한 골격이 들어 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넷째, 히틀러는 국내외 정책의 성공원인을 모두 그 자신과 선전의 성공에서 찾았다. 그러나 성공에 있어서 각 계층의 공헌이 종종 무시되었으며 특히 집단에 대해 야누스적으로 그 공을 돌림으로써 그의 이중성이 노출되었다.
다섯째, 히틀러는 그 나름의 혜안으로 심리조작에 주안을 두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대중들이 가진 이성적 측면을 경시했다. 환언컨대 그는 대중심리의 일면만을 보았을 뿐 살아 있는 숲, 누르면 반발할 수 있는 대중의 본원성을 간과했으며 대중이 다양한 심리의 집합체라는 사실 역시 경시했던 것이다.
여섯째, 나치스의 정치선전은 대립적 개념의 공존을 철저히 배격했다. 그리하여 正이면 正, 白이면 白, 하는 식의 일면성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자연히 그 범위도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히틀러의 대중선전 선동은 신화의 몰락과 시대도착적 괴리현상에 의해 결국 파국의 종말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조승섭, 46-47쪽)
국가사회주의자들은 대중을 설득하고 조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 분야의 은유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첫째, 종교적인 어휘와 어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국민대중을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로 나타내고 있다. 이를테면 히틀러의 연설문에 그와 같은 특성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용례는, 언어를 조작하여 국민대중을 종교적인 격정으로 몰고 가 그들을 쉽게 설득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나치언어에서 나타나는 종교적인 표현은 종교적인 영역과는 무관한 것에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종교용어에서 따온 은유적인 표현을 이용하여 국가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신성시하는 데 이용하였던 것이다.
둘째, 스포츠 용어는 일반 대중에게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나치언어에서는 전쟁과 관련하여 스포츠 용어에서 따온 은유적인 표현이 즐겨 사용되었다. 스포츠 용어에서 나타나는 운동경기적인 요소를 전쟁에 비유해서 은유적으로 말할 경우, 전쟁이 의미하는 심각한 양상에 대한 일반 대중의 공포를 해소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히틀러와 굅벨스는 전쟁행위를 축구경기나 권투경기로 비유해서 은유화하였다.
셋째, 나치언어에는 기계용어를 이용한 은유적인 표현도 있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대중을 향한 연설에서 기계용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함에 따라 그들이 설득해야 하는 일반 대중들을 은연중에 기계화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언어를 통한 인간의 기계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의학용어는 국민건강을 강조할 경우라든가 국가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정치적인 사실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자 할 경우에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손상에 대하여 의학용어인 회복(Heilen) 을 이용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든가, 정치적인 위기극복을 의학 용어인 치료(Heilung) 라는 말로 은유화하고 있다.
끝으로, 나치언어에서 생물학적 용어는 주로 인종론과 관련되어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유태인을 지칭하는 데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유태인을 생물학적 용어인 박테리아(Spaltpilz) 등으로 비유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유태인에 대한 혐오감을 유발하고자 하였다.(김종영 1, 201-202쪽)
영화매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자본이며, 자본을 향하는 영화의 속성을 파악했던 나치정권은 영화신용은행을 통해 영화산업의 자본구조를 용이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영화인들까지 총체적으로 조직화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집권하자마자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어려움에 처한 영화산업을 안정시키고 육성하기 위해 새로운 영화정책을 펼쳐나갈 것을 홍보해왔던 나치정권은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1933년 ‘제국문화협회법 Reichskulturkammergesetz’에 의거해 ‘제국문화협회 Reichskulturkammer’를 세우고, 그 하위법인 ‘영화협회법 Filmkammergesetz’에 의거 ‘제국영화협회 Reichsfilmkammer’를 설립했다(Albrecht 1969, 21). 제국문화협회의 직속 하위기관인 제국영화협회의 설립 목적은 영화단체들의 요구를 대변하며 영화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공정함을 기하는 것 등이었다(Vgl.Wetzel, Kraft/Hagemann, Peter A. 1978, 10). 제국영화협회는 일반경영부, 정치 및 문화부, 예술 및 사회 자문부, 영화경영 및 영화기술부, 이렇게 총 4부서로 이루어졌으며, 각 부서는 다시 여러 개의 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4개의 부서는 1937년 10개의 부서로 확대, 강화되었다. 그 규모나 구성만 봐도 상당히 컸던 이 기관은 영화 관계자들과 영화종사자들을 총 망라한 모든 영화인들을 관리하는 업무, 예컨대 영화활동을 하려는 영화인들은 이 기관에 등록해야 했는데, 그 등록은 물론 등록한 영화인들에게 발급하는 제국문화협회회원 증명서 발급 그리고 영화인들을 다시 세부적으로 제작자연맹, 배우연맹, 감독연맹, 극장소유자연맹, 카메라맨연맹, 영화음악가연맹, 시나리오작가연맹 등에 가입케 하는 것 역시 이 기관의 업무였다(Vgl. Becker 1973, 103f). 제국영화협회의 이러한 업무는, 모든 영화인들이 제국영화협회에 등록해야 함은 물론 해당 연맹에도 가입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제국영화협회는 그 규모나 업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영화관계자와 영화종사자를 총 망라한 모든 영화인들을 이중으로 삼중으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1934년부터는 ‘동등권 同等權 증명서 paritätischer Nachweis’ 제도가 실시되었고, 이로써 영화감독, 제작자, 배우, 시나리오작가, 카메라맨, 녹음기술자, 분장사, 영화음악가 등 영화제작에 관계하는 모든 영화인들은 물론 배급, 상영에 이르기까지 영화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단체나 조직들은 그 어떤 활동이든 영화와 관련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제국문화협회회원증명서 Mitgliedausweis der Reichskulturkammer’를 발급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제국문화협회회원증 제도로 인해 모든 영화관련 회사나 조직, 기관, 단체들은 반드시 이 증명서를 소지하고 있는 영화인만을 고용해야 했다 (Vgl. Becker 1973, 50ff). 바꿔 말해 생업을 위해 영화활동을 해야 하는 영화인들에게는 ‘제국문화협회회원증명서’의 취득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영화인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반드시 제국영화협회에 반드시 등록해야 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창작의 자유를 누려왔던 영화인들도 이제 영화 활동을 하려면 반드시 이 기관에 등록, 소속되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더 이상 개인적인 영화활동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누구나 이 제국영화협회에 등록함으로써 제국문화협회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법적으로는 이데올로기나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신뢰성 Zuverlässigkeit’만 갖추고 있으면 제국영화협회의 회원이 됨과 동시에 ‘제국문화협회회원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지만 등록자격 조건인 ‘신뢰성’에 대한 판단여부는 제국영화협회 협회장 고유의 권한으로 그의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더구나 제국영화협회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아리아인임을 증명해야 했다(Vgl. Geissler 1986, 24f).(김금동, 129-130쪽)
나치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영화매체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움으로써 영화인들을 설득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기대와 희망 속에서 실시되었던 일련의 영화정책은 그러나 심각한 새로운 문제를 야기 시켰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던 소, 대형 영화제작사와 소, 대형 극장주들의 갈등은 물론이고 유명, 무명배우나 스텝들의 개런티 차이,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불공정한 관계 등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고착화되거나 심각해져가고 있었다. 영화조직이나 기관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 소수의 유명 영화배우나 영화감독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세력을 확장해 가거나 유명세를 떨쳤던 반면 그렇지 않은 영화인들은 그들의 그늘에 가려 겉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영화제작비가 천정부지로 높아지는 것이었다. 많은 영화인들의 망명이나 활동금지로 인해 독일에 남아 있는 영화인들의 보수가 상승했고, 사전검열에서 요구하는 영화수정은 제작기간을 연장시켰는 데, 이 모든 것들이 제작비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1933-1936년 사이 제작비는 95%나 증가했고 많은 영화사들이 그 비용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더구나 외국에서의 독일영화 보이콧으로 인해 독일영화의 외국 수출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1933년 영화수출을 통해 제작비의 44%를 충당하던 것이 1937년에는 겨우 7%에 지나지 않게 됨으로써 재정적 어려움은 더 커져갔다(Vgl. Moeller 1998, 83). 이렇게 영화 전체 수익이 계속 낮아져 결국 전혀 수익을 내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었다(Vgl. Spiker 1975, 143). 게다가 중소 영화제작사를 우선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영화신용은행이 대형제작사들 위주로 지원하면서 중소제작사는 소외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소 영화제작사의 몰락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결국 자본주의 폐해의 철폐를 외치면서 시행되었던 나치정부의 영화정책은 오히려 자본주의의 폐해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로 인해 영화산업은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나치정권은 오히려 새롭게 대두된 영화의 위기를 독일영화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나치정권은 1937년 대형 영화제작사인 우파, 토비스, 테라, 바바리아를 국유화했으며 1942년에는 모든 제작사를 우파로 통합시켜 우파를 독점 제작사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모든 영화가 우파에서만 제작될 수 있음은 물론 우파가 모든 영화들의 배급, 상영까지 독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나치정권의 완전한 영화매체 장악프로젝트는 완성 되었다. 제작, 배급, 상영의 일원화를 통한 독일영화 전체의 장악은 나치정권이 목표한 것이기도 했다. 영화전체를 완전히 장악한 나치정권의 영화정책은 그러나 독일만의 일이 아니었다. 나치의 영화정책은 1930년대 말 일제에 의해 수용, 나치영화정책을 모델로 일본 본토에서는 물론 조선에서도 실시됨으로써 조선영화인들로 하여금 친일의 길을 걷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김금동, 136-137쪽)
나치의 조직 중에 가장 인기 있고, 대중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이 기관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문화적 욕구에 대한 현실적인 기대감과 희망을 빌미로 하였던 다양하고 매력적인 홍보와 선전프로그램에 있었다. 대중매체를 활용한 매력적인 홍보와 선전은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문화적으로 형상화시키는 첨병의 역할을 하였고, 특히 “기쁨을 통한 힘(KdF)”의 포스터는 그 행사와 사업을 홍보하고 선전하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효율적인 매체였다. 이 단체의 문화 포스터는 일상에 바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촌철살인과 같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하며,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인상적인 이미지와 메시지를 생산하고 있다. 이렇게 제작된 문화포스터는 공공도로나 각종 대합실 그리고 상점의 창문이나 벽과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다중의 이목을 끌기 위한 선전 및 홍보매체로 활용되었다. 원래 포스터라는 매체는 특성상 여타의 홍보 및 선전매체보다도 저렴한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올릴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부가적으로 이 단체의 홍보 및 선전은 홍보비용과 홍보영역에 있어서 나치의 다른 선전 및 홍보에 비해서도 월등한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는 점도 이 단체의 문화포스터가 프로파간다에 적극적으로 활용된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였다. KdF는 문화포스터에서 공감력 있고 설득력 있으며, 노동자와 국민대중이 원하는 소재와 이미지, 문자, 아이콘들을 적절히 조합하여 선전의 수단으로 삼았다. KdF 포스터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노동자 및 국민대중의 문화적 취향과 욕구를 간파하여 여기에 맞추었으며, 또한 이들에게 지금까지 부족했거나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시간과 여가에 대한 새롭고 환상적이며 매력적인 이미지를 창출함으로써 이 단체에 대한 국민대중들의 뜨거운 반향을 불러오는 데 기여하였다. 나치의 이 문화 포스터에 나타나는 휴가여행, 레저용 자동차등의 선전 이미지들은 이해가 쉽고 대중친화적인 기호 및 상징체계 그리고 도상학적 구성과 제목 및 구호들로 표현됨으로써 노동자와 국민들의 문화적 욕구와 기호를 자극하여, 공감을 형성하는 적절한 매체역할을 수행하였다. 나치 집권초반의 문화뿐만이 아니라 복지와 계몽분야의 포스터에서도 나타나고 있던 이러한 ‘부드럽고 친근한 출발’은 나치가 집권 이전보이고 있던 선거 포스터의 전투적이고 과격한 이미지와 대조된다. 나치의 전투적이고 과격한 이미지가 집권을 위한 몸부림이었다면, 이‘부드럽고 친근한 출발’은 집권초반인 30년대 초중반 대중들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나치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인기몰이’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가까워지면서 나치의 이 ‘부드럽고 친근한 출발’은 다시 ‘과격하고 호전적인 본색’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나치의 정책 및 이념적 변화 과정을 KdF의 문화포스터는 완연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 KdF 문화포스터는 그 궁극적인 목적이 노동자와 국민들의 휴식과 자유 및 여가의 활용이라는 문화적 요소와 그 시각이미지화와는 다르게, 나치의 팽창적인 정책과 호전적인 이념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동원을 이끌어 내기 위한 프로파간다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문화프로그램의 정치도구화가 이 KdF의 문화포스터의 전반에 완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박상욱, 295-296쪽) |
기술을 통한 전쟁을 지향하는 민족의 미래는 총동원으로 귀결된다. 총동원의 목적은 전쟁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을 위해 동원되었으며, 세계 지배의 수단으로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결집한 새로운 인종을 창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나는 지금 새롭고, 뛰어난 인종을 본다. … 그 사람들은 기계를 만들고 기계에 도전하는데, 그 사람들에게 기계는 죽은 쇳덩어리가 아니라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피로 다스려야 할 권력의 기관이다. 이 새로운 인종은 세상을 새로운 모습으로 만든다.” 나치즘은 이런 주장을 채택해 반기술적 태도가 민족적 무능함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20세기에 민족이 부강해지려면 기술적으로 진보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크 네오클레우스, 148쪽)
모든 정치적 사건을 주의깊게 검토했을 때, 나는 이전부터 끊임없이 선전활동에 바로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적 조직이 노련한 기술로 이 도구를 지배하고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선전의 바른 이용이 부르주아 정당으로서는 거의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이해할 수 없는 현실적인 기술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다만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만이 특히 루에거 시대에 이 도구를 어느 정도 능숙하게 사용하여 매우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을 바르게 이용하면 얼마나 커다란 효과를 거둘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사람들은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 비로소 이해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마당에서 다시 모든 것을 상대편으로부터 배워야만 했다. (아돌프 히틀러, 303쪽)
그들은 이 이론이 굉장히 많은 사회정의의 주장과 떨어질 수 없이 통합되어 있다고 밝힘으로써 그 이론 보급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성실한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주장에 따를 것을 지겹도록 재촉한다. 왜냐하면 이 주장이 그와 같은 형식이나 부수물을 수반하고 행해지는 한, 처음부터 부당하고 실현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순수한 사회적 사상이라고 하는 망토 아래 참으로 악마적 의도가 숨겨져 있는 까닭이다. 아니, 그 의도는 매우 뻔뻔스러운 노골성으로 완전히 공개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은 이성과 인간적 광기의 분간하기 어려운 혼합물을 나타내고 있는데, 언제나 광기만은 실현되어도 결코 이성쪽은 실현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인겨을, 또 국민과 그 인종적 내용을 무조건 부인함으로써 그 이론은 온 인류 문화의 근본적 태도를 무너뜨린다. 왜냐하면 문화는 바로 그와 같은 요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아돌프 히틀러, 453쪽)
그리고 정치적으로 그들은 민주주의 사상을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독재로 대체시키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주의로 조직된 대중 안에 유대인은 자기에게 민주주의를 불필요하게 만들고, 또한 그것을 대신해서 민족을 독재적으로 잔인한 주먹으로 정복해서 지배하게 해주는 무기를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두 가지 방면에서 계획적으로 혁명화해서 목표를 노력한다. 바로 경제적․정치적 방면이다.
내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해서 너무나 강력하게 저항하는 민족에게 그들은 자신들의 국제적 세력을 동원해서 적의 그물로 휘감기게 하여 그 민족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마지막에는 필요하다면 전쟁터에까지도 혁명의 깃발을 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이익을 올리지 못하게 된 공공기업이 국유화가 폐지되어 그들의 금융 지배에 종속될 때까지 국가를 계속 흔들어댄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국가에 자기 보존 수단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국가적 자기 주장과 방위기초를 무너뜨리며, 지도에 대한 신념을 아주 없애 버리고, 그 국가의 역사와 과거를 경멸하며, 모든 진실로 위대한 것을 시궁창 속에 버린다.
문화적으로 그들은 예술․문화․연극을 악풍에 오염시켜 자연 감수성을 비웃고, 미와 숭고, 고귀와 선에 관한 모든 개념을 무너뜨려서 그 대신 인간을 그들 특유의 상스러운 기질의 영향 아래 끌어들인다. 종교는 희롱당하고 관습과 도덕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나타나며, 이 세계에서의 생존을 건 싸움에서 민족을 지탱해주는 최후의 것까지도 붕괴하기에 이른다.(아돌프 히틀러, 459쪽)
1933년 정권 장악에 성공한 나치스는 자신들의 집권을 ‘민족 혁명’ 또는 ‘민족사회주의 혁명’으로, 더 나아가 ‘독일 혁명’으로 선전한다.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 혁명과 같은 전통적인 의미의 혁명들과 차별 짓기 위하여 그들은 나치 집권이라는 사건이 갖는 혁명적 성격, 즉 독일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나치 혁명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민족사회주의 신화’를 만들어 내고 이를 ‘민족사회주의 (경배)의식’을 통하여 기념하며 민족적 종교의식으로 승화시켰다. 이와 같은 나치 혁명의 신화화와 그에 따른 ‘종교적’ 의식의 사회화와 정례화 과정은 푀겔린(Erich Voegelin)이 주장한 ‘정치 종교’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나치의 정치 종교화가 정확히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기성 종교를 수단으로 삼는다는 ‘정치 종교’ 개념의 도식에 100% 부합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당시 독일 사회에서 민족사회주의가 자신들의 고유한 상징들을 만들어내고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이를 소비하고 체득하게 만든 방식은 푀겔린의 ‘정치 종교’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나치 정권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나치즘을 위하여 ‘순교한’ 초기 나치스들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종교적 성일(聖日)을 모방한 국경일을 제정하고 기념퍼레이드를 하였다.
1923년의 실패한 나치 쿠데타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영웅기념일(Heldengedenktag)’ 행사는 나치의 정치 종교 의식을 특히 잘 보여주는 예이다. 쿠데타 당시 사망한 16명을 기념하기 위하여 히틀러는 1926년부터 11월 9일을 나치당 내에서 전국적인 ‘애도일(Reichstrauertag)’로 선포하고 그들의 ‘순교’를 기리는 기념행사를 하였다. 이들 16명의 ‘초기 나치 전사(alten Kämpfer)’들은 나치 집권, 나치 혁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웅이었다. 히틀러에 의하면 이들이 흘린 피는 “제3제국을 위한 세례 성수”였다. 실패한 나치 쿠데타의 희생자 추모 의식은 기독교적 구원상을 빌어 나치즘이라는 세속적 정치 운동을 종교화 또는 신성화하는 수단이었다. 민족사회주의 운동 최대의 실패를 영웅의 구원 신화로 전화시킨 것이었다.(나인호, 232-233쪽)
⑹ 교회의 저항
바르트는 히틀러의 정권을 이교적이고 사탄적인 독재정권으로 규정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 선언의 신학적 배경은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Kreuzestheologie)에 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신조의 제19조와 20조에 보면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학과 하나님의 인식이 있다”(Ergo in Christo crucifixo est vera Theologia et cognitio Dei)는 것이다. 루터교회에 있어서 신학의 참된 본질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은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이었다. 따라서 그 어떤 존재도 그리스도인의 주(主)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유산과 종교개혁의 전통이 바르멘 선언을 이끌어낸 것이다. 고백교회는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전통에 따라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양심 있는 고백교회 목사들은 반성서적이고 반인륜적인 ‘아리안 정책’과 유대인 학살정책에 저항하였다. 고백교회는 이교적인 언론과 아리안주의의 ‘피와 토양’의 정책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가했다.
바르트도 히틀러의 유대인 정책에 반박하였다. 바르트는 교회에 속한 자들의 교제는 혈통, 즉 인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과 세례에 의해 특징 지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만약 독일 개신교 교회가 유대인 기독교인을 배타시하거나 그들을 제2등급인 기독교인으로 간주한다면 하나의 기독교로서의 성격이 사라져 버릴 것으로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만약 국가 감독의 직분이 개신교 교회에서 가능하려면 그것은 다른 일반 교회적 직분과 비교되어 고려되어야 한다. 즉 그것이 정치적인 이념들이나 방법들, 즉 정당에서의 선거나, 당원이 되는 것 등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교회의 정규적인 직분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들이 직분에 임명될 때는 전적으로 성직자의 자질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박해할 뿐만 아니라 강제수용소에서 테러(Terror)를 자행하는 것을 강력히 비판하였다.(김기련, 160-161쪽)
신학의 경우 독일의 고백교회와 한국의 신사불참배 장로교인 모두 성서를 준거틀로 하여 십계명의 제 1계명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계시를 주장하는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것은 저항하는 교회가 당시의 파시즘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규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우상은 과거 여타 종교와 이교도의 어떤 신 뿐 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체제와 이데올로기 역시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반면에 신학적으로 차이점이 나타나는 종말론과 성서론에서는 독일 고백교회과 한국 장로교회 사이의 신학적 배경과 시간적 연륜의 차이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 2천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유럽의 교회, 특히 루터 이래로 5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독일교회와 달리 한국교회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지 50여년이 되었다는 역사의 차이가 곧 신학적 차이로 나타나기도 한 것이다.
당시 유럽의 교회와 신학적 상황을 직접 접할 수 없었던 한국교회는 넓은 시야와 신학적 안목으로 교회와 사회를 바라볼 수 없었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부딪히자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전천년주의 종말론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신사참배 저항근거로서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반면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 유럽교회는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이라는 오시는 하나님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의 종말론은 미국의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고 여기에 천국의 개념이 무속의 천당과 불교의 극락정토 개념과 습합 또는 교체되면서 일제에 의한 피지배 민족으로서의 정서적 설움과 결합되어 독립과 해방을 염원하는 내세적이고 피안적인 임박한 종말론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국가․사회적인 혼란 가운데 독일 그리스도인들(DC)은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린 반면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 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종말론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성서론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즉, 바르멘 신학선언의 초안자인 바르트는 성서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독론의 관점에서 이해한 반면 한국의 장로교인들은 대체로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한 것이었다.(김일석, 116-117쪽)
이러한 인간의 합리화를 통해 노동생산성을 높이려는 사회적 합의는 나치의 집권과 더불어 더욱더 구체화되었다. 나치가 추구한 인종주의적 정책으로 인해, 생물학과 식물학 등에 1933년 이후 상당한 관심이 쏟아졌다. 이에 비하면 노동생리학은 생물학이나 우생학처럼 나치의 인종주의적 정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혹은 물리학이나 화학 등 무기개발에 직접 이용되는 학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초기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끌지는 않았다. 물론 나치가 추구한 노동생산성의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꾸준히 관심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집권 초기에는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서 재정적 지원도 부족했고 연구 성과도 많지 않았다. 특히 나치 초기에는 대공황을 겪은 후 실업률이 높았기 때문에, 노동생산성보다는 노동시장의 양적인 성장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게다가 앞서 논의한 대로, 노동생리학 연구소가 응용연구보다는 토대연구에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의 활용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도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 시점이었다. 이와 더불어 연구소가 여전히 ‘최고의 능력’보다는 ‘최적의 능력’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 집권 초기에 기업가나 나치 산하 단체장의 호응을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테일러주의를 경험한 노동자들도 노동생산성을 위한 ‘과학연구’를 반기는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나치 초기에는 노동생리학연구에 부정적인 시각조차 있었다.(송충기, 173쪽)
일제의 이러한 식민주의 교육정책은 ‘일시동인’이니 ‘동화주의’니 ‘황민화’니 하여 얼핏 듣기에는 식민지 모국인 일본인과 동등하게 교육하여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환상을 갖게 하는 것이었지만 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환상을 전면에 내세워 철저하게 한국의 민족성을 파괴하고 영구적으로 일본에 대한 종속민으로 묶어 두어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복종하고 봉사하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관․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계 사립학교 역시 황실을 숭경하는 정신을 기를 수 있도록 제일(祭日)과 축일(祝日)에 신도적 의식을 거행하도록 요구한 것은 1910년대였다. 1912년 한국에도 신도의 신화 및 일본 황실과 관련된 제일․축일을 휴일로 공포하고, 이 날에 신사나 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은 가운데 신도적 의식을 거행하도록 한 것이다.
1920년대 들어서도 총독부와 교육계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기독교도와의 사이에서 문제가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24년 10월의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신사불참배 사건과 1925년 10월의 기독교계 학교들의 출영거부 및 조선신궁 진좌제 불참 사건이다.
기록상 1930년대 들어 기독교학교에 최초로 신도의식 참요를 강요한 것은 1932년 1월, 남장로교 선교구역인 전남 광주시에서였다. 이 때도 학무국에서 이 지역 기독교 학교들에게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에 참가하고 신사에 참배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해 9월 평양지역에서는 숭실전문학교를 비롯한 10개의 기독교학교가“만주사변 일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에 학생을 참가시키라는 도지사의 공식 통보을 받고도 이를 거부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독교계는 신앙상의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총독부의 양해를 구했으나 1930년대 들어 대륙침략을 재개한 일제는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다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신사에 참배하든가 폐교하든가 택일하라는 강경책으로 나왔다.(김일석, 57-58쪽)
2. 반 유대주의
이처럼 종교는 하느님과의 일치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종교의 과거는 오히려 하느님을 죽이는 일에 몰두했다. 이처럼 종교의 과거는 상극의 정치신학을 보여준다. 나보다 더 커 보이는 것은 모두 때려 죽여야 성이차는 살해의 논리, 학살의 논리, 죽임의 논리가 바로 상극의 정치신학이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일치는 아직 오지 않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것은 한스 큉이 말한 종교 평화를 위한 전략 구상이다. “종교평화 없는 세계평화는 없다.”“종교대화 없는 종교평화는 없다.” 그래서 21세기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물음은 어떻게 종교대화가 가능한가라는 물음, 즉“종교대화의 가능성 조건”,“ 종교대화를 통한 상생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김진 1, 195쪽)
오늘날 전 세계적인 이주현상과 세계화라고 일컫는 사회적 맥락에서 교육과 교육학은 각각의 개인을 세계사회의 복잡성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세계시민으로 육성하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세계화교육은 각각의 개인들이 세계를 보는 넓은 시각의 기초를 바탕으로 세계의 상호관련성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전쟁, 기후변화, 자원고갈, 불공정한 세계무역구조,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 및 각각의 국가내의 사회적 빈부 격차의 심화와 같은 현재 당면한 세계문제를 통찰할 수 있도록 조력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화교육은 학생들이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다양한 세계관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시민적 의식과 자질을 강화시키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 시민교육이라는 용어는 종종 세계화교육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화교육은 자라나는 세대들이 다양성에 대한 민감성과 ‘지구적 관점’(권순희 외: 45)을 기르도록 다양한 이론적 구상을 제시하고 있으며 교육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교육의 보편적이며 규범적인 목표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충분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지만, 세계화교육 자체가 권력구조와 배제에 관련하고 있는 측면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양성에 대한 존중, 연대성, 세계개방성과 같은 도덕적으로 ‘옳은’ 개념의 사용은 주체가 비판하고자 하는 문제에 스스로 연루되고 있는 측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소홀히 하게 함으로써 세계화교육에 내재한 인종차별 문제를 덮어버리는 데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인종주의를 연구하는 관점에서 보면,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세계화교육의 이론구상과 실천에 주체의 세계관과 타자관 그리고 자기상이 반영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체는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서 자기의 욕망, 동경과 소망을 연구대상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화교육은 본래의 ‘선한’ 의도 혹은 목표를 옹호하되, 자기 확신을 의심하고 분석과 비판의 대상으로서 인종주의에 대해 스스로 대응하는 방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세계화교육의 제반조건으로서 인종주의를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론적인 입장을 지양하여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홍은영, 16쪽) |
⑴ 반유대주의의 역사
소수자로서의 유대인에 대한 타민족의 관점과 이해는 매우 다양하였다. 어떤 시대에 어떤 곳에서는 매우 성공한 유대인들이 부와 명예와 높은 지위를 얻어 존경을 받았으며, 다른 어떤 시대와 장소에서는 여러 가지 차별 속에서 가난하고 미천한 지위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을 두고 유대인에 대한 타인들의 생각과 태도는 점차 부정적으로 고정되어갔다. 바로 “유대인은 천성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악하며 열등하다고 여기는 일체의 태도와 행동”을 일컬어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 칭한다.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긴 역사를 뚫고 끈질긴 생명력과 놀랄만한 유연성과 뛰어난 융통성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살아 활동하고 있다.
이른바 ‘가장 오래된 증오’로 일컬어지는 반유대주의의 역사는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고정관념은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았다. 나라를 잃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타민족들과의 불가피한 접촉과정에서 생겨난 유대인에 대한 하나의 고정관념이 오랜 시간에 걸쳐 싹트고 자라고 성장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태어난 곳은 신화가 지배하던 그리스-로마의 땅이었고, 그것이 젖을 먹고 자란 곳은 절대 신앙을 자랑하던 기독교 천년 왕국이었으며, 마침내 그것이 ‘위대하고 순수한’ 피를 가진 아리안의 독일에서 ‘악의 꽃’을 피웠다.
그리스-로마인이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유대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이번에는 기독교도가 말했다. “너는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히틀러가 말했다. “너는 살 권리가 없다.”
반유대주의의 출발은 디아스포라 세계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독특한 신앙 ―유일신 신앙으로 대표된다. ― 과 삶의 방식 ― 안식일 준수나 까다로운 음식 법, 타민족과의 결혼금지 등 ― 때문이었다. 유대인의 남다른 생활방식과 외양은 다수의 비유대인들의 눈에 거슬릴 만큼 독특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다수의 외집단에 협력하지 않는 소수의 내집단의 배타적 태도라며 경멸당하였다.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사제 마네토와 아피온, 그리스의 몰론과 로마의 타키투스 등은 바로 ‘유대인들의 반사회적 경향’을 최초로 지적한 이들이었다. 기독교 세계는 그리스-로마 세계가 만들어놓은 유대인에 대한 배타적 분리주의와 사회적 반감을 거의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 토대 위에 새로운 신학적 편견과 차별을 쌓아 올렸다. 그것은 1세기 후반 ‘누가 하나님의 합법적 상속자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논쟁과정에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을 살해한 자’라는 교회의 주장이 자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신학은 교부들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낡은’ 계약은 파기되었으며, 이제 교회가 ‘새 언약’의 상속자이며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학은 388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유대인과 기독교도 사이의 폭력사태로 가시화되었으며, 결정적으로는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한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중세 교회는 기독교의 우월한 교리와 지위를 일깨우기 위해 유대인의 불신앙과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강조하였다. 이로써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이로써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종이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탄생하였다. 이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가 교회법으로 정한 명제였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은 특별히 정해진 복장― 둥근 모자를 쓰거나 옷에 노란 유대 배지를 달게 했다. ― 을 하고 다닐 것을 성문화하였다. 이러한 즈음에 발생한 영국 노리치의 영아 살해 사건(1144년)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무교병을 기독교도의 피에 찍어 먹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성체를 모독한 유대인’에 대한 파문으로 이어져 박해와 추방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판타지는 중세 유럽의 흡혈귀 전설과 민담과 결합되면서 중세의 미술, 음악, 문학, 성극, 설교 등을 통해 정형화해 나갔다. 아울러 1247~60년 사이에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흑사병은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을 낳으면서 성난 군중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게 했다.(최창모, 82-83쪽)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기독교의 발생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서 보면, 거의 모든 시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구약성서에서 에서가 이스라엘(야곱)을 미워하고 죽이려 한 것과 모세의 출애굽사건에서 유대인을 적대시 했던 이집트의 파라오가 그렇다. 그런데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는 이방인을 통해 행해지지만은 않았다. 야곱을 미워한 에서는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고, 모세를 애굽에 팔았던 이복형제들 역시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 즉, 기독교의 성립 이후부터 새로운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제는 기독교의 교회가 새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 받게 되었다는 교리가 등장한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방랑과 고난은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린 백성으로서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로 여겨졌다. 더구나 유대인은 빌라도 법정에서 강도인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하며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를 자신들과 후손들이 치르겠다고 했다. 때문에 기독교도는 유대인에게 죄를 전가 시키며 그들에 대한 증오를 키워 갔다.
유대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들만의 독특한 유일신 신앙과 유대교만이 유일한 진리이며 유대인만이 선민이라는 의식도 함께 있어 왔다.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을 때, 그들은 독립된 사회적․종교적 공동체로 존재하면서 까다로운 음식법이나 안식일의 철저한 준수 및 국제결혼을 금지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독특한 민족성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기 기독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기독교인의 유대인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와 반감이 있었고 유대인을 핍박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스데반의 순교를 들수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 소개되어 있고 사도들의 문서화된 편지 속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증오가 아닌 용서였다. 초기 기독교의 사도들의 편지를 모은 신약성서에는 유대인 전체가 아닌 바리새인과 같은 특정한 계층을 지목하여 비난하였고 유대인들을 용서하는 메시지가 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초기 교부시대에 와서는 반유대인(adversos Judaeos)에 관련된 저작물들을 통해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이 확대 재생산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세기경 아프리카 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의 ‘유대인들에 대한 세 증언서(Three Books of Testimonies)’라는 책에 반유대주의(Antisemitism)적 주제로 첫 번째 증언에서는 (1)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2)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을 믿지 않았고 그들을 죽였다. (3) 그들이 하나님을 배척하리라는 것은 이미 예언되어 있다. (4) 유대인들은 성서를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가 강림한 후에야 비로소 교회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5)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한 성서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6) 그들은 예루살렘과 약속된 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옛 제도의 상징들은 모두 끝나 버리고 새 율법으로 유대인들 대신에 새로운 백성인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김승우, 7-9쪽)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의 시작부터 발생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처럼 형제이면서도 적대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유대교는 언제든지 반기독교주의를 선동할 수 있고, 기독교는 반유대주의를 어느 순간에도 만들어낼 준비가 되어져 있다.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전 세계적인 수학 부호인 덧셈 (+) 기호가 기독교의 십자가를 연상시킨다고 금지하고 다른 덧셈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십자가에 대한 거부감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받았던 박해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들 사이에 가질 수 있는 상호 배타주의는 공격적이고 외형적인 배타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순수성을 유지 시켜주는 내재적 배타주의 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스스로의 금욕생활이나 청빈 생활 같은 것은 내재적 배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재적 배타주의는 인정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타자 살해를 해야만 하는 공격적인 배타주의는 자유주의적 사회(liberal civic socitiy)에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칸트의 윤리는 이제 보편화된 시대정신이다. 라울스(John Rawls)가 현대사회의 특징은 다양한 선에 대한 이론(the theory of the good)이 공존하는 사회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성(the fact of pluralism)이 존재하는 현대사회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 사회는 다시 종교전쟁과 같은 혼동으로 소용돌이 칠 것이며 홉스가 혐오한 것처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사회는 무너질 것이다. 종교는 나름대로 각자의 방식에 의해서 실재(reality)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comprehensive view)를 가지고 있고 각자가 자신들의 선을 실현하는 윤리적 실천방식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나 기독교도 일정부분 같은 전통을 소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전통에 대한 해석 역시 다르기 때문에 갈등의 소지를 갖게 된다.
실제로 루터에게서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며 예언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약속과 예언의 성취로 받아드리고 있다. 루터에게서 그리스도가 빠진 성경은 성경이 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약이 성경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그 속에 그리스도를 담고 있어야 된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구약을 루터에게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이며 신앙적 근거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약을 읽고 연구할수록 그리스도를 받아드려야 할 유대인들이 도리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멀리하는 것은 루터로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반 그리스도적인 유대교의 구약의 이해는 결코 받아줄 수 없었다. 이러한 구약성경에 대한 루터의 이해는 반유대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분한 요인이 된다. 구약에 대한 유대교적인 해석을 배척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론적인 해석으로 구약을 읽는 순간부터 반유대주의는 발생된다.(이성림, 80-81쪽)
가. 위에서 언급했듯 근대 반유대주의는 근대 사회에 대한, 그리고 조화롭고 순수한 것으로 간주되는 전통적 삶의 형태가 파괴되는 현상에 대한 포괄적인 비난을 제기한다. 이슬람주의 역시“과거의 황금시대”를 지어낸 후 “부패하고 신을 망각한 현재”와 대비한다. 쿠트브에 따르면 “무신론적 물질주의 원칙 뒤에 유대인이 숨어 있으며, 동물적 성애 뒤에 유대인이 숨어 있으며, 가족의 파괴와 사회의 신성한 관계의 훼손 뒤에도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 근대의 반유대주의와 이슬람주의적 반유대주의는 반근대적 비난에 있어 일치하고 있다(Holz, 2005: 18).
나. 근대 반유대주의의 두 번째 특징으로 익명성의 사회구조적 과정이 유대인에 의해 은밀하게 사주 받은 음모로 둔갑한다는 점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하마스 역시 똑같은 음모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유대인이 그 부를 통해 전 세계의 미디어를 지배하고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혁명을 촉발시킬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프랑스 혁명과 여러 공산주의 혁명들뿐만 아니라, 제1, 2차 세계대전 뒤에도 유대인이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마스는 유대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물자 매매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으며 이스라엘국가의 건설을 준비했다고 바라본다. 그런데 홀츠가 지적하듯 하마스와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이러한 권력이론적, 음모론적 수사를 코란이 아니라 유럽 반유대주의의 기본 서적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하마스 헌장 32조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시온의 원로 의정서>에서 계획된 것이며 그들의 현재 행동이 거기서 말한 것에 대한 최선의 증거”라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 근대 반유대주의와 이슬람주의적 반유대주의는 동일한 음모론을 토대로 한 세계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여기서 이슬람주의는 유럽 반유대주의의 복사판이라고 할 정도로 이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Holz, 2005: 18-19).
다. 근대 반유대주의의 세 번째 특징으로 그것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는점을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여기서 유대인은 일종의 ‘반민족’(Anti-Volk)으로서 전 세계의 모든 민족, 인종, 종교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된다. 제3자로서 유대인은 ‘우리와 타자’ 사이의 이원적 구분을 초월하고 위협하며 해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국제주의적이라는 것이다. 하마스 역시 이러한 논리에 따라 유대인들이 국제연합과 안전보장이사회를 설립하여 자신들을 대리하는 자들의 도움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 반유대주의와 이슬람주의 모두 유대인을 “모든 우리-집단의 적”이며 “거대한 음모자이자 모든 질서의 해체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생존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반유대주의에서는 이 세계에서 유대인을 사라지게 만드는 ‘유대인문제의 해결책’만이 일관된 것일수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종종 보이는 이른바 “절멸적 반유대주의(der eliminatorische Antisemitismus)”는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근대 반유대주의가 이미 나치의 유대인 절멸 정책에서 극명하게 보여준 그 내재적 결론의 복사판에 불과한 것이다(Holz, 2005: 19-20).(주정립, 110-111쪽)
유대인들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반유대주의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1800년까지 반유대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1879년 이전까지 반유대주의란 말은 없었고 당시 이 말은 유대인과 기독교인 관계에 완전하게 새로운 유형을 정립시키기 위하여 한 독일인이 만들었다(디몬트 1994, 304). 계속해서 디몬트(Dimont)는 반유대주의를 4가지 특징으로 정의했는데, 첫째, 비논리적, 비합리적, 무의식적인 힘으로 야기되는 것이 반유대주의이다. 둘째로 반유대주의는 유대민족을 겨냥한 것이다. 셋째로 반유대주의는 의도적로 같은 유형의 죄악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특별하게 유대인을 꼬집어 내려는 것이다. 넷째로 반유대주의는 해결책을 모색하고 유대인에게 구제책을 제시하거나 유대인의 존재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디몬트는 1800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의 반유대주의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는데 중세 기독교인들의 유대인을 배척하는 폭력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기에 반유대주의와는 완전 반대되는 개념으로 반유대주의자는 개별적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증오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대인을 배척하는 혐오감이 반유대주의 편견으로 변하게 된 이유로 근대 반유대주의의 토양이 변화하는 경제상황으로 야기된 불안한 사회계층을 덮고 있고, 민족주의가 인종편견으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사회계급에게 우월성이라는 사고를 불어 넣고 이들이 내면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유대인을 배척하는 느낌이 반유대주의로 정화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고 본다. 중세의 유대 배척 감정이 인종편견사상인 반유대주의로 전환된 것이다. 그러나 반유대주의 정서와 그 양상의 기원은 훨씬 오랜 세월의 기간을 거쳐 왔다. 주후 4세기 이래 반유대적 정책이 지속되어왔다. 그것은 강제 개종, 추방 그리고 멸절이었다. 개종의 대안은 추방이고 추방의 대안은 학살이었다.(장순옥, 14-15쪽)
19세기가 되기까지 유대인들은 게토라는 폐쇄적이고 기독교 세상과 분리된 채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되었고, 계속되는 추방은 고통스런 방랑의 삶을 살아가는 시작이 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확산으로 유대주의는 반동주의자와 배타주의자로 낙인 되었고, 이러한 민족주의의 바람은 반유대적 탄압으로 연결되어 추방과 유혈의 시련으로 이어졌다. 이전의 반유대주의가 종교적인 것과 관련되었다면 19세기의 민족주의의 성장과 볼테르의 합리주의 철학으로부터의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적인 것이었다. 이 민족적 반유대주의는 1870년 독일에서 시작되어 유럽으로 퍼지면서 유대들에 대한 학대와 압박은 계속되었다. 나치의 유대인 말살 계획으로 반유대주의의 정점을 찍었지만, 1960년대에 있었던 세 가지 사건으로 반유대주의의 씨앗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는데, 그것은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히이만의 전범재판(Eichmanntrial)과 1965년 제2차 바티칸 회의의 유대민족에 관한 성명서 발표, 1967년의 아랍과의 6일 전쟁이었다. 홀로코스트 이후 반유대주의의 또 다른 형태인 반시오니즘(Anti-Zionism)은 반유대주의의 제3의 물결이 되어왔고 그분수령이 되었던 사건이 6일 전쟁으로 이후에 이스라엘을 범 아랍세계에 직면한 골리앗으로 역할을 바꾸어버렸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시오니즘 곧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유대적인 신분 및 유대주의에 대한 공격이 되는 것이다. 80년대 공산국가였던 소비에트에서 반유대주의 새로운 물결들이 일어났고, 더불어 오늘까지도 이스라엘과 아랍의 계속 되는 갈등과 분쟁은 반시오니즘이 공공연하게 표현되고 있는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이슬람국가들에서 볼 수 있다.(장순옥, 17-18쪽)
이처럼 유대인들은 인류역사를 통해 세계 여러 제국과 나라에 유일신신앙을 전해주었고 그 신앙만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이교도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국가에서도 깊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 증오는 “반유대주의” 의 기원이 되어 역사가 흐를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반유대주의의 기원을 한마디로 묘사하자면,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길고도 가장 깊은 증오”이다. 다른 어떤 증오가 2천년 이상 지속되어 왔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체계화되고 악랄해질 수 있었는가? 그 증오는 아직도 때묻지 않고 풍부한 잠재력을 가진 채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설교할 때마다, 또는 율법을 대신한 은혜의 감격을 강조할 때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일어나는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압제를 목격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반유대주의 망령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반유대주의” 정서는 처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이 이교도들 사이에서 부정적으로 특징 지워지면서 시작되었지만, 오히려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는 교회의 역사속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더욱 확대되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대교에서부터 분리하려는 신학적인 작업을 통해 반유대주의가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우선, 이교도적 반유대주의를 살펴보고, 그 후에 이교도적 반유대주의의 정서적 뿌리가 어떻게 교회 공동체 속에서 고착화되었으며, 신학적으로 정립되었는지 초대교회에 공동체 속에서 드러난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갈등과 교부들의 글들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김요한, 7-8쪽)
⑵ 유대인반대의 명분들
전후 스탈린 시기 홀로코스트나 유대인의 전쟁 공훈과 같은 유대인의 전쟁 경험이 소련 언론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는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바 그중 한 가지는 앞 장에서 논의했듯이 스탈린 지도부 사이에 내재해 있는 반유대주의적 정서와 그를 바탕으로 한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의 구현,즉 소비에트 민족 간 단합 및 조화의 달성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대인의 공훈이나 희생 이 의도적으로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즉 전쟁 후반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듯이 전후에 스탈린 지도부는 유대인들의 학살에 대해 아예 모른 척 무시하거나, 규모 상 대단치 않은 것으로 간주하거나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가 아닌 소련 전체 인민의 홀로코스트로 묘사하는 경향을 유지했다(Penter 2006, 785). 이같이 전쟁 중에 이미 등장한 사유 외에 전후 맥락에서도 스탈린 지도부가 유대인 관련 전쟁 기억을 지우려 했던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전쟁 직후 등장한 스탈린 지도부의 전쟁자체에 대한 망각 노력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전쟁 시기 소련 인민들이 입은 물적, 심적 상처가 너무커서 전쟁의 기억을 계속 되살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정권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실 스탈린 스스로 전쟁 직후 인정했듯이 전쟁 초기 소련 정부의 실책으로 많은 인명 손해를 입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 기억에 대해 ‘망각의 정치’를 시행했던 것이다(송준서 2013, 158). 이런 경향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6월부터 12월까지 프라브다 지의 기사를 면밀히 분석한 브룩스(Jeffrey Brooks)의 분석에서도 입증된다. 그는 그 시기 동안 프라브다 지는 전쟁으로 말미암은 희생, 손실에 관한 기사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대신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내용을 가진 기사를 주요 기사로 취급하였음을 지적한다(Brooks 2000, 198).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후에 전쟁의 상흔을 상기시키는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포함해 그들의 비참했던 삶과 죽음 등에 관한 기사나 보고서들 이 소련 언론에 보도되거나 출판될 여지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전후 맥락에서 유대인 관련 전쟁 기억 지우기 관행의 또 다른 이유로는 전쟁 이후 스탈린 지도부에 의한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정책 시행의 영향을 들 수 있다. 1948년경부터 스탈린 지도부는 소위 反코스모폴리탄이즘(anti-cosmopolitanism)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자본주의 영향을 받아 외국 문물을 무조건 추종하는 행태를 맹비난하였다. 이는 반자본주의 캠페인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러시아 민족주의, 소비에트 애국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으로(Johnston 2011, 177; Suny 1998, 374), 다름 아닌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공식적인 반유대주의 캠페인이었던 것이다. 뒤에서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1950년대초 반유대주의 캠페인이 극에 달했을 때 스탈린은 당중앙위 간부회 임원들에게 “모든 유대인은 [유대]민족주의자들이고 미국의 비밀정보 요원이다. 유대 민족은 미국이 자기 민족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거기서 그들은 부자가 될 것이고 부르주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을 미국인들에게 빚졌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Weiner 2001, 197). 전쟁 중에는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반유대주의 감정은 전후에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부 사이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소련 유대인들은 조국을 배반하는 이방인, 스파이 등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의 피해자,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전쟁 영웅으로 기억될 소지는 거의 없어졌던 것이다.(송준서, 153-154쪽)
제2차 대전 동안 스탈린 정부는 유대인의 전쟁 경험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편으로는 유대인이 독일 점령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진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언론을 통해 인정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점차 덮어버리면서 유대인들의 전쟁 기억을 부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같이 양면적이고 모순된 정책은 바로 홀로코스트를 외교적으로 이용하여 서방으로부터 지원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와 전쟁 중반 이후부터 대두하기 시작했던 러시아 민족주의, 러시아 민족을 중심으로 한 소비에트 정체성의 순결함 그리고 소비에트 사회의 조화와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과정의 충돌이 빚어낸 양상이었다. 전쟁 초기 스탈린은 소련 내 유대인 저명인사를 중심으로 소련 내 유대인의 참상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려 물질적, 정신적, 정치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지시하기까지 하였으며, 이런 맥락에서 소련 언론은 점령 지역에서 나치 독일에 의한 소련 유대인들 학살을 상세히 보도하였지만, 전쟁 중반 이후인 1943 년경부터 전세가 소련에 유리해지고 서구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원을 확보한 후부터는 점차 유대인을 학살의 피해자로 묘사하는 기사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쟁 이후에는 중앙의 확고한 통제하에 국가 단합을 유지하려는 스탈린 정부에 의해 반유대주의는 더욱 숨김없이 그대로 발현되었다. 유대인들은 소련을 분열시키고 비애국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로 비난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전쟁 기억은 부차적일 뿐만 아니라 지워버려야 하는 것이 되었다. 결국, 유대인의 전쟁 경험은 스탈린 시기 전쟁의 공식 기억에서 공백으로 남게 되었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서 유대인에 대한 전쟁 기억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시기 탈스탈린주의 정책이 시작되면서 1960년대 초반 몇몇 작가나 시인 등 지식인들이 산발적으로 유대인의 참혹했던 전쟁 기억을 되살리려 했지만 흐루시초프 정부는 그러한 시도를 궁극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 지식인은 나치의 유대인 억압과 학살을 종종 소비에트 정권의 억압 및 폭력과 유사한 것으로 비유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브레즈네프 시기 소비에트 지도부는 활력을 많이 소진한 소련 사회에 다시금 소비에트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고 소비에트 애국주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2차 대전의 전쟁 기억 부흥 정책을 시도했다. 이 과정이 시작되면서 스탈린 시기 공식 전쟁 기억이 다시 강조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대인의 전쟁 기억은 공식 기억에서 계속해서 공백으로 남아있게 되었다(Tumarkin 1994, 112-124, 136-138). 비록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로 불리는 개혁 정책을 시작하면서 2차 대전의 공식 기억이 어느 정도 재평가되는 듯했으나 소련 해체 이후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옐친 대통령은 분열된 국론 극복과 새로운 국가 정체성 정립을 위해 소비에트 시기의 ‘전쟁 기억’ 숭배 정책을 다시 채택했고 그 관행은 오늘날 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이 당한 전쟁의 고통은 공식 전쟁 기억 속에서 ‘국가 단합’ 이라는 숭고한 목표 앞에 부각될 수 없는 주제로 계속 남아있게 되었다. 그 대신 소련 전체 국민의 희생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초기 스탈린 정권이 정치적 필요 때문에 유대인의 고통스러운 전쟁 기억을 널리 알렸던 반면 그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소련 및 러시아의 공식 전쟁 기억 속에서 유대인 희생과 관련된 전쟁 기억은 특별히 부각되지 않고 있다. 전쟁의 기억이 러시아 지도자들에게 국가 단합이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지속해서 사용되는 한 앞으로도 소련 유대인의 전쟁 기억은 러시아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곧 전쟁에 대한 공식 기억에서 누구를 기억한다는 것은 곧 또 다른 누구를 망각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Ignatieff 1984; Merridale 1999, 62). 소비에트 시기 에 널리 애용되었던 제2차 대전의 기억에 대한 명제인 “아무도 잊히지 않고 아무 것도 잊히지 않는다”(Никто не забыт и ничто не забыто)는 결국 ‘신화’였던 것이다.(송준서, 157-158쪽) |
이상에서 19세기 산업화 초기 로스차일드로 상징화되었던 유대인의 집단표상, 그리고 1830-70년대와 1880-9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에 투영된 다양한 반유대주의 담론을 살펴보았다. 19세기 좌파 반유대주의는 반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반유대주의를 사고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이 산업 및 금융자본주의의 최대 수혜자라는 편견은 당시 우파와 극우파뿐 아니라 좌파와 극좌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었는데, 그 점은 생시몽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유대인에 대한 당대의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는지, 또 1930년대에 나치가 독일국민의 불행의 원인이 바로 유대인 때문이라고 주장했을 때 왜 많은 독일인이 그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1898년 드레퓌스의 무죄와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재심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 사회주의자들은 반유대주의를 수치나 공화국의 존립에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한 예로 1891년 브뤼셀국제사회주의자대회(Congrès international socialiste de Bruxelles)에서 한 유대계 미국인 대표가 반유대주의를 강경하게 규탄할 것을 요청했으나, 결과는 반유대주의와 친유대주의적 선동을 동시에 비난하는 발의를 하는 것에 그쳤다. 그 후에도 좌파 진영에서의 반유대주의는 금지되지 않았고, 정치 분야에서의 유대인 관련 농담도 흔한 일이었다. 게다가 좌파 반유대주의자들은 종종 기회주의적 부르주아공화국, 모리배 공화국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우파 반유대주의자들과 함께 집회를 열거나 선거투쟁 벌이기도 했다. 투스넬, 프루동, 블랑키, 드뤼몽의 사회사상이 훗날 ‘민족사회주의’, ‘민족주의적 반자본주의’, ‘파시즘의 원형’, 더 나아가 착취계급인 유대인들의 추방과 절멸을 통해 사회적 질병에 대한 급진적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히틀러의 선도자’로까지 극단적 평가를 받는 이유도 바로 그 점 때문이다.
드레퓌스 사건 이전에 몇몇 사회주의자는 반유대주의의 정당성을 의심하거나 숙고하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은 1898년 드레퓌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한 재심운동의 시작과 반유대주의가 점점 보수 가톨릭 정파의 정치적 병기이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되었을 때에야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연합 진영이 구축되었다. 이러한 연대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경제적․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간전기의 통합사회당, 평화주의자들, 때로는 공산당, 그리고 나치의 독가스실의 존재를 부인하는 극좌파에 이르기까지 좌파 반유대주의 ‘문화’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의 반유대주의가 시기에 따라 그 원인, 양상, 규모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프랑스 학계가 새로운 형태의 반유대주의 현상에 주목하는 것은 암울했던 과거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교훈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위험요소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겠다.(문지영, 178-179쪽)
바이마르(Weimar)공화국 성립이후, 독일에서는 독일국가인민당(Deutschnazional Volkspartei)을 비롯하여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zional 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 partei)이 출현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복, 베르사유 조약의 개정, 반공산주의 등을 주장하였으며, 특히 이들 극우 정당들은 반유대주의 그 자체를 투쟁의 직접적인 목표로 삼았다. 즉 이들은 대규모 전쟁 배상금 부과의 책임을 외부세력의 음모로 보고 독일계 유대인들 대부분이 중산층으로서 이 외부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유대인들은 거대 자본, 국제금융, 부르주아 정당, 노동운동 기구들, 의회민주주의를 장악하고 온갖 못된 힘을 동원해서 독일 국가와 민족의 권위를 훼손하려 하는 존재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독일의 볼셰비키화의 서곡이자 세계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유대인들의 시도로 인식되었다. 반공산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유기적 결합을 이용하려는 히틀러의 정치 프로그램을 독일의 전통적 엘리트들은 열렬히 지지하였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만듦으로써 독일부르주아의 자본주의에 대한 열망을 자신에 대한 지지로 바꿀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홀로코스트를 통해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폭력적인 반유대주의를 표명하였다. 다시 말해서, 히틀러는 서유럽 우파의 반유대주의 세력의 가장 극단적 예에 속한다.
1921년 나치당의 지도자가 된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패전의 책임자이며 볼셰비즘의 원흉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들이야말로 독일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1929년 세계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 질서가 와해 직전의 상황이었던 1933년 3월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당내 급진주의자들의 요구로 유대상점 불매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유대인들의 공직 및 사회단체에 대한가입이 제한되었다. 1935년 9월 에는 뉘른베르크법이 제정 되어 유대인의 판별 기준이 마련되었고 유대인들의 공적 생활에서의 추방과 비유대인과의 결혼이 금지되었다. 1938년 수정의 밤 은 반유대주의의 소위 마지막 해결 (DieEndlösung)을 향한 히틀러의 발걸음에 있어서 중대 고비였다.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법적인 방법은 한 순간에 사라졌고, 유대인들의 재산이 압류되었고, 그들을 추방하기 위해 거리낌없이 폭력이 사용되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인 홀로코스트는 반유대주의의 비합리적 특성이 고도의 정치기술, 절대 권력, 훈련된 군대, 산업과 결합된 결과였다. 히틀러 이전 시기의 우파가 보여준 반유대주의가 기독교의 회복, 민족주의, 범게르만주의 등을 위한 정치적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면,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절멸 그 자체가 목표였다. 결국, 유대인들은 추방과 절멸이라는 고난을 당해야 했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제 2차 대전 이후에 전통적 반유대주의는 서유럽에서 완전히 설 자리를 잃었다. 그 결과, 반유대주의는 이른바 ‘아우슈비츠’이후 서유럽의 정치문화에서 공식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유럽 언론에서 우파 단체들의 반유대주의적 선전 활동이나 극우파의 유대인에 대한 폭력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특정 단체나 소모임, 일상적인 사회생활에서 나타나는 잠재적인 반유대주의이다. 훼손된 유대인 공동묘지와 추모비, 유대회당에 그려진 하켄크로이츠, 유대인 저명인사들에게 날아드는 익명의 편지, 적의에 가득 찬 극우 언론의 보도 등은 배제와 거부의 시위이며, 이러한 행위는 소수에 의해 자행되지만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다수의 갈채를 받고 있다. 바로 여기에 독일에만 국한되지 않는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모든 서유럽의 공통적 문화코드로서의 반유대주의가 위치해 있다.(정철수, 4-5쪽)
칸트의 계몽주의는 이성과 자유 개념에 기초하여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승인될 수 있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 지식과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적 실천법칙을 강조하였다. 이 두 가지 근본목표의 달성을 위한 조건은 신 존재 요청이었다. 칸트는 3대 비판서, 즉 <순수이성비판> (1781), <실천이성비판> (1788), <판단력비판> (1790)과 말년의 종교철학적 저서 <이성의 한계안에서의 종교> (1793)에서 이 문제를 상론하였다. 그리고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영구평화론> (1795)에서 자연상태에서의 반목과 불화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과 국가의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 조건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칸트의 근본적인 시도들이 과연 유대인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것은 칸트가 유대인문제를 당시의 사람들보다 좀더 관용적으로 대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가 원칙적으로 제시한 철학의 원리들에서 유대인들이 근본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면 그의 철학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칸트의 반유대주의적 견해들이 제기되었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칸트의 반유대주의는 당시 그가 살았던 유럽의 시대 상황, 특히 정치적으로 가장 후진적인 상태에 처하여 있었던 독일의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해야 한다. 30년 전쟁(1618~1648)이 종결되면서 체결된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하는 유럽은 근대적인 주권국가로의 변화를 시도하였으나,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300여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어 300명의 제후들과 1200여명의 제후들이 다스리고 있었다(RR,34;61). 가까스로 패권을 잡은 프로이센은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또다시 7년 전쟁(1756~1763)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서 공화주의를 표방한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칸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칸트는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바젤조약(1795)이 독일 영토를 프랑스에 양도한다는 비밀조항을 담고 있는데 충격을 받아서 영구평화론 을 집필하였다. 칸트의 계몽주의와 세계시민주의 사상은 이와 같은 유럽의 전쟁 및 정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철학적 기획이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에서 유럽의 유대인들은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18세기의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국가였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1713-1740 재위)가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하면서 후발국가로서의 도약을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중농주의 사회에서는 장사와 사채업이 비천하게 여겨졌지만, 산업화 과정을 겪게 되면서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자본을 장악한 유대인들에 대한 원성도 갈수록 커지기 시작했다. 칸트 역시, 그리고 피히테까지도, 이와 같은중농주의적 경제 질서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장사꾼 기질이 농후한 유대인들에게 순진하고 소박한 독일 농부들과 수공업자들이 현혹되고 기만될 수 있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비록 칸트가 피히테처럼 가혹할 정도의 비난을 가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반유대적 태도는 계몽주의의 정신에 부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순되기까지 한다. 이는 그의 반유대주의가 민족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계몽주의 자체가 반계몽주의자들 또는 낭만주의자들에게 ‘악령’으로 간주되었던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반유대주의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정치적 보편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칸트의 계몽 기획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신화로 고착될 수 있고, 그 결과 파시즘으로 변형될 수도 있는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는 것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지적이었다.
둘째로, 칸트의 반유대주의는 후반부에 그가 종교 및 정치 저술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현실 권력과의 비판적 대결에 직면하게 되었던 사실을 감안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칸트의 종교철학적 관점은 1793년의 저술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를 정점으로 하여 역사적 계시신앙으로부터 도덕적 이성신앙으로의 변형을 강조하는 데서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칸트는 프로이센 당국으로부터 출판 검열을 당하였으며, 여러 형태로 심적인 고통을 받게 되었다.(김진, 160-161쪽)
가. 모든 반유대주의는 근대 사회에 대한, 그리고 조화롭고 순수한 것으로 간주되는 전통적 삶의 형태가 파괴되는 현상에 대한 포괄적인 비난을 제기한다. 여기서 유대인은 특히 물질주의와 화폐경제, 비도덕적 야만화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반유대주의는 화폐를 비롯해 언론과 성도덕, 예술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현상의 배후에 유대인이 숨어 있으며 이러한 현상을 통해 유대인이 ‘우리의’ 전통적 생활양식을 파괴하고 있다고 믿는다. 홀츠는 이런 맥락에서 반유대주의가 “단호하게 반근대적 지향을 갖는 순전한 근대적 세계관”이라고 규정한다(Holz, 2005: 18).
나. 반유대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첫 번째 특징과 논리적으로 결부돼 있다. 그것은 유대인의 권능(Macht)과 관련된 것이다. 즉 근대 반유대주의에서 유대인은 화폐나 증권시장, 금융자본과 같은 근대사회의 핵심적 권력수단과 언론과 같은 대중매체의 화신으로 나타난다. 유대인은 이를 통해 전 세계에 걸쳐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에 힘입어 모든 민족과 종교, 문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권능에 대한 이러한 환상을 토대로 반유대주의는 비난할 만하다고 판단되는 온갖 역사적 사건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린다. 온갖 임의의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변화가 모두 “권능의 화신”인 유대인의 의도적이고 계획된 행위로서 나타난다. 이리하여 익명성의 사회구조적 과정이 은밀하게 사주를 받은 음모로 둔갑한다(Holz, 2005: 18).
다. 반유대주의의 세 번째 특징은 그것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부분으로 독일인이나 모슬렘과 같은 각각의 우리-집단이 있다. 반유대주의에서 이러한 ‘우리-집단’은 보통 민족이나 인종 또는 종교적 공동체를 의미하며 항상 복수로만 존재한다. 이리하여 독일 민족이나 아리아 인종, 기독교 공동체와 같은 우리-집단에 대해 두 번째 부분으로 일본 민족이나 슬라브 인종, 이슬람 공동체와 같은 ‘다른 집단’이 경쟁 또는 대립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반유대주의에서는 유대인이 제3자로서 독자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유대인은 일본 민족이나 슬라브 인종, 이슬람 공동체처럼 보통의 ‘다른 집단’으로 간주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은밀히 작동하는 권력의 소유자로서 세계지배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인종, 종교 사이의 차이를 없애려는 별개의 집단으로 간주된다. 이에 따르면 유대인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의 모든 특수한 정체성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제3자로서 유대인은 ‘우리와 타자’ 사이의 이원적 구분을 초월하고 위협하며 해체하려 한다는 것이다(Holz, 2005: 19).(주정립, 103-104쪽)
실제로 이스라엘과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은 역사상 전례 없는 막대한 규모이자 사실상 무조건적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을 기반으로 중동지역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제안들을 거부했고 미국이 공급한 무기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미국은 중동지역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평화협정체결 과정에서 이스라엘에게는 당근을 주었고, 팔레스타인에게는 채찍을 사용하였다.
오슬로 평화협정의 실패로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거센 저항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진압하고 팔레스타인 거주지를 공격하기 위해 미국제 탱크와 헬리콥터를 사용하였을 때, 그 자신 유대인이기도 한 당시의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 Albright)는 이스라엘에 대해 ‘자제’를 촉구하면서도 이스라엘 총리 예후드 바라크(Ehud Barak)가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치하했다. 반면에, 그녀는 아라파트(YasaarArafat)에게는 돌팔매질과 폭력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의 편향된 중동정책은 클린턴(Bill Clinton)행정부 시절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장 아라파트가 워싱턴에 갔을 때, 그와 마주한 협상 팀은 클린턴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부시(GeorgeW. Bush)정부는 이스라엘에 대한 충실한 보호자 역할에 있어서 클린턴 정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단지 강력한 나라이고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받고 있는 아니다.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대한 거부는 과거에도 좌파의 중심 주장이었기 때문에 반이스라엘주의는 이러한 관점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1960년대 말 이후 유럽 좌파의 중심 주장인 민족해방 논리에 의하면, 얼스터, 바스크, 코르시카를 점령한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 대하여 어떠한 분노가 표시되어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과 비교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원래 유대인의 나라라는 사실로 인해 유럽의 오래 역사와 연관되어 반이스라엘주의를 형성하게 되었다. 즉, 좌파의 반미주의에는 반유대주의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물론, 고전적 반유대주의를 좌파가 공공연히 명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이스라엘주의가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반유대주의의 표출을 쉽게 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한 연구는 “오늘날 서유럽의 담론에서 반유대주의와 반시온주의는 상당히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반유대주의와 반시온주의가 동일시되고 있는 예가 흔히 발견되고 있다. 유럽인들, 특히 독일인들 사이에서 반유대주의적 태도와 반이스라엘적 태도는 실제로 상당한 중첩 현상을 보인다. 독일인들에게 있어서 반유대주의적 태도와 반이스라엘적 태도 간에 실제 중첩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설문조사를 통해 입증한 지크(Andreas Zick)와 퀘퍼(Beate Kuepper)의 연구는 이를 입증해 주는 성과들의 하나이다.(정철수, 23-24쪽)
이러한 자율성으로 자아의 탄생은 역으로 타자의 죽음으로 연결될 수 있다. 자아의 구성 속에서 타자는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 이것이 극단적 결정주의가 만들어낼 수 있는 비극이다. 윤리가 사라진 극단적 자율성은 언제든지 극단적 결정주의(decisionism)로 환원되고 이것은 타자를 살해하는 괴물로 다시 등장한다. 이렇게 타자 살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윤리 부재의 사상가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이다. 윤리적 질문은 근원적 질문이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다자인(dasein)의 실존은 근원적인 질문에 몰두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의 실존주의에서 독일의 다자인의 실존을 위해서 이루어졌던 비윤리적 행위들은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실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떻게 실존해야 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같이 친나치주의자로 악명 높은 칼 슈미트 역시 결정주의자이다. 그는 독재자의 결정이 모든 논란을 잠재울 수 있으며 그로인해 새로운 상황으로 이전할 수 있다고 본다. 슈미트의 친독재주의적 결정주의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사상에 근거하고 있음을 그 자신이 정치신학에서 밝히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진리의 객관성과 일반성을 거부하고 진리의 주관성과 개체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서 실존적인 진리가 아닌 것은 개체에게 진리로 경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존적 판단과 선택은 바로 매 상황을 새로운 상황으로 탄생시키고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결정시켜주고 있다. 이러한 실존적 해석을 슈미트는 정치적 실존주의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정치적 결정주의로 연결시키고 결정의 내용과 과정에 대한 규범적 판단보다는 결정 그 자체가 규범이 되고 있다. 이럼으로써 한 정치 공동체의 결정이 주변의 타자적 공동체에게 얼마나 큰 재앙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감이 없다. 결정 그 자체에 우선을 두고 있기에 결정된 내용이 미치는 그 영향에 대해서나 또 결정하는 과정에서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서나 전혀 윤리적 책임감 없는 슈미트의 결정주의, 존재 그 자체에만 우선 순위을 두고 있기에 구체적인 존재자들에 대해서는 윤리적 관심이 전혀 없던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이 둘은 결정이라는 맥에서 루터의 솔라 피데와 일맥상통한다.
루터는 선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적 윤리 구절을 반복할 뿐, 선한 나무는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왜 윤리적으로 되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선한 열매인지에 대한 윤리 담론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것은 슈미트나 하이데거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솔라 피데는 피안이 아닌 현세에서 이루지는 기획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획을 만드는 과정과 결과가 어떠한 윤리적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루터는 별 관심이 없다. 물론 루터가 추구하는 솔라 피데는 인간중심적 자율성의 출구 없는 방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는 하다. 죄인으로써의 인간에 대한 한계상황을 무시한 인본주의적 자율성은 인간을 출구 없는 방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출구 없는 방에서 인간은 무의미한 자율성을 계속 반복할 뿐이다. 그 결과 인간은 허무와 권태를 경험하고 이 허무와 권태를 탈출하기 위래서 스스로를 자율성과 정반대가 되는 중독으로 몰고 간다. 이것은 신 없는 자율성에 대한 결과이다.(이성림, 92-93쪽)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타자 살해적 경향성은 자아 밖에 있는 타자를 죽이기도 하지만 내안에 있는 타자를 죽이기도 한다. 자아 안에 있는 타자 살해는 자아 분열과 같은 장애를 제공하고 있다. 주체 밖에 있는 타자를 살해하지 않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절차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절차에 대한 합의는 합리적 소통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 사실 사회만이 아니라 개체안에서도 합리적 소통이 있어야 자신의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저 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안에 있는 도덕이 추구하는 것은 목적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방법과 수단에 대한 추구이다. 옳고 정의로운 수단과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윤리의 방향이다. 한국사회를 비롯한 현대사회들의 갈등은 아직도 중세식으로 자신의 선이 최고의 선이 되어야 하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도 괜찮다는 입장에 의해서 계속 증폭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이 아무리 옳다고 느껴도 그 표현하는 방식이 옳지 않다면 그 주장은 옳은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절차와 방식에 대한 윤리적 무게감은 현대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루터의 반유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해독제가 된다.
칸트의 도덕적 명령은 인간에게 추가사항이 아니라 본질적 사항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도덕적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러한 도덕의 관심은 윤리의 내용에 대한 관심보다 절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용의 문제로 다툼과 투쟁이 시작된다면 인류의 역사는 다시 전쟁과 상호살육의 역사로 점철 될 것이다. 톨레랑스 즉 관용은 절차에 대한 관용이라기보다 본질적 질문에 대한 관용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종교전쟁이후에 등장한 관용의 정신은 더 이상 궁극적 진리가 무엇인지,아니면 나의 진리가 궁극적인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추구하고 있는 통합적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통합적 진리에 포기시키지 않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궁극적 진리가 무엇이 되든지 간에 실천적인 질문들에서 있어서는 형식적 절차나 소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정의로운 형식과 절차대로 진행되어졌다면 내용은 이미 어느 정도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기에 현대 윤리는 내용보다 절차에 대해서 논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점에 있어서 전근대적 윤리가 내용의 문제라면 근대적 윤리는 형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루터의 반유대주의는 이점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분명히 친유대주의적 태도에서 반유대주의적 태도로 전환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친유대주의를 추구한 것도 자신의 목적 즉 유대인들의 회심과 개종을 기대하는 선교적 관점에서였다. 이러한 루터에 대해서 처음부터 반유대주의자였지만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친유대주의자로 변장했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사적인 자아에서 갖게 되는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무한히 비판받아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근대에 등장한 전체주의는 인간의 사적인 영역마저도 통제하고 조정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체주의적 경향성은 얼마나 악마적 결과를 초래하였는지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또 아직도 존재하는 전체주의적 국가나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이성림, 95-96쪽)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에 대한 지속적인 분석 작업이 필요하다고 첨언하는 이유는 그의 영화가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해주기보다는 오히려 피지배자들의 속상한 이야기를 대변해서 들려주기 때문이다.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1차 세계대전이란 사회의 필요악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심지어 미화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후자의 입장에 선 채플린은 전쟁이란 무고한 시민들과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절대악이라고 명시한다. 그리고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히틀러는 독일 민족을 새롭게 부흥시킬 민족의 지도자라고 숭배될지 모르지만, 후자의 입장에 따른 채플린은 히틀러란 독일 민족을 또다시 지옥과 같은 전쟁으로 내몰아 결국에는 몰락하게 될 그야말로 위대한 독재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고발한다. 그리고 또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은 사회악 이라고 폄훼되어 반유대주의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되었지만,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채플린은 유대인은 오히려 전쟁과 독재의 희생자일 뿐만 아니라 반전, 반독재, 반제국주의 저항 운동의 소극적인 또는 적극적인 주체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바로 이런 까닭에 채플린이 직접 들려주는 에피소드는 그 울림이 매우 크다.“나는 뉴욕의 한 젊은 귀족으로부터 내가 왜 그렇게 나치에 반대하는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반(反)인민적(강조는 필자)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당신은 유대인이군요?’ 그는 마치 무슨 새로운 사실이라도 발견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치에 반대한다고 해서 모두 유대인인 것은 아닙니다. 정상인이라면 모두 나치에 반대합니다.’ 내가 이렇게 나오자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최용찬, 26-27쪽)
테오도어의 현실인식에 나타나는 왜곡된 시각과 유대인에 대한 피해망상은 당대의 사회적 편견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의 반유대주의는 베르사이유조약 이후의 급격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따른 보수적 독일인들의 위기와 갈등의 표현이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그들의 국가관에 반하는 것이며 유대인은 바로 이런 새로운 시대를 이끈 장본인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유대인해방의 여파로 사회적 성공을 거둔 유대인들이 늘어나고 구체제의 신봉자들이 이들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무엇보다 바이마르공화국이 유대인에게 서구․그리스도교 사회로의 완전한 통합을 위해 법적 동등권을 부여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사회적 차별과 편견은 불식되지 않았고 이 법안이 후에 다시 폐기되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의 서구사회 진입을 가로막던 여러 장애들은 1919년의 해방법안으로 인해 사라졌다. 이제 20세기 전반부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서구사회 진입을 위해 개종과 개명의 관문을 통과할 필요가 없었고,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로의 이행 과정을 통해 서구의 어느 집단보다도 사회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산업 및 상업 분야 등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른바 유대인 부르주아가 독일사회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대학 진학이 보편화되고 교수, 의사, 언론인, 변호사 등의 사회 지도층 분야에 까지 유대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자,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자본주의, 반공화주의를 내세우며 구체제의 복귀를 주장한 보수 세력은 유대인의 괄목할만한 사회적 진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산업자본가로 또는 고급지식인으로서 독일인의 경쟁자이며 독일 고유의 전통, 경제구조 그리고 문화계를 변혁시켰던 근대화의 선구자이자 사회주의를 조장하는 사회악적 존재로 대중사회에 알려 공동의 적으로 설정하기에 최적의 대상인 것이다. 그것을 통해 보수 세력 및 극우주의자들이 공동의 적에 대해 대항하고 연합을 주도할 주체로서의 명분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유대인에 대한 폭력이 소시민들의 사회적, 경제적 좌절에 대한 분노의 발산과 해방감 만끽의 분출구로서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반유대주의는 소시민 계층의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부합되는 모든 감정을 본능적으로 일깨울 수 있는 이미지들의 총화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폭력은 법적 정당성에 매몰되지 않고 폭력을 법의 세계로부터 정치의 영역으로 배출시키는 방안이 되기도 했다. 공동의 적인 유대인에 대한 폭력행사는 새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치 행위이며 국민으로서의 의무의 수행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중의 내면으로 파고든 반유대주의는 나치독일이 아닌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김희근, 259-260쪽)
『거미줄』은 한 반유대주의자의 피해망상을 다루고 있는데, 작가는 가해자인 주인공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 속에서 이념으로서의 반유대주의가 지닌 허구성을 짚어냈다. 유대인을 겨냥한 폭력은 억압된 욕망의 분출이며 사회적 불만의 해소 수단일 뿐만 아니라 이념으로서의 반유대주의는 부와 권력을 쟁취할 도구였던 것이다. 또한 로트는 유대인들 역시 반유대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비판했다. 그들의 반유대주의 동참은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폭력에서 해방되어 서구인으로서의 안락한 삶을 누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동족에 대한 변절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반유대주의의 횡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배격해낼 수 없는 반유대주의의 희생물인 것이다. 이중적 성격의 벤야민은 이와 같은 반유대주의자인 독일인들과 그들의 동조자인 유대인의 내면을 꿰뚫고 그들을 조롱하며 독일사회를 비판하는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 반유대주의 비판에 있어 유대인과 비유대인, 친구와 적, 가해자과 피해자의 구분이 부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비판했듯이, 당대의 반유대주의는 종래의 그것과는 달리 서구와 유대인 모두의 필요에 의해 도입되고 발전된 새로운 형태의 반유대주의였던 것이다.(김희근, 273쪽)
산업화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반유대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초기 사회주의자들 가운데서 반유대주의와 거리가 먼 그룹으로는 생시몽주의자들(Saint-Simoniens)을 꼽을 수 있다. 그 까닭은 생시몽의 제자들 가운데 로드리그(Olinde Rodrigues), 페레르 형제(Emile et Issac Péreire), 콩트(Auguste Comte) 등의 유대인들이 많았고, 이들이 생시몽의 유훈을 계승,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7월 왕정 이래 생시몽주의자들은 “각자의 능력만큼, 각자 일한만큼 정당하게 대우받는 사회”, “모든 것은 산업을 위해, 그리고 산업을 통해!” 등의 좌우명을 앞세워 산업주의에 입각한 조직화된 사회를 지향했다. 이를 위해 신용 확대, 투자은행 설립, 자본순환 촉진을 주창하는 등 산업화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에서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던 다른 초기 사회주의자들과는 분명 달랐다. 이들 외에 반유대주의자로 분류하기 어려운 인물로는 기독교 사회주의자 그룹에 속하는 카베(Etienne Cabet), 펙쾨르(Contantin Pecqueur), 블랑(Louis Blanc), 콩시데랑(Victor Considérant) 등을 예로 들수 있다.
초기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경제적 반유대주의를 개시한 인물은 푸리에지만 그것을 체계화한 인물은 그의 제자였던 투스넬(Alphonse Toussenel)로 알려져 있다. 생시몽과 달리 푸리에는 고리대금업과 상업, 특히 돈거래와 은행을 혐오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분야에 주로 종사하던 유대인들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고, 자유로운 자본순환에 토대를 둔 산업화에도 매우 적대적이었다. 기독교 반유대주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투스넬은 1845년 유대인, 시대의 왕들: 금융봉건제의 역사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상세한 경제적․사회적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이 책에서 투스넬은 유대인고등금융과 세계주의자 금융가들의 지배를 ‘금융봉건제’로 규정하고, ‘유랑하는 유대인’, ‘뿌리 없는 유대인’, ‘세계주의자 유대인’이 대규모의 국제적 음모를 꾸밈으로써 조만간 프랑스를 지배하게 될 것이며, 결국 프랑스가 불행한 희생자가 될 것이라는 일종의 음모론을 유포시켰다. 그는 금융봉건제의 두지주로 은행과 교통의 독점을 꼽았고, 일찌감치 은행․철도․보험부문의 국유화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의 급진주의적 성향을 잘 드러낸다. 과거 “혈통귀족의 좌우명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면 금융귀족의 좌우명은 ‘자신만을 위한다.’… 민중처럼 나는 유대인을 다른 사람의 노동과 물질로 사는 돈의 밀매상, 비생산적 기생충이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부른다. 내게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밀매상은 동의어다”면서 유대인을 폄훼했고, 심지어 개신교도와가톨릭교도 은행가와 투기꾼들까지 싸잡아 유대인과 동일시했다. 또 “프랑스에는 좌파와 우파, 공화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노동자와 무위도식자, 프랑스당과 유대인당의 두 진영밖에 없다”면서 소수에 의한 돈의 지배와 이러한 경향을 심화시킨 산업 및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고, 노동자계급의 빈곤과 로스차일드의 부를 대립시켰다는 점에서 카프피규(Jean-Baptiste Capefigue)같은 우파 반유대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문지영, 164-165쪽)
그러나 이스라엘의 독립은 곧 팔레스타인에 급진적인 새로운 문제를 야기 시켰다. 다시 말해서 아랍-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은 이스라엘의 독립이 낳은 가장 큰 사생아인 셈이다. 대규모의 유대인 이민자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와 정착하면 할수록 아랍-팔레스타인들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박해한 이들은 아랍-팔레스타인들이 아니었으므로, 유대인의 생존권 회복 과정에서 아랍-팔레스타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아랍-팔레스타인의 관점에서 시온주의는 과격한 식민주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유대인의 이민은 하나의 침입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제국주의 침략의 산물이며, 유대인은 인종차별주의자로 비춰진 셈이다.
결론적으로 어제는 역사의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이 오늘은 역사의 가해자가 되어버림으로써 ‘유대인을 박해한 나치’와 ‘팔레스타인들을 박해하는 유대인’이 동일시되는 역사의 불가해한 아이러니 속에서, 세계의 유대인 통합을 꿈꾸며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켜나가려는 유대인들의 노력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또, ‘제2의 유대인’이라 불리고 있는 우리가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우리는 묻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최창모, 93쪽)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에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심적 외상성 증후군, ‘억눌린 자의 귀환’이라는 명제를 유대민족의 역사에 적용하며 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의 기원을 찾아간다. 그 핵심적 실마리는 유대교의 창시자 모세가 정의와 진리를 강조하는 아텐교의 유일신 신앙을 신봉한 이집트인 귀족이라는 과감한 해석이다. 그 해석은 출애굽 이후 유대인들은 엄격한 윤리성을 강조하는 계몽전제군주 이집트인 모세를 시나이반도에서 살해하고, 야훼신을 믿는 아라비아 기원의 미디아인과 동맹을 맺으며 그들의 군사 지도자를 다시 모세로 옹립하였다는 ‘두 사람의 모세론’으로 이어진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그 후 모세살해라는 원초적 아버지 살해의 범죄를 내면화하고, 억압받아온 이집트인 모세의 엄격한 교의를 예언자들을 통해서 역사의 흥망기에 주기적으로 귀환시켜 심화시키면서 지적 및 정신성의 진보를 성취했다. 그 결과 유일신교 유대교는 고도의 정신성의 진보를 성취하면서 선민의식과 배타성을 강화하는 유대주의를 성립시켰다. 그 유대주의는 동시에 반유대주의의 기원으로 작용했다.
프로이트의 이런 명제는 첫째, 개인의 발전적 성장과 순환과정을 문명의 역사에 유비적으로 적용하여 설명하는 것의 한계. 둘째, 후대인들이 귀환시킨 억눌려온 기억이 그렇게나 강력한 역사적 변환의 동기가 된다는 해석의 한계. 셋째, 역사적 설명에서 실증주의적 차원의 오류가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세번째 질문은 정신분석의 역사학이 직면하는 과제이므로 대답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는 기본적으로 물리적 진실을 역사적 진실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정신분석이론을 신화적 체계를 이용해서 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 전통에 관한 현재주의적 역사적 진실을 찾는 도구로 응용했다.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를 종교적 미숙성에서 찾는 설명은 중요한 사례이다. 유대교는 원초적 아버지 모세의 종교이며 엄격한 아버지의 형상인 유일신 신앙을 심화시켜 정신적으로 고도화 된 반면, 기독교는 아버지를 몰아낸 오이디푸스적 아들의 종교로서 다신교 속성에 모성신까지 포함한 결과 실패는 불가피 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그 책임을 아버지 종교인 유대교에 돌려 반유대주의를 강화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진단할 때 그렇다.
프로이트는 유대교와 유대민족의 혼합적 기원을 강조한다. 유대교는 이집트인 모세가 가르친 아텐교 신앙에 미디아인들의 화산신이며 민중신 야훼 신앙과 결합하여 성립시켰다. 유대민족 역시 연고 관계가 있는 부족들과 결합하며 형성되었고 모세의 개인적 추종 세력이었던 레위지파는 유대민족에 편입되어 모세에 대한 기억과 문화적 우월성을 보존하는데 공헌했다. 왜 프로이트는 아리안족의 순수한 혈통을 강조하는 나치 독일에서 유대교의 혼합성과 유대민족의 혈통적 불순성을 강조했는가? 이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은 유대인을 지중해 문명권에 포섭시켜 유럽문화권으로 인정받아 민족의 생존을 모색하려던 작업으로 추정된다. 그 방법은 신성화된 모세와 선민의식에 집착하는 유대민족에게 혼종성을 부여하여 배타적인 유대주의 전통을 비판하면서, 그리이스-로마적 토대를 가진 근대 휴머니즘의 도덕적 및 지적 가치를 존중하는 혼종적인 유대주의를 성립시키는 것이었다. ‘신 없는 유대인’의 전망도 유대교의 독단성을 넘어서 유럽인과 융합을 모색하려는 시도의 표명이었다. 유대교의 대안으로 프로이트는 유대인의 정신성이 발전시킨 지적 산물이며 보편적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 특히 정신분석학을 염두에 두었다. 1938년 11월 독일 전역에서 유대교회당이 나치의 공격을 받아 불탔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죽음과 나치즘의 승리, 가톨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정신분석학의 소멸과 분산을 예상했다. 시대의 광풍 앞에 정신분석학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판단한 그는, 살해된 모세가 ‘귀환’하여 유일신교를 더욱 심화시켰듯이 잠복기를 거쳐 소생하기를 기대했다. 유대민족을 비판적 변호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이 자기 분석적 저술에서 모세는 프로이트 자신을 은유적으로 상징했다. 모세의 심상은 ‘약속의 땅’을 향한 위대한 진실을 재현할 담지자로 서술되었다. 그것은 역사적 진화주의를 넘어 ‘정신의 진보’를 향한 목적론적 의지를 내포했다.(장세룡, 114-116쪽)
유대인 정체성은 고정된 선결조건이나 누군가가 가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모두가 유대인임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삶의 현장과 그의 이야기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이 아렌트의 생각이었다. 유대교는 한 편으로는 정통 신앙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디시어를 말하고 설화를 만들어내는 유대 민족 내에 존재하기도 한다. 또한 전통이라는 의미에서는 어떠한 유대적 실체도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특정한 사회적 이유들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를 사회와 분리된 한 분파를 이루는 존재로서 인식하기 때문에 ‘유대적 유형’과 같은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러한 유형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유대교라는 말로 또는 그것의 진정한 의미와 관계가 없다. 다만 이 유형 속에는 그들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부정의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이 존재하고 폭넓은 관대함과 편견없는 정신이 있다. 아렌트는 이를 ‘정신의 삶’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태도야 말로 유대적 실체와 특유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브뉴의 이야기로부터 나올 수 있는 특성이라고 보다. 유대적 실체를 전제하지 않으면서도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대적 유형들이야말로 파리아적 관점에서 재구성된 유대적 정체성이다. 유대교나 유대민족에 대한 절대적 믿음보다 “자신을 낯선 세계로 인도하는 모든 길들을 탐사했으며 이 모든 길 위에서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 유대인의 길, 파리아의 길로 향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라헬이 겪으면서 이야기로 만든 유대인성은 다른 무엇보다 ‘유대적’이다.파리아적 감수성은 자기 자신을 배타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동일성에 부합시키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러한 외적 동일성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자기 사유를 유지한다. 이러한 내적 동일성 속에서 부정의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과 차이에 대한 관대함, 그리고 편견 없이 세계와 관계한다. 라헬은 비록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전하지만 자기표현의 가능성을 스스로 얻게 된다. 일기, 서신과 대화를 통한 라헬의 자기표현은 자신이 어떻게 타자로서 위치하고 있는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라헬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명명과 위치를 거부할 수 있었다.이는 아렌트가 이후 『인간의 조건』 에서 인간의 행위의 정치적 의미로 확장하는 데 주요한 기초가 된다. 아렌트가 라헬의 자각적 파리아의 관점을 높이 사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겠다. 아렌트는 라헬이 전적으로 어떤 규정된‘기원들(origins)’로부터 자유로웠고 그 때문에 자유롭게 사고하면서 ‘비어있음(emptiness)’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표현했다. 아렌트 자신도 그래서 난간 없는 사유(Denken ohne Geländer)의 실천자로서 불릴 수 있었던 것 역시 정체성에 대한 이와 같은 입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렌트가 라헬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유대적인 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유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이와 같이 유대인 정체성과 관련한 아렌트의 다각적인 설명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백소윤, 64-65쪽)
유대인 문제를 아렌트가 주장한 파리아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자칫 유대민족의 비극적 역사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유대인이 겪고 있는 차별적 처우들을 가벼이 여기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파리아로 서의 위치는 비고정적이고 일관되지 않은 채 외부자로서의 위치만을 의미하는 것 같다.이 말은 곧 파리아적 관점에서 재구성된 여성주의적 정체성 개념이 여성주의적인 맥락을 전혀 실현해 내지 못하는 추상적 개념으로 보일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본질적인 어떤 정체성을 포기한다는 것, 공통의 경험 특히 피억압자로서의 공통 경험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체성을 매개로 오랜 역사 동안 경험한 차별의 심각함을 쉽게 흩어버리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아렌트가 보는 자각적 파리아로서의 유대인은 유대인의 역사나 민족성 혹은 종교적 신념을 통해 유대인문제를 보지 않는다. 단지 버림받은 그 상태 자체에서 유대인성을 긍정한다. 아렌트는 유대인의 해방이 민족으로 대표되거나 피억압자의 경험으로 통칭되는 것은 유대인 정체성을 매개로 한 반유대주의만큼이나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심리적 연민에 의한 연대는 정치적 문제를 개인사로 치부하고, 정치적 연대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공통의 것으로서의 유대인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렌트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정체성은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공동체나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사이에서 공유된 세계에서 비롯된다. 유대인들의 취약한 위치를 가장 심각하게 만든 것은 이러한 “세계 없음”이었다. 이때의 세계는 민족국가나 예외적 소수에 의해 획득된 어떤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정치적 소통의 장이 되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서의 정체성이야 말로 인간의 정치적 행위 능력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이 소통의 장 속에서 동일성과 차이의 긴장은 개인의 정체성을 늘 흔들어 놓는다. 아렌트는 라헬의 삶을 통해서 라헬의 자유로운 사유와 세계로의 진입을 위한 부단한 투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긴장된 정체성이 그녀에게 준 통찰을 전하고자 했다. 라헬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항상 확인해야 하는 위치의 약자였지만 그 위치 덕분에 본질적인 집단 정체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아렌트가 발견한 파리아 위치의 이점, 즉 “외부자로서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세계의 범주를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때문에 이 파리아적 관점은 유대인성에서 비롯된 어떤 통찰에 국한하기보다 오히려 인간 유형으로서의 파브뉴와 파리아에 대한 아렌트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아적 특성들,‘반항하는 것’,‘국외자가 되는 것’,‘유대인이 되는 것’여기에 ‘여성이 되는 것’을 추가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파리아적 특성의 마지막 항에는 여성 뿐 아니라 여전히 버림받는 위치의 여러 정체성들을 대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차이를 공유할 수 있는 공적 영역과 정치 행위를 통한 표현을 통해 구성되는 공통의 정체성은 차이만으로도 또 동질성만으로도 이뤄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렌트가 인간의 복수성을 통해 의미하려했던 이중의 의미와도 맞닿는다.(백소윤, 80-81쪽) |
3. 일본 파시즘
⑴ 동북아 사회 산물
일본의 봉건제는 토지경제 및 토지의 지배를 중심으로 하는 막번체제였다. 각 지역은 인구의 약 10%를 구성하는 무사, 봉건 영주 그리고 가신들이 농공상의 피지배층을 지배하는 구조의 ‘번’(藩)으로 나뉘고, 각 번의 봉건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을 통솔하는 쇼군(将軍)이 존재하는 ‘막부’(幕府)가 있었다. 이러한 지배체제의 최상위에는 직접적인 지배 권력과는 무관한 천황이 존재하고 있었다. 막번체제는 봉건제이긴 해도 이미 어느 정도의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인한 상품경제가 성립되어 있었다. 교환경제가 발달하고 직업이 분화되기 시작한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상업도 크게 진전되었으며, 상업도시가 성립된 과정은 막부와 각번이 수납한 공물을 교환하기 위해 인구가 밀집한 도시로 운송하면서 이루어졌다. 또한 막번체제 하의 수공업생산자들은 각 번에서 집단을 이루어 살며 영주들의 주문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가내공업이었으나 점차 교환을 전제로 한 초기 자본가적 경영도 등장하면서 점차 생산 공정이 분화되고 수공업 발전이 촉진되었다. 이 시기의 도시 성립은 부분적으로 존재하던 농민의 잉여물자 상품을 통한 상업적 농업 및 농촌 수공업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켰다. 상품경제의 발달은 농촌의 봉건적 자급자족경제를 붕괴시키고 불가피하게 봉건제와의 대립을 초래하게 되었다. 막부와 다이묘는 부호들을 억압하여 재산을 탈취하는 한편 농민들에게는 경제적, 사회적인 억압조치를 취했으며, 이는 농민과 상인들의 불만과 반항을 고조시켰다. 이와 함께 18세기 중엽부터는 농업생산의 황폐, 흉작, 대기근이 빈번해졌으며 인구정체마저 발생했다. 궁핍한 농민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날품팔이가 되거나 수공업생산 혹은 영세 상인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상품경제가 농촌 깊숙이 침투되어 있었으므로 소농들도 필사적으로 이에 참여했지만, 지주는 화폐경제에 편승하여 고리대금, 양조, 수공생산물의 독점 등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갔다. 농민들의 생활은 계속 피폐해져갔고 농민봉기(百姓一揆)도 증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소작빈농과 지주의 분화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빈곤소농들은 경제적으로 지주에 종속되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지주가 영주와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제외적으로도 지주층에 종속되었다. 동시에 수공업생산 역시 19세기에 와서 눈에 띄는 발전이 있었다. 원래는 농민이 원료생산에서 제품생산까지 담당하고 상인이 중간 구매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상인이 원재료를 농민에게 전대하여 가내노동으로 가공하게 하고 임금을 지불했다. 이윽고 농가는 생산수단을 전혀 갖지 않고 자본가에 의존해 생산을 하게 되며 이는 사실상의 ‘임금노동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막부말기에 이르자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되면서 노동력의 대이동이 발생했다. 이동에 따른 영내의 노동력부족은 타 영지에서 영내로 유입되는 노동력에 의해 보완되어 갔다. 이로 인해 부락내부에서의 지주와 소작의 대립을 기축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농민층의 존재와 광역적인 이동의 연쇄는 사회기반의 변용을 초래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1857년에는 방화, 약탈의 횡행으로 이어졌으며, 번 권력 스스로가 ‘소요’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유동하는 노동력을 기축으로 한 농민의 이동은 그 자체로는 막부말기 단계에서 정치주체로 형성되지 못했지만, 근대국민국가가 성립되어 가는 정치과정에서는 확실히 사회주체로서 번이라는 할거적인 봉건지배의 기반과 체제를 붕괴시키고 근대사회의 토대를 형성시켜 갔다. 다시 말해 에도시대의 생산력의 향상은 상품생산, 화폐경제 발달을 촉진시키고 봉건적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붕괴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에도 중기 이후 더욱 뚜렷해졌으며 막부와 제 번들의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영주는 농민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는 농민 계층의 저항을 촉발시키고 오히려 봉건지배체제를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김순임, 56-57쪽)
민중에게 권위를 가진 신앙의 대상과 천황의 종교적 지위의 상관관계부터 설명해야만 했다. 그래서 ‘천자는 황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자손이며 이 세상의 시작부터 일본의 주인이었고, 백성 모두가 천자의 자손’이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당시 민중은 ‘천자’의 존재는 몰랐지만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갖고 있었다. 포고문에 따르면천황이 최고의 종교적 권위라는 점, 즉 당시 민중에게 절대적 정치적 주권자였던 다이묘(영주)에 대한 정치적 우월감을 보여주고, 민중이 동요하면 영주에게 피해가 미친다는 논리로 끝을 맺고 있다. 이러한 논리는 소박한 민중들의 사고에 설득력을 가졌고 동시에 이 소박한 논리 속에 후일 탄생한 국가신도(國家神道)의 기본적인 논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천자인 천황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직결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주변에 다른 신들의 위치를 규정함으로써 결국 말단의 민중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이다. 천황과 조정은 수백 년에 걸쳐 통치 실적이 없었고 현실적으로 유신과 건국의 대사업을 수행함에 있어 공적을 내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신화적인 역사적 전통인 만세일계(万世一系)의 황통지배에서 정통성의 근거를 찾았다. 만세일계의 관념은 구미열강의 외압에 항거하는 국가주의의 발로로써 지배신분 속에서 확산되었다. 이 관념은 이윽고 제국헌법(메이지헌법) 제1조에 규정되며, 천황은 소위‘세습 카리스마’로 가공되었다. 그러한 천황의 만세일계의 연원이 되는 것은 정치적 계보로서의 황위(정치적 천황제)와 종교적 계보로서의 영위(靈位, 종교적 천황제)였다. 그런데 이러한 ‘만세일계’를 정통성의 근거로 하는 군주론은 덕치를 규범으로 하는 유교의 역성혁명론 즉, 군주가 덕과 인을 잃으면 ‘天’(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 버림받아 혁명(왕조교체)에 이른다는 사고와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천과 군주가 혈통으로 직결되어 있으면 ‘혁명’은 일어날 수 없으며 인정을 부정하고 인민을 전쟁에 내몰아도 군주의 권한은 흔들림이 없다. ‘만세일계’는 오히려 근대에 적합한 군주론이었다.(김순임, 65-66쪽)
존왕양이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무사들을 勤王志士라 불렀으며 그들은 주로 국학적인 소양을 갖추고 미토학의 사상적인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었다. 이이 나오스케가가 천황의 칙허를 얻지 않고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일통상조약을 조인하여 막부가 장군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을 계기로 촉발한 양이론이 존왕을 지향한 것은 자연적 내셔널리즘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존왕론과 양이론이 결합되어 반막부의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초기 유코무와 아이자와(會澤)의 사상에서 천황 - 막부 - 번주 - 번사라는 봉건적 계급이 설정되어 무사의 존왕행위는 막번적 지배체제를 보강하는 것이기는 해도 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佐幕的 존왕론을 체제 파괴의 존왕론으로 변화시킨 사람 중의 하나가 안세이(安政)의 大獄 사건에서 刑死한 요시다 쇼오잉(吉田松陰)이었다. 요시다 쇼오잉의 존왕론의 특성 중 하나는 천황에 대한 개인적․주체적 충성을 중시하는 점에 있다. 쇼오잉은 “일본의 전민중은 계급․신분에 관계없이 천황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一君萬民의 사상과 연결되어 천황에 충성을 다한다는 입장에서 상하신분을 초월하고 번의 구별을 초월하여 횡적결합이 가능해졌다. 존왕론이 반드시 막부타도의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존왕양이가 존왕토막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다른 상황발전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개항시 위칙조인이 그 역할을 했고 그것이 바로 부국강병의 새로운 국가체제 형성이라는 역사적 요청과 결부하여 정치적 실천성을 갖게 된 것이다. 현상타파적인 그들의 활동이 역사적 상황의 진전과 역사적 요청에 따라 정치세력이 다원화된 봉건체제에서 정치력을 일원화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어 부국강병을 실천하고자 한 명분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권력획득을 위한 투쟁기에서 막부측과 반막부측 모두 존왕에 귀일한다는 점은 천황의 권위를 확보해 정치권력을 유지하거나 획득하려는 목적달성의 수단 확보에 있는 것이었다.(탁재형, 26-27쪽) |
㈎ 국가신도
일본 파시즘기의 권력이 비이성적인 강제와 폭력적인 억압을 강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기에 자발적으로 지지하고 동의한 것은 결코 중간층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다수의 국민이 사회적 지위와 계층을 초월하여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환상 속에서 총력전체제의 적극적인 가담자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대동아공영권’과 ‘세계지배의 사명’과 같은 파시즘기의 이데올로기 창출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교토학파’는 상층 인텔리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이 밖에도 교육, 문화, 예술의 각 방면에서 파시즘 체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협조한 인텔리는 결코 소수가 아니었으며 그들의 역할이 민중의 자발적 동원에 미친 영향도 결코 경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대다수 민중도 중간층을 매개로 하여 통합의 구조 속에 포섭되고 규제되어 갔다고는 하지만 결코 소극적인 협력자는 아니었다. 이미 근대화 과정에서의 문명화와 제국주의 전쟁에서의 승리, 그리고 식민지 획득 등은 천황의 권위와 결합하여 대다수 국민의식의 통념적 부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근대화의 성과를 천황의 권위와 결부시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적 계층과 지위를 초월하여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파시즘기에 있어서는 그 어떤 조직이나 지역사회도 천황과 국체의 권위를 매개로 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합리성을 치장하고 있었으며 일반 민중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천황제이데올로기의 ‘환상’을 매개로 한 일본 파시즘기의 사회적 기반은 앞서 지적했듯이 ‘현인신’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귀의, 즉 천황숭배와 ‘敬神’의 정신을 통해서 천황에 대한 귀의를 강조한 ‘敬神崇祖’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보다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신도의 이데올로기는 일본인의 민속종교적인 전통에 뿌리를 가지는 客人神信仰, 御靈信仰, 祖上崇拜 등의 관념과 교묘하게 결합함으로서 보다 자발적인 민중의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먼저 근대 일본의 천황숭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강제적 측면만 주목해서는 그 실상을 이해하기 어려우며, 권력이 창출한 이데올로기에 민속종교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나타나는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사람을 神으로 모시는 민속신앙이 존재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客人神信仰’, 또는 ‘마레비토신앙’은 살아 있는 사람을 신으로 믿는 ‘이키가미신앙(生き神信仰)’에 의거하여 貴人이 일 년에 한번 그 해의 부와 장수와 행복을 담아주고 떠나간다고 믿는 민속신앙이다. 이러한 민속적인 신앙은 국가권력에 의해 창출된 천황제이데올로기가 천황을 神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現人神’이라고 제시할 때 이를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특히 메이지시대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천황의 전국순행에서 천황을 ‘이키가미신앙’, 또는‘객인신신앙’에 의거하여 신으로 받아들이는 민속 관행의 사례는 무수하게 전해지고 있다.(박진우, 408-409쪽)
16세의 어린 나이에 천황에 즉위한 명치천황의 권위를 보강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신권적 권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추진하게 된 것이 神道國交化정책이다. 원래 신도는 곡식과 조상의 영(靈)을 가장 중요시하는 신앙으로서 공동체의 제사로 출발했다. 영을 맞아들일 곳을 정결하게 유지하고 외경심을 표하는 일종의 조상숭배교라 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신도는 그 엷은 종교성으로 인해 불교, 유교, 도교와도 아무런 저항감 없이 서로 잘 어울려(습합) 한 사람이 절의 주지와 신사의 궁사(宮司)를 겸한 경우도 많았다. 국가신도는 이러한 神道야 말로 일본인의 정신생활을 통합시켜 주는 장치라 생각하고 메이지 신정부가 강력한 정치적 의도 아래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권력에 의해 강제된 일종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국가신도라 함은 신사신도와 황실신도를 접목시켜 천황을 천손의 자손, 즉 현인신으로 떠받들고 일본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종교적 정치제도를 말한다. 즉 천황은 위대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로부터 시작되는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의 후예로서 神性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국가신도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역사적 신도의 내용에서 불교 등 외래종교적 요소를 배제하고 이를 천황과 직결시켜 순수한 신도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이러한 방침의 뿌리는 막말 유신의 정쟁을 주도한 히라타 유파의 ‘복고신도’에 가 닿는다. 히라타 유파의 시조가 되는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는 막말기의 국학자다. 원래 신도라는 것이 외래종교와 절충하여 이들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써 발전해 온 것이라고 보면, 그의 배타적인 신도론과 광신적인 존왕주의는 명확하게 이질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오히려 이단이라고 해야 할 이 히라타의 사상이, 천황의 고대적, 종교적 권위를 부활시켜 중앙집권적인 재통일을 꾀한다는 정치목적에 가장 적합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져 토막파의 지도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신도의 발전사를 무시한 이러한 신정부의 편협한 자세는 한편에서 병적인 폐불훼석(廢佛檓釋)의 폭풍을 일으켰다.(탁재형, 35-36쪽)
이런 이론적 기반 위에서 ‘국가신도’를 내세우며 민중의 양이의식을 천황에의 기대라는 형태로 유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함으로서 명치정부의 지배층은 성공적으로 명치유신을 달성하고 근대 일본의 명치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렇듯 천황의 권위를 내세워 「양이」를 표방,민심안정을 꾀했던 정치세력은 권력장악과 함께 근대 국가 형성의 과제를 수행해 가는 과정에서 민중의 「고잇신(御一新)」에의 망상적 기대를 뒤로하고 「개국화친」을 내세우며 양이를 져버리게 된다.
막말의 존양왕이파가 내걸었던 「양이」의 슬로건은 왕정복고의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신정부를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논리로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내세웠던 이국(異國)=이적(夷狄)이라는 선동적 이데올로기는 권력 획득 후 바로 개국화친과 문명화 이데올로기로 전환되었고, 이 전환의 정당성 또한 ‘천황’의 권위성과 연계되어 선전되어진다. 명치정부로서는 이러한 태도변화를 민중에게 납득시켜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했던 필연적 이유가 있었다. 흔히 명치유신을 가리켜 ‘위로부터의 개혁’이니 ‘일부 엘리트층에 의한 문명개화’니 하면서 그 민중적 측면을 간과하는 시선을 취하고 있지만, 명치 초년부터 행해진 ‘신도국교화 정책’추진이나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천황제 국가’로서의 이데올로기적 제도의 수행, 예를 들어 축일의 제정이나 천황순례등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명치정부는 ‘국민교화’적 측면을 매우 중시했다. 국가의 성립의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신국사상에 근거한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라는 핵을 내세웠던 명치정부는 이 천황을 절대불변의 권위이자 국가 권력의 정점으로 함으로서 권력 그 자체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근대국가 형성에 필요한 국민적 활력을 집결시켜갔던 것이다. 존왕양이파를 중심으로 민중의식 안의 ‘양이’의식을 선동, 표방했던 신정부 세력은 실은 그런 민중의 의식을 ‘국민교화’의 전 단계인 ‘민중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의 수단으로서 이용했던 것으로, 이와 같은 ‘양이’에 있어서의 민중과 권력 측의 상이성은 신정부가 일련의 정책을 발표하면서 드러난다.
1871년 폐번치현을 필두로 천황제 권력의 이른바 문명개화정책은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신 정부는 먼저 「에타, 히닌의 호칭 폐지」라는 신분제 재편을 행해 국민을 화족, 사족, 평민이라는 새로운 신분 질서의 틀 속에 넣음으로서 종래의 농․공․상과 천민계급으로 고착되어 있던 봉건적 신분 질서를 일도 하려 한다. 봉건사회의 상징적 제도처럼 여겨져 있던 신분제도를 근대국가의 출발과 함께 바로 폐지한 것은 명치정부의 근대 국가 건설에의 강력한 의지를 대내 외에 표방하려는 시도라 볼 수 있고,이런 의지는 이후의 학제나 징병령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최은주, 49-50쪽)
국가신도는 800만의 신들이 신앙하는 다신교이다. 의례는 있지만 체계화된 교의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 조상숭배와 결합하고 또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비롯한 황실의 조상신에 관한 신앙이라는 점 등으로 인하여 그 원시종교적인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한 원시적 신앙이 근대까지 살아남아 재차 활성화되었다는 점에 일본인이 경험한 종교의식의 독자성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원시종교가 『古事記』 에 기록되었고 이를 신도화 정책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古事記』에 기록된 五繼의 전통속에서 천황이 조상신을 만나 제사를 지내는 곳이 이세신궁이고, 천황이라는 신을 위하여 죽은 자들의 영혼에 천황이 친히 절하는 곳이 야스쿠니 신사라는 것이다.
왕정복고를 추진한 정부는 일본의 모든 종교를 하나로 통일한 국교로서 국가신도를 설정한다. 그리하여 1870년 「大敎宣布」(대교;신도)를 통해 천황과 신이 직결되고 천황숭배를 중핵으로 한 신도의 국교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고대 천황은 국가를 대표해서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특별한 인간으로 인식되었었다. 그러나 메이지시대에는 이러한 종래의 천황관과는 달리 절대적인 존재요 도덕의 근원이며 진리를 구현하는 유일신적인 의미로서 신에 비유되는 관념으로 확대되었다. 종교를 국가에 종속시켰던 현상은 1890년 발표하였던 「교육칙어」를 학교 교육의 기본으로서 국가신도의 敎典역할을 담당하게 하였고, 1891년에는 그것의 봉독이 예배로서 제도화 되었다.법적으로 국민들은 「대일본제국헌법」에서 규정되어 있는 바대로 천황에 종속된 ‘신민’이었다. 이로써 천황을 절대화하는 국가신도의 교의가 사상적으로나 법적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천황을 신으로 만든 신도를 일본의 시민종교(Civil Religion)로까지 만든 이유는 기독교 문화에서 찾는 의견도 있다. 국가 신도는 중앙 권력에 의한 여타 종교의 억압과 포섭을 통해 이루어졌고, 불교나 유교, 민중 종교 등은 위로부터의 강압적인 방법으로 국가신도에 수용되었다. 중국이나 한국과 달리 적극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모색한 일본은 사회제도 전반에 대해서는 서구적 합리화를 지향하는 한편, 근대 사회의 시민적 토대는 일본 고유의 전통 위에서 이루려하였다. 옹립한지 얼마 안되는 천황의 권위가 기독교로 인해 무너질 위협을 느끼면서, 근대화를 위해 종교의 힘을 필수로 본 정부는 천황을 신으로 모시는 신도를 대안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천황과 기독교신으로 나뉜다면 충성의 대상이 분산될 위험 소지가 다분했다. 단 하나의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가 널리 퍼지게 된다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들 것이고 심하면 천황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교육칙어와 제국헌법으로 다져온 천황의 권위를 근대적 종교란 이름으로 기독교가 확장한다면 메이지정부는 지배에 적신호가 켜질 수 있다.메이지정부는 기독교를 지배의 장애요소로 인식하고 차라리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신도를 국가에서 장려하고 수용하게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이영미, 10-11쪽)
그러나 昭和恐慌에 의한 경제적 침체와 우익적 혁신운동의 대두, 그리고 대륙침략의 확대로 일본 파시즘이 급속하게 진행하는 시점에서 이러한 반발은 거의 무기력한 것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을 경계로 국내의 사상언론의 통제는 급속하게 강화되고 국가신도는 파시즘적인 國敎의 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1932년 야스쿠니신사에서는 ‘上海事變’ 등에서의 戰歿者를 合祀하는 臨時大祭를 거행하고 군사교관의 인솔 하에 각 학교의 학생들이 집단 참배하도록 했다. 이 때 기독교계 죠치대학(上智大學)의 일부 학생이 신앙상의 이유로 참배를 거부했다. 이에 대하여 문부성이 학생들의 참배는 “교육상의 이유에 의한 것이며 이 경우에 학생생도아동의 단체에게 요구하는 경례는 애국심과 충성을 표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고 하는 정식 견해를 발표한 것은 어떠한 종교상의 이유에서도 신사 참배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후 학교 교육은 물론 전 국민에 대한 신사참배의 강제가 정당화되었으며, 각 종교계에서도 국가의 탄압을 피하고 공인종교로서의 존속을 위해서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인정하여 국가신도와 완전한 타협을 보았다. 물론 이후에도 기독교 신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례는 발생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대중 집회 등을 통해서 규탄 당하였다. 공인 각 종교는 국가신도의 틀 안에서 각자의 교화활동을 강화했으며 여기서 일탈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탄압을 가했다.
동시대를 살면서 일본파시즘에 희생당했던 당시의 지식인 도자카 쥰(戶坂潤)은 이와 같이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가권력에 의해 모든 종교가 흡수되고 억압되어 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3가지 조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조류는 당시의 저널리즘이 ‘종교부흥’이라고 부른 현상이었다. 당시에는 불교, 기독교, 신도 등의 경전이 대량 출판되고 예언, 영적 체험, 신비주의 등이 유행하였으며 심지어는 라디오를 통한 宗敎講話가 시작되는 등 종교부흥은 메스메디아와 결합하여 비약적인 전개를 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신종교 또는 민중 종교의 조류이다. 히토노미치, 大日本觀音會(후일의 世界救世敎), 大本敎, 靈友會 등의 신종교는 각각 수십만 명이 넘는 신자를 확보하여 융성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조류의 배경에는 1930년대의 사회불안이라는 기반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당시까지만 해도 국가신도가 모든 종교의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조류를 도자카는 ‘일본민족종교’라고 불렀다. 도자카에 의하면 그것은 국가신도뿐만 아니라 천황제를 지탱하는 심성으로서 국체, 일본주의, 정신주의, ‘비상시의 정신’ 등을 널리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도자카는 이 민족종교의 담당자를 군부․관료․일본형대부르조아의 삼위일체로 보고 여기에 지탱되면서 ‘일본민족종교’가 교육, 풍속, 문학, 예술, 그리고 정치와 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걸쳐 침투하고 있다고 보았다. 도자카는 전체적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조류가‘일본민족종교’의 강렬한 흡인력에 빨려 들어갈 것이라고 예측했으며 그것은 곧 역사의 현실이 되었다. 때마침 ‘天皇機關說’이 배척을 당하고 ‘國體明徵運動’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에 도자카는 국가신도의 광신적인 미래를 눈앞에 보았던 것이다.(박진우, 399-400쪽)
이러한 일본 파시즘기 국가신도의 敎義를 집대성한 것은 문부성 교학국에서 발행한『國體의 本義』와『臣民의 길』이었다. 1937년 문부성에 의해 작성, 배포된『국체의 본의』는 교육칙어의 국체론과 일본정신론을 집대성하여 ‘국체’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강조한 것으로 국가신도의 교의가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 제1장 ‘大日本帝國’에서는 ‘万世一系’의 천황이 지배하는 ‘國體’의 중요성을 명시하고 ‘現人神’ 천황은 제사에 의해 황조신과 일체가 되며 이로써 황조신의 정신을 이어 창생을 撫育하고 번영시키고자 하는 의지이므로 교육도 그 근본에서는 제사와 정치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하여 국가와 교육의 일체화를 강조하였다. 이어서 1941년 배포된『신민의 길』에서도 敬神의 정신을 일관하는 것은 神을 통해서 천황에게 歸一하는 것이며 ‘敬神崇祖’는 스스로 자신의 번영발전으로 이어진다고 하여 제정일치의 입장에서 국체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다. 여기서 특히『국체의 본의』에서의 ‘현인신’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귀의와『신민의 길』에서의 ‘경신숭조’의 강조는 후술하듯이 민중의 자발적 동의를 조달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박진우, 403쪽)
메이지유신과 함께 막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은 유신세력은 고대 신화를 이용하여 지배에 대한 정통성과 정당성을 내세워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였다. 어린 천황을 ‘현인신’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추론하여 학습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오랜 기간 정치력을 상실한 천황의 모습을 서술하여 순행을 실시한 인과관계를 밝혔다. 천황의 신성불가침을 명시한 ‘제국헌법’을 공포하고 교육을 통해 강화유지하기 위해 ‘교육칙어’가 탄생하게 된 과정 서술했다.「날개글」에도 ‘제국헌법’으로 법제화된 강력한 천황제와 ‘교육칙어’를 통해 국가에서 학교에 배포했음을 알려 천황숭배가 국가적으로 교육에 이용되었음을 알게 한다.「참고자료」에 ‘이토의장의 헌법 초안에 기초한 발언’을 제시하여 헌법안에 숨겨진 정치적 의도를 사고할 수 있도록 한다.
제국헌법, 교육칙어, 신도정책이 천황의 강력한 권위가 곧 메이지정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과 「제국헌법 발포식을 풍자한 판화」에서 천황을 의인화 시킨 풍자를 삽입하여 당시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천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날개글」에 ‘신도’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여 천황의 절대적 종교 권위자의 모습을 이해하게 한다.(이영미, 27쪽)
㈏ 가족국가
본 논문에서 주목하는 식민지 한국의 사회사상은 ‘아시아주의(亞細亞主義, Pan-Asianism)’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제(天皇制)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문제삼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두 사회사상 간에 형성되어 있는 불가분리성 때문이다. 이 둘은 공히 근대 일본을 추동하고 지탱하는 사상적 기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식민지 한국의 문학지식인들에게 주관적 해석 및 전유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일본 정체(政體)로서의 천황 중심주의적 ‘국체(國體)’는, 그것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유력한 방법이었던 ‘대륙침략(그리고 그것에 복무하는 아시아주의)’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했다. 이는 제국 일본 및 식민지 한국의 사회사상으로서의 아시아주의 및 천황주의가 상호 간 논리를 연대보증하고 공고히 하는 상보적 관계개념 임을 증명한다.(윤인노, 56-57쪽)
국가 존폐와 관련한 근대 일본의 ‘위기의식’은 그 타개책으로서의 ‘대륙침략’으로 표출되었고, 그것은 한국(조선)을 ‘생명선’으로 하는 것이었다. 한국이 절대적 식민지로 전제된 대륙팽창이라는 ‘국가목표’는, 일제시대 전 기간을 관류하면서 식민지인들을 규율했다. 아시아의 연대와 공영을 표층담론으로, 차별과 위계의 강조를 심층기반으로 한 아시아주의의 ‘근본 모순’은, 정한론 및 대륙웅비론에서부터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이르는 일본 국가목표의 외화형태들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복무하는 것이었다. 국가 위기의식의 타개책으로 상정된 대륙침략주의의 활성화를 공통목표로, 식민지배정책과 아시아주의는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주의’는 메이지 유신(1868)을 전후한 시기에서부터 근대 일본의 역사를 추동케 했던 중대한 동력의 하나였다. 그것은 부국강병, 문명개화, 자주독립등 메이지 일본의 국가적 의제를 그 저층에서 지탱했던 사회사상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양을 달리한 채 일본 근대의 태동에서부터 ‘전전(戰前, 혹은 전후 현재)’ 시기를 관통하며 식민주의와 침략주의를 은폐․호도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기도 하다. 아시아주의는 매우 다양한 하위담론으로 표면화되지만, 대부분의 주류적 아시아주의는 연대 혹은 평화라는 슬로건으로서의 표층담론과, 차별을 은폐․강화하는 서열 구조로서의 심층이 괴리를 보이고 있다. 이를 본 논문에서는 아시아주의의 ‘근본 모순’이라 줄곧 지칭했다. 일제의 위기의식 해소를 위해 국가목표로 상정된 ‘침략주의’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복무했던 아시아주의는, 식민지 문학지식인들에 의해 주관적으로 인식됨으로써 분식되고 있던 심층의 식민주의적 속성이 은폐된 채로 수용 혹은 변용되었다. 저류로서의 아시아주의의 ‘근본 모순’과 관계 맺는 문학텍스트의 ‘친일적 의미요소’는 단일하거나 균질적인 의미로 규정될 수 없다. 그런 친일적 의미요소의 내부에는, 사상 자체의 내적 모순성에 비판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친일’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인 의미요소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주의의 ‘근본 모순’은 친일문학텍스트의 ‘비균질성’을 떠받치는 심층기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본 논문에서 분석한 친일문학텍스트는 공히 그런 ‘비균질성’이 내장된‘복선적(複線的) 텍스트’였다.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다양한 주의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성격이 강했으며, 따라서 자기완결적이지 않다. 그것은 성립과 파급, 잠복과 부상, 확대와 강화라는 전변의 과정을 보이는 바, 이와 관련을 맺는 친일문학텍스트의 출현도 일본 안에서 아시아주의가 그리는 그런 전변과 유사한 궤적을 보인다. 식민지 사회사상적 저류로서의 아시아주의의 ‘근본 모순’과 친일문학텍스트의 ‘비균질성’ 간에 성립하는 내적 연관에 대한 분석은, 친일문학문제를 식민지 근대의 전관적(全貫的) 흐름 속에서, 식민체제 하부토대로서의 사회사상과 함께 사유하고자 했던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이는 친일 논리의 심층을 사회사상사적 입장에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인식경로를 마련하는 것이면서, 아시아주의를 통해 식민지 한국 근대의 모순성의 일단을 통시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윤인노, 112-113쪽) |
1910년 대역사건 발생 후 정부의 부락개선정책이 관민합동(官民合同) 형태를 보이기 시작하던 상황에서 1912년 메이지 천황의 사망을 계기로 정부의 부락개선대책은 “천황의 성지(聖旨)에 의해 해방령이 포고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방향으로 강화되었다. 부락개선운동측은 이에 호응해 더 적극적으로 천황주의를 표명했고, 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국가의 발전을 위해 부락개선을 행한다”는 국가주의적 방침을 천명했다. 초창기 부락개선․융화운동을 전개한 주체들이 이러한 천황제 국가주의적 논리를 수용했던 사실은 대표적 단체인 야마토동지회(大和同志會)와 제국공도회(帝國公道會)의 사례에 분명히 나타난다. Ⅱ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야마토동지회는 다이쇼(大正) 개원(改元) 직후인 1912년 8월20일 창립되었고 기관지의 명칭도 명치지광(明治之光)이었다. 동지회는 주요사업으로 ‘부락차별철폐’와 함께 ‘신민(臣民)의식의 철저’를 주장했고, 회장인 마쓰이 쇼고로(松井庄五郞)는 명치지광(明治之光)에 기고한 글에서 자사(自社)의 주의주장은 ‘황실중심주의’라고밝혔다. 마쓰이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서 신민의 의무를 다한다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고, 기관지의 명칭을 명치지광(明治之光)으로 정한 것도 해방령을 메이지 천황의 성지(聖旨)로 받아들여 황은(皇恩)에 보답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부락개선․융화운동의 경계에 있던 야마토동지회보다 한층 더 공고한 천황주의를 표방했던 융화단체 제국공도회의 취지는 모임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중심인물 오에 타쿠(大江卓)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오에가 제국공도회의 간판 격으로 나설 수 있었던 까닭은 메이지 시기 ‘해방령(解放令)’의 발의자라는 명망에 힘입은 바가 컸기 때문이었다. 메이지 천황의 사망을 계기로 제국공도회에 가담하고 정력적으로 활동한 그에게 부락차별문제는 천황의 성지(聖旨)에 어긋나는 불충(不忠)이자 제국일본의 커다란 오점이었다. 부락차별을 남겨두면 끝내 부락민이 천황제국가권력의 지배체제를 위기에 빠뜨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오에의 관심은 오로지 그러한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부락민의 자력개선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편, 부락민을 차별함으로써 그들의 반항심을 부추기는 부락 외부의 일반사회에도 반성과 차별철폐를 촉구했던 것이다.(최경순, 33-34쪽)
본고는 수평운동과 융화운동의 상호교섭 실태를 통해, 전국수평사의 신화와 전설 속에 가려졌던 이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다고 전국수평사가 부락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나름의 의의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이쇼 시기에 등장했던 각종 사회운동은 일본의 지배질서나 사회관계와 불화하거나 대결하기 십상이었고 그 최종적 귀결점은 천황을 정점에 두고 천황에 대한 충성과 복종에 의해 일본사회를 틀 지웠던 ‘천황제 지배질서’였다. 일본의 사회운동 가운데 이 천황제와의 대결에까지 나아간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폐색의 억압적 상황에서 천황제 지배질서는 넘기 힘든 벽이었고 사회운동 자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천황제와의 대결을 회피해야만 하는 이율배반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조적 제약 속에서도 수평운동이 제국일본과 천황제 지배질서의 아킬레스건이었던 부락(민)문제를 공론화시키고 기존 부락개선․융화운동과 달리 부락민의 ‘자주적 단결’과 ‘차별규탄투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운동 모델을 제시한 것은 그때까지 사회적으로 방치되어온 일상생활에서의 차별적인 언행을 명백히 정치적인 문제로서 부락 내외에 환기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부락해방을 촉진한 전국수평사와 수평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분명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국수평사를 비롯해 수평운동을 전개한 운동주체들은 본질적으로 천황의 적자(赤子)이자 신민(臣民)으로서의 정체성을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러한 두 운동 진영의 사상적 지향성이나 상호교섭 추이를 볼 때 양측을 양립불가능한 적대관계로만 파악하는 시각은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두 운동의 복합적인 양상을 설명하기에도 곤란하다. 수평운동의 차별규탄투쟁은 기존 부락개선․융화운동과 구분되는 독자적 지표로 평가받는데, 차별규탄투쟁이 처음 규정된 것은 창립대회 때 발표된 결의 제1항이었고, 이것은 강령 제3항의 이념을 구체적 운동방침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Ⅱ장에서 본 것처럼 전국수평사의 강령은 정신적 측면(인도주의)과 함께 물질적 측면(경제와 직업의 자유)도 고려하고 있다. 전국수평사의 창립멤버인 나라현 삼총사가 전수창립 이전에 종사했던 부락개선 활동 중에 중요한 사업은 부락의 경제적 생활향상을 위한 금융대부(貸付)와 소비조합활동이었다. 강령 제2항은 그 때의 경험이 투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초기 전국수평사는 이후에 결의 제1항에 따라 부락(민)에 대한 부락 외부의 차별적 언행을 철저히 규탄하는 ‘차별규탄투쟁’에 조직의 역량을 집중했다. 창립 당초 강령에서 부락(민)을 위협하는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의 문제를 모두 제기했으면서도 실제 운동의 전개과정에서는 정신적 측면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최경순, 55-56쪽)
명치유신까지 천황 권력의 본질은 尊王討幕 운동을 추진하는 유신지사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인 타마(玉)로써의 천황이었다. 번주를 설득하기 위해서도 천황의 칙명이라는 권위가 필요하였고, 천황의 칙명은 藩의 討幕運動을 합리화시키는 대의명분의 기치로 이용되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완고한 양이론자이자 상하신분질서를 중요시한 코우메이천황(孝明天皇)이 이들 존왕토막론자들 강경존왕론의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攘夷를 포기하고 尊王討幕으로 운동목표를 전환한 지사들에게 있어서 양이론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주체적인 정치행동을 강화하려는 코우메이(孝明) 천황은 장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867년 코우메이(孝明)천황의 급사에 의문을 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존왕론은 명분이지 실제 현실의 천황에 대한 존왕이 아니었슴이 이들 세력의 현실이자 모순점인 것이다.
즉 왕을 받들어도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신지사들의 이러한 인식은 막부가 1865년 제2차 쵸슈정벌을 위한 칙허를 얻어냈을 때, 오쿠보 도시미치가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의(非義) 칙명은 칙명이 아니다“라고 하여 천황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자신들의 목적에 유효하게 작용하는 한도라 내라는 의미다. 또한 이들이 반막운동을 전개하며 천황을 타마(玉=天皇)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존왕토막론자들의 권력지향의 실체였다. 공무합체파의 막부와 外樣大名의 尊王도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막부의 대정봉환의 숨은 의도 역시 천황에 의지해 마지막까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모든 세력에게 천황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탁재형, 49쪽)
도이 다케오(土居健郞)는 패전에 의해 천황제와 가족제도에 대한 사상적 강제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개인의 확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아마에의 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후의 사회적 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메이지 정부에 의해 행해진 천황제의 확립은 계급과 계층을 초월한 국가의 정신적 구심점을 존재하게 했는데, 그것은 전통적인 의리와 인정에 입각한 근대화에 대한 시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의리와 인정은 실은 아마에의 심리를 중심으로 한 것이고 일본인은 아마에가 지배하는 세계를 진정으로 인간적인 세계라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제도화한 것이 천황제였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천황제는 천황과 국민이 아마에를 매개로 서로 편의를 봐주는 제도로서 제도적인 집단주의체제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빠른 속도로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저력에 대해 도이는 쉽게 거국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게 한 집단주의의 힘이라 인정했다. 그러한 근대화에 아마에가 도움이 되었다는 또 하나의 힘은 동일화나 섭취 기능에 있다고 말했다. 동일화와 섭취는 아마에와 깊이 관련된 심리기제로서 일본이 동양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빨리 근대화를 이룬 것은 서구를 추종하려는 호기심이나 지식욕이 야기한 힘에 의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도이는 또 아마에와 사회구조의 관계에 대해 종적관계의 사회구조는 아마에를 중시하도록 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사회집단 내에서 수직관계를 중시하는 특성은 실은 천황 또는 상사에게 의존하고 싶거나 보호받고 싶은 아마에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본인의 아마에에 대한 편애라고까지 느껴지는 감수성이 일본사회에 있어서 종적 관계를 중시하게 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탁재형, 106-107쪽)
메이지(明治)정부의 성립과 함께 가족 제도는 새롭게 재편되었다. 메이지정부는 국가를 말단에서부터 지탱하기 위한 기초로써 새로운 가족국가론의 확립을 서둘렀는데 이때 모델로 한 것이 , 가장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가족 성원은 가장의 말에 복종하는 에도시대 무사계급의 가족제도를 근간으로 했다. 천황가의 시조인 이자나기, 이자나미에 의하여 창조 된 일본이기에 臣民은 천황을 최고정점으로 혈연적인 관계로 이어져있다. 따라서 집안의 가장은 지배자인 천황과 백성을 매개하는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은 가장의 절대적인 가부장권에 따라야 하며 부모의 마음으로써 자식인 臣民을 돌보는 천황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일제는 근대 시민 도덕을 가르치는 서적을 금지하고 절대적 가르침으로서 소학교의 修身교육을 비롯하여 각 교과에서 <교육칙어>의 취지를 철저하게 가르쳐 천황제 사상을 주입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일제가 편찬한 수신교과서를 살펴보면 첫째, 나는 부모로부터 나왔고 부모는 선조로부터 나왔으며 天皇이 최고의 선조이다. 따라서 부모의 선조는 神으로 부모의 신분은 존귀하며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의 명령에 절대 복종 할의무가 있다. 둘째, 친자관계를 천황과 인민의 관계에 유추하여 천황은 부모로서의 마음(親心)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천황과 臣民의 관계를 본가-분가의 동족집단 관계라는 의제(擬制)를 통해 국민의 종가인 천황에 대한 충성 의무를 강조 하고 있다. 천황은 신의 자손이며, 臣民도 같은 天神에서 나왔으므로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제의 논리로부터 군신의 관계를 강조하고, 이를 더욱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일제가 생각해 낸 것이 가족국가론이었다. 집에 가장이 있고 가족들이 가부장을 중심으로 뭉치듯이, 국가에도 가장(천황)이 있고 인민(가족)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결속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군신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설정해 놓았던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듯이 교과서에서는 “진무천황이 즉위 하신 이래 …(생략)… 그동안 우리나라는 황실을 중심으로 전 국민이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 되어 번영하였습니다.” 라는 표현이 등장했던 것이다.(오주록, 33-3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지정부는 태생부터 존왕 즉, 왕정복고에 있었던 천황을 신격화한 7세기 古代 천황제로 후퇴한 것이다. 그리하여 記, 紀 신화는 근대국민국가의 國體가 되었고 자국민은 물론 조선인들까지 신화에 대한 믿음과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일본의 신민으로 만들어 영구 식민지화 정책을 위하여 어떻게 해서든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뿌리임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동화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이때 신화를 이용하였는데, 매우 사상적으로 체계화시켜 교육시켰음을 알 수 있다. 메이지정부의 國體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본이 얼마나 신성한 나라이며 그곳을 누가 통치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자나기, 이자나미에 의한 국토창생 신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탄생 신화, 오쿠니누시의 국토양도 신화, 천황의 선조이자 태양신의 후손인 니니기의 천손강림 신화를 시의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들 신화를 통하여 천황은 태양의 후예이며, 만세일계라는 신성불가침의 통치자 혈통의 계승자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萬世一系란 天皇家가 일본 국토의 창생 이래 황실의 조상 태양 神인 아마테라스의 후손이 일본 열도에 강림하여 일본국을 창건한 진무(神武)로부터 대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국민들이 만세일계의 천황 혈통에 대하여 대를 이어 충성을 바쳐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기도하다 . 그러므로 국민들은 선조들이 했던 것처럼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여 충량한 신민이 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천황과 국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고안해 낸 것이 바로 가족 국가론이다. 이에 의하여 천황과 국민은 천황을 정점에 모시고 친자 관계로 구성하였다. 천황의 생일이나 개인적인 일까지도 국가의 공적인 것이 되어 祝日과 祭日 등 모두 천황가의 행사에 맞추어 졌다. 이미 천황은 신이요 국가와 같은 존재로 되어갔다.
가족 국가론에 의거하여 천황은 조선인들에게 인자한 자부의 모습과 잔인한 엄부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즉, <1-5-4>의 야마토다케루의 신화에서 보듯이 천황에게 반발하면 무력으로 진압하고, 그와 반대로 순종하면 <1-5-23> 닌도쿠 (仁德)天皇과 <1-8-3> 아마노히보코(天日倉) 신화처럼 은덕을 베푼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식민지 조선인들로 하여금 천황제의 가족 국가론이라는 이념을 교육시켜 군신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져 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인들은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강제로 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또 전쟁을 수행하고 영토 확장의 일로에 있었을 때도 일본은 신화를 이용했다. 영토 확장은 태초에 이자나기, 이자나미라는 두 명의 신이 일본을 만들었듯이, 그것은 새로운 국토창생이며 또 진무(神武)가 일본을 건국할 때 부르짖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실천이라고 했다. 태평양전쟁 동안 일본의 해외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용된 표어로 일본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통일하겠다는 공상을 아동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전쟁은 침략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며, 천황의 은덕은 세계 만민들과 나누는 것이 된다. 이러한 예로써 조선인으로써는 굴욕적인 신화인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담이 사용되었다. 원래 記, 紀 에 수록된 내용을 수정하여 삼한의 정국 불안으로 인하여 고초를 당하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진출한 평화군으로 바꾸었다.(오주록, 49-50쪽)
이러한 상속의 서사는 당대 가부장제의 제도적 강화책이었던 호적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식민말기 가부장제의 강화는 당대 일본 제국의 핵심사상이었던 ‘국체’ 사상과 연관하여 이루어진다. 일본 제국의 국체론은 “국가 주권은 만세일계의 황위에 있으며 국가는 민중을 통합하여 성립된다. 국민은 국가의 분자로서 국가적 생존목적을 위해 공헌하는 (…) 국가적 관념을 계발한다”라는 요지로 요약되는데, 이에서 보듯 국체 사상이란 천황을 국민 위에 군림하는 국가의 아버지로 형상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1937년부터 문부성에 의해 발간 배포된 ‘국체의 본의’는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은 ‘신성한 기원을 지닌 만세일계의 천황제를 모태로 하는 가족국가’이며 여기서 ‘충과 효는 완전히 일치하는 가치’가 된다. 국체 사상의 전면화 하에서, 호적제와 같은 제도는 모든 국민을 가족 공동체에 포섭하는 국체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실현시켜 나갔다. 특히 호적제는 가부장제 강화의 대표적인 제도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의 가족관을 반영한 제도이다. 이것은 “가(家)는 계속 존속해야 하는 가족 단체로, 가(家)가 있다면 가족이 있고 그 중에는 가족 단체의 지배자의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 지배자인 호주는 최존장이고 남자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말하자면 호적제는 호주를 중심으로 가부장의 권위를 인정하고 상속을 법률 관계로써 정리한 제도였다. 여기서 장자의 위치와 가부장의 허락은 상속의 최 중요 요소로 부각된다.
비단 ‘대흥콘체른’뿐 아니라, ‘사랑의 수족관’ 내 등장하는 가정 대개가 공통적으로 장자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심인물들의 가정들이 대개 장자들의 위치를 부재 상태로 하고 있는 것은, 곧 각 가정의 모습을 유비적으로 연결시키며, ‘대흥콘체른’과의 유사성을 환기시킨다. 예컨대 김광호의 집안은 맏형 김광준이 소설 서두에서 죽음을 맞음으로써 장자를 잃는다. 그런데 형의 죽음이 가져온 슬픔이 지난 지점에서, 김광호가 고민하는 것은 유산 상속의 문제이다. 이것은 장자의 부재와 상속이라는 사랑의 수족관의 근본 문제를 소설의 서두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한편 김광호의 백부 김치선 장로 역시 아들이 없어 동생 광신을 양자로 들일 것을 요청한다. 백부는 김광호에게 “급히 서두는 것은 아니나 집이 외로우니 양자로 정한 광신이를 보내도록 하라는 의견”을 보낸다. 그런데 광신은 “기독교의 장로인 기의 미테서 구속된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항의 태도”를 내비친다. 이는 문학가를 지망하는 광신과 기독교적 윤리를 요구하는 백부 사이의 갈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질서에 편입․구속되기를 거부하는 아들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다. 김광호의 백부가 이신국과 안면이 있는 사이이며, 김광호에 대한 이신국의 후원이 이러한 안면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두 ‘가장’ 사이의 관계성은 더욱 밀접해진다. 두 집안이 구성하는 양자-사위의 상속 구조는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소설 내 등장인물들의 가정적 구속성을 강화한다.(최승태, 61-62쪽)
아시아주의 체계화를 시도한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이 영어로 아시아는 하나다 라고 선언한 것은 1902년(명치 35년)이었다. 서양의 미술을 연구하고, 서양의 언어에 능통한 그는 구미 제국주의의 희생으로서 아시아를 인식하고, 궁극․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넓은 사랑의 전파 가 아시아 전토를 감싸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유럽문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명이 있다고 믿었던 것은 당시의 일본 사상의 흐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아시아가 그 역사적 유산에 눈을 떠 인도, 중국, 일본을 관통하는 美의 전통을 자각할 때 아시아인은 서양사상의 영향으로 인한 혼미에서 벗어나 또다시 힘있게 세계 문명에 공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일본의 민간에 고조되었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외교관념의 無思想性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일본의 진로에 확고한 사상적 기반을 찾고자 하는 심정의 표현이었다. 아시아주의적 세계관으로 파악한 서양 또는 동양 은 자연히 현실의 서양 및 동양과는 다른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문화적 대상으로서의 東이나 西는 영구불변으로 존재할 리가 없고, 실제로 서양의 사상상태나 생활태도도 19세기 후반에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그대로 이다. 오히려 아시아주의자가 가진 서양 이나 동양 의 이미지는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한 것이며, 그들 스스로 이렇다고 믿었던 서양혹은 이렇다고 믿고 싶었던 서양 이었다.
즉 주관적인 산물이며 실제의 서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시아를 서양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혹은 일본을 아시아의 맹주로 하려는 운동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아시아주의는 일본인에게 다분히 매력을 느끼게 하는 바가 있었다. 이 현상은 당시의 일본의 사상적 상황과 사회문제를 잘 반영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대로 동양과 서양의 상호관계를 반영하고 있었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종종 아시아적 색채를 띠고 있었던 것은 일본인이 국제관계에 있어서 무언가 이상적인 것, 사상적으로 선명한 곳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대립이 보다 선명한 형태로 표현된 것을 말한다.(양구하, 76-77쪽)
제Ⅳ기 수신서에는 대동아공영권에 근거한 사회나 국가, 황실과 관련된 국체사상이 두드러져 나타났다. 그러나 제Ⅴ기 수신서는 소학교 개정으로 인해 현저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아동의 자발적인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해 감정이나 정서에 호소한 문학적 표현의 경향이었다. 그리고 수신서는 ‘팔굉일우’의 국체사상과 전시체제에 합당한 의식의 강조와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에 있어서도 이전 시기보다 강조되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군대교과서적 특징을 띠었다.
사카모토 이치로(坂本一郞)는, “국민학교가 교육의 전반에 걸쳐 황국의 도를 수련시키기 위한 황민연성의 도장이었다. 고래로 충량한 황민은 대부분 일본의 도장에서 연성되었다. 학교라는 교육형태가 수입된 것은 최근세에 속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기숙사(塾)나 도장이 국민의 심신단련 장소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아울러 “근대에 이르러 국민학교가 황국의 도를 수련하는 도장이 되었으며,국민이 이 도장에서 황운부익을 위한 신민의 절제를 배우고, 황국의 영원한 번영을 양 어깨에 짊어질 체력과 능력을 수련하였다. 이 길의 도장, 국어의 도장, 합리창조력의 수련장, 심신연마의 도장, 과학적 기능의 도장, 직능수련의 도장이어야만 했다.”라며, 당시 황국민의 연성과 관련된 인식이 국민학교 교육을 통해 총체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이병담 1, 139-140쪽)
일본의 가족제도에서 집(家)은 사회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자 가장 중요한 위치로 나타난다. 일본에서의 집은 에도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뿌리를 이루는 토대이자 혈연중심의 단위였고, 사회공동체의 기본 토대였다. 수신서에서는 가족중심의 이에제도로부터 시작하여 천황과 신민의 관계가 가족 국가관이라는 사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가족제도에서 국가관으로의 이행에는 소단위의 이에(家)라는 물질적․정신적 토대위에 가족국가관이라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덮어씌움으로써 봉건적인 근대천황제의 통치제제 공고화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견고함이 놓여 있다. 이 혈연중심의 가족단위가 수신서에서는 천황과 신민,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JⅣ-(5)-11> 「진취의 기상」을 보면, 같은 혈족간의 경우에도 분가한 집은 본가와 항상 결속하지 않으면 가문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것으로 나타난다.(이병담 1, 182-183쪽)
여섯째, 두 수신서에서는 아동을 국가 속에서만 의미 있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다. 두 수신서에 나타난 국가주의 정신의 고취는 항상 국가의 우월성, 즉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등을 모두 전승사관에 입각하여 기술함으로써 아동의 국가주의 정신을 더욱 부추긴 것이었다. 이러한 국가주의 정신의 고양에 따라 아동의 놀이나 활동, 학습 등 모든 행위들은 이 전쟁의 틀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정서와 행위만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수신내용은 제Ⅳ․Ⅴ기 수신서의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수신서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왜곡된 전쟁관련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침략전쟁의 목표 강화와 전투적인 인간교육으로 일관하였다. 이것은 한편 1941년 태평양전쟁과 더불어 파쇼적인 전쟁의 기술로 인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군복을 입은 천황의 사진이나 전쟁 삽화,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군신으로 기재한 「군신의 모습」, 「일본은 신국」, 「청소년학도의 사열」, 「국민개병」, 「전승축하의 날」 등의 극단적인 파쇼적 형태들은 아동의 신체와 정신을 완전히 파쇼적 행위만 연출하도록 자동화시켜 갔다. 이렇게 탄생된 일본 아동의 국가주의적 사고는 오늘날 신보수주의자들의 사고와 상당부분 일치되는 경향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조선의 아동은 전승사관과 식민사관이라는 두 요소 속에서 분열과 혼란을 겪었다. 그들은 일제의 전승사관적 교과내용을 통해 일본의 우월성을 주입받았으며, 더불어 민족주의적인 패배관과 열등적인 민족성도 동시에 자각해야만 했기에 식민지 아동의 정신과 신체는 그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더구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병참기지의 역할과 함께 전쟁수행에 필요한 교육과 일본 민족주의와 연계된 황민화 연성은 내선일체 등의 획일적인 교육으로 이어져 단일한 사고와 행동으로 이어가게 하였다. 이것이 태평양전쟁이후에는 국민학교를 통한 전시체제 강화에 따라 산업과 전쟁에 필요한 파쇼적 인간양성으로 나타났다.(이병담 1, 335-336쪽)
조선총독부의 국민육성은 일제의 통치와 규율에 따른 植民性이 그 바탕에 놓여 있었다. 식민성은 식민지 조선의 봉건주의와 폐쇄주의, 그리고 왕도주의적 경향을 가진 지배구조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식민성을 유발시키기 위해 일제는 모든 강제적인 규율과 통제로써 순종성을 유발시켰고, 식민성이나 국민성으로서 각인될 수 있는 사고와 행위가 더욱 고착화되었다. 이것이 전시체제에는 국민총력운동으로 이어져 근로착취와 수탈, 산업활동에 필요한 강인한 체력단련, 징병제실시에 필요한 건강과 신체훈련 등 근로주의나 성실․책임․순종․복종주의라는 실천적 행동주의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통제는 오히려 종종 반항적인 태도와 방관주의를 불러일으키며, 절망주의와 비관주의, 열등주의와 청결주의 등 민족적열등감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사회․국가관을 통한 아동의 육성은 봉건주의와 가족주의, 민족주의, 침략주의, 식민주의 등이 다수 나타났다. 특히 수신서의 기술은 『국사』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침략(전승)주의와 식민주의가 크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식민지 아동에게는 민족적 열등감과 패배감을 동시에 수반하였다.
이러한 사유형식과 정치적인 형태에 나타난 개인이나 사회, 국가관은 규율과 통제의 시스템에 따른 자동화된 인간 육성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교육은 일본아동이나 식민지 아동의 단순하고 획일적인 사고와 행동을 유발시켰으며, 그것은 본래부터 국가가 의도하는 근대인, 국민성이었다. 이처럼 근대일본이나 근대조선의 아동 탄생과 수신교육의 의도는 일방적인 왜곡된 국민성과 식민성의 유도였다. 더구나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거나 문명화, 발전시켰다고 호도하고 미화하는 형태로 위장한 근대적 교육의 실태는 자신들의 통제와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들은 근대를 표방한 반근대적인 교육을 통해 식민지 아동의 신체와 정신을 획일적이고 맹목적인 지배체제의 논리로 이끌었으며,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 수신교육은 식민지 노예를 양산하기 위한 노예교육이었고 노예도덕이었다.
지금까지 일본수신서와 조선총독부수신서를 비교 고찰한 결과, 근대일본이 근대국가를 지향한 이래 서구의 근대와 같은 소박한 근대인의 표상이 황국신민이라는 파쇼적 국민성으로의 일탈과 변화를 겪었다. 이것은 세계가 문명과 근대화를 추구한 역사 이래 일찍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일탈적인 파쇼적 통제와 규율을 통해 생산된 국민이나 국민성 및 국가는 메이지․다이쇼․쇼와라는 패전에 이르기까지 거의 3세대로 이어지면서 습속이나 관습화되었고, 이것이 보다 체계적인 형태를 띠면서 민족적, 국가적인 특성으로까지 고착화되었다. 오늘날 일본의 신보수주의와 신군국주의의 재현 조짐도 당시 국민성의 주형과 상당부분 일치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일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식민지배를 받은 우리의 일상이나 국가 간의 문제에서도 파쇼적 현상들이 생활세계속에 묻어 있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일제의 무단정치나 동화정책을 통해 탄생된 식민지 아동에게 보이는 국민성의 귀결은 수신교과서를 보았듯이 단순성과 획일성, 보수성 등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의 학교교육이나 생활세계의 현장에서 아직도 주입식이나 획일적인 줄세우기, 보수적인 사고, 맹목적내셔널리즘 등이 존재하는 이면에는 뿌리깊이 박혀있는 일제의 잔재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병담 1 , 337-338쪽)
1930년대 이후 침략전쟁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한국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로부터 전쟁에 대한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것을 내세웠다. 이는 일본의 한국 통치에 일관된 방침이었던 ‘동화주의’를 보다 극대화한 것으로 1936년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南次郞)에 의해 제창되었다. 그는 한국 땅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과는 “모습도 마음도 피도, 살도 전부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며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다. 조선을 식민지시 하는 자가 있으면 두들겨 패라”고 잘라 말했다. 그의 내선일체론은 조선 사람들에게 ‘차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굴절된 동기를 자극했다. 미나미는 이러한 동기를 이용하여 한국인들에게 완전한 동화를 강요하였지만 자신은 자신이 강요한 논리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발언은 두 가지 성과를 위한 것이었다. 그 첫째가 천황의 조선방문이며 둘째는 조선에서의 징병제도의 실행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조선이 일본화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나미는 내선일체라는 논리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고 강변한 것이다. 조선인에게 역사적 공감이 전무한 일본의 ‘국체’에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라는 것은 일본인 자신도 믿기 어려운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요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 민중의 절대적 충성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충성심의 보증만이 한국인의 손에 일본을 위한 총을 지워 줄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만 전쟁의 성공적 수행이 가능하다는 현실적 인식 때문이었다. 따라서 현실과 당위적 요청 사이의 괴리가 절망적이게 보이면 보일수록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라는 이데올로기적 강제의 강도를 높여갈 수밖에 없었다.(이화정, 113-114쪽)
한편으로는 하부의 의사를 상부에 전달한다는 역할도 있었다. 하부의 연맹원들의 상황을 『총동원』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면 때문에 『총동원』은 연맹원 하부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정동연맹의 하부 조직을 파악하고 이들의 성향을 분석하여 전략적으로 대치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정동연맹은 “위로는 조선연맹에서 아래로는 애국반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통제하고자 했으며 “애국반이라는 것은 조선 연맹의 특색”으로 조선의 정동운동이 일본에 비해 그 이상의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결국 병참기지화 정책에 맞추어 일제는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과 더불어 정신적 총동원 운동을 벌이기에 이른다. 정신 동원을 강조하여 결국 물자 총동원까지 이루어내려는 전략이었다. 정동연맹의 하부조직들의 정신단결을 이루어 내는 것이 관건이 된 것이다. 따라서 『총동원』이 설정하고 있는 하부연맹원들과 이 잡지를 구독할 독자들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잡지 『총동원』이 설정한 독자들, 특히 그들이 호명하고자 원했던 정동연맹의 하부 구조는 누구였을까. 『총동원』은 창간호에서부터 “家庭”을 강조하고 있다. 高橋濱吉은 「家政と國民精神總動員運動」에서 “八紘一宇라는 말, 東亞 新秩序建設이라는 말도, 그 基調는 국민각자의 가정에 있다”고 강조한다. 즉 가정은 국가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또한 “국가의 기조는 가정에 있지만, 가정의 중심은 主婦에 있다”고 주장한다.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물자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제일선에 세운 무기를 가지고 전투를 하고 있는 장병뿐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총동원』 잡지를 통해 호명될 수 있는 대상은 전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노약자나 여성이 대부분일 것이다. 또한 일제가 파악하고 있는 전쟁은, 총을 들고 싸우는 최전선의 싸움 뿐만 아니라 국내 물자, 군수 물자의 조달 역시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주부의 총후봉공적 역할은 강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전은경, 363-364쪽)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을 시작으로 1932년 상해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의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전쟁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식민지 한국은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일제는 한국의 물자와 인력의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존의 민족말살의‘동화정책’(同化政策)을 강화한 이른바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을 추진했다. 이 ‘황민화정책’의 배경에는 소위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의 논리가 있었는데 일제는 이 논리를 민족말살적 ‘황민화’와 전쟁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한국인에 대한 ‘황민화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면1신사(一面一神祠)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매월 6일을 ‘애국일’로 지정하여 신사참배․국방헌금․국기게양․황거요배․국가제창․천황폐하 만세 삼창 등을 실시하도록 하였다.(손승호, 16-17쪽)
1940년대를 전후하여 일제는 대중들을 최대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인은 ‘내선일체’와 ‘총후봉공’이라는 이름하에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크게 두드러진 정책이 ‘창씨개명’이라 할 수 있다.‘창씨개명’이 일제말의 모든 정책의 전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창씨개명’으로부터 나온 여러 정책들이 결국에는 하나로 엮어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조선인 남성들을 호명하고 ‘내선일체’라는 이름하에 조선인들을 징병하고 착취하려고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면에는 조선인 여성을 향해 호명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모든 파시즘은 대중의 심리를 파고드는 전략을 쓴다. 일제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강압적인 파시즘’, ‘억압하는 파시즘’ 대신에 그들의 전략은 ‘유혹’이었다. 특히 여성을 향한 전략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전략을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내세운 ‘모성’은 결국 ‘유혹하는 파시즘’의 한 단면이었다. 또한 그 유혹은 ‘이야기’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스스로 가문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여성의 서사, 남녀의 ‘연애’에 대한 서사,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서사들이 ‘유혹하는 서사’로 사용된다. 또한 이러한 ‘창씨개명’의 전략은 역시 ‘모성권’을 강조하고 있었다. 여성을 향한 호명은 이 ‘모성권’과 연관되었던 것이다.
사치하는 여성, 욕망하는 여성 대신에 ‘모성으로서의 여성’을 강조했다. 이‘모성에 대한 권리’는 ‘창씨개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애국반의 강화로 이어지며, 다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와 합쳐져서 그들의 남편과 아이를 전쟁터로 끌어내고자 유혹했다. 또한 총후봉공의 최고의 임무를 가진 ‘모성’으로서 여성을 호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성은 ‘욕망하고 사치하는 여성’을 벗은 채, 절제하고 희생하는 ‘모성’으로서 호명되었다. 일제는 수동적인 여성을 주체적인 여성으로 불러내었다. 그러나 그 주체적인 여성은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에 다시 강제하게 되었다. 정치화되고 강인한 여성은 오로지 ‘모성’이라는 이름하에서만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것이 일제가 내세운 ‘유혹하는 파시즘’, 정치적인 ‘모성’으로의 호명이었던 것이다.(전은경, 385-386쪽)
총력전으로 치닫던 군국적 파시즘 체제는 배제시켜야 되는 이물질과 같은 스파이가 침투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환기시켰다. 이것이 내부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선전으로 활용되고 아동소설에서 실종가족, 탐정, 미행과 납치의 경성거리 등으로 나타났다. <네거리의 순이>, <봉뚝섬>, <어머니를 찾아서>, <소년탐정단>, <백가면>에서 나타나는 ‘경성거리’는 빛과 활기가 넘치는 도회적 낭만의 공간이다. 그러나 미행과 납치, 범죄와 스파이, 탐정과 길 잃은 어린이가 헤매는 공간이기도 하다. 파시즘은 외부적으로는 팽창의 욕구를 극대화시켜 제국의 영토를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영토 확장의 방법은 전쟁으로 나타나지만, 준전시체제의 후방에서는 만주와 남방 같은 신천지를 개척하겠다는 새로운 희망과 활기로 나타났다. 만주와 남방을 신천지로 사유하는 것은 타인종을 하등한 미개인이며 문명화시킬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여 파시즘의 인종적 특성을 강화시켰다.
<백가면>에서 해양을 향한 진출의 욕망이 보이고 과학을 통한 강력한 국가건설의 열망이 보이는 것은 제국주의적 시선이 전유된 결과이다. 그러나 스파이이며 악당인 줄 알았던 백가면이 실은 실종된 아버지였다는 서사를 통해 조선의 위치를 무의식중에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희생자이지만 전쟁의 공격대상은 아니었고 전승을 부르짖는 제국의 신민이지만 직접적으로 전투현장에 참여하지 않는 위치에서 실종된 아버지는 곧 스파이로 위장된 구원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백두산의 보굴>은 백두산을 민족의 영지라는 의미 외에 보물이 무한정 매장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미개척지로서의 이미지를 보여 준다. 이것은 인도양과 같은 남방을 미개한 곳으로 보고 개척의 대상, 진출의 대상으로 보는 제국주의의 시선이 투영된 결과이다.
<마적굴의 조선소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만주라는 공간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를 넘어 사회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신천지요, 새로운 기운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러나 신천지의 새로운 기운은 동시에 납치의 위험이 도사리는 살벌한 공간이 되고 만다. 제국이 만주의 신경을 신천지로, 새 국가 건설의 장으로 선전하였지만 만주로 떠난 유민들에게는 처절한 생존의 현장이었으며 나라 잃은 설움을 감내해야 하는 곳이었다.(안미란, 113쪽)
근대 국가에서 국민의 신체는 국가 권력의 목적에 맞게끔 만들어져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일본에서 이러한 의무는 메이지시기에 시작되었지만 가장 극대화되고 강제된 시기가 바로 총동원체제 시기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국민의 신체와 체력에 대한 국가의 통제 및 동원의 측면을 1924년부터 1943년까지 시행된 종합적 체육경기였던 메이지 신궁대회를 통해 살펴보았다.
일본에 근대적인 체육이 도입된 것은 메이지 시기였고, 이 시기에는 근대국민국가 창설을 위해 ‘근대적 신체’를 내세우며 규율과 통제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다이쇼 시기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중들은 체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체육 정책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와 메이지 신궁 건설이 맞물리면서 메이지신궁대회가 창설되었다. 초기 신궁대회에서 기본적인 대회의 틀이 완성되었으며 메이지 천황의 성덕을 경앙하고, 국민의 신체를 단련하며 정신을 진작시키며 체육 성과를 봉납하는 봉납주의, 천황제 이데올로기 강화 및 국민통합의 목표가 강하게 나타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만주사변 및 국제연맹 탈퇴 등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에 힘을 기울이게 되자 신궁대회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장기화되자 정부에서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국민의 모든 활동에서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전쟁을 통해 일본 사회가 총동원체제로 전환된 것이다. 특히 모든 국민이 인적 자원으로 여겨지면서 병력 및 노동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기초적 체력 문제가 정부 차원에서 대두되기 시작했다. 징병검사를 기준으로 했을 때, 국민 체력은 점차 저하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병력 문제에 예민했던 육군성에서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새로운 성의 설치를 제안했다. 따라서 1938년에 후생성이 신설되었고, 국민의 신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후생성에서는 체력장검정과 국민체력법 등을 실시하여 국민의 체력을 전국적으로 조사하고 일정 수준의 체력을 유지하도록 했다.(함예제, 40쪽)
‘상징’이란 무엇인가. ‘상징’이란 「사물을 전달하는 매개적 작용을 하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백과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국헌법에 명기한 상징천황제의 성격과 사전적 의미를 바탕으로 일본의 상징 천황제를 재해석해 보기로 하자. 일본국 헌법은 제1조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이 지위는 주권을 지니고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라고 천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기술에 따르면 천황이란 「일본국」을 상징하고 있으며 동시에 「일본 국민의 통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상징’이 지니고 있는 사전적 의미에 근거해서 해석을 덧붙이면 일본의 천황은 「일본국의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임과 동시에 「일본국민의 통합을 전달」하는 매개체적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황=일본>이라는 극단적인 해석의 등식이 성립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때문에 천황을 일본의 아이덴티티라고 해석하는 것에도 납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원래 <신화>에는 신화를 매개로 하는 집단의 정체성이 담겨져 있어, <신화>를 통해 해당 공동체의 아이덴티티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이점에서 생각해 보면 <일본신화>를 계승하고 있는 천황이 일본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하는 논리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점, 즉 일본의 천황이 <신화>적 정체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논리가 근현대 일본의 역사 속에서 ‘상징천황제’에 내재한 문제의 소재가 된다는 것이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물론 정체성을 정의하기에는 <정체성>이 너무나 다의적 개념을 지닌 용어라 난해 할 수 있지만 지극히 단순화하여 풀이한다면, 개인의 정체성이‘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요소’로 이해할 수 있으며, 집단의 정체성은‘타국과의 관계 설정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주의해야 할부분일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점 때문에 현대일본의‘상징천황제’는‘일본국, 일본국민의 기억을 담보하는 장치물’로서 그 기능을 수행할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손정권, 314-315쪽) |
㈐ 종교적 성격
실제로 ‘천황제’에는 부인할 수 없는 종교성이 있다. 메이지정부는 1889년의 대일본제국헌법의 제1조와 제3조에서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통치와 천황의 신성불가침을 명시하면서 메이지정부의 종교성을 표명했다. 『신사본의(神社本義)』에는 “대일본 제국은 황공하옵게도 황조인 천조대신이 개국한 나라로서 그 신의 후예이신 만세일계의 천황 폐하옵서 황조의 신칙에 따라 면면한 과거 이래 무궁히 통치하신다. 이것이 세계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의 국체이다”라고 일본의 통치 근간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패전전까지 일본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제정일치’의 원칙 아래 성립하고 있었고, 일제의 천황은 ‘종교국가의 신성의 정점’으로서 숭배의 대상인 현인신(現人神)의 위치를 가졌다.(손승호, 11쪽)
메이지헌법은 근대국가의 헌법으로는 유례없을 정도로 강한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종교국가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언한 문서였다. 지고의 종교적 권위를 지닌 천황이 정한 흠정헌법이며, ‘신민’(臣民)에 ‘하사’된 메이지헌법의 모두에는 황실전범과 메이지헌법의 제정을 황조(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천황 조상), 황종(역대 천황), 황고(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의 신령에 고하는 내용의 종교색이 짙은 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신민’의 의무로 제20조와 제21조에서 병역과 납세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 제28조에서 ‘신민’의 권리의 하나로 ‘신교(信教)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한 종교색채를 띤 메이지헌법이 규정한 ‘신교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종교의 허용이며, 종교국가인 대일본제국은 여러 종교의 우열을 판정하는 입장에서 종교탄압을 반복하는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성립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통해 국민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국체와 부합되지 않은 서양의 인권 및 자유사상의 진출을 막고, 다가오는 대외전쟁에 대비할 방침을 정했다. 이미 1870년대 후반에 계몽사상, 자유민권사상의 고양에 직면하여 위기감이 고조된 정부 내에서는 천황을 통한 국민사상의 통일을 기도하며, 국민 교육서를 잇달아 만들어 국민들이 읽도록 했다. 하지만 보급은 쉽지 않았다.(김순임, 87쪽)
근대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일본 고유의 민속종교인 신도(神道)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이다. 신도에는 천황이 신과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인 것으로 천황도 숭배의 대상이 된다. 신도의 천황숭배사상은 막부(幕府)말기에 국학자인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가 주장한 존왕복고(尊皇復古)사상의 배경이 된다. 이후 존왕복고사상은 개국을 실시하고 서구와 불리한 조약을 체결하는 막부를 타도하고자 했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무사들에게 수용되면서 존왕양이(尊皇攘夷)사상이 되었다. 존왕양이 사상을 주장한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무사들은 존왕양이파를 구성했다. 존왕양이파의 관심은 일본의 내적 강화에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내적 강화를 위해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가 수립돼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 방법이 서구세력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1863년에 사쓰에이(薩英) 전쟁, 1863년과 1864년에 일어난 시모노세키(下関)전쟁에서 서구에 패배하자 그들은 존왕양이사상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경험을 통해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서구적 근대국가를 수립함으로써 서구에 저항할 수 있는 강한 국가차제를 형성하고자 했다. 결국 1867년에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로 이행되었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정부는 부국강병(富国強兵)과 탈아입구(脱亜入欧)라는 표어를 내세우면서 서구적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서구적 근대화에서 기독교를 배제했으며 기독교금교령을 강화했다, 일본정부가 기독교를 배제하려 한 배경에는 쇄국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겪은 기독교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일본정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하기 이전에 천주교가 일본에 전래되었다. 천주교의 전래로 서구와의 무역이 활발해지고, 무역에 관심을 보인 대명(大名)과 영주(領主)들은 개종을 조건으로 선교사에게 선박과의 연결을 요청했다. 당시 일부 대명과 영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무역을 목적으로 개종을 했으며, 그 영지에 거주하는 평민들을 따라 개종을 했다. 이것을 계기로 천주교인의 수는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 상황을 정치적 위협으로 받아들였으며, 바테렌(伴天連) 추방령을 공포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도 천주교 탄압정책을 실시했다. 1637년 천주교도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으로 천주교 탄압은 더 강화되었고,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쇄국정책을 실시했다.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은 개국 후에 전래된 개신교에도 적용이 되었다.
일본정부는 신도를 국가신도와 교파신도로 분리하고, 국가신도를 비종교적 국가기관으로 타 종교를 종속시킬 수 있는 초종교(超宗教)로 규정했다. 이 규정은 제국헌법에서 신교(信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도 일본정부가 기독교에게 제한을 줄 수 있는 합법적 장치가 되었다.(강이레, 79-80쪽)
조선교육령에 입각한 식민지 교육은 당시대의 조선인들에게 일본제국의 ‘충량한 황국신민의 육성’이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국민의식을 강요했다. 그러한 교육의 핵심적인 것은 천황사상의 교화를 통하여 황국신민으로 육성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황민화 교육정책을 통해 조선인 학생들의 인격을 말살시키고 일본 천황에 대한 희생과 봉사만을 강요한 정책을 강행했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조선을 병참기지로 사용하면서 황국신민화 교육을 전보다 더 심하게 강요하였으며, 한국민족을 완벽하게 일본인화하기 위한 제반 교육정책을 시작하였다.
일제는 수신․역사․지리․음악교육을 통해 천황에 대한 인식을 표출시켰다. 보통학교의 교과 교수요지를 살펴보면 매 시기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지배에 대한 정당성과 의도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그리고 천황에 대한 서술도 강조되고 있다. 또한 수업시수에 있어서도 차이를 들 수 있다. 천황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이 들어있는 수신교과는 타 교과보다 더 많은 시수를 배정하여 학생들에게 천황 사상을 주입시켜 온 것을 볼 수 있다. 지리․역사교과에서는 일본의 국세를 과장하고 일본의 우월성을 선전하며,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의 정당성을 확립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음악교육도 보통학교 규정에서부터 ‘一視同仁’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 문화를 말살하고 한국인의 일본인화하려는 정책을 세웠다. 조선 아동들에게 일본의 고유한 음악성을 주입시켜 황국신민다운 인격의 양성에 주안점을 두고 황민화 음악교육을 실시하였다. 제 4차 조선교육령 시기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천황사상을 부각시키기 위해‘의식창가’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군국주의적인 음악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러한 음악교육은 국민정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황국신민의 연성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고유한 전통의식을 흐리게 만들어 주도록 한 것이었다.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강요는 각 교과뿐만 아니라 학교 행사,황국신민서사의 암송, 기미가요,축제일 및 기념일 등에서도 보여진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교화 교육은 기념일과 御眞影․勅語奉讀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제반 교육은 천황의 존엄성을 높이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교육현장에서까지 이루어진 황국신민화 교육은 천황을 우상화하려는 작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배주원, 60-61쪽)
따라서 조선총독부와 한국장로교회의 갈등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숭배의 대상이 다른 두 ‘종교신앙체계’는 공존할 수가 없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존속을 위해 일제의 의도대로 성경․찬송․신앙고백․신앙활동까지 수정하게 되었고 이는 조선총독부와 한국장로교회의 갈등이 ‘교교갈등’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타종교와 교파들이 차례로 굴복하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저항하였다. 한국장로교회는 일제가 인정한 가장 골치 아픈 배일세력였다. 그러나 일제의 ‘종교단체법안’제정 움직임과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강요에 대해서 격렬한 저항을 보이던 한국장로교회는 1938년 9월 10일에 이루어진 신사참배결의를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부일세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장로교회의 모든 공식적 행사에 신사참배가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교계 지도자들이 신도침례를 받기도 하였고, 중앙상치위원회의 결의에서 성지로 표현된 이세신궁을 찾아 참배하였다. 또한 총회의 신사참배가결에 불응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파면․제명하였다. 한국장로교회의 친일행각은 크게 ‘종교보국’과 ‘일본적기독교 확립’ 두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종교보국과 관련하여서 살펴보자면 한국장로교회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과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였다. 전승축하․무운장구기도회․국방헌금․휼병금․유기헌납․시국강연․애국기(愛國機) ‘조선장로호’ 헌납․폐품회수․근로봉사․징병제감사대회 등은 모두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고 천황의 신민이 위한 한국장로교회의 노력이었다. 침략전쟁 지원을 위한 모금활동인 국방헌금은 교회의 부동산까지 매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1943년 5월 5일 설립된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실천요목’ 제1항은 “대동아전쟁 목적 완수에 협력함과 동시에 사상의 완벽을 기할 것”에 있었다. 한국장로교회의 종교보국 노력은 ‘이만하면’이라는 만족감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제가 주장한 ‘일본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도적, 군국주의적, 천황숭배적, 침략주의적인 기독교의 근본정신과 대치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일본적 기독교’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결국 한국장로교회의 ‘일본적 기독교 확립’은 기독교 본질의 왜곡을 의미했다. 1939년‘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의 상치위원회가 발표한 ‘장로회 지도요강’은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과 헌법․교리․교법․의식․성서․찬송가를 순정 일본적으로 수정할 것을 실천방책으로 규정하였다. 이 실천방책들은 대부분 충실히 실천되었다.(손승호, 105-106쪽)
일본은 ‘민족’이라는 문제를 국가나 천황제와 결부시켜 나가는 방법을 취하고자 하였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민족이라는 개념은 19세기에 들어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천황제 질서 속에서는 입신출세․사리사욕의 싸움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또한 파벌 내지 집단의 대립․모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정점에 있는 천황의 신비성은 더욱더 강화되고, 그 절대적인 권위에 근거한 폭력이 지배의 수단으로서 발동되어야만 했다. 천황의 권위와 존엄성이 높아짐에 따라 식민지조선인이 더욱 비참한 학대를 받게 된 것도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1945년 以前의 내셔널한 것이란 국가주의적인 입장에서 권력이 자의적으로 취사 선택해서 민중에게 강제한 것이며, 그것은 민중과 민중생활의 다양성․다층성을 捨象함으로써 천황제 민족 질서의 강화에 도움을 준 것이었다. 더욱 이 그것은 획일주의적인 색채를 띠면서도 그 내용에서는 아시아 침략을 옹호하는 ‘脫亞入歐’노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구조화 되어 갔다. 1945년 以前의 내셔널한 것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서열체계를 유지․합리화하기 위해 권력에게 편리한 靜止的․고정적인 것으로서 파악되고, 초역사적인 천황․황실의 관념과 직선적으로 결부됨으로써 형식적이고 발전성이 없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황제 민족 질서는 明治維新이후 고대부터 신분제 그 자체의 원천이었던 천황제를 재생․강화하고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신격화해나감으로써 형성되어온 것이다. 즉 천황제 민족 질서는 천황․황실․華族․士族․평민․신평민이라는 서열을 ‘원형’으로 하는 것이며 과거의 신분제를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하도록 재편․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질서의 상징으로서의 천황의 권위를 절대시함과 동시에 1871년의 太政官포고에 의해 원칙적으로 폐지된 천민차별을 온존시키고 피차별 부락민을 ‘신평민’으로서 최하위에 두었다.
더구나 천황제 국가의 본질인 대외침략이 실행됨에 따라 이 천황제 민족 질서의 최하위는 타이완․조선 등 식민지 지배를 받는 민중으로 이행되어 갔다. 천황제 민족 질서에서의 ‘서열’은 동시에 ‘차별’이며, 계층서열에서 각각의 신분이 갖는 신분의식 곧 서열의식은 동시에 차별의식으로 이어졌다.
‘華’와 ‘拜外’의 원리는 천황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맨 먼저, 가장 차별당한 존재로부터 이 擬使공동체적 사회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강요당했다. 즉 ‘華’를 바탕으로 하는 ‘家族國家’의 아시아로의 확대라는 구도 속에서, 대만․조선의 민중은 二類국민으로서 천황제 민족 질서의 최하위에 편입되고, 그 차별과 통합의 장치 속에서 타이완․조선의 민중, 나아가서는 피차별 부락민, 아이누, 오키나와 주민 등이 천황제 국가의 침략의 첨병으로서 동원되었다. 또 그것을 지렛대로 모든 계층이 帝國臣民으로 단결을 꾀하게 되었다.
이처럼 明治이후 단일민족 이래는 국가관 아래 인간존재의 양상을 완전히 무시하고 아이누․오키나와인․대만인․조선인 등을 천황제 민족 질서의 하위에 편입해간 것이다. 또한 그 근거로 삼은 것이 날조된 ‘同祖同根論’이었다.(배주원, 6-7쪽)
일본의 기독교도는 전통적으로 천황제와의 대결을 회피하고, 신앙과 천황제를 그들의 의식 속에 공존시켜왔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 수용기에 기독교회를 보호하려는 의도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일본 기독교도의 상당수가 사족 계층 출신이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전시중 일본 기독교가 천황제 국체 또는 국수주의와 타협하게 되는 배경에 무사도와 그리스도교의 접목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대다수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의 ‘절대적 부정’의 시점에 의해 스스로의 애국심을 상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에 의해 새로운 근대국가 즉 천황제 국체에 충성을 다하고 체득한 신문명으로 국민을 교화시키는 지도자로 변신하려 했던 것이다(土肥昭夫 1987, 156).
1939년 종교단체법 공포 후 일본 기독교는 1940년 10월 24일 전국기독신도대회를 열고 교회합동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합동에 관한 논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황기 2600년 봉축 전국기독교인 대회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해 일본 기독교는 자발적으로 대정(大政)에 익찬(翼贊)하여 진충보국의 성의를 다할 것을 다짐했다. 1941년 6월, 34개 교파가 합류한 일본기독교단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국가 제창, 궁성 요배, 전몰장병을 위한 묵도 및 천황제 국체에 대한 충성을 선서했다. 그리고 교단 총리 도미타 미츠루는 ‘신사참배는 신앙의 일이 아니다’고 하면서 국가신도의 최고 성지인 이세신궁 참배를 단행하여 천황 신앙을 수용했다. 또한 1942년 11월 개최된 일본기독교단 제1회 총회에서 도미타는 교단의 금후방향을 ‘포교정신과 전시 체제의 일원화’라고 요약하면서 천황제에 입각한 일본적 기독교의 수립과 교단의 전시 체제확립을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또한「일본기독교단이 대동아공영권에 있는 기독교도에 보내는 서한」(이하「서한」으로 약칭)을 발송하여 태평양전쟁에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이 서한은 일본기독교단이 사도 바울의 서한에 비유하여 스스로 ‘현대판 사도적 서한’으로 자부한 것으로 천황제 국체에 용해된 ‘침략 전쟁 신학’을 고취한 것이었다(森岡厳․笠原芳光 1974, 288-298; 古屋安雄․大木英夫 1989, 151-161; 양현혜 2009, 136-141).(김웅희, 99쪽)
포교규칙 제 1조에서는 “본령에서 말하는 종교는 선도, 불도, 기독교를 말한다”고 하여 이들 종교는 소위 공인교로 인정받고 총독부 학무국에서 통제하도록 하였다. 일본의 신도를 한반도에서 공식 종교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포교규칙 15조에는 “조선총독은 필요한 경우에 있어 종교 유사의 단체라고 인정한 것은 본령을 준용함이 가하다. 전항에 의해 본령을 준용할 단체는 이를 고시한다” 라 하고 있다. 1912년에는 경찰범 처벌규칙을 통해 유사종교 단속이 시작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대종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단체가 유사종교로 탄압받았던 것이다. 무속 신앙 또한 철저히 탄압받았다. 1936년에는 유사종교 해산령을 통해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국가신도의 신사는 천황가의 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신 것을 말한다. 신사참배는 천황신도를 통해 천황의 신민인 될 것을 식민지 국민에게 요구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병합 전에는 일본인들의 신사가 건립되기도 했지만, 병합 후에는 신사사원규칙에 의해 통제되고 관폐사(官縣社, 궁내성에서 공물을 봉납하던 신사)는 총독부의 보호를 받았던 것이다, 1910 년대부터는 관공립학교, 20년대는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가 강요되지만 강한 반발이 일어났으며, 30-40년대에는 우상숭배로 여기는 기독교계 학교까지 강제화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신사참배 문제가 각 종교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정책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계 또한 원종(圓宗)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을 겪기도 하면서 일제의 지배도구화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개혁을 통해 자구책 마련에 근대의 모든 노력이 경주된다.(원영상, 18-19쪽)
국체명정에 대한 교육체제의 정비는 물론 국가총동원을 위한 신체적, 물질적, 정신적 제약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1937년부터 1942년 전시체제기 통안 검거된 신종교단체만도 39개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동향은 1940 대 파시즘적 행보와 함께 1945년 전시교육에 대한 시행에 이르기까지 조선총독부가 사상의 통제를 패망할 때까지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31 년 제 6 대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케(宇桓一成)는 내선융화 정책을 통해 1932년부터 정신교화운동 1935 년부터는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신숭배의 천황숭배를 위해 신사참배를 더욱 강화했다. 1936년부터 제 7대 조선총독에 임명된 미나미 지로(南次郞) 또한 황민화 정책을 더욱 밀어붙였다. 1936 년 8월 1 일 ‘천황’의 칙령으로 앞에서 본 것처럼 조선신사제도를 전면 개정 강화하여 모든 신사(神社) 및 신사(神洞)가 사격(社格)에 따라 도부읍면으로부터 신찬폐백료공진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경성신사, 부산 용두산신사 등 일부 신사에 대해서는 사격을 높여 신사의 관공립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러한 신사의 사격문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일본국내에서는 20세기 전에 확립된 것이다. 미나미는 또한 호국신사 건립과 부여에 부여신궁 건립 계획을 확정하여 발표하고, 면단위에까지 신사를 건립하는 ‘ 1 면 1신사(神祠) 정책’을 추진하여 전국 각지에 선사의 건립, 주재소 등 관공서나 학교에 가마다나(神祠)를 설치하게 하였다.
일본 국내는 이미 1890년대에 국교신도화의 정착과 함께 타이쇼 (大正), 쇼화(昭和)기라고 하는 천황의 전제(專制)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따른 한반도의 정책은 다소 시기를 달리하기는 해도, 1930년대를 계기로 내선일체를 강조한 천황제 국가의 하부구조에 정신적으로 복속되는 정책이 개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일본국내의 논쟁과는 다르게 그러한 과정이 없이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원영상, 30-31쪽)
⑵ 친일문제
이처럼 일본에서의 비상시 전시체제는 멀게는 만주사변에서 시작되어 직접적으로는 지나사변을 계기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비상시국으로의 변화는 곧 바로 지식인들의 사상 변화로 이어지게 되는데, 위에서 살펴본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그 이름에서부터 전쟁을 위해 국민정신을 ‘총동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데에서도 당시 일제의 사상통제에 대한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논의의 공전을 피하자면, 정치적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 일본의 사상계․문화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그 시발이 시국의 변화에 따른 지식인의 자발적인 내적 변모가 아니라 체제에 의해 의도된 강제적이고 피동적인 결과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예컨대, 만주사변 이후 강화된 사상 통제로 인해 이른바 ‘다끼가와 사건’이 일어나고 마침내 1933년 6월에는 일본 공산당의 지도자인 사노 마나부(佐野學)와 나베야마 사다찌까(鍋山貞親)가 그 유명한 전향선언문을 발표하게 되는 것도 바로 국가의 사상 통제에 따른 결과인 것이다. 특히 佐野, 鍋山의 전향은 일본 사상계에 있어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서 이를 계기로 일본의 좌익 세력은 이른바 전향시대를 맞게 된다. 일본 내 좌익계 예술조직인 NAPF(1934.2 해산, 1930.11 NOPF로 개칭)의 해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 문단에도 이 여파는 그대로 전해져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는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된다. 1934년의 제2차 검거사건 이후 KAPF 조직내부에서는 자기비판 여론이 형성되고 마침내 1935년 5월에 해산함으로써 이른바 경향문학 또한 조선 문단에서 역사 뒤로 사라지게 된다. KAPF의 해산은 검거사건과 조직 내부적인 약점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지만 NAPF의 해산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을 축으로 한문학운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시대적 상황이 조직 내부에서 자기비판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시기 일본은 모든 역량이 천황과 국체(國體)를 중심으로 집중된 비상시국이었기에 그에 맞지 않는 사상은 엄격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정황에 미루어볼 때 KAPF의 해산은 정치적으로 일제의 사상 탄압이 내지(內地)뿐만 아니라 조선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는 방증(傍證)에 다름 아니다.(강유진, 12-13쪽)
일제 말기에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막론하고 명망 있는 상당수 사람들이 총독부에 끌려들어가 친일 논설을 쓰거나, 친일 단체에 관계하거나, 친일적 행위에 어쩔 수 없이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필과 조작 여부가 논란이 되지만 비타협적 민족운동 지도자들 상당수도 친일 논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송진우의 친일 논설과 단체 가입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던 친일 강연과 인터뷰에서조차 현재까지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평생의 동반자였던 김성수가 일제에 의해 비자발적이기는 하지만 친일의 길로 끌려들어갔던 것에 반해, 그는 병을 핑계로 또한 다른 이유를 들어 일제의 회유와 압력을 끝끝내 이겨냈다. 그리고 이런 철저한 자기 관리가 해방 후 송진우가 한민당의 핵심이자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주도 인물로 부각되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일제 말기 파시즘 식민지 지배체제하에서 민족주의 세력의 일부는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친일의 길을 걷기도 하였고, 일부는 파시즘 전체주의사상, 국가주의사상에 경도되어 자발적 친일에 나서기도 했다. 또 다른 일부는 경제 생활이나 사회 활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비자발적으로 끌려들어가 협력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모든 정치사회활동에서 물러나 은둔하기도 했다. 이는 사회주의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에 은둔하여 지조를 지킨 세력도 있지만, 상당수는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전향하고 변절하였다. 동아일보 관련자들도 김성수, 장덕수, 함상훈 등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이 친일협력의 길에 나서기도 했다. 그렇지만 송진우와 그의 측근들인 김병로, 김준연 등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을 비롯해 조병옥, 이인 등 상당수 민족주의자들도 지조를 지켰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해방직후 1945년 9월, 광범한 민족주의세력을 망라한 초기 한국민주당이 결성되었다.(윤덕영, 253-254쪽)
1917년 러시아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민족자결의 풍조 속에 세계의 지식인과 청년․학생들, 그리고 국내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들도 사로잡았던 ‘데모크라시’, ‘세계개조’ 등의 세계와 역사 발전에 대한 기대와 전망은 파시즘의 대두와 함께 점차 사라져갔다. 파시즘의 대두 속에 한때 세계 민주주의 발전과 세계 개조의 원조자․지원자로 인식되던 소비에트러시아는 이제 우익 전체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는 좌익 전체주의 국가로 인식되게 되었다.
시대와 역사의 흐름이 민족자결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진보적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일부 지식인, 청년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패배의식에서 절망하게 된다. 파시즘 사상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기존세계질서의 파괴와 국가 주도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1930년대 사회주의 세력의 전향과 민족주의 세력의 변절이라는 좌우를 막론한 상당수 민족운동 세력의 변화의 심연에는 1910년대 후반 이래 민족운동 세력이 신봉해온 민주주의 세계 대세와 역사발전에 대한 좌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결과 종래 민주주의 발전과 결합되어 있던 민족주의 이념과 가치 중에서는 도리어 파시즘적 국수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 이념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는 부분이 나타났으며, 민족주의 운동에서 일탈하여 일본 파시즘의 조류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식민지 조선에 한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구체적 모습과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양상이 일본 천황제와 국가주의 논리와 결합하여 더욱 광범하고 극심하게 나타났다.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에서도 역시 그 구체적 모습과 형태는 다르지만 유사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윤덕영, 218-219쪽)
이제 조선기독교의 ‘일본적 전향’에 외부적 걸림돌은 제거된 것이다. 일제가 의도하는 ‘국체에 적합한 기독교’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1936년 감리교와 가톨릭이 일제의 입장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1938년 9월의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었다. 이에 일제는 ‘종교단체법’을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예배순서에까지 이른바 '애국적 의식'을 넣도록 강요하는 한편, 예배당에도 ‘가미다나’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러한 일제의 신사정책의 강요는 기독교의 사상과 가치 교리체계 등을 근본부터 부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인으로서 신앙 양심의 변절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결과적으로 부정적 자기인식을 세뇌시켜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심대한 왜곡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일제의 신사정책을 수용했다는 것은 종교적 변절과 더불어 그 행위가 일제에 대한 투항과 친일을 약속하는 상징적 행위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기독교가 신사참배를 수용하게 되자 일제는 1942년 3월 각 교파를 통합한다는 미명하에 ‘조선혁신교단’을 조직했다. 이어 모세오경과 요한계시록을 말살시키고 나아가 4복음 이외의 신구약성서 전부를 금지하고 찬송가도 제한했다. 조선의 모든 개신교 교단은 이를 수용하였으며 교회는 전쟁의 선전과 참전을 강요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어 1943년 9월부터는 주일 오후 및 야간 집회와 수요일 밤 기도회 등을 일체 금지하였으며 일요일 아침 예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집회를 금지시키고 도시의 교회들은 무조건 폐합시켜서 단일교회로 만들고 남는 예배당은 군용으로 징발했다. 따라서 교회 안은 황국신민 서사, 황도실천, 보국 등의 게시물로 메워지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총독부의 황민화 정책에 따른 기독교 정책은 일제의 군국주의 완성에 맞추어 종교에서도 일사 분란한 절대적 충성을 이끌어내는 수순을 밟았다. 일제는 조선 통치에 큰 획을 그었던 3.1운동이 종교적 에너지의 결집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일제는
조선의 종교적 에너지를 국가신도에 집중시켜 조선인을 동화하고 일제가 수행하고자 하는 파시즘 정책의 내재적 에너지로써 이용하고자 했다. 내선일체라는 미명하에 일제는 한손에는 ‘치안유지법’을, 다른 한손에는 신사참배를 가지고 파시즘의 완성을 위한 황민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의 보전이라는 미명하에 일제의 군국주의에 적극 동참하여 민중들을 선동하였다.(이화정, 124-125쪽)
서구의 제국은 18~19세기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발흥 이후 식민자와 식민지민의 통혼을 장려하는 정책을 폐기하거나 금지하는 추세였고,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동화정책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강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적 흐름 속에서 뒤늦게 제국의 반열에 끼어든 일제는 아시아의 같은 황인종을 침략 지배하고 동화의 방침을 채택한 후, 서구와 달리 일본과 조선은 인종적․지리적․역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동화정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한반도의 고대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인과 통혼하며 완전한 일본인이 된 역사적 사례가 있는 등 내선결혼을 인종주의적으로 금지할 이유가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본인을 개량하거나 조선인을 동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일본인 위정자들에게 이러한 생각은 전시체제기 전까지 유지된 기본 이념이었다.
실제 현실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자연스럽게 통혼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대한제국은 1909년에 조선인의 처나 양자가 된 일본인도 민적에 입적시켰다. 그런데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의 시책은 오히려 1911년에 이들의 민적 입적을 정지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통혼을 금지하려 해서가 아니라, 일본과 조선 법제의 관계가 결정되지 않았고, 또 조선에서 민적법에 따라 한 혼인 신고는 일본에서 인정하지 않으므로 조선의 법제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혼인과 입양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법제의 마련을 촉구하는 한편, 1915년에는 조선인 남성이 일본인 처를 입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승인하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했다. 하지만 아직 법제의 결함은 해결되지 못했으므로 일본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내선결혼의 법률혼은 부령 제99호가 시행된 1921년, 입양 및 다른 가족관계는 조선호적령이 시행된 1923년 이후에야 완전해졌다. 이때 일본 정부는 공통법(1918)을 제정해 일본과 조선법제의 관계를 정하고도 법률혼을 인정할 수 있는 제3조는 조선에 호적제도가 마련될 때까지 시행을 유예하고, 수가 적었던 내대공혼을 인정하는 법제는 1933년에야 제정하는 등(<부표 4>), 상대적으로 법제의 마련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일본 본토의 법제를 중시한 일본 정부는 식민지에도 일본과 대등한 호적제도가 시행되지 않는 한, 식민지의 법제로 일본인의 가족 신분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내선결혼 법제가 일찍 제정된 것은 통혼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고, 조선인들이 법률혼이 인정되지 않는 것을 차별로 인식할 것을 우려한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법제 정비를 서두르고 또 일본 정부를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통법 제정 과정에서 여성의 혼인뿐 아니라 남성의 입양․입부혼인도 자유롭게 해달라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수용한 것에서, 일본 정부 역시 성별에 상관없이 내선결혼은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대에는 제도적 결함으로 법률혼을 인정하지 못했을 뿐 1921년 법제의 제정․시행을 전후로 내선결혼에 대한 이념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인들이 이를 의도적 차별로 간주하자 일제는 그에 대응하여 통혼을 부정하면 조선인을 동화할 수 없다는 인식 하에 법제를 제정․시행해간 것이다.(이정선, 368-369쪽)
1930년대 초반의 ‘사회주의 대 민족주의’의 대립 구도가 사라져 가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기존의 문화운동론은 재편되기 시작한다. 새로운 상황은 파시즘의 전면화이다. 새로운 모색기(1934년∼1936년)에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문화운동론의 사건은 ‘조선학 운동’과‘학술운동’, 그리고 ‘모더니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초반에 총독부와 연관된 민족주의 우파의 대중적 문화운동이 우세하였지만, 여건의 변화에 따라 대중운동이 불가능해지면서 차츰 민족주의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부문별 전문적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새로운 모색기는 주로 문화운동 진영의 재편성 과정과 연관된다. 민족주의 좌파는 제국주의의 파시즘에 맞서 약소국의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대응하였다. 모더니즘의 이론가인 김기림의 논의도 반파시즘 전선으로 모아진다. 이들은 민족적 특수성과 세계사적 보편성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의 전화를 모색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의 문화운동의 전개에 영향을 미친 주된 변수로는 객관적 조건으로는 일제통치정책의 변화와 도시 소부르주아지의 성장과 몰락, 주관적 조건으로는 비타협적 문화운동 진영의 운동 역량의 부족을 들 수 있다. 1930년대 들어서 활발해지는 일본의 조선 문화 연구(일본 관학의 침투)에 대한 대항으로서 개별 학술운동은 ‘조선학 운동’으로 합류하는 것이다. 이 시기 민족주의 계열의 학술운동은 공통적으로 조선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강조를 주안점으로 하고 있다. 국어운동은 언제나 이 분야의 주축이었다. 한편 역사학이나 민속학 부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연관된 관학과 대결 관계에 있었다. 새로운 모색기의 ‘학술운동’을 근대적 학문의 성립기로 보는 비정치적 시각보다는 일제 지배체제를 대변하는 일제 관학과의 ‘이론적․이념적 대결’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암흑기(1937년∼1945년)는 전 시기의 비타협적 문화운동론이 개별화, 내면화되고 타협적 문화운동론자들은 급속히 친일화되는 시기이다. 암흑기에는 사회주의적 문화운동을 주도할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 문학과 문화운동의 퇴조기에서 문화계의 구심점은 사라지고, 그 대신 부문 예술별로 전문화되거나 명사들의 각개약진으로 변화한다.(백승국, 69-70쪽)
동아일보는 이제 파시즘적 경향이 일본 사회의 주요한 경향이 되고 있다고 파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파시즘이 ‘세계적 경향’이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현저한 것이라 하면서, 일본에 파쇼운동이 일어난 것은 기성 정당의 부패에 대한 국민의 증오와 실망, 그리고 군부의 득세와 이에 대한 국민의 호의와 신임 때문이라고 보았다. 의회정치의 부패와 ‘5․15사건’은 정당 정치를 초월한 협력 내각을 요구하여 사이토 내각이 출범하고, 이제 일본 정치는 다시 과거의 ‘초연내각시대’로 되돌아갔다고 파악했다.
그렇지만 1920년대 전반 일본에 ‘초연내각’이 성립되었을 때와 달리 사이토 내각의 환경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전과 달리 정당 정치세력은 자신의 주장을 과감히 내지 못하고, 군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현상윤은 군인이 정치에 개입한 ‘5․15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해 “常則으로 말하면 육해군의 행동에 대하야 맹렬한 탄핵이 잇고 따라서 육해군의 예산에 대하야 삭감의 결의가 있어야 可할 것”이지만, 귀족원과 중의원에서는 “ 하등의 질문이나 결의”가 없었다고 하여 이미 군부가 정당 세력의 통제를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상호 역관계가 역전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런 상황은 이누카이 내각의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육군대신이‘5․15사건’의 책임이 있음에도 사이토 내각에서도 여전히 육군대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이제 일본이 “육해 군인을 중심으로 한 파쇼”가 ‘절대한 위력’으로‘潛在’한 상태에 있으며, “파쑈화도 멀지 않다고 관측함이 정당”한 것으로 전망하였다.
사이토 내각은 아라키 육군대신을 중심으로 한 육군 내 황도파와 정당 정치세력, 관료 세력이 기묘하게 동거한 내각이었다. 군부는 아직 직접 적극적으로 내각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념과 노선을 가진 정치세력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사이토 내각은 불안정하고 동요할 가능성이 많은 내각으로 비추어졌다.(윤덕영, 212-213쪽)
일제말기의 문학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민족적인 것과 민족주의적인 것을 범주적으로 혼동하는 것 같은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없지 않다. 천황제파시즘과 국민문학론에 대해서 비판의 초점을 정확히 파지하지 못하고 있던 임종국의 민족주의적 논리는 이러한 혼동으로 나아가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한다. 그러나 출판, 교육, 문단 등 문학에 관련된 전 과정을 장악하고 있던 식민지 권력과 문단 제도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 그것에 포섭되지 않는 문학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일괄하여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비판을 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다. 제국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문학의 논리를 구축하려던 것이 민족주의적인 담론에 귀착하면서 제국의 논리와 이형동질적인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지만 이러한 아이러니는 한국 현대문학사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포스트콜로니얼 문학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식민지 파시즘 아래서 민족적인 가치를 추구한 모든 문학적 흐름을 천황제 파시즘의 대동아론이나 국민문학론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보면서 그것이 해방 후에 보여준 변화에 의거하여 소급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 논문에서 특히 중요시하고자 한 것은 국민문학론을 선도하거나 이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이 아니라 협력과 저항의 틈새에서 고민하면서 그 자신의 문학적 가치를 보존하고자 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특히 최근 들어 협력에 귀착한 작가들로 분류되곤 하지만 그러한 협력적인 포즈의 이면에는 만만치 않은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사소설’의 환유적 기법을 활용하여 식민지 체제에 역설적인 비판을 가하거나, 일본어 소설을 쓰면서도 여러 환유적, 상징적 장치를 통해서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정신의 가능성을 실험해 나갔다. 채만식, 이태준, 박태원, 이효석 같은 작가들의 이면에 대한 탐구는 한국문학을 정치 적인 것으로 밀어붙이는 분석적 시각에 대하여 ‘문학적’ 가치에 대한 고민과 실험이 일제말기의 야만적인 체제 아래서도 여전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방민호, 277쪽)
전후 미국이 점령정책의 중심에 있는 천황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는 결국 전전 천황에 대한 타자의 평가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일본천황에 의한 종전(終戰)의 조칙이 개전(開戰)의 조칙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그 전쟁책임을 피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나, 점령군의 고도의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결국 동경재판을 면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천황이 절대적 전제권(專制權)을 가지고 전쟁을 직접 수행했더라도 그러한 정치적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즉 그러한 결정 이면에는 천황제가 절대적권력이 보장된 군주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천황이 상징적 존재였다는 측면이 반영된 결정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천황 히로히토에 의한 전전․전후 천황으로서의 연속 배경에도 천황의 신권적면과 법적 전제성만 해체하면 그 상징성만으로 천황제와 민주주의는 양립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신권적면과 전제적면의 해체로 군국주의화의 우려를 없애고 남은 상징적 권위로 점령국의 안정과 통치를 효율화시켰다. 결국 미점령군도 일본천황의 상징성의 위력적인 면을 인식하고 그것을 효율적 통치에 이용한 정치지배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천황제 존속에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계대전 종결 후 시작되는 냉전체제의 세계구도였다. 특히 맥아더와 그 주변은 철저한 반소 반공주의로 응집되어 있었다. 지일파의 대부 조셉 그루도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해서 극단적인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황제를 폐지하거나 천황을 전범으로 회부할 경우 일본인의 저항으로 인하여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고 소련의 공산주의 세력이 침투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루는 천황제를 패전 직후 일본의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안전장치로 생각하고, 공산주의의 침투에 대한 방벽으로 온존시키려 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반공주의는 천황제 존속을 기도하는 일본지배충이 정치공작을 전개할 수 있는 커다란 지반이 되었다.(손안나, 12쪽)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한국의 경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일본어만 常用하도록 강요하고 한국어 교육과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노동력의 부족으로 강제징용과 연행을 실시하여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해갔다. 이것은 식민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국민도덕은 철저히 파쇼적 지배체제에 해당하는 교육이었다. 제Ⅴ기의 수신서 개편과 수정은 마찬가지 시대상황을 반영하였으며, 보다 강렬한 천황제 지배체제의 신성화와 극단적인 멸사봉공의 충군애국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37년에 중일전쟁으로 이어진 채,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같은 해인 4월에는 메이지 이래 사용했던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바뀌고, 심상소학교 6년의 과정이 ‘국민학교 초등과’로 변경되었다. 교육심의회가 1940년 8월 21일에 제정한 ‘국민학교 교칙 설명요령’은 전체 6장 26절, 110여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교육심의회는 총론의 서론에서 개혁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최근 우리나라의 국력과 문화가 비약하여 일본의 이름에 어울린 일대 발전을 이루었고, 우리나라의 세계적 지위가 갑자기 향상한데 동반하여, 교육에 있어서도 종래 구미모방의 지역을 탈피하고, 우리나라의 독자성과 세계적 지위를 고려하여, 확고한 지도이념 하에 교육전반에 이르러 근본적인 개혁을 하려는 … ‘國體의 本義’를 편찬하는 등 국체의 본의를 명징(明徵)하고, 교학의 정신을 천명하는데 노력해왔다.”고 하면서 이러한 방향에 따라 교육의 제도내용을 전반적으로 실시하되,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오래전부터 교육심의회 설치를 통해 실시해 왔다고 하였다.(이병담, 688-689쪽)
4. 북한공산체제
⑴ 공산당 중심의 권위주의체제
소련 정치문화의 또 하나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 있는데 볼셰비키 혁명 이전에 집단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개인은 죽어도 집합적 집단(collective group),계 급, 그리고 당은 영구히 살아남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들의 정신은 볼셰비즘 형성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레닌의 중앙집권적 당중심의 권위주의로 나타났다. 레닌의 이러한 중앙집권적 당중심의 권위주의 정치문화는 위에 설명한 프롤레타리아 정치문화와 겹쳐져서 소비에트체제와 소련집단주의의 중심적 형태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레닌에 의하여 마르크스주의가 계승 발전된 소련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사회적 실현 과정은 인간에 의한 착취를 배제한 집단주의적 생산수단의 공유에서 출발한다. 소련에서 생산수단의 공유는 봉건제가 무너지고 사회주의로 되면서 생산수단들이 집단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특히,각종 기업과 공장들을 국영기업 화하고 개인 농장들을 점차적으로 집단 농장으로 합병하는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국영집단농장(sovkhozes)은 농민들이 최근의 농법을 습득하도록 도왔으며, 그들에게 종자와 기계장비 등을 제공하였다. 집단농장은 농민들에게 사회주의 체제가 진보된 생산체제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것은 대규모의 집단 체제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믿을 만한 보루라는 확신과 함께 집단주의가 소련 사회의 발전 동력으로 자릴 잡아가는 것이었다. 요컨대 마르크스․엥겔스의 집단주의는 소련에서 처음으로 생산수단의 집단화라는 사회적 실현과정을 거쳤으며, 그 주요 실천 사항으로서 우리는 국영기업과 집단농장의 건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과도기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담당자로서 공산당과 독재국가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레닌의 독재국가 건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도기가 상당히 장기적일 것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고도로 공업화되고 대도시 공업 노동자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일어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것과는 달리, 레닌은 경제적으로 후진국이며 공업 노동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근소하고 아직 농업 사회의 수준이었던 러시아적 조건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해야 했던 때문이다.(이승목, 29-30쪽)
책임을 논할 때는 흔히 인민성, 계급성, 당성의 세 가지 책임을 지게 된다. 첫째, 인민성부터 살펴보면 이것은 당과 인민대중의 결속을 강조할 때, 당이 인민대중에 복무한다는 논리이다. 공산당은 인민대중을 온갖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할 뿐만 아니라 사상, 기술, 문화적 낙후성으로 부터도 해방함으로써 모두가 다 문명과 친근하고 만족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인민대중을 대표하는 당이다. 물론 인민대중이라 함은 엄연한 집단주의적 실체이며, 노동계급과 함께 모든 근로자들이 포함된 것이다. 둘째, 계급성은 노동계급의 입장을 강화하는 것을 말한다. 집단주의에서 가장 핵심 계급은 물론 노동계급이다. 노동계급은 사회의 광범한 근로대중을 이끌고 나가는 지도적 역할을 한다. 한편 인민성과 관련하여 계급성은 인민성의 결정적 실천사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셋째, 김일성은 “당성 … 이것은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에 기초한 높은 계급적 각성”이라고 지적하였다. 당성은 북한 집단주의 사회에서지도 일꾼들의 체제에 대한 지지와 복종을 가늠하는 대표적 척도가 된다. 공산당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노동계급의 이익에 동조할 수 있고 인민대중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인민성, 계급성, 당성의 통일을 집단주의의 구현을 위해 인민대중이 지켜야 할 의무이자 최고 덕목으로 본다. 즉, 인민성, 계급성, 당성을 다 갖춘 사람은 결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단주의 양식을 배반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세 가지는 사회주의 사회가 심화 발전함에 따라 더욱 더 훌륭히 구현되게 된다고 한다. 이 세 가지는 사실상 북한 집단주의가 노동계급을 주축으로 하는 인민과 당 사이의 상호책임을 기반으로 작동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이승목, 37-38쪽)
이제 인민 이익과 노동계급의 권력은 당으로 지칭되는 관료체제에 의해 대체되었다. 관료제에 똬리 튼 온정주의(paternalistic)는 “권력의 관료적 조직화와 중앙 집중화를 위한 주요한 이데올로기 정당화”의 기제였다. 즉 권력과 이데올로기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레닌은 ‘권력의 문제는혁명의 근본문제’라고 규정했으며, 스탈린은 “권력 장악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며…권력을 유지하고, 권력을 공고화하고, 권력을 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권력과 공식이데올로기는 정신과 몸처럼 불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있는 한 몸이 되었다. 당의 이데올로기가 그 힘을 갖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치적 확신과 충성,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도덕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개인 이익보다 당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공식적으로 규정된 노동시간 이외의 추가노동, 물질적 삶의 기준을 증진시키는 즐거움의 포기, 가정생활을 국가이익에 종속”시키는 것을 수용해야만 했다. 사회주의에 살고 있는 인민은 자신의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과 정치활동에 할애해야만 했다.(김종욱, 38-39쪽)
관료체제적 관직위계 질서의 가장 상층에 지배자와 지배계급이 존재한다. 관료체제는 본질적으로 관직위계질서를 통해 지배구조의 안정과 지배계급의 이익을 관철한다.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라인은 혁명을 수행한 세력이 담당하게 된다.‘홍(紅)’으로 지칭되는 당 관료들이다. 이들은 모든 국가기관, 기업소․공장을 이중적으로 감시․통제한다. 중앙당 또는 지역당 조직에 의한 부서별 담당자들의 관리․감독과 기관․기업소․공장 등의 관료적 위계계선에 의한 관리․감독이다. 즉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당 관료를 행정기관 조직으로 파견․상주케 함으로써 행정에 대한 당의 통제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또한 당의 지도적 위치의 관료들은 당과 국가기관을 겸직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즉 당 정치위원이 행정부의 장이 되거나, 최고인민회의 고위 간부를 겸직하는 경우이다.
이런 현상은 기본적으로 ‘홍’에 의한 ‘전’의 통제를 의미하며, 지배계급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한 방식이 된다. 그러나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사회와 경제구조가 복잡해짐으로써, 이러한 분화에 맞게 전문기술자들이 광범위하게 요구되었다. 또한 국가 관료기구는 전문화와 복잡성의 증가로 거대하게 확장되었고, 점차적으로 사회로부터 이격되어 사회의 위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런 구조적 변화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이후 상당수의 청년들이 전문기술을 체득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사회 각 부문에 진출하게 되었다. 즉 새로운 정치적․경제적 엘리트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는 관료주의적 국가기구가성장함에 따른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국가와 사회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지위와 역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새롭게 생성되는 인텔리들의 지위와 역할이 높아질수록,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전문기술과 무관하게 이데올로기적 의심이 높아졌다. 즉 산업화의 발전에 따른 ‘테크노크라트’(technocrats)의 증가현상은 일반적인 것이며, 이들에 대한 당적 통제의 문제는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김종욱, 58-59쪽)
관료체제 재구축작업은 상부와 하부 전체에서 이루어졌다. 상층간부들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다.회의소집 권한을 박탈했으며, 하급간부에 대한 처벌과 철직이 금지되었다. 내각 부수상과 당중앙위원회 비서들 등 중앙의 책임적 위치의 간부들이 지방에 내려가 자기 마음대로 회의를 소집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회의를 소집하기 위해서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와 비서국의 결정 또는 총비서의 위임에 의해서만 회의소집이 가능했다. 또한 도당위원회와 해당 지방당조직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간부의 처벌․철직과 관련해서도 해당 간부를 임명한 당위원회의 집체적 토의에 의해 결정하도록 했다.
이런 조치는 상층간부들을 위와 아래에서 통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회의소집권의 박탈은 중요사안에 대한 의결권한을 제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생시킨다. 회의소집을 도당 또는 지방 당조직에서 승인하도록 함으로써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하부단위의 경우 당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치가 취해졌다. 즉 군당의 통제체계를 구축한 것이었다. 군당위원회는 특급기업소, 1급기업소 등 군내 소재하는 모든 공장․기업소에 대한 사업통제권이 부여되었다. 예를 들면 큰 공장의 당위원회는 간부문제, 입당과 책벌에 대한 권한이 박탈되고 군당위원회로 귀속되었다. 공장당위원회는 당정책 침투사업과 당생활 지도사업으로 권한이 축소되었다. 이런 조치를 시행한 이유는 공장 지배인 또는 책임비서들의 월권 때문이었다. 군당에 인사와 처벌권이 없었기 때문에 “군당위원회에 찾아가지도 않으며 군당에 복종하지도 않는”상황도 예방하려는 의도였다. 또 다른 측면에서 당 위계에 의한 단일한 권력 작동이 가능토록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당 정책을 전달하는 체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당과 총비서의 결정과 지시사항은 가감 없이 전달되도록 했다. 즉 총비서의 지시사항과 당의 지시사항을 구분해서 그대로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총비서와 내각수상이 지시내린 사항은 절대 변경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당중앙위원회 비서들은 총비서의 보조자이기 때문에 총비서의 지시에 의해서만 사업을 시행할 것도 강조되었다. 이런 조치는 ‘혁명적 수령관’의 태동과 연관된 것으로 판단된다. 단일한 위계질서에 따라 가장 상위의 김일성 지시사항이 하부까지 온전하게 전달되는 체계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지방단위에서 성분과 충성심 중심의 간부선출이 강조되었다. 진취성이 강한 젊은 사람을 세포비서로 중용할 것과 초급간부들의 경우 사상성이 강한 피살자․전사자 가족들을 등용하도록 조치했다. 농촌지역의 경우, 제대군인출신들을 농촌에 보내도록 조치했다. 농촌지역에서 당사업과 행정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74년 리당비서들에게는 10가지 원칙이 제시되었다.(김종욱, 285-286쪽)
보위․정치․참모(지휘)계통 등 소위 ‘3선 감시체계’를 통해 군내부 강온파 등 파벌형성을 차단하고 당군사부․조직지도부를 통해 김정일 명령 이행실태 및 훈련 등 전반적 군사활동을 점검하고 있으며, 군내 말단조직에 이르기까지 각 급 부대에 당위원회, 정치실태를 감시, 감독하는 등 각종 내부 통제기제를 가동, 김정일에 대한 충성 유도와 조직적 반체제활동 소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북한군은 각 부대에는 군사계통의 참모부와 정치계통의 정치부, 보위계통의 보위부가 모두 존재한다. (표6참조) 참모부의 지휘계통은 각급 부대장과 참모장으로 이어지고, 전술한 바와 같이 군내정치기관의 지휘계통은 총정치국산하 각급 정치부 책임자를 통해, 중대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보위계통 또한 독자적으로 운영되어지고 있다. 원래 보위사령부는 총참모부의 한 부서였으나 1993년에 독립하여 군단에는 보위부와 보위중대, 사단에는 보위부와 보위소대, 연대에는 보위부장, 대대에는 보위지도원이 있으며, 보위부는 일종의 비밀경찰조직으로 정치일군과 당일군을 제외한 군대행정기관 일군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보위부가 권력기관이라 해도 보위보사령부내에 당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보위부의 당조직은 총정치국의 지도를 받는 정치부에 의해 ‘당적지도’와 통제를 받는다.
연대급이상의 관계에서 정치부에는 조직부, 선전부, 군사부, 간부부, 청년부(청년동맹과), 3방송과 등이 있는데 조직부와 선전부 양부서는 총정치국의 조직부, 선전부를 통해 조선노동당 중앙위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와 연결되어 있다.(김인숙, 80쪽)
특히 북한의 내각을 비롯한 인민무력부-인민보안성-국가안전보위부 등 각급통제행정조직도 수령의 교시에 따른 로동당의 지시를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피동적으로 정책을 결정 내지 집행하는 관료들에 의한 행정조직은 관료제 현상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어 큰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행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반적 관료제의 병리현상인 권위주의, 동조과잉, 형식주의, 무사안일주의, 분파주의, 목표지향주의와 성과지향주의 등에 관한 근본적인 개혁조치의 마련이 시급한 실정에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북한의 정치체제는 아직도 이런 관료제 병리현상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치유할 대안을 마련하는데 힘쓰지 않고 이른바 ‘권력엘리트들’은 자기들끼리의 일체성을 도모하는데 치중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치적성향의 갈등을 표면적으로 강하게 표출하지 않은 채 동조과잉적 현상만을 더욱 제고하고 있으며, 특히 현재 로동당과 군부를 중심으로 한 권력기구간의 응집력은 김정일을 중심으로 하여 매우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앞으로의 북한체제는 더욱 철저하게 로동당이나 군부의 관료가 중심이 되어 유지․관리되는 체제가 될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곧“특정한 관료만이 북한체제를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변화역군이 될 수 있으며, 북한주민은 오직 관료문화에 추종하게 추종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계속 될 것으로 예견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정부도 앞으로 대북정책의 수립함에 있어 일견 그 주요대상을 관료계층으로 보고, 이들에게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투입시켜 이들의 의식과 행동이 자유민주주의체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전략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즉 북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대북정책 발전을 위한 연구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 환경 조성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더욱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이상근, 147-148쪽)
⑵ 수령주의와 대중의 소외
계획의 ‘중앙집권적 특성’이 더욱 더 강화됨으로써, 대중의 소외는 더욱 더 심화되었다. 정치권력은 8월 종파사건과 반종파 투쟁과정에서 대중에 대한 이율배반적 전략을 취한다. 본래 북한의 사회주의 이론에서 ‘인민대중’은 혁명과 정치의 주체이면서 경제관리의 주체이다. 북한문헌에 따르면 이러한 이론은 현실이 된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민대중은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적이 없다. 북한의 공식적인 기록을 보면, 대중은 8월 종파사건과 반종파 투쟁이후 진정한 존재이유를 찾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은 최고지도자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서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로 거듭난다. 최고지도자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혁명적 열의를 근간으로 ‘자발적’으로 생산력 증강에 기여하고, 이를 통해서 북한체제를 공고히 한다. 북한의 공식적인 문헌들은 북한사회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초험적(transzendent)인식”을 기초로 한다. 초험적 인식의 특성은 원인과 결과, 본질과 현상, 이론과 실제 등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Hofmann 1969, 64~91). 물론 그 이유는 어떠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이다. 북한이 감추고 싶어하는 진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대중의 존재이유’에 대한 부분이다. 8월 종파사건 이후 대중에 대한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 전략이 보다 치밀해지기 시작한다. 북한은 스스로의 사회를 반제반봉건 민주주의단계에서 사회주의 혁명단계를 통해서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 단계에서 ‘대중’은 더욱 더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수령의 현지지도는 이를 현실로 만들어 줄 것이라 기대되었다. 대중은 최고지도자와 만나 폭발적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하지만 최고지도자와 대중의 만남은 대중의 바람에 의해서 실현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의도였으며, 수령은 대중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대중을 더욱 더 정치권력에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지배체제의 구축에 걸림돌이 되는 중간관료들을 교체했다. 결과적으로 정치권력은 대중의 동원과 통제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은 더욱 더 교묘하게 소외되었다. 사실 수령의 현지지도는 중간관료 뿐만 아니라 대중의 불신에서 시작되었다. 대중을 지도와 동원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뿐 정치의 주체로서 인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은 단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권력과 체제의 모순을 인식하고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지는 못했지만, 권력으로부터 배제와 경제잉여의 배분에서의 소외에 대해서 저항하였다. 전후 복구과정에서부터 노동자는 태업(이직, 결근 등)의 형태로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저항이 발생했다. 농민들의 저항은 노동자의 그것보다 강력했으며 보다 적극적이었다. 전후 복구기간에 농민들의 저항은 농업집단화의 추진에 따른 부정적인 반응(reaction)에 가까웠다면, 1956년 8월 종파사건이후에 보다 적극적인 저항이 이루어졌다. 특히 ‘신해방지구’에서 협동농장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은‘배천바람’으로 명명되었다(서동만 2005, 700~705; 김연철 2005, 107~111).(윤철기, 173-174쪽) |
북한에서 수령이란 “혁명과 건설에서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고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당과 혁명의 탁월한 령도자”로 규정된다. 즉, ‘지도와 대중의 결합’ 테제에서 ‘지도’ 란 결국 당을 통한 수령의 영도인 것이다. 수령을 인민대중의 최고영도자로 규정하는 이유는 “수령이 인민대중의 최고뇌수이자 통일단결의 중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최고뇌수라는 것은 사실상 유기체의 머리, 사회적 유기체의 뇌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마치 생물유기체가 자기 뇌수의 통일적인 지도를 받는 것처럼, 인민대중의 ‘최고뇌수’인 수령의 영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통일단결의 중심이라는 말은 인민대중이 수령의 주위에 집단으로서 단합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인민대중이 통일되지 못하면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 존재하고 활동할 수 없으며 역사의 주체로서의 자기의 역할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일단결의 중심으로서의 수령은 ‘인민대중의 심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수령이 인민대중의 ‘최고뇌수’가 되는 이유에 대해 북한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① 수령이 “인민대중의 조직적 의사의 유일한 체현자”이기 때문이며 ② 수령에 의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사상의식과 창조적 능력이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수령만이 집단적 존재로서의 인민대중의 ‘자주적 의사’를 총괄하고 취합할 수 있다는 주장이며, 수령이 창시하는 자주적인 혁명사상으로 인민대중의 사상의식이 고차원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에 수령은 곧 인민대중의 ‘뇌수’로 규정되는 것이다.
또한, 수령이 인민대중의 최고뇌수인 동시에 통일단결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① 수령이 인민대중의 사상의지적 단합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며 ② 수령이 인민대중의 조직적 단합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즉, 수령이 있음으로 해서 인민대중은 하나로 단합되어서 ‘력사의 추체’로 발전하며 수령이 창시하는 자주적인 혁명사상으로 인해 인민대중이 사상의지적으로 단합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수령을 통하여 인민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통일성이 한층 강화된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신동훈, 37-38쪽)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주체사상의 핵심 내용으로 평가되는 ‘혁명적 수령론’ 또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의 논리적 귀결로서 조선노동당의 영도란 곧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혁명적 수령론’에서 수령의 지위는 “인민대중의 최고뇌수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이고 자주성을 위한 혁명투쟁의 최고 영도자”이며, 수령은“인민대중의 이익의 최고대표자, 체현자”로 설명되고 있다. 결국 수령은 인민대중을 의식화․조직화하여 하나로 통합․단결하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며 인민대중의 혁명투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영도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런데, 수령의 지도력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당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제약될 수밖에 없고, 나아가 인민대중의 혁명위업을 승리의 한길로 이끌어주고 영생하는 생명을 주는 어버이와 같은 수령의 지도력에 과도한 역할을 부여하게 되면 결국 이는 수령일인독재와 세습체제를 정당화하는 장식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조선노동당의 규약에 따르면, 조선노동당은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원칙’에 의하여 운용되는데, 이는 하부 당조직 대표가 상급 당조직을 구성해 나가면서 일반 당원의 의사를 자유롭고 열린 논의를 통해 수렴․조정하여 점증적으로 상부로 올리는 일련의 상향식 의사결정구조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결정구조에 의해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당원은 당조직에 복종하고 하급 당조직을 상급 당조직에 복종하며, 모든 당조직은 당중앙위원회에 절대 복종하도록 되어 있다(조선노동당규약 제11조). 이에 따라 당의 최고지도기관은 당대회이고, 당대회가 ‘당노선과 정책 및 전략전술에 관한기본 문제’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동규약 제21조, 제22조). 당대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 동안에는 당 중앙위원회가 최고지도기관의 역할을 대행하며 모든 당사업을 주관한다(동규약 제23조). 그러나 북한에서는 1980년 제6차 당대회 이후 현재까지 오랜 기간 동안 당대회가 개최되지 않았고, 아울러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도 1993년 제6기 제21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열리지 않았으며,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의 기능도 사실상 중단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원칙’에서 하의상달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원칙’은 실종되고, 상의하달을 의미하는 ‘중앙집권제 원칙’만 남게 되어 일인독재에 호응하는 제도로 전락하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정응기, 236-237쪽)
북한이 독자적인 이데올로기의 개발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던 시기는 스탈린격하 운동과 중․소분쟁의 격화로 더 이상 중국이나 소련의 관제이데올로기를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없게 되면서부터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상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변화해 온 과정을 살펴보면,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 연설「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에서 처음으로 주체 확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1966년 8월 12일 로동 신문사설 「자주성을 옹호하자」에서 최초로 주체의 필요성을 공식 선포하였다. 북한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위상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북한이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체제문제와 결부시켜 추진하기 시작한 1967년경부터이다. 1967년 10월 26일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공화국 정부의 10대 정강」을 발표하면서 주체사상이 북한 정권의 지도이념이라는 점을 선포하였다.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는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등한 당의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하였고, 1972년 12월의 사회주의 헌법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맑스-레닌주의를 우리 나라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조선로동당의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언급하였다.
주체사상이 김일성 유일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이념적 변화를 시도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뒤따랐다. 이후 북한은 “주체사상은 가장 정확한 맑스-레닌주의적 지도사상” 혹은 “주체사상만이 맑스-레닌주의와 로동계급의 혁명위업에 끝까지 충실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확한 지도사상” 등으로 주체사상의 의미 변화를 꾀하다가 1970년 11월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채택된 당규약과 1972년 12월에 제정된 사회주의 헌법에 북한의 통치이데올로기로 명문화하기에 이른다. 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 구축을 위한 논리를 형성해 나가는 시기에는 주체사상의 역할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틀 안에서 모색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 시기에 주체는 어디까지나 실천이데올로기로서 대두되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조선의 사정에 맞게 응용하는 방도로 제시되었다.(김난희, 84-85쪽)
주체사상은 사람의 본질적 특성과 세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새롭게 밝힘으로써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을 확립하였기에 무엇보다도‘사람’중심의 철학임을 명시하고 있다. 유교에서 가장 큰 의의는 인간의 의지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했고 종래의 미신적 관념을 넘어서서 인도(人道) 즉, 인간은 본성과 기질 또는 성(誠)과 정(情)이 있고, 주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물과 구분된다. 다시 말해 주어진 환경에 따라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재해석하고 나아가 환경 자체를 변화 시키는 능력, 주체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가장 뛰어난 존재이다. 이런 인간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스스로 민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면서 주체혁명의 위업을 위한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혈연 주의적 사고와 혈연적 유대를 강조하는 부분은 다분히 유교적 전통의 맥을 이어 수령, 당, 대중의 일심단결을 촉구하면서 민족의 운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아가야 한다는 주체사상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령을 인민대중의 의사와 이익의 최고 체현자이고 최고대표자이며 혁명의 최고 영도자로 간주한다. 당은 수령의 사상과 영도를 실현 하기위한 도구이므로 당에의 충성은 곧 수령에의 충성이고 수령의 사상과 이론을 절대적 무조건성의 원칙에서 관철해 나가는 충실성이야말로 숭고한 혁명정신의 지표이며 주체적 혁명가의 기본품성이 된다. 충효는 도덕과 윤리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었을 뿐 ‘일심단결’, 즉 체제 통합과 사회 결속을 위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즉 김정일로 이어지는 부자 권력 세습을 무난히 완결 짓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려는 이른바 세습집단의 통치 합리화 수단인 것이다.
한편 북한의 후계자론에서 김정일의 권력세습은 가부장제의 특징인 친자상속을 완성하는 것이며 장자승계를 정통으로 하는 한국적 권력이양에 근거를 두고 있다. 김정일이 부친사망 후 유훈관철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아버지 노선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유훈정치(遺訓政治)를 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가 충성과 효성의 화신이라는 것을 인민들에게 널리 알리면서 아버지로 향했던 충효를 자신에게 돌리려 한 점이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 대한 우상화와 개인숭배로 이어졌고, 합리적인 사고의 범위를 넘어서는 가부장적인 장자세습 우상화의 성격까지 띄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정에서의 화목을 위하여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을 주체사상에서는 가정의 확대조직인 국가의 지도자가 가정에서의 어버이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면서, 유교에서 가정을 중시하는 것에서 한층 더 심화되어 각 가정은 무시되고 국가, 특히 수령만을 강조한다. 즉, 주체사상에서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유기체와 같이 해석하여 수령은 인민대중의 최고 뇌수이며 혁명의 최고영도자이고, 노동계급의 당은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혁명의 참모부이며 온 사회를 수령의 사상과 의지대로 숨쉬고 움직이게 하는 사회의 심장이다. 주체사상을 역사상 가장 독창적이고 뛰어난 사상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북한에서 반동철학이라고 비판하였던 유교철학의 내용을 다시 재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사상인 유교사상을 수용함으로써 북한은 사회주의 지배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초의 부자 권력 세습을 안정적으로 이룩했으며, 북한 인민들의 정신세계에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충효 사상을 비롯한 고유한 전통 문화적 가치들을 복원함으로써 체제의 안정성을 담보 받고 있다.(정규상, 50-52쪽)
김일성과 김정일은 통치이데올로기의 개발과 효율적인 활용, 그리고 권력투쟁에서의 승리를 기반으로 하여 권력엘리트의 적극적인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일인 독재형’리더십을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망할 때까지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더욱이 현대정치사상 유례가 없는 김정은에게로의 3대 세습까지 성공시켰다. 이러한 점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리더십의 종속변수는 동일할 수밖에 없다. 한편 제2장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일인 독재형’리더십의 특징은 한 명의 최고권력자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점을 고려 시, 그들은 국가기관의 최고직책을 독점하면서 유일지배체제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장기간 ‘일인 독재형’ 리더십을 성공, 유지시킬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에는 그들이 인민대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획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통합 능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일성의 경우, 항일무장투쟁의 ‘신화’가 집권 이후에도 그의 준거권력 형성과 유지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 후 ‘수령론’에 기초한 체계적인 개인숭배 운동의 성공적 전개로 인민들은 그를 찬양하고 충성심을 보였으며‘신적(神的)인 존재’로,‘영원한 수령’으로 남아있다. 김정일의 경우, 혁명전통계승 논리 아래 후계자론과 우상화 운동의 성공적인 전개로 김일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소 열세하지만 인민대중들로부터 찬양과 충성심을 이끌어 낼수 있었으며 인민대중들의 ‘영원한 지도자’로 인식되어 있다.
다음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효과적인 사회통합 능력 발휘는 체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개발, 조직적이고 일관되게 인민대중들에게 교양함으로써 그들을 정치사회화 하는 한편,‘수령론’과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중심으로 권력엘리트들의 지지 획득과 함께 인민들을 결속시켜 대내외적인 체제위기를 효율적으로 극복하는 정치역량을 발휘하였다.또한 김정일의 경우에도 유사한데, 김일성이 제기한 주체사상을 심화 발전시킴과 함께 유일사상체제로 정착시키는 능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이를 통해 인민들을 교양, 세뇌시켰다. 그리고 권력엘리트들의 지지 아래 선군정치를 통치이데올로기로 개발, 인민들을 단합시키고 결속시킴으로써 대내외 체제위기를 성과적으로 극복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또한 김일성과 김정일은 철저한 통제시스템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사회전반에 대해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그들의 ‘일인 독재형’ 리더십을 견고히 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강력하고도 지속적으로 제도적, 물리적 통제시스템을 가동함으로써 인민대중들은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접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거주 이전이나 여행 등이 불가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리고 매스미디어를 일원화시킴으로써 외부정보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차단, 극도로 폐쇄된 사회구조를 정착시켰다.(송길섭, 129-130쪽)
먼저 북한 사회주의 체제가 당․국가체제인지를 검토하기 위해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가 수령제와 당의 관계이다. 수령의 역할은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다. 첫째, 수령은 근로인민대중이 자기의 근본이익을 자각하도록 혁명사상을 넣어주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으로 인민대중을 영도한다. 둘째, 수령은 정확한 지도사상을 창시하고 혁명이론과 과학적 전략전술을 내놓으며 근로인민대중을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묶어 세워 혁명투쟁으로 조직 동원한다. 셋째, 수령은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은 이 같은 수령의 사상을 지침으로 하여 혁명과 건설을 수행하여야 근로인민대중의 자주성이 완전히 실현되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을 종국적으로 완성할 수 있다.
즉 수령은 북한이라는 하나의 정체를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근원이다. 수령은 북한인민의 일반의지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사상을 창시하고 당을 창건하며 다른 모든 조직을 만들고 혁명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 자기 완결적인 존재다.
그러나 북한은 수령과 대중 사이에 당이라는 제도를 위치시키고 있다. 당은‘노동계급의 최고형태의 조직’이다. ‘최고 형태’란 다른 모든 조직들을 지도하는 조직을 말한다. 당은 정권기관과 근로단체들을 비롯한 다른 모든 조직들에 투쟁방향과 목표, 그 수행을 위한 방침들을 제시해 주고 그것들을 정치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갖는다. 노동당은 모든 부분, 모든 분야의 사업을 통일적으로 장악 통제하고 유일적으로 지휘한다. 이 때문에 당은 전체인민의 향도적 역량, 혁명의 참모부라는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당의 지도 대상에는 각종 청년단체, 각계각층의 군중을 망라한 대중단체는 물론 군사조직도 포함 된다. 즉 북한의 지도체계는 당․국가체제를 토대로 하고 그 위에 수령이라는 제도가 하나 더 구축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북한의 ‘수령제’라는 특수한 현상에 당의 지배라는 원칙이 손상된 것은 아니다. 수령의 절대성에도 불구하고 수령이 당의 지배를 대체하기보다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당이라는 제도를 통해 수령의 절대성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은 수령제형 당․국가체제가 융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령이라는 유일지도자에게 모든 권위를 부여하는 유일영도체계는 당․국가체제의 중앙집권적인 특성을 인격적 지배로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런 체제에서 당과 유일지도자는 동일시되고 당은 유일지도자의 대리자가 된다. 따라서 군대의 정치적 역할은 유일영도체계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김인숙, 20-21쪽)
북한 관료제의 구조적 측면에서 파생하는 병리현상의 유형으로는 논자나 접근방법에 따라 다양한 차원에서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나, 북한의 관료들도 우리 사회와 같이 관료 자신이 자기에게 부여된 공권력을 남용하거나 공직에 있음을 기화로 영향력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행사함으로써 법규를 위반하고, 의무불이행 또는 부당행위 등을 함으로써 관료 자신의 개인적 사리사욕을 취하는 데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북한의 체제특성을 감안할 때 관료제 ‘병리현상’의 특성은 대체적으로 절대주의적 관료제, 폐쇄와 명령체제, 극소수관료들의 이익 추구와 족벌체제 등에 연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관료제는 정권 창건 이래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공고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당이나 내각은 물론이고 군부의 주요 간부들까지 이런 정권의 연장을 위한 요구에 충족되는 인물들로 충원되었다. 즉 북한당국은 ‘출신성분’을 위주로 한 봉건적 신분제도를 인사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 전문성보다는 혁명성과 당성을 중시하여 충원해 왔기 때문에, 당-내각의 관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근대적 기술관료’보다는 ‘혁명가’들에 의해 지배되는 절대주의적 관료제로 변모하였다.
그런가 하면 당-정 이중구조로 인한 기구의 비대화, 노-장-청의 배합구조로 인한 노간부의 과다한 비율, 동일 보직에서의 장기간 근무, 인센티브제의 취약등으로 매우 경직되고도 비효율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체제의 특성은 관료제 구조에서 오는 필연적인 병리현상의 유발원인을 가져왔다. 즉 이러한 병리현상은 구조적 취약점으로 인하여 병리의 기회를 제공하고, 이것을 통제할 만한 관료들의 부패통제 의지와 도덕적 윤리관 공직관의 부족,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사회문화 환경적으로 부패를 조성하는 여건을 유인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경우 먼저 구조적으로 관료부패를 유발할 수 있는 소지가 가장 큰 절대주의적 피라밋형 관료구조가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할 수 있는데, 일인독재형의 신격화된 관료구조는 마치 ‘살아있는 신’과 같은 절대주의적 권한을 소유하고, 여기에 관료제의 본질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도록 장애를 준다. 즉 김일성과 김정일의 독재화, 세습화, 신격화 작업은 이미 많은 자료가 증거가 되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그 대표적 예가 바로 김일성과 관련한 각종 간행물이나 보도, 기사의 내용인데 이런 우상화되고 신격화되었던 내용은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의 신격화는 북한 전역에 세워진 우상물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으며,이런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와 신격화는 그의 후계자인 김정일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이상근, 102-103쪽)
주체사상은 수령의 유일적 지도체계 확립과 후계체계 구축의 이론적 근거로서 기능한다. 주체사상에 따르면 인민대중은 사회역사발전의 주체이지만 올바른 지도와 결합하지 않으면 옳게 발현되지 못하므로 ‘지도와 대중의 결합’이라는 정당성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지도와 대중의 결합’은 특히 당과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만 실현되며,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성과적으로 건설할 수 있으며 그를 옳게 운영하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유일지배체제하의 북한 정치에서는 당은 ‘수령’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사회에서 주체를 행사하는 사람은 ‘수령’이며, 인민은 김일성 한 사람의 개인숭배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북한은 김정일 후계를 반대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당과 대중간의 통일단결을 강조하는 도구로 주체사상을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을 중시하는 사상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수령과 대중의 위계적 관계를 통한 수령론을 제기하여 결과적으로 개인숭배의 합리화 방향을 정립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하겠다. 수령의 초인간적인 능력을 강조한 결과는 역사의 창조자인 인민대중의 투쟁과 역할을 약화시키고, 인민대중의 역할을 특정 개인인 수령에게 돌려주는 결과는 낳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수령론과 개인숭배의 문제는 북한 사회주의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개인숭배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어느 특정한 개인이 공적으로 국가의 정치․경제․군사․사상 등 모든 분야에서 전권을 장악하여 모든 인민들을 특정 개인에게 복종시키고 또한 개인숭배를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개인숭배가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에 있어서 발전할 수 있는 문제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개인숭배사상 하에서는 당의 집단적 지도가 상실되고 당의 최고지도자가 자신의 판단과 계획에 따라 지도역할이 수행된다. 개인숭배사상은 특정개인의 결정․지시․명령․의도․의사에 지도의 중심이 옮겨져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숭배는 관료주의와 형식주의를 강화하고 지도자의 일방적인 지시와 대중에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뿐 지도자가 인민대중으로부터 배우고, 경험을 겸허히 수용할 수 없게 됨으로 인민대중의 혁명적인 적극성과 창의성을 충분히 조직하고 동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김난희, 77쪽)
북한 헌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명시되었기에, 대중은 당의 영도 밑에서 활동해야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위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노동당은 수령 개인의 정당이기 때문에 북한의 대중은 실질적으로 수령 개인의 영도 밑에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문화는 보통 개인숭배주의의 기초에서 발생하는데 중국은 마오쩌둥 시기에 유사한 문화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1기 지도자 사망에 따라 개인숭배주의는 보통 약화되고 당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배자가 아닌 당에 대한 대중의 충실성을 요구하게 된다(중국의 경험을 보면). 그러나 북한 인민대중의 충실성은 1기 지도자인 김일성부터 2기 지도자인 김정일을 거쳐서 3기 지도자인 김정은으로 이어지고 있다.
주체사상에서 수령-당-대중이라는 생명체에서 수령이 수뇌라고 규정하고, 당이 수령의 사상을 대중에게 보급시키는 인전대(引傳帶) 역할을 규정해 있기 때문에 대중은 당으로부터 수령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세포라고 해석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인민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주체사상은 실질적으로 자연인으로서의 자주성(自主性)과 창조성(創造性)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에 부속하는 사회인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인정한 것이다. 주체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에서 공부해야 상술한 자주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인의 사상과 행동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라는 외부환경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주체사상은 공산주의 사회가 가장 진보적인 사회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인간이 최고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해석한다. 더구나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김일성에 의해 창조된 인간사회 철학사상체계의 새로운 발명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완벽한 주체적인 인간이 되려면 김일성의 사상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합리화 되고 있다.
비록 북한의 정치현실에서 대중들은 수령주의에 대한 충실도가 100%가 아니고 지도자에게 불만도 있지만, 지배자 권위를 도전하는 세력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에서 제도와 정책적 원인도 있으나, 정치문화적 원인은 가장 근본적이다. 그것은 북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수령에게 독재의 정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들은 수령 및 후계 지도자들에 대해 불만이 있어도, 그들의 권위를 부인하거나 전복하지 않고 있다.(유사, 83-84쪽)
노동계급을 계급의식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는 계급교양은 혁명적 세계관과 공산주의적 품성을 배양하는 공산주의교양에서 기본이 되며, 노동계급의 위업에 복무하는 참된 혁명가, 공산주의자 육성의 기본과업이 되고 있다. 계급 교양은 전쟁 실패로 인한 주민들의 사상적 동요를 막고, 김일성 반대세력의 제거에 따른 혼란을 방지하는 도구로서 계급고양이 필요하게 되었다. 계급교양의 기본방향은 첫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리들을 구체적인 현실과 결부시켜 연구할 것, 둘째, 사회주의․공산주의의 필연적 승리에 대한 신념을 갖도록 유물병증법적 세계관을 확립할 것, 셋째, 혁명적 투지와 열정을 불어넣을 것 등이었다.
김일성 반대세력과의 계급투쟁을 위해서 계급교양이 요구되었지만, 사회주의제도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그 제도에 충성하도록 하는 ‘공산주의교양’이 대두되었다. 사회주의 제도의 도입으로 사유재산의 개념이 사라지고 개인의 상업․농업 활동이 금지되자 이에 알맞는 공산주의교양의 필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공산주의 교양이란 “근로자들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낡은 사상잔재와 유습을 완전히 없애고 그들을 로동계급의 혁명사상, 공산주의사상과 도덕으로 무장시키기 위한 로동계급의 당사상교양사업”으로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으로 튼튼히 무장한 참다운 공산주의자로 키우기 위한 교양”로 정의하고 있다. 공산주의 교양을 해야 사람들을 공산주의사회가 요구하는 높은 사상의식의 새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사회주의 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센 저항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계급의식을 높이고 계급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할 수 있도록 교양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 시기의 정치교육은 ‘계급교양’과 ‘공산주의 사상’을 고취시켜 체제에 대한 저항을 무마하여 사회주의 경제건설과 김일성 중심의 단일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김난희, 177-178쪽)
본래 과도기 사회에서 계획은 사회주의와 동일시된다(Damus 1978, 137). 그것은 북한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경제사전 1』1971, 354). 대안의 사업체계는 계획을 대중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 이는 대안의 사업체계가 대중을 계획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명목상 대중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대중의 역할은 내부예비를 찾아내고 생산성을 진작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노동자의 자격으로 관리를 하거나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다. 노동자는 당위원회에 참여하지만, ‘노동자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한다. 이러한 논리를 종합해보면 대중이 계획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곧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과 동일시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대안의 사업체계에서 생산자의 참여는 대중을 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주요한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윤철기, 339쪽)
즉 국가 권력에 의해 조작된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북한의 인민들은 적절한 보상만 주어지면 의례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된다. 의례는 일상화되고 사회 자체가 극장이 되는 것이다. 신화가 창조되는 과정에서 지도부는 당연히 특권을 부여받게 되고, 중간관료와 인민들 또한 과거보다는 더 나은 삶의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사회 전체적으로 역사의 망각을 경험하고, 신화는 부지불식간에 객관화된 역사가 되고 일상은 신화에 기초한 의례로 물든다.
1980년 때까지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수기에 나타나는 공통적 견해 중 하나는 김일성 숭배가 계획적․조작적이라고 인정해도 사람들이 갖는 김일성에 대한 강렬한 애착의 압도적인 증거에 감탄한다는 것이다. 의례의 일상적 사회화가 보여주는 힘이다. 수령은 현지지도를 통해 인민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하게 되고, 인민대중은 위대한 인물과의 접촉에 고무된다. 상징적 권위가 이미 창출되어 있기 때문에 수령과의 개인적 관계를 맺었다는 착각은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시키는 기제가 된다. 물질적 보상이 부족한 상태에서 자기 만족․보람을 표출할 출구로 수령의 바람에 도달하여 인정․칭찬받고, 신분의 상승을 꿈꾸는 현실적인 길을 택하는 것이다.
북한 체제의 다중적이고 다층적이며 세부단위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감시망은 일상을 연극으로 환유한다. VIP로 인식되어 벤츠를 타고 북한 지역을 방문했던 사람들에 의하면 “길거리를 따라서 모든 아이들이 인사를 했고 시골 지역의 아이들도 차가 지나갈 때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는 외국에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의례가 인민들의 생활 속에서 일상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예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례를 생활화시킴으로써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수령에게로 자연스럽게 전이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의례를 일상화․사회화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 택한 정책 중의 하나가 당생활총화이다. 이는 북한의 직장, 학교, 군중단체 등 모든 조직에서 행해진다. 생활총화는 주기별로 2일 생활총화, 주(週)생활총화, 월(月)생활총화, 분기(分期)생활총화, 연간결산 생활총화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공식적 업무․수업 시간 외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치적 지도의 연장이라는 효과를 볼 수 있다.(김준연, 65-66쪽)
북한군은 여느 사회주의 국가 군대와 조직구조는 비슷하지만 창군목적과 배경은 상이했다.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 전통을 계승하며 김일성 주도하에 창설되었고 한반도 공산화와 김일성의 권력기반을 위한 목적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김일성에 의해 주도적으로 창설된 조선인민군은 사실상 ‘김일성 사병화’를 예정하고 있었으며 유일체계확립과정에서 군은 정권보위의 주요기반으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한다. 또한 북한군은 태동시점부터 국토방위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방위적 차원의 임무와는 별개의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은 일인독재체제유지를 위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정권보위를 위한 주요기반으로 정착되었다.(최지헌, 101쪽)
유일지도체계는 절대 권력자인 수령을 중심으로 전체사회가 일원적으로 편제되어있는 의미로써 북한 사회의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북한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일지도체계는 조선로동당을 비롯한 전체 북한 사회를 관통하는 지도체계로서 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전체사회가 전일적인 하나의 틀로 편재되어 있으며 자신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체계까지 갖추고 있는 지도체계를 말한다. 이 체계는 힘뿐만 아니라 자신을 합리화시켜 주는 이데올로기와 사회문화적 정서까지도 스스로 재생산한다. 유일체제란 바로 이러한 유일지도체계가 관통하는 사회체제를 뜻한다.
유일지도체계는 권력 구조면에서 권력의 1인 집중이 어느 체제보다도 강도 높게 나타나고 있다. 유일체계는 한마디로 “수령의 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여 혁명과 건설을 수행하며 수령의 사상과 명령, 지시에 따라 전당, 전국, 전민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수령의 유일체제는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통해서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이의 공식화가 국가주석제이다. 한편,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노동당 규약에는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사상 혁명 사상에 의해 지도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수령의 유일지배체계를 실질적으로 제도화하였다.(최지헌, 22쪽)
북한은 가부장제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정치문화를 소유하고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최고 지도자인 수령을 아버지로, 당을 어머니로 대비하는 등 국가를 ‘대가정’으로 상정하는 유교적 가산 국가라 할 수 있다. 인민들은 어버이 수령에게 충성을 다하고, 수령은 이민들에게 육친적 ‘배려’를 함으로써 ‘사회주의 대가정’인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북한의 정치문화의 특징이다. 김일성은 1960년대 비밀리에 세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1967년 이를 간접적으로 공식석상에서 언급했고, 1974년 김정일을 당 내에서 후계자로 내정했으며, 1980년 에는 이를 대외적으로 공표했다. 북한의 선전 자료들은 김정일이 이미 1960년대초 김일성대학 재학시절부터 후계자로 활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은 1967년 10월 11일 만경대혁명학원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혁명가유자녀들은 아버지, 어머니들의 뜻을 이어 혁명의 꽂을 계속 피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과거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재차 강조하여 후계구도를 굳혔음을 표현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김일성 자신이 “김정일 동지가 모든 업무를 맡아서 처리한다”고 말할 정도로 이 문제를 사실상 매듭지었다. 이러한 세습체제는 김정일이 1997년 10월 당 총비서가 되고, 1998년 9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체제가 공식 출범하면서 완성되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김정일은 3대 체계세습을 통해 권력 이양 작업에 착수했고, 2010년 9월 28일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3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화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하자 북한은 동년 12월 31일 정치국회의를 개최하여 결정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유훈을 받들어 강성국가건설에서 일대 양양을 일으킬 데 대하여>를 채택함으로써 김정일 유훈에 따라 김정은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했다. 2012년 4월 당대표자회와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김정은은 북한 통치의 정점에 위치했다.
북한의 권력세습은 근대화된 서구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주의국가들 가운데서도 유래가 없는 북한만의 독특한 현상으로 단순한 지도자 교체의 의미보다는 ‘주체체제’를 계승하여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음을 시사한다.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로의 세습 당시의 환경과 현재의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으므로 순조로운 3대 세습체제가 안착 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고 할수 있다.(이초롱, 30-31쪽)
10대 원칙은 또한 북한체제가 김일성의 의지를 인민의 생활영역 전체에서 관철한다는 원칙 내지 규범을 가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김일성의 교시는 “모든 활동과 생활의 확고한 지침으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김일성의 교시를 척도로 “모든 것을” 점검하며, “수령의 사상의지 그대로 생각하고 또 행동해야” 했다. 또, “보고, 토론, 강연을 하거나 출판물에 게재하는 문장을 쓸때에는 항상 수령의 교시를 정중히 인용하고, 그에 입각하여 내용을 전개”해야 했다. “교시 집행에서는 무조건성의 원칙을 지켜야”하며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을 척도로 모든 사람을 평가해야 했고 풍모와 사업방법, 사업작풍도 김일성의 모범을 따라야 했다.
이처럼 사회 전체와 주민의 생활영역 전반을 김일성의 사상과 의지에 따라 꾸려가기 위해서 주민들은 수령의 혁명사상을 매일 2시간 이상 학습하는 규율을 철저히 확립하여 학습을 생활화 및 습성화해야만 한다고 유일사상 10대원칙은 요구하고 있다. 또, “조직생활의 격일 및 주간 총화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수령의 교시와 당 정책을 척도로 자기 사업과 생활을 높은 정신사상 수준에서 검토 총화하면서”사상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를 개조해 나가야 한다고 10대 원칙은 명령하고 있다. 주체사상이 인간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북한사회에 수령의 의지가 관철되지 않는 부문은 존재할 수 없었으며, 북한 인민 모두는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모든 활동과 생활”을 해야 했고 끊임없는 자기개조를 통해 수령의 사상과 의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전체주의 정치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다른 형태의 체제에서는 사적인 영역으로 남겨진 부문에까지 당-국가의 통제가 미친다는 점을 들고는 한다. 위의 10대원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북한에서는 다른 어떤 사회주의국가보다도 당-국가의 통제가 광범위한 영역에 미쳤다고 할 수 있으며 당-국가의 통제는 결국 수령의 의지의 관철을 의미하였다.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은 암송만 하면 되는 문건이 아니라 삶의 준거로 여겨졌다. 생활총화를 통해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시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 충성심의 표현이 부족하였는지, ‘자유주의적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출근 시간에 늦었는지, 동료들과 다툼이 있었는지 등을 모두 10대 원칙에 입각하여 비판받고 개선방법을 토론하여야 했다. 당조직 및 근로단체는 소속원이 직장이나 직위를 옮길 때 업무능력과 함께 충성심, 사상동향 등을 평가한 ‘평정서’를 옮겨가는 직장의 당조직으로 보냈다. 인사, 진학 등도 모두 생활 속에서 수령의 사상과 지시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평가하는 바탕 위에서 결정되었다. 그 결과 옥수수를 심는 것도 주체농법에 따라 진행되고, 집을 짓는 것도, 영화를 만드는 것도, 소설을 쓰는 것도, 심지어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해서도 당과 수령이 제시한 바람직한 방법이 존재하며 이 방법에 따라 모든 것이 진행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나아가 사랑을 읊은 평범한 유행가로 보이는 노래도 마지막 절 마지막 구절에는 수령이나 당, 체제를 언급하는 가사를 포함하는 대중문화가 성립되었다.(이상근, 88-89쪽)
국토완정론의 등장은 북한 공산지도부의 혁명전술에서 커다란 변화였다. 4개월전의 건국정강은, 비록 초점이 통일에 놓여 있기는 했으나, 그 주제가 다양하게 분산되어 있고 포괄적이었다. 그러나 신년사의 초점은 오직 ‘국토완정’하나로만 모아져 있었다. 이후 김일성이 신년사에서 밝힌 통일방도는 전체 북한 사회에 강령적 지침으로 작용하였으며 이미 완벽에 가까운 하나의 효율적인 동원체제로 변전된 북한에서 김일성의 호소와 연설은 국가적 교시가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김일성은 민족문화 유산과 관련하여 그 민족주의적 성격을 분명히 밝힌다.“민족 문화 유산에 대하여 허무주의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보전하여야 하며, 문화 유산 가운데서 진보적이고 인민적인 것은 비판적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합니다.…(중략)… 민족문화 유산을 통하여 인민들의 계급의식을 높여 주는 데도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북한의 문화 정책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경향은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일제의 잔재를 극복해야 할 일차적 대상으로 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 민족주의를 토대로 반일주의를 내세우는 것과 동일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일민주의와 국토완정론을 중심으로 한 남․북한 국가형성기의 국가 이념에는 곧 민족주의가 습합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박현모, 39-40쪽)
그리고 이승만의 언급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민족의 초역사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에 따라 그들은 일민주의가 갖는 단군의 홍익인간과 신라의 화랑도, 그리고 3․1정신 등을 언급하면서 신흥국가의 국가이념으로서 일민주의가 갖는 민족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고양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초기 혈연성과 초역사적 성격을 강조하던 일민주의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다양한 이념적 경향과 결합되는데, 반공주의․자유민주주의․친미주의․북진통일론․반일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 중 반공주의는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그것의 이념적 정합성이 논리분석적 차원이 아니라 체험과 기억의 지평으로 치환됨으로써 국가적 통합과 국가적 정통성을 담보해주는 확고한 국시로서 대두되게 된다. 그에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 탄압과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반공주의에 의해 공허한 이념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최고의 국가이념으로서의 반공주의 못지 않게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반일주의(反日主義)와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다. 반일주의는 ‘반공항일(反共抗日)’이라는 자유당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천명되듯이 국가 이념의 중요한 요소였다. 미국이 미-일-한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3층 국제분업체제와 군사안보체제 수립을 위해 한일관계 개선을 종용하고 국내에서도 한일국교정상화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1957년까지도 이승만은 한일 관계의 개선은 곧 일본과의 합병이라고 주장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감정적 반일주의’가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처참한 기억을 동원하는 지배정치이념의 구실을 한 것이다. 반일주의에서 엿보이는 민족주의적 경향은 경제정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외국 물건을 할 수 있는 대로 쓰지 않으며 자기나라 물건을 돈을 주더라도 사다 써서 금전이 나라 안에 떨어져 있게 만들어야 될 것”이고 “물산장려에 힘써야 될 것이며 국민 중에 밀수품을 한 가지라도 쓰는 사람은 민중이 그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1920년대의 점진적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물산장려운동과 국산품 애용운동을 상기시키는 부분이다.(박현모, 36-37쪽) |
첫째, 김일성의 경우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겪은 항일무장투쟁과 권력 장악과정에서 형성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기반으로 자신의 빨치산 동료들을 중심으로 구축된 군부와 공안조직 등 무력기구를 이용하여 북한의 정권을 장악한 후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이론적 근거인 ‘수령론’을 창출하였으며 자신의 다양한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작업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리더십을 완성하였다.
둘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정일은 김일성의 카리스마적 이미지를 전이받기 위하여 ‘전통’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을 사용했다. ‘전통’은 베버(Max Weber)가 주장했듯이 카리스마와 법적 정당성과 함께 정치적 리더가 자신의 권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후계자론에서 주장하는 ‘수령의 뒤를 잇는 영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자신을 아버지인 김일성의 혁명전통을 가장 선두에서 이끌어가는 자로 묘사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또한, 이를 토대로 형성된 자신의 정치적 기반과 아버지의 권위를 이용하여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등 당의 핵심권력기구와 무력기구인 군을 장악함으로써 마침내 전통적 리더십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다양한 이미지 형상화작업을 통하여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구축한 후 정치적 리더십을 완성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 김일성과 김정일의 정치적 리더십의 특징을 통하여 북한의 체제가 어떠한 통제기제를 가지고 유지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물론 북한의 정책결정과정에 이들의 리더십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파악하고 향후 북한의 전략적 목표 및 핵심정책을 유추하여 우리정부가 이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익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위에서 살펴본 김일성과 김정일의 정치적 리더십 형성과정의 특징은 지난 2010년 9월 28일 북한에서 개최된 당대표자회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 김정일의 삼남인 김정은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이번 대표자회 전날 김정은에게 군의 대장 칭호를 수여하고 대표자회에서 그를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및 당중앙위원에 선출하였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정일이 아버지인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전이 받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이용하여 당의 권력기구를 장악하면서 전통적 리더십을 이용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이 후계자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확립함에 있어 당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후계자론’에서는 후계자는 처음에 당의 영도자로 선출되는 것이 원칙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북한에서 혁명운동이 수령에 의해 영도되고 수령의 영도는 당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주장과 관련이 있다.(신동훈, 94-95쪽)
전체주의 국가는 필연적으로 권력을 지닌 소수의 전제적 정치가 되고, 이어 개인숭배가 나오므로,작가는 궁극적으로 권력을 찬양하는 일에 전력 하게 된다. 북한에서 당을 위해 복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월북한 작가들의 운명은 이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동료들의 숙청을 도운 자들만이 살아남아서 뒤에 '위대한 지도자'를 계속 찬양하였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진정한 예술가가 존재할 수 없었다. 예술가로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실제로는 선전선동 일꾼들이며 그들은 북한 주민들이 체제를 위해 충성과 헌신을 할 수 있도록 이들을 이끌어내는 일에 앞장서야 했다.
예술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도덕적이다. 도덕을 부정하므로, 전체주의는 예술을 병들게 하고 전체주의 사회엔 올바른 예술가가 존재할 수 없다. 전체주의의 경제적 질서는 예술에서도 '노동의 지도(direction of labor)'를 동반한다. 개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유롭게 작가가 될 수도 없고 자유롭게 그만둘 수도 없다. 중앙의 계획 기구에 의해 선택된 개인들이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될 수 있고 그들이 하는 일들은 본질적으로 체제에 봉사를 위한 것으로 한정된다. 그들은 선전선동의 일꾼들이 되어야 하며 주민이 아닌 체제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
북한 예술에서의 부자유 이전에 근본적인 자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자유를 얻는다는 것,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조건에서 다른 사회적 조건으로, 즉 열등한 조건에서 우월한 조건으로 상승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유는 사회적 관계를, 사회적 조건의 비대칭성을 나타낸다. 본질적으로 자유는 사회적 차이를 뜻한다. 어떤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피하고자 갈망하는 종속의 형태가 존재해야 한다.(이현주, 49쪽)
⑶ 전쟁 사회주의
그러나 사회주의 공간 기획의 이상(理想)은 그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20세기가 강제한 제로섬(zero-sum)적 체제경쟁은 체제간 무한대결을 최우선의 과제로 만들었고, 그것은 현실에서 ‘안보강화’와 ‘경제성장’의 문제로 구체화되었다. 냉전은 체제경쟁의 승패를 체제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역사적 사회주의체제는 국방력 강화와 경제성장의 동시적 해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는 중공업중심의 급속한 산업화전략, 이른바 스탈린식 산업화전략으로 모색되었다. 체제경쟁과 경제성장의 강박 속에서, 애초의 ‘인간의 공간’은 ‘안보의 공간’으로,‘생산의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스탈린식 산업화전략은 대규모 자본축적과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공간적인 측면에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대)도시 형성, 즉 도시화(urbanization)로 이어졌다. 자원체계가 집중․집적된 대규모 도시공간의 형성은 “응집된 단위경제를 돕고 규모의 경제를 가능하게 하며, 노동생산성의 향상에 필수적”이다. 이는 사회경제체제의 차이와 무관한 근대적 현상이다. 때문에 역사적 사회주의체제 역시 ‘지역간 불균형’을 수반하는 도시화 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사회주의공간은 ‘지역간 균형발전’의 공간적 평등을 추구했지만, 실제로는 산업입지에 따른 지역간 불균형 발전의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불균형 발전’은 사회경제체제의 문제가 아니라‘산업화’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주의 도시화의 양상은 자본주의 도시화의 양상과는 다르다. 사회주의 도시화의 속도와 규모는 자본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리며 작다. 역사적 사회주의체제는 도시화를 자신의 기획과 산업화전략에 맞추어 진행시켰기 때문이다.(대)도시 건설과정에서 고정자본의 투자, 구체적으로 주택․문화․의료․교육․운수 등의 건설․배치는 스탈린식 산업화전략의 관점에서 조정되었다. 조정의 과정에서, 각종 사회간접자본(Social Overhead Capital, 사회기반시설 infrastructure)과 편의시설 등의 건조환경(建造 環境, built Environment)은 ‘비생산적’인 분야로 분류되어 투자의 우선순위에서 제외되었고, 그렇게 절약된(혹은 축적된)투자는 ‘생산적’인 중공업 건설로 이전되었다. 그 결과 교통망과 주거환경을 비롯한 도시공간의 각종 사회기반시설은 ‘저개발’되었다. 정권은 일부 도시의 과도한 성장을 견제한다는 구실로 최소화된 비생산적 건조환경의 투자를 정당화했다.(전동명, 9-11쪽)
생산문화의 측면에서, 식민지 전시(戰時)경제의 경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무라마스히꼬(木村光彦)는 일본과 북한이 “개인의 자유로운 정치․경제활동을 금하고 모든 권력을 국가에 집중시키는”전체주의적 속성을 공통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쟁 시기 행해지는 물가통제, 양곡징수, 배급 등의 경제통제, 항시적인 동원상태, 생활전반을 지배하는 긴박감 등은 식민지 전시체제와 북한체제에도 공통되는 현상이다. 그에 따르면, 해방 이후 북한의 정책은 “통제의 강화, 인적․물적 자원의 국가총동원, 지주제의 폐기, 자산국유화”등의 측면에서 일제의 전시(戰時)정책과 일맥상통한다. 북한 역시 제국주의적 독재와 군국주의 속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의 논의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양문수의 비판처럼, 기무라 마스히꼬의 논의는 일본과 북한 체제에 대한 주민 반응의 차이, 정권에 대한 인민대중의 저항 정도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양문수의 주장처럼 오히려 전시경제의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의 경험을 강조한 오원철의 논의가 좀더 설득력이 있다. 오원철에 따르면 식민지 전시(戰時), 자력갱생(自力更生)방식으로 경영된 공장들은 해방 후 북한 당국에 넘겨졌다. 그 과정에서 자력갱생의 방식에 익숙해진 조선인 기술자와 현장 노동자들 역시 북한 정권의 수중에 맡겨졌다. 식민지 전시생산체제에서 강요된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의 생산문화를 경험한 인민대중은 식민지 조선과 북한체제에서 자연스럽게 공유되었다.
또한 우리는 ‘제국주의’를 온 몸으로 체험한 탈식민지 인민대중의 열정 역시 고려해야 한다. 언어, 역사, 문화, 인종구성에서 강한 동질성을 갖고 있는 ‘한민족’은 잦은 외세침략과 극복의 역사로 인해서 외세에 대한 경계심과 자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이러한 점에서 36년간의 식민지 경험은 ‘한민족’의 민족의식과 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데 주요한 시간이 되었다.‘제국주의/식민지’경험에 기초한 탈식민지 인민대중의 심리는 엘렌 브룬과 자크 허쉬(Ellen Brune and Jacque Hersh)의 주장처럼, 해방 이후 북한에서 “‘고조되는 기대의 혁명’으로 묘사되어온 열기를 수반한 거대한 대중적 열망”을 불러오게 된다. 인민대중의 고양된 민족의식과 민족주의는 북한 지도부가 해방 이후 정권유지와 대중동원을 위해서, 선전선동의 일환으로 끊임없이 (재)생산하는‘반제국주의’담론의 심리적 근거이기도 하다.(전동명, 32-33쪽)
90년대 이후로 북한에서는 관료문화의 변형을 겪고 있다. 이는 북한체제의 작동원리와 직결되는데, 80년대까지는 형식적으로나마 규율이 유지되었다. 상급기관의 명령과 지침을 하달 받고 집행하는데 있어서 드러내 놓고 비공식적 루트를 활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경제난이 과열되자 관료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또는 상급기관에 의해 설정되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공식적 발로를 통한 일탈현상이 심화되고 표면화되고 있다. 또한 목표가 달성된다면 과정이 비공식적이었어도 묵인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공식과 비공식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황이다. 이러한 북한의 과거와 현재의 관료문화의 변화는 북한체제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으며, 그 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이중성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홍민은 북한 관료의 이중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한다. 권력이 관료질서를 만들어내는 도상(icon)의 사용에서 ‘도덕’과 ‘의리를 통해 가장 극적인 이야기를 재현해 낼 수 있기 때문에,‘도덕’과 ‘의리’는 북한 ‘관료적 드라마(bureaucraticdrama)’의 중요한 테마라고 설명한다.그러나 이러한 ‘도덕’과 ‘의리’는 관료들이 그들 자신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외침(cries)’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비공식적 연줄을 통해 수완을 만들어내는 그들끼리의 ‘속삭임(whispers)’이라는 것이다.
담론과 현실에 사이에 끼여(overlapped)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건이 중간관료에게 마련되어있는 것이다. 비공식 영역에서의 일탈행위가 만연하도록, 공식-비공식 영역을 연계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 중간관료집단이다. 물론 기술(旣述)했듯이 극장국가의 무대전면과 후면을 아우르는 수령, 상층관료, 노동자․인민 또한 나름대로의 역할과 소명이 있고, 개인적 목표를 갖고 있으며, 각각의 행위는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분석의 조밀함과 논의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중간관료에 주목한다.
또한 중간관료는 집행단위에서 수령과 지도부가 부여하는 정치적 자본을 활용하고, 상징적 권위를 재전유하며, 일반 주민들을 착취함으로써 자신의 이득을 챙긴다. 중간관료집단은 90년대 이후 급증한 비공식적 루트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출구를 갖고 있다. 박형중에 따르면 중간단위 관료체는 권력 중앙의 조정의 결과를 최말단의 집행 단위 관료세포에게 쪼개어 할당하며, 또한 그것이 실제로 집행되도록 감독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중간단위는 각 분야별로 조직되어 최상층의 결정을 해당단위에서 적절하게 해석하고, 그것을 보다 하부에 전달하며, 또한 하부에서 적절한 정도로 집행되는 것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중간관료는 지도부의 계획을 해석․집행하고, 노동자의 생산 현황을 통제․감독하여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중압감에 항상 시달린다. 하지만, 계획경제의 불확실성이라는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체제하에서 정보의 왜곡․담합과 흥정 등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따라서 중간관료는 상부와 하부의 감시를 받으며, 동시에 상․하부와 공식․비공식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말 그대로 중간에 끼여 있는 중간관료가 창출하는 ‘사회적 사실’에 대한 검토는 북한 체제 전반의 메커니즘을 파악하는데 유용할 것이다.(김준연, 18-20쪽)
현존 사회주의 내부의 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Bochenski 1975, 31). 이는 북한 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북한 내부의 공식 문헌에서 ‘맑스주의’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통칭한다. 사실 북한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의미하며, ‘맑스-레닌주의’라는 표현이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북한에서 마르크스 혹은 마르크스주의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극히 제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특히 마르크스 논의 가운데에 사회주의와 관련된 부분은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되고 수용되고 있다.
북한체제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개념이 가지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첫째, 사회주의를 공상으로부터 과학으로 전환시켰다는 데에 있다(박민성 1999, 41~42). 역사적 유물론과 정치경제학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전복과 사회주의 이행의 현실적인 물질적 조건, 그리고 혁명적 계급의 사명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였다. 사회주의는 사회발전의 필연적 결과에 의하여 발생, 발전하는 사회라는 점을 논증하였으며, 자본주의 멸망의 불가피성과 사회주의 승리의 필연성을 과학적으로 논증하였다(김란희 2002, 41; 오성길 2006, 7). 둘째, 사회주의 사상의 노동계급적 성격을 명백히 했다는 데에 있다(박민성 1999, 42). 사회주의 사상의 혁명적 본질은 바로 그 노동계급적 성격에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주의 사상은 인류 사상 처음으로 가장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계급적 요구와 이익을 반영하고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과 역할을 밝혀주었다. 셋째, 사회주의 사상이 정치사상으로서의 체계와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이후 발전을 위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박민성 1992, 42). 마르크스사회주의 사상은 사적 소유와 계급 발생에 대한 문제, 자본주의 멸망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문제, 사회주의 혁명의 본질과 성격, 조건에 관한 문제 등 사회주의 이론의 기초적 문제들을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하나의 체계 속에서 밝혔다.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혁명정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문제, 과도기에 대한 문제,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에 대한 문제 등 혁명실천에 대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은 ‘시대적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 받는다 (박민성 1999, 42~43). 첫째, 유물사관의 자연사적 사회주의로의 이행 과정에 대한 이해는 사회주의에 대한 물질경제적요인의 작용과 역할을 설명했지만(김란희 2002,41),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의 주체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리성옥 1997; 명은이 1997). 둘째, 마르크스 사회주의 사상이 유럽 위주의 관점이었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한계들은 이후 레닌을 거쳐 주체사상의 확립을 통해서 극복되는 것으로 이해된다.(윤철기, 105-106쪽)
⑷ 북한 사회주의 선동의 파시즘과 유사성
북한이 나치 독일의 괴벨스 선전선동 원칙을 상당부분 원용했다는 사실을 두브(Leonard Doob)의 논문 “괴벨스, 선전의 원칙”(Goebbels, Principals of Propaganda)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첫째, 선전은 지도자에 의해 촉진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북한의 경우 국가 중요 사안에 대한 선전선동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주도적으로 해 왔다. 특히, 김정일은 1973년부터 조선노동당 선전선동 비서를 맡으면서 북한의 선전선동을 실질적으로 관장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이 통치의 주요한 수단으로 선전선동을 최고지도자가 직접 챙긴 것으로, 괴벨스의 선전원칙과 유사하다 하겠다. 둘째, 선전선동은 ‘불안야기 전법’(angststrategy)을 함께 구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북한은 군사력을 앞세워 국내적으로는 강압적 분위기 조성, 대외적으로는 잦은 군사도발과 핵실험 등으로 북한 주민들을 불안감과 공포심을 갖게 하여 선전선동의 효과를 극대화 해 오고 있다. 셋째, 선전선동은 최적의 열망을(optimum anxiety)을 조성하되, 좌절을 주는 메시지는 차단시킨다는 원칙이다. 북한이 90년대 중반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주민들을 결속하게 하고, 이를 반전시켜 선군사상과 강성대국론으로 주민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면서 희망을 갖게 하는 선전선동을 하여 왔다. 넷째, 선전선동은 모든 대중 매체들을 동원하여 반복적(repetition)으로 전개 한다는 원칙이다. 신문, 방송, 잡지, 영화 등을 총 동원하여 동일한 메시지를 매체의 특성에 맞게 다양하게 제작하여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두브(Doob)에 의하면 “자극은 빈번히 되풀이되면 될수록 지각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또한 자극의 반복은 선전 자극과 반응 사이의 관념 결속을 강화 시킨다.”고 한다. 북한도 모든 매체들이 일사분란하게 이러한 원리에 따라 집중적․반복적인 선전선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이기우, 70-71쪽)
독일 총통제 나치즘 역시 북한 독재체제와 비교 시 유사한 점이 많다. 첫번째로 최고 통치자를 신격화 한 것이다. 독일이 히틀러를 ‘타고난 지도자’․‘절대적 복종’등을 강요하는 ‘지도자 원리’를 채택한 것과 유사하게 북한도‘수령은 하늘이 낸 지도자’․‘대를 이은 충성’등을 강요하는 ‘유일적 영도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1974년 이후 지속 고수하고 있다. 두 번째로 독일 나치당이 집권 초기 각 계층별 단체를 조직하여 주민들을 조직화 한 것과 유사하게 북한도 해방 후 각 사회단체들을 통폐합 또는 재조직 과정을 통하여 주민들을 조직화하고 해당 단체들을 노동당의 외곽단체화 하여 정치․사회적 안정을 꾀하였다. 세 번째로 독일이 ‘우월한 국가․민족․인종’이론을 바탕으로‘민족공동체’개념을 정치에 도입한 것과 유사하게 북한도 ‘위대한 수령․당․인민’이론 하에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주창하여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조장하고 있다. 네 번째로 독일 나치즘이 ‘게르만족’우월감을 바탕으로 유대인 등 타 인종에 대한 증오사상을 조장한 것과 유사하게 북한도 ‘조선민족’우월성을 바탕으로 ‘남조선 괴뢰들과 반동 관료배’에 대한 증오심을 조장하여 적화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다섯 번째로 히틀러가 ‘노동의 영예’등 노동을 신성시 하여 노동자들의 열의를 유도한 것과 동일하게 김일성도 상시 노동자․농민들을 찾아 ‘허물없는 대화’로 그들의 자긍심을 높여 생산활동에서 혁신은 물론 김일성에 대한 절재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하였다. 여섯 번째로 나치 정권이 대다수 주민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베르사이유 파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과 유사하게 북한 정권도 주민의 지지와 핵 전력 강화를 빌미로 NPT를 탈퇴하고 6자회담 합의를 파기하는 등 강경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독일 파시즘과 북한 독재체제와의 차이점은 일본 파시즘과 비교한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독일 나치즘이 북한 독재체제에 주는 시사점은 ① 독재체제 활성화를 위해 권력층과 주민 간의 사상이념의 공유․사회적 운명 공동체화․타 민족에 대한 배척 정신․강력한 국가적 통치시스템 등이 필요하다는 점 ② 상시 외부적인‘적’(敵)을 설정하고 주민의지 결집 소재화 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반면 파시즘이나 나치즘은 경제 발전을 통한 주민 생활 향상을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간주하고 성과를 달성한 반면, 북한 독재체제는 군수산업에 집중으로 주민생활은 주민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빈곤의 독재체제라는 점이다.(차성근, 75-76쪽)
프로이트는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설명하고, 우리의 적을 명시하며, 우리의 힘에 집중하게 만들고, 금지된 욕망을 양심의 가책 없이 만족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단순한 정책을 펼 한 사람을 원한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은 적절한 시기에 나타나 적절한 거짓말로 실현 불가능한 삶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과장되게 말하면서 와인이나 사랑보다도 영구히 지속되는 완벽한 존재감을 선사한다. 그와 함께 하는 순간 우리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벗어난다. 불안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유를 느낀다. 이런 극도의 흥분상태를 일으키는 사람은 프로이트의 말처럼 완벽하게 권위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완벽한 자신감이 있고, 어느 누구도 필요하지 않으며, 한결같은 자기만족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히틀러든, 스탈린이든, 마오쩌뚱이든 혹은 과거에 있었거나 미래에 다가올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든 그는 혼란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행해 일치단결과 목적달성을 설파할 것이다. 북한사회의 무의식적 요소는 한 개인의 현실에 대한 이해와 반응은 그들의 과거 경험과 지식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며, 과거와 현재의 이중적인 상호영향은 집단의 구성원들과 사회의 무의식적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지도자들이 위대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따라서 북한 주민들이 그런 위대한 사람의 지도를 받고 있으므로 북한 주민들도 위대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 주민들이 위대하므로 그들의 지도자는 더욱 위대하다는 식의 무의식적인 소망이 김일성의 우상화와 그에 대한 권력 집중에 연결되도록 북한에서는 작동된 것이라고 보았다.(이현주, 132-133쪽) |
북한『로동신문』은 한편으로는 체제와 정권 유지를 위해 최고지도자의 덕성과 치적을 선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대중들의 모범적 사례를 소개하고 전파하여 총체적 노력동원 체제를 유지해 오고 있다. 북한에서 영웅은 김일성과 같이 혁명신화로 숭배되는 ‘혁명적 영웅’과 충성심이 투철하고 모범적인 근로자, 농민, 군인 등을 발굴하여 이들에게 영웅칭호를 부여하는 ‘대중적 영웅’이 있다. 북한 사회에서 대중적 영웅은 선전 매체인『로동신문』을 통해 국가적인 상징 인물로 미화되어 인민들의 노동의식을 고취시키고 국가경제건설 현장에서 근로 의욕을 배가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영웅주의’(heroism)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구호로 나타나는 집단주의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북한도 경쟁적인 사적영역이 없는 비효율적인 체제이기 때문에 노동력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서는 모범적인 근로자를 발굴하여 영웅으로 만들어 인민들의 노동의식을 고취시킬 필요성이 큰 것이다.
북한의 영웅 만들기는 구소련이 농업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근대 산업국가로 발 돋음 하는 과정에서 영웅들을 통해 노동력을 최대한 동원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1930년대 ‘스타하노프(Aleksei Stakhanov)작업방식’으로 대변되는 소련의 영웅주의가 북한 영웅 만들기의 원조 격이다.
북한의 ‘영웅’은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 사회와 집단을 위한 투쟁에서 세운 위훈으로 하여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훌륭한 사람”으로 정의 되어 있다. 또한 북한에서의 ‘영웅주의’는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무한한 헌신성과 용감성을 발휘하는 자기희생적인 사상과 행동을 말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이기우, 74-75쪽)
북한은 체제 유지와 권력 세습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국가기구들을 동원하여 통치자의 의도가 숨겨진 담론, 즉 언어를 통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확대․재생산하는 구도를 철저히 관철해왔다. 이데올로기는 언어에 의해서 권력으로 하여금 폭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권력이 폭력을 행사하였을 때도 이데올로기는 언어에 의해 그 폭력을 권리, 필연성,국시(國是)로 보이게 함으로써 폭력을 정당화시켜준다.
북한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은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권력세습 정당화에 기여하고 있다. 북한에서 담론은 최고지도자와 노동당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계급이 의도적으로 이념과 사상, 정책 내용 등을 내포한 이데올로기를 언어를 통해 확산하는 중요한 통치행위에 속한다. 따라서 북한의 통치 담론은 대부분 환상과 왜곡된 사실을 피지배계급에게 주입시키고, 이를 통해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즉, 북한 사회는 지배계급이 언어를 통한 담론을 확산하여 피지배계급의 자발적인 순응이 반복적․지속적으로 이뤄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 담론 확산에 북한은『로동신문』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 특히 김일성, 김정일 사망 직후부터 권력 세습과 체제의 연속을 위하여『로동신문』을 통해 세습의도가 내포된 어구(語句)들을 사용하여 인민들을 세뇌하였다. 하나의 예로 북한『로동신문』은 김일성 사망 이틀 후인 1994년 7월 10일자 4면에 시(詩)“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를 게재하고,“김정일 동지, 그 이의 두리에!,김정일 동지, 그이와 더불어 수령님은 계신다! 수령님은 계신다!”로 보도하였다. 여기서 ‘함께’,‘계신다’는 표현은 북한 인민들로 하여금 비록 김일성은 사망하였지만 그의 사상이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김정일로의 세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언어적 표의(表意)인 것이다. 즉, 북한지도부는 선전선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를 숨긴 다양한 어구(語句)들을 지도자 사망 이후 한 달간 집중적으로『로동신문』의 기사들을 통해 보도하였던 것이다.(이기우, 134쪽)
대중에 기반을 둔 전체주의적 독재는 대중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획일화하려는 권력의 욕망과 대중 자신들의 개별적인 이익들(예 :정치적 질서 유지와 졍제적 복지)을 추구하려는 대중의 욕구가 합일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파시즘과 같은 현대의 전체주의적 독재는 아래로부터의 지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과거의 전제정과 같이 비합리적인 강제적 힘의 행사가 아니라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지배 메커니즘들을 통해 대중의 꿈과 희망을 대변하여야 한다. 일본 천황제 파시즘 형성 과정은 현재 북한의 선군정치에 의한 일인독재체제 형성 과정과 일련의 유사점을 보인다. 첫 번째는 군사중심의 독재체제는 항상 국가 위기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일본이 1929년 경제대공항으로 26년간 발전시켜 온 다이쇼데모크라시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의 성과가 대량 실업사태로 변하는 경제적 공항시기에 ‘황도’․‘국체’․‘가족국가관’등을 통한 파시즘을 탄생시킨 것과 유사하게 북한도 동구권 몰락과 김일성 사망으로 이어진 ‘고난의 행군’시기 김정일이 절치부심(切齒腐心)끝에 ‘선군정치’를 주창하면서 군력을 중심으로 한 독재기강 강화 및 ‘강성대국’기치를 내걸었다.두 번째로 독재의 중심에 대한 신격화 이다. 일본이 천황을 살아있는 신(神)으로 추앙하고, 국민과 국가의 아버지로 일본 전체를 하나의 대가족으로 신격화 한 것과 동일하게 북한 역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민족의 태양’․‘자애로운 어버이’등 살아있는 신으로 모시고 북한을 하나의 대가정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세 번째는 선전도구를 활용하여 주민의 민족성을 이용 독재체제에 열광토록 만든 것이다. 일본이 경제공항으로 삶이 고단해진 주민들에게 천황 숭배․일본 민족의 황도사상․대륙으로 진출을 통한 경제난 극복 전망 등을 제시하여 대부분의 주민들로부터 파시즘에 대한 열광을 이끌어낸 것과 유사하게 북한은 지도자 숭배․조선민족 제일주의․대남적화통일을 위한 군사력 강화․핵 능력에 의한 자부심 등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로부터 충성을 유도하고 있다. 이 과정에 선전보도 수단들을 독재체제의 정책 설명에로 적극적으로 투입한 사례도 유사하다.(차성근, 70-71쪽)
북한에서 노동당의 일당 독재는 지도자에 대한 신격화와 동시에 수반되는 과정이다. 북한은 혁명운동의 기본 구성을 수령․당․대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서 수령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혁명 원리에 입각하여 지도자에 대한 신격화와 병행하여 지도자의 근로대중에 대한 지도역량인 노동당의 역할과 위상 강화를 중요한 과제로 추진해 왔다. 해방 후 김일성은 소 군정의 방조 하에 정당인 민주당과 청우당의 우파들을 제거하고 공산주의 운동 추종자들을 두개 정당의 요직에 앉힘으로써 위성 정당화하였다. 또한 노동당 규약과 헌법에 노동당을 김일성가문의 사당화하고 全사회에 대한 노동당의 유일적 영도 체계 항목을 명문화하여 체제의 질적인 변화가 없는 한 노동당은 영원히 북한 전체에 대한 일당 독재가 보장되도록 하였다. 당의 영도적 지위와 역할로 하여 김일성은 해방 후부터 당내 분파 청산을 통한 사상과 의지의 통일과 단결을 가장 중요하게 추진하였으며, 김정일과 김정은 후계체제 시작도 당 주요 직책을 부여 받아 전체 사회에 대한 지도력 행사 과정이었다. 노동당은 당대회, 당중앙위원회․당중앙검사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비서국 (비서 9명,전문부서 20개), 검열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로 구성되어있다. 노동당은 권력기관은 물론 사회단체, 사회 저변까지 당 세포․부문당위원회․분초급당위원회․초급당위원회․당위원회로 조직되어 있으며, 모든 기관과 단체, 주민은 해당 당 조직에 소속되어 정치생활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북한군에는 총정치국을 위시하여 연대∼군단에 당위원회, 중대 (전방부대는 소대)∼대대 당 정치부가 설치되어 군정․군령 등 모든 군사활동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한다. 총정치국은 중앙당 조직지도부 군사과의 통제를 받으며 총참모부와 인민무력부는 중앙당 군사부의 통제를 받는다. 보안 기관 (국가안전보위부․인민보안부)는 중앙당 조직지도부 행정과의 통제를 받는다.(차성근, 102-103쪽)
지도자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의리’化․‘양심’化 관련 북한주민의 경우 일제식민지 하에서 버림받고 천대받던 자기들을 해방시켜주고 ‘자긍심’을 안겨준 수령과 당을 위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인간의 의리이고 충성이며, 참다운 애국이라는 가치관이 유아기로부터 강요당하고 있으며, 북한 당국이 역사를 날조하고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김일성가문을 ‘위대한 인간’․‘위대한 지도자’로 호도 선전하고 있는 현실이어서 변화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하였다.
전통적인 ‘외세 배격’성향과 ‘자력갱생’이 체제 고수의 ‘만능 보검’관련 ‘외세 배격’을 통한 ‘주체적 정통성’확립은 북한체제의 ‘정당성’과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선전선동방식 가운데 하나이며, 결과적으로 북한주민은 ‘내 나라 내 강토에서 스스로 만든 경제적 수단으로 행복을 가꾸는’한편,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외세가 북한을 침략한다면 ‘자체의 힘과 기술로 개발한 핵과 미사일’로 한국과 미국을 초토화 시켜 버리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증오심과 항쟁의 입장이 강하다는 점에서 스스로 변화시킬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하였다.
철저한 인사관리 체계로 지배층 조직 공고화 관련 중앙당 조직지도부와 간 부부가 당․군․정을 포함한 전체 조직과 단체에 대한 인사권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으며, 하부 말단 당 조직에까지 인사 전문가들이 평생 동안 업무를 수행하고 있어 전문성이 높고, 인사 결정이 부서 책임자가 아닌 당위원회라는 집체적 협의체를 통해 결정되며, 인사관리에 대한 비밀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등 인사체계가 지배층 강화에 지속적인 순기능 작용을 하고 있어 변화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강력한 선전선동 체계 변화 가능성 관련 유치원 교육부터 대학은 물론, 직장에 배치된 이후에도 정기적인 보수교육체계와 각종 사상학습이 지속 이루어지는 등 현재의 선전선동 체계가 지속 유지할 것으로 평가하였다.(차성근, 288-289쪽)
당에 대한 충성심을 각성시키기 위해 당을 위해 헌신하는 ‘노력영웅’에게 당은 출세를 보장하였다. 계급과 신분을 뛰어넘는 출세는 당에 의한 발탈이외에는 없었다. 주민들은 당만을 바라보았고 당은 주민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리더쉽과 역량을 보여주었다. 정치사회화와 당의 선전선동은 집단의 구성원인 주민의 힘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다.
북한의 절대적 집단주의는 집단의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한 집단주의가 아니라 집단의 현 상태를 유지하며 지도자를 보호 옹휘하고 나아가서 사회주의 건설을 확대시키기 위한 집단주의 즉, 체제를 위한 절대적 집단주의이다. 절대적 집단주의에서 모든 주민들은 당의 규범을 인지하고 당의 규범에 의하여 강하게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야했고, 당을 위한 절대적인 충성과 헌신을 해야 했다. 그 결과 북한은 경제난과 대량아사에도 체제유지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주의는 굳건하게 세워져서 험한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겨낼 힘을 제공하였다. 집단이 흔들린다는 의미는 북한에서 주민의 삶의 터전과 생계가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므로 집단은 흔들릴 수 없었다. 집단주의는 가장 진보된 생활양식이며 주민의 안전한 내일과 체제의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었고 체제는 주민들의 의심을 허용치 않았다. 북한의 식량난과 김일성 사망하기 전까지 북한 집단주의는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 왔다.(이현주, 189쪽)
앞의 내용에서 소개하듯이 일제시기 실시되었던 강권정치이든 문화정치이든 조선인의 복종과 관리 편리성의 실현을 최종 목표로 하였다. 표면적으로 조선인에 대한 문명화를 추구한다고 하고 실질적으로는 민족동화만 극단적으로 추구하였다. 그리고 조선인에 대해 권리의 평등을 부여하지 않고 의무의 평등만 강요하였다. 이는 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에서 조선인이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인이 부담하는 모든 의무를 동일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비평등적 식민 통치는 조선반도에서 36년 동안을 지속하였기 때문에 조선인의 민족 자존감을 지대하게 약화하였다. 그리고 지방 명망가층에 의한 지방자치 질서를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망가층의 권위와 지위도 심하게 파괴하였다. 지방자치의 파괴는 조선인 최하층에 대한 일제 중앙집권에 의한 직접통치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시기 조선의 정치는 더 이상 전통의 윤리에 따르는 군-신-(명망가층)-민이라는 간접적 또는 일정한 자율성을 지닌 통치가 아니라, 일제 총독부의 명령에 의한 획일적인 강압적 동원 정치로 변모하였다.
결과적으로 일제시기 한국의 국가 관료제 정치문화는 아래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첫째, 기존의 권위성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단지 조선 전통의 권위주의 정치문화 패러다임에서 ‘명분’에 의해 정당성을 획득하는 지배층의 권위를 대신해 무단에 의해 정당성을 획득하는 일제의 권위를 지배 권좌에 앉히는 것이다. 둘째, 관료제의 위계성은 유지되면서 경직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시대 왕권은 지고지상에 있었으나 양반계급으로부터 제약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의 복종을 최종 목표로 하여 수직성이 강한 관료정치체제를 통해 조선인 사회를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 일제 정부에 대한 반대가 허용되지 않고 총독부 명령과 포고에 의해 획일적으로 움직여야 하였다. 관료들은 총독부의 식민지 칙령에 따라 움직여 통치의 도구로 전락되었다. 셋째, 관료제 통치의 수직성은 강화되었다. 이는 일제의 직접적인 통치의 또 하나의 지대한 영향으로서, 가정 및 가정의 외연 즉 부락(部落)을 중심으로 형성하는 지방자치를 파괴하면서 가정에 은둔하는 유교체계를 파괴시킴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러한 수직적인 통치의 하나의 중요한 영향은 한국인의 정치적 삶을 가정에서 국가로 이끌어 나가게 하였다. 특히 일제 신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는 가정에 은둔하는 내향적 성격을 바꾸고 외향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구세대의 내향적 성격의 구속으로 인해 젊은 세대는 밖에서 외향적, 가정에서 내향적 성격이라는 이중성을 보였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외향성에서 일제체제에 순응하는 정향보다 저항하는 정향이 더 두드러졌다. 이러한 점은 일종의 민족주의 정치문화로 볼 수 있다.(유사, 104-105쪽)
북한의 체제 내 종교인들은 남한의 종교인과의 접촉하면서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종교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적인 지원을 받은 체제 내 종교들은 북한 내에서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북한에서 종교인의 자녀라 하더라도 이전처럼 크게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정도까지 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향후 경제적인 요인은 북한의 종교지형을 바꾸는데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북한종교 지형 변화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의 자유이다. 하지만 북한의 현 체제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서구적 수준에서의 종교 자유는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종교의 존재가치는 공산주의 사회가 실현되는 시점까지의 과도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하지만 종교는 종교내적 역량이 있다. 북한체제 안에서 생존하고 있는 종교인들이 남한의 종교인들과 접촉하고 교류하면서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간다면 종교지형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종교지형 확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를 확장시켜야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에서 종교의 자유가 확산되도록 헌법적 토대인 종교의 자유 속에 전교와 교육활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법적 변화를 위한 방안을 강구하여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하고, 북한에 기존해 있는 체제 내 종교들이 적극적인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인도적 지원을 강화하여 그들과 공동으로 봉사활동을 함께 진행함으로 종교 활동의 자유를 확산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한국의 각 종교단체들은 북한의 종교단체와 공동전교지침을 마련하여 이 전교지침대로 북한 주민이 전교활동에 참여하여 종교적 경험 영역을 넓혀나가 종교자유가 실현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세계종교사의 변화는 체제나 주위 환경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독특한 영성을 소유하거나 특별한 종교적 감성을 가진 종교지도자가 나와 그 종교의 지형을 변화 시키고 확장시키는 일들이 있어왔다. 북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종교지도자가 체제내 종교 가운데서도 일어날 수 있고 그 지도자가 지하종교인 가운데서도 잠재되어 역사할 수 있다. 종교는 체제 초월적이며 초이성적인 영성에 의해 존속해왔기 때문에 북한의 종교지형도 이에 같은 현상을 통한 변화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송원근, 141쪽) |
국가의 급속한 경제개발과 자본주의 경쟁 체제에서 가족집단들은 경제적 이해를 극대화하고 신분상승을 꿈꾸며 원자화된 분열의 생존 게임을 치러야 했다. ‘나만이’라는 생각이 심하게 나타날 때 ‘여러 개의 나만이’가 충돌한다는 것은 바로 원자화된 가족집단의 경쟁과 대립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성과에 힘입어 성장한 신중간층의 가족들에게 이러한 가족주의적 가치는 개인과 가족의 신분 상승과 성공을 위한 중요한 자산으로서 이해될 수도 있다. 1960년대 후반 경상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올라와 세탁소 등을 운영하여 부를 쌓았고 현재는 주유소와 대형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한 응답자(남, 68세)는 산업화시기에 신중산층으로 상승한 한 예이다. 그는 “가족의 소중함은 누구에게나 인지상정 아닌가요. 현재도 그렇고. 단지 그 때 더 심했던 것뿐이죠 … 딴 생각 없었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허드렛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고 내 가족 외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이들과 가족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 되는 것이라 생각했고 당연한 것이지요. 이런 생각은 좋은 것이며 제가 힘들게 성공해 온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이같이 산업화의 경쟁체제에서 가족주의적 가치는 원자화된 가족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는 가족의 성공과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가치로서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치 및 행위 지향이 궁극적으로 전체 사회구조에서 분열, 경쟁 및 갈등의 양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산업화 시대 남한의 가족주의의 기본 특징이었다.
이러한 경쟁적 사회구조와 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핵가족문화 속에서 개인은 살아남기 위해 가족집단의 도움이 필요했고 개인은 사회에서도 가족집단의 성원으로 인식되었다(함인희, 2009: 60). 사회 속에서 빚어지는 개인의 경쟁은 곧 가족의 경쟁이었고, 가족의 경쟁은 사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1970년대 후반 서울에 거주하며 화이트칼라로 일했던 한 응답자(남, 63세)는 “직장에서 경쟁하고 출세하기 위해서라도 가족과 집안의 도움이 필요했고 사회에 나가서도 결국엔 가장은 집안의 성원으로 규정되고 와이프는 가장이 성공하도록 노력하는 조력자”였다고 지적했다. 사회경쟁 체제에서 남편의 지위와 직급으로 아내의 지위와 직급이 결정되었고, 이는 급속한 양적 경제성장과 출세지향적 가치관이 개인의 사회적 삶으로 투과된 결과였다. 앞서 언급된 신중간층으로 상승한 응답자의 아내(62세)는 가부장적인 남편의 생각에 이의를 달지 않았으며 남편을 중심으로 가족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녀에게 있어 가족은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고 이러한 신념에 의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가족의 행복이 제 행복이고 가족이 잘 되려면 바깥양반이 잘 돼야지요”라며 여성의 종속화와 주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산업화시대의 가부장제하에서 여성에게 가장인 남편의 출세와 성공은 가족집단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춧돌이었다. 이러한 여성의 주변화를 통한 가부장적 가족주의 가치는 도시 노동자층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발견되었다(장미경, 2004: 109~110). 원자화된 경쟁속에서 발전한 근대 가족주의와 여성의 종속화는 사회계층과 거주지역의 차이를 넘어 나타났던 공통된 현상이었다.(강진웅, 155-156쪽)
⑸ 친일 반동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은 법령은 아니었지만 반동분자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법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기본원칙』제20조는 인민위원회와 인민을 위협하는 온갖 범죄와 ‘반동분자’를 처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제20조는 1946년 중반부터 1947년 초까지는 북한체제와 토지개혁 등 민주개혁 반대자와 서북청년단 등 남한관련자에게 ‘반동죄’나 ‘반동선전선동죄’등 에 적용되는 법조항이었고, 1947년 중반부터 1948년까지는 월경안내, 물자이남반출 등 남한과 관련된 ‘반동범’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리고 반동분자는 1948년부터는 정치적인 사안보다는 점점 경제적인 사안에서 더 많은 자들이 규정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남한과 관계가 가장 큰 변수였다.
신의주사건이후부터 일부 종교인들이 감시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범법행위, 남한종교인 혹은 몰수지주와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반공연설내용 등 개별적인 차원의 ‘반동선전․선동행위’만 처벌하였다. 형법은 헌법제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준비되었지만 1950년 3월이 돼서야 완성되었다. 형법의 기본적인 특징은 첫째 사법치안의 실무경험자와 법률전문가들이 노동당의 영향하에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형법의 ‘사회적 위험성’과 ‘유추적용’은 처벌상의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국가주권적대죄가 ‘반동분자’처벌의 근거가 되며, 특히 제79조는 한국전쟁이후에 ‘반동분자’처벌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반동분자’의 역사적 기원은 반탁세력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북한 사회의 내부갈등보다 미소간의 협력과 갈등 관계 속에서 ‘반동’세력이 등장하였다. 즉 반탁세력=반공반소세력=반동세력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전에도 반동분자라는 표현은 있었다. 반동분자는 친일파, 신구민족반역자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간혹 친일적 반동분자로도 쓰였지만 이는 반역지주 혹은 반동지주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반탁세력이 등장하기 전까지 자주적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정책은 친일적 반동분자라도 언제든지 정권 안에 흡수할 수 있는 세력들이었다. 그러나 반탁세력들은 ‘반동분자’로 규정된 후 정치 사회적으로 배제되기 시작하였다. 북한에서 ‘반동분자’세력으로 호명되었던 자들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되었다. 첫째는 반소 반탁세력이었다. 둘째는 정부시책에 대한 반대세력 예를 들면 토지개혁 혹은 민주개혁 반대자와 정부 혹은 당내 부정․부패자 혹은 철직자 등이었다. 세 번째는 1947-48년 인민경제체제 강화정책은 일반 경제범도 ‘반동분자’로 호명되었고 네 번째는 남한과 연계된 세력들로, 1949년 이후 군사력 강화정책은 남한과 연관 있는 정치적 ‘반동’범들을 ‘반동분자’로 호명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감시대상자가 되었다. 반동분자가 모두 처벌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 증 범법행위가 드러난 자 혹은 범법행위를 하려는 자들이 처벌받았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남한지역의 ‘반동분자’는 내무성 고시에서 나타나듯이 남한정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자들 특히 사법과 치안조직 구성원들을 지칭하였다. 그 중 청년단조직 예를 들면 서북청년단원, 민보단원, 대한청년단원, 경찰정보원, 밀정 등과 미군의 첩보기관과 관련 남한 첩보 조직원 등 그들이었다.(연정은, 234-236쪽)
다시 말하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의 각종 도발의 책임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있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 군사적 도발과 우리의 대북정책의 함수관계가 크지 않다. 즉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대남 군사적 위협 또는 도발을 계속했으며, 남북 간 군사적 신뢰구축 협상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는 데에서 잘 알 수 있다. 또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여 년 동안 강력한 대북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동안 핵위협 증대 등 대남 군사적 위협은 높아졌다. 사실 북한의 대남 도발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탓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정부가 이전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으로 회귀할 경우 북한이 대남 군사적 위협을 중단하고 정상적인 남북관계를 위해 변화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대남 군사적 위협을 강화하는 의도는 한반도 불안정을 조성하여 남북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장악하고 우리 정부를 굴복시키겠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도로 보여 진다. 특히 북한이 대남 군사적 위협을 강화하고 도발을 일으키는 것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북한 내부에 있다. 북한 경제는 김정일이 정권유지를 지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한 해결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오히려 악순환에 걸린 북한 경제는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다. 우리가 대규모 경제지원을 한다고 하여도 북한 경제를 회생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김정일 정권을 강화시켜 핵능력 증대 등 대남 군사적 위협을 높여 나갈 것이다. 따라서 북한을 포용하느냐 하는 대북정책의 논쟁과 북한의 대남 군사적 도발에 대비하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북한의 대남 군사적 위협과 도발에 대하여 우리 정부는 다음과 같은 방향을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우리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도발 억지를 위한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통해 북한의 추가 도발을 억제하고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야 할 것이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 사례에서 우리 정부와 군이 보인 문제점은 전쟁으로의 확전을 방지하려는 지나친 수세적인 대응으로 인하여 북한의 도발에 대한 우리의 대응 범위를 스스로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전쟁협박과 전쟁옵션을 지속 유지시키며 도발 요인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의 도발에 대해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보복능력, 성공 가능성, 응징 방안 등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없이 사건이 발생하면 강경대응을 호언하고 사태의 종결 시에는 외교적 대응조치 및 국민궐기대회 등으로 북한의 호전성을 규탄하는데 그침으로써 국민들과 북한으로 하여금 정부의 신뢰성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주변국들에게 호전적인 인상을 남기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전략은 위험고조의 위험성은 적었지만 북한이 공세적 위기도발을 계속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인식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 북한의 모험주의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적극적인 대응전략을 마련하여 국가전략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즉 북한의 여하한 형태의 대남군사도발도 응징이 뒤따른다는 우리의 정책의지와 사활적 이익이 침해되었을 때 군사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대응전략의 대안을 개발해야 한다.(이초롱, 124-126쪽)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취지와 성격에 대한 최창익의 인식은 “일본제국주의가 남겨놓고 간 일체 타락적․말세기적․퇴폐적 유습과 생활태도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족적 기풍을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한 김일성의 주장을 계승하였다. 김일성에 따르면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새 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정신상 대개혁”이자“새 민주조선의 국민다운 정신과 도덕적 전투력을 창조하기 위한 사상혁명”으로서, 사상영역의 과거청산과 대변혁을 모색한 의식개혁운동이었다. 그를 비롯한 여러 논자들이 일제가 남긴 사상적 잔재의 청산을 통한 새로운 인민의식 창출과제를 역설하였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국가건설운동과 인민들의 의식개혁에 걸림돌이 될 체제내부의 이질적 세력을 투쟁대상으로 설정하였다. 먼저 청산의 일차적 대상인 친일파와 토지개혁기에 축출된 지주층과 남한의 극우세력이 지목되었다. 그들은 체제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경계된 대상이었다. 일부 지도층과 일반 군중도 투쟁대상에 망라되었다. 그 범주에 포함된 지도층은 개인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관료주의자”와 “이색분자(異色分子)” 등에 집중되었다. 논자들은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그들의 적발과 숙청을 통한 당․정기구의 조직․규율 강화에 기여하리라 전망하였다. 인민대중에 대해서는 게으르고 기만과 사기의 습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인민위원회의 지시를 무시하고 공공자산을 낭비하는 부류가 투쟁대상으로 설정되었다. 동일한 인식의 연장에서 당시 남한 좌익진영도 그 운동을“거리에서, 직장에서, 농촌에서 건달꾼들을 숙청하자!”는 슬로건 아래 전개된 캠페인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전인민적 의식개혁운동의 당위성을 뒷받침하고자 다양한 이론적 논의들이 개진되었다. 먼저 해방직후에 부각된 인민대중들의 사상적 결함이 국제정세를 통해 더욱 심화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해방과 민주개혁이 연합국과 소련군의 지원 아래 실현될 수 있었던 국제정세의 유리한 측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인민대중들이 국가건설의 난관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그러한 진단으로부터 국제정세를 위시한 객관적 조건이 국내의 주관적 조건을 앞서 왔으며, 인민대중들의 주관적 사상관념이 객관적 현실정세의 인식에 뒤쳐졌다는 논리가 도출되었다. 따라서 그러한 논리는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국내의 주관적 조건을 개혁하고자 즉 인민대중들의 주관적 사상관념을 개혁하고자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김재웅, 49-50쪽)
그러나 인민위원회 내 지주출신 간부들의 입지는 등용 직후부터 매우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강원도 인제군지역 지주출신 인민위원들은 모두 당선 직후에 파면되었다. 1947년 4월 3일 북로당 인제군 북면위원회는 지주출신 4인, 소시민출신 1인, 빈농출신 8인, 노동자출신 3인 등 총 16인으로 구성된 북면인민위원회의 지주출신 위원들을 모두 파면하라고 지시하였다. 인민위원회의 위신 저하와 타직원들에게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 등이 파면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게다가 북면인민위원회의 사업부진 원인까지 그들에게 전가되었다. 파면된 간부들 가운데 두 명은 결국 월남을 감행했다. 지주층은 당․정기구 뿐만 아니라 사회단체인 농민동맹에서도 축출되기 시작했다. 1946년 12월 중순경 북로당중앙상무위원회는 농민동맹에 가입한 지주출신자들의 조사와 즉각적 제명을 지시하였다. 북로당의 관점에서 그들은 “농민의 가면을 쓰고 조직 내에 잠입한 분자들”이었다.
토지개혁 이후 지주층 축출이 가장 큰 규모로 단행된 곳은 농촌사회였다. 앞서 지주층 축출이 법령에 따라 철저하게 추진되지 못했음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격화와 함께 재개된 축출사업은 매우 엄격하게 단행되기 시작했다.
토지개혁기의 축출자 규모를 훨씬 넘어섰을 만큼 광범위한 규모로 이루어진 재 축출사업은 경작지 5정보 이상을 소유한 불로지주층에 국한되지 않았다. 소유면적이 5정보에 미치지 못해도 지주 혐의를 받은 이들은 축출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를테면 작인을 매수하여 경작지 2정보 남짓을 임대해오던 어느 상인은 발각과 함께 “백리 밖”으로 축출되었다.) 이제 축출된 지주들이 귀환하더라도 재축출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1947년 4월경 북로당 강원도 인제군 북면위원회는 귀환한 지주들을 다시 축출하라고 경찰기구에 지시하였다. 인제군지역의 불로지주 축출운동이 고조된 시기는 1948년경이었다. 인제군 북면 월학리의 한 간부는 자신의 관할지에 남아 있던 불로지주들이 1948년경 모두 축출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인제군당의 한 문건도 “1948년 각처에서 불로지주들이 축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로지주 축출운동이 고조되고 있다는 1948년경의 정황은 인제군만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일고 있었던 일반적 현상이었다. 이른바 “제2차 토지개혁”으로 불린 1948년경 농촌사회의 과열된 계급투쟁은 북한 각지로부터 월남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미군첩보기구 G-2에도 알려질 수 있었다. 평안남도 성천군의 한 지주출신 가호에 전달된 축출통지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귀 가호의 사례는 토지개혁법령 제3조 ㉠항에 속하므로, 동법령 제2조에 따라 1947년에 이미 타군으로 이주를 완료해야 했다. 그러나 귀 가호는 법령을 위반한 채 이주를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다. 귀 가호는 1948년 3월 30일 오전 9시까지 이전 통지서에 언급된 곳이나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 1948년 3월 29일. 성천군인민위원장.” 이 통지는 1947년경 축출대상 가호에 포함되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은 가호를 정리하는 마지막 수순이 1948년 3월 말에 집행되었음을 보여준다.(김재웅, 123-124쪽)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의 의도와 목표는 점령지역에서 어떠한 과업을 수행했는가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 북한이 남한에서 진행한 점령정책은 북한에서 진행된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다. 김일성은 남반부를 '리승만 역도들'의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고 남반부에 진정한 인민정권인 인민위원회들을 부활시킴으로써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기치하에 강력한 민주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남한 점령은 사전에 준비된 점령정책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북한은 먼저 점령지역에서 조선로동당의 하부조직을 복구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민군의 진주 이후 파견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당 조직이 복구되었으나 대부분 토착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직이 부활되었다. 북한의 남한 점령시기 경기도 동면에서 진행된 당 조직의 건설에 관한 보고를 보면, 이 지역의 당원은 약 250명 정도였으나 남로당이 불법단체로 지명되면서 약화되어 1950년 8월 현재 당원은 10여명에 불과하였다. 보고자는 당 조직을 재건하기 위하여 세포 1개를 조직하고 노동자와 빈농들을 대담하게 당에 흡수할 것에 대해 보고하였다. (정일영, 105쪽)
혁명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주체사상을 구성하던 요소들인 현실에 대한 설명, 미래에 도달할 세계의 모습,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의 세계에 도달할 방안 중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는 현실에 대한 설명만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완전한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 이루어진 공산주의사회라는 미래상은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수령과 당의 지도하에 노동계급의 선도에 따라 인민대중이 투쟁한다는 미래적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수정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순수 이데올로기로서의 주체사상과 실천이데올로기로서의 선군사상이 병존하고 있다는 일부 연구자들의 주장이나 주체사상이 여전히 “혁명과 건설을 영도하는데서 지도적 지침”이라는 조선로동당 규약의 문구와는 달리 김정일 시대를 거치며 주체사상이 실천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은 물론이고 순수이데올로기로서의 위치조차 실질적으로는 위협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체사상은 명목상 조선로동당과 북한의 이데올로기로 유지되고 있지만 그 내용을 통해 북한체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능력은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주체사상은 순수이데올로기로서든 실천이데올로기로서든 온전한 체계를 갖춘 북한의 지배이데올로기라고 보기 어렵다. 책 속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 필요한 부분만을 꺼내서 쓰는 이념적 도구일 뿐이다.(이상근, 84쪽)
먼저, 국가주도의 개혁과 통제는 농업협동화운동과 천리마운동 등의 전국민동원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을 거친 후 북한은 중소 및 동구 사회주의권의 원조에 힘입어 전후복구사업을 성공리에 마쳤고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농업협동화운동을 마무리했다. 실제로 협동화를 거부하며 소를 도살시키는 등 사회주의 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황해도 ‘배천바람’과 같은 저항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개혁은 국가의 강압과 다수 빈농 및 소규모 자영농들의 지지에 의해 마무리될 수 있었다(김남식, 1972; 김성보, 2000). 농업협동화가 완료됨에 따라 사적소유 구조가 완전히 철폐되었고, 이에 따라 가족집단들은 경제적으로 국가적 소유와 통제에 종속되었다. 이와 함께 1960년대에 전성기를 이루며 1970년대까지 이어진 북한 사회주의 총건설 노선인 천리마운동은 국가와 당을 중심으로 하여 대중조직과 직장, 학교, 사회단체, 인민반 등 여러 다층화된 사회 연결망을 구축하면서 가족집단을 사상적으로 동원해 나갔다(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376). 특히 국가와 대중을 연결하는 전형적인 인전대로서 각 계급, 계층별 핵심 조직을 망라한 북한의 대중조직은 1970년 인구 약 1,400만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전체의 약90%를 차지할 정도의 대규모 사회 연결망을 형성했다(국토통일원, 1979: 45).
이러한 사회변동에서 정치적인 유인은 경제적인 것과 분리되지 않았다. 가족의 사상, 계급적 출신성분과 정치적 지위를 중요한 사회통합의 기제로 활용한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개인과 가족의 경제적인 향상은 정치사상적인 지위와 토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정치․경제적 유인의 일치 속에서 개인들은 가족집단을 중심으로 국가적 지배에 정치적으로 순응해 나갔다. 이러한 가족집단에 대한국가의 지배 전략은 ‘가정의 혁명화’ 정책 등의 통합 전략과 적대계급에 대한 통제 전략에 의존했다. 1972년 신헌법 제 63조에서 “가정은 국가의 한 세포”로서 규정되었는데, 이는 세포 가족이 유기체 국가에 순응하는 ‘유기체 국가론’과 ‘세포가족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국가주의적 지배 담론을 통해 북한 정권은 인민군 후방가족, 애국열사가족 등의 핵심계층을 중심으로 국가와 가족의 유기체적 집단주의를 모형화했고 적대계층의 가족들은 연좌제의 원리로 엄격한 차별과 통제를 가했다(김남식, 1972: 204). 예를 들어, 북한 정권은 1960년까지 벌인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을 통해 전국민의 성분을 ‘혁명적 요소’,‘중간계층’, ‘반혁명적 요소’로 분류했고, 이 사업을 거쳐 약 8000여 세대의 적대계층 가족이 강제이주를 경험해야 했다(Scalapino and Lee, 1972: 833~834). 이후 정권은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주민재등록사업’을 실시하여 얻어낸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민의 성분을 ‘핵심계층’, ‘기본계층’, ‘복잡한 군중’의 3대 계급 51계층으로 재분류했다(북한연구소, 1983: 878~880). 이러한 국가 주도의 사회 개혁과 통제를 통해 1970년대 북한은 신헌법을 제정하고 주체사상을 제도적으로 확립했으며 김정일 후계체제의 기반을 마련했다.(강진웅, 159-160쪽)
이 논문은 1970년대를 중심으로 남북한의 국가체제 변화에서 가족주의가 어떻게 상이한 모습으로 변형되었는가를 비교, 분석했다. 전통사회 이래로 남북한의 근대국가에 이르기까지 가족집단은 사회의 중요한 구성단위이자 집합적인 행위자로 존재해 왔다. 남북한의 국가는 자신의 관심과 전략에 따라 상이한 방향으로 가족집단을 동원했고 개인들 역시 가족집단을 중심으로 상이한 전략으로 국가의 체제 변화에 대응했다. 이 글에서 분석되었던 가족주의는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개인들이 가족집단을 중심으로 국가의 체제 변화에 대응하여 표출하는 가치 및 행위 지향으로 설명되었다. 전통사회에서 개인들은 국가보다는 가족을 우선시하며 이러한 가족주의적 가치 및 행위 지향을 혈연적인 친족 공동체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식민국가, 해방 및 분단 체제를 경험한 남북의 국민국가는 상이한체제와 전략을 통해 가족집단을 지배해 나갔고 이러한 상이한 경로에서 가족주의 역시 대조된 형태로 변형되었다. 1970년대 남한의 경우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전략과 불균형성장 모델, 경제적 유인의 우선성 및 배타적인 가족 경쟁의 사회구조 속에서 가족 성원들은 경제적인 이해를 극대화하며 가족집단을 다른 어떤 사회집단보다도 우위에 놓는 가치 및 행위 지향을 드러냈다. 과잉교육열에서 보이듯이 이러한 원자화된 가족주의는 경제적인 부의 축적과 입신양명을 위한 가족 이기주의로 발전하여 가족집단간의 경쟁과 갈등으로 이어졌다. 반면, 1970년대 북한의 경우 국가중심의 사회통합과 통제전략, 정치경제적인 유인의 일치 및 국가와 가족의 통합된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들은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가족보다는 국가를 우위에 놓는 가치 및 행위 지향을 드러냈다. 위로부터의 ‘유기체’국가론과 ‘세포’ 가족 이데올로기가 아래로부터 수용되고 정치적인 전략을 중심으로 국가와 가족이 내재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세포화된 가족주의가 두드러졌던 것이다. 이같이 남북한의 두 사례에 대한 맥락의 대조에서 체제변화와 가족주의 변형이라는 두 변수간의 인과관계는 ‘원자화’와 ‘세포화’라는 이념형적인 개념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사회적 유인, 국가와 가족의 관계의 차이들은 ‘역사적인 특수성’ 속에서 비교될 수 있는 맥락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의 차이에서 경험적으로 추론되는 원자화된 가족주의와 세포화된 가족주의의 대조는 이념형적 개념과 명제에서 추출될 수 있는 제한된 일반화의 결과였다. 이러한 맥락의 대조를 통해 남북한의 정치권력이 전통적인 유교문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호명했고 가부장적인 사회문화 속에서 여성을 사회의 주변인으로 배제했던 과정을 공유한 것 역시 분석되었다. 결론적으로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남북한 공히 가족주의 문화가 강하게 잔존했고 이러한 가족주의 문화는 국가 지배 체제의 동원 수단이 됨과 동시에 국가 역시 가족주의 문화를 일정 정도 수용, 활용한 양날의 칼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특히 남한사회에서 발견되고 있는 유사 가족주의적 연고주의 현상은 가족 집단의 가치가 또 다른 형태로 변형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화된 가족주의의 현상은 1970년대 남한사회전반의 일반화된 현상이었고, 이념형적으로 대조되는 남북한의 가족주의의 변형양상은 사회문화적 요인보다는 두 체제의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설명되어져야 하는 것이다.(강진웅, 169-170쪽)
5. 북한공산당 (조선노동당)
우선 필자는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시기 초기 동력이 확실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성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제기를 하였다.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지식인이 다수였다. 이에 대한 뒷받침을 3장 1절에서 4가지로 들고 있다. 1.생활수준(재산정도를 추적해보면 62%정도가 중상류층에 속했음), 2.학력(94%가 보통학교졸업이상, 전문학교 이상의 고학력자도 46%) 3.직업(쁘띠 부르주아 지식인이였음을 확인할 수 있음-기자가 29%) 4.코민테른 12월테제를 통해 살펴보면 민족개량주의적 부르주아와의 결합을 부정하였던 것과 쁘띠부르주아 특히 지식인의 파벌 투쟁을 이유로 조선공산당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였던 것을 역으로 이해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확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즉, 위의 4가지 사항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 시기 초기 동력은 다수가 지식인이었는데, 이는 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이 합당하여 진행한 1차 당대회의 간부성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북한문헌에서도 초기 공산주의 운동으로 여기는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족해방투쟁에서부터 지식인이 선구적,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이는 조선의 혁명이 중국과 같은 ‘신민주주의혁명’이라 일컬을 수 있는 ‘반제반봉건혁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맑스가 공산주의 형성에 대해 언급한 사항과 다른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 계급투쟁 역사의 동인(動因)은 억압상태가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이 혼몽한 잠복 상태에서 영원히 머무르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토대는 계급의식이다. 이것이야말로 계급투쟁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생생한 계급의식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적인 부르주아지이다. 사회주의들이 등장하기 이전에서도 북한에서조차 자발적인 프로레타리아트적(proletaroid)운동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정신적, 경제적 생활수준의 개선을 선망하던 본능적 움직임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저주스러운 현실의 객관적 원인을 인식한 인간의 행위였다기보다, 현실에서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불만들을 기계적으로 분출해버리는 운동에 불과하였던 것이다.‘프롤레타리아트적’운동이 ‘사회주의’운동으로 바뀌고, 무의식적이고 무목적적이며 본능적인 반란이 비교적 분명하고 명시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식적 노력으로 전환한 것은 노동자들에게 지식이 결부되었던 때부터 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맑스는 지식인이 프롤레타리아에게 “계급의식 교육”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지식인은 프롤레타리아에게 교육만을 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주도적으로 혁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박미연, 108-109쪽)
혁명의 이행경로로 볼 때 조선로동당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한 동아시아 사회주의권의 정당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조선로동당이 북한사회에서 생산력 발전에 조응한 생산관계의 변화라는 공식적인 발전경로가 아닌 생산관계의 우선개조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추진한 주체였음을 의미한다. 발생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조선 로동당은 대자적(對自的) 노동자계급의 광범한 투쟁 속에서 형성된 당이 아니라 해방이라는 특별한 국면 속에서 반외생적(伴外生的)으로 탄생한 정당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1928년 코민테른에 의해서 조선공산당이 해산된 뒤 당을 가지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하였다. 따라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해방된 뒤에야 비로소 당을 만들 수 있었으며 북한지역에서는 이 당이 소련군의 진주라는 규정력 속에서 애초에 지배정당으로서의 위치를 획득한 채탄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 건설 초기에 수백 명의 소련계 한인들이 북한에 들어와 당건설 실무에 참여하면서 당을 소련 공산당식으로 건설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당 창건의 반외생성은 조선로동당 건설이 끊임없는 외세 개입에 대응하면서 이루어졌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와 함께 발생사적으로 대자적인 노동자․농민계급의 형성보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한 당 창건이 선행되었다는 조선로동당의 특징은 당 상층지도부의 정치행위가 애초부터 장기간 광범한 대중적 기초 위에서 형성된당보다 훨씬 더 큰 규정력을 갖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박미연, 44쪽)
국민대표회의에서 1923년 6월 7일 창조파만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위원회를 조직한 것에 대해 고려국은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분열되어 지도적 중앙기관의 수립에 실패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1923년 9월 20일 고려국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실제적 민족혁명당 조직에 근접했다는 면에서 단일민족전선 전술은 올바르다고 평가하면서 이후 국내외 노동자 농민의 경제적 요구에 기초한 강령에 기초하여 단일민족혁명당 조직운동을 강화할 것과 그것을 국민위원회와 협의하여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동휘는 고려국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국제공산당 원동부에 국민대표회의가 분열되어 어느 한파도 승인할 수 없다고 한 결정을 보이진스키, 한명세가 국민위원회를 지지함으로써 민족문제에 대해 분파적 행동을 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국제공산당은 고려국 위원 이동휘․한명세․파인베르크를 해임할 것, 고려공산당이 조직된 뒤 인민혁명당을 조직할 것 등을 제시했다. 고려국은 이동휘․전우를 위원에서 제외하고 국민위원회와 민족당 조직사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고려국은 1923년 12월 31일 제25차 회의에서 국민위원회 총회사업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같은 날 이동휘는 “국내의 유력한 혁명적 노동․농민․청년․사상단체를 중심으로 하고 국외 각 혁명단체를 참여시키는 民族革命團을 조직할 것”, “민족당 조직 시기는 그것을 지도할 고려공산당이 조직된 뒤에 해야 하지만 그 전이라도 시기가 올 경우는 그것을 조직할것” 등을 제안하면서 고려국 탈퇴성명서를 발표했다. 고려국을 탈퇴한 전우도 고려국 위원을 남만춘․이동휘․정재달․신백우․김약수로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다. 국제공산당은 창조․개조파를 모두 부인한다는 방침변경에 따라 국민위원회의 노령 밖으로 퇴거를 명령했고 1924년 2월 고려국도 해산했다.(조철행, 321-322쪽)
지금까지 공산대학 조선학부가 어떤 곳이었는지 살펴보았다. 공산대학은 조선과 망명지에 있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전문적인 혁명가로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공산대학은 코민테른집행윈회 동방부가 관할하던 곳이었다. 공산대학에 입학하고자하는 조선인은 코민테른, 러시아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등과 같은 기관의 추천이 필요했다. 공산대학은 2년제 학교로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계속 공산대학에 남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학생들은 공산대학에 머무르는 2년 동안 실제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이론을 배웠다. 학생들은 정해진 일과에 따라 공동생활을 했다. 공산대학의 재학생들은 코민테른집행위원회의 경제적 지원을 통해 안정적으로 학업에 임할 수 있었다. 1921년 개교 이래로 많은 조선인이 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4년 당시 조선학부에는 120여명의 학생이 있었고 그들의 구성은 다양했다. 학생들은 여러 당에 가입하고 있었고 자신들이 가입한 당의 추천으로 공산대학에 왔다. 처음 출교 문제는 조선학부 내에 있었던 학생들과 당3인위원회 사이에서 발생했다. 공산대학에서는 효율적인 학생 지도와 관리를 위해 당3인위원회를 조직했다. 당3인위원회 반대그룹은 오르그뷰로를 지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924년 9월과 12월에 출교 대상이 된 사람들이었다. 갈등이 발생하자 공산대학 측에서는 당3인위원회 반대그룹을 출교시켰다. 코민테른이 오르그뷰로에 대한 지원을 끊은 상태에서 오르그뷰로를 재정비하려는 오르그뷰로 지도부 측에서는 공산대학 학생들이 오르그뷰로를 반대하자 출교를 단행하려 했다. 이에 공산대학에서 계속 오르그뷰로를 반대하는 사람이 출교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특히 조선학부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던 당3인위원회 그룹이 출교 대상이 되었다. 출교 대상이 된 15명의 출교는 1925년 1월 동안 진행되었다. 조선학부 학생들의 출교는 학생들 사이의 갈등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출교는 오르그뷰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 1924년 9월과 12월에 출교된 당3인위원회 반대그룹과 1925년 1월에 출교된 오르그뷰로 반대그룹은 오르그뷰로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출교된 것이었다. 조선학부에서 발생한 출교는 학생들 사이의 사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출교는 학생들 사이의 공산당 건설에 대한 방법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김국화, 31-32쪽) |
⑴ 중앙집중제
소련에서의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원칙은 레닌이 집권하던 1906년 3월에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전당’에서 처음으로 당조직 원칙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사회민주노동당의 한 분파인 멘셰비키파가 구체화 하고 볼셰비키파가 만장일치로 동의했던 것으로써, 상향식 선거와 하급기관이 상급기관을 비판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요소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일례로, 소련의 당규약 19조를 확인해보면 1항에는 아래로부터 선거하는 내용의 민주주의적 요소가, 2~4항은 상급기관에 정기보고, 다수에 대한 복종, 상급기관 결정절대 복종 등의 중앙집권적 요소가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 이 원칙은 멘셰비키파의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원칙에서 민주주의적 요소가 퇴색되고 볼셰비키파 주도의 중앙집권적 요소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하였다. 이어 1921년 제10차 당대회에서는 당내 분파를 형성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스탈린이 집권한 1930년대에 들어서는 중앙 기관을 비판하는 지방 인민 자치제의 역할이 금지되는 등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화되고 민주주의적 성격이 퇴보하였다.
민주주의적 요소가 퇴보한 민주주의 중앙집중제는 1934년에서 1976년까지 시행되었다. 그러나 1977년 동서 긴장완화인 데탕트의 주역이었던 브레즈네프가 헌법 제3조를 “상부기관은 하부 기관의 결정에 구속되어야 하고, 최고지도기관은 인민의 선거로 선출된 기관이기 때문에 모든 국가 기관은 최고지도기관에 인민의 결정을 보고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또한, 모든 인민 자치체는 최고지도기관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수정하면서 민주주의적 요소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요소는 소련의 제28차 당대회(1990)에서 결정된 당규약 제2조 당내 민주화 부분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소련의 민주주의 중앙집중제는 그 근본원칙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지도자에 따라서 민주주의적 요소와 중앙집권적 요소가 그 정도를 달리해가며 변화해왔다.(진용선, 22-23쪽)
소련 및 중국과 마찬가지로 북한 또한 당․국가체제로써, 다른 국가기구에 당적우위가 확립된 체계를 가지고 있다. 흔히 우리가 국가조직체계하면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체제를 떠올리지만, 북한의 체계는 한국의 삼권분립체제와는 다르다. 북한 국가조직의 권력체계는 당․정(국가)․군 세 분야로 이루어져 있다. 당은 ‘조선로동당’으로써, 정은 최고인민회의와 내각으로써, 군은 조선인민군으로 존재한다. 이들은 각각 정치사상, 경제, 군사 부문을 맡고 있다. 물론 북한에도 입법부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사법부에 해당하는 재판소와 검찰소, 행정부에 해당하는 내각, 주석, 정무원, 중앙인민위원회, 국방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북한은 전통적으로 권력체계를 당․정․군으로 구분해왔고 실제로 권력체계에서 상호작용하는 것도 이 셋을 기준으로 이루어져 왔다. 당에 해당하는 기구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중앙위원회 산하 정치국, 비서국, 검열위원회 등이 있다. 행정기관을 통치하는 국가기구, 즉 정에 해당하는 기구에는 최고인민회의와, 내각, 국방위원회 및 각각의 산하단체들이 있다. 군에 해당하는 기구에는 국방위원회 산하 총참모부, 총정치국, 인민무력부 등이 있다.(진용선, 42쪽)
북한은 현재까지 어느 현실사회주의 국가보다 강력한 당 우위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은 자주적 사상체계 확립과 주민 통치의 수단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토대 위에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이라는 기본 사상을 만들었다.
북한의 통치지배 원리는 이 두 사상을 기초로 하여 김일성 가계의 교시에 따라 조선노동당의 규약이 변경된다. 또한, 당 규약에 따라 운영되는 조선노동당은 주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와 내각 그리고 조선인민군의 상위의 기관으로 존재하면서 국가를 통제하는 절대적 기구이다. 김일성 가계의 절대 권력을 떠받치는 기반은 조선노동당, 주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 그리고 내각 및 조선인민군 등이며, 이를 정당화시키고 합법화시키는 것이 조선노동당 규약과 사회주의헌법이다.
이를 통하여 북한의 김가 체제가 유지되고 북한 체제가 통치되어진다. 김가가계는 당 규약을 바탕으로 당과 정과 군이라는 권력기관을 이용하여 북한 인민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 체제의 핵심권력의 통치구조의 관계망을 요약 정리해 보면, 다음의 <그림 1>과 같은 모델로 요약된다.
아래의 <그림 1>를 분석해 보면, 김일성 일가의 세습체제는 이씨조선-일제강점기-김가 가계로 이어지는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하여 조선노동당규약과 헌법에 김일성을 창건자로서 교조 시 하면서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조선노동당을 사유화하였다. 북한 권력의 핵심 요체인 김일성 가계는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백두혈통으로서 그들 가계가 한반도의 통치 권력의 적통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권력을 세습하는 것 또한 백두혈통으로서의 정당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 가계의 적통자가 북한의 최고 권력자이며, 김일성 시기에는 김일성의 통치행위가 절대 권력자의 교시로서 권부와 북한 주민에게 전파되었다. 김정일과 김정은 시기에는 최고 권력자의 지도와 지시라는 표현과 더불어 국방위원장 및 제1국방위원장이라는 무력을 통괄하는 직함을 가지고 북한을 통치를 해 왔다.(백근현, 24-25쪽)
북한의 최고 권력이자 세습권력인 김일성 가계에 대한 종합적 분석적 접근을 해야 하는 이유는 최고 권력자로서의 개별 행위자들 각각의 속성 및 특징보다 는 그들 사이에 구조화된 관계분석이, 그들의 지배연합의 구조적 특성을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김일성 가계의 태생적 근원과 그들의 권력구조가 만들어지게 된 근본 배경의 분석은 북한 핵심권력의 구조화 과정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준다.
정치․사회적으로 보면, 舊체제인 조선의 봉건사회라는 틀이 한반도에서 정신적으로 선각자적인 민주 정치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외세에 의해 舊체제가 붕괴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틈을 이용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침투시킬 의도가 있었던 소련을 등에 업고 나타난 정치세력이 김일성과 그 추종 세력들이다. 한반도에서의 이러한 현상은 전근대사회였던 조선왕조가 붕괴되면서 한반도에는 자생력을 갖추고 있는 정치․사회적 구심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조직이나 단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경제적․군사적으로도 선진화된 문명과 문물에 대한 대항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로서 강대국 간의 충돌과 그 결과 상호간 절충적 위치로서의 정점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체제는 김일성 가계를 중심으로 당․정․군이라는 연합적 지배와 인민이라는 피지배 구조의 2분법적 국가형태가 만들어진 배경은 역사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한다.(백근현, 152-153쪽)
그러나 김일성은 이러한 위의 모든 문제를 극복하며 기독교계를 제압해 나갔다. 김일성이 기독교계를 제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38선 이북에서 물리력을 장악한 소련 군정의 전폭적 지원 때문이다. 소련군정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 김일성은 자신의 세력을 북한정권 요직에 기용할 수 있었으며 유력인사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둘째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의 월남이다. 토지개혁과 주요산업 국유화 조치로 인해 오윤선, 김동윤, 손창윤 등 교회의 재정적 후원자들이 대부분 월남을 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 정치지도자들과 교회지도자들도 소련군정의 핍박을 피해 월남을 감행하게 된다. 조만식과 같은 정치인 조희렴 목사와 같은 목회자가 북한에 남았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교회지도자들과 기독교정치인의 월남은 북에 남은 기독교 세력 붕괴에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셋째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의 38선 이북교계 장악이다. 이 연맹을 설립한 강량욱은 장로교 목사로서 김익두 등을 이용하여 기독교 회유의 역할을 감당했다. 기독교계의 이탈세력을 모아 친(親)김일성화 했고, 협조하지 않는 세력이 설 자리를 박탈하여 김일성에 반대하는 기독교 세력은 월남하거나 지하화할 수밖에 없는 종교 환경을 만들었다. 그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으로서 현실 정치에도 깊이 관여하여 북한정권의 설립을 도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발한 6․25전쟁은 기독교계의 몰락을 한층 강화하여 북한지역에서 교회는 소멸되다시피 한다. 6․25 직전 북한정권은 저항의 불씨가 될 수 있는 기독교 교역자들을 체포하였고 이들 중 대다수는 1950년 10월 19일 평양이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점령되기 직전 처형된다. 기독교계의 독보적 지도자 김익두, 기독교인으로서 독보적 영향력을 소유하였던 조만식도 이 때 북한군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쟁 시기 남한의 주된 외부적 지원세력은 전세계 기독교계 였으며 국내 기독교계도 내부의 협력세력중 중심세력을 이루었다.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 마다 교회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지역에 남아있던 기독교 세력은 정권에 협력하여 충성심을 증명 하거나 공산당을 피해 월남하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거되거나 지하화 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한건희, 87-88쪽)
김일성은 1958년 8월 9일에 시․군인민위원회 위원장들의 강습회에서 인텔리에 대한 개조문제를 처음 제기하고, 동년 9월 북한은 보수주의와 소극성을 극복하고 사회주의 건설의 속도 증가를 위한 대책으로서 전체 당원에게 호소하는 “북한로동당중앙위원회 편지”(일명 붉은 편지)를 채택하게 되었다. 이 편지에서 “보수주의와 소극성을 분쇄하고 모두 다 천리마를 타고 과감히 진군하자!”고 주장하였다. 조선로동당은 전 당원들에게 로동당중앙위원회 편지(붉은 편지)를 통해 계급투쟁의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인텔리개조운동을 본격화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인텔리 속에서 보수주의와 소극성을 반대한다는 것은 정책에 불만을 가졌던 인텔리를 숙청하는 사업으로도 전개되었다. 이에 대한 《조선전사》는 북한에서 “혁명의 전진운동을 방해하는 소극성과 보수주의, 신비주의 등 낡은 사상 잔재를 뿌리 빼는 사상투쟁이 힘 있게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보수주의자, 소극분자, 신비주의자들의 유해로운 사상관점과 행동이 철저히 폭로 비판되었다”고 지적함으로써 인텔리들에 대한 숙청이 감행되었음을 시사했다.(박미연, 83-84쪽)
⑵ 통일전선전술 혹은 마을 연합
독립이라는 목표를 두고 이념적 요인과 기타 이해관계로 조선공산당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해방정국이라는 권력의 진공상태에서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을 위해 민족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투쟁을 벌인 가운데 공산당 내에서는 장안파와 재건파 등 여러 계파간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는 공산당 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쟁탈전이었다. 결국 박헌영이 이끄는 재건파의 승리는 장안파의 보수세력과의 동조라는 결과를 가져와 공산당 세력의 약화를 가져 왔다. 결국에는 여러 계파가 투쟁하는 틈을 타 조선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입은 국내의 지지기반도 없고, 인적 구성 면에서도 미약했던 빨치산파의 김일성에 의하여 조선노동당으로 탈바꿈하고 만다. 김일성의 북한 장악은 대를 이은 유일독재체제로 변하고 김일성이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시조로 날조됨으로써 독립을 위해 투쟁한 공산주의운동을 역사에서 왜곡하게 되는 문제점을 가져오고 만다. 당내의 분파작용, 파벌간의 대립은 모두의 붕괴를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함은 여실히 볼 수 있다. 파벌은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동시에 병존하고 있다. 긍정적․순기능적 요소로서는 일반적으로 당내의 이념이나 노선 문제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데 기여하고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었으며 파벌의 강한 결속력을 가져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른 한편 부정적․역기능적 요소로서는 분파성의 조장으로 당 보다 파벌의 이익을 위해 분당도 불사하고 당권을 놓고 격심한 파쟁을 전개하여 당 기능을 마비시키는 일이다. 여기서 해방정국에서 조선공산당 내에서의 파벌 현상도 그 기능면에서 보면 긍정적 기능보다는 부정적 기능이 많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조의환, 89쪽) |
반제동맹은 두 가지 이유가 작용해서 해산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반제동맹은 히틀러정권의 가혹한 탄압으로 여러 차례 습격을 당해 사실상 기능 정지 상태에 빠졌다. 또 하나의 요인은 반파시즘인민전선이 대두하면서 좌익별동대 역할을 하던 반제동맹의 노선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반제동맹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국가와 대결하기 위해 구성된 소비에트러시아와 자본주의국가의 노동자계급과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세력의 국제반제통일전선이다. 반제동맹의 반제국주의전선은 자본가나 지주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일체의 세력을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지주나 자본가라 하더라도 파시즘에 반대하는 한 제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인민전선은 파시즘 국가와 싸우는 제국주의국가와도 반파시즘 공동행동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소련과 미국이 연합국으로 공동의 적인 독일․이탈리아․일본과 싸우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이런 상황이 도래하면서 공산당의 외곽 별동대로서 사회민주주의세력이나 민족주의 세력 또는 제국주의국가 일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반제동맹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조직이 된 것이다. 인민전선론의 등장은 반제동맹의 존립마저 부정하는 데로 나아간 것이다.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서 인민전선은 종래 반제동맹이 투쟁 대상으로 설정한 민족부르주아지나 소부르주아민족주의자는 물론 ‘반일적인’ 지주나 자본가도 인민전선에 포함일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코민테른은,“(공산주의자는-인용자) 민족개량주의자가 이끄는 대중적인 반제국주의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며, 구체적인 반제국주의적 강령에 기초하여 민족혁명조직과 민족개량주의조직과의 공동행동달성에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여기서 ‘반제국주의 강령’이란 그동안 반제동맹이 제기한 ‘토지혁명․노농소비에트 수립․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과 다른 것이었다. ‘반제’라는 단어는 같지만, 반제동맹의 ‘반제’와 이 시기 통일전선의 ‘반제’의 함의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 반제동맹의 경우 토지혁명이 전개될 때 부르주아민족주의자는 물론 소부르주아민족주의자도 이 혁명에 반대하고 나아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제국주의 편에 설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온 것이다.
한편 인민전선은 7차대회에서 정식화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그것이 적용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어떤 계급이나 단체와 인민전선을 형성해야 하는가, 어떠한 슬로건 아래 어떤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는 각 지역의 운동주체가 구체화해야 할 문제였다. 인민전선론 또한 몇 년간의 이론 투쟁과 프랑스, 만주, 브라질 등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었기 때문에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 채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민전선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려면 두 가지 난점을 극복해야 했다. 하나는 인민전선을 거부하는 지역이나 정파들의 반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각 나라의 실정에 맞게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다.(박한용, 286-287쪽)
애초 반제동맹은 신간회 해소를 전후해 민족협동전선체의 하나로 제기되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간회 해소론이 제기되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해소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高景欽에 의해 새로운 민족협동전선의 한 형태로 거론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즉 신간회를 해소하면서 계급별로 재분리하는 과정에서 이를 대체해야 할 협동전선체로 상설적 도는 일시적인 공동행동위원회를 상정했다. 그런데 노동자농민의 경우 계급별로 재배치하는 것은 농노조로 가능하지만 소부르주아층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가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애초 공산주의자들은 신간회를 소부르주아단체로 재조직하고 프랙션을 통해 헤게모니를 관철하려고 했다 이 경우 혁노 . (노동자계급)․혁농(농민계급)과 신간회(소부르주아계급) 등이 사안에 따라 공동행동위원회를 만드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신간회를 해소하기로 확정한 이후에는 민족협동전선체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민족혁명적․반제적인’ 소부르주아층을 결집시킬 조직과, 노동자․농민․소부르주아층이 함께 참가하는 민족협동전선체 두 개의 조직이 필요했다. 반제동맹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틀로 제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반제동맹에 소부르주아를 결집시키고, 여기에 혁노․혁농이 참가함으로써 노농헤게모니를 관철하는 반제통일전선을 실현하려 한 것이다. 곧 반제동맹 운동이 제기되던 초기에는 학생 소부르주아 조직이 아니라(우선은 소부르주아를 결집시키지만) 장차 노동자 농민이 참가하는 민족협동전선체로 발전할 조직으로 여겼던 것이다.
실제 반제동맹의 조직주체들이 반제동맹의 성격을 “일체의 반일본제국주의적 세력, 즉 노동자, 노민(勞民-노력농민?-인용자)을 선두로 하여 학생, 도시소시민, 특수하게는 각 계급 계층 간의 민족주의적 반일본제국주의적 요소들도 포함한 광범한 반제공동전선” 혹은 “식민지에 있어서 민족적 협동전선의 기본적 형태의 하나”로서 ‘당파적 조직이 아닌 초당파적 대중조직’으로 규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이에 따라 반제동맹의 조직적 임무는 일국적 차원에서는 제계급이 "단체 혹은 개인자격"으로 민족협동전선 또는 반제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며, 국제적으로는 국제반제동맹 조선지부를 결성하여 자본주의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을 식민지 피억압민족과 결합시키고 이를 소비에트러시아의 노동자・농민과 결합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박한용, 309-310쪽)
좌익진영의 통일을 위해 인공을 수립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박헌영은 인공의 성립을 민족주의진영까지 포괄하는 민족통일전선보다 좌익진영 통일의 연장 선 상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에 앞서 정부조직부터 선포한 사실로도 명백하다.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볼때 통일전선이란 조직․사상적인 자기세력화가 선행된 뒤에 제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공이 인민공화국의 성립에 깊이 관여한 정황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미군정의 주간 정기보고는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의 ‘마스터플랜’을 써서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의 승낙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남로당 출신인 박일원에 따르면 1945년 9월 4일 경성의전병원 내과에 입원 중이던 허헌의 병실에서 박헌영․여운형․정백 등 4인이 밀회하여 인민공화국 창립과 그 구성인물을 협의 결정했다고 한다.
조공은 인민공화국을 항일투쟁의 역사적 산물로 보고 있다. 1925년의 조선공산당 성립, 그 당의 지도하에 전개된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8년 원산총파업 및 1929년의 부산 대파업, 1927-1931년의 신간회운동, 또 국외에서 1930년대 김원봉 등에 의해 지도된 무장투쟁, 1944년 여운형의 건국동맹,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건준에 이어 근대후기 조선민족운동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 인민공화국이라는 것이다.(이현주 1, 87쪽)
공산당 재건과정의 조급성은 인민공화국의 선포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재건파는 조공이 재건되기도 전에 건준과 협력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공산주의에서 통일전선이란 조직․사상적인 자기세력화가 선행된 뒤에 제기되는 것이 순서임을 감안할 때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조공은 인민공화국을‘인민정부론’에 기초하여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구성원 전체가 망라되는 민족통일전선으로 구상했다. 그러나 인민정부에의 참여요건의 하나로 조공에 대한 지지를 제시함으로써 인민정부의 대중적․계급적 기반의 범위를 좁히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남한 내 배타적 유일정부임을 자처하는 미군정의 부인과 각료의 태반이 취임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인민공화국이 인민정부의 완결체일 수는 없었다. 권력의 완결체로 간주하지 않는 한 인공을 광범위한 민중적 기초 위에 민족통일전선으로 확대 강화하는 것은 조공이 당면한 급선무의 과제였다. 이를 위해 조공은 미군정의 후원 하에 이승만이 주도하는 독촉중협 참가를 시도했다. 독촉중협 속에서 인민공화국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여의 조건으로 인민공화국의 해산을 요구한 미군정과 이승만의 요구로 조공은 독촉중협 참여를 포기했고 인민공화국을 광범한 대중적 기초위에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강화하려던 조공의 계획은 위기를 맞았다.
중경임정과 인민공화국은 다른 정치사상과 상이한 계급적 기반에 더하여, 양자 모두 정부권력을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둘 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추구하고, 대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등 핵심적인 경제정책이 동일한 점에서 보면 협력의 가능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협력의 가능성이 배제된 데에는 이념과 정책, 완고하게 법통만을 내세우는 임정의 고집, 인적 구성의 이질성 등 못지않게, 임정이 8․15 해방 직후 민족 구성원 사이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조공의 박약한 역사의식에도 있었다.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도 혁명의 헤게모니는 노동자계급이 갖는 다는 것은 공산주의 이론의 상식에 속하는 것인데도,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외치다 느닷없이 임정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안파공산당의 행태는 이러한 혼란상이 극에 달한 사례였다.
8․15 해방에서 같은 해 12월 모스크바3상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는 조공이 민족통일전선운동 등의 정책과 노선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선택과 결정이 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과거 공산주의운동의 파벌의식과 자파 우월주의, 편협한 교조주의는 이러한 가능성의 폭을 크게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이현주 1, 108-109쪽)
조공은 1945년 12월 27일 소련탁치주장설 오보 직후 3상회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한데다가 소련을 의식하여 태도표명을 보류했다. 이에 1945년 12월 말부터 1946년 1월 초에 임정에게 빼앗긴 주도권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임정과 합작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그다지 기대를 걸지 않았던 만큼 그 포기도 빨랐다.
결정과정은 복합적이었으며 머뭇거렸으나 하급당부에 내린 노선전환 지시는 매우 급하게 전해졌으므로 1946년 1월 3일 집회에서처럼 하루아침에 표변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조공의 노선전환은 대중적 반탁감정을 의식한 당내인사들로부터도 거센 반발을 받았으며 우익은 조공을 ‘국론통일의 교란자’니 ‘매국노’니 하면서 질타하였다. 거기에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즉시 독립을 열망하는 대중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조공의 노선전환은 신탁을 반대하는 민족 감정과 얼마간 융합할 수 없었다. 당시 남로당 경상북도당 조직부 간부였던 박진목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공산당이 태도를 돌변하자 지방좌익단체들은 그 수습이 곤란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충남 인민위원회와 산하 인민위원회들의 특별모임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공산당 외곽단체들은 노선전환 후 인기를 상당히 잃었다.
결과적으로 좌익은 한동안 정국의 주도권을 우익에게 넘겨주고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조선공산당의 전술적 실수를 지적할 수 있다. 조공의 한 내부문건에 의하면 “急角度의 戰術轉換”을 함으로서 “左翼은 大衆에 대한 無責任한 豹變的 背信者로서 自己를 暴露하고 말었든 겄이다”라고 평가되었다. 이어서 “「託治反對」의 豫備宣傳을 通하야 召集된, 三日 示威의 群衆은 意外에도 「託治支持」를 보고서, 極端의 不平과 憤懣을 表示하였으며 市民側動員은 大部分이 脫退하고 말었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이완범, 223-224쪽)
이런 연장선상에서 8․15 해방 직후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의 혁명론과 통일전선 방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박헌영이 기초하여 1945년 8월 20일,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의 정치테제로 발표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 소위 ‘8월 테제’이다. 8월 테제는 9월 11일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9월 20일 중앙위원회에서 당의 정치노선으로 최종 확정하는데, 두 문서사이에는 8월 20일 이후 정세변동 양상이 추가되는 등 양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 노선이나 주요 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8월 테제는 현 단계 조선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단계에 있으며 완전한 민족독립의 달성과 토지혁명의 완수가 핵심적 과제라는 1920년대 이래 조선혁명론의 연장선상에 서있었다. 때문에 노동자 농민 대중을 전취하기 위한 노동․농민운동의 강화와 대지주 토지 몰수 및 분배 등이 주요한 과제로 제기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의 새 조선은 혁명적 민주주의 조선이 되어야 한다며, 이를 위한 인민정부를 수립하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것을 주장했다. 인민정부에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고 또한 도시 소시민과 인텔리겐챠가 참여하며, 이것이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으로 발전하여 혁명의 높은 정도, 즉 사회주의혁명으로의 발전을 보장하는 전제조건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인민정권이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확립되어야 하며, 이런 노동계급의 영도권 문제는 농민의 전취 및 민족개량주의자의 영향 밑에 있는 일반 인민대중과의 협동 전선 결성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8월 테제의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의 노선은 민족부르주아와의 협동이나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주장하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관심의 초점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즉 노동계급의 영도권의 확립을 위해 대중을 전취하는데 있었다. ‘대지주, 고리대금업자, 반동적 민족부르주아지’와 싸울뿐 아니라, ‘민족 및 사회개량주의자’의 영향 밑에 있는 일반 인민대중을 전취하기 위해 그들의 개량주의적 본질을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폭로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의 민족부르주아지(지주, 자본가, 상인)는 친일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반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기대하고 있다면서 ‘민족개량주의자’, ‘좌파 민족주의자’, ‘계급투쟁을 거부한 사회개량주의자’, ‘반역자와 일제의 주구인 사회파시스트’에 대해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역사과정에서 드러나지만 조공은 1945년 하반기에 민족통일전선 결성이라는 명분하에 정당, 단체들과의 정치적 연대를 표명하고 협상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이 같은 연대 표명과 협상 과정은 ‘우익’ 또는 ‘민족주의세력’이라 불리던 정치세력까지 통일전선에 포괄시키는 것을 현실적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표는 ‘민족적 통일’이라는 명분하에 부르주아지 세력을 민족통일전선에서 탈락시키고 그들의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었다. 조공은 ‘민족통일전선’이라는 형식을 통해 그들과 대립되는 당파들을 고립시키려 했고, 이를 위해 그들은 “친일파・민족반역자의 배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윤덕영 1, 858-859쪽)
6. 아기장수설화
① 옛날 어느 곳에 한 平民이 살았는데, 신의 정기를 받아서 겨드랑이에 날개(비늘)가 있고 태어나자 이내 날아다니고 힘도 센 장수 아들을 기적적으로 낳았다.(出生) ② 그런데 부모는 이 아기장수가 크면 장차 역적이 되어서 집안을 망칠 것이라고 해서 아기장수를 돌로 눌러 죽였다.<1차 죽음> ③ 아기장수가 죽을 때 유언으로 콩 닷섬과 팥 닷섬을 같이 묻어 달라고 하였다.(再起) ④ 얼마 후 官軍이 와서 아기장수를 내놓으라고 하여, 이미 부모가 죽였다고 하니 무덤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을 어머니가 實吐하여 가보았더니, 콩은 말이 되고 팥은 군사가 되어 아기장수가 막 일어나려는 것이었는데, 그만 관군에게 들켜서 성공직전에 다시 죽었다.<2차 죽음> ⑤ 그런 후 아기장수를 태울 龍馬가 근처의 용소(龍沼)에서 나와서 주인을 찾아 울며 헤매다가 용소에 빠져 죽었다.(龍馬) ⑥ 지금도 그 흔적이 있다.(證示)(박영호, 209-210쪽)
<아기장수 전설>의 내용을 정리하면 미천한 가문에서 비범한 아기가 태어났으나 아기의 비범함을 두려워한 부모의 고발로 관군에게 살해되었다는 비극적 이야기이다. 먼저 비극의 일반적 특성을 살펴보면, “주인공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하락하는 하강의 서사구조, 보통사람보다 주인공이 우월하다는 인물의 우월성, 주인공의 하락이 운명적이라는 운명성 그리고 이를 통한 정서의 심화와 그로 인한 심미적 효과”와 같다. 그런데 이 같은 특성만으로 비극의 구체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즉 하락의 요인과 그 과정에서 노정되어야 할 갈등의 양상, 우월함의 구체성과 그러한 우월함을 억압하여야 하는 당대 사회의 모순 그리고 그러한 사회 모순과의 대결에서의 패배를 운명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에게 주어진 제약 등이 함께 제공되어야 한다. <아기장수 전설>에서 ①에서 ⑥까지가 관련 모티프이고 괄호 안의 내용들은 자유 모티프이다. 관련 모티프가 한편의 서사를 구성할 때 주축이 되는 요소라면, 자유 모티프는 관련 모티프에 내재하는 의미를 정교하게 보완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관련 모티프가 비극이라는 서사의 성격을 생산하는 근본적 기능을 수행한다면 자유 모티프들은 그러한 비극의 성격을 구체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렇게 관련 모티프와 자유모티프가 서로 상보적 기능을 수행할 때 우월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당대 사회의 모순과 가까운 사람의 배신과 같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적 요인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비극성은 완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모티프가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주는 한편, 주제의 전개에 일조”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 모티프를 축으로 삼고 새로운 자유 모티프를 발굴하여 결합시키면 새로운 서사 창조 또한 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을 함께 파악할 수 있다. 이를 기존 작품을 사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김승옥의 <力士> 가운데 서씨에 관한 에피소드에는 밤마다 동대문성벽의 돌을 옮기는 우월한 힘에 대한 모티프가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우월함의 현실적 효용가치가 저하된 시대를 살아가는 서씨의 비극을 통해 “작가는 질서와 문화라는 외피를 두른 지배 논리의 교조성과 허위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김영현의 <차력사> 역시 절대적 힘을 가진 박팔갑산의 우월 모티프를 통해 野性의 회복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두 작품에서 우월한 힘은 관련모티프이고 이를 둘러싼 많은 에피소드는 자유모티프이다. 관련모티프를 답습하면서 자유모티프를 작가 임의로 활용하여 각기 다른 주제를 생산하고 있다. 이는 엘리자베스 프란첼의 지적처럼 “모티프인 하나의 질료적 요소가 한 작품에서는 주도 모티프로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보조적 액세서리로 그리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단순히 장식적인 자질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모티프의 속성에서 기인한다. 모티프의 활용에 따라 서사의 성격과 주제가 달라졌다. 이는 새로운 서사를 창조하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박영호, 212-213쪽) |
⑴ 민중 꿈의 투사로서 英雄
드라마 <각시탈>이 아기장수의 불멸성을 믿는 서사가지를 계승한 작품이라면, 이제 문제는 무엇이 가능태로만 남아있던 이 서사가지를 하필 이 시점에서 수면 위로 끌어올렸는가 하는 점이 될 것이다. 일단, 가능태로만 존재하던 서사가지가 선택되어 원형서사의 부모․친지의 집단을 원조자로 바꾸고 세계를 전복시킬 의지를 갖춘 인간으로 변형시킬 수 있게 된 것은, 비극적 서사가지를 선호하는 향유자와 함께 공존하던, 현실극복 가능성을 인정하는 서사가지에 관한 선호도가 세대를 이어갈수록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간단치 않다. 이 서사가지에 대한 선호도가 확산되려면 향유층의 현실인식이 바뀌어야 하며, 동시에 이렇게 바뀐 세계인식이 현실세계를 조금씩 바꾸어 나갔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현실세계를 주체적으로 바꾸어나가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원형서사의 서사가지 내부에 존재했던 현실극복의 가능성이 서사의 원형을 현실 전복적으로 변형시켜 새롭게 쓰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요는 믿음으로만 존재했었던 현실극복 가능성의 서사가지가, 민중의 힘이 실제로 세계를 변화시켜 온 데 대한 향유층의 자신감과 만나 원형서사를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하는 민족적 집단의지의 문제를 아기장수가 지닌 민중성이 기반하고 있는 역사적 지평과 전승사적 위치를 따져보면서 검토해 보자. 아기장수의 정체성을 시대를 초월한 민중성으로 일반화 하고자 하는 접근법에서라면 아기장수가 저항하는 지배질서의 범주 문제는 중요치 않다. 이성계든 양반이든, 중국이든 일제든 아기장수가 저항하는 대상이 기득층이라는 보편성의 차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아기장수의 민중성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특수성과 그 전변의 문제를 규명하고자 한다면, 아기장수가 저항하는 기득층의 범주를 구분하고 헤게모니의 속성을 분석해야 가능해진다.(권도경, 304-305쪽)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아기장수’전설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이율배반적인 속성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아기장수는 가혹한 정치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꿈의 투영이다. 그들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장군의 출현을 기원하지만 막상 장군이 나타나자 그를 거부하고 만다. 갓 태어난 아이를 살해하는 부모도 무력한 하층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변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하층의 인재를 용납하지 못하는 지배층의 나약한 의식도 간과할 수 없다. 현실적인 삶과 미래적 가치관의 거리를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을 읽게 된다. 정치적 내홍과 외세의 도래라는 역사적 현실은 인물전설을 통해 새롭게 부각되었는데, ‘최제우’전설은 득도하여 세상을 구하려다 수난을 겪는 영웅의 일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울러 항일 의병장 신돌석 등과 결부된 이야기도 안타까운 현실 속에 재현된 영웅전설이다. 물론 성공한 인물의 전설은 사실에 기초하여 위대하게 언급되기 마련이지만 전설적으로 창조된 인물들은 타고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좌절하도록 그려져 있다.
전설은 ‘인간과 사물’을 포함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예기치 않던 일들로 인해 일어나는 불행한 상황을 매우 민감하게 다루고 있다. 심지어 신비한 자연물 전설마저도 현실적 한계를 잘 보여준다.<그림자 못>, <쌀 나오는 구멍>만 하더라도 아직껏 어느 못도 사람의 그림자를 바로 비추어주며, 어떤 바위에서도 쌀이 나오거나 물이 나온 적이 없다. 영웅적 인물들이 현실적으로 좌절하고 마는 구조와 마찬가지로 초월적 자연물이 현실에 맞게 변화된 것이다. 무한한 상상과 괴리된 현실 속에서 존재적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게 바로 전설의 속성이라 하겠다.(이화형, 118-119쪽)
조동일은 우선 神人, 영웅, 異人의 유형론을 제시하며, 진인은 세계와 대결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영웅이며, 현 시점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은거해 있다는 점에서는 異人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영웅은 세계에 맞서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싸움에서 승리한 영웅과 패배하여 실패한 영웅으로 나뉘게 된다. 그래서 비범한 출생이나 재능 때문에 역적이 될 인물로 지목도어 마을 공동체나 부모에 의해 살해당하는 아기장수와 같은 '민중적 영웅'은 실패한 영웅의 전형이 된다. 반면 같은 민중적 영웅이라 하더라도 '진인이야기에는 결말이 없다'. 즉, 진인 이야기는 영웅의 패배를 말하지 않고 승리의 가능성만을 제시하고 있는 데, 그 공백은 민란과 같은 현실적 의미가 메꾸어준다는 것이다. (한승훈, 212-213쪽)
아기장수의 출생에서는 아기장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옆구리의 날개로 천장에 달라붙고, 재주를 부리는 등 보통의 인물과는 다른 행동을 하거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초현실적인 인물의 면모, 즉 장수의 잠재적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아기장수의 신이한 능력은 민중들이 기대하는 의인의 모습이며, 조화로운 세계의 질서 속에서 존재하던 신화적 영웅의 그것이다. 민중은 그들의 염원을 아기장수의 탄생을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곧 좌절되고 만다. 고귀한 혈통이 아닌 미천한 평민의 혈통으로 태어난 아기장수가 잠재적인 지배자에겐 대적의 세력이었음을 아프게 인식한 민중은 가차 없이 아기장수를 죽인다. 그들의 염원이 허용되지 않는 세계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달성하기에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려던 민중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아기장수는 민중의 손에 의해 처참한 죽음 당하고 만다. 아기장수의 죽음은 철저한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민중이 자신들의 염원을 겪는 아픔이다.
일반 민중들의 좌절은 아기장수를 죽이는 방법 즉, 쌀가마니로 눌러 죽이거나 팥섬, 돌 등으로 눌러 죽이는 등 잔혹한 방법으로 형상화된다. 이것은 민중들이 스스로 그들의 염원을 꺾는 것을 의미하며, 아기장수 스스로가 자신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에서는 민중의 좌절이 갖는 비극은 최고조에 다다르게 된다. 구조상 드러난 아기장수의 죽음은 갈등의 해소가 아닌 갈등의 전개로 그것은 용마의 출현으로 더욱 심화된다. 용마의 출현과 죽음은 장수의 출현이 초월적인 섭리였음을 나타내고 그 섭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민중들의 안타까움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많은 각편에서 아기장수와 단짝인 용마를 직접적으로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아기장수가 죽자 용마가 ‘스스로 녹아버렸다’ 또는 ‘용소에 빠져 죽었다’며 용마의 죽음을 상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날개달린 말이 울다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는 점 등을 통해 우리는 아기장수의 성공을 기대하는 민중의 희망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전수경, 35-36쪽)
그리고 ‘아기장수 설화’를 통해 아기장수는 민중들이 만든 영웅이야기로 기존의 사회질서에서 민중들의 삶이 억압되고 고통스러울 때 현재의 고통을 해방시켜줄 새로운 지배자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는 민중들의 심경을 표출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기장수의 재탄생에 대한 민중들의 소망의 투영이며, 새로운 인물의 출현을 기대하는 의식의 지향성을 나타내는 열린 구조로 볼 수 있었다.
‘아기장수 설화’의 비극은 현실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의 생활을 부모를 통해 반영하고 부모의 선택과 행위로 인한 아기장수의 죽음이라는 결말로 비극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거꾸로 그들의 욕구를 끊임없이 이야기에 반영하면서 그들의 인간성을 긍정하고 미래에의 희망을 염원하는 공감으로서 비극의 초월을 이루어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광포설화로서 <아기장수 설화>는 하나의 설화작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승자들의 의식을 담고 있다.(전수경, 45쪽)
이러한 민중의 염원은 ‘복수’라는 설화소로도 표현된다. 아기장수는 민중을 구원하는 존재이다.이러한 영웅이 허무하게 죽는 것으로 끝마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 복수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는 것은 민중의 염원을 담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거창은 풍성한 민속과 더불어 민중의식이 깊이 반영된 전설도 다수 전승되고 있다. 거창의 민중들이 시대적 상황에 결코 순응하거나 맹종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전설들이 입증해 주고 있는 셈이다. 왜구의 침입이나 임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대를 조직하여 싸운 문위(文緯), 변혼(卞渾), 윤경남(尹景男)등의 인물과 병자호란 때 동계 정온 등과 같은 인물이 배출 될 수 있었던 것이 거창의 이러한 저력에 기반을 둔 것이다.
더구나 거창은 조선시대에 각종 민란의 중심지로 유명한 곳이다. 민란은 민중들의 분노를 표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강력한 민중의 분노에 어울리는 설화소는 ‘복수’이다. 이는 민중들이 지배계층에 대하여 가지는 강력한 분노의 표현이기도 하다. 거창의 민중들은 ‘복수’를 통하여 ‘승천’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민중의식이 거창 ‘아기장수 전설’에 반영되어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도영록, 38-39쪽)
⑵ 대중영웅의 정치적 의미
호르스트 베셀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나치가 만들어낸 ‘대중 영웅’의 궁극적인 목적은 끊임없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위해 희생하는 정치 종교의 순교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나치 체제는 당시까지 존재한 모든 영웅 숭배의 문화 기제들을 베셀의 영웅화에 집중시켰다. 전통적인 영웅 숭배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동상과 기념탑, 조형물의 건립과 베셀의 이름을 딴 거리, 지역, 광장 등을 통하여 독일 국민들에게 민족의 영웅으로써 베셀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기존 종교의 신성성 강조를 빌려와 ‘순교자’로써의 베셀 이미지를 만듦으로써 베셀의 영웅화는 독일인들의 일상으로 더욱 파고 들 수 있었다. 이러한 영웅화 작업과 함께 나치는 전통적인 ‘사자 경배’의 문화 기제와 종교적‘순교자 숭배’를 혼합하여 독일 민족의 ‘구원자’로써의 베셀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들 수단을 통하여 베셀의 무덤은 나치즘의 성지가 되었으며, 이로써 베셀은 종교적 경건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과 함께 1차 세계대전 이후 보편화된 전몰장병의 추모 의식을 통해 형성되기 시작한 ‘대중 영웅’ 이미지도 베셀의 영웅화 과정에 적극 활용되었다. 이러한 논리에서 베셀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평범한 한 젊은이가 아닌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웅은 강한 사명감과 신앙과 같은 국가 사랑이 있으면 누구나 될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에서 베셀은 미래의 지도자가 되고 영웅이 될 청소년들이 본받아야 할 전형이었다. 특히 고난과 어려움에 처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베셀 신화는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를 체화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나치의 ‘대중 영웅’ 베셀 만들기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대중의 일상이 머무는 모든 곳에서 베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치집권 이전에 일반적이었던 전통적인 영웅을 만나는 장소와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다면 나치가 집권한 후 독일 국민들은 ‘대중 영웅’ 베셀을 어느 곳, 어느 시간에도 만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영웅 만들기가 가능하였던 가장 큰 요소는 ‘호르스트 베셀 노래’라는 문화 기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당시의 독일 대중이 접하는 모든 문화 매체가 나치의 베셀 영웅 만들기에 동원된 것이었다. 과거의 영웅들이 묘지의 담장 안에서 머물렀다면 나치의 ‘대중 영웅’ 베셀은 기념물이 세워진 성스런 장소나 묘지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의 일상 속에서 함께 한 영웅이었다. 이러한 나치의 베셀 영웅화가 성과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나치 정권이 대중들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보았던 베셀 신화의 창조를 위한 다양한 방법들은 영웅 숭배라는 문화 기제를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심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결과물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1930년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이 나치당의 급속한 성장이 몰락을 위한 전조라는 ‘성급한 예언’을 한 것이 역사적으로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 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나인호, 256-257쪽) |
박막동은 한국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반이념적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 지역 사람들의 기억 속에 포착되어 그의 이야기가 생성․전승되고 있다. 박막동은 머슴살이와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박막동의 집안 환경은 당시 대다수의 기층민의 생활환경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 해방과 한국전쟁이 발생하게 되고, 영광 지역의 경제적․사회적 환경과 결합되면서 특별한 사건이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박막동은 주목받는다. 한국전쟁 기간 국가권력으로 대변되는 경찰뿐만 아니라 지역의 좌익 세력들은 그들이 지닌 권력을 사적 감정을 해소하는 도구로 이용하였다. 이런 상황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여 많은 민간인이 사망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경험으로 인해서 지역민들은 이념과 상관없이 두 집단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반면 박막동은 미천한 출신 성분이지만 전쟁과 함께 지역의 유격대 대장으로 등장하고, 직책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경찰의 토벌 기간에는 피난 온 지역민들을 끝까지 보호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박막동이 보인 이러한 모습이 그를 다른 좌익과 구별하면서 이야기로 전이되게끔 하였다. 더불어 지역민의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 의지가 박막동의 모습과 결부되어 이야기 생성력을 추동하게 하였다.
박막동은 실제 인물이고, 그의 죽음이 이야기가 생성되는 현재와 그리 멀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구술하면서 사실을 전제한다. 그를 직접 보았던 경험을 토대로 1차적 경험담을 구술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2차적 경험담을 구술하기도 한다. 화자들이 사실을 전제하면서 이야기를 구술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설화의 서사 문법을 차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들이 설화의 서사 문법을 의식적으로 차용했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잠재된 구술 문법이 박막동 이야기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단순한 설명적 진술을 벗어나서 사가 형성되는 지점에서 더 강화된다. 또한 1차적 경험담보다 2차적 경험담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설화의 서사 문법을 활용한 이야기 구성이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박막동 이야기는 흡사 아기장수 설화로 대변되는 비극적 인물전설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기층민의 기대 지향과 반대로 세상의 흐름은 전개되고, 이 과정에서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 출현한다. 하지만 그 인물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세상 앞에서 좌절하고 마는 것이 비극적 인물전설의 핵심이다. 사실 과거뿐만 아니라 근대의 사건 속에서 실제 인물이 비극적 인물전설로 재탄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한말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신돌석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신돌석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그의 삶이 (아기)장수 설화와 쉽게 접속되면서, 그의 이야기가 (아기)장수 이야기의 모습을 따라가고 있다.(한정훈, 32-33쪽)
아기장수는 순수한 타자이기 때문에 아기장수의 부모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기장수> 설화의 기저에 깔려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다른 주체에 의해 자신이 타자화되어 제거될지도 모른다는 아기장수 부모의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렇게 타자와 타자화가 원인이 되는 공포를 <아기장수> 설화 공포의 유형라고 했을 때, 이것이 현대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 <지슬>을 통해 확인해 보았다. 영화는 4․3사건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발생한 권력과 개인의 대립의 구조를 통해 <아기장수> 설화식의 공포를 드러내고 있다. 국가권력은 그들이 설정해놓은 이념적 틀에서 벗어난 존재들을 빨갱이라는 타자로 치부해버리고 제거한다. 이에 주민들은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빨갱이라는 타자의 존재가 되어 살해당해야 했고, 토벌군은 타자화되지 않기 위해 주민들을 살해한다. 이것은 결국 국가라는 거대한 동일자에 의해 타자화되어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의한 것으로, <아기장수> 설화식의 공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단 영화의 배경이 되는 4․3사건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수많은 굴곡 속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상황의 이면에도 이 <아기장수> 설화 식의 공포가 작동되고 있다. 과거의 6․25 한국전쟁과 5․18민주항쟁, 그리고 최근의 천안함 사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는 공포의 감정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 공포의 감정이 작동하는 역학을 분석해 보면 <아기장수> 설화에 나타난 공포와 동일한 맥락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6․25 한국전쟁과 같은 경우 영화 <지슬>의 소재가 된 4․3사건의 연장선에 위치한 사건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광범위하고 강렬한 생채기의 기억을 우리에게 각인했다.
6․25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도발을 계기로 발발한 사건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진영과 반공진영 간의 이념대립으로 인해 팽배해진 냉전갈등이 한반도에서 폭발한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념집단 간의 충돌로 말미암아 발생한 6․25 한국전쟁은 이와는 무관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순간과 대면하게 했다. 이러한 경험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안겨주었고,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들의 기억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념대립의 표상으로 성립되는 6․25 한국전쟁은 그 근저에 철저한 동일화의 논리가 자리한다. 이념집단이 지향하는 바에 동조하지 않는 다른 주체를 타자로 인식하고 물리적으로 배제하려고 하는 논리의 극단성이 생명의 존엄성 우위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이 연출된다.이와 같은 이념집단의 전체주의적 동일화의 논리는 개인의 일상 영역에까지 전개되어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가하게 되고 이것을 계기로 그들은 공포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논리는 이념에 대한 확고한 의식으로부터 반체제적 성향을 드러내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접촉한 존재들에게 타자화의 가능성을 둔다.(황승업, 99-101쪽)
백범 문학콘텐츠에 속하는 개별적인 작품 속에서 서사의 잔가지를 제거하고 나면 다음과 같은 골격이 공통적으로 추출된다.
a. 민중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b. 태몽과 난산, 소 울음소리 이후 출산 등 신이한 조짐이 있었다.
c. 학문․병법 등이 뛰어났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힘이 세었다.
d. 동학․의병활동, 독립․통일운동 등을 벌이면서, 사람들이 따르는 민중의 지도자가 되었다.
e. 독립운동의 동지인 이승만에게 배신당하였고, 같은 민족 출신의 인물들에게 2번의 암살 기도 끝에 살해당하였다.
f. 살해당한 후, 오히려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로서 추숭되고 있다 민중의 영웅으로 태어나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다가 같은 집단의 구성원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줄거리로 정리가 된다. 여기서 핵심은 백범이 기득층이 아닌 민중 출신의 영웅이라는 점, 태생적 조건에 걸맞지 않은 선천적인 비범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 소속 집단의 일정한 유대관계가 있는 구성원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 핵심적인 요인이 서사의 비극성을 강화한다는 것인데, 주목할 점은 이러한 서사의 골간이 전통적인 구비전승의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백범 문학콘텐츠 속에 나타난 이야기의 서사골격은 전형적인 민중영웅 전설에 대응된다. 민중영웅 전설은 비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득 질서에 의해 패배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백범 문학콘텐츠 속에서 공통적으로 추출되는 백범 이야기의 골격은 민중영웅 전설 중에서도 아기장수 전설 유형에 근접해 있다. 민중영웅을 살해하는 주체가 일정한 유대관계가 있는 소속 집단 출신이라는 사실은 민중영웅 전설의 유형 중에서도 일차적인 근친 집단의 구성원인가족의 배신에 의해 죽음을 맞는 아기장수 전설의 원형과 재생산의 기제 속에서 백범 이야기가 형성되고 향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아기장수 전설을 원형으로 하여 문학콘텐츠 속에서 백범의 이야기가 형성되고 수용되어 왔다는 것이다.(권도경 2, 145-146쪽)
그렇다면 문제의 초점은 역사적 리얼리티, 즉 백범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실의 왜곡 여부가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역사 기록이나 학술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백범의 인간적․개인적 측면에 대한 백범 이야기 주체의 강한 관심이다. 왜 백범 이야기의 주체는 역사 기술과는 달리 백범의 공식적인 활동의 나열과 그 의의 파악에는 관심이 없고, 대신 그의 비범성과 죽음, 기존 질서의 억압과 이에 대한 백범의 저항, 인물 형상 등에 그토록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앞서 백범의 이야기가 전통적인 전설의 한 유형인 아기장수 전설의 서사구조 및 인물 형상화 방식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분석한 바 있다. 백범 이야기의 형성 및 수용 주체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기존 질서에 결코 무릎 꿇지 아니한 그가 당한 어이없는 죽음에 대해 기억하고자 한다. 비범함에도 불구하고 동족에 의해 암살당해야만 하는 기존 질서의 부조리에 대한 항변을 백범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고 향유함으로써 제기하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 백범의 암살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재생함으로써 민중은 자신들 속에서 태어나 자신들을 위해 활동하다 억울한 죽음 맞은 거인에 관해 말을 하고 싶어 한다. 백범이 자신들과 같은 민중 속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민중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지 않았더라면 이야기를 만들고 향유하는 주체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백범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 주체의 정조는 안타까움과 비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움의 정조는 이것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자기 동일성을 느끼지 않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백범은 누가 민중에게 시키지 않아도 그 속에서 자체 내적으로 기억을 재생산하고 싶은 존재인 것이다. 백범 이야기에 관한 이와 같은 이야기 주체의 미의식적 지향은 바로 민중영웅 전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아기장수 전설의 그것과 만난다. 아기장수 전설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민중 출신 영웅 이야기의 원형이다. 이 장르에서는 민중영웅이 기존 질서에 저항하여 새로운 질서를 꿈꾸다가 패배하는 죽음에 강하게 집착한다. 기존 질서에 대한 부분적인 승리에 대한 언급도 있겠지만 부각되는 것은 기득 권력의 횡포와 민중영웅의 패배, 그 비장미와 비극성이다. 백범 이야기의 주체는 민족의 무의식 속에 전해 내려오는 이러한 아기장수 전설을 끄집어내어 그 구조와 미의식을 빌어 백범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비범함에도 불구하고 소속 집단 구성원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민중영웅인 아기장수 전설의 상징과 구조가 백범 이야기를 형성하고 수용하는 향유층으로 하여금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재생산하게 하는 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권도경 2, 172-173쪽)
드라마 <각시탈>은 신돌석과 김구가 아기장수로서 해결해나가고자 했던 일제의 국권침탈과 관련된 민족의 집단 트라우마의 문제를 계승했다. 특히, 신돌석은 등장인물들에 의해 일제의 한일 합방 야욕에 저항한 민중영웅으로 거듭 언급되며, 심지어 신돌석의 제단을 차려놓고 이강산의 죽음 이후 각시탈의 생존을 위한 기원까지 드린다. 신돌석이 각시탈 이전에 을사조약에서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는 대일(對日) 트라우마에 대항한 민중영웅의 상징으로서 각시탈과 동일시되는 수용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신돌석의 역사적 실존성의 지평이 반복적으로 작품 내부에서 수용됨으로써 각시탈의 아기장수성이 환기되고, 동시에 각시탈의 허구성이 희석되어 신돌석의 실존적 지평과 겹쳐지게 된다. 대신, 민중영웅 대신 각시탈의 아기장수로서의 민중성이 양반 계층까지 포함하는 민족적 차원으로 확장되어 있는 것이 차이다.
이러한 차이는 신돌석의 민중영웅성을 각시탈의 그것과 일치시키되 신돌석에 의해 민중성과는 정반대의 차원에서 일제 국권 침탈기의 트라우마를 겪은 양반층의 입장까지 수용하는 총체성에서도 확인된다. 신돌석전설에서 대체로 양반은 일본제국주의 질서에 순응한 아기장수의 적대자로 설정되고 있지만,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호 및 양반가를 습격한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도 존재한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직접적인 수탈을 입은 계층은 민중이며, 이러한 민중을 중심에 둔 항일활동이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민족주의의 주류 범주를 구성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탈역사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제국주의 질서 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계층의 일상적 삶은 협의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는 상대적인 입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목적성에 의해 기득권을 내세우거나 지킴으로써 일본제국주의에 의도적으로 순응하지 않았다면, 계층질서에 따라 민족주의의 적용 대상을 물리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관점도 가능할 수 있다.(권도경, 307-308쪽)
아기장수전설은 어느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기실 사회적 실조감이 상승하는 모든 때를 총체적인 배경으로 삼는다. 바꿔 말하면 민중의 고난이 직결되는 시대 상황이면 언제나 가능하다는 말이다. 또한 이야기의 각편에 따라 구체적인 시대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특정 시대 자체를 뜻하기보다는 그러한 시대 상황과 비슷한 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 고소설에서 설정된 특정 시대의 시대(시공간)도 특정한 시대 자체를 뜻하기보다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정된 것이다.
아기 장수 전설이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시하는 바가 많다. 그것은 곧 이야기의 배경 시대는 사회적 아노미 현상이 발생하는 모든 때를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아기장수전설은 시대가 어느 때이건 그러한 상황에 이를 때에는 재창출될 수 있는 살아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 민중의 내면화된 의식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는 신념으로 작용할 수 있고 행위 동기의 역동적 힘이 될 수도 있다. 이로 볼 때 아기장수전설에서 내포하고 있는 비극적 의도가 단순히 이야기자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민중종교나 민중의 자발적인 사회운동으로 확장됨을 알 수 있다. 조선조 후대에 강력한 의미 세력으로 유포된 정감록을 비롯한 각종 참설은 革世主가 내림할 사건을 예견하고 있다. 또는 조선조 누대를 거치는 동안 정여립이나 이몽학 같은 반역 인물을 혁세주의 출현과 결부시키려는 의도도 이와는 무관하지 않다. 특히 후천개벽의 열린 세계로 규정되는 민중종교 사상이나 미륵불 사상이 조선 말기에 발생했던 민란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것도 역시 이와 관련된다. 그래서인지 조선 말기의 민란들이 봉건체제를 지지하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와해와 함께 근대화를 요구하는 사회운동의 성격에서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성격을 띠게 된다.(장장식, 336-337쪽)
건국 신화의 영웅들 중에서 주몽과 아기장수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점은 아기장수가 날개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점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둘다 하늘이 낸 인물이라는 것은 암시하는 기호이다. 둘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재주가 뛰어났다는 점이다. 주몽이 활과 화살을 잘 다룰 수 있었다는 것과 아기장수가 힘이 세다는 것은 단순한 무력을 의미한다기보다 남들보다 뛰어난 영웅적 자질의 기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주몽이나 아기장수 모두 자신들이 가진 능력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배척당하게 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여기까지는 아기장수와 주몽은 모두 전형적인 영웅형 인물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제는 배척당하게 된 이후의 두 영웅의 운명이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데 있다. 주몽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동부여를 더나 고구려를 세우게 되지만, 아기장수는 부모의 손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 똑같이 하늘이 낸 인물인데 왜 주몽은 성공하고 아기장수는 실패하는가. 그 출신 신분 때문인가? (중략) 따라서 주몽은 지배층의 지위를 합리화시켜주며 이익을 강화시켜주는 인물이 된다. 즉 주몽을 비롯한 건국신화의 영웅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지배층의 권위가 정당하다는 생각을 유포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아기장수는 지배층의 이익을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건국신화와 아기장수 이야기를 만들어낸 계층은 각각 다르지만 그 이야기 속의 사건과 인물들의 행동을 이끌어가는 이데올로기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강유리, 286-287쪽)
사실 아기장수는 한국민중의 메시아다. 그는 왜 태어났는가? 분명한 것은 그가 무엇이 될 예정이었던 간에 생명 억압의 현실을 타파하고 백성과 생명을 널리 이롭게 할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수많은 민중들의 기원에 의해서 자연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생명이다. 민중들은 그의 탄생을 기다렸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기장수는 자연의 아들이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민중들의 아들들이었다. 그를 낳은 것이 민중들의 기원이었듯이 그를 받아들여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것도 민중들의 아들이었다. (중략) 그러나 한국 민중설화의 세계관은 생명 전체의 차원에서 성립된다. 예수는 스스로의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부활하여 아버지에게로 가지만, 아기장수는 어머니 용소를 통하여 자연의 생명력으로 남는다. 수많은 나무, 수많은 곡식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아기장수가 자연의 아들, 생명의 주재자라는 증거는 또 있다. (김창현, 115쪽)
아기 장수 설화의 핵심 줄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한 무고한 생명이 거대권력의 보이지 않는 억압에 의해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펴본 것처럼 아기, 날개,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부모라는 과감한 전형화를 통하여 강렬한 서정성과 주제의식을 길어내고 있다. 여러 연구자들이 아기장수를 반역의 혁명적 열망을 간직한 ‘민중영웅’으로 보는 것도 물론 일리는 있다. 아기장수는 결국 역모의 가능성 때문에 죽으며, 성장하여 민중영웅이 되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아기장수는 ‘장수’가 아니다. 그냥 아기일 뿐이다. 그를 따르는 병졸도 없고, 그 어깨 위에 내려진 작위도 없다. 심지어 아직 이름조차도 없다. 그러므로 아기장수의 ‘장수’는 이 아기가 자라 ‘장수’가 되길 바라는, 아니 되었어야 한다는 민초의 바램의 투영일 뿐이다. (김창현, 110쪽)
장수전설이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며 전승되는 현상은 전승집단의 전설 향유 심리에 바탕한 지역성의 반영이라는 특성을 보여준다. 장수이야기의 대략적인 분포를 보면, 영남지역에서 신돌석, 최제우 등, 호남지역에서 우투리 정여립, 김덕령 등, 충청도에서 이몽학, 제주도에서 김통정, 이재수 등으로 나타난다. 이외에도 탁장군, 피장군 혹은 한씨네 아기장수, 구롱동 아기장수 등으로 이름붙여진 아기장수, 그리고 송장군, 정장군 등의 이름을 가진 오누이 장수등이 각지에서 전승되고 있다. 이것은 장수 출현이 요구되던 절박한 사회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장수를 통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화중의 설화적 대응력을 읽게 해준다. 즉 전승집단은 자신들의 영웅을 자신들의 생활과 인식체계 속에서 형상화 시킴으로써 현실과 역사를 해석하고 거기에 대응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여러 변이형으로 혹은 역사적 인물과 관련지어져 전승되었다고 보인다. 곧 각지에서 전승되는 장수이야기는 전승집단의 전설 전승심리의 다양한 표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장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널리 있으니 각지에서 장수이야기가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주변의 샘이나 바위 등과 같은 증거물에 특별한 동기가 있어 의미를 부여하고, 오랫동안 신앙해오던 민간신앙과 풍수사상등이 배경이 되고,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면서 생겨난 현실·역사의식이 동기가 되어, 그리고 동정이 가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장수이야기는 점점 다양하게 이야기 되고 전승되었을 것이다.(이경엽, 82-83쪽)
⑶ 민중영웅과 恨
설화는 민족적 집단의 공동생활 속에서 공동의 심성에 의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구전문학으로, 그 속에는 민중의 사상 ․ 감정 ․ 풍습과 가치관 및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설화는 민중 사이에 널리 전파 ․ 전승되어 오면서 민족적 정서 함양과 가치관, 인생관이나 세계관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설화의 주요한 성격을 통해 설화의 개념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설화는 일정한 구조를 가진 꾸며낸 이야기이다. 설화에는 일상의 신변 잡담(身邊雜談)이나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이야기는 포함되지 않으며 또한 설화 중에는 사실을 가장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이 아닌 사실적인 이야기이다. 둘째, 설화는 구전(口傳)된다. 설화의 구전성은 단단한 구조에 힘입어 가능하게 되는데 화자(話者)는 이야기의 모든 구절을 완전히 기억해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이 되는 구조를 기억하고 화자 나름대로의 수식을 덧보태서 전달하게 된다. 따라서 설화는 같은 유형(유형, type)의 이야기일지라도 화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며 심지어는 같은 화자일 경우에도 경우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된다. 이 때 각각 다르게 이야기되는 이야기 하나하나를 각편(各篇, version) 이라고 한다. 셋째, 설화는 산문(散文)으로 되어있다. 구전되는 다른 민요, 무가, 판소리 등이 모두 노래로 불려지며 규칙적인 율격을 갖는 것에 비해 설화의 구연은 보통의 말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산문성이 강조된다. 넷째, 설화는 구연기회가 개방되어 있다. 즉 설화의 구연은 한 명 이상의 화자와 청자만 있으면 언제든지 구연될 수 있다. 민요와 무가, 민속극등은 어떤 일정한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에만 연행되는 것에 비해 설화는 이야기를 하고, 들을 분위기만 형성되면 구연이 가능하다. 다섯째, 설화는 화자의 자격에 제한이 없다. 설화의 화자는 전문적인 수련이 요구되지 않으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면 파악된 구조를 바탕으로 누구나 화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설화는 구비문학 장르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계층의 향유층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어느 장르보다도 문헌에 정착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었다.(조호정, 7-8쪽) |
그런데 이와 같은 공포가 조직될 수 있었던 원리는 이야기 속에 설정되어 있는 두 가지의 발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첫 번째 발언은 아기장수의 부모와 이웃들이 아기장수의 출현을 통해 환기하게 되는 ‘장수가 난 집안은 망한다’와 관련된 ‘역적=장수=제거대상’이라는 도식이다. 이는 지배층에 의해 생성된 것으로써 그 이면에는 죽음의 위협을 전제로 하는 지배층의 폭압적인 태도가 담겨있다. 그것은 평소에 그들의 일상과 무관한 것이었지만, 아기자수의 탄생을 계기로 아기장수 보모의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를 통해 아기장수의 부모는 아기장수라는 이물적인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동시에 지배층에 의한 죽음이라는 원초적 공포를 환기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발언은 아기장수가 아기장수의 부모에게 제시하는 금기인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있는 곳을 알리지 말라’이다. 이것은 아기장수 역시 지배층이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기장수 첫 번째 발언 이면에 숨어있는 지배층의 논리를 이미 인지하고 있으며, 이는 첫 번째 발언에 의해 부각된 죽음의 논리를 보다 명확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의 환기는 그 시대의 지배담론, 즉 스스로를 동일자로 표상하는 지배층 중심의 인식론적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아기장수가 역적, 즉 금기의 대상으로 설정되었다는 사실은 금기의 생성자인 지배층이 아기장수를 부정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배층이 표명하는 동일자의 속성을 파악함으로써 더욱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동일자는 낯선 존재를 타자로 인식한다. 동일성을 지향하는 주체로서의 동일자에게 있어서 타자는 일상을 파괴하는 위협의 존재로 간주되며, 따라서 철저하게 배제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는 전체성과 동일한 의미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전체성의 이념은 유한한 인간의 의식이 완전한 내재성, 즉 자기 자신과의 완전한 일치를 바라는 욕구에서부터 나온다고 한다. 인간의 의식은 자기 밖에 있는 다른 존재를 그대로 두지 않고 의식 안에서 포괄하려고 한다. 따라서 전체성을 바탕으로 한 전체주의는 전체의 체계 속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든 제거한다. 즉 인간의 절대적․인격적 가치를 부인함으로써 인간의 인격을 하나의 체계 속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성의 논리는 주체로서의 동일자가 자신의 영역 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배제하는 동일화의 논리인 것이다.
지배층은 이러한 전체성의 논리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타자로 인식되는 존재를 제거하려 한다. 따라서 ‘역적=장수=제거대상’이라는 도식에는 아기장수뿐만 아니라, 그에게 동조하는 모든 존재를 타자로 치부하고 제거하겠다는 지배층의 전체성의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황승업, 37-38쪽)
아기장수 전설은 본질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으나 그것을 주류사회 속에서 실현하지 못한, 비범한 주변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 전설의 하위 장르이다. 타고난 재능의 비범함과 환경세계의 주변성이 갈등하면서 만들어내는 아이러니가 그 미의식의 핵심이다. 아기장수 전설의 주된 향유층은 민중으로 그들 스스로가 주변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사회적인 헤게모니를 소유하지 못한 주변인의 집합체가 바로 아기장수 전설의 향유층인 것이다. 사회적인 헤게모니와 비범한 재능을 모두 결여한 주변인의 집합체인 민중은 전자의 부재에서는 그 성분이 일치하나, 후자에서는 자신들의 결핍을 대리만족해 줄 수 있는 아기장수의 이야기를 향유함으로써 문학을 통해 사회적인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인 담론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아기장수의 비범성과 비극적 운명에 대한 전설 향유층의 자부심과 안타까움이라는 이중적인 향유의식이 놓여 있다. 이러한 아기장수 전설의 향유방식이 특정한 지역적인 정체성과 결합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돌석 전설이다. 신돌석은 영남의 대표적인 민중 영웅으로서 그 비극적인 생애가 아기장수의 정체성과 일치한다. 영남 지역에서는 이러한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신돌석을 아기장수에 치환하여 신돌석 전설의 대부분을 아기장수 전설의 유형구조 속에서 향유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영남의 대표적인 민중영웅인 신돌석에 대한 자부심이 외세인 일제와 결탁하여 자국의 영웅을 죽인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결합되어 아기장수로서의 신돌석에 대한 풍부한 전설 텍스트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호남지역에서는 아기장수 전설을 지역적인 정체성과 결합하여 향유하는 방식이 지역사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있다. 영남 지역의 아기장수 전설이 신돌석이라는 특정한 지역 인물과 결합되어 있는 특수한 차원에 그쳤다면, 호남지역에서는 그것이 특정한 역사적인 인물과 결합되는 극소한 차원에 한정되지 않고, 지역적인 특수성 내부에서 전반적인 지역사 및 지역민의 의식과 결합하여 일반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호남지역은 마한과 백제가 한반도 남부의 고대사를 일군 지역으로 그 역사의 시원과 문화의 전통이 깊은 곳이다. 중국의 산둥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미칠 정도였던 호남지역의 고대 문화는 한반도의 통일국가를 해당 지역 내에서 배출하지 못한 결과, 지역적인 헤게모니 다툼에서 패배하여 주변인의 위치에 놓이는 위상의 급격한 전락을 경험했다. 첫 번째 통일국가인 통일신라가 영남지역에서 나왔고, 두 번째 통일국가인 고려가 오늘날의 북한 지역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호남지역의 주변적인 위치는 쉽사리 극복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통일국가인 조선에 와서도 이러한 사정이 극복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조선의 시조인 이성계가 그 본관을 호남지역에 두고 있었으면서도 왕조 창업의 기반이 중국과 인접한 전통적인 여진족 거주지인 함경도 일대에 있었으며, 오히려 자신과 혈통적으로 근친의 관계에 있는 호남지역을 역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었다. 호남지역은 고대 이후로 한반도 내부에서 전개된 지역적인 헤게모니 다툼의 역사 속에서 일종의 주변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역적인 경험이 아기장수 전설의 미의식과 보다 쉽게 교감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권도경 1, 84-85쪽)
역사학자들은 민란의 시기마다 세상에 널리 퍼지곤 했던 ‘장수’나 ‘진인(眞人)’에 대한 풍설에 대하여 그것을 난의 주동자가 민심을 얻기 위해 조작해낸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그 바탕에 전설을 통해 이어져온 또 하나의 역사가, 민중들이 스스로 이어온 말로 된 역사가 가로놓여 있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수동적인 추수가 아닌 주체적인 몸짓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된다. 민중은 허튼낭설에 속아서 우루루 일어났다가 속절없이 죽어 쓰러졌던 바보가 아니다. 권력에서 배제되고 지식에서 소외된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자기의 역사를 지키고 세우는 가운데 세상의 주체로 살아왔던 이들이 그렇게 주인이 되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힘에 의해 마침내 세상은 바뀌고 역사는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역사가 아니고 무엇일까.
말로써는 온전한 역사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말은 글을 모르는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역사가 없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인식의 줄기가 없다는 뜻이니 역사 없는 삶이란 허깨비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의 삶이 역사가 없고 맥락이 없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 할 때 그것만큼 허망하고 아픈 일은 다시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글을 못 가진 채 소외된 사람들이 구비전승을 통해 스스로의 역사를 지키고 세워온 과정이란 억압받고 박탈당하는 존재로서의 삶의 아픔을 감싸고 이겨내는 치유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존재로서 살아 있음을 그렇게 표현해 왔던 것이다. 이렇게 주체가 되어 움직여 온 삶은 그 자체로 건강하고 빛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식과 권력을 독점한 상태에서 못 배운 이들을 함부로 차별하거나 억압했던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말이다.(신동흔, 57-58쪽)
나숭대(羅崇大)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반란 가담자.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 일가인 나만치(羅晩致)·나두동(羅斗冬)과 더불어 가병을 양성하여 가담한 죄로 참형에 처해졌으며, 가산은 적몰되었다. 이 일로 인해 나숭대의 일에 가담한 나씨와 가담하지 않은 나씨가 갈라졌으며, 가담하지 않은 나씨들은 원래 본관인 나주(羅州)에서 금성(錦城)으로 본을 바꾸었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따르면, 나숭대는 타고난 기골이 장대하여 그에 따른 ‘나숭대의 탄생’, ‘옷고름 때문에 잡힌 나숭대’, ‘나숭대와 나귀’와 같은 설화가 있다. 일명 아기장수설화와 명당설화를 혼합한 것으로, 비록 지방 토호(土豪)이기는 하나 몰락한 양반으로서 울분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인물에 대한 비극적 설화이다.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9999_1_0020677
이 설화와 진인 이야기의 관련성은 우선 인물의 신이성으로부터 찾아진다. 아기가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서 나자마자 날아다니곤 한다는 것은 일상의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신이한 일로서, 이 아이가 큰 일을 행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한다. 장수가 그 신이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죽으면서 그 죽음에 이어 바로 출현한 용마 역시 아기장수가 지니고 있던 신이성을 다시 한번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요소들은 아기장수가 바로 하늘의 뜻을 안고 태어난 인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진인 역시 신이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탄생과 행적은 신비에 싸여 있으며, 그가 지닌 능력은 함부로 재단되지 못한다. 그는 천명을 얻은 인물로 인식되며 나서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할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기장수와 마찬가지로 진인 역시 일상의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초인적인 존재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사실은, 아기장수나 진인의 경우에 다 같이 그 능력의 쓰임새가 세상을 변혁하는 일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기장수는 세상에 동요를 일으킬 인물로서 받아들여지며, 훗날 역적이 되어 후환을 입히리라는 불안감 때문에 가족에 의해서 압살되고 만다. 한편 진인이 세상의 변혁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진인은 흔히 새 세상의 주인이 될 인물로 인식되고 있으며, 진인 이야기는 민란과 같은 사회․동요와 결부되어서 폭넓게 유포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정여립 사건, 홍경래란, 갑오항쟁, 이필제란 등이 모두 진인출현설이 문제가 되었던 역사적 사건들이다. (신동흔․강진옥, 105-106쪽)
⑷ 한국 사회 적용 현장 : 민주화운동 관련
기소 뒤에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사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인권옹호협회에서는 인혁당 사건의 무료 변호를 맡기로 결정하고, 피고인들에게 가해진 혹독한 고문 내용을 폭로하였다. 그 뒤 한신옥 검사가 47명 중 26명만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속하였으나, 재수사 결과 14명이 공소 취하되고 나머지 12명은 반공법 위반으로 공소 변경되었다. 1965년 1월 20일 서울 형사지법 합의 2부(재판장 김창규)는 피고 13명 중 도예종에게 반공법 4조를 적용해 징역 3년, 양춘우(추가 기소)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피고인 11명에 대해서는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발표한 어마어마한 국가변란사건은 용두사미로 끝을 맺었다.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이후 독재정권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거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다시피 하는 용공조작사건의 전형을 보여준 시초였다. 그러나 고문으로 조작된 조직사건을 통해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던 박정권의 시도는 성사되지 못했다. http://archives.kdemo.or.kr/Collection?cls=999&yy=1960&evtNo=10000009
1961년 4월과 5월에 학생들은 통일운동을 더욱 확대했다. 4・19 한 돌을 맞아 서울대생들은 침묵시위를 했다. 그리고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4・19제2선언문’에서 반봉건・반외압세력・반매판자본의 3반(反)운동을 펴겠다고 선언했다.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한 것에 이어 5월 5일 19개 대학이 참여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대회에서는 제3세계의 민족해방론적 통일관이 강렬히 표출되어 있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남북학생회담을 판문점에서 열 것을 제안했다. 5월 13일 민자통 주최로 약 3만 명이 모인 가운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가 열렸다. 급진적인 통일운동은 4월혁명으로 위축된 극우반공세력을 불안하게 했고, 쿠데타 모의자들한테 하나의 구실을 제공했다. http://archives.kdemo.or.kr/Collection?cls=999&yy=1960&evtNo=10000007
2006년 1월 26일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당시 6·8 부정 선거에 대한 반대를 무력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규모 간첩 사건으로 과대 포장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위는 그 근거로 검찰에 송치한 66명 가운데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했지만 대법원은 단 한 명도 간첩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점을 들었다. 또 중앙정보부가 당시 대표적인 학생 동아리인 서울대 민비연으로 수사를 무리하게 확대한 뒤, 수사 도중 7차례나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점도 그 이유로 들었다. 국정원 진실발전위는 특히 해외에 거주하던 예술가와 교수, 유학생 등 30여명이 국내로 불법 연행됐으며, 수사 과정에서 각종 고문이 자행된 것으로 추정했다. 국정원 진실발전위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연행을 직접 지시한 물증은 없지만 해당 외국과 주권 침해 시비가 일어났던 점으로 미뤄, 사전 보고를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국정원 진실발전위는 또 중정이 이 사건 재판 도중 검찰과 재판부에 금품 로비를 하려 했다는 내부 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정원 진실발전위는 정부가 사건 관련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http://archives.kdemo.or.kr/Collection?cls=999&yy=1960&evtNo=10000012
그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이날 광주 등 지방 대도시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으며, 박정희는 같은 날 밤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압하였다. (상세는 ‘6·3시위’ 참조) 윤보선, 장택상, 유진오, 장준하 등이 주도한 한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위원회는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지원, 고무, 독려하였는데, 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한일협정 반대 이슈를 선동하여 배후 조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후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 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 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져 상당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었다. 시위의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검거되고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서울 시내에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되어 7월 28일 사태는 진압되었고 이튿날인 2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http://archives.kdemo.or.kr/Collection?cls=002&evtNo=10000010
김근태 의장이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고 있을 당시 나는 10월 5일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민청련 사무실에서 김근태 의장의 고문수사에 대한 항의농성을 하는 중에도 민청련 집행부에 대한 연행 구속은 계속되었다. 먼저 구속된 김근태 의장, 김병곤 상임위원장,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 외에도 김종복 청년부장, 김희상 대변인, 최민화 부의장이 속속 구속되었다. 나 역시 구속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결혼식 때까지 연행되지 않아 10월 5일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예정대로 치르고 설악산으로 2박3일 일정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결혼식 날과 다음날 억수같이 비가 내려 꿈같은 신혼여행을 설악호텔 방안에서만 보내야 했기 때문에 마지막 날 비가 그치고 해가 나자 우리 부부는 뒤늦게 울산바위까지 등반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냥 귀경하기가 못내 아쉬어 강릉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하고 강릉으로 가던 중 잠시 속초에서 선물을 사러 시장에 들렀다. 아내는 장보러 가고 나만 다방에서 짐을 지키고 있는데 수사관 6명이 들이닥쳤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들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호텔 직원으로 위장하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고, 등반할 때도 뒤를 미행하였다. 결국 갓 결혼한 신랑신부는 이들 경찰차에 실려 귀경길에 올랐는데, 서울 톨게이트에서 신부만 보내고 나는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직행했다. 말로만 듣던 고문수사로 악명 높은 남영동으로 간다는 두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신혼의 신부를 길거리에 내려놓고 가는 무기력한 내 모습에 너무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3주간의 조사는 의외로 혹독한 고문 없이 넘어갔다. 잠 안재우기나 욕설, 위압적인 언사 등은 있었지만 김근태 의장이 받았던 물고문, 전기고문은 없었다. 김근태 의장의 고문사실이 밖에 알려져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 정권의 민주화운동 말살작전은 민청련 탄압이후에도 계속되어, 민통련 간부들의 구속과 사무실 폐쇄, 건대사태에 의한 학생들의 대량구속 등이 86년에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야만적 탄압과 고문수사는 결국 87년 1월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까지 이르렀고, 이러한 전두환 정권의 무리한 행보는 6월항쟁을 불러 일으켜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작년 말 김근태 의장의 죽음은 고문의 야만성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해주었다. 김근태 의장은 강인한 의지로 고문을 이겨냈지만 그러나 그 후유증에 일생동안 시달려왔다. 그 고문의 후유증은 파킨슨병이라는 육체적 병으로도 왔지만 고문으로 한번 무너졌던 정신적 상처는 시시때때로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발가벗은 몸으로 기어다니며 목숨을 구걸하던 기억, 망가진 자존심은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았던 것이다. 김근태 의장과 거의 같은 시기에 안기부에 연행되어 고문받았던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은 아직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몇 년에 한 번씩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
7. 정치적 낙인으로서 파시즘
⑴ 중화주의 동북아 문명의 오랑캐 낙인으로서
김동리는 전형적인 동양과 한국의 전통을 통해 세계적인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근대적인 ‘전통’은 근대적인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일민주의의 그것처럼, ‘가족, 윤리, 유기체, 도덕, 영웅’ 등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만나면서 혼란을 겪는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혼란은 최일수의 글을 통해 쉽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괴테가 “초민족적인 보편성”을 주장하고 “민족문학이 세계문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단편적이고 어린”발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전통이나 풍속이 단순히 민족적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차원에서의 다양한 파시즘적 요소들을 포함해야 하며, 제3세계 민족의 민족적 특성이 자본주의와 세계주의의 저항 동력이라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이평전, 222쪽) |
나는 어렸을 때에, 즉 1980년대에 소련의 대중매체에서, 남한(Южная Корея)과 관련해서 계속 ‘파쇼 도당’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대체로 전두환의 신군부정권을 소련의 조선학 전공자나 미디어 종사자들이 그렇게 인식했다. 실은 전두환정권 말기에는 박철언과 김학준 등을 통해서 대소 관계 정상화 교섭이 이미 들어오고 있었지만(박철언, 2005: 제4부 제28절), ‘사회주의 국가’라는 명분상으로는 소련은 광주학살과 삼청교육대의 주인공들을 ‘파쇼’ 그 외에 그 어떤 방식으로도 기표하기가 힘들었던 셈이었다. 과연 그 말이 그렇게 지나쳤을까? 1980년대 학생운동가들도 ‘파쇼 정권’이라는 말을 흔히 썼고, 또 지금도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군사정권 시기를 통틀어 ‘주변부/유사 파시즘의 시기’(김동춘, 2005)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나 역시 이 규정을 지지하는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파시즘’이라는 것은, 독재의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는 국가의 지배집단이 조직노동을 배제하거나 장악, 어용화하고, 나아가서 사회영역/시민사회를 탄압해서 배제하거나 역시 장악해 각종의 ‘끄나풀’로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총동원적 운영 방식이다. 크게 봐서는 중심부 내지 준(準)중심부의 파시즘은 ‘밑으로부터의 파시즘’과 ‘위로부터의 파시즘’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대개 배타적 종족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소부르주아/중간계층의 정당이 국가를 장악하는 형태(히틀러, 무솔리니 식)며, 후자는 전시 일본과 같이 기존의 관료체계가 ‘비상상황’을 조성하면서 조직적으로 파쇼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주변부의 경우에는 보통 ‘위로부터의 파시즘’의 하나의 특별한 종류, 즉 군사파시즘이 유행한다.
많은 경우에는 피지배자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직면한 극우적 군부는 핵심부의 비호하에서, 핵심부의 후원을 받으면서 정변의 방식으로 정권을 탈취하여 피지배자들의 조직들에 대한 철권통제를 하면서 체제에 대한 모든 도전들의 가능성을 차단시켜버리는 것이다. 스페인(프랑코의 정변, 독일/이탈리아의 후원), 칠레(피노체의 정변, 미국의 후원), 한국(박정희/전두환의 정변, 미국의 후원)은 그 대표적 사례인데(스페인의 경우에 대해서는 Campos, 2004 참조), 한국의 경우에는 피지배자 조직/저항에 대한 파괴는 1961년 5․16 직후의 혁신정당 탄압, 『민족일보』 탄압, 노조 자율성 박탈, 그리고 1980년 광주학살 등의 형태를 띤 것이다. 핵심부 파시즘과의 중요한 차이점이라면, 주변부 파시즘은 사회의 병영화를 지향할 수 있지만, 자율성이 없는 주변부 종속 국가의 특질상 ‘침략’을 독자적으로 꿈조차 꿀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의 종범행각과 반북 히스테리의 고취로 끝나고 만 셈이다. 주변부 파시즘으로서는 아무래도 외적(外敵)보다 (상상된) 내적(內敵)에 대한 증오 유발을 통한 ‘대동단결’이 더 중요하다. 오늘날에 이루어지는 ‘이석기 재판’을 위시한 좌파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마녀사냥은, 왜 이와 같은 주변부 파시즘의 특징에 대한 고민들이 시의적인지를 잘 보여준다.(박노자, 13-14쪽)
전 세계적으로 파시즘 세력이 몰락한 직후인 ‘해방8년’ 기간 동안에 ‘파시즘 노선’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다툴 정도로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파시즘 노선과 저항민족주의가 결합했던 주변부적 특수성속에서 역사적 요인을 찾는다. 독일, 일본의 파시즘과 달리 주변부로 수용된 파시즘은 ‘반제’ 민족운동과 결합하며 2차 대전 이후에도 생명력을 유지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0년대 구국의 방법으로 파시즘을 수용한 중국의 장제스와 국민당이었다. 장제스는 파시즘을 민족주의, 군사화, 지도자 숭배로 이해했다. 저자는 1930년대 말 국민당 당정훈련반 과정에서 행한 장제스의 강화 내용을 치밀히 분석하고, 이범석이 이 훈련반 과정을 이수하며 장제스로부터 민족주의, 군사화, 당 운영방식 등과 관련한 내용을 교육받았음을 밝힌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해방8년’ 기간에도 이어져 이범석의 정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이처럼 1930년대 민족주의와 파시즘의 결합이 ‘해방8년’ 시기 파시즘 노선의 등장과 직결되어 있음을 논증한 저자의 분석은 역사학계가 ‘한국적 파시즘’ 이해를 심화하는 데 커다란 학문적 기여를 할 것이라 본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의 운영과 훈련 내용, 반공 군대의 건설 방식, 원외자유당 조직 방식, 이승만과의 정치적 관계, 그리고 민주주의의 군중주의적 인식 등, 이범석의 거의 모든 정치적 행위가 장제스와 중국국민당을 모델로 삼은 결과였다. 하지만 평자가 볼 때 저자의 의도는 이범석이 장제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부각시키는데 있지 않다. 이범석은 장제스를 통해 ‘파시즘 노선’과 결합한 저항민족주의의 통치방식을 나름 체계적으로 흡수하고 이를 일관되게 실천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이 책은 이범석의 파시즘적 사상과 실천이 분명한 한계가 있으나, 그렇다고 그를 ‘정치 9단’ 이승만에 의해 토사구팽당한 인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족청이 해체된 이후에도 파시즘 노선을 추구했던 인물들이 족청계라는 정치세력으로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념’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념은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이며 ‘반공주의’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반공주의’는 ‘해방8년’ 동안 족청계를 묶어주고 이승만과 결합하게 만든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저자는 족청계의 ‘반공주의’가 공산주의자를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데 주안점이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향을 통한 포섭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범석은 민족청년단 시기부터 “민족의 이름으로 좌익도 포섭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이범석의 롤모델 장제스가 이미 1930년대 말 국민당 재편 때 공산주의자들을 포섭, 활용하는 방침을 취했다.(허은, 399-400쪽)
식민지 말기 조선의 문학가들은 파시즘과 전쟁, 사회주의에 대한 탄압, 서구 근대의 종언 등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현실과 미래를 매개할 역사적 전망과 문학적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당시 임화, 김기림, 김남천, 최재서 등 몇몇 문학가에 의해 주체재건론, 휴머니즘론, 지성론, 모랄론, 교양론, 고발문학론, 풍자문학론, 풍속소설론, 세태소설론, 본격소설론, 생산소설론 등 “문학적 위기”의 타개와 식민지 주체의 재건을 위한 다양한 대안이 모색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논의는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다. 특히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논의의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후 식민지 조선의 문학가들은 다양한 지적 담론의 ‘호명 주체’에서 지배 담론의 ‘호명 대상’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식민지 문학은 국책문학, 시국문학, 국민문학 등의층위에서 가치매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1930년대 후반의 전환기문학이 어떠한 담론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문학적 경향이 친일파시즘과 어떤 방식으로 접합될 수 있었는지를 가늠해보고자 하였다. 특히 전시체제의 강화를 위한 적극적인 시국협력이 요구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념적 통일성’을 잃어버리고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있던 전환기문학이 시국문학, 국책문학, 국민문학으로 나아가기 위한 ‘모색과 인고의 과정’으로 재가치화 될 수 있었음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문학과 정치의 일원화’가 가능해질 수 있었다. 이는 유행에 편승한 정치적 협력이 아니라, 근본적인 전환을 위해“쓴다”라고 하는 문학 본연의 가치가 긍정적으로 수렴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문학과 정치의 결합은 근대의 종언에 대한 새로운 주체의 기획이었던 근대초극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치열한 내적 투쟁을 동반해야만 하는 문학이 “근대의 파국”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초월’적인 양식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학은 근대문명에 의해 ‘은폐된 자기’를 자각하고, 완전히 새로운 주체로 탄생하기 위한 근본적인 전환의 양식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식민지 말기의 전환기문학은 ‘근대의 초극’이라는 시대적 당위가 작용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전유되어갔다고 할 수 있다.(이상옥, 437-438쪽)
일민주의자들은 사회원리로 ‘개인주의’를 대신해 ‘도의와 윤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들은 자유당의 목적이 나라의 도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도의를 앙양하고 국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교사, 국민의 윤리강령 제정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내세우는 ‘도의와 윤리’는 봉건적인 요소가 강해 근대적 규칙이나 제도, 질서와도 거리가 멀었다.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 ‘도의’와 ‘윤리’라는 점, 그것이 곧바로 ‘인격’으로 연결되고 다시 ‘가족’이라는 하나의 유기체적 질서로 간주되었다는 점에 비춰보면, 일민주의의 이러한 성격들은 오히려 식민 파시즘 체제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하나의 유기체적 질서를 만드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봉건적 충효사상에 바탕을 두고 ‘가족’을 상상하는 일이다. 물론 이러한 가족(=가족주의)은 20세기 초 계몽기와 식민지를 거치는 동안 지속되어 온 근대국민 국가의 기획이라는 차원에서 연속성을 지닌다. 마루야마는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면서 일본의 경우, 국가를 가족의 연장으로 봐 천황이나 황실은 ‘가장’ 또는 국민의 ‘총본가(總本家)’로서 떠받들어지고, 대일본 제국의 신민들은 ‘아이들’로 표상 된다고 하였다. 이 가족국가론은 일본을 ‘유기적으로 불가분의 한 대가족’으로 파악했던 것에 이르기까지 일본 파시즘 전체에 통용되고 있다.(이평전, 211-212쪽)
한국의 현대사는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반목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반공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확대되거나 강조되었다. 주체성의 발로이자 애국주의의 실재적 표현이었던 민족주의는 분단 상황, 산업화 등에 시기적절하게 적용되면서 지배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해온 것이다. 즉, ‘민족주의=반공주의’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독특한 양상으로 발전해오면서 반공주의의 내면화를 이끌어 왔다.
이러한 정치적, 역사적 환경 속에서 국가권력은 무엇보다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한 통제를 정책적으로 실현해왔고, 그 과정 속에서 배태된 것이 바로 금서(禁書)이다. 금서는 지배 권력의 사상과 정치적 성향을 함의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회문화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통제’라는 말 자체가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정치적 의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기제에 의한 통제는 지배 권력의 입장에서는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대안일 수도 있다.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시차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으로 이데올로기적 통제는 법률 등 다른 수단보다 더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의식적 차원에 머물고, 기본적으로 의식의 지향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즉, 이데올로기적 통제는 의식의 통제이며, 사상통제는 의식과 사상을 통제하고 탄압하는 비가시적인 형태의 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 시대에 금서를 분석하고 이데올로기를 논하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사회 발전과 변동에 어떤 의미를 제공할까. 이는 본 논문이 설정한 연구문제와 경험적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살펴볼 수 있었다.
첫째, 금서는 시대와 정권에 따라 어떻게 양산되어 왔고, 얼마나 효과적인 사상 통제 수단으로 작동했는지의 문제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통시적’ 구분에 따라 분석하였다. 정권 안정과 지배체제의 공고화를 위해 지배이데올로기의 기제로 작동해 온 금서는 강력한 사상통제의 축 위에서 양산되었고, 국가권력의 상징적인 힘으로 기능해왔다. 금서정책은 표면적으로는 사상 통제에 기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금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고취시켰고, 나아가 금서정책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 지식인들의 대항이데올로기 형성과 의식의 내면화를 초래했다. 금서정책의 또 다른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 ‘지식의 계층화’는 유기적 지식인의 불완전성과 지식인의 실존적인 모순과 경계적인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386세대의 금서경험을 분석한 경험적 연구는 이를 구체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둘째, 제도의 경로의존성을 갖고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는 금서의 법적,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요인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의 변천사와 금서정책의 경로의존성, 반공이데올로기 형성 등의 전반적인 차원에서 논의하였다. 사상통제의 메커니즘은 ‘분단’과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특수적 상황들이 반영된 결과이며, 이것들은 ‘안보’와 ‘국가수호’라는 표면적인 형식과 ‘통제’라는 내연적인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제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위시해 민주주의의 기본원칙들을 굴절시키고 있는 사실이다. 국가보안법이 무방비로 남용된 제5공화국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국가보안법이 기본권에 우선하면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 속에서 반복된 국가보안법 피해사례는 결국 ‘인권’의 차원으로 수렴되고, 지배이데올로기 지형의 견고함을 반증한다. 따라서 오늘날 국가보안법의 문제는 확대된 공론장에서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방법론적인 기제가 필요하지만 어떻게 해결책을 도출할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사회가 이미 많은 답을 가지고 있고, 점진적인 실천의 단계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김선영, 117-118쪽)
⑵ 공산 좌파의 정적 낙인
● 좌파의 보수 문화 낙인
지금까지 친일파시즘문학의 특성을 숭고 미학적 관점에서 규명하였다. 파시즘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파시즘적 황홀이다. 이것은 파시즘이 기획한 ‘파시즘적 구경거리’에서 비판적 능력을 상실한 대중이 순간적으로 몰입하게 되는, 초월적 존재나 세계와 합일하는 듯한 느낌에서 오는 정서적 충격을 말한다. 이는 동시에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압도적인 풍경을 마주한 상상력이 스스로의 한계를 통감하면서 그 한계를 이성의 무한한 능력의 표상으로 전환하면서 얻게 되는 쾌감을 말하는 것이다. 파시즘문학은 파시즘적 황홀의 생산을 주요 목적으로 삼는 문학이다. 파시즘문학의 성패는 바로 이 황홀의 발생 여부에 달려있다. 그래서 파시즘문학은 황홀 경험의 고백이나 전체주의 속에서 느끼는 개인의 희열 묘사에 집중한다. 친일파시즘문학은 이런 파시즘문학의 특수한 형태로 일제의 파시즘 정책에 동조하여 파시즘적 황홀을 생산하는 문학이다. 여기에서 전체주의의 모형은 대부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념이다. 파시즘적 황홀은 칸트가 설정한 주관성에 갇힐 때 평가할 수 있는 척도를 잃어버린다. 이것이 숭고 판정의 딜레마다. 해결책은 숭고의 폐쇄적인 구조를 깨는 데 있다. 주관성의 성채 안에 숭고가 놓일 경우 상대주의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박현수, 227-228쪽) |
김두용은 국제작가회의의 결과를 정인섭(鄭寅燮), 최재서(崔載瑞) 등이 파시즘의 비합리주의와 반지성주의에 대항하는 좌우 문학진영의 협력을 통한 신자유주의 문학운동으로 해석한 것을 <문학의 조직상 문제>( 조선중앙일보 , 1935. 11. 26~12. 5)를 통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것은 반파시즘의 전선 통일을 위한 실천적 조직과 힘의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는 사상성을 방기한 예술성의 옹호가 아니라 고상한 차원에서의 사상성과 예술성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며, 부르주와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진보적 작가의 단결을 통한 통일전선을 부흥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김두용은 프롤레타리아적 경향과 그와 동반하려는 진보적 작가들에 대해서만 미래의 전도가 있다고 파악하고(<프로문학의 전도>, 《동아일보》 , 1935. 1. 7), 궁극적으로 프로작가들과 진보적 작가들의 협력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작가의 단결을 위한 통일전선의 대상이 왜 ‘구인회’ 였는가? 여기에 ‘구인회’의 작가들 중 특히 유치진에 대한 김두용의 개인적 이해와 평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김두용은 구인회작가들 중 유치진에 대해서만은 “<철저한 현실의 파악>을 창작의 기본적 방법”으로 삼고 있는 작가라 하고, ‘가장 진보적 작가’라는 수사도 붙이고 있다. 비록 유치진의 과거 작품들인 <토막>이나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은 니힐리즘적 경향을 보여주었지만, 일본동경에 있으면서 “현실의 파악으로부터 <대중성의 개척>을 목표로 재출발”했으며, 이에 따른 첫 작품이 <소>라는 것이다(<구인회>에 대한 비판(1)>, 《동아일보》 , 1935. 7. 28). 유치진의 희곡 <소>에 대한 김두용의 긍정적인 평가는 후일 그가 직접 이 작품을 연출하여 조선예술좌의 공연에 올리기도 한 이유가 되며, 다음과 같이 구인회와의 협력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박경수, 380-381쪽)
그러나 30년대 후반 이듬의 리얼리즘론이 체계화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 그것은 크게 두 측면을 중심으로 하여 나타난다. 하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안함광은 프로문학 대 비프로문학이라는 구도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독자적인 미적 특질을 탐구했다. ‘의식의 능동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인식론적 특질임을 밝힌 점은 그러한 노력이 낳은 중요한 성과이다. 그러나 그는 리얼리즘미학의 알반원리를 경시하고 비프로문학과의 차별성에 집착한 나머지 혁명적 낭만주의론으로 기울게 된다. 이에 비해 임화는 민족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리얼리즘 일반론적 측면이 강화된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으로 나아간다. 그의 리얼리즘론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독자성이 약화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며, 그 결과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차별성이 희석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반파시즘 민주변혁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비판적 리얼리즘은 민중연대성을 공통분모로 한 전략적 연대의 관계에 있으며, 이는 미학적으로 양자가 리얼리즘일반론을 중심으로 서로 접근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화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의 산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30년대 후반 임화의 리얼리즘은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이념에 가장 접근한 이론이라할 수 있다. 본격소설론을 비롯하여 민족문학의 미학적 지도이론을 정립하려 한 그의 여러 작업들 역시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30년대 후반 임화와 안함광의 리얼리즘론은 파시즘기라는 새로운 현실에 대응한 가장 진지하고도 치열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이론적 성과이다. 이 시기 이들의 리얼리즘론이 아직 체계화되지 못했고 민족문학적 전망 속에서의 총체적인 이해도 부족하지만, 해방 이후 남북한 민족문학론의 정립에 이들의 이론이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임화와 안함광의 리얼리즘론이 갖는 문학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들의 문제의식이 현재에까지도 여전히 유효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들의 문학론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한층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하정일, 347쪽)
경성콤그룹은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서 채택된 인민전선전술을 적극 승인하였다. 그들은 인민전선전술의 요체가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만이 아니라 비공산주의 그룹과 위로부터 통일전선을 허용한 점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경성콤그룹은 인민전선전술을 두 방향으로 구사하고자 하였다. 첫째 민족주의그룹 특히 자기 대중을 가진 종교계의 반제 반전그룹과 공동투쟁강령에 따라 위로부터 공동전선을 펴는 방식, 둘째 도시 소부르주아․지식인을 중심으로 소부르주아적 대중조직(반제동맹)을 만들고 노농 대중조직들과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방식을 고려했던 것이다. 전자의 경우 공산주의 정당과 비공산주의 정당의 정치협정에 의한 인민전선(프랑스․스페인의 인민전선)혹은 공동행동협정(중일전쟁 직후 중공당과 국민당의 항일합작 협정)방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 노동조합 농민조합 공산청년회 반제동맹의 통일전선체인 대중적 인민전선 조직을 상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파시즘 인민전선론을 정립한 경성콤그룹은 해방 후의 정권형태로서 인민정부를 고려하였다. 경성콤그룹은 당면한 혁명단계가 토지혁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 아래 농민, 소시민과 동맹하고 모든 반제국주의적 요소를 인입’하여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지주를 대상으로 투쟁하는 혁명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투쟁과정에서 구성되는 인민정부는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인민전선정부이며, 노농민주독재로 나아가는 과도정부로 판단된다.
경성콤그룹은 조직 규모, 활동성, 영향력 측면에서 국내의 대표적인 콤그룹이었다. 그들의 국내외 정세 분석과 인민전선론은 중일전쟁기 국내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정세 인식과 정치노선을 대표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경성콤그룹의 인민정부론은 해방 직후 박헌영이 작성한 <8월테제>와 그가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과정에 반영됨으로써 해방후 신국가 건설운동으로 계승되었다.(이애숙, 234-235쪽)
⑶ 적색공포와 인종주의가 파시즘?
구조적 파시즘의 자원이나 요소로서의 한국의 반공, 반북주의, 국가주의 특징,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 의해 그것이 다시 동원되고 현재화될 수 있도록 만든 한국 우익의 사회심리적 조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시즘은 인종주의와 반공주의, 적색공포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점에서 히틀러의 인종주의․민족주의가 일종의 집단 정신병이듯이, 한국의 반공주의도 일종의 트라우마이며 ‘집단 정신병’이다(강준만, 1997). 그것은 자신의 반대자나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 대한 과도한 의심, 공포, 공격성,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색깔론에 집약되어 있다. 미국의 매카시즘은 일시적 히스테리로 마무리되었지만, 한국에서는 1950년 6․25 당시의 공포감에 사고가 고착되어 있는 만성적 색깔론과 간헐적 히스테리가 교차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간헐적 히스테리는 민주화 이후 보수 세력이 정치적 위기에 처할 때 주로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 반대파를 공격할 명분을 자신의 정책이나 철학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6․25를 어떻게 보는지” 물어보거나 국기경례, 애국가 제창 등의 행위를 문제 삼아 상대방의 국가에 대한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형태로 역공을 펴는 것이다. 이들은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과거 기억에의 고착’, ‘이중의식’, 혹은 정신분열 상태와 유사한 증후군을 갖고 있다(허먼, 2007). 이들은 공적인 토론이나 정책논의에서 밀리면 반대파에게 색깔 시비를 걸고 좌익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공격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치권 정부 주요 인사들이 수도 없이 ‘종북’ 공세를 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와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들은 자신의 의존의 대상, 신앙의 대상인 외부 기제에 자아를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김헌식, 2003: 163~164). 북한과 미국은 각각 악과 선을 표상한다. 따라서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태도와 미국에 대한 일반화된 태도를 자원으로 삼아 정적 혹은 비판자들을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미국의 모든 것에 대에 절대 의존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일본과 미국의 정치 사회체제를 진정으로 좋아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자신들의 취약한 입지를 그것을 통해 채우고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러한 외부의 상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북한, 일본, 미국은 오직 정권 이익을 위한 외부소재일 따름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내면의 사상이나 정책적 입장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통해 역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이들은 세상의 모든 집단을 적과 우군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들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주체로서의 정신적 중심이 없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를 옹호하는 입장에 선 이들은 통상 다른 나라의 우익들처럼 ‘국가’에 더욱 집착하며, ‘애국’의 담론은 그들의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상징 내지 기호이다.
한국 극우 반공주의의 사회적 기반의 하나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인데, 이들은 자유주의자를 좌익이라 부르고, 반대파를 악마화하는 점에서도 대단히 유사하다. 한국에서 색깔 공격, 빨갱이 담론은 좌익 ‘절멸’을 꾀하고, 그런 맥락에서 학살과 고문까지 용인하고 있으므로 ‘유사 인종주의’의 성격을 갖고 있다(김동춘, 2000). 극우반공주의 하에서 모든 정치적 반대세력은 좌익으로 분류된다. 과거 ‘빨갱이’ 담론이 그랬듯이 오늘의 ‘종북’ 담론은 그 대상을 무한히 확대한다.(김동춘, 44-45쪽)
파시즘의 등장과 성립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정치적 패배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여기서 정치적 패배의식이란 다름아닌 대중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정치적 패배의식이란 대중이 자신이 갖고 있는 엄청난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과 힘을 보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대중이 자신의 힘을 느끼거나 확인할 수 없을 때, 대중은 자신의 의지를 누군가를 통해 표출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바로 그 누군가가 대중의 의지를 가로챈 뒤이며 대중의 의식은 뒤틀린 상태이다. 그런데 이것은 대중의 의식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의식은 대중이 차지하고 있는 권력의 정도에 의해 규정되는 의식이다. 대중의 의식이란 결국 대중이 갖는 권력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의회주의를 문제 삼는 것은 의회에의 개입이나 참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리주의를 낳거나 지속시키는 방식으로 흐르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의회주의를 통해 대중의 권력은 형성될 수 없다. 사회운동은 가장 기본에서 대중의 자기권력화를 끊임없이 형성, 진전시키기 위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정당) 운동이든, 부문운동이든 상관없다. 국가와 자본이 행하는 권력에 맞선 저항과 투쟁의 성과를 끊임없이 대중의 힘으로 축적하는 과정과 결합시켜야 한다. 대체권력을 형성하는 것만이 파시즘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다. 파시즘의 출현은 그 이전에 이미 그럴 수 있는 과정의 축적이 전제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른바 ‘파쇼적’이라고 할 때, 그것을 단순한 억압이나 탄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본의 문제를 끊임없이 다른 무엇으로 전가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자본 외부에 가상의 적을 만듦으로써 노동자 민중의 저항과 투쟁을 그곳으로 향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가상의 적은 각국의 역사적 조건과 정세에 따라 끊임없이 그리고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생성, 재생성되고 있다. 역사적 파시즘에서 나타난 인종 문제가 그러하며, 부시 정권이 설정한 ‘악의 축’이 그러하다. 한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는 ‘반공/반북’이 오랫동안 그 역할을 해왔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공격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이명박 정권과 보수 세력의 노동자 민중운동에 대한 공격도 한편으로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 외부에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한 일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꼭 이른바 거대 담론 속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 속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그 속에서의 축적이 병행될 때만이 거대 담론에서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운동은 지금보다 훨씬 더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파쇼적’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대처해야 한다. 거리에서의 투쟁이나 공장에서의 파업만으로 파시즘을 제어하기는 쉽지 않다. 역으로 거리에서의 투쟁이나 공장에서의 파업을 힘있게 건설하기 위해서도 그와 같은 실천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들을 결국 정치의 장으로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와 분리되거나 무관한 일상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결국 계급 문제와 연결된다. 다만 계급문제만이 유일한 것이라는 것과 계급 문제와의 연결을 밝히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대체권력 형성과 ‘파쇼적’인 것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국가와 자본주의 시장으로부터의 이탈 또는 탈주 역시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전통적인 운동방식은 주로 대중동원에 기초한 전선형성에 주력해왔다. 이것은 여전히 중요하며 그 필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대적전선을 형성하지 않고는 당장의 억압이나 탄압에 대처하기도 어렵거니와 더구나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만들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만을 유일한 투쟁 방식으로 삼는 것은 한계가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모순을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며 광범위하게 유포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전선 형성의 문제로 환원하거나 단순화시켜서는 현실을 따라잡을 수 없다. 비록 아직 어떤 정형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국가와 시장에 대한 일탈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상을 고착된 이데아로 설정해놓고 그곳으로 대중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회상을 지금의 현실로, 현재의 장소로 불러들여야 한다. 이데아 대 이데아의 투쟁만으로는 국가와 자본의 전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일탈이 꼭 그것 밖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제도 밖에서 제도를 공격하고 포위하는 것과 함께 제도 안에서 제도의 모순을 드러내고 내파를 일으키는 것을 병행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의 삶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을 방치해두고 파시즘의 등장을 우려하는 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고인택, 205-207쪽)
파시즘(fascism)의 어원은 고대 로마의 최고 정무관인 집정관(콘술consul)의 권위(아욱토리타스auctoritas)를 상징하는 ‘파스케스(fasces)’로부터 유래한다. 파스케스는 징벌권을 상징하는 도끼를 나뭇가지들로 동여맨 형태였는데, 이로 인해 파스케스는 그 자체로 ‘묶음’이나 ‘다발’을 뜻한다. 파스케스를 소지할 권한을 갖는 집정관은 원래 임기 1년에 2명이 임명되어 공동으로 임무를 수행했으며, 국가비상시기(예외상태)에 이르러서는 임기 6개월에 1명으로 임명되는 절대적 권능의 독재관(딕타토르 dictator)으로 대체되었다. 이렇듯 집중된 권력이 부여된 독재관 제도는 119년 동안 7번 밖에 운영되지 않을 정도로 점점 유명무실화 되었고,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 되어 원수적 형태로 운영하다가 결국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공화주의자들에게 암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종적을 감췄던 파스케스는 현대 이탈리아로 돌아와 단수형인 ‘파쇼(fascio)’나 복수형인 ‘파시(fasci)’로 부활했다. 이때로부터 ‘파시즘’이라는 개념의 실체적 기원이 발생하는데, 1919년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주도해 결성한 ‘이탈리아 전투파쇼(fasciitalianidi combattimento)'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집단의 구성이 왕년의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미래주의자, 공화주의자, 페미니스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들이 하나의 공유된 이념을 갖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처럼 파시즘이란 하나의 체계를 갖춘 ‘주의(-ism)’로서 간단하게 규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러한 성격에 대해 장문석은 “파시즘은 기성 이념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면서도 정작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모호성이 증폭된다”라고 주장한바 있고, 로버트.O.팩스턴(Robert.O. Paxton, 1932~)은 “모든 사람을 남김없이 만족시킬 수 있는 파시즘 해석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라고 해설한 바 있다. 그러나 ‘파스케스’라는 ‘파시즘’의 어원과 공유된 이념 없이 무조건적으로 집결된 ‘이탈리아 전투파쇼’라는 실체적 기원으로부터 추론하자면 파시즘이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단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시즘의 개념 규정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일찍이 파시즘에 대해 논의해왔던 맑스주의자들의 정의는 1933년 코민테른 13차 집행위원회를 통해 정의된 것으로 파시즘이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국수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공포정치의 독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결국 파시즘을 ‘자본주의 대리자’로 바라보는 것이며 1924년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대부르조아의 노동계급에 대한 단순한 투쟁도구’로써 바라보는 경향이다. 이처럼 맑스주의자들은 파시즘을 자본주의의 위기와 계급적 기반 속에서 확인하고자 하였는데, 가령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호르크하이머(Horkheimer, Max, 1895~1973)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면, 파시즘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까지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의견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장문석은 맑스주의자였던 탈하이머(Thalheimer, August, 1884~1948)나 바이다의 경우 파시즘에 관한 논의에서 파시즘이 자본주의하의 계급구성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자본과 노동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어느 한 계급이 압도하지 못할 때 제 3의 세력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실례가 파시즘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점을 예로 든다. 지배계급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정치권력을 포기하고 이를 국가에 이양하는 상황”이라는 것인데, 만약 그러한 주장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파시즘이 자본가계급의 사회경제적 권력을 유지시켜 준다는 점에서 맑스주의적 해석이 강조하는 바를 전복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 속에서 우리가 파시즘에 관해 추론할 수 있는 바가 있다면 파시즘이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고민택은 파시즘의 등장에 관한 특징을 정리하면서 파시즘이 ‘세계대공황과 분리해서 설명되지 않는 점’‘자본주의체제 아래에서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을 들어 자본주의위기의 산물로서 파시즘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위에서 확인한 ‘단결’이라는 파시즘의 의미에 더해 파시즘의 출현 배경이 ‘자본주의의 위기’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이 확인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파시즘에 관한 또 다른 논의는 ‘지도자’에 대한 것이었다. 이국영은 독일이 패망한 이후 파시즘에 대한 연구가 지도자에게 집중되어왔다며 지도자가 파시즘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조직하고 수립하였다면 그 외의의 사람들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반문한다. 파시즘이 개인 지도자의 산물이었다면, 1918년 이후 거의 모든 유럽 자본주의 국가에서 파시스트 운동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또는 파시즘이 선동했던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은 어디로부터 연유하는 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다른 한편에서 고민택은 파시즘 등장의 특징 정리에서 “파시즘이 성립된 데에는 가상의 적을 설정할 수 있었던 것과 함께 그에 대한 대척점으로써의 카리스마를 갖는 갖는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한 바 있다. 이러한 고민택의 정리는 이국영이 비판했던 ‘지도자에 집중된 연구의 맹점’과는 인연이 없는데, 왜냐하면 고민택은 파시즘의 전부로써 지도자가 아니라 파시즘 출현의 요소로써 지도자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민택의 주장은 의미 있게 수용되어야 한다. 파시즘이 하나의 사상으로써 정리되어 있지 못하고 각 나라마다 다양한 형태로 발생한다고 했을 때,‘단결’을 도모하는 구심력으로써 상징적인 인물이자 인격체로서의 주권자인 지도자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파시즘에 대한 연구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라는 존재의 등장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수 있겠다.(조용신, 16-19쪽) |
8. 계몽의 변증법
⑴ 도구적 합리성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인간 스스로를 주체로 설정하려는 목적 자체가 계몽을 부정적으로 이끌게 된다. 객체와의 관계에서 주체가 동일성을 확립하는 것이 주체성이라고 할 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한 것처럼 “주관적인 것을 자연에 투사”(DA, 22)하여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us)을 만들어낸 신화 역시 주체를 형상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에 대해 ‘인간’이라는 오이디푸스의 답변은 신화에 내재한 주체성의 투사야말로, 신화 자체가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DA 23참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고대 자연철학의 형상들은 신화 속에서 정신화되어 순수한 형식을 지닌 존재론적 실체로 전환되었고, 올림포스의 가부장적 신들은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철학적 로고스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로고스는 보편을 추구하며 숫자를 가지고 세계를 계산가능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탈신화화라는 계몽의 문턱을 넘어서게 한다.
호머의 서사시 ‘오딧세이Odyssee’를 서구 문명의 기본 텍스트로 간주하는 아도르노는 트로이에서 고향 이타카로 가는 오딧세우스의 여정을 통해 이미 신화적 단계에서 계몽의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이 내재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도르노는 오딧세우스가 바다의 전설적인 요정 사이렌의 매혹적인 노래속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돛대에 묶게 하고 선원들의 귀를 밀납으로 막음으로써 환상적 꿈과 행복을 희생하는 대신에, 인간의 힘으로 신화적 운명을 극복하는 대목에서 계몽적 합리성의 원형을 확인한다. 즉 선원들에게 안전한 항해를 약속하면서 즐거움 없는 소외된 노동을 강요하는 오딧세우스의 명령은 서구문명의 지배와 억압의 메카니즘의 기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맹목적인 운명과 투쟁하여야 하는 오딧세우스는 불가피하게 자기 보존을 위해 마스트에 몸을 묶고 그 유혹에 응하지 못하게 하는 합리성으로, 즉 자신의 전체성과 합일할 수 없는 자기부정의 계기로 넘어가야 한다. 이를 아도르노는 “문명사란 자기희생의 역사, 다른 말로 하면 자기포기의 역사”(DA 71)라고 표현한다. 자연을 대표하는 그리스신화의 신들이 앞으로 펼쳐질 서구 문명사의 지배적 인간집단에 대한 알레고리라면, 속임수와 도구적 성격을 보여주는 주관적 합리성의 맹아로서 오딧세우스는 계몽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전형적인 근대의 ‘경제인’을 상징한다. 신들이 정해 놓은 자연적 운명마저도 떨치고 나올 계산적이고 도구적인 합리성의 능력이 인간 이성에 주어짐으로써 신화는 탈마법화와 탈주술화를 겪으며 새로운 단계의 계몽으로 전개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이상(Ideal)을 모든 것을 도출해낼 수 있는, 통일성을 추구하는 ‘체계’로 보았다. 그들은 서구 문명사에서 진보로 일컬어졌던 계몽의 주체인 이성이 그러한 ‘체계’를 완수하기 위해 질주하는 합리성 즉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여, 세계의 외적 자연지배 뿐 아니라 내적인 자연까지 지배함으로써 이제 인간이 오히려 그러한 지배수단으로 전도되는 원사(Urgeschichte)를 추적한다. 그러한 역사를 몰고 간 것은 헤겔에게서 볼 수 있는 ‘동일성 사유’로서, “주체는 무한정으로 외부 세계를 식민화하여 자신의 내부에 있는 세계와 동일시한다.”(DA 215)《계몽의 변증법》의 여러 단편 중 <반(反)유대주의의 요소들:계몽의 한계>는 말 그대로 그러한 역사의 한계가 어떤 결말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즉 나치즘에 의해 ‘절대적 악’으로 낙인이 찍힌 유대인들에 대한, 즉 주체의 “잘못된 투사(falsche Projektion)”(DA 211)는 신화의 시대에 있었던 미메시스와는 반대로 작용한다.(유현주, 6-8쪽)
그러나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에게 공통점은 자기 보존을 위해서 자기의 본질적인 희생을 스스로가 강제한다는 것이다. 자기 보존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원리-이게 계몽의 신화화 과정인데- 아도르노는 그런 문명의 자기 전개 과정을 체념의 역사, 희생이 내면화된 역사로 기술한다. 이런 체념의 역사는, 그러나 체념하는 자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삶에서 내주어야 하며 자신이 보호해야 할 삶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러한 체념은 이미 고도로 계산된 합리화된 체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종교 제식에서 희생을 사전에 계산함으로써 희생을 받아들이는, 희생된 제물의 신격화를 통해 희생을 합리화하는 기만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자기 보존이라고 생각하는 합리화 속에 비합리성이 자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인 계산의 자기 보존이 희생을 대가로 해서 성립되는 기만과 묶여 있다는 것은 오디세우스의 합리적인 기만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난 자기 행복은 실제로는 강요된 자기 희생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도구적인 합리성은 자기 보존을 위해서 자기 포기를 통해 강제적으로 구속됨을 말한다. 그것은 비약적으로 말해 계몽의 자기 기만이요 책략으로 요약정리 될 수 있다.(김귀석, 12쪽)
아도르노가 계몽의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부르게 되는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도구적 이성이란 설정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이 최선인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이성이며, 그런 점에서 기술합리성을 추구하는 지성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수단-목적의 관점에 붙들려 있으며, 따라서 탐구대상인 자연, 인간, 그리고 사회 등은 객체화(Objektivierung)된다. 계몽기 유럽의 정신사를 이끌어 온 도구적 이성은 대상의 지배를 위한 효율성과 투명성을 강조함으로써 외적 자연, 내적 자연(인간의 본성),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조작하는 기술의 발전, 즉 지배기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도구적, 형식적 이성을 이끌어 가는 “기술적 합리성을 지배의 합리성”과 등치시킨 아도르노의 논리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사실 계몽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베버의 논의에 힘입은 바가 크다. 베버는 근대의 과정을 탈마법화의 과정이자 합리화의 과정이라고 하고, 근대적 합리성을 형식적 합리성이라 함으로써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합리성 개념을 선취하고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에게 진정으로 새로운 점은 그가 계몽비판을 유럽정신사의 시원으로까지 확대한다는 점이다. 즉 그는 신화와 계몽이 깊은 연관이 있으며, 신화는 계몽의 선구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계몽은 일반적으로 신화나 종교적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그런 점에서 신화나 종교로부터 계몽으로의 이행은 역사의 진보의 한 표식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역사의 진보라는 계몽의 가치를 희생하면서까지 신화와 계몽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는데, 이것은 그의 정신 분석학과의 연관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는 우선 신화나 계몽이 동일하게 자연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자연이라는 타자로부터 인간의 자기보존이라는 계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계몽과 신화는 “인간에게서 (자연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제거하고 인간을 주인으로 대체하는 목적”을 추구했다. 신화는 재연, 즉 의례를 통해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고, 계몽은 ‘실재’를 관념의 영역으로, 사유의 범주로 정초함으로써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연의 지배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계몽은 신화적 두려움이 급진화한 것이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연을 지배하는 데로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신화와 계몽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신들에 대한 어떤 비판적 의문도 허락하지 않는다. 비판적 의문은 그 존립 자체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정대성, 199-200쪽)
이러한 문제제기는 인간이 관여하는 모든 영역을 도구적 이성과 이에서 나타나는 ‘지배’ 개념으로 환원함으로써 삶의 영역의 기능적 분화와 그 분화된 영역의 고유 논리를 전혀 포착해 내지 못한다는데 있다. 즉 아도르노의 논의에서는 사회, 자연, 인격성 형성의 영역이 적절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고, 자연 지배의 현상을 은유적으로 다른 영역에 이전할 뿐이다. 자연과의 관계가 어떻게 인간 상호관의 관계와 동일한 논리선상에서 논의될 수 있겠는가? 하버마스가 자연과의 관계를 표시하는 ‘노동’과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표시하는 ‘상호작용’을 구분하여 각자의 고유한 논리를 밝히고자 한 것은 그 작용 논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모델을 삶의 여타 영역으로 확장하는 아도르노의 사유는 『계몽의 변증법』을 비판한 최초의 철학자인 헤겔의 변증법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헤겔은 자연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투쟁이 사회적 관계에서 등장하는 인정투쟁과 다를 뿐 아니라 오히려 인정투쟁을 생존투쟁에 앞세우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관계를 인격성형성과 사회적 관계로 확대한다는 의미에서 벤하비브는 아도르노가 주체성철학의 패러다임에, 즉 근대의 패러다임에 여전히 갇혀 있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계몽의 이성을 총체화 하고 자연과의 동화를 의미하는 미메시스를 삶의 전 영역에 투사하는 아도르노의 사유 패러다임에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정대성, 214쪽)
지배체제에 대한 봉사의 측면을 보면 지배집단은 기술적 합리성을 채용했는데 호르크하이머가 자주 언급한 바와 같이 기술적 합리성은 이성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배신이었다. 이런 논리를 그의 철학적 논리중의 하나와 간접적으로 관련시키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파시스트들은 실용주의로부터 무언가 배웠다. 그들의 주장에는 이미 의미는 없고 오로지 목적만 있을 뿐이다.” (마틴 제이, 244쪽)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헤겔주의자들 즉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등과 마찬가지로 만하임은 권위주의적 통치의 출현을 합리성의 부식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그런 과정의 위험성은 바로 대규모 산업사회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그런 과정의 위험성은 바로 대규모 산업사회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베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런 사회는 최고도로 합리적 계산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그에 상응해서 감정상의 만족에 대한 일련의 억압․단념에 의존하는 행동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 사회는 아주 정밀한 사회메카니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비합리적 혼란도 광범위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H.S. 휴즈, 88-89쪽)
⑵ 계몽은 신화다
사실상 계몽주의 정신의 가장 큰 실수는, 이름과 사물이 합법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사회조건을 창출할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니고, 언어로부터ㅡ이 부정을 체계적으로 배제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개념을 공식으로 대체한 계몽주의가 궁극적으로 그토록 파괴적이었던 까닭이다. 계몽주의 철학은 실재론적이기보다는 억압적으로 유명론적이었다. 벤야민 식으로 말한다면, 계몽주의 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오로지 인간의 언어만을 인정하였다. 인간만이 이름을 부여 받는 유일한 존재였고, 이는 인간의 자연지배에 상응하는 역할이었다. 그리하여 언어는, 마르쿠제의 후기 용어를 사용해 본다면 일차원적으로 되었다. 부정을 표출할 수 없음으로 해서, 언어는 더 이상 억눌린 자의 저항의 목소리를 발할 수 없었다. 언어는 진실된 의미를 발표하는 대신에 사회 지배세력의 한갓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틴 제이, 393-394쪽) |
이처럼 객체의 우위는 동일성 사유에 전제된 주체의 우위를 비판하고, 개념 속에서 정립된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이 가상임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아도르노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헤겔의 긍정변증법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적 방법론인 부정변증법을 제시한다. 헤겔의 긍정변증법이 주체에 우위를 두는 동일성의 변증법이었다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객체에 우위를 두는 비동일성의 변증법이다. 이 때 비동일성의 변증법은 “동일성이라는 개념을 미리 전제하지 않으며, 그 개념 속에 한정되지 않는 철학을 구상하는 것”, “개념과 사태가, 주체와 객체가 서로 어긋나고 불화하는 상황을 명백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관념론적으로 긍정성을 도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헤겔의 긍정변증법과 차이를 갖는다. “불굴의 부정은 존재자의 인준에 관계하지 않은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부정의 부정은 부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부정이 충분히 부정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증명한다. … 부정된 것은 사라질 때까지 부정적이다. 이것이 헤겔과 구분되는 점이다.” 이때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귀결시키지 않는 아도르노의 입장은 사태를 무차별적으로 무책임하게 비판하는 냉소적 태도가 아니라, 비판자의 정신에 내재된 폭력성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사태의 진실에 접근하려고 애쓰는 겸허한 태도를 특징짓는다.(류도향, 52쪽)
자연사 이론에 따르면 자연과 역사는 덧없음(Vergänglichkeit)의 계기에서 수렴된다. 역사의 본질이 흘러가는 시간인 것처럼 자연 또한 매순간 변화하고 흘러가는 시간성을 지닌다. 자연은 인간의 외부에 고정되어있는 배경화면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는 유동적인 것이다. 아도르노는 인간 진보의 측면에서 기술된 기존의 문명사에 반대하고 역사적 시간이라는 범주 안에서 신화와 계몽, 진보와 퇴보의 변증법적 역사를 추적한다.
자연사의 전개과정은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세히 서술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연사의 전개과정은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자연사 과정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지배(Herrschaft)다. 아도르노는 인류와 자연의 역사가 인류에 의한 자연지배의 역사라고 보고, 근대에 이르러 자연지배의 이념이 전면화 된다고 본다.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계몽의 정신은 세계의 탈마법화, 탈신화화, 탈주술화를 목표로 한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계몽의 정신이 계몽시대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관계 맺는 인류에게 근원적인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특히 미메시스의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아도르노의 자연사 전개과정을 ① 태고시대 본능적 미메시스, ② 신화시대 의도된 미메시스, ③ 근대 미메시스의 잘못된 투사로 구성하여 살펴본다.(최송아, 5-6쪽)
이처럼 태고시대 예배물이 추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자율성을 갖게 된 근대의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다. 인간의 자기보존은 본래 미메시스를 통해 가능했지만, 더디고 힘겨운 미메시스적 자연 인식은 근대에 이르면 간편하고 신속한 합리적 사유로 대체된다. 미메시스적 자연 인식이 자연을 닮아가는 방식이었다면 합리적 사유에 의한 자연 인식은 자연과 거리두기를 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계몽주의 시대에 확고해진 합리적 사유는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자연을 물리적 법칙에 의존하는 고착된 실체로 상정한다. 자연을 역사의 주변부에 위치한 환경으로 대상화시킴으로써 기계적 사물로 고정시키는 일은 자연을 과학의 대상으로 보는 입장이다. 계몽의 정신은 자연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고 체계화되고 합리화된 자연과 비체계적이고 비합리적인 자연을 분리하고서 전자를 옳음의 영역으로 후자를 그름의 영역으로 규정한다. 인간의 자기보존 욕구는 단순히 외적자연을 지배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내적 자연(자연적 충동)마저 지배하는 데로 나아간다. 인간은 외적 자연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이 합리적 체계와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상정한 것처럼 인간을 도덕의 대상으로 삼고 인간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도덕을 가지고 있다고 상정한다. 이러한 입장은 동일성, 일반성, 보편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 내부의 자연성을 비도덕의 영역으로 규정하는 데로 나아간다.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자연적 충동을 지배하기 위해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여 나와 다르다고 분리시킨 후, 그것을 자연에 투사시킨다. 이로써 인간의 자연적 충동은 단순한 부도덕을 넘어 그릇된 것, 틀린 것, 거짓된 것, 비합리적인 것으로 된다. 태고시대에 신성하게 여겼던 자연의 힘과 그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은 합리화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의 무력함과 그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으로 변화한다. 태고시대 예배물들은 자연의 두려움을 거부함에 따라 비합리적인 것, 악하고 추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처럼 근대 계몽적 합리성이 발달하면서 미메시스적 예배물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배제되어가는 과정은 미메시스가 금기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최송아, 13-14쪽)
그러나 계몽은 객체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주체의 미메시스적 태도를 자연에 종속된 맹목적 상태, 즉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판한다. 계몽의 시기에 인간은 개념적 사유를 통해 자연을 대상화하고, 자신을 자연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이때 개념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자연의 특수한 질을 추상화하고, 그것을 사유와 동일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자연이 임의적인 견본과 구별되는 일회성을 지닌 존재, 즉 “특유한 대표가능성”(spezifische Vertretbarkeit)을 갖는 존재로 간주되었던 반면, 계몽된 세계에서 자연은 “보편적 대체가능성”(universale Fungibilität)을 갖는 “단순한 견본”으로 취급된다.
인간이 어떤 사물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 사물을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몽이 사물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독재자가 인간들에 대해 취하는 행태와 같다.” 독재자가 인간들을 자기 의지대로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는 객체로서만 대하는 것처럼, 인간은 사물을 주체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사물로서만 관계한다. “인간이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힘이 행사되는 대상으로부터의 소외다” 개념적 사유를 통해 자연의 모든 흔적을 제거한 주체는 초월적이며 논리적인 주체로 승화되면서, 동일적 자기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전체주의적이고, 그 때문에 부분적인 합리성은 자연의 위협적인 것으로부터 역사적으로 받아쓰여진 것이다. 이것이 그 합리성의 한계다. 동일화하는 사유, 즉 동일하지 않은 어떤 것이라도 모두 동일하게 만드는 그것은 불안한 가운데 자연에 얽매인 상태를 영구화한다.” 다시 말해 합리성은 자연의 폭력적 힘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 힘을 고스란히 모방하면서 자연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처럼 주체가 객체에게 행사하는 마법적 힘이 똑같은 방식으로 주체에 대한 마법적 힘으로 행사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객체를 향해 가한 폭력을 자기 자신에게 똑같이 휘두르는 것을 대가로 자신의 고유한 동일적 ‘자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외적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적 자연 또한 억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토대를 둔 계몽은 외적 자연과 내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낳게 된다.(류도향, 48-49쪽)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arung )』의 서문에서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가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라는 물음을 화두처럼 던진다. 그의 문제 의식 속에는 지금까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달려왔던 서구 근대문명이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하는 강한 회의와 의혹이 도사리고 있다.
거칠게 말해 아도르노의 평생의 모든 작업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욕구가 그의 밑에 깔려 있다. 계몽에 의한 신화의 탈신화, 그리고 합리화를 거친 현대 기술 문명이 과연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제공할 수 있는가? 이러한 근대서구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위기와 붕괴 현상, 구체적으로 파시즘의 대두와 세계대전 및 스탈린주의를 경험한 시대 의식 속에서 화두처럼 틀어쥐고 있는 삶의 질문이요, 문제의식이다. 그것은 다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는 가능한가 라는 미학적인 질문과 함께 하나의 짝패를 이루는 질문들이다.
결론부터 앞서 말하자면 왜 새로운 야만의 상태에 빠졌는가 하는 아도르노의 질문은 새로운 야만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당위가,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이후에도 서정시는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는 가능하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아우슈비츠 이후 쓰여진 시는 그 자체가 고통이 되어서, 고통을 증거해야 한다는 답으로 주어져 있다. 거기에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는 마땅히 쓰여져야 한다는 미래적인 소망이 깔려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한 고통의 의식 속에서 아도르노는 서구 문명의 비극을 찾아내기 위해서 서구 지성사와 문명사의 지층까지 들어가는 고고학적 작업을 한다. 근대 문명의 자기 파괴, 아니 계몽의 자기 파괴의 역설, 합리성의 비합리성에 대한 전환을, 그러나 아도르노는 실증적이고 객관화된 작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알레고리의 형식으로 접근한다. 계몽이 어찌하여 신화로 복귀했는가를 보기 위해서 그는 호모의 「오디세이(Odyssee)」를 근본 텍스트로 삼는다. 아도르노에게 자기 부정과 체념 아래서만 자기를 보존할 수 있는 오디세우스는 시민적 개인의 원형이며, 서양문명의 자기 파괴적 경향성을 분명히 해주는 문명의 변증법을 예감한 알레고리로서 유럽 문명의 근본 텍스트로 읽혀진다. 아도르노에게 유럽문명의 근본 텍스트, 혹은 주체성의 원사(原史)로 묘사한다.(김귀석, 8-9쪽)
근대의 패착은 비인격적인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인격체인 개인의 사회적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구도 자체에 있을 것이다.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18세기 계몽주의 문화운동시절부터 이 점을 직감했고, 그래서 주기적으로 비합리주의가 득세하는 문화지형을 만들어내었다. 18세기말 독일에서 일었던 질풍노도의 광풍은 분석적 계몽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결정판이었다. 그 결과 독일은 분석적 계몽과 질풍노도의 변증법을 문화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칸트의 이성비판은 이 문화적 자산을 철학적 프로그램으로 변환시킨 것이었다. 근대성 기획은 체계의 폭력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제출된 것이었고, 따라서 합리화 과정을 어떻게 상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되어 있다. 합리화가 인간사회에 가져다주는 생산력 증대 및 사회조직 결성을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합리화의 독주 및 일방통행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늦추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는 계몽된 문명세상은 과학이외에도 도덕과 예술이 함께 어우러져 구성될 때에만 과학적 합리화의 병폐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있다. 따라서 근대성은 본래 합리가 비합리를 의식하면서 자신을 상대화할 가능성을 스스로 도입한 프로그램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도덕과 예술은 바로 이론이성이 인간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지배할 가능성을 차단할 ‘비합리적’ 계기를 문명사회에 도입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합리와 비합리를 평면적으로 공존시킬 수는 없는 일이므로 철학자들에 의해 추상화 작업이 실행되었고, 근대는 궁극적으로 이성의 복합체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근대의폐해는 명백했다. 하지만 질풍노도와 낭만주의를 통해 비합리의 광풍을 이미 경험한 독일은 이웃한 프랑스처럼 탈근대 담론에 이성 중심주의를 교정하는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의 자기반성에 기대를 걸었다.(이순예, 24쪽)
--참고문헌--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9999_1_0020677
http://archives.kdemo.or.kr/Collection?cls=999&yy=1960&evtNo=10000009
http://archives.kdemo.or.kr/Collection?cls=999&yy=1960&evtNo=10000007
http://archives.kdemo.or.kr/Collection?cls=999&yy=1960&evtNo=10000012
http://archives.kdemo.or.kr/Collection?cls=002&evtNo=10000010
H.S. 휴즈, 김창희 역, 『파시즘과 지식인』, 한울, 1983
강유리, 「'아기장수' 설화연구-이데올로기 수용의 관점에서-」, 『한국고전연구』, 통권2집 (1996. 11)
강유진, 『‘인문평론’의 신체제기 비평 연구』, 중앙대 석사, 2007.
강이레, 『근대 일본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기독교의 갈등 - 한국과 일본에서의 신사참배 문제를 중심으로 -』, 연세대 석사, 2014
강진웅, 「남북한의 국가와 가족:체제 변화와 가족주의의 변형」, 『한국사회학』 제44집 5호(2010년),
게오르그 루카치 1, 변상출 역, 『이성의 파괴 Ⅱ』, 백의, 1996.
게오르그 루카치, 전태국 역, 『이성의 파괴Ⅰ: 혁명들 사이의 비합리주의』, 열음사, 1993.
고인택, 「왜 지금 파시즘을 떠올리는가? ―파시즘에 대한 우려와 사회운동의 나갈 방향」, 『문화과학』 통권 제58호 (2009년 여름)
권경희, 『파시즘의 작동기제와 정치의 미학화 -Thomas Mann의 <마리오와 마술사>(Mariound der Zauberer)를 중심으로-』, 한국교원대 석사, 2010
권도경 1, 「호남지역 ‘아기장수 전설’의 유형적 특징과 지역적 특수성에 관한 연구」, 『코기토』 63 (2008.2)
권도경 2, 「백범 문학콘텐츠의 스토리텔링에 나타난 아기장수 전설의 재맥락화와 그 의미」, 『국제어문』 41집, , 2007.12
권도경, 「아기장수전설의 서사가지(narrative tree)와 역사적 트라우마 극복의 선택지, 그리고 드라마 『각시탈』의 아기장수전설 새로 쓰기」, 『국어국문학』 163, (2013년 4월)
권혁준, 「전후 독일에서의 정치 신화 - 동독의 ‘반파시즘’과 서독의 ‘경제기적’」, 『독일어문학』 제64집, 2014.3
권형진, 「나치의 대중 영웅 만들기 - 호르스트 베셀(Horst Wessel)의 경우를 중심으로 -」, 『역사와 경계』, 56, 2005. 9.
김국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연구 (1924~25년)』, 성균관대 석사, 2013
김귀석, 『아도르노 부정성 미학 연구 -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한 시론 -』, 연세대 석사, 2002.
김금동, 「나치의 영화정책이 식민지 조선영화에 미친 영향 (1)- 나치의 영화정책을 통한 영화자본과 영화인력의 통제방식」, 『독일문학』 133권, 2015
김기련, 「히틀러의 유대인 정책과 고백교회의 투쟁」, 『신학사상』 169집 2015 여름
김난희, 『북한 통치이데올로기의 형성․변화와 사상교육에 대한 연구』, 강원대 박사, 2008.
김누리․오성균, 「파시즘 트라우마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68혁명(2)」, 『독일언어문학』 제54집 2011.12
김동춘,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 정치’:‘구조적 파시즘’하에서의 국가주의의 재등장」, 『경제와 사회』 2014년 봄호(통권 제101호)
김선영, 『금서(禁書)가 지식인의 이데올로기 형성과 변동에 미친 영향』, 이화여대 석사, 2012
김순임, 『일본 야스쿠니신사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메이지 시기와 1990년대 이후 시기의 비교를 중심으로-』, 제주대 박사, 2013
김승우, 『반유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기독교교육 모형』, 연세대 석사, 2011
김영임, 『차별과 배제의 이중주 : 나치 독일의 출산정책』, 숙대 석사, 2006
김요한, 『기독교적 반유대주의 연구와 반성』, 총신대 석사, 2005.
김용우,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 -새로운 합의 의 성과와 한계」, 『서양사론』 제75호, 2002
김웅희, 「일본 기독교의 천황제 국체에 대한 적응과 공존을 위한 선택」, 『일본연구논총』 제31호, (2010년 여름)
김인숙, 『북한의 당․국가 체제 변화에 대한 연구 - 김정일시대 군의 정치적 역할을 중심으로』, 숙명여대 석사, 2003
김일석, 『20세기 초반 파시즘에 저항한 교회-독일고백교회와 한국장로교인들을 중심으로-』, 장신대 석사, 2006
김재웅, 『북한의 인민국가 건설과 계급구조 재편(1945∼1950)』, 고려대 박사, 2014
김종영 1, 「나치언어의 은유적 표현」, 『독어교육』 제19집, 2000
김종영, 「나치언어의 구조」, 『독어학』 제8집, 2003
김종욱, 『북한의 관료체제와 지배구조의 변동에 관한 연구』, 동국대 석사, 2006.
김준연, 『북한의 극장국가체제 형성과 관료의 역할 -중간관료집단의 ‘순응’과 ‘저항’을 중심으로 -』, 동국대 석사, 2006.
김진 1, 「종교의 과거와 상극의 정치신학」,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53 : 2012. 9
김진, 「계몽주의의 신화 해석: 칸트의 신정론과 반유대주의」, 『철학논총』 제57집, 2009. 제3권
김창현, 「아기장수설화에 나타난 한국 민중들의 생명관 」,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 33권 0호. 2003
김희근, 「가해자 시각에서 본 반유대주의 - 요셉 로트의 「거미줄」을 중심으로」, 『독일언어문학』 제62집(2013.12).
나인호, 「정치종교로서의 나치즘 - 그 성과와 한계」, 『역사문화연구』 제20집, 2004. 6.30.
도영록, 『‘아기장수 전설’ 연구』, 계명대 석사, 2012 년 12 월
류도향, 『총체성과 비판 - 아도르노의 심미적 총체성에 관하여 -』, 전남대 박사, 2014
마크 네오클레우스, 정준영 역, 『파시즘』, 이후, 2002.
마틴 제이, 황재우 외 역, 『변증법적 상상력』, 돌베게, 1981
문지영, 「19세기 프랑스 유대인의 집단표상과 좌파 반유대주의」, 『프랑스사 연구』 제28호, 2013.2
박경수, 「1930년대 김두용의 반파시즘 프로문예운동의 세 방향」, 『일본어문학』 제44집 (2009년 2월)
박노자, 「‘박근혜 스타일’- 사회적 파시즘과 정치제도적 자유민주주의」, 『경제와 사회』 2014년 봄호(통권 제101호)
박미연, 『조선로동당의 지식인 정책과 변화 연구 (1945-1961) 』, 동국대 석사, 2005.
박상욱, 「나치 문화정책에서의 프로파간다 -“기쁨을 통한 힘”(KdF)의 속성변화와 문화포스터를 중심으로-」, 『서양사론』 제110호 2011.9.
박영호, 「아기 장수 전설의 현대적 변용 연구」, 『한국언어문화』 (제44집), 2011.4
박진우, 「일본파시즘기의 천황제이데올로기와 국가신도 - 강제와 동의의 관점에서 -」. 『일본학 연구』 제18집, 2006년 4월 15일
박한용, 『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고려대 박사, 2013
박현모, 『남․북한 국가형성기 민족문학 담론 연구』, 전남대 박사, 2006.
박현수, 「친일파시즘문학의 숭고 미학적 연구」, 『어문학』(제104집), 2009.6.
방민호, 「일제말기 문학인들의 대일 협력 유형과 의미」, 『한국현대문학연구』 22, (2007년 8월)
방청야, 『1930년대 독일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건국대 석사, 2002
배주원, 『일제하 황민화 교육정책에 관한 연구 -보통학교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 청주대 석사, 2008
백근현, 『북한 권력구조 변화에 대한 비교체제론적 연구 -북한과 중국의 헌법 및 공산당 비교 -』, 경기대 박사, 2014
백소윤, 『한나 아렌트의 정치개념과 여성주의적 정체성 구성의 가능성 - 라헬 파른하겐 을 중심으로』, 숭실대 석사, 2010.
백승국, 『1930년대 국내 문화운동의 성격 변화에 관한 연구』, 연세대 석사, 2002
손승호, 『일제말 한국장로교회와 해방후 죄책고백에 관한 연구』, 연세대 석사, 2008.
손안나, 『쇼와천황(昭和天皇)의 전후순행과 상징천황제 -언론보도를 중심으로-』, 건국대 석사, 2010.
손정권, 「현대일본의 상징천황제와 기억의 전승」, 『일본근대학연구』제37집, 2012
송길섭, 『북한의 정치지도자 리더십 형성과 유지에 관한 비교 연구-김일성․김정일과 차우세스쿠,카다피 비교를 중심으로』, 대구가톨릭대 박사, 2015
송원근, 『북한의 종교지형 변화 요인에 관한 연구』, 명지대 박사. 2012
송준서, 「스탈린 정부의 반유대주의와 제2차 대전 기억 만들기」, 『국제지역연구』 제17권 제2호, 2013. 7.30.
송충기, 「과학연구와 정치: 나치 시대의 ‘노동생리학’을 중심으로」, 『독일연구』 제23호, 2012
신동훈,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의 정치적 리더십에 관한 연구 : 막스베버의 지배와 지도유형 이론을 중심으로』, 고려대 석사, 2011
신동흔․강진옥, 「아기장수 설화와 진인출현설의 관계, 질의」, 한국고전문학회, 『고전문학연구』 5권 0호. 1990
신동흔, 「구술담화의 서사적 지향과 그 역사적 가치 - 전설에 깃든 역사적 진실과 각성의 힘」,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 57, 2014.3
신종락, 「나치시기 독일 망명문학에 나타난 반유대주의 - 페르디난트 브루크너의 『인종』을 중심으로」, 『독일문학』 55권 1호 제129집 (2014년 3월)
아돌프 히틀러, 황성모 역, 『나의 투쟁』, 동서문화사, 2014
안미란, 「일제말기 ‘少年’ 지 수록 아동소설 연구 - 파시즘체제와 모험서사를 중심으로 -」, 『국어국문학지』 제46집, 2009
양구하, 『近代日本의 이데올로기와 外交政策』, 연세대 석사, 1999
에리히 프롬 1, 김병익 역, 『건전한 사회』, 범우사, 1975
에리히 프롬, 강영계 역, 『자유로부터의 도피』, 박영사, 1985.
연정은, 『북한의 사법․치안체제와 한국전쟁』, 성균관대 박사, 2013
오주록, 『일제강점기식민지 교육에 이용된 신화 고찰 -보통학교 수신서 <국어독본> 을 중심으로-』, 전남대 석사, 2012
원영상, 「근대일본과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 관계에 대한 연구」, 『일본불교문화연구』제11호(2014.12.31)
유사, 『북한과 중국 체제의 비교연구 -정치문화적 접근을 중심으로-』, 전남대 박사, 2014
유현주, 『아도르노 미학에서의 ‘기술(Technik)’』, 홍익대 박사, 2009.
윤덕영 1, 「8․15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적 한계와 좌․우 분립의 배경」, 『사학연구』 제100호, 2011.9.
윤덕영, 「1930년대 동아일보 계열의 정세인식 변화와 배경 - 체제 비판에서 체제 굴종으로 -」, 『사학연구』 제108호(2012. 12)
윤용선, 「나치의 인종주의적 범죄론」, 『역사와 문화』 13, 2007.
윤인노, 『식민지 사회사상과 친일문학텍스트의 내적 연관 연구』, 동아대 석사, 2005
윤철기, 『북한지배체제의 성격과 해석 - 계획과 ‘사회적 종합’을 중심으로(1953~69년) -』, 성균관대 박사, 2009.
이경엽, 『장수전설의 전승양상과 전승의식에 관한 연구』, 전남대 석사, 1991.
이기우, 『북한의 통치기제로서 선전선동과 『로동신문』의 역할 - ‘체제유지’와 ‘권력세습’과정에서의 기관성 분석-』, 경기대 박사, 2014
이병담 1, 『근대일본과 조선총독부 초등학교 수신교과서 비교』, 전남대 박사, 2006.
이병담, 「일본 쇼와기 황국신민 만들기 - 국민학교 제Ⅴ기 수신서를 중심으로 -」, 『일본어문학』 제 31 집, 2005
이상근, 『북한체제의 지속과 변화 - 김정일시대 ‘조정체제’ 형성에 관한 연구 -』, 연세대 박사, 2011
이상옥, 「1930년대 후반의 전환기문학과 친일파시즘」, 『우리말글』 52, 2011
이성림, 「루터와 반유대주의: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 『신학과 세계』 제83호, 2015
이순예, 「근대성, 합리와 비합리성의 변증법」, 『담론 201』 13(1), 2010.
이승목, 『북한 집단주의의 형성 및 변천에 관한 연구』, 동국대 석사, 2005.
이애숙, 「일제 말기 반파시즘 인민전선론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韓國史硏究』 (126), 2004
이영미, 『근대 천황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서술 분석 - 세계사 근대화 단원을 중심으로 -』, 이화여대 석사, 2012
이완범, 「조선공산당의 탁치 노선 변화 과정 (1945~1946)」, 『한국근현대사연구』 2005년 겨울호 제35집
이정선, 『일제의 ‘內鮮結婚’ 정책』, 서울대 박사, 2015
이진일, 「독일에서의 인구-인종주의 전개와 생명정치 ― ‘생존공간’과 제국을 향한 꿈 2」 ―, 『사림』 제50호, (2014년 10월)
이초롱, 『탈 냉전기 체제유지전략으로서 북한의 대남도발에 관한 연구』, 고려대 석사, 2014
이평전, 「‘일민주의’ 파시즘과 정치적 서사성 연구― 1950년대 문학을 중심으로 ―」, 『한국문학 연구』 제28집, 2005년 상반기
이현주 1, 「조선공산당의 권력구상과 ‘조선인민공화국」, 『한국근현대사연구』 2006년 봄호 제36집
이현주, 『북한의 집단주의 특성요인과 심리적 분석에 관한 연구』, 고려대 박사, 2011
이화정, 『구한국 ․ 식민지시대 정치권력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대응양태 (1884년 - 1945년)』, 이화여대 석사, 2009
이화형, 「한국설화 속에 깃든 인본주의 고찰 : 융합을 중심으로」, 우리문학회, 『우리문학연구』 47, 2015.7
장세룡, 「프로이트의 모세와 유대주의의 기원」, 『역사와 경계』 63, (2007년 6월)
장순옥, 『홀로코스트와 현대 이스라엘 선교 방안 연구』, 총신대 석사, 2012
장장식, 「설화에 나타난 민중의 고난과 극복」, 『국제어문』 제12․13 합집. 1991.8.
전동명, 『북한의 체제와 공간의 정치경제 (1954-1970)』 , 동국대 석사, 2004
전수경, 『‘아기장수 설화’의 교육적 가치와 활용방안 연구』, 인천대 석사, 2007.
전은경, 「‘창씨개명’과 ‘총동원’의 모성담론의 전략」, 『한국현대문학연구』 제26집 (2008년 12월)
정규상, 『북한 주체사상의 유교적 성격 규명』, 한국교원대 석사, 2008.
정대성,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에서 ‘미메시스적 화해’와 주체의 자율성 연구」, 『철학논집』 제34집 2013년 8월
정응기, 「북한 사회주의헌법의 기본원리-주체사상」, 『법학연구』 제51권 제4호, 통권 66호, 2010.11
정일영, 『북한의 사회통제체제 형성:1945-1961』, 성균관대 박사, 2014
정철수, 『반유대주의로서의 반미주의--최근 서유럽 반미주의의 일 성격』, 경북대 석사, 2009.
정희강,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나치 선전 포스터 디자인 특성 연구』, 홍익대 석사, 2010
제임스 D 윌킨슨, 이인호․김태승 역, 『지식인과 저항』, 문학과 지성사, 1984.
조승섭, 『대중선전 선동에 관한 연구 -소련공산체제와 나치체제 비교-』, 연세대 석사, 2004.
조용신, 『예외상태와 파시즘의 한국사회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분석을 중심으로 -』, 경희대 석사, 2014
조의환, 「해방정국의 조선공산당 파벌에 관한 고찰」, 『통일논총』 제3집 2004
조철행, 「1920년대 전반기 고려중앙국의 조직과정과 운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0집, 2008.6.
조호정, 『설화 교육 방안 연구 -<아기장수 설화>를 중심으로』, 홍익대 석사, 2006
주정립, 「지구화 시대의 반유대주의: 부활인가 또는 새로운 형태의 ‘발전’인가」, 『사회과학논집』, 제42집 2호, 2011 가을
진용선, 『북한 조선 노동당 대회 및 대표자회 연구- 당 규약, 조직, 인사, 정책 변동을 중심으로』, 고려대 석사, 2013
차성근, 『북한 체제변동 가능성과 북한주민 의식구조 분석』, 경기대 박사, 2014
최경순, 『1920년대 일본 부락해방운동의 재조명 - 수평운동과 융화운동의 관계를 중심으로 -』, 연세대 석사, 2011
최송아, 『자연미와 심미적 미메시스-아도르노 《미학 이론》을 중심으로』, 전남대 석사, 2008
최승태, 『식민 말기 연애서사에 나타난 계급성과 가족-국가의 질서 - 김남천․이태준․이효석을 중심으로 -』, 고려대 석사, 2015
최용찬 1, 「독일 파시즘의 문화적 기원:<하얀 리본>에 나타난 근대 가족 문화의 폭력성」, 『역사와 담론』 제63집, 2012.7
최용찬, 「“위대한 독재자”(1940)에 나타난 유대인의 이미지와 저항의 미학」, 『Homo Migrans』 Vol. 10(Jun. 2014)
최은주, 『명치국가 형성기의 민중운동과 攘夷意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전남대 석사, 2005.
최지헌, 『북한군의 체제유지 역할에 관한 연구』, 동국대 석사, 2008
최창모, 「세계 유대인 네트워크와 반유대주의」, 『디아스포라연구』 창간호(2007)
최형식, 「나치체제에서의 독일유대인의 저항 연구- 도피, 은신 그리고 자살을 중심으로」. 『독일연구』 제29호
탁재형, 『일본천황제와 정치의식 -천황권력의 본질과 정치적 이용을 중심으로』, 부산대 석사, 2005
하정일, 「1930년대 후반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의 발전과 반파시즘 인민전선」, 『창작과 비평』 1991년 봄호(통권 71호), 1991.2,
한건희, 『북한정권 초기(1945~1953):기독교계와 공산주의 세력의 갈등연구』, 고려대 석사, 2014
한승훈, 「미륵의 시대, 진인의 귀환: 조선후기 종교운동에 대한 반란의 현상학」, 『종교연구』 제75집 제2호, 2015
한정훈, 「한국전쟁의 경험과 인물 이야기 - 영광 지역의 한 빨치산 이야기를 대상으로 -」, 『구비문학연구』 제39집 (2014. 12. 31)
함예제, 『총동원체제 일본의 국민체력동원과 메이지신궁대회』, 이화여대 석사, 2010.
허은, 「20세기 '한국적 파시즘'의 역사적 자리매김, -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8년사>」, 『역사비평』 2013년 여름 호(통권 103호), 2013.5,
홍은영, 「인종주의 비판과 백인성(白人性) 연구(whiteness studies) 고찰을 통한 세계화교육의 방향」, 『교육의 이론과 실천』, 2014. Vol. 19, No. 1,
황기우, 「나치의 대일 문화외교를 통해 본 반유대주의의 의미 ― 나치의 추축국정책을 중심으로 ―」, 『사림』 제46호 2013.10.
황승업, 『‘아기장수’ 설화에 나타난 공포와 그 현대적 지속에 대한 연구』, 건국대 석사, 2014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