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6

김재준 범용기 제3권 1974-1983 토론토 편




[범용기 제3권] (72)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태평양에 “다리”를 놓는다) - 상철 캐나다 유학



나는 1958년 캐나다 방문 중에 뱅쿠버의 유니온 신학교 “테일러” 교장에게 한국 학생도 한 사람 받아주기를 제청했다. “인도” 학생은 한 사람씩 장학생으로 받는다고 들었기에 “밑져야 본전”이니 나도 한번 말해 본 것이다.


“한국 학생을 위한 장학기금은 없지만 어디 만들어보지요!”


다음 해에 한국 장학생 한 사람 갈 수 있게 됐다.


나는 이상철을 추천했다.


“그는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카운슬링에 ‘위트’가 있고, 그룹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있다. 학문 성적도 우수하다 등…” 이런 내용의 추천서였다.


그가 내 ‘사위’란 것은 말하지 않았다. 정실관계(Favoratism)를 떠난 추천이었기 때문이다.



[범용기 제3권] (73)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태평양에 “다리”를 놓는다) - “신자”의 혼자 살림




신자는 애기 셋을 데리고 서울에 남았다. 생활대책도 없고 거처할 집도 없었다.




[범용기 제3권] (74)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태평양에 “다리”를 놓는다) - 상철 캐나다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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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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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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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74)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태평양에 “다리”를 놓는다) - 상철 캐나다 유학


구식 서울 기와집 행랑 볕 안드는 한평 반만한 냉동골방에 몸을 가눈다. 그것도 변동이 잦아서 걸핏하면 나가란다. 한달에도 한두번 보따리 몇 꾸러미를 “리어카”에 주워 싣고 비슷한 딴데로 옮긴다.


금호동 자기 언지 집 고깐 옆에 형부인 신영희 의사가 작은 판자집을 붙여 짓고 거기 와 있으라 했다. 그래서 얼마 동안 거기도 있어 봤다. 거기는 “떠불”로 고생스럽다면서 다시 셋방으로 옮겼다.


수유리 집은 도대체 건평이 14평 밖에 안되지만 마당만은 넓었다.


“이 뜨락에 판자집 한칸이라도 있었으면…”하고 신자는 “엄마”에게 혼잣말처럼 뇌였다고 들었다.


상철이 캐나다 간지 2년째였다. 신자는 자궁병으로 고생에 고생이 겹쳤다. 서울대학 외과교수로서 수술의 명수라는 분의 사설 의료실(그의 자택)에 가서 진단했다.


자궁에 혹이 생겼으니 수술해야 하겠단다.


수술했다. 꽤 큰 혹이 유리 알콜통에 담겨 있다


“음성(암)은 아니니까 곧 나을 겁니다”


의사의 말이다. 마룻방 저쪽 모퉁이의 작은 온돌방이 “병실”이었다.


신자는 잘 참는 성질인데도 몹시 신음한다.


나는 미리 의사에게 “자궁을 다 들어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의사는 다시 임신할 수 있을 정도는 남겨 놓았단다.


“아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한, 그러는 것이 의사의 윤리입니다…”


그랬다고 다시 임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들었다.


나는 섭섭했다. 신자의 몸에서 딸은 셋이 났지만, 아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회복은 순조로왔다.


상철이 학업을 마치고 귀국할 때가 가까웠다. 신자의 몸도 정상으로 회복됐다.


이번에는 자기네 힘으로 수유리 우리집 가까이에 작은 독채 집을 전세로 얻었다. 뒤뜰에는 잔디 마당도 있었다.


상철은 크리스천 아카데미 총무직을 맡아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다가 다시 캐나다로 가면서 신자도 같이 갔다. 뱅쿠버 근교 백인교회에서 초청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상철 신자 캐나다로 떠날 때, 여비 한 푼도 도와주지 못했다. 벽걸이 그림 하나도 선사하지 못했다. 주머니가 비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잖느냐 하겠지만, 없다는 것만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정”과 “한”이 맘 속에 서린다. “인생이란 외로울 때 자란다”, “까닭없는 고난에서 알찬다”고 한다. 그러나 꼬마 셋을 빈손으로 떠나보내는 “할아버지”란 보기 드물 것이다.


상철이 위임맡은 교회는 회원의 대다수가 백인이다.


일본인 어부들의 교회와 2차대전 후 합친 교회였다. 지금은 일본인, 백인의 혼성 회중이다. 상철은 예배때, 같은 내용의 설교를 영어와 일본말로 연출해야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새로 이민온 한국인들에게 설교도 했다. 그것이 현재의 뱅쿠버 한인연합교회의 모체가 됐다.


한국에서 캐나다로 옮겨오는 한국인과 그 가족이 많아진다. 그들의 대부분은 덮어놓고 오는 것이어서 이민국 관계, 세관관계, 거처 마련 등등에 철모르는 어린애 같았다. 당장 있을 데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영어는 “깜깜”이니 취직할 수도 없다. 상철은 우선 이민국에 가서 통역한다. 입국 수속을 한다. 거처를 마련한다. 마땅한 거처가 없으면 자기 집에 데리고 온다. 집은 그리 협소하지 않으니까 여기저기 끼어 며칠이고 지낼 수는 있다. 그러나 여관집 같이 부산하다. 그래도 신자는 자기 할 일로 알고 즐겁게 협력했다.


상철은 그들의 취직 알선 때문에 밤낮 뛴다. 집살림만으로도 목사 봉급으로서는 어림도 없다. 신자는 취직했다.




[범용기 제3권] (75)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태평양에 “다리”를 놓는다) - 상철과 캐나다 이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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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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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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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75)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태평양에 “다리”를 놓는다) - 상철과 캐나다 이민사


“상철”은 1961년에 캐나다 뱅쿠버의 유니온 신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주로 목회심리 부문을 전공했다. 그러다가 1962년 9월부터 63년까지 제네바의 “에큐메니칼인스티튜트”에서 학업과 아울러 세계적인 지도자들과의 인간관계를 넓혔다. 1963년 봄에 다시 뱅쿠버에 돌아와 학위 논문 준비에 정진했다. 그 동안에 뱅쿠버 일본교회 “미쯔이” 목사가 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목회까지 겸임할 수 없다해서 상철은 일본교회 임시목사로 시무했다.


그러다가 1964년 5월에 귀국하여 아카데미 원장 강원룡과 함께 그 기관 총무로 일했던 것이다.


1965년 7월에 다시 뱅쿠버에 와서 비행장 부근에 있는 Steveston United Church의 목회자가 됐다. 한국이민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뱅쿠버에 한인연합교회를 창설했다.


1969년 6월말까지 매주일 3개 국어로 설교하는 목회를 하다가 1969년 7월 1일부로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당시의 토론토 한인연합교회는 문자 그대로 “창설기”에서 터 닦고 주춧돌 놓은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정대위 목사가 터를 고르다가 “오타와”의 칼톤대학 교수로 초빙되면서 “상철”을 억지로 토론토에 끌어왔다고 들었다.


내가 무슨 일로던가 캐나다 동부에 돌아 토론토에 들렀을 때, 연합교회는 미조직 교회로서 아직 장로도 없는 교회였다.


여신우회만은 상당히 활발한 것 같았다.


교회란 생명체니만큼 나무 자라듯 자라야 한다. “나두 한번 큰 교회 만든다”고 갑작스레 교인 수를 부풀게 하려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다. 교회는 거목(巨木)의 연륜(年輪)같이 자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읽은 맹자의 말씀이 떠오른다.


“농부 둘이 각기 자기 논을 갖고 농사에 부지런하다. 이웃 논의 벼는 이삭이 피었는데 자기 논의 벼는 겨우 이삭이 치일락 말락이다. 내가 네게 질성 싶으냐? 그래서 자기 벼 모개를 왼종일 억지로 뽑아 길다랗게 목을 늘였다. 그리고서는 신이 나서 자랑했다. 이튿날 해가 뜨니 자기 벼 모개는 허옇게 시들어 말라 버렸다…”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고요히 자라는 것이다. 밖에서 안으로 강제하면 병들든지 죽든지 한다.


통치자가 국민을 다루는 것도 이 “진리”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얘기가 곁길로 나가버린 것 같다.


상철의 얘기를 매듭지어야 하겠다. 한마디로 말해서 “상철”은 한국민족의 캐나다 이주사(移住史)에서 적어도 뱅쿠버와 토론토에 있어서는 “선구자”, “개척자”, “건설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무방할 것이다.


10년 전에 거의 “무”에서 시작한 토론토 한인연합교회는 지금 출석교인이 3백명 선에 이르렀고 수석목사, 부목사, 음악목사, 비서진 등 Paid Staff가 각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건전하게 자라는 교회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른 데는 이런 교회가 없다든지, 없으리라든지 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Fetisism이나 조작에 의한 확장주의를 경계하려는 의미에서 고언(苦言)인 것이다.


그리고 속칭 “부흥집회”에는 성령의 역사가 아주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신학적, 이성적 비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함이다. 마치 수돗물이 저수지에서 두세번 여과 작업을 거쳐서 부엌에까지 배급되는 것과 같다.

[범용기 제3권] (76)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태평양에 “다리”를 놓는다) - 토론토 한인연합교회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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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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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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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76)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태평양에 “다리”를 놓는다) - 토론토 한인연합교회의 성격


교회가 10년을 한 목자 아래서 길러나면 교회도 목자를 닮고 목사도 교회를 닮는다.


토론토 한인연합교회는 내향적인 “교회농성주의”가 아니다. 언제나 외향적이고 선교적이어서 사회참여를 강조한다. 사회에서 단절된 개인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사회에서 절연된 교회 생활도 있을 수 없다. 백인교회와 최대한으로 협력한다. 본국의 “수난성도”들을 위한 기도와 봉사에도 힘쓴다. 캐나다 연합교회 “본부”로서의 보조금은 없다. 완전 자립이다. 다만 얼마라도 본부 예산에 공헌한다.


한인회와도 협력할 뿐 아니라 책임적으로 동참하여 지금은 저절로 순조롭게 교회의 중요 “멤버”들이 한인사회각종단체 간부들로 선임되어 성실하게 봉사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


본국의 “반독재ㆍ민주운동”에도 “Sitting on the fence”의 입장이 아닌, “동참자”가 되었다.


한참은 “비복음적”이니 “빨갱이 교회”니 하는 조작된 유언(流言)도 돌았지만 오래잖아 저절로 사그러졌다.


“비복음적”이란 비난은 “비부흥적”이란 말과 통한다. 속칭 “부흥회”란 집회는 10년 동안 한 번도 한 일이 없었으니만큼 “발산”이 필요한 분들은 그런 기회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독한 환자에게 캠풀주사 놓는 것과 비슷한 것이어서 오래가지 않는다. 차리리 목회심리학적인 정신과학 근거 위에서 “목회상담”을 받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복음”이란 용어는 예수 자신의 첫 설교에 나온다.


“주께서 내게 기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 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심이라”(누가 4:18,19).


이것은 예수의 첫 “선언서”니 만큼 우리가 언제든지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 한귀절만 보더라도 사회관심없이 “복음적”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범용기 제3권] (87) 北美留記 第二年(1975) - 토론토에




3월 10일(월) - Boston 구경하러 나섰으나 오히려 고역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점심 먹고 4:30PM에 출발 8PM쯤에 토론토 공항에 내려 경용 집에 갔다.




[범용기 제3권] (94) 北美留記 第二年(1975) - TORONTO민건 모임

작성자장공작성일2017-10-18 16:46조회193

[범용기 제3권] (94) 北美留記 第二年(1975) - TORONTO민건 모임




6월 20일 – 토론토 민건 위원들이 이목사 집에서 시국에 대한 뉴스 교환과 대책협의를 했다. 모두 열심이어서 저녁 9시에서 새로 3시까지 계속했다.
[범용기 제3권] (120) 北美留記 第三年(1976) - 토론토에서




정치학회 학자들의 Conference가 토론토 Royal York Hotel 회의실에서 열린다.




내일이 개회하는 날이다.




Dallas 대학의 정치학교수 동원모 박사도 왔다.




그는 이 학회에서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학자일뿐 아니라, 한국민주화운동에서 직접 전선에 나선 투사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그와의 인연이 깊게 맺어진 것이었다.

[범용기 제3권] (129) 北美留記 第三年(1976) - TORONTO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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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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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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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129) 北美留記 第三年(1976) - TORONTO에


4월 25일(일) - 오늘 토론토로 떠난다.


차상달 선생 댁에서 차선생 사회로 퀘이커식 묵상과 기도의 모임이 있었다.


조용히 부른 한 장의 찬송, 그리고 나와 함께 한 한주일의 사귐과 사명에 대한 총평과 치사의 말씀이 있었다.


다음으로 약 10분간의 내 인사와 부탁말씀, 노의선 목사의 감화(感話), 김상돈과 김성락의 통곡섞인 기도……


Farewell Party로 차상달이 마련한 Coffee와 도너츠를 나누고 홍윤호 여사 “드라이브”로 공항에 갔다.


노의선, 김상돈, 최옥명 등이 비행장까지 나와 작별했다.


노의선 목사는 범상(凡常)을 탈출한 기인(奇人)이랄까? 그 생각이 비약(飛躍)하며 새롭다.


오전 9시반에 떠나 네 시간 날아 오후 5:38P.M.에 토론토에 내렸다.


상하(常夏)에서 설원(雪原)에로, 그러나 김운하 사장의 캘리포니아 과일상자가 남국의 향기를 품고 따라왔다.

[범용기 제3권] (130) 北美留記 第三年(1976) - TORONTO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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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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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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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130) 北美留記 第三年(1976) - TORONTO에서


4월 25일(일) - Toronto에 돌아왔다.


L.A.는 “홍록쟁연”(紅綠爭姸)인데 토론토는 “설만건곤”(雪滿乾坤)이다.


저기에는 “낭만”이 있고, 여기에는 “의지”가 있다.




[범용기 제3권] (143) 野花園餘祿(其一) - 토론토에서 친교의 4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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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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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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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143) 野花園餘祿(其一) - 토론토에서 친교의 4일간


4월 13일(화) - 나는 7PM에 Thornclife Apt.에 있는 인철ㆍ혜원집에 갔다.


같은 Apt.의 다른 Wing에 있는 이복규 목사가 식후에 찾아와 오래오래 환담했다. 그는 10년내 간염, 간경화로 고생하면서도 언제나 건강자처럼 명랑하고 부지런했다. 숨지는 날까지 주님 백성 돌보는 것이 내 사명이고 소원이라고 다짐한다.


국민학교 교사로 다재(多才)한 부인의 내조가 크다.


수유리 막내 며느리 “정희”에게서 편지가 왔다. 귀여운 손녀 명은과 명혜 사진이 들어 있다.


4월 15일(목) - 이목사와 전택균 장로와 나 셋이 이목사 차로 Dr. Wm Scott옹을 방문한다. Branfford까지 2시간 반의 Drive다. 그는 한국 나이로 90이지만 언어 행동에 늙은이 티가 없다. 그는 아들 다섯이 있지만 모두 흩어져 산다.


부인이 세상 떠난 다음부터는 문자 그대로 “외톨이” 살림이다. 식사, 청소 등은 손녀들이 번갈아 했었는데 그들도 하나 둘 시집가고 지금은 여기 없다.


“무엇이 제일 아쉽습니까?”


“외로움이오!”


그는 방구석에 있는 어항의 금붕어들을 가리키며 저것이 내 앞에 있는 유일한 “생명”이오 한다.


90 노인이 식사도 자기 손으로 만들어 잡수신다. 그릇 치다꺼리, 방 소제 모두 손수 하신다. 사모님이 주무시던 침대가 고스란히 옆방 구석에 놓여 있다.


나는 백합화분 하나를 사들고 사모님 모시니 묘소에 성묘하러 떠난다. 스캇 박사는 단정하게 신사복으로 갈아입고 우리를 안내한다. 묘소는 바로 옆에 있었다. 둘러서서 추모의 기도를 드렸다. 스캇 박사는 친히 예배를 인도한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읽고 손수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축복한다. 사모님 묘소는 미완성이었다. 반쯤 끊어 스캇 박사의 유택(幽宅)이 준비되 있었다. 몇해 후에는 두 분이 나란이 누워 부활의 날을 기다리실 것이다.


우리는 흰 백합화를 묘전에 드리고 헤어졌다. 스캇 박사는 자기가 쓴 “Canadians in Korea”를 우리에게 기증한다.


4월 16일(금) - Boston의 김장호 박사가 며칠 전에 인삼 한 Box를 보내왔었기에 오늘 고맙다는 감사 서한을 보냈다.


N.Y.의 증손녀 명희 부부가 3주간 휴가로 토론토에 방문왔다. 둘 다 의사다. 내가 은용의 집에 있었기에 명희 부부는 그리로 찾아왔다. 맏며느리 “행강”이 환영디너를 차렸다.


4월 17일(토) - David 정 부부를 만났다.


정대위는 Ottawa의 Carlton 대학교에서 인류학의 저변인 원시종교를 강의한다. 이번에 연구비를 얻어, 동경제대에서 중국의 은(殷)나라 시대 제사문화와 한국의 Shamanism을 연구한 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Toronto에 들린 것이다.


이 목사와 나는 새벽같이 집을 나와 공항근처 Hollyday Inn에서 정대위 박사와 조반을 같이 하며 한국 소식을 들었다.


1976년 4월 25일 – 은용이네서 유숙, 처도 거기 와 있다.


4월 26일(월) - 서울서 온 편지에 “명은”이 그린 “꿈에 본 할아버지”란 그림이 들어 있었다. 수유리 집을 본격적으로 수리한다고 했다.


5월 1일(토) - 휴스톤의 이은설ㆍ이종만이 사무실에 와서 오래 오래 얘기했다.


5월 2일(일) - 한인연합교회에서 서희가 유아세례를 받았다. 미국 남부 Houston의 은설ㆍ종만은 같이 예배하고 귀로(歸路)에 올랐다.


5월 9일(일) - “노인잔치”에 참예했다. 교회 젊은이들이 손수 차려 대접하는 “경로의 향연”이다.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인생철학의 일면이기도 하다.


신자가 교회 노인 약 60명을 목사관에 초청하여 Dinner Party를 열었다. 신자의 심정은, 자기는 부모님 슬하에서 그리운 줄 모르고 지내지만, 이목사는 부모님이 모두 이북에 계셔서 안부 여쭐 길도 없으니 얼마나 외로울까 싶어 어머니주일을 기하여 연로하신 분들을 모신다는 것이었다. “사려 깊은 마음가짐”이라 생각되어 나는 속으로 칭찬했다.


5월 24일(월) - 인철ㆍ혜원ㆍ지영ㆍ할머니 모두가 Center Island 아동유원지에 갔다. 아이들 낙원이다. 어른들도 덩달아 좋아했다.


6월 2일(수) - 본국에서 잠시 다니러 온 커렌트 여선교사와 반갑게 대담했다.


“귀국하지 말라”는 것이 내게 전하라는 본국 동지들의 “메시지”라고 했다.



[범용기 제3권] (145) 野花園餘祿(其一) - 토론토에서의 평범한 날들




6월 8일(화) - 오늘은 경용ㆍ효순, 결혼 6주년의 날이다.




나는 은용집에서 시내 사무실에 왔다. 머리가 흐리고 생각이 답답하다.




5PM에 3불 10전짜리 피자를 사 들고 경용집에 갔다. 아이들은 피자면 그만이다.




나는 정처없이 방랑하다가 老子처럼 남 몰래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다.


[범용기 제3권] (159) 北美留記 第四年(1977) - 토론토에서 舊友 한경직을 만나서
작성자장공작성일2017-11-20 13:23조회324
[범용기 제3권] (159) 北美留記 第四年(1977) - 토론토에서 舊友 한경직을 만나서


3월 21일(월) - 그동안 한경직 목사가 토론토 한인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다고 했다.




한목사와 나는 프린스톤에서 같이 2년을 지낸 동창친구다. 그래서 박희민 목사를 통하여 면회를 청했다. 집회 끝나는 대로 만난다고 약속됐다. 집회가 끝났는데도 소식이 없어 다시 물었더니 새벽같이 떠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떠나기 직전 호텔에서 조반을 같이 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합의되었다.




아침 8시에 그의 호텔에 갔다.




그는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옛 모습 그대로다. 나는 “뒤에서는 욕했는데 만나니 반갑구려!” 하며 진짜 반갑게 악수했다. 그도 그러했으리라고 믿는다.




나와 한경직, 이상철 그리고 박희민이 작은 식탁에 앉았다. 나는 다짜고짜로 물었다.




“한목사는 박정희와 단짝이 되어 그의 부탁으로 북미주를 순강한다는데?”




“천만에! 나는 육여사 장례식 때 한번 그를 만난 것 뿐이오. 그것도 처음에는 순 기독교식으로 거행한다기에 허락했었는데, 다음에는 불교, 유교, 기독교 종합예식이라고 해서 두 세 번 거절했었소. 그랬더니 문공부에서 일부러 사람이 와서 ‘아니, 목사님은 살인죄수 장례식도 두말없이 해 주면서 육여사 장례식에는 순서 하나 맡아달라는 것도 거부하십니까? 기독교가 국교로 되있지않는 한, 기독교만의 의식을 주장하기도 어렵지만 육여사가 경건한 불교신자였으니 어쩔 수 없지 않소. 그러나 한목사님에게 불교 프로에 끼어드시라는 건 아니고 기독교로서의 기도를 원하는 것뿐이 아니겠오?’ 그러니 내가 거절하 말이 없잖소! 거기서 잠깐 박대통령을 만난 것뿐이오” 한다.




“조찬기도회에서 한목사는 박정희를 모세 같은 민족지도자라고 극찬했다면서?




“내가 언제 그랬소? 그러나 대통령을 잘하라고 기도하지, 못되라고 기도할 수야 없지 않소!”




“영략교회의 성격은 어떤거요?”




“영락교회는 지금 매 주일날 낮예배에 약 3만명이 출석하는데 네 번에 나눠 집례하고. 거기에는 고위관리, 여러 은행총재들, 국책회사 사장족, 국회의원, 유정회분들…. 그 밖에도 소위 박정권 특권층은 거의가 영락교회 교인이오. 그러니 내가 거기서 어떤 설교를 할 수 있겠오?”




“알겠오! 한목사는 남 듣기 싫은 소리는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지금 예언자적인 젊은 목사들이 바른 소리하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공석에서 그들 이름 하나 ‘멘슌’한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게 목사의 심정이오?”




“하하! 내 이제 나가면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상중이오.”




“한목사 할 일이란 대략 어떤거요?”




“나는 교회제일주의자란 말이오.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라는 거요. 박정권은 이 일을 방해하지 않을뿐 아니라 도리어 지원하는 편이오. 군대 전도에서도 한번에 3천명식 믿게 된단 말이오. 어디서든지 예수 믿으려는 인구는 굉장히 늘었소. 그래서 나는 여생을 전도에 바쳐서 교회인구를 적어도 3천만명 정도로 늘여볼 작정이오. 그리하면 나라도 저절로 달라질거요. 그때에는 김목사(나를 가리키며) 말 들을 사람도 많아야겠지요. 지금 정치적으로 박정희를 건드리면 전도에 장해가 올거니까 삼가야 하겠고, 또 그가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데는 나도 우리 교인들도 모두 찬성이오. 공산주의가 된다면 선교자유가 아주 없잖겠오?”




시간이 없어서 더 오래 얘기할 수가 없었다. 나는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과 “교회주의자”가 된다는 것과는 꼭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 참 크리스찬은 하느님의 의로 교회를 비판한다는 것, 신앙이란 것은 수(數)의 마술에 마취되지 않는 의로운 바탕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 “교회주의”에서 “그리스도주의(?)”에로 방향을 다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미흡한대로 헤어졌다.

[범용기 제3권] (162) 北美留記 第四年(1977) - TORONTO에서


5월 8일(일) - 어버이주일.




뉴욕의 구춘회 여사가 연합교회에 초청되어 설교했다.




5월 11일(수) - 서동준 전도사 Drive로 구춘회, 서 전도사 부인, 나 셋이서 나이아가라에 갔다.




5월 13일(금) - 구춘회 뉴욕에로 떠났다.




[범용기 제3권] (165) 北美留記 第四年(1977) - TORONTO에서 이런 일 저런 일




5월 28일(토) - 토론토에 돌아왔다. 저녁 8시반에 토론토 공항에.







정선과 그 Boy friend “Douglas Scott”군이 공항까지 나와 맞이해 준다. 그의 차로 이목사집에 들러 경용이네까지 갔다.
[범용기 제3권] (171) 北美留記 第四年(1977) - TORONTO에서




1978 7월 1일(금) - Canada의 생일날이다. 각 주에서 축하 Party하는 광경이 T.V.로 방송된다.




모든 국민이 자발적으로 “애국”하도록 된 이 나라의 민주정치가 부러웠다.

[범용기 제3권] (193) 北美留記 第五年(1978) - “제3일” - Second Class Mail로




1978 5월 31일 – 김정근과 박세진 두 젊은 동지가 “제3일” 2종우편 면허를 얻어다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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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범용기 제3권] (204) 野花園餘錄 (其三) - 토론토에서

작성자장공작성일2018-03-06 15:23조회190

[범용기 제3권] (204) 野花園餘錄 (其三) - 토론토에서




3월 26일 – 부활절이다. 토론토연합교회에서 설교했다.







3월 31일 – 오후 6시에 이목사와 Cedergine 수양관에 갔다. 거기서 연합교회제직 수양회가 있어서 내가 Keynote Speech를 했다.







33호실에서 이목사와 함께 유숙했다. 木香 그윽한 杉木 집이다.







4월 2일(일) - 2박 3일의 수양회를 마치고 오후 1시에 떠나 시내 연합교회에 돌아왔다.







오후 2시 예배에서는, 귀국하기로 된 문재린 목사 송별예배로 모였다. Korea House에서 교우들이 문목사 송별 Party를 열었다. 강태룡 장로 차에 같이 타고 경용집에 왔다.







4월 4일 – 공항에 나가 문재린 목사를 전송했다.







4월 6일 – 캐나다 Passport를 받았다.







불교를 일본에 토착화시킨, “니찌렌”(日蓮和尙)의 “생애와 사상” - 保田正文 -을 다 읽었다. 그는 일본의 “기둥”으로 자처한 애국신앙인이었다. “玄正安國”의 底力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4월 8일(토) - 은용ㆍ행강이 Bramptpon에 연립주택을 사고 오늘 이사했다. 경용이 와서 이삿짐 운반을 도왔다. 나는 하륜과 남이를 동무하며 짐을 보살폈다. 밤에는 이목사 집에 와서 유숙했다.







4월 9일(일) - 연합교회에서 예배하고 효순의 동생 “현순” 집에 갔다. 갖난 아들애기 이름을 “유진”(裕眞)이라고 부르게 했다. 먼저 난 첫 애기는 여자인데 그 이름이 “수진”이었다.







“봉자”네 사는 Apt.에 갔다. 봉자도 갖난 애기를 안고 있다. 이름이 “모나”란다. 봉자도 이번 결혼에서 안정된 것 같아 기뻤다.







4월 11일 – 오후 5시에 연합교회에서 최홍희 장군 장남 결혼식에 참석했다. 피로연은 Showboat에서의 大宴이었다. 이목사 차로 12시에 경용집에 왔다.









나는 “장군과 돈”이라는 수필을 쓸까 하고 구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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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206) 野花園餘錄 (其三) - 토론토에서

작성자장공작성일2018-03-07 10:01조회404

[범용기 제3권] (206) 野花園餘錄 (其三) - 토론토에서




4월 29일 – 김지하의 “不歸”를 읽었다.







4월 30일 - 夢見先親







5월 2일 – 김정근, 김영호, 박세진 세 젊은 박사후보생 그룹이 떤다스에 있는 “上海”란 중국반점에서 나를 위로해줬다.







밤 10시까지 얘기하다가 경용집에 갔다.







5월 3일 - “The Hunter”라는 유명한 “러시아” 영화를 구경했다. 촬영과 감독은 일본인의 솜씨라는데, 색채가 분명했다.







시베리아를 무대로, 원주민 달단족 노인과 “고자크” 군인 부대장과의 인간적인 친근감을 Story로 했다.







달단족 노인은 나무나 새나 짐승을 자기 생명과 꼭같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Animism적인 자연인이었다. 그런데 “코자크” 부대는 사냥꾼 기질이다.







요새 몹시 살벌해진 인류가 이 달단 노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원시 미개인이고 Animism(만물정령설)적인 원시종교신봉자고 산업사회와는 온전히 동떨어진 열패자라고 할 것인가?







말하자면 “등외인간”일 것인가? 다 같이 생각할 “숙제”다.







5월 6일 - 夢見伯父







5월 7일(일) - 한인연합교회에서 막내 손자 “하준”이 유아세례를 받았다. 세례 준 목사는 이상철이다.







Brampton에 옮긴 은용집에 경용 식구와 함께 갔다. 사촌 형제인 하령과 하륜이 반가와하며 기뻐 뛰놀며 헤어지기 싫어 울먹이는 모습이 애처롭다.







5월 9일 – 길가 어느집 목련(木蓮)이 탐스럽다.







5월 10일 - “전신불수”로 10년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함석헌 씨 부인이 사흘 전에 세상 떠났다는 소식이 왔다.







함석헌 선생의 외손녀 집에서 Dinner를 준비하고 이목사, 김이선 목사, 그리고 나를 초청했다. 함석헌 따님은 지금 그 집에 와 있다.







그 댁에서 함선생 부인을 추도하는 예배를 드렸다. 내가 기도했다.







마침 그 댁에 애기가 났기에 애기를 위한 축복도 남겼다.







5월 18일 – 와싱톤의 반독재민주운동 “행동파”라는 “고세곤”이 자기 일로 토론토에 왔다. 토론토 민건 사람들이 Korea House에서 월례회 겸 환영 Party를 열었다.







그는 행동파니만큼 시원스러워서 모두들 통쾌하다고 했다.







5월 21일 – 서독의 배동인이, 해밀톤에서 열릴 럿셀협회 모임에 참석하려고 토론토에 들러 내 사무실에 찾아왔었다.







6월 6일 - “Inheritance”란 영화를 봤다. Andrew Queen 주역, “富와 純愛” 사이에 싹트는 불신과 갈등을 소재로 한 좋은 작품이었다.







6월 10일 – 전충림 장로 둘째딸 “인선”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둘 다 Pianist다.







6월 14일 – 5월 20일 “뉴코리아” 사설로 발표한 “5.16은 한국 正史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내 글이 일본의 “祖國統一新報”에 연재되었다. 아무 양해도 없이 그리한 것이다.







6월 15일 – 서울 송파근방에서 교회를 창설하고 10년을 꾸준하게 애써 새 교회당을 짓고, 출석교인 2백명의 자립교회로 육성한 한신졸업생 고해성 목사가 시카고의 Ecumenical Institute에서 지도원 훈련을 받고저 도미 도중에 나를 방문했다. 반가웠다.







6월 17일 – Hartford의 곽노순 박사가 내 사무실에 예방했다. 그는 연세대 이공학부와 한신대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구약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Semitic Language에 능해서 한때 한국에 나와 문익환 목사와 함께 구약 공동번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귀국하여 구약을 가르치고 싶은데 소개해 달라고 한다. 지금 형편으로서는 어느 신학교에도 구약 Post는 만원이라고 일러 보냈다. 여기서 목사 장립도 받았단다.







사고방식이 비범하고 파격적인 성격의 인간인 것 같았다.







6월 22일 – 박재훈 박사가 점심에 초대했다.







양성우 시집 “奴隸手岾”을 읽었다.







6월 24일 – Drew대학에서 대학원 공부중인, 김정준 박사 외아들 “영일”군이 “어머니” 주재숙 여사를 모시고 나 만나러 토론토에 왔다.







6월 25일 – 연합교회 야외예배다. “주재숙”, “영일”도 나왔다. 같이 사진도 찍었다.







내게 대한 부탁은 본국 나오라는 것이었다.







6월 26일 – 수유리 “막내” 관용은 한양대학교 총장실 직속 자재과장으로 일한다고 편지가 왔다.







7월 1일 – 은용ㆍ행강 식구와 함께 가벼운 숲 포반에 소풍갔다.







7월 3일 – 은용 식구 모두와 함께 Soubile Beach라나 하는 호반 백사장에 갔다. 차로 네 시간 달려야 한다. 모래사장이 좋았다.







아이들은 낙원인양 좋아서 물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7월 4일 – 동경 정경모가 쓴 “癒着は椎陸したか?”를 읽었다.







7월 6일 – 토론토 대학 한국학생들이 연출하는 Vincent Milley작 “Endless Naration”을 감상했다.







평가회에 참석했다.







7월 8일(토) - 연합교회에서 12시 “정선”과 Alexander Douglas Scott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주례는 신부의 아버지인 이상철 목사가 했고 나는 신부를 Escort했다.







Inter-racial Marrage인데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객이 약 4백명이었고 교회 여신우회에서 한식피로연을 마련해 주었다.







저녁식사는 교외에 있는 Mae Watt에서 양쪽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이 모인 서구식 연회가 있었다.







용어는 영어다. 한 100명 모인 것 같았다. 사회자가 나에게 식사기도를 하란다.







영어로 기도하고 하긴 했는데 엉망이었다. “너바스”했던 모양이다.







기도문 책에서 골라 써 갖고 갔더면 좋을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7월 13일 – 김병숙 여사가 나와 이남순 여사와 김병욱ㆍ김인숙을 자기 Apt.에 초대했다.







점심인데 냉면, 지지미, 인절미 등 요리 솜씨가 비상했다. 약 3시간 시국담, 통일문제 등을 얘기했다.







저녁은 “신자”집에서 먹고 유숙했다.







7월 21일 – 박재훈 박사가 Korea House에서 Mrs. 전과 미스 “강”과 나를 초대했다.







문익환 목사 시집 “꿈을 비는 마음”이 APO편으로 내게 왔다.







모두 서정시다.







“릴케”의 영향 때문인지 상당히 보드럽다.







경용집에서 유숙했다.







7월 22일 – 경용 집에서 “할머니”가 혼자서 적적할 것 같았다. 갑작스레 그런 “동정”이 생긴다.







4시에 신문사에서 나와 집에 왔다. 집이 비고 문이 잠겼다.







얼마동안 뒷 뜰, 벤취에 비스듬히 누워 문익환 시집을 읽었다. 그래도 소식이 없다.







도루 사무실에 갔다. 오후 10시다. 사무실에서 하룻밤 지낼까 했었는데 경용이 찾아와서 같이 경용집에 갔다.







7월 23일 – 주일이다. 은용 식구가 예배에 왔기에 함께 Brampton에 가서 거기서 유숙했다.







7월 27일 – 하령을 데리고 시내에 갔다. 조손(祖孫) 동락이다.







하령은 드물게 보는 “똘똘이”였다. 오는 길에 “피자”집에서 스파게티를 먹고 여덟조각 피자 하나 사들고 집에 왔다.







Edward Garden은 아름다웠다.







7월 30일 – 은용 식구가 모두 경용 집에 와서 저녁을 같이 했다. 나는 은용 식구들과 은용 집에 갔다.







7월 31일 – 은용 식구가 모두 북쪽 무스께끼 호반 피서지에 간다. 나도 같이 갔다.







인철, 혜원이 먼저 가 있어서 산장 한채를 세냈기에 거기서 유숙했다.







호수 이름과 산장있는 고장은 Muldrew반도라는 데였다.







8월 1일 – 종일 완전 휴식이다.







“Story of Man” 중세기편을 읽었다.







은용 식구는 딴 데로 옮겼다. Perry Sound의 Kill Bear Campin Lot인데 우리나라 동해안 같이 명미(明美)한 곳이란다.







8월 4일 – 휴식, 먹고, 자고, 읽고, 호수를 보고, Story of Man 중세기편을 다 읽었다.







8월 5일 – 경용 집에 돌아왔다.







8월 6일 – 일요일이다. 연합교회에서 예배했다. 점심은 전우림ㆍ장금숙이 Korea House에서 냉면과 갈비구이를 차렸다.







그 분들은 일주일 예정으로 L.A.에 휴가로 떠난다고 했다.







8월 7일 – 하령을 데리고 다운타운데 갔다. 조손(祖孫) 同樂 제2회다.







즐거웠고 하령도 좋아했다.







8월 12일 – 백영렵 목사 맏며느님인 김은숙 여사의 만찬초대를 받았다. 옛 친구 백목사 생각도 새로워진다. 김은숙 집사는 미모의 굳센 생활투사다.







전동림 장로 환갑잔치에도 참석했다. Don Mill의 Holiday Inn에서였다.







8월 13일(일) - 연합교회에서 예배했다. 한국사람과 고락을 같이하는 일본인 목사 “사와 마사히꼬”(澤正彦)가 한국말로 설교했다.







그는 김소운의 사위다. 한국말은 한국인 그대로다. 동경제대 출신이다.







8월 15일- 해방운동은 끝난 과거가 아니라, 행군(行軍) 중이라는 취지의 방송을 녹음했다.







8월 30일 – 하령과 함게 “조손동반” 외출 제3회. 즐거웠다.







영리해서 오히려 자기가 할아버지 안내역을 담당하고 보살핀다.







8월 31일 – 오후 6시에 우리 식구의 Family Doctor의 Issac 박사에게 가서 아내의 건강진단을 청했다. T.B.인데 Active하단다. 담과 피검사에 쓸 용기를 갖고 왔다.







처의 Spitus를 검사실에 보냈다.







Town Center에 나도 X-Ray를 찍었다.







9월 4일 – Vancouver의 장범식 박사가 하기 유가로 가족 동반 토론토에 와서 이목사 집에 유한다. 토론토 민건 사람들이 와서 장박사와의 좌담회를 가졌다.







요령있는 문답이었다. 신자가 냉면 Party로 대접해 줘서 나도 면목이 섰다.







9월 5일 – 하령이 오늘부터 학교에 간다. 삼학년이 된다.







이남순 여사가 일본인 “마쯔모도”(松本清張)가 펴낸 “기다노시진”(北의 詩人) 한권을 갖고 와서 읽기를 권한다.







9월 10일(일) - 연합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동경한민통에서 촬영한 영화를 지하실에서 봤다. 민주운동자들의 수난실태가 소재였다.







9월 6일 – Don Mill Center 고층건물 501호실에 있는, 중국인 안과전문의 Luke씨에게 가서 눈 진단을 받았다.







깨알 같은 글씨도 다 읽는 흠칠데 없는 눈이라고 한다. 안경도 필요없단다.







9월 11일(월) 거처를 이상철ㆍ신자네로 옮겼다.







이 목사가 “할머니”와 나를 태워갔고 Town Center의 Chest Clinic에 가서 X Ray Specialist를 만났다. 처의 X Ray Specialist를 만났다. 처의 X Ray Reading을 들었다.







Active하지만 초기기 때문에 집에서 약 2주일 동안만 약을 먹으면 전염성은 봉쇄된다고 했다. “약” 네가지를 타갖고 이목사집에 이사했다. 지하실인 이목사 서재방에 들었다.







9월 12일 - 山家의 精舍같은 고요함이다.







강원룡 목사가 Finland 가는 길에 N.Y.에서 이목사에게 긴 전화를 했단다. 나의 귀국에 대해서도 의견교환이 있은 것 같다.







9월 13일 – 이 목사 차로 Civic Center 보건소에 같이 가서 나의 T.B.관계를 알아봤다.







“보균”(保菌)이란 것 뿐이고 활동성이 아니니 상관없고 약도 필요없다고 했다.







“그 정도의 보균은 누구에게나 있는거”라고 덧붙인다.







인철ㆍ혜원이 문병와서 놀다 갔다.







청포도 한 광우리 사들고, 처는 여기 와서 기분이 전환된 모양이었다.







9월 17일 – 김익선 목사 생일이라고 교회 여신우회에서 친교실에 잔치를 차렸다.







거기서 점심먹고 인철ㆍ혜원 식구와 함께 그리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식후에 인철ㆍ혜원 차로 이목사네 왔다.







9월 18일 – 이 목사와 Wine 한 잔씩 마신다. 향기가 몸을 돈다.







Jimmy Carter가 중동정상회담 결과를 의회에 보고하는 광경을 T.V.에서 방영하고 있었다.







9월 23일 – 사무실을 이목사집 지하실에서 이목사 서재방에 옮겼다. 그 옆에 침대가 있어서 잘 수도 있다.







정화와 정화 친구 둘이서 내 사무실 책들과 집기와 서류들을 날쌔게 짐짝으로 만들어 놓는다.







9시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이사트럭이 와서 쓰레기도 남기지 않고 Weston 지하실에 옮겨 놓았다. 지하실은 궤짝으로 만원이다. 나는 책꽂이에서 책부터 정리해 세웠다.







9월 25일 – 오후 4시 30분에 정희가 Drive해서 Doctors Hospital의 한국인 여의사로 내과 Specialist인 Dr. R. Kim의 진찰실에 갔다. 거기서 일반적인 건강진단을 마쳤다. Chest의 X-Ray는 괜찮다는 정도가 아니라 Perfect하다고 했다. 다른 의사들도 와 보고서 같은 말을 했다. 그러니까 내 Chest는 “불가침”의 성역인 셈이다.







문제는 간장과 위궤양이란다.







9월 26일 – Doctors Hospital 807호실에 입원했다. 한국인 간호원 Miss Lee가 친절하게 돌봐준다.







키를 잰다 … 5f 6inch다.







혈압은 … 190-130.







체중은 … 116pound.







병실위치는 그만이다. 창가여서 하늘보고 바람쐬고 밤이면 고층건물들의 광탑밀림(光塔密林)을 본다. 침대와 야구(夜具)도 좋다. 네시간 잤다.







9월 28일 – 812호실로 옮겼다. 마찬가지로 좋은 위치다. 자연과의 접촉은 어려웠지만 안온하다. 오늘 일과를 적어본다.







식전에 (1) 피채취, (2) 증기채담, (3) 소변검사, (4) 아침식사 – Toast, One Egg, Juice, Milk, Coffee, (5) 점심식사 – Porkchop, Vegitable Soup, Juice, Milk, Fruit Cocktel, Tea, (6) 목욕탕.







9월 29일 – 어제와 같은 채취작업 반복이다. “채담”은 이것으로 끝난다고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조반 대신에 영양액 한병 먹은 것이겠다.







Dr. Kim이 회진(回診) 때 들렸다. 비뇨과 Specialist를 보내겠다고 했다. 얼마후에 약속된대로 왔다. 남자의사였다.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서 “Perfect”를 연발(連發)한다. Dr. Kim에게 보고한다고 했다.







법왕 John Paul 1세가 어제밤 11시에 심장마비로 급서했다고 한다. 7억 신도의 최고 영도자니만큼 세계가 떠들썩한다.







9월 30일 – 입원 제4일이다. 자리에 누워 있다.







연합교회에서 풍요한 꽃다발을 갖다 놓는다. 상머리가 빛난다. 향기도 그윽하다. 위로가 됐다.







이목사가 들려갔다.







10월 1일(일) - 종일 자리에 누워 있다. 당뇨도 있지만 혈당이 위험선에 까지는 오르지 않았으니 음식만 조절하면 큰 걱정은 없겠다고 한다. 사탕 엄금이다.







“담” 검사는 지금 배균(排菌) 중이니까 화요일(10월 3일)쯤에는 알게 될 거라고 했다.







오후 4시쯤에 경용이 오고 얼마후에 혜원이 왔다. 반가왔다.







이 목사가 지동식 박사의 “신학의 오솔길”과 홍현설 박사의 “오직 이 한길”을 가져왔다. 읽었다.







홍현설 박사는 한경직과 비슷한 타입인 것 같다. Status Quo안에서 자기교회, 자기교파를 지키고 발전시키자는 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오직 이 한길을”은 현 제도 안에서 전도하여 교인을 증가시키는 “전도” 신학이랄까! 다시 말해서 “교회주의자”라 하겠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를 보는 눈도 밝아야 할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우리와 상당히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10월 2일(월) - Jewish Holiday라고 한다. 대부분의 의사는 쉰단다. Dr. Kim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 해야 할 진단은 폐호흡 용량을 재는 일이다. 모두 Computer로 나오니까 기술간호원이 맡아했다.







나는 신약성서를 읽는다.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은 다 읽었기에 오늘부터 누가복음을 시작했다.







저녁 후에 신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어서 “할머니”, 정희, 정선과 Douglas가 전화로 문안한다. 기분이, 즐거워졌다.







목욕하고 같은 층에 입원중인 한국할머니를 찾아 위로했다.







10월 3일 – 이목사와 김익선 목사가 내방했다. 별 고장이 없으면 내일 퇴원할거라 한다.







유동식 저 : “민속종교와 한국문화”를 읽었다.







10월 4일 – 오후에 이목사가 와서 곧 퇴원절차를 밟았다. 병원비용 $25.50은 이목사가 냈다. 당료식사 Menu를 따라 먹으려니 성가시고 먹은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하라는대로 해볼 작정이다.







10월 6일 – 연합교회 김태진 가정에서 터키 한 마리와 포도를 갖고 문병왔다. 순정(純情)으로 주고 순정을 받는 그리스도 사랑의 공동체를 감격하며 감사했다.







효순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밤에 스카보르에 와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이영일 치과에 가자고 한다. 저녁 먹고 7시쯤 떠나 효순네로 갔다. 하령이, 서희 진짜 반가워한다. 매달려 뽀뽀하고 그동안에 된 얘기가 끝이 없다. 밤 11시에 잤다.







10월 7일 – 9시에 하령과 함께 경용이 차로 Danford의 이영일 치과에 갔다. 하령은 앞 아래턱 유치 두 개를 뽑았다. 나는 앞니 안쪽을 보강하고 왼쪽 어금니 금씌운 것은 잇몸이 온전히 썩어서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뿌리는 그대로 둬보자고 했다. 다시 경용집에 들려 이목사 집에 왔다.







나는 원래 이빨이 엉망이다. 아이 때 이빨관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10월 8일(일) - 추수감사절이다. 오후 2시 예배에서 내가 설교했다.







Burbage 선교사가 심장마비로 급서했단다. 향년 81세다.







10월 9일 – 감사절, 정선 부부가 결혼 새살림 첫 초대로 자기들 Apt.에 신부쪽 친척들을 Dinner에 초대했다. 은용이네가 못오고 다른 친척들은 다 왔다. 경용이네, 혜원이네, 신자네 모두가 왔다. 나와 “할머니”도 물론 갔다. Turkey Dinner를 차렸다.







신접살림인데 실내장식이며 가구며 알뜰하고 각기 있을 곳에 배치되 있었다. 감탄했다.







밤 11시에 산회했다. Doug와 정선은 잘 어울린 살림꾼인 것 같다.







10월 10일 – Burbage 목사 유해를 안치한 장의사에 가서 Mrs. Burbage에게 조의를 표하고 영결했다. 많은 한국교인들이 왔었다.







10월 11일 – 밝은 가을날씨다. 10시에 이 목사와 함께 college Street United Church에 가서 Burbage 목사 장례식에 참석했다. 세 목사의 분담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이상철 목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Brandford의 William Scott 박사도, 아드님 부축을 받으면서 식에 참석했다. 아주 노쇄해 보인다. 금년 94세란다. 내 옆에 앉아 계셨다. 우리는 “산소”까지는 가지 못했다.







Burbage 목사는 내가 미국 유학을 바치고 돌아와 회령에 들렸을 때 내게 자택에서 축하디너 차려 주었고 그 해 겨울에는 그가 담당한 구역교회들을 순방할 때 나를 동반하고 두만강 연안 여러 교회를 역방한 분이다. 그리고 그가 Hamillton에서 이민교회를 목회할 때에 나는 유재신과 설상수를 만나려고 그리고 갔던 일이 있다. 그때 Mrs. Burbage가 설상수와 유재신을 얼마나 끔찍하게 돌봐주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주일날 그가 보는 동양이민교회에서 설교했다. 일본인 장로가 사회했었다. 버베지 목사는 한국 선교를 위한 선구자 중의 한 분이다.







10월 15일(일) - 인철ㆍ혜원이 많은 반찬과 쌀 한포대, 고기, 생선등속을 사서 신자네로 보내왔다. 부모공양의 효심에서다.







상철과 신자는 물론이고 경용과 효순도 부모에게 끔찍하게 군다. 은용ㆍ행강은 아직도 살림이 자리잡히지 않아서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늘 죄송스레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캐나다에 옮긴 초기에는 은용집에 오래 있었다. 이 세대에서 그만하면 내 자녀들이 모두 기특하다고만 느껴진다.







10월 16일 – 박재훈 박사가 L.A.에서 부인과 함께 캐나다에 정식으로 이주해 왔다. 토론토 연합교회 Minister of Music 책임자로 부임한 것이다. 이목사 집에서 교회 찬양대와 제직 약 40명이 모여 환영 party를 열었다. 신자가 냉면을 차렸다.







L.A. 얘기와 시국담 등등으로 새로 한시까지 즐거웠다.







10월 17일 - 아침 8시에 이 목사가 “장모”를 Civic Medical Center에 데리고 가서 X-Ray를 찍고 검진하고 오후 1시 반에는 나를 Dr. Kim 진찰실로 데리고 가서 건강진단 결과를 물었다. 나는 백혈구가 정상보다 반이나 부족하단다. 재검사를 요한다고 했다.







기장총회에 Guest professor로 갔던 Dr. Jay사무실에 가서 한국 다녀온 얘기를 들었다. 김정준 박사가 보낸 긴 사연의 편지도 받았다. Visiting professor로 캐나다에 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Dr. Jay의 말에 의하면 당장은 예산이 없어서 어려우나 추진시켜 본다는 것이었다.







10월 19일 – T. B. 예방 순회간호원이 와서 식구 모두가 6개월에 한번씩 X-Ray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의 T. B. 예방 정책은 철저하다. 그래도 거의가 보균자라고 했다.







10월 22일 - 楓林放燃이랄까! 장관이다.







로마 법왕 취임식 광경이 T.V.에서 방영했다. 장엄 그것이었다.







10월 24일 – 유재신 목사가 내 생일선물이라면서 전기담요 한 장을 보내왔다.







10월 27일 – 처는 경용이네가 모셔갔다. “하준”의 첫돌준비를 거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밤에 한국에서 온 목사 셋이 나를 찾아와서 많은 소식을 전해줬다. 신자가 냉면을 대접했다.







10월 27일 – Korea House에서 이번 캐나다교회에 견학하러 온 기장목사 6인을 위하여 연합교회 유지와 한신동창들이 모여 환영 Party를 열었다. 나도 참석했다.







내일이 “하준” 첫돌이라서 선물을 샀다. 선물 고르기란 무척 어려운 노릇이다.







10월 28일(토) - 효순 집에서 내 생일, 하령 생일, 하준 생일을 한데 묶어 큰잔치를 베풀었다. 친척들이 모두 초청됐다. 6시쯤에 인철ㆍ혜원과 그 집 식구가 왔다. 영철 식구, 은용ㆍ행강 식구, 현순 네 식구 모두 모였고 조금 늦게 상철과 신자와 자매들, Douglas와 정선 다 왔다. 이렇게 모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캐나다에서의 가정 생활에서 제일 큰 Family Union이었고 나의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하령과 하륜이 제일 좋아했다. 흩어질 때 하령은 하륜과 떨어지기 싫어 통곡했다.







내게 주는 선물도 푸짐했다. 이 목사 부부는 교회 모임 때문에 일찍 떠나고 우리는 11시쯤에 행강의 차로 이목사 집에 왔다.







10월 30일 – 김병숙 여사가 약밥과 지지미를 손수 만들어 들고 왔다. 정성어린 선물이다.







11월 1일 – 서울서 2백만이 데모했다는 소식이 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얘기다.







일본의 “하용” 조카로부터 편지가 왔다. 11월 10일까지에 岩手縣 水澤市 東中通 二丁目 3-1, 美山病院舍宅으로 옮긴다는 통지였다.







大戊의 妻 英淑이 9월 14일에 첫딸을 얻었는데 이름을 河蓮이라 했다는 것이었다.







11월 5일 – 최동호 장로와 이목사를 따라 Ontario Lake에 연어 낚으러 갔다. 나는 최동호 장로 배를 타고 그가 준비한 근사한 낚시도구를 갖고 해 저물때까지 낚시질에 열중했다. 결과는 강태공식이 됐다. 이 목사는 큰 연어 한 마리를 낚았다.







나는 선창에 쉬면서 “한시” 한 구절 지었다. 달 보며 호반에 돌아와 수첩에 적어뒀다. 無韻이다.







湖上鈞魚日巳暮

歸帆遲遲月色新

雲天篹芒星又稀

心興白鷗飛去來







11월 9일 – 오후 6시에 최홍희 장군 환갑잔치에 초청돼 갔다. “미시사가” 그의 저택에서였다. 태권도 사범들이 가득하에 모여 있었다. 최덕신 중장과 나를 귀빈으로 초청한 것 같았다. 최덕신 중장이 사회자였다. 그는 나에게 축사를 청한다. 나는 대략 이런 말을 했다.







첫째로, “나는 군대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고, 태권도도 모른다. 그러나 ‘도’(道)를 숭상하는 마음은 있다. 나는 최홍희 장군이 태권 ‘道’를 창안했고, 태권 ‘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높이 찬하한다. 최홍희 장군은 ‘道’의 사람이다.”







둘째로, 그는 관북출신으로 나와 동향지인이라는 것 때문에 자연감정으로 쉽게 친할 수 있었다. 개인적 친분이므로 이런 공석에서 말하는 것은 삼가야 할 줄 알지만, 만리이역에서 고향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逢故人’의 기쁨이 있다. 특히 그가 창안한 태권도가 전 세계에 우리민족 정기를 높이 선양한다면 동향인으로서 더 많이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그를 자랑스럽게 존경한다.







셋째로, 그는 이제 세계인이 됐다. 이념이 달라 서로 갈라선 유럽국가 군(群) 어느 진영에서도 태권도는 받아들이고 있다. 그야말로 “국경없는 스포츠”의 실현이라 하겠다. 등등. 그리고 결론적으로 최홍희 장군은 군인이면서도 다방면의 재능을 발위하고 있는 꿈의 사람이다. 그는 서도(書道)에도 일가를 이루고 있다. 주부자(朱夫子, 朱喜)의 “치가격언” 전문이 그의 서재에 열폭 “병풍” 글씨로 쓰여져 있다. 그에게 서도를 가르친 스승의 글씨라 했다.







“나는 지금도 그가 ‘Sports에는 국경이 없다’는 근본정신에서 이북, 이남과 서구, 동구를 태권도의 무대로 삼아 주기를 바라며 그 ‘도’가 어떤 정치게임이나 선전에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도인’(道人)으로서의 주체성(Identity)를 드높여 지켜주기를 희망한다…….” 등.







11월 13일 – 오후 6시에 강원룡 목사가 방문했다. 이 목사가 공항에 나가 같이 들어왔다. 밤 3시까지 한국정세분석을 들었다. 나에게는 귀국을 권한다.







11월 14일 – 강원룡 목사를 공항에서 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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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218) 北美留記 第六年(1979) - 토론토에서




4월 3일(화) - 이질(姨侄) 석영 군이 찾아와 그 옛날 향동학교 시절, 동경 시절, 대구사범 시절 등등 – 그리고 그의 친형이자 내 “이질”이면서 향동학교 시절의 선생이던 “희영”에 대한 추억담 등등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 먹고 헤어졌다.







“굴”을 선물로 갖고 왔다.







1979. 4. 7.(토) - N.Y.의 해외한민보 주필인 서정균 씨와 Toronto의 장정문 신부가 내방했다.







상의할 것이 있어 일부러 왔다는 것이었다.







중국음식점에 가서 간단한 오찬을 나누며 얘기했다.







요지는 (1) 카아터 방한 직전에 전 북미주 민주단체들과 전세계(서독 등) 민주단체 연합으로 와싱톤에서 데모를 강행하자는 것.







(2) 이것을 계기로, 미국, 서독, 일본 등 각 민주단체 대표자 회의를 열고 한국민주 전세계 연맹을 발족시키자는 것이었다.







4월 9일(월) - 최홍희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12시에 Korea House에서 점심을 같이 하자는 것이다.







4월 10일(화) - “코리아 하우스”에서 12시 최홍희 장군을 만났다. 최덕신 장군도 자리를 같이했다. 9월쯤에 해외민주단체 총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4월 11일(수) - 오후 1시에 이남순, 김인숙, 김병숙 세 분이 한국관에 모였다.







내 서독갔던 얘기를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곰탕을 먹으면서 대략 얘기했다.







나는 다만 사실을 얘기한 것 뿐이오. 나 자신으로서의 “콤멘트”나 태도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左右合作의 포석인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민통과(배동호 등) 자매관계를 맺고 행동을 같이 하게 하려는 저의에서인 것 같기도 했다.






[범용기 제3권] (206) 野花園餘錄 (其三) - 토론토에서




4월 29일 – 김지하의 “不歸”를 읽었다.







4월 30일 - 夢見先親







5월 2일 – 김정근, 김영호, 박세진 세 젊은 박사후보생 그룹이 떤다스에 있는 “上海”란 중국반점에서 나를 위로해줬다.







밤 10시까지 얘기하다가 경용집에 갔다.







5월 3일 - “The Hunter”라는 유명한 “러시아” 영화를 구경했다. 촬영과 감독은 일본인의 솜씨라는데, 색채가 분명했다.







시베리아를 무대로, 원주민 달단족 노인과 “고자크” 군인 부대장과의 인간적인 친근감을 Story로 했다.







달단족 노인은 나무나 새나 짐승을 자기 생명과 꼭같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Animism적인 자연인이었다. 그런데 “코자크” 부대는 사냥꾼 기질이다.







요새 몹시 살벌해진 인류가 이 달단 노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원시 미개인이고 Animism(만물정령설)적인 원시종교신봉자고 산업사회와는 온전히 동떨어진 열패자라고 할 것인가?







말하자면 “등외인간”일 것인가? 다 같이 생각할 “숙제”다.







5월 6일 - 夢見伯父







5월 7일(일) - 한인연합교회에서 막내 손자 “하준”이 유아세례를 받았다. 세례 준 목사는 이상철이다.







Brampton에 옮긴 은용집에 경용 식구와 함께 갔다. 사촌 형제인 하령과 하륜이 반가와하며 기뻐 뛰놀며 헤어지기 싫어 울먹이는 모습이 애처롭다.







5월 9일 – 길가 어느집 목련(木蓮)이 탐스럽다.







5월 10일 - “전신불수”로 10년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함석헌 씨 부인이 사흘 전에 세상 떠났다는 소식이 왔다.







함석헌 선생의 외손녀 집에서 Dinner를 준비하고 이목사, 김이선 목사, 그리고 나를 초청했다. 함석헌 따님은 지금 그 집에 와 있다.







그 댁에서 함선생 부인을 추도하는 예배를 드렸다. 내가 기도했다.







마침 그 댁에 애기가 났기에 애기를 위한 축복도 남겼다.







5월 18일 – 와싱톤의 반독재민주운동 “행동파”라는 “고세곤”이 자기 일로 토론토에 왔다. 토론토 민건 사람들이 Korea House에서 월례회 겸 환영 Party를 열었다.







그는 행동파니만큼 시원스러워서 모두들 통쾌하다고 했다.







5월 21일 – 서독의 배동인이, 해밀톤에서 열릴 럿셀협회 모임에 참석하려고 토론토에 들러 내 사무실에 찾아왔었다.







6월 6일 - “Inheritance”란 영화를 봤다. Andrew Queen 주역, “富와 純愛” 사이에 싹트는 불신과 갈등을 소재로 한 좋은 작품이었다.







6월 10일 – 전충림 장로 둘째딸 “인선”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둘 다 Pianist다.







6월 14일 – 5월 20일 “뉴코리아” 사설로 발표한 “5.16은 한국 正史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내 글이 일본의 “祖國統一新報”에 연재되었다. 아무 양해도 없이 그리한 것이다.







6월 15일 – 서울 송파근방에서 교회를 창설하고 10년을 꾸준하게 애써 새 교회당을 짓고, 출석교인 2백명의 자립교회로 육성한 한신졸업생 고해성 목사가 시카고의 Ecumenical Institute에서 지도원 훈련을 받고저 도미 도중에 나를 방문했다. 반가웠다.







6월 17일 – Hartford의 곽노순 박사가 내 사무실에 예방했다. 그는 연세대 이공학부와 한신대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구약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Semitic Language에 능해서 한때 한국에 나와 문익환 목사와 함께 구약 공동번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귀국하여 구약을 가르치고 싶은데 소개해 달라고 한다. 지금 형편으로서는 어느 신학교에도 구약 Post는 만원이라고 일러 보냈다. 여기서 목사 장립도 받았단다.







사고방식이 비범하고 파격적인 성격의 인간인 것 같았다.







6월 22일 – 박재훈 박사가 점심에 초대했다.







양성우 시집 “奴隸手岾”을 읽었다.







6월 24일 – Drew대학에서 대학원 공부중인, 김정준 박사 외아들 “영일”군이 “어머니” 주재숙 여사를 모시고 나 만나러 토론토에 왔다.







6월 25일 – 연합교회 야외예배다. “주재숙”, “영일”도 나왔다. 같이 사진도 찍었다.







내게 대한 부탁은 본국 나오라는 것이었다.







6월 26일 – 수유리 “막내” 관용은 한양대학교 총장실 직속 자재과장으로 일한다고 편지가 왔다.







7월 1일 – 은용ㆍ행강 식구와 함께 가벼운 숲 포반에 소풍갔다.







7월 3일 – 은용 식구 모두와 함께 Soubile Beach라나 하는 호반 백사장에 갔다. 차로 네 시간 달려야 한다. 모래사장이 좋았다.







아이들은 낙원인양 좋아서 물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7월 4일 – 동경 정경모가 쓴 “癒着は椎陸したか?”를 읽었다.







7월 6일 – 토론토 대학 한국학생들이 연출하는 Vincent Milley작 “Endless Naration”을 감상했다.







평가회에 참석했다.







7월 8일(토) - 연합교회에서 12시 “정선”과 Alexander Douglas Scott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주례는 신부의 아버지인 이상철 목사가 했고 나는 신부를 Escort했다.







Inter-racial Marrage인데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객이 약 4백명이었고 교회 여신우회에서 한식피로연을 마련해 주었다.







저녁식사는 교외에 있는 Mae Watt에서 양쪽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이 모인 서구식 연회가 있었다.







용어는 영어다. 한 100명 모인 것 같았다. 사회자가 나에게 식사기도를 하란다.







영어로 기도하고 하긴 했는데 엉망이었다. “너바스”했던 모양이다.







기도문 책에서 골라 써 갖고 갔더면 좋을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7월 13일 – 김병숙 여사가 나와 이남순 여사와 김병욱ㆍ김인숙을 자기 Apt.에 초대했다.







점심인데 냉면, 지지미, 인절미 등 요리 솜씨가 비상했다. 약 3시간 시국담, 통일문제 등을 얘기했다.







저녁은 “신자”집에서 먹고 유숙했다.







7월 21일 – 박재훈 박사가 Korea House에서 Mrs. 전과 미스 “강”과 나를 초대했다.







문익환 목사 시집 “꿈을 비는 마음”이 APO편으로 내게 왔다.







모두 서정시다.







“릴케”의 영향 때문인지 상당히 보드럽다.







경용집에서 유숙했다.







7월 22일 – 경용 집에서 “할머니”가 혼자서 적적할 것 같았다. 갑작스레 그런 “동정”이 생긴다.







4시에 신문사에서 나와 집에 왔다. 집이 비고 문이 잠겼다.







얼마동안 뒷 뜰, 벤취에 비스듬히 누워 문익환 시집을 읽었다. 그래도 소식이 없다.







도루 사무실에 갔다. 오후 10시다. 사무실에서 하룻밤 지낼까 했었는데 경용이 찾아와서 같이 경용집에 갔다.







7월 23일 – 주일이다. 은용 식구가 예배에 왔기에 함께 Brampton에 가서 거기서 유숙했다.







7월 27일 – 하령을 데리고 시내에 갔다. 조손(祖孫) 동락이다.







하령은 드물게 보는 “똘똘이”였다. 오는 길에 “피자”집에서 스파게티를 먹고 여덟조각 피자 하나 사들고 집에 왔다.







Edward Garden은 아름다웠다.







7월 30일 – 은용 식구가 모두 경용 집에 와서 저녁을 같이 했다. 나는 은용 식구들과 은용 집에 갔다.







7월 31일 – 은용 식구가 모두 북쪽 무스께끼 호반 피서지에 간다. 나도 같이 갔다.







인철, 혜원이 먼저 가 있어서 산장 한채를 세냈기에 거기서 유숙했다.







호수 이름과 산장있는 고장은 Muldrew반도라는 데였다.







8월 1일 – 종일 완전 휴식이다.







“Story of Man” 중세기편을 읽었다.







은용 식구는 딴 데로 옮겼다. Perry Sound의 Kill Bear Campin Lot인데 우리나라 동해안 같이 명미(明美)한 곳이란다.







8월 4일 – 휴식, 먹고, 자고, 읽고, 호수를 보고, Story of Man 중세기편을 다 읽었다.







8월 5일 – 경용 집에 돌아왔다.







8월 6일 – 일요일이다. 연합교회에서 예배했다. 점심은 전우림ㆍ장금숙이 Korea House에서 냉면과 갈비구이를 차렸다.







그 분들은 일주일 예정으로 L.A.에 휴가로 떠난다고 했다.







8월 7일 – 하령을 데리고 다운타운데 갔다. 조손(祖孫) 同樂 제2회다.







즐거웠고 하령도 좋아했다.







8월 12일 – 백영렵 목사 맏며느님인 김은숙 여사의 만찬초대를 받았다. 옛 친구 백목사 생각도 새로워진다. 김은숙 집사는 미모의 굳센 생활투사다.







전동림 장로 환갑잔치에도 참석했다. Don Mill의 Holiday Inn에서였다.







8월 13일(일) - 연합교회에서 예배했다. 한국사람과 고락을 같이하는 일본인 목사 “사와 마사히꼬”(澤正彦)가 한국말로 설교했다.







그는 김소운의 사위다. 한국말은 한국인 그대로다. 동경제대 출신이다.







8월 15일- 해방운동은 끝난 과거가 아니라, 행군(行軍) 중이라는 취지의 방송을 녹음했다.







8월 30일 – 하령과 함게 “조손동반” 외출 제3회. 즐거웠다.







영리해서 오히려 자기가 할아버지 안내역을 담당하고 보살핀다.







8월 31일 – 오후 6시에 우리 식구의 Family Doctor의 Issac 박사에게 가서 아내의 건강진단을 청했다. T.B.인데 Active하단다. 담과 피검사에 쓸 용기를 갖고 왔다.







처의 Spitus를 검사실에 보냈다.







Town Center에 나도 X-Ray를 찍었다.







9월 4일 – Vancouver의 장범식 박사가 하기 유가로 가족 동반 토론토에 와서 이목사 집에 유한다. 토론토 민건 사람들이 와서 장박사와의 좌담회를 가졌다.







요령있는 문답이었다. 신자가 냉면 Party로 대접해 줘서 나도 면목이 섰다.







9월 5일 – 하령이 오늘부터 학교에 간다. 삼학년이 된다.







이남순 여사가 일본인 “마쯔모도”(松本清張)가 펴낸 “기다노시진”(北의 詩人) 한권을 갖고 와서 읽기를 권한다.







9월 10일(일) - 연합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동경한민통에서 촬영한 영화를 지하실에서 봤다. 민주운동자들의 수난실태가 소재였다.







9월 6일 – Don Mill Center 고층건물 501호실에 있는, 중국인 안과전문의 Luke씨에게 가서 눈 진단을 받았다.







깨알 같은 글씨도 다 읽는 흠칠데 없는 눈이라고 한다. 안경도 필요없단다.







9월 11일(월) 거처를 이상철ㆍ신자네로 옮겼다.







이 목사가 “할머니”와 나를 태워갔고 Town Center의 Chest Clinic에 가서 X Ray Specialist를 만났다. 처의 X Ray Specialist를 만났다. 처의 X Ray Reading을 들었다.







Active하지만 초기기 때문에 집에서 약 2주일 동안만 약을 먹으면 전염성은 봉쇄된다고 했다. “약” 네가지를 타갖고 이목사집에 이사했다. 지하실인 이목사 서재방에 들었다.







9월 12일 - 山家의 精舍같은 고요함이다.







강원룡 목사가 Finland 가는 길에 N.Y.에서 이목사에게 긴 전화를 했단다. 나의 귀국에 대해서도 의견교환이 있은 것 같다.







9월 13일 – 이 목사 차로 Civic Center 보건소에 같이 가서 나의 T.B.관계를 알아봤다.







“보균”(保菌)이란 것 뿐이고 활동성이 아니니 상관없고 약도 필요없다고 했다.







“그 정도의 보균은 누구에게나 있는거”라고 덧붙인다.







인철ㆍ혜원이 문병와서 놀다 갔다.







청포도 한 광우리 사들고, 처는 여기 와서 기분이 전환된 모양이었다.







9월 17일 – 김익선 목사 생일이라고 교회 여신우회에서 친교실에 잔치를 차렸다.







거기서 점심먹고 인철ㆍ혜원 식구와 함께 그리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식후에 인철ㆍ혜원 차로 이목사네 왔다.







9월 18일 – 이 목사와 Wine 한 잔씩 마신다. 향기가 몸을 돈다.







Jimmy Carter가 중동정상회담 결과를 의회에 보고하는 광경을 T.V.에서 방영하고 있었다.







9월 23일 – 사무실을 이목사집 지하실에서 이목사 서재방에 옮겼다. 그 옆에 침대가 있어서 잘 수도 있다.







정화와 정화 친구 둘이서 내 사무실 책들과 집기와 서류들을 날쌔게 짐짝으로 만들어 놓는다.







9시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이사트럭이 와서 쓰레기도 남기지 않고 Weston 지하실에 옮겨 놓았다. 지하실은 궤짝으로 만원이다. 나는 책꽂이에서 책부터 정리해 세웠다.







9월 25일 – 오후 4시 30분에 정희가 Drive해서 Doctors Hospital의 한국인 여의사로 내과 Specialist인 Dr. R. Kim의 진찰실에 갔다. 거기서 일반적인 건강진단을 마쳤다. Chest의 X-Ray는 괜찮다는 정도가 아니라 Perfect하다고 했다. 다른 의사들도 와 보고서 같은 말을 했다. 그러니까 내 Chest는 “불가침”의 성역인 셈이다.







문제는 간장과 위궤양이란다.







9월 26일 – Doctors Hospital 807호실에 입원했다. 한국인 간호원 Miss Lee가 친절하게 돌봐준다.







키를 잰다 … 5f 6inch다.







혈압은 … 190-130.







체중은 … 116pound.







병실위치는 그만이다. 창가여서 하늘보고 바람쐬고 밤이면 고층건물들의 광탑밀림(光塔密林)을 본다. 침대와 야구(夜具)도 좋다. 네시간 잤다.







9월 28일 – 812호실로 옮겼다. 마찬가지로 좋은 위치다. 자연과의 접촉은 어려웠지만 안온하다. 오늘 일과를 적어본다.







식전에 (1) 피채취, (2) 증기채담, (3) 소변검사, (4) 아침식사 – Toast, One Egg, Juice, Milk, Coffee, (5) 점심식사 – Porkchop, Vegitable Soup, Juice, Milk, Fruit Cocktel, Tea, (6) 목욕탕.







9월 29일 – 어제와 같은 채취작업 반복이다. “채담”은 이것으로 끝난다고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조반 대신에 영양액 한병 먹은 것이겠다.







Dr. Kim이 회진(回診) 때 들렸다. 비뇨과 Specialist를 보내겠다고 했다. 얼마후에 약속된대로 왔다. 남자의사였다.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서 “Perfect”를 연발(連發)한다. Dr. Kim에게 보고한다고 했다.







법왕 John Paul 1세가 어제밤 11시에 심장마비로 급서했다고 한다. 7억 신도의 최고 영도자니만큼 세계가 떠들썩한다.







9월 30일 – 입원 제4일이다. 자리에 누워 있다.







연합교회에서 풍요한 꽃다발을 갖다 놓는다. 상머리가 빛난다. 향기도 그윽하다. 위로가 됐다.







이목사가 들려갔다.







10월 1일(일) - 종일 자리에 누워 있다. 당뇨도 있지만 혈당이 위험선에 까지는 오르지 않았으니 음식만 조절하면 큰 걱정은 없겠다고 한다. 사탕 엄금이다.







“담” 검사는 지금 배균(排菌) 중이니까 화요일(10월 3일)쯤에는 알게 될 거라고 했다.







오후 4시쯤에 경용이 오고 얼마후에 혜원이 왔다. 반가왔다.







이 목사가 지동식 박사의 “신학의 오솔길”과 홍현설 박사의 “오직 이 한길”을 가져왔다. 읽었다.







홍현설 박사는 한경직과 비슷한 타입인 것 같다. Status Quo안에서 자기교회, 자기교파를 지키고 발전시키자는 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오직 이 한길을”은 현 제도 안에서 전도하여 교인을 증가시키는 “전도” 신학이랄까! 다시 말해서 “교회주의자”라 하겠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를 보는 눈도 밝아야 할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우리와 상당히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10월 2일(월) - Jewish Holiday라고 한다. 대부분의 의사는 쉰단다. Dr. Kim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 해야 할 진단은 폐호흡 용량을 재는 일이다. 모두 Computer로 나오니까 기술간호원이 맡아했다.







나는 신약성서를 읽는다.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은 다 읽었기에 오늘부터 누가복음을 시작했다.







저녁 후에 신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어서 “할머니”, 정희, 정선과 Douglas가 전화로 문안한다. 기분이, 즐거워졌다.







목욕하고 같은 층에 입원중인 한국할머니를 찾아 위로했다.







10월 3일 – 이목사와 김익선 목사가 내방했다. 별 고장이 없으면 내일 퇴원할거라 한다.







유동식 저 : “민속종교와 한국문화”를 읽었다.







10월 4일 – 오후에 이목사가 와서 곧 퇴원절차를 밟았다. 병원비용 $25.50은 이목사가 냈다. 당료식사 Menu를 따라 먹으려니 성가시고 먹은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하라는대로 해볼 작정이다.







10월 6일 – 연합교회 김태진 가정에서 터키 한 마리와 포도를 갖고 문병왔다. 순정(純情)으로 주고 순정을 받는 그리스도 사랑의 공동체를 감격하며 감사했다.







효순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밤에 스카보르에 와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이영일 치과에 가자고 한다. 저녁 먹고 7시쯤 떠나 효순네로 갔다. 하령이, 서희 진짜 반가워한다. 매달려 뽀뽀하고 그동안에 된 얘기가 끝이 없다. 밤 11시에 잤다.







10월 7일 – 9시에 하령과 함께 경용이 차로 Danford의 이영일 치과에 갔다. 하령은 앞 아래턱 유치 두 개를 뽑았다. 나는 앞니 안쪽을 보강하고 왼쪽 어금니 금씌운 것은 잇몸이 온전히 썩어서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뿌리는 그대로 둬보자고 했다. 다시 경용집에 들려 이목사 집에 왔다.







나는 원래 이빨이 엉망이다. 아이 때 이빨관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10월 8일(일) - 추수감사절이다. 오후 2시 예배에서 내가 설교했다.







Burbage 선교사가 심장마비로 급서했단다. 향년 81세다.







10월 9일 – 감사절, 정선 부부가 결혼 새살림 첫 초대로 자기들 Apt.에 신부쪽 친척들을 Dinner에 초대했다. 은용이네가 못오고 다른 친척들은 다 왔다. 경용이네, 혜원이네, 신자네 모두가 왔다. 나와 “할머니”도 물론 갔다. Turkey Dinner를 차렸다.







신접살림인데 실내장식이며 가구며 알뜰하고 각기 있을 곳에 배치되 있었다. 감탄했다.







밤 11시에 산회했다. Doug와 정선은 잘 어울린 살림꾼인 것 같다.







10월 10일 – Burbage 목사 유해를 안치한 장의사에 가서 Mrs. Burbage에게 조의를 표하고 영결했다. 많은 한국교인들이 왔었다.







10월 11일 – 밝은 가을날씨다. 10시에 이 목사와 함께 college Street United Church에 가서 Burbage 목사 장례식에 참석했다. 세 목사의 분담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이상철 목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Brandford의 William Scott 박사도, 아드님 부축을 받으면서 식에 참석했다. 아주 노쇄해 보인다. 금년 94세란다. 내 옆에 앉아 계셨다. 우리는 “산소”까지는 가지 못했다.







Burbage 목사는 내가 미국 유학을 바치고 돌아와 회령에 들렸을 때 내게 자택에서 축하디너 차려 주었고 그 해 겨울에는 그가 담당한 구역교회들을 순방할 때 나를 동반하고 두만강 연안 여러 교회를 역방한 분이다. 그리고 그가 Hamillton에서 이민교회를 목회할 때에 나는 유재신과 설상수를 만나려고 그리고 갔던 일이 있다. 그때 Mrs. Burbage가 설상수와 유재신을 얼마나 끔찍하게 돌봐주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주일날 그가 보는 동양이민교회에서 설교했다. 일본인 장로가 사회했었다. 버베지 목사는 한국 선교를 위한 선구자 중의 한 분이다.







10월 15일(일) - 인철ㆍ혜원이 많은 반찬과 쌀 한포대, 고기, 생선등속을 사서 신자네로 보내왔다. 부모공양의 효심에서다.







상철과 신자는 물론이고 경용과 효순도 부모에게 끔찍하게 군다. 은용ㆍ행강은 아직도 살림이 자리잡히지 않아서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늘 죄송스레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캐나다에 옮긴 초기에는 은용집에 오래 있었다. 이 세대에서 그만하면 내 자녀들이 모두 기특하다고만 느껴진다.







10월 16일 – 박재훈 박사가 L.A.에서 부인과 함께 캐나다에 정식으로 이주해 왔다. 토론토 연합교회 Minister of Music 책임자로 부임한 것이다. 이목사 집에서 교회 찬양대와 제직 약 40명이 모여 환영 party를 열었다. 신자가 냉면을 차렸다.







L.A. 얘기와 시국담 등등으로 새로 한시까지 즐거웠다.







10월 17일 - 아침 8시에 이 목사가 “장모”를 Civic Medical Center에 데리고 가서 X-Ray를 찍고 검진하고 오후 1시 반에는 나를 Dr. Kim 진찰실로 데리고 가서 건강진단 결과를 물었다. 나는 백혈구가 정상보다 반이나 부족하단다. 재검사를 요한다고 했다.







기장총회에 Guest professor로 갔던 Dr. Jay사무실에 가서 한국 다녀온 얘기를 들었다. 김정준 박사가 보낸 긴 사연의 편지도 받았다. Visiting professor로 캐나다에 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Dr. Jay의 말에 의하면 당장은 예산이 없어서 어려우나 추진시켜 본다는 것이었다.







10월 19일 – T. B. 예방 순회간호원이 와서 식구 모두가 6개월에 한번씩 X-Ray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의 T. B. 예방 정책은 철저하다. 그래도 거의가 보균자라고 했다.







10월 22일 - 楓林放燃이랄까! 장관이다.







로마 법왕 취임식 광경이 T.V.에서 방영했다. 장엄 그것이었다.







10월 24일 – 유재신 목사가 내 생일선물이라면서 전기담요 한 장을 보내왔다.







10월 27일 – 처는 경용이네가 모셔갔다. “하준”의 첫돌준비를 거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밤에 한국에서 온 목사 셋이 나를 찾아와서 많은 소식을 전해줬다. 신자가 냉면을 대접했다.







10월 27일 – Korea House에서 이번 캐나다교회에 견학하러 온 기장목사 6인을 위하여 연합교회 유지와 한신동창들이 모여 환영 Party를 열었다. 나도 참석했다.







내일이 “하준” 첫돌이라서 선물을 샀다. 선물 고르기란 무척 어려운 노릇이다.







10월 28일(토) - 효순 집에서 내 생일, 하령 생일, 하준 생일을 한데 묶어 큰잔치를 베풀었다. 친척들이 모두 초청됐다. 6시쯤에 인철ㆍ혜원과 그 집 식구가 왔다. 영철 식구, 은용ㆍ행강 식구, 현순 네 식구 모두 모였고 조금 늦게 상철과 신자와 자매들, Douglas와 정선 다 왔다. 이렇게 모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캐나다에서의 가정 생활에서 제일 큰 Family Union이었고 나의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하령과 하륜이 제일 좋아했다. 흩어질 때 하령은 하륜과 떨어지기 싫어 통곡했다.







내게 주는 선물도 푸짐했다. 이 목사 부부는 교회 모임 때문에 일찍 떠나고 우리는 11시쯤에 행강의 차로 이목사 집에 왔다.







10월 30일 – 김병숙 여사가 약밥과 지지미를 손수 만들어 들고 왔다. 정성어린 선물이다.







11월 1일 – 서울서 2백만이 데모했다는 소식이 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얘기다.







일본의 “하용” 조카로부터 편지가 왔다. 11월 10일까지에 岩手縣 水澤市 東中通 二丁目 3-1, 美山病院舍宅으로 옮긴다는 통지였다.







大戊의 妻 英淑이 9월 14일에 첫딸을 얻었는데 이름을 河蓮이라 했다는 것이었다.







11월 5일 – 최동호 장로와 이목사를 따라 Ontario Lake에 연어 낚으러 갔다. 나는 최동호 장로 배를 타고 그가 준비한 근사한 낚시도구를 갖고 해 저물때까지 낚시질에 열중했다. 결과는 강태공식이 됐다. 이 목사는 큰 연어 한 마리를 낚았다.







나는 선창에 쉬면서 “한시” 한 구절 지었다. 달 보며 호반에 돌아와 수첩에 적어뒀다. 無韻이다.







湖上鈞魚日巳暮

歸帆遲遲月色新

雲天篹芒星又稀

心興白鷗飛去來







11월 9일 – 오후 6시에 최홍희 장군 환갑잔치에 초청돼 갔다. “미시사가” 그의 저택에서였다. 태권도 사범들이 가득하에 모여 있었다. 최덕신 중장과 나를 귀빈으로 초청한 것 같았다. 최덕신 중장이 사회자였다. 그는 나에게 축사를 청한다. 나는 대략 이런 말을 했다.







첫째로, “나는 군대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고, 태권도도 모른다. 그러나 ‘도’(道)를 숭상하는 마음은 있다. 나는 최홍희 장군이 태권 ‘道’를 창안했고, 태권 ‘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높이 찬하한다. 최홍희 장군은 ‘道’의 사람이다.”







둘째로, 그는 관북출신으로 나와 동향지인이라는 것 때문에 자연감정으로 쉽게 친할 수 있었다. 개인적 친분이므로 이런 공석에서 말하는 것은 삼가야 할 줄 알지만, 만리이역에서 고향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逢故人’의 기쁨이 있다. 특히 그가 창안한 태권도가 전 세계에 우리민족 정기를 높이 선양한다면 동향인으로서 더 많이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그를 자랑스럽게 존경한다.







셋째로, 그는 이제 세계인이 됐다. 이념이 달라 서로 갈라선 유럽국가 군(群) 어느 진영에서도 태권도는 받아들이고 있다. 그야말로 “국경없는 스포츠”의 실현이라 하겠다. 등등. 그리고 결론적으로 최홍희 장군은 군인이면서도 다방면의 재능을 발위하고 있는 꿈의 사람이다. 그는 서도(書道)에도 일가를 이루고 있다. 주부자(朱夫子, 朱喜)의 “치가격언” 전문이 그의 서재에 열폭 “병풍” 글씨로 쓰여져 있다. 그에게 서도를 가르친 스승의 글씨라 했다.







“나는 지금도 그가 ‘Sports에는 국경이 없다’는 근본정신에서 이북, 이남과 서구, 동구를 태권도의 무대로 삼아 주기를 바라며 그 ‘도’가 어떤 정치게임이나 선전에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도인’(道人)으로서의 주체성(Identity)를 드높여 지켜주기를 희망한다…….” 등.







11월 13일 – 오후 6시에 강원룡 목사가 방문했다. 이 목사가 공항에 나가 같이 들어왔다. 밤 3시까지 한국정세분석을 들었다. 나에게는 귀국을 권한다.









11월 14일 – 강원룡 목사를 공항에서 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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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229) 北美留記 第六年(1979) - Toronto에서







6월 17일(일) - 오후 2시 연합교회에서 김익선 목사 위임식이 있었다.







노회에서 주재한다. 내가 설교했다. 제목은 “목자상(像)”이다.







79. 6. 19(화) - 서독의 이영빈 부부가 토론토에 왔다. 친척 방문이란다.

이 목사와 나는 그들을 “코레아 하우스”에 초대했다.







이영빈 목사는 내가 N.Y.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처음에 교섭하던 것과는 온전히 다른 성질의 모임인데 내 이름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내가 내 양심대로 해야 할 일도 태산같은데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까지 내 이름을 내 놓아야 할 까닭은 없지 않겠오?”







옆에 앉는 이영빈 목사 부인은 “이용당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지요!” 했다.







어쨌든, 그 모임도 “태산명동 서일필”이었다.







6월 25일(월) - 선우학원 박사로부터 평양의 내 막내조카 남용의 편지와 사진이 전해졌다.







남용은 모스크바 대학을 마치고 지금 평양에서 중직에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 고향에도 가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성묘도 했다고 한다.







비석도 세웠단다. 비엔나 이북대사관이 하는 일이니까 신빙성은 할인할 밖에 없겠다.







나는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7월 4일(수) - 서울 교회 신계동에 우거하는 강기철 씨가, 단권에 요약된 A. Toynbee의 “Study of History”를 자역, 자비 출판한 것을 한권 보내왔다. 호화판 장정이다.







79. 7. 7.(토) - 최홍희 장군 부부가 Korea House에서 곰탕에 정종 한 도꾸리 대접한다.



별 대답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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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241) 北美留記 第六年(1979) - Toronto에







79. 8. 29(수) - 그 동안 최우길 장로 댁에서 쉬고 오늘 12:45에 이목사 동행 라과디아 공항을 떠나 한 시간 날아 토론토에 왔다.




79. 9. 2(일) - 베델교회 청년헌신예배에서 설교했다.

집회인원 약 200명이다. 한국에서부터 잘 아는 노인네들이 많았다.







79. 9. 4(화) - 9PM에 이목사와 함께 Buffellow에 간다.

12시 30분 착 비행기로 지명관 교수가 온다기에 만나러 가는 것이다.







캐나다 입국은 당국에서 허락지 않았다.







호텔에서 밤 2시까지 얘기했다. 나이아가라 夜景도 봤다.







셋이 한 방에서 잤다. 이름 그대로 “밝게 보는” 재사다.







모든 비용은 이 목사가 전담했다.







79. 9. 5(수) - 아침 먹고 두 폭포를 미국 편에서 다시 보고 지교수를 전송한 후 우리도 돌아왔다.



5PM에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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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243) 北美留記 第六年(1979) - 함석헌 만나고




9. 14. (금) - 태풍 계절이다. 여기에도 여파가 밀려퍼진다. 구름이 너무 짙어서 대낮인데도 황혼 같다.






한국에서 함석헌 씨가 온다고 해서 이 목사와 나는 오후 5시에 공항에 나갔다.







영국 London에서 토론토로 날은 함석헌은 피곤한 기색이 없다. 카랑카랑하고 걸음도 가볍다.







토론토 쾌이커그룹 책임자라는 어느 노파 집에 유숙한다.







김정근과 나도 그 집에 들러 식사를 같이 했다. 김정근 차로 Weston에 왔다.







9월 16일(일) - 연합교회에서 함석헌 옹이 설교했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란 제목이다. 내가 축도했다.







예배후 교육회관에 갔다. 토론토 민건 주최 함석헌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장장 두 시간 반의 긴 강연이지만 시국담은 없었고 쾌커 평화주의 해설에서 맴도는 내용이었다.







함석헌은 독설로 유명했는데 “사자후”(獅子吼)를 기대하고 왔던 청중은 양떼의 잦아붙는 애원을 듣고 간다고 불평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언가 숨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필하고 함옹을 노벨평화상 수상 후보로 추천하는 서류에 서명했다.







9. 18(화) - 토론토 민건 주최 함석헌과의 좌담회에 나도 참석했다.






간단한 환영 Party가 있었다.







9월 20일(수) - 코레아 하우스 위층 Apt.에 사는 함선생 손녀댁에서 함선생을 점심식사에 모시면서 나와 이 목사도 함께 초청한다.







배석하여 대접을 받았다.







오후에는 이 목사가 자기 집에 함 선생을 초대했다.







밤 열시까지 얘기했다.







9월 26일(수) - 함석헌 옹이 9시에 N.Y.로 간다. 이 목사와 나는 공항에 나가 전송했다.







그 동안 함옹에게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공항에 같이 나온 그 젊은이 주위에는 영사관 직원 한 두명이 둘러서서 허물없는 친구인양 호들갑스럽게 그와 담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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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248) 北美留記 第六年(1979) - 토론토에




79년 11월 8일(수) - 최우길 집을 떠나 라과디아에서 11시 30분발, 12시 30분에 토론토에 내렸다. 이 목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이목사 집으로 왔다.







밤에 경용이 와서 “할머니”와 나를 자기 집에 모셔산다.







최인호 기자가 쓴 “맨발의 세계일주”를 읽었다. 어딘지 사람을 깔보는 신문기자다운 기행문이다. 눈치 안 보는 솔직한 패기가 풍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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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3권] (254) 北美留記 第六年(1979) - 토론토에서는




12월 25일(화) - 성탄절이다. “할머니”는 어제부터 열이 높아 효순의 주선으로 스카보로 종합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11AM에 나는 연합교회 성탄예배를 참석했다.







12월 26일(수) - 아침 8시반에 경용은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갔다. 전문의가 진단한 결과는 “폐렴”이란다. 입원수속을 끝냈다.







병실은 W.479실이다. 2PM에 나는 경용집에 돌아와 할머니 대신 꼬마 손주들을 돌봤다.







점심식사에는 효순이 준비한 빈대떡을 먹었다. 돼지고기 김치등속을 섞은 녹두지짐이다. 별미였다.







전화로 “어머니” 입원한 소식을 이 목사와 혜원에게 알렸다. 은용에게는 전화가 통하지 않았다.







12월 28일(금) - 입원한 처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은 병원에 오지 말라는 것이다. 효순이 출근 중에 정성껏 돌봐줘서 맘 든든하고 많이 나았다고 했다.







민중신문사에서 신년휘호를 부탁하기에 나는 “陰風靂散 陽光遍照”라고 써 보냈다.







새해에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12월 29일(토) - 집에서 쉬었다. 교회 여러분회에서 여러 가지 선물을 갖다준다. 정화가 병원에 와서 “할머니” 문병했고, 이 목사 부부, 은용 부부와 하륜, 남희도 왔다.







은용 부부와 아이들은 마캄의 경용 집에 들어 밤늦게까지 놀았다. 하령ㆍ하륜 등 사촌끼리가 그렇게 친할 수 없었다.







효순은 병원에서 근무한다. 효순은 정화네와 나를 병원식당에서 치킨디너에 초청했다.







밤 경용 집에 유숙했다.







12월 31일(월) - 1979년 마감날이다. 효순은 집안을 청소하고 오후 세시에 병원에 출근했다.







나는 서독 친구들에게서 부탁받은 신년휘호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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