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8

알라딘: 비굴의 시대-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2015

알라딘: [전자책] 비굴의 시대:

[eBook] 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은이)한겨레출판2015-01-30 


편집장의 선택

"전례 없이 더러운 시대를 함께 건너기 위해"
박노자를 한국사회에 알린 책은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다. 2001년에 1권이, 2006년에 2권이 나왔는데, ‘당신들’이 여러 의미로 읽혀 여전히 기억에 남는 제목이다. 이제 박노자를 이야기할 때 굳이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꺼낼 필요는 없겠지만, 여전히 인간이 사라지고, 평화는 요원하고, 배반과 혼란이 가득하며, 혁명은 더욱 멀어진 지난 5년 ‘침몰하는 대한민국’을 읽으니, 여전히 유효한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박노자는 오늘 한국사회가 전례 없이 더러운 시대라 말한다. 나의 사적 욕망을 위해 타자를 짓밟는 게 국시(國是)가 되었고, 국가 폭력, 자본 권력의 억압에 개인은 점차 비굴해진다. 나만 잘 살면 남의 죽음까지도 관심 밖이라는 잔혹함, 이런 태도를 서로에게 겨냥하는 위험한 사회다. 박노자는 한국의 살풍경과 세계의 소용돌이를 살피고, 지식인과 좌파가 가야 할 길을 제안하지만, 모두에게 혁명 투사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변화는 남의 고통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공감 속에는 나의 고통이, 자비심 속에는 구원의 방법이 깃든다. 비장한 논리와 결연한 의지보다 당연하고 단순한 인간의 본원적 의무가 오히려 혁명에 이르는 정확한 길이 아닐까 싶다.
- 사회과학 MD 박태근 (201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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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376쪽,

책소개

박노자가 말하는 비굴하고 잔혹한 세상. 우리 시대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박노자의 고민과 번뇌를 담고 있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부에서는 박근혜 정권의 후진성,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사고와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노동자 문제 등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다루었다.

2부에서는 바깥으로 눈을 돌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문제를 살펴본다. 지난 20년간 세계는 급격하게 돈과 시장에 그 중심 자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대신 인간은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3부에서는 지식인의 한계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학계에 대해 비판한다.

4부에서는 우리 시대 사회주의와 좌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와 좌파란 지난 역사에서 사라진 현실 사회주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비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대변하는 하나의 표현이다. 저자에게 사회주의는 하나의 정치 체제나 집권을 위한 정당 이념이기 이전에, 인생의 의미와 뜻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보루이자 실존적 운동이다.


목차

프롤로그 겨울 공화국, 비굴함과 잔학성의 이중주

1부 ‘인간’이 사라져가는 대한민국
01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
우리 시대의 파시즘 / 군주국 멘탈리티를 넘어서 / 역사에서 편집증의 역할 / 신앙의 힘으로 포용할 수 없는 정권 / 냉소의 시대, 정의란 무엇인가 / 우리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 남근이 지배하는 사회 / 괴물 제작소 대한민국 / 대한민국에 없는 것 / 근본적 물음이 거세된 사회

02 부끄러움 없는 권력, 공감할 줄 모르는 사회
젊은 백수들에게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절망을 재생산하는 사회 / 한국형 자본주의의 살인성 / 대통령은 누구인가 / 불신공화국에서 벗어나는 법 / 침몰하는 대한민국호 / 대한민국에서 인간답게 사는 길

03 물질적 욕망의 질주, 사라진 노동의 꿈
대한민국에 보수는 없다 / 국가의 맨얼굴 / 차별의 왕국, 천민 대 양민 / 한진중공업과 우리의 희망 / 이 시대의 투쟁 문법 / 고독한 싸움을 위로하는 희망버스 / 문명사회와 은폐된 폭력 / 불행한 역사의 압축판, 밀양

2부 요동치는 세계, 딜레마에 빠진 세계
01 신자유주의 몰락하는가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몰락 /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유럽 좌파의 대응 / 그리스에 대한 단상 / 현대 유럽의 전체주의 / 후기 자본주의의 3대 법칙 / 미국은 어떻게 보수화되었는가 / 혁명에 대한 단상

02 혼란과 저항의 소용돌이에서
아랍권 혁명과 제국의 황혼 / 좌파 민족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제국주의, 혁명을 포섭하다 /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 / 우크라이나, 혁명으로 가는 길 / 혁명가에게 애국이란 없다 / 역사와 화해

03 두 개의 국가, 평화로 가는 좁은 길
근대성의 빛과 어둠을 공유한 두 나라 / 남북한 비교론: 왕족 사회와 귀족 사회 / 북한, 피와 잔혹의 전제 왕국? / 국제법에 대한 사망 선고 / 자유주의자의 기준과 그 바깥 세상

3부 배반과 혼란의 시대, 지식인을 향한 외침
01 그들을 믿지 말라, 지식인의 한계
교수가 휘두르는 무기 / 특권적 지식인과 책임 유기 / 지식, 해방 혹은 학살의 도구 / 자본의 노예가 된 학자들

02 승자 독식 세계와 인문학
인문학의 위기는 사회성의 위기다 / 거대 담론을 위하여 / 근대적 이성의 가치 / 신자유주의 시대 인문 지식계의 이데올로기 / 반동의 시대여, 안녕

03 지금 가장 필요한 것, 자기 바로보기
우리의 진짜 이념은 무엇인가 / 무관심, 우리의 진짜 문제 / 자본주의와 언론의 자유 / 짖지 않는 개로 살 것인가

4부 아득하지만 가야 할 좌파의 길
01 사회주의적 삶이란 무엇인가
‘좌파’의 인류사적 의미 / 사회주의가 꿈꾸는 사회 / 민주적 사회주의의 청사진 / 심장 없는 사회의 심장 / 복지국가의 명암 / 사회주의와 인생의 의미

02 혁명을 꿈꾼 시대, 우리에게 남긴 것
인생은 짧지만 저항의 역사는 길다 / 1968년 혁명의 의미 / 혁명의 어머니, 혁명적 인텔리겐차 / 스탈리주의에 대한 마녀사냥 / 레닌과 카우츠키를 넘어서 / 지는 싸움의 미학 / 수호믈린스키의 대한 교육 / 현실 사회주의의 긍정적 측면 / 현실 사회주의와 박정희 체제

03 좌파가 걸어온 길, 그리고 가야 할 길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 평화주의의 원칙 / 절망, 조직, 그리고 투쟁 / 자본주의의 성공 스토리와 진보의 한계 / 진보의 시대적 의미

에필로그 인생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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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44
사회주의자의시각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평균적 국민이 생각하는 사회적 정의란 억울하고 우스운 것이다. 사회주의자에게는 이건희나 이재용 같은 이들이 군대에 가지 않은 것보다도 삼성의 일가를 위시한 자본계급이 대한민국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상황 자체가 문제다. 그런데 자산계급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데 어찌할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 인구의 90퍼센트는 중하급 월급쟁이이거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영세한 업자들이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각자 그 생존을 도모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한다. ‘각자가 생존을 도모한다’는 말은 우리의 국시 아닌 국시다. 애국이고 사회고 민족이고 뭐고 그 국시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취미, 선택 사항, 장식품이다.  접기

P. 76~77
행복이 있다면 남들과 경쟁적으로 비교할 필요가 없는 곳에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시험에서 떨어지면 원하는 것을 안 사주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곳이 아닌, 그냥 애정 표현을 많이 하고 그 웃음을 즐기는 곳에 있지 않을까? 나아가 자아와 그 욕망을 상대화할 수 있는 데에 있지 않을까? 1등을 강요하고 2등은 기억하지 않는 사회가 아닌, 등수와 상관없이 그저 운동장에서 함께 뛰는 것을 즐길 수 있는, 무욕(無慾)을 권하는 사회에 있지 않을까? 그런데 국가와 자본이 잉여가치 극대화 차원에서 가장 비생산적이고 인간 건강에 나쁜 욕망의 미친 질주를 부추기는 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어떤 것을 성취한 듯한 강남족의 한가한 교양 정도가 되고 만다. 무욕의 사회도 결국 아래에서부터 다 같이 하는 투쟁을 통해 만들어질 것이다  접기

P. 113
이 차별의 왕국은 영원할까? 지금까지 비정규직의 투쟁은 사업장별로 당면 현안을 중심으로 산발적이고 고립적으로 진행되었다. 오늘날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의 후손이 어쩌면 대대로 이 차별의 지옥을 탈출파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제대로 파악하기만 한다면 곳곳의 개별적 투쟁은 하나의 커다란 현대판 천민의 반란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현대판 양민이라 할 정규직의 일부라도 제대로 연대해준다면 이 나라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접기

P. 155~156
자본이 노동자 간에 차별을 두어 초과 이윤을 얻고 그들이 단결하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묘법은 결국 ‘계급’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이란 생산수단을 보유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임금 근로자들의 공통된 처지를 말한다. 임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고용 형태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를 떠나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고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하나의 계급에 속한다. 이와 같은 의미의 계급은 ‘민족’보다도 훨씬 일차적인 문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민족 자본이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에 어떤 어용 민족주의자의 선전 선동도, 그리고 어떤 ‘우리의 위대한 민족 문화’ 타령도 결국 노동자 사이를 이간질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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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93~194
진정한 화해는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가능하다. 언젠가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의 가난뱅이가 서로 손잡는 날이, 또한 과두 재벌과 함께 투쟁하는 날이 올 것이다. (…) 이런 화해와 연대는 결국 민족주의를 타파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화해를 위한다며 과거 국가가 저지른 범죄나 파쇼 극우 민족주의자의 소행을 합리화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런 과거에 대해 공동으로 단죄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것만이 화해와 연대의 기반이 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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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노자 (Vladimir Tikhonov)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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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자랐고,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조선학과를 졸업한 후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묶은 『당신들의 대한민국』으로 주목받았으며, 『주식회사 대한민국』 『비굴의 시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등은 이 연장선상의 저작이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우승열패의 신화』 등을 통... 더보기
최근작 : <팬데믹 시대에 경계를 바라보다>,<당신이 몰랐던 K>,<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 총 93종 (모두보기)
인터뷰 : 이중의 타자, 박노자 교수와의 e-만남 - 200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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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
박노자가 말하는 비굴하고 잔혹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일까?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가치를 더 이상 묻지 않는 ‘동물적’ 시대를 살고 있다. 2014년 11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 한 명이 “드럽고 치사한 나라 살기 싫어 죽으려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시도했다. 박노자는 이 시대를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비굴’은 자연히 우리 삶을 지배하는 핵심 키워드가 된다. 우리는 ‘냉소의 시대’를 지나 ‘비굴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1등’만을 강요하는 세상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사람만 골라 사귀고, 친구를 경쟁자로 여기며, 강자에게는 아부하고 약자는 짓밟으며, 동시에 절망의 발버둥을 친다. 개개인은 이렇게 비굴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이 적자생존의 원리를 체득하며 괴물로 자라나 윤 일병을 구타한 가해자가 된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의식이 세월호를 탈출한 무책임한 선원을 만든다. 아이를 차가운 바다에 묻고 국가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 앞에서 폭식 투쟁을 벌인 ‘일베’와 매상이 떨어진다며 유가족이 걸어놓은 현수막을 떼어버리는 상인들. 대한민국은 괴물공화국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 것으로 이런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비굴하고 잔혹한 시대를 철저히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를 냉철히 진단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과 자신의 모습을 여실히 보자. 그렇게 한다면 각자도생의 시대에 인간 본원의 의무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모범국
대한민국의 미래는 안녕한가?
이 책은 우리 시대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박노자의 고민과 번뇌를 담고 있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부에서는 박근혜 정권의 후진성,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사고와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노동자 문제 등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다루었다. 한국은 어떤 자본주의 사회보다도 더 자본주의적 사회, 신자유주의 모범국이다. 여기에 여전히 완고하게 남아 있는 전근대적 요소까지 겹치면서 한국은 그야말로 ‘중세성’과 첨단의 자본주의성이 공존하는 묘한 이중적 사회의 특징을 보인다.

2부에서는 바깥으로 눈을 돌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문제를 살펴본다. 지난 20년간 세계는 급격하게 돈과 시장에 그 중심 자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대신 인간은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사회 없는 사회’ 혹은 ‘인간의 주변화’로 요약되는 이러한 괴물성은 전 세계가 동일하게 겪는 문제다. 이는 필연적으로 저항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몰락의 징후를 보이는 신자유주의의 흐름, 미 제국의 약화, 아랍권과 우크라이나 혁명 등이 이를 보여준다. 2부의 마지막에는 북한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는다. 북한 사회의 야만성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우리의 야만성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부분이다.

3부에서는 지식인의 한계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학계에 대해 비판한다.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상아탑에서 교수는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제자를 성추행한다. 또한 경쟁에 매몰되어 권력 비판이라는 지식인 고유의 임무를 유기한 채 살아간다. 신자유주의 시대, 개개인은 ‘1인 기업’이 되어 경쟁적인 서바이벌 게임에 몰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었다. 동료를 뛰어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회의 미래보다 개인의 미래가 앞서는 분위기에서 인문학은 비효율적 학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4부에서는 우리 시대 사회주의와 좌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와 좌파란 지난 역사에서 사라진 현실 사회주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비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대변하는 하나의 표현이다. 저자에게 사회주의는 하나의 정치 체제나 집권을 위한 정당 이념이기 이전에, 인생의 의미와 뜻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보루이자 실존적 운동이다. 그렇기에 사회주의는 박제해서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에게서 심각하게 소외된 이 폐허의 세상에서는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되짚어 보아야 할 이념이다.

대들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면
희망은 시작된 것이다!

현실은 너무나 절망적이고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만 같다. 괴물을 만드는 이 세상에서 과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과연 출구를 찾을 수는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박노자는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상황은 더 악화될 수도 있지만, 잔혹한 시대와 맞서 싸우려는 수많은 사람들과 연대한다면 그 자체가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지배층의 요구에 “조금이라도 대들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연대와 투쟁을 한다면 당장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지는 않아도 미친 세상을 뜯어고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반성하지 않는 한 이 지옥의 삶은 무한히 반복된다. 스러져간 이들을 기억하고 고통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할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접기

평점 분포
    9.4
이번 책은 예전 책들에 비해 논조가 다소 거칠게 느껴졌다. 그만큼 지금 한국 사회가 변화해야 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옛글 모음집 같은 것보다는 한 주제로 이어져 있는 책을 보고 싶었는데 이 점이 매우 아쉽다.
박노자 교수님은 원래 사회주의자 맞는데 아랫분은 왜 놀라시는지  구매
감기군만쉐 2015-01-14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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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책이다. 하지만 상처가 아프다고 해서 가만히 둔다면 그 상처는 곪아서
부위를 잘라내어 버려야 한다. 이미 우리의 상처는 곪을대로 곪아버려 재생이
불가능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태마저 내버려 둔다면 대한민국의
내일은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더이상 우리가 괴물이 되어선 안된다.  구매
트루디 2015-01-09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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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말했지만 박노자가 개인 칼럼에선 이상한 소리들을 꽤 하지만, 책만큼은 KS 마크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한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와 지적들은 다 좋은데, 왜 유독 ‘ 지역주의 ‘ 라는 원흉에 대해서는 그닥 목소리를 내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구매
DUKENUKEM 2017-10-21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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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무거운 이야기들을 담담하지만 때로는 비장한 어조로 풀어나갔고, 앞으로 계속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써 가슴 한 구석에 무거움과 불편함을 덜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불편하게 느껴질지언정, 이 책에 담긴 날카로운 이야기들이 진실의 조각을 담고 때문이 아닐까.  구매
blue923 2015-02-0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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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대들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면‘‘‘] 네, 쉼없이 꿈틀거리며 대들어야지요!  구매
zikomo 2017-12-0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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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박노자, <비굴의 시대> 새창으로 보기
1990년, 한국학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당시의 러시아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역사에는 공포스러운 장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재처럼 이렇게 더러운 시대는 .......아마도 처음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그렇다. 이렇게 더러운 시대는 없었다. 국가는 잔학해지고 개인은 점점 더 비굴해지고 있다. 기득권에 기생하기 위해 대다수 지식인들이 침묵을 선택한 것과 달리 ‘러시아의 아들’ 박노자는 한국 현실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서슴치 않고 해왔다. 그의 비판이 소중한 것은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한 파쇼적 아비투스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박노자는 박근혜 정권을 파쇼의 부활로 본다. 히틀러 독재가 ‘대중 독재’였듯 오늘날 대한민국은 파쇼 대중을 기반으로 한 파쇼 정권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을 해산시키는 걸 보고나 들은 적이 있나? ‘도살자’ 박정희도 전두환도 정당을 해산시킨 적은 없다. 박노자 말대로 편집증 정권, 미친 정권이다. 오죽하면 보수적인 불교, 천주교, 개신교등 종교계가 손잡고 대통령 사퇴를 부르짖었겠는가?

 

박노자의 말대로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가 지옥이라면 대한민국은 무간지옥이다. 예전에 리뷰를 썼던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대해 어떤 이가 반박의 글을 올렸다. 책을 제대로 이해못했다고? 핑커의 책은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지력만 있다면 누구나 이해가능하다. 핑커의 주장은 한 마디로 유사이래 폭력이 감소해왔다는 거다. 박노자는 뭐라고 했을까?

 

핑커의 주장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폭력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주된 폭력의 형태는 자본의 횡포, 이른바 갑질이다. ‘갑’은 파견 업체를 통해서 1년 계약의 비정규직을 모집해서 정규직과 같은 라인에서 일하게 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동일하거나 오히려 더 힘든 일을 한다. 그들이 비정규직 보호법에 의거해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기만 하면 갑은 바로 계약을 해지하고 그들을 내보낸다. 직장이외에는 사실상 어떤 복지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실업 수당을 최장 10개월간 받고 나면 그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갑의 이러한 횡포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초적인 정의를 짓밟는 강자의 부당 대우는 바로 광의의 폭력에 속하지 않을까?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핑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우리 사회는 비폭력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패악질이 누적됨에 따라 더 더욱 폭력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물리적 폭력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희방버스 참석자들은 용역깡패에 의해 머리가 깨지고 송경동 시인은 갈비뼈가 부러져 나갔다.

 

국가폭력은 개인의 폭력을 내면화시키는 걸까. 윤일병 살인 사건, 김해 여고생 사건을 보면 대한민국은 ‘괴물제작소’다. 김해 여고생 사건에서 가해자들은 성매매 강요, 폭행, 고문에 이어 시신에 휘발유를 붓고 시멘트로 암매장했다.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힘든 네팔, 이집트, 아르메니아, 시리아 등의 국민들은 왜 우리처럼 자살하지 않는 걸까.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말했듯 돈이 없고 지위가 낮을수록 생명의 가치는 제로에 가까워진다. 세월호 사건은 기업과 국가가 공모한 대량 살인 사건이다.

 

미쳐가는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커의 말이 맞다고 아득바득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연해진다. 대한민국에서 인간답게 사는 길이 있을까. 박노자의 처방이다.

 

믿지 말라, 무조건 따르지 말라, 동류를 찾으라.

 

우리는 당장 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체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가질 필요가 있다. 또한 체제가 강요하는 사회화 과정을 거부한다면 체체의 보복이 뒤따른다. 박노자는 우선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부모의 말에 따라 명문대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존중할 수 있는 학과를 선택하라. 그리고 동류를 찾으라고. 온건 사회주의자가 되든 급진 아나키스트가 되든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이야 말로 중요하다고.

 

나는 좌, 우파 프레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의 좌파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나의 모든 척도는 만인의 인권이다. 인간답게 살 권리 말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인가? 각자가 생명으로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박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각자도생의 시대에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란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수백만 년 동안 군중 동물로 살아온 인간이 남을 짓밟고서 혼자서만 누리는 생존과 번영에 진정 행복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아무리 표면적으로 성공해도 이 체제와 시대가 각자에게 남기는 것은 내면의 파멸과 고통일 뿐이다.

 

인간이면 남의 고통을 진지하게 보고 이해하는 순간 자비심을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운명이 그 자비심을 실천할 기회를 줄 것이다. 각자도생 시대의 적자생존이니 약자 도태니 하는 코드에 역류할 수 있는 심층적 집단 심성이란 결국 자비심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혁명적 실천의 원천이다. 파웰 코르차긴의 말대로 “내 모든 생명과 정력”을 다해 그것을 실천한다면 죽는 순간에는 그래도 덜 부끄럽지 않을까?





-2015. 5. 27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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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2-12 공감(24)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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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의 등에 .... 박노자

언제나 그랬던 듯 하다. 시대는 변하고 있지만 박노자는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박노자의 글을 찾아 읽는 건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하는 내 자신에 대한 의심에서 일 수도 있겠다. 

박노자의 글은 어쩌면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과 폭력은 체제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그 본성(?)상 어찌할 수 없는 체제이다. 사람들을 경쟁시키고 폭력을 통해 배제하고 비인간화시켜야 작동이 되는 체제이니 이 체제를 어서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여기서도 박노자의 대답은 한결같다. 사회주의의 실현을 통해서...단순하게 자본주의를 인간화 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혁명인 것일까?

실제로 제체를 뒤엎어버리는 방법은 혁명 밖에 없는 듯하다. 그런데 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혁명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하다. 

아니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시대는 혁명이란 말 자체가 어불성설인 시대가 아닌가? 

혁명을 하자고? 미친 놈 소리를 듣거나 낭만적인 이상주의자 딱지가 붙기 딱 좋은 상황일테다. 

혁명따위는 집어치우고 니 앞이나 잘 처신하라고 쏘아 붙일 터다. 역시 자본주의다. 개인의 경쟁력이 최고의 지상과제인 이 시대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박노자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그저 탄식만 할 뿐....



그러데 왜 박노자의 글을 읽는가? 끊임없이 변주하는 듯 하면서도 동일함을 유지하느 그의 글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혁명에 대한 다짐을 하려고? 설마... 난 자보주의를 싫어하고 무한경쟁을 도모하는 이 사회를 증오하면서도 감히 혁명이란 말을 꺼내지 못하겠다. 그렇게 순치되어 온 것이다. 이런 나를 깨닫게 만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 박노자다. 그는 등에 처럼 사람등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왜 이 숨막히는 체제를 가만히 놔두고 소소한 일에 분노하느냐고...그런데 정말 숨막히는 체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박노자에게 지금의 한국사회는 80년대의 혁명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순치된 사회다. 더 이상 타인과 사회에 대한 관심은 잃어버리고 각자도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경쟁에 올인하는 사히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민중의 고통과 희생을 도외시하는 사히다. 그럼에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사회다. 더불어 우파적 민족주의와 좌파적 민족주의가 발전에 경도되어 경합을 하는 사회다. 진정한 좌파는 쥐꼬리만큼 남아서 발버둥치는 사회다. 그럼에도 아직 희망이 있는 사회다. 어디에? 이렇게 험하게 굴러가는 사회에, 그리고 이 사회에서 발버둥쳐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본다. 그런데 그 희망의 근거는 항상 우리를 좌절케 만든 근거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온 긍정적 단어는 '연대'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다. 

사회주의에 관한 한 양가적 감정이 들어있다. 이미 백일몽처럼 스러진 현실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라 할 수도 없지만, 그 나름대로 성취되었던 긍정적인 요소들까지 버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스탈린 식 사회주의를 배격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 정치적으로 부자유스럽던 체제가 보호하는 가치 즉 노동자들의 존업성, 계획경제를 통한 완전고용, 직장에서의 평등과 부와 권력의 세습이 없었던 점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옹호를 하고 있다. 이건 좀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정치적 자유가 제한된 속에서 이런 긍정적인 가치에 대해 얼마나 평가해야 할지 감은 오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하는 연대의 가치에 대해서는 뭐 별다른 비판을 하지 못하겠다. 연대가 너무 안되서 문제이니.... 특히 시민사회와 노동계급의 연대는 항시 고민의 중심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계급의 정의가 있다고는 하나 임금을 받고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임에도 자신을 노동자로 규정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 게급은 사회적 위치에 대한 객관적 조건과 더불어 이른바 계급의식이라는 주관적 깨달음이 통합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듯하다. 다만 현재의 언론을 통해서는 계급적 자각을 이루기 힘들다는 점은 말해봐야 잔소리다. 



진부한 듯 새롭다고 해야 하나? 이 체제를 살아가면서 꼭 질문해야 할 문제에 대해 이른바 총정리를 해 두었다고 하자. 다만, 이 시대가 모멸의 시대이자 이제 비굴의 시대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나타나는 이 혐오스런 감정들이 과잉되는 시대. 단순하게 살아남기를 넘어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박노자에게 답을 구하지 말라. 다만, 박노자가 말하는 이 사회에 대해 공감했다면, 자신이 무엇이라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박노자가 안내했으면, 다음은 독자 몫이다. 그리고 박노자는 이런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충분하게 자신의 역할을 한 것 아닐까? 



투박한 듯 날이 서 있는 변하지 않는 견결한 사회주의자를 난 사랑한다. 나와 의견이 같지 않은 부분도 많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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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5-01-18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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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가운데 밝다

2004년. 서울대 정시모집 면접 전날, 막상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말 한번 섞어 보지 못했던 고등학교 선배의 기숙사 2층 침대에 누워 선배가 던지듯이 두고 간 박노자를 처음 읽었다. 이 나라 지성의 요람중 으뜸이라는 곳의 기숙사는 상상했던 것보다 허름했고 그래서 더욱 고즈넉했다. 창 밖으로 겨울밤은 가로등이 뿜어내는 빛 위에 누워 춤추고 어디선가 찌르르- 하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불을 켜 놓은 방은 어둡고, 밤이 내린 밖은 오히려 밝다는 기분이 들었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박노자의 책도. 그리고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사는 곳은 밝은 중에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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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5-07-21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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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가 같은 말만 반복한다고?

오늘도 아버지는 누나에게 늦게 일어난다며 타박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주방 행주를 바닥 걸레로 썼다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듣게 되는 말들이고, 10년 전에도 들었던 말들입니다. 비슷한 언성이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10년 내내 누나는 늦게 일어났고, 아버지는 행주로 바닥을 닦았기 때문이죠.

이런 현상의 책임은 당연히 행동을 고치지 않는 쪽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책임의 당사자는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합니다. 오히려 적반하장일 때도 있죠. 언성을 높이는 쪽이 화목한 분위기를 깨고 있다면서요.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런 건 결코 가족의 정이 아닙니다. 가족의 정이라는 것을 악용해서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일 뿐이죠.

‘수신제국평천하’라는 말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족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서 그런지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사회를 야만적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당당하게, 야만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왜 똑같은 말을 자꾸 하냐는 거죠. 『비굴의 시대』를 쓴 박노자 교수에게도 비슷한 비난이 가해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낸 책에서와 별 다를 바 없는 주장을 지겹게 반복한다면서요.

같은 이야기를 또 한다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게 무슨 문제인가 싶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의 병폐는 결코 개선되지 않았고 도리어 심화되고 있으니까요. 박노자 교수는 그저 그 누구보다도 두 눈을 부릅뜨고 한국 사회를 쳐다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 시선이 자꾸만 터부시되니까 반복해서 말하고 더 크게 말할 수밖에 없는 거고요. 이게 과연 게으른 걸까요? 오히려 게으른 건 그러한 외침을 듣지 조차 않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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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찬희 2015-02-15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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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관계적 인간이해를 다시 생각하다

『비굴의 시대』(박노자, 한겨레출판, 2014.)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1.

『비굴의 시대』는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가 정의한 21세기 한국사회의 단면이다. 그가 한 일간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서 2014년 출판했다. 제목이 다소 직설적이다. 부제는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이 제목만 보더라도 그는 ‘비굴의 시대’를 규정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마땅한 대안을 찾아보려는 의지를 내비쳤다.



2.이 책을 다시 꺼내본다. 나는 그가 지난 날 우리 시대의 비굴함을 어떤 유형으로 분석했는지 또 확인할 마음은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비굴'해지는 법을 더욱 터득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를 제대로 관통할 수 없다는 ‘불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실감해왔다. 솔직히 나는 사회가 비굴하다는 것보다 나 자신이 오히려 비굴함에 더 익숙해져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니 비굴의 시대는 우리의 문제이기에 앞서 나의 문제다.



3.

그는 본래 왼쪽에 서서 세계를 본다. 물론 그는 우리 시대의 비굴함이 '오른쪽'에서 부터 기인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뿐만은 아니다. 동시에 엉성한 왼쪽에서도 초래되었다는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주시하는 바는 우리 사회 겉으로 드러나는 숱한 현상들이 사실은 오랫동안 누적되고 마침내 길을 잃어버린 것들이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똑바로 서 있어도 삶이 왜곡되고, 편향되었음을 진단한다. 불편하다

.

4.

나는 그의 책 4부를 관심 있게 본다. <아득하지만 가야 할 좌파의 길>이라는 제안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대안이기도 하다. 그는 앞뒤도 고려하고, 좌우도 살피면서 시대를 위한 대안적 '실천이념'을 제안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권리'가 정당하게 회복되는 사회적 이념 실현에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아주 쉽게 망각하는 사회이념이기도 하다. 그는 이것이 재생되고 재활되기를 제안한다.



5.

그가 제시하는 대안을 이념적 명명으로 하자면 '사회주의'다. 아직도 어감이 유쾌하진 않다하겠지만, 이 용어는 본래 ‘타인과의 관계’를 우선하자는 이념이었다. 그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어정쩡한 좌파의 우유부단함과 겉만 요란한 피상적 개혁에 뜻밖에도 ‘인간성’이 소실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 위기에 대해 인간 본연의 삶의 자리를 복구시키고 그 권리를 보전하는 대안적 이념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가 주장하는 '사회적 이념이 '인생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런 맥락을 따라 그는 인생의 세 층위를 이렇게 말한다.



"기본적 층위는 생물학적로 생존하는 것이다. 그 다음 층위는 기본적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마지막 층위는 관계나 창조적 노동이나 어떤 애타적 실천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303/304쪽)



그는 '사회적 이념'의 목적지도 설정한다. 바로 '애타적 실천'이다. 핵심은 온전한 '개인'의 확립이다. 이는 공동체의 단위로서 모든 애타적 실천의 출발이다. 저항과 혁명은 바로 이 견고한 '개인'에게서 발원한다.



6.

솔직히 나는 그의 글의 흐름을 견실하게 따라가는 편은 아니다. 그의 한국사회 분석은 선명하고, 정확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사회적 이념’이라는 틀에 경도된 것은 아닌지 의심을 갖는다. 문제 분석은 한국의 속살을 냉철하게 드러냈지만, 대립되는 이념사회인 우리에게는 그 대안이 아직 걸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7.

박노자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21세기, 우리를 둘러싼 사회 환경은 더욱 푸석해지고 있다. 그가 비판한 것처럼 우리가 가장 힘겹게 직면하는 문제는 '애타적 삶'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저자가 단호하게 종교적 삶마저도 제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한 것은 지금도 정확하다. 종교는 특히 '타인을 배려하는 삶'이 사라지고 극단적인 '자기사랑'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땅은 이 왜곡된 상황을 화석화하면서 정치화하여 이용하고 있다. 어느 분야든 ‘자기 의도를 감추고 타인을 이용하려는 웃음에 절어있는 사람’들이 우리 앞을 자유롭게 거닐고 있다. 이런 시대를 우리는 힘을 내어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너'나 '그들의'의 문제는 아니다. '나' 자신에게 잠복되어 나를 위협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나'도 언제든 나의 생존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정치화될 수 있는 변형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8.

전염병이 끝없이 진화하며 세계를 맴돌고 있다. 언제 끝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해결을 위해 노력하자면 여전히 장담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가 이 판데믹만은 아니다. 국가의 책임이 감지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묻혀가는 숱한 국가사고 이야기들이 여전히 있다. 이런 현상들은 더욱 '악의적으로 정치화'되어가고 있다. 가볍게 생각하더라도 사회가 발전해도 아직 우리 사회는 진지하게 '타인을 품어내는 사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굽어진 실존들이 너무 많다.

9.

박노자교수가 '비굴의 시대'라고 명명한 것은 옳다. 물론 그가 '인간화'에 집중한 사회적 이념을 낯설게 여기는 경향이 많다고 해도 나는 그가 말하는 ‘인간의 시대’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나아가 나는 그가 말한 '사회적 인간화'를 ‘관계적 인간화’라는 말로 풀어 이해하고 싶다. ‘신이 창조한 인간’이라는 신앙 언어를 빌려서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 사회 속에 이미 퇴색해버린(?) 이 인간이해를 이 굽어진 현실에서 재활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책은 오늘 다시 나를 채근한다. 무엇보다, 나의 신앙을 경각시킨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이 세계의 굽어짐을 공의와 정의의 ‘야훼’(YHWH)가 허용하고, 야훼 자신이 그 징계와 치유를 모른 척 아직도 유예하며 방관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 야훼의 행동의 의도를 어떻게 따라가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야훼의 카이로스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서재 밖에서 공기에 흠칫하는 시간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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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헬퍼 2020-06-0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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