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5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1,2,3,4. | FELIVIEW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1.
2018년 12월 10일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일본정치사상사연구日本政治思想史研究』, 김석근 역, 한국사상사연구소, 통나무(東京大学出版会), 1995(1952).

해제-영어판 저자서문-저자 후기-번역을 마치고.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를 처음 손에 넣은 것은 이 책의 번역본이 처음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서 였다. 1995년 말 무렵일까. 그렇지만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다. 책에 남겨진 낙서의 흔적을 보니 대략 4번 정도 시도했던 것 같다. 매번 300쪽 정도까지 한 번은
400쪽 까지 읽었지만, 마지막 100쪽을 읽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하고 일어판 『日本政治思想史研究』과 대조하
면서 읽었다. 그 결과를 간략하게 정리해 두려한다.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연구는 물론 이 책에 대한 논의도 무수하게 많지만, 그런 논의들이 한 눈에 들
어오지 않는 것은 실은 맥락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논의의 맥락을 모두 이
해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사상사 17~19세기』(고
려대학교 출판문화원)와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예문서원)를 읽고 나서였다. 전자는 2010년에 일본
에서 그동안의 강의를 모아 출간한 것이고, 후자는 1985년 일본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를 충분히 의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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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출간한 것이다. 여기 실린 논문은 1979년과 1980년에 『国家学会雑誌』에 실렸던 글. 따라서 이 두
책을 비교해서 읽다보면, 어디에 차이가 있고 어디에 논점이 있는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러
나 비교하면서 읽으면서 알아내야지, 마루야마 마사오의 어느 책 어느 부분을 거명하면서 논쟁을 전개하
지는 않는다. 여튼 이 두 책과 마루야마 마사오를 함께 읽으면서, 저간의 논쟁이 가지는 의미를 조금이
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번역서의 목사를 보면, 김용옥의 해제, 영어판 저자 서문, 저자 후기, 번역자 후기, 1, 2, 3장의 순서로
되어 있다. 참고로 일본어판의 순서를 보면 1, 2, 3장, 저자 후기, 영어판 서문의 순서로 되어 있다.
1983년 신장판의 순서다. 일본어판은 이 글이 쓰여진 혹은 게재된 순서대로다. 1장은 1940년 『国家学
会雑誌』에 4차례에 걸쳐서 게재되었고, 2장은 같은 『国家学会雑誌』에 41년 하반기에 3차례, 42년 8월
에 한 차례 나누어 게재되었다. 그리고 징집되어 평양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쓴 3장은 같은 『国家学会雑
誌』에 44년 3, 4월에 두 차례로 나누어 게재되었다. 1장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조수助手논문이다. 당시
제국대학 졸업생은 조수에 지원할 수 있다. 조수는 2년에서 3년간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国家学会雑
誌』의 편집 등의 일도 한다. 한국으로 치면 조교 또는 연구생 비슷하다고 할까. 물론 교수의 지도도 받는
다. 그의 경우는 난바라 시게루南原繫였다. 그리고 임기 내에 이 조수논문에 통과하면 조교수가 된다.
그의 경우 1장의 논문으로 조교수가 되었고, 2장은 그 후 1장을 보완하기 위해 쓴 보론이다. 조수논문이
란 박사학위논문 또는 교수자격논문 비슷하다고 할까. 80년 전의 제도다. 물론 그래서 마루야마 마사오
는 박사학위가 없다. 그리고 저자후기あとがき는 1952년 이 책을 처음 출간하면서, 영어판 저자 서문은
1974년에 이 책의 영어판을 간행하면서 쓰여졌다. 이 모든 글들이 쓰여진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
다. 역자도 그 중요성을 알기에 목차에 여러 서문들의 발표시기를 기록해 두었다. 이 책을 맥락을 따라
읽으려면 일본어판의 순서가 가장 좋지만, 그래서는 외국인과 일본정치사상사의 논쟁의 맥락을 모르는
사람은 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이해하려면 영어판 서문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어판 이 순서를 완전히 뒤집으면서 그 사이사이에 김용옥의 해제와 번역자 후기를 넣어두었
다. 그리고 맨 앞에 둔 역자 해제가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이 책의 독해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순서로 읽었기 때문에 내용을 가다듬기 쉽지 않았는데. 이번에 간략하게 나마 정리해 두려고 한다.
참고로 이 책의 논문들은 물론 반박하는 논문도 모두 실린 『国家学会雑誌』는 1882년에 창간된 국가학
회国家学会의 잡지로 본래는 제국대학 법학부 학생, 졸업생, 교수들이 회원으로 된 조직이다. 한국식으
로 이해한다면 도쿄대 정치학과 대학원에 뿌리를 둔 학회이고, 그 확회가 발간하는 잡지라고 할까. 신기
하게도 한국에서 이 잡지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은 영남대 도서관이다.
김용옥의 해제
일단 김석근이 번역한 마치 일장기를 보는 듯한 빨간색 표지의 이 책을 펼치면, 김용옥의 장황한 해제가
일단 눈을 빼앗아 간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이 해제는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다지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올바른 해제라면 이 책이 놓인 논쟁사의 맥락을 짚어주는 글이어야
한다. 이 책으로 말미암은 일본에서 전개된 일본정치사상 논쟁의 맥락과 한국에서의 이해와 소개의 논란
의 맥락을 짚어주는 글이어야 한다. 마루야마 자신도 문제사라고 말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도올도 알
고 있고.(31) 그러나 장장 사십쪽에 걸친 도올의 장광설은 예의 자기자랑과 경험담에 더 많은 부분을 할
애하고 있다. 그럼에도 완전히 젖혀버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집고 넘어가야 한다.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메이지의 작위作為를 근대적인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의 탄생과 관료제로 이해한 점.(25)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든 것에 이렇게 크고 복잡한 사상적 문제가 제기되거나 논쟁이 있을 필요가 없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마루야마가 소라이에 착목한 것은 법과 제도를 만드는 작위 그 자체가 아니라, ‘권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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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출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성공여부에 대한 판단은 실은 유보하고 있다는 점. 그러나
김용옥의 눈에는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의 눈에든 실로 메이지의 성공이 크게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마루야마의 다소간 회의적 시선을 간과하게 된다. 그 자신도 분명하게 서술하지 않고 있지만. 그는 다시
한번 이 작위란 일본의 작위이며, 국민국가의 작위이고, 이를 주자학의 해체과정에서 나타난 소라이荻生
徂徠의 선왕의 도先王の道의 작위에서 발견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공’과 ‘사’의 분열, 정치적 사유의 우
위, 마키아벨리적 근대성 등이 발견되고, 이러한 마루야마의 소라이 발견이야 말로, 일본정치의 발견이
라고 격찬하고 있다.(32-33) 이들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자. 그러나 내 눈에
는 이때의 이 ‘작위’가 둘 또는 셋 이상의 다양한 차원을 넘나든다는 점이다. 근대정치사상의 사회계약이
론이란 구체적인 법과 제도의 구성을 넘어서서 그런 법과 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권위의 가상적 혹은
인위적fictional한 구성, 그리고 그 구성에 대한 동의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의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이
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만들어냈다면 그것은 근대국가의 법과 제도가 아니라 실은 ‘천황제’
즉 국체国体를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논의가 전개되면, 일본은 근대적인 즉 인위적이고 가
상적인 권위의 무한한 근거로서 가장 봉건적인 ‘국체’를 만들었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데, 실은 마루야마
의 논의에서 이 부분은 명료하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상찬은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되,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김용옥의 말처럼 소라이가 서구 근대성 논의로 축소된 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마루야마가 헤겔 류의 발전론과 진보사관에 함몰되어 이 책을 쓴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은 본
문에서 충분히 논하기로 하자.
흥미롭게도 김용옥은 1989년에 있었던 마루야마 마사오와의 만남을 기록해 두고 있다. 거기서 마루야
마는 동양東洋이란 픽션이라고 나이토 고난内藤湖南을 인용했다고 한다.(36) 그렇다. 동양이란 단순히
서양의 잔여가 아니다. 동양이란 일본이 화이華夷로 설명하는 동아시아의 질서관을 대체하는 새로운 개
념으로 만들어낸 것이고, 거기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이 중심이다. 이 일본 중심으로 그려낸 동양을 가져
다가 그게 한국 중심이라고 말하는게 무슨 실체적 의미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이제사 이런 사실
을 알게 되었다. 왜 이렇게 근대에 고집하는가?(38)라는 김용옥의 질문을 나도 숱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는 마루야마의 근대성에는 형식만 있을 뿐 내용은 없다고 비판한다.(39) 그러면서 그는 중세에서 근
대로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사의 패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40) 문제는 결국 근대modernity
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근대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실재다. 그것은 18세기와 19세기에 서유
럽의 몇몇 국가에서 시작된 국가형성 및 국가관리 방식 그리고 경제 운영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문명이자
일종의 거대한 힘이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그 힘에 압도당했고, 그 힘에 침략당했
고, 그 힘을 받아들였고, 그 힘을 따라가려 노력했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역
사다. 어느 만큼 따라가고 나서 이제 비로소 한숨 돌리면서 지금까지 죽도록 따라갔던 것은 과연 무엇인
지 사상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한 이식인지, 아니면 변용인지, 그도 아니면 맹아가 있었는
지 끊임없이 따지는 것이다. 모든 사상은 현재적 의미를 추구할 수밖에 없으니까. 동아시아만 그러는 것
이 아니다. 푸코가 늘 하던 작업이 결국은 모더니티의 어떤 모습이 고대에 있다 또는 그리스도교적 통치
술에 있다는 주장이다. 지금 여기 근대라는 삶의 현실이자 실재가 있다. 이 사실이 사상사 연구를 압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근대에 신화적으로 매달리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왜 매달리는지,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인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그러니 동양을 쉽게 추상화시켜서 가능했을런지 않았을런지도 모르는
다른 길을 입에서 놀리는 것은 호사가들의 일이기는 하되 참으로 무용한 일이다. 그러면서 그는 실학의
허구성을 비판하다. 마루야마 식의 논의를 조선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는 비판.(41) 나는 오랫동안 이
런 주장에 동의해 왔지만, 최근에 실학에 대한 관심이 이미 일제 강점기 일본학자들과 당시 마르크시스
트들 그리고 민족주의자들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는 주장을 보면서(정종현, 『다산의 초상: 한국 근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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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담론의 형성과 전개』) 이 문제에 대한 평가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루야마의
작위관이 문제이고, 소라이의 작위론이 메이지 근대국가를 낳았기 때문에 작위에 대한 도덕적 반성이 필
요하다는 식의 논리의 비약은 따라가기 조차 버겁다.(43) 그는 마루야마 식의 근대의 긍정이 폭력의 긍
정으로 비약한다고 말하지만,(43) 근대국가란 폭력의 독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여기서
마루야마 보다 김용옥의 근대관이 훨씬 낭만적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러면서 일본역사의 근대
적 작위성이란 타문명의 능률적인 흡수(44) 즉 모방이라는 전통적인 일본인론으로 후퇴하고 만다. 다시
여기서 작위란 사회적인 제도나 활동양식의 차원에서 논의가 전개된다. 혼란스럽다. 김용옥의 전체적인
평가 일본 근대가 가진 여러가지 한계에 대한 지적들(43-44)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지만, 그
런 한계가 도출되는 과정에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이 글을 쓰기위해서 이제 이 해제는 대여섯번은
더 들여다본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글은 혼란스럽다. 그러니 이 글에서 혼란을 느끼는 것은 꼭 내
책임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접어버리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이 글은 마루야마 수용의 한계, 또는
근대정치사상에 대한 이해의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느꼈던 수많은 혼란을 보
여주는 것이 아닐까. 내가 대학원을 막다니던 1995년이라는 배경을 생각한다면, 김용옥을 마냥 비난할
수만도 없다. 그 시절의 나의 사고를 다시 돌아본다면 혼돈과 무지 이외에 다른 것은 발견하기 어려우니
까. 말하자면, 마루야마의 글은 좀더 섬세하게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영어판 저자 서문 (1974)
이 글은 이 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글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주 섬세하고 꼼꼼하게 읽어
야 한다. 이 글은 일본에서의 논쟁의 전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졌고, 그래서 상황에
대한 약간의 묘사를 하고 있다. 우선 서두에서부터 자신의 생각이 이 글을 쓸 때와 적잖게 달라졌으며,
이글의 내용에 많은 비판과 도전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49-50) 그런데도 구체적으로 어떤 도전을 중요
하게 여기는지는 또 말하지 않아 그 속뜻을 더듬어 가기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의 글들이 쓰여진
상황과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여전히 이 책이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50) ‘闇の谷間’, 일본 역사의 어
두운 골짜기, 1930~40년대에 이르는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사상통제가 극심하던 시대에 자기검열과 변
명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르크스를 연상시키는 어떤 표현도 피했다.(51-53) 그는 일고一高 재학시
절인 19세 때 유물론 강연회에 참여했다가 경찰서에 구류되어 특고의 수사를 받은 적이 있다. 법학부 재
학시절 강좌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도 받았다. 이 책에도 그런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요즘의 글보
다 훨씬 유물론적이다. 그는 이어서 이 책이 쓰여지게 된 연구사를 간략하게 밝히고 있다. 일본 상황을
모르는 영어권 독자를 위해 친절하게 쓰여진 연구사다.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이 쓰여지
던 당시의 일본사상사 연구를 세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 국민도덕론을 기초로 하는 연구로, 1910년대
까지 보수적 계층 사이에 깊숙이 뿌리내린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화의
급격한 파도를 맞이해 자기 국가 및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으로 유교・불교・신도에
서구 윤리중 전통에 결여된 도덕을 적당히 섞어 제국 신민의 새로운 도덕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도쿄대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鉄次郎가 대표적이며, 그의 도쿠가와 3부작(『日本陽明学派之哲学』
(1900), 『日本古学派之哲学』(1902), 『日本朱子学之哲学』(1905))』은 일본의 유교사를 역사로 다룬 최
초의 역작이다.(54-55) 여기서 비로소 당연하지만, 마루야마 이전 연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
다고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연구 내용을 살필 여유까진 없지만, 마루야마의 말처럼 유럽 철학의 범주나
학파에 넣어서 해석한(55) 이전 연구가 있었기에 새로운 문제사의 도전이 가능한 것이다. 마루야마 마
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 독해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연구사적 맥락 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문
화사Kulturgeschichte로서의 사상사로 메이지 말년부터 국민도덕론에 대한 반동으로 등한한 것으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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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구스트 뵈크August Boeckh의 문헌학Philologie이나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의 정신사
Geistesgeschichte를 포괄하는 접근이다. 무라오카 쓰네쓰구村岡典嗣의 『本居宣長』는 뵈크의 ‘인식된
것의 재인식’이라는 문헌학적 방법이 노리나가의 고도古道・고학古学의 밑바탕에 있다고 상정한 것이
다. 또 한 사람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의 『日本精神史研究』(1926)는 딜타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정
치사상이나 사회사상 보다 문학, 조형, 미술, 연극(가부키)을 일본 전통의 핵으로 강조했고, 그는 다이쇼
초기 지식인의 전형적인 비정치적, 반정치적 문화 개념에 중심이 있다.(56) 다만 이 정신사가 일본정신
을 고금을 관통하는 하나의 실체라는 의미로 보는 생각은 1930~1940 군국주의 시대에 전성기를 구가
했고, 국민도덕론의 흐름에 속한다.(57)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입장은 이들 모두와 달라 『文学に現
はれた我が国民思想の研究』(1916~1921)에서 일본의 사상을 국민의 실제 생활, 그것도 시대의 문화에
주요한 역할을 수해한 계급 즉, 궁정귀족, 무사, 평민 등의 일상적 생활태도와 관련하여 각 시대의 사조
를 자연관, 인생관, 연애관, 정치관 등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는 유학자나 불교사상가의 책은 낮게 평가
하고, 서민들이 좋아하던 이야기나 풍자시 그리고 노래를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민중들의 의식의 다양한
표현 형태, 발상 양식에 주의를 기울였다.(57-58) 셋째,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을 습격한 마르크스주
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일본사상사연구이다. 마루야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토대의 제약을 강조하는 마
르크스주의의 연구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계급구성, 계급투쟁 등 구체적 상황에 관심을 두어야 하지만,
일본에서는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애미니즘적 우주상을 의식의 밑바닥에 깊숙이 침전시켜둔 채,
유럽에서 직수입한 고등교육제도의 훈련을 받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방법은 종합적・체
계적 지식으로 모든 과학을 통합하는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유물론이라는 이름의 장대한
근대관념론으로 유럽에서 주관주의 철학 인식론이 수행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58-59) 유물론
사상이 하나의 관념론 체계로 일본에 수용되었다는 주장은 흥미로우면서도 거울을 보는 느낌이 든다. 루
카치Georg Lukács나 코르쉬 등 독일관념론의 영향이 강한 마르크스주의자자의 인식론 저작이 1930내
에 지식인에게 읽혔고, 일본의 청년・학생들은 경제결정론을 나이브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마루야마
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세계상의 변용과정을 그려낸 프란츠 보르케나우Franz Borkenau의 연
구에 큰 자극과 시사를 받았다.(60)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일본사상사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낸 것은 일본이 파멸적인 군국주의의 언덕을 달려오던 1934년 이후의 일로 나가타 히로시永田広志, 도
리이 히로鳥井博郎, 사에구사 히로토三枝博音, 하니 고로羽に五郎 등은 일본의 전통사상인 유학, 국학,
신도의 연구를 통해 국민도덕론의 계보를 잇는 일본정신의 이데올로그들과 대결하여 했다. 그러나 이들
은 정치적=사회적 상황에서 수세에 몰리고, 사상통제에 노출되면 될수록 과학의 보편성과 객관성의 요
청을 내걸었다. 자신의 도덕적 선호에 따른 사상사 즉, 국민도덕론에서 황도皇道철학에 이르는 국체찬미
론에 의한 사상사를 비판하고, 가치판단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주장을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내놓고 있다.
(60-61) 이상은 연구사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지적 분위기 전반을 언급한 것이다. 당시의 마르크스주의
는 서유럽의 그것과 또 달랐다. 일본의 분위기가 있어서 마치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했던 역할을 하고 있
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도덕론과 국체国体찬미론과 마루야마의 연구가 대결하고 있다는 사
실을 잘 드러낸다. 마루야마가 발견한 일본사상에서의 근대성 논란을 일차적으로 그 맥락 속에서 평가되
어야 하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사상사를 사상의 논리적 발전으로 ‘안으로부터’ 파악하는 시각과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기능
에 착안하는 ‘바깥으로부터’의 시각을 연결시키기 위해 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에서 말하는 시좌구조
Aspektstruktur나 사고모델Denkmodellen 즉, 사회적 토대와 개개의 정치적=사회적 제 관념의 중간
에 있으면서 양자를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과 보편적 이데올로기 개념에서 시사를 얻게 된다.(64)
따라서 그는 1장에서 도쿠가와 초기 주자학을 주자학적 사유양식이라는 비인격적 레벨에서 파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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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유양식이 겪는 역사적 변질 속에서 도쿠가와 시대의 정통적 세계상의 해체과정을 추적해 보려했
다. 그가 주자 철학의 특징인 규범-자연의 연속성이 분열되어가고, 그 분열이 국학 사유양식의 성숙을
준비하게 된다는 구성은 보르케나우의 연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과 그 제 범주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서술에서 힌트를 얻었다.(64-65) 2장은 퇴니스, 베버, 트뢸치에게 시사를 받기는 했지만, 특
정인의 영향은 받지 않았고, 원래 1장의 보론 성격이다. 1장이 유학의 철학적 범주나 국학의 비정치적
문학이론의 분석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좁은 의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고찰로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에도 시대 표면의 정치적 교의에는 사회계약설이나 인민주권론은 물론 안도 쇼에키安藤昌益를
제외하고선 저항권이론 조차 발생했던 흔적이 없다. 썩어빠진 유학자의 공리공론을 비웃은 평민 사상가
의 리얼리즘은 태평한 천하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고,(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 시바 고칸司馬江
漢, 가이호 세이료海保青陵) 존왕론은 전통주의자나 국체론자들이 강조하는 것만큼, 반막부적이지도 반
봉건적이지도 않았다. 따라서 ‘생각지도 않은 결과’로서 근대의식이 준비되는 과정을 사상사적 레벨에서
그려내기 위해 정치적=사회적 질서에 대한 기초지움의 방식의 차이라는 2장의 관점을 설정했다.(65-
66) 왜 마루야마는 ‘근대의식’의 성장에 매달렸는가. 우선 일본에서는 근대가 특수한 의미와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특히 여기 실린 논문이 쓰여질 당시는 지적 서클에서 ‘근대의 초극’이 빈번히 논의되던 시
대였다. 초극되어야 할 근대란, 넙게는 르네상스 이후의, 좁게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이후의 서구의
학문, 예술 등의 문화에서 기술, 산업 및 정치조직까지 포괄하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현대의 세계사는
영국・미국・프랑스 등 선진국이 담당해온 근대와 그 세계적 규모의 우월성이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문화에 의해 대체되는 전환점에 있다는 것이 초극론자들의 시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파시스트들
이나 군국주의자들은 아니었다. 1940년대 초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그런 외침은 영국・미국・프랑스 등
에 의해 대표되는 시대에 뒤떨어진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타도하고, 군부・혁신 관료・반의회주의
정치가・좌익에서 전향한 지식인 모두, 일본・독일・이탈리아 등이 밀고나가는 ‘세계신질서’의 건설에
협력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라는 제창에 휩쓸리고 있었다. 여기서 근대의 병리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모든 영역에 침윤했고, 지식인 사회가 가장 심하게 침식당하고 있다는 진단을 수반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 국내의 이데올로기적 획일화 요구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근대의 초극론과 배후의 전체주
의에 강한 저항감을 품은 지식인과 연구자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속죄양이 되어있던 근대를 옹호하는 것
을 의무로 느끼고 있었다.(66-68) 메이지 이후의 일본은 이미 충분히 근대화되어 있다, 너무나 서구 근
대의 문화나 제도를 흡수한데서 오는 독소가 나오고 있다는 주장과 근대에 오염되기 이전 일본에는 고대
신앙과 유교를 비롯하여 아시아대륙에서 넘어온 동양정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아름다운 전통을 형성했
고, 여기서 근대를 씻어내야 한다는 주장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68) 마루야마가 도쿠가와 시대의
근대적 사고방식의 성숙과 그 정도를 헤아린다는 것은 근대의 초극론에 대항한다는 동기가 깔려있었다.
(68) 간략하게 말하면 (a)일본은 그렇게까지 근대화되어 있지 않았다. 전함을 만드는 고도의 테크놀로
지와 아마테라스의 신칙으로 최고통치자가 정해져 있다는 국가신화가 공존협력할 수 있다. (b)메이지
유신 이전에 전통주의자들이 미화하는 정도로 근대와 인연이 없는 동양정신이 역사적 변화로부터 벗어
나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을 논증하려 한 것이다.(69) 그러나 갑장스럽게 소집 영장이 날아
들어 3장을 급하게 쓰고 유고처럼 남겨두고 평양으로 떠나게 된다.(70) 그는 군국주의에 협력할 수 없
어 장교지원을 하지 않았다. 평양에서 각기병으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고, 다시 징집되어 히로시
마에서 근무하다 피폭까지 당하게 된다. 제국대학 조교수였던 그를 대학생이라 부르면서 괴롭히던 평양
의 이등병 생활에서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육군지원병훈련소에서 철저한 황민화 교육을 받고 온 조선인
일등병이었다는 마루야마의 회상은(가루베 다다시, 『마루야마 마사오: 리버럴리스트의 초상』, 109) 실
로 가볍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의 절박한 상황이 모든 것에 대한 답변은 될 수 없겠지만,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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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일본의 사상계의 상황에서 그는 그 나름의 응답을 한 것이다. 이점이 그가 ‘근대’에 집착해서 소라이
와 노리나가를 연결지은 하나의 맥락이 된다. 그렇기에 이 영어판 서문은 1960년대 이후 무수하게 쏟아
진 비판들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게다가 그의 소라이에 대한 연구도 노리나가에 대한 연구도, 근대의
맹아에 대한 해석과 한계에 대한 해석이 공존하고 있다.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발견된다.
그리고 영어판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 중 수용할 내용을 자신의 오류라고 밝히고 있
기도 하다. 첫째, 주자학적 사유양식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었고, 그 보편성이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붕괴하고, 고학파의 대두에 의해 도전에 처한다는 생각은 역사적 진화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구
체적 역사적 사실에 대응하지 못했으며, 문치 정책에 의한 유교의 고전과 주석서 발간 등으로 이데올로
기로서 유교 교의가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17세기 후반 이후의 일임을 인정하고 있다. 야마자키 안사이
山崎闇斎가 주자학을 강의하기 시작한 것은 1655년, 야마가 소코山鹿素行가 주자학에 도전한 것은
1666년, 이토 진사이가 고의古義의 초고를 마련한 것이 1663년 경으로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보급과
고학파의 도전은 거의 동시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게다가 도쿠가와 사회의 시좌구조를 이루는 유교의 근
본적 제 범주는 막부 말기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통성을 강인하게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
자학적 사유방식의 보급과 해체라든가 자연에서 작위로의 진화론적 도식이 실증을 감당할 수 없다고 인
정한다. 다만, 이 책의 개개의 분석 소라이학의 내적 구조나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분기, 소라이
학과 국학의 사상적 연관에서 사적 영역의 해방이 계승되었다는 성과는 앞으로도 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72) 이미 여기서 1장과 2장의 주요한 주제들의 도식이 붕괴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나로서
는 이 영어판 서문을 너댓번이나 읽었지만, 이 말의 의미를 앞에서 말한 와타나베 히로시의 책들을 읽고
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둘째로 이 책의 치명적 결함으로 일본주자학의 일본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중국에서 직수
입한 것으로 보고 있음 또한 인정하고 있다. 일본 주자학과 중국 주자학의 괴리는 처음부터 드러나 있었
고, 야마자키 안사이 만이 아니라 에도 유학의 출발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이미 주자학의 수정주의적
이해 위에 서 있다는 점을 말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랬다면 도쿠가와 유교사 전체가 이 책과 다른
퍼스펙티브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셋째로 조선 주자학 즉 이퇴계 학문과 사상을 고찰에 넣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72-73) 실제로 일본 주자학이 중국의 주자학과 어떻게 다른 지 그리고 왜 다를 수
밖에 없는지를 논구하는 것이 와타나베 히로시의 저술이다.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 본문의 첫번째 각
주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 영어판 서문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맹점을
인정하는 마루야마도 그것을 지적하는 와타나베 히로시도 서로 전거를 들어서 논쟁하지는 않고 있다. 실
제 와타나베 히로시 이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의 입
으로는 이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마지막에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은 해제가 아니고, 마루야마 마사오의 영어판 서문이다.
저자후기あとがき(1952)
저자후기는 1952년 한국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던 시절에 이 책을 간행하면서 쓰여진 것이다. 그는 그때
군국주의와 파시즘에 관한 비판을 한참 전개하던 와중이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일본제국주
의는 해체되었다. 이것은 커다란 단층이다. 그는 우선 이 책의 여러 문제설정이나 분석의 진행방식 내지
다양한 역사적 범주의 규정 자체가 8.15 이전의 각인을 받고있으며, 그 이후 수백년에 비견할 역사적 상
황의 변동의 의미를 되씹어야 하는 현재와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78-79) 어디
까지나 근대초극론을 염두에 두고 읽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일본사상사 연구는 이
책의 방법론의 확장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조명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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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책에서 시도한 분석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합이나 배열속에서 기능변화를 겪어야
한다고 평하고 있다.(80) 이미 사이고 노부쓰나西郷信綱와 훗날 자신의 강의를 이어받는 마쓰모토 산노
스케松本三之介의 「近世日本における国学の政治的課題とその展開」를 평가하고 있다.(80) 특히 그는
여기서 자신의 작업이 통사가 아닌 문제사라며, 당시의 의도와 주도동기Leitmotiv를 말한다. 1장과 2장
은 서로 밀접하게 보완하는 관계로 봉건사회의 정통적인 세계상이 어떻게 내면적으로 붕괴해가는가에
대한 연구로 일본사회, 일본사상의 근대화의 패턴 및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갖는 특질을 규명하려 했다
고 말한다. 그렇기에 도쿠가와 봉건사회의 시좌구조와 유교적 세계관의 구조적 추이를 문제삼은 것이다.
이것은 근대성 정도에서 가장 낮은 레벨까지 내려가 거기서 가장 고정성이 강한 정신 영역, 가장 추상적
사고의 모형에서 내면적 붕괴를 어디까지 검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라고 평가한다. 다라서 정치사
상에서 근대화 과정에 대한 서술은 원래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자답한다.(81) 사상의 내재적 자기운
동의 추상적 부정이 아니라 자기운동 자체를 구체적 보편인 전체 사회체계 변동의 계기로 적극적으로 파
악하여 해야 사상사와 사회가적 연구가 만나게 되며, 전근대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와 하부구조가 서로
얽혀있다고 평한다. 루카치를 인용해 경제적 및 법률적 범주는 그 자체로 내용적으로 떼어놓을 수 없게
얽혀있다고 말한다.(82) 어떤 의미에서 훗날의 영어판 서문에서 이미 부정한 내용들을 아직까지 역설하
고 있다. 특히 여기서 중국의 정체성停滯性에 대한 일본의 상대적 진보성이라는 입장을 번복하고 있다.
그러면서 괄호가 쳐진 근대를 경험한 일본과 그것에 성공하지 못했던 중국의 대중적 기반에서의 근대화
를 언급한다.(83) 사실 이 구절을 여러 연구자들이 들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데. 때로는 지나치거나 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1940년의 중국은 독립된 근대 국민국가를 결성하지 못
하고 일본과의 전쟁과 내전을 동시에 치르고 있으니 정체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1952년의
중국은 농민 공산혁명을 이룩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으니 마치 대중적 근대화를 이룩한 듯 보였
다. 꽤 오랜기간 마오의 중국에 대해 외부 연구자들은 환상을 가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시기의 학살
과 참혹의 현실 그리고 혁명의 실상에 대한 사실이 보고되고 있다. 그러니 이런 간략한 인상비평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지엽말단에 휘말리는 것이다. 중국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일본이 근대적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주자학을 매개로 논의를 전개하다보니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마루야마는 여기서 도쿠
가와 사회의 근대적 요소의 성숙 만이 아니라 어떤 반석 같은 체제도 자체에 붕괴의 내재적 필연성을 가
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자체가 ‘영혼의 구원’이었다고 자평한다. 기계적 편향성에 빠졌음도 인정하지
만. 그러면서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내부에서 해체하는 것이 근대의식의 징표는 아니라 해도 근대의식의
성숙을 준비하는 전제조건이라 말한다.(84) 실은 이런 견해가 1장의 말미에 아주 간략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또한 작위 계열의 근대성에는 제약을 가하고 있고, 일군만민적인 절대주의 사상에 대해 평가가 후
했지만 본질적으로 반봉건적 요소를 인정하는 것이 내심이었다고 말한다. 이 문제에는 도쿠가와 봉건제
가 전형적 수봉관계가 아닌 가산적 관료제의 계기가 침투되어 절대주의화의 길이 유럽적 절대주의(관료
화된 후기가산제)가 아닌 아시아적 전제로의 방향과 중첩되는 것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다.(84-85) 실
은 이런 식의 근대화로의 이행경로에 대한 연구가 사회사에서 1990년대초까지 이어졌던 것이 사실이
다. 동구권의 붕괴 이후 이런 관심은 시들해져 버렸지만. 남은 관심은 만민에 대한 즉 네이션 형성에 대
한 것 정도랄까. 그리고 3장은 내셔널리즘 사상이 국민주의 이론으로 형성되어 국가주의로 변모해 갔는
가라는 관점으로 파악하려는 의도였다고 말한다. 완성하지는 못했지만.(85) 그는 크로체의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과 트뢸치의 현재적 문화 종합을 언급하면서, 국체사관의 횡행 속에서 역사의식과 위기의
식의 내면적 연계성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관심은 이 원고에서
싹텄다고 말한다.(86) 실로 행간 곳곳에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3장은 또 그 나름 읽는 맛이 있다. 도대체
가 결혼한지 3개월된 사람이 돌아올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는 소집영장을 받고 마지막으로 남은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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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원고 마무리에 몰두한다는 것 자체가 한 사람의 정신의 숭고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읽
을 때 나는 늘 마음을 가다듬고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리고 번역자의 후기가 이어진다. 이 번역이 없었더라면, 이 책을 읽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기
껏해야 영역본을 구해서 기웃거렸을 테니,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그렇지만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무엇보다 중국어와 일본어의 표기법이 통상적이지 않다는 점이 불만이다. 출판사의 입장인지 번역자의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표기란 원음에 가깝게 하는 것보다 정보의 확인과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편이라, 이 글에서는 알아서 그냥 고쳤다. 한글이 많은 음성을 표시할 수 있다고 그게 실제 해당언어와
가까운 것도 아니고, 원음에 가깝게 표기한다고 일종의 합의로 존재하는 표기법을 뛰어넘는 데는 동의하
지 않는다. 게다가 문장을 아주 친절하게 풀어 쓴 나머지, 天地自然은 하늘과 땅이 스스로 그러하다고
되어 있어서 다소 읽기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어판을 펼쳐놓고 대조해 가면서 보
다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외에 사소한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런 건 대체로 독자가 알아서 해
야할 일이라 생각한다. 다만, 마루야마가 중국의 전적(논어, 맹자 등)을 인용할 때, 역자는 한문을 전재
했다. 반면 마루야마는 이를 한문에 토를 달아 일본식 번역문으로 표기하고 있는 점을 지적해 두려 한
다. 읽으면서 신경써야 할 부분은 중간중간에 표시해 두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2018. 12. 10.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2018년 12월 10일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일본정치사상사연구日本政治思想史研究』, 김석근 역, 한국사상사연구소, 통 나무(東京大学出版会), 1995(1952). 

1장 근세일본유교의 발전에 있어서 소라이학의 특질 및 국학과의 관련성 1장 1절 머리말-근세 일본유교의 성립: 중국역사의 정체성과 유교-일본에 있어서의 유교-근세 일본 유 교의 성립과 객관적 조건-그 주관적 조건-근세 일본 유교의 전개를 더듬어 보는 것의 의미.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40 중국은 가부장제에 근거한 신정적 전제정의 제국이며, 개인은 도덕적으로 자기가 없는 것과 같다는 헤겔 의 『역사철학강의』의 한구절로 시작한다. 중국에서는 역사의 한 특이성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거기에 중국역사의 정체성이 있다는 것. 헤겔의 비판은 신랄하다. 역사의 유년시대. 가족관계 위에 구축된 국 가. 훈계와 예의범절의 가르침에 의한 국가. 산문적 제국. 지속의 제국. 동요조차 비역사적인 역사. 주체 가 자신의 권리에 이르지 못하고 대립을 자기속에 잉태하지 못한 즉자적인 결합체. 대립은 고정적 국가 질서 바깥에서 발생한다. 반면 외부에서 파괴하는 방종하기 짝이 없는 자의성.(105-107) 마루야마는 이를 중국역사에 있어서 유교의 지위와 연관시킨다, 왕조가 변하면서 다소간의 성쇠가 있어도, 유교는 새왕조의 국교적 지위를 보증받았고, 중국적인 사회관계는 재생산되며, 유교에 대항할만한 사상체계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즉 사상적 대립을 경험하지 못했고, 최근세에 국제적 압력이 중국사에 근대적= 시민적인 것을 침투시켰을 때, 비로소 삼민주의와 같은 계통을 달리하는 사상과 만나게 되었다.(108- 109) 마루야마가 두고두고 헤겔리안과 중국 정체론이라면서 비판을 받게 되는 1장의 서두이다. 대립 다 시 말하면 모순을 동력원으로해서 세계정신에 의한 역사발전이 이루어진다는 헤겔 역사철학에 비추어 본다면 지극히 타당한 이야기다. 지금에 와서 이런 주장을 반복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1940년으로 돌아 가 중국이 정체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래 보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을 그저 지속의 왕국이라고 단순하게 평가한 헤겔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사실은 결국 두고두 고 오점이 된다. 일단 그는 여기서 역사적 현실과 사상의 연속성과 반복성을 끌어내지만, 지나치게 단순 한 주장이기 때문에 합당한 근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남겨진 사진 중에 학생들과 헤겔을 독일어로 강독수업을 하는 모습도 있다. 일본 유교의 도래는 4세기 오진 천황 때 왕인으로부터 라고 할만큼 오래되었다. 중국제국의 특성에서 분 리할 수 없지만 자체속에 보편화로의 계기를 가지고 있어 일본에 수용될 수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는 유 교의 전성기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도쿠가와 봉건사회의 사회적 내지 정치적 구성이 유교의 전제가 되 는 중국제국의 구성에 유형상으로 대비되기 때문에, 근세 초기에 유교가 그 이전의 유교에 비해 사상적 으로 혁신되었기 때문이다.(109-110) 전국시대를 통해 형성된 근세 봉건사회는 중세 봉건사회에 비해 철포의 전래로 인한 전술의 변화, 검지検地와 도수령刀狩令에 의한 병농분리, 무사와 토지의 관련성 상 실, 조카마치城下町에서 위계적인 가신단 형성 및 세분화, 쇼군, 다이묘, 무가 고용인武家奉公人을 순서 로 하는 무가의 신분적 구성, 무가의 서민에 대한 우월은 주의 봉건제의 천자, 제후, 경, 대부, 사, 서민 의 구성과 유형적으로 비슷하기에 그 사회관계를 유교윤리의 이데올로기로 기초짓기에 적절했다. 아메 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무사를 유교 경전을 들어 정당화시켰다. 무사계급 내부에서도 은혜를 기초로 한 정된 수로 맺어지는 주종관계의 심리적 지주인 나사케なさけ나 서약ちぎり은 조카마치의 방대한 봉건가 신단과 영주 사이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객관적 윤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때로 법률이나 제도로 표 현되어, 신분에 따라 의상, 경칭, 수레 등에 번잡한 등급을 마련하여 구별하고, 새로운 것을 꺼리고 생활 을 고정화하는 봉건적 정치양식은 유교가 예로 합리화한 중국의 지속적이고 장려한 제도를 방불케했다. 이에家가 봉록이라는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기초로 하했기에 당주의 가족구성원에 대한 통제권은 매우 강했고, 가족구성원의 인격적 독립성은 매우 약했다. 여기서도 유교의 가족윤리는 적응성을 보인다. 또 한 신분사회에 있어서 사회관계는 최상층의 그것을 전형으로 하여, 하층신분의 사회관계가 형성되고, 의 식형태도 이에 따라 위로부터 아래로 침윤이 이루어지는 신분사회의 일반적 법칙이 타당하며, 유교윤리 는 다소간의 변용을 거치기는 했으나 서민들간의 사회관계에도 적용되었다. 이런 근세 봉건사회의 사회 구성과 유교윤리의 사상구조와의 유형적인 조응이야말로 근세에 있어서 유교가 가장 강력한 사회윤리로 서 사상계에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객관적인 조건이었다.(111-116) 중국이 신분제 사회가 지속 순환되고 유교가 지배이데올로기였고, 일본도 도쿠가와시대는 그랬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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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아니다. 사회가 신분제인 것은 분명하나, 그 지배 이데올로기는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유교가 아 니었다. 그리고 일본의 신분제도 중국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마루야마는 근세에 있어 유교가 융성하는 주관적 조건으로 유교 그 자체의 사상적 혁신을 들고 있다. 근 세유학은 교학教学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그 연구도 독립된 유학자들에 의해 다소간 공개적으로 이루 어졌다. 이런 전환의 사상적 계기는 송학宋学의 전래였다. 가마쿠라 시대 선승들에 의해 일본에 전래되 어 불교 교리 특히 선종 교리와 통합되었던 송학을 불교로부터 독립시키고 근세에 있어 유학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하야시 라잔林羅山이었다. 둘 모두 승문에 서 태어나 환속하여 송학에 귀의하고 유학의 입장에서 출세간교로서의 불교를 배격하게 된 경력은 일본 에 있어서 유교의 독립과정을 말해주고 있다.(116-118) 공개적 교학으로서 정주학의 확립은 유학 계통 으로부터의 이탈이라 조정을 배경으로 한 진신박사縉紳博士 가문으로부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을 것 이다. 신흥유학은 공가公家에 대항할 만한 정치세력을 지주로 필요로 했고, 그 지주가 에도 막부의 창시 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였다. 이에야스는 막부 창업 전에 유교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고, 후지 와라 세이카를 방문해 정관정요貞観政要 강의를 들었고, 라잔은 세이카의 추천으로 1607년 막부의 정 치고문이 되어, 중용되었고, 하야시 가문이 관학官学의 종가宗家가 되는 기틀이 되었다. 『도쿠가와 실기 徳川実紀』는 “성현의 도를 존경하고, 학문과 배움의 길을 장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루야마도 도쿠 가와 이에야스가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유학을 시정 방심의 수단으로 삼았는지는 의심스 러우며, 막부 초기 정책은 무단적이었지만, 이미 장악한 정권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의 살벌한 마음을 바꾸어야 하고 교학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느꼈을 거라고 본다. 이에야스는 『맹자』를 애독했고, 라잔과 맹자의 탕우의 폭군 방벌에 대해 동의했다. 이에야스는 유교에서 장래의 교화수단만이 아니라 에 도 막부의 정통성의 거점을 모색했을지도 모른다. 이에야스는 유학에서 문학적이거나 주석적인 연구가 아니라 윤리강령이나 명분론을 찾았다. 근세 유교는 주자학에서 시작되었으나, 중국에서의 전개와는 달 랐다. 그것은 유교의 내부발전을 통해 유교사상 자체가 분해해 가서, 바로 완전히 이질적인 요소를 자기 속으로 잉태해가는 과정이다. 일본 유교의 좁은 의미의 정치사상은 근세를 통해 봉건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국학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변혁은 표면적인 정치론의 아주 깊은 곳 사유방법 그 자체 내 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소라이학까지 더듬고, 소라이학의 사유방법을 이어받으면서 그것을 완전히 전환시킨 노리나가학의 사유방법의 성립을 준비하고 있었다.(118-122) 이 마지막 문장이 원래 초고에 서는 “노리나가학에 있어서 소라이학의 사유양식은 거꾸로 서 있는逆立 진리였고, 노리나가는 그런 거 꾸로 서 있는 진리를 다시 뒤집음再 転倒으로써 소라이학을 이어받았다”고 썼지만 지도교수였던 난바라 의 충고로 마르크스를 연상시키는 구절을 바꾸어야 했었다. 그는 일고시절 경찰에 체포되어 특고의 수사 를 받은 후 사상경찰의 감시하에 있었다.(영어판 저자 서문, 52-53) 훗날 자유주의자에 근대주의자라는 온갖 비난을 받은 그도 정작 사상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미군정 시절의 일로 미국 비자가 대사관에서 거 절되기도 했다. 이런 구절 하나하나에서 마루야마는 자신이 습득한 서양사상을 일본 정치사상 연구에 얼 마나 철저히 적용하려 애썼는지 알 수 있다. 과연 그런 점에서 그는 철저했고, 그런 관점은 이 연구 전체 에서 관철된다. 그런 점이 여러 부분에서 한계로도 지적되지만, 적어도 어떤 방법을 가져오려면 어느 정 도까지 철저해야 할런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마루야마가 평생 그런 관점을 고수하기만 한것도 아니고. 실상 훗날 많은 사람에게 비판받고 특히 와타나베 히로시가 결정적으로 비판하면서 극복해냈으며, 본인 도 영어판 서문에서 오류를 인정한 도쿠가와 초기에 주자학이 관학이고, 교학이었다는 주장은 비전문가 의 눈으로 보아도 쉽사리 한계가 드러난다. 그는 『도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 주로 의존한다. 간혹 인용 출처로 나오는 『동조궁어실기東照宮御実紀』는 이 실기의 이에야스 부분을 가리킨다. 문제는 이 실기가 19세기 전반의 문서라는 점이다. 전517권으로 구성되어 1809년부터 1844년까지 집필되었다. 19세기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4/40 전반의 시각으로 17세기 전반을 보았을 수밖에 없다. 해당 국왕의 치세가 끝나면 편찬한 조선의 실록과 는 다르다. 조선의 실록도 고쳐지고, 또 집권자의 입맛에 맞게 쓰여진 게 태반이고. 이것은 물론 1940년 대 일본의 도쿠가와 시대에 대한 역사연구, 사회사 연구의 한계가 원인이지만. 마루야마에게 주어진 비 판 중 가장 큰 비판은 주자학이 도쿠가와 막부의 관학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조선에서 는 관학이었다. 그것도 무려 500년간 이나. 이점이 마루야마를 읽는 우리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며, 마 루야마의 논의에 빠져들게도 하고, 판단을 흐리게도 하는 지점이 아닌가 한다. 주자학이 관학이 아닌 사 회에서 관학인 주자학의 해체과정을 탐색한 마루야마 그리고 그걸 읽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500년 간 주자학이 관학이었던 조선의 뒤를 이은 한국의 독자라는 그 미묘함이 있다. 그래서 주자학의 해체나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근대성에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1장 2절 주자학적 사유양식과 그 해체. 주자학의 구조-주자학적 사유의 특성-도쿠가와 초기의 사상계에 있어서 그 특성과 반영-주자학적 사유양식의 전성기-간분寛文으로부터 교호享保에 걸친 사조의 급격한 추이-주자학적 사유양식의 분해과정[야마가 소코山鹿素行-이토 진사이伊藤仁斎-가이바라 엣켄貝原益 軒] 주자학은 주렴계에 의해 개척되고 정자 형제에 의해 발전된 송학의 흐름으로 첫째, 도통의 이음을 주창 하고 오경 중심주의에 대해 사서에 의해 근본정신을 파악하는 의리의 학문, 둘째,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 는 형이상학의 수립이 특색이다. 작게는 일상생활의 수양방법에서 크게는 세계실체론에 이르는 방대한 사상체계가 완성되었다. 여기는 치밀한 정합성이 있고, 주자학의 폐쇄성은 주자학자들이 이론적 창조성 을 발휘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123-124) 주렴계의 ‘태극도설’이 주자학의 형이상학의 기초로 우주 의 법칙理法과 인간도덕이 하나의 원리로 꿰어져 있고, 천인합일 사싱이다. 주희는 정자의 견해를 받아 들여 태극은 곧 ‘천지만물의 리’라고 말하며 발출론적 색채를 희석시키고 일종의 합리주의 철학을 만들 어냈다. 주자학의 리는 개개의 만물에 내재하면서도 만물을 넘어서는 일원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있다. 합해서 말하면 만물의 근원이 태극이고, 나누어서 말하면 사물 모두 각각의 태극을 가진다는 식으로 주 자학에는 원래 양자택일entweder-oder적인 범주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또한 리는 기와 함께 사물物 로 불려 실체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단순히 기의 그러한 까닭然の所以의 근거가 된다. 이점에서 주자학을 근대적으로, 이노우에 데쓰지로 처럼 독일 이상주의 철학과 대비시켜 생각하는 데, 상당히 문제가 있으 며, 오히려 초월성과 내재성, 실체성과 원리성이 즉자적으로an sich 무매개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 이 주자 철학의 특징이다.(125-126) 마루야마가 꽤나 길게 주자학을 정리하고 있지만, 그걸 모두 옮기 는 건 좀 무의미한 것 같다. 전체적인 골격을 따라 마루야마의 이해만을 들여다보는 쪽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여기서 원래 주자학이 어떠하다는 식의 논의는 뭐랄까 좀 산으로 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마루야마 는 곳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면 여기서 이노우에 데쓰지로는 주자학을 독일 이 상주의 그러니까 독일 관념론 철학과 대비하여 근대적인 것으로 본다는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연구사에 서 본 국민도덕론의 대표자이고, 또 그 후예가 파시즘과 국체론으로 빠져드는 그 이노우에다. 말하자면, 이노우에는 주자학을 근대적인 것으로 보았고, 당연히 그 이후에 나오는 국학은 근대의 극복(초월)으로 보았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건 마루야마의 이 논문을 읽다보면 구석구석에 빵부스러기처럼 던져져 있는데, 마루야마는 일본사상을 근대의 맹아가 있다고 평가했다고 그게 근대냐고 비판받는 경우 가 많지만, 실제 마루야마는 그 당시의 해석보다 덜 근대적인 것으로 전반적으로 서구 역사의 더 과거로 옮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그가 헤겔의 역사철학에 영향하에 있다는 점도 분명하고. 천지만물은 모두 형이상의 리와 형이하의 기의 결합으로, 본성은 같지만 차별적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 며, 인간 대 자연 사물 사이에서도, 인간 상호간에서도 그렇다. 주자학의 우주론은 그대로 인성론으로 이어진다.(127) 태극=리가 사람에 깃들어 본연의 성이 되고, 기가 인간에 부여되어 기질의 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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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탁한 기질에서 욕망이 생겨나고, 욕망이 본연의 성을 뒤덮어 가릴 때, 인간의 악惡이 발생한다. 선은 악보다 근원적이다. 어떤 사람도 기질의 성의 어둡고 탁함을 씻어내면 본연의 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기질을 개선할 것인가, 주자학의 실천윤리가 전개된다.(127-128) 주자학의 실천 윤리에서 중시하는 것은 『중용』으로 군자의 덕성을 높이고 학문에 의거한다는 말에 따라, 욕망을 제거 하고 천리에 돌아가는, 수양과 지적탐구, 주관적 그리고 객관적 방법을 선택한다. 주관적인 것은 존심存 心으로 순수하게 주관적인 내성內省으로, 욕망이 소멸되는 경지에 이른다. 객관적인 것은 격물치지格物 致知, 사물에 나아가 앎을 다한다. 사물에 나아가 하나하나 리를 궁구하면 내 마음에 본연의 성을 밝게 한다. 궁리에 힘쓰면 활연관통豁然貫通하게 되고,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밝게 된다. 주체의 자기반성 에 의해 성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과, 객체를 매개로 개념적으로 주체의 리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다. (128-129) 존심과 궁리로 안으로로 욕망을 없애 본연의 성으로 돌아가고, 밖으로 세계의 법칙理法과 하나가 되면合一 그는 성인이 된다. 개인의 이런 도덕적 정진이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전 제조건이다. 격물格物, 지치至治, 의성意誠, 심정心正, 신수身修, 가제家齊, 국치國治, 천하평天下平. 주 희 철학의 귀결점. (129-130) 개괄적으로 주자철학을 정리한 후 거기서 특성을 읽어낸다. 그러면서 주에서 일본 근세 초기 고학파의 비판을 받은 주자학은 직수입된 주자학으로 주희 철학의 본래적 특성에서 보아도 동일하다고 간주한다. (130) 바로 이 부분이 훗날 수많은 비판을 받은 부분으로, 본인도 인정한 것이다. 일본 주자학은 처음부 터 일본화되었다는 부분. 주희 철학의 근본개념인 리理 사물에 내재하는 자연법칙物理이지만, 인간에 내 재하는 규범道理이고 자연自然이자 당연當然이다. 자연법칙은 도덕규범과 이어져 있다. 이 연속은 대등 하지 않고 종속적인 것으로 사물의 이치는 인간의 도리에 자연법칙은 도덕규범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주자학의 형이상학에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제1철학의 영예를 부여할 수 없고, 주자학의 우주론 내지 존재론은 인성론의 반사적인 지위만 차지하고 있다. 주렴계는 발출론이기는 하나 존재론에서 인성론을 끌어내고 있는데, 주의의 ‘태극도설’은 우주론에서 성誠이라는 계기를 끌어들인다. 태극(리)는 본래 윤 리적 범주에서 파악되고 있다. 자연만이 아니라 역사 역시 도덕에 종속된다. 주자학적 합리주의는 규준 인 리가 도덕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 역사는 『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무엇보다 교훈이며, 거울이고, 명분名分(이름과 직분)을 바로 하는 수단이다. 역사적 현실의 독자적 가치는 인정 되지 않으며, 자연, 역사, 문화 모든 것이 도덕적 지상명령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이 주자학의 합리주의 내 지 주지주의의 기본성격이다. 이런 도학道學적 제약은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비합리주의를 불러일으켜 합리주의에서 비합리주의에로의 진전이 실은 근대적 합리주의의 성립을 위한 기반이었음을 보여준다.(130-132) 자연법칙과 도덕규범의 연속성과 도덕의 우위. 역사에 대한 도덕의 우위 등이 주자학의 특징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도리道理는 동시에 사물의 이치物理라는 점에서 윤리가 자연에 이어져 있음으로 해서 주자학의 인성론은 당위적=이상주의적 구성을 취하지 않고, 자연주의적인 낙관주의가 지배하게 된다. 누구나 본 연의 성을 가린 어둡고 탁한 기품을 제거하면 착한 본성이 드러난다. 이는 덕행의 목표를 초월적 이념으 로 하지 않고, 인간성에 완전히 내재시키는 일종의 낙관주의다. 사람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 이는 동 시에 준엄한 엄격주의도 내포한다. 실현되어야 할 규범은 본연이며, 보통 인간의 감성적 경험이나 정감 은 기질의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천리天理는 구체적 실천적으로 자연적 기초를 잃고, 절대적 당위로서 인간의 욕망人欲에 대립하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적 낙관주의와 극기적인 엄격주의는 주자학적 사유양식 의 분해과정에서 두 개의 방향으로 분열하게 된다. 하나는 유교의 규범주의를 자연주의적 제약으로부터 순화純化시키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욕망人欲의 자연성을 용인하는 방향이다.(133) 낙관주의 와 엄격주의로서의 주자학이라는 평가는 냉정하면서도 놀라운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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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론에 있어서 낙관주의적 구성은 규범이 자연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배태되어 있다. 이런 연속적 사유가 주자철학의 특색이다. 리의 초월즉내재超越卽內在, 실체즉원리實體卽原理의 관계가 역시 연속적 사유의 표현이다. 모두 직선적으로 이어지며, 도덕성의 우위 하에 일사분란한 배열을 보여준다. 낙관주 의는 인성론만이 아닌 주자학 전체의 체계적 특성이며, 낙관주의가 유지되기 어려우면, 근대적인 헤겔이 말한 분열된 의식이 다가선다.(134) 대립 즉 모순이야말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는 헤겔 역사철학을 일본주자학, 고학파, 소라이학, 노리나가학(국학)의 연쇄에서 발견하고 관철하기 위해 철저한 전제를 깔 고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주자학 체계를 장식하는 정적-관조적 경향. 주렴계의 태극도설 보이는 절대정絶對靜은 주자 학에서 전면적으로 전개된다. 성인은 고요함에 근본을 둔다. 본연의 성은 적연부동寂然不動하다. 인의 예지는 아프리오리한 성에 속하지만,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사단四端은 이발已發한 정情에 속한다. 인은 사랑과 구별되는 사랑의 이치라 된다. 이는 주자학의 실천도덕에서 수정지경守靜持敬이나 거경정 좌居敬靜坐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격물궁리格物窮理에 아무리 실천적 의미를 부여해도 이토 진사 이에 비긴다면 관조적 색채가 남아 있다. 움직임에 대한 고요함의 우위, 행동성에 대한 관조성의 우위도 연속적 사유방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주자학 체계의 낙관주의의 한 표현이다.(134-136) 마루야마는 방대한 주자학 체계를 증류하여 도학적 합리주의, 엄격주의rigorism을 내포한 자연주의, 연 속적 사유, 정적=관조적 경향이라는 특징을 찾아내고, 그런 특징을 꿰뚫고 있는 성격으로 낙관주의를 집어냈다. 이는 주자학이 근세 초기 사상계에서 지녔던 독점적 지위를 설명해 준다. 낙관주의는 안정된 사회에 부응하는 정신자세이며,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한다. 전국시대를 완전히 바꿔 고정화된 질서 와 사람들의 마음 위에 성립한 근세봉건사회에 있어 그런 정적 낙관주의는 보편적 정신 자세가 될 소지 가 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번제 사회가 지속의 왕국이 아닌 한, 국민생활이 영원토록 정지된=고정적 인 것일 수 없어, 낙관주의의 보편성도 얼마 후에는 한계에 부딪힌다. 사람들은 점점 주자학적인 연속적 사유 위에 안주할 수 없게 되었고, 정합성을 자랑하던 주자학의 고리는 하나씩 떨어져 나가게 된다. (137) 나는 주자학과 한국철학에 대해 잘 모르기때문에 함부로 평할 자격이 없다. 조금 들여다 보았다 고 할 정도도 못된다. 다만, 마루야마의 작업은 그것이 주자학이든 소라이학이든 노리나가학이든 대화가 능한 언어, 비교가능하고 설명가능한 언어, 논쟁가능한 언어로 이끌어냈다는 데서 탁월하다고 말하지 않 을 수 없다. 마루야마는 주자학을 서구 역사에 가져다 비추어 볼 때, 중세적으로 볼 것이냐, 근대적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에서 중세적으로 보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냈다고 할 수 있다. 1장의 말미에서 보이듯, 주자학은 스콜라,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은 후기-스콜라에 비견한다. 그는 당시 일본의 국민도덕론자들 이나 국체론자들 보다 주자학에 대한 해석을 더 과거로 끌어올렸다. 특히 주자학을 근대적이라고 볼 때, 나타나는 맹점, 사회경제적 구성과 조응하지 않으며, 정치-신학적 상상 역시 원시적이라는 점을 인식했 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하자면 당대의 사람들보다 전통 일본사상이 더 퇴행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논의는 일본의 주자학자들에게 향한다. 그들은 주자의 언설의 충실한 소개 이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루야마는 이노우에 데쓰지로에서 시작한다. 이노우에는 주자학파는 단조롭고, 동질적이며, 충실하게 주자의 학설을 받드는 주자의 정신적 노예라 천편일률적이라고 평가한다. 마루야마는 도쿠가 와 중기 이후 주자학이 고학파古学派와 국학자国学者들의 반격을 받으면서 타협적이고 절충적인 요소가 끼어들었지만, 초기는 순수했다고 평한다.(138)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는 전국시대 보편적 통속 도 덕으로 유행했던 천도天道라는 관념을 주자학의 리에 결합시킨다. (번역자는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道를 모두 길이라고 풀어서 번역하는데, 그게 틀렸다기 보다는 이해하는데 좀 번거로워서 여기서는 모두 도道로 쓰려 한다.) 이는 근세 초기 주자학의 독립과 일반화라는 객관적 사태에 의해 가능했다. 주자학 의 리가 가진 연속성을 천도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인욕은 거울의 때와 같은 것이라 떨쳐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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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이것은 일종의 낙관주의이며, 성인과 보통 사람이 이어진 실천도덕으로 연결되다. 동시에 인욕을 적으로 증오하는 엄격주의도 내포하고 있다.(139-140) 후지와라의 인용구를 보면, 천도는 천지간天地 間의 주인이라고 되어 있다. 일종의 인격신 적인 모습을 띤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에 이미 천도가 다양 한 종교와 민간신앙의 혼합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후지와라는 일본의 천도를 주자학으로 해석하는 것이 다. 그래서 일본이 주자학화되었을까? 아니면 주자학이 일본화되었을까? 현대 일본어에서는 아니 꽤나 오래전부터 お(御)天道様(오텐도사마)란 태양 또는 태양신을 가리키는 말이고, 때로는 아마테라스 오미 카미를 지칭하기도 한다. 당연히 천황제와도 이어지겠지. 이미 후지와라 세이카에서부터 주자학은 일본 적인 것이 아닐까. 마루야마도 그래서 그런 점들을 간과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그 가 나중에 인정하듯, 후지와라 세이카와 필담으로 주자학에 대해 논의한 인물이 바로 임진왜란에서 포로 로 잡혀온 조선의 주자학자 강항이다. 퇴계학과의 관련성이 여기에 있다. 하야시 라잔林羅山에 이르게 되면, 그의 말은 주자의 충실한 소개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는다. 태극 은 리이고, 천명인 성이 도리이며, 천리와 인욕은 대립투쟁성을 보여준다. 명명덕으로 교화도 가능하다. 개인의 도덕과 정치가 이어지는 낙관적인 사유방식을 보여준다.(141-143) 세이카・라잔의 경사파京師 派와 나란히 근세일본 주자학의 원류를 이루는 해남파海南派의 집대성자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는 너 무나 경건한 주자학자 였고, 자신의 고유한 성격도 작용하여, 주자의 엄격주의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 는 지경, 존양을 극도로 강조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책 읽지 못하게 했다. 안사이가 자기 학파의 수양강 령으로 중시한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은 완전히 전형적인 엄숙주의이다. 그의 집이 감옥이나 호랑이굴 같 다고 말한 제자도 있다. 인간의 자연성을 용인하는 쪽으로 주자학에 대한 반발이 생겨날 때, 구체적인 (잘못된) 사례로 언제나 안사이학파가 내세워졌다.(143-145) 그러나 하야시 라잔이 이에야스에게 벼 슬한 것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지 2년 후인 1605년이며, 후지와라 세이카는 1619년에 세상을 떠나 고, 이에미쓰家光 쇼군 때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가 개정되고, 참근교대参勤交代가 확립된 것은 1635년 으로 다이묘들 앞에서 이 법을 읽어내려간 사람이 라잔이었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1618년에 태어나 1645년을 전후해, 유자로서 두각을 드러냈고, 그가 요시카와 고레타루吉川惟足의 신도 학설을 잇는 것 은 1665년으로 주자학자로 20년간 활동했다. 히데타다秀忠의 아들로 쇼군을 보좌함 막부 정치에 권위 를 가졌던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1611~1672)도 안사이를 존경한 주자학자였다. 그러나 그와 비슷 한 시기에 야마가 소코(1622~1685)와 이토 진사이(1627~1705)에 의해 거의 동시에 송학으로부터 고학으로의 일대전환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오규 소라이가 1666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주자학적 사유 방식이 보편성을 자랑하던 시대를 17세기 초반부터 중반을 약간 넘은 때, 막부 권력이 확립되어 전국의 소요 사태가 고정화되어가는 과정과 병행하고 있다. 소라이가 고문사학古文辞学을 제창한 것은 교호 연 간(1716~1736)으로 소코와 진사이의 고학 전환으로부터 거의 반세기를 지나서였다. 이는 긴 기간은 아니지만, 간분(寛文1661~1673)에서 교호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에 이르는 사회와 사상의 변용은 그 사이의 겐로쿠(元禄, 1688~1704)가 보여준다. 주자학적 사유의 보편성도 급속한 추이를 보여 1666년 야마가 소코가 『聖敎要錄』을 간행하여 주자학을 비판하자, 아코赤穂에 유배되는데, 이때 그들은 사상계 에서 고립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호 연간의 소라이가 주자학을 철저하게 비판했지만, 문하에 인 재들이 모여들고, 명성을 얻었으며, 쇼군 요시무네의 신임을 얻었다. 이 반세기 동안 사조가 급템포로 변천되었다.(145-149) 마루야마의 논의는 17세기 전반기는 주자학의 시대, 17세기 후반에 새로운 흐 름이 나타나 18세기 초에는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었고, 그 사이에 커다란 사회적 사상적 변화가 있었다 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와타나베 히로시는 일본의 학계는 주자학이 관학이 아니고, 유자도 권 위가 없어서 오히려 다양한 견해가 발표될 수 있었고, 이미 도쿠가와 초창기부터 다양한 사조의 싹이 텄 고, 실은 거의 동시에 다양한 흐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토록 촘촘하게 붙어있는 변화의 흐름에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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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이 관학이 되어 권위를 가졌고, 주자학적 사유양식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데도 이런 주장에 내심 매력을 느끼는 것은 주자학이 관학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한국에 지금도 살고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동시에 그 정도로는 지배적이라고 말히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는 자신이 고학古学을 제창하게 된 사상적 계기를 『배소잔필配所 殘筆』에서 성인의 학은 실천에 옮겨야 하며, 공부, 지경, 정좌는 잡학이라고 말한다. 소코가 송학에 가진 불만은 실천도덕의 방법이었다. 그는 리의 초월적・형이상학적 측면을 부정하고, 사물 그 자체에 가까이 갈 것을 주장한다. 지경을 근본으로 삼아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면, 눌리고 막힐 뿐 아니라 좁고 얕게 된 다.迫塞狹淺. 고요함과 함께 움직임에 나아가 공부해야 한다. 이것이 격물이다. 주자학 격물의 정적=관 조적 성격을 밀어내고 즉물성Sachlichkeit를 밀고나가려 했다. 그는 성선을 미혹이라하며, 선악은 선의 동태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선악은 본연이 아닌 기질의 성의 작용이다. 도덕적 수련은 밑바탕下地에 지 나지 않으니 이로서 성인이나 천지에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라하여, 송학의 낙관주의의 안이함을 경계하 고, 배움과 가르치는 동적인 실천과 역행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자학적 인성론의 규범성과 자연성의 연 속이 단절되어 규범주의는 스스로를 순화純化시키려 한다. 소코에게 이는 무사도의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본래의 유교의 윤리적 순화純化는 진사이. 규범성의 족쇄를 풀게 된 자연주의도 독자화된다. 이 점이 소라이와 연관되어 주목해야 할 점이다. 그의 사회적 정치적 관심은 송학의 도학적 합리주의 비판 을 밀고나가 성과를 얻게 되었다.(150-154) 먼저 인간의 情欲은 적이 아니다. 엄격주의적인 태도는 거 부되고, 동적=실천적 입장에서 욕망은 모든 행위의, 선한 행위의 기초이다. 거부해야 할 것은 욕망이 아 니라 미혹됨惑이며 이는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過不及이다. 인욕은 선악과 모든 행위의 기초이며, 인욕을 떠난 천리는 부정된다. 기준은 인간의 본성 바깥, 즉 예악에서 구해야 한다. 성인의 가르침은 예악이라 하여, 소라이를 연상시킨다. 물론 아직 예가 자연과 연속성을 완전히 끊어버린 인위적-사회적 제도라고 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의 과불급을 제어하는 것이 예라고 하여 인간의 성에 대해 외부적 =객관적인 것이라 생각하여, 소라이에 있어 규범의 외면화를 향한 결정적인 한 걸음이었다. 규범과 인 간의 성性의 연속성이 분해되기 시작하자 개인의 수양과 정치의 고리도 느슨해 진다. 수신 만으로 천하 를 논하는 것에 충분하지 않다고 하여 정치적 계기의 독자화를 향한 빛이 보인다. 수신은 근본, 기틀, 시 작에 불과하다. 이적의 재앙으로 남송는 쇠약해졌다. 백성의 교화는 예악형정의 객관적인 제도를 매개로 하고, 율령격식을 중시하고 있다. 이미 소라이에 가깝다. 천하는 일체이기는 하나 많은 등급으로 나뉘어 일심으로 다스릴 수 없고, 정치적 통일은 대립을 통해 만들어져야할 통합이기에 수신과는 원리가 다르 다. 정치의 고유법칙성에 대해 어느 정도의 통찰을 하면서 정치의 비합리적인 모멘트를 인식한다. 즉 세, 시세 같은 것인데. 예를 들면 술이나 담배의 금지는 실패한다는 것처럼. 풍속의 교화에서 엄숙주의 를 택하는 것은 인간의 정을 모르는 속된 유학자의 견해로, 송유의 신민 新民같은 도학적 합리주의를 비 판한다.(154-159) 마루야마는 야마가 소코에게서 실천도덕론의 변화를 규범성과 자연성의 연속의 분 리에서 파악한다.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제도는 외부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등, 주자학적 연 속성은 해체의 길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해체의 과정에서 정치적인 것이 발견되기 시작한다고 평가한 다. 이 과정에서 낙관주의와 엄격주의의 연계 역시 무너진다고 본다. 야마가 소코가 주자학의 규범-자연의 연속적 구상의 분해과정에서 자연의 독자화에 의해 인욕의 소극성 을 적극적인 것으로 바꾸고 그런 방향에서 송학의 합리주의를 비판했다면,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1627~1705)는 규범성을 밀고나가 유교 윤리사상에서 순화純化를 시도하고, 원시유교로 되돌아갈 것 을 주장했다. 교토의 재목상 가문에서 태어나 일생 민간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도를 주장했던 순수 한 선비로, 소코의 송학 비판이 사회적・정치적 면에서 성과가 있었다면, 철학적 입장의 해부에는 진사 이였다.(159-160) 진사이는 천도天道, 인도人道, 천명天命, 리理, 인의예지仁義禮智, 성性과 같은 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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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그는 유교를 관조성에로의 타락에서 구제하여 실천윤리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 로 주자학의 연속적 사유의 분해를 촉진시키고, 자신과 대척적인 소라이학의 성립을 직전까지 준비하게 된다. 천도와 인도는 섞어서는 안된다. 음양은 천도이고, 인의는 인도라 하며, 우주론을 인성론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진사이의 우주론은 바이탈리즘적인 원기론이며, 동태적 자연관으로 리의 우위를 부정하며, 리는 기 안의 조리條理라고 한다. 진사이의 리는 천인天人의 연쇄가 절단되고, 물리物理에 한정되어 있 다. 리는 사물, 성은 사람, 명은 하늘에 속하는 것이라하여, 리의 무제한적 확장에 반대한다. 리의 논리 적 우위를 시간적 우위로 혼동하지 않고, 가치적 우위를 초래할까 염려했다. 원기의 더 궁극적 근원을 더 비합리적인 천명 天命에서 구하게 된다. 송학의 천명은 천리, 천도와 등치되고, 인성人性과 이어져 있으며, 범신론적이다. 진사이의 천명은 천도와도 인성과도 완전히 구분된다. 진사이는 천天을 인격적 으로 사유하며, 천명을 주재主宰라는 측면에서 말한다. 실질은 일리一理이다. 진사이의 천명 사상은 충 분하지 않다. 진사이의 천명사상은 사물의 시종, 과거 현재, 끝, 형상, 성정의 그러한 바의 까닭然る所以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으로 나아가며, 소라이학은 이를 발전시켜 주자학의 기초적 지반을 무너뜨렸다. (160-163) 그러나 진사이가 가장 중시한 것은 우주론, 천명론이 아닌 도덕론, 인도人道에 관한 주장이 었다. 그의 실천적 의욕은 유교 윤리의 이론 구성 내부로 들어가 이상주의적으로 순화純化시키려 했다. 인성도 넘어서는 것이다. 진사이에게 인의예지란 본연의 성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실현해야 할 것으로 부과된 이데아적 성격을 띄고 있다. 성은 사람이 없으면 없지만, 도道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본래 있는 것이다. 도는 자연계로부터 분리되고 인간의 성으로부터도 초월적이다.(164-165) 성선을 말 하는 맹자를 존숭하는 진사이는 사단四端을 인성에 속하게 했고, 이는 객관적=자립적 존재인 인간이 도 를 실현해야할 바탕으로 인성에 부여되어 있다. 인성이 선하기에 인의예지를 이룰 수 있다. 도는 당위적 이고 초월적이며, 성선은 방편적일 뿐이다. 마루야마는 차이만을 지적하는 이노우에와 달리 주자학의 분 해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165-166) 진사이는 소코와 같이 정욕情欲에 대한 관용도 엿보인다. 유교의 규범성을 순화純化시킨 진사이에게 이상해 보여도, 주자학적 사유의 분해과정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주자학 인성론에서 낙관주의 부정(규범의 자연주의적 제약으로부터의 순화)은 엄격주의의 파괴도 수반 하기 때문이다. 진사이는 부귀를 하찮게 보는 유학자들의 태도를 도를 모르는 것이라고 비판하는데, 이 는 노리나가 부귀와 영예를 바라지 않는 듯한 모습은 거짓이고, 실제 그렇다고 해도 정상이 아니라고 말 한 것과 비슷하다. 유학자인 진사이와 반유교주의자 노리나가도 주자학 사유의 분해과정에서 본다면 양 자간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167-168) 우주론에 있어서 불가지론적 견지에서 전개된 비합리주의가 반엄격주의적 입장에서 전면에 나선다. 모든 일을 리에 의해 판단하면 잔인하고 각박해진 다. 송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결여되어 있던 역사의식의 대두를 촉진시킨다. 삼대 이전은 천리이 나 삼대 이후로는 인욕이라는 주자의 말을 비판한다. 물론 『통감강목』 사관에 의존하고 있지만, 성인이 지금 태어나면 지금의 법今の法을 쓸 것이라며, 극단을 버리고, 시세를 따를 것이라며, 예악의 역사적 변천을 중시했다. 진사이는 정적=고정적 합리주의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도학자 진사이는 의외 로 도학적이 아니며, 고학파 진사이가 반드시 묵시론적 말세론자는 아니었다.(168-169) 진사이는 정치 론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았지만, 도덕과 정치의 연속성은 여기서도 분명하게 분해의 징후를 보여준다. 주자와 효종의 사례를 들어 정심성의正心誠意는 학자에게는 괜찮겠으나 백성과 호오好惡를 함께 해야하 는 군주의 치도治道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자로서 사심이 없다는 동기보다 민중의 복지 혜택이라는 사회적 성과를 더 중시한다. 이의 풍요로운 전개도 소라이학을 기다려야만 했지만, 연속적 사유구성의 분해가 막을 수 없는 흐림이 되었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한다.(169-171) 마루야 마 마사오의 논지 전개는 철저하게 주자학의 연속적 사유구성의 분해라는 입장이다. 여기서 주자학이 관 학으로서 권위를 갖지 못했다는 비판이 꼭 유효한 것만은 아니다. 하나의 체계로서의 주자학이 중세적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10/40 봉건사회의 특징이라면, 그것의 해체라는 일관된 방향은 그 자체로 사상적 발전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 1630~1714)은 1714년 『대의록大疑錄』으로 주자학에 대한 근본적 의혹을 표명했다. 그는 진사이와 안사이학파를 싸잡아 교토 학자의 분위기가 좋지 않고, 개인적 견해만을 내세 운다고 말했고, 다른 한편 고학파의 송학 비판에 끌려가는 자신을 어찌할 수 없었다. 우주론에서 엣켄은 주자의 리가 먼저가 기가 나중이라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리기는 하나의 사물이라 주장하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일원론으로 나가려 했다. 진사이와 마찬가지로 리의 실체성을 부정하게 된다. 전지(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을 구별하지 않고, 성을 기질로 일원화하며, 선악의 고정적=절대적 대립은 동적인 관계 로 상대화된다. 좋은 것은 성의 본래 모습이며, 나쁜 것은 성이 바뀌어 변한 모습이다. 엣켄은 크게 의심 하는데 머물러 있지만, 사유방법은 고학파에 의존하고 있다.(171-174) 성이 부정되고, 선악이 동태적 으로 파악되면, 엣켄을 엄격주의적 실천도덕에 대한 비판으로 이끌어 간다. 지경에만 몰두하면서, 완고 하고, 욕심많고, 속좁으며, 억압적이고, 엄격하고, 각박하다고 평한다. 엣켄은 지경대신 충신忠信을 내 세운다. 동시에 이익추구를 무시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평한다. 또한 지경이나 정좌를 비판하면서 도를 아는 것은 리를 궁구하여 일事에 이르는 것이라며 궁리를 중시한다. 이점은 고학파와 다르지만, 자연현 상에 대한 폭넓은 관심으로 경험적=실증적이다.(일본 본초학의 시조) 고례古禮에 사로잡혀서는 그때그 때의 적절함을 유지할 수 없다. 진사이의 역사의식과 통하는 무엇이 있다. 그는 또 한당 유학자들의 것 이 아닌 고주소古註疏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소라이학처럼 설設보다 문장의 참된 의미를 중시하는 것 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성인에 대해 신앙적인 태도를 보이고, 현인에 대해 비판적인데, 고학파의 모 든 학자에게도 공통적이었다. 현대적=평면적으로 보면 모순적이지만, 역사적=입체적으로 보면 주자학 적 사유의 붕괴과정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그런 단계였다. 일반인-현인-성인이라는 계층적 연속 의 분해는 한편으로는 성인의 절대화, 다른 한편으로는 중간층의 전락으로 나타났다.(174-178) 엣켄이 『대의록』을 간행하고 죽은 1714년, 오규 소라이는 『겐엔수필蘐園隨筆』을 간행한다. 소라이가 송학의 입장에서 1705년에 죽은 이토 진사이를 공격한 것이다. 이무렵 소라이는 진사이의 고학에 기울어져 있 었다고도 한다. 3년 후인 1717년 소라이학의 기초를 구성한 『변도弁道』와 『변명弁名』이 완성된다. 엣 켄은 주자학적 사유방식이 전면적으로 붕괴되는 시점 바로 그 앞에 서있었다.(178) 마루야마는 자신의 목표가 불쑥 솟아난 것처럼 보이는 소라이학의 성립도 맥락을 보면 그 기초가 근세 전기의 사상계 내에 서 준비되어 왔다는 점을 사유구조의 내부로부터 가능한ㅎ 한 명쾌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자신한다. 주자 학의 낙관주의적 연속적 사유는 도쿠가와 봉건사회 백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보편성을 상실해 버 리고 말았다. 고학파와 엣켄 그리고 소라이 사이에 결정적 비약이 있다. 이는 겐로쿠로부터 교호의 사회 적 변동을 고려해야 한다.(179) 어떤 의미에서 마루야마의 논리는 따라가다 보면 그 정치함에서 빠져나 오기가 어렵다. 연속과 단절을 논하는 그의 솜씨가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당시의 유학자들의 좌 절감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주자학의 붕괴와 의심이란 학자들의 좌절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통치 에 대한 학문을 습득하고서도 통치에 참여할 수 없는. 1장 3절 소라이학의 특질: 두개의 사례-소라이학의 정치성-방법론-천天의 개념-도道의 본질-도의 내 용-도의 근거-소라이학에 있어서 공・사의 분열-겐로쿠에서 교호에 이르는 사회정세-정치조직개혁론 소라이가 5대 쇼군 쓰나요시綱吉의 소바요닌側用人야나기자와 요시야스柳澤吉保의 가신으로 관여한 두 사건을 살펴보자. 첫째 생활고에 시달린 농민이 집과 논밭을 버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유랑길에 나섰다가 도중에 병이든 어머니를 버린 사건에 대해, 소라이는 다이칸代官과 군부교君奉行의 책임이며, 가로家老 의 책임이고, 그 윗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다른 유학자들이 송학적인 입장에서 농민의 주관적 동기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11/40 만 왈가왈부하고 있을 때, 소라이는 이를 객관적인 유형으로, 사회적 반복 가능성에 착안하여 그의 무죄 를 이끌어내고, 문제를 위정자의 정치적 책임으로 옮겼다.(180-183) 1702년 아코로시赤穂浪士의 사 건, 봉건적 주종관계와 막부 통일 정권의 정치적 입장이 맞부딪힌 사건으로, 유학자들은 의사義士들의 목숨을 살려주자는 견해였다. 물론 하야시가라고 해서 막부의 견해를 추인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음 과 법률을 나누어 주자학적 사유의 붕괴를 보여주었다. 소라이는 시종일관 의사들의 할복을 주장했다. 그들의 의는 사적인 것으로 공의公儀(막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나 그들의 충의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되므로 참수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론私論으로 공론公論을 해친다면 법도가 서지 않을 것, 즉 개인도덕을 정치적 결정까지 확장하는 것을 단호하게 부인하는 입장이었다. 실제 그의 주장처럼 처분되었다.(183-188) 두 사건에서 일관된 것은 정치적 사유의 우위이며, 모두 겐로쿠 시기 (1688~1704)에 일어난 것이다. 정치성의 우위는 소라이학의 일관된 특질이고, 『변도』와 『변명』에서 붕괴도리 지경에 처해 있는 유교를 정치화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재건하려 하였다.(188) 마루야마는 아코로시 사건으로 소라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라이는 처음부터 할복을 주장했다 고 하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소라이의 의견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오히려 주자학 자들이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된다. 이런 경우 할복시키는 것이 가장 일본적이다. 도쿠가와 초기였다면, 아마 전원 참수했을 것이다. 뒤에서 말하는 공과 사 구분과 맞추어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큰 것에 대해 작은 것을 사로 여기고, 작은 것에 대해 큰 것을 공으로 여기는 전형적으로 일본적인 논리에 가깝다. 과연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일까. 고문사학古文辞学은 소라이학의 출발점이자 방법론이다. 성인의 도를 이해할면 옛날의 말古文辞을 알아 야 한다. 말은 역사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진사이가 원시유교로 되돌아가려는 의도는 옳았으나 언어의 변천을 몰랐기에 주관적 왜곡에 빠지고 말았다. 도의 깊은 곳에 있는 말辞(ことば)과 말을 통해 표현되 는 일事(こと)가 중요한 것이다. sollen을 말하기 전에 sein을 알아야 한다. 학문의 요체는 말과 일의 차 원에서 구해야 한다. sein이란 당우 삼대에 있었던 것das Gewesen이다. 소라이에게는 제도와 문물을 서술한 ‘육경’이 고전으로서 중심이다. 육경은 곧 物(사물・사실)이고, 『예기』, 『논어』는 義(의미)이다. 의는 물에 속하고, 그 후에 도가 정해진다. 물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데서 혼란이 생겨났다. 육경을 세밀 하게 읽어 말의 용법을 익히고, 고대의 제도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 논어로 나가야 공자의 참뜻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소라이는 『맹자』 이하의 경전은 상대적 가치만 인정했다. 다른 제자백가와의 논쟁 즉, 시대를 구하기 위한 것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런 개념은 역사적=구체적 연관성과 떼어놓을 수 없다. 종래의 무비판적으로 절대시되던 주장과 개념의 역사적 배경을 지적하고 가치를 상대화한 소라이의 사 고방식은 이데올로기론이라 할 수 있다. 정치화적인 입장이 방법론 차원에서 표현된 것이다.(189-191) 송학의 『대학』, 『중용』 중심주의는 진사이학의 『논어』, 『맹자』 중심주의를 거쳐 소라이학의 육경중심주 의로 옮아갔다. 근본경전이 시대적으로 소급되는 것은 한편으로 성인과 일반인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절 대화하는 과정과 다른 한편 리학理学에서 고의학古義学으고 다시 고문사학古文辞学으로 라는 주관성 즉 소라이의 사지私智의 배제과정과 상응하고 있다.(192) 고문사학이란 방법론이다. 진사이가 고의 즉, 경전의 원래 뜻을 찾겠다고 했다면, 소라이는 언어가 변했 기에 원래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야기인 즉은 둘다 방법론적으로 매우 올바른 주장이지만, 그 것을 방법론적으로 관철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또 문제다. 진사이는 옛날 식으로 글을 지었지만, 그것을 훗날 와타나베 히로시는 조닌들이 사용하는 일상언어의 뜻이라고 말했다. 소라이의 이 독법이야 말로, 훗날 노리나가의 『고사기』 독법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일단 이런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을 기 록해 두자. 그러나 원시유교 즉, 원형에서 답을 찾으려는 방식은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어디서든 누구든 시도하는 방식이다.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12/40 소라이의 도란 오로지 인간의 규범이지 자연법칙은 아니다. 천도天道나 지도地道는 어디까지나 성인의 도聖人の道에서 유추해낸 것이다. 진사이는 천도와 인도의 연속성을 분해하여 우주론과 윤리학을 독자 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소라이는 천도는 인도를 단순하게 유추한 것으로 천도론은 그 모습을 감추고, 천天은 알 수 없고, 신비한 것이라는 점이다. 천은 앎의 대상이 아닌 공경의 대상이다. 인격적인 의미에 서 천天개념 즉 천명론이 소라이학에 만연하게 된다. 천즉리天卽理라고 말한 것은 후대 학자들의 주관적 생각이다. 천天이 마음을 가지는 지 여부는 인간 이성에서 논의대상이 될 수 없다. 천天과 인人 사이에 깊은 단절이 있다. 천의 인격성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다. 송유의 리선기후설이나 소코・진사이의 기일 원설은 모두 사지私智를 남용한 결과이며, 인륜人倫으로 천륜天倫을 헤아리는 불손함이다. 송학의 합리 주의는 유교 내부에서 비합리주의로 바뀐다.(192-195) 소라이의 도는 성인의 도이며,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도로, 선왕의 도先王の道이며, 천하를 평온하게 하는 도, 천명을 공경하는 것이다. 성인의 도, 선왕의 도의 본질은 정치성이다. 소라이학에서는 개인도덕과 정치의 연속적 사유를 통열하게 부인한다. 지경, 주경, 수신 등 유학자들의 논의는 중에게나 어울리는 것이고, 성인의 도는 정도政道와 완전히 다 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성인의 도라고 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면 된다는 주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단순한 주장이며, 국가를 다스리는 도를 알아야 한다. 소라이는 개인도덕과 정치가 연결되지 않 는 예들을 들고 있으며, 나아가 개인도덕을 정치의 수단으로 삼는다. 나아가 군주는 안민安民이란 정치 적 목적을 위해서는 도리에 어긋나도 무방하다. 이는 유교도덕의 ‘가치의 전환’이다. 마키아벨리의 『군 주론』을 떠올릴 수 있다. 소라이학에 있어 정치적 사유의 도학적 제약이 배제된 이상, 소라이학을 일본 도쿠가와 봉건제하에서 정치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195-198) 도가 치국평천하를 본질로 하고 있다면 도의 내용은 예악형정을 포함하여 선왕이 만든 것을 모두 합하여 말한다. 도란 첫째 보편적=포괄적인 존재이다. 도는 알기 어렵다. 성인의 도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상과 대립하지 않으며, 일체를 포 괄하고 있다. (소라이는 늘 자신의 이론을 다른 주장에서 엄격하게 구별하면서도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 다) 둘째, 도란 객관적=구체적인 것이다. 예악형정이란 일事과 말辞인 당우삼대의 제도와 문물의 총칭 이다. 역사의 산물이지만, 초시대적 의미를 가진다. 객관적이므로 내재성이 없다. 마음을 따지지 않고, 요堯의 옷을 입고, 요의 말을 하고, 요의 행동을 하면 요堯다. 소코에서 진사이로 진행되어 온 도의 객관 화과정은 소라이학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도는 객관적이면서 구체적인 존재이므로 진사이처럼 당위나 초월적인 이데아일 수 없다. 소라이는 진사이의 도덕의 공허함을 지적한다. 진사이가 주자와 다른 것은 기른 후에 완전해 지는가 아니면 성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인가일 뿐이다. 진사이의 덕은 아직 이루어지 지 않은 것이다. 소라이가 추구했던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도 따위와 같은 추상적인 이념 이른바 Moralitätrk 아니라 예악형정으로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Sittlichkeit였다.(198-201) 소라이에 따르면 맹자의 성선도 순자의 성악도 모두 논쟁적 개념이다. 이를 절대화하면 안된다. 문제는 성의 선악이 아닌 선왕의 도을 믿느냐의 여부이다. 성의 선악에 대한 논의는 모두 쓸모없는 주장들로 일축되었고, 소라이 는 인간의 성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테제를 내세웠다. 송학에서는 본연지성은 숙연부동이라 기질을 변화 시켜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고, 소코・진사이・엣켄은 성의 존재를 부정하고 기질의 변화만을 주 장했다. 소라이는 기질의 성은 아프리오리한 것으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송학의 낙관주의가 전복 되어 정반대인 비관주의가 되었다. 성인은 배워서는 이를 수 없다. 송학과 성악론은 이론적으로 대립하 나 실천적으로(예악) 모두 엄격주의이다. 이는 성인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소라이의 비관주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천명에 대해 무력하고, 도의 포괄성=보편성에 대해 부분성=특수성의 한계에 있다. 여기서 오히려 인간의 자연성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생겨난다. 소라이의 도는 사회적인 것이라 개인이 실현할 수 없고, 억만인이 전체로 실현하는 것이며, 예악형정으로 구체화된 존재이다. 따라서 기질변화 는 불필요 아니 해롭다. 쌀과 콩은 쌀과 콩으로써 쓸모가 있다. 소라이는 세계라는 전체성에서 문제를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13/40 

고찰한다. 송유와 진사이의 현실과 목표의 관계는 소라이에 있어서 부분과 전체로 바뀌었다. 부분은 특 수성을 지킴으로 전체의 부분이 된다. 각자는 천성적으로 다른 기질 그대로 개성을 발휘하는데 노력하는 것이 좋다. 특수성을 함양하는 것을 移(옮긴다)라고 표현한다. 성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옮겨야 한 다. 소라이는 양적인 변화를 주장한다. 길러져서養 재목材이 된다. 사람이 천성의 기질을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을 소라이는 덕이라고 불렀다. 진사이에서 도와 같았던 덕은 소라이에게서 도에서 분리되었 다. 덕은 특수적=부분적인 개인으로 하여금 보편적=전체적 도에 참여하는 매개체가 된다. 도는 큰 것이 다. 각각 그 성이 가까운 곳에 따라 잘 길러서 그 덕을 이루게 해야 한다. 소라이는 인의예지를 분리하여 예와 의는 도로 인과 지를 덕의 이름名으로 삼았다. 인의 본질은 안민安民이며 지의 본질은 지인知人이 다. 이것은 정치적 지배자의 덕이다. 소라이의 덕이란 좁은 의미의 덕이 아니라 재목材이라 불리는 것처 럼 특수한 기능도 포괄하여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에 가까운 기능을 함양하는 자기 방식으로 보편적인 도에 참여하는 것이다. 군주는 특수한 기능을 기른 자를 관료로 발탁한다. 사, 농, 공, 상은 맡은 일을 하 여서 서로 돕는다. 세상에 가득찬 사람은 모두 군주가 백성의 부모가 되도록 돕는 관리役人, 모든 인민 은 관리이다. (202~207) 마루야마가 소라이에게서 일관되게 발견하는 것은 분리 혹은 연속의 해체이다. 그는 먼저 우주론과 인간 론 사이의 해체가 시도되었다고 본다. 주자학에서 우주와 자연을 뜻하는 천도와 지도를 인도에서 분리한 다. 소라이는 그런 것들은 인도에서 유추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천은 천명이라는 이름으로 숭배와 신앙 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인도 즉 인간에게서 규범이 등장할 때 둘로 나눠진다. 하나는 개인도덕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 또는 통치이론이다. 물론 주자학에서는 이 둘이 같은 원리로 이루어진다. 몸과 마음에 서 출발해서 평천하로 간다고 말한다. 소라이에게서는 이 둘의 연계가 끊겨있다. 도란 객관적이고 구체 적인 것이며, 정치의 원칙이다. 개인과 사회의 원리가 분리되면서, 정치의 발견 즉 정치의 독립이 이루 어진다. 그렇다면 개인의 성은 그것은 자질을 기르는 일이고, 사회와 국가 전체로 보았을 때, 어딘가에 서 쓰임새를 찾는 일이다. 모두가 통치에 참여한다. 그러나 정치는 성인의 도인 동시에 구체적인 제도의 총체이다. 즉, 제도란 각자에게 부여된 자리를 만드는 것이고, 각자는 거기서 역할을 하는 일이다. 이를 마키아벨리에게 비추어서 정치의 발견이라고 정의한다. 거기까지는 좋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천명 은 신앙의 대상이다. 그렇게 해결해 버린다. 자연에 대해서는 더욱 말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성인 조차 신앙 또는 믿음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신앙 또는 믿음에 가까운 존재로 처리된 후 논리적 설명을 포기한다. 이것은 지나친 편의주의가 아닐까? 천명도 신앙의 대상이고, 성인도 신앙의 대 상이라면, 과연 정치는 독립한 것인가? 그저 현실 긍정적인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현실을 만들겠다는 의 도인가? 이 도를 도답게 만드는 근거는 당우삼대의 문물제도이다. 역사적, 지역적으로 한정된 도가 시공간을 초 월한 초월한 절대적 보편타상을 지니게 되는가. 송학이 근거를 태극=리는 배제되었다. 소라이는 리를 인식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곳에 둔다. 진사이는 도를 자족적인 가치로 생각했다. 진사이에게 인의예 지는 선험적인 절대성을 지니며, 진사이의 도는 송학에 있어서 천도와의 연속성이 부정되고, 인륜성이 강조된 점에서 비자연적인 것이지만, 경험적 인간행위에 대해 아프리오리한 자족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오히려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도란 자연히 그런 것이다. 소라이는 진사이의 이런 이상주의(관념론) 을 실질이 없다고 비판하고, 도의 구체적인 실증으로 당우삼대의 제도문울에 이르렀다. 이름에서 실질로 주관적 도덕에서 갠관적 인륜으로라는 소라이의 공작을 위해, 도의 배후에 그 도를 창조한 절대적 인격 을 두고, 그 인격적 실재에 도의 가치성을 의거하게 해야 한다. 소라이학의 선왕 도는 성인은 이런 궁극 적인 실재이다.(209-211) 도는 성인聖人이 창조한 것이고 성인은 도를 창조한 것이다. 복희伏羲는 윤 리, 신농神農은 경작, 황제黃帝는 건축과 길쌈,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은 예악형정을 체계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14/40 화한 당우삼대唐虞三代의 군주로 성인이다. 고대의 정치적 군주로 선왕先王이다. 성인은 도덕의 구현자 가 아니라 예악을 만든 사람이다. 소라이 성인 개념의 정치적 우위를 볼 수 있다. 도道란 성인 내지 선왕 의 작위作為라는 데 궁극적인 근거가 있다. 송유의 도가 천지자연 또는 사물의 리라는 주장은 선왕을 믿 지 않고, 자신을 믿기에 자신의 생각을 성인의 길이라 억지주장하는 것이다. 학자들의 선왕의 길을 평가 해서는 안되며, 선왕의 길을 따르는 것이 바름正이고 따르지 않는 것이 사악함邪이다. 성인을 이해가 되 지 않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믿어야 한다. 일종의 종교적 절대자로 천天이 피안적 신앙의 대상이듯이, 오제五帝를 천天으로 간주한다. 즉 성인은 인격적 천으로 이어지는데, 성인의 이런 피안성Jenseitigkeit 은 소라이학에서 도의 보편타당성을 최후로 보증하는 것이다.(211-214) 당우삼대라는 시공간적으로 제약된 제도에서 도를 구한 소라이학이 어째서 비역사적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고, 역사의식이 고양되었 는가. 당우삼대라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약된 제도는 피안적인 성격을 가진 성인이 만들었기 때문 에 절대적이라는 기본명제가 역사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첫째, 소극적으로 피안성을 상실한 후에 있어서 의 모든 제도 예악의 상대성, 그 시대적=지역적인 제약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타난다. 소라이는 명율을 강의할 때,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법이므로 현재의 법률을 훼손시키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았다고 한다. 둘째 도는 피안성에 있어서 절대적이기에 구체적=경험적 구속력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태로만 드러난 다. 고문사학은 sollen보다 sein이다. 당우삼대의 제도・문물은 sein 그 자체로 피안적 성인에 의해 부 여된 것이지 규범적 의미로 절대화된 것은 아니다. 도가 sollen으로 작용할 때, 구체적 상황에 맞는 형태 를 취할 수 있다. 소라이는 예를 만드는 사람은 삼대의 성인이며, 전해 주는 사람은 공자이고, 예를 실천 하는 사람은 후세 사람이 선왕의 예에 비추어 짐작하여 인정에 들어맞는 것을 구해야 한다. 일본의 신도 도 당우삼대의 고도古道라고, 일본에 태어나 일본의 신을 공경하는 것이 성인의 길의 뜻이라 말한다. 소 라이학은 역사적 현실에 맹목적인 공식주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214-217) 아직까지 도를 천지 자연 즉 비인격적 이데아에 근거를 두고, 『통감강목』을 역사책의 전형으로 보는 진사이와 엣켄과 달리 소라이는 도 자체의 궁극성을 부정하고, 고대 중국에 각기 단 한번 출현한 인격에 의거하고, 그 인격을 피안적 존재로 끌어올림으로써 차안적diessetig 역사는 고정적 기준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게 전개하 게 된다. 소라이는 모든 제도를 만든 사람과 특수성을 말하면서, 『통감강목』 류의 권선징악 사관을 폐기 한다. 천지는 살아있는 것活物이다. 그래서 사실만을 다루는 『자치통감』 쪽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한다. 그가 역사에서 추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소라이는 유교의 고전으로 육경에 대해 주관적 요소가 끼어드 는 것을 배격했다. 성인과 성인의 도를 종교적 신앙으로 절대화한 후, 다른 한편 실증적인 정신은 유교 고전의 범위를 넘어 모든 역사적 사상으로 확대되었다. 무엇보다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문장도 정치 도 경학도, 시대가 바뀌면 언어와 제도도 바뀐다. 육경에 대해 辞언어와 事제도를 추구하는 고문사학을 적용시킨다. 소라이에게 학문은 시서예악을 배우는 것이므로, 권형權衡이나 도리道理라는 속박에서 벗 어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넓게 무엇이든 받아들여 지식을 넓히는 것이다. 소라이의 저작 목록 은 백과사전 같다. 성인을 피안적 존재로 고양시켜 막고 있는 둑이 무너지게 된 개체성에 대한 관심은 성난 파도처럼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성인의 도를 모든 대립으로부터 넘어서게 한 것은 그의 학문적 대 상을 직접 치국평천하를 추구하는 경학 방면과, 견문이 넓고 사실을 행하며 넓게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누게 되었다. 마루야마는 이를 공적인 측면과 사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본다.(217-221) 마 루야마의 소라이 분석은 이렇다. 도란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만일 도가 현실에 시행 되거나 현실 해석에 실패한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니 도를 보편타당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도를 차 안 혹은 내세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근거는 성인이 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도가 특별한 것인 만큼 이 성인도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의 신적 존재 또는 신앙의 대상이다. 그들은 특 별한 사람들고, 두번 다시 존재할 수 없으며 신적 존재이다. 그렇게 분리시키고 나서 소라이는 이 세계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15/40 에 속한 문제들은 이런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통감강목 류의 역사관을 배격한다. 여 기서 자인과 졸렌이 등장한다. 성인이 만든 당우삼대의 도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그 시대의 sein에 따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한 것은 이 시대의 sein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 이 일본의 신을 섬기는 신도다. 소라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가장 절대적인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으로 평가하거나 해결방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이니 만큼 있는 그대로 둔 다. 그런 절대는 재현불가능하다. 현실에서는 현실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을 가진 성인의 도를 폐기해가는 절차다. 성인의 도를 배우지만, 현실을 알지 못하면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현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현실을 알아야 하는 부분에서 현실의 정치와 제도를 논하지 않 고, 백과사전적으로 넓은 지식으로 빠져나간다. 다음 절에서 더 명료해 질 것이지만, 이런 식의 분해과 정 또는 변환이 왜 필요했는지는 실은 분명하다. 현실정치에 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에 개 입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실을 외면하면, 초월의 영역으로 넘어가 탐구하거나 개인의 내면으로 후퇴하게 된다. 헬레니즘 로마의 스토아철학은 공적 장에서 후퇴하여 철저하게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마루야마가 소라이에게서 발견한 것은 치국평천하에 대한 외면이 아닐까? 그것을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직면하지 못했다. 당시의 유자들 이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을 직면하면, 도쿠가와 일본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주 자학이라는 전제가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앙시아 레짐을 해체하기 위해 앙시앙 레짐을 구축해야 했 다. 마루야마는 소라이에게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을 사용한다. 그 출발점은 아코의사赤穂義士 사 건에서 소라이의 『의율서擬律書』이다. 의사들이 죽은 군주의 원수를 갚은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가 ‘사’이며, 국가적 견지에서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공’이라 했다. 또 하나 『정담政談』에서 막부公儀에 대 한 충절로 행해진 고발은 포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발을 겁쟁이라고 하는 것은 사私의 의리이고, 공公 적인 일에 해를 끼치면 안된다. 두 사례는 ‘공’이란 정치적=사회적=대외적인 것이고, ‘사’란 개인적=내 면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으며, 오늘날의 공・사의 구별과 거의 같다. 이념형적인 견지에서 비근대적인, 전근대적인 사유는 이런 의미의 공・사의 대립을 모른다. 이는 전근대적 사회구성이 공・사분열을 가지 지 못한 것과 상응한다. 정치적인 지배관계가 사적인 경제관계와 서로 얽혀있다. 통치자의 재정 지출과 개인 소비가 뒤섞여 있고, 행정 사무는 주종관계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공법은 공법이자 사법이며, 사법은 사법이자 공법이다. 문화적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의 독립, 사적인 영역의 해방이야 말로 근대적 인 것의 중요한 징표다. 이와는 다른 의미로 전근대적 사유에서 공・사의 구별이 있기는 하다. 공・사의 구별은 영역에서 구하지 않고, 윤리적 가치로서 추구하는 것이다. 공이란 선이며, 사란 악과 같은 의미 다. 소라이에게 있어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보다 앞서 있다. 정치성의 우위가 있다. 사적인 것 자체를 배 격하지는 않는다. 아코 의사들의 참수를 반대하고 할복하도록 해야한 것은 사적인 의가 본래의 영역을 넘어서 공적인 법을 침범하기 이전까지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의무의 충돌Pflichtkonflikt이 일어났을 때, 후자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영역의 접촉이다. 그는 『변명』 에서 공은 사의 반대로 많은 사람이 더불어 하는 것이 공이고, 자기 혼자 오로지 하는 것을 사라고 한다. 공과 사가 각각 그 자리所가 있다. 공적인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윗사람이 되는 도이기 때문이다. 공 의 예로 ‘왕도’와 ‘평천하’를 사의 예로 부자상은父子相隱을 들고 있다. 주자학의 공은 천리天理이며 사 는 인욕人欲과 같아 사私는 부정되어야 할 악惡이다. 도쿠가와 초기 주자학자, 하야시 라잔은 천리天理 는 공公이고 공은 의義이며 사私는 인욕人欲이라고 이런 논의를 반복한다.(221-224) 마루야마의 주장을 따라가면 이런 것이다. 서양 근대에는 공사의 구별이 있고, 전근대 또는 비근대에는 공사가 뒤섞여 있다. 그런데 소라이는 공과 사를 구별한다. 공이란 정치적=사회적=대외적인 것이고 사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16/40 란 개인적=내면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이 충돌할 때, 공 즉 정치적이 우위에 서야 한다. 그렇다면 주 자학은 주자학의 경우는 공과 사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는 부정되어야 할 악으로 공은 천리로 해석된다. 이것은 내 해석이지만, 그렇다면 정치에도 공・사가 있을 수 있고, 개인적인 것에도 공・사가 있을 수 있다. 주자학이나 유학이 전근대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공・사의 구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 른 축으로 가로지른다. 이때 이 구별은 정치성을 분리해애는 구별이 아니라. 도덕적인 분기선이자, 선악 의 분기선이다. 동양까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의 정치적 성향 속에서 도덕적 선과 정치적 선이 교차하 는 지점에서 가장 큰 지지 내지 환호를 이끌어내는 점을 상기해 보라. 마루야마가 발견한 것은 실제로 이렇게 가로지르는 지점이 다르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일본에서 말하는 공과 사 특히 おおやけ로서 의 공公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공과는 또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사의 집안에서 다이묘의 가문으로 그리고 쇼군의 막부로 작은 상자가 들어있는 더 큰 상자가 공 즉 おおやけ다.(와타나베 히로 시, 『일본정치사상사』, 70-71) 이렇게 보면, 아코로시 사건 등 마루야마가 들고 있는 소라이의 사례가 쉽게 이해된다. 마루야마의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라이학에 있어서 공・사의 분기는 소라이의 사유방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성인의 도는 주로 공적 인 측면에 있고, 치국평천하를 본질로 하는 도가 무리와 함께 하는 공적인 영역에 속한다. 선왕의 도는 외재적이고 대사회적이다. 반면, 군자도 가지는 사적인 것에 신독愼獨이나 사私의 의리義理가 속한다. 그러나 소라이는 개인도덕을 거의 논의하지 않는다. 예악이 개인적 내면성을 규제할 때는 번거롭고 귀찮 은 일이나 국가적으로는 중요한 일이다. 오로지 정치적인 성격을 띤 것이다. 도의 외재화에 의해 빈 공 간이 되어버린 개인적=내면적 영역은 주자학의 도학적 합리주의에 의해 억압된 인간의 자연적 성정이 채우게 된다. 규범과 자연의 연속적 과정의 분해과정은 소라이학에 이르러 규범道의 공적=정치적인 것 으로까지 승화됨으로써 사적=내면적 생활의 모든 엄격주의로부터 해방이 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소라 이는 제자백가 류의 기예를 갖춘 유학자가 될지언정 도학선생이 되지는 말라 말했다. 『통감강목』은 엄 격주의적 실천적 영향 때문에 거부당하고 있다. 사람의 됨됨이가 나쁘게 된다. 송학의 나쁜 영향의 예는 야마자키 안사이와 그의 학파였다. 아사미 같은 경우도 자신의 허물이 아닌 학파의 편협함이다. 인간의 성은 바꿀 수 없다고, 개성德을 키워줄 을 주장한 그의 인성론은 그대로 실천에 옮겨져 겐엔蘐園 문하에 는 다양한 준재들이 모여들어 백화요란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고, 소라이학에 있어서 엄격주의로부터 해방된 자연적인 성정은 풍아문재風雅文才로 흘러 겐엔학풍은 문예제일주의로 불리기도 했다. 정치와 역사에서 도학적 제약을 배격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예도 윤리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소라 이는 시를 권선징악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시경에는 음란한 시도 많다, 시는 단순히 시라고 보는 것 이 좋다. 시는 일본의 노래歌와 같은 것이다. 무릇 성인의 도라는 궁극적 제약은 벗어날 수 없다. 인정은 선왕의 도로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일본의 와카和歌가 중국의 시와 분위기가 다른 것은 일본은 성 인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지막 제약까지 배제하는 것은 국학에 이르러서로 예술을 위한 예 술이라는 입장이 확립되었다. 중국의 시나 일본의 와카는 모두 정情이 내부에서 일어나 말로 나타나고 소리를 내는 것으로 수기치인이나 치국평천화와 무관하다. 그는 유교적 예술관의 한계선에 서있다 할 수 있고, 문예를 사적인 영역에 귀속시키고 있다.(225-229) 마루야마가 발견한 소라이의 공・사의 분기는 소라이의 사유양식에 있다. 왜 이런 전제를 내걸었을까? 그것은 서구 근대의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는 것은 영역, 즉 공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사 적인 공간 그것은 집 또는 가정 즉 부르주아적 사생활이다. 그러나 소라이가 분리해낸 것은 사적 공간이 나 사생활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에서 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도덕 즉 내면적 사유의 영역이 다. 우선 그는 내면적 사유와 외부의 정치를 분리한다. 이것을 분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앞에서도 보였지만, 당시에 유자(유학자)가 막부든 다이묘든 특별히 윗사람의 허락에 의하지 않고서는 정치에 개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17/40 

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혹은 개입한다고 해도 그가 타고난 무사 가문의 위치에 의해서이지, 유학자여서 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유와 정치가 연결되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된다. 또는 위험인물이 된다. 정치와 사 유를 분리시켜야 한다. 그런데 주자학은 둘을 연결해서 정치를 위해서 내면의 도덕을 강제했다. 그러나 정치는 유학자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적인 내면적 도덕을 닦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면 의 도덕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이상,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훗날 소라이의 문인들 중 상당수가 탐미적으로 변해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라이의 공・ 사의 분리란 공에 대한 포기에 해당한다. 공을 포기하고 사를 살려내는 것이다. 소라이에게는 공에 개입 할 장치나 방법이 없다. 그것은 오직 윗사람의 호의에 힘입어서만 가능하다. 자신이 쇼군 요시무네의 이 야기상대가 되었듯이. 그러나 윗사람이 이를 정책에 반영하지 않는다고 해도 윗사람을 강제할 방법은 없 다. 오직 한탄만이 가능할 따름이다. 소라이학파가 시문에 빠져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유학 자가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던 것은 소라이학 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라이는 발언권마저 빼 앗아 버린다. 그 자세한 이유는 다음에 나올 것이다. 본래의 경학과 견문이 넓고 사실을 행하는 학문이 나뉘어지는 것은 소라이학을 꿰뚫고 있는 공・사의 양 면성이 그의 학문론에서 표현된 것이며, 학문의 공적 영역은 오로지 육경에 나타난 이른바 좁은 의미의 성인의 도에 독점되고 있다. 여기에 주자, 양명, 진사이, 노장, 불교 등 비非치국평천하적인 사상의 혼입 이 엄밀히 배제되고 있다. 공적인 영역에서 따돌림받은 다른 모든 사상들은 사적인 영역에서 모두 그 존 립이 허용되고 있다. 석가의 도는 자신의 심신에 대한 것이지 천하국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불법은 성인의 도와 얽히지 않기에 개인적 영역에서 허용된다. 따라서 불법을 믿는 것과 성인의 도를 믿는 것은 동시에 허용된다. 각기 그 영역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라이학은 이단의 학문 송학과 철저한 대립 을 천명하고 있지만, 송유의 주장은 노장이나 불교의 주장 같이 귀한 생각이다.(229-230) 그런데 이 공적인 영역은 다시 성인의 도에 국한되게 된다. 정치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성인의 도뿐 이다. 치국평천하의 도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거꾸로 치국평천하에 해당하지 않는 심신에 대한 모든 주 장은 허용되고, 또 유용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때 주자학마저 인정된다. 주자학이 심신 수양에 집착하는 한 이것은 유용한 것이다. 성인의 도에 나서지만 않으면 된다. 다시 말하면 학자가 정치를 하 겠다고 나서지 않고, 현실 정치를 성인의 도를 들어서 왈가왈부만 하지 않는다면, 어떤 학문에서도 유용 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소라이를 정치의 발견자라고 할 때, 그는 어떤 정치를 발견한 것인가? 정치를 회 피하기 위해서 발견한 것인가? 게다가 주자학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주자학이 정치 영역에 영향력이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라이가 말하듯이 주자학 체계는 그렇게 빨리 수립되 었다가 그렇게 빨리 해체된 것인가?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유일하게 주자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한국 사회도 유교화되는데, 최소 200년에서 그 이상 걸렸다고 평가하는데.(『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 공・사의 분열은 학문적 대상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학문 그 자체의 성격에 스며든다. 성학聖学은 치국 평천하의 학이며, 정치적 지배자가 알아야 할 지식이다. 소라이는 무사의 무학을 탄식하고 있다. 장관奉 行이나 관리役人는 경대부卿大夫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사는 왕후경대부王侯卿大夫의 직에 나가 면서도 자신이 군자임을 모르고, 학문으로 재지才智를 넓히고, 국가는 문치文治함을 알지 못한다. 형벌 의 위세로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소라이는 『政談』에서 유자儒者를 에도에 거주하게 하고 하타 모토旗本에게 강의를 하고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학문은 치국평천하 를 할 때 공적이며, 학문을 하는 것은 사적이다. 학문은 막부公儀에서 일하는 것과 다르며, 어디까지나 내면의 깨달음内証이다. 학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유자들은 모든 인민이 관리라는 의미에서 학문을 통 해 치국평천하에 참여하지만, 본래의 직무는 사적=비실천적 영역에 귀속된다. 유자의 일은 문헌을 지키 는 것이고 도는 훗날의 성인을 기다려야 한다. 유교와 유자의 관계는 주자학과 소라이학에서 서로 반대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18/40 

이다. 궁리, 덕행,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직선적으로 연속시키는 주자학은 그 이론적 성격이 비정치적 이기 때문에 유자의 임무는 정치적이 되지만, 사적도덕과 정치의 연속성을 끊어버린 소라이학에서 유교 의 본질은 치국평천하이기 때문에 유자의 지위는 비정치적이 된다. 도를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은 학자의 일이고, 도를 실천하고 작위하는 것은 정치적 지배자의 임무이다. sollen 보다 sein이라는 소라이학의 방법론古文辞学은 실로 이런 입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사지私智의 개입을 배제하고 경전의 글 文辞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는 태도는 성인을 신격화하는 것과 다른 한면이다. 그는 성인을 정치적 가치 에 있어서 절대화하고 학문의 요체를 낮게 말辞과 일事에서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비정치화 시켰 다.(230-232) 마루야마에 따른 소라이의 공・사에서 처음에는 공은 매우 협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공을 제외하고는 모 두 사에 속한다. 처음에 정치의 발견자로 칭송받을 때, 막부 정치가 바로 공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학 문적인 논의를 할때는 철저하게 선왕의 길로 축소되는데, 이때 선왕의 도는 육경으로 제한되게 된다. 즉, 원시유교에서 언급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말할 때는 정치적 지배자들로 확대된다. 심지어 하타모토까지도 공을 행하는 자들이 된다. 막부의 정치가들이니 당연할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순을 해 소하려면, 막부의 정치적 지배자들에게 성인의 도를 강요하면 된다. 선왕의 도를 강요하면 된다. 그게 조선의 주자학자들 도학자들이 했던 방법이다. 왕을 주자학자로 만들고 신하도 주자학자들 즉 도학자들 이 담당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교육을 통해 심신수련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 마루야마가 말하는 낙 관주의다. 그렇게 하면 개인의 내면도덕에서 현실정치까지의 연속이 확보된다. 그러나 소라이로서는 현 실정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아니 언급할 수 없다. 혹은 칭송만 하거나 칭송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인 또는 선왕의 도를 축소한다. 아주 좁은 특정한 것만 치국평천하의 도라고 그것은 특수 하고 특별한 것이며 믿음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치국평천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유학자들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상, 즉 현실 정치에 대해 일일이 간섭 하거나 트집잡지 않는 이상, 막부나 무사들도 간섭하지 않을 터였다. 치국평천하를 언급해야만 하는 유 자의 자존심 또는 명분을 지키는 방법은 성인의 도, 선왕의 도를 특수화시키고 아주 특별한 사례로만 말 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근본주의적면서 이중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흔히 발견된다.) 그렇다고 현 실정치에 대해서 완전히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데 그것은 윗사람 즉 정치적 지배자의 일이라면 서 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학문적으로도 논하지 않는다. 학문은 그런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학문은 사적이고 비실천적이면서, 훗날의 성인을 위해 성인의 도, 선왕의 도를 보전하는 것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 지배자에게는 선왕의 도를 배우는 것이 권장되지만, 혹 그렇지 않더라도 탄식 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실천과 작위는 오직 정치적 지배자의 일이다. 그것은 신분과 가문으 로 확정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라이의 논의에서 왠지 공・사는 둘이 아닌 셋으로 나뉜 것처럼 보인 다. 정확히 말하면 두개의 공과 하나의 사다. 신앙의 대상인 고대 선왕의 도로서의 공과 현실의 정치적 지배자들의 공 그리고 유학자의 내면 영역으로서의 사. 그리고 소라이가 끊어버린 연속성이란 두 개의 공 사이의 연속성이다. 공과 사의 연속성은 주자학자도 이미 끊어버린 것이니까. 그걸 다른 방식으로 적 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공에도 사에도 속하지 않는 수많은 영역이 있다. 상업이나 공업의 영역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대해서는 아예 언급이 없다. 모든 사람이 관리인 차원에선 억지로 그것도 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고, 또 이런 영역에서도 크고 작은 관계 속에서 공・사가 발견될 가능성 마저 존재한다. 그런데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마루야마가 발견한 소라이의 근대란 무엇인가. 내면 세계의 발견이 라면, 그 공은 미셸 푸코가 말하듯,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스토아에서 벌어진 반전, 초기 그리스도교 에서 형성된 내면 탐고와 고백에 돌려져야 하지 않나. 나의 주장이 지나친 것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 루야마의 분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넘어가기에는 생각할수록 걸리는 것이 너무나 많다.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19/40 `소라이학에서 발견한 것은 모든 의미에 있어서 주자학의 안티테제였다. 합리적인 천도天道는 비합리적 인 천명天命으로 대체되었다. 궁리하는 능력에는 일단정지 명령이 내렸고, 성인聖人은 일반인과 구별되 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 규범과 자연의 연속성은 끊어졌으며 엄격주의는 폐기되었다. 치국평천하는 수신제가로부터 독립했다. 주자학의 연속적 사유는 완전히 분해되어 독자적 길을 걷게 되었다. 소코, 진 사이, 엣켄에 있었던 여러 모멘트가 궁극적으로 발전한 형태였다. 근세 초기 주자학적 사유의 보편성은 도쿠가와 봉건사회의 안정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이런 낙관주의적 사유방식의 분해 배후에는 근세사회의 어떤 역사적 전개가 존재했던 것일까. 소라이는 어떤 계기로 이처럼 철저하게 유교를 정치화 시켰던 것일까.(232-234) 분명히 마루야마의 말대로 소라이학은 주자학에 대한 안티테제다. 주자학과 관련성으로부터 보건대 이 것은 분명하다. 유학자들은 정치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정치에 참여해야만 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정치를 변혁해야만 하는 의무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학문은 정치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의무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학문이 정치에 대해 비판하고 간섭하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권력으로부터 얻 어낸 학문의 자유가 아니다. 정치권력을 승인하고, 정치권력에 간섭해야만 하는 도덕적 의무로부터 얻어 낸 자유이다. 이런 자유는 도대체 어떤 자유인 것인가? 마치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의 논쟁 같은 이 기묘 한 논리구조는. 법은 이념이기 때문에 독재권력에 대해 순응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이 자유는. 어떤 의미에서 사고가 나도 매뉴얼만 찾는 기술적 합리성으로의 도피와는 어떤 연결이 있는 가. 매뉴얼에 있는 대로만 했으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합리성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실로 근대성modernity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소라이가 근대적인 것은 가치를 의무나 도덕으로 부터 자유롭게 한 것 그 자체에 있는 것인가? 비록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면 마 루야마의 이런 논의는 모두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겐로쿠元禄, 호에이宝永, 세이토쿠正徳, 교호享保에 걸친 즉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이르는 반세 기.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확립된지 약 80여년. 국내적 무질서, 국제적 교통, 무역 등의 분위기를 타고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현저한 활동을 보인 전국戦国시대 정신은 국내질서의 안정화 및 쇄국에 의한 대외발전의 차단 때문에 일시 완전히 침체되었다. 그러자 바깥으로의 출구를 봉쇄당한 국민적 에너지는 오로지 내면을 향하게 되었고, 거기서 눈부시고 품위있는 그림 같은 겐로쿠 문화를 펼치게 되었다. 5대 쇼군 쓰나요시綱吉는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의 첫머리를 문무충효文武忠孝를 장려하고 예의禮儀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여 문치주의 색채를 드러냈고, 유시마성당湯島聖堂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 판액을 걸었으며, 하야시 노부아쓰林信篤에게 속발을 명하고 다이가쿠노카미大学頭로 임명했다. 다이묘, 하타 모토, 유자를 모아놓고 경서를 강의하고, 토론을 벌이며, 학문과 교육을 융성하게 하는데 힘을 쏟았다. 소라이는 쇼군이 강의듣기를 좋아해서, 유학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비판했지만, 교학진흥책 은 겐로쿠의 학문과 교육에 기여했다.(234-236) 자주성은 겐로쿠 학예의 특징이다. 진사이의 호리카와 堀河학파나 소라이의 겐엔蘐園학파의 흥기도 이런 기운이 유학계에 반영된 것이고, 가학歌学에서 토다 모스이戸田茂睡, 승려 게이츄契沖(1640-1701)에 의해 귀족측 지향의 가학은 비판당했다. 순문학純文 学에서는 하이카이俳諧의 마쓰오 바쇼松尾芭蕉가 단린談林학파에 대항하여 쇼후正風학파를 열었다. 단 린학파 출신의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1642~93)는 얼마 후 우키요조시浮世草子를 창시하여 정치적 으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된 조닌町人들이 물욕과 성욕을 추구하는 모습을 리얼하게 그렸다. 유곽과 더불어 조닌의 도피장소로 급속히 발전한 연극부문에서 조루리浄瑠璃 작가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 衛門(1653-1725), 가부키 배우로 간사이関西에서 사카다 도주로坂田藤十郎(1645-1709), 간토関東 에서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郎(1660-1704)가 나왔다. 그림은 화단의 아카데미 가노파狩野派로부터 하나부사 잇초英一蝶(1652-1724) 같은 반항아가 출현하여 스승의 스타일이 갖는 질곡에서 벗어나 쇄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0/40 

탈한 풍속화를 그렸다. 풍속화를 조닌 예술로 확립시킨 우키요에浮世絵 판화의 시조 히시카와 모로노부 菱川師宣(1618~94)와 고아미幸阿弥(1599~1651), 고마古満(?~1663) 등의 어용 마키에蒔絵 작가 들과 경쟁하면서 조켄인常憲院시대 마키에의 명성을 높이 쌓은 오가타 고린尾形光林(1658~1716)도 모두 이 시대에 속한다. 모든 문화영역이 창조성이 흐르는 겐로쿠 디자인元禄模様에 표현된 화려하면서 섬세한 색채가 그 기본정신이었고, 문화적 제작의 융성은 생활에 대한 욕망의 향상을 전제로 하며, 그것 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이것이 에도・교토・오사카 대도시에 집중된 것은 조닌의 경제적 증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겐로쿠적인 정신은 조닌사회의 화려함과 사치로 실천했다. 무사도 이런 풍속에 동화되었 다. 소라이는 하타모토는 다이묘와 다름없고, 하타모토의 부하家来는 다이묘의 가신과 같은 격이라 젋은 하급무사도 그렇게 산다고 말했다. 겐로쿠(1688~1704), 호에이(1704~11) 무렵 유곽悪所은 번영해 마치 극락, 용궁 같았다. 위아래 환락의 소리가 저택邸과 거리에 가득차, 전국시대의 살벌한 분위기는 사라졌고, 막부 초기의 엄격하고 교묘한 다이묘 통치정책은 성공해서, 변경의 다이묘들도 정치적 야심을 에도의 향락생활에 녹여버렸다. 어정밀御精謐을 누리는 겐로쿠 시대는 문화적, 정치적 도쿠가와 막부의 최전성기였다. (236-240) 어쩌면 아주 간단한 내용이다. 겐로쿠기 도쿠가와 시대가 시작한지 80년에서 100년으로 넘어가는 17 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일본 문화계는 다채롭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가득찼다. 그리고 진사이학이나 소라이학은 모두 그런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녹아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시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라는 것. 그런데 눈길을 끄는 점은 전국시대의 정신이 쇠퇴했다고 하는 지점이다. 도쿠가와 봉건 체제는 외부로의 발전 가능성이나 다양한 시도가 봉쇄되었다는 지적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특히 일본사 의 사학적 전개에 무지하기 때문에 이해에 한계를 느꼈다. 도쿠가와 봉건체제를 사회경제사적으로 어떻 게 평가하느냐가 이 부분이고, 이 부분의 논의가 소라이학의 탄생가능성을 평가하고, 뒷받침한다. 그런 데 만일 이 부분에 대한 1940년대 역사해석에 대한통설이 틀렸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사학자들 의 견해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도쿠가와 사회는 사농공상의 신분적 분리와 계층관계의 고착화로 일본 봉건제도가 완성된 형태이나 동 시에 무로마치室町(1336~1573) 말기 이래의 영주들의 분국 현상의 확대와 사무라이들의 조카마치城 下町 집중에 의해 정치적 지배가 토지의 사실적 사용-수익 관계로부터 유리되어, 봉건제의 중요한 특질 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봉토知行所를 갖는 무사는 봉토와 공조를 통해 관계를 유지했으나, 대다수의 하 급 사무라이는 토지와의 연관성은 겐마이現米에 겨우 상징적으로 표현되었고, 막부가 성립된 후 화폐주 조권의 독점을 필요로 만들었던 화폐경제는 방대한 봉건가신단이 조카마치에 집중됨으로 한층 더 진전 되었고, 참근교대 제도의 확립으로 에도와 모든 번이 상품경제를 매개로 긴밀하게 얽히게 되었다. 무사 들은 예전의 물권 중심적 생활에서 채권 중심적 생활, 이른바 소라이가 말하는 ‘여숙의 경계(旅宿の境 界, 여관방의 문턱)’에 접어들었다. 생활이 물권에 기초하다면 정태적이나, 채권이 기초가 되면 동태적 이다. 무사계급은 정태적 수입으로 동태적 지출에 대응해야 했다.(240-241) 일본 봉건제도의 완성기였던 도쿠가와 시대는 실상 봉건제의 근본이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라는 지적이 다. 상품경제의 등장을 오규 소라이는 ‘여숙의 경계’라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정태적 수입으로 동태적 지 출에 대응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실은 한쪽 면만 본 것이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띄었다고 평가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마루야마는 여기서 봉건제라고 하는 것은 토지와 봉 건 가신인 무사의 연계를 기반으로 한 사회경제적 체제라고 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체제 즉 이념형을 마 음 속에 수립해 놓고서, 그런 체제가 수립되었다가 붕괴되었다는 식의 논의를 펴나가고 있지만. 일단 그 런 형태의 체제가 중세 서유럽에 존재했는지 부터가 의문이며, 도시경제의 변화 등에 따라 어떻게 변모 했는지도 의문이고. 실제 그런 체제가 존재하든지 없었든지 평가도 어려운 데다가. 과연 그런 이념형을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1/40 일본에 적용할 수 있는지도 문제가 된다. 일본 중세 봉건제의 가신단은 서유럽과는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그 숫자와 크기에서 차이가 난다. 일본의 가신단은 수가 많았고, 계층이 복잡했으며, 하급무 사는 처음부터 땅이 분배되지 않았다. 봉건 가신단이라고 모두 토지와 연계된다는 생각 자체가 일본 경 제발전이나 사회발전을 서유럽에 끼워맞춘 것이다. 실제로 신분제화된 거대한 상비군 조직이 일본의 가 신단이었는데. 어디가 완성이고, 어디가 정점이며, 어디가 붕괴인지 평가하기 어렵다. 물론 화폐경제의 등장과 ‘여숙의 경계’가 탄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전시조식을 평시화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모든 전시조직은 평시화하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 평시화하는 지가 문제가 된다. 일본도 그 한 방식이다. 봉건 가신단의 규모를 줄이면서 관료화하는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화폐경제가 결국은 그 과정을 진행시킨 것이다. 이것 자체가 선택이 아니라 필연 이었다. 전쟁을 통해서 거대하게 성장한 군사조직을 어떻게 평시화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막부의 재정 자체가 파탄났다. 이에쓰나家綱 말기 심각한 재정궁핍은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1695년 하기와라 시게히데萩原重秀의 건의로 금은화를 다시 주조학는데, 화폐를 개악하여 조정의 기금 을 늘리려는 것이다. 이는 막부말기까지 이용하던 미봉책의 첫시도로 도쿠가와 봉건제 해체과정에 역사 적 의미를 지닌다. 이로 얻은 수익은 방만한 재정과 천재지변으로 날려버리고 계속해서 은화를 다시 주 조해, 열악한 화폐가 시장에 넘쳤고, 물가는 뛰어오르고 막부 지출에는 역작용을 안겨주며, 무사 계급을 고달프게 만들고, 금화와 은화를 주조하는 어용상인과 그들과 결탁한 시게히데 등 재정담당 관리들만 부 유해졌다. 금은화의 하락으로 동전 가치가 올랐는데, 이는 무사가 녹미를 금으로 이것을 다시 동전으로 바꾸어 사용했는데, 동전 가격이 오르는 만큼 일용품 가격이 하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08년 막부는 종래의 동전 10개에 해당하는 대전大錢을 주조했으나, 백성들은 강요해도 사용하지 않아, 다자이 슌다 이太宰春台의 지적처럼 막부 권력의 한계만 보여주었다. 전례 없던 경제생활의 혼란 속에 5대 쓰나요시 는 죽었고, 6대 이에노부家宣(1663~1725)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1657~1725)를 기용하여 하 기와라 시데히게를 배척하고 화폐의 품위 복구에 힘섰다. 하쿠세키는 재정감사관勘定吟味役을 부활하 고, 나가사키 무역량 제한 등에 힘썼지만, 그의 공경적 예치주의는 막부 지출을 철저히 삭감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노부, 이에쓰구家継(1709~1716) 잇달아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8대 요시무네吉宗 (1684~1751)는 교호享保의 개혁이라 불리는 도쿠가와 최초의 대규모 봉건제 보강 공작을 단행하여 재정을 긴축하고, 게이초慶長 시대(1596~1615) 금은화의 가치를 지닌 화폐를 새로 주조하고, 막부 지 출을 삭감하고 검약령을 내렸지만, 이미 파탄난 막부 재정을 되살릴 수 없었다. 막부는 쇼군 직속의 하 급무사御家人의 봉록 지불도 어렵자, 1722년 1만석이상의 다이묘들에게 수입의 100분의 1에 해당하 는 아게마이上ゲ米를 부과하고, 막부의 기본정책인 참근교대에 따른 에도 체류기간을 반년으로 줄였다. 이는 ‘치욕을 돌아보지 않고 내놓은 것’으로 1730년 막부의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는데도 상당한 기간 동안 시행되었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교호 초기의 풍년으로 쌀값은 폭락했지만 일반 물가는 올라 막부 를 비롯한 일반 무사계급은 곤궁해졌다. 여러 대책이 소용없어지자, 1736년 막부는 겐로쿠의 악화를 주 조하는 정책으로 돌아서, 건전한 재정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시게家重(1711~61), 이에하루家 治(1737~86)에 이르게 되면 타누마田沼 시대라는 겐로쿠보다 방만한 시기에 들어섰다. 이후 마쓰다이 라 사다노부松平定信에 의한 간세이寛政(1788~1801) 개혁, 다시 분카文化(1804~18), 분세이文政 (1818~30)의 교만하고 사치스런 시기 그리고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1793~1851)의 덴포天保 개 혁으로 막부 정치는 시소처럼 방만한 시대와 긴축시대를 오가면서 막부 말기의 동란기로 접어든다. 겐로 쿠와 교호는 우연히 근세 봉건사회의 하강기를 서로 번갈아 얽어가는 두개의 시대적 유형을 제시했다. (241-245) 결론적으로 말해서 막부의 재정정책 특히 화폐정책이 실패해서, 긴축과 방만한 재정을 반복해가면서 왔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2/40 다갔다 했다는 것. 요약하면 그렇다. 악화의 발행을 거듭하면서, 그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는 세력이 등 장했다는 것. 하지만 악화의 발행은 그가 말했든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무사계급이 가난해진 것도 원인 이 아니라 결과이며, 원인은 거대한 경제적 변화로 보아야 한다. 막부가 악화를 발행하는 잘못된 재정정 책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을까? 막부가 사치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원래 막부의 재정기반이 튼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봉건 영주에 대한 토지분배 등으로 전국적인 과세, 즉 중앙집권화에 실패했거나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화의 거듭된 발행은 임기응변 식으로 그런 현상에 적응해 나갔던 것 뿐이 다. 이에야스라면 금리를 타도하거나 금리와 무가의 일원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그 후에 누구라도 그런 시도도 하기 어려웠다. 막부의 재정적 궁핍 하타모토, 고케닌御家人의 궁핍은 막부와 경제적 기초를 같이하는 제후와 번사藩士 들의 궁핍도 의미한다. 무사계급의 금융을 담당하던 쿠라모토蔵元, 가케야掛屋, 후다사시札差 등의 대 한 의존성도 점점 강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고리대자본은 화폐변동과 물가 등귀를 이용해 자기증 식해 나갔으며, 쓰나요시의 토목사업과 재해복구 정책은 어용상인을 살찌웠다. 무가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상인은 크게 이익을 얻어 무사와 조닌의 사회적 지위는 교호 무렵부터 뒤집히는 형세를 보였다. 다이묘 조차 부유한 상인이나 고리대자본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서로 도노殿라고 불러 구분하기 어려우 니 무사의 위엄이 유지될 수 없었고, 조닌의 자의식은 향상되고 있었다.(245-247) 반면 조닌의 발흥이 가진 역사적 성격은 과대평가되면 안된다. 그들은 모두 봉건권력에 기생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생산 방법을 만들어낼 힘을 결여한 상업=고리대자본이며, 폭리 자본주의wucherischer Kapitalismus의 성 격이 농후했다. 그들은 봉건적 권력에 기생하면서 봉건적 권력이 수취하는 공조貢租를 직간접으로 빨아 들이면서 생존할 수 있었고, 권력의 노여움을 사면 맥없이 무너지는 존재였다. 부유한 조닌들은 사치스 럽고 호탕한 생활을 했고, 철저한 금욕생활도 훗날의 쾌락적 소비를 위한 것이었다. 조닌 들이 아직 중 산계급中産階級(middle class)을 형성할 수 없었듯이, 조닌의 근성도 막스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 정 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영리추구란 불쾌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불가피한 것 정도로 취급되었다.(베 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역, 80-82)(247-250) 일련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리대자본이 등장한다. 그러나 마루야마가 보기에 이 자본주의란 산업 자 본주의로 성장한다기 본다는 막스 베버가 말하는 후진적인 폭리 자본주의 형태라는 점이다. 이들의 정신 은 중산계급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막스 베버가 남유럽이나 아시아를 비판하는 부분을 가져다 인용한다. 이 과정에서 신분제가 내부적으로 붕괴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도노殿라고 부르게 된다. 돈을 가진 신흥부르주아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도 기반이 충분하지 않아, 언제든 누명을 뒤 집어 씌우면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였을까 조닌들, 부유한 조닌들은 자본을 축적하지 않고, 쾌락적 소비와 향락으로 탕진한다. 일반적으로 중산계급의 도덕 문제가 있었겠지만. 조금 의문이 든다. 실은 일본 자본주의 성숙 과정에서 서구 학자들이 주목한 것 중 하나가 통속도덕의 존재였다. 이 시다 바이간石田梅岩과 세키몬 심학石門心学 같은 것. 이런 존재를 무시하고, 조닌의 쾌락과 타락만을 묘사하는 것 자체가 어떤 형태의 발전론의 특정 단계에 일본사를 끼워맞추는 해석은 아닐까. 예를 들면 이 부분에 대한 기술은 중세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를 연상시킨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같 은. 사실 여기서 내 눈길을 끈 건 중산계급이라는 표현이었다. Middle class를 1940년대 일본에서는 중 산계급으로 말한 것인가. 현대일본에서는 흔히 중류라고 표현한다. 일억총중류 같은 표현이 그렇다. 중 산이라는 번역어 자체가 강좌파의 영향인 걸까. 겐로쿠에서 교호로 이어지는 이 시대에 밑바닥에 봉건사회의 궁극적 지주인 농민들이 묵묵히 그들의 삶 을 이어가고 있었다. 막부를 비롯한 봉건 영주들은 공조를 확보하기 위해 농민들의 일상에 개입하여, 의 식주는 물론, 재배작물, 부부윤리에까지 간섭했다. 이런 규제의 목적은 연공年貢을 내기만 하면 백성들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3/40 

만큼 마음 편한 사람도 없다는 게이안慶安시대의 말이 있다. 연공만 다 내면 지토地頭나 다이칸代官의 간섭없이 이웃마을로 옮겨갈 수도 있다. 그러나 상품경제의 발전은 농민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우선 무사계급을 궁핍으로 몰아감으로써 공조 수취를 양적으로, 질적으로 강화시켰고, 농민의 자연경제를 분 해하게 되었다. 소라이가 시골에도 돈으로 물건을 사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겐로쿠 이후 농촌이 상품경 제에 말려들어, 겐로쿠 문화가 농촌에도 보급되고, 농민들의 생활 욕구가 상승하게 되었다. 강화되는 세 금과 향상되려는 생활 사이의 마찰은 소라이에 의하면 지토와 백성이 서로 원수라고 할 정도로 영주와 농민 관계는 악화되었고, 상업자본의 농촌 침투로 토지도 화폐경제로 들어가, 매매금지인 논밭도 탈법행 위에 무너지고, 토지겸병과 영세화가 진행되었다. 내몰린 농민들은 잇키一揆를 통해 타결하려 시도했 다. 농촌 상태가 치명적으로 악화된 것은 호레키宝暦 무렵이지만, 겐로쿠-교호는 분수령으로 교호 년간 의 잇키 증가는 비약적이었고, 농민들 사이에 마비키間引き(영아살해)도 널리 행해졌고, 인구도 감소했 다.(250-253) 마루야마를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현대의 일본 역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봉건사회의 붕괴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일본 경제는 17세기 초부터 계속해서 붕괴해야 한다. 그러나 실은 그렇 지 않다. 도쿠가와 성립기에 비해 100년이 지난 바로 이 겐로쿠 기에 일본의 인구는 두 배가까이로 성장 한다. 그 배경에는 농업생산의 비약적인 증가가 있다. 그런 농업생산의 비약적인 증가가 겐로쿠 문화나 이런 자본주의적 성장, 특히 상공업의 성장을 뒷받침해 온 것이다. 상품경제의 성장은 원인이 아닌 결과 로 그 배경에는 농업생산의 비약적 성장과 장기간의 평화의 지속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상품경제의 성장 으로 봉건 사회 시스템에 금이 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에 문화가 꽃피게 된 것 자체가 경제적 성장에 배경을 두고 있다. 그러나 겐로쿠 이후에는 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좀 더 섬세하게 나누어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겐로쿠에서 교호의 사회적 상황은 전환기적 현상이다. 화려한 겐로쿠 문화의그늘에서 소극적인 부식과 적극적인 반항에 의해 봉건적 권력을 위협하는 모멘트들도 아직 강력하게 자라지 않았다. 도쿠가와 봉건 사회는 최초의 커다란 동요를 경험하면서 전체로서는 건전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소라이로 하여금 유교 를 정치화시킨 사회적 계기는 거기에 있었다. 지배층의 정치적 사유의 우위는 일단 안정된 사회, 사회적 질서에 대한 낙관주의로 일어날 수 없다. 사회적 변동에 의해 지배적 사회계층의 생활 기초가 흔들릴 때, 정치적인 것das Politische이 사유의 전면에 나타난다. 다른 한편 사회가 혼란하고 부패하면 정치적 사유는 모습을 감추고, 도피, 퇴폐, 은폐가 만연해 진다. 이 두 중간의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서만 현실을 바로보는 진지한 정치적 사유는 존립할 수 있다. 소라이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성인의 도가 이 세상 정치와 전혀 별개의 것처럼 사람들에게 생각하게 한 주자학의 낙관주의를 부정하고, 유교의 정치화 를 통해 이 세상 정치의 철학적 기초로 삼으려했다. 소라이학 자체가 봉건사회를 동요시킨 문화적 요소 [겐로쿠 문화]를 그 사적 측면에 강하게 새겨놓지 않을 수 없었다.(253-254) 마루야마 마사오를 평할 때 흔히 강좌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읽다보면, 분명히 그런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독일의 국민경제학파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 또한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종의 위기이지만, 아직 붕괴는 아닌 특정한 시점에서 정치적으로 꽃핀다는 생각인데. 이건 분명 히 서유럽의 르네상스 시기를 상정해 놓고, 그와 비슷한 발상을 한 것이다. 일부 과도기적 상황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혼란하고 부패하면 정치적 사유가 모습을 감춘다는 식의 작위적인 한 계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럴때 오히려 정치적이고 새로운 사조가 싹튼다. 일본의 경우 19세기가 18세 기보다 훨씬 다양했다. 마루야마가 이런 식의 해석에 매달린 것은 그가 도식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고, 특히 토대에 의한 상부구조의 결정이라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어판 서문에서 그런 부분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는 사회경제적 토대와 정치적 사유의 일종의 조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4/40 

응관계를 정교하게 조율하면서 산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산출이 옳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일종의 소 라이를 위한 변명처럼 들리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사회적 상황을 눈앞에 둔 소라이가 그린 치국평천하에 학문을 적용한 정치사회조직의 개조론을 살 펴보자. 우선 자신의 방법론을 현실사회에 적용하여 봉건사회가 처한 난국을 이론적으로 분석했다. 그래 서 무사계급이 곤궁한 연원과 원인에 도달했다. 근본적 원인은 첫째, 위아래를 막론하고 모든 무사가 ‘여 숙의 경계’에 접어들었다. 젖가락 하나도 구입. 둘째, 모든 일에 제도가 없다. 즉 수요가 무제한. 원인으 로 첫째, 가격이 너부 비싸다. 둘째, 금은의 양이 줄었다. 셋째, 빚이 길을 막고 있다. 그 대책으로 우선 긴급한 원인을 제거하고 근본적인 개혁으로 간다. 먼저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근본으로 동전을 주조하는 일종의 통화팽창정책이다. 한편, 무사에게 봉토를 주어 토착시키고, 호적을 만들어 인구이동을 통제하 고, 제도를 확립하여 신분에 따라 욕망을 구제하고 자연경제로 되돌아감으로 상업자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려 한다. 무사와 농민의 대립도 완화될 것이다. 제도의 확립은 예악에서 도를 찾은 소라이의 철학 이다. 법가적인 입장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인정에 의한 것이다. 풍속에 맞지 않는 일을 강제해서는 안된 다. 제도의 변혁도 사람에 달려있다. 법보다 사람이 중요하며, 기질이 바뀌지 않기에 개성을 발휘할 수 있게 등용해야 한다. 이런 정치사회개혁론은 복고적이다. 그러나 그가 유교적이라고 할 수 없는 방향으 로 원시 유교를 기초지우려고 한 것처럼, 원시 봉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정치사상 속에 정치적 집중 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 절대주의적 관념의 맹아가 나타난다. 막부의 여숙성, 쇼군도 여숙에 있으나 온천하가 그의 영지이니 그는 일본 전체의 소유자라고 하여, 각 번에 강력한 통제력을 지니되 가장 거대 한 봉건영주라는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형태와는 모순적으로 평가한다. 막부에서 필요하면 징수하면 될 일이로 아게마이도 정당화한다. 다이묘는 30만석을 한정시킬 것도 주장한다. 막부 절대주의 아래에서 평균화 지향이었다. 소라이는 제도적 변혁에는 겐로쿠 무렵이 가장 적당하다고 교호는 늦었다고 보았다. 소라이가 본 교호 시대는 위기의 시대였다. 사람들이 교호의 중흥을 노래할 때, 소라이는 황혼의 그림자 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봉건사회가 낳은 최초의 위대한 위기의 사상가였다.(255-259)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이 봉착하게 되는 곤란은 소라이의 해결책이나 대안이 원시 봉건제에 가까운 자연 경제론에 봉착한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논의는 꽤나 소극적으로 변해 버린다. 그러면서 이런 형태의 방식이 보다 인정론에 가까운 법가적이지 않고 유교적인 해석이라고 하는데. 애초에 인정이 라면 실은 상업주의 쪽이나 상품경제 쪽이 훨씬 더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제도라고 해서 제시하는 것이 외려 고대 원시유교적인 발상이 나오는 것은 소라이 유교적 한계 안에서 아직 머물고 있 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도로 강제력을 동원해서 돌아갈 수 있다는 해석을 절대주의라고 본 것 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장 자크 루소의 코르시카 헌법론에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루소가 혁명적으로 제안해서 동의한 헌법은 결국 모든 농민이 자기 토지를 가지는 경작자 들의 민주정이었다. 아마도 마루야마가 여기까지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소라이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해 석했었을런지도 모른다. 실제 혁명가들의 사상이 자연법을 되살리거나 상품경제를 부정하고 고대적인 농업사회로 돌아가자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근대적이라고하는 것은 그런 사회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방식이 근대적이어서 그렇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낼수 있다는 상 상. 그렇기 때문에 마루야마는 소라이에게 집착했을 것이다. 정치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상상 이 소라이에게 있었다고 마루야마가 평가한 점이다. 마루야마는 소라이가 성인을 상상하거나 상정하고 있다고 믿었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마루야마에게 소라이가 두드러진 것은 근대 일본의 천황제가 자연스 러운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일본의 지배구조는 자연스러움에 뿌리밖고 있다. 근대초극론도 그 뿌리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태양신의 자손이 천황이 되어 3000년간 그 후손이 계속해서 다스리는 그 나라의 통 치의 자연스러움을 깨트릴 수 있는 인위적인 정치가의 도래를 꿈꾸었을 수 있다. 그가 만들어낸 세상이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5/40 그저 자연적 농업경제일지라도. 그러나 농업이 자연스러운 만큼 상품경제도 자연스러운 것인데. 소라이가 여러가지 주장을 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 중 하나가 ‘아게마이’를 변호한 것이 다. 애초 쇼군 요시무네는 ‘아게마이’를 징수하면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고, 참근교대를 완화해 주었 다. 그러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된다. 도쿠가와 막부가 여러가지 측면에서 국가로서의 형태를 갖 추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결정적으로 이 과세권이 봉건제의 연공 제도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다. 초기에 는 다이묘를 이리저리 옮기기도 하고, 감봉을 해서 영지를 빼앗기도 했다. 나중에는 이런 일들이 어려워 지긴 했지만. 소라이는 여기에 덧붙여 다이묘를 소규모화해서 중앙에 대항할 수 없도록 해야한다고 했는 데. 이 역시 중요한 주장이다. 소라이는 쇼군이 중앙집권화를 시도할 수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주장들에서 das Politische의 가능성을 본 것이겠지. 문제는 전환의 논리나 전환과정의 정당화를 선왕의 도로 내세운 것이지만. 그것을 어쩌면 알기 어렵게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훗날 그 정당화의 논리는 존왕론에서 나오게 된다. 대정봉환大政奉還이나 판적봉환版籍奉還을 통해, 중앙집 권화를 이룸과 거의 동시에 무사계급은 몰락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를 것인데. 그 전환의 논리가 존왕론이었다. 금리의 권위를 내세우는 이 사상은 유교의 영향은 물론 수많은 학설의 집합인 동시에 무능한 도쿠가와 정권에 대한 미움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군주는 근대적인 군주 라기 보다는 일본 신화의 정통성에 근거한 군주였다. 이 기묘한 자연스러움의 연결과 정치란. 반면, 소라이의 정치론은 실천을 전제로 하지 않았고, 특히 학자의 정치 참여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제도의 실천은 훗날의 성인에게 맡겨야 하며 직접적인 실천을 회피했고, 어디까 지나 조언하는 형태로 막부에 제출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런 조언을 받아들이도록 여론을 모 으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탄식할 뿐이다. 상소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소라이 자신은 요시무네의 이야기 상대였다고는 하나 정치적 영향력은 평가하기 어렵다. 하쿠세키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 성인 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본 정치의 정당성이 점차 금리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반발인 것인가. 쇼군이 나서기만 하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 다는 것인가. 소라이가 금리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재미있다. 실제 권력이 없는 금리는. 마루야마가 주목한 것은 소라이가 제도 만들기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이다. 예악이라는 형태로 이 제도가 주대의 봉건제나 고대의 선왕의 예법이 아니라, 일본의 전통적인 농업사회로의 복귀라서 이를 선왕의 도 라고 이름붙이기는 했으나 실은 꽤나 일본적이다. 따져볼수록 여러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밑바닥에 깔린 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궁금증은 실상 이런 것이다. 소라이는 왜 학문론과 정치론을 주 장했는가? 소라이는 선왕의 도를 왜 주장했는가? 실상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기 위해서 주장한 것은 아 닌가. 이미 지난 교호에 했어야 했다는 탄식은 지금은 이제 시대가 지났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는 의미는 아닌가? 훗날의 성인을 기대한다는 주장 말이다.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의심은 소라이의 시대 그것도 하쿠세키의 의한 유교적 개혁이 요시무네의 등장으로 완전히 뒤집어진 그때, 물론 그는 하 쿠세키 식의 주자학적인 개혁에는 반대였다. 키슈 도쿠가와가 출신인 요시무네의 등장은 유학자들에 의 한 개혁 또는 그 입김을 제거하고, 무가의 방식으로 돌아가겠다는 시도였다. 그때 유학자들은 현실 참여 를 하지 않을 핑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소라이학이란 학자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현실 참여를 하지 않는, 유학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자신의 현재를 교묘하게 옹호하는 학문의 자세이고, 학문은 유지하되, 현실에는 참여하지 않아서, 자신의 명성과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바로 그런 방법과 길을 소라이가 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궁금증이 소라이에 대한 글을 읽을수록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일본에서 2025년 오사카만박을 유치했다는 소식이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 오사 카만박이라니. 대규모 이벤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베 정권이 얼마나 퇴행적 사고를 반복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 만박의 재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6/40 지만 그것은 그저 쇼와 시대 고도성장에 대한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일 이상이 될는지 모르겠다. 그것 보다는 소라이가 더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읽어나갈수록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이 어떤 아슬아슬 한 경계를 걷고 있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아주 잠깐 짧게만 존속할 수 있는 변곡점 그 변곡점에서 소라이학이 탄생했다는 것은 실상 마루야마가 헤겔 류의 진화론적 사관과 역사발전론에 얼마나 함몰되 었는지를 보여준다. 만일 조금이라도 더 봉건사회가 붕괴했다면, 소라이학의 자연주의와 농촌경제론은 퇴행이라고 비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아직 덜 붕괴된 상태였다고 강변하는지도 모른 다. 그가 이런 발전론에 사로잡히지 않았더라면, 소라이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해석했을 수 있다. 자연 주의 경제로의 회귀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왠지 요즘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는 사회경제적 원인을 중시하는 글을 보면 반갑다. 2010년대에 쓰여진 책들은 경제적인 문제 역사적인 문제를 외면하 는 경우가 많다. 정치일면적인 글들이 적지 않다. 일본은 아마도 1970년대가 변곡점인 것 같다. 전쟁 체 험 세대에서 전후 세대로 사회 주축이 변화하던 그래서 요즘은 그 이전의 역사서들이 훨씬 솔직하게 한 계를 인정하는 점을 매력적으로 보고 있다. 1장 4절 국학 특히 노리나가학과의 관련성: 소라이학의 보급과 거기에 대한 반발-겐엔학파의 분열-소라 이학 이후의 유학계의 쇠퇴-국학과 소라이학의 부정적 관련-그 사유양식의 공통성-적극적 관련의 다양 한 모습-관련의 총괄 및 국학의 사상사적 위치 소라이학은 당시 사상계에 큰 공명을 가져왔다. 그 흡인력은 수백명을 포용하는 겐엔蘐園학파를 성립시 켰다.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1680~1747), 야마가타 슈난山県周南(1688~1732), 핫토리 난카쿠服 部南郭(1683~1759), 히라노 긴카平野金華(1688~1732), 안도 토야安藤東野(1683~1719), 우사미 신스이宇佐美伈灊水(1710~66) 등 일류 재사들이 포함되어 사회적인 면에서 소라이학의 황금기는 오 히려 그가 죽은 후였다. 교토에서 성행한 것은 소라이가 죽은 후 겐분元文(1736~41) 초기부터 엔쿄延 享(1744~48), 간엔寛延(1748~51) 무렵까지 십이삼년간 절정에 이르러 朱注에 『논어징論語徵』을 섞 어서 가르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260-261) 소라이가 살아있는 동안은 소라이학에 대한 공격이 크지 않았는데, 이는 반대파와도 교류했던 소라이의 태도 덕분이다. 18세기 중반이후 소라이학을 공격 한 저서만 30여종이 넘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서들도 구태의연하거나 소라이학을 공격하면서 소라이적 인 사유방식에 의거하고 있었다. 소라이학을 포함한 모든 유학을 비판했던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는 소라이를 비판하는 유학자등은 소라이의 영향을 받았기에 소라이의 잘못을 찾아낼 수 있으며, 소라이는 오늘날 대부분 유자의 시조라고 평가한다.((262-263) 겐엔학파의 유성기에 이미 분 열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라이가 유교를 정치화함으로써 도리어 비정치적 계기가 내부에 도입되는데 이 를 공・사의 분기로 설명했다. 경학과 견문을 넓히고 사실을 행하는 행하는 것인데. 詩文이나 歷史는 모 두 사적인 측면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문사학은 원래 선왕의 도의 방법론이라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서도, 어느새 문사文辞의 고증적 연구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소라이학의 역사의식이 촉발 시켰다. 성인과 성인의 도가 절대적이기에 이런 공・사의 분기는 도의 나뉘어짐으로서 체계적 통일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체계적 통일성은 소라이의 박학다식을 통해 인격적 통일성을 가지게 되었다. 소라 이학의 분열은 인격적 분열로 표면화되었다. 소라이의 공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사람은 다자이 슌다이와 야마가타 슈난 등이며, 핫토리 난카쿠, 안도 토야, 히라노 긴카는 사적인 측면을 계승하게 된다. 치국평 천하의 학문과 시와 문학・역사・고증학이 별개의 인격에서 추구된 결과 소라이학의 이론적 통일성도 파괴되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영역을 절대화하고 다른 영역을 무시했는데, 슌다이는 고문사를 즐기는 것을 더러운 것이라 매도했고, 난카쿠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관심을 헛된 논의라고 일축했다. 겐엔 의 대다수는 경학이 아닌 난카쿠 경향을 따라가고 있었다. 소라이학에서 보이던 진지한 위기의식은 사라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7/40 

지고 부박한 문인취미만 남았다. 난카쿠가 가지고 있던 발랄한 창조성은 후대에 사라지고, 이우린李于 鱗, 왕원미王元美의 문사를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등 학문적으로 예술적으로 하강세를 보여, 분세이文政 연간(1818~30)에는 서예와 그림 따위 잡기를 즐기며 방탕하게 노는 무리라 불리게 되었다. 이미 겐엔 초기의 문예 취미와는 달라져 분카, 분세이의 말기적 퇴폐 정신과 통했고, 이는 소라이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은 이미 떠난 후였다. 겐엔학파도 덴메이天明(1781~89) 무렵을 경계로 사상계의 헤게모니를 급 속하게 상실했다. 소라이학은 반소라이학이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의 간세이 이학의 금寛政異 学の禁이 아니라 겐엔학파 스스로에 의해 무너졌다.(263-266). 소라이학의 분열과 몰락의 원인은 소라이 자체에 있었다는 것이 마루야마의 주장이다. 소라이 학파가 둘 로 분열하고, 그 중에서 사에 관심을 가진 난카쿠 류가 가장 크게 성장했고, 그 결과 어떤 전망도 제시하 지 못하고 몰락했다는 것인데. 그게 과연 공・사의 구별에서 생긴 문제인지는 정말 의문이 든다. 거듭 말하지만 공・사의 구별이 생긴 이유는 학자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다. 사적 영역이야말로 그들이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거꾸로 이들의 정치적 제안이 사라진 이유는 위기가 오지 않아서다. 소라이 학은 위기학문이라고 마루야마 마사오는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도쿠가와의 평화와 번영은 소라 이 이후로도 백수십년을 이어졌다. 연속되는 태평성대에 학자들이 시문으로 흐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 한 일이다. 위기의 학문이 위기가 없을 때 어떻게 존속할 수 있겠는가. 소라이학이 분열・퇴폐해가고 송학이 고학파에서 입은 상처회복에 고심할 때, 유학계에 이노우에 긴카 井上金峨, 야마모토 호쿠잔山本北山, 가메다 보사이亀田鵬斎, 호소이 헤이슈細井平洲, 가타야마 겐잔片 山兼山, 요시다 고오톤吉田篁暾, 미나가와 기엔皆川淇園, 오타 긴죠太田金城 등 절충학파가 등장했다. 이들은 학파라 하기에도 잡다하나 공통적으로 당파적 편견을 배척하고 자기 학설의 장점을 취해 단점을 보완함으로써 중정의 도를 추구하고, 광범한 고증적=문헌적 섭렵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려는 자세에 있 다. 이들은 반소라이학적 색채가 깊었으며 동시에 소라이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절충은 어디 까지나 절충이지 창조를 의미하지 않았다. 이런 절충성은 소라이학 이후 유학계의 공통되는 경향이다. 주자학도 그 사유방식이 사회적 적합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상 순수한 주자학에 머물수 없었다. 당시 부진하던 주자학파의 하나인 카이토쿠도懐徳堂 일파의 학풍은 1대 학주 미야케 세키안三宅石菴의 경우 그 학설의 절충성 때문에 야학문鵺學文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런 절충 경향은 교호 후반 서민층에 보급 된 세키몬 심학石門心学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심학의 기반은 송학이지만, 송학의 배타성은 사라지고, 신도와 타협하고, 불법과 유도가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인정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어떤 법도 버리지 않고, 어떤 법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며, 개인수양에 도움이 된다면 모두 받아들이는 태 도로 밀고 나갔다. 소라이학은 성인의 도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어떤 영역에서 다른 사상을 용인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심학의 내용 그 자체에 잡다한 사상계통이 흘러들어 단순하게 뒤섞인다. 심학은 통속 도덕으로 널리 대중화되었지만, 이론적 가치는 절충 고증학파에 미치지 못했다.(267-269) 이런 절충성 은 근세 일본의 유교가 이미 독창적 발전을 멈추었다는 것으로 후지와사 세이카에서 시작된 근세 일본 유교 사상은 소라이에게서 절정과 마침표를 찍었다.(269) 그리고 절충학파가 등장한다. 학파라기 보다는 절충적인 경향이 대세를 띄게 된다. 그런 경향들 속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세키몬 심학이다. 일본의 여러 사상적 경향 중에서 전문가인 학자들에게서 가장 홀 대를 받은 것이 바로 이 세키몬 심학이다. 확실히 정통사상적 측면에서 그 가치를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 다. 그러나 반면, 마루야마도 지적했듯이 개인수양과 통속도덕이라는 두 개의 주제는 오늘날 일본을 자 기개발서의 대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서구의 그리스도교가 상층부의 교의와 하층부의 통속 신앙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일본 사상의 하층부나 종교적 심성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이 통속도덕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통속도덕에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이 주어져야 한다.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8/40 국학国学the National Learning이란 참 흥미로운 이름이다. 토다 모스이, 승려 게이츄, 카다노 아즈마 마로荷田春満, 카모 마부치加茂真淵(1697~1769). 이 글에서 과제인 국학이란 카모 마부치에 의해 발 전되고,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에 의해 완성된 일련의 사상 계열을 말한다. 이 국학 의 형성에 소라이학 역시 기여했다. 여기서 마루야마는 개개의 국학자에게서 그 영향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자학적 사유양식의 분해과정이 국학이라는 하나의 정리된 사상의 형성을 어떻게 내재적으로 준비했는가 그리고 그 결과 양자는 어떠한 구조적 연관성을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269-270) 이런 영 향 내지 관련성은 의식적인 그것에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발흥기 국학은 유교에 대한 철저한 대립자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했고, 국학의 계보에서 어떤 유학파로부터의 영향도 준엄하게 거부했다. 국학이 스스로 고학古学이라고 했기에 유교 고학파에서 유래한다는 비평이 제기되기도 했으니 국학자들은 고학파와 아 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강조해야만 했다. 노리나가는 『ある人のいへること』에서 고학은 고문사에서 생 겨난 것이 아니라 게이츄가 열었다고 말했다. 국학자들은 적극적으로 겐엔학파를 유교 공격의 목표로 삼 았으며, 다자이 슌다이가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마부치가 고도古道를 천명한 『国意考』의 주제는 슌다 이의 『弁道書』에 대한 반박이며,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1776~1843)도 『弁道書』를 공박하는 『呵妄 書』로 사상계에 등장했다. 노리나가는 특별히 슌다이나 소라이를 겨냥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중화 숭배 사상에 대한 공격은 소라이학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가 『くずばな』에서 논쟁 상대로 삼은 이치카와 가 쿠메이市川鶴鳴는 겐엔학파 유학자였다. 이런 점은 국학과 소라이학의 관련성을 부정하기는커녕 유사성 을 보여준다. 마루야마는 헤겔을 인용해서 소라이학은 유대인들이 구원의 문 바로 앞에 서 있기 때문에 거꾸로 가장 배척받는 존재가 된 것과 같다고 말한다.(271-272) 카모 마부치는 다자이 슌다이의 제자 와타나베 게이안渡辺蒙菴에게 한학을 배웠고, 핫토리 난카쿠와 가까웠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겐엔과 직접적 인적 교류는 없었지만, 그가 유교적 소양을 배운 호리 게이잔堀景山은 소라이와 편지를 주고 받 던 사이였고 리가 비어있다거나 문자의 원래의 뜻이 중요하다거나 성인과 예악을 천자 즉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은 소라이에 가까웠다. 그는 욕欲을 인정人情이라하며 엄격주의를 비판했다. 주주朱 注 시를 보는데 정확하지 않다면, 주자학적 예술관에 반대했다. 시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것, 와카는 사람의 마음에서 싹트는 것이라며, 예술을 윤리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주장했다. 소라이학과 국학의 직간접적 인적교류는 양자의 실질적 연관성을 강화시켜주는 계기였다. ((272-275) 주자학의 도는 천지자연의 리에 기초를 두고, 천지를 관통하고 사회와 자연을 포섭하며, 규 범이자 법칙이고 당위이자 존재인 포괄적인 도였으나, 소코・진사이・엣켄 등에게서 연속적 사유의 분 해과정을 통해 그 속의 계기들이 독자화하고, 인도는 천도로부터, 규범은 본성으로부터, 당위는 자연적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분리를 가장 정밀하게 이론화한 진사이에게서도 도는 이데아로서 여전히 선 험성을 띠고 있다, 소라이에서 비로소 도 자체의 궁극성이 부정되고, 성인이라는 인격, 피안적인 존재에 의존하게 되었고, 도는 절대적인 보편타당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도는 천지자연도 이데아도 아닌 성인 이 만든制作 것이기 때문이고, 도로 하여근 도이게 채주는 것은 리가 아닌 권위였다., 홉스는 권위가 법 을 만든다고 말했다. Au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 권위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도의 진리 성을 설득할 수 있다. 성인을 제거하면 성인의 도가 무너진다. 고대 중국이라는 역사적 지역적으로 제 약된 인격이 창조한 도가 존중할 가치가 있는가. 국학자들이 그 점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마부치는 중국 땅唐國의 유학자들이 사람이 만든 보잘 것 없는 그런 것을 만들었다고 비판하는데, 성인의 역사적・일회 적인 제작이라는 소라이학의 입장이 유교비판의 출발점이다. 노리나가는 성인이란 위력과 지략으로 다 른 나라를 빼앗아 빼앗기지 않도록 다스리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만든 것이 도이다. 정치적 목 적에서 도의 본질을 찾으면서 그 내용에 있어서 소라이학을 완전히 뒤집는다. 성인의 만든 것作爲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던 것이, 같은 이유로 배격당한다. 그들은 게이츄 이래에 일본의 고전에 대한 연구를 통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29/40 해 유교도덕과 고대정신 사이의 괴리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유교 비판의 방향성을 결정해 준 것 은 소라이학이다. 이것이 소라이학과 국학의 부정적 관련성이다.(275-278) 여기서 소라이학의 사상적 순수함이 중요하다. 근세 추기 유교의 배불론은 신불습합에서 신도를 해방시켜 유교와 연결시키려 시도 했다.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그런 시도의 싹이 있고, 하야시 라잔은 신도와 유교의 합일을 기도했다. 그 는 주자 철학에 입각한 리당심지理黨心地 신도를 수립했다. 야마자키 안자이의 스이카 신도垂加神道는 송학적 범주에 의해 『일본서기』를 해석 또는 왜곡한 것이다. 종래의 신도 중 하나로 이세 신도를 중흥시 킨 와타라이 노부요시度会延佳는 신도와 유가를 일치시키는 태도를 취했다. 막부 신도의 담당자 요시카 와 고레타루吉川惟足도 理學의 신도라는 이름의 타협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소라이학의 출현은 신도 와 유교의 결합을 차단시켰다. 고문사에서 드러난 성인의 도를 절대시하고 후세의 왜곡과 혼입을 엄밀하 게 배제한 소라이는 신도의 존재 그 자체를 완전히 부정했다. 그럼에도 성인의 도의 역사적・특수적 발 현을 승인해서 신도는 존재하지 않으나 귀신은 숭상해야 하며, 일본의 신을 존경하는 것이 성인의 도라 고 말했다. 공적인 측면을 받아들인 다자이 슌다이는 소라이의 신도 부정을 철저하게 밀고 나갔고, 슌다 이는 신도를 칸나기巫祝의 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교의 지배적 흐름을 이루던 겐엔에게 내몰린 신도는 독자적 입장을 구축해야 했고, 국학자들은 구신도旧神道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고, 국학자들의 고 신도古神道와 소라이학은 신도와 유교의 결합에 대해 공동전선을 펴게 되었다. 노리나가는 후세에 신도 라는 부류가 주장하는 것은 모두 유불이 만들어낸 것으로, 소라이가 신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지적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했다. 다자이의 신도자들이 말하는 신도는 유불이 말하는 것을 부러워해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옳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소라이와 슌다이는 진정한 신도가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고 비판한다. 그들은 중국漢国만을 존숭하고 일본皇国을 천박하게 여긴다며, 일본의 신전神典을 보면서 그 신도가 외국의 도보다 뛰어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비판한다. 물론 소라이 중국을 가장 훌륭 한 곳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라이학의 사상적 순수함이 신도론神道論을 통해 소라이학과 국학 을 부정적으로 매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278-281) 마루야마에 따르면 국학 여기서는 노리나가학은 소라이학을 부정적으로 매개한 사상적 발전을 통해 등 장한 것이다. 즉 국학, 노리나가학이란 소라이학까지의 모든 사상적 발전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개인적으로 소라이학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 주자학에서 소라이학에 이르기까지 그 연속성은 철저하 게 해체된다. 그런 해체 속에서 소라이학은 성인이라는 개인적 인격에 의존하고 있지만, 마부치와 노리 나가는 그런 성인 마저 중국인이고 정치적 변동과정에 있었던 사람이라면서 부정한다. 이들은 소라이에 근거해서 소라이까지의 모든 유교를 비판한 후, 다시 소라이까지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를 부정적 관련 성이라 한다. 신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앞서의 유학자들은 신불을 분리해서 신도와 유교를 연결하려 시도했다. 주자학의 해체과정과 비교하자. 그러나 소라이학은 당시의 신도를 모두 부정한다. 그러면서 도 소라이는 일본의 귀신을 존경하는 것은 성인의 도라고 말한다. 이것 역시 성인이라는 개인적 인격의 절대화와 비교하자. 소라이나 슌다이 모두 신도는 유불의 영향을 받은 것, 유불의 흉내를 낸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므로 신도를 배격한다. 그리고 노리나가는 여기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신도旧神道를 모두 배격한 후, 새로운 신도古神道를 주장한다. 그것은 일본의 고대 전적인 신전神典에 근거하는 것이다. 마 루야마의 노리나가 해석은 노리나가와 당시의 일본의 다른 사상가들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 라 소라이까지의 일본 근세 정치사상의 발전의 연속성 상에서 그 결정적인 전복으로 노리나가를 평가하 는 것이다. 자신이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와 같은 심정이라고 말한 것이 그와 같았다. 항상 문제는 마루 야마아 서양 정치사상의 발전을 정교하게 개념화하고 일본 정치사상을 그에 끼워맞추는 데 있다. 물론 그가 직접적으로 노리나가를 마르크스에 비견한 적은 없지만. 부정적 매개의 계기가 바로 헤겔의 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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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그렇다. 지금에와서는 노리나가를 차라리 유럽의 낭만주의와 비교하는 것이 낳을 듯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헤르더라던가. 근세 초기 송학적 사유가 신도의 밑바닥에 깔리게 될 때, 신도는 범신론적 아니 오히려 범심론적 Panpsychismus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라잔의 理當心地 신도, 와타라이 노부요시의 신, 작은 먼지에도 혼이 깃들어 있다는 구니노토코타치노미코토国常立尊로서 요시카와 고레타루의 신 모두 범신론적 성격 을 띄며, 인격신을 말하고 있다해도, 비인격적 리와 연속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가장 비합리적・종교적 색채가 짙은 스이카 신도까지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고신도古神道의 이론구성을 보자. 마부치가 유교의 좁은 고토와리理를 배제하자 자연이 세계의 가치 기준에 놓이고, 도의 근거를 비인격적인 것에서 찾는 다. 노리나가에서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는 『古事記』의 용례를 통한 귀납에 근거하여, 고전에 나타난 인 격신은 물론 무엇이든 평범하지 않고 뛰어난 덕이 있어 두려워할 만한 것을 모두 가미迦微(신)라고 이해 하고, 모든 신들에 대한 합리적 해석이나 윤리적 평가를 배제했을 뿐 아니라 그런 신들 및 세계의 최고 의 근원을 다카미무스비노카미高皇産霊神와 카미미무스비노카미神皇産霊神 두 신에서 찾았다. 고도古 道의 도 역시 천지의 길도 사람이 만든 길도 아니라, 외경스러운 타카미무스비노카미高御産巣日神의 미 타마御霊에 의해, 이자나기노오카미伊邪那岐大神, 이자나미노오카미가伊邪那美大神 시작했고, 아마테 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가 이어받아 지키고 물려준 도, 이를 신의 도神の道라 했다. 도는 조상신皇祖神 이 만든 것이다. 중국에서 신은 공허한 리일 뿐이라 확실히 존재하지도 않지만, 일본皇国의 신은 현존하 는 아메노시타시로시메스御宇 천황天皇의 미오야皇祖라고 하여, 추상적・관념적 신 개념과 철저한 대립 을 천명한다. 구신도旧神道의 범신론적 구성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주자학적 합리주의는 분해과정을 겪 는다. 천인天人의 분리, 이어서 천도天道의 후퇴, 천명天命이 전면에 나타났으나, 진사이가 도 자체를 자연으로 인정했으므로 천명은 멈춰버렸고, 소라이에 의해 도의 가치성이 그것을 작위作爲한 인격 에 귀 속되고, 그 인격이 피안성을 띠어, 비인격적 리는 인격적인 천에 의해 구축되었다. 여기에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사유방법이 딱들어맞는다. 소라이학은 신도神道 부정을 통해 외면적으로 노리나가학으로 이어지며, 근세 신도가 의거했던 유교사상의 범신론적 구성을 파괴함으로서 노리나가학에 의한 구신도 의 혁신을 내면적으로 원조했다. 노리나가는 성인을 땅위로 끌어내렸고, 그의 의식에서 소라이학의 사유 구성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도가 아니라 조상신이 창시한 길이라는 사유구성과 범주적으로 구별된다. 노리나가학에서 인격성을 하늘天에까지 인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늘은 신들이 사는 공간이다. 그러 나 소라이학을 내재적으로 이해하면 성인은 천에 이어져 피안성을 띠고, 천은 성인에 이어져 도를 근거 짓는 인격적 존재가 되므로, 소라이학의 성인 내지 하늘天의 지위와 노리나가학의 신과의 공통성은 부인 할 수 없다. 노리나가학과 소라이학의 도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되 그 근거짓는 방식은 동일하다. 주자학 적 합리주의에 대한 소라이학의 비판은 노리나가학에 이어져, 유교 내지 모든 유교적 사유를 배제하는 무기가 되었다. 노리나가에 의마면, 천지, 자연, 인사人事 모든 것의 근원은 신이 하는 바로 사람은 알 수 없다. 성인들이 자신들의 사사로운 지혜私智를 가지고 사물의 이치를 주장하지만, 천도든 리든 모두 암암리에 추측해서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이는 소라이의 송유, 천즉리天卽理에 대한 비판을 거꾸로 이 용한 것이다. 노리나가가 료부신도両部神道를 비판할 때, 유불선 삼교 중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린다는 주장을 사사로운 도라고 말하면서, 소라이학의 입장을 원용했다.(282-286) 국학 즉 노리나가학은 일본의 조상신을 숭배한다. 도 역시 조상신이 만든 것이다. 소라이학에서 말하는 성인의 도 역시 중국의 시공간적 제약하에 있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배격하고, 구신도 역시 유불신 삼 교가 뒤섞여 있다고 배격한다. 그런데 구신도를 배격하는 것은 소리이학도 마찬가지다. 마루야마는 이 점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않고, 노리나가학의 사유구성이 소라이학의 사유구성과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31/40 노리나가학이 소라이학을 배격하고 전복하지만, 소라이학이 성인의 피안성과 초월적 인격을 인정하는 방식과 노리나가학이 일본의 조상신을 인정하는 방식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둘은 같은 방식에 근거하여 사고를 전개하지만 결론을 뒤집는다. 이것이 마루야마가 소라이와 노리나가를 이해하는 일관된 방식이 다.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이 피안적 인격에 궁극적 근거를 두고 비인격적 리理의 가치규준성을 부정하는데 공통된 입장을 취한다. 주자학적 합리주의의 해체과정을 통해 점차 육성되고, 소라이학에서 유교의 한계 내에서 최대로 개화한 모든 성과는 노리나가학에서 소라이학의 마지막 제약인 유학이 제거됨으로 비약 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도학적 합리주의의 비판은 다른 한편 모스이茂睡, 게이츄契沖 이래 국학이 독 자적으로 소라이학의 부분적 영향 하에서 아즈마마로春満, 마부치真淵로 이어졌으며, 소라이학과 노리 나가학은 사유구조의 본질적 유사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그런 성과를 확보 발전시켰다. 먼저 문헌학적= 실증적 방법의 계수 내지 발전을 들 수 있다. 소라이의 고문사학古文辞学의 그 자체의 영향은 아즈마마 로, 마부치에서 찾아볼 수 있고, 특히 노리나가와의 관련에 있어서 문헌해석에 있어서 모든 주관적인 자 의를 배제하려는 지향이 소라이학 및 노리나가학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인격적 실재에 대한 절대적 존신 의 태도와 서로 표리를 이루고 있다. 소라이는 고인古人의 도는 책과 글에 있으니 이를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섞지 않고 이해하게 되면 뜻이 분명해질 것이다. 글도 뜻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바뀌며, 후세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견해를 바탕으로 성인의 길을 이해하려 하기에 모두 자기 식으로 해석한다 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성인을 깊이 믿기에 어떤 것이 적절하지 못해 보여도 성인의 도라면 나쁠 수 없 을 것이라 말한다. 노리나가학은 신대神代의 일을 기록한 책을 중국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알 수 없고, 기기記紀해석에 있어서 아프리오리한 범주를 버리고 이치에 어긋나거나 부도덕해 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조상신에 대한 비합리적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도의 선험성을 부정하고 성인에게 의존하게 한 소라이학이 진사이의 고의학의 도학적 왜곡을 배제하여 유학적 문헌학을 구축했 다면, 유교의 사카시라さかしら에 대해 자연을 대치시킨 마부치를 뛰어넘어 자연을 포함한 모든 이데아 의 우위를 배격한 노리나가에 의해 국학 본래의 문헌학은 확립되었다. 소라이에게 의義보다 물物이, 논 의의 정밀함 보다 일事와 말辞이이 근저에 놓였던 것처럼, 노리나가에게도 이 세상의 일에 대해 알려주 는 신대神代의 사적事跡을 연구하는 것이 고학古学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소라이학에서 고문사학을 통 해 밝혀진 도는 선왕의 가르침 또는 술이지만, 노리나가학에서 사적 자체가 도라 가르침으로 규범화되어 야 할 것은 아니다. 고도란 사물에 이르는 길일 뿐이다. 가르침이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가르침을 배제하고 사실物을 향해 나가려는 태도에서 전통적인 학문의 개념은 중대한 전회를 겪게 된다. 가르침은 스승에 전수에 기반하고 있다. 문헌학=귀납적 방법의 발흥은 그런 전통을 파괴하게 된다. 국학자들은 가학의 사승전수를 비판했고, 소라이는 강석중심주의를 배격했다. 노리나가에 의해 사실에서 벗어나는 규범은 모조리 부정되자 이런 전회는 방법론적 자각으로 고양되었다. 학문은 진리에 대한 것이지 가르침 에 대한 것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학문과 대상 사이로 옮겨가게 되었다. 마부치는 스승에도 자신의 학설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말했다. 가르치는 이유는 도를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287- 290) 마루야마의 논리 전개는 일견 간단하면서도 촘촘하기 때문에 더듬어가는 일이 여간 성가시지 않다. 여기 서 마루야마는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같은 특징으로 문헌학적=실증적 방법을 들고 있다. 그것은 이 두 사람 모두 도덕적인 가르침의 전승을 배격하고, 문헌과 사실도 돌아가는 태도를 가리킨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해석사에 대한 부정이다. 고문헌에 대한 이해는 해석사를 따라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라이도 노리나가도 모두 이런 해석사적 전개를 부정하고, 고대 문헌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라이는 유교적 문헌학이고, 노리나라는 이것을 훌쩍 뛰어넘어, 일본적 신화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32/40 

의 문헌학을 택한다. (이것은 마치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 나 해석사를 무시한 채 원문으로 돌아가는 태도는 실상 자기자신의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을 진 심으로 믿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런 입장이 방법론적 전회이자 자각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시대적으로 또 사회사 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상사적으로만 평가할 때, 문헌학적이고 귀납적 또 실증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학문적 방법과 태도를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실증을 할 수 있다는 생 각 자체가 이데올로기이고, 문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평가하지 않은채 문헌을 존숭하는 태도가 실 증적=문헌학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는 있다. 말하자면 문헌학적인 것 을 곧바로 실증적으로 본데 문제점이 놓여 있다. 문헌을 무엇에 대해 실증할 때, 실증적이라고 할 것인 가. 마루야마는 이들이 문헌을 문헌 내에서 귀납하고 실증하며, 소라이나 노리나가 한 말이 실증 또는 귀납적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실증하거나 귀납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문헌 안에 서 돌고 있을 뿐이다. 비인격적 이데아의 우위성에 대한 부정에 수반되는 두번째 관련성은 역사의식이다. 주자학의 합리주의 는 삼대이전은 천리, 이후는 인욕이라는 규범적 복고주의였다. 고학파의 흥기는 규범의 역사적 변용이라 는 인식을 가져왔다. 도를 성인의 역사적 행위로 이해한 소라이학에 의해 도학적 해석은 배제되었고, 노 리나가학은 도의 규범적 해석을 철저히 배척했다. 노리나가학은 소라이학의 역사의식을 철저히 밀고 나 갔다. 노리나가는 인간적 규준에 의한 권선징악적 역사관을 배격하며, 천명・천도・신 같은 초인적 규준 에 의한 역사의 합리화도 반대했다. 좋은 사람이 망하고 나쁜 사람이 잘되기도 하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 하고, 세상의 모든 일을 신의 지배로 돌리는 신앙이 연결되어 신의 윤리화를 거부했다. 신은 단지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나을 뿐이다. 소라이가 성인도 역시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 성인의 절대화와 모 순되지 않듯이, 노리나가의 신의 윤리화의 거부는 신을 인간적 가치판단의 저쪽 너머에 두려는 그의 지 향의 당연한 결과다. 노리나가의 신과 소라이의 성인은 적극적인 규정에 있어 완전히 상반되면서 도학적 합리주의로부터 해방이 양자의 사유방식을 이렇게 가깝게 만들었다.(291-292) 역사 관찰에 대한 어떤 이데아의 도입도 배제하는 노리나가는 그의 고신도古神道에도 불구하고 묵시론적 말세론자일 수 없었 다. 고대로의 지향이라고 역사적 진보를 외면하지 않았다. 옛날보다 후세가 뛰어난 경우도 없지 않을 것 이라 말한다. 예를 들면 가론에서 만요슈만 내세우는 견해를 비판한다. 당시 국학자들이 분명한 근거도 없이 옛날 것은 좋고 오늘날은 나쁘다는 식으로 억지로 소리 높이는 복고주의는 유교와 대립된다해도 가 라고코로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소라이를 거치면서 유교적 합리주의를 부수고 한걸음씩 성장해가는 역사의식의 발전과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293-294) 마루야마는 다시 한 번 노리나가와 소라이의 사유방식을 비교한다. 이번에는 역사의식이다. 소라이도 노 리나가도 모두 도학적 역사관 즉 규범적 역사관을 배격하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다. 그러면서 각자 기준을 내세우는데, 소라이는 성인, 노리나가는 신이다. 이 둘은 모두 있는 그대로의 존재이며, 때로 잘못이나 한계가 있을지라도 믿어야 하는 신앙의 대상이자 존재이다. (이런 신앙은 어떤 종류의 근본주의에서도 모두 발견되는 형태다) 물론 노리나가는 소라이의 성인을 부정한다. 그는 신앙 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중국의 한 시대의 정복자에 불과하다. 소라이는 그때까지의 신은 배격한다. 그러 나 노리나가의 일본 신에 대한 존중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리나가와 같은 신앙은 부여하 지 않는다. 이 둘의 사고방식은 도학적 합리주의 즉 규범적 역사관을 배척하는 데서 다시 한 번 일치한 다. 그런데 노리나가는 복고적이지 않다. 실은 이 점에서 소라이도 살짝 모호하지만, 미래의 성인을 부 정하지 않는다. 마루야마는 다시 한 번 솜씨좋게, 소라이를 거쳐 소라이를 극복해 나가는 노리나가의 모 습을 그려낸다.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33/40 의문점은 다시 한 번 이렇게 만들어낸 소라이와 노리나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진보적인 것으로 볼 수 있 느냐에 있다. 이것이 진보적인지 아닌지를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마루야마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역사를 규범적으로 평가하는 척도로부터 역사 또는 현실을 구해낸 것처 럼 보인다. 마치 랑케의 역사주의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그러나 실상 이들이 해체한 것은 척도에 불과하 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묘사도 냉정한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노리나가가 다소 진 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과거 특정의 어느 시점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기준으로 그 이후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복고적 합리주의가 가장 손쉬운 수단이며, 비판받아야 하는 견해인 것은 분 명하다. 그러나 그런 복고적 합리주의의 만능의 잣대를 깨트리는 것은 현실을 구해내기 위해서이다. 소 라이와 노리나가는 여기서 현실을 구해내는 데 까지 나갔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자기 스스로 를 구해내었다. 척도를 부수고, 척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돌린 후에 이들은 말하지 않을 수 있는 평가하 지 않을 수 있는 도덕적 자유를 얻었다고 하면, 지나친 판단이 될까. 도학적 합리주의의 분해는 인간 자연성의 해방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 세번째 연관성이 나타난다. 노리 나가학의 반엄격주의는 너무나 분명하다. 주자학에 있어서 규범과 자연의 연속성의 분열은 한편으로 규 범성의 순화, 다른 한편으로 자연성의 해방이라는 양면적 발전을 이루었다. 물론 중점은 규범성의 순화. 이런 분열을 밀고나가 규범을 순전히 정치적인 것으로 고양시켜 모든 엄격주의를 배제했던 소라이학에 있어서 성인의 도의 본질은 공적인 측면에 있다. 노리나가는 소라이적인 도 역시 배척하고 일체의 규범 이 없는 곳에서 그의 도를 찾아냄으로써 비로소 인간자연성은 적극적 기초를 확보하게 되었다. 도란 학 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던 마고코로真心다. 후세 사람들은 모두 가라고코로漢心에 관심을 기울여 마고코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른바 지나치게 영악한 마음이 생겨났다. 마고코로를 본연의 성으로 가라고코로를 기질의 성으로 보면, 주자학의 인성론과 흡사하다. 천리天理의 자연성에서 도를 찾았던 주자학의 자연주의는 소라이학에 의해 기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비 관주의로 다시 한 번 인욕人欲의 자연성에서 도를 찾아내는 노리나가학에 이르렀다. 노리나가는 인욕이 천리라고 말했다. 도학적 낙관주의에 대한 부정의 부정으로 감성적인 낙관주의가 탄생했다. 유불이 전래 되기 이전의 상대上代를 찬미하고 있다. 각자 주어진 바를 다하면 평온하고 즐겁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 던 시대였다. 노리나가는 마고코로를 통해 당시의 지배적 도덕의식의 형식성과 위선을 폭로했고, 이런 낙관주의는 메이지 초기 계몽사상가 쓰다 마미치津田真道에 의해 인욕 중에 정욕은 진보를 도와주는 것 이라고 전개되었다.(294-296) 반엄격주의에 있어서 문예관도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관련성을 보여 주며, 여기서도 노리나가학은 소라이학의 사유를 이어받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노리나가의 초기 문학론에는 윤리 및 정치로부터 문학의 해방이라는 측면이 나타난다. 여기서 시문의 도학적 해석을 배척 하며 사적인 영역에 귀속시킨 소라이학과 현저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노래란 정치를 돕는 것도 수양을 위한 것도 아닌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말할 따름이다. 시는 권선징악을 위해서가 아닌 기쁘거나 슬플 때 노래한 말일 뿐이라고 하여 소라이와 일치하고 있다. 소라이가 시를 윤리・정치로부터 해방시키면서 시 의 효용을 인정을 이해하고, 도리를 드러내게 되어 다스리는 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 것처럼, 노리나 가도 와카가 정치를 돕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군주된 자가 아랫사람의 정서를 아는 것, 모든 것 의 의도나 느낌을 아는 것이 노래의 쓰임새다. 중점은 문예의 윤리・정치로부터의 해방에 있으며, 부차 적으로 정치적=사회적 효용이 언급되고 있는 점이 양자의 사유방식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소라이 가 와카를 시(시경)와 같지만 여성스럽다고 한데 대해, 노리나가는 시와 와카가 본질적으로 같다며 오히 려 시는 어린 여자아이女童(여자와 어린이)가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고 후세의 남성적 시가 오히 려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감동을 받는 것이 마고코로에 들어맞는다는 노리나가의 주정주의다. 중 고학中古学으로부터 얻은 입장을 밀고나간 노리나가는 소라이 문예관의 마지막 제약을 벗어던지고, 마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34/40 

부치마저 극복했다. 마부치도 타오야메부리たをやめぶり에 대해 마스라오부리ますらをぶり를 찬양하 여, 여성스러움을 멸시하는 소라이에 가까웠다. 반면 노리나가의 문학론은 전장의 용사라도 죽기 싫어하 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으로 마스라오부리의 한층 더 깊은 곳에 있는 우타모노가타리 歌物語의 본질로서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를 찾아냈다. 문학의 독립은 여기서 확보되었다. 노리나가 에서 고유한 가치를 자각한 문학은 마부치로부터 이어받은 고대주의와 융합하여 고도古道의 핵심적 지 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의 도는 선악시비 같은 것은 없고, 풍요롭고 유유하며 세련된, 노래가 말하고 자 하는 것이다. 모노노아와레는 신도 그 자체의 본질이다. 수신이나 치국에서 해방된 문학은 다시 정치 적=사회적 성격을 띄게 된다. 노리나가에 있어 문학의 정치화란 변질도, 정치적 효용도 아닌 문학적 정 신(모노노아와레)이 정치 원리처럼 되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상대上代를 이상으로 하는 노리나 가의 낙관주의의 방법적 밑바탕이다. 문학이 문학이면서 정치화되는 것, 정치가 문학화한다는 것은 정치 가 비정치화entpolitisieren된다는 것이다.(296-301) 마루야마가 발견한 소라이와 노리나가의 세번째 공통점은 반엄격주의이다. 이 반엄격주의는 자연의 해 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도 소라이는 소극적인 형태이자 비관주의의 형태를 띄고 있는 반면, 노 리나가에게서 자연성에서 도를 찾아내는 감성적 낙관주의가 나타났다. 이것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라이는 문학을 윤리로부터 자유롭게 하면서도 정치에 효용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노리나가는 정치의 효용도 아닌 문학 자체가 정치원리가 되는 극단적인 주정주의이자 정치의 비정치화로까지 나아가게 된 다. 반엄격주의에 있어서도 소라이와 노리나가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소라이는 어디까지나 소극 적인 형태로서 반엄격주의의 자리를 확보하는데 그치는 반면 노리나가는 이를 극한까지 밀고나가 감성 적 낙관주의이자 주정주의, 정치의 비정치화에 이르게 된다. 마루야마는 사유양식의 이 세 가지 점 모두 에서 소라이와 노리나가의 공통점을 발견하되 노리나가가 소라이에 입각해서 그를 궁극적으로 극복했다 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도 마찬가지의 의문점이 다시 제기된다. 다시 소라이와 노리나가를 서양 사상의 발전사 위 에 놓아보자. 자유의 발견, 엄격주의의 해소는 분명히 발전적이다. 문제는 자연의 해방, 즉 자유의 발견 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 즉 세계상을 결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들은 자연 스럽고 자유롭게 되는 것에 어떤 정당성도 부여하고 있지 않다. 즉 현재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어 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자연의 해방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그런 방식이 아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하면 태평하고 잘된다는 것이 결국 노리나가의 주장이 아니던가. 소라이의 위기의식이나 비관주의가 어떤 궁 극적 행동을 낳기는커녕, 자신을 정치적 의무에서 해방시킨 결과가 아니던가. 자연의 해방은 어떤 의미 에서는 부차적 결과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어떤 사상적 발전 의 단초나 계기들을 마루야마 처럼 어떤 거대한 발전의 한 단계나 문턱으로 볼 수 있느냐에 있다. 그것 이 발전이나 극복의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사회적 조건과 결부되어야 한다. 역사적 계기들과 결부되어야 한다. 그런 것들로부터 떼어낸 발전이나 극복의 계기가 과연 서양사 또는 서양사상사에서 발 견된 그것과 같은 기능을 하는지, 그렇지는 않더라도 역할을 하는지는 다시 역사 안에서 역사적 맥락을 비교하면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사상사는 사회사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이렇게 사 상사의 계기를 잘 벼려내어 멋지게 드러내는데 그친다. 이것은 한계라기 보다 그의 암묵적 의도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의 맥락으로 되돌아갔을 때. 정반대로 기능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암 묵적으로 모순을 알아서 깨달을 수도 있겠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가 섬세하게 세공한 이 사상사의 건 축물은 그 자체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35/40 국학은 소라이학의 뒤를 이어 모든 유교적 작위를 부정하는 존재로 등장했고, 소라이학에서 사적 영역으 로 소극적 자유를 향유하고 있던 내면적 심정 자체에서 둥지栖家를 발견하게 되었다. 국학은 소라이학의 공적인 측면을 완전히 배제하면서 사적・비정치적인 그것을 전반적으로 이어받게 되었다. 고문사학의 고증적 입장이나 역사 의식은 소라이학 전체의 기초적 성격인데, 구체적으로 견문이 넓고 사실이 행해지 는 비정치적인 대상에 보다 많이 발현되었다. 소라이학의 유학자는 글을 지키고 전하는 것이고, 노리나 가학의 학자는 길을 연구해서 밝히는 것뿐으로 실천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학자의 지위가 비정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노리나가와 소라이는 사적인 측면을 통해 이어지는데, 소라이학의 사적인 영역이 유교를 정치화함으로서 생겨난 부산물이었던데 반해, 국학은 모든 규범성을 소탕한 내면적 심정 그 자체를 도로 형상화했다. 이렇게 해서 국학은 소라이학에 있어서 비정치적인 것을 거꾸로 정치에 이어지게 했다. 마 부치는 노래하는 마음이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사람들은 평온하게 지내는 기초라고 하였다. 노리나가는 모노노아와레를 알면 몸, 집안,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여, 윤리・종교・정치 기타 모든 가치기준에 서 완전히 독립된 문학적 정신을 그대로 정치적인 것까지 밀어 올려, 정치의 비정치화가 완성되었고, 규 범주의적 사유에 대한 안티테제가 철저해졌다. 모노노아와레적 정신의 규범화 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모 노노아와레가 비모노노아와레적인 것에 대한 규제 원리가 될 때 순수성은 상실된다. 규범에 대해 자연을 주장하면 이미 자연이 아니다. 노리나가는 마부치가 예찬한 노자의 자연을 비판하며, 옛날의 자연을 강 요하는 것도 억지라며, 노자의 오류는 그의 약삭빠른 꾀智慮로, 사변의 산물이라, 자신의 사카시라(영악 함)을 조금도 섞지 않고, 카미노미후미神典에 보이는 그대로인 그의 고도古道와 구별된다. 노리나가가 심정의 순수성을 존중하는 것과 학문론의 객관적=실증적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이지理 智적 의미와 의지意志적 의미에서 사카시라를 배제하고, 세상의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신의 마 음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학문적 타협을 거부했다. 그의 고도古道란 옛날처럼 사는 것 도 아니고, 옛날의 신도를 행하는 거도 아니다. 이런 일들은 신을 넘어서는 것이라며 정치적 복고주의를 거부했고,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오늘날의 법령, 오늘날의 상식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면서, 도쿠가와 막 부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나타냈다. 이는 주어진 것을 주어진 것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의 입장의 귀 결이었다. 그러나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정당화도 아닌 그 시대의 법은 그 시대의 신의 뜻이라 말하는 것으로 정치 형태가 변화하면 그것을 새로운 신의 뜻으로 긍정하게 되는 철저한 비정치적태도 unpolitische Haltung이며, 그 때문에 모든 정치원리를 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보수적인 심정이라기 보다 모든 낭만적 심정에 공통되는 기회주의적 상대주의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 라고 말하는 노리나가는 막부 형태의 역사적 신의神意적 필연성을 인정함으로써 아프리오리한 절대적 기초지움의 가능성을 박탈한다.(301-305) 노리나가학의 도는 결과적으로 자기모순이다. 노리나가의 도는 모든 규범의 부정이며, 소라이의 일事과 말辞도 아닌 일의 흔적事の跡이었고, 가르침으로 규범화되 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규범성의 부정이 부정으로 철저화되자 그것은 긍정으로 바뀌게 된다. 노리나가의 도가 유불의 도와 구별되는 한 일의 흔적의 관념적 상승을 수반한다. 긍정의 자기발전. 고도 는 하나의 적극적인 규범이 되었다. 이는 노리나가 사후 히라타 아쓰타네에 의해 한층 더 발전되었다. 역사적인 소여는 단순한 소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하나의 정치적 이즘인 고도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히라타파 국학자들의 메이지 유신의 정치적 실천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이는 동시에 노리나가학의 학 문성도 파괴하게 되었다. 유교의 정치화의 뒤를 이어 이를 부정하면서 등장한 국학의 사상사적 딜레마는 실증적=객관적 정신이 비정치적 태도와 떼놓을 수 없게 얽혀 있다는 점이다. 국학은 그 자신을 배타적 정치원리로 끌어올리지 않고 학문적 방법의 순수성을 관철시키면서, 정치적 부문에서는 모든 이데올로 기를 포용하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서 생존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305-306) 마루야마의 노리나가에 대한 해석은 이해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앞부분에서 코멘트한 것처럼 노리나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36/40 

가학이란 실은 비정치적인 정치참여에 대한 포기와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 리나가를 비롯한 국학자들은 심지어 자기자신이 주장하는 모노노아와레까지 일종의 가르침이나 이념이 되는 것을 거부하려고 한다. 그렇게해서 형성된 비정치적 태도란 모든 정치형태를 포괄할 수 있는 기회 적의적 상대주의라는 지적은 적절하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형태를 고수하려는 보수주의가 아니다. 노리 나가가 보수적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마루야마는 당대의 근대초극론자들에게 국학에 근거할 수 없고, 당신들의 논의는 국학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마루야마의 논의는 살짝 이해 하기 어려운 표현으로 나타난다. 노리나가의 도쿠가와 정권에 대한 지지는 그것이 어떤 정권이라도 절대 적으로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프리오리한 절대적 기초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막부에 대한 지지가 토막에 대한 지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원리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현실 정치의 권력에 대한 지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노리나가는 지독한 현실주의 아니 현실긍 정의 장으로 들어간다. 이런 해석은 막말에 있었던 모든 주의와 사상이 막부와 황실을 오가면서 양이와 개국을 오가면서 전개되었던 혼란상에 대한 어떤 복선을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루야마의 주장을 따라가기가 성가실 뿐 아니라 따라가서 동의하고 나면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다. 그래서 마루야마는 노리나가의 도가 자기모순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노리나가학에는 고도 의 일종의 규범화 가능성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히라타파로 그리고 메이지 유신 즉 존황론 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고도 즉 일본이 태양신의 후계자인 천황일맥이 다스 린다는 신화가 규범이 되어서 그것이 메이지 유신 국가를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평가다. 역사적 소여가 단순한 소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정치적 이즘인 고도의 비판을 받았다는 말은 장래의 논거를 위한 일종의 밑자락이다. 그러나 그 전개를 학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노리나가의 후계자들의 활동 은 노리나가학의 파괴였다. 노리나가의 비정치와 달리 그 후예들은 고도를 근거로 내세우면서 적극적으 로 정치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의 내용은 유교, 불교, 신도에 서양의 개국과 양이 사상이 뒤 얽힌 이데올로기의 혼종성이었다. 마루야마의 논리를 따라가기 어렵게 만드는 지점이 실증적=객관적 정신과 비정치적 태도를 연결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실증과 객관이라는 두 단어에서 혼란을 가져오게 만 든다. 노리나가가 말하는 실증과 객관이란 고도 즉 일본의 옛 정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 에 대한 어떤 유교적 또는 불교적 해석을 배격하는 태도이고, 비정치적이란 현실정치를 무조건적으로 수 용하는 상대주의를 말한다. 마루야마는 이를 실증적=객관적 정신이라고 말했다. 노리나가의 입자에서 보면 그것은 나름의 실증이고, 유불이라는 주관적 해석의 개입을 막는 객관일 수 있다. 그러나 실증이나 객관이라는 개념이 떠올리는 그런 타당한 근거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실은 그것은 노리나가 자신의 기 기해석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도 하나의 해석론에 불과하다. 당대에서 실증이나 객관이 아닌 순수주관적인 이데올로기가 있을 수 있는가. 마루야마가 지나치게 비교가능한 개념적 틀을 가져와 견강부회에 이르게 된 것이다. 비정치적 태도에 대한 사상사적 의미 부여가 정치화의 극복이라는 것은 지나친 해석인데. 왜 이런 인위적인 논리구조를 가져오는가 하면, 마루야마가 헤겔의 사상사적 방 법론에 근거해서, 대립 즉 모순을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상정했기 때문에 정치화와 비정치화라는 대립 과 모순에 집착한 것이다. 이것이 대립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비정치화가 의미를 가져야 한다. 정치현실 을 외면하는 태도가 비정치화로 적극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후예들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논리는 이렇 게 성립한다. 이것은 정교하고 공들인 억측이다. 차라리 연속성을 보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장 5절 맺음말 근세 초기 사상계를 독점했던 주자학이 어떻게 사회적 적합성을 상실해 갔으며, 그 적합성을 회복하기 위해 유교를 정치화시킨 소라이학이 도리어 비정치적 계기를 자기 내부로 도입함으로써 어덯게 국학의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37/40 대두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 과정을 통해 근대의식이 어떻게 싹을 틔워갔는가를 사유양식의 미 묘한 변용 속에서 구체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목적이다.(307) 그는 이 맺음말에서 비로소 자신이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속내를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는 현재를 향해 발언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미셸 푸코가 고고학과 계보학을 통해서 현재의 역사를 서술한 바로 그것이다. 그가 주자학의 해체과정을 통해서 말하는 것, 정치적인 것의 발견이라는 의미에 서의 근대라면, 일본에는 이미 소라이에 있었고,(이 지점이 한국인에게 열등감을 가져와 눈을 가리지 만,) 그렇기에 그를 수용하고, 대립적으로 극복해서 발전시킨 노리나가도 근대성의 맹아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일본의 전통 속으로 소박한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근대초극론자들의 주장이란 근거가 없 다는 주장이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그 조차 만들어진 전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근대의식을 내면적인 사유양식 속에서 찾고, 반드시 정치사상에 있어서 반대자적 요소 속에서 찾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막부 절대주의를 주장한 소라이나 막부정치는 신의 뜻神意性이라고 주장한 노리 나가 사상은 같은 시대 유학자들보다 더 봉건적이다. 그러나 밑바닥의 사유양식의 변혁이 그 위에 정치 사상의 변혁과 나란히 진행된 유럽근대사상과 달리, 일본은 도쿠가와 시대에 시민사회의 힘이 봉건사회 의 안에서 성장하는데 방해를 받았고, 도쿠가와 시대에 우연적인 조건의 지배를 받아 바탕을 이루는 사 유와의 연관성을 결여한 정치론에 대해 근대의식을 엿보면 자의적인 결과에 빠지게 된다.(마루야마가 고심했던 지점은 여기일 것)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이런 저런 사상의 단편적 근대성이 아니라 사상의 계 통적 맥락 속에서 일관된 근대의식의 성장을 찾아보는 것이다. 둘째 근대적 의식을 주로 유교의 자기분 해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아무리 풍부한 근대성을 가지고 있어서 고립된 학자는 제외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나 미우라 바이엔. 난학과 난학자들의 근대의식도 고려하지 않았다. 오로지 유교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학파와 순수한 유학자만을 다루었다. 이는 유교가 봉건사회의 가장 강력한 의식형태인 한, 바깥으로부터의 파괴가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생각지도 않았던 성과로서의 해체과정의 분석이 근세 일본 사상이 단순히 공간적으로 지속되지 않았던 까닭 그 발전성을 가장 잘 증 명해 보여줄 것으로 생각했다. 일본에 있어서 근대적이 갖는 양면성 즉, 그 후진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체성非停滯性이 이런 방법론을 규정한 것이다.(308-309) 외부자가 동아시아의 사상가들을 볼 때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지점은 이런 것들이다. 현상적으로 근대적 이거나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지만, 그 바탕은 아주 봉건적일 수 있다는 것. 예를 들면, 고대적 자연주의 사상에 근거해서 만민평등이나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토지분배를 주장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결과적 으로는 아주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결과를 낳는 배경에 깔린 사상은 가장 전통주 의적인 것이다. 아마도 이 부분이 그의 가장 고민이었을 것이다. 근대적으로 보이는 몇몇의 돌출된 학자 들의 견해를 다룬다고 근대성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것. 오히려 봉건사상의 연장에 불과한 주류 사상 의 전개에서 근대성을 찾으려는 그는 이런 근대의식에 대한 고민을 사건적이나 단편적인 데서 찾지 않 고, 비정체성이라는 측면 곧 헤겔이 말하는 대립의 발견에서 찾아내려 한 것이다. 사상에서 내면적으로 대립과 모순이 발견될 때, 그는 여기에 주목하고, 그런 사상가가 아직 현실정치적으로 제도적인 근대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이를 인정했던 것이다. 후진성과 비정체성이란 이런 현실에 대한 설명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흥미롭고 또 놀라운 것은 사유양식을 둘로 분해한 것이다. 사유의 내적 구조와 그 결과로 나타 나는 사유의 외면화. 이것은 마치 마르크스의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유물론적 구조를 사상 안으로 가져온 것 같다. 사유의 내적 구조란 사유의 토대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사유의 유물론을 전개한 적은 없다. 이 것은 또 그람시의 진지전과 헤게모니를 말하는 것도 같고. 미셸 푸코가 말하는 에피스테메와도 유사하 다. 마루야마 자신이 훗날 정치의식의 집요저음執拗低音basso ostinato라는 일본적 형태의 연속성에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38/40 몰두했던 것과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고 있다. 근대적 정신은 합리주의를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삼는다. 그런데 주자학에서 소라이학을 거쳐 국학에 이 르는 과정은 합리주의 보다는 비합리주의적 경향에로의 전개를 보여준다. 이는 두 가지 측면 세계사적 과정과 주자학의 특수성의 양측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첫째, 근대적 이성은 비합리적인 것의 점차적 구 축에 의해 직선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근대적 합리주의는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한 경험론과 상호 제약 관계에 있는데, 인식 지향이 경험적=감각적인 것으로 향하기 전에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지향이 일단 차단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 과정에 이성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는 범위가 현저하게 축소되어 비합 리적인 것이 우위를 차지한다. 이는 유럽의 중세에서 근세에 걸치는 철학사에서 후기 스콜라 철학의 역 할이다.(여기서 마루야마의 속내가 드러난다) 둔스 스코투스의 프란시스코 학파 오캄의 윌리엄 등 유명 론자는 전성기 스콜라철학의 주지주의와의 투쟁에 있어 인간의 인식능력에 제한을 부여해 종래 이성적 인식의 대상이었던 많은 사항을 신앙의 영역에 할양하여, 한편으로 종교개혁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 자 연과학이 발흥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소라이학이나 노리나가학의 비합리주의가 바로 그런 단계에 있었 다. 고학파나 국학이 유명론과 같지 않은 것처럼, 주자학적 합리주의와 스콜라적 합리주의 사이에 결정 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후기 스콜라철학이 토미즘에 대해 자겼던 사상사적 의미와 유교 고학파 내 지 국학이 주자학에 대해 가졌던 의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마루야마는 각주 에서 종래 고학파와 국학의 흥기를 르네상스에 비견한 것을 비판하며, 사상의 계몽성에서 그런 비교는 무리라며, 비교할 시기를 1, 2세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평한다) 주자학의 궁리의 제한적 성격은 진 사이에 있어서 천도로부터 인도의 분리 소라이에 있어서 정치의 경험적 관찰을 낳게 했다. 그리고 성인 에 대한 비합리적 신앙의 강화는 다른 한편으로 고전에 대한 문헌학적=실증적 입장의 흥기를 수반했으 며, 그것은 성인에 대해 조상신을 대치한 노리나가에게 그대로 이어져 발전하게 되었다. 궁리를 철저하 게 방기했던 노리나가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하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리가 형이상학적 범주였던 한 자연과학적 인식을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길러준다. 예를 들면 그는 천문과 우주에 대한 추상적 설명에 대해 해달물불 등 눈에 보이고, 귀, 코, 몸에 닿는 것만을 알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아마테 라스오미카미는 지금도 사람들 눈에 보인다고 말한다. 『고사기』에 따르면 이는 태양이다. 노리나가의 사카시라(영악함) 배격은 감각적 세계에 대해서만 확실한 지식을 용인하려는 입장과 연결되어 있다. 유 불노장 사상의 견강부회가 강했던 만큼 소라이나 노리나라가의 반동도 강했고, 그들의 실증적 태도를 손 상시킬 정도로 신비화 경향도 강했다. 풍운뇌우를 음양오행 같은 단어를 빌어 피상적인 설명을 한다고 해서 안다고 할 수 없다. 태극이나 괘를 통한 설명은 중국의 성인들이 망령되이 만든 것이다. 이렇게 말 한 노리나가는 ‘궁리’의 당시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진보적 파괴작업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근대적 인 궁리는 비근대적인 그것(음양오행 등)을 쓸어버린 후에야 개화할 수 있다. 한편 신도를 배타적 이데 올로기로 끌어올려 복고復古를 강행하려 했던 히라타파 국학자들은 얼마후 메이지 유신 당시의 지도력 을 상실하고, 서구화에 비분강개하는 일군의 반동주의자로 바뀌어 갔지만, 국학의 실증적 정신은 유럽의 시민문화 보급을 위해 활약한 계몽적인 신관神官들에게서 근대적 합리주의와 결합하게 된다.(309- 313) 서양 근대에서도 합리주의로 한 번에 나간 것이 아니다. 합리주의로 향해 가기 전에 비합리주의로 보이 는 역행이 있었다. 그건 원래 서양도 그랬다. 그것은 언제인가? 스코투스와 오캄으로 대표되는 후기 스 콜라였다. 그는 일본의 소라이와 노리나가학의 위치를 서양 근대사 및 근대사상사에서 후기 스콜라에 위 치시키려고 한다. 이를 일컬어서 서양사에 억지로 끼워맞춘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각주에서 그는 자신의 속내를 비춘다. 지금 사람들은 소라이와 노리나가를 르네상스에 비견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과적 으로 그들의 사상은 국민도덕으로 근대초극으로 흘러간다. 마루야마 생각에 일본의 도쿠가와 사회는 그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39/40 보다 훨씬 뒤쳐졌다. 거기서 1~2세기 더 위로 올려잡아, 후기 스콜라로 가야 한다. 그러니 근대가 너무 심해서 근대를 초극해야 한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말이다. 그리고 소라이는 물론 노리나가에게도 감각 기관을 중시하는 실증적 태도와 신화적 태양에 대한 신앙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사 상을 추구한 후기 스콜라처럼 그렇다. (와타나베 히로시가 서양 그리스도교를 대중적 종교와 스콜라적 사상으로 나누어 평가하는 것은 아마도 이 지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종교에 착목한다.) 마루야 마가 보기에 노리나가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것은 파괴적인 측면과 신화를 중시하는 수구적 측면 이다. 그리고 히라타파는 후자를 이어서 신도 복고를 감행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혼란에 빠져들 었다. 그러니 현대의 근대의 초극론과 국체론자들이 그들의 후예이다. 진정한 노리나가의 후계자는 그 파괴적 분열적 측면을 제시하는 계몽적인 신관들이다. 일본의 전통사상의 흥기를 후기 스콜라에 비견하 는 그 철저함에는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실학자들의 저술의 파편에서 혹은 문인들의 일기의 파편에서 근 대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요소 하나를 발견하고 희희낙락하는 견해와 비교하면 참담한 기분이 든 다. 둘째 주자학의 특수한 성격에서 기인하는 점이다.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강한 도학道学성을 띠고 있기에 그런 합리주의의 분해는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치의 독립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주자학의 연속적 사유 에 의해 윤리에 완전히 얽매여 있던 정치・역사・문학 등의 제 영역이 각각 그 고리를 끊고 문화적 시민 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정치는 수신제가의 연장에서 안민이라는 가치를, 역사는 교훈의 거울이라는 지위 에서 실증이라는 가치를, 문학은 권선징악의 수단이라는 지위에서 모노노아와레라는 고유한 가치기준이 부여되었다. 이 같은 문화 가치의 자율성 이야말로 분화된 의식으로 근대의식의 가장 상징적인 표현이 다.(314)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도학적이기 때문에 주자학의 분해과정은 다양한 문화적인 가치가 등장하게 된다는 점, 그러니 문화적 가치의 자율성 자체를 근대의식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 두번째 평가다. 그러 니 합리주의의 성장으로 보이지 않고, 일견 비합리적이고 무질서하며, 혼란스러워보이는 데 오히려 근대 의 맹아가 숨겨져 있다는 주장이다. 강력한 구조의 해체라는. 이처럼 유교사상의 자기분해 속에서 근대의식을 찾아내는 것에 어떤 현대적 가치가 있는가. 현재 근대적 사유야말로 분명하게 위기를 외쳐대고 있다. 현대 정신의 혼란과 무질서도 원천을 찾아낼 수 있다. 근대 적 사유의 곤란함이 전근대적인 것으로 되돌아감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가? 이미 내면적 분열을 겪은 의 식은 전근대적 소박한 연속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자율성을 자각한 문화가치도 다른 것과 무관하게 존 재할 수 없다. 예술은 다시 윤리와 연계될 수 없다. 역사도 과거 사실의 서술에 머물 수 없다. 역사가 도 학적 규준의 노비가 되어 있는 동안은 본래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헤겔의 실용적 역사서술을 철저하게 초극한 후에 참된 역사서술은 시작된다. 정치적인 것의 복잡함은 이미 소라이의 시대에 단순한 연속적 사유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현재에는 모든 규범적 제약을 배제한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갖는 독자적 의 미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그런 실증성을 잃지 않고 그것을 가치와 관련지을 것인가, 정치의 고유법칙성을 자각하면서 윤리와의 새로운 결합을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만이 남아 있다. 그리스적 사유의 단순함과 소 박한 아름다움으로 돌아갈 수 없다.(313-316) 맨 마지막 문단에서 그의 속내가 드러난다. 현대 근대적 사유의 위기를 외쳐대고 있다. 1940년 일본에 서 성행했던 근대초극론과 국체론 일본의 소박한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말한다. 마루야마는 그들 이 말하는 전통으로의 회귀가 문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돌아가려는 전통은 이미 해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돌아가자고 말하는 천황으로부터 모든 황국신민에 이어지는 소박한 연속성은 이미 오래전에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주자학적 체계의 연속성이 해체되었다는 마루야마의 주장은 근대 초극론은 이미 해체된 사상을 주술적으로 불러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10/25/23, 4:06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 | FELIVIEW feliview.com/theasian/japanese/maruyamamasao-nihonseijishisoushikenkyu-2/?ckattempt=1 40/40 상황이 변했기에 돌아갈 수 없다고. 일본의 전통을 말한 노리나가는 이미 해체한 그 위에서 불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얼마나 긴장하면서 썼을지. 그 긴장감이 느껴진다. 2018. 12. 1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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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3.
2018년 12월 10일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일본정치사상사연구日本政治思想史研究』, 김석근 역, 한국사상사연구소, 통
나무(東京大学出版会), 1995(1952).
2장 근세 일본정치사상에 있어서의 자연自然과 작위作為: 제도관의 대립으로서의
2장 1절 이 글의 과제
도쿠가와 시대에는 학문이 종교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 어쨌거나 자립적인 것이 되면서 현실성과 사회성
을 현저하게 드러내긴 했으나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곤 다양한 입장 내지 학파들이 거의 모두 봉건적 사
회질서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고 불가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논의를 전개함으로 정치적・사회적 측
면을 평면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학문은 치자 세계의 학문으
로, 학자들은 정부라는 새장에 갇혀있다고 말했고, 근세사상을 지배하던 유학이 정부의 전제專制를 돕고
윤색시켰다고 평가한다. 존황론도 도쿠가와 막부가 조정으로부터 정권을 위임받았다는 형태로 막부를
인정하고 있었고, 정세가 급박해져 존황론이 토막討幕 이데올로기로 나간 상황에도 봉건 사회질서 그 자
체의 변혁은 고려하지 않았다. 막말에서 메이지 초기의 사상 문헌을 시대순으로 훑어보면, 1871~2년의
일련의 개혁들, 페번치현, 신분제 정리, 직업선택의 자유, 토지매매 금지 해제 등을 전후하여 근대적 입
장에서 봉건제를 비판하는 주장이 갑작스럽게 잇달아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319-320)
일본에서 실제 근대적 입장의 사상은 메이지 4~5년(1871~2)을 전후해 급속하게 쏟아져 나온다는 점.
10/25/23, 4:10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3. | FELI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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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봉건사회를 비판하는 사상은 미리 생성되지 않았다는 점이 마루야마가 주목하는 지점이지만,
여기서 거꾸로 생각해 볼 때, 사상의 밑바탕을 살펴보려는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게 된다. 주목할 점은
거꾸로 근대 사상이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물론 와타나베 히로시는 그렇지 않다고, 개국
과 문명도 일본에 그 나름의 사상적 기반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근세 일본의 사상이 정치적 귀결점을 같이한다고 해서 그런 학파적 다양성을 섹트적인 대립으로만 보고
사상적인 정체성停滯性만 본다면 정당한 견해라 볼 수 없다. 현상적으로는 갑작스러워 보여도 내부 깊은
곳에서 낡은 것의 점차적 해제가 먼저 이루어지고 있다. 이른바 개화사상이 외래의 것이라 해도, 재래의
안의 것이 변질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시민 사회력의 미성장이나 산업자본
의 미성숙이 근세 일본 사상이 명백한 반봉건의식에 이르지 못했다해도, 봉건적 관념 형태의 내면적 부
식을 부정할 수는 없다. 체계적 구성에 한걸음 들어서 본다면,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사상의 논리적 광
맥을 찾아낼 수 있다. 1장에서 유교사상의 구조의 자기 분해를 사유양식의 전체로서 내재적 추이에 중점
을 두었다면, 여기서는 근데 일본 유교사상의 전개가 봉건적 사회질서를 보는 시각 내지 기초지워주는
방식에 있어 어떤 차이점으로 나타났는가, 그런 차이점의 보편적 의의는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주자학도
소라이학도 봉건적 지배관계 자체를 절대시하지만 그 논리적 과정은 정반대이다. 마루야마는 그런 대립
을 자연自然과 작위作為라는 두 개념을 지표로 설정하고, 그런 개념의 대립이 봉건 사회의 틀 내에서의
Wie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중세적 사회=국가제도관과 근대적・시민적인 그것과의 대립이라는 세계사
적인 과제를 내포하는 이유를 밝히고, 나아가 메이지 초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양상을 검
토한다.(321-322)
새로운 사상이 없다고 일본이 사상적으로 정체했다고는 볼 수 없다. 내부에서 변질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근대 사상은 외래적인 것으로 본다. 이 장에서 마루야마가 주목
하려는 것은 ‘봉건적 사회질서를 보는 시각 내지 기초지워주는 방식’이라는 말로 표현되어있지만, 이것
을 근대정치사상의 말로 하면, 당연하게도 주권이론 또는 사회계약론이다. 구체적으로 이론화되지 않았
다면, 그는 어떤 사회적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에 대해 탐색하겠다는 이야기이다. 구체적으로 개인
간의 사회계약에 기초한 자유로운 사회상을 꿈꾸지는 못했을 지라도 그런 논리가 성립할 수 있는 기반,
다시 말하면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된 주권이론 같은 것을 발견할 수는 없는지. 그것을 그는 유명한 자연
과 작위의 대립에서 찾으려 한다. 다시 헤겔로 돌아가서 대립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근세 일본의 사상가들은 봉건적 사회질서를 보는 시각이나 기초지움이라는 점에서 자신이 처해 잇는 정
치적 사회적 환경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여 그 질서의 타당한 근거를 논하거나 하지 않았다. 사회
적 현실 그자체에 대한 고찰보다 고전에 대한 지식을 오로지 학문적 사색으로 생각하는 전통이 있었고,
당시 학자들 대부분은 경서로부터의 지식을 통해 현실사회도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교의
제 범주를 시좌視座Aspektstruktur로 받아들였고, 그 시좌를 통해 봉건적 사회질서를 보았다. 천자, 제
후, 경대부, 사, 서인, 사농공상 등이 그렇다. 유교의 제후와 근세 일본 봉건제의 다이묘, 사와 무사의 내
용적 차이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륜은 그들이 알고 있는 사회관계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고, 군신의 의君
臣の義라는 구절을 접할 때, 중국 주대의 군신관계가 아닌 봉건적 주종관계를 연상했다. 그 시대의 학자
들이 모두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벗어나 경서에 대한 논의에만 몰수한 것은 아니고, 다만 인식지향과 사
회관계는 오륜이라는 매개를 수반해야 했다. 따라서 오륜의 기초지움을 살펴봄으로써 봉건사회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322-324)
그러나 그 방식은 구체적인 사회이론이나 사회적 상상을 통해서는 볼 수 없다. 당시의 사상가들은 소수
를 제외하고 대부분 경서의 해석을 통해서 그런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시좌구조다. 다
라서 경서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경서 해석의 기초를 어디에서 가져오는지 살펴야 한다. 아니 살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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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경서를 아주 일본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324쪽의 긴 주에서 그는 중국
에 비교했을 때, 도쿠가와 일본의 사회상황이나 신분구조가 어떻게 다른지 제법 상세히 말하고 있다. 훗
날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사상사』 전반부분에 나오는 일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의 요소들이 대부
분 나와있다. 두 사람을 꼼꼼히 읽다보면, 같은 레고로 만들어낸 다른 작품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와
타나베 히로시의 관점이 일본적 특성에 따라 유교가 이미 재해석되어 있었으니, 그런 차이점과 해석상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마루야마 마사오는 유교 경전을 통해서 말하지만, 일본 사회에 대해
서 경서를 통해 진단한다고 평가하는데. 이점은 실은 유사하면서 아주 다르다. 와타나베의 관점은 차이
점을 알고, 사상적 대응을 했다는 것이 초점이라면, 마루야마의 관점은 사회상의 상황이 녹아들어간 경
서해석이 보편의 논리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미묘하지만, 출발점의 차이, 도착점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비교적으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조교수로 임명되기 위한 조수논문이었던 1장을 쓴 후, 다음해와 그 다음해에 걸쳐, 정치사상적인 논점을
보완하기 위해 2장을 썼다. 2장은 1장에 비해 간결하면서, 자연과 작위라는 논점에 집중되어서 논의를
전개한다.
2장 2절 주자학과 자연적 질서사상
근세 일본 초기 사상계를 독점한 주자학의 사회질서관은 근세 초기 봉건적 사회질서, 계통적 지배관계의
시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오륜을 보편적인 도達道(일반적인 도덕)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천天의 지地에 대한 지배, 양의 음에 대한 지배, 자연계의 원리에 의해 기초지
워져 있다. 사회관계를 자연현상의 관찰에서 연역해 내고 거꾸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연계
로 투영시키는 태도는 인간 사유의 초기 단계에서 언제나 보이는 것으로, 고대 중국사상의 특색이자, 원
시 유교에도 내재된 경향이다. 그러나 진한秦漢대 음양설이 유교윤리와 결합된 후이다. 계통적 질서를
자연에서 연역해내는 사상은 『역경』, 『예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주자학자 라잔에게는 보다 명백
한 방법적 근거가 있다, 송학은 진한 경학에 있어서 원시유교 사상과 『역』이나 음양설의 복잡한 교착을
방대한 형이상학으로 통합시켜, 천인상관天人相關에 확실한 이론적 기초를 부여했다. 천지와 모든 사물
은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리는 우주의 궁극적 근거로 모든 사물에 통하는 보편적 성격을
가지며, 기의 작용에 의해 사물에 특수성이 부여된다. 이는 일리一理가 다른 모습分殊을 취한 것에 다름
아니다. 천리天理가 사람에 깃들여 본연의 성이 되고, 사회관계五倫를 규율하는 근본규범 五常이기도 하
며, 그 궁극적 리는 태극이며, 성誠으로도 불린다. 오륜에 있어서 당위는 자연적 필연성과 같은 진정한
리実理에 의해 기초지워진다. 오륜을 행하는 근거인 오상은 마음一心에 있으며 그 마음에 갖추어지는 바
의 이치理가 성性이다. 유교의 윤리적 규범은 주자학적 사유의 이중적인 의미에 있어서 자연화된다. 하
나는 규범이 우주적 질서天理에 근거를 두는 의미에서 다른 하나는 규범이 인간성에 선천적으로 내재하
는 것本然の性으로 간주됨으로써 자연법 사상이 거의 전형적인 형태로 내포되어 있다. 근세 초기 유명한
키리시단 문헌인 『妙貞問答』으로 유명한 파비안은 유학자들이 나투라ナツウラ의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본성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 오상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서도 높이 평가된다고
말한 바 있다.(325-328)
마루야마의 논법처럼 봉건사회의 위기 속에서 주자학 세계가 붕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일단 주자
학적 체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주자학적 체계의 모델은 자연법 체계에 있다. 그래서 그는 우
선 서양 중세에 성립했던 자연법 사상과 유사한 체계가 일본 근세 초기 주자학 체계를 통해서 형성되었
다고 설명한다. 이런 자연법적 사상체계는 근세 이전 사회에서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근세 이후
의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변이 속에서 근대적 요소를 찾는 것 보다, 그 이전의 중세적 사유를 서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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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치시키려는 이 시도가 더 대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원시유교에서 송학까지의 전개 상황을
간결하게 정리하면서 송학의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윤리적 규범은 우주적 질서에 근거를 두는 동시에 인
간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이중적 자연화라고 설명한다. 그는 토미즘을 마음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속내를 1장 말미에서 슬쩍 비친 것과 달리 구체적으로 사상을 논의할 때는 근거없는 일반화된 논의
를 가져오지 않는다. 대신 선승이었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파비안(ハビアン)의 입을 빌어서 유학자
들의 말한 것과 그리스도교의 나투라 즉, 자연법 사상의 유사점이 있다고 슬쩍 걸쳐 놓고 넘어간다.
이런 자연법은 순수한 이념성을 고수함으로써 실정적 질서에 대한 변혁적 원리가 되거나 아니면 자기를
전적으로 사실적 사회적 관계와 합일시킴으로서 그것의 영원함을 보증해주는 이데올로기가 될 것이다.
주자학적 자연법 사상에서도 현실적 소여에 대해 변혁적 귀결을 이끌어 낼 수는 있다. 군주와 신하의 의
義에 반하는 현실의 군주와 신하 관계는 변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자학의 이론 구성에 깊이 침투해 있
는 자연주의는 이런 리, 자연법의 순수한 초월적 이념성을 희박하게 만든다. 도道와 물物 그리고 규범과
현실적 상황의 틈새를 규범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매몰시켜가려는 충동이 있다. 그런데 이 주자학은
도쿠가와 막부가 하극상을 진정시키고, 쇼군에서 무가 고용인武家奉公人에 이르는 무사단 내부의 서열
을 편성하고 봉건적 주종관계를 피지배계급 내부까지 확장시켜 위아래를 관통하는 계층제적 원리 위에
철저한 통제력을 발휘한 근세 초기 (일본의) 주자학이다. 자연에 질서가 있는 것처럼 인간의 윤리가 바
르게 서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왕도를 이루며, 예가 번성할 것이라고 말한 라잔에게 자연법의 궁극적 의
미는 현실의 봉건적 계층제를 자연적 질서로 승인하는 데 있다. 주자학에 내재하는 이런 자연적 질서의
논리는 발흥기 봉건사회에 주자학을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 사회적 사유양식으로 만들어준 계기였다.
물론 사회적 질서를 자연적 선천적인 것에 기초를 두는 방식은 학자마다 같지 않다. 라잔도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람의 빈부귀천을 이일분수라는 동태적 자연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나카에 도주中江藤樹는 형
태가 있는 것은 정교함과 거침精粗가 있는데, 거친 것을 받은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정교한 성
현・군주의 신하로서 성현이 명령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천명의 본연이라고 하여 기품의 精粗를 근거로
삼는다. 이런 방식은 오륜의 이중적 자연화라는 송학적 자연법 사상에서 그 궁극적 논리를 찾고 있어,
근세 봉건사회가 성립된 후 이를 뒷받침하는 사유양식은 자연적 질서의 입장이다.(329-331)
주자학으로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사회변혁적 이데올로기가 되는가 아니면 사회안정적 이데올로
기가 되는가. 그리고 일본에서는 마침 봉건사회가 안정화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회안정의 이데올로
기 즉 현존하는 봉건적 상하관계 질서를 자연질서로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라잔과 도주의 방식이 조금씩
달랐다고 해도 관변학자의 이데올로기로서는 다를 바가 없고, 그래서 주자학이 사상계의 주류였다는 것
이다. 물론 주자학이 사상계를 장악했다는 주장은 훗날 사상누각임이 드러나 바람처럼 무너지지만.
근세 초기 주자학 일색이었던 사상계도 나카에 도주가 만년에 양명학을 창도한 후 그 학파는 후치 고잔
淵岡山이나 쿠마자와 반잔熊澤蕃山으로 발전했고, 야마가 소코山鹿素行와 이토 진사이伊藤仁斎는 에도
와 교토에서 거의 동시에 고학을 창시하는 등 붕화의 조짐을 보여주었다. 반잔과 소코는 초기 주자학자
에게 결여된 정치적・사회적 현실의 경험적 고찰에 성과를 올렸으나 사회관계가 자연에 기초지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자학 사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잔의 경우 치국평천하의 원리는 오륜・오상에 의
해 이는 다시 자연의 음양오행에 의해 기초지워진다. 다만 반잔은 도道와 법法을 구별하여 법=제도를
성인이 만든 역사적 존재로 규정한다. 소코는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인 오륜과 예악이라는 규범의 타당한
근거를 모두 자연에서 구한다. 위아래의 계층제는 천지의 언제나 그런 것常經이다. 이토 진사이는 천도
와 인도를 분리하고 음양오행을 인의예지로부터 구별했으며, 후자를 도덕이지 성이 아니라고 하여 송학
이 사회규범을 자연법칙 및 인간 본성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주자학적 자연법칙의 이론
적 기초를 부정했다. 그러나 진사이의 논의는 순수 철학에 한정되어 그 변혁이 정치=사회사상의 수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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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떠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도=규범은 그 자체 안에 타당한 근거를 가짐으로 자연계로부터는 단절되었
으나 인간 존재에 대해서는 선천적 타당성을 보유하여, 자연히 그러한 결국 존재형태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봉건사회의 근본규범이 반드시 실체적 자연질서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자연적 질서라는 점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332-334)
마루야마의 논의는 1장에서 상세하게 전개되었던 주자학 붕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양명학파 고잔이나
반잔, 그리고 고학파를 각각 형성한 소코와 진사이. 반잔과 소코의 경우 정치사회 현실의 경험적 고찰에
성과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를 상세히 논증하지는 않는다. 반잔의 경우는 각주에서 도와 법의 구별이 나
타났다는 것을 말하는 정도. 그리고 교토의 고학파인 진사이는 천도와 인도의 분리 즉, 자연법칙과 사회
규범의 연속성을 분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규범이 자연계와의 연속성은 분리되었으되, 그 자체로 자연
적인 선험성까지 포기된 것은 아닌 한계를 지녔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회규범이 선험성이 포기되고, 사
람이 만들 가능성이 생기면, 그것은 홉스적이든 루소적이든 사회계약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마루야마의
논의는 정말 일관성이 있다. 그에게 근대란 서유럽 근대이고 그것은 바로 사회계약론에 입각한 자유주의
정치사상이다. 이걸 밑에 깔고서는 정말 일관성있게 논의를 전개한다.
2장 3절 소라이학에 있어서의 선회: “자연적 질서” 논리의 파괴공작-그 실천적・정치적 지향
특정 정치사회질서는 자연법에 의해 기초지우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하게 보증하는 것이지만,
정치적 안정성이 현저하게 손상되고 사회변동이 나타나면 사회의 근본규범이 자연법이라는 기초지움은
수용성을 상실한다. 사회관계가 평형성을 상실하고 예측가능성이 감퇴하면 규범 내지 법칙의 지배는 무
너진다. 질서의 평형을 되돌려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주체적 인격이 등장한다. 겐로쿠 시대
에 근세 봉건사회에 내재하는 모순이 격화되고, 요시무네에 의해 교호의 개혁으로 불리는 도쿠가와 최초
의 봉건제 보완작업을 시행하게 되었을 때, 근세 초기 이래 견고하던 자연적 질서관이 전면적으로 뒤집
히게 되었고, 오규 소라이는 도道란 사물의 이치도 자연의 도도 아닌 성인이 세우고 만든 도라며 누가
wer라는 문제를 근세 일본에서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이 되었다.(335-336) 마루야마의 이 주장이 타당
성을 얻으려면, 요시무네의 개혁의 내용을 보아야 한다. 요시무네의 교호의 개혁은 원래 도쿠가와 이에
야스가 수립한 봉건체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봉건체제가 붕괴하는데, 봉건체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
그것은 도쿠가와 막부의 유교적 색채를 탈색하는 것이었다. 이에야스 이후 유교적 색채가 조금씩 도쿠가
와 체제에 가미되었고, 그 가장 활발했던 때가 주자학자 아라이 하쿠세키에 의한 문치였다. 바로 겐로쿠
와 교호 사이의 쇼토쿠와 호에이 기간 동안 6, 7대 쇼군 이에노부와 이에쓰구 시절의 일이다. 중요한 건
가장 유교의 영향이 컸을 때 조차 주변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리가 성립하려
면, 무가의 억압적 통치가 유교적 문치로 인해 붕괴하던 것을 요시무네가 다시 무가적 통치로 되돌린 일
을 교호의 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모순이 있다. 주자학은 봉건적 세계를 지탱하는 것인가 아
니면 붕괴시킨 것인가. 또는 붕괴된 것을 회복하는 데 실패한 것인 것. 어떤 경우에도 주자학이 지배사
상이라는 타당성을 얻기 어렵게 된다. 이 책에서 아라이 하쿠세키에 대한 논의가 상세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소라이에게 있어 사회관계를 ‘자연’에 의해 기초지우는 주자학적 사유는 봉건적 지배관계를 정당화시키
기 위한 너무나 현실과 괴리된 낙관주의였고, 이미 이완,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현재의 계층적 질서도
자연적이라 간주함으로서 안정성을 회복하기 위핸 제도의 재건을 저해하는 것으로 비쳤다. 예를 들면 격
식이란 시대의 풍속인데, 예를 천리로 보는 주자학의 영향으로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봉건사
회를 난국에서 구해내고 재건하기 위해서는 봉건사회의 관념적 기초를 이루는 유교 이론 자체를 근본적
으로 변혁시켜, 자연적 질서天理의 논리를 주체적 작위의 그것으로 전환시켜야 한다.(336-337) 자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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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의 논리는 유교 규범이 천도나 천리로 불리는 우주적 자연과, 본연의 성으로 불리는 인성적 자연이
연속되어 있다는 점에 있는데, 소라이는 먼저 우주적 자연을 성인의 도의 대상에서 배제해 버린다. 天道
나 地道란 인간적 질서를 자연계에 유추한 것으로 음양이라는 자연계의 범주를 사회관계로 끌어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성인이 이를 人道로 삼지 않았다. 오상의 기초를 이루는 오행 역시 성인이 편의상 만든
상징적 기호로 필연적 근거는 없다. 천의 경天の経이나 지의 의地の義 같은 말도 예를 예찬하는 말일 뿐
이라면서 천지天地의 실체적 성격을 박탈하고, 비유적 의미로 떨어 뜨렸다. 그는 우주적 자연에 의한 도
의 근거지음을 부정하고, 유교 자연철학의 제 범주를 치국평천하의 수단으로 성인의 도에 예속시켰다.
원시유교의 천의 양의성 즉, 법칙적 의미에서의 하늘天道와 인격적 의미에서의 하늘天命에 주목하여, 천
도를 부정하고 천명을 전면적으로 강조했다. 천도로부터 천명에서의 전환은 주체적 인격을 기저로 하는
그의 전체 사유방식을 표현한 한 형태이다.(337-339)
마루야마에 따르면 봉건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주자학적 사유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고 나선 소라
이는 우선 주자학의 연속적 세계관 중에서 가장 먼저 자연질서, 즉 우주관이 사회규범과 연장선에 놓이
지 않도록 이를 분리한다. 그 구체적인 형태가 천명과 천도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유교의 종교성
에 대한 논의가 한국 사회과학계에 있었다. 유교가 종교가 아니냐가 왜 중요할까 싶다마는, 그 배경에도
실은 막스 베버가 놓여있었다. 1980년대까지의 동아시아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
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에 비견하기 위해 유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실은 이런 이야기는 로버트 벨
라나 그 위로까지 올라가는 고색창연한 이야기다. 유교윤리가 가져오는 노동규율과 검소함 등에 주목한
학자들이 유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유교가 종교인가의 여부가 논쟁이 되었고. 원시유교는 종교였다는
주장에서부터 기다 아니다 논란이 있다가 어느새 그런 논쟁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때 유교의
종교성을 주장하는 논의의 근거 중 하나가 천명이라고 하는 천의 인격신적인 경향이었다. 이런 종교사회
학적으로 근대화를 설명하는 논의들은 대부분 기독교라는 종교형태를 자본주의 발전 및 근대성과 결부
시켜 보기 때문에, 인격신에 대한 관심이었던 것. 그러나 기독교는 자연질서의 사회규범에로의 연장과
인격신의 존재가 양립했었다. 이 두 가지가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를 취사선택하려는 것은
자연질서와 사회질서의 분리가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며, 그런 상황에서 어떤 종교를 가져올 것인지라는
개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마루야마는 일관성있게 주권이론으로서의 사회계약론
을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척도로서 준비하고, 그 논리가 성립하도록 이론을 재단하고 있다.
둘째 소라이는 도(규범)을 오로지 예악이라는 외부적 객관적 제도에 한정시켜 도를 인성적 자연을 넘어
서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도는 예악형정을 떠나 달리 있지 않다. 예악은 송학에서 말하는 天理의 節文
이나 人事의 儀則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성의 개혁을 문제삼지 않고 오로지 정치적 지
배의 도구로 본다. 인성에 대해 외재적이다.(339)
그리고 두번째로는 인간본성과 사회규범의 분리. 인간본성과 사회규범의 분리는 단순히 주자학적 연속
성을 해체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핵심은 바로 인간의 개별적 욕망추
구를 허용하고, 인간본성에 대한 도덕적 제약을 해제하는 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사
회규범은 인간본성을 고려하지 않고, 행위에 대해 처벌하는 것. 인간본성과 사회규범의 분리는 마루야마
에 절실했던 것이다.
이 정도로는 소코나 진사이의 모멘트를 밀고나간데 지나지 않는다. 자연적 질서의 논리를 완전히 극복하
기 위해서는 자신의 배후에 어떤 규범도 전제하지 않고, 규범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인격을 사유의 출발점에 두는 수밖에 없다. 소라이가 도는 선왕이 만든 것이라고 했을때, 선왕은 도를
절대적으로 만든作爲 자라는 의미였다. (339-340) 선왕은 복희, 신농, 요순우탕문무주공 등 고대 중국
의 정치적 지배자이며, 도=예악은 그들이 만든制作 것이다. 성인 개념을 선왕이라는 역사적 실재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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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킨 것은 소라이학을 종래의 어떤 유교 사상으로부터도 결정적으로 구별지워주는 모멘트였다. 그때
까지 성인은 도덕을 완전무결하게 갖춘 사람이며, 그가 성인인 까닭은 내재하는 이데아 성에 있었다. 이
데아 성이 강조되면 성인 개념은 비인격적 궁극이념 속에 쉽사리 해소된다. 예를 들어, 성인은 태극의
전체이다. 순자가 예의법도를 성인이 만들었다고 해서 소라이학의 사상적 연원으로 간주되지만, 그에게
성인은 도道의 극極이며 수양의 목표로서 이데아적 의미도 지닌다. 성인 개념에 보편적・이데아적 의미
가 담겨있는 한, 예의법도를 제작한 구체적인 성인도 결국 그 가치를 배후의 이데아로부터 부여받는다.
이런 선왕은 절대적 주체가 아니다. 소라이가 성인을 구체적 역사적 존재인 선왕에 한정시키고, 성인은
배워서 이를 수 없다며, 비인격적 이념화를 막았던 것은 선왕에게 도의 절대적 작위자의 논리적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전제였다.(340-341) 성인(=선왕)이 도를 절대적으로 만든 사람이란 성인이 모든 정치
적 사회적 제도에 선행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적 질서의 논리에서 성인이 질서 속에 있다면,
당연히 그 성인을 그런 내재성에서 구해내고 거꾸로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낸 사람으로서의 지위
를 부여해주어야 한다. 성인의 작위 이전에는 無이지만, 만든 이후에는 全이다. 이런 입장은 성인이 출
현하기 이전의 사회를 아무런 규범이 없는 홉스적 자연상태로 간주하게 된다. 소라이에 의하면 오륜 중
에 자연스레 존재하는 것은 부자 간의 사랑 뿐이며, 부부의 윤리도 복희에 의해 만들어졌고, 오곡의 경
작은 신농, 궁실을 들고 의복을 짖는 것은 황제가 고안한 것이다. 이런 규범, 생산양식이 원초적, 자연발
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성인이 人生에 상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복희나 신농에 대
한 생각은 당시 유학자의 일반 상식이었다. 그런 생각의 방법적 의의를 추구하여 이를 자연적 질서의 논
리에 대한 명료한 대립으로 끌어올린데 그의 독자성이 있다. 마침내 근세 일본사회의 가장 근본적 신분
질서인 사농공상도 선왕이 만든 것으로, 오륜도 성인이 만든 도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를 구마자와 반잔
은 농업으로부터 탁월한 사람이 계속 탁월성을 보여 천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야마가 소코도 농업에서부
터 출발하여, 필요에 따라 농공상이 생기고 결국 군주를 세워 교화와 풍속의 바탕이 되었다고 말한다.
반잔도 소코도 사농공상의 발생을 인류가 생활하기 위한 필요에서 점차적으로 생성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를 고대의 성인이 만들었다고 하는 소라이보다 반잔과 소코가 더 역사적 설명으로 진리에 가깝다. 그
러나 사회적・인간적 존재가 자연적 존재와 연속되어 있다는 생각에 있어서 역사적 발생을 말하면 동시
에 자연적 발생을 말하는 것이며, 역사를 만드는 주체는 물을 수 없게 된다. 선왕의 작위의 절대적 시원
성을 밀고나간 소라이의 오류는 사상사적으로 본다면, 자연적 질서 사상의 전면적 전환 과정의 이른바
희생타였다.(341-345)
제도의 작위자인 성인에 집중한다. 그는 정치적 행위자이자, 제도의 창시자이며, 결코 도덕적으로 완벽
하지 않다. 동시에 재현불가능한 일회적인 존재이다. 그는 바로 역사적 주체이다. 마루야마에 따르면 소
라이는 이런 정치적 행위자 내지 입법자lawgiver로서의 성인을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대립을 창출해
낸다. 특히 제도에 있어서 자연과 작위의 대립. 제도는 자연의 연장이 아니다, 만들어낸 것이다. 성인 또
는 선왕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본성과 제도의 대립. 성인이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일 필요는 없고, 꼭맞
는 적합한 제도를 만들어 내면 된다. 성인 전후의 대립, 성인 이전의 상태는 무질서의 상태이며, 이후는
질서잡힌 제도의 상태이다. 마루야마는 이 부분에서 소라이가 성인이전의 상태를 홉스적 자연상태로 상
정했다고 보고 있다. 자연의 연속성을 해체한 소라이에게 자연이란 안온하고 편안하고 조화로운 것이 아
니라 제도가 필요한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마루야마가 소라이에게서 하나의 대립, 또 하나의 대립을 발
견할 때마다 소라이는 점점 더 역사발전의 계기를 발견한 인물이 된다. 결국 성인(선왕)이란 역사발전의
주체로까지 등장한다. 소라의 선왕(성인)이 역사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 그는 시대정신을 체현한 절대정
신의 구현자일 수밖에 없다. 마루야마가 발견하고 싶었던 것 그것은 바로 이 주체가 아니었던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헤겔적 주체이다. 어떤 의미에서 마루야마가 대립항으로 설정하고 있는 반잔과 소코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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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의에는 한계가 있다. 반잔과 소코의 논의에는 사회가 창출
되는 단절의 순간이 없다. 그리고 소라이는 그런 정치적 단절의 순간, 분열의 순간을 구성해내는데, 마
루야마는 여기에 착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고들이 사회변혁의 가능성으로 전개되지 않고,
사그러들었다는데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런 한계 속에서 밑바닥이 변했던 것을 사유의 이중구조 논
리로 변명하고는 있지만.
천지자연에 존재하는 선험적 리에서 도의 본질을 찾는 주자학과 선왕이라는 실재적 인격이 무에서 도를
작위했다는 소라이학은 같은 유교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사유방식 위에 서 있다. 이는 이데아가
인격에 선행하며 인격은 이데아를 체현한 존재인가, 아니면 인격이 현실재로서 존재하고 이데아는 인격
에 의해 비로소 실재성을 부여받는가 하는 철학의 근본문제와 연결된다. 유교가 봉건사회의 시좌구조인
한 유교의 도를 보는 시각은 사회제도로 옮겨진다. 주자학적 사유에서는 봉건사회의 자연적 질서관이 도
출된되며, 사회규범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이념성 때문에 스스로 타당성을 지니게 된다. 소라이학의 논
리가 제도관에 나타날 때, 이미 이념의 선험적 절대성은 허용되지 않으며, 인격적 실재 속에 종속되어
비로소 존립한다. 따라서 사회규범도 그것을 작위한 당우삼대의 선왕들인 정치적 인격에 의해 타당한 것
이 된다. 소라이는 선왕=성인을 깊이 믿는다고 하여, 종교적인 절대자로 끌어올려 봉건사회의 근본규범
을 절대화하려 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출현한 개국군주이다. 따라서 성인과 도의 논리적 관계는 모든
시대에서 제도와 정치적 지배자의 관계로 유추된다. 소라이는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역사적 개성을 간과
했음을 지적하고, 각 시대별로 제도의 특수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고, 제도란 모두 그 시대를 열게 된 시
조가 스스로 헤아려서 전체 세계의 구조를 바꾸었기 때문에, 제도와 법률 역시 바뀌는 것으로, 모든 시
대의 창업 군주의 자유로운 작위에 타당성의 근거를 돌리는 것이 소라이학의 사유방법에 내포된 가장 중
대한 정치적・사회적 의미였다. 소라이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봉건사회가 의거
하고 있는 근본 규범에 대해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는 것, 다른 하나는 현실의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적 조치를 제시하는 것. 전자를 위해서는 근본 규범의 타당성을 절대화된 성인의 작위
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작위 논리가 고대 성인에 한정되면, 후자를 해결할 수 없다. 일단 성인이
도를 만든 후, 작위 주체로부터 벗어나 객관화된 이데아로서 스스로 타당하다면 자연적 질서관으로 되돌
아가 그로부터 현실에 대한 어떤 정치적 결단도 나오지 않는다. 선왕의 작위의 논리를 모든 시대에 유추
analogy함으로써 비로서 이데에 대한 인격의 우위가 철저해지고, 그래서 정치적 지배자의 위기 극복을
위한 미래를 향한 작위가 가능해진다. 소라이의 성인의 도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선 보편타당성을 지니고
있고, 스스로 실현되는 이데아가 아닌 각 시대의 개국 군주에 의한 그때 그때의 작위를 매개로 한다. 여
기서 이데아의 실현은 시대가 변할 때마다 새로운 주체화를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비연속적이다. 소라이
는 『政談』, 『太平策』, 『鈐録』 등에서 제시한 위로부터의 대규모의 제도적 변혁은 이런 논리 위에 있다.
겐로쿠에서 교호에 이르는 사회적 변동으로 현실의 봉건사회는 신분적 질서가 무너진 혼란의 시대로 비
쳤다. 혼란은 제도가 없는데서 생겨났다. 지금의 격格은 작위가 아니라 세상의 풍속으로 스스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고, 도쿠가와 개국 시조 이에야스가 성인의 도에 따라 제도를 세워야 하는 본래의 임무를
띄고 있었는데, 시대가 멀어 옛날 제도를 다시 세우기도 어렵고, 큰 혼란 후라 제도들이 모두 없어져서
당시의 풍속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 제도가 없는 상태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소라이는 이에야스가 했
어야 할 제도의 작위를 8대 쇼군 요시무네가 대신하도록 하려 했다. 유교에서 규범의 자연적 타상성이라
는 사상을 배척하기 위한 그의 사색은 정치적=실천적 의도가 그 동기를 이루고 있었다.(345-348)
마루야마의 소라이 해석은 일단 그 논의만은 아주 수려하다. 주자학과 다른 소라이학의 사회관・제도관
은 주자학과 다른 소라이의 사유방식에서 나온다. 소라이는 인격이 이데아를 앞선다. 일종의 초월종교나
개국신화 같은 성격을 띈다. 소라이는 선왕=성인을 절대적 종교적 신앙의 존재로 까지 끌어올린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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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야마의 소라이 해석은 여기서 결을 달리한다. 소라이의 성인이 중국 고대에만 나타났다고 보지 않고,
소라이의 성인은 모든 개국 군주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등장한 군주
들의 사례를 들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정치적 지배자는 위기극복을 위한 제도 만들기가 필요하고, 특
히 제도가 무너진 현재의 모습은 어떤 작위의 결과도 아닌 현상일 뿐이라고 새로운 작위의 실천이 필요
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새로올 성인 즉 요시무네에게 요구한다. 이는 마치 체자레 보르지아를 기
다리는 마키아벨리 같다. 놀랍게도, 소라이는 계속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요시무네가 못하면 그냥 끝이라
는 식의 태도를 펼친다. 그는 소라이학이 저항의 학, 새로운 제도 수립의 학이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인지
도 모른다. 여기서 마루야마 식으로 소라이는 개국 군주를 성인=선왕으로 보았다고 해석하기에 탐탁치
않은 부분도 있다. 소라이에게 선왕은 당우삼대 뿐이다. 복희, 신농, 황제 만이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본의 진무천황이나 또는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시대나 어떤 시대에도
제도로서의 도인 예악형정이 수립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야스까지도. 그런 그를 현실의 정치가
정치적=실천적 의도가 유교 사상 변화를 이끌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보편적인 제도 수립의 기회가
특수한 경우에만 인정되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묵시적 종말론도 아니고.
소라이가 요시무네를 통해 확립하려한 사회조직 개혁론은 한 마디로 복고적이다. 그는 화폐경제, 상업자
본의 발달, 무사의 토지와의 연계 사실 등을 여숙의 경계(여관방의 문턱)라며 비판해 왔다. 무사는 영지
에 토착시키고, 호적을 만들어 인구이동을 제한하고, 신분적 차별을 엄중하게 하고, 이에 따라 욕망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는 원초적 봉건제의 찬미자다. 그는 옛날의 무사를 동경하고, 사치스러운 조닌을 미
워했다. 법도가 소략하고 상하의 은혜외 의리로 이어진 주종관계를 이상으로 여겼으며, 조카마치의 이익
에 따라 살고, 게으르고 나태한 풍속은 그의 기호에 맞지 않는 생활환경이다. 상업 고리대자본의 분방한
활동은 날이갈수록 순수한 신분제를 급격하게 침윤했다. 그는 순수 봉건적 후다이譜代奉行人이 자유계
약적 데가와리出替奉行人로 대체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 후다이들이 해고되면 무
사 가문에 남는 사람이 없다고 평했다. 이런 사회관계의 실체적 변화는 주종관계를 떠받쳐주는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계약관계에서는 서로의 마음이 길가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고, 후다이가 어린아이
를 키울 때처럼 가풍도 전해지지 않고, 당분가 지내기 위해 일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게마인샤프트적인
의식이 쇠퇴하고 게젤샤프트적인 그것이 만연하게 되었다. 자연경제를 기반으로 한 봉건적 주종관계가
상품경제의 한 가운데서 맺어지게 된 것의 귀결이었다. 소라이는 봉건사회의 태내에 그것을 해체하고 부
식시키는 독소가 급격하게 성장하는 시대에서 그런 독소를 제거하려 했지만, 그런 독소의 성장이 역사적
필연인 한 반동적 사상가였다. 그런 제도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 원시 봉건제의 자연적 요소(전원생활,
자연경제, 가족적 주종관계)에 있다면, 소라이학의 체계는 작위作為에 의해 자연自然을 만들어내려고
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반동가로 하여금 적의 무기를 빌어 자신을 이론적으로 무장하는 역할을
맡긴다. 소라이는 게젤샤프트적 사회관계를 저주하면서도 자신의 작위의 입장에는 게젤샤프트적 논리가
내포되어 있었다.(349-352)
소라이가 마루야마를 곤란하게 만든 점이 바로 소라이 개혁의 구체적 내용이 복고적이라는 점이다. 그러
나 사실 그것이 문제일까. 혁신적 사상가들이 복고적 비전을 내세운 경우는 적지 않았다. 루소 만큼 복
고적이었던 사람도 없다. 그러나 루소와 다른 점은 루소는 원천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소라이는 원천
에 대한 의식이 모자랐다는 점이다. 그가 생각했던 복고적 과거가 그렇게 먼 과거가 아니었을 수도 있
고, 일본에만 있는 특수한 상황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소라이는 변화가 어느 한계를 넘어가면 되돌릴
수 없다면서 자포자기 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마루야마는 소라이에게 게젤샤프트적인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계약은 아니더라도 제도형성의 기반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도형성의 기반으
로 주권을 긍정한다는 것과 그 주권의 형성을 사회계약에 근거짓는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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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 마루야마의 논리적 비약이 있다. 그리고 그 제도를 통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자연’이라는
것이다. 마루야마의 이런 지적은 일견 단지 말장난 처럼 보이지만, 실은 말장난은 아니다. 작위로 자연
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마루야마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인식했든 그러지 못했든, 메이지 유신을 통
찰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은 천황제를 만들어냈다. 이 천황제는 서구적이면서 입헌적이면서 일본적이면
서 신화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의 이데올로기 저작들(교육칙어, 군인칙유, 메이지헌법 등)은
이런 천황제는 일본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평가한다. 일본인들은 근대 일본이 만들어낸 자연스
러운 천황제를 국가주의의 한 형태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천황제의 가장 큰 힘은 그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 마루야마가 패전 이후 초국가주의를 비판할 때, 천황제에 대해 착목했던 중요한 지점이 바로 자
연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루야마나 얼마나 인식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철두철미하게 만들어지
고 기획되고 강제되었으며 동시에 자발적으로 수용된 것이었다. 소라이에 대해서는 1장에 충분히 말해
서인지.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언급한다.
2장 4절 자연自然으로부터 작위作為에로의 추이와 그 역사적 의의: 작위 논리의 근대성-주체적인격의
절대화 문제
주체적 작위의 입장이 게젤샤프트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사회적 결
합의 두 이념형은 그런 결합이 개인에 있어서 필연적인 소여所与로 먼저 존재하는 경우로 결합양식은 고
정적・객관적인 형태를 지니며, 사람들은 이른바 운명으로 주어져 있는 것(예를 들면, 가족)과 개인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결합을 만들어 내는 경우로 개인은 의도를 가지고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사회
관계를 맺고, 결합양식에 고정적・객관적 정형이 존재하지 않으며, 목적의 다양성에 따라 임의적 형태를
취하는 것(정당이나 학회와 같은 결사)으로 나뉜다. 유럽 근대사회의 성립을 법률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
면에서 본 학자들은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역사적 전환과정에서 두번째 유형이 첫번째 유형을 압도
하는 현상의 추이를 밝혔다. ‘신분에서 계약으로’나 ‘게마인샤프트에서 게젤샤프트로’(퇴니스) 같은 도식
이다. 퇴니스의 문제는 게마인샤프트에 근대 시민사회 이전의 모든 시대를 막연하게 포괄하고 있다는
것. 원시공동체가 붕괴되고 지배형태Herrschaftsgeblide가 성립하는 역사적 변화를 무시한다. 프레이
어Freyer는 Gemeinschaft-Ständegesellschaft-Klassengesellschaft의 셋으로 나누는데, 이 경우 봉
건사회는 신분사회로서 게젤샤프트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사회관계를 물질적 기구적 측면에서만이 아
닌 침투해 있는 의식(객관적 정신)에 중점을 두어 고찰하면 퇴니스의 도식은 여전히 생생한 의미를 가진
다. 봉건사회의 다양한 사회적 결합(봉건 주종, 교회, 길드, 일본의 座, 株仲間, 五人組)은 성립과정이나
구조 형태는 시민 사회관계에 가까워도, 결합을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 구성원이 결합에 품고 있는 표상
은 혈연공동체와는 양적인 거리가 있어도, 주식회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봉건적 주종관계의 의식은 쌍
무계약 보다는 친자관계가 더 적합하다. 사회관계의 표상 내용은 봉건사회까지의 모든 변화보다 근대사
회 형성기의 변화가 더 크다. 중세말 근세초기에 두번째 유형이 첫번째 유형을 압도하게 된 현상은 사회
적 사실 보다 사회적 의식에서 더 현저하다. 중세의 인간이 모든 사회적 결합의 원형을 가족처럼 자연적
이고 필연적인 단체로(societas necessariae) 이해하고 있다면, 근세의 인간은 사회관계를 가능한 한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해 만든 것으로(societas voluntariae, Gierke) 파악하려 했다. 이것이 근세에 있
어 인간의 발견이다. 중세에 인간은 개인의 직분에 대해 논읳지만, 인간의 발견은 주체성을 자각했다는
의미다. 사회질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온 인간은 질서의 성립과 개폐가 자신의 사유와 의사에 의존하
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질서에 따라 행위하다가 질서에 대해 행위하게 된 것이다. 퇴니스가 본
질의사Wesenwille와 형성의사Kürwille를 설명하면서, 본질의사는 인간 육체의 심리적 대응물이며,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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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사를 사유 자체의 구성물이자 오로지 사유의 주체와의 관계에서만 실재성이 부여되는 것으로 본다.
본질의사는 지나간 것에 의존하고, 형성의사는 그것이 관계된 앞으로 올 것에 의해서만 이해된다. 본질
의사는 앞으로 올 것을 맹아Keim 속에 가지고 있는데, 형성의사는 그것을 심상Bild 속에 가지고 있다고
한 것도 중세와 근세에 있어 질서와 인간의 뒤바뀐 관계를 나타내 준다. 생성과 맹아가 포함되며, 자연
적이며 자족적인 것은 유기체로 중세 사상은 유기체관에 가까우며, 수단과 목적에 종속되는 것은 기계관
으로인간이 질서에 대해 주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유기체관의 붕괴와 기계관의 수립에 있다. 토마스 홉스
가 인간의 기술the Art of man은 자연, 즉 신이 세계를 만들고 지배하는 기술을 모방하여 인위적인 동
물을 만들 수 있다며, 자동기계의 인위적 생명을 언급하고, 기술은 이성적 존재이자 자연의 가장 훌륭한
작품인 인간을 모방하며, Commonwealth, state(civitas)로 불리는 Leviathan을 기술에 의해 만들어
냈는데, 인위적 인간이라고 근대적 제도관의 첫머리를 밝혔다.(353-358)
다시 한 번 마루야마의 솜씨좋은 논리 전개를 보여준다. 우선 기반이 되는 사상을 유럽의 보편적 사유에
서 가져온다. 마루야마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때 보편적으로 생각했다는 뜻에서. 그러나 있는 그대
로 적용하려 하기보다 훗날의 분석을 위해 솜씨 좋게 재료를 손질한다. 게젤샤프트와 게마인샤프트의 논
리를 퇴니스의 논리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한 지점에 착목하는데, 그것은 사회관계를 결합
하는 외형보다 정신적 형태에 주목하려는 것이다. 물론 자연스럽게 사회계약이론으로 연결시킨다.
Societas voluntariae나 Kürwille가 모두 그렇다. 이는 당연히 일본의 봉건사회를 평가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상품경제와 봉건적 인간관계가 혼효된 일본에서 어디서 진보의 계기를 찾을 것인가가 예고 되
어 있다.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정신적 요소이다. 질서를 인간이 만든다는 사고만 있으면 근대적이라고
이 주장을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그런 사회관은 유기체관과 기계관으로 나누어서 계열을 만든다. 그리
고 이 기계관의 끝에 토마스 홉스의 Leviathan이 있다. 의도와 목적을 위해 인간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국가라는. 사실 여기에 비약이 숨어 있다. 퇴니스와 기에르케와 홉스의 논의들을 이런 식으로 이분법적
인 계열로 분류해서 줄을 세울 수 있는지 솔직하게 의문이다. 사회관계를 만든다 즉 구성한다에서 그것
을 기계적인 것으로 연결한다. 실은 모든 사회는 구성해낸 것일 수 있다. 그 모델이 유기체일 수 있고,
기계적일 수도 있다. 이런 개념들은 교차할 수도 있고, 뒤섞일 수도 있다. 이런 실마리를 함상 염두에 두
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교하고 우아한 마루야마의 논리전개에 그냥 휩쓸려 가게 된다. 마루야마는
실은 소라이와 홉스 사이에 있는 결정적 차이 하나를 슬쩍 건너뛴다. 무엇을 건너뛴 것일까. 홉스의
Leviathan이 사회계약에 속할 수 있는 이유는 권리의 포기를 통한 주권 인정이라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
다. 권리의 위임을 통한 주권 형성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소라이의 성인은 이 권위를 어떻게 확
보하는가? 그는 그냥 확보한다. 그가 개국군주이기 때문이다. 그 권력은 원초적으로 정복에서 오는 것이
다. 마루야마는 이 지점을 간과한다.
정치적=사회적 질서가 천지자연에 존재한다는 주자학적 사유로부터 주체적 인간에 의한 작위여야 한다
는 소라이학의 논리에로의 전개가 위에서 말한 중세적 사회의식의 전환 과정에 거의 대응되고 있다. 예
를 들어 사농공상을 자연적 점차적인 발생과정으로 이해하지만, 소라이는 안민安民이라는 목적을 위해
선왕이 작위한 질서로 생각했다. 퇴니스의 Genossenschaft(Gemeinschaft적 결합)는 자연적 산물이
자 생성된 것으로 기원과 발전의 제 조건을 통해서만 이해되고, Verein(Gesellschaft적 결합)은 머리
속에서 구성한 존재로, 공통된 형성의사를 어떤 관계 속에서 표현하려 한다. 중요한 것은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도쿠가와 초기 자연적 질서사상은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Gemeinschaft에
대응되지만, 소라이의 작위는 의도적으로는 Gemeinschaft적이되, Gesellschaft의 논리 궁극적으로 社
団Verein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앞에서 자연적 질서의 발흥기 내지 안정기에는 이데아에 의한 기초
지움을, 동요기 내지 위기에는 주체적 인격에 의해 기초지움을 대응시킨 것은 주자학과 소라이학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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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형식적 법칙하에서 다루는 것이다. 주자학이 봉건사회의 정치적=사회적 사유양식이란 지위를 차지
한 것은 발흥기 봉건사회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퇴니스가 말한 분배를 규정하는 신성화된 전통, 정당하
고 필연적 생활질서라는 이념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오륜을 인간의 선천적 본성과 우주적 질서라는
이중적 의미에서 실체적 자연과 같은 것으로 보는 주자학은 봉건적 질서관을 잘 표현하며 이론화한다.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근저는 유기체적 사유organishes Denken였다. 근본원리인 태극은 세계의 통일
적 근원이자 개개 사물에 내재하며 궁극적 가치에 참여한다. 도쿠가와 시대에 말한 ‘논마다 비치는 달田
每の月’은 바로 리일분수理一分殊다. 천지天地라는 가장 포괄적 유기적 존재의 활동이 모든 사물을 거쳐
압축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윤리적 행위로 반복된다. 기에르케가 말한 신이 원하는 질서에 따라 특수
한 존재는 하나의 단위全一体Ganzes인한 세계라는 macrocosmos의 압축적 모사로서 microcosmos
혹은 minor mundus로 나타난다는 중세 사회관의 신이 원하는 질서란 라잔의 천지의 생의天地の生意
로 바꾸면 주자학의 해설로 타당하다. 게다가 주자학은 천지라는 세계 바깥에 초월한 인격신이라는 관념
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어, 본질적으로 내재적인 유기체적 사유는 스콜라 철학보다 더 철저하다.(358-
362)
마루야마는 다시 한 번 유럽 사상가들과 일본의 결합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소라이의 작위란 의도적
으로는 Gemeinschaft적이되, Gesellschaft 즉 Verein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작위로 자연을 만든다
는 이야기의 반복이자 변주이다. 그러면서 주자학의 사유양식이 기에르케가 말하는 유기체적 사유, 중세
사회관과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도 설명한다. 신의 존재가 없이도, 아니 인격신의 존재가 없어 훨씬 더
유기체적이다. 주자학과 스콜라 철학을 연결하는 그의 논의는 아름답게까지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어반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의 논리가 숨어있다. 통상적으로 독자는 마루야마가 소라이라는 일본
의 정치사상을 퇴니스를 통해서 해석해 낸다고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그러나 실은 소라이를 분석하는
퇴니스는 이미 소라이적으로 해석된 퇴니스다. 마루야마는 소라이가 일부분 Gesellschaft적이라고 말한
다. 그리고 Gesellschaft적인 근거로 머리 속에서 구성된 즉, fictional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Gesellschaft란 fiction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fiction인가? Gesellschaft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적
어도 동의 내지는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fiction이다. 그러나 마루야마의 소라이는 퇴니스의
Gesellschaft에서 이 구성원들이라는 요소를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묵살한다. 물론 동의한다.
fictional한 것이야 말로 중요한 요소다. 그렇다. 근대는 fiction이다. 그러나 누구의 fiction인지도 무시
할 수 없는 요소다. 다수의 fiction이기 때문에 변경과 재해석의 여지가 남는 것이다. 정치적 주권자의
일방적 fiction이라면, 그것은 고대의 입법자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에
정복에 의한 강제라는 사고가 암묵적으로 깔려있다면, 그것을 Gesellschaft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동
요기의 인격에 다수의 인격이냐 단일한 인격이냐의 문제는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이 다수의 포
기라 해도 그렇다. 여기에 마루야마의 소라이 해석의 맹점이 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문득문득 마루야
마는 정말 서양정치사상을 잘 알고 분석도구 삼아 일본사회를 다루고 있다고 실감하게 된다. 그는 자신
의 분석도구를 섬세하게 마련했고, 이를 통해 주자학과 일본 봉건사회를 분석해 냈다. 물론 일본의 주자
학이었다.
주자학은 Gemeinschaft적이지만, 소라이학과 Gesellschaft의 대응에는 역사적 한계가 있다. 봉건주의
자가 전면적으로 근대적=시민적 사유양식에 입각해 있을 수는 없다. 소라이학의 주체적 작위 입장에 내
포된 근대성의 정도를 측정해야 한다. 소라이학에 있어서 질서와 작위하는 인격의 한정성. 완전히 근대
화된 Gesellschaft적 사유양식은 자유로운 의사의 주체인 모든 개인이 사회질서를 만든다는 사회계약설
로 귀결된다. 그러나 소라이학에서 질서를 만드는 인격은 성인이자, 여기서 유추한 정치적 지배자다. 동
시에 종교적 절대자까지 높여져 있다. 소라이는 주자학이 성인에 대해 규범적으로 미리 정해놓는 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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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반대한다. 성인의 신비화 도는 성인이란 주체적 인격은 자연적 질서가 주체적 작위로 전환되는 과
정에서 객관적 필연성이 있는가?(362-363) 유럽에서도 자연적 질서 사상 내지 유기체설이 일거에 작위
적 질서 사상의 완성형태인 사회계약설 내지 기계관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개인의 발견이란 주체성이 개
인 일반에게 처음부터 부여된 것이 아나라 근세 통일국가의 대표자로서의 절대 군주가 먼저 이런 자각자
로 출현한다. 절대군주는 배후에 아무런 규범적 구속도 받지 않고, 모든 규범에 주체적 작위자의 입장에
선 인물로 중세의 군주에게 그런 위치는 부여되지 않았다. 중세에는 신적 이성에 의해 관철된 유기적 공
동체 그 자체가 최고 주권성을 가졌고, 군주는 그런 공동체 질서 내의 특수한 목적을 부여받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교황권과 국가권력의 투쟁도 트뢸취가 말했듯 국가와 교회의 갈등이 아니라 양자에 의해
같이 전제되어 있던 국가적=교회적 생활통일체의 지도에 관여하는 정도를 둘러싼 갈등이라고 본다. 생
활공동체의 자기 표현이 법 규범으로, 어떤 의미로 중세는 법이 지배하던 시대로 법lex는 왕rex이었으
며, 계시된 한 신의 목소리가 낳은 엄한 딸이었고, 자연인 한 신의 마음이 깃든 인간 이성의 산물이다.
법은 보편적이면서 영구적인 것으로, 모든 인간의 행위는 미리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의 분
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Barker) 자연적 질서사상의 논리적 귀결로 lex naturalis는 인간에
선행하고, 군주의 지배권에는 제약이 부과되어 있으며, 정치적 지배는 의무이자 직분이다. 이를 벗어난
지배는 정당성을 상실한 단순한 폭력이 되고, 여기서 중세사상은 폭군에 대한 인민의 저항권, 지배자의
암살권까지 이끌어 낸다. 중세의 다원적・계층적 지배관계가 붕괴되던 시기에 봉건귀족 및 교회는 저항
권 이론을 민족국가에 대한 항쟁의 무기로 삼았고, 봉건적・신분적 기득권과의 항쟁을 통해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수립에 성공한 절대군주는 필연적으로 모든 규범 질서의 내재성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자유의
사에 따라 제정하여 타당성을 부여해주는 인격으로 등장했다. 군주가 만들고 지배하는 질서의 모범적인
인 이미지는 신과 세계의 관계였다. 근대국가론의 중요한 개념은 모두 신학적 개념을 세속화된 것이라는
칼 슈미트의 명제는 타당성을 얻는다.(363-365)
마루야마는 사회계약에 의한 주권성립이라고는 해석할 수 없다는 반론에 대응하기 위해, 소라이학의 주
체가 가진 이중적 위치에 주목한다. 이 주체는 아직 개인들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들의 결합으로서의 사
회계약에는 이르지 못한다. 소라이학에서 주체는 성인 또는 정치적 지배자에게 제한된다. 마루야마는 다
시금 유럽사에서 그 사례를 찾는다. 그리고 절대군주에서 그 사실을 발견한다. 다음에는 중세의 군주와
절대군주를 구별한다. 중세의 군주는 규범의 제약을 받는 존재이다. 중세는 법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이
런 규범 체계와 투쟁해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구축한 절대군주는 칼 슈미트가 말하는 주권적 존재였
다. 말할 필요도 없이 시대적 한계 속에 있지만, 역사적 전개와 사상적 전개가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 보
고, 일방적 진보의 사다리를 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중세사회(중세적 군주)-절대군주-민주주의(사회계
약)이라는 식의 도식을 형성한다. 이런 도식에는 절대군주는 왕권신수설에 기반한다는 전제가 서 있다.
뒤에서 말하지만, 소라이의 성인은 심지어 신도 필요없는 절대적 존재다. 그러나 사회계약은 반드시 자
유주의나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 만은 아니다. 홉스의 사회계약은 절대군주의 사상적 기반이기도
하다. 그럼 이를 다시 중세적 군주-절대군주(신수설)-절대군주(홉스적 계약설)-민주주의(로크적 또는
루소적 계약설)의 역사발전론으로 해석할 것인가. 마루야마의 논의를 긍정하려면, 그의 주장 안에 이런
도식으로 절대정신이 자기를 구현한다는 식의 헤겔 역사철학이 깔려 있다고 보고, 이를 긍정해야만 가능
하다. 마루야마는 절대군주와 이에 상응하는 중세적 군주를 너무나 단순하게 보고, 이념형으로 만들었
다. 중세의 군주도 나름의 정치적 행위자이면서, 반드시 규범의 한계 속에 제약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중세 초기 중기와 말기를 걸쳐 왕권이론이 유럽 각국에서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었는지 몰랐던 것도 당
연하지만, 무엇보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역사에서 찾는 절대왕정이란 존재도 이념형이자 신화다. 중
세 군주들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제약도 많았고, 불안한 세력균형 상황에서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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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서유럽의 절대군주는 존재했던 적이라도 있지만, 마루야마의 소라이 이해
에서 등장하는 성인은 사상적으로 유추해서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그런 존재였다. 그가 기대했지만 나타
난 적은 없었던. 마루야마의 교묘한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절대적인 불일치에 둔감해 진다. 사상
사의 전개가 정치사회사적 부재를 보완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것은 중세군주제와 왕권에 대해
꽤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천황기관설天皇機関説과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에 대한
공격을 연상하게 된다. 거칠게 말하면 천황기관설은 중세군주제와 왕권사상이다. 그리고 이를 공격하고
나온 이 글을 쓰던 시대를 지배하는 국체명징国体明徴사상은 아직 근대도 아닌 근세사상이라는 비판이
다. 그러니 근대초극이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는 그런 주장이다. 마루야마는 아주 일관성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전성기 스콜라철학에서 근세철학을 최초로 수립했다는 데카르트에 이르기
까지 철학사는 신의 절대성=초월성을 강화해간 역사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의거하는 중세신학에서
자연과 초자연이 연속적이고, 세계질서는 구석구석까지 신적 이성에 의해 각인되어 그 자체에 선한 품성
을 내재하고 있는 유기체이며, 모든 인간은 그 이성적 행위를 통해 신의 은총 행위에 협력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요컨대 피안적 신과 차안적 세계는 필연적・내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후기 스
콜라철학내지 종교개혁은 신과 세계의 내면적 연관성을 풀어내고, 신에게 주권적 자유를 부여해주는 길
을 걸었다. 둔스 스코투스는 사물의 가치질서라는 개념을 배격하고, 세계는 신의 절대적 자의의 산물이
자 창조적 결단의 결과라고 말했고, 후기 유명론자인 윌리엄 오캄은 스코투스적인 의사우위설을 발전시
켜, 신을 모든 이데아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신의 의사와 도덕율의 내용을 완전히 우연적=자의적 관
계에 두었다. 카롤릭주의와의 명백한 대립에 있어 신의 주권성을 강조한 사람은 칼뱅이다. 칼뱅주의는
심원한 의미에서 신중심적 신학이며, 신의 교리는 교리 중의 교링자 유일한 교리였다. 신의 영광, 신의
주권, 절대적인 신으로서의 신. 칼뱅은 오캄처럼 도덕율과 신의 관계를 자의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
고, 신의 선성善性은 신의 본질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신의 절대적 자유의사에 따라 만든 것은
그 자체로 선하다. 그러나 규범적 구속하에 놓여있지는 않다. 신은 세계에 선물恩賜을 내려주지만 본체
나 실지에 있어 세계와 공통된 어떤 것도 없다. 칼뱅에게 창조주의 본체를 분해하여 피조물에 일부를 주
었단느 것은 미친 짓이다.(화체설 비판) 예정구원설도 신의 절대주권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
이다. 이런 신의 초월화 경향은 데카르트에서 그 논리적 귀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의 신은 무한히 독립
하여 최고의 예지와 힘을 가진 실체로 만물의 창조주에 머물지 않고, 모든 도덕규범, 자연법칙의 원천이
다. 보든 선악, 진위는 신의 결단에 의해 정해지며, 신은 그런 가치의 실질적 내용에 대해 완전히 무차별
적이다. 신은 선, 정의, 진리를 그 반대로도 만들 수 있다. 신은 자기 내부에 어떤 가능성도 품고 있지 않
은 현실적 실재다. 그런 현실재로서의 신이 전지전능한 주권자로서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가치질서를 만
들어냈다. 신은 국왕이 영토에 법률을 제정하듯 자연계에 법칙을 정해두었다. 자연발생적 도시보다 계획
도시가 낫듯이, 뛰어난 입법자가 제정한 법률을 지키는 민족이 더 훌륭하다. 데카르트의 신에 비견할 배
후에 어떤 규범적 이념도 가지지 않은 절대적 주체로 모든 규범질서를 자유자재로 제정하고, 법・불법을
구별하는 정치적 결단을 독점하는 정치적 지배자란 근세 초기 절대군주의 이념형이다. 세계에 대해 절대
무차별로 초월한 신의 영상이 질서에 대해 완전한 주체성을 가진 정치적 인격의 표상을 가능하게 했다.
(365-368)
1장의 끝부분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주자학에 대한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의 관계를 전기 스콜라와 후
기스콜라의 관계, 즉 아퀴나스에 대한 스코투스와 오캄의 관계로 비교한 바 있다. 마루야마는 이 절에서
그 주장을 좀더 밀고 나간다. 스코투스에서 시작된 신의 절대성과 초월성은 오캄을 거쳐 칼뱅의 종교개
혁 사상에서 극대화되어 모든 도덕규범에서 자유로워지고, 데카르트에게서 마침내 모든 도덕규범과 자
연법칙의 원천이 된다. 데카르트에게서 신은 가치에 대해서 무차별적이다. 신은 전지전능한 주권자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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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이든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루야마는 이를 절대군주라는 주권자에 대한 신학적 표상이라고 설명한다.
앞에서 말한 칼 슈미트에 기대어서 그렇다. 데카르트를 정치사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실상 생소하다.
칼 슈미트에게만 근거한 것도 편협한지 모른다. 이 모두를 단계로 설명할 없다는 점을명시하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초기 중세 이래로 유럽 군주제에 대한 해석에서 로마법과 지역법 그리고 각종의 신학
사상이 변주하면서 신학-정치적 해석이 다양하게 변주해왔다는 점을 몰랐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해석
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절대군주제를 연결시키는 부분만은 쉽게 고개를 끄덕여 주
기 어렵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렇게 사상사적 발전과 사회사 혹은 정치사적 발전이 때로 교차하거나
역진할 수 있다는 점 또는 무관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것은 물론 헤겔의 영향일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한계이기도 하고.
자연적 질서 사상의 전환에서 서양에서 신이 맡았던 역할을 일본에서는 소라이학의 성인의 역할에 다름
아니었다. 질서에 내재하며, 질서를 전제하고 있던 인간에게 질서에 대한 주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비인격적 이데아의 우위를 배제하고, 모든 가치판단에서 자유로운 인격, 그의 현실재 그 자체
가 궁극적인 근거이며, 그 이상의 가치적 소급을 허용하지 않는 그런 인격을 사유의 출발점에 두어야 한
다. 최초의 인격의 절대화는 작위적 질서사상의 확립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주자학의 자연적 질서
사상이 철저했던 만큼 이데아의 우위는 강했고, 그것을 쓰러뜨릴 인격은 절대화될 필연성이 있었다. 기
독교적 창조신 관념이 유기적 사유, 자연적 질서사상의 철저화를 제한하던 유럽에 비해 소라이가 수행해
야 할 사상사적 사명은 훨씬 더 어려웠다. (유럽에서 Verein의 성립은 자연적 생성이라기 보다 신의 창
조행위를 모사하는 인간의 독립행위였다.) 소라이가 성인관념에 모든 이데아적 성격을 떨쳐버리고, 현
실화한 것, 성인의 도를 리로 설명하는 것을 거부한 것, 정사正邪의 존재를 부정하고, 선왕의 도를 따르
는 것을 정이라고 한 것, 반대는 사라는 것은 홉스의 Au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진리가 아닌
권위가 법을 만든다)를 연상케 하는 명제였다. 서양에 비교할 때, 이런 논리적 공작이 갖는 객관적 의의
가 생생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이런 성인의 위치가 도쿠가와 쇼군에 유추되자, 모두 윗분의 뜻대
로 윗분의 손아귀에 있어야 한다는 정치적 절대주의로 나타난다. 스코투스적=데카르트적 신의 세속화
로서의 유럽 절대군주와 소라이의 성인에 대한 유추로서 도쿠가와 쇼군의 역사적 환경의 차이는 도쿠가
와 쇼군의 절대주의의 내용에 있어 봉건성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소라이의 제도에 있어서 봉건성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가치 때무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지배자의 생각, 마음대로에 의해 작위된 결과로
서의 봉건성에 지나지 않아 시대가 바뀌면 새로운 지배자는 자신의 생각에 기초하여 세계 전체의 구도를
다시 바꾸게 된다. 이것이 작위 논리의 귀결이다. 소라이는 봉건사회의 위기극복을 위해 자연적 질서사
상을 배제함으로써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괴물을 불러냈다.(368-370)
여기까지 읽고 나면, 정말 스콜라의 서양사상과 주자학 세계가 그리 똑같은 것이고, 동양사상과 서양사
상이 그토록 유사한 궤도를 지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루야마의 집요함에 설득
되어 버린다. 마루야마는 스코투스에서 데카르트의 발전까지를 절대군주의 사상적 배경과 연결지은 다
음 이제 소라이의 성인을 데카르트의 신과 비교하고, 유럽의 절대군주를 도쿠가와 쇼군과 비교한다. (이
렇게 해결하려는데 왜 홉스나 퇴니스가 필요했던 걸까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일단 서양에서 신
의 절대화가 필요했듯이 소라이에게서도 성인의 절대화가 필요했다. (니체와는 어떻게 관련지을 수 있
을까 문득 생각한다.) 그리고 소라이의 성인이 더 혁명적이다. 인격신이 없는 주자학의 자연적 질서사상
이 더 철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쿠가와 쇼군으로 넘어오면서 문제가 생긴다. 도쿠가와 쇼군은 실제
그런 권력을 행사하지도 않았고, 봉건적 정치사회질서의 해체로 나가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쇼
군은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실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역사적
환경의 차이로 얼버무린다. 그러면서 소라이에게 또 한 번 무기를 쥐어준다. 성인의 작위는 소라이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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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봉건질서로의 복고가 아니라도 무방하고 어떤 새로운 질서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
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빈공간, 무한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 가능성의 공간이 열렸
다고 할 수 있을까? 마루야마는 소라이가 괴물魔物을 풀어놓았다고 까지 말하지만.
2장 5절 쇼에키와 노리나가에 의한 ‘작위’ 논리의 계승: ‘작위’ 논리의 정치적 귀결-안도 쇼에키에 있어
서 ‘자연’과 ‘작위’-모토오리 노리나가에 있어서 ‘자연’과 ‘작위’
봉건사회의 위기 해결의 방안으로 도를 성인이라는 인격적 실재의 작위로 돌리고, 도쿠가와 쇼군의 절대
주의에 의해 자연경제에 기초한 신분질서를 건립하려는 소라이의 기도에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그가
기초한 주체적 작위의 논리는 Gesellschaft적 질서사상으로 봉건적 사회관계를 이질적 논의에 의해 포
장한 것이다. 봉건적 사회질서 내지 근본규범이 작위 논리에 기초지워진다면 그 정치적 귀결이란. 가장
래디컬한 귀결로 소라이학이 인간의 질서에 대한 우위를 보여줌으로 모든 질서는 인간의 의사에 의해 자
의적으로 개변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자연과 작위의 대립은 메이지 초년의 계몽잡지 『万国叢
話』에서도 정치에는 ‘천조天造설’과 ‘인작人作설’ 있다고 명쾌하게 드러난다. 이런 귀결은 소라이는 단연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왕조를 연 개조는 세계전체의 구조를 변화시켰다고 하면서도, 성
인을 종교적 절대로 끌어올겨 성인이 작위한 도[예악형정]에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성을 부여하고 있
다. 오륜이라는 규범과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는 쇼군의 작위에 기초한 제도임을 넘어 절대화된 길 그 자
체에 편입되어 있다. 어떤 제도적 변혁도 봉건사회의 틀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취약
성이 있다. 소라이가 궁극적 가치를 이데아로부터 인격으로 옮기는 순간, 그는 모든 영원한 것을 시간의
파도에 맡겨버렸다. 이데아의 우위에 기초한 사상에서 역사는 이데아 실현의 장이며, 어떤 역사적 변화
도 이데아 양상의 변화에 머문다. 그러나 내재적 가치의 인격에로의 주체적 초월은 필연적으로 역사의
연속성의 파괴를 초래한다. 소라이에게도 百世를 오로지 주자의 『통감강목』처럼 논하는 태도에 반역이
일어나 각각의 시대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시대의 변화는 언어와 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역사적 개성
에 대한 인식이 눈에 띈다. 한번 연속에서 단절로,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향해진 의식은 멈춰서야 할
한계를 모르게된다. 성인과 작위한 도를 이성적 인식과 가치판단의 다른 편에 두는 것은 주자학의 정적
합리주의의 극복 및 그에 따른 역사의식 출현의 논리적 전제인데, 절대화된 성인의 도가 어느새 역사적
상대성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수백년이 흐르면 성인이 만든 것에도 폐단이 생기고, 세상이 어지러워진
다. 이런 소라이의 후퇴는 『弁名』에서 삼대의 예가 이미 각각 다르다며 자연의 동일성에 대해 역사의 변
화성이란 무기를 들고 주자학에 다가섰을 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결국 성인이 만든 예악과 다른 개국
군주가 만든 제도는 소라이의 엄격한 구별에도 불구하고 질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륜 이나 사농
공상이란 봉건사회 기본질서도 천지자연의 리가 아닌 한, 선왕의 작위에 기초지우려 해도, 다른 모든 제
도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 아래 놓이게 된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파괴할 수 있다. 봉건사회를
위한 변혁이 봉건사회에 대한 변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절대적 보증은 소라이학의 논리에는 없다.
(371-375)
소라이의 작위 논리가 봉건사회에 가져오는 외부로부터의 첫번째 충격이란, 일단 제도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인한, 아무리 소라이처럼 봉건적인 제도를 재건한다고 해도, 봉건제도의 한계
아래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봉건제도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자연질서와 연관되어 있다는 상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인데. 다시 말해 다른 대안이 없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사람이 일단 한 번 제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모든 제도는 상대화가 되고, 그런 논리에 의해 봉건사회를 구하기 위
한 작위 사상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는 작위사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마루야마의 소라이의 작
위사상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매우 적극적인 평가인 동시에 봉건사회에 대한 근본주의적 해석을 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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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마루야마의 이런 모든 논리가 성립하려면 거기에는 봉건사회의 순환성이라는 전제가 성립해
야 한다. 봉건사회는 자연질서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라는 사상 속에서 모든 사회질서가 강력하게 자리잡
고 있는 데다 사상과 사회현상이 상호순환적으로 보완하고 있고, 이런 사상이나 사회제도 모두 자연발생
적으로 생겨났을 때만 이런 논리가 성립한다. 즉, 봉건사회를 이념형으로 보지 않고, 현실 그대로 들여
다보는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여하튼 마루야마처럼 소라이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그리고 소
라이학의 후계자들이 소라이의 이점에 근거해서 사상을 발전시켜갔다면, 그때는 소라이에 근대성의 맹
아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의 독자들은 마루야마의 이런
주장을 읽을 때, 그래서 일본의 전통에는 근대성의 맹아가 있었다는 자랑이냐라는 심정으로 읽지만, 마
루야마는 실은 그런 맹아가 있었다고 해도 꽃피우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말하는 데다가, 그런 맹아의 존
재란 실은 일본 전통사상 순수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순수한 일본사상 따윈 없다는 그런 주장
으로 파시즘을 공격하려는 것이다. 한일관계의 오묘함은 서로 같은 것을 보면서 전혀 다른 것을 읽어낸
다.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가진 열등감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그 원인일 것이다.
소라이학의 논리에 잠복한 괴물은 봉건적 사회관계를 바깥에서부터 뒤흔들었지만, 내면적 가치를 빨아
들여서 안으로부터 공허한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봉건사회는 폐쇄적・완결적 사회적이 계층적으로 긴
밀하게 연관되어 통일성이 유지되는 사회로, 정치적으로 간접지배의 원칙으로 나타난다.(쇼군과 다른
영주와의 차이는 쇼군직할영지天領의 양적 우월에 있을 뿐, 질적 차이는 없다.) 지배의 간접성에 대응해
정치의 물적 기초가 각 사회권에 내재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인적 행정직der persönliche
Verwaltungsstab과 물적 행정수단das sachliche Verwaltungsmittel의 결합은 전형적인 모습이며,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권한도 신분에 따라 광범하게 분산되어 있다. 사회권의 폐쇄성의 원칙은 무사
만이 아니라 서민들 사이의 사회관계에도 적용되었다. 봉건사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재적 가
치의 계층적 체계이다. 전체 사회질서의 가치가 개개의 폐쇄적 사회권에 개별적으로 내재 분산되어 있
고, 각각의 사회권은 전체질서의 불가결한 담당자이므로 그런 가치의 신분적=지역적 내재성을 유지하
고 사회권의 폐쇄성을 유지하는 것은 봉건사회 질서 유지에 중요하다. 이런 폐쇄성이 파괴되고 분산되어
있던 가치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응집되는 순간 봉건체제는 붕괴된다. 지배의 간접성이 사라지고 중간
권력이 최고권력에 습수되며, 행정의 물적수단(건물, 마필, 무기 등)이 행정직의 사적 소유로부터 분리
되어 국가에 집중될 때, 입법권이나 재판권의 다양한 분포가 중앙에 통일될 때, 근대국가가 탄생한 것이
다. 소라이학은 봉건적 질서를 형해화한다. 주자학의 대우주・소우주의 유기체적 도식은 봉건사회의 내
재적 가치의 계통적 체계에 들어맞는다. 소라이학은 이데아를 성인에 종속시키고, 사물에 분산된 가치를
성인이라는 절대화된 인격에 흡수한 결과, 사회규범은 천지자연의 리가 아니라 절대적 인격의 작위 때문
에 타당한 것이 된다. 데카르트적 신의 개념에서 도덕율을 결정하는 자의성으로 귀착하고 권위가 법을
만든다는 홉스의 명제에서 법실증주의가 생기는 것처럼, 작위는 봉건적 사회질서에서 실질적 가치를 박
탈하고 단순한 형식적 실정성에 근거지우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소라이의 정치적 절대주의가 순수한
자연경제와 그에 기초한 순전한 계층적 질서의 수립이라 해도 유럽의 절대주의에 비해 봉건사회에 대한
위험성이 덜하지 않았다. 실질적 내용에 무관심하다는 점은 주체적 작위의 입장에 공통적이다. 규범은
소라이에 있어 형식화될 뿐 아니라 외면화되기도 한다. 도가 천지자연이 아니라 성인이 만든 것이라면,
오륜・오상과 같은 사회규범은 인간성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소라이는 도가 인정人情에 입각한 것이
라 역설하는데, 이는 규범이 완전히 공적・정치적인 것으로 승화되고 있어 개인적・내면적 영역과 부딪
히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그럼 규범이 인간을 내면에서 의무지워주는 힘을 잃어버렸음을 말해준다. 다
자이 슌다이도 규범의 외면화라는 문제에서 스승의 논리적 귀결을 충실하게 끝까지 밀고 나가, 외면적으
로 군자의 면모를 갖춘 사람이 군자이며, 내심이 어떤지는 묻지 않는다고 했다. 나쁜 마음이 드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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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이지만, 행동에 옮기면 소인이다. 여기에 이르면 유교 규범은 인간의 내면성과 어떤 관련성도 가질
수 없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분리는 규범 준수를 용이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여도, 규범의 구속력
을 약화시키며, 인간의 감정에 기반을 둔 자연성을 전능한 것으로 만들어주게 된다.(375-380) 소라이
학이 도입했던 주체적 작위사상이 봉건사회에 미친 정치적 기능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적극적인
것으로 봉건적 질서의 변혁, 새로운 질서수립의 논리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소극적인
것으로 봉건적 사회관계 및 그 관념적 유대로부터 실질적 타당성의 근거를 박탈하고 형해화했다는 것.
도쿠가와 후반기 사상사에서 대체로 소극적인 것으로 현실에 작용했다. 작위적 질서관이 인작설로 적극
적 의의를 갖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 소라이가 불러들인 괴물은 봉건적 지배 태내로 파
고들어가 내면에서 부식시키고 있었다.(380)
둘째로 봉건사회란 폐쇄적이고 자기완결적이며, 분권화된 지배구조이기 때문에, 중앙집권적으로 제도를
수립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아무리 봉건사회의 구축을 향한 방향이라고 해도 봉건사회
를 안에서부터 부식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내면 도덕을 강제할 방법이 사라지게 되면, 규범적 구속을 무
너뜨리고 만다. 내면 도덕의 윤리도 무너지고, 이를 제도적으로 강제할 외적인 근대 국가도 형성되지 못
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것은 감정과 자연에 기반을 둔 낭만주의다. 규범만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규범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주장이다. 한 마디로 소라이학은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방향
으로는 전개되지 못했으나, 기존 사회를 안에서부터 부식시키는데는 충분했다는 것이다.
겐로쿠 시대 표면화된 봉건제의 동요는 화폐 주조를 계기로 한 상업자본 내지 고리대자본의 급격한 대두
에 의해 배태되었지만, 상업자본이 상업자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그 점에 봉건사회에 대한 변혁의 힘
으로서 역사적 한계가 있었다. 지배적인 생산은 농업이고, 공업은 농촌의 가내공업, 동업조합 수공업,
問屋制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순수한 산업자본은 도쿠가와 시대를 통해 성장을 거두지 못했고, 쇄국
에 의한 해외시장의 차단은 생산방법의 변혁에 대한 자극을 안겨주지 못했다. 구라모토蔵元, 가케야掛
屋, 후다사시札差 등 거대한 조닌은 무사계급의 경제적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무사계급에 대한
대부를 통해 높은 이자를 챙기고, 상업자본가의 자격으로 봉건적 소유형태를 침식하고 있었으나 이미 존
재하는 생산방법으로 수입을 올리고 생산방법에는 외부적으로 접촉하는 한 봉건적 지배자에 의존하는
기생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빌린 돈을 갚지 않거나, 강제적인 차용, 강제 기부금 등 적법 불법한 지배
층의 공세에 대해 순수 경제적인 방어 밖에 강구할 수 없었고, 권력에 의한 몰수 같은 마지막 수단 앞에
는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품경제의 농촌팀투는 농민층의 분화를 촉진했으나 자본가적 생산의 미성
숙으로 농촌 생활은 내부적으로 침식되면서 중간 착취계층이 생겨나고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해졌다. 한
편으로 봉건적 지배체계는 상업・고리대자본의 침식에 의해 경제적으로 쇠약해지고, 도시의 우치코와시
打毀し나 농촌의 잇키一揆에 의해 정치적으로 해체과정을 걸으며, 다른 한편 새로운 생산양식을 담당할
세력은 도쿠가와시대를 통해 충분히 사회적으로 성숙하는데 이르지 못했다. 이점이 작위논리의 발전방
향이 봉건사회의 침식 쪽으로 달려가게 한 역사적 근거였다. 하강기에 들어선 봉건사회에 반대파적 사상
적 동향은 소라이학을 근대적인 인작설로 끌어올릴 힘을 결여하고, 봉건적 사회관계가 작위의 산물이 되
며, 거기서 필연적으로 소외된 자연을 자신의 의지처로 삼아, 그런 질서 내지 관념적 유대에 대한 사상
적 저항을 시도하게 된다. 안도 쇼에키와 모토오리 노리나가(380-383).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봉건사회가 무너지게 된 데 대해 사회경제적 배경을 설명한다. 마루야마는
이런 설명을 절대 빠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내용은 지극히 도식적이다. 한 마디로 봉건사회의 자연경
제와 농업생산에 의존한 구조는 붕괴했고, 상업자본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산업자본으로 발전하지는 못
해 생산양식을 바꾸지 못했고, 정치적 지배자들의 공격에는 무력했다. 이 과정에서 피지배 생산자인 농
민들은 비참해졌다. 봉건사회를 떠받치는 사회경제적 토대가 침식되고 붕괴한 이상 봉건사회를 재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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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쪽으로 작위사상이 전개되지 않고, 봉건사회를 침식하는 쪽으로 전개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가들은 소외된 자연을 도피처로 삼는다는 것. 토대와 상부구조가 너무나 완벽하게 조
응하는 도식적인 주장이라 더는 설명을 못하겠다. 마루야마의 설명이 때로 혼란스러운 것 또는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봉건사회와 이를 설명하는 사상의 선후문제와 상관관계 문제에 있다. 사회 변화에 사상
이 반드시 필요한가? 특정한 사상 없이 사회는 형성되거나 돌아갈 수 없는가? 사상이 붕괴는 사회의 붕
괴의 전조인가? 아니면 사회가 붕괴해서 사상이 무너지는가? 마루야마는 꽤나 자신감 있게 이 둘 사이
가 상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 하나하나 파고들어 가면 이런 문제에 있어서 구체적인 인과성이나
상관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크게 크게 말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
을 설명하려다 어려움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안도 쇼에키安藤昌益는 비교적 최근에 주목을 받은 사상가다. 그는 호레키 연간(1751~64)에 활동한
의사출신이라는 점 외에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고립된 인물이지만 도쿠가와 시대를 통해 봉건적 사회질
서 및 관념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부정한 유일한 사회사상이며, 그 관념이 자연과 작위 대립의 발전적 적
용 위에 구축되어 있다.(383-384) 쇼에키의 사상체계는 기초인 자연철학이 광범하며 상세한데, 현실사
회에 대한 깊은 시대적 관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사색도 정치적=사회적 귀결
로 이끌어가기 위한 단계이다. 소라이보다 한 세대 늦게 봉건사회의 위기를 도호쿠東北의 외딴 곳에서
농민들 한가운데서 보게 된다. 봉건사회는 모든 사회적 모순의 탈출구를 농민에게서 찾고, 재정 건전화
사업은 결국 농민들에게 무거운 공조를 부과하고 엄중하게 징수하게 된다. 토지의 유질처분이 잇따르고
기근과 재해가 겹치자, 농민들은 잇키로 대항했고, 법은 엄해졌다. 잇다른 기근으로 간토에서 도호쿠 일
대에 영아살해間引き가 널리 행해지게 된다. 교호까지 상승세를 타온 인구 증가가 멈추고 감소하기 시작
한다. 쇼에키가 보기에 농민들의 궁핍의 원인은 직경直耕하지 않고, 노동생산물을 수취하는 불경탐식不
耕貪食하는 무리들, 무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저항하는 자를 포박하는 것은 군주가 자연천하를
훔치기 때문이다. 무사가 없다해도 농민은 농민이다. 농민이 무사를 기르는 부모인데, 무사는 부모를 멸
시한다. 이는 인정仁政이 아니라 망악忘惡이다. 유학자나 종교인도 불경탐식자이기에 이런 모순을 지적
하지 않는다. 유불・노장・신도 모두 노동하는 피치자와 노동에 기생하는 치자의 관계를 대전제로 하고
있다. 수백년 이상 이런 교설의 홍수 속에서 명백한 도착을 보고도 모순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
인聖人이 모든사람이 스스로 일하는 일상적 상태(自然の世)를 다른 사람이 농사지은 것을 빼앗고 종속
시키는 특수한 상태(法世)로 전환시켰다. 성인이 상하 지배관계를 만들었다. 군주는 성인이 천하를 훔친
후에 생긴 이름이다. 오륜과 사농공상도 성인이 사사로이 만든 것이다. 성왕을 세우는 것은 사치의 시작
이자 악의 근원으로 사회악의 궁극적 책임은 성인에게 있다. 쇼에키는 복희에서 공자까지 모두 11명을
지목하여 자연의 참된 도를 잃어버리고 천하 국가를 훔치기 위해 병란兵亂의 세상을 만들었다. 성인이
자연을 모르고 사법私法을 만든 것이 문제이며, 쇼에키는 소라이가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본 성인의 작
위에서 모든 타락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작위 이전의 자연세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며, 자연 상
태를 잊어버린 세상사람들의 의식 개조가 전제이다. 이를 위해 성인들의 가르침이 도둑들의 변명임을 증
명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해야 한다. 쇼에키가 복희, 신농, 황제, 요순우탕문무주공, 성현, 학자, 석가,
쇼토쿠 태자, 하야시 라잔에서 소라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농사짓는 첮도를 훔치고, 여분의 식량을 먹어
치우면서, 서로의 본성이 더불어 충분함互性具足을 알지 못한다고 과거의 모든 사상과 대결했을 때 부정
해야할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단계는 소라이학이었다.(384-390)
쇼에키의 사상은 당시 일본이라는 상황에서 보면 놀랍지만, 또 없을 법하지도 않다. 이런 식의 자연주의
적이고 자연회귀적 사상은 어떤 시대에도 존재하는 법이다. 간디도 영국인 앞에서 물레를 돌렸고,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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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돌아가려는 이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마루야마가 주목한 것은 쇼에키가 소라이를 지목했다는 점일
것이다. 모두가 사작私作이고 사법私法이란 비판은 일견 소라이의 작위론에 근거해서 그들 모두를 뒤집
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복희에서 시작해서 소라이까지 비판한 것도 그렇고.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아
닐 수도 있고.
쇼에키의 과제가 불경탐식의 타파라면 그의 지도동기leitmotiv는 직경直耕이다. 작위를 배제하고 드러
낸 자연은 직경이다. 이 의미를 파고들며 소라이학의 주체적 작위와 주자학적 자연을 아울려 지양하는
그의 논리를 구축한다. 직경이란 인간이 스스로 노동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우주적 자
연이 모든 사물을 생산하는 것도 천지의 직경이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기운동活眞自行 뿐이다.
이런 운동의 배후에서 운동의 근원을 이루는 인격적 비인격적 실체란 추상적 사유에 불과하다. 천명, 태
극, 음양, 오행 같은 것은 불경탐식하는 자들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모든 사물은 추상적=고정적 실
체를 상정하지 말고, 구체적인 활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시무종無始無終하며, 무상무하無上無下하고,
무천무존無賤無尊한 천지에는 선후가 없다. 오로지 자연뿐이다. 천지의 위치를 덧붙이는 것은 그르침의
시작이며 큰 혼란의 근본일 뿐이다. 오행은 실은 하나이며, 오륜과 사민을 나눈 이유는 뭇사람의 위에서
불경탐식하기 위해서이다. 노자도 자연을 고정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불교의 임제도 실체와 그
림자를 나눈 잘못을범한다고 비판한다. 쇼에키의 불경탐식에 대해 직경을 추구하는 것은 기능주의로 철
학적 표현을 실체 개념에 대한 기능 개념의 투쟁애서 구하는 것이다.(390-393) 호성互性이란 사물 사
이에 존재하는 상관적성질을 가리킨다. 活眞自行이라는 자기 운동으로 모든 사물이 파악된다면, 모든 절
대적・고정적 대립은 상대화된다. 삶은 죽음을, 죽음은 삶을 포함하고 있다. 삶과 죽음은 互性의 상징이
다. 천지, 남녀, 선악, 리비理非, 상하, 치란 등 대립은 모두 互性을 갖는다. 천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일
체이다. 남녀, 선악, 밤낮 등의 대립은 대립하면서 동시에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혼동하는 것도 잘못이
지만 추상적으로 분리하여 고정시키는 것도 일방적인 것偏惑이다. 두 개로 나누어 서로 다른 것으로 보
지도 말고, 섞어 하나로 혼동하지도 말아야 하는데 사물을 구체적 작용으로부터 분리시켜 이해하는 종래
의 사상(석가, 노자, 장자, 성덕태자 등)은 필연적으로 偏惑에 빠진다. 互性를 알지 못해, 直耕의 오묘함
을 드러내지 못하고, 천지, 일월, 남녀, 군민, 상하, 귀천, 선악 등 二別을 가르쳐, 둘이면서 하나의 一眞
氣인 眞道를 훔치고 천하를 미혹하기에 이른다. 자연세가 법세로 바뀐 것은 互性의 원칙이 상실되고 구
체적 통일이 分別知의 추상적 대립으로 변한데서 시작되었다. 음양의 차별이 생겨 일부일처가 무너지고,
유불의 일부다처나 독신이 생겼고, 성인이 윗자리에 서자 亂이 일어난 후 治이 생겼다. 자연에는 治도
亂도 없고 眞道으로 편안히 먹고 살 뿐이다. 쇼에키는 자신의 이상사회를 서술하면서도 성인의 작위에
대해 추상적인 二別을 부정하는 형태로 그린다.(393-395) 곡식, 땔감, 생선은 각자 생산하여 바꾸니 빈
부도 상하도 없고, 책망도 아첨도 싸움도 군대도, 형벌도 근심도, 오상, 오륜, 사민의 가르침이 없으니,
성현도 어리석은 사람도 사무라이도 없는 자연과 오행에 의해 생겨나는 세상이다. 천하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므로 누구나 농사를 지어 자식을 기르고 부모를 봉양한다.(396) 만민평등한 직경에 기초를 둔 물물
교환 사회로, 소라이의 이상사회에서 지배자인 무사를 배제한 형태이다. 더욱이 가공의 몽상이 아닌 법
세 이전에 어디서나 존재했던 것으로 에조(북해도)와 네덜란드에는 지금도 존재하는 사회다. 그는 나가
사키에서 네덜란드 문화를 접하고, 모두가 일하는 사회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도 그런 세상이 다시 실
현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에도 막부 개창 후 150년 만에 도쿠가와 시대에 철저히 적대적인 목소리가
등장했다. 근세 초기에 주자학 내지 주자학적 사유에 있어서 봉건적 계통제는 고금천지의 자연적 질서였
다. 그것이 소라이학에 있어 성인의 작위에 의해 근거지워짐에 따라 자연적 질서는 봉건사회로부터 소외
되었다. 안도 쇼에키는 소외된 자연으로 성인의 작위로서의 봉건사회를 부정한 것이다. 소라이와 슌다이
는 성인이 출현하기 이전 상태는 짐승과도 같은 세상이었는데, 성인이 예악제도를 만들어作為 비로소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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륜이 있는 세상이 되었다. 쇼에키에 있어 사람은 치우치지 않고 모두 통하는 기에 의해 만들어졌고, 모
두 평등하게 직접 일해서 대소 상하의 이원적 구분이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인이 나온 후 크
고 작음의 순서가 생겼고, 사람의 세상을 짐승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연에서 작위로의 전개는 인
간에서 짐승으로의 타락이다. 주자학적 자연은 그 부정으로 소라이학적 작위를 낳았고, 다시 부정의 부
정으로 쇼에키적 자연에 이르렀다. 쇼에키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환경을 응시하여 그런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 냈지만, 그런 논리적 과정은 그때까지의 사상적 발전 속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397-398) 그
러나 봉건사회의 철저한 적대자가 작위의 논리적 가치의 단순한 부정자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역시 그 반
봉건성은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법세를 자연세로 전환시켜야 할 주체적 계기는 그의 이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쇼에키의 이론에는 직경이란 자연세의 논리는 있어도, 자연세를 만들어내는 원리는 나
오지 않는다. 법세의 타도에 의한 자연세의 회복에 대해 논하는 대신, 법세에 있으면서 자연세와 같은
효과를 내는 방법이었다. 그는 평화주의를 취하고 그의 이론의 실현에 대해 백년 후를 기약했으며, 그의
자연세는 네덜란드에 주목했는데도, 봉건사회 이후 보다 이전의 사회적 특징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는
점도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말해준다.(398-399)
쇼에키는 흥미로운 사상가다. 마루야마는 쇼에키의 사상을 실체에 대한 기능주의라고 평가한다. 고세이
互性란 아주 전통적인 이해방법의 하나이다. 양극적 특성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하나로
기능하는 세계관인데. 아주 통속적이면서도 현대 일본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처세술이다. 모든일에는
플라스가 있으면 마이나스가 있다는 식의 일본인의 상투어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면서도 만민평등의
모두가 농사짓는 사회는 사농공상의 단순한 구별 이전의 원시공동체적 사회를 지향한다. 무사계급도 군
주도 없으면, 연공도 없고, 노역도 없으니 모두가 태평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네덜란드가 그
런 사회라고 말한다. 쇼에키는 나가사키에도 왕래했다고 하는데, 쇼에키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모두가
일을 한다는 것이다. 쇼에키 뿐 아니라 많은 수의 일본사상가의 저작에서 네덜란드에서는 국왕도 상업을
한다면서, 왕도 일을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온다. 왕실의 이름으로 무역하는 것이 그렇게 비친 모양이
다. 쇼에키나 당시 농민들의 눈에는 무위도식하는 것으로 보였던 당시 지배층을 불경탐식으로 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그런 사회일리가 없지 않은가. 자연의 부정인 작위를 재차 부정한 자
연으로의 회귀 사상에서, 쇼에키는 구체적으로 자연세를 되살릴 방안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을
했다가는 당장 참수를 당했을런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기근이 심한 도호쿠 지방에서 사실상 농민들 사이
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다. 그가 말한 법세에 있으면서도 자연세와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
그런 것인지. 그러면서 백년 후에는 그런 사회가 올 것으로 생각했고, 네덜란드 같은 사회를 그렇게 보
았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마루야마 식으로 사유양식의 구조를 보면, 쇼에키
의 자연주의에서 자유주의, 중농주의적 자유주의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를 완성자로 하는 근세 일본의 국학国学과 정치적・사회적 질서와의 접촉이
라는 측면, 바꾸어 말하면 국학적 사유구성을 통해 봉건사회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다
룬다.(399) 국학의 내용 중 현실적 정치・사회사상은 취약한 고리 하나를 이루고 있다. 국학이 가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초기 단계는 물론 고도라는 사상적 입장을 자각하게 된 마부치, 노리나가에 있어 그
들이 살았던 현실의 정치적・사회적 환경을 직접적 대상으로 한 고찰은 이렇다 할 지위가 없고, 당시의
상식적 정치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학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규정하는 비정치적 성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마부치는 유학자의 치국평천하를 비웃었고, 노리나가는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정한 규정대로 행하기만 하면 되며, 사사로이 도를 행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이론과 실천을 구별했다.
모토오리 오히라本居大平는 일본皇国은 중국 조선漢国과 달라, 마나비学問은 마츠리코토政事의 요체가
10/25/23, 4:10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3. | FELI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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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며, 세상의 다스려짐 여부는 마나비고토学問事와 관계없다고 말했다. 국학의 이런 비정치적 성격은
존황尊皇 사상으로 하여금 끝까지 막부 정치와 융화하게 해주고, 완전한 반대 이데올로기로 전화를 억제
하던 모멘트였다. 봉건적 지배관계와 관련하여 국학의 주요한 사상가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직접적인 말
은 모두 현존하는 질서의 무조건적 긍정 내지 예찬으로 끝난다. 마부치는 상대를 찬미하고, 마츠리고토
유교의 침윤을 통탄하여, 도쿠가와의 세상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찬양했다. 노리나가도 오늘의 이
시대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구상하고, 조정의 위임에 의해 이에야스로부터 대를 이어 위대한 쇼군 가
문이 천하의 정치를 펴는 시대로 이에야스의 법률, 쇼군 가문의 규정,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법률규정
이라며 봉건적 계통제를 정통화한다. 홍수・가문・기근이 비참해도, 평화로운 시대라고 거리낌 없이 읊
는다. 고학古学에서 하나의 적극적 신학神学을 구성하고, 그 학통에서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을 배출한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조차 텐노-막부-다이묘라는 위임관계御手代를 다함이 없는 정치형태라고 했
으며, 다자이의 성인의 도는 모두 도쇼구東照宮의 무덕御武徳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리얼리
스틱하게 현존 질서를 긍정하는 사람이었다. 표면의 정치적 사유를 그대로 맏아들이면, 국학은 시종일관
봉건사회로부터 한걸음도 내딪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국학 사상의 혁신적 의의가 순수 학문
적 영역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역설적이긴 하나 국학은 본질적 성격이 비정치적이기 때문에, 봉건사
회에 대한 긍정이 비정치적 입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리어 하나의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국학의 변혁적 이데올로기를 억제했던 비정치성은 보수적인 기능도 상대화시켰다.(400-403)
문제적 사상가 노리나가의 정치적 측면은 이렇다할 고찰이 없는 당시의 상식적 정치론을 벗어나지 못하
는 것으로 비정치적 성격을 지녔다. 흥미롭게도 이런 비정치적 성격은 존황사상과 막부 정치의 융화를
가능하게 했다. 현존 정치질서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 일본의 조상신으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통치에
대한 순수한 긍정은 신학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마루야마는 반복적으로이런 비정치성이 가지는 다른 측
면, 변혁에 대한 순응에 주목한다. 어떤 다스림도 긍정하는 사상은 현존 질서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없
기 때문에, 현존 질서의 유지를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세상이 뒤바뀌면 또 찬양할 뿐이다. 딱히 친일
이 문제랄 것이 없이, 독재정권이건 뭐건 상관없이 찬양시를 읊어대는 어떤 시인의 아름다운 말들이 떠
오를 정도다.
국학은 본래 上代 문학의 문헌학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서 후세의 이지적 반성이나 논리적 강제를
수반하지 않는 인간 심정의 적나라한 모습을 찾아내고, 자연적 성정의 자유로운 발로를 즐겼던 상대 생
활에 대한 동경을 낳았다. 국학은 먼저 모든 인간적인 작위에 대항하는 노장적인 자연의 주창자로서 출
현했다. 여기서 유교 규범을 성인의 작위로 돌리는 소라이적인 사유가 부정적 계기로 개입하게 된다. 소
라이와 슌다이는 유교 규범을 외면화・형식화했고, 국학자들은 그런 규범의 인간성으로부터의 소외를
이용하여 내면적, 심정 세계의 불가침성을 선언했다. 소외된 규범은 공적・정치적 제도를 의미한다. 이
런 외적 규범에 대한 내적 자연의 반항을 밀고 나가면 쇼에키, 노자, 루소 같은 봉건적・신분적 구속 그
자체의 부정에까지 이르는 자연주의로 흐른다. 그러나 국학적 자연주의는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마음이라는 인간 성정의 본래적 자세에 입각하려는 와카적 정신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자연이 하나의
이즘이 되면 내적 심정에 대해 새로운 당위로 다가가고, 유동하는 심정은 다시 고정적 규제에 따르게 된
다. 노리나가는 노장은 인간의 사카시라를 싫어하여 자연의 도를 억지로 세우려 세기에, 사카시라를 싫
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도리어 자연을 어기는 억지強事라 말했다. 인간적 작위에 대해 내적 자연성을 우
위에 두고, 자연 그 자체의 관념적 절대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내적 자연 그 자체의 배후에서 그것을 근
거지워주는, 초인간적 절대적 인격을 두어야 했다. 신의 작위로서의 자연이 노리나가의 입장이다. 어떤
규범적 구속도 없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真心에 따라 평온하고 즐겁게 세상을 살았던 上代 일본
의 국민생활은 그냥 그대로 신의 도神の道이다. 조상신이 만들어 전해준 도이다. 후대에 真心가 漢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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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가리워지고, 신의 도가 성인의 私智로 만들어낸 규범에 방해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추이도 신께
서 하시는 일神の御所為인데, 타락은 나쁜 신의 일이지만, 이 또한 조상신의 령이다. 고도를 따른다고
억지로 上古와 같이 만들려면 신께서 하신 바를 거스르는 일이다. 오늘날의 국가정치는 윗자리에 계신분
이 정하신 대로 하는 것이 상고의 신의 다스린 취지에 들어맞는 일이다. 노리나가는 고도조차 당위로 작
용하지 못하게 했다. 인간정신의 자연적 활동에 대한 어떤 강제가 되고, 신의 도를 따르는 생활태에 모
순된다. 역사적으로 주어진 것을 주어진 대로 긍정하는 것이 풍요롭고, 넉넉하며, 세련된 노래의 정신을
본질로 하는 국학 정신의 귀결이다. 그 사상의 근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을 신께서 하시는 일이
라는 신의 작위에 대한 절대적 귀의였다. 봉건적 계통제는 그들이 처해 있는 역사적・현실적 여건이며,
그렇게 되어 있는 것 역시 신의 작위에 의한 것이다. 그 시대의 법령도 신의 명령이니, 그 시대의 법령을
지키는 것이 신의 도이다. 거기서 현질서에 대한 방항이 부정됨과 동시에 절대성의 보증 역시 거부한다.
시대가 바뀌면 새로운 지배형태는 역시 그 시대의 신의 명령이다. 중요한 것은 신께서 하시는 일 그 자
체이지, 내용이 아니다. 내용으로서의 봉건제는 긍정되는 동시에 부정된다. 인간이 만든 작위 규범에 대
한 자연의 주창자인 국학은 자연 자체의 규범화를 방지하기 위해, 신의 작위에 의거하게 만들었고, 결국
소라이의 주체적 작위의 논리적 귀결과 같았다. 노리나가가 신의 도와 성인의 도를 아무리 구별했어도,
노리나가의 신과 소라이의 성인의 체계적 지위의 유사성은 가릴 수 없을 것이다. 양자 모두 이 세상 모
든 제도와 문물의 궁극적 근거다. 양자 모두 통상적 윤리적 가치판단을 넘어서 있는 절대적 인격이다.
소라이가 리로 성인을 헤아리는 것을 모독으로 여기듯 노리나가도 신을 이치로 따져서는 안된다고 말했
다. 신 내지 성인은 양자 모두 이데아의 우위를 배제하며, 인격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다만 이런 사유구
성을 취한 동기는 정반대인데, 소라이의 주체적 작위는 처음부터 봉건사회의 보필이라는 공적=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정치적 지배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었고, 노리나가는 국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내면
적 심정의 真心와 모노노아와레의 세계가 일차적 관심사였고, 그 순수성을 밀고나간 결과로 이르게 된
논리가 신께서 하시는 일이란 구성이다. 그런 논의가 정치적 사회를 새상으로 할 때는 정치적 복종이라
는 관점에서 논의되었다. 노리나가에 있어 주체적 작위의 논리는 선악을 넘어서 있으며 자신이 하고 싶
은 그대로 지배하는 소라이적 절대주의의 드러나지 않는 측면을 지배받는 입장에서 올려다본 것이다. 작
위의 논리는 제도의 내재적 가치를 공허하게 만들었고, 노리나가는 비정치적 내면적 자연을 디딤돌 삼아
모든 정치적 제도를 괄호 안에 집어넣었다. 아랫사람은 좋건 싫건 어떤 지배관계에도 복종하라는 것은
질서의 타당성이 순수하게 주권자의 형식적 실정성에서 유래하며, 내재적 가치(정의, 진리)와 전혀 상관
없다는 홉스적 실증주의가 드러난다. 아랫사람은 좋건싫건 간에 윗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르면 된
다. 소라이학에 있어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결과인 규범의 가치적 소외는 그와 정반대 입장에 섰던 노리
나가학에 있어서 분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국학의 비정치적 낙관주의의 사유구성을 통해 작위 논리는 불
길하게 이미 발효했다.(403-410)
마루야마는 다시 한 번 소라이와 노리나가의 논리구조를 분석한다. 노리나가는 모든 작위에 반대하는 자
연을 내세웠지만, 그런 자연이 다시 규범이 되면, 가학歌学에 입각한 자유로운 심정의 변화와 흐름을 다
시 억제할 수 있다. 노장사상 같은 자연의 관념적 절대화를 피하기 위해 그 배우에 초인간적 절대적 인
격이 필요했다. 실상 이것은 꽤나 예리한 분석이다. 자연의 절대화로 인해 운동이나 사상이 산으로 가는
경우는 현대에도 늘상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연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흔하다. 그래서 노
리나가는 일본의 조상신을 중시하고, 모든 일은 신께서 하시는 일이 된다. 심지어 상대에 비해 타락한
오늘날의 타락 조차 나쁜 신의 하시는 일로 억지로 고도를 살리는 일조차 신에게 거스르는 것이 된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그저 그때의 지배자와 법령에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신의 도고 신의 명령이다. 봉
건제도 신의 명령이고, 또 다른 체제도 신의 명령이다. 정말 놀랍게도 노리나가를 읽을 때마다, 현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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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통속 기독교에서 흔히 등장하는 지배자에게 절대 충성의 논리가 떠오른다. 독재자도 무능하고 불의
한 대통령도 모두 신의 뜻으로 신이 세운 것이니 그에게 복종해야하며, 평가해서는 안되고 위해서 기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아직도 하고 있다. 물론 노리나가는 변화를 받아들이지만, 이들은 그만도 못해서 변
화를 되돌리려고까지한다. 일본 국학과 신도의 정치사상적 해석이 식민지 시대를 통해 스며든 것은 아닐
까 으심이 생기기도 한다.
마루야마는 노리나가에게서도 신의 작위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소라이의 성인의 작위와 마찬가
지이다. 마루야마는 다시 한번 사유구조의 동질성과 방향의 차이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나는 방향에
서 한 가지 동질성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현실 통치 구조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소라이는 봉건사회를 보필하기 위해서 엿지만, 노리나가는 그저 정치적 복종의 측면에서만 논의한 것이
다. 마루야마가 보기에 노리나가는 소라이의 절대적 지배를 아래에서 올려다본 것이다. 두 사람 모두에
게서 중요한 것은 질서의 타당성을 주권자의 형식적 실정성에서만 찾는다는 점이다. 현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사한 입장으로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식의 준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말한다. 소라이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봉건사회를 재건하려고 했지만, 그 사유구조는 결국 규범을 분리시키는 구조였다. 노리나가
는 아예 규범을 배제하고 있다. 전통적 규범의 내적 가치에서 자유로워진 정치는 새로운 구조와 기능 및
제도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일련의 활동을 보면, 그런 해석도 가
능하다. 놀랍게도 어느 누구도 정도전이 설계했다는 조선 왕조 식의 해법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왕을 유학자로 만들려고 했다. 엄격하게 가르쳐서 따르게 하거나 주눅들게 만들었다. 어쩌다 왕이 천재
적인 경우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왕은 규범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일본은 그런 사회가 아
니었다. 무력에 의해 정복된 국가, 무력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사회가 규범 없이 유지 존속하는 것은 아
니겠지만, 철학의 나라 조선 만큼 형식적으로든 외면적으로든 규범에 종속되지 않았다. 소라이든 노리나
가든 규범에서 자유로운 사상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본래 그 사회가 규범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은 아닌
가. 칼을 든 통치자를 규범에 얽어맬 능력이 없었던 탓은 아닌가.
2장 6절 막부 말기에 있어서 전개와 정체停滯: 근세 후반기의 정치・사회정세와 사상계-다양한 제도 변
혁론-작위 입장의 이론적 한계-메이지 유신 후에 있어서 두 제도관의 대립
바램願望이 사상의 아버지라면 이익은 이념의 어머니다. …… 이념은 자신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발전하
며, 봉사해야 할 이익에 반하기도 한다.(Radbruch) 소라이학이 도입한 ‘주체적 작위’라는 이념도 그렇
다. 봉건사회를 흔들리지 않는 기초 위에 세우기 위한 논리였다. 이를 계승한 안도 쇼에키와 모토오리
노리나가라는 봉건사회의 명백한 부정과 소극적 긍정으로 나타났다. 양쪽 모두 봉건사회가 천지와 더불
어 변하지 않고, 인간성과 더불어 영원하다는 사상적 근거는 잃어버리고 있었다. 절대적 가치로서의 자
연은 봉건적 계통제로부터 떨어져 나와, 정치적 유토피아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거나 인간 내부의 깊은
심정에 틀어박혔다.(411-412) 봉건사회의 관념적 약체화 경향과 더불어 안정성을 위협하는 현실적 요
인도 늘어가고 있었다. 호레키 연간에 늘어났던 잇키와 우치코와시는 1787년에 전국화되었다. 노리나
가는 기슈紀州 영주의 하문에 대해 세금貢租의 과중함이 원인이라며 가렴주구가 노동력의 생산성을 저
해하여 윗사람의 손실이 된다고 경고했다. (412-413) 바깥으로부터의 세력도 다가왔다. 러시아 절대왕
정은 점차 시베리아로 확장해 겐로쿠 연간에는 사할린, 쿠릴千島, 훗카이도에 이르게 되었다. 계속 접근
하고 통상을 요구하더니, 1792년 러시아황제 카테리나 2세의 사절 락스만이 마쓰마에松前에 와서 정식
으로 통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안팍의 정세에 직면해 정치적 통제를 강화했다. 단속규정이 연속적으로
1788년엔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413) 호레키宝歴(1751~64)와 메이와明和(1764~72)에 걸쳐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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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난 다케노우치 시키부竹内式部, 후지이 우몬藤井右門, 야마가타 다이니山県大弐 사건은 존황론尊皇
論이 봉건권력이 꺼리는 부분을 건드린 최초의 사건이다. 이들은 성숙한 반막부 운동이라기 보다 막부의
신경과민이 일을 크게 벌려, 막말 근황勤皇 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다케노우치가 말한 위기의식, 조정의
쇠미와 무가 번창에 대한 비판, 야마가타 다이니는 정치가 간토로 넘어가 예악이 무너지고 형벌만 행해
지고 있다고 말하게 된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 부정에서 한걸음 떨어졌을 정도이고, 사유방식은 소라이
학과 공통적이다. 다이니의 자연상태는 인간이 동물이나 짐승과 다를바 없는 원시적 상태에 있을 때, 특
출한 사람이 나타나고, 오륜과 사민이 생겨나고, 만든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며, 제도를 만들어서 성립한
다. 곧 소라이의 질서작위론이다. 일본의 역사를 찬양하여 신황神皇이 기틀을 마련하고, 이용후생의 길
을 열고, 의관의 제도를 만들고 예악의 가르침을 세웠다고 사회발생론을 구체적으로 적용했다. 그 시대
사회의 퇴폐와 곤궁은 조상皇祖이 만든 예악이 무너지고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지 않은데서 생겨났다.
오늘날 정치하는 자는 대책을 내놓지도 못하고 예전에 그렇게 했다古事고 할 뿐이다. 그러나 만든지 천
년도 지나고 그 사이에 전란도 있어서, 의거해야 할 예도 없고, 따라야할 법도 없는 상황이다. 예전에 그
렇게 했다古事는 것은 군웅이 할거하던 시대로부터 내려온 풍속이며, 야만적인 시대가 물려준 유물이다.
마치 소라이가 오늘날 세상의 격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으로 참된 제도는 존재해본 적이 없고, 上古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큰 혼란이 있었다고 말한 것과 사유방식이 매우 비슷하다. 현대의 위정자들이
자신의 행위준칙을 전제된 규범질서에서 받아들이고 있어 질서에 대한 자유로운 작용을 결여하고 있음
을 개탄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체적 작위의 본래의 면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쇼에키와 노리나가에
있어 작위의 논리는 부정적 가치로 내재하는 퇴폐라는 측면에서 작용하고 있었는데, 다이니에 이르러 다
시 소라이와 같이 적극적인 의미를 띠고 정치적, 능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막부를 위한 것이 아
니라 막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다이니는 소라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사회적 모순의 궁극적 해결로서 제
도의 확립을 주장했고, 제도의 내용도 소라이를 거의 답습한다. 그러면서 제도를 만들어야 할 최고 주체
로 쇼군이 아닌 서쪽(조정, 천황)에 기대한다. 작위 논리의 목적이 변질된 현저한 사례이다. 1676년 시
키부는 유배, 다이니는 사형 우몬은 처형되었다.(413-418)
도쿠가와 봉건사회는 안팍으로 위기에 봉착한다. 농민의 삶의 어려움으로 잇키와 우치코와시가 끊이지
않고, 시베리아를 넘어 세력을 확장해왔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서양 세력으로 일본 앞에 나타난다. 이
런 위기의식 속에서 존황론의 싹이 생겨난다. 대표적인 존재가 시키부, 우몬, 다이니이다. 그중 다이니
는 소라이의 질서작위론과 사유방식이 비슷하다. 옛 제도가 효용성을 잃은 데 대한 설명도 유사하다. 그
러나 새로운 제도의 수립자로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서쪽, 다시 말해 천황(조정)에 기대한다. 이런 작위
로 생겨난 사회는 봉건사회일 수 없다. 작위 논리의 목적이 현저하게 변화했다.
간세이 이학의 금寛政異学の禁은 이런 정치적・사회적 동요에 수반되는 사상 통제 강화에 획을 그렀다.
직접적으로 하야시 가문에 정학正学을 유지할 것을 지시했지만, 막부의 정책은 여러 번에 미치게 되고,
실질적으로 일반적 사상통제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 금지가 고학파에 의해 야기된 일찍이 없던 논쟁과
사상적 혼란을 직접적 동기로 한다는 점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로 하여금 그런 조치를 하게 한
시바노 리츠잔柴野栗山, 라이 슌스이頼春水, 니시야마 셋사이西山拙斎등의 의견에 나타난다. 여기에 이
르러 주자학이 강제적으로 부활하게 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주자학의 낙관주의적 사
유방법은 발흥기 내지 안정기에 대응되는 사상체계였다. 봉건사회가 동요하자 실천적으로 강력한 소라
이학에 헤게모니를 넘겨주었고, 소라이학은 그 위기적 성격 때문에 한정된 사용가치 밖에 지니지 못했
다. 가차없는 리얼리즘과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der의 철저함은 강력한 봉건권력이 현실의 모
순을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한에 환영받았지만, 동요가 너무 심해져서 지배층이 이를 은폐하고
미봉이라도 하기 위해 부심하는 단계에 있어서 오히려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소라이학의 의도와 효과의
10/25/23, 4:10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3. | FELI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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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사유방식이 내포하는 반역성이 감지되는 데 있어서는. 본래 정태적 구조를 갖는 주자학이 그 사회
적 조응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 때문에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골몰하는 봉
건지배자에 의해 다시 등장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노리나가는 잘 다스려지는 세상의 주자학의 안정적
기능을 소라이학의 극약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다. 셋사이는 그런 노리나가도 유가의 도를 비판한다며
규탄했다.(418-420)
와타나베 히로시는 마루야마는 물론 주자학이 일본 봉건사회의 사상적 기반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
들이 간세이 이학의 금 때문에 주자학의 주도적 성격에 대해 오해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한 바 있다.
와타나베는 간세이 이학의 금에 이르러서 주자학이 더 앞으로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와타
나베의 주장은 조선의 유교화에 대한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주장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조선의 유교화에
서 2~3세기가 걸렸다. 그러나 마루야마의 솜씨 좋은 주장은 명료하다. 도쿠가와 초기 안정기에 주자학
이 지배 이데올로기였고, 위기가 찾아오자 소라이학과 노리나가학이 등장했고, 존황론 마저 등장하게 되
자, 다시 주자학을 내세우는데, 이번에는 지배 이데올로기라기 보다 정치적 안정을 강조하는 실천적 효
용성 때문이었다는 것. 마루야마의 주장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전형적인 이념형에 입각한 주장
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사실 한 가지만 빼고 나면.
이학의 금異学の禁은 자연적 질서사상을 강제적으로 부흥시킨 것이며, 자연법으로서 일차적인 타당성을
잃어버린 봉건사 사회규범을 억지로 자연법으로 통용시키려는 시도라는 것이 된다. 작위적 질서관의 발
흥에 대한 전통적 학자들은 수수방관하고 있지 않았고, 자연적 질서사상의 정당방위로 볼 수 있는 것들
이었다. 다카이즈미 메이高泉溟는 밝은 사람과 성인의 덕이 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서술하고 만든다고
말했다. 이시카와 린슈石川麟州는 성인이란 덕을 기리는 것이지 제작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소라이의 궁극 실재로서의 성인 개념을 배격하고, 인격에 대한 이데아의 우위를 강조한다. 헤이유平瑜는
소라이의 말은 천하 사람을 이끌고 도에 적대하는 것으로 위아래가 서로 편안함과 이익을 다투게 되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고 단정했다. 소라이는 덕을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규범의 외면화를 지적했
다. 이들 모두 자연과 작위라는 두 질서관과 그 대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라이학을 둘러싼 사상계의
논쟁의 결정적 쟁점은 미우라 아쓰오三浦淳夫가 말하는 대로 도란 송유가 말하는 천지자연인가, 소라이
가 말하는 선왕제작인가였다. 간세이 이학의 금은 송유의 주장을 공권력을 빌어 지지한 것으로 사상계의
다원적 분열에 결단을 내리고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봉건사회의 관념적 통일을 회복하려는 기도였다. 그
러나 간세이 이학의 금을 실행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도 그 2년 전 도는 성인이 만들었고, 신농
과 황제가 만들었다고 말했다. 역사적 이성의 간지로는 막을 수 없는 작위관의 침윤을 읽어낼 수 있다.
(420-423)
간세이 이학의 금 이전에 다른 사상가들이 자연적 질서사상을 수수방관하고 포기했던 것이 아니며, 자연
과 작위관은 사상계에 대립하고 있었다. 간세이 이학의 금은 송유의 주장을 공권력으로 주장한 것이지
만, 그 책임자 조차 작위관에 침윤되어 있었다. 즉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간세이 이
학의 금이 하야시가에만 적용된 것일 뿐이며, 사상계의 다양한 흐름을 실제로 막지 못했다는 데 있다.
도쿠가와 일본은 과거로 관료를 선출하지도 않고, 학자가 통치하는 정치사회도 아니었다. 주자학도 소라
이학도 지배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사회였다.
그 무렵 소라이에 의해 시도된 제도의 근본적 다치카에立替え(개혁)의 새로운 주창이 난학蘭学의 영향
을 받은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출현했다. 유아사 겐조湯浅源蔵(1793)는 도쿠가와 시조 이래 확고한 제
도가 수립되지 못한데 국가의 질병国疾의 원인이 있다며, 소라이의 개혁론이 실시되지 않은 것을 통탄했
다. 이미 봉건사회로 복귀할 수 잇는 시대가 아니었다. 상업자본의 파괴적 침식과 러시아 영국 세력의
10/25/23, 4:10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3. | FELI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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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은 교호와는 비교되지 않는 것이었다. 시대를 예민하게 감지한 지식인들의 제도 개혁론은 모두 시야
가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있으며 내용도 많건 적건 봉건사회의 틀을 뛰어넘었다.(423-424) 혼다 도시아
키本田利明(1744~1821)는 세키 코와関孝和의 정통을 이은 수학자다. 그는 천하의 보화는 상인에게
있고, 무사와 농민이 어렵고 곤궁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근본 원인은 무역 운송과 교역을 상인에게만
맡겨둔 잘못이라며, 해운 국영화, 지방 상품 가격 통일, 해외무역과 식민지 경영에 의한 경제적 진흥을
주장한다. 상업자본의 무통제적 발호 수립해야 할 제도, 즉 상업자본의 국가적 운영을 수립하지 못한 데
서 시대의 병폐를 찾아냈다. 그는 반잔과 소라이가 경제에 뛰어나다고 예찬하면서도 그들은 같은 토지의
이용만 고민하여, 인구증가에 대응할 수 없다는 맬더스적 인식을 보여주고, 해외로 눈을 돌리는 밝은 법
을 내세운다. 에조를 살펴본 체험과 난학 특히 지리학을 통해 얻은 세계에 대한 지식에 영향을 받았고,
특히 영국의 부강함에 놀랐다. 나라의 빈부강약은 모두 제도・교육에 달린 것이지 토지의 선악에 달린
것이 아니다. 유럽의 부강함도 국가를 풍요롭게 만드는 도리를 연구하여 제도를 세웠기 때문이다. 모든
원인을 해외팽창 海洋渡涉, 산업장려와 자원개발勸業開物, 제도의 유무에 돌리게 되었다. 제도의 작위
가 없어 1783년 이후 3년간 흉년과 기근으로 오슈奥州에서 아사한 자만 이백만명이며, 모스크바에 굴
복하는 국제적 치욕도 당할 것이고, 제도를 세우면 서양에 영국 동양에 일본이란 부유하고 강대한 두 국
가가 존재할 것이라 말했다. 토시아키의 입장에 논리적 기초는 없었지만, 제도를 세우기 이전과 이후의
차이에서 가치의 질적 전환을 찾아내는 사유방식이 자연적 연속관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다.
자연질서는 현재의 봉건사회에 내재된 것이 아니다, 선정과 자연치도의 제도를 만들면 된다고 보았다.
(424-427)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1769~1850)의 놀랄만한 조직적이고 대규모의 이상 사회의 구상
역시 국내적 궁핍과 국제적 위협의 절실한 체험을 그 동기로 한다. 그는 농업의 황폐함과 영아살해에는
신의 뜻을 이어받아 백성을 구제해야 할 위정자들이 경제도経済道를 알지 못하고 천공개물天工開物의
법도를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경제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이고, 개물은 국토를 경영하고, 산물을
개발하여 국가를 풍요롭게 하고 인민을 번식하게 하는 일이다. 선왕의 도는 경제도이다. 상의 탕왕은 교
환과 유통의 법을 시행했다. 노부히로에게도 국가의 부강과 곤궁은 토지의 자연적 기초가 아니라 이를
운용할 제도의 수립 여하에 달려 있었다. 아이즈会津 지역은 제도가 잘 정비되어 강하고, 휴가日向의 노
베오카延岡의 영주가 할 수 있는 것은 세금을 거두는 것뿐이다. 일본에는 제도가 없었지만, 군주가 겸손
하고 절약해서 국가가 부강하고 내실이 있었다. 그런 상고시대의 자연적 질서는 장원의 발생으로 붕괴했
고, 무사계급도 정권을 장악했을 뿐 좋은 제도가 없었으므로 재화는 상인들에게 집중되고, 무사는 빈궁
해졌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자연적 방임은 어려워지고 점점 더 대규모의 제도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생
겼다. 이제 일찍이 예가 없던 내우외환은 일본 전체를 두드려 한 덩어리로 만드는 통일적인 제도의 수립
이 필요하며, 내용도 선왕의 제도를 복제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삼대三台, 육부六府, 오관五館이라
는 전국적 정치조직에 의해 생산, 분배, 유통의 기능을 모조리 중앙정부에 집중시키고 국가로 하여금 빈
민구제, 국민교육을 담당하게한 수통법垂統法은 종종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노부히로도
쉽게 시행할 수 없다며 유토피아적 성격을 인정했다. 이는 도쿠가와 시대에 소라이 이래의 일련의 제도
적 개혁론에 마침표를 찍는 가장 규모가 큰 관념 체계였다. 그런데 그의 사상의 철학적 기초는 히라타
아쓰타네의 국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조화삼신으로 시작하는 그의 논의에서 경제는 사람을 사랑하
고 보호하기 위해 신이 만든 것으로 보았으며, 정치적 군주는 실로 이 세상에 있어서 창조신의 대리인으
로 모든 사물을 총괄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의 사상적 근저의 인격 우위가 이상국가에 있어 최고지배
자에게 일본전국을 손발처럼 움직인다는 절대주의적 성격을 부여해 준다. 소라이와 달리 노부히로는 유
럽 절대주의에 가까이 가 있다. 서양 국가의 교역은 국왕의 업무인 만큼, 그의 구상으로 천하의 물건은
바삐 움직이고, 이익은 군주에게 돌아간다고 말해, 수통 국가와 중상주의적 국가의 유사성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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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절대주의 국가가 대외팽창을 하듯 수통법을 실시한 일본은 전세계를 군현으로 삼게 된다.(427-
432) 가이호 세이료海保青陵의 마키아게まきあげ 제도는 목적이 무사 계급의 구제에 있으며, 범위는 일
개 번에 한정되어 있으나 일종의 상업국가 경영을 주장한 점에서 같은 방향을 걷고 있으며, 현실의 모든
사회관계를 상품교환うりかい의 원리로부터 연역해내고 있다. 세이료는 소라이의 제자 우사미 센스이에
게 배웠고, 소라이의 리얼리즘을 이어받아 유학자를 무위도식꾼이자 사악한 무리라 말하며, 하쿠세키와
소라이만 경험적=귀납적 관찰 때문에 높이 평가한다. 그의 사무라이 구제책도 현실직시에서 출발한다.
무사도 쌀을 파는 상업행위를 한다. 무사의 곤궁함은 상품경제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 그런 현실에 눈을
돌리는 데서 생긴다. 상품교환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당연하며, 조닌에게 빌려서 갚지 못하는 것이 치욕
이다. 네덜란드 국왕이 장사하는 것처럼 세상의 공통된 이치를 비웃는 것이 잘못이다. 무사 계급의 곤궁
함을 구제하려면 이윤을 올려야 한다. 화폐는 그냥 두면 모두 민간에 떨어지므로 지배계급은 이윤올리기
로 그것을 감아올려야まきあげ 한다. 강제는 서투른 것이고, 무사가 장사를 해서 상품경제 기구를 통해
화폐를 얻는 것은 능숙한 이윤올리기다. 집안에서 일하고 대가를 받거나, 교역을 위한 개항장을 열거나
상호 융통조직인 代物無盡을 들고 있다. 관직을 팔거나 돈으로 형벌을 대신해서도 정부가 화폐를 축적할
수 있다. 백성들이 언제 감아올렸는지 알아차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훌륭한 방법이다. 마키아벨리즘적
인 냄새마저 맡을 수 있다. 치세라면 사치스럽고 간교해진다며, 서로 이익을 다투는 세상에 왕도란 무의
미하고 패도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태평스러운 시대에 임시방편에 익숙해지고 편의적이 된다. 모든
것을 미루어 버려 지지부진함으로 병은 큰 병이 된다. 강한 마음과 용기를 가지고 결단을 내려서 개혁에
착수할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주체적 작위의 지향이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세이료가 우리카이라
는 상품교환의 논리를 사회관계의 근저에 설치한 의의믄 큰 것이다. 상하가 모두 상인이며, 군신관계도
노동력의 매매로 市道이다. 예전에 인간이 속해야 할 자연적=선천적 질서인 군신관계는 명백하게 당사
자의 자유의사에 기초한 결합과 같은 것으로 보게 되어, 퇴니스를 연상시킨다.(432-436)
마루야마는 세 사람의 본격적인 개혁가를 제시한다. 세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경제에 기반한 사고
방식이다. 이를 위한 제도개혁을 제시한다. 도시아키와 노부히로 두 사람은 공히 제도를 개혁하고 교역
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세계로 진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부히로는 히라타의 사상에 기반하면서도
수통법으로 국가사회주의(나치즘)적인 주장을 하면서 전면적인 개혁을 말하고 세계정복의 야심을 보인
다. 세이료는 상품교환을 모든 것의 기초로 삼고, 적극적으로 이윤추구에 나서며, 군신관계도 노동력의
매매라는 이익사회의 본질을 예시한다. 세 사람 모두 작위관에 입각한 본격적인 사회개혁 사상을 제시하
면서, 경제 즉 부국강병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개혁제안은 과감하며, 범위가 넓고, 근본적이다. 이런
사상이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근세 봉건사회의 내면적 부식 과정과 대외적 위기 증대는 다양한 제도 개혁론을 낳았고, 내용은 단순히
봉건적 범주 속에 머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어느 것도 봉건적 지배관계 그 자체의 변혁에는 손가락 하
나 대지 못했다. 가이호 세이료도 결국 무사계급을 위해 서민들의 돈을 감아올리는 장치이다. 무사가 상
인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 모두 상인이 되라는 것도 아니었고, 백성들은 어리석다고 말했다. 무역・식
민・산업장려의 수립을 말한 도시아키도 그런 제도를 작위하는 주체는 무사계급에서 찾으며 사농공상을
엄격히 구분하고 유민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는 자기사상의 위험성을 알고 책을 간행하지 않고, 몇몇
에게 보여주기만 했다. 사토 노부히로는 가장 래디컬하다. 사민이 아닌 팔민으로 나누고 육부에 배속시
켜 중앙집권적 색채를 띄지만 다이묘의 영지는 존속된다. 육부의 지배적 지윈느 무사가 차지한다. 군주,
경, 대부 등 현재의 계통적 질서를 존중하게 하는 등 반봉건성의 한계는 분명하다. 슨세 말기 제도개혁
론의 변혁성을 제약했던 것은 모두 위로부터 수립되어야 하는 제도로 서민은 어떤 능동적 지위도 인정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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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소라이의 제도 정비 요청은 이들 사상가에게 받아들여져 내용은 풍요롭고, 근
대적인 것도 혼입되어 작위 입장의 구체적 발전이기는 했으되, 그들을 통해 작위 입장 그 자체의 이론적
전개는 대부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작위의 주체가 성인이나 쇼군이라는 특정한 인격에 한정되었다는 소
라이학적 작위의 이론적 제약 역시 있었다. 인작설 즉 사회계약론으로 진전할 수 있는 계기가 완전히 결
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도개혁의 추진력은 종래의 지배층, 절세의 영명한 군주, 천하의 영웅 등에서
찾았다. 작위 논리는 질적으로 정체되고 양적인 보급도 일정한 한계 안에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의 현실
의 정치적・사회적 질서는 실제 운명적으로 자연적 질서관의 기반이 남아 있다. 자연적 질서관과 가장
잘 들어맞는 경제행위는 농업이다. (예외적으로 보덕교의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徳는 농업에서 주체적
작위를 말하지만.) 반면 공업생산은 본래적으로 인간의 주체적 작위의 표상과 무리없이 결합되며, 매뉴
팩처의 사회적 발흥은 도구를 만드는 동물로서 인간에 대한 자각을 수반하게 되었다. 농업이 지배적 생
산이고 공업은 취미적 공예품 단계에 머물러 있는 곳에서 인간적 작위의 가치인식은 자연히 낮다. 예를
들면 분세文政(1827~30), 덴포天保(1830~44) 무렵의 『知命記』는 서양사람들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기구와 물건을 만들어내고, 마음을 상하고 뜻을 잃게 만드는 잡스러운 기술을 만들어내는作為 것을 경멸
해야 한다. 동시에 전형적 자연적 질서관은 사회정치질서(일부일처제)를 옹호한다. 혼다 도시아키의 자
기 나라를 풍요롭고 부유한 나라로 만드는 근본은 신기한 기구와 특이한 물품을 만들어내는 제도, 즉 서
양에는 산업을 장려하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비교하면 양자의 제도관의 대립과 공업생산에
대해 완전히 대척적 평가의 상관관계가 드러난다. 그런 도시아키도 공업생산물은 신기한 기구일 뿐 일상
적 생활수단으로 끌어올리지 못한 상황에 작위 논리의 순조로운 진전을 저지시킨 역사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437-443)
소라이나 노리나가가 그렇듯 이 개혁가들 역시도 봉건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작위의 주체는
무사계급이고 지배자들이었다. 개인들의 결합을 통한 사회계약론으로 진전될 수 없었다. 마루야마에 따
르면 그 이유는 농업경제와 공예품 생산에 한정된 자본주의 발전의 한계 때문이다. 이런 개혁가들조차
아직 신기한 기구 일뿐, 일상적인 생활수단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 개인이 작위의 주체로 설 수 없었던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 성장을 이토록 섬세하게 구별하다니. 그런데 서유럽에서 사회계약사상이 산업 자
본주의가 생겨난 이후였던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매뉴팩처를 하던 시절이었던지. 이런 식으로 사상의
전개와 성장을 경제적 생산양식의 전개와 조응시켜서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정도의 마르크스적 사유라
니.
작위 논리를 정체시키면서 자연적 질서 사상을 부활시키려 했던 다른 현실적 사정은 외국 세력의 위협에
대해 국내적으로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내부의 사회적 모순의 해결 없이 외부로부터의 위협
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은 양학洋学의 세례를 받은 사상가들의 입장이었다. 그런 인식이 결정적으로
고양된 것은 막부 붕괴 직전으로 그때까지 대세는 국내 질서의 무조건적 인정을 이적夷狄에 대항한 사상
적 무기로 생각했다. 유럽 시민사회의 구조를 감지하고, 이적들은 세상사람을 모두 친구라 하는 나쁜 풍
속이 있어 난학의 무리도 그 말을 믿는다며, 평등사상의 침투에 대한 공포가 지배층인 무사계급 사이에
서 첨자 높아졌고, 이적의 나라에서 무사와 상인 사이의 차별이 없어 의리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이윤만
을 추구한다며, 일본이 그렇게 되면 타락할 것이라 말했다. 즉 봉건적 계통제를 일본 고유한 길로 간주
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 일본은 외적에서 보호하는 길이라는 양이론攘夷論으로 나갔다. 한편 국내적 일
치단결의 정신적 지주로 급속하게 대두괸 존황론은 양이론과 결합되어 봉건적 질서의 변혁보다 그에 앞
서 그것을 재인식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런 경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후기 미토학水戸学
이다. 이론적 대표자인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는 신하가 다이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막부와
조정과 조상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며, 막부의 호령을 두려워하고, 다이묘가 정한 제도와 법을 지켜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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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말하여, 그의 존황론이 봉건적 계통제와 모순되지 않으며 오륜에 의해 기초지워지고 있다. 그것은
천연天然의 대도大道이다. 사민과 군신은 천지자연이다. 황실과 신민 관계를 봉건적 군신관계와 연장선
위에 두는 것이 자연적 질서관의 재생이 지닌 객관적 의의가 있다. 이런 이론적 의미에서 공무합체론公
武合体論은 미토학이나 국수론자의 독점물은 아니었다. 오대륙의 지식이 필요하고, 컬럼버스, 코페르니
쿠스, 뉴튼, 증기선, 자기력, 전신 등을 말하는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도 귀천존비는 천지자연의 법칙이
라며 외국과 다른 일본의 국체御国体가 있다고, 다이묘의 간소화에 반대했다. 동양의 도덕, 서양의 예술
이란 말은 근대 유럽문화가 봉건말기의 일본에 침투했을 때 봉착한 한계를 나타낸다. 끓어오르는 국제관
계는 양학洋学에 용인되어 있던 적은 영역도 삼켜버리는 열광적인 양이론을 낳았다. 오하시 토츠안大橋
訥庵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용납하는 것은 근원에 독이 있는데, 지류에는 독이 없다고 하는 것이라고
일축하고, 해부학을 보면 잔인함을 알 수 있다고 하며, 사진이나 전기를 환술로 보는 등 서양의 모든 것
을 증오했고, 무사와 상인의 차별이 엄격한 제도를 옹호하고 절대적 쇄국론을 주장했다. 그 배경에는 사
물의 규칙은 작위가 아니라 천리이고 도라는 자연적 질서의 논리가 걸쳐있었다.(443-448)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양학이 있을 여지는 없어졌고, 자연질서관에 기반한 봉건적
계통제를 지키자는 즉, 사농공상의 구별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지면서, 존황론과 양이론이 합쳐져
서, 존황양이론으로 그리고 공무합체론으로 전개된다. 바야흐로 일본은 자연질서를 중심으로, 천자-조
정-막부-다이묘-무사-백성의 순으로 완전한 질서관에 함몰되어 갔다. 위기가 강해질수록 자연적 질서관
은 또 그 나름 강해졌다. 대립과 모순은 통일될 수 없을 정도로 균열을 크게 내포하고 있었다. 다만 여기
에 내포되어 있는 미묘함은 바로 후기 미토학과 국수론도 메이지 유신의 한 동력이었다는 점이다. 순수
한 일본전통사상은 없다는 그의 생각이 여기도 깔려있다. 게다가 샤쿠마 쇼잔 같은 다소 복잡하지만 개
국론자들도 자연질서론에 입각한 신분차별을 고수하였던 것들 보면, 두 가지 사상적 흐름이 뚜렷한 줄기
를 가지고 분화되었다기 보다 혼재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명확할 것 같다..
역사는 쇼헤이코昌平黌의 주자학자들의 절망적 반항을 짓밟으면서 앞으로 나갔다. 영주와 농민, 무사와
조닌,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 공가와 막부, 막부와 웅번 등 봉건체제에 내재하는 대립과 모순은 그것을
은폐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말에 격화되었다. 더불어 전통적 지배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국제적 중
압에서 일본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도 퍼지고 있었다. 히로세 교쿠소廣瀬旭荘는 지금은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어 도저히 적을 이길 수 없다며 외국이 큰 근심거리라고 말했
다. 봉건적 신분제가 국민의 외환에 대한 정신적 일치단결의 질곡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말한
다. 이런 객관적 인식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시민사회적 질서는 더 이상 헛된 공포나 혐오의 대상일 수
없다. 옛날 일본에는 농민-병사가 있었고, 서양에는 상인-병사가 있다. 일본도 이를 활용해야 한다.
(448-449) 이 같은 내우와 외환의 필연적 관련의 인식에서 교쿠소의 친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사람들은 카이보海防을 외치지만 민세이民政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며, 내우와 외환은
관련되어 있으니 카이보와 민세이를 같이 주장해야 한다. 양이론은 자기 역량도 모르면서 으스대는 배외
주의일 수 없고, 환과고독을 보호하는 서양 오랑캐의 빈민구젯, 병원, 유아원이 일본에 없는 것을 반성
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쇼인으로 하여금 봉건적 지배관계에 안주할 수 없게 했고, 지금의 무사는 백성
의 고혈과 군주의 봉록을 탐하는 하늘에 적대하는 백성이다. 그는 모든 백성은 천하를 자기 관심사로 삼
아 천자를 섬겨야 하며 귀천존비로 구분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외국에 대해 일본을 지키는데 자주독립
의 기풍을 충만하게 하고 차별없이 모두가 나라를 자신보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후쿠자와 유키치
福沢諭吉의 독립 자존의 요청 직전이었다. 국민들이 자신이 구성하는 질서에 대한 주체적 자각 없이 단
순히 주어진 질서에 운명적으로 따르는 곳에서 외적에 대한 강인한 방어를 기대할 수 없다는 자각은 존
황양이론으로 하여금 계통제적인 형태로 일군만민一君万民적인 것으로 전화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10/25/23, 4:10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3. | FELI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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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쇼인은 현재의 막부와 제후들이 근왕양이勤王攘夷할 수 없다며,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나와 자
유를 외치지 않으면 내부의 질병을 고칠 수 없고, 일반 민중 속에서 지도자가 나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
다고 섰다. 그가 처형된지 7년 후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발해졌고, 메이지의 새로운 질서가 쇼인이 갈망
했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출현했다.(449-452)
다른 한편 전통적 지배관계가 일본을 구해줄 수 없다는 점도 명백해졌다. 봉건적 신분제 자체에 대한 고
민이 점점 커져갔다. 드디어 샤쿠마 쇼잔의 제자인 요시다 쇼인에게서 신분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
이 나왔고, 그것은 일군만민이라는 인작론, 사회계약 사상의 기반이 되는 모든 사람이 역사의 주체가 되
는 바로 그 사상에서 딱 한발짝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보다 딱 한 발자국 앞서 있었다.
존황양이론의 그림자가 깊어질수록 자유를 갈구하는 사상도 그 깊이를 더하면서 표출되려하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판적봉환版籍奉還, 질록처분秩禄処分, 폐번치현廃藩置県, 징병령 발표, 대도帯刀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 등 신분적 특권 철폐, 하층 신분의 해방, 직업선택의 자유,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변혁을 통해 일본의 국가체계는 눈부신 속도로 근대화되었다. 봉건적 계통제가 자연질서가 아니
라는 점은 현실의 사태에 의해 증명되었고, 이런 정세 속에서 성난 파도처럼 문명개화 사조가 구 사회의
차별관을 예리하게 겨향했다. 사람은 신체적으로 누구나 같다는 자연적 평등론이 발흥하고, 귀천, 빈부,
가문, 격식, 화족, 사족, 호가, 빈민 등은 모두 사람들이 사사로이 정한 인간세계의 모습이라며, 작위적
질서관에 길을 열었다. 쓰다 마미치津田真道는 자연현상, 지리, 인사의 규율은 자연의 것이지만, 국가의
성립과 질서 치안 유지란 사람이 만든 법를로, 국법国法 또는 민법民法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작위관의
우위를 결정적으로 만들어 준 것은 자유민권론의 대두로, 작위 입장은 이론적 귀결을 밀고나가 인작설人
作説에 이르렀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西洋事情』에서 문명이 발달하며 약하고 힘없는 자들이 모여 권리
를 확보하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취한 조치가 국가 제도이고, 정부가 생겨난 근원이라고 소개했다. 우
에키 에모리植木枝盛의 『自由民権論』에서 자유가 존귀하기에 누리고 지키려고, 국가를 만들어 정부라는
것을 두고 법률을 만들었고, 관리를 고용하여 인민의 자유권리를 더욱 옹호하여 인민의 행복과 안락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 말하며, 모든 사람은 동등하니, 권리를 주장하고, 정부는 인민民이 세운 것이며, 법
도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라 말했다. 이런 자유민권론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이 계몽적 자
연법으로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이라는 자연적 질서사상의 계열에 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거기서 인권이라 불리고 있는 것은 어떤 실증적 질서 속에서의 권리가 아니라
거꾸로 실정적 질서를 형성해야 할 인간의 주체성을 구상화한 것이다. 자연법의 선천성을 주장하는 것은
거꾸로 실정법은 인간이 제정함으로 비로소 타당하다는 이론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가토 히로유
키加藤弘之의 『人権新説』를 둘러싼 논쟁은 그런 사정을 말해준다. 히로유키는 권리가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주권자에 의해 제정된 것이며 천부인권론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을 때, 바바 다쓰이馬場
辰猪는 그것은 법률상의 권리일 뿐, 저자가 말하는 권리가 아니라며, 오히려 법률이 주권자가 있고 난
후 비로소 생기는 것이라고 말해 실정법의 타당성이 형식적 실정성에 근거를 둔다는 홉스와 오스틴
Austin 류의 작위의 입장의 답습이다. 야노 후미오矢野文雄도 가토의 권리가 도덕적 권리인지 법률 상
의 권리인지 먼저 결정해야 하며, 법률상의 권리, 즉 오스틴의 사람이 만든 법에 있어서의 권리라면, 정
부 존립 이후의 것이니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이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실정법의 인위성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한다. 논쟁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규범이 인간의 작위에 의해 비로소 타당하게 된다는 명제는
어떤 논의에서도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압도적인 작위논리도 봉건제 하에서 은근한
진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코지마 쇼지兒島彰二가 자유권에서 신앙의 자유, 사상의 자유, 마
음 속에 묻어두고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는는 의사意思 자유의 권리를 주장했을 때, 이는 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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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슌다이적 규범의 외면화(안과 밖, 사적인 내면성과 공적인 제도의 분리)의 근대적 발전형태에 다름
아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도 『文明論之概略』에서 오륜 중 가장 먼저 생긴것이 군신관계인데, 이는 약속
에 의해 우연히 생긴 것이라며, 봉건적 군주와 신하의 윤리의 선험성을 부정한다.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군주와 신하가 자리를 같이하고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논의의 밑바닥에는 송유가 말하는
천지자연에 대해 소리아가 말하는 선왕이 만들었다는 입자에서 하는 비판과 공통의 논리가 흐르고 있다.
노리가가가 경계한 소라이학의 숙명적 귀결이다.(452-457)
마루야마의 주장 중에 흥미로운 것은 천부인권설 등 계몽적 자연법 사상은 자연적 질서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토 히로유키를 둘러싼 논쟁을 소개하면서, 한 마디로 권리라고 말한 이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률 상의 권리이기 때문에, 주권자가 만들어 낸 이후 생긴다며, 천부인권설은 실정법의 인위성을 전제
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라는 주장이다. 이 논리는 간단히 배척해 버리기에 곤란한 지점이 없지 않다.
권리의 형성과 발전사를 보면, 천부적 인권론이 주장되는 것 같지만, 실제 권리가 보장되는 과정은 실정
법에 의해서 이거나 오래 전에 성립되었던 옛 법률 조항을 원용하거나 확대 적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권에 대한 주장과는 달리 실정법이 없으면 보호되지 못한다. 그러나 천부적 인권
이라는 자연법적 주장은 단순한 사후적 정당화는 아니고, 실정법이나 오래된 법률을 재해석하는 사상적
추동력이 된다. 물론 일본과 같이 권리사상이 위로부터 허용에 의해 열린 공간에서 비로소 전개된 경우,
발전된 권리사상을 선진 외국에서 배워 가져온 경우에 더욱 정당화의 논리로 보일 수 있다. 이점에 마루
야마의 해석의 오묘함이 있다. 적어도 일본에서 그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런 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내면의 분리와 규범의 외면화를 시도했고, 제도가 선왕의 작위라고 말한 소
라이의 영향이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작위론에서 무한한 변법론이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러나 여기서 아직까지 마루야마에 에게 보이는 한계 또는 미적지근함도 있다. 그것은 폐번치현으로 군신
이 한 자리에 앉았다는 후쿠자와를 인용한 부분이다. 여기서의 군이란 도쿠가와 쇼군이고, 신은 다이묘
와 그 신하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새로운 메이지 천황 앞에서 신하들 사이의 평등을 가진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천황제가 드리우는 어두움은 이렇게 깊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다.
주체적 작위사상의 범람에도 자연 질서 사상이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니다. 판적봉환이나 폐번치현은 자연
적 질서사상을 논리적 무기로 하는 봉건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수반하게 된다. 쿠모이 타쓰오雲井龍雄는
봉건군현은 자연스럽게 점차적으로 생겨난 것이라며,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고 이에야스도 바꿀 수
없어 봉건을 한 것이라 말했다. 이런 순수한 봉건 반동세력이 후퇴한 후, 자유민권론 반대파, 요시오카
노리아키吉岡徳明는 개화론자들은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모두 인위라고 하지만, 법률이나 정부를 사람
이 만든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군주와 인민 마저 사람이 만든 것이 되는데, 그럴 수 없다고 반
대한다. 여기에 자연적 질서사상에 새로이 부여된 사회적 역할이 보인다. 1881년 국회 설치 운동이 전
개될 시절 에드문드 버크Edmund Burke 저,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 역으로 간행된 『政治論略』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와 An Appeal from the New to the Old Whigs를 편역
한 것, 정부당국의 환영)에서 한 나라의 헌법과 정체를 만드는 정략은 천지자연의 기상을 따르면서 점차
적으로 바꾸는 것으로 정치의 운용은 천지자연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라며, 관습을 낡은 것이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책자는 元老院에서 간행되었는데, 민권운동에 의구심을 품은 메이지
정부가 자연적 질서사상의 기능에 착안한 사태를 이해할 수 있고, 반민권 이데올로기로서 자연적 질서
사상은 자유당自由党, 개진당改進党을 반대하는 도리오 고야타鳥尾小弥太 등의 보수당保守党 중정파中
正派는 기관지 『保守新聞』에서 개인주의 정치가들은 국가를 인간이 만들 발명품, 인간이 통제할 수 있
고,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잇는 것으로 보지만, 국가란 인류의 자연스런 본성에 기초해 발달했지만, 이상
적 결과는 아니었고, 이해득실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이상을 덧붙이기 이전에 국가는 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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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존재하고 있다. 사람은 국가의 태내에서 자라서 이어가는 것이라며, 국가는 인간에 속하는 것이 아
니라 인간이 국가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메이지유신의 신분적 구속을 배제하여 새로운 질서에 대
한 주체적 자유를 확보하는 것처럼 보였던 인간은 다시 거대한 국가 속에 매몰되게 된다. 작위 논리가
인고의 여행을 맟고 청춘을 구가하려 했을 때, 곧바로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에서 전
반적으로 근대적인 것들이 걷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이었다. 도쿠가와시대 사상이 완전히 봉건적인 것이
아니었듯이, 메이지 시대는 완전한 시민적=근대적 순간을 조금도 갖지 못했다.(457-462)
자연적 질서관은 자유민권사상을 억제하기 위해 되돌아온다. 봉건사회 말기 간세이 이학의 금으로 현존
질서를 보존하려고 하듯이. 그 와중에서 보수파들은 에드문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을 편
역하여 활용한다. 솔직하게 다른 무엇보다 그냥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1881년에 버크라니 하긴 토크빌
을 소개한 건 후쿠자와 유키치니까. 사상을 공부하려면 일본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러나 한편 버크가 제대로 번역된 것이 2008년이고,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1990년대니까 어떤 의
미에서 환경이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도 같다. 자연질서론의 복귀. 여기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 속내를 다시 한 번 펼쳐낸다. 도쿠가와의 봉건이 완전한 봉건이 아니듯. 메이지의
근대는 시민적=근대적인 순간 따윈 없었으니. 근대의 초극 따윈 집어치우라고. 보수사상의 원조 격인
마부치와 특히 노리나가를 분해해서 그가 말하는 일본의 조상신 사상은 자연적이라기 보다 작위사상을
전복적으로 소화한 것임을 밝히며, 히라타 등의 사상도 당대의 개혁사상과 어떤 갈등없이 소화될 수 있
었음을 보여준 후, 자연적 질서관이 다시 도래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에드문드 버크에 대한 소개까지.
일본에는 순수하게 보수적이면서, 일본적인 전통 사상 따위는 없고, 통치자에 의해 활용되고 있을 뿐이
라는 점과 동시에 메이지 그리고 다이쇼와 쇼와의 근대에는 시민적 근대란 꽃핀적도 없다는 사실을 역사
를 통해 주장한다. 근대란 지금부터 추구해야 할 과제라는 선언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현재의 사상가
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상사 연구자는 현재의 사상가다. 미셸 푸코가 그 점을 다시 한 번 놀랍
게 보여주고 있다. 마루야마의 사상은 적어도 『日本政治思想史研究』는 이 글들이 쓰여진 1940년,
1941~2년, 그리고 1944년의 맥락에서 읽지 않으면 안된다. 이점에서 마루야마 자신은 소라이이고 노
리나가이다. 표면과 심층의 분석을 통해 그는 소라이와 노리나가 처럼 당시대를 향해 말하고 있다. 그는
당대를 향해 목이터져라 말하고 있으니까. 당대적 이해와 당대와의 투쟁이 선결된 이후에야, 이 책의 주
장에 대한 여러가지 비평이 가능하겠지만, 당대적 이해는 수많은 비평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여기
까지 읽고 정리하면서 비로소 마루야마 마사오가 이 책의 개정판을 내지 않고, 계속 출판한 이유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덧붙여 한국인이 마루야마를 이해하려면, 꼭 와타나베 히로시를 병행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비교의 준거점이 생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정치사상사의 출발
점이란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책의 나오는 거의 모든 주제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
되고 있다.
2018.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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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4.
2018년 12월 10일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일본정치사상사연구日本政治思想史研究』, 김석근 역, 한국사상사연구소, 통
나무(東京大学出版会), 1995(1952).
3장 일본 국민주의国民主義의 전기적前期的 형성
3장 1절 머리말 – 국민 및 국민주의
국민이란 스스로 국민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집합체다. 단순히 하나의 국가 공동체에 소속되어 공통의
정치적 제도 하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인민에 불과하다.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귀속감을 적극적으
로 원하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의식해야 한다. 일정한 집단의 구성원이 다른 국민과 구별되는 특정한 국
민으로 상호간 공통된 특성을 의식하고 일체성을 수립해가려는 의욕을 가지는 한 비로소 국민의 존재를
말할 수 있다. 언어・종교・풍속・습관・다른 문화적 전통의 공통성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문화적 일체
성에 대해 명확한 자각을 보유하면서도 정치적 국민의식을 결여한 경우, 19세기 초까지 독일 국민이나
이탈리아 국민을 국가국민과 구별해 문화국민이라 하더라도 문화적 일체성을 옹호하려면 자기 존재를
정치적로 고양시켜 국가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에 부딪힌다. 국민의식은 자각적인 한 정치적 일체의식으
로 응집하며, 국민국가를 떠받쳐주는 국민의식을 배경으로 성장하는 국민적 통일과 국가적 독립의 주장
을 폭넓게 국민주의nationalism, the principle of nationality라고 부른다면, 국민주의야 말로 근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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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 근대국가로 존립해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정치적 추진력이다. 각 국민의 세계사적 위상의 차이에
따라 국민국가의 형성 내지 발전의 양태도 다양하며, 국민주의 자체의 발전도 개성적 형태를 띈다. 유일
한 국민주의 따위는 없으며, 여러 개의 국민주의들이 있을 뿐이다. 국민주의란 개성적이며, 국민주의의
발현형태 속에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의 특질이 명료하게 각인된다.(465-466)
교과서를 읽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는 내셔널리즘을 오랫동안 민족주의로 번역해 왔다. 마루야마는 주
에서 소수민족이나 식민지의 독립, 다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할 때에 민족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하지
만, 일본 같은 경우 국민주의라는 번역이 더 정당하고 내셔널리즘이 내부적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
다고 말한다. 실상 1940년대까지 일본에서 민족의 구분이란 호적에 표기되는 구분으로 내지와 조선 등
으로 분류했다. 마루야마의 일본정치사상사는 암묵적으로 일본 열도만을 일본으로 간주한다. 그는 식민
지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으로 제국주의 비판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1945년 패전 후 일본은 순식
간에 일본 열도의 단일민족국가로 전환되면서, 그 국민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또 외면하게 된다. 마루
야마 마사오는 이런 변화 속에서 어떤 전환도 필요하지 않았다. 마루야마의 식민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일본중심주의나 일본우월론과는 또 다른 문제다. 그 자신의 연구범위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다.
포함시키는 것을 온당하지 않다고 본 것 같고. 내셔널리즘의 번역어로 국가주의도 적당치 않다. 네이션
과 내셔널리즘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최근 일본 문서에서는 国民主義 보다 ナショナリズ
ム라는 가타가나 표기가 더 자주 보이는 듯한데, 사회과학자들의 문제의식이 있을 것이다. 민주화가 어
느 정도 진전된 후 이제야 비로소 민족주의라는 단어를 벗어던지나 했더니, 다시 남북관계에 있어서 민
족이라는 단어가 등장해서 사람들의 피를 뜨겁게 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정치적 주
체로서의 국민의 호명과 국민주의는 필연적으로 분단을 기본으로 삼게 된다. 그렇다고 자연적이고 생래
적이거나 문화적인 민족을 다시 호명하자니, 수많은 약자와 소수자 문제가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 무엇
보다 남북한 관계가 진전된다면, 그것은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실제로 새로운 네이션을 형성해야 하는 문
제가 된다. 남북한이 각기 국민 또는 네이션을 형성하는 과정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새
로운 네이션 형성과제가 또는 네이션 간의 관계 유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안정성은 해
소되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네이션이 형성되면, 필연적으로 정치지형의 변동을 아래에서 추동하게 된
다. 그러나 어떤 문제도 1945년 강제적인 남북한의 분할과 더 길게는 근대화와 국민국가 형성에 실패하
고 식민지가 된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친일이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 자체가 문제다, 식민지에 대한 어
떤 형태로든 정리 또는 탈식민이란, 두 개의 국민국가냐 아니면 하나의 국민국가냐는 정리를 필요로 한
다. 어떤 정리를 향해 가고 있는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지만.
정치적 범주로서의 국민 및 그 자기주장으로서의 국민주의는 일정한 역사적 단계의 산물이다. 국민이 스
스로 정치적 통일체로서 의식하거나 의욕하기까지 자연적 식물적 존재로 생존을 계속해온 오랜 시대가
있다. 토지나 향토애는 국민의식 배양의 원천이기는 하나 정치적 국민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지는 않
는다. 향토애 즉 환경에 대한 사랑은 전통적이나 국민의 국가에로의 결집은 하나의 결단적 행위로 표현
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환경에 대한 사랑의 농도는 거이레 반비례하기에 추상성을 띈 국가적 환
경은 친근함이 옅고, 향토애는 국민의식 배양의 질곡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때 근대적 국민주의는 전
통적 향토애의 지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한편 전 국민을 포괄하는 국가적 질서가 이미 존재한다
해도, 자연적・필연적으로 국민들 사이에 정치적 일체의식을 발효시킨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질서의 내
적 기구가 국민의 국가에로의 응집을 저지하는 경우 국가적 질서는 국민을 내면으로 장악할 수 없고, 국
민 대다수는 자연적・비인격적 생존을 계속한다. 국민주의는 국가적 질서와 국민 사이에 낀 직접적인 결
합을 방해하는 세력과 기구를 배제하려고 한다. 국민주의는 국민의 전통적인 생존형태와의 모순・충돌
을 감수하고 스스로 형성한다. 정치적 국민의식은 자연적・자생적 존재가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조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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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혀있다. 국민은 적 자극을 계기로 종래의 환경적 의존보다 많건적건 자각적인 전환에 의해 자신을 정
치적 국민으로 고양시킨다.(467-468)
국민은 역사적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 국민 의식의 형성이라는 주장을 이렇게 명료하게
1944년에 이미 밝히고 있다. 일면으로는 일군만민一君万民 사상 즉 국가와 국민 사이에 낀 봉건제도나
신분사회의 존재는 국민 형성을 방해하기에 이를 정치적 결단에 의해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메이
지유신을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유신 이전과 단절의 의도도 명백하다. 그러나 그가 끊이없이
말하는 자연적이라는 단어는 실은 메이지 천황제의 근거 논리이다. 조상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
어 온 일본의 천황제를 대상으로 놓고 볼 때, 천황제 전복의 논리가 깔려 있다. 마루야마 자신을 마루야
마의 소라이 분석과 같은 방법으로 연구한다면 그렇다. 게다가 주에서 손문의 삼민주의를 언급하며, 중
국의 국족주의를 민국혁명과 함께 언급한다.
도한 이 절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이 책의 3장 1944년 国家学会雑誌에 国民主義理論の形成란 제목
으로 발표된 이 글이 훗날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에 수록된 논문과 평설의 서론이라는 점이 분명하
게 드러난다. 마루야마의 작품들은 하나도 빼놓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그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3장 2절 도쿠가와 봉건제 하에 있어서 국민의식
일본에서 국민의식과 국민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메이지유신이 필요햇다. 신국 관념 내지 민족적 자
긍심은 국민의 정치적 일체의식으로 승화되지 못했으며 그것이 곧바로 국민적 통일로 이끌어간 것도 아
니다. 국내적 사회적 조건도 성숙되지 못했고, 국제적 교역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막부 말기 외국
세력의 도래가 우발적 일시적 사건이 아닌 세계시장 형성의 마지막 고리를 꿰어야할 역사적 필연으로 일
본에 닥쳐왔을 때, 국가독립과 국민통일이라는 문제가 등장했고, 국민의 국가에로의 정치적 응집을 방해
하던 도쿠가와 봉건제라는 기구 내지 정신에 직면해야 했다.(469) 일본의 국민주의가 극복해야만 했던
도쿠가와 봉건제 및 그 밑에서 사회의식은 어떠한 것이었나? 첫째 병농분리를 철저하게 밀고나가 성립
한 도쿠가와 봉건제에서 치자와 피치자의 세계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무사는 정치적 권리를 독점
하고, 사회적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구별했다. 농공상의 서민들은 무사에게 봉사하고 봉양하
기 위해 생존이 허용되고 있었다. 농민은 공조를 바치는 존재였다. 농민의 사회적 의무는 납세에서 끝난
다. 그해의 세금만. 납세의무도 정치적 의무라기 보다는 필연적 운명으로 일종의 재난으로 받아들이며,
복종하는 것은 못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든 잇키를 일으키려고 했다.(469-471) 도시의 상인들은
피치자 중에서 최하위 가치질서에 자리매겨져 있어, 개인적 영리만을 추구하는 윤리 외적인 존재로 간주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무rien화되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악이거나 말살의 대상이었다. 조닌 측에서
도 윤리 바깥으로 추방된 존재이기에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천민 근성이 몸
에 배어 부를 통해 사회적 세력을 정치적 차원으로 고양시키려 하지 않고, 관능적인 향락의 세계로 도피
하고 유곽悪所의 어두운 구석에서 덧없는 사적인 자유로 숨쉬거나 현실의 정치적 지배에 대해 왜곡된 조
소를 날리는데 머물렀다. 정치질서를 자신의 것으로 짋어진다는 자각적 의사는 없었다. 도쿠가와 봉건사
회는 두 부분으로 분명히 나위어 한편에서 사무라이 계급은 오로지 정치적 주체로서의 모든 정치적 책임
을 졌고, 인구의 90% 이상인 서민들은 오로지 정치적 통제의 객체로서 주어진 질서에 수동적으로 따르
게 되어 있었다. 치자와 피치자가 사회적으로 고정되어 일체의 국민의 존재를 말할 수 없었다. 한 사회
나 계급이 다른 한 사회나 계급을 제어하는 나라는 어디까지나 사회일 뿐 국민일 수 없다. 사람들이 만
든 계급을 없애고 인민과 정부라는 양대 요소에 의해 한 나라를 조직할 때, 비로소 하나의 국민이라 부
를 수 있다.(471-473)
도쿠가와 봉건제 하에서 국민의식이 형성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신분격차였다. 더 정확히는 정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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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담하는 무사계급과 정치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농공상 계급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마루야마를 비롯한
일본의 학자들에게 어려운 문제는 상인계급이었다. 도쿠가와 후기가 되면, 상품경제는 발달하고, 상인
들의 지위는 오르며 무사들의 지위는 하락한다. 그러나 상인계급은 정치적 성숙하지도 못하고, 향락적인
데. 머문다. 이 점은 마루야마의 반복적인 숙제였다. 마루야마의 해결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닌 층을
포함한 상업계층이 봉건사회의 한계 속에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들은 기생하는 존재였다. 봉
건사회의 생산구조를 바꿀 만큼 성장하지도 못하고 그 한계에 있었다.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대략 3~4회
반복적으로 제기된 주장이다. 두 번째는 윤리 문제다. 막스 베버의 영향은 일본사회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자본가의 윤리 따라서 상인계급의 윤리이다. 마루야마는 일관되게 일본의
상인계급은 윤리를 형성하지 못하고 향락으로 흘렀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형성되지 못한 이유를 설
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글을 쓰던 이 시대에 윤리란 늘 국민도덕을 상징하는 강압적인
것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막스 베버가 말하는 윤리란 자발적인 금욕과 자본축적의 윤리가 아니던가.
스스로 내재화해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마루야마는 국민도덕학파에 반발해서 자발적인 것만을 윤리라
고 부르고자 하지 않았나 싶다. “전전 일본에서의 베버 연구”라는 마루야마의 논문(유불란 역, 『한국동
양정치사상사연구』 16권 1호)를 보면, 자신의 이런 심경의 일단을 드러낸다. 베버에 입각해서 동양 정
체성을 주장했다고 마루야마를 평가하기 전에, 마루야마의 베버 이해의 시대적 성격을 먼저 들여다 보아
야 한다. 그래서 동시에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늘 세키몬 심학을 생각하게 된다. 마루야마는 이시다 바
이간을 좀 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물론 그러면 또 다시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상인계급이
성숙되지 못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어려움이 더해지겠지만.
무사 대 서민이란 봉건사회의 기본적 신분 분열과 더불어 무사계급과 서민계급 내부의 계층적 신분적 구
별과 고정성이 국민적 통일의식의 생장을 방해했다. 신분적 계층은 지역적 분포도 지녀 수직적인 신분적
격리는 수평적 지역적 할거와 얽혀 특유의 섹셔널리즘sectinalism을 낳는다. 근세 일본의 봉건제는 집
권적 봉건제로도 불리는데, 도쿠가와 막부는 전국의 주요 도시와 광산을 통할하고, 화폐주조권을 독점하
고, 전국의 다이묘를 갈아치울 수 있는 등 강한 중앙권력적 색채가 있었으나, 실질은 여전히 하나의 봉
건 영주로 직할영지天領 이외의 지역은어디까지나 쇼군에 예속된 다이묘를 통한 간접지배양식을 유지했
다. 다이묘는 독자적 입법권・재판권을 행사했고, 번 사이의 교통은 어려웠으며, 번 내부의 무사藩士들
도 수십개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각의 신분도 대체로 고정적이다. 신분 내지 격식에 의한 사회적
결합상태는 서민에까지 확산되어,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국 내 수천만 인구는 수천개의 상자 속에 갖히
거나 수천개의 장벽으로 구획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환경에 처한 의식이 고루하고 협애하여 공공성・
개방성이 결여된 것은 자연스럽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도 일본인들은 눈앞만 본다고 말했으나
자신도 외환에 경종을 울린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를 처벌하는 인물이었다. 정치적 책임의 독점적 담당자
인 무사 계급 조차 그 책임의식은 오로지 직접적 주군만을 대상으로 하며, 『葉隠』에서 공公이란 부처,
공자, 신겐도 나베시마鍋島 가풍을 모른다며, 봉록에 의해 맺어진 관계만을 말한다. 번의 상호 격리와
대립의식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한덩어리가 되었던 삿쵸薩長도 제휴 직전까지
갈등이 극심해서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은 정치적 활동을 다소 자유롭게 수행하기 위해 탈번脱藩이란 비
상수단에 호소해야 했다.(473-475)
다음으로 지적되는 것은 단순히 무사와 서민의 이분법 만이 아닌 일본 전체의 분할 구도였다. 마루야마
는 이를 섹셔널리즘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은 상자구조라는 후쿠자와 유키지의 주장을 여러 곳에서 반복
한다. 마루야마는 여기서 일본에서의 공公의 문제를 살짝 언급한다. 대중적으로 무사도를 전파하는 대표
적인 책인 『하가쿠레葉隠』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거기서 공자, 부처는 물론 심지어 전국시대의
명장 신겐이라도 자신이 속한 특정 다이묘의 가풍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실로 강력했던 일본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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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방자치의 전통이기도 하고, 현대에서는 온갖 흥미로운 관광자원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또 놀라운 통일을 이루어낸다. 일본 해석의 열쇠가 되면서도 동시에 어려움으로도 다가온
다.
근세 봉건제의 사회기구 자체는 국민적 통일의식 형성의 결정적 질곡이었고, 도쿠가와 막부의 현실 정책
은 그런 기구를 최대로 이용하여 통일의식의 아래로부터의 성숙을 저지시키려 했다. 쇄국은 이를 위한
최대의 정책이었다. 막부가 국내적 통제를 위해 채택한 정책은 모두 분할지배divide et impera의 목적
에 기여했다. 한편으로 막부정치 윗분의 뜻御上意의 절대성을 관철시키고, 정치비판은 불경으로 국민의
자발적 정치지향을 억압하며, 봉건적 할거에서 생기는 시기심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서로 감시・견제하
게 했다. 위로는 다이묘의 통어統御에서 아래로는 고닌구미五人組까지. 막부의 관직인 메쓰케目付(감
찰)란 막부의 통제원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며, 각 번 내부의 통제원리로 정교한 스파이 체제를 만들었
다. 막부권력은 쇄국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정치적 반대파로 성장할 우려가 있는 사회적・사상적 동향은
잘라냈다. 260년의 이런 통치가 만들어낸 국민정신을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민들은 아무 일도 없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이라 표현했다. 도당徒党과 집의集議의 구별을 논할 기력도 없고, 정부에 의지하고, 국가
에 관여하지 않으며, 모두가 자기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고 개탄했듯이, 국민 상호간의 불신과 의심이 만
연했고, 보신주의와 오불관언 식의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근성이었다.(476-477)
분할통치를 가능하게하고 완성시킨 감시체제 또는 감찰제도는 막부권력의 강한 힘이었다. 사회전체를
분할하는 것 자체가 막부권력의 목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반대파는 성장하지 못했으며, 국민
상호간의 불심과 의심은 컸다. 마루야마는 막부가 외세에 대항하지 못하고, 개항 후에 몰락한 것은 자업
자득이라고 말한다.
1853년 페리가 우라가浦賀에 도착해 개항을 요구하자, 막부는 사태를 조정에 알리고 에도의 다이묘들
에게 자문을 구하며 거국적 협력을 요청함과 동시에 조선과 대포주조를 허용하녀서 군비강화를 촉구했
다. 그러나 생산력과 낮은 기술수준은 감출 수 없었다. 막부는 그동안 근대적 생산과 기술을 막고, 난학
자는 체포하고, 사전 간행 요구는 끝내 기각하는 등 국민들을 외국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만들려
했다. 그러니 막부의 페리대책자문에 응한 다이묘나 번사들의 상소문이 대부분 우물안 개구리 같은 좁은
소견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미토의 영주 나리아키斉昭 조차 전함 대포에 대해 칼과 창으로 맞
서자고 했을 정도다. 다카시마 슈한高島秋帆은 조선침공(임진왜란)을 언급하며, 훈련된 베테랑 병사도
조선의 진흙탕에 빠져 중국 국경을 넘지 못했는데, 중국을 항복시킨 영국과 맞서 싸울 수 없다고 비판했
다. 막부는 개항이 불가피함을 깨달았을 때, 국내의 맹목적 양이론을 억누르고 추스르는데 부심하게 된
다. 우물안 개구리 같은 소견이라도 일치단결했으면 나았을 테지만, 국내에 서로 믿지 못하고 시기하는
풍조가 심각했다. 센다이仙台 번사 오츠키 헤이지大槻平次도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도 요코이 쇼난横井
小楠도 사람들의 마음을 화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막부와 이에 가까운 영주들이 개항요구에 응하면서 염
려한 것은 막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 일어날 제후 내지 일반 백성들의 반역이었다. 봉건세력
은 외부를 두려워하기 보다 내부를 경계했다. 순수 피치자인 서민에 대해 막부와 각번의 봉건지배자들의
깊은 의구심이 집중되었다. 서민들이 오랑캐와 접촉하고 회유당하거나 계책에 빠질 수 있었다. 우민관에
기초한 서민에 대한 불신, 외국세력과의 결탁에 대한 의혹이 대외관계가 밀접하게 됨에 따라 어떻게 지
배층에 뿌리를 깊게 내기게 되었는지 하는 점은 당시 문헌에 흔하다. 일부 상인들은 준엄한 단속망을 뚫
고 외국 선박과 활발한 밀무역을 전개했다. 그렇다고 우민관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파렴치함이야말
로 상인들을 가치질서의 최하위에 위치하게 한 봉건체제 및 도덕에 의해 반사적으로 생겨난 부산물이다.
일반 서민은 모든 정치적 능동성을 부정당하고 통치의 객체로서 사생활의 좁은 부분으로 내몰려온 그들
에게 갑작스레 국민적 책임의식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1864년 솔선해서 양이를 한 쵸슈가 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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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함대의 공격으로 시모노세키의 포대를 점령당했을때, 일본인들은 서양부대에 우호적 태도를 보였
다. 위에서의 국민에 대한 불신과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무관심은 서로 맞물려 있었다. 이것이 봉건적 지
배관계가 가져온 현실이다. 요코이 쇼난은 1860년에 일본은 분열되어 있다며, 페리가 일본을 무정부 국
가라고 본 것은 뛰어난 직관이라 평가했다. 막부가 제후에 대한 제도는 병력을 소모시키려는 것으로, 온
갖 사역을 시키면서 부담은 각 번의 피폐한 백성드에겍 넘어갔고, 권부의 막강한 권력에 의해 도쿠가와
가문 만의 편리를 도모하는 사적인 운영으로 결코 천하를 편안하게 만들지 못했고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
기는 정치・교육을 시행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477-484)
막상 페리가 도착하여 개국을 요구하자, 다이묘들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소견을 발할 뿐이었다. 오늘날
은 당시 사료가 더 알려져서,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허락하는 대가로 요구했던 풍설서에는 반년전부터 페
리 제독의 함대가 대서양을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다이묘들도 이를 회람한 바가 있다는 사실이 알
려져 있다. 그러나 국론의 분열은 한데 뭉쳐서 양이를 주장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막부는 대외
개항보다 국내 제후나 서민들의 반역을 더 우려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서세동점의 시기에 강제적으로
개국을 하는 나라들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막부 지배층은 제후들을 믿지 않았으며, 막부와 제후는 모두
서민을 믿지 않았다. 그들 역시 갑작스레 정치적 책임을 담당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난 가을 꽤 유행한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그려낸 구한말의 모습에서 가장 큰 허구가 국민의식을 가진 수많은 장
삼이사들의 등장이다.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의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 시대를 끌어올렸고, 과
장되어 있다. 그들의 활약은 훗날의 의열단을 연상시켰다. 마루야마는 일본의 국민형성에 대해 솔직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메이지 정부는 국민형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제 국민이 형성된 것은 러일전쟁에
가서였다. 전장에 대한 동시적 체험과 언론 매체의 영향 등으로.
3장 3절 전기적 국민주의의 제 형태: 해방론-부국강병론-존황양이론-이들의 역사적 한계
봉건체제와 그 밑에서 양육된 의식형태가 국민적 통일의식에 기초한 국민의 국가적 질서에로의 응집을
강인하게 저지했다. 메이지 유신은 일군만민一君万民의 이념에 의해 국민과 국가적 정치질서 사이에 끼
어있는 장애물을 제거하여 국민주의가 나갈 길을 열게 된 획기적 변혁이었다. 메이지유신이 문제해결의
전제로 국민주의는 바로 그 지점부터 전진하기 시작했으며, 물론 그 전제 자체는 봉건제의 태내에서 준
비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도쿠가와 사회구성의 해체과정이며, 이데올로기측면에서 보면 봉건적 관념형
태를 많건넘건 넘어서는 사건의 성숙과정이다. 국민주의의 전단계로서 전기적 국민주의 사조를 보자. 모
든 반 내지 초봉건적 사유형태는 그 자체에 있어 근대적 국민주의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준 셈이다.
(485-486)
왜 굳이 메이지유신을 국민주의의 시작이라고 단언할까. 이 점은 앞에서도 반복되어 왔지만, 멘이지유신
이전으로 유구하게 거슬러 올라가는 일본 국민의 전통사상이라는 국학과 근대초극론을 단절시키기 위해
서이다. 또한 국민주의 전기적 형성, 다시 말해 국민주의의 준비로서의 전통사상의 해체과정을 보는 것
은 순수 일본의 전통사상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일본 국민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외국 군함의 도래는 국민적 통일 관념을 싹트게 했고, 신국 일본과 존황 관념은 근세를 통해 계속되고
있었고, 교통과 시장의 통일은 통일국가의 내적 조건은 준비되고 있었다. 종교적 윤리적 정서로서 존황
관념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한 던서는 외세와의 대면이다. 외국이라는 사상은 일본국이라는 관념을 자극
했다. 국외의 경보가 국민적 정신의 집중적 표현인 존황론을 봉건사회 전복의 지도이념으로 끌어올리는
데 몇 단계가 있었따. 외세의 위협은 페리 내항 7, 80년전, 메이와明和 안에이安永 무렵부터 북쪽에서
왔다. 북방에 대한 군사적 대비 문제와 관련해 대외적 위협에 대한 거국적 관심이 요청되었고, 이런 해
방론海防論이 전기적 국민주의의 1단계이다.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는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방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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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가 있는 조선・유구・에조의 지리를 알아야 하며, 해양국가 일본의 지위를 논했다. 오하라 고킨고大原
小金吾는 외국 오랑캐는 천하의 사람과 힘을 합해 방어해야 한다며, 비밀주의를 버리고 군비기술을 균등
하게 할 것을 역설한다. 간세이寛政, 분카文化, 분세이文政에 이르자 러시아와 영국이 침략과 폭행을 저
질렀고, 해방론도 첨예해져서 고가 세이리古賀精理의 국내체제 강화론은 국방에 대한 관심의 결여에 분
개하고, 위아래가 멀어져서 변고라도 있으면 무너질 것이라며, 언론을 열어 막히고 가린 것을 막는 것을
국방대책으로 들고 있다.(486-489) 당시 근세사회의 기구적 모순이 격화되어 사다노부의 간세이의 개
혁을 실시할 정도로 격심한 재정적 곤궁은 농민들의 세금 부담은 잇키와 우치고와시가 만연되게 되었다.
현실적인 재정상태로 군비강화가 장벽에 부딪히게 되자, 그 전제조건으로 국내 경제적 앉어을 도모하자
는 부국강병론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해방론자들도 토착론이나 에조치개발론을 거론하기는 했으나, 기
술적으로 어떻게 국방을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국내의 경제적 궁핍의 타개가 대외적 위기를 극복하는 중
심과제로 발전했다. 궁핍함이 근세 사회에 깊이 구조적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렸고, 그
대책으로 제도적 변혁의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그런 변혁의 수행은 정치적 집중을 필요로 하는 만큼 다
이묘 체제를 벗어나 중앙집권적・절대주의적 색채를 띈 국가체제의 구상을 성숙시키게 된다.(489-
490)
전기적 국민주의 즉, 국민주의 이전의 봉건제 해체를 위한 사전 준비로 먼저 해방론이 등장한다. 처음은
러시아 그 다음은 영국이라는 외국세력을 막아야 한다. 처음에는 군사적 기술에 대한 관심이 다음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야하는 국내 개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야한다는 정책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체제에 들이닥친 위험을 해결하기 위한 데서 개혁안이 제기되면서 봉건체제가 내부로부터 흔들
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집권적・절대주의적 부국강병론을 가장 조직적으로 제시한 사상가는 혼다 도시아키本田利明와 사토 노
부히로佐藤信淵를 들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대일본국大日本国 내지 황국皇国 관념이 흘렀고, 이는 난
학을 통해 양성된 세계 의식과 보오나되고 있으며, 중화 관념에서 해방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동양이
서양에 대해 뒤떨어졌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국방론은 소극적인 쇄국이 아닌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해외 경략에 의한 적극적 방위체제로 노부히로는 宇内混同 즉 세계통일을 언급한다. 쇄국정책의
시기에 해외 운송과 교역을 주장하고, 공업생산과 상업을 국가가 관리하는 식산흥업을 도모하고,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근본사상은 비약적이며, 유토피아적이며, 제도는 절
대주의 성격을 띈다. 근대 국민국가에 선행하는 절대주의의 역사적 역할은 봉건제의 다원적 권력을 중앙
으로 일원화하고 정치적 정통성을 최고 군주가 독점함으로서 중개세력을 해소하고, 국법의 지배에 복종
하는 동질적이고 균등한 국민을 만드는 것, 나아가 박스 베버가 말하는 행정직의 행정수단으로부터의 분
리를 통한 근대적 관료층과 군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도시아키와 노부히로의 부국강병론에도 불철저하
기는 하나 다원적인 정치력을 가급적 통합하여 한편으로 국군国君 내지 군주와 다른 한편으로 만민万民
으로 중간세력을 분해시키려는 경향이 드러난다. 도시아키가 사대급무를 제시할 때, 무력, 산업, 에조,
에도, 오사카를 수도로 하면 풍요롭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천하의 만민은 모두 국군에게 충성과 절
개를 다할 것이며, 믿음이 천하로 퍼질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새로운 질서에
내면적으로 복종하는 상태이다. 해외 운송과 교역을 상인 맡아, 무사와 농민이 곤궁하니 부유한 상인을
억누르라는 것은 부유한 상인이 중간세력으로 성장함으로 국민들이 균등성이 파괴되고 국가 통치자에
의한 국민적 통일을 위태롭게 만든다는데 대한 경고였다. 국가 통치자는 무사, 농민, 상인 모두에게서
초연한 존재로 그려진다. 노부히로가 세계를 일본의 군현郡県으로 하고, 삼대三台, 육부六府, 팔민八民
의 수통垂統 조직은 사농공상의 전통계급을 해체한 후 팔민으로 나누어 육부에 배속시킨다. 무사 계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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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앞에서 다른 사회계층과 만민을 구성한다. 다이묘의 석고는 20만에 한정되고, 군주가 임명한 관리
에게 복종하며, 상인도 부교까지는 등용될 수 있다. 주구너자가 일본전국을 손발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 국내에서 절대적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 해외경략의 전제조건이다. 수통국가에 있어 황거를 에
도에 두고, 군주 직속 관리와 병사 조직이 지키도록 하고, 도시아키도 인재등용과 관료조직을 구상하는
등 근대국가 구조를 부분적으로 묘사한다.(491-495) 도시아키나 노부히로의 절대주의적 식민제국의
국군国君은 황거皇居라는 이름에서 보이듯 정치적 패자와 전통적 신성함을 지닐 것이 요청되었고, 자국
의 역사적 전통 속에서 존립의 정신적 지주를 찾아내려 한다.(495)
부국강병론은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등장한 절대주의 사고방식이다. 여기서 마루야마는 앞에서 제기한
이들 사상의 한계나 차이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부국강병론은 사농공상의 해체나 일군만민의 사고방식
의 단서를 가지고 있다고만 말한다. 해외진출과 제국주의적 식민지 국가를 내세우는 이들의 유토피아적
사상에는 정치적 지배자의 종교적 권위, 전통적 신성함, 즉 존황론의 가능성을 밑에 깔고 있다.
막말의 거대한 하나의 정치적 사회적 흐름을 형성한 존황양이론尊皇攘夷論을 훗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는 국가가 봉건으로 분열되어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만세일계의 제실이 드러나게 되었
고, 국가가 어려움에 처하자 국가의 분열을 통일시키겠다는 생각이 양이당이 되고 근왕당이 되어 결합한
것이 존왕양이였다고고 말한다. 이 국민주의 대운동은 존황양이라 해도 현저하게 다른 흐름들이 병존하
고 있다. 양이론자는 쇄국론이 아니라서 열렬한 양이론자인 동시에 적극적 개국론자도 있었고, 개국론이
라고는 하나 보수적인 쇄국론인 사람도 있었다. 존황론이 막말에 정치적 표어가 되었어도, 반드시 반막
反幕론이나 도막倒幕론을 의미하지는 않았고, 반봉건도 아니었으며, 존황경막론尊皇敬幕論이나 공무합
체론公武合体論을 거쳐 도막론까지 변혁의 정도를 달리하는 주장이 스펙트럼처럼 형성되어 있었다. 양
이인가 존황인가하는 주관적 용어가 아닌 복잡한 정세 속에서 어떤 사회계층의 어떤 사회적 입지에서 주
장되는가 하는 점이 구체적을 분석될 때 존황양이론의 흐름은 역사적 전모를 드러낼 것이다. 존황양이를
단순하게 국민적 통일과 국민적 독립이란 근대적 국민주의 명제로 직접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없다. 제후
의 양이론에도 막부의 무사안일주의적 개항론에도 지배적 특권의 동요를 두려워하는 이해가 작용하고
있었다. 알코크가 지배자들은 인민 대중이 지적, 도덕적 계몽된다면 근본적 변혁이 초래될 것을 우려하
기에 상업적 이익에도 불구하고 외교관계의 수립과 통상의 진전에 적의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고, 마쓰다
이라 사다노부도 교역이 허락되면, 상인은 이익을 얻고 무사는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495-498) 알코
크는 지배층의 특권유지를 위한 양이론의 취약성을 꿰뚫어보고 열국의 강격조치를 주장하면서도, 일본
인의 애국적 감정의 열광성에 불을 붙여 대중운동으로 전화될 것을 우려했다. 막말의 존황론이 일본을
식민지화, 반식민지화의 운명에서 구해내는데 일조한 힘이라면, 이는 서생들의 존황양이론이었다. 제후
들의 양이론은 존황경막론 내지 공무합체론과 결부되어 있엇지만, 서생들의 존황양이론은 얼마 후 반막
부 내지 토막론討幕에 합류했다. 막말의 존황양이사상은 전자의 우월함이 후자로 이행해가는 과정이었
다.(497-498)
얼마전 BTS의 일본 공연장 앞에서 누군가 양이攘夷라고 크게 쓰여진 깃발을 보았다. 일본의 과거의 인
물들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는지. 반면 일에서 양이라고 하는 사상적 흐름이 현대로 어떻게 전개되고 있
는지도 흥미로운 관심사라고 하겠다. 막말의 존황양이론의 구조는 복잡하기 그지 없다. 존황론이라는 이
데올로기는 처음에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존속하다 서생들의 이데올로기 즉 전복의 이데올로기
로 전환되게 된다. 며칠 전에도 천황의 탄생 축하연이 한국에서도 개최되었다. 군주국가 일본의 경축행
사라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실은 일본이 군주국인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천황제는 그 뿌리가 아주 깊고, 실로 근대 일본 전체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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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존황론을 볼때도 그것을 천황제와 연결지어 이해해야 한다. 근대 천황제는 존황론의 바탕 위에
서 피어난 꽃이니까.
후기 미토학에 있어서 존황양이론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한 것은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의 『新
論』이다. 이 책은 먼저 국체의 위엄을 밝히고, 세계 정세와 구미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 방책을 서술하며
방위체제를 긴급조치와 근본대책으로 논한 조직적 저작으로 막말 사상계에 놀랄만한 영향을 미쳐, 막말
지사들의 성전聖典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여기에 존양론의 국민주의 사상으로서의 전기적 성격이 뒤섞
여서 나타났다. 존양론의 밑바닥에 피지배층에 대한 근본적 불신, 서민층이 외세의 지원을 믿고 봉건적
지배관계를 뒤흔드는 데 대한 공포심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불신과 공포심은 우민愚民 사상을 발상지로
하고 있다. 또 부국강병론자들에게 백성의 마음이 한번 떠나면 부유하고 강한 것이 오랑캐에게 넘어갈
것이라며, 난학에 대해서도 오랑캐들이 이를 이용해서 우민을 미혹시킨다면, 그들이 짐승처럼 변해서 덤
벼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야스의 봉건적 통치는 현명한 계산과 위대한 계략이지만, 현제의 국제적 위
기에서는 약점이 되고 있다며,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고 군사력을 약하게 만든 것은 통치를 위한 계책이
지만,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우민정책의 한계를 지적하고, 권력의 분산(농병제)을 통해 나라의 온힘
을 통해 외적에 대응할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 국민주의의 내재적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가 전개한 국
방 국가체제, 무너지지 않는 체제不抜ノ業를 시행하려면 백성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지 알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우민관 후기 미토학 전체에 얽혀 있다. 후지타 토코藤田東湖는 고대의 무력을 높이
는 기상이 귀족에서 사라지고 무사계급에 옮겨갔으며, 평화로운 날이 오래 지속되어 간악한 백성과 교활
한 오락캐들이 일어날까 염려한다고 말했다. 영웅이 천하를 고무할 때는 백성이 움직이지 않을까 염려하
지만, 용렬한 사람이 한 시대를 호도할 때 백성이 움직일까 걱정한다는 것은 『新論』의 유명한 명제이다.
후기 미토학의 양이론 널리 국민과 더불어 대외방위에 임하려는 근대적 국민주의와 반대로 행여 백성들
이 움직일까봐 걱정했던 것은 아닐까. 치자와 피치자라는 고정 관념 위에서 국가적 위기를 책임지고 떠
맡아야 할 사람은 고정된 치자들에서만 찾았다. 이런 입장에서 양이론과 결합된 존황론은 봉건적・신분
적 계통제에 저촉되기는커녕 후자의 기초를 다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499-502) 아이자와
의 존황론이 경막론을 수반하듯히 후지타 유코쿠藤田幽谷도 후지타 토코도 황실은 봉건제의 계층적 군
신관계의 맨 윗자리에 있고, 자신이 소속된 주군에 복종하는 것이 존황의 구체적 실천이다. 막부가 황실
을 존경하면 위아래가 서로 떠받쳐 모두 화목하게 될 것이다. 명분을 바로하는 것은 계층적 질서를 유지
하는 것이지 일군만민이 아니다. 미토학은 제후의 입장에서 나온 존양론의 이론적 정식화이다. 미토학의
실천적 영향은 넓은 범위로 침투해, 모든 존황양이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는 모습을 보였는데, 한편
으로는 국체론이 시무론과 결부되어 존황론과 부국강병론이 떼어놓을 수 없는 한덩어리로 강력하게 주
장되었다는 점과 존황론이나 부국강병론이 구체적인 내용을 묻기 전에 정치적 슬로건으로 사람들의 마
음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미토학의 핵심인물인 나리아키斉昭와 막부 각료들의 대립이 미토
번이 친번親藩이라는 사실 때문에 강조되어, 막부말기의 막연한 현상을 타파하려는 제 동향이 표현된 것
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미토학적 의미에서 존황론 내지 양이론이 존양론 전체를 대표할 수 있었던
것은 안세이安政, 만엔万延 시대까지며, 나리아키나 세이시사이가 만년에 개국론으로 바뀌었을 무렵 존
양론의 분화가 분명하게 되어 미토학적 입장은 사쓰마薩摩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의 주장과 행동에
계승되어 과격파 존양론과 예리하게 대립했다.(503-504)
후기 미토학은 제후 쪽에서 본 존양론으로 아이자와의 주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 국민형성의
관점에서 보면, 농병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국민주의 전기적 논리가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
으로 우민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민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고
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했고, 일군만민 사상이 아닌 천황을 내세우면서 봉건적 계통제를 다시 세우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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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로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존황론이 존양론의 대표인 것으로 알려진 이유이다. 하나는 국체론과
시무론의 결합으로 구체적인 대안으로 여겨졌다는 점, 둘째는 무엇보다 정치적 슬로건으로 강력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존양론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해가 발생하고, 개국론으로 전화되기에 이른
다. 위로부터의 존양론은 어디까지나 구체제 유지에 방점을 찍고 있었지만, 해체로의 방향도 막을 수 없
었다.
아이자와나 후지타 부자의 존양론이 분세이文政, 고카弘化 연간에 결정적으로 형성되었다면, 요시다 쇼
인吉田松陰의 존양론이 사상적으로 성숙한 것은 페리가 내항한 이후다. 그는 봉건적=지방적 할거 근성
을 타파하고 대외적으로 다가올 중대한 위기에 대한 방위를 황실天朝에 대한 거국적인 의무임을 부각시
켰다. 천하는 황실의 천하이자 천하의 천하이지 막부의 사적인 천하가 아니라며 막부는 제후를 이끌고
천하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로를 열고 논의가 모여야 한다며 수평적인 지방적 폐쇄성과
수직적 신분적 폐쇄성에 거국일치의 가장 큰 장애물을 보고 있다. 서로 협력해서 당연히 교활한 오랑캐
를 물리쳐야 한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좋은 의견들이 가리고 막히는 것이다. 조정에서 정치를 논하던
것이 사라졌다며, 정치・외교에 대한 찬반의 자유로운 토론을 역설한다. 한편 막부를 존경할 줄 모른다
면서 미토학적인 존황경막론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막부가 페리와 화친조약을 체결했을 때, 그
는 격분했다. 그는 본래 친구인 승려 게쇼月性의 토막론에 반대하며, 공무합체적 거국일치론을 주장했
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칙허를 기다리지 않고 1858년 통상가조약의 조인을 단행하자 그
의 입장은 일변하여, 천자의 조칙을 받들지 않은 쇼군의 죄를 토벌하여 주륙해야 한다고 말하며, 마침내
그의 존황양이론은 토막론에 이르렀다. 얼마후 안세이安政의 대옥이 시작되어 쇼인도 로쥬老中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를 공격하다 체포되고 이 때를 전후 그의 사상은 급진화하여 제후들도 사치스러운 생
활에 젖어 자신과 자기 가문만 생각하여 시세의 흐름에 아첨하고 있을 뿐이라며, 초모草莽의 지사 내지
천하의 로닌浪人에게 구하게 되었다. 우메다 운핀梅田雲浜도 이 시기 제후들은 영지를 잃을까 걱정할 뿐
이라며, 황실 권위는 빛을 더한다고 말했다. 존황양이론은 미토학적인 단계로부터 결정적으로 비약하고
있다. 쇼인은 도쿠가와 정부가 존재하는 한 결국 미러영프의 통제를 받을 것이고, 천자가 계시지만, 조
정 귀족은 막부 보다 더 문제가 심하다며, 이대로는 3천년 독립을 유지한 대일본이 하루 아침에 속박을
받을 것이니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나와 자유를 외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대외적 자유독립을 양 어
깨에 짊어질 사람은 막부, 제후, 공경 등 어느 봉건 지배층에도 없으니 존양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 않
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며, 세상을 완전히 바꾸는 것今の世界の一変으로 과제를 실현하려 했다. 물론 그
구체성은 없지만, 일군만민에로의 방향을 막연하게 예감하며 처형장으로 떠났다.(504-510)
마루야마의 존양론에 대한 추적 혹은 전기적 국민주의에 대한 추적은 요시다 쇼인에게서 끝난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인에게는 영웅이지만, 다른 한편 일본 제국주의의 문을 연 사람이기도 하다. 요시다 쇼인도
처음에는 봉건제후 등 봉건지배층에게 의존했으나 마침내 봉건지배층을 포기하고, 그러나 그 자신도 새
로운 세계상에 구체적인 모습은 없었고, 막연히 일군만민을 향했던 것이다. 존양론은 국민주의 이전에
국민주의에 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의 국민주의는 어떤 국민주의냐는 질문이
고, 그런 질문은 존양론의 성격에 있다. 결국 일군만민의 사상으로 전환되지 못했던 존양론이 가진 한계
가 오히려 명확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메이지가 근대적=시민적 이지 못했다고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
다.
지금까지 살펴본 전기적 국민주의 사조를 전체적으로 훑어보면 그 사상의 내용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내면적 경향이 굵은 선을 이루면서 전체를 꿰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건 사회의 다원적 분열이 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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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직면하여 무력함을 드러냈을 때, 국가적 독립을 위한 국민적 통일의 요청은 대내적 정책에 있어 다음
의 두 방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하나는 정치력의 국가적 응집에 대한 요구였으며, 다른 하나는 국민적
침투에 대한 요구였다. 초기 해방론은 한편으로 횡적인 지방적 할거의 부정과 거국적 관심의 요청이 다
른 한편 종적인 신분적 격리의 완화(언로를 열어달라) 요청과 결합되어 있다. 중개 세력의 자립적 존재
가 국가와 국민의 내면적 결합의 질곡을 이루는 이상, 이를 극복한 국민주의 이념은 집중화와 확대화라
는 두 계기를 동시적으로 내포하면서, 변증법적으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구체화한다. 그런 정치적
집중의 방향이 부국강병론에서 절대주의적 체제로 결정적으로 강화되었고, 그런 집중이 최종적으로 귀
속되어야 할 주체를 찾아 존황론을 표면에, 존황양이론은 그 사회적 담당자들을 봉건적 지배자로부터 초
모굴기의 백성들로 옮겨갔다. 이는 막부 말기 사상의 공의여론公儀与論 사조의 대두 같은 역사적 움직임
을 표현한 것이다. 페리가 내항했을 때, 로쥬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가 모든 사람의 견해를 물은 것은
중간세력 해체의 두 방향 최고 주체로의 응집과 국민층으로의 확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며, 당사자의 의
도를 넘어서는 국민주의 역학을 역사적으로 상징해 주는 것이다. 시종일관 압도적인 역할을 떠맡았던 것
은 누구든지 쉽게 알 수 있듯이 정치적 집중이란 계기였다. 대외적 위기에서 우선적으로 요망된 것은 봉
건적・할거적 정치세력을 일원화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어 국방력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전제로서 국민생활의 안정과 식산흥업의 진전을 주장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정치적 관심을
더 넓은 사회계층으로 침투시키고 그것을 통해 국민을 종전의 국가 질서에 대해 책임없는 수동적인 의존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그들의 힘을 정치적으로 동원한다는 과제는 막연하게 제기되면서도, 전자의
움직임을 허덕이며 따라갈 뿐이다. 언로 요청, 신분장벽 완화, 하층 계급 인재 등용, 공의여론 등으로 구
체화하면서도 정치적 권리를 아래로 침투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넘을 수 없는 선에 의해 한계지워져 있었
다. 국가적 독립의 책임자는 봉건적 지배층 이외의 국민대중은 금새 문제의 바깥으로 내몰리고 만다. 현
실적으로 국민들의 정치적 총동원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사회적 요인까지 파고드는 견해는 보이지
않는다. 쇼인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은 초모의 지사였으며, 전기적 국민주의 사상에 있어 이같은 확대
계기의 취약성은 봉건적 중간세력이 강인하게 존속할 수 있게 해줌으로 오히려 집중는 계기 그 자체도
불철저한 것으로 만들었다.(511-513)
가장 눈에 띄는 주장은 중간 세력의 해체가 절실하다는 통치자와 국민을 적접 연결해야한다는 주장이다.
국가와 개인의 직접적 연결이다. 국가권력의 집중에는 성공했지만, 국민대중은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것
이다. 그것이 한계라는 주장. 그레고리 핸더슨 같은 사람이 소용돌이vortex이야기를 할 때, 한국정치의
중앙집중화 경향, 한국사회의 중앙집중화 경향을 이야기하면서 늘 문제 삼는 것이 중간집단이나 기구이
다. 지역이나 정당 같은 중간 집단이 성장하지 못해서, 중앙권력을 위한 상승작용 외에 다른 생산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일본 사회에서 마루야마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국민의 성장은 외려 이런 것인지 모른다. 조선시대에는 경화사족에게만 허용되던 중앙권력의 집
중화가 바로 마루야마가 말하는 중간세력 증 삼남과 서북의 향반 즉 재지사족, 중앙의 무인귀족과 중인
명문가 등 다양한 중간 세력이 식민지와 전쟁으로 몰락해 버리자, 국가와 국민의 직접적 연결 속에서 모
두가 중앙권력을 지향하는 상승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오해일까. 외세에 의한 구 지배층의
몰락이라는 우연적 계기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식산흥업의 수행과 군비의 충실을 위해 많건적건 간에 요망된 정치력의 집중은 어느 것이나 다이묘 영지
의 정치적・경제적 자족성을 넘어서는 것이긴 했지만, 그것을 타파하는 것까지는 구상하지 못했다. 이는
중심적 정치력의 귀착지를 조정에서 찾든 막부 중심으로 생각하든 차이가 없었다. 존황론이 토막론에 이
르렀을 때도, 존양론자들의 대세는 번의 독자적 권력에 손가락 하나 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쇼인의
말기 사상 등에 일본의 대외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체 체제를 전환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10/25/23, 4:11 PM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4. | FELI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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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할 정도이다. 이들은 부국강병론이나 존황양이론이 국민적 침투의 계기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집권
적 정치력의 확립이라는 방향에서도 봉건 기구의 마지막 철벽 앞에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이것이 국민주
의 이론의 전기적 성격의 궁극적인 근거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사상적 전개는 막부 말기 일본이 현실적
으로 걸었던 정치적 통일과정과 기본적 흐름에 완전히 대응되고 있다. 외국배의 도래를 계기로 막부 권
력이 이완됨으로써 초래된 국내적 분열과 무정부적 혼란을 극복해야 할 정치력은 서민들 사이에서 성장
하지 못했다. 왕정복고의 정치적 변혁은 봉건적 지배층의 자기분해 과정에서 과격파 공・경・하급무사
들과 기껏해야 서민들의 상층부를 주요한 담당자로 해서 이루어졌다. 막부가 소멸한 후 제일 먼저 출현
한 정치형태는 조정의 리더십 하에 웅번들이 서로 연합한 것이다. 공의여론 사상이 거둔 결실은 이것이
다. 애초부터 그것을 봉건적・다원적 통치형태의 단순한 계속 내지 변형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구미열
강의 중합을 느끼면서 국가의 독립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 정령의 귀일에 의한 부국강병 정책이 초미의
과제로 다가왔다. 군비의 근대화와 식산흥업은 막부 말기 막부 자신에 의해서 시도되고 있었고, 유신 정
부를 구성한 서남웅번들은 그 점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 봉건적 권력은 말기 단계에서 자기보존을 위해
이질적 근대 산업 및 기술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절대주의적 체제의 수립은 조정과 막부 거의 모
두의 보편적 과제였다. 문제는 단지 그 지도력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그런 한 순수하게 봉건적・계통적
분권 조직은 이미 존립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중개 세력의 배제가 서민층의 능동적 참여 없이 중개
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는 점이 근대적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유신의
제 변혁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이었다. 전국 인민들의 뇌리 속에 국가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는 후
쿠자와 유키치의 말은 새로운 메이지 사상가들의 과제가 되었다.(514-516)
마루야마는 반복적으로 메이지유신의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결국 메이지유신으로 성립한 정부형태
란 막부의 소멸 후 조정을 중심으로 서남웅번의 연합이었다. 물론 봉건적・다원적 통치형태의 계속이나
변형은 아니다. 막부 자신과 중요한 번들이 이미 부국강병, 식산흥업, 군비강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막
부를 제외한다면, 그것에 가장 앞장섰던 이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중개 세력의 배제는 중개 세력을
구성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론 그렇다 어떤 혁명에서도 대항 엘리트들의 존재와 향방이 혁명의
성패를 결정짓는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대중동원조차 없이 이루어졌다. 그 점이 이루의 메이지 국가
의 성격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마루야마의 주장은 국민국가야말로 이제부터 사상가들이 이룩해야할 과
제라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 마지막 장에서 천황제에 대한 평가가 빠진 것이다. 존황론으로 모든 논
의를 몰고 간 이상 그 결론은 천황제에 대한 평가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천황제에 대한 논의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비로소 마루야마에게도 가능했던 것이다. 단순히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서도 그렇
다.
2018.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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