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5

근대 일본의 치명적 발명품, 무사도 박노자 2010

근대 일본의 치명적 발명품, 무사도


박노자의 국가의 살인 838호
근대 일본의 치명적 발명품, 무사도
군국주의 필요에 의해 ‘전근대 유산’이 ‘위대한 전통’으로 둔갑…

근대의 군주가 되려던 박정희가 ‘선비정신’ 강조한 맥락도 비슷


등록 2010-12-01 

세계의 어느 나라를 봐도 국민국가에 유리한 쪽으로 ‘전통’의 이미지를 조작하지 않는 곳은 없다. 대한민국부터 그렇다. 박정희와 박종홍(1903∼76)이 반동적이고 복고적인 민족주의로 어용적 사상 흐름을 틀었던 1970년대 초반부터 ‘선비정신’과 같은 표현이 유행했는데, 이런 표현이야말로 ‘전통의 날조’치고 가장 심한 편에 속한다. ‘정신’ 같은 일본제 근대 용어들이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선비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선비정신이라기보다는 그저 성리학이었다.

집권 초기엔 폄하했던 선비정신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주군을 위한 복수’는 중요한 테마였다. 주군의 적을 죽이고 전원이 할복자살한 47명의 사무라이 이야기를 그린 일본 민화.한겨레 자료

선비들이 ‘이발기수’(理發氣隨·우주의 원리인 ‘이’가 먼저 발하고 물질의 본질인 ‘기’가 이에 따른다)와 같은 고급 관념론을 줄줄 외웠다고 해서 과연 그렇게까지 고매했던가? 고매한 이들도 없지 않았겠지만, 세계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조선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이 일차적으로는 고매한 ‘선비’라기보다는 소유욕과 승부욕, 출세욕을 불태울 수밖에 없는 ‘지배자’였다. ‘상것’들의 재산을 빼앗는 데 정신이 없던 양반 지방관과 재지(在地) 사족들을 “흡혈귀와 같은 존재”라고 부른 유명한 영국 여류 탐험가 비숍(1831∼1904)의 의견은 오만한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적 속단이라고 치자. 하지만 조선 후기의 양심적 지식인들도 당대 선비들의 ‘정신 상태’를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컨대 평생 벼슬을 멀리해온 성호 이익(1681∼1763)은 선비들의 불같은 출세욕을 거의 망국적 질환으로 봤다.

“본래부터 우리나라는 토지는 좁고 관원은 많다고 이르는데, 토지가 좁으면 재물이 넉넉하지 않고 관원이 많으면 토색질이 성행되어 백성은 더욱 곤궁할 것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권귀(權貴)의 자제들은 천치 바보를 막론하고 벼슬 없는 자가 없고, 그 연인 족척들과 문객들도 벼슬에 오르지 않는 자가 없어, 한 번 사모를 썼다 하면 수령은 떼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오히려 지체됨을 꺼리어 만기도 되기 전에 미리 엽등할 것을 도모한다.” (<성호사설> 제14권, ‘파용관’)

조선 후기의 선비들의 타락은, 구한말의 계몽주의자부터 식민지 시대나 그 후의 진보·보수를 막론한 다수의 근대적 지식인들의 한탄과 비판의 표적이었다. 박정희 자신도 집권 초기에 <국가와 혁명과 나>(1963)와 같은 ‘강령’ 격의 책에서 ‘선비문화’를 위시한 ‘전통시대 역사’를 “퇴영, 조잡, 침체의 연쇄사”라고 싸잡아 폄하했다.

그러면 1970년대 초반부터 관 주도로 선비정신이 선양되고 율곡과 퇴계 등이 새로운 지폐 문양에까지 등장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서구식’ 민주주의와 결별하고 김일성의 종신집권을 빼닮은 영구적 권력을 누리려 했던 박정희에게 근대 이전의 ‘충효’ 전통이 그 의도를 합리화하는 기제로 급하게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반동화가 관 주도 사상 흐름의 복고화를 부르고, 복고적 민족주의 차원에서는 선비문화에 전통의 후광을 입히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박정희는 그렇게 해서 ‘선비나라’의 새로운 ‘군주’ 노릇을 하려 했다. 그 자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절대다수의 국민은 선비의 자손이라기보다는 선비에게 착취와 토색질, 무시를 당해온 ‘상것’들의 자손이었으며, 선비정신 등은 전통시대에는 물론 일제시대나 그 직후에도 잘 쓰이지 않던 새롭게 발명된 표현이었다.

‘부국강병’을 메이지 일본에서 배운 박정희는, 선비정신 같은 전통 날조의 기술도 거기에서 배웠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박정희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할 선비를 역사 속에서 불러내고 싶었다면, 메이지 말기 군국 일본의 지배자들은 무사(武士)의 유효성을 높이 사서 동시대 일본인들에게 무사도(武士道)가 일본의 ‘위대한 전통’임을 믿게끔 하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일본을 피상적으로만 아는 이는 분명히 “일본 전통사회는 사무라이들의 ‘칼’ 문화에 정말로 젖어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하고, “무사도가 왜 근대적 발명품이냐”고 의아해할 것이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향반 등 중간 계층을 제외한 양반 사대부들이 조선 사회의 다수를 차지할 수 없었듯이, 에도시대(1603∼1868) 일본에서도 사무라이, 즉 사족(士族)이 많이 잡아봐야 총인구의 1할에 불과했다. 그들의 ‘무도’(武道) 문화에 나머지 90%의 인구가 영향을 받았느냐 하면 그것도 결코 아니었다. 사족들과 달리 나머지 90%의 주민들은 칼을 차고 검술을 배울 권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청일전쟁 전후 ‘무사도 폭발’


주군의 원수를 갚고 자살한 47명의 사무라이 이야기를 영화화한 <기묘한 이야기 - 사무라이 휴대폰>. 한겨레 자료

그렇다면 사족들의 교육은 과연 ‘무덕(武德) 수양’ 위주였던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외전(外戰)이 없었던 에도막부의 장기적 평화 시대에 지배층에게는 검술보다 유교경전과 문장 익히기가 훨씬 더 중요시됐다. 예컨대 나카쓰(中津)번의 하급 사족 아들로 태어난 유명한 계몽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만향당(晩香堂)이라는 번의 학교에서 <좌전>(左傳)과 같은 경전을 11차례나 읽어 다 외울 정도로 한학에 열을 올렸지만, 이렇다 할 만한 ‘무사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칼잡이 사무라이의 나라’라는 에도시대 일본의 통상적 이미지는 사실과 상당히 다르다고 봐야 한다.

물론 관료적·학구적 분위기가 강한 에도시대라고 하더라도 유교와 다른 ‘무사의 덕목’에 유념하는 지식인도 없지 않아 있었다. 예를 들어 변방인 규슈섬 사가 지역의 고급 사족인 야마모토 쓰네토모(1659∼1719)가 먼저 돌아간 번주(藩主)와의 대화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가쿠레>(葉隱)라는 책을 남겼다. 그런데 “무사도라는 것은 죽는 일에서부터 발견된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책은, 에도시대에 널리 읽히지 않았으며 근대에 와서야 빛을 보게 된다. 자세한 내용을 보면, ‘순사(殉死) 찬양’ 이외에는 유교나 불교에서 따낸 자비, 성(誠), 간언(諫言), 예의에 대한 설파로 가득 차 있다. 불명예를 씻기 위한 죽음에 대한 강조의 정도는 조금 달라도,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사실 조선 성리학자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근세의 일본은 ‘무사도의 나라’라기보다는 점차 유교화돼가던 농업관료제 사회였다. 단, 막번(幕藩) 체제라는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독특한 조합만이 중국이나 조선과 판이하게 달랐을 뿐이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일본이 1894∼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눌러 동북아의 군사적 패권국가로 돌연히 등장한 뒤였다. 박정희가 초기에 한국 전통문화에 무관심하고 적대적이었듯이, 1890년대 이전까지 근대 일본의 주류는 에도시대 사무라이 문화를 ‘전근대의 유산’이라고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점차 징병제를 확대하고 학교 교육까지 군사화하는 시점에서는 군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전통’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시점에서는 에도시대 사람들도, 메이지 초기의 사람들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던 ‘무사도’가 갑자기 중요해졌다. 1890년대 이전까지 제목에 ‘무사도’가 들어간 책이 거의 나오지 않았는데, 1890년대에는 거의 해마다 한 권씩 나오고 1901∼05년에만 해도 47권이나 나와 ‘무사도 폭발’을 이루었다. 일본보다 훨씬 강해 보였던 러시아와의 전쟁, 그리고 한반도의 식민화를 일본 주류가 이렇게 ‘정신적으로 준비’했던 셈이다.

퀘이커 교도까지 무사도 찬양


‘무사도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제작·보급한 영화 <망루의 결사대>.한겨레 자료

당시 무사도를 입에 올리고 다니던 이들 중에는 당대 지식계의 거물들도 포함됐다. 예컨대 동경제국대학의 철학과 원로이며 ‘가족국가’로서 천황제 국가의 이념적 틀을 준비한 핵심적 관(官)철학자 이노우에 데쓰지로(1855∼1944)는 육군사관학교에서 특강한 내용을 중심으로 무사도에 대한 소책자를 따로 냈다. 이노우에가 본 무사도는 아예 ‘일본 정신’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일본사를 관통하는 핵심적 ‘국민도덕’이었다. 극단적 보수주의자 이노우에는 “천황보다 하나님을 우위에 두는” 기독교를 ‘비일본적 종교’라고 생각하고 애써 배격했는데, 무사도 찬양에는 기독교인도 열심히 한몫했다. 대표적 사례는 최근까지만 해도 일본의 5천엔 지폐를 장식한 퀘이커 신자 니토베 이나조(1862∼1933)였다. 물론 그 얼굴을 5천엔 지폐에 등장시킨 것은 무사도와 관계없는 일이었다. 미국과 독일에서 유학한 저명한 학자이자 저술가인 그는, 1920년대에 국제연맹 등에서 중역을 맡는 등 일본의 ‘국제주의’와 ‘자유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는 탁월한 영어 실력을 국제주의를 위해서만 발휘하지 않았다. 1900년 한반도와 남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갈등이 점차 심해지는 민감한 시기에, 그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로 <일본의 영혼, 무사도>라는 책을 발표한다. 특히 영미권에서 히트를 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애독서가 된 이 책은 무사도를 유럽의 ‘기사도’와 유사한 것으로 묘사해 외국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한편, 청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를 ‘무사도 덕분’으로 돌리기도 했다. 전쟁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퀘이커 신자인 니토베였지만, 그는 무사도야말로 기독교가 일본에 이식될 수 있는 ‘좋은 토양’이라고 결론 내렸다. 상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병역거부를 최초로 보편화한 초기 기독교(퀘이커)와 <하가쿠레>류의 ‘전사(戰死) 찬미’가 양극단처럼 보이지만, 전쟁 열풍에 휩쓸린 지식인들의 관심은 거기까지 미치지 않았다. 국가를 위한 살인은 그들에게 예수의 자기희생처럼 고귀하게 보였다.

천황주의적 극우부터 기독교적 자유주의자까지, 전쟁 열기의 히스테리적 분위기에서 ‘무사도는 일본인의 고유 정신’이란 테제에 반대할 사람은 극소수의 사회주의자 이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함석헌(1901∼89)의 스승이 된 전쟁 반대론자인 우치무라 간조(1861∼1930)마저 일찌감치 1894년의 영문 저서 <일본과 일본인>에서 ‘전형적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1828∼77)의 “충성, 용기, 결단력, 헌신”을 “일본 민족의 대표적 덕목”으로 봤다면, 그보다 더 온건한 지식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포스트모던 시대에 되살아난 무사도

‘칼의 도덕’에 대한 지식인들의 찬양을 글로 읽을 수 있는 식자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1910∼20년대 일본에서 영화가 대중적으로 보편화됨에 따라 칼부림이 난무하는 ‘시대극’은 무사도를 민초 사이에 인기 있는 담론으로 만드는 새로운 매체가 됐다. 에도시대 사무라이들을 등장시키는 시대극 중에는, 1701년 주군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주군의 적을 죽였다가 정부의 명령으로 전원 할복자살한 47명의 충실한 사무라이 이야기인 <주신구라>(忠臣藏)가 단연 1위의 인기를 누렸다. 1908년에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약 130편의 다른 영화로 나왔다. 이런 영화로 인해 대중 사이에서 관료로서의 사족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다스렸던, 꽤나 유교화된 에도시대의 일본은 적의 머리를 멋지게 베고 할복을 쿨하게 하는 ‘용감무쌍의 무사 나라’로 비치게 된 것이다.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등장한 무사도 담론은 전후 한때 혹독한 비판을 받아 그 자취를 감춘 듯했다. 1960년대에 무사도를 여전히 찬양했던 미시마 유키오(1925∼70)와 같은 심미주의적 극우파들은 비주류 중에서도 한참 비주류였다. 그런데 경제성장이 멈춘데다 포스트모던의 광풍으로 선과 악의 구분선이 흐려진 1990년대 이후의 일본에서는 무사의 ‘멋진’ 칼이나 주먹이 또다시 상당수의 노골적 숭배 대상이 되는 것 같다. <흉기의 벚나무>(2002) 같은 영화에서는 도심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네오나치가 거의 낭만적 ‘협객’처럼 보일 정도다. 인간의 해방과 궁극적으로 모든 폭력이 정지될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좌파의 꿈들이 좌절되고 모든 것이 상대화된 포스트모던의 반동적 시대에는, 관객을 매료시키는 아름다운 청년 배우가 화면에서 상대의 가슴에 ‘시원하게’ 칼을 꽂거나 몸을 ‘쾌활하게’ 풀어 상대를 ‘멋있게’ 때려눕히는 등 폭력을 낭만화·미화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왜 나쁜지 설명하기 힘들어졌다. 상대주의 시대에는 구태의연한 도덕론적 무사도는 인기를 끌지 못해도, ‘눈요깃감’으로서 영상 폭력은 난무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소비 대중의 거부감을 조금씩 무력화해 전쟁을 흉악한 범죄가 아닌 ‘아름다운 일’로 다시 한번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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