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1

노회찬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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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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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휘장(9대-19대)



국회휘장(9대-19대)




국회휘장




대한민국 제17·19·20대 국회의원
노회찬
魯會燦 | Roh Hoe-chan
노회찬 전 의원
출생
사망
2018년 7월 23일 (향년 61세)
묘소
본적
본관
서명
노회찬 서명
SNS[7]
유튜브 아이콘 X Corp 아이콘(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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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일생3. 재단4. 수상5. 소속 정당6. 선거 이력7. 평가
7.1. 친서민적인 달변가7.2. 한글 사랑에 앞장선 정치인7.3. 지역구 세습 논란7.4페미니스트로서7.5. 불법 정치자금 수수7.6. 추모 분위기와 정의당 지지층 집결
8. 어록9. 기타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노동운동가정의당과 그 전신인 정당에 몸담으며, 서울 노원과 경남 창원시 성산구 등에서 국회의원을 3차례 역임했다. 심상정과 함께 대한민국 진보정당 소속으로 최초이자 단 둘뿐이었던 3선 의원이었다. 노심조의 노, 노초사[10]의 노가 이 사람을 가리킨다.

진보정당계를 대표하는 스타 정치인이었다. 여러 방송에 출연하여 진보정당 소속 정치인들 중 가장 높은 대중성을 갖추고 있었다. 진보정당의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고, 결국 2018년 7월 23일 모친의 아파트 17층과 18층 사이에서 스스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국회장으로 치러졌다.

2. 일생[편집]

△ 비디오머그에서 정리한 노회찬의 일생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노회찬/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

3. 재단[편집]

사후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이 설립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4. 수상[편집]

  • 2006년 - 조계종 조선왕조실록 환수 감사패
  • 2005년 -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추진위원회 한글을 빛낸 큰별
  • 2005년 - 국회57주년 개원기념 우수의원외교 공로패
  • 2005년 - 광복회 친일재산환수법 통과 감사패
  • 2005년 - 여성단체연합 호주제 폐지 감사패
  • 2004년 - 전태일 문학상 특별상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92
창당준비위원회[12]
1992 - 1995
정계 입문
개혁신당(1995년) 흰색 로...
1995
창당
민주당(1991) 글자
1995 - 1997
합당[13]
1997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진보정치연합
1997
창당
1997
신당 창당을 위한 정당해산
건설국민승리21 글자
1997 - 1999
창당
1999 - 2000
신당 창당을 위한 정당 해산
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
2000 - 2008
창당
2008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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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 2011
창당
2011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11
창당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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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 2012
창당
201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진보정의당 흰색 로고타입
2012 - 2013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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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 2018
당명 변경
사망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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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4,061 (13.3%)
당선 (8번)
초선[14]
2008
서울 노원 병
진보신당 흰색 로고타입
32,111 (40.05%)
낙선 (2위)
2010
143,459 (3.26%)
낙선 (3위)
2012
서울 노원 병
통합진보당 흰색 로고타입
52,270 (57.21%)
당선 (1위)
재선[15]
2014
서울 동작 을
정의당 로고타입
37,382 (48.69%)
낙선 (2위)
2016
61,897 (51.50%)
당선 (1위)
3선[17]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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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비례 민노당
노회찬 18
노회찬 5
노회찬 19
노회찬 보궐
노회찬 20
  • 낙선한 3번의 선거의 경우 사표론이 제기가 될 정도로 해당 선거의 1, 2위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 그중에서 2010년 서울특별시장 선거는 사표론으로 비난 받는 입장이었고, 2008년 국회의원 선거와 2014년 재보궐 선거는 사표론을 주장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당선된 3번의 선거는 진보정당의 거센 풍파와 함께 한 인물임을 증명하듯 모두 임기를 끝까지 채우지 못했다.[18]
  • 벽보가 따로 없는 비례대표를 제외하고 모든 선거 벽보에 쓰인 사진이 다 똑같다.

7. 평가[편집]

7.1. 친서민적인 달변가[편집]

노동자와 서민의 입장에서 권위주의나 엘리트주의를 지양하고 대중주의적 정치를 지향한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운동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강성의 이미지 대신 소통력과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나름 유명 정치인이 되었음에도 주류정당에 편입되지 않고 계속 진보성향의 소수당에 몸담는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소신과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고 호평하는 반면 다른 일각에서는 2000년대 이후 민주당 등의 중도성향의 정당과 정치적 지향성 측면에서 별 차이가 없어졌는데도 분파적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성격이나 성향 측면에서 봐도 진보정당보다는 좀 더 대중적인 정당에 어울린다는 평가가 많다.[19]

언변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한데, 같은 당 유시민 못지 않게 뛰어난 말솜씨를 자랑한다. 도리어 어떤 경우에는 유시민도 능가하는 언변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시민이 보수 계열 정당의 정치인 중 토론 상대로 가장 좋은 상대로 꼽은 인물이 박형준과 유승민으로 모두 정계 인물 중 뛰어난 토론 실력으로 유명한데, 노회찬은 그 박형준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어서 잠시 쩔쩔매게 한 적까지 있다(...). 다만 말하는 스타일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데, 유시민이 뛰어난 논리력과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안에 대해 분석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노회찬은 상황에 맞는 적절한 비유와 풍자를 통해 복잡한 사안을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때문에 김어준은 "홍준표와 토론에서 다이다이를 떠서 상대가 될 만한 정치인은 역대급으로 뽑아도 한 손을 채우지 못하지만, 노회찬 의원은 능히 상대가 될 만하다"고 평했다.[20]

박근혜 정권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으로 통진당 세력이 무너진 후, 노회찬과 심상정이 이끌고 있는 정의당이 사실상 진보세력의 원내 입성을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 버렸다. 정의당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나름의 입지와 지지도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존 주류정당의 대안으로까지 부상하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 원인으로 당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특유의 진보성을 구축하는 대신 대중성에만 치중하다가 진보정당 특유의 선명함이 많이 퇴색하고 기성정당과의 차별성이 모호해진 점, 노회찬/심상정/유시민 등 소수의 스타 정치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고 인재 영입이나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20대 국회 시기쯤 되자 이들도 이미 환갑 줄에 들어섰기 때문에, 빨리 지명도와 자질을 갖춘 후배 정치인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그마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진보세력이 크게 위축될 우려가 있다. 때문에 숨지기 전까지 당 수뇌부에 젊은 당원들을 기용하는 등 세대교체를 진행한다.

진보신당 창당 당시에는 사민주의 우파 성향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이는 사민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친NL계 민중의소리에서의 평가라 걸러들을 여지가 있다.

7.2. 한글 사랑에 앞장선 정치인[편집]

한글 사랑에 앞장선 정치인이었다.

2004년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국회의원 뱃지에 한자로 國이라고 써져있다는 이유로 뱃치 착용을 거부했다.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된 후 약 한 달이 지난 후에는 한글문화연대와 한글사랑 대학생 동아리 학생들로부터 한글로 '국회'라고 쓴 뱃지를 선물받아 착용하고 다녔다. 기사 이러한 노력은 2014년에 결실을 거두어 국회의 뱃지가 한글로 바뀌었다. 기사 정의당의 관악구의원 이기중이 이를 본받아 관악구의원 뱃지를 한글로 바꾸기도 했다. 기사 기사2

2005년 국정감사에서 노회찬 의원은 김선욱 법제처장에게 한자로 된 법률 용어 10개를 제시하고 몇 개나 뜻을 아는지를 질의했다. 법학교수 출신의 법제처장은 10개 중 두 개만 뜻을 대답했고 나머지는 뜻을 대답하지 못했다. 이는 한국의 법률이 일제강점기의 법률 문장을 그대로 베낀 것이 많아 일반 국민들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질의였다.

2012년 국회의원 선서문을 한글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국회측에 전달했고, 국회 사무처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서 서기호 의원은 한글로 선서하는 최초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노회찬은 이를 두고 '국회의원 선서문이 이제 한글로 바뀌었기 때문에 내용을 몰라 (선서를) 못 지켰다는 변명은 통할 수 없다.'고 트위터에 썼다.

7.3. 지역구 세습 논란[편집]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실명공개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한 뒤 보궐선거에 아내인 김지선을 내보낸 행동으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노회찬이 의원직을 상실하여 열린 2013년 재보궐선거에 안철수가 출마를 선언하자 노회찬은 "왜 집안 식구들 먹는 걸 뺏으려고 하는가?”, "동네 빵집으로 어렵게 이룬 상권에 대기업 브랜드가 들어왔다."는 식의 발언으로 안철수를 비판하였다. # 그러나 노원병 지역구는 노회찬 개인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개인 영토도 아니고, 심지어 안철수는 노회찬과 같은 당도 아니며, 여러정당이 경쟁하는 지역구의 선거구도를 동네빵집에 비유한 것은 적절치 못하였다. 누구를 국회의원으로 뽑을지는 노원병 지역주민들이 선택할 일인데, 노원병을 마치 자신의 나와바리인 양 여기며 다른 정파 정치인의 출마를 비난하는 행동은 적절치 못한 행동이다.

게다가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아내인 김지선을 내보낸 것은 지역구 세습 논란을 일으키며 같은 당 서기호 의원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고, 서기호 의원은 선거유세를 거부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반박이 있었는데, 2013년 재보궐선거에서 김지선 후보의 선거 캠프 멘토를 맡았던 표창원은 1. 김지선 후보 자체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분이고 2. 당내 절차에 따라 후보로 선정되었고 3. 거대 후보인 안철수와 경쟁하기 때문에 세습이라고 칭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당시 표창원 인터뷰

민주당의 김근태와 인재근의 사례가 이와 유사하다. 민중당 김창현과 이영순의 사례도 이와 비슷하다.

7.4. 페미니스트로서[편집]

매년 3월 8일 여성의 날마다 주변 여성들에게 장미꽃을 선물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기사 기사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뒤 소감으로 "'남자가 최고의 스펙'인 대한민국의 많은 제도, 문화, 관습을 깨기 위해서라도,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야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발언 출처 링크

YES24에 의하면 노회찬은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홍보대사로 불린다.
노 전 의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평등 사회를 위한 소신을 밝히고 변화를 촉구했다.

지난해 5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5당 원내대표의 만남에서는 대통령 부부에게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선물하며,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앞서 지난 2월 초에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올해 세 권의 소설을 읽는다면 『82년생 김지영』, 이 책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좀 더 인간다운 사회가 되리라 확신한다. 강추!”라고 소개한 바 있다.

이번 6·13지방선거에서는 ‘정의당 여성당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여성 후보자들의 당선을 위해 노력했다. 발족식에서는 “제가 태어나서 맡은 직책 중 가장 영광스러운 직책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맡게 됐다”면서 “나라다운 나라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성평등한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여성의 가사부담, 폭력으로부터의 위협, 경력단절, 차별 등 무수한 문제가 바로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성평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남성이 최고의 스펙'이라는 말은 성차별적인 발언으로 해석되어 많은 이들이 정의당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사실 정의당은 그동안 젊은 남성들에게도 지지를 받는 정당이였다. 그러나, 저 발언을 즈음으로 지지층이 빠졌는데, 결국 이는 정의당에게 대해 많은 젊은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21]

사실 '남자가 최고의 스펙'이라고 여겨지던 시기는 오히려 노회찬와 동년배의 남성들인 기성세대에게나 해당되는 문제고, 세대갈등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상당수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남자가 최고의 스펙'이라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가장 노회찬이 비판 받았던 이유. 오히려 차별받았으면 받았다고 생각하지 스펙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22]

사실 그보다 훨씬 전인 2016년 7월에 터진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에서 정의당이 보여준 행보 때문에 정의당에 호의적이였던 커뮤니티가 돌아섰다며 아쉬워한다는 노회찬의 말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이유로 관련 논평을 철회했을 정도로 정의당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지고 있던 건 기정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노회찬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82년생 김지영>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해 줌으로써, 이런 지나친 친페미니즘의 행보로 인해 젊은 남성 유권자들이 반감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해석이다.[23]

물론 이런 원인들만이 정의당의 패배의 모든 원인은 아니나, 실제로 노회찬 사후 치뤄진 2019년 재보궐선거에서도 여영국이 단일화 끝에 가까스로 노회찬의 지역구를 이어받았지만, 득표율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고, 21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직전 총선과 총 의석은 같았지만 지역구에선 창원시 성산구를 뺏기고 고양시 갑에서 겨우 신승하는 등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유리해진 상황에서도 별 소득을 못 봤다. 이는 여러 논란이 있었던 비례대표 후보자[24]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 위성정당 관련으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사이의 간극이 크게 벌어지면서 교차투표 가능성이 이전보다 매우 줄어들었고, 거기에다가 독자 후보 공천으로 성산구에서는 어부지리로 국힘이 당선되게 만들고, 고양시 갑에선 겨우 신승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새로 선줄된 당 대표의 성추행 사건과 이로 인한 공백, 친민주당도 독자노선도 아닌 애매한 행보[25] 등으로 인해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다만 페미니스트로서의 행보를 따지면 2023년 현재, 친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정의당의 행보나, 토론에서 늘 여성만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논리나 위트없는 똑같은 주장 때문에 페미니스트 정당으로서 노회찬 생전 시절의 정의당을 더 두렵고 위협적인 정당으로 평가하던 시각도 생겨서 소소한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26] 래디컬 페미니즘과 이에 친화적인 방향으로 가는 정의당에 대해 활발히 비판하던 논객활동을 해온 이준석도 노회찬 시절의 정의당이 훨씬 위협적인 상대였음을 여러번 강조했을 정도.

7.5. 불법 정치자금 수수[편집]

2016년 경 예비후보자 신분일 때 정치자금법상 위법한 돈 5천만원 가량을 받은 사실은, 청렴한 이미지의 그에게 큰 심적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총선 때 불법 정치자금 5,000만원을 줬다는데

“총선이 있던 그해 총선 전후로 만난 적도 없고 전화 한 통 한 적이 없다. 어디 보도엔 심지어 국회의원도 아닌 데 강연료로 2,000만원을 줬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저는 이런 부분에 관해선 나중에 문제 삼을 것이다 "

처음에는 위와 같이 의혹을 부인했으나 특검의 수사가 점차 좁혀지면서 끝내 유서로 불법 정치자금 수수를 시인하고 투신하기에 이르렀다. 청탁이 없었다 하더라도 현행법상으로는 분명히 불법임이 틀림없고, 이러한 사실을 국민에게 솔직히 밝히고 책임지지 못하고 거짓으로 부인했다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수수받을 당시 노회찬의 재산은 10억원에 가까웠으니 그리 생활에 쪼들리는 형편도 아니었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하여 노회찬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으며 정봉주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대표적이다.
정 전 의원은 "저도 똥 묻은 처지에 있는 신분이지만 국회의원 299명에게 묻고 싶다"며 "(정치할 경우) 친구 등 주변에서 금전적으로 도와주는 경우가 많은데 '후원금으로 처리하겠다'는 국회의원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후원금 등록을 할 경우 외부에 이 사실이 공개되므로 암묵적으로 정치자금을 건네는 경우가 많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노 전 의원이 4,000만원을 받은 것은 개인적인 부귀영화를 위해 쓰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역구를 하다 보면 등록하지 않고 들어가는 돈이 있다. 노 의원은 그런데 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전 의원은 "국회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하지 않고 비법적으로 쓴 돈 한 푼도 없냐"며 "이런 경우를 알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노 의원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노 의원이 이 문제로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진다. 더 구린 돈 안 받으려고 한 것 아니겠냐"며 "난 내 근황보다 이 얘기를 꼭 하고 싶다. 막상 국회의원을 하면 그렇게 들어가는 돈이 생각보다 많다. 비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불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노회찬을 옹호하거나 동정하는 쪽에서는 정치자금법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 때문에 노회찬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정치자금법은 노회찬 사망 이전부터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개정이 있어 왔었고 정치자금법이 노회찬 본인에게 딱히 불리하게 적용된 것도 아니다. 이미 본인부터가 차떼기와 박스떼기 같은 말도 안되는 뇌물수수 방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정치자금법을 완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던 인물이니만큼, 그런 그가 정치자금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자금법이 문제가 있다는 주장으로 그의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모든 동정 여론이 불법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그가 한 행위가 불법이었음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동정하는 여론도 있다.

7.6. 추모 분위기와 정의당 지지층 집결[편집]

바로 그 전 주 한국갤럽 여론조사상으로 정의당의 지지율이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을 뛰어넘었으나 노회찬의 부재로 인해 다음 총선까지 정의당의 진로는 한치 앞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27] 다만 노회찬 사망 이후 정의당에 입당하거나 후원금을 납부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의당은 고인이 불미스러운 일로 사망한 데다 장례 절차가 진행중인 만큼 당원 가입이나 후원금 증가 수치를 공개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

그럼에도, 노회찬의 죽음 이후 정의당은 7월 30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역대 최고 지지율인 12.5%를 기록했다.# 정의당은 노회찬의 투신과, 이와 연루된 당내 핵심 심상정, 김종대에 대한 추가적인 수사로 인해 더욱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

시간이 좀더 지나자 정의당의 지지율은 이보다 훨씬 더 늘어나, 무려 15%의 지지율을 기록, 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에 등극하는 데에 이르렀다. #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노회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노회찬 의원 알지. 너무 아까워.” 노회찬 의원의 얘길 꺼내자 뒷좌석 승객 상당수는 그를 안다고 했다. 하지만 절반쯤은 아무 표정도, 말도 없었다. 기자는 그들에게 노 의원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얼굴을 묘사했다. “조금은 못생긴…”이라고 말했다가 금세 반박을 당하고 말았다. 노 의원을 ‘안다’ ‘모른다’ 티를 내지 않던 이가 갑자기 팔을 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잘생겼지.” 6411번 버스를 10년째 타고 있다는 윤혜순씨(74·가명)도 말을 보탰다. “훤하게 생겼잖아, 근데 옛날 사진 보니까 자라면서 얼굴이 커진 것 같아.” 웅크리고 앉은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억울해. 왜 나쁜 사람은 잘살고 정직한 사람은 목숨을 던져야 하는지.” 좌석이 이내 고요해졌다.


그러나 추모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정의당의 지지율은 노회찬이 사망하기 전 당 지지율보다 살짝 오른 수준인 평균 9퍼센트 대[28]로 다시 갔고 2019년 2월 즈음에는 6%대 지지율로 원상복귀하였다.#

8. 어록[편집]

기본적으로 재치있는 화법을 구사하지만 그 속엔 촌철살인의 의미가 숨어 있어 진보 진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으로 국회의원으로 재직 당시에도 기회만 되면 재치있는 드립을 치는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여의도 정치판에서 대중친화적이면서도 선출직 공무원의 품위를 잃지 않는 수준의 언어구사력을 가진 정치인은 찾기 힘들다. 무엇보다 감탄이 나오는 건 역시 비유 실력. 하나의 대답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비유를 바로 탁탁 내보내는 능력은 감히 적수가 없을 정도.

이런 말솜씨 덕분에 각종 방송이나 토론의 초대 손님으로 출연 요청을 많이 받는다. 특히 언론인 김어준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어준의 파파이스나 김어준의 뉴스공장블랙하우스에도 고정 출연하였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여전히 노회찬의 어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거기다가 이명박이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기조에 불만을 나타내는 페이스북 글을 게시하자, 노회찬은 그 글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그리고 단순히 재치있는 말뿐만 아니라 하나의 정당 소속의 정치인으로써, 그리고 당시 민심을 가늠하는 척도 역할을 하는 국회의원으로써 남긴 발언 또한 있다는 걸 유념하고 보도록 하자.

대통령 공약 중에서 가장 잘 만든 공약집이 박근혜 대통령 공약집이에요. 세상을 바꾸는 약속. 그거 아주 제 애독서입니다. 제가 그 책이 한 권밖에 없는데 두 권이 있다면 박대통령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본인이 안 읽어본 것 같아.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제목을 바꿔야 해요. 약속을 바꾸는 세상.
솔직히 대통령 후보의 약속중에 안 지켜지는 것이 있잖아요. 뭐 다른 대통령도 그랬고. 그런데 스스로의 약속을 안 지키는 대통령은 많았지만 자기 약속을 정면으로 반대로 위배하는 대통령은 처음이에요.
해고를 어렵게 한다는 게 공약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쉬운 해고를 밀어붙이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은 제1호 법안을 해고를 어렵게 만드는 법안을 내겠습니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을 실현하는. 5개의 공약을 전부 다 박근혜 대통령이 약속을 했지만 (지키지 않은 것들).
이런 것도 있어요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원청 하청 관계 속에서 괴롭힐 때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겠다, 엄청나게 좋은 법인데 이거 안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만 해가지고 진짜 진박이 누구냐! 진박 될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노회찬 진박 선언!

― 2016년 2월 제20대 총선 선거운동 기간 중에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해서 한 말[29]
"한나라당민주당 의원님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이제 저희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50년 동안 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꺼매집니다. 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

― 2004년, KBS 심야토론에서
"노무현, 참 구차하다."
"(노무현은) 대통령을 지내신 분으로서는 정말 부정부패 관리에 있어서 무능력함까지 드러냈다고 보여진다"

2009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태광실업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음을 고백하자, 납득할 수 없다면서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해 발언#
"콜레라균을 이유미가 단독으로 만들었건 합작으로 만들었건 국민의당 분무기로 뿌린 거 아닌가"
"여름에 냉면집 주인이 "나는 대장균에게 속았다, 균이 나를 속였다, 대장균 단독 범행"이라고 얘기하는 격"

―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 관련해서 국민의당 지도부가 단독 범행이라고 결론 내렸을 때 했던 말

― 2012년 총선 당시 허준영 후보의 KTX 노원 연장 공약을 비판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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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임: 야권 연대면 당을 통합하든가 하지 같은 당도 아니면서 왜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죠?
노회찬: '같으면 통합을 해야 하는데 다르기 때문에 연대를 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요, 우리나라랑 일본이랑 사이가 안 좋아도 외계인이 침공하면 힘을 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2012년, SBS 시사토론에서
"학교 앞에 즐겨다니던 분식집 사장이 구청에 소환되니까 (일부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한 것"

고용노동부의 김장겸 체포영장 발부에 반발한 자유한국당이 국회 일정을 보이콧했을 때 했던 말.
"통큰치킨? 몸무게 100kg대의 헤비급선수가 50kg도 안 되는 플라이급 경기에 뛰어드는 것을 '통큰복싱'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칙도 아니고 폭력일 뿐입니다."

― 2010년 12월 통큰치킨 사태때 통큰치킨을 비난하며 트위터에 올린 글#
"'남자가 최고의 스펙'인 대한민국의 많은 제도, 문화, 관습을 깨기 위해서라도,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야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2017년 8월 29일 '예스24 문학학교'에서 남성들에게 소설책 82년생 김지영의 일독을 권하며 위와 같이 발언#
"동네에 파출소 생긴다니까 동네에 폭력배들, 우범자들이 싫어하는 거나 똑같은 거죠."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 삽니까?"

― 2017년 9월 20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공수처 신설안을 반대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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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시대를 엎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지 신석기 시대가 구석기 시대를 보복합니까? 시대가 바뀌었을 뿐이죠.

그렇죠. 청소할 때는 청소를 해야지 청소하는 게 먼지에 대한 보복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됩니까?

― 2018년 1월 2일 JTBC 소셜라이브 인터뷰 中

― 2018년 1월 2일, JTBC의 신년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한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에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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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정책 보복하지 마세요. 4대강도 이미 20조를 넘게 쓴 사업인데 지금 와서 그걸 철거하고, 물을 빼는 게 잘하는 일입니까?
노회찬: 네.
김성태: 에?
(청중 웃음)

― 2018년 1월 2일, JTBC의 신년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한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에게[31]
금단현상으로 괴롭다고 해서 아편을 다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불법정치자금 받은 적 없다. 수사에 당당히 임할 것."

― 드루킹으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한 노회찬의 대답출처"
법은 만민에게 평등하다가 아닌 만명에게만 평등하다

9.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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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1월 11일, 이명박 정당인 늘푸른한국당 창당 시, 축하 인사 차 찾아와서 이재오에게 반갑게 인사한 다음 축사를 낭독하기도 했는데, 그가 이명박에 대해 평소 비판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좀 이례적이다. 하지만 노회찬은 과거에 이명박과도 인연이 있었으며[32], 특히 이재오의 경우 존경하는 운동권 선배 중 한 분이라고 언급했다. 거기다가 이명박과 노회찬 모두 같은 고려대학교 출신. 한편으로 이재오 또한 2013년 당시 안기부 X파일 문제로 노회찬이 의원직을 상실할 때 안타까움을 표현했으며 그의 의원 상실직을 막고자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발의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33] 거기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 노회찬과 심상정이 민주노동당에서 탈퇴한 직후 진보신당을 창당했을 때랑 창당 2년차 때, 이명박이 직접 축하 화환을 보내기까지 했다.[34] 다만,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로는 관계가 다소 소원해진 듯하다.
  •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1999년에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노조를 만들며 노회찬에게도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35] 깜짝 놀란 노회찬이 '월급도 많이 받는 분들이 노조가 왜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대접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고(...) 대한항공 사주 일가가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35분 26초부터
  • 애플빠다. 2009년부터 아이폰을 이용해 왔는데, 사망할 때까지 아이폰을 애용했다.[36] 또한 iPad도 자주 사용하며, 심지어는 노회찬과 아이폰은 구글에서 자동검색으로도 등장한다.
  • 2009년 진보신당 중앙당 당직자 전원에게 아이폰을 선물했던 적이 있다. 비용은 전액 사비로 충당했다(...) 새로운 소통의 도구를 과감하게 도입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한다. 기사
  • 노회찬은 중학교 때부터 조선일보를 즐겨읽던 자칭 '30년 독자'이다. 민주노동당 시절 당차원에서 조선일보의 편파, 왜곡보도를 문제삼아 모든 인터뷰를 거부했을때도 조선일보 본사를 방문하여 직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열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노회찬은 조선일보의 논조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기사의 품질만큼은 최고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2010년 조선일보의 90주년 창간식에도 참여하였다.[38]
  • 서민적인 이미지 때문에 노회찬의 재산이 서민 수준일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신고된 재산만 10억원으로 상류층 수준의 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10억원의 재산은 신고당시를 기준으로 보았을때 '부자'로 불릴 정도의 재산이다.# 노회찬의 재산은 다른 국회의원들의 재산과 비교해도 결코 하위권이 아니었다.## 대학 선배였던 권오을에 따르면, 노회찬이 부산 부잣집 아들이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 정치인들 중에서는 드물게 자녀가 아예 없다. 뒤늦은 나이에 결혼했는데(본인 34세, 아내 36세)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수배되고 몇 년간 교도소에 갔다오는 사이 아내의 가임기가 지나버렸다. 입양이라도 할까 했으나 당시에는 의원도 아니고 해서 수입이 일정치 않아 거절되었고 결국 실패했다.
  • 노회찬의 이 로스쿨에 다닌다는 가짜뉴스가 있었지만 본인이 직접 자식이 없다고 일갈했다. 욕먹는 딸이라도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
  • 개인 성격은 정치계의 코미디언이라 불릴 정도로 유머 감각이 탁월해 주변 사람들을 웃기고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 미디어를 통해 비친 모습으론 비유가 탁월하고 말이 청산유수라서 평소 성격도 활달할 것 같지만 동료 의원들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는 수줍음이 많고 무척 겸손했으며 혼자 사색하는 모습이 많이 목격됐다고 한다.
  •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권오을 전 의원의 대학 후배이다. 권오을은 1957년생으로 노회찬보다 1살 젊었는데, 정작 권오을은 77학번[39], 노회찬은 79학번이라 이리 꼬였던 것. 1982년 권오을이 군 전역을 하고 복학을 하니[40] 노회찬이라는 후배가 있었다고. 권 전 의원의 회고에 따르면 "늘 해박하고 책을 끼고 다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2004년 국회에서 다시 만나기는 하는데 서로 소속된 정당이 많이 다르다 보니[41] 많이 친하게 못 지냈었다고 한다. 노회찬이 사망한 후, 권오을이 그의 조문을 간 후 이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1982년, 군대 제대하고 복학을 하니 고대 정외과에 노회찬이가 있었습니다.
늘 책을 끼고 다니면서 해박하고 달변이었습니다.
부산 부잣집 아들이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04년,
17대 국회에서 다시 만날 땐 반가우면서도 한편 서먹한 분위기였습니다.
그 뒤 말을 트기도 하고 서로 올리기도 하면서 가끔 보는 사이었지만 한국 최고의 국회의원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오늘 조문을 마치고 노 의원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유명을 달리한 노회찬 의원님.
이 시대의 정직하고 양심적인 참 정치인이었습니다.
부정비리에 추상 같았던 잣대를 본인 스스로에게도 들이댄 정치인이었습니다.

이제 돈 걱정 없는 저 세상에서 마음껏 경륜의 정치를 펼치길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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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석희 앵커, 박원순 서울시장과 동갑이다. 해당 영상은 100분 토론 손석희 앵커 하차 특집 때 나온 것으로, 손석희 앵커의 지나친 동안 때문에 노회찬 의원은 졸지에 노안이 돼 버렸다. 게다가 홍의락 의원이 노회찬보다 나이가 1살 많은데, 동안이라 같이 있으면 노안으로 보일 정도. 다만 같은 학교 3년 선배이자 1살 동생이 되는 권오을(1957년생)보다는 동안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 노안에 대한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은 듯 한데 신혼여행 중 만난 여행사 안내원이 옆구리를 쿡쿡 치면서 "아저씨 좋겠네요. 두번째(재혼)죠?"라고 해서 뭐라 말은 못하고 허허 웃기만 했다고 한다. 또 38살 때 경인선 전철에서 노인인 줄 알고 자리를 양보받기도 했다고.
  • 정의당의 개그 페이지 정의당 X-File의 이름은 삼성 X파일 사건에서 따온 것이다. 운영자 중의 한 사람이 전직 노회찬 대학생 팬클럽 회장이었을 정도로 노회찬을 좋아했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인기를 끈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수요일 고정 패널로 출연해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당초에 이 코너는 임시로 설정된 것인데, 일단 시도해 봤다가 큰 인기를 끌면서 고정적인 코너로 정착되었다. 이 코너의 이름은 오랫동안 정해지지 않고 있다가 2017년 5월 이후 노회찬의 이름에서 유래한 '노르가즘'으로 확정되었다. 시국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촌철살인의 비유 덕분에 인기 코너로 자리잡았다. 이 코너에서 논의된 노회찬과 김어준의 대화는 상당수의 언론에서 그대로 기사화돼서 내보낼 정도로 임팩트가 높다.
  • 중요한 정치적 선택들을 함께 취해왔기 때문에 진보정당 지지자들에게 심상정과의 커플링(...)이 꽤 오래 회자되었던 듯하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배우자가 있다. 심상정은 실제로 둘이 진짜 부부인 줄 알았다는 시민도 만난 적이 있다고. 심상정과 노회찬은 오랜 경쟁자 관계이기도 하다. 조직과 강한 리더십을 강조하는 심상정과 개인기의 비중이 강한 노회찬은 여러모로 대조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동지이자 라이벌인 셈이다.
  • 유시민과 친분이 있어, 노유진의 정치카페 및 정의당에서 행적을 같이 하고 있다.
  • 1988년 결혼식 피아노 반주를 고교 동창인 이종걸이 직접 해줬다.#
  • 이명박 정부 시절, 정봉주가 수감되었을 때, 정봉주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는데, "1달 내로 정봉주를 사면복권시키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 이명박을 집어넣겠다"고 연설하기도 했다(...).[42]
  •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5월 광우병 사태를 비꼬며, 심상정과 함께 "광우병보다 대통령이 더 무섭다"는 성명을 냈다.
찬2
  • '투캅스'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및 탤런트 박중훈이 '회찬이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상당히 친한 사이다.[44] 그래서 박중훈이 노원역에서 노회찬의 선거 유세를 도와주기도 했다. 박중훈은 개인적으로 노회찬을 "참 좋은 형"이라고 호평한다고 한다. 또한 노원구 병 국회의원 시절 삼성 관련 폭로에서 벌금형을 받아 국회의원직이 박탈된 적도 있으나, 노원구와의 인연이 매우 깊은 정치인으로, 맹형규법이나 다른 법에 걸리지 않았다면, 노원구에 출마하려 했고, 20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노원구에 출마하려 했으나 권영길의 지역구였던 창원이 걸려있어, 권영길이 노회찬에게 창원 지역구 출마를 요청해서 창원에 출마한 것이라 한다. 실제로 현재 잠시 창원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주거지와 주 활동 장소가 모두 노원구이기도 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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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노회찬
(...)
  • 2017년 3월부터 김어준의 뉴스공장의 수요일 고정 인터뷰이로 출연, 특유의 명쾌한 분석과 촌철살인의 비유 덕분에 뉴스공장의 인기몰이에 한몫 한다. 원래 이 코너는 이름이 없다가 '(노회찬의) 노르가즘'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 손석희가 진행하는 토론에 많이 나와서 그런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내가 진행하고 손석희가 토론하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손석희가 말하면, 자신이 전부 "짧게 해달라"며 말을 끊을 거라고.
  • 조국 교수가 문재인 정부 민정수석으로 발탁되기 전까지 노회찬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기사 조국은 민정수석에서 물러난 후 첫 일정으로 노회찬 1주기 추모전시회 봉사활동을 했다.
  •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일관되게 한미FTA를 반대하며 국정조사를 요구한 바 있다.
  • 흑역사로는 음주운전에 적발되어 2001년 4월 6일,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 동상 설치를 조건부로 찬성한 적이 있다. 지하 100m에 지어서 모두가 밟도록 하면 찬성하겠다고.
  • 2018년 4월 5일, 제7회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과의 창원시장 선거연대를 언급했다. 문제는 창원시장에 20대 국회의원선거 당시 노회찬과의 선거연대를 거부하다가 당지도부의 설득으로 노회찬과 단일화 경선을 치렀다 패배하여 후보를 사퇴한 허성무 역시 창원시장에 후보신청을 한 상태이다. 악연이라고 해야 할지...
노회찬 잔치국수
  •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날 SNS에 잔치국수를 먹는 인증샷을 올리며 이 날을 기념일로 지정하자고 제의한 바 있는데, 노회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일베저장소를 비롯한 보수 성향의 인물과 단체들이 똑같이 잔치국수를 먹는 인증샷을 올리며 고인드립을 일삼기도 했다. 대한애국당 국회의원 조원진의 보좌관은 페이스북에 잔치국수 사진과 함께 "7월 23일을 좌파 척결 기념일로 지정하겠다"라는 조롱 글을 올렸다. 극우 인터넷언론인 뉴스타운 또한 유튜브채널에 출연자들이 잔치국수를 먹으며 고인을 향한 욕설과 조롱을 내뱉는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정치부회의] "잔치국수 먹었다"…고 노회찬 향한 도넘은 조롱. 당연히 범국가적인 피해를 입힌 중범죄자를 공직에서 파면한 것을 반기는 것과 사람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은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기에 그와 같은 행위들은 크게 지탄을 받았다. ############
  • 우파 만화가 윤서인이 페이스북에 조롱조의 비난글을 게시했고,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이 진보의 이중성 운운하며 노회찬을 비꼬는 고인모독성 글을 본인 페이스북에 올렸다. # 홍준표 전 대표 또한 노회찬의 영결식이 진행된 날 “자살이 미화되는 세상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라는 식의 주장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은연중에 노회찬의 죽음과 추모 분위기를 비난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
  • 사망 직후 구급차로 운송되는 모습을 TV조선과 연합뉴스가 생중계하면서 두 언론사는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게다가 조선일보는 부고를 알리는 기사 바로 옆에 고교야구 기사라는 명목으로 샴페인을 터뜨리며 환호하는 사진(...)을 넣어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의도가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강하게 받았다. 또 기자들이 장례식장을 찾은 유명인사들에게 집요하게 심경을 묻는 과잉취재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 은근히 성씨의 한자 표기를 씨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때문에 사망 당시 몇몇 기자들이 확인도 하지 않고 노회찬의 성씨를 씨가 아닌 盧씨로 표기해 기사를 작성해서 비판을 받았다.
  • 노컷뉴스는 23일 오전 노회찬 의원 사망 소식에 정의당과 정치권 반응을 전한 두건의 기사를 페이스북에 링크했는데 문제는 노회찬의 모습을 흑백처리해버린 것. 노회찬이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와 손을 잡은 사진과 정의당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는 모습인데 노 의원만 흑백 처리를 해버린 것였는데 이와 관련해 부적절한 조치라며 강하게 반발하였고 고인을 능욕하는거냐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항의를 받은 노컷뉴스는 결국 사진을 교체했다. #
  • 노회찬이 사망한 후, 그가 2012년 진보정의당의 당대표로 선출되었을 때 했던 일명 '6411 연설'이 화제가 되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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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이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고 있는 줄 의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 이 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노회찬 의원, 2012년 진보정의당 당대표 수락연설)
승객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 의원의 연설을 알지 못했다. 버스가 노들역을 지나 한강변 인근을 달릴 즈음 뒷좌석의 승객 몇몇에게 ‘6411번 버스 연설 영상’을 메시지로 전달했다. “저도 좀 줘 봐요.” 8명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나는 휴대폰이 옛날 거라 저런 거 못 봐.” 아쉬운 듯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 2017년 12월 6일 방송된 tvN의 쿨까당에서 자신이 고교시절 자작한 노래를 불렀었는데, 그의 사망 후 7월 24일 방송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그를 추모하며 다시 이 노래를 소개하여 화제가 되었다. 곡 제목은 '소연가'로, 서정주 시인의 수필 '석남꽃'에 실린 동명의 시에 음을 붙인 곡이다. 25일 인디밴드 '노랑'이 이를 락 버전으로 편곡해 유튜브에 공개했다. 음원은 인디밴드 노랑 공식 블로그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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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망 당일 손석희 앵커는 뉴스룸 앵커브리핑 대신 노 의원의 미공개된 영상을 공개하는가하면 다음날부터 영결식 전날까지 3일 동안의 앵커브리핑을 노 의원과 관련된 내용으로 방송했다. #1 #2 #3 방송을 마치고 난 뒤 직접 조문도 갔고. 그리고 2019년 4월 4일. 2019년 보궐선거에서 노회찬의 빈자리를 채울 후보로 나온 정의당 여영국 후보가 승리하면서 '이제는 탈상할 수 있다'는 이정미 대표의 말을 앵커브리핑에서 전하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1주기 때 tbs에서 제작한 추모 다큐에도 출연했다.
  • 한편, 사망하기 얼마 전에는 대선 직후부터 지속되어온 포퓰리즘 공약 경쟁에 대해 반성어린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 현재는 삭제 당시 한창 논의되고 있던 최저임금 관련 정책들이 비현실적이고 포퓰리즘적이었다고 비판한 것.
  • 노회찬 1주기를 무렵해서 강상구 전 정의당 대변인이 그의 어록을 모은 책을 출판했다. 책 이름은 <언제나, 노회찬 어록>
  • 본인 인스타에 따르면 생전 탈모로 꽤 맘고생을 한 듯 보인다. 단 본인은 인정 안하려고 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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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투명
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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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2] 의원직 사퇴.(제19대 대선 출마)[3] 임기 중 사망[4] 보궐선거에 의한 당선[5] 민주화 운동가나 사회, 노동 운동가가 안장되는 곳이다.[6] 함남 정평문중(定平宗中) 74세 회(會) 항렬.[7] 현재는 노회찬재단 명의로 전환되었다.[8]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무신론자라고 밝혔다.#[9] 의원 선수로는 3선이지만 비례대표였던 초선 시절에는 민주노동당 탈당으로, 재선 시절에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으며 의원직을 상실했고, 3선 임기 도중 사망했기 때문에 단 한번도 임기를 온전히 채운 적이 없다. 기간으로 따지면 국회의원을 임기를 수행한 기간은 총 2,400일로 일반적인 재선 의원 임기(2,922일)보다 적다.[10] 정의당의 노회찬+심상정+초선 비례대표 4명(이정미김종대추혜선윤소하).[11] 2018년 12월 4일 추서[12] 이때 노회찬은 구속된 상태였다.[13] 민주당과 신설 합당[14] 2008.2.11 의원직 상실 (민주노동당 탈당에 의한 의원직 자동상실)[15] 2012년 진보정의당으로 당적변경
2013.2.15 의원직 상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16] 전임자 정몽준 서울특별시장 출마로 인해 사퇴.[17] 2018.7.23 임기 중 사망[18] 17대 총선(비례대표)은 민주노동당의 신당권파인 NLPDR과의 대북관 차이로 탈당하며 의원직을 자동상실하였고, 19대 총선(노원구 병)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였으며, 20대 총선(창원시 성산구)은 특검이 자신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관련 수사를 진행하자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4년 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채운 적이 한번도 없다.[19] 심상정도 강성 세력으로부터 진보정당들을 우경화시켰다고 평가받는 마당에 그보다 우측에 있다고 평가받는 노회찬은 말할 필요도 없다. 노회찬은 대중지향적인 성향의 참여계와 발맞춤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온건한 스타일이라는 것. 심지어 그의 벗이 자유한국당에도 있을 정도로 발이 넓었다. 그러나 2008년 진보신당을 창당했을때 '우리는 대한민국 체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급진적인 지향을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위의 평가는 다분히 방법론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20] 실제로 홍준표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시절 노회찬과 토론에서 붙은 적이 있었는데 토론에서 한 번 맞부딪혀 보고는 노회찬의 언변을 인정했다. 여담이긴 하지만, KBS의 방송을 찾아보면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노회찬과 유시민, 홍준표가 술자리에서 만나서 농담을 주고 받은 적이 있었는데, 동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21] 다만 이는 남성 한정으로, 실제로 20대 남성은 빠져나갔지만 오히려 20대 여성은 유입 요인이 되기도 했다.[22] 물론 실제로는 아직 기업 등지에서 그런 부분이 통용되긴 하다. 이는 공기업도 다를 게 없을 정도. 대표적으로 대한석탄공사 등 일부 기업에서 여성 채용자를 면접에서 점수를 조작하면서까지도 탈락시켜서 논란이 크게 생겼었다.[23] 반면 젊은 여성 유권자인 경우는 오히려 득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실제로 21대 총선 때, 비례대표 한정으론 18세 여성에서 더불어민주당 다음으로 2위가 나온 적 있다.[24] 특히 류호정이 거의 99.9%라고 봐도 무방한데, 바로 대리게임 논란이 있었기 때문[25] 특히 검수완박 관련으로 이런 부분을 많이 보였다. 차라리 아예 민주당과 함께 했거나, 아니면 민주당과 처음부터 거리를 뒀거나 이랬으면 선거에서 저 정도로 처참한 성적을 보여주진 않았을 것이다.[26] 즉 현재의 정의당은 그래도 조직력이 약한 쩌리지만, 그 때의 정의당은 조직력도 있었기에 위협이 있었다는 뜻.[27] 정의당은 심상정과 노회찬, 두 스타 정치인의 이름값에 기대어 버티던 정당이기 때문이다. 이정미(정치인) 당대표가 나름 이름값을 올리곤 있다지만 노회찬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편.[28] 사망 전에는 약 6~8%사이었다.[29] 파파이스 풀버전[30] 1:18:25경[31] 김성태는 이날 일로 혼수성태라는 별명을 얻는다.[32] 이명박은 운동권 경력도 있는 데다 이재오와 매우 가까운지라,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이재오를 통해서도 노회찬, 심상정과의 관계가 비교적 좋았던 듯. 실제로 이명박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바로 심상정을 찾아가서 인사하기도 했었다.[33] 사실 정치적 성향이 상극이어도 인간적으로는 절친한 경우가 제법 많은데, 일례로 자유한국당 정갑윤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강기정 전 의원이 있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때 강기정 의원이 눈물을 쏟으며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발언을 마무리하자 사회를 보던 정갑윤 부의장이 "나는 강 의원과 매우 각별한 사이다. 다음에 또 국회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사랑한다."는 말로 애정을 드러냈을 정도. 평소의 언행을 생각하면 정말 이례적인 상황이다.[34] 진보신당계에 속해 있는 노회찬, 심상정의 경우 예전부터 이명박과 친분이 있었던 점이 있어 이명박이 직접 축하 의사표현을 했던 듯하다. 또한 이명박은 민주노동당과는 인연이 전혀 없었지만,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가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만든 진보신당에는 창당 2년차 행사 때에까지 직접 대통령 명의로 된 축하 화환을 보내준 것을 보면 이들과는 다소 친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이명박의 동반자라고 불릴 정도로 매우 가까운 사이이며 마찬가지로 노회찬, 심상정과 친분이 있는 이재오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한테는 전혀 우호적이지 않던 이명박이 정작 노회찬과 심상정이 주축이 돼서 창당한 진보신당에는 창당 2년차에까지 화환을 보냈을 정도면 예전부터 노회찬, 심상정과는 사적인 친분도 있었다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35] 이 시기의 노회찬은 유명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김포공항이 있는 서울 강서구를 지역 기반으로 삼고 활동했으니 어떻게 어떻게 연이 닿았던 것으로 추측된다.[36] 아이폰은 보안적인 측면에서 다른 스마트폰들보다는 낫기 때문에 이명박문재인박원순 등 많은 정치인들이 애용한다. 다만 갤럭시와 아이폰으로 번갈아 바꿔 가며 쓰는 경우가 많은 타 정치인들과 달리 노회찬은 일관되게 아이폰만 사용한다.[37] 첫 번째 트윗은 지워졌고, 두 번째 트윗은 남아있다.[38] 다만 의외로 조선일보 계열의 경우 민주당계-진보정당계 정치인들과도 친분이 꽤 있는 편이다. 심지어 문재인과도 친분이 있을 정도.[39] 재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0] 이 때 권오을과 노회찬 모두 4학년이었다.[41] 이때 당시 권오을은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다. 2008년 이래 잇달아 낙천하였고, 노회찬 사망 직전인 2018년 이래로 중도보수 정당인 바른미래당 소속이다.[42] 정봉주는 노원구 출생이고, 노회찬도 현재 창원의 국회의원으로 가기 전까지는 노원 쪽에서 활동을 많이 했는데, 이런 연유인지 정봉주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던 듯하다. 실제로 노회찬은 문재인 대통령 당선 직후 국회에서 정봉주 사면복권 관련 기자회견 및 청원에 참여했다.[43] 곰치국을 요리했던 2편은 유튜브 영상이 비공개 처리되었고 다만 당게시판에 올린 링크가 남아있다.[44] 다른 예로는 유인촌과 친한 이명박이라던가, 지석진 및 지상렬과 친한 지상욱이 있다.[45] 특히 노회찬이 운영하던 씽크탱크 명칭도 '마들연구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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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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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노회찬(2017년)
출생1956년 8월 31일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사망2018년 7월 23일(63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성별남성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국적대한민국
본관강화
학력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경력건설국민승리21 정책기획홍보위원장
건설국민승리21 기획위원장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민주노동당 민생특별위원회 위원장
진보신당 대표
통합진보당 공동대변인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정의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정의당 원내대표
부모아버지 노인모
어머니 원태순
형제2남 1녀 중 장남
배우자김지선
자녀
군복무육군일병 소집해제
종교무종교(무신론)
의원 선수3
의원 대수17·19·20
정당정의당
지역구경남 창원시 성산구

노회찬(魯會燦, 1956년 8월 31일 ~ 2018년 7월 23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정계 입문 이전에는 인천 지역 노동자들의 연맹을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후 정계에 입문해 제17·19·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강화이며 부산 출생이다.

1982년 용접 기술을 배워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구속돼 3년 수감되었다. 이후로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3년 독수독과이론에 의거해 의원직을 퇴직당했다가 2016년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창원시 성산구에서 당선되었다. 원외에 있을 때에는 유시민진중권과 함께 팟캐스트 방송 《노유진의 정치카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1][2][3]

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던 중 7월 23일 오전 9시 38분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한 아파트의 17층과 18층 사이에서 투신 자살[4]하였다.

학력[편집]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어머니 원태순의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이며, 교사를 하던 중 전쟁이 터져 1.4 후퇴 때 거제도로 피난한 후 함경남도가 고향인 아버지 노인모를 만났다. 노회찬은 1956년 부산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생 시절부터 첼로를 배웠으며 고교시절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축제에 초청을 받고 첼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는 한 해 개봉영화를 모두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영화광이었다고 한다.[5] 중학시절부터 펜싱과 육상에 뛰어났으나, 구기종목은 전혀 하지 못하는 소년이었다. 또 고등학교 2학년때 무술을 잘한다고 학내에 소문이 퍼져 노지심이라는 별명도 생겼다.[6]

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시험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여 1973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7] 이때부터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삶을 보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3년,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하고 배포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씨알의 소리》, 《다리》와 같은 잡지를 읽게 되었고, 함석헌백기완선우휘 등 저항적 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에서 함께 운동을 했던 동기들이 정광필이종걸 등이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입시에 떨어졌다. 노회찬은 재수를 하지 않고 바로 군대를 지원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청년기[편집]

노동운동[편집]

대학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전념하던 노회찬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는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거리로 나온 민중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 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한다.[8] 이때부터 노회찬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1982년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 했다. 그 뒤 서울부천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위장취업하게 된다. 첫 직장은 기아자동차였으나, 대학생 신분인 것이 탄로나 해고 당한다. 그 뒤 여러 공장을 전전하면서 알게 된 노동자들과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은 정치적인 서클로 발전하게 된다.

원래는 대공장 들어가려고 기아자동차에 시험 쳐서 붙었는데 실수를 해서 예비군 때문에 대학출신이라는 게 밝혀져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인천에 있었던 현대정공 하청 회사에서 아주 초보적인 운동을 하고 있었죠. 그때만 해도 저희는 변혁을 위해서 노동자가 되어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기술도 배웠어요. 청소년 직업학교 다녀서 용접기술을 배웠죠. 그러고 있는데 83년쯤 되니깐 1명 2명 현장에 대학출신이 생기더니 84년 되니깐 더 많은 수로 학교 졸업한 위장취업자들이 오는 거라. 자연스럽게 그 전에 알고 지내던 후배들이 같이 하자 해서 써클을 만들었어요. 그 써클이 그 당시로서는 내가 알기로는 전국에서 젤 컸어요.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컸지. 인민노련이 인천주안부천팀이 모여서 만들어지는데 그중 한 축이 되죠.[9]

대학생 노회찬은 이렇게 노동운동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노회찬은 1982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수배되었다. 긴 수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편집]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뒤이어 터진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 전쟁 이후 억눌려왔던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시민권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출범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변혁 지향적 노동운동은 일종의 '장기 매복'노선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의 의식 수준, 공안 기관의 감시 등을 이유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매우 신중한 활동 노선을 맞이한 듯했으나 대개는 인맥, 학맥에 따른 서클주의적 노동 운동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첫째로 가내 수공업 적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분산된 서클들을 모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동 운동으로 새롭게 개편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둘째로 과학적인 정치 노선과 조직노선으로 노동운동을 통일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셋째로 현장 노동자의 소모임 활동이나 일회적인 경제투쟁을 넘어선 공공연한 정치 선전과 선동 활동이 필요했고, 넷째로 전국적인 노동자 정치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동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인천 지역에서 지역정치 조직을 먼저 만들기로 했던 것입니다.[10]

인민노련은 80년대 운동의 유행이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즉, 정치적 신념을 현실변화에 대한 인식이 없이 맹신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87년 6월 10일 인천 부평에서 창립을 선포했다. 결성 직후 내부 논쟁을 통해 NL진영이 이탈하면서,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의 운동 방향과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민노련은 민중 민주(PD)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인민노련은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즉, 진보정당을 조직의 목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을 대선후보로 추대했으나, 백기완이 야권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게 된다. 이후 인민노련은 <노동계급>, <삼민동맹>[11], <안산노련>등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거듭났다. 인민노련은 당시 존재했던 진보적인 사회운동 조직 중 현장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가장 큰 전위조직이었다.

노회찬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격주간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 활동을 주도하던 중 1989년 12월 24일에 체포된다. 노회찬은 법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1992년 만기 출소한다. 옥중에서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원고를 구상하기도 했다.[12]

체포 1년 전인 1988년 12월,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 김지선(현 여성의 전화 연합 조직위원장, 사단법인 서울강서양천여성의전화 소장, 가정폭력상담소 소장)과 결혼했다.

노회찬과 함께 인민노련 활동을 했던 사람으로는 송영길 민주당 국회의원신지호 한나라당 국회의원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국회의원 등이 있다.

초기 정치활동[편집]

노회찬의 복역 도중 인민노련은 1991년 7월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다. 그러나 창준위 대표 주대환은 훗날 신노선이라 불리는 <진보운동의 신노선>이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이는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는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합법정당으로 조직을 전환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신노선은 논란 끝에 통과되고 한사노당 창준위는 기존의 지하정당 노선을 탈피하고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하게 된다. 1992년에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뒤 민중당과 통합하게 된다. 그러나 통합민중당은 1992년 총선에서 참패하고 해산당한다.

민중당 당권파였던 김문수이재오 등은 진보정당운동을 포기하고 김영삼의 영입을 받아들여 민주자유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진보정당운동을 지속해나가야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1992년 4월 15일 <진보정당추진위원회>(약칭 진정추)를 결성한다. 진정추는 진보정당을 당장 건설하기에 역량이 부족하다는 내부 평가를 내린 뒤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대응하기로 한다.

진보정당 추진위원회[편집]

1992년 초 감옥에서 만기 출소한 노회찬은 진정추의 결정에 따라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백기완 선거대책 본부>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백기완은 23만표, 1%정도의 지지를 얻고 패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실망하고 다른 길을 갔지만 노회찬은 진보정당 건설을 계속하기로 한다.

노 대표는 당시 진보정당의 실패원인을 △노동운동세력의 공식적 지지를 바탕에 두지 못한 점 △민족민주운동진영의 내부 갈등 및 대립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를 꼬집었다.
그는, "노동조합간부 등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긴 했지만 당시 전노협 등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출발한 점은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 "민중당이 창당 순간부터 해산될 때까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진보정당에 동의하지 않은 또 다른 민중운동세력과의 갈등과 대립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지평과 지형이 조성되어야 당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았고, 이걸 공개적으로 글까지 써서 발표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13]

노회찬은 진정추 1기(1992년 4월 ~ 1993년 3월) 사무총장을 거쳐 2~4기 대표를 역임(1995년 9월)한다. 노회찬은 진정추를 "창당에 이르는 안정된 중간단계로서 준정당적 조직"으로 위상을 규정하고 민중정치연합과의 통합을 추진한다. 1995년 9월 25일 진정추는 민중정치연합과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으로 거듭났다. 노회찬은 진보정치연합(이하 진정련)의 창립이후 진정련이 국민승리 21에 통합되기까지 대표를 역임했다.

진정추 활동을 하던 1992년부터 2003년까지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을 역임했다. 노회찬은 매일노동뉴스 발행으로 부채를 많이 지게 되었다. IMF 외환위기때는 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다.[14][15]

노회찬 진정련 대표는 1996년 보수야당 소수파였던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추진한다. 1992년 민중당과 백기완 선거운동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섣부르게 창당했다가 조직적으로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치연합은 정치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직 구성원의 대부분이 민중당을 경험했던 상태라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총선용으로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고요. 진보정치연합한테 1996년 총선은 진보 정당 재 창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역 정치 활동의 기반을 견고히 하는 정도의 훈련이었습니다. 마침 제도 정치권의 반3김 세력, 일부 재야, 시민 단체들의 개혁신당 논의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총선을 위한 '선거연합'으로 규정했습니다. 진보정치연합 대의원 대회는 1996년 총선 방침으로 개혁신당 참가를 결정했습니다. 단 1996년 4월. 제15대 총선이 끝나면 개혁신당에서 철수하여 진보 정당 운동에 매진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개혁신당 참가는 진보 정당 추진 세력들을 보존하고 장기적으로 재 창당에 대비하기 위한 고육지책 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복권, 미공천 등 여러 사정으로단 1명만이 개혁신당 추보로 출마한으로서 이 전술은 실패했습니다.[16]

개혁신당은 총선을 앞두고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이 되었다. 노회찬은 이때 진보정당 추진세력의 대표 자격으로 통합민주당의 당무위원을 잠시 맡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적인 보수야당과의 제휴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참여[편집]

96-97 총파업[17] 이후 민주노총은 보수 야당에 의존적인 기존의 노동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 역시 독자적 진보정당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진정련은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이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논의 끝에 1997년 대선 기구로서 국민승리21이 출범하게 된다. 노회찬은 국민승리21에서 정책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한다.

네, 96년에 국민승리21은 제가 97년 1월 달에 <말>지에다가 이른바 민주민중세력들이 총집결해가지고 97년 대선을 치르고 그 힘으로 진보 정당을 건설하자라는 제안을 사실 했었습니다. 하고 바로 저희는 그 작업에 착수했는데 일단 민주노총은 그해 6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결의를 했습니다. (중략) 농민운동 조직은 아직 뜻은 같이 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또 농민운동이 민주당과 함께 지역에서 지방선거도 같이 하고 여러 가지 해온 관계로 시간이 좀 걸리겠다는 그런 답변을 들었습니다. (중략) 농민 부분은 이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이후에나 이제 참여하게 되는 거죠. (중략) 그다음에 이제 빈민 조직도 그 당시에는 공식적으로는 참여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러나 민주노총이 상당히 큰 힘이 사실 되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전국연합이 참여를 (중략) 전국연합의 대부분의 인사들은 참여를 했습니다.(중략) 이창복 의장을 포함해서 이창복, 천영세, 그다음에 최규엽, 양재덕 이런 분들이 (중략) 유기홍 전 의원도 참여를 사실 했었죠.
그 다음에 당시에 이제 진보정치연합 제가 대표로 있던 진보정치연합. 그래서 실제로 국민승리21 출범 선언문에서도 그렇게 돼있습니다만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그리고 진보정치연합 주요하게는 이 세 조직을 중심으로 하되 폭넓게 그래서 국민승리21에는 뭐 오세철 교수나 김세균 교수 같은 (중략) 좌파 지식인들도 참여를 했고 그 다음에 장기표 씨도 초기에는 참여를 했었습니다. 국민승리21 대통령 선거까지는 참여했고요. 그리고 거기서 권영길 위원장을 이제 대통령 후보로 추대를 해서 선거를 치렀던 거죠.[18]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우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306,026표(득표율, 1.19%)를 득표하였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백기완이 받았던 238,648표(득표율, 1.0%) 보다는 높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국민승리21은 일단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정당작업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1998년부터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원탁회의를 저희들이 제안해서 원탁회의를 만들었고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를 98년 하반기에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99년도에는 이른바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1월 30일 날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죠.[19]

민주노총은 대선 패배 이후 국민승리21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전국연합은 공식적으로 국민승리21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1987년, 1992년과 달리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을 건설을 계속하기로 다짐했다. 국민승리21은 1998년 6월 4일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23명의 당선자를 내어 기사회생하게 된다. 국민승리21은 충분히 준비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에 대응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냈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은 이후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조직이다.

민주노동당 활동[편집]

국민승리21은 1999년 8월 29일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창당준비위원회는 권영길양연수이갑용을 공동대표로 추대하고 본격적인 창당 작업을 시작했다. 노회찬은 정치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았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1월 30일 창당했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초대 부대표를 맡았다. 노회찬은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민주노동당의 대부분의 선거를 지휘했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18%의 저조한 득표를 기록했지만, 울산 등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기초단체장 2, 광역의원 11명 (비례 9명 포함) 당선, 정당득표에서 8.13% 득표를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노회찬은 2002년 3월 민주노동당 정기당대회에서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전까지 당의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노회찬은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비례대표 순위를 뽑는 당내 선거에서 노회찬은 일반명부 4위를 기록해 8번째 비례대표 후보가 되었다. 노회찬은 비례대표로 출마한 제17대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이 지역구에서 4석에 그치고 정당득표율이 3%에 미달해 비례대표를 배정받지 못하면서 10선에 도전한 김종필을 물리치고 국회의원이 되어 3김시대의 막을 내렸다.

노회찬은 2004년 총선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선대본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로 유명세를 얻었고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졌다. 《힘내라 진달래》는 2004년 11월 3일 제 13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

정치 활동[편집]

17대 국회의원[편집]

노회찬은 17대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배치되었다. 노회찬은 2004년 국정감사에서 피감기관이 뽑은 베스트 의원에 선정되었다.[20] 2007년 12월 9일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에서 신사적인 의원 베스트 10에 뽑혔다.[21] 이외에도 2005년 여성이 뽑은 여성친화적인 남성의원 1위[22], 2006년 카드포인트 정치후원금 1위,2006년 진보지식인 대상 설문조사 대권후보 2위[23], 2005년 시민운동가가 뽑은 최우수 의정활동 1위, 2005년 PD들이 뽑은 베스트 의원 1위에 뽑혔다. 여성단체 호주제폐지 감사패, 한글을 빛낸 큰 별, 무지개 인권상, 장애인 차별금지법 감사패, 동남아 쓰나미 국회의원 우수외교상, 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으로 불교계 감사패 등을 수상했다.

노회찬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아온 검사 7인을 공개한 이른바 "삼성 X파일"을 폭로했다. 또한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운동,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 학교급식 직영화, 일반병원까지 6세미만 어린이의 예방접종 무료, 아토피걱정 제로 프로젝트, 지역복지재정 확충을 위한 법 개정 추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추진,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 전월세 세입자 보호법 추진등을 했다.

제 17대 국회 (2004-2008) 4년 임기동안 총 467건의 의안을 발의하였다. 이중 1인발의한 의안은 총 0건이며 본회의에서 가결된 의안은 총 31건이다.[24]

삼성 X파일 사건[편집]

MBC 이상호 기자가 2005년 7월 22일 방송을 통해 삼성 X파일을 공개했다. X파일은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당시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테잎과 이를 분석한 안기부의 보고서를 말한다. X파일에는 1997년 4월부터 10월까지 시시각각 변해가는 당시 정국을 반영한 삼성측의 전방위 로비실태가 담겨있던 것으로 전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X파일에는 삼성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엄청난 뇌물을 건냈으며, 최고위급 검찰 간부들에게 명절대마다 1천만원에서 5백만원의 떡값을 뿌리며 검찰 인맥을 관리했다는 내용등이 포함되어있었다.[25]

그러나 방송에서 뇌물을 받은 검찰들의 실명은 공개되지 않았다. 노회찬은 안기부 X파일을 입수 한 뒤, 2005년 8월 18일 국회 법사위 회의에 앞서 배포한 '안기부 X파일' 관련 보도자료를 통해 옛 안기부 불법 도청테이프에서 삼성그룹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그러나 검찰은 불법으로 금품을 수수한 고위 검사들을 처벌하지 않고 노회찬의원과 MBC 이상호 기자를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26]

노회찬은 1심에서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2009년 12월 4일 열린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8부(부장판사 이민영) 2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난 느낌"이라며 "사필귀정"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오늘 판결은 삼성 X파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며 "이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삼성 관계자, 중앙일보 관계자, 전 현직 검찰, 검경언권 모든 주체들이 삼성 X파일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의 나머지 300여개 녹취 테잎이 아직 서울중앙지검에 남아 있다"면서 "이 문제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경우 유사한 사건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27]

대선과 진보신당 창당[편집]

진보신당 창당대회

노회찬은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 출마를 결정하고 대선 레이스에 참가했다. 노회찬은 "제7공화국 건설운동"을 주제로 당내 경선에 뛰어들었다.[28] 노회찬은 대선 후보 지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다른 두 후보(권영길심상정)보다 높은 인지도와 지지율을 보였지만, 자주파가 다수인 당내에서 조직력은 높지 않았다. 결국 노회찬은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다.[29] 노회찬은 경선 패배후 심상정 후보를 지지했다. 대선 전부터 민주노동당이 가지고 있었던 정파간의 갈등은 대선후보 경선을 거치며 더욱 첨예하게 드러났다. 결국 권영길 후보가 2002년 대선(3.9%) 보다 낮은 3.0%의 지지를 얻고 대선을 참패했다. 대선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이 시작되었다. 당 지도부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심상정 비대위를 출범 시켰다. 그러나 2008년 2월 3일 열린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가 제시한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자주파와 평등파의 동거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을 준비했다. 2008년 3월 16일 진보신당이 창당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 이덕우, 박김영희, 김석준과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18대 국회의원 총선거 노원구 병 국회의원에 출마한 노회찬 후보가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 옆에는 이금희다.

노회찬은 진보신당 창당 직후인 2008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노원구 병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노회찬은 여론조사에서 줄곧 한나라당의 홍정욱 후보에게 앞서, 지역구 당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당 김성환 후보가 13,036표(득표율 16.26%)를 들고 가는 바람에 결국 3.05%(2,343표) 차이로 석패한다. 하지만 노회찬의 선전은 진보 정당의 후보로서 서울에서 상당한 득표를 했다는 점에서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의석이 없는 다른 소규모 정당과는 달리 정당 지지율 2%를 넘겼기에 정당등록취소를 면할 수 있었으며, 정부의 정당보조금도 일부분 받을 수 있었다.

2위 대 1위출마지역득표율득표수(명)
노회찬 대 홍정욱(한나라당)서울특별시 노원구 병40.05%  43.10%32,111 vs 34,454

18대 총선 이후 노회찬의 패배를 아쉬워 하는, 이른바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줄임말) 당원의 증가가 크게 이어졌다. 노회찬은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더 많은 지지자와 당세를 확보하게 되었다.

촛불시위[편집]

총선 이후 진보신당은 내부적으로는 총선용으로 만들어진 정당을 재창당하여 본격적인 틀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앙당 측은 당 홈페이지를 통해 재창당에 대한 일반당원들의 의견을 물었으며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8년 5월 16일에는 재창당에 대한 평당원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인해 광장에 나간 시민들을 당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재창당 논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노회찬은 촛불시위 초기부터 활발하게 참여했다. '진보신당 칼라TV'에 리포터로 자주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촛불시위 초기 시위 배후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격이 이어지자 "촛불시위의 배후가 있다면 이명박 정부"라며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협상 때문에 건강을 걱정하는 국민들이 순수하게 모여서 시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30]

진보신당은 촛불시위를 지원하기 위해 '진보신당 칼라TV' 방송 이외에도 연행자 면회 및 경찰서 항의 방문, 연행 과정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에 대한 법률적 자문, 중간에 참여하고자 하는 시민들을 위한 중앙당 상황실 개설 등의 활동을 했다. 진보신당의 촛불시위는 총선 이후 지못미 효과와 이어져 당원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제2창당과 진보신당 대표 취임[편집]

촛불시위가 사그라들며 당 내부에서는 미뤄둔 '제2창당'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자는 의견이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2008년 9월부터 당내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지역별 순회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토론회에서는 현재 진보신당이 내걸고 있는 '4대 가치'인 평등, 생태, 평화, 연대로는 이념지향을 드러내기 힘들며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통합, 생태주의여성주의의 복수(複數)의 이념 등을 가치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9년 3월 1일에 용산 구민회관에서 열린 첫 정기당대회 1차 대회에서는 현행 공동대표 체제를 임기 2년의 단독대표 체제로 전환하는 조직개편과 당명변경, 당 강령 개정, 재보궐선거 예비후보 선출 등이 결의되었다. 정기당대회 1차 대회의 결의에 따라 3월 23일부터 3월 27일까지 닷새간 당원투표를 실시했고, 그 결과가 3월 29일에 송파 구민회관에서 열린 정기당대회 2차 대회에서 발표되었다. 심상정과 당 대표 경선이 예상됐지만 심상정의 불출마로 단독 출마해서 29일 열린 2차 당대회에서 전 당원을 대상으로 한 직접투표에서 투표율 58.7%에 97.9%의 찬성을 받아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진보신당 대표로 취임하여 "서민복지동맹"을 제안하고, 진보신당의 정책 상품을 개발하여 정책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노동의 정치를 바로 세워 자본의 정치가 독점해온 정치의 역사를 청산하고, 이를 위해 서민 중심형 복지동맹으로 노동의 정치를 강화하겠다.[31]

2009년 4월 29일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에서 울산 북구의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면서 진보신당은 원외정당에서 원내정당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서울시장 출마[편집]

노회찬은 2009년 11월 29일 진보신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것을 선언했고.[32] 2010년 1월 31일 2010년 지방선거 출마후보를 결정하는 서울시당 후보선출 대회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서울"을 모토로 콘크리트 서울이 아닌, 보편적 복지정책을 펼치는 도시를 만들것을 주장했다.

(전략) 사람들의 인정이 사라진 자리에 콘크리트와 생존경쟁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뉴타운이 갈라놓은 동네주민들, 용산의 철거민들은 콘크리트와 생존경쟁이 남겨놓은 오늘날 서울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이렇게 서울 시민들은 삶의 질을 고민하는데, 서울 시장은 서울의 겉모습에만 열중해서야 되겠습니까? 아이는 학원비 걱정하고, 노부모는 병원비 걱정하고 있는데, 코나 높이는 성형수술 하겠다는 것이 지금의 오세훈 서울 시장 아닙니까.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 서울에는 완전히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시민들의 삶의 여유입니다. 시민들의 삶에서 걱정과 근심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시민들에게 보편적 복지와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이에게 복지를 엄마에게 일자리를, 아이와 엄마로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행복한 도시 서울. 이것이 제가 만들고자 하는 변하는 서울입니다.[33]

선거가 끝난 후 3.3%를 득표하는 데 그쳐 서울시장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민주당 지지자들은 노회찬이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하였다면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비판했지만,제18회 국회의원 선거 시절 노회찬은 홍정욱과 벌였던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갈린 표 때문에 졌어도 민주당 후보를 탓한 적이 없었다. 6월 3일부터 6월 5일까지 선거 과정에서 국민참여당-민주노동당 연합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엉뚱하게 노회찬에게 원망의 화살이 돌려지기도 했다. 선거가 끝나고 화살을 맞을대로 다 맞은 한참 후에 노회찬은 나꼼수 팟캐스트에서 한명숙쪽에서 단일화에 대한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고 밝혔다.

대표직 사퇴와 탈당[편집]

노회찬 전 대표는 2010년 진보신당 대의원 회의의 결정으로 진행된 새로운 당 대표단 선거에서 조승수 의원이 3대 대표로 선출되면서 진보신당 대표에서 물러났다.당시 노회찬 전 대표는 모든 당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어 진보신당 대표로서의 마지막 감사인사를 하였다.

2011년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이른바 종북주의 문제로 인하여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논의가 결렬이 되었다. 또한 진보신당 대의원 대회에서 통합에 대한 안건이 상정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이에 노회찬은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당을 탈당해 '새진보정치연대'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새진보연대와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이 3당 합당을 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이후 노회찬은 당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총선 승리와 의원직 상실[편집]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노원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57%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13년 2월 14일 대법원은 이른바 '안기부 X파일'을 입수해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노회찬 공동대표에 대해 상고를 기각, 징역 4월(집행유예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형을 확정했다. 노회찬 전 의원은 2005년 8월,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검사 7인의 이름이 담긴 이른바 '삼성 X파일'을 인터넷에 올렸다.[34] 대법원의 유죄 선고 논리는, 'X파일'에 실린 검사들의 이름을 보도자료를 통해 기자들에게 배포하는 것은 면책 특권에 해당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 알게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규정하는 통신비밀보호법에 근거하여 판결했다.

국민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1인 미디어 시대에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배포하면 면책특권이 적용되고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면 의원직 박탈이라는 시대착오적 궤변으로 대법원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는가. 뇌물을 줄 것을 지시한 재벌그룹 회장, 뇌물수수를 모의한 간부들, 뇌물을 전달한 사람, 뇌물을 받은 떡값 검사들이 모두 억울한 피해자들이고 이들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 저는 의원직을 상실한 만한 죄를 저지른 가해자라는 판결이라며 이는 폐암환자를 수술한다더니 암 걸린 폐는 그냥 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사고와 무엇이 다른가. 국내 최대의 재벌회장이 대선후보에게 거액의 불법정치자금을 건넨 사건이 '공공의 비상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대법원의 해괴망칙한 판단을 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 한국의 사법부에 정의가 있는가, 양심이 있는가, 사법부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고 묻고 싶다.[35]

불법 도청·감청 행위와 이를 공개한 행위를 동일하게 처벌하도록 한 통신비밀법 위반의 경우 벌금형 없이 무조건 실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는데 현역 의원의 경우 통비법 위반 유죄가 인정되면 무조건 의원직을 박탈당하므로 지나치게 과도한 처벌이란 비판이다. 2013년 2월 4일 여야 의원 159명이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는 통비법 개정안을 제출하고 대법원에 선고연기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과반수의 국회의원들이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어 입법 통과가 분명한데 판결을 강행한 것은 오히려 법이 바뀔까봐 한사람을 표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서둘러 재판했다는 의혹이 있다. 또한, 도청된 대화 내용에는 떡값검사 7명의 실명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노회찬은 "유죄판결 받은 통신비밀보호법은 불법 도청된 내용을 공개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떡값검사 7명의 실명은 도청된 내용에 안 나와 있다"며 "다른 언론에서 공개한 이니셜로 추론한 것인데 사실이 아니라면 그 점을 처벌해야지 도청된 내용 공개로 처벌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36] 판사 출신인 서기호 의원은 "통신비밀보호법의 취지는 국민의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것이지 재벌이 검사들에게 떡값을 주는 범죄까지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고 비난했고,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도 "대법원 판결을 접하고 참으로 답답하다. 국회의원이 권력형 비리를 고발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 권력형 부패를 어떻게 청산할까"라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민변은 "노회찬 의원이 공개한 것은 삼성이라는 거대 재벌이 검찰을 돈으로 관리하려고 모의하는 대화내용이었으며, 그 대화에 거론된 검사들의 명단이었다. 공개한 내용에 보호돼야 할 사생활은 전혀 없으며, 오로지 재벌이 돈으로 검찰을 관리하려는 내용뿐이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공적 영역에서조차 표현의 자유, 국민의 알 권리가 아닌 권력집단의 손을 들어 주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며 규탄했다.[37] .[38] 2013년 2월 13일,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의 특별수사팀의 지휘를 맡았던 황교안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됐다. 두 사람은 경기고 72회 동기(1976년 졸업)다.[39][40]

황교안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대해서 그는 "과거 안기부 X파일 사건을 덮는 걸 주도한 사람이 지금 검찰 개혁을 지휘해야 할 법무부 수장으로 지명이 됐다. 같은 시각, 검찰 개혁을 촉구하면서 검찰을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한 나는 국회를 떠나게 됐다"며 부당한 현실을 꼬집었다.[41] 2005년 당시 황교안 중앙지검2차장이 진두지휘한 X 파일 사건 수사팀은 '삼성·떡값 검사 전원 무죄(불기소), 이상호 <문화방송> 기자와 김연광 <월간조선> 편집장과 노회찬의원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 결정 내린 바 있다. 아직도 서울중앙지검에는 당시에 압수되었던 280여 개의 안기부 X파일이 비공개로 남아 있다.[34][42]

저는 오늘 대법원의 판결로 10개월만에 국회의원직을 내려놓고 다시 광야에 서게 되었습니다.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서도 뜨거운 지지로 당선시켜 주신 노원구 상계동 유권자들께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국민들이 저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바로 그런 거대 권력의 비리에 맞서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대법원 판결은 최종심이 아닙니다. 국민의 심판, 역사의 판결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오늘 대법원은 저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지만 국민의 심판대 앞에선 대법원이 뇌물을 주고받은 자들과 함께 피고석에 서게 될 것입니다. 법 앞에 만명만 평등한 오늘의 사법부에 정의가 바로 설 때 한국의 민주주의도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오늘 국회를 떠납니다. 다시 국민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43]

노회찬 '안철수 노원병 출마' 반대의사 표명[편집]

2013년 3월 4일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2013. 4·24 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노원병에 출마하기로 한 데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44] 2013년 3월 3일 안철수 전 교수와의 통화에 대해 "판결에 관해 위로의 얘기를 했고 서로 덕담을 주고받은 짧은 통화였다. 어디에 누가 출마하든가는 본인이 알아서 할 문제일 수 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기자회견을 잡아놓고 1시간 반 전에 저한테 전화해서 그냥 간단한 통화한 뒤에 마치 양해를 구한 것처럼 이렇게 뭐 각본을 짜 맞추듯이 이렇게 하는 것은 새 정치가 아니지 않느냐, 저희들로선 하고 싶지 않은 구태정치다" 라고 비판했다.[45][46]

안 교수가 출마한다면 그 야권후보 들 중에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인데 그럼 가장 어려운 곳에 나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4·24 재보궐 선거에 야권후보들 중 가장 경쟁력이 있는 안 교수가 야권이 의석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역으로 출마하면 야권 의석을 늘이는 데는 기여하지 못하는 게 됩니다. 가난한 집 가장이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올 생각을 해야지 왜 집안 식구들 먹는 걸 뺏으려고 합니까?[47][48]

진보정의당은 "안 전 교수가 국민의 뜻을 수렴하고자 정치복귀를 하는 것은 환영하지만, 그 첫 번째 무대가 노원 병이라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대선 후보를 지낸 소위 거물급 정치인이 진보정치인에 대한 탄압의 결과물인 재보궐 지역에 출마를 한다는 것이 삼성이 동네빵집을 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라고 논평했다.[49]

보궐선거와 20대 총선[편집]

노회찬은 2014년 7월 30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선거과정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와 단일화하여 사실상 야권단일후보로 선거에 나섰다. 출마한 선거구는 서울시 동작구 을이였다. 하지만 48.69%의 득표율을 올렸으나 2위에 그쳐 패배하였다. 1위는 나경원이었고, 노회찬과 표차이는 928표였다.[50][51]

2016년에 있었던 제20대 총선에서는 서울 노원구 병과 경남 창원 성산 중 어느 지역구에 출마할지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노원병은 자신의 옛 지역구이자 안철수 의원의 지역구이며, 경남 창원 성산은 제조업이 발달해 있고 노조 조직률이 높은 지역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창원 성산 출마를 권유하였고, 노 후보는 성산 출마를 결정했다.[52] 여론조사에서 노회찬 후보는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를 이기고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되었다.[53] 노 후보는 당선되어 3선에 성공하였다.

2016년부터 계속 원내대표를 하였다. 2018년 6월 재선출되어 3연임을 하게 되었다.[54]

20대 국회에서 노 의원은 특수활동비 폐지를 주장했다. "내년 예산 편성 때 국회 특수활동비를 제외해야 하고, 올해 예산에서 남은 특수활동비는 각 정당이 매달 사용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고 발언하였고,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를 골자로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55] 이 기조에 따라 정의당은 현재까지도 계속 특활비 폐지를 추진하고 있으며, 노 전 원내대표 몫으로 지급된 2018년 7월 특활비는 사용하지 않았다.[56]

2018년 7월부터는 JTBC <썰전>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사망[편집]

2018년 서울에서 정의당장으로 치러진 노회찬의 장례식
2018년 노회찬 장례식의 빈소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 노회찬 전 원내대표가 정의당에 보낸 유서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의혹을 받았고, 2018년 7월 23일 노 의원은 동생 부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8분쯤 서울 중구 신당동 N아파트 1층 현관 앞에서 노 원내대표가 쓰러져 있는 것을 아파트 경비원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투신장소로 보이는 아파트 17~18층 사이 계단에는 노 원내대표의 외투, 신분증이 포함된 지갑, 정의당 명함, 유서 3통이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유서에는 "드루킹 측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있다. 하지만 청탁과는 관련이 없다" 및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57][58][59] 유서 3통 중 가족에게 보낸 2통은 유가족 의사에 따라 공개하지 않았으며, 정의당에 보낸 1통(상단 인용문)만 공개되었다.[60]

같은 노동운동가 출신인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늘 노동현장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들의 애환과 고충을 대변하고자 했던 진정성이 어떻게 비통한 죽음으로 고하는지 말문을 잇지 못하겠다"고 애도를 표했다.[61]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노회찬 의원이 지향했던 진보와 민주주의 가치들은 후배 정치인들이 그 뜻을 이어받을 것"이라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57]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예정된 SNS 생방송을 취소했다.[62] 빈소가 마련된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여야 정치인들과 노 의원이 출연했던 <썰전> 출연자들, 일반 시민들이 조문을 하였다.[63][64][65] 반면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잘못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또다른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논란이 되었다.[66]

정의당은 노 원내대표의 유가족과 상의하여, 장례 형식은 정의당장(葬)으로 5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장례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이정미 대표가 맡기로 했다.[60] 이후 문희상 국회의장의 제안으로 7월 23~25일 3일간은 정의당장으로 치르고, 26~27일 이틀간은 국회장으로 승격해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67]

7월 27일 오전 9시 세브란스병원에서 발인이 치뤄졌다. 발인에는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심상정 의원, 유시민 작가, 강기갑천호선 전 의원 등이 참석하였다. 발인식에서 이정미 대표와 심상정 의원은 오열했고, 유시민 작가는 마지막 목례를 올리며 예의를 표했다. 영정은 이 후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져 10시부터 영결식이 진행되었으며, 개식-묵념-약력보고-국회의장 추도사-이정미 대표 추도사- 심상정 의원 추도사-유가족 인사-헌화- 퇴장의 순이었다. 이정미 대표는 "노회찬의 정신은 정의당의 정신이 될 것이다" 라며 당의 미래를 결의했고 심상정 의원은 "노회찬 나의 사랑하는 동지, 영원한 동지여" 라고 부르짖으며 오열하였다. 노 전 의원의 조카 노선덕 씨는 유족 인사말에서 "무슨 길을 선택해야 할 지 모른다면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라는 큰아버지의 뜻을 받들겠다고 밝혔다. 영결식 이 후 영정은 노회찬 의원의 사무실인 국회의원회관 510호와 정의당 당사, 국회 건물 등을 둘러본 뒤 오전 11시 30분 국회의사당을 떠났다. 국회의원회관 밖에는 시민들이 모여 "잘가세요" 라고 외치며 노란 꽃과 비행기를 던졌다. 이 날 국회는 조기를 계양하였다.

오후 1시 노 의원의 영정은 서울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 도착하였고 화장은 예정보다 5분 늦게 진행되었다. 운구는 여영국 창원 시의원 등이 진행했고 이정미 대표와 심상정 의원 및 조문객들은 오열하였고, 부인 김지선 전 정의당 고문은 부축을 받으며 나가기도 했다. 2시 30분 화장이 종료된 후 유골은 노 의원의 사위 손에 들려 서울추모공원을 빠져나왔다. 오후 4시부터 장지인 마석모란공원에서 하관식이 진행되었고 하관과 헌화 등의 순서가 이어진 뒤 참석자 전체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며 국회장의 모든 일정이 끝났고, 노 의원은 영면에 들어갔다.

한국갤럽 8월 1주차 여론조사에 의하면, 노 의원의 사망 이후 정의당의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올라가 15%로 최고치를 기록하였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을 넘어선 적이 있다.[68] 9월 9일 정의당은 노회찬재단 설립이 제안되었다고 밝혔다. 제안자는 권영길 · 심상정 · 이정미 등 전현직 진보정당 대표들, 이종걸 ·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유시민 작가 등 18명이다.[69]

이후 2019년 4월 3일 그의 지역구인 창원 성산구에서 보궐선거가 치뤄졌고, 여영국 정의당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선거 다음날 여영국 당선인은 당선증을 가지고 노회찬 의원의 묘소를 찾았다.[70]

논란[편집]

전직 비서의 법무부 취업 특혜 의혹[편집]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와 김진태 의원 등이 노회찬 의원실의 전직 비서의 법무부 취업에 특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노 의원은 "1%라도 채용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면 의원직을 내놓겠다"며 "강원랜드 부정채용 의혹 등 자유한국당 전·현직 의원들이 연관된 채용 부정청탁에 대한 물타기"라고 대응했다. 노 의원의 전 비서 역시 "노 원내대표 본인 또는 의원실 관계자 그 누구도 제가 법무부에 원서를 낸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적어도 채용비리 의혹을 받을 만큼 불성실한 경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고 대응했다.[71]

드루킹으로부터 정치자금 수수[편집]

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을 수사 중인 허익범 특별검사팀은 드루킹 일당이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측에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한 정황을 포착하였다. 2018년 7월 23일 노회찬 의원은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하였다. 그는 유서에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경제적 공진화 모임)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며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는 내용을 남겼다.[72]

상훈[편집]

전과[편집]

  • 국가보안법위반(기타):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3년 - 1990년 6월 23일 선고, 1991년 5월 25일 특별감형, 1998년 8월 15일 특별복권[73]
  • 도로교통법위반(음주운전): 벌금 100만원 - 2001년 4월 6일 선고[73]
  • 통신비밀보호법위반, 명예훼손: 징역4월 집행유예1년, 자격정지1년 - 2011년 10월 28일 선고[73]

저서[편집]

주요 저서[편집]

  •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년)
  •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년)
  • 《나를 기소하라》, (정보와사람, 2008년)
  • 《법은 만명한테만 평등하다》, (정보와사람, 2007년)
  •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년)
  •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 실록》, (일빛, 2004년)-누리집에서 읽을 수 있음.
  •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년)
  • 《지역감정과 정치발전》, (고려대 심포지움,1995년)
  • 《산업별 노동조합과 한국노동조합운동》,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1994년)
  • 《민주노조운동과 전노협》, (거름, 1990년)
  • 《87,88 정치위기와 노동운동》, (거름, 1989년)
  • 《노동자와 노동절》, (석탑, 1983년)

공저[편집]

  • 《당신은 바보 아니면 도둑》, (해피스토리, 2009년)
  •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2》, (리더스북, 2009년)
  • 《10살에 꼭 만나야 할 100명의 직업인》, (조선북스, 2008년)
  • 《열정바이러스》, (바른지식, 2008년)
  • 《어머니》, (매일경제신문사, 2006년)
  • 《신영복 함께 읽기》, (돌배게, 2006년)
  • 《대한민국 50대의 힘》,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년)
  • 《나의 고전 읽기》, (북섬, 2006년)
  • 《벌거벗은 이력서》, (휘즈프레스, 2007년)
  • 《7인 7색, 일곱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곱 개의 세상》, (북라인, 2005년)
  •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 93통》, (랜덤하우스중앙, 2005년)
  • 《우리가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시와 사회, 2004년)
  •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년. ISBN 9788993642889
  •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생각해봤어?》.웅진지식하우스. 2015년. ISBN 9788901203294

가족[편집]

  • 아버지: 노인모
  • 어머니: 원태순
  • 아내: 김지선

같이 보기[편집]

역대 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선거대수직책선거구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2004년총선17대국회의원비례대표민주노동당2,774,061 표
13.03%
비례대표 8번초선
2008년총선18대국회의원서울 노원구 병진보신당32,111 표
40.05%
2위낙선
2010년지방 선거34대시장서울특별시진보신당143,459 표
3.26%
3위낙선민선 5기
2012년총선19대국회의원서울 노원구 병통합진보당52,270 표
57.21%
1위재선
2014년7·30 재보선19대국회의원서울 동작구 을정의당37,382 표
48.69%
2위낙선
2016년총선20대국회의원경남 창원시 성산구정의당61,897 표
51.50%
1위3선

각주[편집]

  1.  삼성공화국, '노회찬'과 '황교안' 운명 갈랐다《미디어오늘》
  2.  또 다른 노회찬 만들 통비법 개정해야《미디어오늘》
  3.  노회찬만 직격탄... 맥빠진 黃 청문회《한국일보》
  4.  경찰 "정의당 노회찬 의원 아파트서 투신 사망"(2보)
  5.  “두 영화광의 만남- 영화감독 장항준과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0일에 확인함.
  6.  정운영, 《노회찬,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랜덤하우스중앙, 61쪽
  7.  1996년 교육과정 개정 이전까지 대한민국에는 고등학교 입시 시험이 존재하였다.
  8.  “노회찬 홈페이지”. 2010년 12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1일에 확인함.
  9.  퍼슨웹 인터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노회찬: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10.  정운영, 《노회찬,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랜덤하우스중앙, 78~79쪽
  11.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
  12.  《여성동아》2004년 9월호, 가사분담, 요리솜씨로 화제 모으는 민주노동당 의원 노회찬
  13.  [1][깨진 링크([2] 과거 내용 찾기])]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 노회찬① 진보정당의 태동과 수난, 백기완 독자후보논쟁, 진보정당의 연이은 실패, 진보정치의 가능성 '국민통합21' 창당
  14.  404 Error ::: 재경일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5.  정운영, 《노회찬,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랜덤하우스중앙, 92~93쪽
  16.  정운영, 《노회찬,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랜덤하우스중앙, 116쪽
  17.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이 국회에서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것에 반대하여 일어난 한국 전쟁이후 최초이자 최대의 총파업.
  18.  [3][깨진 링크([4] 과거 내용 찾기])] 폴리뉴스 정찬대 기자 <한국정당실록 60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 ① 2009-05-04
  19.  [5][깨진 링크([6] 과거 내용 찾기])] 폴리뉴스 정찬대 기자 <한국정당실록 60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 ① 2009-05-04
  20.  국감 '베스트5'초선이 72%
  21.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93547
  22.  한겨레신문, 2005년 4월 17일
  23.  한겨레신문 2006년 1월 2일
  24.  "국회-의안정보시스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5.  노회찬, 《나를 기소하라》17~19쪽
  26.  Web/View/at pg.aspx?CNTN CD=A0000411893[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삼성-X파일'에 대한 검찰 기소를 환영한다 - 오마이뉴스
  27.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2심 무죄판결
  28.  노회찬, 7공화국 11테제 발표 - 레디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9.  노회찬 "저와 심후보 지지는 변화, 개혁의 표" - 레디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0.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10583
  31.  "서민 위한 집권정당으로 만들겠다"
    자본정치→노동정치, 서민복지동맹 - 레디앙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2.  “노회찬의 공감로그 ::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출마선언문 : 사람 사는 서울, 2010년 서울에서부터 정권교체합시다”.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2월 8일에 확인함.
  33.  [7] Archived 2014년 2월 3일 - 웨이백 머신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 수락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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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동작을 무효표 불과 1403표… 나경원-노회찬 929표차, 당락 바뀌었을 수도
  51.  동작을 나경원, 노회찬 후보 '929표'차로 꺾고 당선
  52.  “노회찬, 노원병 대신 창원 성산 출마 확정…다음달 1일 공식 선언”.
  53.  “노회찬, 창원성산구 야권단일후보 확정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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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데일리 오피니언 제317호(2018년 8월 1주)”.
  69.  '노회찬 재단' 설립 본격화, 유시민·김미화·박찬욱 등 참여”. 2018년 9월 9일.
  70.  '노회찬 부활시킨 국민께 감사' 노회찬 묘소 찾은 여영국”. 매일경제. 2019년 4월 4일. 2019년 4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4월 4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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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한지훈 (2018년 7월 23일). “[전문] 노회찬 유서…"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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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편집]

  • 《노회찬의 의정보고서》2004, 2005, 2006, 2007
  •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 노회찬 - 대한민국헌정회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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