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7

이승만 - 나무위키 //이승만/평가 //긍정적//부정적

이승만 - 나무위키

이승만

최근 수정 시각: 
다른 뜻 아이콘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이승만(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 펼치기 · 접기 ]






이승만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국회휘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장






자유당 심볼(백색)자유당 투명




독립협회 검은색 글자





국회휘장(제헌-5대)




대한민국장 약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부장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미국 국기


대만 국기


에티오피아 제국 국기


베트남 공화국 국기


튀르키예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독일 국기


차드 국기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기


베냉 국기


세네갈 국기


코트디부아르 국기


가봉 국기


카메룬 국기


니제르 국기


케냐 국기


우간다 국기


마다가스카르 국기


말레이시아 국기


태국 국기


대만 국기


대만 국기


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


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


엘살바도르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미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태국 국기


태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이승만
李承晩 | Syngman Rhee
이승만 흑백 공식사진
출생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삼리 능안골[2]
(現 황해남도 봉천군 성기리[3])
사망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
하와이 주 호놀룰루 카운티 호놀룰루 시
카이무키 구 마우타네리아 요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대통령묘소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제2대 대통령
제3대 대통령
서명
이승만 서명(영어)
 | 
이승만 서명(한자)
[4]
[ 펼치기 · 접기 ]





이승만대통령초상화
공식 초상화

1. 개요2. 약력3일생4평가5. 묘소6. 선거 이력7. 소속 정당8여담9. 어록10. 관련 자료
10.1. 본인이 저술한 저서10.2. 전문가들의 저서10.3. 올리버의 저서10.4. 기타10.5. 다큐멘터리
11. 대중매체에서
11.1. 실사 매체11.2. 애니메이션11.3. 소설11.4. 게임11.5. 음성 매체
12. 각종 타이틀13. 관련 단체1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취임 선서[14]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대한민국 국회의 초대 국회의장,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

2. 약력[편집]

3. 일생[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
1875년(고종 12년) 조선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연마하였고, 독립협회[29], 만민공동회, YMCA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하에서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퇴위 음모에 가담한 사실이있어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중에 사면되어 을사조약의 국제법적 부당함을 주장하는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돼 활동하였고, 한국의 주권회복을 위한 청원외교를 전개하였다.

이후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이후 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했다.[30]

초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거쳐서 1948년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이후 직선제로 바뀐 1952년 2대 대선과 1956년 3대 대선에서도 2연속으로 도전해 왔던 무소속 조봉암 후보를 이기면서 총 12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 재임 중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 농지개혁, 초등학교 의무교육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대대적인 학교 건립, 평화선 선포 등과 같은 족적을 남겼으며, 6.25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췌 개헌사사오입 개헌 등 독재 권력을 추구하여 국민들의 반발을 샀고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4.19 혁명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이후 미국 하와이에서 말년을 보냈고 1965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나 고국에 안장되었다.

3.1. 이승만 정부[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 정부 문서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5. 묘소[편집]

presiPic1
external/www.seg...
우남(雩南)[31] 이승만 묘소[32]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
서울 4[33]
당선 (1위)
초선[34]
180 (91.84%)
초선[35]
1952
자유당 투명
5,238,769 (74.61%)
재선[36]
1956
5,046,437 (69.98%)
3선
1960
9,633,376 (100.00%)
당선 (1위)
재선거 결정[37]
역대 선거 벽보
[ 펼치기 · 접기 ]
이승만 초대총선
이승만 2대 대선
제3대대선이승만이기붕
이승만 3,4대 대선

7.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독립협회 검은색 글자
1897 - 1898
정계 입문[38]
1898 - 1909
강제 해산[39]
1909 - 1924
창당
1924
탈당[40]
대한인동지회
1924 - 1925
입당
1925
탈당[41]
1925 - 1938
창당
1938 - 1945
정당 해산[42]
1945 - 1946
창당
1946 - 1951
합당[43]
1951
탈당
자유당 투명
1951 - 1960
창당
1960 - 1965
탈당[44]
정계 은퇴
사망

8. 여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여담 문서
 참고하십시오.

9. 어록[편집]

마산 시위는 공산당이 배후 조정해서 일어난 폭동이다. 어린 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건 자식을 방임한 부모들의 책임이다.

315 민주의거에 대한 입장 [45]
공산주의는 콜레라[46]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같이 살 수 없다.[47]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이젠 천하 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

1901년 4월 19일자 제국신문 논설 中
선원들이 술에 취해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눈이 멀고 팔이 부러져서 배를 움직일수록 위태롭게 만들어 물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데 이 배의 선객들은 구조하는 일을 남에게 미뤄두고 무심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하겠는가. 선객들은 남이 건져주기를 바라지 말고 선원들에게 버려두지도 말고 각자 자기 일로 생각하고 자기 힘을 다해야 한다. 우리 대한 삼천리 강산은 곧 2천만 생명을 싣고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이 몰아치는 큰 바다를 외로이 나가는 배와 같다. 우리는 지금 당장 물에 빠져가는 배 안에 앉아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보아야 한다.

저서 <독립정신> 中[48]
대한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이란 두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인민들의 마음속에 독립하려는 마음을 넣어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일가는 일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
사람을 두 가지 부류로 구별할 수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
전국을 통틀어 양반은 1000분의 1도 못된다. 나머지 999는 모두 그 양반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실로 나라에서는 1000분의 999는 다 잃어버리고 앉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서 <독립정신> 中[49]
지금 이 시대에 노예의 풍속을 가진 나라는 대한과 청국밖에 없다. 슬프다, 대한의 형제들이여. 어찌하여 옛 법에 익숙하여 내 나라 내 동포를 소나 말 같이 대접하며 짐승처럼 사고파는가. 미국 사람들은 저들과 생김새가 다른 흑인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 동포끼리 전쟁까지 벌이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이 나라는 동포를 노예로 부림을 당연하게 여겨 노예법을 여태껏 폐지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저서 <독립정신> 中
우리는 우리 집 종들이나 남의 집 하인배들, 낮고 천하게 여기는 부인과 여자들,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어린아이들을 다 한층 올려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사람의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고 사람에게 속한 물건으로만 알던 모든 악습을 버리고, 국법과 올바른 도리 앞에서 그들을 모두 동등한 사람으로 대접하여 따로 서서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국민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50]
모든 정치제도의 성패는 항상 그 나라 백성들의 수준에 달려있다. 굽어 자란 나뭇가지는 갑자기 펴지 못하고, 앉아서만 자란 아이는 하루에 멀리 가지 못한다.

저서 <독립정신> 中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권리만 주장하고 공공의 이익을 등한시한다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이 오히려 권리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저서 <독립정신> 中
교육을 하는 근본 목적은 사람이 가진 지혜와 본성을 거울처럼 맑게 닭아 세상만사를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추게 하여 잘잘못과 우열을 가리게 하려는 것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51]
우리는 선진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를 모두 배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배우는 데 그치지 말고 실행하고 옮겨야 한다. 남들이 흉보고 욕하는 것을 상관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야 한다. 형식적으로 하는 체해서는 소용이 없다. 모범을 보이는 사람은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저서 <독립정신> 中
진실로 만국이 서로 통하여 한 집 같이 섞여 살며 형제같이 사랑하여 정의가 친밀하면 풍속이 스스로 같아지고 인물, 언어, 문자까지도 다 한결같이 될 것이다. 그렇게 지난 100년 동안에 세상이 변해 온 것을 보면 오는 100년에도 또 어떻게 변할지 짐작할 수 있다.

저서 <독립정신> 中
구구절절이 더없이 적실하여 장부의 혈기를 격동시키는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사람은 다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니, 이 한 구절로 말미암아 모든 조목의 근본이 생겼다. 사람마다 나도 남과 같은 권리가 있음을 깨닫고, 그 권리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 결과 이렇듯이 보배로운 기초를 세우게 된 것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
조물주는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권리를 주셨으므로 생명과 자유의 안락한 복을 추구하는 것은 다 남이 빼앗을 수 없는 권리이다. 한 사람이나 한 나라가 자기가 제 일을 하는 것을 자주라 이르며, 따로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은 것을 독립이라 이르는데, 이는 인류로 태어난 자에게 부여된 천품으로서 인간이라면 모두 다 같이 타고난 것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
공산주의는 실패한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재산을 나누면 근로의욕이 꺾인다.
2. 기업가를 없애면 혁신이 이루어지지 못한다.[52]
3. 지식인을 없애면 모든 사람이 우매해진다.
4. 종교를 없애면 도덕이 타락한다.
5. 소련을 조국으로 믿으면 배반당한다.

1923년 태평양잡지 '공산당의 당부당' 中
PACIFISTS ARE LIKE FIFTH COLUMISTS

평화주의자들은 간첩과 같다.

One who believes in the democratic principles of government is essentially an individualist. The power of the government is derived from his citizenship. Therefore, his personal rights and personal freedom are the fundamental basis upon which the structure of the nation is built. Different from totalitarian ideology, which holds that the people should obey the government, a democracy, on the other hand, insists that the people's rights should be protected against any possibility of the government's usurpation.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를 신봉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자다. 정부의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그 위에 한 국가의 구조가 세워지는 기반이 된다. 국민은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체주의 이념과 달리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권리가 정부에 의한 그 어떤 침해의 가능성으로부터도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서 <Japan Inside Out> 中
It has been my task to present the case of Korea as an example to show that she is a victim—the first—of Japan's lust for power. Her destiny cannot be separated from that of the free peoples of the world, nor from the lot of those peoples who once knew freedom and have lost it for a while. At long last—perhaps sooner than we dare to hope—the democratic forces of the world will thrust the Japanese back on their islands, and peace will reign again in the Pacific. In that day Korea will rejoin the ranks of the free and again become known as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한국이야말로 일본의 야욕에 바쳐진 첫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조명하는 것은 나의 오래된 숙업이었다. 한국의 운명은 세계의 자유인들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고, 한 때 자유를 누렸지만 지금 자유를 상실한 자들의 운명과도 분리될 수 없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어쩌면 우리의 바램보다 일찍, 전 세계의 민주주의 진영이 일본을 패망시켜 섬 안으로 밀어넣을 것이고, 태평양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 날이 오면 한국은 자유 국가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고, 다시금 고요한 아침의 땅으로 알려지게 되리라.

저서 <Japan Inside Out> 中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며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천 3백만 동포여!

1942년 6월 13일, VOA 단파방송연설 中
오늘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함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이론상으로 공산주의는 그럴듯하다. 만일 이 주의를 전달하려는 사람들이 단순히 이 주의를 주의대로 전하면 나도 그들을 존경할 것이다. 만일 이 주의가 민주주의와 같이 세계 대중에 복리를 줄 만한 주의가 된다면 아무도 막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자들이 아름다운 이상으로서 양의 가죽을 만들어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야심자를 덮어 씌워 공산주의를 소련의 앞잡이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 사람들에게 각각 정부를 파괴시키고 나라를 크레믈린의 독재하에 넣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당신의 동생일지라도 공산주의의 훈련을 과학적으로 받은 뒤에는 당신의 동생이 아니다. 그 동생은 따라서 소련을 자기의 조국이라고 부르고 국가 공업을 파괴하며, 당신의 정부를 뒤엎고 당신의 동포를 넘겨 준다. 그러면 드디어는 당신의 나라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엔 당신의 동생은 집없는 거지가 되고, 가족은 노예가 되며, 그 뒤에는 이것을 깨달아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1946년 2월, 6주간의 민정 시찰을 위해 지방을 순회하며 돌면서[54]
민주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호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 연설 中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1950년 10월 평양 탈환 후 연설 中[55]
조금만 더 견디면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전후 복구와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고급 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하다. 그 때를 위해 대학 재학생들을 보존시켜야 한다.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1951년 2월 18일 대학생 징집연기조치 시행
배신을 일삼는 일인들은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을 정복하고자 하였소. 그러나 미국은 일본의 경제 구조를 엄청난 규모로 구축해 주었고, 그래서 일부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 중에는 일본만큼 대단한 지원을 받으려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할 수밖에 없다고 농담을 할 정도라오.

대일 미국 원조와 일본경제의 급속한 부흥에 대해 분개하며 남긴 1951년 4월 25일자 메모
전쟁이 끝나면 하루빨리 부흥 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니 그 기초가 되는 철강 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 특히 주택 건설 사업을 위한 함석, 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할 제강 사업 건설 계획을 우선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라. 미국이 돈을 못 내겠다면 정부가 보유한 자체 보유 달러로 공장을 지으라.

1953년 4월 4일 내각에 특별 지시[56]
제너럴 원, 자네는 지금 공산 북한으로의 귀환을 반대하는 애국 청년들을 포로라고 생각하나? 그들은 모두 우리의 동포요, 애국하는 청년들이야, 그들을 구해야 해.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직전, 원용덕 헌병 사령관을 불러 자신의 의도를 내비치면서[a]
나는 내 신분의 권한으로서 전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명령하였다. 나는 이 조치를 단행함에 있어서 유엔군 당국 및 관계 당국과 전연 협의 없이 진행한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제네바 협정 및 인권 옹호의 제원칙하에 반공 포로들은 석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포로 석방 직후 자기 심정을 토로하면서[a]
저 모습이 얼마나 자유스럽고 평화스럽습니까? 나는 반공 포로를 공산 지옥으로 보내느냐, 광명의 이땅에 머무르게 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근 일주일 동안 기도한 끝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번 조처를 감행한 것입니다.

아이젠하워 특사로 파견된 로버트슨 미 국무성 차관보가 휴전을 설득하러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창 밖의 경무대 숲을 날고 있는 까치 한 쌍을 가리키며[a]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당분간 공산압제 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우리들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요,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는 계속 남아있으며 결국 성수되고야 말 것입니다.

1953년 7월 6.25 전쟁 정전협정 직후의 성명[60]
우리는 앞으로  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며, 이 조약은 앞으로 우리를 번영케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미국이 사다주는 비료에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가.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자금으로 공장을 건설하고 기술자를 양성해서 필요한 물자를 국내에서 생산해야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 내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 측과 상의하여 반드시 비료 공장을 지어라.

비료 공장 건설안을 거부한 미국에 대해
내가 산에 올라가 나무 한 토막이라도 베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고 공포했지만 소용이 없어요. 당장 땔감 없어 밥도 못 지어먹을 형편인 국민들에게 나무를 베지 말라고 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말이오. 다른 땔감을 만들어주고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해야 국가의 영이 제대로 서는 것이지, 지금 우리가 석탄 열심히 캐서 연료를 공급해야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 않을 것이오. 내가 어떻게 하든 식량은 미국에서 끌어다 댈 테니 당신은 땔감 문제를 책임지시오. 우리 힘을 합쳐 나라를 살려봅시다. 내 눈에 서울시내에 장작 실은 마차가 다니는 모습이 안 보이게 해 주시오.

1957년경 정인욱 강원탄광 사장을 대한석탄공사 총재로 임명하며[62]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4.19 시위 소식을 듣고 직접 병원을 찾아가 다친 학생들을 위문하며[63][64]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1960년 4월 26일 대통령 하야 성명에서
나는 위로받을 필요가 없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가 있고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이 있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나라의 미래는 밝다.

4.19로 하야 후, 망명 전 이화장에서 머무를 때 대만 장제스 총통이 보낸 위로편지에 대한 답장 中[65]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유언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 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 버겁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서거 직전 마지막 기도

9.1. 초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오다가 오늘에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심당(心當)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기쁨이 극(極)하면 웃음으로 변하여 눈물이 된다는 것을 글에서 보고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요사이 나의 치하(致賀)하는 남녀 동포가 모두 눈물을 씻으며 고개를 돌립니다.

각처에서 축전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눈물을 금하기 어렵다합니다. 나는 본래 나의 감상으로 남에게 촉감(觸感)될 말을 하지 않기로 매양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석간담(木石肝膽)이 아닌만치 뼈에 맺히는 눈물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40년 전에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는 것이요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 이에서 표면(表面)되는 까닭입니다.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一層)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 따라서 여러 동포들도 오늘 한층 더 분발해서 각각 자기의 몸을 잊어버리고 민족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국민된 영광스럽고 신성한 직책을 다 하도록 마음으로 맹서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맡기는 직책은 누구나 한 사람의 힘으로 성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책임을 내가 용감히 부담할 때에 내 기능이나 지혜를 믿고 나서는 것이 결코 아니며 전혀 애국 남녀의 합의 합력함으로만 진행할 수 있는 것을 믿는 바입니다. 이번 우리 총선거의 대성공을 모든 우방들이 칭찬하기에 이른 것은 우리 애국 남녀가 단순한 애국 정신으로 각각 직책을 다한 연고입니다. 그 결과로 국회 성립이 또한 완전무결한 민주주의제로 조직되어 2, 3 정당이 그 안에 대표가 되었고 무소속과 좌익색태(左翼色態)로 주목받은 대의원이 또한 여럿이 있게 된 것입니다.

기왕 경험으로 추측하면 이 많은 국회의원 중에서 사상 충돌로 분쟁 분열을 염려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 문제에 대하여 종종 극열한 쟁론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 의견을 표시하여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 제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대로 종다수 통과된 후에 아무 이의 없이 다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 내에 원만히 채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된 것이니 국회의원 일동과 전문위원 여러분의 애국 성심으로 우리가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국회의장의 책임을 사면하고 국회에서 다시 의장을 선거할 것인데 만일 국회의원 중에서 정부 처장으로 임명될 분이 있게 되면 그 후임자는 각기 소관투표구(所管投票區)에서 갱선(更選)하게 될 것이니 원만히 표결된 후에 의장은 선거할듯하며 그동안은 국회부의장|부의장 두 분이 업무를 대임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의장 두 분이 그동안 의장을 보좌해서 각 방면으로 도와 협의 진행케 하신 것을 또한 감사히 생각하는 바입니다.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조직에 대해서 그간 여러가지로 낭설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다 추측적 언론에 불과하여 며칠 안으로 결정 공포될 때에는 여론상 추측과는 크게 같지 않을 것이니 부언낭설(浮言浪說)을 많이 주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는데 제일 중대히 주의할 바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일 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입니다.

둘째로는 이 기관이 견고해져서 흔들리지 않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회 명예나 정당 단체의 세력이나 또 개인 사정상 관계로 나를 다 초월하고 오직 기능있는 일꾼들과 함께 모여 앉아서 국회에서 정한 법률을 민의대로 진행해나갈 그 사람끼리 모여서 한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 우리는 그 분들을 물색하는 중입니다. 여러분들은 인격이 너무 커서 적은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고 큰 자리를 채울 수 없는 이도 있으나 참으로 큰 사람은 능히 큰 자리에도 채울 수 있고 적은 자리에도 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이 하지 않습니다.

기왕에도 누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므로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절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개과(悔心改過)해서 우리와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하루바삐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복리를 다같이 누리게 하기를 바라며 부탁합니다. 만일 종시(終始) 깨닫지 못하고 분열을 주장해서 의 괴뢰가 되기를 감심(甘心)할진대 인심이 결코 방임치 않을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와 친선해서 평화를 증진하며 외교 통상에 균등한 이익을 같이 누리기를 절대 도모할 것입니다. 교제상 만일 친선에 구별이 있으면 이 구별은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요 타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나라든지 우리에게 친선히 한 나라는 우리가 친선히 대우할 것이요 친선치 않게 우리를 대우하는 나라는 우리도 친선히 대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 40년간에 우리가 국제상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일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우리나라를 찾게 되었은즉 우리가 우리 일도 할 수 있으니 세계 모든 나라들은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 하는 일을 보아서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중량대로 판정해주는 것을 우리가 요청하는 바이니 우리 정부와 민중은 외국의 선전을 중요히 여기어서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로 하여금 우리의 실정을 알려주어서 피차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가 상통하여 교제가 친밀할 것이니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새로운 정부가 절대 필요하지만은 새 정신이 아니고는 결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부패한 정신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룩하지 못하나니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나간 40년 동안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 문명국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남녀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용진(奮鬪勇進)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서 새로운 국가를 만년반석(萬年盤石) 위에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9.2. 제2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제2대 대통령 취임식은 음성 전체가 모두 녹음되었다.[66]
오늘 취임식에서 내가 다시 지게 되는 책임은 내가 할 수만 있었으면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나간 4년 동안에 행한 정부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앞으로 오는 일을 좀 쉽게 되리라고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민국이 이 위험한 때를 당해서 정부 관료나 일반 평민이나 너 나를 물론하고 누구나 각각 나라의 직책과 민족의 사명 외에는 다른 것을 감히 복종할 생각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 생명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당한 노력과 고초를 다 피하고 우리 몸의 평안과 마음의 원하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할 수 있는 대로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할 것입니다. 밭에서는 노력해서 이남 이북의 우리 국민을 먹여 살릴 일을 하든지 전장에 나가서 악독한 원수를 쳐 물리치게 노력하든지 정부 안에서 무슨 직책을 맡아 진행하도록 하든지 각각 실수하거나 실패하고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때는 우리가 다 희생적으로 공헌할 때입니다. 모든 한인남녀는 다같이 사명을 맡아서 고상하고 영웅스러운 공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백만명의 반 수 되는 우리 청년들이 희생적 제단에서 저희 목숨을 바쳐서 냉정한 담량과 백절불굴한 결심으로 무도한 공산당의 침략에서 우리를 구해내려고 해 싸우는 중입니다. 2천만 우리 동포는 가산을 잃어버리고 도로에 방황하니 무염지옥을 가진 적군들이 우리를 정복하자는 희망으로 파괴 소탕한 중에서 우리는 살 길을 구하는 중입니다.

이북의 칠백만 우리 형제자매들은 적색 학정 아래서 피를 흘리고 애통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다 구해내지 못하고는 잠시라도 편안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불의한 전쟁을 참혹한 전제로 우리나라는 거의 다 적색 적지가 되어있으며 이백만 우리 동포가 잔혹한 사상을 당하고 보게된 것입니다. 우리 반도에 한 가족도 비참한 지경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각각 우리의 포악한 원수들의 죄를 징벌하고 우리 파괴된 나라에서 몰아내라는 요청을 하기에 정당한 이유를 아니 가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 환란에 대해서 우리는 한 가지 경력을 배운게 있는 것이니 이것은 곧 동족상애와 호상원조의 뜻을 깊이 배운 것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가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우리 몸을 둘째 생각하든지 아주 잊어버린 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애국심과 통일 정신으로 우리나라는 오늘날에 이르러서 모든 파괴 중에서도 전보다 몇 갑절 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충분히 훈련받은 무장한 국방군이 준비되어서 육지와 해면과 공중에서 모든 방면으로 전투력이 증가되며 무기 무장이 날로 구비해지는 것이니 이 용감한 군인들은 모든 연합군의 사랑과 칭찬을 받으며 우리 원수의 부요함과 두려움을 받고 우리 민중의 영원한 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 국민의 방패가 된 것이지만치 우리는 어디까지든지 이 사람들의 뒤를 바치도록 맹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앞으로 당하는 몇 해 동안은 우리의 해결할 문제가 중대하고 또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위로되는 것은 이 문제를 우리가 혼자 당한 것이 아니고 세계 53개 자유국들이 우리 옆에 서서 나가기를 보증한 것입니다. 또 16개국의 군인들이 우리 땅에서 같이 서서 원수들을 쳐 물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반도에서 일어난 어려운 문제는 세계에서 공동의 투쟁과 충돌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려운 문제를 정복하기에는 우리의 도움과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을 우리 도시와 우리 집에서 싸우느니만치 우리나라를 재건하기에도 또한 다수의 우리의 희생과 우리의 쉬지 않는 노력을 시작하셔야 성취할 것입니다. 우방들이 우리를 도와주는 중이나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직책을 더욱 행할수록 우리 친구들이 더욱 감격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들이 더 희생할 것입니다.

이 두 해 때 두 해까지 난리를 겪은 뒤에는 우리의 첫째 직책은 전쟁 전선에서 행할 일입니다. 우리가 승전해서 원수들을 다 항복 받을 때까지는 우리에게는 쉴 수도 없고 끝도 없는 것입니다. 마크 클라크 장군과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우리에게 선언하기를 우리 땅에서 토굴을 파고 있는 공산군이 어떠한 강력으로 우리를 쳐들어오던지 우리는 능히 정복시킬 결심과 능력이 상당하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 때와 그 후에도 우리의 행할 보편적 우리의 목적은 악독한 원수들이 우리에게 피를 흘리게 한 상처를 합창시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국제연합 제국과 우리의 가장 친절한 우방인 북미합중국이 여러번 선언하기를 자기들의 목적은 우리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거는 즉 대한이 통일 독립 민주국가로 완전히 회복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통일의 목적을 완수해야 되겠다는 구체적 방책은 우리가 확실히 말하기 어려우나 얼마쯤은 우리 원수들의 정략과 계획에 달린 것이요 또 얼마쯤은 우리의 마음 속에 맺힌 결심과 담양과 목적이 얼마나 공고한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한가지 단언하는 것은 우리 한국은 분열되거나 얼마라도 남의 점령을 당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세계도 공산 제국주의를 허락해서 공산자들이 승리한 것을 길러주게 되고는 자유세계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겁니다. 공산 제국주의는 모든 연합국을 대립해서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타도시킬 목적으로 할 것임으로 기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은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전은 모든 나라들의 승전입니다.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세계 모든 자유국민에게 비극적인 실패일 것입니다.

자유세계에 단결심은 누구나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치는 힘을 힘이 클수록 모든 반공국들의 공동 안전을 위해서 단결심이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이 과정은 크레믈린에 있는 모든 불의한 사람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 과정을 잘만 배우게 되면 집단 안전의 길이 우리 앞에 널리 열려서 모든 자유를 원하는 세계 민족들의 한량없는 물산과 번성이 평화의 새 시기를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 국내에서도 모든 내정과 지방의 관계되는 문제들은 앞으로 몇 해 동안에는 국제상의 영향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살 수 없는 물가고등으로 민중의 혈맥을 모두 말려주는 이 문제도 전답에서와 공장과 광산에서 생산력이 충분히 회복되어야 이 문제가 충분히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도시와 촌락과 우리 가정과 생산 근원을 우리를 도와주어서 집단 안전을 위하여 싸우는 모든 나라들이 각각 자기들의 부담으로 도와줄 수량을 충분히 내어주어야 해결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태평양 전체에 대한 문제와 전 세계에 대한 문제는 지금 한국 내에서의 되어가는 문제와 결연되고 있는 것이니 이는 처음으로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담대히 일어나서 근대의 제일 악독한 전쟁을 싸워나가며 공산당 제국주의의 오래 내려오는 것을 끝 맺기로 결심한 까닭입니다. 이 끝은 한국에서 막기로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은 나의 개인의 메세지로 우리 국민과 또 친근한 우리 우방들에게 대해서 한마디 말을 드립니다.

내 평생은 우리나라 운명과 같아도 계속적 투쟁과 인내력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앞에 장애가 어떻게 또 커서 크든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도 여러번 있었으나 계속해 나온 것입니다. 1882년 한미조약 이후로 우리가 밖으로는 각국의 제국주의와 안으로는 타락하여 가는 군주 정부의 학정을 대항할 적에 희망도 보이지 않을 것을 싸워 온 것입니다.

지금와서는 이 싸움 시작하던 모든 선열들이 다 없어지기 전에 우리 민주정부를 세워서 민의의 굳건한 토대위에 세워놓고 세계 모든 결심한 친구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일본의 무력과 무력의 폭력과 궤휼로 우리의 독립문을 닫혀놓은 뒤에는 세계 모든 나라들이 우리를 포기하고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중은 조금도 굴복치 않은 것입니다.

우리 국가의 자유를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우리 의병들이 싸우며 보호하려한 것입니다. 1919년에 만세 운동으로 우리가 우리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중국과 만주에서는 우리 국군의 잔병이 1945년까지 싸워오다가 마지막으로는 공화 민주국의 결실이 되어 지나간 4년 동안에 처음으로 민국 정부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당에게 정치상 굴복을 거절해서 싸움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 군정시대 소련과 교섭해서 여러 어려운 문제를 평화적 담판으로 나라를 해결하고 우리나라를 통일시키자는 주의를 가졌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 자유 국가와 합해서 전쟁으로 결말내기로 시작되고 있은 것이니 이 전쟁도 우리 사람들이 이전에 싸워오던 것 같이 전쟁의 결국을 승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 목적이 우리 이웃의 자유를 없이 하자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여 보유하자는 것이니만치 우리는 실패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간담에 깊이 갈망하며 원하는 바는 내가 60년 동안을 공헌해서 분투노력한 이 나라를 내 생명이 끊어지기 전에 굳건히 안전과 자유와 통일을 민주국가 안에서 성립되는 것을 눈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이번에 소위 정치상 파동이 일대 위기라고 세계에 전파된 것이 실상은 솥 안의 풍파였던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몇몇 외국 친우들과 외국 신문 기자들이 나의 정치적 원수들의 말을 듣고 내가 병력을 이용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민국 정체를 없이하련다는 쾌가 괴이한 언론을 곧이도록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평생 역사와 나의 주장하는 목적을 아는 친우들은 이런 낭설을 듣고 웃었으며 혹은 분개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동포가 나를 전적으로 지지한 힘으로 우리가 반대자들과 대립해서 그 끝을 완전히 맺게 될 적에 오래 싸워오던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대통령 선거권을 국회에 맡겨두지 않고 민중의 직접 투표로 행하기에 이른 것이므로 우리의 민주정체와 주의가 절대로 굳건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통일과 우리의 민주정체를 위해서 나는 앞으로도 나의 생명과 나의 공헌을 다 하기를 다시 선언하는 바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전 민족에게 대하야 각 개인에게 일일이 말하노니 이 공동 목적을 완전히 달성할 때까지 각인의 모든 생각이나 주장을 다 버리고 일심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4천년의 역사를 계속하여 우리의 신성한 조상들이 계계승승하여 내려오며 이 금수강산에서 살며 일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다 일어나서 싸워서 우리의 거룩한 유업을 우리에게 물려주고 주었고 또 앞으로 이 신성한 유업을 보유할 직책을 우리의 손에 맡겨 준 것이니 우리의 오랜 역사상의 어떤 시대를 물론하고 오늘 우리가 당한 형편같이 어려운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이 난리를 대담하게 치루어 갔고 직책을 다 힘껏 행한 것임을 우리가 다 감복하는 바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다 합해서 연속 진행할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일하며 같이 희생하며 우리가 같이 싸워서 마침내 승전 할 것입니다. 승전이 우리 마음과 우리 간담에 있을 동안에는 우리가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다 지나갔으며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오직 승전과 성공일 것입니다.

이것으로 마칩니다.

1952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9.3. 제3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나의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내가 오늘 또 한번 우리 민중 앞에 서서 대통령 취임 선언식을 제3차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동포들이 나의 지도에 신념을 표시한 것에 대해서 내가 겸손한 마음과 영광스러운 뜻으로 평화할 때에나 전쟁 중에서나 또 국내 국외의 관계를 막론하고 우리 민족의 복리를 위해서 내 성심과 능력을 다하기를 맹서하는 바입니다.

이 다음 4년은 우리 역사에 제일 긴절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앞에 당한 여러 가지 큰 문제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당하며 여기까지 나온 역사를 대강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제일 긴급하고 절박한 문제는 통일입니다. 한국이 분렬된 것을 잠시라도 그저 두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불공평한 것이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 반면으로 한국을 통일시키는 것은 유엔의 큰 영예가 될 것이며 또 국제상 관계에 이유와 공의를 믿는 모든 나라에 큰 성공일 것입니다.

우리 국제상의 둘째로 큰 문제는 일본이 공산당과 점점 친밀하여 가는 것입니다. 일본이 사절단을 중공과 한국 이북에 연속 보내서 공산당들과 결속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찰이 날마다 우리나라에 잠입하여 들어오는 공산당들을 잡아드려서 저의들의 행동을 밝히 드려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군기와 재정을 상당히 준비해 가지고 들어와서 우리나라에 난동과 혁명운동을 선동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만일 일본이 북경과 모스코의 공산당들의 뒤를 계속 따라간다면 어떠한 결과가 생길 것입니까. 자유세계가 이 위태한 것을 제때에 각오하고 일어설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내정을 말하자면 내 생각에는 지나간 첫 8년 동안에 민주정체의 진보를 성취한 것은 실로 역사상 드문 성공입니다. 일본의 선전에 빠진 사람들은 한인들이 능히 자주 국가를 진행할 준비가 되었을가를 의심했던 것입니다.

오늘 와서 보면 우리 정부는 삼권분립으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병행해서 발전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전국적으로 또 지방적으로 여러 번 선거를 집행했었는데 매번에 각오가 깊이 박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주권이 민중에게 있다는 것이며 또 우리 유권자들의 권리가 점점 늘어가서 굳건한 토대가 선 것입니다.

사회상이나 교육상의 발전은 막대한 성공입니다. 모든 어려운 문제가 많은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벌서 교육의 나라가 되어서 우리 청년들이 전에 없던 기회를 가지고 무엇이든지 다 배울 수 있을 만치 교육제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한과 질병을 다 이겨냈으며 우리의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다 넘겨주어서 농민들이 농토의 주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부녀들도 날마다 정치 사회 경제상으로 진전해 나가고 있으며 우리 청년들도 새 세계의 안광을 가지고 앞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상 전도도 크게 진전되고 있는 것이니 1953년 하반기까지는 미국의 원조금액을 대부분 임시 구급책에 쓰고 우리나라의 생산력을 회복하는 데는 쓰지 못했던 것이나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그 정책이 고쳐저서 지금은 전쟁에 파괴된 경제를 다시 회복하는데 놀라운 진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주나 춘천같이 전쟁에 전수히 파괴되였던 도시들이 날로 재건축이 되어가는 중이며 지나간 수 년 동안에 새 공장들이 건축되어서 우리 민족이 여러 대를 내려가며 누릴 복리를 양출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간단하게 이 몇 마디로 그 동안에 성취한 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더욱 낙관적으로 결심해서 이 앞에 모든 어려운 문제를 이겨나가자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이 어려운 문제를 다 인정하며 또 우리 민중의 복리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앞으로 장기계획이 필요한 것을 또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장기계획의 순서를 우리가 만들어서 진전시키는 계획은 대략 5개년을 앞두고 해나갈 것인데 그 동안에 우리가 노력해서 성공하려는 조건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중소공업을 많이 발전시키는 것이니 이 공업들을 다 민간에서 자유로 해가도록 만들어서 전국적으로 생산력을 증가해 가지고 국내에서 쓸 것과 해외에 수출할 것을 만들며 동시에 직업을 마련해서 실업자가 없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발명하는 재능과 용진력이 충분함으로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한 것이 양편으로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은행의 필요를 알아서 그리로 달하여 모든 영업을 진전시킬 것이요 중소공업에 대해서는 융자를 해주는 제도를 펴놓게 하며 남은 귀속재산을 속히 다 팔아서 민간 사유물을 만들 것이니 나는 대통령의 책임으로 이 방면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쓸 것이고 또 국회에 요청해서 애국성심으로 협조하며 이 여러 가지 긴요한 사업을 속히 또 정밀하게 도달하여 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쌀과 다른 곡식의 생산 수량이 늘도록 만들기를 힘쓸 것이니 이것은 수리사업과 개간사업을 개량해서 나가야 할 것이며 보통 물건값 수준에는 곡식 값이 표준이 되는 것이니 생산을 증가하는 것이 경제의 안전을 성취하고 또 유지하게 만드는 근본이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정부의 공무원과 봉급 생활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버는 것을 가지고 자기와 자기 가족들이 살도록 해주어야 될 것이며 또 여기에 대해서 특히 내가 한 가지 말하려는 것은 우리 국군의 식량 부식물을 좀 더 늘여서 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전력하려는 것입니다.

또 둘째로는 우리나라 농민들을 위해서 재정 순환하는 데와 물건 사고 파는데 새 제도와 개량된 방식을 실시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농림부에서 전국농민회 조직을 완성하기에 힘쓰고 있는 중이니 이것이 성공되면 이전 농회에 속했던 재산을 다 그리로 넘겨줄 것입니다. 그전 농회는 전쟁 전에 해산을 시켜서 그 재산이 농림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인데 새 농민화가 조직된 후에는 그 재산도 농민회에 넘길 것입니다. 이 새 농민회는 단순히 농업관계 뿐이고 정치상에는 아무 관계가 없게 만들 것이며 이 회의 권한은 농업은행을 주식회사로 차지하고 또 주장할 것이며 이 회에서 비료 발매권과 미곡 매매권리를 가지게 되며 또 농민에게 융자를 주어 농민들이 적은 변리로 돈을 얻어 쓰도록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이 순서 하에서는 농민들이 고리대금을 쓸 필요가 없게 되며 또 우리가 해마다 봄과 여름을 당해서 쌀값이 올라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경제안전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벌써 많이 교정된 것인데 작년에 미국과 협의해서 달라 환산률을 500 대 1로 정한 것이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쌀과 다른 곡식의 생산을 늘이고 공장에서는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또 농산물을 매매하는 제도와 물산수출을 전적으로 장려하자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해외에서 곡식을 수입할 적에는 그 물건이 제때에 들어오게 만들어야 될 것이니 이것이 제때에 들어오지 못하면 쌀값이 졸지에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환산률을 절대로 지켜서 전국이 경제상으로 이익을 보게 되는 것을 국민들이 다 도와야 될 것이니 이것은 국민된 자의 직책이며 우리 국민이 다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해갈 정책이 광대한 것이나 성공할 능력이 자재한 것이며 미국이 우리의 재건축하는 계획을 양해하고 동정해서 도웁는 힘으로 우리의 목적을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민중의 복리를 위해서 성심으로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정책인 것이니 우리는 희생적 정신으로 합동해서 전력을 다하여 진행할 것이며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에는 나라를 제일 먼저 도와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행정상의 정신이며 또 국회와 모든 국민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내가 우리 사랑하는 동포들에게 일르고저 하는 말은 지금 세계가 다 공존주의의 함정에 들어가는 것 같으나 이것은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다시 새로 맹서하노니 우리들은 오직 독립으로 또 통일민주국으로 세운 한국을 위해서 우리들은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을 공헌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의 독립이 없으면 우리 개인의 자유가 없는 것이며 우리들은 자유가 없는 생명보다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서 밑에서 다 합동으로 나아가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것을 나는 아는 바입니다.

1956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10. 관련 자료[편집]

이승만은 1800년대 후반부터 신문 발행에 참여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생애 동안 여러 저서와 논설 등을 남긴 바 있다. 그래서 아래에 대략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2019년부터 이승만 전집도 차례로 발간되고 있다. 동시대 다른 인물들의 전집 발간이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완료된 것과 달리 이승만 전집 발간은 뒤늦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부터 잘 알려졌던 저작들은 이승만 재평가 흐름 이후 산발적으로 출간되어 왔고, 이를 하나의 전집으로 엮어 나오려는 시도가 있지는 않았다. 또한 이화장에 있던 일기와 서간집 등 방대한 분량의 이승만 자료들이 1990년대 중반 이후에서야 학계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10.1. 본인이 저술한 저서[편집]

이승만과 그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 읽어봐야 할 주요 서적들이다. 이승만을 다룬 책과 연구 논문들은 많지만, 아직까지 만 90세를 살았던 이승만의 생애에 대해서 세밀한 연구는 많이 부족한 편이다. 특히 이승만과 관련된 자료들에 대해서 치밀한 고증을 한 연구는 많지 않은 편이다.

2016년부터 ‘우남이승만전집발간위원회’와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의 주도 하에 『우남 이승만 전집』 발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총 35권 발간 예정이다.
이승만이 독립협회 활동하던 중에 고종의 양위 문제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옥중인 1904년에 저술한 책이다. 집필 동기는 러일전쟁으로 나라가 더욱 위태로워지면서 민족 독립에 대한 조선 민중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04년부터 대한제국의 내정에 개입한 일본으로 인해 국내에선 출판되지 못하였고, 1910년 2월 10일에 미국 로스엔젤레스 대동신서관에서 발간되었다. 조선 대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순한글로 썼다. 일제강점기 내내 금서로 지정되었고, 4.19 혁명 뒤에 절판되었다가 1993년에 다시 발간되었다. 당시 지식인으로서 국민의 계몽에 앞장서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 한국교회핍박
1913년 4월 미국 하와이에서 105인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발간한 책이다. 105인 사건의 경위와 배경, 재판 과정과 사건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여론 등을 소개하며 궁극적으로 105인 사건이 일제가 한국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조작한 ‘한국 교회 핍박 사건’이었다고 설명한다.
  • 체역집
이승만이 한성감옥서에 갇혀 있던 시기인 1900년 봄부터 1903년 9월 15일까지 지은 한시를 정서하여 편집한 것이다. 제목을 ‘체역집(替役集)’이라고 붙인 까닭은 “신체적인 노역[役]을 정신적인 노역으로 바꾸겠다[替]”는 뜻이다. 이 시를 시집 마지막 장에 편집한 것은 정부가 내린 판결에 따라 감옥 안에서 노역하였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까지 바뀌지는 않았다는 자부심을 보인 것이다. 국문학사, 한문학사에서 가치가 있는 책이다.
  • 옥중잡기
이승만이 한섬감옥서 옥중에서 남긴 문건을 정리한 책이다. 한문(21건), 영문 (12건), 국한문(7건)으로 작성된 한 논설, 에세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청년 이승만 자서전
1912년에 집필한 자서전이다. 과거 자신이 배재학당을 다니던 중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었고 자신을 비롯한 배재학당 출신이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불행한 연결'이라고 표현하며 독립협회 활동의 과오를 인정하는 내용도 쓰여있다.
  • 청일전기
청일전쟁이 끝난지 5년 후이자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있던 1900년 옥중에서 탈고하여 1917년 하와이에서 출판한 책이다. 청일전쟁에 대한 중국의 "중동전기본말"을 발췌, 번역하고 거기에 자신의 논설을 덧붙여 만들었다. 즉, 일종의 편역서. 조선의 대중들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순한글로 썼다.
이승만이 1941년 7월에 미국에서 출판한 책으로, 일본 제국주의 사상을 낱낱이 분석하여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저술하였다. 일본 신화부터 대략적으로 설명하며 일본인들의 성전(聖戰)사명과 전쟁 심리를 분석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의 대비를 하지 않는 미국의 평화주의자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처음 출판될 당시엔 미국인들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그로부터 약 5개월 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일으켜 일본과 미국 간 전쟁이 발발하자 그때서야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 이승만 일기#
연세대 이승만연구원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공동으로 펴낸 책이다. 이승만이 1904년 ~ 1934년과 1944년에 썼던 영문 일기다. 한성감옥에서 나온 뒤 미국으로 출발하는 시점부터 시작하는데, 마치 메모의 느낌으로 매우 간략하게 기재되다가 1933년 들어서는 굉장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신영한사전
이승만은 한성감옥서 수감 시절인 1903년 4월부터 1904년 2월까지 옥중에서 『신영한사전』 편찬을 시도했다.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되었지만,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전과는 명확히 대비되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이승만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사전을 집필했다. 둘 째, 이승만은 정확한 발음을 표시하기 위해 독창적인 방식을 고안했다. 셋째, 이승만은 표제어 정의에서도 기존의 선교사들이 발간한 사전과는 다른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의 영한사전은 영어의 쓰임새에 대한 순수한 교육 철학적 관점에서 집필이 시작되었으며, 사전의 구성과 내용은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언어적 통찰력을 반영하면서도 최대한 사전 사용 자의 이해력을 고양하도록 기술되었다.

10.2. 전문가들의 저서[편집]

실제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들이 쓴 책이다.

◈ 유영익의 저서
  •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 생애 사상 업적의 새로운 조명』 (학술서적)
  •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학술서적)
  •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교양서)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연세대 교수 시절을 포함하여 거의 일평생을 이승만 연구를 천착해온 학자이며, 1989년 탈냉전 이후 학계 일각에서 이승만에 대해 재평가하는 연구를 선도하였다. 이승만과 관련된 1차 자료들을 두루 섭렵하여 저술과 연구를 남기고 있다. 특히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로부터 이승만이 소장하고 있거나 개인적으로 수집한 편지, 문서, 수첩, 사진 등과 같은 방대한 문서군들을 기증받아서, 이를 바탕으로 이승만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를 진행했다.[67]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이승만의 전반에 대한 책이고, 『젊은 날의 이승만』은 청년기 이승만의 사상에 관한 책으로 이승만이 24세부터 29세까지 한성감옥에 수감된 시기에 집필했던 옥중잡기를 바탕으로 그의 초기 생애와 사상을 분석했다. 옥중잡기의 원문을 원본과 일일이 대조해가며 번역하고 그 해제를 썼다는 것이 특징이다. (월간조선 2008년 11월호 기사)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승만 연구를 종합하고 보완하여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이라는 책을 썼는데 대중들이 읽기에도 어렵지 않은 책이다.

◈ 고정휴의 저서
  •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학술서적)
고정휴의 이 책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차분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책이다. 3.1 운동 시기, 한성정부 시기 이승만의 행적,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조직과 활동, 이승만의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이승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외교활동 등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승만과 구미위원부,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알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봐야할 책이다. 이 밖에도 고정휴는 이승만의 독립운동활동과 사상에 대해서 상당한 연구를 남겼다.

◈ 오영섭의 연구
  • 오영섭, 「상해 임정내 이승만 통신원들의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52집(2007) (학술논문)
  • 오영섭, 「이승만의 『청일전기』 번역·간행과 자주독립론」, 『한국사학사학보』 22(2010) (학술논문)
  • 오영섭, 「1910-1920년대 태평양잡지에 나타난 이승만의 정치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70집(2012) (학술논문)
  • 오영섭,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위임통치 청원논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1집(2012) (학술논문)
  • 오영섭, 「이승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치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61집(2009) (학술논문)
  • 오영섭, 「대한민국임시정부 두 대통령 이승만과 박은식의 관계」, 『숭실사학』 제32집(2014) (학술논문)
  • 오영섭, 「이승만의 상해 체류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91집(2017) (학술논문)
오영섭은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 유영익의 제자이다. 이승만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및 자료정리 및 번역출간 등을 수행해왔다. 이승만에 대해서 단독저서로 낸 책은 아직까지 없지만 공저 및 학술지 논문을 통해서 이승만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해오고 있다.

◈ 이정식의 저서
  • 이정식, 『이승만의 청년시절』 (학술서적)
  • 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학술서적)
이정식 경희대 교수는 비교적 이승만을 중립적 시각에서 연구했으며, 특히 《이승만의 청년시절》에선 올리버가 소장한 이승만 관련 문건을 토대로 저술했다. 또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에선 서재필-김옥균-박영효-박지원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속성'을 강조했다.

◈ 정병준의 저서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학술서적)
정병준이 출판한 "우남 이승만 연구"도 일독할 만하다. 정병준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으로 석사 학위를, 이승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전쟁과 제1공화국 시기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출판사 '역사비평사'에서 한국학연구총서의 일환으로 2005년 출간한 이 책은 개화기,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제1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이승만의 행적을 담고 있다.

◈ 손세일의 저서
  •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전 7권) (교양서)
손세일은 학자 출신은 아니지만[68]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비교 연구에 오랫동안 천착하며 이 책 역시도 선행 연구 및 자료들을 소화해낸 책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심인물이자 한국독립운동사의 두 거목인 이승만과 김구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1969년 신동아에서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글을 처음으로 투고한 이래, 이후 월간조선 연재활동 및 단행본 출간을 통해서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 김명섭의 연구
  • 김명섭·김석원, 「김구와 이승만의 지정인식 :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제43집 제3호(2009). (학술논문)
  • 김명섭·김석원, 「독립의 지정학: 대한제국(1897-1910) 시기 이승만의 지정학적 인식과 개신교」, 『한국정치학회보』 제42집 제4호(2008). (학술논문)
  • 김명섭·김주희, 「20세기 초 동북아 반일(反日) 민족지도자의 반공(反共): 이승만과 장개석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4집 2호(2013). (학술논문)
  • 김명섭·김정민, 「워싱턴회의 시기 이승만의 외교활동과 신문 스크랩, 1921-1922」, 『한국정치학회보』 제51집 제2호(2017). (학술논문)
  • 유지윤·김명섭, 「프레데릭 B. 해리스의 한국관련 활동: 이승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40집 1호(2018). (학술논문)
  • 김정민·김명섭, 「만주사변 발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연맹외교: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제53집 제1호(2019). (학술논문)
  • 한서영·김명섭, 「미국 유학 시기 이승만 강연활동의 양상과 함의」, 『국제정치논총』 제59집 2호(2019). (학술논문)
  • 김명섭, 「『독립졍신』에 대한 서지학적 재조명」,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41집 1호(2019). (학술논문)
  • 김명섭·박재원,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하와이 대한인 독립운동: 이승만과 박용만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제61집 4호(2021). (학술논문)
  • 김명섭·김민식, 「전쟁과 연설 : 6ㆍ25전쟁 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에 관한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제56집 제1호(2022). (학술논문)
김명섭은 한국정치외교사 연구자로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석사과정 시절까지만 해도 이승만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고 『해방전후사의 인식』 집필에도 참여했으나, 지금은 한국근현대사에서 이승만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있는 학자이다.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장을 지냈으며, 제자들과 함께 이승만에 대한 많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아직 이승만에 관한 단행본을 출간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독립노선, 외교활동과 연설, 지정인식, 저술 등에 대한 광범한 연구를 하고 있다.

◈ 서중석의 저서
  •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학술서적)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교양서)
서중석은 한국현대사의 대표적인 학자로 이승만을 가장 강도높게 비판하는 인물이다. 굳이 정치적 성향을 들이댄다면 민족주의 정도로 분류된다.[69] 다만, 본래 이승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며, 이승만에 관한 연구로는 해방 이후로 국한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아울러 유영익, 고정휴, 오영섭, 정병준 등의 학자들과 달리 언론, 잡지와 성명문 등 국내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를 수행해 왔으며, 이승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1차자료 및 미국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를 많이 진행하지는 않았다.

◈ 공저
  • 송복 외, 『저서를 통해 본 이승만의 정치사상과 현실인식』 (학술서적)
  • 유영익 외,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술서적)
  • 김영호 외, 『이승만과 6.25전쟁』 (학술서적)
  • 최상오, 홍선표 외,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 (학술서적)
  • 유영익 외, 『이승만 연구』 (학술서적)
  • 오영섭, 홍선표 외, 『이승만과 하와이 한인사회』 (학술서적)
  • 이주영 외, 『이승만 연구의 흐름과 쟁점』 (학술서적)

10.3. 올리버의 저서[편집]

올리버(Robert T. Oliver)는 이승만의 친구이자 공보·선전분야 고문이자 개인 대변인이었다. 올리버는 연설소통학(Speech Communication)을 전공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원제: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원서
올리버가 1954년에 미국에서 낸 책인데 한글로 번역되었다.
  • 박마리아 역, 『리승만박사전: 신비에 싸인 인물』, 합동도서주식회사, 1956.
  • 황정일 역,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 건국대학교출판부, 2002.
  • 서정락 역,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단석연구원, 2009.

◈ 이승만의 대미투쟁 (원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승만과 주고받은 서한전보 등 원사료 중심으로 쓰여져 있으며 이승만이 미국의 정책입안자들과 벌여온 투쟁을 보여준다.
  • 박일영 역, 『대한민국 건국의 내막』(전 2권), 계명사, 1998.
  • 한준석 역, 『이승만의 대미투쟁: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1942-1960』 상·하, 비봉출판사, 2013.

10.4. 기타[편집]

◈ 회고록 부류

이승만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던 인물들의 회고록은 방대한 양의 사료들과 비화들을 제공하여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아카이브는 전국 각 지역 도서관 내에 지정된 원문 PC를 사용하여 무료로 볼 수 있고, 본문 검색과 저가에 프린트까지 가능하다. 관외 무료인 책들은 도서관이 아닌 어느 PC에서도 열람이 가능하다.
임영신은 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 참상을 담은 사진들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러 도미한 20대부터 그와 독립운동을 같이 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 제헌 국회의원이자 초대 상공부 장관을 맡은 바 있다.
임병직은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부터 이승만의 비서로 발탁되어 시체가 들은 관이 가득한 배를 타고 이승만과 함께 상해로 밀항했던 인물이다. 해방 이후, 미국에 머무르면서 UN 대사외교부장관 역할을 수행하며 무수한 업적을 남겼다. 경무대와 핫라인으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전보로 실시간 통신하면서 남긴 희귀한 사료들을 책에서 다수 소개한다.
허정은 1920년대부터 미국에 유학하면서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활동을 적극 도왔으며 초대 교통부장관, 사회부장관, 서울시장 등을 역임하고 2공화국 출범 전 과도정부 수반으로서 가장 중요한 4.19 전후의 비화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원순은 1910년대 하와이로 건너가 처음에는 박용만의 비서로서 활동하다가 그의 죽음 이후 이승만의 요청으로 동지회 회장을 역임하고 그의 아내 이매리는 한인기독학원 원장을 이승만을 대신해 맡아주는 등 하와이에서의 이승만에 대한 숨겨진 일화들을 많이 드러내준다. 1890년 생인 그는 거의 100세까지 살면서 88올림픽까지 보았기에, 구한말부터 대한민국이 번영하는 초기 모습까지 지켜본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범석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대첩을 치룬 독립운동가로서 청산리 대첩 직후 이승만과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후에도 자주 서신과 자금으로 이승만은 그를 많이 도와주었으며, 해방 후에는 초대 국무총리이자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을 지내며 대한민국 제1공화국 내각 조각의 야화라든지, 부산 정치파동과 자유당 창당 등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윤치영은 1923년, YMCA 야구단으로 하와이로 가서 이승만과 함께 여러 사업들 다년간 진행시켰다. 동지회 간부, 《태평양잡지》 주필로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유학을 위해 워싱턴으로 가서는 1937년 귀국하기까지 구미위원부 업무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에는 돈암장에 기거하며 이승만의 비서실장으로 물심양면 그를 도왔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이승만의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었던 인물이다. 민주공화당 의장으로 대한민국 제3공화국 출범에도 큰 기여를하면서 88올림픽까지 보았기에, 이승만 정부로부터 박정희 정부전두환 정부 그리고 민주화까지 모두 지켜본 건국 1세대의 회고록이라 정말 내용이 알차고 풍부하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대회에 참석해서 이승만을 만나고 후에 파리에서 김규식과 구미위원부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방되고는 송진우의 암살을 계기로 미군정 기간동안 경무국장 조병옥과 함께 치안을 담당하는 수도경찰청장 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4번의 국회의원으로서 이승만과 협조하기도 때론 대립하기도 하면서 다사다난한 의정 활동을 벌였다. 짧은 회고록임에도 이승만에 관한 내용이 아주 많기에 참고가 된다.
1933년, 첫 만남부터 이승만의 공적인 면모와 더불어 사적인 내밀한 부분에 관해 자세한 정보를 찾고 있다면 위의 책들을 참고. 이승만이 같이 살면서 자기 아내에게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와 일화들을 접할 수 있다.

◈ 전기 부류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거진 30여년간 머물면서 그의 조직을 관리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업가 이원순의 이승만 전기이다. 자료의 종류 자체가 상당해서 버릴 것이 없지만, 1960년대에 나온 책이라 날짜나 숫자면에서 꽤 오류들이 있음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시인 서정주는 그가 청년기였던 1948~9년도에 대통령으로 재직 중인 이승만에게 불려가 구술로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였다. 이후 이화장에 기거하던 프란체스카 여사를 찾아가 인터뷰하여 추가 내용을 보강한 후 재출간 되었다.

◈ 이한우의 저서
  • 이한우,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전 2권)』, 조선일보사, 1995.
언론인 이한우가 1995년 설날부터 12월 26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다. 연재 시기가 광복 50주년을 맞는 해이며 '이승만 신드롬'을 대중적으로 널리 불러일으키며 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도서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승만을 재조명한 선구적인 책으로 평가받는다.

◈ 김인서 목사의 저서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 서적정보
  • 김인서 저, 이주영 편, 『망명노인 이승만박사를 변호함』, 2016, 비봉출판사.
김인서 목사가 1963년에 쓴 책인데, 2016년에 비봉출판사에서 다시 출판하였다.

◈ 이덕희의 저서
  • 이덕희 외, 『이승만과 하와이 한인사회』,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 온라인 아카이브
  • 이덕희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
  • 이덕희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북앤피플, 2015. 서적정보
이덕희 교수는 하와이 한인 이민사와 이승만의 활동과 관련하여 상당한 연구와 사료 수집을 십수년간 해온 전문가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지식들을 접하고 싶다면 위의 책들로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

◈ 이주영의 저서
  • 이주영,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다: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북앤피플, 2022.
이승만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다룬 책이다. 이승만의 경험과 그가 남긴 유산을 조명하고 있다.

◈ 김삼웅의 저서
  • 김삼웅, 『독부 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두레, 2020.
저자는 참여정부 시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고 오마이뉴스에 정치, 역사 글을 연재하고 있는 언론인이다. 2012년에 출간되었고 2020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다룬 책으로 이승만의 친일파 등용이나, 독립운동 내부의 분열, 제주 4.3이나 여순사건 그리고 보도연맹 학살과 같은 민간인 학살과 이승만 독재에 대해 주로 강력하게 비판하며, 김구의 암살 배후로 이승만을 지목하기도 한다. 김삼웅이 쓴 인물 평전이나 한국현대사를 서술하는 책에서는 이승만과 이승만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2020년 개정판

◈ 김용삼의 저서
  •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 대한민국의 건국은 기적이었다』, 북앤피플, 2014. 서적정보
저자는 조선일보 출신의 언론인 김용삼.[71] 2014년 6월 출판. 이승만의 국가건설 과정에 대한 책이다.

◈ 최기일의 저서
  •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나무, 2002. 서적정보
저자는 해방정국 시기 돈암장 시절 이승만의 공보비서를 역임했던 최기일. 책 자체는 전반적으로 본인의 일생을 회고하는 회고록이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승만의 개인적인 면모들에 대해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어 이승만 연구자들이 자주 참고하는 서적이기도 하다. 돈암장 시절 이승만을 비롯하여 주변 측근들이었던 윤치영임영신프란체스카 도너의 면모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저자 최기일의 경우 1948년 정부수립 전에 이승만 곁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가서 경제학과 교수가 되었고[72], 훗날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갔을 때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고[73]계훈제함석헌 등과도 교류하면서 재미 인사로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기여하였다. 여담으로 김준엽과 장준하의 유년시절 친구이기도 해서 장준하의 수기 <돌베개>에도 막판에 잠깐 등장하기도 한다.[74]

◈ 공저
  • 남정옥·류석춘, 『이승만 깨기:이승만에 씌어진 7가지 누명』, 백년동안, 2015. 서적정보
저자는 남정욱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 류석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다.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5년 11월에 출판하였다. 한강철교 폭파와 같은 민감한 주제도 포함하고 있다.

◈ 청소년용 위인전
  • 정현채, 『엄마가 들려주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야기』, 도서출판보담, 2020. 서적정보
2020년 6월에 출간되었으며 청소년용 위인전이다.

10.5. 다큐멘터리[편집]

Play: Video

Play: Video

▲한국사전: 이승만 2부작 (2008.8.30.~2008.9.6. KBS1)

Play: Video

Play: Video

Play: Video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대통령 이승만 (2011.9.28.~2011.9.30. KBS1)
총 3부작으로 구성돼 있으며, 김정수 CP가 기획한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1부는 '개화와 독립', 2부는 '건국과 분단', 3부는 '6.25와 4.19'로 각각 구성돼 있다. 이 프로그램에선 이승만이 미국과의 원조 협상에서 기선제압식으로 성사시켜 외교 주도권도 양보 못할 사람으로 그려 친미주의자 프레임을 벗었고, 원자력의 필요성을 제창하고 과학자를 키운다거나 의무교육을 확대시킨 점,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한 점 등의 공적을 많이 다뤘다. 물론 손세일이나 유영익 등과 같은 이승만에 긍정적인 인물들 중심으로 인터뷰가 나오지만,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김삼웅이나 주진오, 브루스 커밍스 그리고 김동춘 등의 인물들의 입장과 인터뷰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장점보다 단점이 더 부각됐는데, KBS 2노조 측이 '독재자 미화'라며 제작을 반대한 바 있으며, PD저널에서도 문제를 제기했다.[75] 그 1부에선 임시정부 위임통치 파문에 대해 사실만 얘기했지 파장은 안 다뤘고, 2~3부에선 친일청산 실패를 '인력 부족' 탓이라 한다거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훈련이 안 된 병사들이 한 짓'이라 하고, 이승만에게 민간인 학살의 큰 책임이 있는 제주 4.3 사건은 일체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만 최악의 행적이라 할 수 있는 국민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내용이 다큐멘터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1960년 4.19 혁명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책임을 거론하는 대신 교수 시국선언 후 이승만이 직접 사태를 파악해 병원에서 부상자를 위로하는 모습도 내보냈다. 새로운 사실 전달마저도 이승만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선물인 나전칠기를 전달한 얘기 정도다.

2013년에는 청미디어를 통해 단행본으로 나왔다.

11. 대중매체에서[편집]

구한말과 독립운동기, 대한민국 초기를 다룬 역사물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단순히 고증 때문에 등장하는 수준도 있지만 이승만이란 인물을 캐릭터로서 깊게 묘사하여(특히 대체역사물에서) 주로 유능하지만 정치적이며 권력 지향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명과 암이 뚜렷한 인물이다보니 그가 언급될 때마다 그에 대한 평가를 두고 항상 병림픽이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능구렁이 같은 거물 정치인'이라는 이승만의 대중적 이미지 자체가 창작물에서 써먹기 좋은 소재라서 주인공의 협력자나 라이벌로 많이 등장한다.

11.1. 실사 매체[편집]

  • 1959년 신상옥 감독 작품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최초로 이승만이 주연인 영상물이며 임화수가 제작에 개입한 사실상의 관제 영화이다. 젊은 시절의 이승만 역을 김진규가 연기하였다. 1959년작 <한말풍운과 민충정공>에선 방수일이 연기했다.
  • 1968년에 만들어진 영화 <잘 돼 갑니다>와 1973년작 <광복 20년 백범 김구>에서 이승만과 외모가 비슷한 일반인 최용한이 연기했다. 1968년 당시 72세의 최용한은 최고령 데뷔 신인배우 라는 이채로운 기록을 남겼다.
  • 1979년작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선 배우 민지환이 연기했다.
external/ojsfile...
제1공화국 에서 이승만 역을 맡은 최불암. 좌측은 조병옥 역의 김무생.
  • 역대 이승만 전문 배우 중 배역을 잘 소화한 배우로는 역시 최불암이 첫손에 꼽힌다.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 에서 처음 이승만을 연기한 이래, 거의 드라마 자체의 상징처럼 되었으며 1982년 8.15 특집드라마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와 1987년작 <산하>, 1989년 <제2공화국> 및 <독도수비대>, 1990년 8.15 특집극 <반민특위>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나올 정도였다. 그 특유의 스타일은 그 이후 이승만을 맡게 된 후배 배우들이 이승만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최불암을 흉내냈다고 일컬어질 정도다.
  • 1982년 KBS1 8.15 특집드라마 <그 여름의 이틀>에서는 성우 이강룡이 연기했다.
  • 1984년작 KBS1 다큐드라마 <휴전 6.25>에서는 배우 출신인 양동군 교수가 연기했는데, 목소리 대역은 성우 구민이지만 영어 대사는 본인 목소리다.
  • 1985년 KBS 광복 40주년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신구가 연기했는데, 1990년 실록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 1985년 KBS1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최정훈이 연기했는데, 1993년 <다큐멘터리극장>과 2004년 EBS 드라마 <명동백작>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등장했다.
  • 1989년작 KBS2 미니시리즈 <무풍지대>에선 배우 하대경이 연기했다.
  • 1989년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선 배우 김인태가 연기했다.
  • 1994년작 뮤지컬 <4월 하늘 어디에>에서는 배우 김진해가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정욱이 연기했다.
  •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선 배우 권성덕이 연기했는데, 그는 이듬해 MBC 특별기획 드라마 <영웅시대>,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도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특히 <야인시대>에선 종영 후 2010년대 들어 인터넷상에서 밈화돼 있고(이승만(야인시대) 문서 참고), <서울 1945>에선 장택상과 함께 여운형 암살의 배후로 그려졌는데, 방영 직후 양자 이인수와 장택상의 3녀 장병혜 등 유족들이 담당 PD 윤창범과 이한호 작가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2010년에 대법원은 '이승만이 여운형의 암살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장면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대법원 2007도8411)
  • 2014년에는 코미디언 출신 영화제작자 서세원이 전광훈 등의 후원을 받아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제작하려 했으나, 정치 논란 등에 시달리다 2015년에 중단됐다.

11.2. 애니메이션[편집]

11.3. 소설[편집]

이하 작품은 전부 대체역사물 웹소설이다.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주인공 유진 킴의 재능을 보고 감탄하며, 웨스트포인트 입학 추천서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 유진 킴을 장기말로 쓰려다가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유진킴에게 한인 커뮤니티를 헌납, 대신에 유진킴의 후광덕에 임시정부를 장악하고 한국 독립후 친미파라는 특징 답게 초대 대통령이 된다. 권력욕은 여전해서 장기집권을 할 꿍꿍이를 가졌지만 유진의 개입으로 무산되어서 결국 2선을 끝으로 퇴임했고,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정권도 내주었다.
  •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안창호와 루즈벨트의 합의를 통해 주미 한국대사로 선정되었다. 이게 은근 이승만에게 독인게, 루즈벨트의 연임기간 동안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76] 루즈벨트에게 아시아 문제를 조언해주며 본인도 미국에서 사는게 행복한지 그냥 미국에서 쭉 살고 있다. 그외에는 치사함과 그에 비례하는 정치력 덕분에 주인공인 백범과 안창호에게 가끔씩 언급된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임시정부를 대신해서 단독으로 독일과 협상하려고 하나 주인공 디트리히 샤흐트는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이 모두 미국에 있기에 결국 미국의 개입 말고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알고 그를 무시하고 임정과 직접 협상하자 독일에서 자신을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대한민국 광복 이후 임정에 단단히 찍힌 탓에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주인공 조지원이 처음 만나는 역사적 인물로 등장. 조지원과 비슷하게 뛰어난 인물이라 금방 동지가 되고 열강과의 협상을 주도하여 조선의 독립을 지켜내지만 지도자 자리를 두고 조지원과 경쟁하다가 열강과 맺은 굴욕적인 조약을 핑계로 국외 추방당한다. 추방되어도 미국에서 한국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오랜시간이 지난뒤 귀국해서 조지원의 딸인 조가은을 지도하거나 다양한 정치고문, 명예직을 맡는다. 권력욕은 여전해서 어떻게 하면 조지원 대신에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취임할지 고민 하지만 조지원의 철인적인 면모에 낙담하고 귀국 직후 정권 교체를 열망하는 안창호의 러브콜을 받지만 대통령이 되어봤자 조지원보다 못하다는 소리만 들을 게 뻔하다며 거절, 권력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황제가 된 완화군 이선의 신하로서 등장. 유능한 황제 밑에서 일하면서 왕정에 대한 반감은 없지만 내심 민주주의를 채택했음에도 황제가 모든 정치방향을 이끄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황제의 외교방향이 자신과 일치하기에 큰 불만은 못내는 상황[77].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외교관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김규식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총리가 되기 위해 이런저런 정치적 공작을 펼치다가 친구 였던 안창호박용만(1881)등과도 결별하고 야당 지도자인 여운형전봉준과도 마찰을 겪어서 결국 선거에서 패배하지만 이를 교훈삼아 다시 재기할것을 꿈꾼다. 여기서도 일본패는 실력은 여전해서 관동 대학살의 한국인 희생자가 대략 추산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바로 추산치의 4배로 부풀려 일본정부를 미칠 듯이 압박한다. 자세한것은 이승만(조선, 혁명의 시대)참고.
  • <레전드 1957>에서는 역사대로 혁명이 일어나 하야한다. 하야하면서 군 앞에서 탱크맨 역할을 한 주인공을 불러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 하는 변명을 하지만, 준영에게서 "당신의 가장 큰 죄는 독재가 아니라 미래를 짓밟은 것"이라는 팩트폭력을 당한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남의 아래에서 '이놈 저놈' 소리 듣기 싫다는 일념으로 죽어라 서책에 몰두하여 고시에 합격하고 학사장교로 임관했다. 전역후에는 출세하기 어려워져 고민이 많은 젊은 식자들을 끌어들여 자유당 안에 교양사라는 단체를 차려 자신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꿈꾸는 이완용과 경쟁하고 있다. 싱겁고 부드러운 음식이 취향이고 입맛도 까다로워 다른 조선인들이 맛있게 먹는 짜장면을 혹평했다.
  • <대한민국 전쟁 영웅이 되었다>에서는 주인공의 개입 덕에 전쟁 트롤러들을 일찌감치 치워내고 체통 신경쓰지 않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 등 이미지 개선은 많이 되었지만 미국에 있는 동안 친일파 청산 등으로 정치 기반이 다 사라져 전쟁이 끝나고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머무르며 대통령 자리도 신익희에게 넘어간다.

11.4. 게임[편집]

  •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2편과 3편까지는 권위주의 계열 한국의 지도자였으며, <하츠오브아이언4>에서는 민주주의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배경이 2차세계대전 시기인지라 한국은 해방시켜야 플레이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민주주의 내전이 터져서 독립하거나, 민주주의 국가가 일본을 항복시키고 해방해주거나 괴뢰국으로 삼지 않는 한 보기 힘들며 본인 얼굴이 아닌 아시아 기본 지도자 초상화로 나온다.[78]
    • 위 게임의 모드인 <The Road to 56>에서 해방 한국을 플레이하면 고증대로 한국의 지도자로 나오는데 뜬금없이 이념이 파시즘이다.[79] 만일 제정복고를 택한다면 지도자에서 내려가게 되는데, 제정이 복고되어도 황실의 일원이 지도자가 되지는 않는다. [80]
    • 한국산 모드인 《KOREA: REVOLUTION OF 1896》에서도 반공을 핑계로 집권가능한 파시즘 지도자로 등장한다.
    • 한국과 일본이 역전된THE LAST EMPIRE에서 민주주의 개혁가로 제국주의 국가가 된 대한제국에서 도망쳐서 미국에 망명간다. 한국이 미국에게 패배하면 한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
    • 독일제국이 1차대전에서 승리한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선 미국에 한국 독립 운동 지원을 설득했으나 실패했고, 이로 인한 리더쉽 상실로 임시정부에서 축출당해 미국에 망명해서 미주한인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다가 2차 미국내전 이후 하와이에서 살해당한다. 개발진이 공인한 내용으로 게임 내에선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
    • 1906년 민주주의 한국이 건국된 세계관의 대체역사 모드 <하츠 오브 코리아>에서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 설정상 대공황 시기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리던 대구에서 음식, 일자리, 의료 보장과 본인의 하야를 요구하는 대규모 비폭력 시위가 발생하자 시위 참여자 20만명을 전차로 짓이겨 진압했다고 한다. 민주주의 루트 플레이시 김구와 이승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 선제타격, 아시아 연합 창설 등 대외 팽창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김구 루트와 달리 이승만 루트는 '이승만선'이라는 요새를 짓고 연합국에 가입하거나 미국과 새 세력을 파는게 끝이다. [81]공산이나 파시 루트를 가면 대구 코뮌, 국가재건최고회의[82]와 내전을 해야 한다.
    • 대체역사 모드 <레드 플러드>에서는 북한의 존재를 핑계로 집권한 반공 권위주의 독재자로 등장한다.

11.5. 음성 매체[편집]

  • 잘 돼 갑니다
    1967년 DBS에서 방송했던 라디오 드라마로, 총 120부작에 극본은 한운사가 맡았으며 이승만 역은 성우 구민, 류기현이 조병옥고은정이 영부인 프란체스카, 주상현이 이발사 김광제, 이창환이 해설을 각각 맡았다. 이 작품은 이승만의 전속 이발사 김광제의 시점을 토대로 자유당 정권 말기 6년간의 인간과 권력, 권력의 무상함 등을 중점적으로 다뤘고, 훗날 MBC TV드라마 <박마리아>와 <제1공화국> 등 정치드라마 장르의 토대를 구축한 역사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1968년에는 아세아필림[83]이 조긍하를 감독으로 맡겨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했는데, 이기붕 역은 장민호, 조병옥 역은 박노식, 최인규 역은 허장강, 박마리아 역은 김지미, 이발사 역은 김희갑 등이 각각 맡았다. 당시 일반인 최용한이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지닌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았으나 얼굴이 제대로 안 나왔다. 초기에는 공보부로부터 데모 장면 등 일부 수정 지시를 받았긴 해도 정부는 청와대를 촬영 장소로 제공하고 이기붕 자살 장면까지 실제 이기붕 자택에서 찍게 하는 등으로 배려하면서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영화 개봉 하루 전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로부터 서울 국도극장에 걸린 간판이 뜯어졌고, 이에 김상윤은 문화공보부에 수차례 상영 허가 요청을 한 후 문공부 측의 지시에 따라 문제가 된 내용들을 개작했지만 1971년 문공부 측은 영화진흥공사로 하여금 융자금 540만원을 주는 한편, 필름을 강제로 압수하면서 상영이 아예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공동제작자였던 김상윤은 늘어나는 빚과 정신적 충격 등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1975년에 뇌출혈 투병 중 숨졌고, 차남도 1979년 4월 청와대에 호소하려다 경비경찰에게 구타당해 정신이상을 앓는 등 가정이 풍비박산나기도 했다. 이에 아내 홍정순 등 유가족들이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10여 년간 호소한 끝에 1987년 6.29 선언 뒤 이듬해 상영 허가를 얻어 1989년 9월에야 합동영화가 배급을 맡은 뒤, 서울 명보극장에서 추석 특선 프로로 처음 개봉됐지만, 이미 관심이 사라져 흥행을 못했다. 2000년에 유가족이 이 영화 제작행위와 관련해 국무총리 직속기구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민보상위)'에 민주화운동 보상금 신청을 했으나 2001년과 2007년에 각각 2번 기각됐다가, 2013년에야 직권으로 인정받았다. 다만 보상은 2013년에 법원에서 손해배상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해당 영화는 2016년 12월 20일에 TBS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2002년 오마이뉴스 기사2012년 일요신문 기사)
  • 1967년작 DBS 드라마 <잘 돼 갑니다>와 TBC 라디오 드라마 <광복 20년>에서 이승만 역을 깔끔히 소화해낸 구민이 알려져 있으며, 방송 당시 청취자들은 이승만 목소리가 실제 육성인지 구민의 연기인지 점심내기를 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 MBC <격동 50년>의 박일도 선배 구민을 능가할 정도로 맛깔스럽게 대사를 구사했다. 동시에 이승만의 능구렁이같은 면도 세세하게 표현하여 많은 호평을 받았다. 미중년을 많이 맡았던 박일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준 연기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원조 이승만 전문 성우 구민은 2001년에 미국으로 이민갔고, 박일마저 2019년 7월 31일 돌연사했다.

12. 각종 타이틀[편집]

13. 관련 단체[편집]

14. 둘러보기[편집]

이승만투명
이승만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1] 음력 2월 19일.[2] #[3] 대한민국 이북5도위원회 기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4] 국문으로 된 한국 정부의 공문서에는 위에 있는 한문 휘호로 서명하였고, 보고서에는 '晩'자를 흘려써서 서명하였다.[5] 양녕대군파 16대손, 시조 40세손 승(承)○ 항렬.[6] 두 형이 이른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이승만이 사실상 장남이었다.[7]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이다. 출처: 《전주이씨족보》 이승만편.출처2:쿠키뉴스 박승선 취재1 취재2 취재3오마이뉴스 국민일보 한겨레1891년 혼인. 쿠키뉴스의 취재 등 여러 언론에 따르면 박승선은 이혼에 합의한 적이 없고 해방 이후 면담 역시 거부되었다. 끝까지 자기가 본부인이며, 다른 이가 있다면 첩이라고 주장했다. 박승선의 주장은 무시당했다. 1912년 이혼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은 이승만 측에 의해 소송을 당해 1949년 6월 4일 혼인 관계와 호적이 말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방 법원 판결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 여러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고, 1965년 8월 8일 조선일보 당대 기사에서 호적 말소는 법적 소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시정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60년의 부산일보 9월 20일 기사에서는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호적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박승선이 이은수를 양자로 맞아 호적상 이승만의 장남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박승선이 1912년 이후에도 호적에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8] 1934년 10월 8일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오랜 친구인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홈즈 박사의 주례로 결혼식(중혼)을 올렸고, 소송으로 박승선의 호적이 말소된 사이 1950년 4월 프란체스카와 종로구청에 결혼 신고를 했다. 1965년 하와이에서 임종하는 순간까지 평생을 함께했다.[9] 아명은 태산. 박승선 사이에서 둔 그의 유일한 친아들이었으나 10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10] 학위논문 :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1912)[11] #[12] 0C542194-01DC-48...
170cm가 공식 키이지만 스스로를 169cm 정도라고 밝혔던 장제스보다 확연히 작은 걸 보아선 노년에는 키가 줄어 165cm 정도로 추정된다. 보다시피 옆의 166cm의 쑹메이링과 비슷해 보인다.
[13] 족보에는 운남(雲南)이라고 써져 있다. 아마 한자획을 그을 때 잘못 그은 모양.[14] 2대 대통령 취임사는 음성 전체가 모두 녹음되어 있어 녹취된 이승만의 실제 육성과 목소리를 우리말과 영어로 들어볼 수 있다.#[15]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서당이다.[16]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이근수가 운영하는 서당으로, 한성부 용산에 위치해 있었다.[17] 현 배재고등학교.[18] 서재필이 세운 최초의 학생 단체다.[19] 본래 1908년 전 과정을 수료했으나 사회적 이슈들로 미국인 교수들에게 냉대를 받아 석사 학위 수여가 연기되었다.[20] 학위명은 Ph.D.(Doctor of Philosophy; 철학박사), 정치학을 전공하여 35살에 한국인 최초의 박사가 되었다. 그의 박사 논문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며 원문은 인터넷에서 PDF로 다운받아 볼 수 있고 연세대 출판부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판도 있다.[21] 그에게 직접 박사 학위를 수여한 프린스턴대 총장이 훗날 미국 제28대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이었다.[22] 한인중앙학원으로 개칭.[23]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2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07&cid=62049&categoryId=62049[25] 일명 구미위원부[26] 공식적으로 취임한 것은 아니었으며 여운형이 세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에게 일방적으로 추대된 것이다. 이 당시 이승만은 해외에 있었으며, 귀국한 이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 취임을 거절했다. 사실 이승만 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인민공화국 정부 요직에 일방적으로 추대되었는데 자세한 건 조선인민공화국 문서 참조.[27] 한국인 최초의 명예박사 취득자다.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박사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다.[28] 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29] 이승만은 1912년 집필한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던 중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었고 자신을 비롯한 배재학당 출신이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불행한 연결'이라고 표현하며 독립협회 활동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이승만은 출옥한 1904년을 기점으로 일본관이 지일에서 반일로 바뀌며 민영환의 대미 밀사로 활동한다. # #[30]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북측에서도 일찍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차리는 등 독자적으로 정부 수립 절차를 밟고 있었던 데다 김일성이 건재하는 이상 타협의 가능성은 희박하고 운 좋게 단일정부가 성립된다 쳐도 공산주의가 혼합될 염려가 있기에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으로서는 남쪽에서 따로 자본주의 국가를 세운 뒤에 남측 주도로 통일한다. 라는 판단이었다고 여겨진다. 아니면 그냥 권력을 위해 분열을 감수한 거라는 시각도 있다. 김구나 김규식 등은 처음부터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에 반대했다.[31] 어렸을 때 서울 우수현 남쪽에서 자라서 호를 '우남'이라 지었다.[32]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와 같이 안치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대통령묘소에 자리하였다.[33] 당시 행정구역 기준 동대문구 갑. 관할 모든 동들이 서울 확장으로 인한 분구와 구간 경계 조정을 거치면서 다른 구로 이관 되었다. 현재 기준 서울 종로구 창신동숭인동 및 성북구 돈암동성북동.[34] 1948.7.20. 초대 대통령 당선 및 취임에 따라 사퇴.[35] 제헌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36] 역대 직선제 대선 당선자 중 최고 득표율.
역대 직선제 대선 당선자 중 2위와 최고 득표율 차 당선. (63.26%)
[37] 사유: 당선인의 자진 사퇴.[38] 개화파의 영향을 받아 정계 입문.[39] 독립협회 강제 해산.[40]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인한 탈당.[41] 흥업구락부 창당을 위한 탈당.[42]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인한 정당 해산.[43]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와 신설 합당.[44] 4.19 혁명으로 인한 대통령직 하야로 탈당.[45]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3기 15회 中.[46] 당시 표현으로는 호열랄(虎烈刺). 헌데 언젠가부터 한자 발음이 와전되어 호열자라고도 불렸다.[47] 출처: 로버트 T. 올리버의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투쟁』[48] 조선이라는 나라를 에, 지배층을 선원에, 백성들을 선객에 비유하며 무기력하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백성들이 자기 일이라는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깨어날 것을 외치고 있다.[49] 조선인들의 마음을 결박하고 있는 것 중 하나로 여전히 양반과 상놈의 구분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양반은 조상이 이름났다는 이유로 능력이 없어도 자리를 차지하고 비천한 출신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상놈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니 수많은 잠재적 인재들이 썪고 있음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50] 이는 이승만 정부가 20세 이상 국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를 실시하면서 실현된다.[51] 이승만은 교육을 중시한 사람답게 부족한 인건비 예산 중 교사의 봉급을 늘 1순위로 지급했다. 이로 인해 경찰이나 군인의 비리가 횡행하는 문제가 있었다.[52] 소련이 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2번이다. 나머지 1, 3, 4, 5번은 소련도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지만, 2번은 공산주의 자체의 근본적 결함이기에 도저히 수정하거나 보완할 수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문단 참조. 이승만은 소련이 탄생한 직후부터 이미 소련이 가진 근본적 문제점을 통찰한 셈이다. 1950년대 식민지가 해체되며 탄생한 수많은 신생독립국들이 공산주의를 국가 정책 이념으로 채택하는 와중에도 자본주의에 기반한 혼합경제체제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자본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가능했다.[53] 이 책이 쓰여진 1941년 당시는 이미 중일전쟁과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정세가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평화주의를 배격하자는 전쟁광적 발언이 아니다! 이미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 외치는 평화주의는 적국에 이익을 가져다 줄 뿐 진정한 평화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다. 일본 내막기를 읽어보면 당시 평화주의자라는 자들이 얼마나 대책없는 자들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승만은 그들의 그러한 태도를 비판한 것이지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지 오웰 역시 같은 시기에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한 쪽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건 다른 쪽의 전쟁 수행을 돕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이를 그대로 읽으면 평화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것 같지만 이 발언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것은 이미 평화와의 저울질이 끝나고 결단이 내려진 상태를 의미하기에 평화주의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이승만은 알았던 것이다.[54]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219-220[55]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창궐 이후로는 이 말을 패러디해 역으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로 패러디되기도 한다. 2009년 1박 2일 혹한기 특집에서 재발굴된 이후 꾸준히 유행어는 아니어도 쓰인 문장이었다.[56] 다만 미국에서 철강 산업에 태클을 건 데다가 보유 기술도 없던 국면이라 전쟁 후에 철강 산업을 진행하지는 못 했다.[a] 57.1 57.2 57.3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342-344[60] <38선은 없어졌다. 휴전 결사반대. 38선 대신 압록강을 달라. 38선 대신 두만강을 달라.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여러개 구호를 번갈아 들면서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몇 달 동안 데모를 해야 했다. 이때 학생들만이 아니라 전국민이 결사적인 데모를 하였다.[61] 이는 이승만의 업적 중 단연 1위에 손꼽히는 전설적인 외교적 성과다. 2020년대에도 이 조약의 실용성은 대단한 수준이며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와 달리 당시 미국은 극빈국이었던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일본에 투자하는게 훨씬 효과적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때 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미국이 약속한 단순한 군사적 지원에 만족했다면 신생 독립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안보 불안에서 비롯한 과도한 군비로 인해 성장 동력을 잃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중진국 수준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정말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이 조약은 앞으로도 우리를 번영케 할 것이라는 이승만의 발언은 완벽히 들어맞았고 성공한 예언이 되었다.[62] 대체 연료의 공급 없이 녹화사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석탄과 도시가스 공급 없이는 나무를 베어 연료를 충당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자연재해 빈발로 이어져 경제 성장 동력을 크게 저하한다. 현대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겪는 문제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63] 출처: 김정렬 국방장관의 회고록 "항공의 경종"[64] 이승만은 역설적이게도 본인이 열심히 보급한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의해 하야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어떻게 하야하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이 어록을 보면 마치 자기자신과 싸우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3.15 부정선거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본인이 부정선거를 획책한 건 아니었다. 당시 이승만은 이미 대선 승리가 보장되었기에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사망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면 정권이 바뀔 수 있었기에 자유당 인사들이 이승만 몰래 부정선거를 획책한 것이다. 이승만도 혁명 1주일 전에야 국무회의에서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선거에 대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65]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시절에도 그랬지만 외교에 집중하는 국정운영 스타일로 인해 내치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를 지적하며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 평한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동아일보 기사가 일품. 이를 옹호하자면 식민정책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가 적어 고졸이 엘리트로 취급받았던 때에 독립하자마자 전쟁까지 겪고 북한군이 사회인사나 학자를 납치해가는 바람에 인재가 부족했던 것이 원인이다. 게다가 독립 당시 한국에는 박사 학위자가 5명(...)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반 이상이 월북해 버렸다. 아무튼 이로 인해 임기 내내 국내 문제에 시달렸고, 급기야 여당의 과잉충성과 여기서 비롯한 부정선거를 예방하지 못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말년에 이승만 스스로가 "내가 4.19 혁명 때 '그렇다고 합니다'란 말만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자조한 것도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자행한 게 아니라 예방하지 못한 것임을 증명한다. 따라서 이 발언은 유체이탈 화법이 아니라 자신의 직무유기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 행사를 치하하고 감사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66] 녹취된 이승만의 실제 육성과 목소리를 우리말과 영어로 들어볼 수 있다.[67] 이인수가 기증한 문서군들은 오늘날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아직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많다.[68] 손세일은 신동아 및 사상계 편집장 등을 지낸 언론인으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래 주로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이력을 갖고 있다.[69] 서중석을 좌파 성향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 그의 연구논조를 살펴보면 박헌영 및 남로당에 대한 비판이 단정세력에 대한 비판 못지 않게 강력하다. 조선공산당/남로당과 같은 본래 의미의 좌익에게 매우 비판적이며, 좌우합작 및 통일을 지향한 중도파 세력에게 매우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다. 좌익 및 중도파가 모두 사라진 1948년 이후에는 이승만의 대항마로 조봉암을 매우 강력하게 띄워준다.[70] 주의해야할 점은 1998년에 외교부에서 출판한 버전은 이승만과의 일화들을 빼고 외교적 기록만 부분 발췌한 것이라 내용이 부실할 수 있다.[71] 황장엽 망명사건에 대한 특종 보도로 대한민국 언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72] 공교롭게도 본인의 상사 이승만이 재학했던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여 최초의 한국인 학부생이 되기도 했고, 이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73] 단순히 지지를 한 것을 넘어서 김대중에게 하버드 대학교 인사들과 미국 상원의원들을 소개시켜주는 등 실질적으로 김대중에게 미국 정계 인맥을 쌓는데 도움을 주었다.[74] 해방 이후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 최기일은 이승만의 비서를 역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이 힘을 합쳐서 김구와 이승만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 우익진영에 더할나위 없이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장준하의 수기 <돌베개>에 나온다. 하지만 신탁통치 문제로 정세가 점점 악화되어가서 결국 이 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최기일은 아예 정부수립 전에 이승만 곁을 떠나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래도 미국에 체류하면서 가끔 장준하의 잡지 사상계에 글을 개재하기도 했다.[75] 아무래도 2부가 '건국과 분단'이라는 제목을 쓰다보니 그런 듯 하다.[76] 알다시피 루즈벨트 임기는 4선 대통령이다.[77] 주인공 완화군 이선(에 빙의한 현대인 이선우)의 정치적-외교적 지향점은 이승만과 일치하는 것이 많다. 무리한 팽창을 경계하고 미국과 친하게 지낸다 등등. 차이점이라면 이선은 자신과 주장이 달라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공산주의에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점이 있다.[78] 호이 4는 한국의 모든 지도자 초상화가 아시아 기본 지도자 초상화로 되어 있어 얼굴은 볼 수 없다. 즉 이승만, 김일성,의친왕영친왕의 얼굴이 전부 김정일 비스무리한 기본 초상화로 나온다.[79] 일민주의 때문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80] 바닐라처럼 일본내전이 발생하면 한국이 독립을 하긴 하는데 이럴 경우 바닐라처럼 이승만이 지도자가 아니라 영친왕으로 등장한다.[81] 김구 루트도 만주국 공격 타이밍을 태평양 전쟁 즈음으로 맞추거나 그때까지 세력 없이 뻐기면 연합국에 쉽게 가입할 수 있다.[82] 여기서는 박정희가 아닌 이범석이 세운 파시즘 단체로 등장한다. 이름만 빌려온 것[83] 영화제작자 이지룡이 이끌던 제작사로, 1972년 영화사 법정등록요건 및 제작실적 미달로 등록 취소 후 폐업.[84] 대한제국의 경우 존속기간이 짦아서 대한제국 시기에 출생한 대통령은 한명도 없다.[85] # # # ### 단, 이는 《고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으로 인정할 경우에 한한다. 조선이 1910년에 멸망했기 때문에 조선이 다시 부활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실릴 대통령은 전혀 없다. 참고로 거의 다 독립협회 관련해서 처벌받은 내용이다.[86] 합격한적은 없다. 5살때 서울로 내려와 고명한 스승밑에서 사서삼경을 포함해 수많은 고서들을 달달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13살때부터 19살때까지 7번이나 내리 낙방했다. 참고로 문과 최종급제자 평균연령은 35세였다.[87]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 한정한다면 가장 최연소 대통령은 1963년 취임한 박정희(1917년생)이며, 다시 민주화 이후로 취임한 최연소 대통령은 2003년 취임한 노무현(1946년생)이다.[88] 만약 임시정부를 포함하게 된다면 이승만이 최고령 재임과 최연소 재임 두 타이틀 모두 갖게 된다.[A] 89.1 89.2 89.3 89.4 89.5 2023년[90] 윤보선은 박정희에게최규하는 전두환에게 각각 대통령직을 강탈당하였고, 박정희는 아예 임기 중에 암살당했고, 박근혜는 임기 중 탄핵을 당했다.[92] 현재 가장 장수한 대통령은 1990년 92세로 사망한 윤보선이다. 두 번째는 2021년 90세(+10개월)로 사망한 전두환이다.[95] 김대중에게도 김소희라는 딸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97] 김대중과 윤보선도 재혼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경우는 이혼이 아닌 사별 후 재혼이다.[98]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황해도 출신은 물론 이북 출신 대통령은 당분간 없을 듯하다. 19대 국회에서 이북 출신인 사람은 김진표에 더해 조명철이 있었다가 20대 국회에서는 김진표만이 유일하게 되었고, 21대 국회에서는 김진표에 더해 태영호지성호가 추가로 이북 출신으로서 당선되었다. 새터민 출신이 아니고서는 깨지기 어려운 기록. 다만 본적지가 이북인 대통령은 존재한다. 19대 문재인은 양친 모두 이북 출신이다.[99] 이회창도 황해도 출신이어서 만약 당선됐다면 두 번째 이북 출신 대통령이었겠지만, 총 3번의 대선 출마 결과 모두 낙선하면서 결국 이승만이 유일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2022년 기준으로 대권을 도전하는 후보들도 최소 1950년대 이후 출생이니 앞으로는 통일이 되거나 태영호가 대권주자급으로 급격히 성장하지 않는 한 나올 일은 없을 듯 하다.===

===

이승만/평가

최근 수정 시각: 
상위 문서 아이콘  상위 문서: 이승만
이승만투명
이승만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1. 개요2긍정적 평가3부정적 평가4. 논란이 있는 평가
4.1. 징병제
4.1.1. 긍정적 시각4.1.2. 부정적 시각
4.2.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질
4.2.1. 긍정적 평가
4.2.1.1. 개관4.2.1.2.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4.2.1.3. 안전한 미국에서 호의호식했다?4.2.1.4.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노력
4.2.2. 부정적 평가
4.2.2.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4.2.2.2. 독립운동 자금 횡령
4.3. 친일파 대통령?
4.3.1. 반일 행보도 했다는 일부 주장4.3.2. 일부 반일 정책과 발언들4.3.3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 방해
4.4. 미국의 앞잡이?4.5. 순수혈통주의에 기반한 국제입양4.6. 정부 수립과 건국

1. 개요[편집]

이승만 사진
이승만의 행적들을 평가하는 문서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을 주도하여 일각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한편 장기 집권과 집권기에 벌어진 학살 등으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으며, 여러 측면에서 상이한 평가를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현대사의 인물 중 한 명이다.

2. 긍정적 평가[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긍정적 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3. 부정적 평가[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부정적 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4. 논란이 있는 평가[편집]

4.1. 징병제[편집]

4.1.1. 긍정적 시각[편집]

아래 부정적 시각의 문단에서처럼 수십년간 한국 남성들이 이승만 때문에 병역 의무로 고통 받았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논리적 비약이 심한 억지다. 징병제는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 때문에 생긴 것이지 이승만 때문에 생긴게 아니다. 그리고 군대가 환경이 좋고 군인 대우가 좋으면 모병제로도 충분해서 징병제가 필요없다는 주장도 1960년에 임기가 끝난 이승만과는 무관한 얘기다. 오히려 장군대비 병사의 월급이 역대 가장 높았던 정부가 이승만 정부였다. 병장이 준장 월급의 10%를 받았으며 심지어 2020년 현재에도 이것에 한참 못미친다.

그리고 일본 자위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모병제가 된다고 반드시 군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군인에 대한 대우와 똥군기는 징병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단순히 모병제로 바뀐다고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산이다.

심지어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다고 평가받는 미군조차도 이라크 전쟁 이후로는 지원자가 없어서 인원수를 충당하기 위해 갱스터, 양아치, 저학력 백수들까지 선발해서 병사들의 질적 저하가 문제되고 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을 비교하기도 힘든 것이, 미군은 이미 당시로도 세계 1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던 국가였으며, 자국 군대를 넘어 유럽과 소련에게 물자 지원을 퍼줄 정도로 경제력이 넘사벽이었기에 병사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자본이 넘쳤지만, 정부수립 당시의 한국은 경제 전반이 빈약했다. 모병제조차도 나름의 문제점이 있으며, 모병제가 되었다고 무조건 징병제보다 낫다고 볼 수는 없다. 군인이란 직종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기피 직종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징병제는 오히려 대한민국에 긍정적 영향들을 끼쳤다. 1945년에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 한국은 소수의 도시민들을 제외하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농촌 사람들은 여전히 전근대적 구습과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1950년대 실시된 징병제 아래 군대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생활양식을 배우고 근대적인 기계들을 다루는 기술도 배우고 글 읽는 법도 배웠다.[1]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지금 우리는 군대라고 하면 왠지 구습의 상징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곳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1950년대 기준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징병제를 통해 전국 방방곳곳의 수많은 농촌 출신들이 근대화되었고 군대에서 배운 기술과 조직력, 협동심, 집단생활 경험은 1960년대의 경제발전에 긍정적으로 연결되었다.[2]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지는 데는 이승만이 군인 출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도 한 몫 한다. 역으로 군인 출신인 박정희 때부터 나라 수준에 비해 군대는 더욱 열악해졌다.

4.1.2. 부정적 시각[편집]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에는 국군 창설을 준비하면서 의용병제 즉 모병제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당시는 개별 부대의 지휘관들이 주둔지 부근 지역을 돌면서 청년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식으로 모병을 하였다.[3] 그러다가 1949년 8월 6일 병역법을 공표하면서 국민개병제, 즉 징병제를 도입하였고, 행정적인 준비를 거쳐서 그 다음해인 1950년 1월 6일에는 최초로 전국적인 징병검사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가재정을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이 "국군 10만명 제한", "그 이상의 원조는 어떤 경우에도 없음"이라고 못을 밖으면서 징병제는 징병검사 한번 이후 바로 유야무야돼버렸다. 결국 1950년 3월 다시 병역법을 개정해서 징병제를 폐지하고 미국의 요구대로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

이승만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물자 원조를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징병제를 고집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병제를 권유하는 미국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국가 안보의 초석이 되어야 할 병역 제도가 고작 8개월 동안 모병제 → 징병제 → 모병제 식으로 지그재그 하면서 혼란만 일으켰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장 다급해진 이승만 정부는 가두모집 등의 방법으로 청년들을 징병하기 시작했고, 그 이듬해인 1951년 5월에야 병역법을 개정하면서 공식적으로 징병제를 재도입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미국의 감군 요구에도 불구하고 60만 대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현재까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된 것이다. #

4.2.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질[편집]

4.2.1. 긍정적 평가[편집]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승만에대한 반민특위 억압과 미군정 옹호등 독립 정신을 우롱했다는 평가있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한 위대한 독립운동가라고 정리해볼 수 있다.
4.2.1.1. 개관[편집]
이승만은 국외에서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서 노선으로서는 외교 독립론을 견지했다. 이승만은 한국 독립에 영향을 주는 여론을 미국 내에서 만들었고, 그가 미국 내에서 지지를 쌓아갈 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한국에 무지했던 미국 내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처리에 영향을 주는데 기여를 하였다.

외교 독립 노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외교 독립 노선이 성과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같은 잣대로 따졌을 때 무장 투쟁도 성과가 없었던건 어차피 마찬가지다. 무장 투쟁이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으려면 무장 투쟁으로 한국이 일제를 무너뜨리기라도 했어야 한다. 이승만이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갈등을 일으켰다는 말도 궁색한 게, 이 시기 서로 안 싸운 개인/단체는 없다시피 했으며 오히려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끼리 암살과 총질까지 해대는 판국이었다.

애초에 광복은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더불어 외교론, 무장 투쟁론, 실력 양성론 등 여러 독립운동 노선의 성과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임시정부의 노선 역시 외교론에 무장 투쟁 노선을 결합한 형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941년 '일본 내막기'라는 책을 저술해 일본에 대해 순수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알렸다.[4]


3.1 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도 이승만이었다. 그 이전 대한제국 시절이던 1898년 4월에는 매일신문이라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5]을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창간했다. 순한글 신문이었으며 민족의 대변지로 한글신문시대에 기여하였고,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요구와 횡포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했다.# 후에 제국신문도 창간했다.

그리고 105인 사건이 벌어지자 미국 각지를 돌며 '조선에서 저렇게 일제에 의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이어지고 있는데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은 왜 가만히 있느냐. 조선을 도와야한다'라며 미국내 여론 조성을 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을 비롯한 고위층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 국제연맹 총회, 워싱턴 군축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에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국의 실상과 독립 문제를 알렸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미국내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 취급을 받았는데 이승만이 미 법무장관 프랜시스 비들에게 미국내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것을 요구하여 실제로 비들은 1942년 2월 9일에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등록한 한국인 가운데 자의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에 한해 적성국 외국인에 가해지는 규제에서 특별 면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승만 덕분에 미국 내 한국인들이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항일단파방송 사건 등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어 방송을 직접 진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해가는 전쟁 상황을 고국의 동포들에게 전달하고 독립 운동을 독려했다. 또 미국 국무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것도 이승만이며, 한국인들을 연합군에 편입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하도록 하여 독립권을 얻어내려고 했다.

이승만은 미국육군전략사무처(OSS)의 굿펠로우 부국장을 만나서 한인 특공대원들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게릴라전 계획도 추진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은 일제의 핍박을 받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누군가 반드시 해주어야 할 외교 활동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실천했다. 총칼을 드는 것 역시 독립운동이지만, 교육이나 언론 등의 수단으로, 혹은 외교적 방법으로 외국에서 일제의 침략을 알리고 주권 회복을 위해 일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다. 이승만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케이스로,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던 일부 인물들과 달리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수행했다.
4.2.1.2.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편집]
이와 관련하여 특히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자주 지적 당하는데, 당시 이승만이 이에 대한 통역을 거절했던 것은 미국의 여론이 매우 안 좋았고 외교독립론자였던 그는 이 사건자체를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약소국이며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를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사람들이 미국 그것도 자기네 나라 외교관을 살해한 것이니 어떤 나라든 여론이 좋을리가 없다.

본래 현대 외교관은 군주, 곧 국가의 "주권"의 대리자 개념으로 시작한 근대 외교관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6] 따라서 외교관을 살해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주권을 짓밟는 모욕 행위에 해당된다. 현대에 비해 외교관이 가지는 대중적 위신이 엄청났던 당시엔 더욱 그러하였고, 당시 미국인들의 눈에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앉혀놓은 스티븐스가 두 한국 사람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되었다. (중략) 그리고 안중근 열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했다.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토 히로부미와 스티븐스를 살해했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나의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나의 석사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이 1912년에 쓴 '청년 이승만 자서전' 中
위에 나온 이승만의 글을 보면 스티븐스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때[7] 당시 미국 내의 여론과 분위기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무리 친일 미국인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외교관을 죽이는 행동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을 적으로 여기게끔 만들 뿐이었다. 이승만이 생각하기에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교육받은 근대화된 한국인들이 해외로 나오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해외에 나가 활동하며 "우리 한국인들은 일제의 탄압이 어울리지 않는 문명인이자 개화인이자 자유인들이다"라는 인식을 서방 국가들에게 심어줘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이 설득이 되고, 미국의 심장부에서도 그런 인식이 통용이 되어야 그것이 곧 독립으로 가는 길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해서도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마저 파는구나

신채호
라고 비난했으나 이것도 비약이 대단히 심한 비난이며 이승만이 했던 청원의 내용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는 조치"였지 나라를 판다거나 타국의 식민지가 되는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 이승만 뿐만 아니라 김규식이나 안창호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유사하게 가지고 있던 구상이었다. 현대의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신채호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채호의 저런 주장은 그가 국제정세와 국제법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이승만을 제외한 나머지 독립운동가들은 똘똘 뭉쳐있었는데 이승만이 분탕을 쳐서 이승만VS나머지 의 갈등이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하곤 하지만 실제론 이승만과 상관없이 당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항상 분열되어 있었고 온갖 파벌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었다. 당장 박용만이 누구에게 암살당했는지 생각해보라. 심지어 한길수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도록 공작을 벌였다. 분열이나 분탕이라는 것은 그 사람만 아니면 안정적으로 뭉쳐져 있을 때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모두가 사분오열인 상황에서 특정인만 분열자로 프레이밍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어떤식으로 독립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노선 차이와 사상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거기서 오는 갈등이라는건 혼자서 일어나는게 아니라 상호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노선과 사상에서 오는 갈등이 이승만에 대한 비판거리가 된다면 반대로 이승만과 갈등을 빚은 상대 독립운동가도 갈등을 빚은 것에 대해서 똑같은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누군가와 패권 싸움을 하는데 조직력을 낭비했다고 비판한다면 같은 논리로 그 상대에 대해서도 이승만과 패권 싸움을 하느라 조직력을 낭비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상호간에 갈등을 빚었는데 그게 마치 이승만의 잘못이라는 일방적 비판은 이승만은 악이고 상대는 선이라는 정답을 정해놓고 얘기하는 이중잣대에 불과하다. 게다가 앞서 얘기했듯이 이승만이 아니어도 원래 분열과 파벌 싸움이 일상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파벌 싸움은 한국뿐만 아니라 식민지배를 당한 다른 국가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일이었다.[8]

신채호는 분명히 위임 통치안이 정한경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정식 결의를 얻었으며, 이승만 뿐 아니라 김규식도 같은 문서를 각국에 발송되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즉, 그는 거짓 모함을 한 것이거나 아니면 잘 모르면서 저런 발언을 한 셈이다. 그러나 현순의 자서전인 현순자사(玄楯自史)를 보면 대강 왜 신채호가 저런 발언을 했는지 알 수 있는데, 임시정부에서 자신이 조소와 조롱거리로 놀림을 받은 것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있던걸로 보인다.[9]
현안인 임시정부를 조직할새 2종의 숨겨진 흥미로운 일(逸事)이 있으니, 하나는 유위(有爲)의 청년들이 권총 목봉(木棒)들을 가지고 와서 한쪽은 회중을 보호하며 또 한쪽은 회중을 위협하여 공정한 조직을 개최한 것이오, 다른 하나는 신채호가 총리로 추천된 인사 즉 이승만박영효이상재 등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천하니 그때 청년 중에서 현창운이 웃기려고 신채호를 추천하매 회중이 큰 소리로 웃자(齊聲大笑) 신씨가 노하여 자리를 떴다. 신씨가 이승만을 반대한 것은, 그 이유가 박용만이 신성에게 이승만이 위임 통치를 미국 정부에 청원하였다고 전보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촉향이 오직 이승만에게 폭주하였었다.
4.2.1.3. 안전한 미국에서 호의호식했다?[편집]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하여 그걸로 좋은 옷 사고 스테이크 썰면서 "안전한" 미국에서 사치를 부리며 호의호식했다고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재산도 없이 홀로 미국에 갔는데 무슨 돈이 나서 거기서 생활을 하냐?"라고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 각지의 학교와 교회, 지역단체들에서 강연비를 받고 강연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현지 교민들로 이루어진 후원회와 개별적으로 이승만을 도와주는 미국인 후원자들도 있어서 이들이 이승만의 활동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안전한" 미국에서 활동했다며 공격하는 것은 공격을 위한 공격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독립운동의 목적은 조국의 독립이지 누가누가 더 열악한 곳에서 활동했나를 겨루는게 아니다. 당시 전세계 최고 강대국이자 동아시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동북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저런 공격을 하는 세력들은 똑같이 미국에서 활동한 박용만이나 유일한 또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서영해 등에 대해서는 같은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점도 재밌는 부분이다.

또한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마치 일제강점기 수십년간 일체의 여가도 없이 산 줄로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착각이다. 이승만 또한 미국에서 현지 동료들과 또는 미국 지식인들과 만나서 일상적인 교우관계를 갖는 것을 두고 마치 엄청난 사치라도 한 것인양 호의호식이라고 표현하는건 다분히 의도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이승만의 조직은 안창호의 국민회를 테러하여 자금을 탈취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도 여러 왜곡이 섞여 있다. 일단,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안창호의 국민회가 아니라 하와이에 있던 하와이 국민회였으며 테러를 하여 자금을 탈취한게 아니라 하와이 국민회가 회관 건축비를 유용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그것을 문제 삼아 하와이 국민회 김종학 회장을 파면시켰던 것이다.
4.2.1.4.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노력[편집]
1943년 5월 15일 이승만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제야말로 미국이 지난날 한국에 행한 잘못을 바로잡을 때다. 1905년과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도록 도움으로써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한 건 미국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팽창을 거듭한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 이어졌고 결국 미국은 막대한 병력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었다. 서양 정치인들이 일본의 팽창주의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유일하며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소련이 종전 후 한국에 '소비에트 조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의 극동 진출을 막고 현재의 대일 전쟁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당장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인들을 대일 전쟁에 참전시켜 실질적으로 미국을 도울수 있게 해야한다. #
미국이 일제의 위험성을 알지 못하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가만히 둔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까지 이어지고 그 결과 미국은 수많은 병력과 전비를 낭비하게 됐음을 지적하는 이 서한은 이승만의 국제적 통찰력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 독립된 한국만이 동양 평화의 보루임을 지적하며 일본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인정해 줄 것을 설득하고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해야한다고 얘기했다.

위는 대표적인 예시일 뿐 이승만은 이 서한에서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미국이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겼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등 최대한 할 수 있는 여러 방법으로 루즈벨트와 미 국무부를 압박했다.[10] 임시정부는 결국 국제적 승인을 받지는 못했으나 이승만은 이렇게 백방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미국내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버드프린스턴 인맥과 고위직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고 그가 미국의 이너 서클에 들어가려고 노력한 것도 이때문이다. 미국 내 여론전을 위해 엘리트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한미협회도 발족시켰다. 이승만이 아니라면 당시 한국인들 중 이정도로 미국의 최고위급들과 연결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4.2.2. 부정적 평가[편집]

민족문제연구소를 포함한 국내의 민족주의 진영이나 혹은 진보 진영에서 그의 독립운동가적 자질이 의심을 받고 있다.

아래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쓴 <이승만 평전>에서 그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한 비판을 보도록 하자.
1904년 8월 9일, 러일전쟁 와중에 일본 공사 하야시의 도움으로 한성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장ㆍ전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총격 사건은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킨 살인범이고, 일본과 같은 강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은 1912년 11월 18일 자 《워싱턴 포스트》회견에서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 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했다"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사실상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1913년 하와이에서 강연 중 "청일전쟁 시 각국 군사들은 행위가 부정하여 그 나라 국기의 빚이 다들 흑암한 추태를 입었으나 오직 일본 군인은 행위가 단정하여 일본의 태양기는 광명한 일광을 받아 공중에서 기색이 늠름하게 휘달렸다"는 믿기지 않은 일제 찬양 발언을 했다.

이승만은 1915년 《홀놀룰루 에드버타이스》지에서 "나는 한국은 물론 하와이에서도 혁명운동을 꿈꾼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1915년 《홀놀룰루 스타블렌턴》지에서 "우리는 어떤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정반대로 우리는 전 인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우리 백성들 가운데서 어떤 반일 감정도 일으키길 원치 않는다"고 발언했다.

이승만은 1919년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약 한국에 자유를 준다면 일본에 감사하고 우정을 느낄 것이고, 만약 우리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일본은 정복자로서 불신과 멸시를 받을 것"이라는 '굴욕적인' 언행을 보였다.

이승만은 1922년 9월 하와이 귀환 기자회견에서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새로운 총독이 많은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는 망언을 거듭했다.이 밖에도 이승만의 대일 관련 망언은 수없이 많다.

최고 수훈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훈장을 받기에는 그의 행적에 미심쩍은 점이 적지 않았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현실감각이 무딘 외교관이나 기독교 선교사라 해야 어울린다.

김삼웅, 이승만 평전(개정판), 두레, 2020, 129~130쪽.

이승만의 독립 운동 활동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다.
미국에서 교포들 모아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4.2.2.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편집]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기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 시작은 유학 시기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더럼 스티븐스 저격사건 통역을 자신은 살인자를 두둔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거절하였다. 박용만과의 하와이에서의 대립,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의 대립과 위임통치 청원 문제 등 꾸준히 이어졌다. 또한 상술했듯이 도산 안창호 선생과 대립 후 '이승만 친위대'라 불릴만한 동지회을 결성 기존 미주 한인 사회의 대한인국민회와 많은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자기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켰다. 안창호, 박용만 그리고 김규식을 미군 정보당국과 민간 첩보기구에 급진적인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다.

<박용만 평전>
FBI보고에는 또 1931년의 문서를 인용하여 이승만이 박용만을 '간통자, 착취자' 그리고 나중에 '일본 밀정'으로 중상모략한 일이 있다.

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1989, 89쪽

1924년 가을, 안창호는 미국 입국을 위해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에게 입국비자를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서재필에게 알려 스펜서(Spencer) 상원의원을 통하여 미 국무성에 교섭한 즉,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는 한인지도자가 안창호를 공산당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비자를 줄 수 없다.'라는 회답을 받았다.

1923년 1월의 일본 정보문서 또한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 안창호를 공산주의자라고 선전하였기에 안창호의 미국에서의 신용은 추락하였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12] 그리고 이승만은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13]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며, 일본 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이승만, 하와이 법정 증언에서

이승만은 미주에서의 박용만과 패권 싸움을 하는데 조직력을 낭비하고 그가 일구어 놓은 조직을 가로챈 점 등은 비판 받을 만한 행보다. 후에 조직을 빼앗긴 박용만 측에서 하와이에 정박해 있는 일본 순양함 이즈모 폭파 논의가 일어난 것을 두고 법정 같은 공개된 장소에서 폭로하였다. 이승만의 밀고는 "신한민보"와 "(국민회)공고서",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4.2.2.2. 독립운동 자금 횡령[편집]
첫째, 하와이의 동포들이 공동 결의로서 임시정부에 직접 납입하려고 한 인구 세금을 중간에서 가로채 유용하고, 정부에서 임명한 세금 징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징세 위원을 불법으로 처벌하였다.
둘째, 대통령에 위임 발행한 외국 공채의 수입도 거의 전부 유용하고 심지어는 수지보고조차도 하지 않았다.
셋째, 본래의 임무인 외교와 선전에 관해서도 하등의 볼 만한 성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편의 보고도 하지 않았다.

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 폐지를 의결하면서 주장한 부정, 비리 사항
# #

그가 주관하던 구미위원회는 밑에 파리통신부를 두고 외교업무를 직접 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동포의 인구세와 애국금까지 독점하는 등 임시정부 업무를 전횡하여, 대통령의 독주라는 비난을 받았다. 1924년 상해 임정 개혁파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난 후에는 임정으로 보내던 소규모의 독립운동자금마저 끊어버렸으며, 결국 구미위원회는 이승만이 탄핵된 뒤 1928년 해체되었다.

4.3. 친일파 대통령?[편집]

4.3.1. 반일 행보도 했다는 일부 주장[편집]

이승만은 종종 친일매국노로 비판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초기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일본 군함 이즈모호 폭파 시도를 미국 당국에 고발한 것, 반민특위 해체를 명령하고 친일파 인사들을 등용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을 탄압, 처형[14]시키고, 독립투사들과 그 가족들을 고문하고 연쇄살인한 매국노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공권력을 동원해 방해하고 그 매국노들을 공직에 중용한 일 때문이다.

다만, 리영희는 그의 책인 "역정: 나의 청년시대- 리영희 자전적 에세이"[15]에서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반일적 고집에 골치를 앓았다."라고 서술하여 이승만의 강경한 반일 성향을 언급했다.

강경한 대일발언과 달리 친일파 청산을 적극적으로 훼방한 행적이 존재하기 때문에[16]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해석의 여지가 남는다.

4.3.2. 일부 반일 정책과 발언들[편집]

대표적인 경우들을 거론한다면, 우선 1952년 1월 18일에 독도 해역을 지키기 위해 선언한 이른바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을 들 수 있다. 이승만이 평화선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언론들은 '오만 무례하고 불손한 한민족', '한국의 해양 주권 선언은 영토 침략'이라며 잔뜩 흥분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평화선을 불법이라고 항의하면서 고기잡이를 계속하자 이승만은 불법 어로를 하는 어선을 붙잡아 어민을 억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52년 9월 이승만이 해군에게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은 나포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은 뜨겁게 달아올랐다.[17] 나중에 그렇게 해서 한국 해군에 의해 억류당한 일본 어민의 수는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과정에서 44명의 일본 어민들이 죽었다.

두 번째로는 1954년 3월 14일 일본 도쿄 메이지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월드컵 극동 예선에서 원래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한 번씩 경기를 하는 홈 앤드 어웨이가 원칙이었지만, 이승만은 한국 땅에 절대 일본 축구팀의 입국을 허용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여 두 경기를 모두 일본 도쿄에서 치러야 했다.[18] 이때 일본으로 경기하러 가는 대표팀을 모아놓고 이유형 감독과 대표팀으로부터 승리하지 못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 도쿄대첩 항목 참고.
세 번째로 이승만은 1955년 12월에 미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을 희생해 일본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들 중에는 일본과의 맹목적 사랑에 빠진 이들이 있다고 경고했으며[19], 미국인들 이외에 도대체 누가 일본을 믿느냐고 개탄하기까지 했다.[20]

네 번째로 이승만은 대만(중화민국)이 일본[21]과 가깝게 지내는 걸 비판하면서 심지어 "4억 중국인은 다시 일본의 지배하에 노예가 되느니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의 속박을 원할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22]

다섯 번째로 이승만은 1959년 6월 15일 대일 경제단교 및 일본 왕래금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언론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단교 조치에 대해 그것은 일본을 제재하는 게 아니라 한국을 제재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23]

그 밖에도 이승만은 한국전쟁 초기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의 군대를 데려와야 한다는 미군의 제안에 "만약 그렇게 하면 공산군보다 먼저 일본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한 바 있다.[24][25] 또한 이승만이 미국에 있다가 조선이 해방되자 귀국하고 나서 가장 처음 한 일이 바로 조선총독부 건물 안에 들어가서 망치로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모조리 때려부수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물건이 보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울러 이승만은 조선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금괴를 일본한테 빼앗겼다고 자주 분통을 터뜨렸다고도 한다. #.

또한 그의 집권 기간 12년 내내 일본과의 국교 수립은 끝내 이루어 지지 않았다. 수교 협상이 있긴 했으나 적산 문제 등이 문제가 되어 결렬되었고, 일본과의 국교 수립은 박정희 집권 후, 정부 수립 17년 후인인 1965년에야 한일기본조약으로 달성되었다.

4.3.3.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 방해[편집]

이승만노덕술2
노덕술과이승만
노덕술에 관한 이승만의 국무회의록
노덕술 피검에 관하여는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비추어 정부가 보증하여서라도 보석하도록 함이 요망

불법조사관 2명 및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여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수립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반대하고 방해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고 해체된 것도 이승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히려 경찰은 반민특위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당시 글을 읽은 사람은 모두 친일 민족 반역 행위를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반민특위가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일제 치하에서 복무한 기술관료 모두가 아니라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자들이거나 일제의 식민지 독립 운동 탄압에 앞장서며 악영향을 끼치던 수백 명이었다. 한편 이승만이 친일파 출신을 그대로 등용하되 권력의 핵심에 손이 닿지 않는 한직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숙청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던 노덕술이나 김창룡과 같은 자들을 측근으로 두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했다.

반민특위 활동이 소급입법금지원칙 위반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급입법금지 대상은 이미 완료된 사실에 대한 입법(진정소급입법), 진행 중인 사실에 대한 입법(부진정소급입법)으로 분류된다. 친일반민족행위 문제는 통상 전자에 해당하는데, 진정소급입법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위헌이지만 예외적으로 정의실현 등의 차원에서 소급입법을 할 공익이 더 크다고 한다면 허용된다는 것이 한국의 학설과 헌법재판소 판례의 견해다. 한국의 경우, 군사 독재 문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제 두 부류에 한해서 진정소급입법을 허용하고 있는데 과거사 청산같이 그에 대한 예외 역시 정당하다면 보편적으로 인정된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에서 본 헌재의 판례[26]

이승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국내에서 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일부를 권력에 끌어들인 대신 제공해준 대가라고 보고 있으며, 당시 중국의 국공내전이 발발하고대구 10.1 사건제주 4.3사건여순반란사건 등을 진압하고 이승만 정권의 강경한 반공을 실천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에 협력해줄 수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용서해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해결을 위해 친일파 청산에 대해 이승만이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러한 스탠스는 이승만 개인만의 입장이라고 보기는 힘들었고, 김구, 조소앙, 신익희 등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우파 인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공유된 인식이었으며,[27] 세부적인 스탠스 차이는 있지만 민족통일과 정부 수립 등의 과제를 친일파 청산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친일파 청산은 추후에 해야 한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을 번 친일파들이 그걸 착실하게 이용해서 청산 시도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게 문제가 되버렸지만... 이후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는 21세기가 되기까지 친일파 청산은 시도조차 되지 못했으며[28] 현재도 인명사전 발간으로 친일파의 존재들이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이후 관련 처벌은 소급입법으로 가는 문제라 앞으로의 길도 난항이 예상되는 상태다. 즉, 처리해야할때 제때 처리하지 못해서 오늘날까지도 큰 골칫거리로 남은 것이며 우파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4.4. 미국의 앞잡이?[편집]

'이승만은 친일파다'라는 주장 말고도 이승만을 비하하려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다', '미국 하수인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오히려 미국 대통령들을 비롯한 많은 미국 인사들과(해리 트루먼존 하지아이젠하워 등) 뜻이 달랐고 자주 부딪혔다.

왜냐면 이승만은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활용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내에서 "Sick man Rhee"가 이승만의 별명이었을 정도였다.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미국에서 나왔다.[29] 미국인들은 당연히 남의 나라인 한국의 입장이 아닌 자국 미국의 입장에서 볼 수 밖에 없으니 이승만이 맘에 들지 않았겠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승만은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뽑아먹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뽑아먹는 대통령이었다. 이런 사람이 미국의 앞잡이라 할 수 있는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뿐만 아니라 그 전인 1946년 6월에도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이승만의 정치 자문가였던 로버트 올리버에게 "그의 그치지 않는 반소언동 때문에 미국이 장차 한국에서 설립할 어떤 정부에도 이승만은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기까지 했고 장택상에게 이승만을 정계에서 축출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30]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라서 이승만은 미국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심지어 1953년에는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는 에버레디 계획을 세우기도 했을 정도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 아이젠하워가 한국과 일본이 수교를 맺고 잘 지내길 요청했을 때도 이승만은 거절했다. 아무것도 없는 신생약소국이자 한국전쟁에서도 미국 덕에 나라를 지킨 입장이었음에도 이런 대응을 한 것이다.

이런 이승만의 행보를 보면 아무리 봐도 그가 미국의 앞잡이였다거나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는 식의 평가는 절대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승만은 미국을 국익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다.

4.5. 순수혈통주의에 기반한 국제입양[편집]

제인 정 트렌카 대표는 한국전쟁 이후 혼혈아동의 국제입양에 대해 "당시 많은 나라가 전쟁을 겪었다. 또 전쟁 과정에서 혼혈아동을 포함해 보호를 필요로 하는 많은 아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나라도 '아버지의 나라'로 보낸다며 이렇게 대거 입양을 보낸 사례가 없다"며 "심지어 혼혈아동이 전쟁을 벌인 적군의 아이들도 아니었는데 왜 이들을 내보내야 했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고 말했다. #
한국의 해외입양은 1953년 이승만 정권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승만은 '일국일민(一國一民)주의'를 정치적 신념으로 내세우며 한국전쟁 당시 외국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은 아버지의 나라로 강제로 보냈다. 심지어 키워주는 어머니가 있음에도 해당 가정을 해체시키고 혼혈 아동은 무조건 강제로 이주시켰다.

4.6. 정부 수립과 건국[편집]

2000년대 중반 이후 뉴라이트[31] 진영을 중심으로 건국절 논란이 촉발되면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앙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위 '이승만 국부론'이 바로 그것인데, 그에 따르면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건국한 사람이며 따라서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과 같은 건국의 아버지라는 주장이다. 반면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측에서는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등으로 자유민주주의 헌정을 오히려 파괴한 인물이며 종국에는 4.19 혁명으로 불명예 퇴진해 이미 국부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본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보는 평가는 현대 한국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첨예한 사안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편 이승만이 남긴 여러 문헌 자료는 일각의 평가와 달리 이승만 스스로는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보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는 제헌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한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 나는 이 대회(大會)를 대표하여 오늘의 대한민주국(大韓民主國)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 나라에 유일한 민족 대표 기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公布)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道)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 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大勢)에 연유해서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우리 애국 남녀가 해내 해외(海內海外)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 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온 것이니,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대한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民國年號)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는 전 민족(全民族)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 정부는 완전히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 정부임을 공포하는 바입니다. ···
 
대한민국 30년 5월 31일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아울러 이승만은 3.1운동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1919년을 원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연호를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한 이유는 크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는 민주국의 기초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때 잡혔음을 표시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무저항주의를 시작해서 성공한 역사를 드러내기 위함이며, 셋째는 남녀 선열의 위대한 공업을 인증함이며, 넷째는 단군기원이 지나치게 상고사적이어서 조상의 이름만 판다는 비판에서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를 통해 이승만은 본인 스스로 자유민주주의를 들여와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승만의 역사관은 제3대 대통령 선거 공보물 1948년 약력에 기미년 3월 1일로부터 기산하여 29년만에 자주민국을 부활함이라고 적어놓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정리하자면, 적어도 이승만 본인은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의식이 없었으며, 도리어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기원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았다. 한편 이승만 건국론을 전면에 내세운 뉴라이트 진영의 과거 사상적 기반이 주체사상이었기에 사상적 배경과 극단성은 그대로 둔 채 숭배의 대상만 김일성에서 이승만으로 바꾼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32]
[1] 대학은 커녕 학교 자체를 못 다닌 경우가 많아서 군에서 배운 기술로 먹고 살게되는 경우도 많았다.[2] 유영익, '1950년대를 보는 하나의 시각', "한국근현대사론", 262p[3] 한국전 참전 장성들의 회고에 자주 나오는 내용인데, 정작 청년들을 모아서 입대를 시켜도 군수물자 지원이 제대로 안돼서 훈련도 못시켰다는 이야기들이 많다.[4] 발간 당시에는 별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몇 달 뒤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5]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2년 앞선 1896년 창간되었으나 주 3회 발간됐기 때문에 일간지는 아니었다. 독립신문이 일간으로 바뀐 시점은 1898년 7월로 매일신문보다 늦다.[6] 이제는 외교 업무가 너무 힘들어져서 대사 파견이 기본이 되었기에 예전만한 존재감이 안 느껴질 뿐이다.[7] 두 사건은 불과 1년 간격으로 일어났다[8] 특히 아일랜드는 독립 후에도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지 못했고, 이는 아예 아일랜드 내전으로까지 번졌다.[9] Hyun Soon, 《My autobiography by the reverend Soon Hyun 1878-1968 : with historical documents, photographs and analysis》, Chapter 16. 三一運動과 我의 使命, 2003,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Press.[10] 이승만이 1941년에 미국에서 출판한 일본 내막기에서도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미국인들의 치부를 자극했다. 펄 벅은 당시 한 잡지에 기고한 서평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미국이 1905년에 수치스럽게 파기했다는, 미국인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이승만이 지적해줘서 기뻤다'고 썼다.[11] 그런데 교포들을 대상으로 활동한 건 주로 안창호였고 이승만은 주로 미국 현지인과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여론 조성을 하는데 집중했다.[12] 조선총독부 경무국 상해정보(고경 제245호 : 1923.1.28) <일본외교사료관자료>[13] "이승만은 자신의 라이벌들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그는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 - "우남이승만과 건국사"[14] 보도연맹 학살 사건 당시 독립운동가도 처형당했다.[15] 창작과비평사/ 1988년/ 370쪽[16] 사실 반민특위가 처벌하려 했던 친일파들은 실무 부역자가 아니라 당시 기준으로도 도저히 쓸 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일제에 부역하거나 직접적으로 독립운동 탄압에 가담한 자들이었다.[17]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61~264쪽[18]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쪽[19] 당시 미국 국무부 내부에는 한국을 희생해서라도 일본의 세력 팽창을 이루어내려는 친일 성향의 미국인 관리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승만의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이 굉장히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20]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70쪽[21] 중화민국과 일본은 1954년에 중일전쟁에 대한 강화조약을 체결해 외교관계를 회복했고, 장제스는 2차대전 승전 후 친일 세력을 강경하게 처벌한 것과는 달리 대만으로 피난간 이후에는 현지의 식민 체제 협조 세력에 대해 온건하게 대해준 편이다.[22]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71쪽[23]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236쪽[24] 이승만 집권기의 한국은 미국이 경제 원조를 끊으면 당장에 나라가 망할 만큼 경제 사정이 매우 부실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을 만큼, 반일 감정이 무척이나 강했던 것이다.[25] 이승만이 보도연맹 학살을 저지르고 "공산당이었다면 부모 형제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해야 할 것이다."라는 망언을 남겼을 정도로 광신적인 반공주의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일본군이 국군을 돕겠다고 하면 그렇게나 증오하던 공산당에게 지는 한이 있어도 일본부터 쫓어내겠다고 말한 이승만이 얼마나 일본을 진심으로 증오했는지 알 수 있다.[26] 해외에서도 소급입법금지의 예외를 규정하는 경우는 꽤 있다. 가령, 남미의 경우 군사 독재 관련 과거사에 관해서는 소급입법의 예외로 둔 사례가 있으며 그 옛날 나치 문제, 기타 전쟁 범죄의 경우도 문제가 발생한 당시의 당사국에서는 처리가 곤란한 문제인 바 소급입법의 예외로 규정하곤 한다.[27] 사실 일각의 단편적인 이해와 달리 북한 역시 최승희, 황철, 문예봉 등 친일 경력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정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은 기용했다.[28] 그나마도 민간의 움직임이었지 국가적 움직임은 없었고 친일인명사전도 여야간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되는 등 수많은 난항을 겪었다.[29] 미국이 제거를 실제로 실행하지 못한 이유도 이승만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지도가 워낙 높아서 제거했다간 역효과만 날 것 같아서였다.[30] 이 존 하지는 문제가 많았는데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제임스 매트레이 교수는 미국이 그를 미군정 사령관으로 임명한 건 실책이었으며 그는 한국의 역사나 한국인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고 행정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정부조직을 이끄는 일에 문외한이었다고 평했다.[31] 식민지 근대화론 주장, 독립운동가 폄하,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 부정 등 종일(從日)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반일의 대표격인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찬양하는 심히 모순적인 행각을 보여주고 있다.[32] 실제로도 뉴라이트가 이승만 외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는 것과 북한이 김일성 외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는 것은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CC-white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923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

이승만/긍정적 평가

최근 수정 시각: 
상위 문서 아이콘  상위 문서: 이승만
이승만투명
이승만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1. 개요2. 정치에 대한 평가
2.1. 대한민국 정부 수립2.2. 남녀평등 투표권 부여2.3. 시장경제체제 도입2.4. 대한민국 공산화 저지2.5. 자유민주주의 도입2.6. 제대로 된 사병 급여 비율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1. 농지개혁법 시행3.2. 초등교육 의무화 및 교육개혁3.3. 고등교육 투자
4. 외교에 대한 평가
4.1.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4.1.1. 반공포로 석방
4.2. 6.25 전쟁 초기 미국의 지원 유치4.3. 전후 미국의 대규모 지원과 원조 유치4.4.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5. 국방•안보에 관한 평가
5.1. 6.25 전쟁 당시 군부 인사
6. 경제에 대한 평가
6.1. 경제개발의 초석 마련6.2. 한국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6.3.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작성하는 문서이다.
이승만은 아시아의 반공국가 및 비공산국가군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하여서 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런 지도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인이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였다. 성장하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반공지도자일 뿐 아니라 반(反)식민지 지도자였다.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이승만은 극동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 이런 이미지는 그가 한국의 동맹국인 강력한 나라들의 의지에 끌려다니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맞서 전쟁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의 회고록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 中
그는 그의 몸무게 만큼의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인 그리고 애국자 중 한명이다.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이승만은 내가 만나본 한국인들 중 고령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가장 날카롭고 월등히 뛰어난 인물이다.

영국 외무상 셀윈 로이드(Selwyn Lloyd)
이 박사 밑에 국무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 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고 하야함은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1]

2. 정치에 대한 평가[편집]

2.1. 대한민국 정부 수립[편집]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이승만
국부는 한 나라에 한 분, 이승만 박사뿐이니 내 이름 앞 국부라는 말은 떼어내라.

이승만은 건국의 주역이다. 다만 3선 개헌은 아쉽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2009년 인터뷰 中#[3]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입국하여 과도민주의원을 거쳐 UN결의안에 따라서 제헌의회 총선거를 거친 뒤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다.

이승만은 38선 이남 지역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 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을 폄훼하고자 하는 측에서 그를 분단의 원흉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고는 한다. 그러나 소련은 해방 직후부터 북한 지역에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을 수립한 뒤 인민민주주의 정권울 확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내세우는 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고 실제로 스탈린은 동유럽과 아시아 각국에 연립 정권을 구축한 후 공산화를 진행하도록 지시하였다.
2. 모든 반일민주주의정당-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을 수립하는데 협력할 것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와 제25군에 내린 스탈린의 지시
반일민주주의 정당 및 단체 범연합을 기반으로 한 북조선의 부르주아민주주의 개조는 지극히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소련군 정치국장 이오시프 쉬킨
이러한 유물사관에 입각한 전략을 기반으로 북한 지역에서는 공산체제가 이미 굳혀져가고 있었다. 김일성과 소련군정이 자리잡은 38선 이북은 1946년 2월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만들져서 토지개혁을 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 하고 군대를 개편하였으며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을 숙청하였다.

이승만도 원래는 한반도 전체에 민주국가를 수립하고 싶어했으나 이러한 당시 상황이 현실적으로 그것을 어렵게 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남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이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혁적 조치에 대응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분단의 원흉은 이북에서 단독 국가 수립을 이미 진행하고 있던 김일성일 것이다. 실제로 김구가 김일성을 설득하려고 시도를 했으나 김일성은 비협조적이었고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남한지역에서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보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좌우합작이라는 것도 목표는 이상적이었으나 이미 박헌영과 공산당이 미제의 술책이라고 비난하고 부정하면서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겉으로 듣기엔 그럴싸하지만 동유럽은 실제로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 공산화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자신들이 키운 소위 '작은 스탈린'들을 동유럽 각지로 보내 '화물열차 정권'을 만들었다. 이 화물열차 정권들은 비공산세력과 연립정부를 세우고 군대, 경찰 등 권력 기구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연립정부 안에 있는 비공산세력들을 축출하거나 정치테러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치러 정권을 장악하며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화시켰다. 체코슬로바키아가 그 대표적인 예시로 총선에서 제1당이 된 공산당은 연립정부를 세우고 권력기구를 장악한 뒤 1948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38선 이북의 김일성 세력도 바로 이 화물열차 정권이었고[4] 좌우합작이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가면 동유럽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2.2. 남녀평등 투표권 부여[편집]

이승만 정권은 20세 이상 전국 모든 남녀에게 모든 선거에서 평등한 투표권을 부여했다. 지금의 현대화된 선진국 한국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뭐 대단한 건가 싶겠지만 당시 한국은 이제 막 전근대 왕조국가와 식민지에서 벗어난 시점이었고 국민 중 대다수는 남녀평등한 투표권은커녕 투표권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개념도 없는 상태였다. 벨기에에 남녀 동등한 투표권이 생긴 것이 한국과 같은 1948년이었고, 그리스가 1952년, 멕시코가 1953년, 스위스는 1971년, 포르투갈은 1976년에서야 남녀간에 완전히 동등한 투표권이 생겼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초대 내각을 꾸릴 때 임영신을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이었으며 불과 근래까지도 여성 장관은 드물었던 것을 생각하면 1948년 그 시대에 초대 내각 상공부 장관에 여성을 임명한 것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53년에는 원래 여성에게만 적용되던 간통죄를 남녀 모두에게 적용시켰다.

그리고 여성들에게도 의무교육을 비롯한 평등한 교육기회를 초기부터 부여하면서 기능직 노동자부터 사무원, 의사, 교사, 군인, 경찰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시작되었다. 숫자는 적었지만 여성 판사, 공학사들도 이승만 집권기 당시에 나타났다.[5] 이런 변화들에 힘입어 여성 국회의원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들은 조선 수백년을 포함하여 오랜 기간 차별 받아온 한국의 여권 신장 역사에 엄청난 변화였다.[6]원조 페미니스트

2.3. 시장경제체제 도입[편집]

광복 당시 국내에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나 대중들 70% 이상의 다수가 공산주의[7]에 우호적이었다. 그 시기는 세계 일부 국가들을 시작으로 레닌식 공산주의가 국가체제로 채택되어 돌아가기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은 초창기였고[8]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체제일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시대였다.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공산주의는 반제국주의적이다는 명분으로 신생 국가들에게 독립을 지원하거나 독립 후에도 지원하다보니 신생 국가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소련 편에 붙거나 중립국으로 가더라도 외교만 중립인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문제점과 미래를 명확히 꿰뚫어 봤다.
1. 재산을 나누어 가진다 : 재산을 나누어 가지면 정차 저마다 일은 하지 않고 얻어먹으려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2. 자본가를 없앤다 : 자본가를 없애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기 어렵고 사람의 지혜가 막혀 물건들이 진보되지 못한다. 자본을 폐기하는 것보다 법률로 노동과 평등 세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낫다.
3. 지식계급을 없앤다 : 모든 사람들의 지식 수준을 높여서 현재 학식으로 양반 노릇 하는 사람들과 비등하게 되게 해야지, 지식계급을 없애자고 하면 안된다.
4. 종교단체를 혁파한다 : 평등과 자유의 사상이 열교확장되는 중에 발전된 것이니 이를 없애는 것은 인류덕의상 손해가 클 것이다.
5. 정부, 군사,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한다 : 공산당 속에서도 이론이 많을 뿐더러,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러시아만 봐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자기들도 다 알고 있다.

이승만이 1923년에 쓴 '공산당의 당부당'의 내용 중 공산당의 부당한 점 요약.

위에 인용된 '공산당의 당부당'을 이승만이 1923년에 썼는데 이 때는 레닌도 생존해 있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지만 마치 이후의 일들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생활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체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미국이 풍요롭고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는 것을 목격하며 우리도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한반도가 처한 선택의 기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한 것의 혜택은 지금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 공산주의를 선택했던 국가들의 결말을 보면 그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이승만의 주도 하에 대한민국은 정부수립과 함께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제헌헌법은 기간산업 및 주요산업의 국공유화, 대외무역의 국가통제, 사영기업의 국유화와 경영통제 등 사회주의적 통제요소들을 대폭 담고 있었다.# 이는 국가가 공공복리를 명목으로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954년 개헌을 통해 이러한 계획경제적 헌법조항들을 시장경제 조항들로 전환하였다. 개헌 이후 주요산업과 자원에 대한 국공유화는 헌법에서 삭제되었으며 대외무역의 국가통제의 기준도 법률로서 규정하도록 제한하였다. 또한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을 국유화시키거나 경영통제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기업과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된 자유시장경제를 대한민국에 확립시키고 고도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4. 대한민국 공산화 저지[편집]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이승만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터졌음에도 그 체제를 유지해낸 것에 기여한 바가 있다. 일각에서는 어차피 남한에 진주한 것이 미군이기 때문에 남한이 자본주의를 도입한 것은 이승만이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이승만이 만약 공산주의를 그만큼 배척하지 않았다면 6.25 당시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항복하거나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물론 끈질긴 항전의식과 별개로 그의 군사적 무능은 비판받을 일이다. 제대로 된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아 초반부터 밀리고, 애꿏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실정이 있었으며 이를 단지 공산주의를 방어하려 했다는 점에서 미화하려 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다만 훗날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외교적으로 미국을 붙들어 놓는 데 실패하면서 끝내 공산화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미국을 붙드는 것은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방어하는 데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업적으로, "이승만이 없었거나 다른 인물이 이승만을 대신했어도 어차피 남한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이승만의 역할을 낮게 잡는 평가라고 볼 수 있다.

2.5. 자유민주주의 도입[편집]

이승만이 원한 것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였다. 나중에 사사오입 개헌과 부정선거 등으로 얼룩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했다는 점 자체에 대해선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왜냐면 이승만 집권 기간 동안 국민들은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의희 의원 선거 등 자신의 손으로 직접 뽑는 민주주의 정치 경험을 반복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지만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도 결국은 이승만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가치로 정부를 수립했고 공교육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 가치에 맞지 않은 부정선거 같은 일이 일어나자 국민들의 시위가 일어나게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이승만이 도입한 지방자치제는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가 거의 30년이나 지나서야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부활했다.

다만 이에 관해서는 이승만 본인이 한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원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것, 그리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한 과정 자체가 자유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연호 문서와 3.1운동건국절 논란 등을 참조할 것.

2.6. 제대로 된 사병 급여 비율[편집]

이승만 시기의 장군 대비 사병의 월급 비율은 10%로, 2022년까지도 최고치를 유지했다. 이 기록은 2023년 병장 월급이 100만원이 되고서야 처음 깨지게 된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60년 3월 기준으로 병장 급여를 120환으로 지급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준장의 급여인 1200환의 10%였다. 2023년 기준 준장의 급여가 대략 (수당 포함) 900만 원인 것을 감안하고 그 당시의 비율대로 보면 병장의 급여는 90만원이 되는데, 병장 월급은 100만원이므로 현재는 10%가 넘는다. 또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현재 9급 공무원 초임에 해당하는 5급 26호봉이 360환이었으니 당시 병장은 공무원 초임의 1/3을 받은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매우 오래 지낸 덕분에 사고방식이 사실상 미국인이었고 그래서 일하면 돈 준다는 사고방식이 뼛속 깊이 박혀있었다. 그래서 사병의 급여는 제대로 지급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는 장성 대비 사병 월급 비율이 적절했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액수로만 보면 생활하기 부족했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나라 자체가 가난했고 화폐 가치가 극도로 불안정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장교든 사병이든 절대적인 금액으로는 부족했고 영관 장교조차 월급만으로는 가족들 입에 겨우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군인들의 증언[9]들을 들며 이 병장 월급에 대해 말이 안된다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당시 절대 빈곤에 처해있었던 한국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당시 영관 장교들조차 월급만으로는 일가족이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들었을 정도니 절대적인 금액으로는 당연히 적은 금액이며[10] 당시 장군이나 공무원 월급을 고려했을 때 사병 또한 제대로 급여를 쳐줬다는 뜻이다.[11]

그러나 이후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사병 급여는 동결되었으며 전두환 정부 중에는 병장 급여가 준장 급여의 1.5% 수준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병 급여가 대폭 인상되었으며, 김영삼 정부에서 횡보하다가 노무현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권에서 높은 인상률을 보였다.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편집]

3.1. 농지개혁법 시행[편집]

광복 이후 가장 중요한 현안이자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농지개혁을 이루었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이루기 위해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앉혀서 대지주 계층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식의 농지개혁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농지개혁법은 소작농들에게 농지의 소유권을 주어 이들을 자작농으로 전환시켰고 이를 통해 이승만은 농업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고 부족한 식량을 증가시켰으며 지주들의 경제적 수탈을 해소하였다.

반면 북한에서는 한국보다 먼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형식으로 농지개혁을 했었으나 그에 대해 이승만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북한식 농지개혁(무상몰수 무상분배)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의 노예가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의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이승만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 전쟁 초반의 패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북한이 전쟁 초기 남한 농민들에게 선전한 토지분배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얻어낸 토지를 뺏어서 옆집 빈둥거리는 녀석이랑 똑같이 공짜로 나눠주겠다는데 어떤 농민이든 환영할 리가 없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기 직전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얘기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국민 절대다수가 농민인 이 시기에 농심은 곧 민심이자 여론이었다. 한마디로 농지 개혁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닌 대한민국의 안보 정책이기도 했다.[12]

소작농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조항은 있었지만 머슴[13]들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조항은 없었기 때문에 1950년 6월 25일 쳐들어온 북한군이 머슴들한테도 땅을 분배한다고 약속하자 땅을 분배 받지 못해 불만을 품었던 머슴들이 북한군에 협력하는 사례도 일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은 농촌 내의 유효수효를 확대하여 공업생산의 발전을 자극하였고 지주-소작 관계를 무너뜨리고 지주 계급을 무너뜨리면서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판을 만들었다. 남미나 제3세계 국가들이 토착 지주 계층의 반발로 산업화나 경제 개발 정책이 실패한 점[14]을 생각하면 농지개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한민국이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할만하다.

2023년 콜롬비아에서 자국의 개혁을 위해 이승만의 토지개혁을 참고하고 싶다고 밝혔다.

3.2. 초등교육 의무화 및 교육개혁[편집]

낮은 교육 수준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교육을 최우선시하였고 여성도 동등한 교육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전국민의 초등학교 6년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사업을 위해 당시 문교부 예산의 최대 80%를 할당했으며 광복 당시 초등학교 수는 2,800여개였고 한국전쟁 때문에 전후에는 이보다 훨씬 적었으나 1960년에는 4,600여개로 늘어났다. 그밖에도 이승만은 전쟁 중에도 전시하교육특별조치요강을 통해 수업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며 교육을 고취하였다. 그 결과 1951년 69.8%까지 떨어졌던 의무교육 취학률은 1959년에는 전국 적령 남녀 아동의 95.3%로 까지 늘어나 당초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5]

초등교육 의무화와 더불어 수만개의 국문보급소를 전국 각지에 설치하고 성인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벌여서 1958년까지 550여만 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16] 이런 노력으로 광복 당시 80%였던 문맹률을 1959년에는 22%까지 낮췄다. 중학교도 광복 당시 불과 97개에서 1960년에는 1,000여개까지 늘어났고 고등학교도 1952년 당시 304개에서 1960년 640개로 늘어났다. 중학생 수도 5만여명에서 53만여명으로 10배 넘게 늘었다.[17] 그리고 교육 행정을 일반 행정에서 분리시키고 교육자치제도 실시하여 교육 지원 예산이 기존처럼 일반 행정으로 쓰이지 않고 교육 사업에만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이 시행한 이런 교육개혁들은 매우 중요한 효과들을 가져왔다. 먼저, 전통 사회에서의 신분 차별 교육과 달리 전국민에게 남녀 불문 계층 불문 동등한 교육 기회를 부여하여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승만 시절 학교에서 강조된 실용주의적 '일인일기' 교육과 과학기술 교육은 기존의 한국 사회에 팽배하던 문(文)을 숭상하는 숭문주의 문화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가치관을 확산시켰다.[18] 이러한 의무교육들과 후술된 고등교육 확대로 배출된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은 이후 한국의 성장의 근본적인 토대가 되었다.

당시 학교에서 이루어진 사회생활[19]같은 교과내용을 통해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부정선거 이후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 퇴진 운동에 나서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을 물러나게 한 것도 아이러니하게 그가 시행한 의무교육이 매우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20]

3.3. 고등교육 투자[편집]

이승만은 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의 복구 과정에서 고급인력들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광복 당시 전문학교 이상의 대학 졸업자는 전체 인구의 0.2% 미만에 불과했다.[21] 그리하여 초등교육의 의무화뿐만 아니라 국가를 이끌 고급인력의 양성을 위해 고등교육에도 투자하여, 김흥배로 하여금 외국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설립하도록 도와주었고, 공학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인하공과대학(현재 인하대학교)을 설립하는 등 대학 설립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과 전문학교는 광복 당시 19개에서 1960년 68개로 대폭 늘어났고 대학생 수는 10만명으로 늘었다.
조금만 더 견디면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전후 복구와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고급 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하다. 그 때를 위해 대학 재학생들을 보존시켜야 한다.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이승만

그리고 이승만은 한국전쟁 중에도 대학생들만은 보존해야한다는 신념으로 1951년 2월 18일 대학생 징집연기조치를 시행하고, 부산에 '전시연합대학'을 설립하여 피난 온 대학생들의 학업이 끊기지 않게 그곳에서 수업을 계속하여 고급 인력을 보존하였다.

4. 외교에 대한 평가[편집]

나는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나도 역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예측 불가능한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을 많이 되새겨 보았으며, 이 노(老) 정치가가 얼마나 지혜로웠는가를 더욱 새롭게 인정하게 됐다.

리처드 닉슨 부통령의 회고록 中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하는 내내 일관되게 외교독립론을 견지하였다. 국제 정세를 읽는 눈 만큼은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물론, 역대 대통령 가운데에서도 가히 독보적이었다. 미국에서 국제법과 국제정치를 공부했고 미국 각계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인식과 소양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있으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요구한 일본 내막기를 저술했다. 또한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미일 관계, 미일 개전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고 미국에서 일본의 위험성, 호전성, 잔혹성을 알리는 활동을 끊임없이 개진했다.[22]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긴 것도 미국으로 하여금 이 전쟁에 개입하고 책임을 지우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외교적 책략에 미국이 홀딱 넘어가서 미국은 한국이라는 늪에 넣은 발을 당장에 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한반도 분쟁에 있어서 북한의 군사 행동을 장기간 저지할 수 있는 명분과 더불어 한국전쟁 때 발생할 수 있는 미국의 태도 전환에 대한 억제력을 확보했다.

또한 독도 문제에 있어서 일본을 상대로 초강경책을 펼쳤다. 평화선 선포를 통한 독도의 영유권 편입도 이런 정책의 일환이었다. 아무리 당시 일본이 패전국이었다고 하지만, 두 나라 간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배짱으로 밀어붙인 외교 정책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평화선 선포만큼은 잘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23]

이러한 성공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교전을 펼칠 때 강경책을 매우 선호했다. 미국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강한 요구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저대로 못 피해가도록 도박 수까지 던지며 밀어붙였다.(반공포로 석방 사건 등.) 이 때 모든 사안을 본인이 철저하게 본인이 주도하여 일선 외교관들은 이승만의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만 수행했다. 이런 강수가 잘 먹힌 대표적인 사례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휴전 협상을 마무리 짓고 발을 빼려는 미국을 제대로 붙들어 매어 놓았고 이승만이 성사시킨 이 조약은 한국의 안보와 발전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효과는 2023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의 모든 단독행동들, 나의 모든 말들은 미국을 괴롭히는게 아니라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미국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될 것이다. 나아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이승만이 리처드 닉슨 부통령에게 1953년에 한 말

이승만의 위 발언은 미국이 북한과 소련을 상대로 유리한 협상테이블에서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미친놈처럼 굴었다는 얘기인데 그의 외교적 행보들이 아무 생각없이 허투루 된게 없음을 알 수 있다. 저 말조차도 사실은 한국의 이익을 위해 그가 "내가 하는 행동들이 결국엔 미국에도 이익이 된다"라며 미국을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다.[24]

혹자는 미국의 고위인사들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 경우가 꽤 있는 것을 이유로 그의 외교력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승만은 이렇게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활용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게 바로 당시 미국 고위인사들 사이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이유다. 이승만은 국익을 위해서 철저히 미국을 이용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선 이승만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는 일각의 프레이밍과 달리 이승만이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승만을 공격한답시고 한편으로는 미국 고위인사나 기관의 악평을 인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다.

4.1.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 조약을 통해 이승만은 북한의 적화통일 의지를 꺾고 한국이 아시아의 제1세계 국가로서 발전하는 원동력을 확보하여 체제경쟁에서의 승리를 가능케하였다. 안정적인 힘의 균형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 가능한 것은 사실상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이승만의 긍정적인 평가 중에서도 단연 1순위로 꼽힌다.

4.1.1. 반공포로 석방[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반공포로 석방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6.25 전쟁 휴전 직전 반공포로를 석방해 그들의 북송을 막았고, 이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4.2. 6.25 전쟁 초기 미국의 지원 유치[편집]

냉전이 격화되고 있던 세계 정세와 트루먼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생각하면 6.25 당시 미국이 지원을 하리라는 것은 어느정도 예상된 바였다.

그렇지만 6.25 전쟁 초기 이승만이 최선을 다해 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지 못했다면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지연전을 전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주미 대사 장면에게 훈령을 내려 미국의 지원을 촉구하라고 지시했고, 맥아더와 무쵸 주한 미국 대사에게 '더 많은 무기와 10일치의 특정 탄약과 F-51 전투기'를 지원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통해 한국군의 부족한 무기와 탄약이 보충되었으며, 공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지연전을 벌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승만이 전쟁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6.25란 비극을 초래했다고 비난받을 수 있겠지만, 그가 6.25 당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도망다니기만 했던 무능한 지도자라고 폄훼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4.3. 전후 미국의 대규모 지원과 원조 유치[편집]

이승만은 우리 미국을 궁지로 몰아 넣었고,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 국무부 차관보 월터 로버트슨

이승만은 미국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알았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할 줄 알았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정세를 활용해 그를 달래려는 미국으로부터 수많은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얻어냈다. 한 예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 8억 달러를 끌어오는데 성공했는데 이는 후에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체결하며 일본에게 받은 무상차관 3억 달러보다도 훨씬 많은 돈이었다.[25]

4.4.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평화선 문서
 참고하십시오.

5. 국방•안보에 관한 평가[편집]

5.1. 6.25 전쟁 당시 군부 인사[편집]

이승만은 6.25 직전 국군에 유능한 인사들을 중용하였고, 이는 전쟁 당시 한국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당시 한국군에 일본군 부역 경력이 있는 사람은 굉장히 많고, 이것이 현대까지 논란이 되곤 한다. 하지만 광복 시점까지 수백명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임시정부의 광복군 인사만을 중용하는 데 집착했다면 국군의 정통성은 살릴 수 있었을지 몰라도 북한의 남침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선엽,[26] 김종오,[27] 김석원,[28] 정일권,[29] 이종찬[30] 등은 친일 경력이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북한군의 침략을 저지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표되는 반격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일방적으로 친일파만 기용했다는 것도 근거없는 비판인데, 광복군 소속이자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소속이었던 김홍일[31]손원일[32]이범석[33] 등 군부 수뇌부에는 독립군 출신이 어느정도 존재했다. 하다못해 제일 무능하다고 비난받은 신성모도 임시정부 출신이었다.

이승만은 친일 경력이 있는 자라도 능력만 있다면 기용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이 패망하지 않게 하는 데 기여했다.

6. 경제에 대한 평가[편집]

6.1. 경제개발의 초석 마련[편집]

1960년대 이후의 경이적인 경제성장과 국가발전은 그 이전의 이승만 정부에 의한 전제조건의 구축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로버트 올리버

6.25 전쟁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고 당시 한국 경제의 상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절망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폐허가 된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기반을 닦기 위해 힘썼다. 그 예로 충주 비료 공장, 한국유리공업, 문경 시멘트 공장 등을 설립하고 PL-480(한미잉여농산물원조협정)을 맺었고 이른바 삼백산업[34]으로 불리는 신흥 산업을 번성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상품을 생산하게 한 뒤 한국에는 원조자금을 지원하여 그 원조금으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필요한 상품들을 수입해서 쓰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체적인 공업생산력을 갖추는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체 공장들을 세운 것이다.

1955년에는 영암선을 개통하여 석탄을 서울로 직송하여 연료를 장작에서 석탄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벌거숭이가 되어 파괴되는 산림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었다. 기존에 전국에서 산에서 나무를 베어 장작을 쓰는 방식으로 생활을 하느라 산이 거덜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한국은 아무런 기반도 없는 말 그대로 제로의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1950년대 말, 한국의 절대 빈곤은 거의 50%에 달했다.[35] 산업의 대외의존도는 90%에 이르렀고, 공업생산은 일제 말기의 절반 수준도 안 되었다. 1959년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작성한 <퀼른 보고서>는 "많은 면에서 대한민국은 대여된 시간 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 원조 없이는 한국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36] 왜냐면 폐허의 상황에서 임기 10여년 동안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한다거나 당장의 가시적 효과를 낸다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1970년까지 한국 정부 재정의 약 3분의 2가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단한다면 한국은 당장 재정 파탄이 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당장의 임기응변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썼고 그래서 절대 빈곤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 예산을 전국민의 6년 의무교육 시행에 쏟아붓고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료 공장과 시멘트 공장을 지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국방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예산을 쓴 곳이 바로 교육 예산이었다.

그리고 기업, 산업체의 기술자들을 해외로 연수 보내어 기술력을 배워오도록 했고 학생들을 국비로 해외에 유학을 보내고, 국내에도 대학교들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1953 ~ 1960년까지 정규 유학생 자격으로 4,884명의 학생이 해외로 나갔으며[37], 기술 훈련 유학생 자격으로는 1953 ~ 1961년 동안 2,309명이 해외로 나갔다.[38] 그리고 교육계, 경제계, 언론계, 노동계 등 각계 지도자 940명이 미국에 연수를 다녀왔다. 이게 어느정도였냐면 1956 ~ 1957년 기준으로 미국내 외국인 유학생 중에 한국인이 캐나다와 대만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였다.[39] 그 외에도 9,186명의 국군 장교와 부사관들이 미국에 파견되어 전문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이런 각종 유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갔다.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인해 기존에는 유학이라고 하면 일본 유학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이런 정책은 그런 유학 패턴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일본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40] 이렇게 유학 보내진 인재들과 국내에서 양성된 대졸 고급인력들은 이후 박정희 정부 시기에 맹활약하며 한강의 기적을 이끌게 된다.

즉,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이승만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 가능할 수 있었다. 동남아 국가들은 물론이고 인도 같은 나라가 소수의 엘리트 인력이 중요한 달탐사 로켓은 쏘아올릴 수 있으면서도 나라 전반의 산업화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이유도 국민 일반의 교육과 훈련 수준이 낮아서 노동력의 질이 낮기 때문이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농지개혁법인데, 토지개혁 하나가 막혀서 경제 성장이 퇴보한 필리핀 같은 예를 들어도 토지 개혁의 중요성이 경제개발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빼놓을 순 없다. 박정희 정권이 실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시작은 사실 이승만 정부 때 처음 나온 계획으로 1959년에 발표되었고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한국경제재건계획이 건의되기도 했으며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1960∼1962)이 정부가 마련한 경제개발계획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절 이 계획을 변형하여 만든 것이 바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6.2. 한국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편집]

우리나라 장래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 회의가 우리들이 옳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으로 생각한다.

1959년 7월 16일 제1차 원자력 학술회의 대통령 축사

1956년 7월에 이승만 정부는 시슬러 박사#에게 원자력 발전에 관한 자문을 받기 위해 초청하였다. 이승만은 그에게서 석탄보다 300만배나 많은 전기를 생산한다는 얘기와 “한국도 원자력 발전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듣고 한국도 원자력 개발 체제를 갖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서 원자력 전담기구를 설치해 원자력에 관한 연구에 투자를 하고 과학자들을 양성하는 계획과 행정지원과 연구소, 인재 양성 등의 과학기술 분야 진흥을 위한 기본전략을 추진해나갔다. 1958년 2월 원자력 업무를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 원자력법도 공포하였고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를 신설하였다.

1959년에는 원자력원과 그 산하기관에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후에 여기서 배출된 전문인력들은 한국의 원자력발전 도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원자력연구소는 처우도 대단히 좋아서 연구수당과 위험수당을 본봉의 100%씩 더 받았다. 즉, 본봉의 3배를 받았다.# 같은 해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에 국내 최초로 원자력공학과를 만들고 1959년 서울대 공과대학도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하였다. # 1959년 미국 제너럴아토믹사로부터 공급받아 한국원자력연구소에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여 기초 실험과 교육훈련을 실행하며 원자력 운영 경험을 축적하였다.

1인당 6,000달러나 드는 미국의 알곤국립연구소 프로그램에도 4년간 150여명의 훈련생을 파견하였고 1969년까지 국비 131명을 포함하여 과학자 322명을 보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달러 정도에 불과했으니 얼마나 큰 투자였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시슬러 박사는 지금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지 묻는 이승만에게 20년 정도 후면 이루어질 것이라 얘기했는데 정확히 20여년 후인 1978년 4월에 고리 1호기가 준공되었다. 이승만이 원자력 발전 연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오랜 기간 한국에 큰 혜택을 가져다 준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은 이보다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6.3.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편집]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파괴로부터 경제를 복구를 하고 국민의 의식주 기초 생활을 위한 물자 수입을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한국은 외환 부족 상태에 있었고 부족한 외환을 주로 원조 자금, 유엔군 지출 경비 등으로 충당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복수환율제를 운용하였는데 외화를 최대한 끌어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협정 환율은 미국으로부터 받는 무상 원조 물자 판매 가격을 가급적 낮게 책정해 민간기업의 재건 활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수출 시장에서는 협정 환율보다 높은 시장 환율의 영향을 받게 했는데, 민간 부문의 수출 활동을 억제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수출지원정책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에서 받은 원조는 최대한 값싸게 민간 부문에 판매하고 수출은 상대적으로 고환율의 영향을 받도록 해서 수출로 벌어 들이는 외화를 극대화하려는 조치였다. 미국이 이에 대해서 끊임 없이 이 복수환율제, 저환율정책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고 이 때문에 1950년대 후반 한미관계가 갈등에 놓이기도 했다.

다만 이승만 정부의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 등, 복잡한 환율 제도와 관련해 외환프리미엄이라는 경제적 지대가 창출됐는데, 이 때문에 많은 자본가들은 국가가 보유한 외환을 배정 받기 위해 애썼다. 1951년 11월에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의 비율은 3.03에 이르렀다.

또한 본격적인 수출주도산업화를 위해서는 미국이 요구한 변동환율제와 환율 현실화를 통한 본격적인 고환율 정책이 이승만 정부의 정책보다 훨씬 좋았고 실제로 1960년대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행과 함께 환율 현실화를 단행하자 경제성장률이 뛰어오른 것이 이를 증명하기에 이승만의 환율 정책을 (결과적으론) 본격적인 성장을 늦춘 오판이라고 볼 소지가 존재한다.
[1] 이 두 발언의 출처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이승만 문서. 장면과 허정의 저서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과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나온 평가라고.[2] 위 관련 짧은 에피소드가 링크 마지막 문단에 써져 있다.[3] 김영삼은 이승만과 동시대에 활동하며 그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4] 애초에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였다.[5] 조경원, 이배용, '해방 이후 여성교육정책의 변화와 여성의 사회진출 양성-미 군정기(1945)~제1공화국시기(1960)', "한국교육사학"[6] 반면 북한은 김일성 본인의 주체사상으로 인하여 여성의 인권이 없어졌다.[7] 정확히는 소련식 공산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웠다. 이시기 사회민주주의는 지금과 달리 최종적으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했으며, 방식에 있어서 평화적인 민주주의에 의한 공산주의 건설을 목표로 했을 뿐이다.[8] 실질적인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소련의 건국이 1922년이다.[9]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강원도 화천 3사단 포병중대의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강호창의 증언에 의하면, 휴가를 나간 사병이 안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데리러 가보면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다."라면서 부대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년 9월 20일/ 113쪽) 또한 5.16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이 쓴 책인 <한국군사혁명사>에 의하면 "장군은 트럭으로 날라다 먹고, 장교는 지프로 날라다 먹으며, 하사관은 등으로, 사병은 반합으로 날라다 먹으니 피차 마찬가지."(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년 9월 20일/ 113쪽)라는 내용이 언급된다.[10] 때문에 당시 미군수품 같은 것들을 몰래 빼돌려 암시장에 파는 등의 부패도 많았다.[11] 당시 1공화국 정부는 부족한 예산을 공직 봉급으로 배분하며 교육을 1순위에 두어 교사 월급을 가장 챙겼고 상대적으로 후순위였던 군인, 경찰, 공무원 봉급은 박봉으로 남아 부정부패를 어느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12] 실제로 같은 반공국가였던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이 토지 개혁에 실패하자, 베트콩이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농촌을 게릴라 소굴로 만들어 패망에 일조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6.25 전쟁 3개월 전부터 본격적으로 토지개혁에 시동을 걸었고, 그 이전부터 농지개혁법이 시행될 것 같다는 소문을 들은 몇몇 지주들이 소작농과 타협해 농토 소유권을 넘기는 등의 자발적 조치도 더해진 상태였다. 그 결과 한국은 베트콩과 같은 자생적 무장 공산 게릴라가 세력을 더 확장하지 못했다.[13] 비록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공식적인 신분제는 폐지되었으나, 어디까지나 법률적으로만 없어졌을 뿐이지 실제로 농촌 사회에서는 50년 넘게 계속 머슴과 백정 같은 하층 계급들이 차별과 천대를 받으면서 살았다.[14] 농사지을 사람이 줄어들면 지주의 수입도 줄고 도로나 통신 인프라가 늘어나면 그 지역 지주의 권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도 그렇지만 지주들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중남미 국가들이 2차 대전 이후 농산물과 광물 수출로 한때 반짝하다가 만성적인 외채 위기로 주저 앉은 것에는, 대지주 계층이 권력을 장악하여 전근대적인 사회 질서를 유지한 것이 큰 이유라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15] 김기석,강일국, '1950년대 한국교육', 문정인,김세중 편,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선인[16] 김기석,강일국, '1950년대 한국교육', 문정인,김세중 편,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선인[17] 오천석, "한국신교육사"[18] 오천석, "외로운 성주"[19] (1954년 기준으로) 제1차 교육과정기의 중학교 교육과정에 있었던 지금의 일반사회와 같은 역할을 한 교과다. <김대현, 교육과정의 이해, 학지사, 1판 8쇄 347쪽>[20] 교육의 양적 성장은 4.19 발발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식 민주주의 이념교육을 받은 세대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의 실현을 주장하며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절차조차 무시되는 현실에 궐기했던 것이다. <한국사연구회, 새로운 한국사길잡이(하)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초판 11쇄 430쪽>[21] 교육50년사편찬위원회, "교육 50년사, 1948-1998", 42p[22] 출간 당시에는 별 관심을 못 받았지만 정말로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다를 벌이자 관심을 받게 되었다.[23] 게다가 일본 정부가 아직 군정이 미처 끝나지 않은 때에 전격적으로 해서 일본은 즉각적인 대처를 못했고 이후 대처를 하려고 배도 보냈으나 이승만은 족족 나포하는 것으로 답을 했다.[24] 저 중에서 '미국이 이승만을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가장 효과적인 패를 잃는 것이다'라는 발언도 남베트남 상황을 생각하면 상당한 통찰력을 보여준 것이라 평가된다. 그나마 미국에 맞서 독자적으로 정책을 진행할 수 있었던 남베트남의 유일한 지도자 응오딘지엠이 미국의 묵인 하에 제거된 이후 남베트남은 미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으며, 이것이 당시 시대 상황과 합쳐져 전세계 여론들이 남베트남을 비난하며 북베트남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원인이 되었다.[25] 물가 보정을 한다면, 이는 더 큰 차이이다.[26] 개전 초기 개성-문산 전투와 낙동강 전선 최대의 혈전인 다부동 전투 지휘[27] 춘천-홍천 전투 지휘로 북한군 1개 군단 궤멸[28] 진천 전투 등 국군의 지연전에서 성과를 거둠[29] 전쟁 초기 육군참모총장[30] 정일권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 재임[31] 한강 방어선 전투 지휘[32]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서 대한민국 해군 건설을 맡음[33] 초대 국무총리 겸 초대 국방부 장관이며, 전쟁 당시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34] 제분, 제당, 면방직 공업의 원료로 쓰이는 밀가루, 설탕, 면화 등이 모두 흰색이어서 '삼백산업'이라고 불린다[35] 한국전쟁과 기복신앙확산연구/ 김흥수 지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년/ 32쪽[36]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4년 7월 9일/ 279쪽[37] 김종철, "한국교육정책연구", 314p[38] 馬越徹, "현대한국교육연구", 232p[39] "An Evaluation of the Uniqueness of Education growth in Korea", Noel F. McGinn, et al.,op. cit.,p.92[40]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

이승만/부정적 평가

최근 수정 시각: 
상위 문서 아이콘  상위 문서: 이승만
이승만투명
이승만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1. 개요2. 정치에 대한 평가
2.1. 독재
2.1.1. 정치깡패와 서북청년회2.1.2. 국가 보안법 제정 및 남용2.1.3. 진보당 사건2.1.4. 견통령 사건2.1.5. 발췌 개헌2.1.6. 사사오입 개헌2.1.7. 2.28 학생민주의거2.1.8. 3.15 부정선거2.1.9. 4.19 혁명
2.2. 인사 실패2.3. 친일몰이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1. 한글 간소화안3.2. 새로 만든 화폐에 자신을 새김3.3. 학살
3.3.1. 여수·순천 10.19 사건 때의 민간인 학살3.3.2. 보도연맹 학살사건3.3.3.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3.3.4.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3.3.5.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3.3.6. 고양 금정굴 학살사건3.3.7. 거창 양민 학살사건3.3.8. 산청, 함양 양민 학살사건3.3.9. 문경 양민 학살사건3.3.10. 강화 양민 학살사건3.3.11. 제주 4.3 사건 때의 민간인 학살3.3.12. 북한 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
4. 외교·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4.1. 미흡한 전쟁 대비4.2. 한국전쟁 초기 허위 전황 방송4.3. 한강 인도교 폭파4.4. 국민방위군 사건4.5. 일본을 상대로 한 테러 시도
5. 경제에 대한 평가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작성하는 문서이다.
이승만은 여러 일을 했다고는 볼 수 있지만, 그가 범한 많은 과오 중에서도 민족으로부터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은 외세의 국가이익 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 역적들을 싸고 돌아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점과 12년의 통치 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 아닌 열강 예속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도 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현대인물사론: 민중운동의 사상과 지도노선 - 송건호 저. 한길사. 1984. p235~256 중에서 (#)
넷째, 이승만 정권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사회경제적 배경이 전무했는데다, 이승만 자신이 자유민주주의의 의식보다는 자신의 권력 강화와 유지에 더 몰두하여, 정치 체제는 권위주의화의 길을 밟았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라는 분단 상황의 논리로 인하여 실제로는 반공 이념으로 대체되거나 변질되었다. (중략) 다섯째, 정권 구조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정권은 본질적으로 이승만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였다.

김수명(1991), 이승만 정권의 흥망과 그 정치사적 의미. 한국정치학회보, 25(1), 103-132[1]
북의 김일성 남의 이승만
모두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라의 평화통일은 기대 못 한다
제국의 앞잡이여!
붉은 사냥개여!
민족을 기만하고
나라를 망치려는
너의 배짱은 그 무엇이냐
북성남만(北成南晩)[2]

1946년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부패한 자유당 관권 중심의 '해방 귀족'들이 도량하여 민족의 장래는 어두워만 갔다.… 마침내는 4·19의 반독재 학생혁명을 유발하고 말았다.[3]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 운동을 하고 독립에 기여했지만 독단적인 행동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여러 차례 일으켰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4][5]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NL 세력이나 브루스 커밍스식 수정주의 사관을 추종하는 입장에선 남북 분단과 민족상잔의 원흉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게다가 이승만의 독선적인 모습은 해방 이후에 보여준 대통령에 대한 권력 욕심과 독재 정치로 더욱 심화됐다. 민주 국가를 천명했음에도 스스로 민주주의의 원칙을 저버렸고[6]서북청년회 등 정치 깡패를 이용한 반대파 억압, 제주 4.3 사건보도연맹 학살사건 등과 같은 양민학살, 전쟁 대비 미흡과 6.25 전쟁 당시 한강 인도교 폭파국민방위군 사건 등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으로서 간접적 책임이 존재한다. 국방력이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북진 통일을 고수한 점, 국회 프락치 사건발췌 개헌사사오입 개헌진보당 사건3.15 부정선거 등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한 독재 행위, 이로 인해 발생한 4.19 혁명 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군인, 관변단체, 학생을 동원해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추진했다.[7] 남산공원을 이승만의 호 우남을 따서 우남공원으로 명명했으며, 공원 가운데에 자신의 동상[8]을 세웠고 생일에는 탄신제가 거행되었다. 측근들의 부정부패도 이어졌다. 또한 이승만이 계속 주장한 북진 통일론은 중국과 소련에게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 통일 주장 때문에 대한민국 군대를 10만 명으로 제한을 두기도 했다.

kim gu VS dr.lee
독립운동 당시에는 이승만과 김구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지만, 정권을 잡은 후 이승만은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김구를 축소시키려 하였다.[9] 먼저 김구의 백범일지를 금서로 지정하고 학계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업적, 외교독립론을 강조하라고 지시하였다. 지금은 매년 6월 26일에 김구 추모제가 꽤 성대하게 열리는데, 제대로 열리기 시작한 것은 4.19 혁명 이후인 1960년이다. 이후 김구의 아들인 김신이 5.16 군사정변에 동조했고, 군인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외교론자인 이승만을 격하하고 무장 투쟁론자인 김구를 격상하며 현재까지 이 입지가 굳어지게 된다.

2. 정치에 대한 평가[편집]

이 문단에서는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행적들을 다룬다.

2.1. 독재[편집]

이승만은 모든 자유주의자와 자신에게 반대하는 좌익세력들은 추방되어야 하며, 그들은 언론의 자유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 텍사스의 푸트만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던 마우리 메버릭(Maury Maverick)이 1949년 8월 록펠러재단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발췌
이승만은 파시스트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은 극단적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는 모두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내부 안전부서(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에서 근무한 케네스 E. 맥더걸 대위가 1954년 10월 발간한 책에서 발췌
한국정부가 재판도 없이 사람들을 죽였다. 공산주의자가 아닌데도 단순히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다.

미군 소속 첩보 기관인 특무대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1951년 4~5월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발췌
한국 정부는 허용되어서는 안 될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위에 대해 관대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계속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과거 전쟁에서 저질러진 전쟁 범죄에 대한 재판도 끝내지 못했다. 우리의 젊은이가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그곳에서 같은 범죄가 또다시 저질러져선 안 된다.

1950년 11월 1일 영국 상원에서 스트라볼기(Strabolgi) 의원의 발언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을 체포해야 한다. UN에 있는 영국 대표는 이승만을 부정하고 그의 정권을 끝내도록 요구해야 한다.

브로크웨이(Fenner Brockway) 영국 독립노동당 상원의원의 발언
이승만과 그 도당이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고자 했던 모든 명분을 완전한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다. 이승만이 한국을 통치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만큼 UN이 한국을 맡아야 한다.

영국의 레이놀즈 뉴스(the Reynolds News)
미국 유학 시절 이승만과 친분이 두터웠던 허정은 이승만이 "양녕대군의 후예로서 지배의식 또는 양반의식이 매우 강했다"고 증언한다. 그는 미국에서 군주나 왕족처럼 행동했고 영친왕 이근에 대해 묘한 라이벌 의식을 내비치기도 했다. 해방 뒤 그는 이 습관을 그대로 싸들고 귀국했다. 미군정기 하지의 정치 에이전트로 좌우합작운동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던 합리주의자 버치는 <시카고 선> 기자인 게인에게 "이승만씨는 결코 파시스트가 아닙니다. 그는 파시스트보다 2세기 앞입니다. 순수한 부르봉파예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뒤 이승만은 더욱 군주처럼 행동했다. 이승만이 국무회의에서 하는 말은 '의론'이 아니라 '분부'였으며, 그가 총재로 있던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비서를 통해 '봉독'시킨 그의 글은 '유시'(諭示)였다. "위에서 타일러 가르친다"는 뜻을 가진 이 낱말은 봉건군주가 신하에게 내리는 '유지'(諭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이승만이 왕도정치를 표방했음에도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그가 '현군'이나 '성군'은 아니었다고 평한다. "그는 여순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녀 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해서 다 제거하라는 담화를 발표했고,(…) 농민들이 나무를 좀 베지 않으면 얼어죽는다는 말에, '얼어죽을 사람은 죽으라'고 꾸짖"은 철혈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유교적 인간의 '봉건통치': 이승만의 정치행태에 나타난 유교의 흔적…/ 한겨레21 1999년 07월 15일 제266호 기사에서 발췌#

2.1.1. 정치깡패와 서북청년회[편집]

이승만 정권은 정치깡패들과 서북청년회를 대거 이용하여 정권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정치인들을 탄압하였다. 특히 해방정국에서 서북청년회가 자행한 백색테러와 학살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정치깡패들은 정권의 비호 아래 각종 이권사업에 뛰어 들어 수많은 불법을 저질렀다. 임화수곽영주유지광이정재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로, 이들이 벌인 사건으로는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고대생 습격 사건충정로 도끼 사건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등이 있다.

2.1.2. 국가 보안법 제정 및 남용[편집]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국가 보안법을 제정했다. 문제는 이 국가 보안법이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투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던 그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했다는 사실이다. 1949년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했을때, 국가보안법 제정에 극렬 반대했던 노일환 의원 등 반대파 소장의원 13명을 이 국가 보안법을 통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했으며, 1949년 한 해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잡아 가둔 사람의 숫자가 12만 명이 넘었다. 놀랍게도 이승만 정부의 수감자 규모는 일제시대 말기 한반도나 해방 후 미군정기에 수감되었던 수감자 규모를 압도했다. 말 그대로 국가 보안법 제정 및 실행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감옥에 일반 죄수들 보다 이승만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투옥된 정치범들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저서 <한국의 민중봉기>를 보면, 국가보안법 제정 1년 만에 경찰은 확대된 법적 권위를 이용해 18만 8,621명을 체포했고, 군대는 모집과 동시에 숙청을 감행하며 준군사 우익 집단의 무장이 가속화 됐다. 놀랍게도 이승만 정부는 정치범 숫자에 있어서 일제 시대와 미군정 시기를 추월했고, 이 가운데 대략 80%가 공산주의자로 간주됐다. 그와 동시에 1945년 일본에 협력한 배신자로 공식적으로 알려진 수백 명의 조선인 중에는 단 1명만 감옥에 있었지만, 많은 친일 협력자들이 판사로서 이들에게 사형선고와 징역선고를 내렸다. 이런 점에서 국가 보안법 제정은 치안유지법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3. 진보당 사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진보당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2.1.4. 견통령 사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견통령 문서
 참고하십시오.

2.1.5. 발췌 개헌[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발췌 개헌 문서
 참고하십시오.

2.1.6. 사사오입 개헌[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사사오입 개헌 문서
 참고하십시오.

2.1.7. 2.28 학생민주의거[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2.28 학생민주의거 문서
 참고하십시오.

2.1.8. 3.15 부정선거[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

2.1.9. 4.19 혁명[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4.19 혁명 문서
 참고하십시오.

2.2. 인사 실패[편집]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

- 1954년 11월 27일 사사오입 개헌 과정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중.
이승만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측근 문제가 많았으며, 인재 보는 능력은 확실히 부족했다.[11]
  • 국방부참모총장인 채병덕은 더글러스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 장성들한테 무능한 인물로 여겨졌고 실제로 그러했는데, 이승만은 그런 채병덕을 오히려 철저하게 총애했다. 한 번은 미국 대사관 관리들과 미군 장성들이 "한국에서 제일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장성(채병덕은 167cm의 키에 110kg의 체중이었다.)을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했는가?"라고 이승만에게 묻자, 이승만은 "나의 채 장군은 날씬한 장군이 못 가진 기민성을 갖고 있어요. 전문적인 군사 지식은 물론 우리나라에 무슨 무기가 필요한가를 잘 알고 있는 경험으로 뭉쳐진 장군이야. 또 미남 장군들의 큰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채 장군의 졸리는 듯한 눈은 꿰뚫어 본단 말이야!"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터지고 나서 채병덕은 맥아더를 만났을 때, 한국 청년들 200만 명을 동원해 훈련시켜 북한군을 물리치겠다는 엉뚱한 대답을 했고 이에 맥아더는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채병덕을 해임시키라고 말했다. 결국 채병덕은 사실상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해임되어 고작 100여 명의 독전대를 거느린 자리로 좌천되어 전선으로 쫓겨났다가 1950년 7월 27일 하동 고개에서 북한군 6사단의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12]
  • 민간인 학살에는 용감했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맨날 도망만 간다는 무능한 장군이라고 미군들한테도 경멸을 받았던 김종원[13]을 정작 이승만은 "이순신 장군에 비길 만하다."라며 끝까지 감싸고 돌았다.
  • 국방부장관이라는 신성모는 할 줄 아는 것이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어서 세간에서는 이 사람을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 불렀다. 국회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게 신성모 국방 장관[14]과 조병옥 내무 장관[15]을 경질하라는 것이었지만 이승만은 계속 거부하여 양쪽은 지속적으로 충돌하였다. 결국 이승만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6.25 전쟁 중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경질해버렸다.[16]
  • 마지막 내무부장관 최인규 역시 변변찮은 위인으로 할 줄 아는 게 이승만에게 아양을 떠는 것밖에 없어서 세간에서는 지당장관(至當長官)이라 불렀다.[17] 그는 4.19 혁명 때 미국의 매카너기 대사가 전달한 미국의 외교문서도 일부러 은닉하고 이승만에게 안 보여줘서 사태를 더 심각하게 키웠다. 결국 대사가 직접 찾아와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실을 설명하고 나서야 이승만은 모든 걸 알았다. 결국 혁명재판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이승만의 양아들이 된 이강석은 아버지 빽으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가 다른 서울대 학생들의 반발로 인해 중퇴, 결국 정부에 반발을 할 수 없는 학교인 육군사관학교에 또다시 아버지 빽으로 진학한 후 장교로 임관한다. 이후에도 어찌나 이승만의 빽을 믿고 전횡을 일삼았는지 가짜 이강석 사건이 벌어질 정도였다.
  • 곽영주는 아예 애초부터 이정재임화수유지광 일당과 한 패거리였으며, 평소의 행실도 영 좋지 않았다. 특히 4.19 혁명에서 민간인에게 발포를 명령한 주범이다. 정치깡패가 아닌 나머지 구 자유당 인사들에게는 상당히 관대했던 박정희가 곽영주의 사형을 집행한 걸 보면 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18]
  • 이기붕과 그의 아내인 박마리아 역시 이승만의 총애를 받는 최측근이었다.[19] 문제는 이기붕의 아내인 박마리아인데, 지나치게 오만하고 탐욕스러워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밖에 모르는 여자였는데다가 시국을 보는 눈도 없어서 4.19 혁명이 일어나자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시위에 참가한 국민들을 폭력으로 억누르려 했다가 들통나 수많은 원성을 들었으며, 이기붕 역시 그런 아내의 권력욕을 제어하지 못하여 둘 다 파멸로 치닫고 말았다는 것이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고령[20] 때문에 판단력에 상당한 문제점을 보였고[21], 가족(특히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과 측근들이 대통령직을 대행했음이 미 대사관의 보고서에 나타나 있다. 사실 측근 부분은 단순히 주변인 뿐만 아니라 이승만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애초에 이런 사람을 측근으로 둔 게 이승만이다. 그나마 이승만의 인사 중에서 성공적이었던 게 조봉암 농림부 장관을 비롯한 초기 내각과 한국전쟁 당시의 군부 정도였다.

정작 우스운 일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던 때에는 그를 우상으로 받들던 자유당 사람들이, 막상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쫓겨나고 1년 후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자, 박정희를 맹종하면서 대신 이승만은 철저히 외면해 버렸다는 것이다.[22] 이승만을 미워하는 박정희의[23] 눈밖에 날까봐 외면하기도 했겠지만, 이제 이승만에게 더 이상 빨아먹을 단물이 없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24][25]

2.3. 친일몰이[편집]

이승만은 대통령 시절 반대 세력 배척을 위해 모함을 자주 하였다. 그 중 하나는 친공(親共)이었고 다른 하나는 친일몰이였다. 자기한테 반대하면 친일파거나 배후에 일본 정부가 있다는 식이다.[26]
  • 에게 반대하면 친일이다.
근래에 와서 친일파 문제로 해서 누가 친일파며 누가 아닌가 하는 것이 민간에서 혼동된 관계가 있으므로 내가 다시 설명하고자 하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정시대에 무엇을 하든것을 가지고 친일이다 아니다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 뭘 했든지간에 그때 친일로 지정 된 사람이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그 사람의 의사와 행동으로 표시되고 안되고에 친일이다 아니다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가령 이전에 고등관을 지내고 또 일본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한 사(史)적이있을지라도 그 사람이 지금와서는 그 일을 탕척받을만한 일과 사실이 있어 가지고 모든 사람이 양해를 받을만한 일을 해서 진정으로 친일 아니다 하는 것을 증명 받을만하면 전에 일은 불문하고 애국하는 국민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줄 것이다. 그러나 전에 고관이나 악독한 짓은 하지 않았어도 동시에 일인을 반항해서 싸우거나 그런일은 없었을지라도 일인들과 친근히 지내서 반일이나 배일분자는 아닌데 지금와서는 말로나 행동으로 친일이 아닌 것이라는 행동을 뵈여서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의혹 가지만 한것은 친일로 규정하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승만, 1954년 4월 8일 동아일보
일인들이 물건을 제조해다가 거대한 액을 잠재로 수입시켜서 그 개정을 총 선거비용으로 친일자를 내세워서 정권을 도모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 물건에는 저의 부사산을 그려서 한편에는 일본섬과 한편에는 한국 반도를 그려서 이것이 다 저의 것이라고 표시(…)모든 친일 분자들을 일본에 모아다 보호해놓고 이 분자들을 통해서 우리나라 국권요란을 선동하기를 마치 이전이 조말년에 망명객들을 모아다놓고 남의 국모를 암살하며 침략하든 악습을 행하고 일인들의 야심을 우리가 더 말할 것 없이 보고 안 진 것이다.(보고 있는 않을 것이다.)

이승만, 1954년 5월 14일 동아일보
요즘 우리 국세에 위급한 문제는 소련이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계획과 중공이 한반도를 자기에세 부속시키고자해서 과거 사년동안 전쟁을 하였으며 즉 이북반도를 차지하고 이남을 마저 합병시키는 것이 그 사람들의 목적이고 또 일본이 친일하는 한인들과 반정부 한인들을 이용하여 다시 한반도를 병합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 때

이승만, 1954년 10월 21일 경향신문
일본공산당들과 친일하는 한인들이 동경과 연락해서 민심을 선동하고 있으니 이것은 경찰이나 민간에서나 정부를 보호하며 반공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다 전적으로 이런 반역행동을 가진자를 조사보고 하여 중벌로 다스려야 될 것

이승만, 1954년 12월 10일 동아일보
한편으로 대통령에 나를 선출하고 부통령엔 반대당인 민주당 장면 박사를 선출한 사실만 보아도 그렇고 친일용공의 표수가 그렇게 많이 나왔다는 사실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민심의 소재를 측정하기다 곤란하다.

이승만, 1956년 5월 27일 경향신문
이어 이 대통령은 반정부신문들은 있는 소리 없는 소리로 정부하는 일을 헐어댄다고 전제한 다음 매우 격노한 어조로 "그렇다면 소련의 정부를 원하느냐? 중공의 정부를 원하느냐? 일본의 정부를 원하느냐?"하고 일갈

이에 신문기자는,
"각하의 말씀 매우 듣기 거부합니다. 한국판도내에 친일 친공하는 신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1956년 6월 28일 경향신문
이 대통령, 여(與)조직부장들에 훈시.

이 대통령은 이십육일하오경회루 에서 자유당각도 및 핵심당부 조직부장 이백삼십오명을 한희석중앙위부의장의 안내로 접견하고 "큰 성을 이루어서 모든 사람이 원하는 동시에 도달한 것을 믿고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 대통령의 훈시요지는 다음과 같다.

"지금은 어려운 때인데 각 지방에서 자유당의 지도자들이 이와 같이 모여서 내가 만노 보게 되니 감사하며 또 다같이 합동해서 각 지방에서 잘해난다고 하니 나로는 정성껏하며 나할 것을 힘껏 다 바쳐서 할 것이다. 앞으로 선거가 있을 것을 알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즉 공산당이나 친일하는 사람들이 각방면으로 파괴시켜서 저희의 목적을 세우려고 애쓰고 있는 이 어려운 때에 모든 사람들이 이와같이 잘해나가니 마음에 든든하게 생각되며 모두 충성과 충심에서 나오는 결정과 정신이 마음속과 뇌속에서부터 잇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1959년 8월 27일 동아일보
이승만은 외부 발표 뿐만 아니라 내부 측에 말할 때도 반대자가 친일파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 이승만 측근들도 비슷하게 친일몰이를 하였다.
이기붕씨는 이 대통령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자 신익희씨를 친일분자라고 지적한데 대 하여 "자기는 그들을 친일분자라고는 생각치않으나 친일한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고 말하였다.

1956년 4월 18일 경향신문
문교부장관 이선근 씨는 지난 26일 이리 고등여학교 강당에서 각교 교장 교직원 및 대학생을 소집해놓고 노골적인 여당지지선거연설을 행하였는데 이날 연설에서는 이 장관은 "목 살겠다고 웨치는(외치는) 놈들은 일본이나 38 이북으로 보따리를 싸서 쫓아내야 된다"폭함함으로써 시민들의 큰 분격을 사고 있다.
(…)
민주당 이리 시[27] 위원장 이춘시 씨 담 = 수 많은 후예들을 교육시키는 책임자의 입장에서 그와 같은 폭언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정당인의 입장에서보다도 이 나라의 국민의 한 살믕로서 슬퍼아니할 수 없다. 정치를 잘하자는 사람들은 모두 공산당이나 친일분자란 말인가?

1956년 4월 30일 동아일보
"지금은 국제외교를 각국 대통령이나 수상이 직접해결 해야 할 국제정세에 처하여 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외교를 직접담당해 온 이승만 박사만 이 이 나라를 구출할 수 있으므로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친일파가 아니라면 누구나 다 이박사를 지지해야 할 것이다.
(…) 요즈음 어느 당의 대통령 후보자는 미국에서 자기의 외교정책에 관하여 발표했는데 그 첫 조항이 일본 사람과 친하자고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랬다.

도대체 이웃에 사는 강도와 어떻게 친해질 수 있느냐? 과거 우리나라를 식민정책으로 압박해왔고 지금도 그 때의 근성으로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 일본과 우리가 어떻게 친해질 수 있단 말이냐?"

자유당, 1960년 2월 8일 동아일보
  • 당시 인식
"친공친일언사해명하라"
……이대통령의 돌연한 담화에 반응심각
……"항일투쟁 이박사 못지 않다."
"매국매족이란 위협적이다."
신·조 양씨 응수

이 대통령은 12일 공보실을 통해서 "어떤 정당의 지도자들은 一.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일본과 협의해서 친선을 이루겠고 二 괴뢰와 합해서 통일하겠다" 는 등의 망설을 발한 바 있다고 야당측의 대통령입후보자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1956년 4월 14일 동아일보
이대통령은 반대당을 용공친일이라고 비난하여 선거전에 제일탄을 던지는가 하면 그렇게 없는 사실을 날조하는 것은 선거공세로서는 가장 졸렬한 수단이라고 정부에 응수한다. 처음 정강 정책으로부터 시작하던 선거전은 인신공격을 전개될 것 같기도 하고 이대통령이 단수를 높여 반공반일의 국책적 문제를 새삼스러이 들고나옴(…) 이승만 박사가 선거전이 본격화하는 요즈음이제 새삼스러이 반공반일의 국책적 문제를 가지고 반대당을 비난

1956년 4월 16일 경향신문
이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자로서의 아무런 정견공약을 아직 공표하지 않았으며 다만 "친일·친공 분자를 경계"해야 한다는 일담화로써 민주당대통령후보 신익희 진보당대통령 후보 조봉암 양씨를 간접적으로 비난한일이 있었다.

1956년 5월 1일 경향신문
민주정치의 원칙인 정치의 대사로써 "갈아보자"는 말만 해도 반정부적인 동시에 반국가적인 사상으로 규정하려는 범재자의 태도를 우리는 자주 발견한다. 심하여 이를 친공에다가도 친일에다가도 붙여서 숙청의 대상으로 삼으려고도 하는 듯 하다.

1956년 5월 26일 경향신문
당신네들이 부통령에 대한 경고결의안을 낼 때에는 어떻게했나 이 나라 국민이 굶주리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이것을 해결시키는 것이 당면한 모든 문제보다도 더 긴급하고 더 중요하다고 하는 그 말 한마디가 용공이요 친일이라고해서 경고결의안을 낸 선례를 맨든 것이 누구인가?

김영선 민 의원, 1957년 1월 27일 동아일보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편집]

3.1. 한글 간소화안[편집]

CC-white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r88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이승만은 1949년에 당시의 철자법을 폐지하고 구한말 시대의 철자법으로 돌아가자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동안에 형태주의적 요소를 많이 받아들인 한글 맞춤법이 구한말 세대인 이승만에게는 너무 어렵고 번거로웠던 것. 1953년에 국무총리령이 발표되어 이 건을 밀어붙이게 됐다. 하지만 국어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고, 문교부 장관이 연달아 사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승만은 1954년에 “3개월 이내에 현행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국 말엽의 성경 맞춤법에 돌아가라.”라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새로 임명된 문교부 장관이 일단 간소화 안을 발표하고 무작정 국무 회의를 통과시켰다. 그러자 더욱더 각지의 반발과 비난이 빗발쳤으며, 이승만은 결국 1955년에 이 방안을 취소했다.
  • 받침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ㄺ, ㄻ, ㄼ만 허용한다. 언문 철자법 시기와 동일. ex) 잊다 → 잇다
  • 용언의 어간은 받침으로 쓰지 않고 연철해서 쓴다. ex) 잊으니 → 이즈니
  • 어원은 표시하지 않는다. ex) 길이 → 기리 , 낱낱이 → 낫나치

3.2. 새로 만든 화폐에 자신을 새김[편집]

이승만 지폐2
이승만 동전1
이승만 정권 당시 대한민국 공식 한국은행권이 첫 발행되었고, 오늘날 통화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실상 이승만은 한국 화폐의 시초라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이 부정부패와 독재로 몰락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의 존재 자체는 국부가 아닌 지워야 할 적폐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돈은 이승만 때 태어나서 박정희 때 변화한 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는 우리 화폐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이승만 초상은 1950년 첫 지폐에 등장한 이후 1962년 정권이 붕괴되기까지 12년간 10종의 지폐와 주화의 도안 인물을 독식했다.
그 기간 동안 초상의 의복은 두루마기에서 양복으로 바뀌고, 인물은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1958년 50환권에 이순신이 잠시 나오지만 이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어서 초상으로 보기 어렵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국왕이나 여왕이 있는 군주제 국가를 제외하고 선진화된 민주국가에서 현역 대통령을 지폐도안으로 쓰는 경우는 드물다"면서 "하물며 모든 지폐 도안이 오직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28] 자유당 붕괴 이후 우리 화폐에는 이승만 지우기가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장면 내각은 도안 인물을 세종대왕으로 바꿨고, 박정희 정부는 파고다공원, 남대문, 해금강, 거북선 등 무생물을 거쳐 이황, 이율곡, 이순신 등으로 인물교체를 단행했다.

이제 와서 이승만이 직접 명령하여 자신의 초상을 화폐에 새기라고 했는지, 아니면 한국은행의 과잉충성이었는지를 따져 봤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설령 화폐 도안을 기획할 때 이승만 본인의 개입이 없었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승인이 없이는 화폐 최종본에 자신의 초상이 들어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권 당시에 그것을 승인했다는 것만으로도 이승만 본인의 자만심이 얼마나 허황된 수준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3. 학살[편집]

이 문단은
 토론을 통해 학살 단락과 관련된 표현의 어조 객관화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을 다룰 수 있소. 빨갱이들은 총을 숨기고 군복을 불태울 수 있겠지만, 우리는 찾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소. 불도저로 커다란 구덩이와 참호를 파고 그 안에 공산주의자들을 채울 것이오. 그다음에는 덮어버릴 거요. 그들은 정말로 땅속에 있게 될 거요.

이승만[29]
이승만 정권은 소위 한미협정으로써 민족적 이익을 미국 정부에 매도하고, 극소수의 도당들의 이익을 위하여 민생을 기아와 도탄에서 신음케하고, 나아가 무수한 애국자들을 투옥·학살하며 남조선 일대에 야만적인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니 이 자는 국가와 민족의 원수로 규정 되어야할 것이다.[30]

이승만 집권기에 터진 민간인 학살은 사망자가 최소 수십만 ~ 최대 113만명에 이른다.[31] 워낙 오랜 시간이 흘러서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 수 없다. 국정 책임자이자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서 상황을 통제할 의무가 있음에도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공포한 비상조치령과 같은 전시법령이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냈던 것[32]을 감안하면 학살의 최종적인 책임자는 이승만이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민간인 사망 비율이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보다 높은데 민간인 사망자 가운데는 이승만 정부가 학살한 남측 양민의 수가 적지 않으며 이념과는 전혀 무관한 농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사살하는 만행도 이어졌다 (출처:한국일보)

3.3.1. 여수·순천 10.19 사건 때의 민간인 학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여수·순천 10.19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3.3.2. 보도연맹 학살사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보도연맹 학살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3.3.3.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 문서
 참고하십시오.

3.3.4.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3.3.5.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3.3.6. 고양 금정굴 학살사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고양 금정굴 학살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3.3.7. 거창 양민 학살사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거창 양민 학살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3.3.8. 산청, 함양 양민 학살사건[편집]

국군이 1951년 2월 7일 경상남도 산청군함양군에 사는 주민들을 "무장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일곱 마을이 초토화되고 가현(123명), 방곡(210명), 점촌(62명), 서주리(310명)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서 총 희생자 수는 705명에 달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주동 세력이 일으킨 일로, 당연하지만 제대로 된 이유도 근거도 있을 턱이 없고, 설령 있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전쟁범죄였다.#

3.3.9. 문경 양민 학살사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문경 양민 학살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국군 제2사단 70여명이 경상북도 문경리의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학살해[33]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 여성 44명, 남성 83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이다.# 이후 6.25 전쟁이 끝나고 문경 양민 학살 사건을 정부는 무장공비가 선량한 양민들을 죽였다고 조작하였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2008년, 참여정부가 진행한 과거사 청산 막바지 과정에서 그 진상이 밝혀지고 이후에도 속속 보도가 나오고 있다. ###

3.3.10. 강화 양민 학살사건[편집]

이승만은 지역별로 치안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는데 이승망의 지시로 강화 지역에서 조직된 치안대는 수사대를 별도로 설치해 민간인들을 임의로 살해했고, 치안대를 중심으로 조직된 민간인 특공대도 민간인들을 살해했다.(출처: 조선일보)

문경 양민 학살사건과 같은 해 벌어졌으며, 1.4 후퇴가 벌어질 당시 국군 산하의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중심이 되어 212 ~ 500명의 강화 주민을 조선인민군의 협조자로 아무 근거없이 몰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유족 측에서는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양민의 숫자를 400 ~ 500여명으로,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은 212명으로 집계하고 있는 상황. 진실화해위에서는 430여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했다. 이렇게 증거가 수없이 나왔음에도 학살의 주동세력에서는 민간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3.3.11. 제주 4.3 사건 때의 민간인 학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제주 4.3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보고에 의하면 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한 전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간의 상호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은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당 경위 1명, 2백명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
--
주한미군사령부, 「G-2 일일보고서」, 1948. 12. 6., 4․3은 말한다 제4권, 123쪽에서 재인용
서북청년단 개개인이 직접 군대에 지원해서 들어간 게 아니라 그 집단을 경찰과 군대에 보냈다. 서북청년단은 당시에도 정치깡패였다.

다음은 서청 경찰관 출신 박형요 씨의 증언이다.[34]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서청 문봉제 단장은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 하나를 앞세워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대원들을 대거 투입한 것입니다.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집권욕만 생각한 것이지요. 이 대통령의 허락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 대통령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살고 있는 가시리에서는 며칠 전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대부분 억울한 죽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튼 학살의 총책임자는 이승만이라고 생각합니다.
--
朴亨堯(83. 表善面 加時里, 西靑출신 경찰관)의 증언., 4․3은 말한다 제4권, 124쪽에서 재인용

제주도에 간 서북청년단들은 송요찬이 특별중대로 만들었는데 장교나 헌병도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얻었다.
난 1948년 7월 계몽연극단 20명과 함께 제주에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연극을 보러오지 않아 흐지부지될 때에 송요찬 연대장이 우리를 무장시켜 특별중대를 만들었습니다. 1개 중대는 4개 소대 80여 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중대장은 대위 계급장을 달았지만 우린 없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은 9연대 헌병과 장교들을 집합시킨 가운데 “특별중대에 대해서는 타치하지 말라. 만약 손대면 너희들 죽도록 터질 줄 알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지요. 우리는 한림, 월정, 성산 등지를 순회하며 주둔했습니다. 9연대가 철수하고 2연대가 주둔하자 월정리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특별중대원 88명은 그대로 2연대 11중대 소속이 됐습니다. 총살집행을 할 때는 “희망자 나오라”고 해서 갔는데, 한번은 한림면 귀덕리에서 총살이 있을 때 내가 일부러 빗나가게 쏘아 한 사람을 살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들 신분도 모르고 그냥 남의 말 듣고 하는 건데, 그렇다고 쏘지 않으면 내가 의심을 받으니까 일부러 빗나가게 쏜 것이지요.

노윤복(78세, 남제주군 성산읍 성산리, 당시 서청 특별중대원, 2002. 3. 28 채록) 증언.,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0쪽

거기다 이렇게 서북청년단을 보내면서도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어주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서청 대원들을 대거 경찰이나 군인으로 내려보내면서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현지 조달하라는 식으로 내몬 것도 문제였다. 역시 서청출신 경찰관으로 ‘2백명 부대’에 이어 제주에 왔던 박형요는 “일선 지서로 배치될 때, 홍순봉 경찰국장이 연설하기를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식량이나 월급을 보낼 수 없다. 가서 마을에서 얻어먹으며 진압하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물론 일선 지서마다 경찰후원회가 조직돼 이들을 뒷바라지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민폐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1쪽

이 상황에서 서북청년단은 제주도 총무국장조차 때려죽였으나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1948년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 53)이 서청의 손에 고문치사 당한 사건도 서청의 위세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특히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2쪽
11월 9일, 서북청년 단원들이 제주도 총무국장인 김두현을 타살했다.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서청 단원들은, 김두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이며 자기들은 단지 그를 조사하려 했을 뿐이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A-1).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87, November 13, 1948.,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2쪽
총무국장 살해사건 때 경찰이 범인을 잡아 구금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홍순봉 경찰청장도 김재능 서청 단장에게 양보했어요. 범인들을 9연대원으로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했습니다. 살인범들이 처벌 받기는커녕 군인이 된 것입니다.

金浩謙(서울시 은평구 역촌1동, 당시 서귀포경찰서장)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 앞의 책 ④, 163쪽).,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2쪽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위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도화선이 된 좌익계의 투쟁은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연인원 110만 명(300만 명이 참가했다는 주장도 있음)이 참가하는 8‧15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朝鮮通信社, 󰡔朝鮮年鑑-1948年版󰡕, 1947, 258쪽)…그런데 전국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있있던 이 사건에 인민위원회 세력이 강했던 제주에서는 참여하지 않았다. 중앙 일간지에는 이 무렵 제주도에서 10‧1 대구사건의 여파로 10월 9일 소동이 일어나 전남 본토에서 미군부대가 파견되었다고 일제히 보도하고 있으나, 그것은 와전된 것이었다. 이는 제주도 미군정청 공보관 케리 대위의 1947년 신년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작년을 회고컨대) 육지 각 지방에 소요사건이 발발해서 여러분의 동포 가운데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내에 한하여서는 여러분이 시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함으로써 여사(如斯)한 불행한 소요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濟州新報󰡕, 1947년 1월 1일.)고 밝히고 있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78쪽

1948년 1월에 쓴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제주도는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들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인사들은 이렇다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불리우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국내외적 정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선전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우익인사들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며 주로 청년단체와 공직에서 좌익인사들의 척결을 통하여 섬을 장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주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

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123, January 23, 1948.,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146쪽에서 재인용

봉기를 일으킨 세력은 소수일뿐이다. 4.3 사건 진상보고서에도 이렇게 나와있다.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정된다. 4‧3사건 전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기는 4월 3일 소총 30정으로부터 시작해 지서 습격과 경비대원 입산사건 등을 통해 보강되었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536

또한 1949년 6월 7일 경찰특공대는 이덕구를 사살하는 과정에서 무장대 측 보고서를 입수[35]하여 제주경찰청에 보관을 하였는데, 여기서도 마지막으로 정비된 인원이 501명(각급 지도부 35명, 통신대 34명, 유격대 120명, 특무대 312명)으로 기록하고 있다.[36]

3.3.12. 북한 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편집]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부분에서 의외로 얘기가 안되는 부분인데,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은 단순히 한반도 이남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이 북진을 시도하면서, 그 과정에서 북한 지역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다소 논란이 있는 신천양민 학살 사건을 포함하여, 북한 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빼도박도 못하게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 추진 과정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정부는 북한 내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대략 북한 점령 기간 2개월 동안 172,000명[37] 이상의 북한 주민들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중 35,000명은 신천에서 일어난 학살로 희생됐으며, 학살의 주체는 우익 치안대였다. 신천학살을 포함 나머지 이북 지역에서의 학살 주체를 보면, 결정적으로 치안대와 같은 극우무장단체들인데, 이들은 미국과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세력들이다. <폭격>의 저자로 유명한 김태우 교수의 저서 <냉전의 마녀들>을 보면, 전쟁 당시 북한 지역 민간인 학살을 조사했던 국제여맹의 보고서에는 황해도에서만 12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 및 한국군 점령하에서 죽은 것으로 나와있다.

아래 참고용으로 후술되긴 했지만, 관련 연구자인 이신철의 경우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양측의 양민학살이 묘사되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에 잠시 나온 인민군의 우익 인사와 그 일가족 학살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우익들과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학살에 비하면, 규모나 양상에서 일부분이라고 자신의 연구서 및 저서에서 주장했다.

한반도 이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 연구로는 성균관대 이신철 교수의 학술 논문인 6ㆍ25 남북전쟁시기 이북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참고해도 좋다.

4. 외교·안보·국방에 대한 평가[편집]

1980년대 들어서는 운동권 사이에서 퍼진 브루스 커밍스식 수정주의 사관에 따르면, 이승만은 분단과 민족상잔의 원흉으로 찍힌 바 있다가 1990년대 탈냉전 시기 러시아 정부가 구소련 시절 기밀문서를 공개하면서 죽은 이론이 됐다.

정용욱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미군정의 존 하지를 인용해가며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적 배경을 위해 활동했을 뿐 외교에서마저도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맥아더도 면담을 거절하는 걸 기어코 고작 몇 분밖에 만나지 못하거나, 유엔 총회도 이미 끝나간다는 걸 알자 마지막까지 방문을 미뤄놓고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정치적 활동으로 포장해서 떠들었다는 주장이다. 링크된 기사에는 하지가 이승만의 활동에 대해 평가한 편지 내용의 대부분이 번역되어 있다.[38]

4.1. 미흡한 전쟁 대비[편집]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라며 북진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39]

국방의 최고책임자로서 북한의 남침 준비를 파악하고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은 책임이 있다. 전쟁 발발 이전 산발적인 국지전 양상이 이어져가고 있던 와중에 전병력의 1/3을 휴가를 보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이후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뺏긴 것은 장비/인력 부족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또한 당시 감시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건 최전방에서 인민군과 직접적으로 교전을 벌이고 정탐했던 일선 부대장의 보고밖에 없었다. 다만 당시 계속된 비상근무태세로 국군의 피로도가 가중된 상태였고 국가산업이 농업에 편중되어 있었기에 휴가를 보내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한편,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애치슨의 담화인 애치슨 라인에서 미국은 한국을 제외하고 라인을 그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이 한국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약간의 원조를 통해서 한국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 의회에 주기 위해서였다.[40] 미국은 1949년에 10월 6일에 군사방위원조 법안의 302조를 통해서 한국 등에 2,660만 달러 가량의 원조를 계획했고 1950년 1월에는 26일에는 '한미 상호군사원조협정'이 체결되었다.[41] 당시 미국은 북한이 남침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북한이 본격적으로 소련에게 무기를 구입하기 이전에는 북한의 전력이 남한을 압도할다고 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또한 미국은 전차같은 장비를 제공하지 않았을 뿐 57mm M1 대전차포같이 방어전에 사용할 무기는 어느 정도 제공하고 있었다. 실제로 전쟁 초기에 제6사단은 57mm 대전차포를 이용하여 기갑장비에 어느정도 타격을 주면서 선전하기도 했다.[42] 6사단은 전쟁발발 직후인 6.25일부터 6.28일까지 907발의 57mm 포탄을 소모하였다. 즉, 전쟁 이전에 이미 해당 대전차포를 수령한 상태였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던 북한은 소련제 T-34 전차를 운용했는데 이 전차를 상대하기에는 국군이 보유한 대전차화기의 위력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일단 57mm 대전차포의 원본인 6파운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름대로 잘 써먹었던 물건이고 어지간한 중형전차는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었던 물건이다. APCBC는 논외로 하더라도 AP 사용시 500m에서 112mm를 관통하고 1000m에서도 89mm를 관통하여 60도 경사의 45mm 두께의 장갑을 가지는 T-34-85의 전면을 관통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43] 경사장갑이라 실제로 전면에서 관통하려면 약 320m 근처까지 와야했다. 만약 한국군이 APDS를 쓸 수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그건 영국군만 썼던 물건이라 의미가 없다. 당시 미국은 한국 지형에서는 전차의 사용이 제한적일 것이고 57mm 대전차포 정도면 한국 지형에서 사용될 전차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격파가 되지 않았다. 덕분에 초기에는 한국군이고 미군이고 할 것 없이 북한군의 T-34 앞에서 고전해야 했다. 사실 전차의 이용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판단은 길이 좁고 논밭이 많았으며 교량이 버틸 수 있는 하중도 제한적이었던 당시 한국 지형을 생각하면 아주 틀린건 아니었다. 실제로 M26 퍼싱이 한국에 와서 지형 문제로 고생했고 영국의 센추리온 전차도 어디 처박는다거나 셔먼 전차가 전복되는 등 당시 한국 지형이 전차를 굴리기 좋지 않은 상황인건 사실이다. 문제는 당시 한국군의 역량은 그 상황에서도 전차에 대응하기 힘들었다는 것. 하다못해 대전차지뢰라도 잘 활용했으면 대책없이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제대로 된 지원이 있었다면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발언이 사실화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44] 미국의 입장에선 강력한 북진의사를 내보이는 상황에서 전차같은 무기를 제공했다가 선제공격이라도 한다면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될 상황이었기에 회의적이었다.[45] 실제로 미국은 북한의 선공보다 남한이 선제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승만이 공공연하게 강력한 북진의사를 내비친 것이 6.25 전쟁 초기에 북한에게 큰 전력차로 인해 무기력하게 밀리게 된 것에 일조했다는 비판이 있다.

전쟁준비도 미흡했고 섣불리 북진을 외쳐서 미국이 한국군에 장비를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게 만든 것은 비판할 점이지만 전면전이 발발한 이후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전면적으로 미군에게 이양하여 히틀러나 스탈린같이 군 작전에 간섭하려는 모습은 거의 없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46] 만약 이승만이 히틀러나 스탈린같이 작전권을 미군에게 이양하지 않고 멋대로 후퇴불가, 전선사수 따위를 외쳐댔다면 나치 독일군같이 강군도 아니었던 국군은 초기에 전멸 당했을 것이고 소련처럼 광대한 영토나 인적, 물적 자원도 없던 한국은 파멸했을 것이 확실하다. 상황이 그렇게되면 미군도 아예 투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4.2. 한국전쟁 초기 허위 전황 방송[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문서
 참고하십시오.

4.3. 한강 인도교 폭파[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한강 인도교 폭파 문서
 참고하십시오.

4.4. 국민방위군 사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국민방위군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4.5. 일본을 상대로 한 테러 시도[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5. 경제에 대한 평가[편집]

1960년에 농촌의 82%, 서울의 39%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47] 이 부분은 1962년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박정희가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이 12년 동안 기간 산업의 토대가 되는 전력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이라고 비판했다. #[48]

아울러 심각한 실업률도 문제였다. 1950년대 말 공식 집계로 30%에 달했는데, 대졸자의 절반이 실업자였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출신도 전신주를 탈 정도로 나머지 절반이 취업한 일자리의 질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각 언론들은 신문을 통해 "비싼 등록금을 내고 졸업해봐야 실업자만 되는데, 대학교는 만들어서 무엇하느냐?"라고 비꼬았을 정도이다.[49]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도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강원도 화천군 제3보병사단 포병중대 행정병이었던 강호창의 증언에 의하면 휴가를 나간 병사들이 "군대에 돌아가봤자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프니, 차라리 그냥 집에 있겠다."며 귀대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5.16 군사정변에 참여한 이석제는 "1960년 나는 육군 중령이었는데 받는 월급이 너무 적어서 겨우 거지 신세를 면할 정도였고, 어느 날은 며칠째 집에 양식이 떨어져서 출근도 못하고 맹물로 허기를 때워야 했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적은 월급에 지치다 힘들게 제대한 군인들도 취업에 실패하고 실업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 예로 현역 장교가 제대한 옛 상관한테 "나한테 돈을 준다면, 다시 군대로 입대시켜 주겠습니다."라고 거짓말로 속여서 돈을 뜯어낸 사기 사건이 있었다(1959년 7월 26일자 조선일보 기사).[50]

결국 이승만 정부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었고, 급기야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려는 4.19 혁명이 터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승만 정권은 삼백산업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한국 최초의 재벌 계층을 만들었고 이들을 집중 육성했는데, 문제는 국가 경제가 재벌에게 집중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승만이 독재하는 과정에서 재벌들은 정부에게 정치자금을 주고 정부로부터 특별 융자를 받고 도입된 외자를 특별 불하받는 식으로 각종 특혜를 받았다. 즉, 정경유착을 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정경유착에 협조하지 않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이 정치자금 청탁을 뿌리쳤다가 보복성 회계감사를 받기도 했다.

게다가 소비재 위주의 경공업 건설에만 너무 치중해서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생산재 부문의 공업 건설은 늦어졌고, 그 결과 공업생산 원료의 90%가 해외로부터 도입되어 국내 생산 원자재의 개발이 상대적으로 늦어졌으며, 이는 한국 경제의 외국 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심한 인플레이션과 1953년 2월의 화폐개혁 실패로 약 3년 동안 발행고는 11배면서 물가 지수는 18배로 올라간 것도 이승만 정부의 경제 실패 요인 중 하나라고 꼽힌다.
[1] #[2] 김창숙, <심산 유고>, 199~200p,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역, 1973[3] 정작 황당한 것은 이승만을 숭배하는 뉴라이트 같은 극우 쪽에서는 이 글을 토대로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박정희는 1963년에 발표한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이승만을 가리켜 김일성과 등치시키기까지 하면서 독재자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4] 반민특위 담화를 다섯 차례나 발표하고 반민법 법률 개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였으며, 윤기병 서울중부경찰서장에게 지시하여 6.6 반민특위 기습 사건을 주도했고 11일에는 특경대를 해산시켰다.[5] 자세한 내용은 국회 프락치 사건 문서 참조.[6] 1956년에는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비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을 허용한다.'라는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헌법을 만들었고, 1960년에는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밖에 없었지만 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잘 알려진 3.15 부정선거가 터졌다.[7] 이승만의 생일마다 집집에는 태극기가 달렸고, 이승만 찬가를 불러야 했으며 국민 학교와 관공서마다 이승만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뿐만 아니라 화폐에도 이승만의 얼굴이 들어갔다.[8] 높이는 무려 25m로 당대 동양 최대 규모 크기였다.# 오늘날 평양의 김일성 동상의 높이는 20m 정도다.[9] 실제로 둘이 완전히 갈라선 기간은 광복 후 장덕수 암살 문제로 완전히 갈라지고 나서 몇 년 뿐이었다. 이전까지는 노선 차이가 있고 약간의 갈등은 있었을지언정 줄곧 편지를 주고받으며 형님, 아우 하던 친한 관계였다.[10] 출처: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김기진 지음/ 푸른역사[11] 사실 이건 이승만 본인의 자질 문제인데, 이승만은 누가 되었건 무조건 자신한테 충성만 하면 다 고위관직에 뽑아주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아부만 잘하면 아무나 등용했다는 이야기.[12]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56~58쪽[13]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조사하러 온 국회의원들한테 자기 부하들을 북한군으로 변장시켜서 총격을 가한 다음, 북한군의 음모라는 거짓된 누명을 씌우기까지 한 인물이었다.[14] 6.25 초전 패배 책임[15] 경찰 간부들을 해임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의 친지와 친지들을 임명 시켜서[16] 국민방위군 사건 때에도 신성모를 파면시키라는 국회의 요구에 대해 이승만은 처음에는 "강을 건너다가 말을 바꾸어 탈 수 없다."라고 거부했으나,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결국 신성모를 해임시켰다.[17] '지당하신 말씀입니다'의 그 지당이 맞다.(...)[18] 다만, 여기에는 곽영주가 박정희의 인사에 개입하여 그를 해임시키라는 압력을 넣었던 것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19] 특히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아내인 프란체스카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는데다가, 이기붕 본인의 건강이 무척 쇠약하여 사실상 이기붕의 업무마저 대신할 정도로 이승만 정부에서 입지가 무척 강했다. 프란체스카 본인이 평생 한글과 한국어를 몰랐기 때문에 영어가 능통한 박마리아한테 크게 의존했다.[20] 1960년에 이승만은 이미 85세였다. 이승만은 윈스턴 처칠보다 1살 아래이며, 이오시프 스탈린보다도 4살이나 연상이다. 지금도 85세면 장난 아닌 고령이다.[21] 실제로 2015년 7월 22일 뉴시스가 보도한 CIA 비밀문서에 의하면 이승만은 1959년 5월부터 고령으로 인해 정신건강에 이상이 보이고 판단능력도 쇠퇴해간다고 하였다.#[22] 하지만 장교출신인 차지철 의원에게 매일 구타당한 자유당 인사들이 많았다.[23] 지금의 인식과 달리 당시 이승만과 박정희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24]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47~48쪽[25] 박정희가 이승만을 얼마나 미워했냐면 이승만 사망때 장례식 격도 영친왕 서거때보다 낮았다. 그것도 이승만에 대한 반감이 가장 강했던 대구와 부산 민심을 등에 업고 이승만 장례식때 파티벌이는 것도 통제를 전혀 안했을 정도다. 그에 비해 대한제국 최후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장례식은 아예 대한민국 출범 최초 국장을 열 정도로 신경을 매우 쓰면서 이승만에 대한 반감을 더더욱 노골적으로 표시했다.[26] 이것만 보더라도 이승만의 반일 민족주의 성향이 대단히 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정작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증오하면서 이승만은 찬양하는 모순된 성향을 지닌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은 이승만의 이러한 반일 민족주의적인 모습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을 하고 있는 것이 블랙 코미디다.[27]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28] 실제로 많은 독재 국가에서 독재자를 지폐도안으로 쓰는 경우는 차고 넘친다. 당장에 북한부터가 그런데, 심지어 그 북한도 김일성 생전에는 최고액권에만 김일성을 집어넣었고, 김정일, 김정은도 자신을 감히 지폐 도안에 새겨넣지 않았다.[29]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현실문화, 2017, p.264[30]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이 인민군 치하에서 했던 연설이다. 비록 인민군 치하에서 한 연설이라는 점에서 공정성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의 학살을 규탄한다는 점에서 그래도 의의가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겠다.[31] 자세한 건 6.25 전쟁 학살/유엔군, 국군, 미군, 우익을 참고.[32] 이덕인 (2015). 1950년대의 사형제도에 대한 실증적 분석과 비판. 형사정책연구, 26(2), 5-57[33] 그 이유가 기가 막힌데, 국군이 왔는데 주민들이 나와서 환영을 하지 않았으니 빨갱이라는 것이었다(...)[34] 朴亨堯(83. 表善面 加時里, 西靑출신 경찰관)의 증언이다. 일본군이나 독일군에서도 멀쩡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있듯이 서북청년단에서도 멀쩡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있는데, 박형요 씨가 그 경우로 이 분은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막기도 했다.[35] 전직 경찰관 文昌松이 1995년 이 보고서 필사본을 엮어 '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이란 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고 한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146쪽에서 재인용, 159쪽[36]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146쪽에서 재인용, 187쪽[37] 대략 20만 명 정도로 보기도 한다.[38] 다만 존 하지 자체가 대단히 무능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의 평가가 의미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존 하지는 이승만과 시종일관 대립하던 인물이었다.[39] 정확히는 이승만이 아니라 신성모의 발언이다. 실제 정부수립 초기만 해도 이 발언은 어느 정도 먹혔는데, 그때는 남북 공동 총선 무산으로 각자 정권이 세워지다보니 서로에 대한 정치공세수위가 높았고, 소련이 북한에 대규모 군사지원을 해주기 전이었다.[40] 이에 대해서 2006년에 김대중을 만난 아미티지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당시 미군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졌고 애치슨 라인도 실수였다"고 인정했다.##[41] 한국전쟁, 박태균.[42] 한국군 57mm 대전차포. 그러나 57mm 대전차포의 위력이 부족해서 실제 성과는 보병에 의한 성과라는 이야기도 있다.[43] 수직으로 환산하면 90mm.[44] 저 말 자체는 신성모의 발언이기는 하지만.[45] 물론 그렇게 제공받은 무기를 제대로 굴릴 수 있냐는건 별개의 문제인데 당시 한국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무리다. 필요한 물자를 지속적으로 미국이 대준다면 모를까. 그럼에도 이승만은 국군의 항공기 운영능력이 없음에도 미국에 F-80 슈팅스타를 달라고 요구해 미국이 황당해 했다. 당시 미국에서도 실전배치 숫자가 부족했던 최신예 제트전투기를 요구했으니...[46]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 평양을 미군보다 먼저 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은 있다.[47] 다시찾는 우리역사 제 3권/ 한영우 지음/ 경세원/ 2004년 발행/ 186쪽[48] 사실 대한민국은 1988 서울 올림픽 무렵까지 전기가 안 들어오는 시골 집도 있을 만큼 전력 사정이 매우 열악했다.[49]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7년 11월 25일 발행/ 245~250쪽[50]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7년 11월 25일 발행/ 245~250쪽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