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조총련을 피고로 하는 재일교포 북송사건' 손배소 희망"
기자명 홍승기 변호사
입력 2024.11.28
[본지 창간 3주년 특별 대담] '탈북 운동가' 된 북송 교포의 딸 리소라
이혜경 국민대 명예교수의 연락을 받았다. 자택의 게스트 룸에 머무르고 있는 탈북운동가 리소라 씨를 만나 보라고 했다. 미리 보내온 자료를 읽으며, 소설이라고 해도 과장이 심하다 싶었다. 다음 날 리소라 씨로부터 그녀가 겪은 별별 사연을 확인했다. 숨을 죽이고 들었던 긴 이야기의 일부를, 그것도 무난한 내용만을 글로 옮긴다. [인터뷰=홍승기 변호사]
리소라.-서울에는 어떻게 왔나?
"서울에서 조총련을 피고로 하는, 재일교포 북송사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할 수 없을까 궁리하고자 왔다. 실제 소송이 아니라면 모의재판이라도 했으면 싶다. 북조선 적십자사와 연대해 10만 명 가까운 재일교포를 북송한 일본 적십자사도 책임이 없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책임은 조총련이 져야 한다."
-현재 일본에서 어떤 활동을 하나?
"10여 년 전 탈북민 위주의 북한인권단체 ‘모두 모이자’를 설립해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매달 도쿄의 조총련중앙본부 앞에서 시위를 한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김정은을 피고로 하는 민사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탈북민 재일북송교포 5명이 원고였다. 도쿄지방법원은 각하했으나 지난 해 10월 30일 도쿄고등법원에서 승소했다."
-출생지가 어디인가?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재일북송교포인 어머니가 17세에 부모 몰래 ‘공화국 지상낙원을 보겠다’며 홀로 북송선을 탔다."
-북한에서의 생활을 어떠했나?
"재일북송동포는 자유세계에서 왔다는 이유로, ‘동요계층’ 가운데 가장 아래에 속한다. 동요계층보다 성향이 불량한 ‘적대계층’이 있으나 그들은 거의 수감되어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동요계층의 바닥에서 실감한 차별은 견디기 힘들었다. 물론 북송동포 중에서도 조총련 간부 가족이거나, 혹은 일본 친척들이 돈을 보내오면 대접이 달랐다. 가출하다시피 북송선을 탄, 가난한 집 딸인 어머니에게는 먼 이야기였다."
일본 시위 현장에서 리소라 씨. /리소라-대학은 다녔나?
"학업성적이 꽤 우수했지만 출신성분 탓에 대입절차는 진행되지 않았다. 대학 진학을 포기할 무렵 기적이 일어났다. 전기생산부터 배송·공급까지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에서 전기기계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생활은 어떠했나?
"강의 중 1/3 정도가 강의실에서 이루어지고 나머지는 평양의 건설현장, 벌목현장, 발전소 건설현장 등에서 작업을 했다. 6개월간 예비역군관(교도대) 육성기간, 3대혁명 소조까지 마치며 약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배치됐다. 1984년경부터 (평양이 아닌) 지방은 배급이 중단됐다. 대학에 입학한 다음 해인 1989년부터 기숙사에서는 하루 한 끼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자체 해결하라고 했다. 그 무렵 이미 소련의 지원이 말라갔던 것이다. 1989년 임수경이 방북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으로 북한 경제가 멎었다. 그 축전의 개최를 앞두고 김일성과 김정일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고 소문이 났다."
-졸업 이후의 생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후부터 길거리에 시체가 뒹굴었고, 이때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선포했다. 아들이 성장기 영양실조로 갈비뼈가 비틀어져 있다. 심한 영양실조로 위급해진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한국과 UN이 보낸 쌀과 의약품 거래 틈새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원조 받은 쌀은 인민무력부 양식부장이 총관리하고, 그로부터 사회의 수매양정국장이 필요한 양을 배분받는다. 이중 일부는 김정일 일가 등 고위층에게 제공하는 육류 사육용 사료를 중국에서 매입하기 위해 외화로 전환된다. 출세한 대학 동기들의 도움으로 외환 전환하는 일을 맡아 할 수 있었다. 원조 쌀과 약품 배분에 개입해 꽤 돈을 벌었고, 지방에서 집장사를 해서도 돈을 벌어 평양에 집을 사고 남편의 출세길을 만들었다."
-집장사라면, 북한에 부동산 매매 시장이 있다는 말인가?
"돈주(錢主)들이 자재, 인건비 등 아파트 건설에 필요한 돈을 대고, 간부가 필요한 허가 등 서류절차를 맡아 아파트를 짓는다. 완성되면 돈주와 간부가 필요한 만큼 챙기고 나머지는 팔 수 있다. 겉으로는 국가소유건물로 등록해 놓고 실제로는 개인 소유처럼 팔고사고 한다."
지난 9월 20일 진실화해위 인권 유린 결정 후 시위를 하는 모두모이자 회원들. /연합-그렇다면 부유층이었는데 왜 탈북했나?
"북한 사회에 마약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공식적으로는) 마약을 금지했으나, 1999년경부터는 마약 생산과 판매가 공공연해졌다. 개인이 제조하는 화학제 마약도 상당량인데, 3000달러 정도 투자하면 이익이 2000달러 정도이니 그만큼 수익성이 높은 장사가 없었다. 나는 김정은이 마약 중독이라고 확신한다. 당 간부들은 마약을 비타민처럼 복용하고, 민간에서도 상비의약품이 마약이고, 군부대에서도 전시비상약으로 비치한다. 미성년자들 사이에서도 마약이 만연한다. 그런 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없어 탈북을 결행했다. 국경선 근처에서 남편을 만나 함께 탈북하기로 했는데, 남편이 검문소에서 체포됐다. 돌아오라는 남편의 전갈을 받고 그날 밤으로 열 살 안 된 두 아이를 데리고 국경을 넘었다. 도저히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행히 남편은 목숨을 부지해 지금 북한에 있다. 남편에 대한 죄책감은 죽는 날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다."
-종착지가 일본이었다. 왜 일본행이었나?
"내 인생을 옭아맨 재일북송사업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나?
"법적 보증인이 없어 노숙자 쉼터, 가정폭력 피난처를 거쳐 생활보호 시스템의 도움으로 세 식구의 주거를 해결했다. 일본에서의 첫 직업은 호텔 방 청소부였다."
-호세이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했더라. 굳이 다시 대학 공부를 할 이유가 있었나?
"일본 사회를 이해하려고 대학에 다시 갔고, 북한에서는 일반인에게 거의 접근이 되지 않는 ‘법’을 선택했다. 북한에서는 법서(法書)는 금기도서다. 북한 학력이 인정되지 않아, 야간 중고등학교를 거쳐 호세이대학 야간대학에 입학했다. 일하며 아이들을 키우며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느라 6년 만에 졸업했다. 법률학과 2학년 말에, 말로만 하는 북한인권이 아니라 법정에서 책임규명을 하고자 ‘모두모이자’를 결성했다. 올해로 10년이 된다."
일본 도쿄고등법원 정문 앞에서 정기적으로 시위를 하는 모두모이자 회원들. /모두모이자 제공-국적이 일본이다.
"탈북자로서 일본에 입국할 때 국적 선택지가 3가지였다. 조선적, 대한민국, 무국적. 그때는 무국적을 택했다. 호세이대학 민법 수업에서 법무국 부동산등기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옆에 국적업무과가 있어 실습을 겸해 직접 일본 국적 취득 수속을 했다. 나는 맹렬한 활동가이므로 일본 국적이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이제는 이중국적으로 대한민국 국적도 취득하고자 한다."
-북한은 아직도 공개 총살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그런가?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해 주민에게 총살현장을 보도록 한다. 총살을 집행할 때는 친인척을 가장 앞자리에 앉힌다. 나도 여러 번 보았다."
-생각나는 현장은?
"인민학교 2, 3학년 아이들에게 교사가 조사를 한다. "혹시 부모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영화를 보지 않았나, 무엇을 보다가 감추지 않았나?" 그렇게 얻은 정보로 일가족을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10년 후 아이는 석방됐는데 부모는 모두 수용소에서 죽었다. 아이는 출소 후 부모 사망을 알았고, 자신이 부모를 죽게 했다고 자포자기해 전화선 절도라는 중범죄를 저질렀다. 그 아이가 총살당할 때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 보던."
씩씩하게 세 시간 이상 폭포수처럼 이야기를 쏟아 놓던 그녀였는데, 순간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청소년이 된 그 아이를 총살하던 날도 친척들을 앞자리에 앉혔다고 했다.
모두모이자 가와사키 대표. 북한 군대에서 20살을 갓넘긴 손자를 잃었다. /모두모이자홍승기 변호사parao11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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