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2

[전자책] 문명의 전환 새로운 비전 | 장기표| 알라딘

이병철
-우상(牛墒) 장기표 선생 1주기에/




9월 20일, 영원한 재야라고 일컬어지던 우상(牛墒) 장기표 선생 1주기 추도 행사가 선생의 유택이 모셔진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에서 있었다.
어제까지 비오고 궂었던 날씨가 다행이 개이는 가운데 유가족들과 지인들과 선생을 흠모하는 분들이 예상보다 많이 오시어 추모행사를 진행했다.
어쩌면 선생은 당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가 사후에 더욱 새롭게 조명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번 1주기 때 선생의 추모문집을 간행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지만, 형수님이 서두르지 않았으면 한다고 하셔서 미루게 되었다. 선생의 평전은 따로 쓰고 있는 작가가 있어 기다리면 될 것 같다고 한다. 
선생이 떠난 지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이 나라의 정치 현실은 참으로 경천동지할 정도로 바뀌었다. 선생이 생전에 우려했던 일들이 지금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엄혹한 현실로 다가와 있는 것이다. 선생을 추모하면서 참석한 이들이 하나같이 깊게 우려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선생 떠난 뒤 지난 일년 동안에 미망에 사로잡힌 무지한 자가 국가 권력을 잘못 행사했을 때, 나라가 어떻게 한순간에 망가질 수 있는지를 빼저리게 경험했다. 
그리고 그런 전임 정권의 자폭으로 새롭게 집권에 성공한 인물과 그 집단들이 마치 점령군처럼 행세하며 피 땀으로 쌓아온 이 나라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반을 어떻게 뒤흔들고 있는지를 가슴 졸이며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지금 이런 국면에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선생의 1주기를 맞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 생각이었다.
우상 장기표 선생, 그는 이번 생에서 내가 만났던 이들 가운데 가장 자신에게 엄격했고, 대의를 위해 온전히 자신을 던졌던 우리 시대의 마지막 지사였다. 동시에 생명과 사랑의 정치, 자아실현의 정치를 역설한 뜨겁고도 여린 혼의 소유자였다.
선생은 부당하고 불의한 권력 앞에서는 강철처럼 굳건했지만, 이 땅의 민중들과 함께할 때는 더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선생이 마지막까지 전력으로 추구했던 특권폐지운동 또한 그 때문이었으리라 싶다. 
내가 선생을 우리 시대의 양심이자 참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선생을 이른바 운동판의 동지로, 선배이자 형으로 함께해오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선생이 사적 이해관계로 주저하거나 타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선생이 비록 정치권에 몸담았지만, 내가 선생을 정치인이 아니라 수행자라고 일컬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선생은 정치판을 정치운동의 장으로 삼은 영원한 운동가였다. 세상에서 선생을 영원한 재야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일급수의 맑고 청정한 물에서나 살아갈 수 있는 물고기가 시궁창 같은 혼탁한 정치판에 뛰어들어, 부끄러움조차 잊은 양아치 같은 무리들 틈에서 그 물을 맑게 정화시키겠다고 작정한 것은 애초부터 무망한 일이었다.

선생이 말기암으로 홀연히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으리라 싶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선생의 팔순 여행을 함께하며 이제부터는 그런 미망에서 벗어나 ‘수행자 우상(牛墒)'으로 남은 날을 사시라고 강권했던 것도, 그런 정치판을 바꾸려하다가는 끝내 제명대로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지금 이 시대, 이 나라의 가장 큰 불행은 우리 사회에 이른바 양심세력이라 할 수 있는 재야와 깨어 있는 지성인 그룹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모두 권력의 위세 앞에 숨죽이고 있거나, 진영이라는 망령에 휩쓸려 확증 편향의 내로남불식의 언사를 부끄러움 없이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전횡을 지적하고 제지할 세력이 없다는 것은 나라가 망국으로 치닫는 지름길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전횡과 독주가 어떻게 나라를 나락으로 내몰았는지는 지난 역사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미 이 정권에서도 파시즘의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견제받지 않은 정권과 거대 여당은 행정부와 입법부에 이어 언론까지 사실상 장악한데다가 이제는 마지막 보류인 사법부까지 저들의 의도대로 바꾸려는 폭주를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이 나라의 근간이 무너지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나라의 명운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더 안주해온 우매하고 무능한 야당은 여전히 자중지란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현실적으로 집권 여당의 일방적 폭주를 견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새력과 수단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렵고도 우려스러운 일이다. 일방적 폭주는 결국 필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재야와 양식적인 지식인들이 반민주, 반인권적인 폭주를 막고 국가 권력의 건강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앞서 나서야 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나라와 국민들도 다시 새롭게 일어날 수 있고, 그래야 이 정권도 성공한 정권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함께 사는 길이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고, 시대 정신이 사라진 암울함 속에서 그 어둠을 밝혀줄 등불마져 보이지  않는데, 세계 도처에서 망나니들의 미친 칼춤만 난무하고 있다. 
누가 나서서 다시 등불을 밝히고 사람과 뭇생명이 더불어 함께 사는 호혜 상생의 세상, 그런 새로운 문명의 길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선생의 1주기에 새삼 시대의 등불이었던 선생을 그리워하고 떠올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생이 남기신 뜻은 지금 우리에게 그 길로 오롯하게 한마음으로 나서라는 것이리라 싶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깨어 있는 양심으로 이 나라와 세상을 위해 해야할 마지막 역할이라는 당부이리라.
오늘 1주기를 맞이하여 동지였고 선배이자 자상한 형이었던 선생의 유택 앞에서 남기신 그 뜻을 다시 새긴다. 
이 땅, 이 나라, 이 세상에 생명과 사랑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각자도생의 공멸의 길에서 벗어나 자아실현의 행복을 통해 우애와 상생의 길로 나아갈수 았도록 새롭게 마음을 보태야겠다고. 
이 땅의 영원한 재야 우상 장기표 선생이여, 
내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형이여,
당신의 그 뜨거운 혼이 여기에 남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길이 살아 숨쉬소서.
(25.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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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종덕
그런데 장기표 선생을 왜 "영원한 재야"라고 하는가요? 언제부터 누가 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 궁금합니다.
21h
Reply

Author
이병철
민종덕 오랫만이에요. 영원한 재야라는 말은 내가 처음 쓴 말이 아닌데, 그 말이 어느새 장선배를 지칭하는 수식어가 되었네요. 이번 추모행사 현수막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는데,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싶어요. 하나는 정치판에 있었음에도 여태껏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못했다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정치판에 뛰어들었음에도 여전히 재야인사처럼 행동한다는 의미라 싶은데, 지금은 정치판(정치현장)의 재야인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아요. 아마도 이런 수식어가 사용된 지는 내 기억으론 꽤 오랜된 것 같은 데, 십년 쯤은 되었지 않았나 싶네요.
14h
Reply
남민종덕
이병철 그렇군요 썩 좋은 의미는 아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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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위키백과

장기표
2021년 7월 5일에 국회의사당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모습
출생1945년 12월 27일
미 군정 조선 경상남도 밀양군 상남면 기산리
사망2024년 9월 22일(78세)
성별남성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국적대한민국
학력서울대학교 법학과 학사
경력
  • 전국민족민주연합 사무처장
  • 민중당 정책위원장
  • 통합민주당 당무위원
  • 새시대개혁당 대표
  •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 푸른정치연합 대표
  • 새천년민주당 영등포을 지구당위원장
  • 한국사회민주당 대표
  • 녹색사민당 대표
  • 새정치연대 대표
  • 녹색사회민주당 대표
  • 녹색통일당 상임공동대표
  • 정통민주당 선대위원장
종교무종교
웹사이트

장기표(張琪杓, 1945년 12월 27일~2024년 9월 22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사회단체활동가이다.

생애

경상남도 밀양군 상남면 남산리에서 태어나[1], 김해군 이북면(한림면) 장방리에서 성장하였다. 마산공업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에 진학, 법과대학 학생회장을 맡아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70년 11월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분신자살 소식을 접하고 서울대학교 학생장으로 치르겠다고 가족에게 제의했으며, 후에도 계속 노동운동에 지속적 관심을 쏟았다. 이후 유신체제와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계속하여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시작으로 70-90년대에 걸쳐 5차례 복역하였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관련자로 수배됐으나 도피하여 체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5년 민주통일운동연합(민통련) 정치연구실장을 맡았고, 1986년 5.3인천사태로 구속되어 1988년 12월 말에 출소하여 1989년 전국민족민주연합 사무처장을 지냈고, 1990년 재야운동의 제도권 진입을 목표로 이재오김문수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하여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서울 동작갑)해 낙선하였으며, 이후 재야운동과 거리를 두고 제도권 정계에 진입을 시도하였다.

1995년 서경석장을병 등과 개혁신당을 창당한 후 민주당과 합당하여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서울 동작갑)해 낙선하고 탈당하였다. 2000년 홍사덕과 연대를 시도했으나 홍사덕의 한나라당 입당으로 실패했고, 이후 한나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한 김윤환이기택이수성 조순 등의 보수인사와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전국구)했으나 낙선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탈당하였다.

2002년에는 당시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여 서울 영등포구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이후 바로 탈당하였다. 2004년 총선에는 한국노총 주도의 한국사회민주당의 대표를 맡아 출마(서울 동작갑)했으나, 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수도이전 국민운동을 전개하다가 2012년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박세일 교수와 함께 가칭 '국민생각'을 창당하려 했으나, 결별한 후 녹색통일당을 창당한 후 민주통합당 공천탈락자들이 주도하는 정통민주당으로 합당하고 비례대표 1번으로 19대 총선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다.[2]

1998년 pc통신망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에 '장기표 시사논평'이라는 정치논평 방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2013년부터 인터넷에 '언론을 바로잡아 세상을 바로잡자'라는 슬로건으로 '뉴스바로'를 창간하여 발행인 및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14년도엔 중국공산당중앙당교(중앙당교)의 기관지 학습시보의 등위원(鄧郁文) 편집장을 초청하여 토론회 및 강연을 주최하기도 했다.

또한 합리적 진보를 표방하며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박범진 전 의원,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 의장 등 33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회민주주의포럼(사민포럼)도 2014년 12월 '왜 지금 사민주의인가'라는 제목으로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사민포럼은 2015년 상반기 창당을 목표로 삼기도 했지만 정작 2016년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그런 그는 2020.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소속으로 김해시 을 선거구에 출마해 낙선했다. 2021년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출마했으나 예비경선에서 탈락하였다. 여러 정당에 입당하고 탈당하는 행보와 관련해 여러 가지 비판도 상존한다. 이부영김근태 등 오랜 재야 동지들이 대부분 성공적으로 제도치권계에 진입한 데 반해, 30년 넘게 계속 도전 중이다. 노동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던 그는 자신이 정립한 민주시장주의의 구현을 위한 정당을 건설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2023년 4월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여 특권폐지를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하다가 2023년 11월 특권폐지당을 창당하여 2024년 총선에 임했으나 또 실패했다가, 같은해 9월 22일 담낭암으로 사망했다.

전과

  • 폭발물사용음모, 내란음모: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 1972년 9월 11일 선고[3]
  • 반공법위반, 주민등록법위반, 병역법위반: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2년 6월 - 1979년 12월 29일 선고[3]
  •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징역 1년 - 1986년 11월 17일 선고[3]
  • 소요, 공문서위조, 위조공문서행사, 국가보안법위반,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징역 6년, 자격정지 3년 - 1986년 11월 17일 선고[3]
  • 국가보안법위반(기타):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 1993년 2월 26일 선고[3]

주요 저서

  • 1987 우리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때 <형성사>
  • 1987 해방의 논리와 자주사상 <도서출판 친구>
  • 1988 새벽노래 <미래사>
  • 1991 사랑의 정치를 위한 나의구상(전8권) <한길사>
  • 1995 지구촌시대 민족발전전략 <백산서당>
  • 1997 문명의 전환 <미래M&B>
  • 1998 국가파산을 막을 희망의 메시지 - 구국선언 <신문명>
  • 1999 대통령님, 나라팔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신문명>
  • 2001 신문명 국가비전 <신문명> 신문명 경제시론 <신문명>
  • 2004 대통령 대 국민 <신문명>
  • 2006 장기표의 신문명 경제비전 - 한국경제 이래야 산다 <명상>
  • 2007 북한위기의 본질과 올바른 대북정책 <신문명>
  • 2007 신문명 국가비전 증보판 <밀알>
  • 2007 부부사랑, 그 지혜로운 행복 <밀알>
  • 2007 청년의 비전, 청년의 도전 - 청년에게 고함 <밀알>
  • 2008 지못미, 정치! <시대의창>
  • 2009 지못미, 경제! <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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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張琪杓 | Chang Ki-pyo[1]
장기표 선생 프로필(1)
출생
사망
2024년 9월 22일 (향년 78세)
본관
창녕 장씨
학력
병역
육군 병장 제대
가족
배우자 조무하
장녀 장하원, 차녀 장보원
최종 당적
링크
X Corp 아이콘(블랙) | 페이스북 아이콘 | 유튜브 아이콘 | 네이버 블로그 아이콘




































































1. 개요2. 생애
2.1. 재야 시민운동2.2. 정계 입문 (민중당)2.3통합민주당2.4민주국민당2.5. 민국당 탈당2.6새천년민주당2.7한국사회민주당녹색사민당2.8. 사민당 해산 후2.9제19대 국회의원 선거2.10. 19대 총선 이후2.11. 보수정당 합류2.12. 탈당 후 특권 폐지 운동2.13. 투병 및 사망
3. 평가4. 사건사고
4.1. 공직선거법 위반 및 이재명 아들에 대한 허위사실공표
5. 저서6. 소속 정당7. 선거 이력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시민운동가, 정치인.

마산공업고등학교 화공과를 졸업했으며, 196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 입학 후 학생운동에 투신하면서 1995년에야 졸업했다. 재야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에 오랜 기간 헌신했으며 진보좌파 정당을 결성하면서 정계에 입문, 정치인과 시민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선출직 공직선거 운은 매우 좋지 않은 편으로, 제14대부터 제17대까지 국회의원 선거에 연이어 도전했으나 모두 낙선했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보수정당 후보로 진영을 옮기면서까지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 시민 운동의 대부이면서도 끝까지 제도권 정치에 진출하지 못한 행보로 영원한 재야(在野)라는 별명을 얻었다.

2024년 암으로 사망하면서 결국 한 번도 선출직 공직에 당선되지 못했다.

2. 생애[편집]

2.1. 재야 시민운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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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부인 조무하 여사, 가운데가 장기표 본인. 오른쪽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1960년대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꾸준히 노동운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서 싸워온 재야운동가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장이었으며,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모병원으로 찾아가 어머니(이소선 여사)를 만났다. 당시 이 여사는 “우리 태일이가 그토록 대학생 친구 갖기를 바랐는데[4] 죽고 나서야 나타나느냐”고 한탄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에서 전태일의 학생장을 치렀다.

그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으로 9년을 감옥에서 지냈고, 12년의 수배생활을 보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비롯해서 여러 번 복역과 가석방, 석방을 거쳤는데, 위 사진도 그 당시 가석방 되며 찍힌 사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으며, 일절의 배상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국민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서 할 일을 한 것일 뿐이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5]
장기표3
▲ 2011년 이소선 여사 장례식장에서

2011년 7월 8일 이소선 여사가 쓰러지기 전 가족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가 평소에 “하원이 아버지가 좀 잘돼야 할 텐데”라고 했을 정도로 걱정과 격려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는 “기표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기억했다. #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7년 청계피복노동조합 사건, 1986년 인천5.3민주항쟁 등 많은 민주화운동, 노동운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1980년대까지 꾸준히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서 활동했다. 신군부가 주도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도 연루되어 정치 활동 규제 대상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6월 항쟁 이후로는 재야 세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는데, 모든 재야세력이 결집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을 주도하는 40대 4인방(이부영이재오, 장기표, 김근태)의 일원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6]

1988년 2월 27일,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7,234명의 대사면을 감행했으나, 여기에 장기표나 김근태이태복 등은 포함되지 않았고, 야권에서는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였다. 정부는 1988년 12월 21일 장기표를 포함한 2,015명을 석방했는데, 장기표는 석방되자마자 다른 양심수들도 전원석방하라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25일에 연행되기도 했다.

2.2. 정계 입문 (민중당)[편집]

1980년대 후반에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 내에서는 재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전민련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의견이 매우 갈렸다.[7] 1989년 9월에 있던 전민련 2차 정기중앙위원회에서는 "정당을 결성하는 것을 막지 않으나, 전민련 내 직위를 사임하고 개인자격으로 추진하라"는 결론이 나오면서 장기표는 전민련 사무처장을 사임한다. 1989년 11월에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약칭 '진보정당준비모임')이 결성되었고, 장기표는 기획반 책임간사였다가 조직국장이 된다. 1990년 3월에 전민련 대의원대회에서 독자정당 창당안이 부결되면서[8], 독자정당 창당을 추진하는 이들은 전민련을 탈퇴하였다. 1990년 4월에는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 추진위원회'(약칭 '민연추')로 개편되었고[9], 장기표는 조직위원장을 맡는다.

1990년 11월, 이재오이우재김문수 등은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기치로 민중당을 창당하였고, 장기표는 당의 정책위원장을 맡는다. 1990년 12월 30일에 전두환이 백담사에서 서울 연희동 사저로 복귀하자, 31일에 장기표는 이재오, 조춘구와 함께 국무총리실로 항의 방문하여 복귀 반대 항의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1991년 3월 11일에는 '금권정치 청산을 위한 정책 대토론회'에 최장집 교수, 민주자유당 남재희평화민주당 조세형민주당 김광일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8월에는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연합회 초청으로 인해 방중하였다.

그러나 민중당은 1991년 지방선거 결과 강원도의원 1명만 당선시키는 데 그쳤고,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아예 1명의 당선자도 못 내며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장기표도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에 출마했고, 첫 낙선을 경험한다. 그래도 이 때는 시민운동가로써의 명성 때문인지 21.5%로 3위를 기록하여 군소 정당 치고 높은 득표를 얻었다. 민중당은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여 당시 정당법에 따라 등록 취소되었다.

민중당 말소 후, 민중당 출신들은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과 연루되어 조사를 받는다.# 김낙중, 장기표 등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장기표는 1993년에 몇 달간 복역하다가 출소한다.

1993년 집권한 김영삼은 여당(민주자유당) 물갈이를 염두에 두고 1994년에 이우재이재오정태윤박형준김문수차명진 등 민중당 출신 인사 상당수를 영입하였으나, 장기표는 민주자유당에 가지 않고 독자 행보를 한다.

1994년에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과 동반해외여행을 하기도 했다.#[10] 그리고 과거 민중당 출신 인사 일부들과 함께 '21세기 사회발전연구회'를 만들어서 회장을 지냈다.

1995년에는 입학 29년만에야 서울대를 졸업했다. 5차례 옥고를 치르고 2차례의 제적과 재입학을 되풀이한 끝에 마침내 졸업한 것.
1995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홍성우박형규 등 진보적인 목사들, 장기표 등 민중당 출신들이 주축을 이뤄 "정치개혁시민연합"을 설립한다. 이 때 장기표는 부위원장이었다.

이후 정치개혁연합이 주도한 신당은 개혁신당으로 창당되었다. 장을병홍성우가 공동대표를 맡았고, 장기표는 오현주, 곽영훈, 성유보와 함께 공동 부대표를 맡는다. 얼마 가지 않아 민주당과 통합을 추진하면서 통합실무대표를 맡았고, 이후 민주당과 신설 합당하여 통합민주당 소속이 된다.

1996년 15대 총선에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다시 동작구 갑에 출마하나, 19.07%를 득표하며 3위가 되고, 두 번째 낙선을 경험한다. 당시 통합민주당은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에 비해 당세가 상당히 밀렸다.

통합민주당은 총선 이후 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제15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후보로 추대된 조순 후보가 부진하자, 통합민주당은 신한국당의 이회창을 지지하고 신한국당-민주당 합당을 추진한다. 민주당의 비주류들이 '국민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를 결성하자, 장기표도 여기 참여하고 한나라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다만 김원기김정길노무현처럼 새정치국민회의에 가지도 않았다.

이후 재야운동, 제도권 정치와 거리를 두고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서 저술과 강연활동에 몰두한다. 그리고 인터넷을 활용하여 시사칼럼 연재를 한다. 1999년에는 한나라당이 자신의 정치칼럼을 무단으로 게재했다며 소송을 걸기도 했다.#

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를 개편하기 위해 새천년민주당 창당을 추진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 이창복이 새천년민주당에 간 것을 비난하기도 했다.# #[11]
1999년에 슬슬 16대 총선을 위한 신당 작업을 시작했다. 장기표와 비슷하게 무소속 3지대를 노리던 홍사덕과 협력하여 '개혁신당'을 창당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2000년 1월에는 창당을 추진하던 당명을 개혁신당에서 '무지개연합'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2월에 홍사덕이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가면서 장기표는 또다른 세력과 통합을 모색해야 했다.

장기표는 2000년 2월 9일에 '청렴정치 국민연합'이라는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전 총리이면서 당시 제3지대 노선을 걷던 이수성을 끌어들이면서 명칭을 '새시대개혁당'으로 변경한다. 이후 신상우김윤환 등 한나라당 낙천자들과 통합하기로 한다.[12]

조순이나 이기택 등 통합민주당 출신들도 한나라당 공천 과정에서 갈등을 빚었는데, 그러면서도 신당 세력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2월 23일 조순이 한나라당을 공식 탈당하고 신당 창당을 선언하였다. 조순은 2000년 2월 29일에 대표자로써 민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등록했고, 3월 14일에는 공식적으로 정당이 등록되었다. 장기표는 민주국민당에 합류하기로 하여 '새시대개혁당' 창준위를 자진 해산시켜버렸다.

민주국민당은 반DJP, 반이회창을 내세우는 제3지대 정당에 가까웠다. 장기표는 최고위원에 선출되었고, 수도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다가 조순이 선대위를 사퇴하면서 중앙선대위원장이 되었다. 원래 서울 종로구 출마를 준비했으나, 당선되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비례대표로 나가기로 했다.[13] 창당에 관여했던 기여도 때문인지 비교적 앞순위인 3번을 받았으나, 민주국민당이 참패하면서 비례대표 득표율 3.68%로 고작 1명이 당선되었고, 결국 장기표의 3번째 낙선 이력이 된다.

이 시기에 인터넷 논평을 통해 '다가오는 16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김중권을 내세운다'고 주장해 화제가 되었다.#[14]

2001년, 새천년민주당은 국회 과반 확보를 위해 자유민주연합뿐만 아니라 민주국민당에도 정책연합을 제의하였고, 김윤환 대표가 이를 받아들여 추진하기 시작했다. 장기표와 신상우허화평이기택김동주 등은 이에 반발하였고, 김윤환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결국 장기표는 4월 4일 최고위원직을 사퇴하고, 4월 18일에 탈당한다.

2.5. 민국당 탈당[편집]

2001년 11월 8일에는 '국가복지당'의 창당을 선언했다.# 이후 '푸른정치연대'라는 이름으로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시기 장기표는 인터넷 논평으로 반김대중 성향을 더 강하게 나타냈는데, 김대중 대통령에게 사재를 모두 국각에 헌납하라고 하거나#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보상금을 사양했어야 마땅하다고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해찬은 기자들 앞에서 장기표가 맛이 갓다고 비난하기도 했으며#유시민은 프레시안에 "장기표 대표님께 드리는 고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강준만과도 언쟁이 있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선 경선에 관심을 가지며, 이인제 (#), 노무현 (#) 등을 비판하기도 했다. 박근혜가 이회창과의 갈등을 빚고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한국미래연합을 준비하던 시기, 박근혜의 결단을 지지한다고 하기도 했다.# 한편 김대중의 세 아들 비리의혹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대통령 세 아들 구속수사 촉구집회에 참여하기도 했고##, 김대중 하야를 주장하기도 했다.#
푸른정치연합의 창당 준비가 지지부진하면서 창당준비위원회의 활동기간만료일이 다가오자, 결국 7월에 창당을 포기하고 새천년민주당에 입당을 선언한다.#[15]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국민의 정부 말기 레임덕 현상으로 인해 지지율이 급락하였고, 민주당의 대선후보인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도 10%대로 급락하면서 대선후보 교체론이 대두되된 시점이었다. 그래서인지 장기표가 김대중과 민주당을 맹비난하긴 했어도, 과거 재야운동의 거두이기도 했으므로 쇄신 인사로서 받아들여진 듯하다. 심재권김근태김영환이창복 등 다른 재야운동가 출신과 친분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2002년 8월 재보선 서울 영등포구 을[16] 후보를 신청했는데, 노관규와 경합하고 나서 후보가 될 수 있었다. 한편 노무현과 그의 측근들은 장기표에게 불편한 기색을 표했다.[17] 장기표가 재보궐선거 후보로 확정된 후 두 사람은 잠시 화해했다.# 그런데 막상 장기표는 37.74%를 득표하여 권영세에게 밀리는 2위를 기록하며 4번째 낙선을 막지 못했다. 심지어 장기표가 속했던 정당 중 그나마 세가 강한 정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18]

재보선 패배 후 다시 노무현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고, 노무현이 사퇴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후보 단일화 협의회에는 속하지 않았으나, 심재권김근태김영환이창복 등과 함께 후보 단일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2003년 2월 11일에 사회민주주의 정당 건설을 선언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
2003년에는 한국노총이 주도해서 만들어진 민주사회당[19]에 합류하여 한국사회민주당으로 개편하고 대표를 맡았다.[20] 한국노총과 함께 한글날 국경일 제정 촉구 시민대회를 여는 등 여러 활동을 했다.#

6월에는 함세웅박형규이부영김근태이창복 등과 회동하여 범민주 신당에 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21] 이들이 제기한 신당론의 결과는 열린우리당인데, 이부영, 김근태, 이창복은 참여하지만 장기표는 참여하지 않는다. 다만 열린우리당의 전신인 '국민참여통합신당' 창당주비위원회 개소식 및 현판식에 축하 화환을 보냈다.[22]

여전히 노무현과의 관계는 나빴으며, 기자 회견에서 노무현에게 국정 쇄신을 요구하고, 외면할 경우 퇴진운동을 하겠다고 했다.[23] 또한 노무현 탄핵 정국에서 노무현의 노골적 선거 개입이 잘못이라고 하면서 탄핵에 동조하는 견해를 보였다.[24]

2004년에 17대 총선을 앞두고, 막역한 지인인 김문수의 한나라당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25] 장기표가 대표인 한국사회민주당은 녹색정치를 주장하는 생태주의 정당인 녹색평화당과 합당하여 녹색사민당을 신설한다. 장기표는 녹색사민당 대표로써, 이전에 출마했던 동작구 갑에 다시 출마하여 "걱정 없는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득표율 4.8%, 5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5번째로 낙선하였다.[26] 녹색사민당은 비례득표율 미달로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

2.8. 사민당 해산 후[편집]

2004년에는 "나라구하기 국민운동 추진본부"의 대표가 되어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반대하는 운동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500만명 서명운동에 착수했고#김문수이재오와 함께 '대통령 대 국민'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정부 비판에 앞장섰다.

2005년에는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추진을 반대하며 "수도분할반대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여 대표를 맡았으며, 이재오김문수박계동배일도 임동규김진홍 목사, 최상철 등과 활동하였다. 대연정 파동 때는 노무현이 하야하기 위해 그럴 듯한 명분을 찾은 결과라고 했다.#

2005년 12월에는 "새정치연대"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으나, 6개월 활동기간 만료로 인해 해산되며 정식 창당에 실패하였다.

2006년에는 김인배와 함께 "신문명새정치연대"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으나, 6개월 활동기간 만료로 인해 해산되며 정식 창당에 실패하였다.

2007년에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진보개혁세력 총단결을 주장하며 경선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후 대권 출마를 선언한다.#

한나라당과 이명박#문국현이나 손학규 등 많은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제일 적대적인 대상은 노무현과 참여정부였다.#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의 몸통은 노무현이라고 했다.#

결국 역량 부족으로 대선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이후, 대선 3일 전인 12월 16일에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2009년 4월부터 (사단법인) 전태일기념사업회 8대 이사장을 맡는다. 그가 이사장을 맡던 2009년 7월 17일에 사단법인 전태일 기념사업회가 (재단법인) 전태일재단으로 변경되었고, 2011년까지 이사장을 맡았다.

2009년에는 "녹색복지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으나, 6개월 활동기간 만료로 인해 해산되며 정식 창당에 실패하였다.

블로그에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이명박 책임이라고 논평했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정치권에 등장한다. 2011년에 "녹색사회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창당을 준비중이었으나, 보수이론가로 유명한 박세일[27] 교수와 손을 잡기로 하면서 녹색사회민주당 창준위를 2012년에 자진 해산했다.#

장기표는 박세일과 함께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함께하는 국민생각 창당을 준비했다. 그런데 장기표는 자유무역협정(FTA), 특히 당시에 시끄러웠던 한미 FTA와, 역시 시끄러웠던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 및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부정적이었다. 반면 박세일은 보수 스탠스에 충실해 한미 FTA와 제주해군기지에 긍정적이었으며, 그의 입장이 당론으로 관철되었다. 이런 식으로 장기표 입장에서는 계속 본인의 신념이 배치되는 당론이 형성되니 회의감을 느꼈는지 결국 국민생각 창당준비위원회를 떠났다. 그 결과 국민생각은 그냥 별 특징 없는 보수 성향 군소 정당이 돼 버렸고, 전여옥을 영입해 잠시 원내 정당이 되었지만 총선에서 폭망해 사라졌다. 장기표보다 3세 연하였던 박세일 교수도 5년 뒤인 2017년 세상을 떠났다.

국민생각을 탈당한 장기표는 다시 신당을 준비하는데, 독자적인 정당 창당은 버겁고 시간도 촉박한지라 여러 세력과 통합을 시도한다. 먼저 '한빛당'이라는 창당준비위원회와 접촉하였다. 그리고 이 당을 정식으로 창당하면서 당명을 '녹색통일당'으로 바꾸었고, 당대표로 장기표를 추대하였다. 한편 당시 민주통합당 공천에 불만을 품고 탈당한 동교동계 세력들도 신당 창당을 준비중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창당이 지지부진했는지 장기표 세력과 통합하기로 한다. 그리하며 녹색통일당은 창당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통민주당이 되며, 당권도 한광옥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제3신당이란 정당을 흡수 합당하여 세를 불렸다. 이렇게 총선을 노리고 창당을 시도하던 여러 세력들이 정통민주당으로 융합하였다.

장기표는 비례대표 1번이라는 최우선순위를 받고 출마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통민주당에 관심이 없었고, 비례대표 득표율로 고작 0.22%를 얻으며 6번째로 낙선하고 만다. 정통민주당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여 당시 정당법에 따라 등록 취소되었다. 당시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정통민주당이 표를 분산시켜서 새누리당에게 총선 승리를 안겨주는 역할을 했다며 욕을 먹었다. 특히 이로 인해 야권단일 후보였던 홍희덕천호선까지 낙선했다면서 정통민주당 지도부와 당원들은 민주통합당 지지자뿐만 아니라 통합진보당의 구 민주노동당계, 참여계 지지자들로부터 욕을 먹었다.[28] 특히 제18대 국회에서 3년 연속 국정감사 우수 의원으로 뽑히기도 했던 홍희덕 의원의 낙선은[29] 제19대 국회에서 노동, 인권 관련 입법활동을 멈추게 하여 더 부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2.10. 19대 총선 이후[편집]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통민주당이 실패하면서 낙선한 이후, 한동안 제도권 정치를 멀리하고 논평이나 인터뷰를 하며 지낸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에 관해서, 통합진보당이 부정경선을 저지른 원인은 주체사상 신봉이라고 하며 당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에는 종북 성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들을 지적했다.#

2014년에는 "통일 2016 포럼"의 대표가 되었고, "사회민주주의 포럼"의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2015년에는 국민모임이 통합진보당의 재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했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것에 대해서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다.# 그러나 결국 출마하진 않았다. 투표 3일전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국민의소리 시민단체를 만들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광화문집회를 주도했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박근혜에겐 최순실이 1명,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10명"이라고 하기도 했다.#

2019년에는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지만원을 비판하면서도,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는데는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타내는 세력의 책임이 상당하다고 주장했다.# 조국 사태 당시 조국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11. 보수정당 합류[편집]

2019년 말에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민소리당' 창당을 선언하고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시기 전광훈이 주관하는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집회에 나가기도 했다.#

이후 2020년 초에 자유한국당새로운보수당미래를향한전진4.0 등이 구성한 보수대통합 논의 기구 '혁신통합추진위원회'에 합류했다.# 장기표는 '통합신당준비위원회'의 창당준비위원장이 된다. 그런데 통합신당이 자유한국당 중심으로 흘러가자, 이에 반발하여 2월 14일 창당준비위원장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2월 17일 미래통합당 출범식에 참여하며 다시 합류하였다.#

고향인 경남 김해 을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았는데, 당내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나#, 결국 사그라들었다.# 어쨌든 오랜만에 미래통합당이라는 거대정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41.6%를 득표하여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후보에게 패해 낙선했다. 후보 토론회에서 김정호 후보의 트램 공약에 대해 토론하던 중 트램 노선 구간을 김해 갑 지역과 혼동하고 선거 공보에 주촌면과 진례면를 잘못 표시하는 등 총체적인 난맥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결국 본인의 7번째 낙선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2021년 9월에 기고한 에서, 이재명은 대통령이나 고위공직자를 맡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재명을 대장동 도시개발 사업 특혜 의혹과 관련하여 집중 공격하면서 "대장동 부패수익 국민환수단", "대장동게이트 진상규명범시민연대"를 출범시켜 대표가 된다.

2021년 7월, 2022년으로 예정된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여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간다. 그러나 9월 15일 1차 경선 컷오프 명단에 포함되며 좌절되었고, 김해시 을 당협위원장을 사임하였다.# 이후 최재형 후보를 지지하였고#, 최재형이 2차 컷오프에서 탈락하자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다.[30]

2.12. 탈당 후 특권 폐지 운동[편집]

2022년 8월, 윤석열-이준석 갈등과 관련해 이준석을 비판했다.#

2022년 윤석열 정부 들어 초기엔 서울법대 선배로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조언도 제법 한 것으로 보이나, 이후 아내 인터뷰에 따르면 이상민 장관 거취와 김건희 여사 문제를 지적한 뒤로는 전화도 문자도 대통령이 받지 않아 사실상 연이 끊겼고, 2024년 22대 총선 이후엔 더 절망하다 대통령이 극우 유튜브를 보며 정치를 한다고 확신한 뒤에는 윤 대통령의 조기 사퇴만이 보수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사망 이후 몇달 가지 않아 12.3 비상계엄 사태가 터지고 윤석열이 탄핵당한거 보면 묘한 부분.

2023년 7월 언론 인터뷰에서 독자 창당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 이후 국민의힘을 탈당했고, '국회의원 특권 폐지'를 기치로 하는 특권폐지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특권폐지당의 정식 창당을 위한 세력 결집이 지지부진하자, 창당발기인들과 함께 김준수 대표의 가락당에 집단 입당했다. 가락당의 당명을 '가락특권폐지당'으로 바꾸고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본인은 출마하지 않고 지역구에 1명, 비례대표로 2명의 후보를 냈으나 전원 낙선하며 원내 진출에 실패하였다.

총선 후 가락특권폐지당은 다시 가락당으로 되돌아갔으며, 탈당은 하지 않았다. 별도로 남아 있던 특권폐지당 창당준비위원회는 활동 기한 만료로 2024년 6월 5일 자동 해산되었다. 창당에는 실패했지만 언론 인터뷰와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회의원 특권 폐지' 목소리를 높였다.

2.13. 투병 및 사망[편집]

2024년 7월 17일 페이스북 계정 게시글을 통해 담낭암 말기 판정을 받아 곧 입원한다고 밝혔다. # 8월 7일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이 이후 보도되었다. # 이것이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다.

2024년 9월 22일 새벽 1시 35분경 경기도 고양시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되었다. # 윤석열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이재명 민주당 대표[31]를 비롯해서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치인들이 화환과 조기를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고, 생전 고인과 인연이 깊던 이재오 전 의원과 김문수 장관은 직접 상주 역할을 하며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장례위원장은 김부겸이부영, 김정남 3인이 맡았고, 앞서 언급된 김문수와 이재오 역시 상주 역할을 맡으면서 생전 창당에 관여한 민중당 인사 등 재야 운동권 인사들도 총망라해 장례위원이 꾸려졌다. #

경남신문,# 조선일보,# 국민일보,# 중앙일보,# 서울신문#은 그를 애도하는 사설을 냈다.

3. 평가[편집]

1970~80년대에는 각종 시민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하였다. 학생운동노동운동민주화 운동 등을 섭렵하면서 굵직굵직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보니 많은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정계에 진출한 후 7번의 선거에서 모두 낙선하면서 제도권 진입에 실패하였고, 민주화 세력에게 쓴소리를 하면서 척을 지게 되고 변절자 소리를 듣게 된다. 당적을 자주 바꾸다보니 정치 낭인철새 소리를 들었고, 어떤 정당에도 제대로 기반을 쌓지 못했다. 정치 경력 상당수는 비주류 독자 노선을 걸었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거대 양당보다는 주로 제3지대 정당이나 군소정당에서 활동했다. 본인이 직접 신당 창당을 주도한 적이 많았고, 그러다 실패한 적도 많았다. 겨우겨우 당적을 얻었어도 과거 정당법에 총선 득표율 미만 정당은 등록이 취소된다는 규정이 있었다보니, 그는 자기가 속했던 정당(민중당녹색사민당정통민주당)이 취소되는 일을 세 번씩이나 겪어야 했다.

그가 당적을 오래 유지하지 못한 이유에는 잦은 탈당도 있었다. 민주당(1996년) 탈당[32]민주국민당 탈당[33]새천년민주당 탈당[34]국민생각 창준위 이탈[35]국민의힘 탈당이 있었다. 말년에 합류한 미래통합당-국민의힘에서는 그나마 당적을 오래 유지했으나, 결국 여기서도 5년을 못 가고 탈당하면서 특권폐지당이라는 창당을 시도하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 세력에 대해 강한 쓴소리를 한다. 특히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쓴소리를 많이 했는데, 장기표가 그 이전부터 삼김시대에 부정적이었던 것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1990년의 민중당 또한 삼김과 엮이지 않고 독자 정치를 시도한 것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그 이후의 개혁신당통합민주당 또한 삼김과 거리가 있는 제3지대로 볼 수 있다.

그는 2000년에 민주국민당에 참여했는데, 이 정당은 한나라당 탈당파가 많다보니 보수정당에 가까웠다. 이때부터 장기표가 공격적인 언행을 하는 것과 더불어서 민주당 지지층에게도 강한 비판을 받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민주국민당은 총선 이후 국민의 정부와 협력하여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과의 연합을 추진하였고, 장기표는 이에 반발하며 탈당하였다. 이렇게 보면 장기표가 당시 연합에 동참했던 김윤환한승수보다도 민주당에 적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002년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해서 모순된 행보라는 비판이 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이재명 등과 모두 사이가 나빴고, 결국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과 완전히 척을 진다. 또한 민주노총민주노동당 등에도 쓴소리를 하다 보니 진보정당 쪽과도 좋지 않은 사이가 된다. 이렇다보니 변절자로 불리며 공격받았고, 실제로 갈수록 보수 진영에 가까워지면서 결국 미래통합당에 합류했다. 그러나 장기표와 함께 했던 이들 상당수가 90년대에 보수정당에 합류했던 것과는 다르게, 2020년에 70대가 되어서야 주류 보수정당에 합류하다보니 상당히 늦었고, 5년을 못 채우고 다시 탈당했다 보니 여기서도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사실 장기표는 보수정당 대통령인 이명박박근혜윤석열 등에게도 쓴소리를 많이 했다.

같은 민중당 출신인 이우재이재오김문수 등은 1994년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고, 민주•진보 성향 사람들에게 배신자로 불릴지언정 여러 번 당선되고 거물이 되는 데 성공했다. 장기표는 이들과 함께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으나, 선거에서 계속 낙선하고 쓴소리를 하다가 배척당하는 등 챙긴 건 별로 없었다. 갈라진 이후에도 민중당 출신들과 친분을 유지했는지, 민주당 정권 시기에 이들과 함께 반정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장기표는 대권 의지를 여러 번 드러냈었는데, 17대 대선19대 대선20대 대선 당시 출마 선언을 했었다.[36] 그러나 최종 후보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이유로, 일단 군소 정당이나 무소속으로는 지지율을 올리거나 대선 자금을 내기 힘들다. 그나마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는 참여했으나, 당에 기반도 거의 없는 데다가 선출직이나 공직을 해본 적 없는 장기표가 경선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1차 경선 컷오프되었다.

노무현과 사이가 굉장히 나빴지만, 사실 장기표는 노무현과 접점이 상당히 많았다. 장기표는 밀양군 태생이지만 실제 고향은 김해군인데, 노무현은 김해 봉화마을이 고향이다. 그리고 둘 다 진영중학교 동문이며, 나이 차이도 1살밖에 나지 않는다. 두 사람은 1990년도에 노태우 정부의 내각제 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비상시국대책 회의에서 민중당과 민주당을 대표하여 만난 적이 있다.# 이후 둘은 통합민주당에서 만났고, 15대 총선에서 둘 다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한다. 이후 당권파가 신한국당-민주당 합당을 추진하자, 두 사람은 비주류들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에 참여하며 한나라당 탄생을 반대하였다.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하고 장기표는 한동안 정치 생활을 중단하면서 갈라졌는데, 2002년에 장기표가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며 다시 만났다.

2020년에 미래통합당에 참여한 건, 오랫동안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에 헌신한 입장으로서는 나름 파격적인 행보였다. 장기표가 오랜만에 후보로 출마한 21대 총선에서 전향에 대한 논란이 공론화되었고,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과 조국 지지층은 장기표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고, 진영을 옮겨 배신했다는 점을 들어 철새정치 낭인 중 1인 등으로 폄하하기도 하였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장기표의 날카로운 비판에 공감하는 지지층도 있었기에 김해에서 41% 넘는 득표를 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어찌됐든 결과는 낙선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자와 조국 지지자 입장에서는 그냥 재야로 남는 게 본인에게는 더 영광스러웠겠지만 그 국회의원 병을 이기지 못한 채 변절하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라고 평가절하하고[37], 당시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장기표의 비판에 공감하는 지지층과 조국 비판자 입장에서는 진보·보수 이념을 초월해 합리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그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미래통합당에 합류하면서 민주당계와 진보진영으로부터 "전향했다", "변절했다"는 욕을 들으면서까지 국회의원 당선을 노렸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하면서, 본인의 주요 공격대상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행적으로 인해 피해를 본 정의당민중당 등 진보정당, 한국노총민주노총 지지자들에게서도 조롱받았다. 실제로 과거 녹색사회민주당과 한국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한 한국노총은 장기표가 아닌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지지하였다.

생태주의나 환경운동에도 관심이 있는지, 한국사회민주당을 이끌다가 녹색평화당과 합당하여 녹색사민당 대표를 맡았으며, 녹색복지당과 녹색사회민주당의 창당을 시도했었고, 2012년에는 녹색통일당을 창당하였다가 정통민주당이 되면서 생태주의는 잊혀졌다.

4. 사건사고[편집]

4.1. 공직선거법 위반 및 이재명 아들에 대한 허위사실공표[편집]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2021. 9. 12. "이재명의 아들이 천화동인의 직원이고 이재명 지사가 임명한 경기주택공사 부사장(안태준)이 등기이사"라는 취지의 문자를 기자들에게 총 1,000건 넘게 전송하였다. 하지만 이재명의 아들은 천화동인 이사가 아니었다. 본인도 9. 15. 컷오프되었다. 이에 이재명은 장기표를 고소하였다. 이에 검사는 장기표를 정통망법 명예훼손과 허위사실공표 혐의로 기소하였다. 발언 자체는 이재명 아들에 대한 허위사실유포 행위지만, 본인의 경선 통과를 위한 당선 목적 허위사실공표인 동시에 이재명의 낙선 목적 허위사실공표이자 이재명 아들과 안태준을 피해자로 하는 정통망법 명예훼손이라는 취지이다.[38]

그 외에 공직선거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확성기와 영상물 재 사용 범위를 넘은 형태로 선거운동을 하였다는 점도 함께 병합하여 기소되었다.
  • 제1심 사건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3. 2. 1. 선고 2022고합654 판결
    벌금 700만 원 형을 선고받았다. #
    판결문을 읽어보면 재판부가 정통망법 명예훼손의 목적범(비방할 목적)을 인정하지 않아 정통망법 명예훼손을 무죄로 판단하고, 나아가 형법상 명예훼손(목적범이 아님)을 판단하여 이를 유죄로 보았다.
  • 상고심 사건번호: 대법원 2023도8993
    장기표만 상고하였다가 2023. 7. 13. 상고취하하여 제1심대로 확정되었다.

5. 저서[편집]

  • 1987 우리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때 <형성사> (절판)[A]
  • 1987 해방의 논리와 자주사상 <도서출판 친구> (절판)[A]
  • 1988 새벽노래(에세이) <미래사> (절판)[A]
  • 1991 사랑의 정치를 위한 나의구상(전8권) <한길사>
    • 한국사회개혁론 (절판)
    • 민중시대의 정치와 운동 (절판)
    • 80년대의 상황과 실천 (절판)
    • 지배의 논리와 해방의 논리 1 (절판)
    • 지배의 논리와 해방의 논리 2 (절판)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에세이) (절판)
    • 창살의 노래 햇살의 노래 (절판)
    • 우리 사랑의 기쁨으로(에세이) (절판)
  • 1995 지구촌시대 민족발전전략 <백산서당> ISBN 9788973271078
  • 1996 사랑의 원리 <한길사> (절판)
  • 1997 문명의 전환 <미래M&B> (절판)
  • 1998 국가파산을 막을 희망의 메세지 - 구국선언 <신문명> (절판)
  • 1999 대통령님, 나라팔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신문명> (절판)
  • 2001 신문명 국가비전 <신문명> (절판)
  • 2001 신문명 경제시론 <신문명> (절판)
  • 2004 대통령 대 국민 <신문명> (절판)
  • 2006 장기표의 신문명 경제비전 - 한국경제 이래야 산다 <명상> (절판)
  • 2007 북한위기의 본질과 올바른 대북정책 <신문명> (절판)
  • 2007 장기표의 신문명 국가비전 <밀알> ISBN 9788941802587
  • 2007 부부사랑 그 지혜로운 행복(에세이) <밀알> (절판)
  • 2007 청년의 비전, 청년의 도전 - 청년에게 고함 <밀알>
  • 2008 지못미, 정치!(청소년을 위한 정치교과서) <시대의창> ISBN 9788959401291
  • 2009 지못미, 경제!(청소년 경제 교과서) <시대의창> ISBN 9788959401703
  • 2013 문명의 전환 새로운 비전 <백산서당> ISBN 9788973274857
  • 2013 한반도 통일과 중국(공저) <사회와연대> ISBN 9788989097457
  • 2015 참된 진보정치를 선언하며 - 왜 녹색사회민주주의인가! <글통> ISBN 9791185032160
  • 2016 통일 초코파이(한반도 통일전략) - 한반도 통일 전략 예언서 <꿈과의지> ISBN 9788983010513
  • 2017 불안없는 나라 살맛나는 국민 - 장기표 자아실현정치론 <도서출판 九思> ISBN 9788996818519
  • 2020 장기표의 정치혁명 <행복에너지> ISBN 9791156027706
  • 2021 영원한 찐보 장기표 그 길 그 숨 <쌩큐컴퍼니> ISBN 9791196914431
  • 2024 위기의 한국, 추락이냐 도약이냐 <글통> ISBN 9791185032962[42]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90 - 1992
창당
정계 입문
1992 - 1995
등록 취소[43]
1995
창당
1995 - 1996
합당[44]
1996 - 1997
당명 변경
1997 - 2000
탈당[45]
새시대개혁당

()
2000
창당준비위원회
2000 - 2001
창당
2001 - 2002
탈당[46]
푸른정치연합

()
2002
창당준비위원회
2002 - 2003
입당
2003
탈당
2003
입당
2003 - 2004
당명 변경
2004
합당[47]
2004 - 2005
등록 취소[48]
2005 - 2006
창당준비위원회
2007 - 2008
창당준비위원회
녹색복지당

()
2009 - 2010
창당준비위원회
녹색사회민주당

()
2011 - 2012
창당준비위원회
2012
창준위 이탈
2012
창당
2012
당명 변경
2012 - 2019
등록 취소[49]
2019 - 2020
창당준비위원회
2020
창당
2020 - 2023
당명 변경
2023
탈당[50]
2023 - 2024
창당준비위원회
2024
입당
2024
당명 변경
작고
창준위 포함 무려 24개의 당적 보유 경력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인 사상 역대급으로 당적이 많으며, 2012년 이후 활동한 정치인 중에서는 가장 많은 당적[51]을 보유하고 있다.[52]

또한 어느 정당이건 오래 활동하지 않았으며[53], 자의적 탈당도 꽤 잦았다.(4번) 그리고 정치 활동 중 진보정당민주당계 정당보수정당 등을 모두 거쳤으며, 그렇게 여러 정당에 몸담았는데도 단 한번도 당선되지 않았다는 것이 특이하다.

다만 거대 양당보다 제3지대 정당 위주로 활동한 걸 감안해야 하는데, 양당제인 나라에서 쉽지 않은 3지대 위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당적이 많은 것이다. 총선 결과 득표율 미만으로 인해 정당 등록이 취소된 경우, 창당준비위원회 상태에서 창당을 못한 것을 제외하면 당적 갯수가 상당히 줄어든다.[54]

그러나 완전히 3지대에서만 행동한 것도 아니라서, 2000년대 초 주류 민주당계 정당인 새천년민주당, 2020년대 주류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국민의힘에 소속되었던 이력이 있다. 보수 세력과 민주당측을 꾸준히 비판해오면서 3지대 활동을 했던지라, 거대 정당에 입당했던 행보가 모순이라는 비판이 있다.

특히 한나라당 탈당파들과 민주국민당을 창당한 행적, 반DJ를 주장하여 2001년에 민주국민당을 탈당했는데 2002년에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한 행적은 상당히 튀는 편이다.[55]

7.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21,181 (21.50%)
낙선 (3위)
1996
18,851 (19.07%)
2000
695,423 (3.68%)
낙선 (3번)
2002
14,419 (37.74%)
낙선 (2위)
2004
5,202 (4.86%)
낙선 (5위)
2012
48,624 (0.22%)
낙선 (1번)
2020
60,003 (41.61%)
낙선 (2위)
역대 선거 벽보
14대 총선 장기표 벽보
15대 총선 장기표 벽보
16대 총선 전국구 민주국민당...
빈 가로 이미지
17대 총선 장기표 벽보
21대 총선 장기표 벽보
역대 선거 이력

통합민주당 1995년 로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28년간 7번의 선거에 도전했지만 전부 낙선했다. 7번의 출마가 모두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였다는 점, 그리고 잦은 당적 변경 이력을 증명하듯 7번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후보자로 소속된 정당이 다 다르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사실.

8. 둘러보기[편집]

[1] 외래어 표기법 상, 'Jang, Gi-pyo'가 맞지만 본인의 블로그에 올라온 공식 프로필에서 이렇게 표기하고 있다.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참고한 듯.[2] 現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 이후 초등학교 6학년부터 경상남도 김해군 이북면 장방리(現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서 자랐다. #[3] 원래 서울대학교 법대를 목표로 대입에 도전했지만 수학 점수가 나오지 않아 탈락한 이후 차선책으로 입학했다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하여 중퇴했다.[4] 한자로 가득찬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밤새 번역해 읽고 나서 어머니께 "대학생 친구가 1명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5] 훗날 전원책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자신이 언젠가 사석에서 "(민주화 운동) 보상금을 거절하고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농담삼아 물었더니 실없는 소리를 한다는 투로 자신을 나무랐다고 한다.#[6] 사실 4인방이란 말은 과장이고, 여러 위상을 봤을 때 이재오는 4인방에 들어가지 않는 게 맞다.[7] 당시 전민련으로 결집한 재야 세력은 제도정치와 대선전략에 대해서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이부영이 주장하던 보수야당 경유론/김대중 비판적 지지론으로, 일단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당계 정당에 입당해서 김대중으로의 정권교체를 도운 다음에 실력을 키워서 나중에 독립하자는 견해였다. 실제 이부영을 포함해서 수많은 재야인사들이 이런 논리로 대선을 앞두고 1990년대 초반 민주당에 입당했다.(하지만 이렇게 들어간 사람중에 나중에 실제 진보정당 창당을 추진한 사람도, 진보정당으로 돌아온 사람도 아무도 없다. 사실 이 논리는 그 이전부터 무수히 많이 나왔던 이야기로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진영에 합류했던 이해찬이나, 1988년 총선에서 김영삼의 영입제안을 받고 부산에 출마했던 노무현도 모두 진보정당을 하기 위해서 간다고 약속했다.) 둘째는 김근태가 주장하던 민족민주전선론/김대중 비판적 지지론으로 지금처럼 모두가 단결해서 순수한 재야운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도 결국 1990년대 중반에 가면 모두 민주당계 정당에 입당해서 제도권 정치인이 된다. 셋째가 당시의 보수야당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노동운동 세력 일부와 이재오, 장기표 등이 주장하는 독자정당 창당/독자후보 대선 출마론이었다. 하지만 정권교체를 지상과제로 여기고 있던 재야세력 내에선 독자세력화는 분열이라는 반발이 극심했다. 이 때문에 장기표와 이재오는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김문수와 손잡고 민중당 창당에 나서고, 여기에 지하조직 활동을 정리하고 공개활동에 나선 노회찬 그룹이 합류한다.[8] NL세력들이 결사반대했다[9] 1980년대~1990년대 초반까지 진보정당들은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약칭:노민독정)라는 구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주로 민중정당이라고 불렀다. 진보정당, 진보진영이란 표현은 민중당이 실패한 이후 노회찬이 <진보정치연합>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쓰인다.[10] 한편 과거 박노해가 장기표와 김우중을 둘 다 비난해 화제가 되었었는데, 1989년에 월간「노동해방문학」에 기고한 글로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자본철학이라고 비난했으며, 장기표의 진보정당 결성론을 혹평했다.[11]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장기표는 이후 200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영등포구 을에 출마한다.[12] 김윤환은 군사정권에 오랫동안 협조했던 정치인이다. 김윤환은 자신과 장기표의 이력을 의식하면서 "과거에 나는 가해자였고, 장기표씨는 피해자였는데, 이런 세력이 합치는 것이 대통합의 새로운 정치"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13] 민주국민당은 창당 초기에는 무시할 수 없어보였으나, 갈수록 인기가 떨어지면서 출마를 포기하는 사람이 늘었다.# 덕분에 민주국민당에는 비례대표 후보가 넘쳐났고, 총선 결과 완전히 실패하면서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각각 1명만이 당선되었다.[14] 알다시피 16대 대선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이 승리하고 대통령이 되었기에 지금에 와서는 황당하게 들리나, 당시는 DJP연합이 복원된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다. 자민련을 통해 충청권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에 이인제를 배제했으며, 김근태나 노무현 등 다른 후보는 김종필의 동의와 TK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중권은 경북 출생에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 출신이라서 김종필과 영남의 지지를 둘 다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당시 영남 후보론이 얼마나 대세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15] 장기표가 이전부터 김대중과 새천년민주당 정치인들을 적대하고 있었기에, 2001년 재보궐선거 즈음부터 한나라당 후보 리스트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래서 새천년민주당으로 간 건 의외였다.#[16] 김민석이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위해서 사퇴한 지역구.[17] 노무현 측에서는 장기표가 노무현을 그렇게 비난했으니 부정적인 게 당연하다고 이야기했으나, 장기표 지지자 및 반노 인사는 노무현이 벽을 친다고 여겼다.#[18] 다만 이 때는 국민의 정부가 레임덕에 시달리던 때라서 장기표 개인의 문제보다는 정국 상황이 미친 영향이 많았다.[19] 건설국민승리21 세력과 민주노총이 주도해서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의 당세가 강해지자, 경쟁관계였던 한국노총이 2002년 말에 만든 정당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꾸준히 연대를 제안했지만, 민주노총과의 경쟁심리 때문에 한국노총은 독자 정당 창당에 나선 것이다.[20] 원래 당대표이던 이남순은 한국노총 위원장이었는데, 정부 지원을 받는 노조위원장이 정당대표를 겸임하는 게 문제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따라서 장기표가 대표가 되었다고 한다.[21] 민주노동당은 논평을 통해 이들을 "어영부영근무태만, 장기표류" 한다면서 언어유희를 섞어서 조롱했다.[22] 당시 장기표 말고 화환을 보낸 인물은 개혁국민정당의 김원웅 대표, 고건 총리 정도밖에 없었다.[23] 장기표의 발언이 너무 강했는지,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장기표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24] 당시 녹색사민당과 민주노동당은 둘 다 원외 진보 정당이었는데, 총선 결과 민주노동당은 원내 3당으로 상당히 선전한 반면, 녹색사민당은 아무도 당선되지 않으며 득표율 미달로 해산되었다. 이런 차이를 노무현 탄핵 사태에 대한 태도에서 찾는 시각이 있는데, 녹색사민당 대표 장기표는 탄핵을 긍정한 반면 민주노동당은 탄핵 추진을 비판하고 선을 그었다.[25] 당시 김문수가 한나라당 공천관리위원장이어서 지역구나 비례대표 중 원하는 곳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지만 장기표는 이를 거절했다.[26] 그의 지역구 선거 최저 득표이다. 그전까지는 군소 정당에서도 15% 이상 지지율이 나왔으나, 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새천년민주당민주노동당에게도 밀리면서 인기가 많이 떨여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27] 서울대학교 법경제학 교수로 김영삼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세계화 선언을 기초하고, 국내에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을 도입한 인물이다.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이 되었으나 탈당하면서 의원직을 내려놓았다.[28] 정통민주당 후보들은 지역구마다 3~5%를 득표하면서 군소정당 치고는 제법 많은 득표를 얻었는데, 수도권 같은 곳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야권이 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통민주당이 표를 분산시켜서 총선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다.[29] 더군다나 당선된 사람이 친박계 중진 홍문종이었던터라 진보계층에서 비토가 심했다.[30] 비슷하게 운동권이자 민중당 출신인 김문수도 윤석열을 지지했다. 다만 이재오는 홍준표에 가까웠다.[31] 이와 관련해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딱히 애도 메시지를 내지 않아 생전 그가 이재명 대표를 비판했기 때문 아니냐는 말도 있었는데 이재명 대표가 직접 2024년 9월 25일 빈소에 조화를 보냈다. 다만 관계자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고인의 조카라는 사람이 요청해서 대표 명의의 조화를 보내게 됐다"라고 한 반면, 유족 측은 "이 대표 측에 조화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해프닝이 있었다.#[32] 당시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신한국당-민주당 합당을 추진중이었다. 사실상 민주당이 보수 정당에 먹히는 모양세에 노무현김원기를 포함한 비주류들과 같이 탈당했다.[33] 민주국민당의 DJP연합 참여에 대한 반대로 탈당.[34] 사회민주주의 정당 참여를 위한 탈당.[35] 박세일과 정책적 의견이 갈려 창준위 이탈.[36]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도 대권 의지가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푸른정치연합' 창당 시도를 할 무렵에 신당에서 대선 후보를 내겠다고 했었다.# 또한 2002년에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한 것이 당시 낮은 지지율에 시달리던 노무현 대선 후보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란 분석이 있다.[37] 운동권 출신이지만 보수 정당 미래통합당에 합류하여 변절자 소리를 듣다가, 다시 탈당한 후 한번도 국회의원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국회의원의 특권 전면 폐지를 부르짖던 특권폐지당 시절의 모습은 그 절정으로, 당시 여의도에선 장기표가 맛이 갔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38] 3죄가 각각 성립하면 서로 상상적 경합이다.[A] 39.1 39.2 39.3 옥중서적이다.[42] 뒤표지에 "윤석열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한다"라고 크게 써 놓았다. 그리고 아래에는 "윤석열에게 이재명같은 범죄자를 방치한 책임이 크며, 자진 사퇴하지 않는다면 탄핵으로 물러나 차기 대통령이 이재명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는 식으로 써져 있다.[43] 총선 득표율 저조.[44] 민주당과 신설 합당[45]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신한국당-민주당 합당 반대)
[4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47] 녹색평화당과 신설 합당.[48] 총선 득표율 저조.[49] 총선 득표율 저조.[50]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51] 이인제(18개), 김한길(18개)보다도 당적이 많다. 게다가 이인제는 주로 중도~중도우파 정당 위주로 활보했으며, 자의적 당 이동만 따지면 그리 횟수가 많지는 않았다. 김한길도 주로 민주당계 정당제3지대 정당 쪽에서만 활보하였다. 장기표는 이와 달리 자의적으로 당적을 옮긴 적이 많기에 어떻게 보면 더 대단한 셈. 비슷한 케이스로는 안영근이 있다.[52] 가장 많은 수의 당적을 보유한 정치인은 김두섭(33개), 두번째로 많은 당적을 보유한 정치인은 안동선(28개).[53] 30년 이상의 정치 활동 중에서 5년 이상 머무른 정당이 없다. 가장 오랫동안 속해있던 정당은 미래통합당-국민의힘.[54] 창당준비위원회를 제외하면 15개, 당명 변경도 제외하면 10개, 정당끼리 합당한 경우도 제외하면 8개.[55] 훗날 백현종 경기도의원 또한 장기표와 비슷하게 진보정당-민주당계 정당-제3지대 중도정당-보수정당으로 당적노선을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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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지구촌시대 민족발전전략 
장기표 (지은이) | 백산서당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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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문명의 전환 새로운 비전 | 장기표 | 알라딘


[eBook] 문명의 전환 새로운 비전 
장기표 (지은이)백산서당2022-01-10 






전자책종이책 17,100원
전자책정가
23,000원

[eBook] 문명의 전환 새로운 비전
종이책 페이지수 : 354쪽

목차

머리말. 신문명정치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제1부 인간해방과 사회붕괴의 갈림길에서
제2부 인간해방의 새 세상을 건설할 신문명정책
제3부 정치혁신의 방향과 과제
제4부 이래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

저자 및 역자소개
장기표 (지은이)


50년이 넘는 긴 기간 학생운동, 노동운동, 재야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서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온몸으로 투쟁해온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 장기표. 10여 년의 수배와 10여 년의 구속으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롯이 민주화운동의 한길을 달렸다.
1970년 전태일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자마자, 당시 서울법대생이던 장기표는 현장으로 달려가 이소선 여사를 만났고, “우리 태일이가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이제 나타났구나”는 말을 들었다. 그 뒤로 장기표의 별명은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되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장기표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할 새로운 진보의 방향을 제시했다. 산업의 정보화와 정보통신수단의 혁명적 발달로 물질적 풍요가 달성되고 대중의 사회정치의식이 고양된 정보문명시대야말로 자유와 평화, 복지가 보장된 가운데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아실현의 시대가 되리라고 확신하여 새로운 진보이념인 민주시장주의(녹색사회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이를 구현할 참된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30여 년간 분투해왔다.
이 과정에서 온갖 고난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자아실현의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철학이 있는 정치, 철학이 있는 삶’을 기치로 강연과 기고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특히 현재의 한반도 주변 정세로 보아 지금이야말로 민족통일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으로 민족통일과 민족웅비를 위한 활동도 열심히 전개하고 있다.
2023년에는 특권폐지 국민운동본부를 창립해 국회의원 및 고위공직자들이 불필요하게 누리고 있는 과도한 특권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폐지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평생 30여권의 저서를 집필해 양극화, 청년실업, 비정규직, 저출산, 해고불안, 노후불안, 공교육 붕괴, 입시지옥, 사교육비 등 우리시대 현안의 해법을 정보문명시대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제시했다. 대안 없는 비판이 횡행하는 한국적인 정치풍토에서,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작 : <위기의 한국, 추락이냐 도약이냐>,<장기표의 행복정치론>,<장기표의 정치혁명> … 총 27종 (모두보기)

최근작 : <위기의 한국, 추락이냐 도약이냐>,<장기표의 행복정치론>,<장기표의 정치혁명> … 총 2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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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장기표에 대한 글을 평가해주세요. 장기표는 어떤 인물? 현재 한국의 정치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ChatGPT의 말:

네, 업로드해주신 글을 정리하고 평가해드리겠습니다.


1. 장기표는 어떤 인물인가?

  • **“영원한 재야”**로 불린 민주화 운동가.

  • 자신에게 엄격하고 대의를 위해 헌신한 지사로 묘사됩니다. 글쓴이는 장기표를 “정치인”이 아니라 **“수행자”**라 부르며,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일생을 민주화 운동과 특권폐지 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기억합니다.

  • 강직함과 따뜻함의 공존: 불의한 권력 앞에서는 강철처럼 단호했지만, 민중과 함께할 때는 따뜻한 인물로 회고됩니다.

  • “생명과 사랑의 정치, 자아실현의 정치”를 강조한 사람으로 소개되며, 한국 사회의 양심이자 “우리 시대의 마지막 지사”로 평가받습니다.


2. 현재 한국 정치에 대한 저자의 평가

글쓴이는 장기표의 1주기를 맞아 현재 한국 정치를 매우 비판적이고 위기적으로 바라봅니다.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전임 정권의 실패 → 무능한 권력 행사로 국가가 급격히 망가졌다고 평가.

  • 현 정권의 문제 → 전임 정권의 몰락을 계기로 집권한 세력이 “점령군처럼 행세”하며 산업화·민주화 성과를 흔들고 있다고 비판.

  • 권력 집중과 파시즘의 징후 → 집권 여당이 행정부·입법부·언론에 이어 사법부까지 장악하려 한다며 “파시즘의 징후”가 보인다고 지적.

  • 야당의 무능 → 여당의 폭주를 견제할 역량이 전혀 없고, 오히려 분열과 무능에 빠져 있다고 혹평.

  • 양심세력의 부재 → 장기표 같은 ‘재야·지성인 그룹’이 사라져 권력 견제 세력이 없다는 점을 한국 사회의 최대 불행으로 진단.

  • 대안적 요청 → 새로운 재야와 양심적 지식인들이 나서서 반민주적 폭주를 막고, “생명과 사랑의 정치”와 “호혜·상생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


3. 종합 평가

이 글은 추모문이자 정치평론입니다.

  • 장기표 개인을 “재야 지식인의 상징”으로 추켜세우며, 그의 삶을 통해 현재 한국 정치의 위기를 비추는 거울로 삼고 있습니다.

  • 현재 한국 정치를 권력의 전횡·야당의 무능·지성인의 침묵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양심세력이 필요하다고 호소합니다.

  • 전체적으로 글은 감성적 언어(“등불”, “뜨거운 혼”)와 강한 위기의식(“망국으로 치닫는다”, “파시즘의 징후”)이 교차하는 선언문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이 글을 비평적 시각에서 다시 정리해, 장기표의 역사적 위치와 현재 정치 평가를 좀 더 객관적·학술적으로 분석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드릴까요?

나의 말:
장기표는 글쓴이가 말하는 그런 인물인가요?
ChatGPT의 말:

좋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글쓴이가 묘사하는 장기표와 실제 역사 속 장기표의 위치를 구분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 글쓴이가 말하는 장기표

  • “영원한 재야”: 평생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을 지켜낸 인물.

  • “수행자”: 정치인이 아니라, 수행자·지사로 불릴 만큼 자기 희생적이고 청렴했다고 강조.

  • 민주화·특권폐지 운동의 상징: 개인적 이해관계를 초월해 시대의 양심으로서 살아온 사람으로 그려짐.

즉, 글 속 장기표는 거의 성인(聖人)적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2. 실제 장기표 (역사적 맥락)

  • 1970년대 학생운동의 지도자: 유신체제 시절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투옥.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 재야 민주화 운동가: 1980년대에도 민주화 운동을 계속했으나, 김대중·김영삼 같은 거물 정치인과 달리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지는 못했습니다.

  • 정치 참여와 한계: 이후 여러 차례 총선·대선에 출마했지만 번번이 낙선했습니다. “영원한 재야”라는 표현은 바로 정치권에 들어가려 했지만 끝내 제도권에서 성공하지 못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 평가의 갈림:

    • 긍정적으로는 **“타협하지 않은 양심적 운동가”**라는 평이 있습니다.

    • 부정적으로는 **“정치적 입지 부족, 전략적 한계,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 특히 보수·진보 진영 어디에서도 확고히 자리 잡지 못했고, 대중적 지지도 얻지 못해 ‘고독한 재야인사’로 남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3. 종합

따라서, 글쓴이가 묘사하는 장기표는 존경과 이상화의 결과물입니다. 실제 장기표는 분명 민주화 운동사에서 중요한 이름이지만, 글 속에서처럼 ‘마지막 지사’ ‘재야의 성인’으로 보는 시각은 다소 주관적이고 추모적인 과장이 섞여 있습니다.

  • 사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 권위주의 체제에 맞선 투사.

  • 평가의 차이: 정치권 진입의 실패와 이상주의적 태도 때문에 현실 정치에서는 영향력이 제한적이었음.


👉 정리하면:
장기표는 실제로 ‘영원한 재야’라는 별칭이 잘 어울리는 인물이지만, 글쓴이처럼 그를 “우리 시대 마지막 지사, 수행자”라고까지 보는 평가는 추모적·이상화된 시각이라고 보는 것이 균형 잡힌 해석입니다.

세진님, 원하시면 제가 장기표에 대한 학계나 언론의 주요 평가(긍정적·부정적)만 따로 정리해드릴까요?

나의 말:
ChatGPT의 말:

좋습니다. 장기표에 대한 학계·언론 주요 평가를 긍정적·부정적으로 나누어 정리해드리겠습니다.


1. 긍정적 평가

  1.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

    • 1970년대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권위주의 체제에 맞선 청년 지도자로 부각.

    • 이후에도 재야 운동을 이어가며 민주화의 한 축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사의 증인”**이라는 평가.

  2. 원칙주의와 청렴성

    • 정치적 이익이나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양심”을 중시했다는 이미지.

    • 언론에서 자주 붙인 수식어가 “영원한 재야”. 즉, 정치권력보다는 사회적 정의를 우선시한 인물로 인식됨.

  3. 특권폐지 운동

    • 생애 후반에는 “특권 없는 사회”를 강조하며 새로운 사회운동 의제를 제시.

    • 이 점에서 단순히 과거 민주화 투사로 머문 게 아니라, 민주주의 이후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고민한 인물로 평가.


2. 부정적 평가

  1. 정치적 역량의 한계

    • 민주화 이후 여러 차례 국회의원·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선.

    •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고, 정치 전략이나 현실 감각이 부족했다는 비판.

  2. 고립과 이상주의

    • 민주화 운동 세대 중 김대중·김영삼처럼 권력을 잡은 인물들과 달리, 장기표는 끝내 재야 인사로만 남음.

    • 학계에서는 그 이유를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와 동시에 “현실 정치에 적응하지 못한 이상주의”에서 찾기도 함.

  3. 진영 내 입지 부족

    • 진보 진영에서는 그가 정치적 영향력이 약하다고 보고, 보수 진영에서는 “운동권 출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신뢰받지 못함.

    • 결과적으로 **어느 쪽에도 확고한 기반을 만들지 못한 채 ‘고독한 운동가’**로 남았다는 평가.


3. 종합

  • 학계와 언론의 공통된 시각: 장기표는 분명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상징적 인물이지만, 민주화 이후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재야 지도자로 평가됨.

  • 긍정적 해석: 원칙과 양심을 지킨 “마지막 지사”.

  • 비판적 해석: 이상주의에 머물러 현실 정치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인물.


👉 결론적으로, 장기표를 어떻게 보느냐는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느냐, 아니면 **“민주화 이후 정치적 실질 성과”**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세진님, 제가 원하시면 김대중·김영삼 같은 민주화 동시대 인물들과 장기표를 비교 평가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드릴까요?

나의 말:
이번에는 저자의 현정권 이해와 비판을 평가해주세요.
ChatGPT의 말:

네, 이번에는 글쓴이가 제시한 현 정권 이해와 비판을 평가해보겠습니다.


1. 저자의 시각 요약

글쓴이는 장기표의 1주기를 맞아 한국 정치를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 전임 정권: 무지하고 무능한 자가 국가 권력을 잘못 행사해 나라를 망가뜨렸다.

  • 현 정권: 전임 정권 몰락의 반사이익으로 집권했으나, “점령군처럼 행세”하며 산업화·민주화 성과를 뒤흔든다.

  • 위험 신호:

    • 행정부·입법부·언론 장악,

    • 사법부까지 손대려는 폭주,

    • “파시즘의 징후” 등장.

  • 야당 평가: 무능·분열에 빠져 권력 견제 불가능.

  • 지식인·재야 부재: 권력을 제어할 양심 세력이 사라졌다.

  • 대안 요청: 새로운 재야와 양식 있는 지식인이 나서야만 나라가 망국을 피할 수 있다.


2. 강점

  1. 도덕적 위기의식 제기

    • 권력 집중, 견제 장치 붕괴, 언론·사법 장악 시도 등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를 예리하게 지적.

    • “권력의 전횡 → 파시즘 위험”이라는 경고는 민주주의론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음.

  2. 재야·지식인의 역할 강조

    •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 공론장의 부재를 비판하고, 다시 “양심 세력”의 필요성을 역설.

    • 이는 장기표의 삶과 연결해 정치적·윤리적 긴장감을 부여함.


3. 한계

  1. 흑백논리적 서술

    • 전임 정권은 “무지와 무능”, 현 정권은 “점령군·파시즘”으로 규정.

    • 정치 권력의 복합성과 제도적 맥락을 고려하기보다는 감정적·선언적 비판에 가까움.

  2. 구체적 사례 부족

    • 언론 장악·사법부 개입 등 중대한 비판을 제기하지만, 어떤 법안·제도·사건을 근거로 하는지는 제시하지 않음.

    • 따라서 정치평론으로서는 설득력이 제한됨.

  3. 야당·사회세력 분석의 단순화

    • 야당을 “무능과 자중지란”으로 단정.

    • 실제로는 야당 내부의 분열, 제도적 한계, 정치적 전략 등 복합적 요인이 있는데, 이를 도덕적·심리적 언어로만 설명.

  4. 재야·지식인 의존의 한계

    •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의 ‘재야 지도자’ 모델을 다시 요구하지만, 2020년대 정치 현실은 시민사회 구조·미디어 환경이 크게 달라져 단순 대입하기 어려움.


4. 평가

  • 이 글의 정치적 비판은 현실 진단보다는 윤리적·역사적 우려에 기반한 경고 성격이 강합니다.

  • 글쓴이는 현 정권을 **“산업화·민주화 성과를 무너뜨리는 점령군, 파시즘의 전조”**로 보고, 야당을 견제 능력 없는 무능 집단으로 규정합니다.

  •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구체적 정책·제도 분석이 결여된 도덕적 선언에 가까워, 학술적·정치학적 분석으로 보기엔 일면적입니다.

  • 다만, **“권력 집중에 대한 견제 필요성”**이라는 문제 제기 자체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에 부합하고, 경계해야 할 위험을 잘 환기하고 있습니다.


👉 정리하면:
저자의 현 정권 비판은 선언적·윤리적 강도는 높으나, 분석적·구체성은 부족합니다. 따라서 정치평론보다는 추모문 속 시대적 경고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세진님, 원하시면 제가 이 글의 현 정권 비판을 정치학적 관점(민주주의 제도, 견제와 균형, 권위주의 회귀 논의 등)에 맞춰 재해석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드릴까요?

나의 말:
ChatGPT의 말:

좋습니다. 이번에는 글쓴이의 현 정권 비판을 정치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보겠습니다.


1. 글쓴이의 기본 주장 (정리)

  • 전임 정권은 무능, 현 정권은 점령군처럼 권력 독점.

  • 언론·입법·행정 장악, 사법부 개입 시도 → 파시즘 징후.

  • 야당은 무능하고, 지식인·재야는 사라져 권력 견제가 부재.

  • 새로운 “양심세력”이 나서야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다.


2. 정치학적 재해석

(1) 권력 집중과 민주주의의 위기

  • 정치학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은 권력 분립과 견제(Checks and Balances).

  • 글쓴이의 비판은, 현 정권이 행정부 + 입법부 + 언론 + 사법부까지 장악하려는 시도로 해석됨.

  • 이는 권위주의 회귀(Authoritarian Backsliding) 논의와 맞닿음.

    • 헝가리(오르반), 폴란드, 터키(에르도안) 사례에서도 집권 세력이 사법부와 언론을 장악하면서 민주주의 후퇴가 발생.

    • 따라서 글쓴이의 “파시즘 징후”라는 경고는 학문적으로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혹은 **“민주주의 후퇴”**라는 개념과 연결 가능.

(2) 야당의 무능

  • 글쓴이는 야당을 “자중지란·무능”이라 단정.

  • 정치학적 분석에서는 한국 야당의 한계를 구조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음.

    • 대통령제 구조: 여당이 집권하면 강력한 권한 집중.

    • 선거제도: 지역주의와 정당구조가 야당의 견제력을 약화시킴.

    • 내부 분열: 세대·이념 균열이 심해 통합된 전략 부재.

  • 따라서 야당의 무능은 단순한 도덕적 결함보다 제도·구조적 문제와 연관됨.

(3) 지식인·재야 세력의 부재

  • 글쓴이는 1970~80년대식 재야·지식인 주도 정치운동의 부활을 요구.

  •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에서 권력 견제는 시민사회, 언론, 법원, 국제적 네트워크 등 다양한 제도적 장치에 의해 수행됨.

  • 따라서 “재야 지도자”의 부재는 시대적 변화의 반영이지, 곧 민주주의 붕괴의 원인은 아님.

  • 다만, 공론장(公共場)의 약화—지식인·언론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갇혀 사회적 비판 기능을 상실하는 현상—은 민주주의적 건강성 약화로 이어질 수 있음.

(4) “파시즘의 징후”라는 진단

  •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학문적으로는 전체주의적 대중 동원과 폭력적 권력 유지를 전제.

  • 한국의 현 상황을 그대로 파시즘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 권력 집중,

    • 사법 독립성 약화,

    • 언론 자유 위축
      등은 자유민주주의의 질적 후퇴로 해석 가능.

  • 따라서 글쓴이의 표현은 정치학적 개념으로는 **“민주주의 후퇴(Backsliding)”**에 더 가깝다.


3. 평가

  • 글쓴이의 비판은 윤리적·감정적 언어로 쓰였지만, 정치학적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 가능:

    • 한국은 현재 권력 집중과 민주주의 후퇴 위험에 직면.

    • 야당은 제도적·전략적 한계로 견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

    • 시민사회·언론·지식인 공론장이 약화되어 권력 감시가 어려움.

  • 따라서 민주주의 안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재야 지도자”의 등장보다는,

    • 제도적 견제 장치 강화,

    • 시민사회·언론 독립성 회복,

    • 국제적 민주주의 규범과의 연계 등이 될 것임.


✅ 정리하면:
저자의 현 정권 비판은 “파시즘”이라는 강한 언어로 표현된 민주주의 후퇴 경고입니다. 정치학적으로는 권위주의적 후퇴, 견제와 균형의 약화, 공론장의 붕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민주주의 위기의 일부와 맞닿아 있습니다.


세진님, 제가 원하시면 이 내용을 한국 민주주의의 국제 비교(예: 헝가리·터키·폴란드 vs 한국)와 연결해 확장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드릴까요?

나의 말:
일본도 포함시켜 비교해주세요
ChatGPT의 말:

좋습니다. 이번에는 한국 현 정권 비판을 세계 민주주의 위기 맥락에서, 특히 헝가리·터키·폴란드와 함께 일본까지 포함해 비교해보겠습니다.


1. 한국

  • 문제 진단 (저자 시각): 권력 집중, 언론·사법 장악 시도, 파시즘적 징후.

  • 정치학적 해석: 민주주의 후퇴(Backsliding)의 위험.

  • 특징:

    • 대통령제 권력 집중 + 야당의 무능.

    • “재야·지식인”의 부재가 상징적 문제.

    • 아직 선거 경쟁은 활발하나, 제도적 견제 약화 우려.


2. 헝가리 (오르반 정부)

  • 현상: 집권당(Fidesz)이 장기 집권하며 헌법 개정, 사법부 장악, 언론 통제.

  • 유형: “자유민주주의의 해체” 혹은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 한국과의 비교:

    • 공통점: 권력 집중과 사법·언론 장악 시도.

    • 차이점: 헝가리는 이미 구조적으로 민주주의 후퇴가 진행되어 EU에서도 비판받는 단계. 한국은 제도적 저항력이 아직 남아 있음.


3. 터키 (에르도안 정부)

  • 현상: 쿠데타 실패 이후 권력 집중, 대통령제 개헌, 언론·시민사회 탄압.

  • 유형: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 종교적 보수주의.

  • 한국과의 비교:

    • 공통점: 집권 세력의 권력 집중과 야당의 취약성.

    • 차이점: 터키는 폭력적 탄압·선거 공정성 훼손이 심각. 한국은 제도적 자유·언론 활동 여지가 더 넓음.


4. 폴란드 (법과정의당, PiS)

  • 현상: 사법부 장악 시도, 언론 개입, EU와 충돌.

  • 유형: 보수민족주의적 권위주의.

  • 한국과의 비교:

    • 공통점: 사법 독립성 위협, 정파적 언론 활용.

    • 차이점: 폴란드는 EU라는 외부 견제 장치가 존재, 한국은 내부 제도와 시민사회만이 방어선.


5. 일본

  • 현상:

    • 아베 신조 시기(2012~2020) 장기 집권으로 자민당 일당우위 체제 심화.

    • 언론 종속(특히 NHK), 사법부 독립성 문제는 한국·헝가리 수준보다는 약하지만, 정치적 다양성 약화 뚜렷.

    • “헌법 9조 개정” 같은 장기 과제를 통해 국가주의적 의제 강화.

  • 유형: “경합적 권위주의”보다는 “안정된 일당우위 민주주의”.

  • 한국과의 비교:

    • 공통점: 여당 장기 집권, 언론 자유 축소 경향.

    • 차이점: 일본은 선거·정권교체 가능성이 극히 낮고, “야당의 무능”이 구조화되어 있음. 한국은 정권교체 경험이 반복되어, 일본보다 정치적 경쟁성은 더 강함.


6. 종합 비교 (표 요약)

국가권력 집중 방식민주주의 위기 정도야당 역할언론/사법특징
한국대통령 권력 집중, 여당의 폭주후퇴 위험 (초기 단계)무능·분열장악 시도, 아직 저항 가능재야·지식인 부재 강조
헝가리장기 집권, 헌법 개정심각한 후퇴 (EU 경고)사실상 무력화사법·언론 거의 장악“비자유주의 민주주의”
터키개헌, 대통령제 강화권위주의 심화취약언론·시민사회 탄압종교+포퓰리즘 결합
폴란드사법부 개입후퇴 중 (EU 견제 있음)약화언론·사법 갈등민족주의적 권위주의
일본자민당 일당우위경쟁성 약화 (장기적 위기)구조적 무능언론 종속 경향안정된 권위적 민주주의

7. 결론

  • 글쓴이의 한국 정치 비판은 “파시즘”이라는 언어를 쓰지만, 정치학적으로는 민주주의 후퇴의 위험 단계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합니다.

  • 한국은 아직 정권교체 가능성이 크고 시민사회의 저항력이 존재하므로, 헝가리·터키보다는 일본과 더 비슷한 문제(야당 무능, 언론·지식인 약화)를 공유합니다.

  • 다만 일본은 장기적 일당 지배로 정치 경쟁성이 사라진 반면, 한국은 경쟁성이 강하지만 극심한 양극화와 제도적 불안정이 문제입니다.


👉 정리하면:
한국의 현 상황은 헝가리·터키형 권위주의 회귀 위험일본형 일당우위 민주주의의 구조적 경직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글쓴이의 위기의식은 타당하지만, “재야 지도자”의 부활보다는 제도적 견제 강화와 시민사회 회복이 더 효과적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세진님, 원하시면 제가 이 비교를 한–일 민주주의의 차이와 공통점에 초점을 맞추어 더 깊게 정리해드릴까요?

나의 말:
ChatGPT의 말:

좋습니다. 이번에는 한–일 민주주의의 차이와 공통점을 깊이 있게 정리해보겠습니다.


1. 공통점

(1) 야당의 취약성

  • 한국: 야당은 분열·리더십 부족으로 여당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음.

  • 일본: 자민당의 장기 집권에 맞설 야당이 구조적으로 약화. 민주당(민주당 → 민진당 → 입헌민주당 등)이 여러 차례 통합·분열을 반복하며 신뢰 상실.
    ➡️ 두 나라 모두 여당 권력 집중에 비해 야당이 대안 세력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 공통 문제.

(2) 언론의 독립성 약화

  • 한국: 정권 교체 때마다 언론 장악 논란이 반복.

  • 일본: NHK 등 공영방송이 자민당 정부와 밀착, 기자클럽 제도가 권력 친화적으로 운영.
    ➡️ 두 나라 모두 언론이 권력 견제보다는 정파적·권력 친화적 태도를 보인다는 비판.

(3) 지식인·시민사회의 위축

  • 한국: 저자가 말한 “재야와 지성인 그룹의 부재”는 민주화 시기의 도덕적 권위가 약화되었음을 반영.

  • 일본: 전후 비판적 지식인 전통(예: 마루야마 마사오 세대)이 약화, 정치 담론의 비판적 성격이 줄어듦.
    ➡️ 한국과 일본 모두 과거 민주주의를 견인하던 비판적 지성의 힘이 현저히 약화.


2. 차이점

(1) 정권 교체 가능성

  • 한국: 1987년 이후 여야 간 정권 교체가 반복됨. 민주주의 경쟁성은 강함.

  • 일본: 자민당이 1955년 이후 대부분 집권. 2009~2012년 민주당 정권이 예외였지만 금세 무너짐. 사실상 일당우위 체제.
    ➡️ 한국은 정권 교체가 활발하지만 불안정, 일본은 정권 교체가 거의 없고 안정적이지만 민주적 경쟁성은 약화.

(2) 정치 제도의 특성

  • 한국: 대통령제 → 권력 집중이 심하고,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극단적. “제왕적 대통령제” 논란.

  • 일본: 의원내각제 → 총리는 자민당 당내 권력 구조에서 결정. 따라서 유권자의 정권교체 힘이 약함.
    ➡️ 한국은 정치적 극적 변화, 일본은 정치적 관성이 특징.

(3) 민주주의 위기 양상

  • 한국: 권력 남용, 사법부 독립 위협, 언론 장악 시도 등 권위주의적 후퇴 위험.

  • 일본: 일당 지배, 정치 무관심, 시민사회 위축 등 정치적 활력의 장기적 쇠퇴.
    ➡️ 한국은 “폭주 위험”, 일본은 “정체 위험”이 더 두드러짐.


3. 요약 비교 표

구분한국일본
정권 교체활발 (87년 이후 반복)거의 없음 (자민당 장기 집권)
정치제도대통령제 (권력 집중·극적 변화)의원내각제 (당내 권력, 관성)
야당분열·무능, 견제력 부족구조적 약세, 대안 세력 부재
언론정권 교체 때마다 장악 논란자민당 친화적, 기자클럽 구조적 문제
지식인민주화 세대 이후 도덕적 권위 약화전후 지식인 전통 약화, 정치 담론 위축
위기 유형권위주의 회귀 위험 (폭주형 위기)정치적 활력 상실 (정체형 위기)

4. 결론

  • 한국과 일본은 모두 야당의 무능, 언론·지식인의 약화라는 공통적 민주주의 위기를 겪고 있음.

  • 그러나 한국은 권력 집중으로 인한 단기적 폭주 위험, 일본은 장기적 정치 정체와 일당우위 구조의 경직성이라는 다른 형태의 위기를 보임.

  • 저자가 한국에서 강조하는 “재야 지식인 부활”은 일본 상황과 비교하면, 정권 교체 경쟁성이 살아있는 한국의 특수한 문제의식으로 볼 수 있음. 일본에서는 오히려 “경쟁 가능한 야당 재건”이 더 시급한 과제임.


👉 정리하면:
한국은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지만 정치적 극단성이 문제, 일본은 정권교체 가능성이 거의 없어서 민주주의 활력이 문제라는 점에서 대비됩니다.

세진님, 원하시면 이 비교를 더 확장해서 동아시아 민주주의 전체 맥락—즉, 한국·일본·대만·홍콩·중국을 연속선상에서 평가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드릴까요?

ChatGPT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정보는 재차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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