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를 평하다] - 1편,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정치+3노동/인권/사회+14사상/철학/역사+9

혁명읽는사람·독서가
2023/01/12
- 1편,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인터뷰] 노동장관 "노조, 헌법 보호만 받고 역할 등한시해선 안 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2023.1.12 kjhpress@yna.co.kr (출처 : https://www.yna.co.kr/view/AKR20230111154600530)https://www.yna.co.kr/view/AKR20230111154600530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본 기사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터뷰였다. 읽고 나서 이해가 되지 않아 관련 기사들까지 다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내 감상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였다. 윤석열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대통령실, 각 부의 장관 등등이 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이 혼자 그럴 수는 있는데 대통령을 보좌하는 이들 전체가 이 지경이라면 답이 없다. 일단 무언가 말들을 계속 하기는 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무수한 말들을 걷어내고 나면 '실천'만이 남는다. 이 실천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씩 따져보자.
1. 도대체 법치란 무엇인가?
우선 첫 부분부터가 탁 막힌다.
"이 장관은 이날 인터뷰의 상당 시간을 노사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할애했다.
그는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고 자연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는데, 사회에는 갈등이 있기 때문에 질서가 요구된다"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사회 규범이며 그 최고 형태가 바로 법"이라고 말했다."
윤석열은 대선후보 시절에도 법치와 준법을 구별하지 못했다. "노사 법치주의"라는 말을 내가 법학에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윤석열한테서 처음 들어봤다. 보수우파들이 법치와 준법을 구별 못하는 게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다. SNS를 오랫동안 하신 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한 10여년 전에도 뉴라이트 식이기는 했지만 '청년정치'라는 게 있었더랬다. 당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윤주진이라는 '청년' 보수가 SNS에서 보수의 입장을 대변한다며 많은 발언을 했는데 거기에도 '법치주의'가 무너진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떼법" 때문에 법치주의가 무너지니 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서 집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와 같은 주장에 격분해 법치와 준법의 구별에 대해 한참 설명하며 비판했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나의 지적이 맞다면서도 오늘날에는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보다 대중이 더 강한 권력을 지녔기에 대중이 준법을 하는 게 곧 법치주의가 된다고 말해서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뒤로도 그는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법치'라는 게 뭔가?
법치주의라는 건 기본적으로 전근대 사회에서의 군주의 자의적인 통치, "인치(人治)"에 대비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권력의 행사를 "법으로" 규제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뒤에서 보다 자세하게 말하겠지만 인치와 법치는 사실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런데 '노사 법치주의'라니? 노동자와 기업이 국가라는 말인가? 국가는 사라져도 시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을까? 말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출처 : 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2212274751Y)왜 '법치'가 문제가 되는가? 법치국가에서 주권의 행사는 국가 및 모든 국가 작용이 법에 "구속"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으로서의 주권은 그 자체로는 반드시 '법(法)'과 관련이 있다고 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법치국가"에서는 그것이 규범 및 규범의 연역으로서의 법과 상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본디 법치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이 자의적인 "인치(人治)"의 영역, 주권자가 법에 구속되지 않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의 자의적인 행사의 '여지'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최종적인 결정권자로서의 주권자는 법체계 안으로 사라져야 한다.
근대사회에서 입법부가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행정부는 아무리 물리적인 폭력수단 등의 집행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입법부가 정한 틀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서도 안된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입법부가 자기 멋대로 법을 제정한다면 자의적이고 전제적인 지배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를 최대한으로 제한하는, 로버트 달의 표현에 따르자면 '매디슨주의적 민주주의'를 구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치'는 '인치'를 끝내 배제하지 못한다는 게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가 전 생애에 걸쳐 논증하고자 했던 부분이다. '법치국가' 내에서는 "주권자"를 제거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주권과 법치의 충돌은 외재적인, 서로 다른 원리 간의 충돌이 아니라 법치의 '내재적인 한계'로 인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헌법도 '법'이자 "규범"이기 때문이다. 규범으로서의 헌법, 법으로서의 헌법을 만들어낼 결정의 계기는, 그리고 그 결정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권위의 계기는 헌법 자체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입법부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법은 궁극적으로 그 근거가 헌법으로 소급되지만 "최고"규범으로서의 헌법 자체는 소급되지 않는다. 헌법 자체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누구의 의지가 반영됐으며 누구의 결정에 따라 "최고"규범이 되었는가? 이것은 궁극적으로 헌법 더 나아가 근대적 법질서 전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대혁명 이전부터, 그리고 이후로도 무수히 논쟁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라 지적한다. 근대 사회 내에서의 우리의 삶은 법에 의해 규율되는데 그 법의 최종적 근원으로서의 헌법은 누구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것이 법의 적용을 받는 나의 의지인가? 36년 전의 1987년에 만들어진 제6공화국의 헌법의 의지를 2023년의 지금의 내가 왜 따라야 하는가? '일반의지'와 '개별의지' 간의 대립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법으로 해결이 가능한가? 내가 동의하지 않은 법을 왜 따라야 하는가? 법을 어기는 게 왜 나쁜가? 오히려 법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항하는 정당한 폭력행사가 아닌가? 법의 기반이 무너지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서 최고규범으로서의 헌법은 그 자신에게 "최고", 규범들 중의 "최고" 규범의 지위를 부여할 결정권자와 권위체를 요구한다. 이른바 "헌법의 수호자"이다. '헌법의 수호자'는 대통령이 될 수도, 헌법 재판소가 될 수도, 국가원수일 수도, 의회일 수도, 사법부일 수도, 입헌군주일 수도, 심지어는 국민 자체일 수도 있다. 동시에 이들 모두이면서 모두가 아닐 수도 있다. 어쨌거나 핵심적인 문제는 이들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기능하는 것은 헌법으로부터 그 최고 결정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법치국가에서의 헌법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자신에 의거해 해결해야 하는 모순에 빠져있다. 법치국가는 이 모순을 최대한 유예하려 결정의 여지를 없애려 최대한 노력하지만 그 모든 노력들이 최종적으로 헌법에 의거하는 한 헌법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결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법의 지배가 무한소급 속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상실할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근거가 되는 주권자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법의 자기실현에 있어서도 결정의 계기가 필요하다. (헌)법은 앞서 말했듯이 "규범"이다. 법은 사회라는 대상을 규율하기 위한 규범으로서 존재하며, 만약 그에 실패하면 법은 자신의 존립기반을 잃게 된다. 그런데 법의 규율 대상인 개별적인 사건들, 좀더 포괄적으로 말해서 "사회"라는 대상은 "구체적"이다. 규범으로서의 법이 지닌 추상성과 일반성과 달리 사회적 행위는 대부분 구체적이고 특수하다. 따라서 규범으로서의 법, 더 정확하게는 법조문 자체가 사회 전체를 포괄할 수는 없다. 법조문에서 아무리 연역을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법의 "해석"과 그 해석으로부터 도출되는 결정의 정당성을 놓고 대립한다. 즉, 이 지점에서 알 수 있듯이 법이 규범으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구체성을 부여할 "외적인 계기"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곧 결정이다. 조르조 아감벤이 법의 유일한 목표는 '판결 그 자체'라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독해되어야 한다.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면 법은 기능하지 않고 존재근거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것이 사회적 정의(正義)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판결을 통해 법이 '실현'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헌법의 수호자가 알려주는 역사적 해법(출처 :김성모의 만화 <4인조>,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yean5rang&logNo=50125885588)이런 의미에서 법치는 본질적으로 '자의적인' 결정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좋든 싫든 그 결정을 수행하는 "주권자"의 폭력을 수용하며 살 수밖에 없다. 동일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주권자'의 의지가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이유로 그것이 공화정이든 입헌군주정이든 심지어 차리즘 전제군주정이든 '부르주아 독재'라는 범주에 넣어 비판하는 것이다. 그가 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또한 주권의 의미에서 사용되어야 하며, 그렇기에 그는 궁극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도 사라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의 성격을 "과도기"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의는 '인치'와 '법치'를 서로 대립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가?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규율하는 규범이 반드시 곧바로 '법'이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의에 대비되는 '규범' 혹은 '합의'에 따른 규율 중의 일부가 "법"으로 제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공동의 규범을 창출해내는 기구는 이미 근대 사회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바로 의회, 입법부이다. 하버마스가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논의했듯이 부르주아 공론장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것의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위치는 의회일 수밖에 없다. 의회에서 논의하는 것은 그 자체로 특정한 이해관계를 보편화하며 공공성을 산출해내게 된다.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이 의회라는 공론장에서 논의를 하고 합의하는 형태가 반드시 법의 형태로만 나타날 필요는 없다. 근대적인 정치의 역할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정치의 역할이란 법을 통해 사회적 주체들을 규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주체들 간의 합의를 공개성과 토론, 그리고 공공성에 입각해 주조해내는데에 있다. '노사 법치주의'라는 희한한 조어를 통해 윤석열 정부와 그 장관들은 사회적 주체와의 타협을 통해 공동체의 공공성을 확립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기능하도록 유도하는 게 아니라 되려 사회적 주체를 파괴하는 행위를 거듭하고 있어 상당한 우려를 갖게 한다. 법치주의는 노사가 아니라 윤석열 정부 자신을 규제하는데 사용되어야 하는 조어이다. 대상이 주체 노릇을 하려는, 거꾸로 된 시대에서 이정식 장관은 춤을 추고 있다.
2. 사회적 주체가 없는 정치
이어서 계속 이정식 장관의 발언을 살펴보면 노조 재정 투명성 제고의 필요성 부분인데 이것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 정부가 내건 노동 개혁 과제 가운데 하나인 노조 재정 투명성 제고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그는 "요즘 뉴스에는 건설사를 협박해 돈을 뜯어낸 '조폭 같은 노조' 보도가 나온다"며 "노조의 생명은 자주성과 민주성으로, 회계를 투명하게 운영해야 스스로 당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조 재정 투명성 제고와 건설업체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낸 "조폭 같은 노조"가 무슨 관련이 있는건가? 후자를 잡아내려면 형사법과 경찰, 검찰 등의 시스템적인 부분이 잘 갖춰져야 하는 것이지, 그것이 노조의 재정을 들여다볼 이유가 무엇인가? 노조를 재정을 들여다보면서 노조가 범법행위를 저질렀는지 여부를 추적하겠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나올 수 있는 의문은 기업도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내부 정보 공개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얘기는 또 안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은 계속 이어진다.
"근로기준법과 관련해서는 "1953년에 만들어졌는데, 그해에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있었다"며 "70년 전인 당시 공장과 노동조합, 노동자가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이라며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70년간 유지돼 온 현재 고용·노동 체제는 시스템 안의 근로자들만 두텁게 보호해 임금, 복리후생, 고용안전성 등의 측면에서 격차를 확대하고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초래한다는 것이 이 장관의 진단이다."
비록 노동사회학 분야에 문외한이지만 정이환 교수의 고전적인 연구들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현행 이중구조는 IMF 외환위기 이전의 1980년대 후반의 노동자 대투쟁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거기서 핵심적인 쟁점이었던 것은 노동자의 성과를 기업 등의 사용자들이 "평가"하는 것에 대한 노동자들의 격한 반발이 현재의 정규직 보호와 비정규직 배제라는 이중구조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류석춘과 같은 뉴라이트 사회학자 또한 이 부분을 지적하며 산별노조의 도입성에 대해 주장하는 기묘한(?) 상황에서 노동부 장관이 갑자기 70년 전의 법체계 때문에 이중구조가 발생했으니 법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이지만 현실의 노동자들이 무슨 거창한 혁명 이념이나 이런 걸 갖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급진적인 정치적 지향성을 지닌 사람일수록 인간은 본래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현실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더 많은 임금을 원할 뿐이다. 실적을 평가하는 권한을 기업가가 쥐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공정"할 것인지, 내가 기여하는 혹은 원하는 만큼의 임금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켜줄 방안이 없는 상태에서 1980년대 후반의 노동자들은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울타리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이것을 깨려고 한다면 노동시장에서의 노동력의 가치 측정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 그 객관의 기준이 무엇인지 등을 사회적으로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앞서 말한 "정치"의 역할이고 기능이다.
계속 가보자. 이정식 장관은 자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타국의 역사까지도 별다른 근거없이 왜곡시킨다.
"그는 "'유연안정성' 문제는 임금체계와도 연결된다"며 "우리나라의 연공형 임금 체계상으로는 일한 햇수만큼 임금이 올라가기 때문에 근로자가 한 기업에 종속되는데, 임금체계가 직무급제로 전환되면 다른 기업으로 옮겨도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조돈문 교수의 연구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유연안정성' 실험은 유럽의 노사관계를 가져온 것인데 이정식 장관은 그 전제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체계와 "산별노조"가 전제되지 않으면 "다른 기업으로 옮겨도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다"는 말이 성립할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기업도 일종의 "공동체"이고 나름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직급'이라 하더라도 기업 내부에서의 가치평가는 전연 상이할 수 있다. 이 부분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및 아예 산별교섭체계로 바꾼 것인데 그런 전제조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기존의 현기차 중심의 대기업 노조 전체를 무너뜨리겠다는 말만 늘어놓으면서 어떤 식으로 하겠다는건지는 말이 없다.
어디서 주워듣기는 한 것 같은데 본인이 직접 그것들이 실현가능하기 위해서 어떠한 조건들이 필요한지 고민해본 흔적이 드러나지를 않는다. 장관의 말이 주장과 그것에 기초한 실천으로 이뤄져 있는데 정작 주장의 디테일이 모두 성립하기 어려워 사실상 무용한 것이라 한다면, 남는 것은 "실천"밖에 없다. 사실상 이정식 장관을 비롯한 윤석열 정부는 기존의 현기차와 같은 대기업 노조 체제를 무너뜨리겠다는 의도만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심'은 마지막 부분에서 사실로 입증된다.
"그는 노동계가 강하게 요구하는 노동조합법 2·3조 개정과 관련해서는 "파업 등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법 테두리 안에서 하면 손해배상·가압류 얘기가 안 나온다"고 일축했다.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2·3조 개정안은 간접고용 노동자의 교섭권을 보장하고 쟁의행위 탄압 목적의 손해배상·가압류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와 경영계는 '노란봉투법'이 만들어지면 법적 분쟁으로 사회에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법 테두리 안에서" 하는 쟁의행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쟁위행위의 탄압을 목적으로 손해배상·가압류를 하는 걸 막겠다는 법인데 쟁위행의를 '탄압'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완책이 없다. 애당초 손해를 안 끼쳤으면 될 것 아닌가? 라고 "노동부"의 장관이 말하고 있다. 본인도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이정식 장관의 말에 따르면 노동쟁의행위는 애당초 봉쇄될 수밖에 없다. 손해를 끼치지 않는 '착한' 파업이 어떻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일 다 끝나고 남들 다 퇴근한 다음에 모여서 시위하면 되는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3. 정치가 실종된 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는 대통령부터 대통령실, 장관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말들만 한다. 대선후보 시절에도 그랬지만 그나마 그때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조금 숙이는 게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사라져버렸다. 이정식 장관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났지만 윤석열 정부는 입법부를 이용하지 않고 사회에 개입한다. 어떤 식으로? "저기에 불법이 있다." 노조부패라는 희한한 조어를 내세워서 노조에게 무언가 불법의 여지가 있으니 형사법적인 국가폭력이 개입해서 조정해야 한다는 방식이다. 여기에 대화, 공개성, 토론 등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정치는 실종되고 판사봉이 춤을 춘다. 앞서 말했듯이 추상적인 법조문은 결코 사회를 포괄할 수 없다. 결코 법조문이 도달할 수 없는 사회의 구체성에 도달하기 위해 윤석열 정부는 "불법성" 여부를 판별하기로 택했다. 행정부의 수반이 '헌법의 수호자'가 되어 사회적 관계를 조절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이런 시대, 이런 시대란 국가의 전제적인 지배에 맞선 새로운 보편과 구체의 변증법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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