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1987년 체제'를 넘어라
[중앙 시평] '1987년 체제'를 넘어라
[중앙일보] 입력 2003.07.06 19:03 수정 2003.07.07
한국 현대사는 세 개의 체제를 넘어왔다. 제1막 '1948년 체제'. 그것은 냉전과 사회주의의 위협 속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정통성을 수호한 체제였다. 제2막 '63년 체제'.
그것은 '잘 살아보세'의 토대를 확립한 개발체제였다. 제3막 '87년 체제'. 그것은 '전태일''광주''박종철'을 딛고 자유와 참여, 시민사회를 연 민주화 체제였다.
지금 우리는 이 '87년 체제'의 어디쯤 있는가? 세계화.정보화 등 복합적 도전들이 이 시기를 함께 했다. 이 복합 도전을 한국은 그래도 용케 뚫고 왔다. 세계화에 적응해 경제 규모도 두배 이상 늘었고, 정보화 경쟁에서도 '인터넷 강국'을 외치기에 이르렀다.
민주화도 착실히 진전됐다. 흥미로운 것은 87년 이후 바뀐 대통령은 늘 이전 대통령보다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넷째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은 6.10 항쟁을 주도했던 두 세력 가운데 보수야당이 아닌 재야세력을 온전히 상징하는 첫 대통령이다.
역사의 오묘한 역설인가? 87년 체제의 '성골'인 盧대통령이야말로 87년 체제를 종식시키고 새 체제(가칭 '2003년 체제')를 만들 적합한 대통령이 아닌가. 87년 체제의 화두가 민주화였다면, 이 화두는 참여정부 출현으로 일단 마감됐음을 인정하자.
이제 '2003년 체제'를 위해 새로운 화두가 필요하다. 그것은 건국.경제발전.민주화의 역동적 에너지를 선진국 도약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 핵심 과제는 '경제 강국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지방분권 체제, 지역주의와 고비용 정치의 혁파, 투명성과 신뢰성 제고, 삶의 질 고양' 등으로 집약된다. 그것은 '업그레이드 코리아'와 '강한 한국'을 겨냥하는 것이다.
지난 4개월간 집권세력은 87년 체제에 안주하는 국정을 폈다. 국정의 중심이 보이지 않고, 민주화 세력들에 대한 '잠재적 부채의식'이 현안 해결을 꼬이게 만들었다. 전문적 팀워크와 동지애를 혼동한 인사도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하지만 최근 다른 모습이 보이고 있다. 철도 파업에서의 법 준수를 신호로 '2만달러 시대' 제창, 지방분권 로드맵의 제시 등 '코드'만을 드러내는 공허한 '개혁 담론'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국가경영의 담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이제야 대통령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새 체제는 과거의 연속선에 있다는 것이다. 국가를 개조하려면 '어버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경건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경청하자.
창조적 계승은 그래서 철저한 실용주의를 요구한다.'48년 체제''63년 체제', 그리고 '87년 체제'를 거쳐 한국을 여기까지 발전시킨 에토스는 이상주의가 아니라 실용주의였다.
덩샤오핑(鄧小平)의 말대로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최고"라는 실용주의는 이승만부터 김대중까지 한국을 이끌어온 국정의 원리였다.
실용주의에 입각해 선진국 도약과 2만달러 시대를 여는 수단을 찾고 거기에 대통령 프로젝트를 집중시켜야 한다. 여기에 진보.보수를 따지는 것은 한가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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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대로 일상적 국정관리는 총리에게 넘겨 책임총리제를 도입하고 청와대가 핵심 어젠다에 집중해 민주화 이후를 '한국 사회의 업그레이드'로 이끌도록 하자. 지금은 그 기로다.
만일 여기서 과거의 정체성에 얽매이면 '2003년 체제'는 '2008년 체제'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의 국정 시계침은 87년을 가리키는가, 2003년 이후를 가리키는가? 중국 방문, 경제 살리기, 청와대 개편, 지방분권, 그리고 신당 추진으로 이어질 하반기 국정의 주요한 관전 포인트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사회학
◇약력:동아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학 박사, 지방분권부산운동본부 집행위원장, 저서 '성찰적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대전환 21:미래와의 대화'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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