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의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기시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품속에서 생의 빛나는 자욱을 남긴 애국지사들가운데는 량심적인 민족자본가였던 리종만선생도 있다.
주체38(1949)년 6월 평양에서는 전민족적인 통일전선조직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날로 로골화되여가는 미제의 분렬책동에 대처하여 애국력량을 하나로 결속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의 하나로서 소집하신 이 대회는 북과 남, 해외의 70여개의 진보적정당, 사회단체들이 참가한 력사적인 대회였다. 회의당일인 6월 25일 모란봉극장은 북과 남, 해외의 각계각층 대표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 자리에는 《조선산업건설협의회》 회장의 자격으로 남조선에서 온 리종만선생도 있었다.
오후 3시, 주석단으로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밝은 안광으로 참가자들을 살펴보시다가 리종만선생을 주석단으로 부르시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응답이 없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다시 리종만선생을 부르시였다. 얼결에 몸을 일으킨 리종만선생은 얼어붙은듯 서있다가 옆사람의 재촉을 받고서야 주석단으로 올라갔다. 그가 옷깃을 여미며 인사를 올리려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며 늙으신분이 먼길에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겠다고 하시면서 회의참가자들에게 리종만선생을 소개하시였다.
순간 리종만선생은 이름할수 없는 감동과 더불어 마음이 개운해지는것을 느끼였다. 사실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기 전까지만 하여도 공화국에서 대기업가인 자기를 어떻게 대해줄것인가 하는 위구심을 좀처럼 털어버릴수가 없었던 그였다.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여난 리종만선생은 해방전에 큰 광산들과 수백개의 광구를 가진 《대동광업주식회사》와 수백만평(당시)의 토지를 가진 《농림주식회사》 그리고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를 비롯한 10여개의 교육기관과 출판사들도 경영하였다. 해방후에도 그는 남조선에서 많은 광산, 탄광, 공장들을 운영한 큰 기업가였다. 허나 아무리 많은 재산도 그에게 위안을 주지 못하였다.
해방전에는 일제가 기업가인 그를 틀어쥐기 위해 위협과 회유를 들이대였고 해방후에도 미제와 리승만역도의 강권과 압박속에 시달려야 하였다. 하지만 민족적량심과 애국지조만은 버릴수 없는 리종만선생이였다. 하기에 그는 민족적울분을 안고 갈길 몰라 모대기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그를 불러주시였던것이다.
그가 주저없이 평양으로 걸음을 옮길 용기를 내게 된데는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직접 만나뵙고 온 김구와 같은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받은 충격이 컸기때문이였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고 돌아간 김구선생은 리종만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한다면 당파나 종교의 소속, 재산의 유무, 정치적견해여하를 불문하고 반드시 김일성장군님의 두리에 단결해야 하오.… 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겠소. 이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요.》
하기에 리종만선생은 초청장을 받자마자 평양으로 달려왔던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어버이의 품에 안겨 참된 애국의 길을 걷는 인생전환의 뜻깊은 새 출발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제의에 의하여 리종만선생은 력사적인 대회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 상무위원으로 선거되였다. 이것은 량심적인 민족자본가 리종만선생에게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저버리는 일이 없이 깨끗한 량심과 지조를 지니고 살아온 그의 소행을 애국적소행으로 평가하시고 그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시였던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어버이의 따뜻한 품에 안기였기에 민족자본가였던 리종만선생은 조국앞에 떳떳하게 한생을 보낼수 있었으며 《조국통일상》 수상자로, 후대들이 기억하는 애국지사로 영생의 삶을 누릴수 있었다.
주체38(1949)년 6월 평양에서는 전민족적인 통일전선조직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날로 로골화되여가는 미제의 분렬책동에 대처하여 애국력량을 하나로 결속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의 하나로서 소집하신 이 대회는 북과 남, 해외의 70여개의 진보적정당, 사회단체들이 참가한 력사적인 대회였다. 회의당일인 6월 25일 모란봉극장은 북과 남, 해외의 각계각층 대표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 자리에는 《조선산업건설협의회》 회장의 자격으로 남조선에서 온 리종만선생도 있었다.
오후 3시, 주석단으로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밝은 안광으로 참가자들을 살펴보시다가 리종만선생을 주석단으로 부르시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응답이 없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다시 리종만선생을 부르시였다. 얼결에 몸을 일으킨 리종만선생은 얼어붙은듯 서있다가 옆사람의 재촉을 받고서야 주석단으로 올라갔다. 그가 옷깃을 여미며 인사를 올리려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며 늙으신분이 먼길에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겠다고 하시면서 회의참가자들에게 리종만선생을 소개하시였다.
순간 리종만선생은 이름할수 없는 감동과 더불어 마음이 개운해지는것을 느끼였다. 사실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기 전까지만 하여도 공화국에서 대기업가인 자기를 어떻게 대해줄것인가 하는 위구심을 좀처럼 털어버릴수가 없었던 그였다.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여난 리종만선생은 해방전에 큰 광산들과 수백개의 광구를 가진 《대동광업주식회사》와 수백만평(당시)의 토지를 가진 《농림주식회사》 그리고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를 비롯한 10여개의 교육기관과 출판사들도 경영하였다. 해방후에도 그는 남조선에서 많은 광산, 탄광, 공장들을 운영한 큰 기업가였다. 허나 아무리 많은 재산도 그에게 위안을 주지 못하였다.
해방전에는 일제가 기업가인 그를 틀어쥐기 위해 위협과 회유를 들이대였고 해방후에도 미제와 리승만역도의 강권과 압박속에 시달려야 하였다. 하지만 민족적량심과 애국지조만은 버릴수 없는 리종만선생이였다. 하기에 그는 민족적울분을 안고 갈길 몰라 모대기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그를 불러주시였던것이다.
그가 주저없이 평양으로 걸음을 옮길 용기를 내게 된데는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직접 만나뵙고 온 김구와 같은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받은 충격이 컸기때문이였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고 돌아간 김구선생은 리종만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한다면 당파나 종교의 소속, 재산의 유무, 정치적견해여하를 불문하고 반드시 김일성장군님의 두리에 단결해야 하오.… 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겠소. 이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요.》
하기에 리종만선생은 초청장을 받자마자 평양으로 달려왔던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어버이의 품에 안겨 참된 애국의 길을 걷는 인생전환의 뜻깊은 새 출발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제의에 의하여 리종만선생은 력사적인 대회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 상무위원으로 선거되였다. 이것은 량심적인 민족자본가 리종만선생에게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저버리는 일이 없이 깨끗한 량심과 지조를 지니고 살아온 그의 소행을 애국적소행으로 평가하시고 그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시였던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어버이의 따뜻한 품에 안기였기에 민족자본가였던 리종만선생은 조국앞에 떳떳하게 한생을 보낼수 있었으며 《조국통일상》 수상자로, 후대들이 기억하는 애국지사로 영생의 삶을 누릴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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