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24
‘도민의 목숨을 한 손에 쥔 염라대왕’ – 제주의소리
‘도민의 목숨을 한 손에 쥔 염라대왕’ – 제주의소리
‘도민의 목숨을 한 손에 쥔 염라대왕’
김관후 시민기자 kghoo21@naver.com 2014년 10월 21일 화요일 08:06 0면
<김관후의 4·3칼럼> (34) 학살사건 한복판에 선 제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
탁성록은 누구인가?
▲ 탁성록.
‘조선경비대총사령부 특명 제122호(1948년 8월)/ (중략) 9. 대위 탁성록(10158)을 제3여단 사령부로부터 제5여단 제9연대에 전속을 명함. 일보 변경일 1948년 8월 25일. 정부차 승용허가 10.(중략)/ 총사령관 명에 의하여 총참모장 대령 정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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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읍내 주민들의 희생에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는 송요찬 9연대장 외에 9연대 정보참모 탁성록(卓聖錄) 대위,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직속 특별수사대 최난수(崔蘭洙) 경감, 제주도 서북청년회 김재능(金在能) 단장 등이 손꼽힌다. 이들은 제주도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382쪽
"탁성록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와 소위 아편주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마약은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라 약재과장을 불러와 결재를 받고 주사를 놔 주었습니다. 그는 팔에 주사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아편쟁이였어요. 안정숙 간호원이 팔뚝에 주사하려 해도 주사 바늘이 들어가지 않자 겨드랑이 밑에 꽂으라고 하더군요. 그는 재임기간 내내 주사를 맞으러 병원을 찾았습니다." -당시 제주도립 제주의원 경리주임 河斗瑢의 증언(‘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383쪽)
탁성록(卓聖祿, 1916~?)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제주4.3사건 당시 제9연대 정보과장을 역임하였다. 제9연대 정보참모라면 진압군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는 마약 중독자이며, 무소불위로 인명살상과 성폭행을 했다. 원래 광주주둔 제5여단 정보참모였다. 박진경(朴珍景) 대령이 암살되자, 1948년 6월 18일 제주도에 급파, 제9연대 정보과장으로 재임하였다.
탁성록은 도민에게 지은 죄가 너무나 크다. 그는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할 것 없이 잘못 걸리면 죽였다. 서북청년단이 그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송악산에서 먹돌로 망을 짜서 수십 명씩 총살시켰다. 외도리에서의 수장(水葬)도 탁성록이 주도적 역할을 하며 직접 지휘했다.
제주4·3을 겪었던 사람들은 그를 ‘탁 대위’라 부르며 치를 떤다. 그는 11연대에 이어 재편된 9연대 정보참모로 제주도에 부임, 학살사건의 한복판에 선다. 11연대가 철수하고 9연대가 들이닥쳤다. 송요찬(宋堯讚) 연대장 휘하에 부연대장 서종철(徐鍾喆) 대위를 위시해 인사주임 최세인(崔世寅), 정보주임 탁성록, 작전주임 한영주(韓永周), 군수주임 김정무(金貞武) 대위 등의 참모진으로 짜여졌다. 또 헌병대장으로는 송효순(宋孝淳)이 복무했다. 그런데 박진경 사건을 처리할 때 정보주임 탁성록 역할이 컸다.
탁성록은 여성을 농락하다 살해하는 패륜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도민의 목숨을 한 손에 쥔 염라대왕이었다. 구금자 가족들은 돈 보따리를 들고 그를 찾기 바빴다. 결국 그가 토벌이라는 미명 아래 저지른 즉결총살은 마약중독자가 환각상태에서 저지른 학살극이었다.
탁성록의 말 한마디에 여럿이 죽어갔다. 그 때 헌병에게 잡혀가면 살고, ‘탁 대위’에게 잡혀가면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가릴 것 없이 다 죽었다. 서북청년들도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서북청년들이 사건을 악화시켰다. 그래서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올랐다.
탁성록과 관련한 증언 가운데 대부분은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라고 몰아 죽였다’거나 ‘여러 여성을 겁탈했다’는 내용이다. 예쁜 여자들만 여러 번 바꿔가며 살았으며 나중에 제주를 떠나게 되자 동거하던 여인을 사라봉에서 죽이고 갔다. 그는 사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구금된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문턱에서 하루하루를 속 태우며 지냈다. 밤중에 호명당해 나가면 다신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탁성록 대위와 강현(姜鉉) 서청 정보부장에 의해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매일 아침 탁 대위가 점호를 했다. 탁 대위는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체격이었다. 그는 매일 권투연습을 했다. 그가 수용소 천막 안에 들어오면 재빨리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야 했다. 수감자들을 쓱 훑어보다가 누군가를 지목해 욕설을 하면서 발길질을 하면 그걸로 끝이다.
부하들이 해당자를 즉각 끌고 가 처형했다. 공포감에 젖어서 정신착란을 일으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경비병의 ‘이 새끼, 조용히 못해!’ 하는 고함과 동시에 구타와 비명이 터진다. 아침에 집합해 나가보면 천막 앞 무덤 부근에 시신이 나뒹군다.
구금자의 가족들은 토벌기관에 줄을 대기 바빴다. 특히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되는 상황 속에서 도민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던 탁성록 정보과장과 김재능 서청단장에게 접촉하는 것은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농업학교 수감자 중에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끌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진주에서는 1950년 7월 15일경부터 연행된 주민들이 진주경찰서 유치시설과 진주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진주경찰서와 진주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들은 7월 21일부터 7월 26일까지 진주 명석면 관지리, 용산리, 우수리 등지, 문산읍 상문리, 마산 진전면 여양리 등지에서 희생되었다.
진주경찰서에는 최소 100여 명, 진주형무소에는 최소 200여 명의 주민들이 연행되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가해 집단은 진주CIC파견대와 헌병대, 진주경찰서, 진주형무소 특공대 등이다. 진주CIC파견대장은 바로 탁성록이다. 진주형무소 재소자의 희생자까지 포함한다면 진주에서는 모두 2,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1948년 가을부터 제주지역 기관장과 유지들도 대거 수용되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박진경 암살사건 진성조사차 제주에 왔던 5여단 장교 가운데 눈여겨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정보참모 탁성록(卓聖綠) 대위였다. 4·3을 겪었던 제주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탁 대위’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람이 많다. 그는 11연대에 이어 재편된 9연대 정보참모로 제주도에 부임, 학살사건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제3권 222쪽
‘1948년 10월경에 검거됐다. 그때는 아주 무서운 때였다. 농업학교에 천막을 몇 십 개를 쳐서 거기에 수용시켰다. 우리 눈에는 고문으로 죽은 사람도 많이 보였다. 일단 취조가 끝나면 천막에 들어가서 일어나질 못했다. 결국 못 일어나서 죽었다. 그때 취조관들이 술을 먹었는지 어쨌는지 하여튼 보통 정신으로 안보였다. 냄새도 나고, 탁(성록) 대위가 지휘자인 것 같았다. 삐라를 뿌리지 않았느냐고 하였다. 나도 거기서 고문을 당하고, 이틀 동안은 일어나지 못했다. 죽는 줄만 알았다. 고문으로 민청에 가입한 것으로 억지 자백했다.’(김춘배,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당시 상업 2001. 8. 25. 채록)-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488쪽
‘9연대는 송 연대장 휘하에 부연대장 서종철 대위(徐鍾喆, 육사 1기․ 대장 예편․참모총장․국방장관 역임)를 위시해 인사주임 최세인(崔世寅, 육사 3기․대장 예편․육사교장․군사령관 역임), 정보주임 탁성록(卓聖綠), 작전주임 한영주(韓永周, 육사 1기․준장 예편․육본전사감 역임), 군수주임 김정무(金貞武, 육사 2기․준장 예편․사단장 역임) 대위 등의 참모진으로 짜여졌다. 또 헌병대장으로는 송효순(宋孝淳, 육사 2기․준장 예편․헌병감․국회의원 역임)이 복무했다. 그런데 앞의 사건을 처리할 때 정보주임 탁 대위와 헌병대장 송 대위의 역할이 컸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제4권 121쪽
제9연대 본부는 제주읍내 제주농업학교에 자리잡고 있었다. 송요찬 연대장의 9연대는 제주도 모슬포에서 창설된 원래의 9연대 병력(제1대대)과 부산에서 파병된 5연대 병력(제2대대), 대구에서 내려온 6연대 병력(제3대대)으로 혼성 편제돼 있었다.
4·3발발 이후 제주도 전역은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제주읍내에서도 지역유지를 비롯, 주민들이 계속 연행됐다. 이 무렵 제주읍내에서는 여섯 군데의 조사기관이 맹활동을 했다. ①9연대 정보과 ②헌병대 ③미군 CIC ④경찰 특별수사대 ⑤경찰 사찰과 ⑥서북청년단이 그런 기관이었다.
제9연대 정보과는 탁성록 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구금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문턱에서 하루하루를 속 태우며 지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두려움은 더해 갔다. 밤중에 호명당해 나가면 다신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CIC는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제주도 모든 기관의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다. 앞에 열거한 조사기관들, 가령 막강하게 힘을 휘두른 9연대 정보과 뿐만 아니라 헌병대, 경찰 수사․정보기관, 심지어 서청으로부터도 매일 매일 1일보고를 받았다.
고등계 형사출신들
▲ 송요찬.
초토화작전 당시 중앙의 군․경 수뇌부는 어떤 인물들인가? 제주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극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당시 군·경의 수뇌부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으며,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미군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조병옥은 4․3 초기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추진하던 김익렬 9연대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해임하였다. 초토화작전 당시 중앙의 군․경 수뇌부를 제민일보 4·3취재반은 『4·3은 말한다』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콜터 장군(John B. Coulter)=주한미군사령관 겸 미24군단장(1948. 8. 27~1949. 1. 15) ▲로버츠 준장(William L. Roberts)=통위부 고문관(1948. 5. 20~1948. 8. 24), 임시군사고문단(PMAG) 단장(1948. 8. 26~1949. 6. 30), 주한미군사령관 겸임(1949. 1. 15~1949. 6. 30), 미군철수 후엔 군사고문단(KMAG) 단장(1949. 7. 1~50. 6) ▲이범석(李範奭, 총리 겸 국방장관)=1900년 서울 생. 광복군 참모장,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사령관. 해방 후 민족청년단 단장. 초대 국무총리(1948. 8~50. 4), 초대 국방장관을 겸임했으나 1949년 3월부터는 국방장관에 신성모(申性模)가 임명됨에 따라 총리직만을 수행. ▲이응준(李應俊, 총참모장, 준장)=1890년 평남 생. 일본육사 26기, 일본군 대좌(대령).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졸, 정부수립 후 초대 총참모장. 체신부장관 역임. ▲윤치영(尹致暎, 내무부장관)=재임기간 1948. 8~1948. 12 ▲신성모(申性模, 내무부장관)=재임기간 1948. 12~1949. 3 ▲문봉제(文鳳濟, 서북청년단장)
직접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을 수행한 토벌대 수뇌부는 또 어떤 인물들인가? 주로 일제때 일본군이나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만주군에 복무했던 사람들이다. 또는 독립운동가를 고문․살해하는데 앞장섰던 고등계 형사출신도 있다. 일부는 이후에 대한민국의 고위직을 역임했다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이다. 당시 나이 서른살의 송요찬은 제주도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또 초토화작전에서는 탁성록, 최난수, 김재능의 역할이 주목된다.
▲버제스 대위(F. V. Burgess, 9연대 미군고문관) ▲송요찬(宋堯讚, 9연대장, 소령)=1918년 충남 생. 일본군 지원병 준위, 해방 후 경찰전문학교 훈련주임. 군사영어학교 졸, 육참총장․국방장관․국무총리 역임 ▲서종철(徐鍾喆, 9연대 부연대장)=1924년생. 일본군 학도병 소위, 해방후 군사영어학교 졸, 육참총장․국방장관 역임 ▲탁성록(卓聖綠, 9연대 정보과장, 대위)=경남 출생. ▲송효순(宋孝淳, 9연대 헌병대장, 대위)=육사2기. 국회의원 역임 ▲홍순봉(洪淳鳳, 제주도경찰국장)=평남 출신. 일제 경찰로서 만주에서 근무. 해방후 경찰전문학교 교양과장. ▲최난수(崔蘭洙, 특별수사대장, 경감)=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 ▲김재능(金在能, 서북청년단장) ▲강현(姜鉉, 서북청년단 부단장)
▲ 한라산 정상부근에서 작전중인 9연대장병들(1948.9)
여성들 줄줄이 연행
"탁성록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예쁜 여자들만 여러 번 바꿔가며 살았는데 나중에 제주를 떠나게 되자 동거하던 여인을 사라봉에서 죽이고 갔다. 그는 사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崔吉斗의 증언(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383쪽)
4.3은 보편적 인간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인권유린을 가져왔다. 4 3의 여성 피해는 전시와 같은 상황이었기에 더욱 잔인하고 큰 규모로 나타났다.
제주도 부녀동맹(婦女同盟)은 47년 1월 25일 결성되었다. 부녀동맹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이환(金二煥)은 개회사를 통해 "조선의 해방은 8할 이상을 점하고 있는 무산대중과 1천 5백만 여성의 해방 없이는 도저히 기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직체를 가짐으로써 이를 위하여 투쟁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1947년 3.1 시위나 48년 5.10단선 반대 투쟁에도 부녀동맹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여성들 중 일부는 산으로 올라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마을에 남아 무장대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식량이나 의복 등 생활 물자를 마련하여 무장대에게 공급하는 일을 하게 된다. 탁성록은 많은 여성을 농락하다 살해하는 패륜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도민의 목숨을 한 손에 쥔 염라대왕이었다. 구금자 가족들은 돈보따리를 들고 그를 찾기 바빴다. 그가 토벌이라는 미명 아래 저지른 즉결총살은 마약중독자가 환각상태에서 저지른 학살극이었다.
1948년 11월 유지들이 갇히기 시작할 무렵 읍내 여성들도 헌병대에 끌려 들어갔다. 읍내에서도 내노라는 여성들로서 대개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나이였다. 읍내 곳곳에 군인들이 배치돼 있었기 때문에 면회는 물론이거니와 군 주둔지인 제주농업학교까지 가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군 주둔지에는 탁성록이 버티고 있었다.
제주농업학교에 자리잡았던 9연대 정보과는 탁성록 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지역유지들이 연행되면 가족들을 구명하기 위해 줄을 대느라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들 중에 △강어영(康御英, 道부녀동맹 부위원장) △강염숙(姜念淑) △고숙자 △고지영(高芝英, 의사 朴永勳의 아내) △고혜영(高蕙英, 조선소 사장 高昌基의 아내) △김보배(民戰조사부장인 鄭相朝의 아내) △양청열(梁淸烈, 邑부녀동맹 부위원장. 민족청년단 창설멤버인 文奉澤의 아내) △이순실(李順實, 도청 金王辰 과장의 아내) △이순손(李順孫) △최정숙(崔貞淑, 의사. 최원순 법원장의 딸. 제주도교육감 역임) △김이환(金二煥, 제주도 부녀동맹 위원장) △고인식(高仁植, 제주읍 부녀동맹 위원장) △한여택 △홍종춘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일부를 즉결 처분한 자가 바로 탁성록이다.
또 강상유(姜相幽)를 강제로 함께 살다가 살해하는 등 패륜성을 그대로 나타냈다. 제주읍 월평리 강상유는 명문가 집안에 시집을 갔으나 4․3 당시엔 홀로 된 상태였다. 얼굴이 아주 고왔다. 탁성록이 강제로 그녀를 범한 후 함께 살았는데 어쩐 일인지 탁성록이 그녀를 죽여버렸다.
강상유는 오빠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산 쪽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강상유는 탁성록이 자신을 범해 함께 살게 되자 정보 등을 빼내 무장대 쪽에 전달했고 이것이 발각돼 처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강상유는 당시 사회활동을 하던 여성들과 같은 그룹인데다가 그녀의 오빠 강상호(姜相鎬)는 일제시대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다. 일제 때 와세다대 경제학부를 다녔다. 그는 특히 일본공산당 관서지구 책임자로 활동했다. ‘조천에는 김명식(金明植), 제주읍에는 강상호(姜相鎬)’란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는 일본경찰에 잡혀 9년형을 받았다. 출옥후 기인(奇人)처럼 생활했다. 겨울철에 화분 속에 씨앗을 뿌린 후 싹이 트라고 밑에서 불을 때는가 하면, 마루 널판을 뜯어내 만든 엄청나게 큰 ‘게다짝’을 신고 다녔다.. 해방 후에도 일체 사회활동을 삼갔다. 건준에서도 그를 영입하려 했지만 관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미친 줄 알았다.
▲ 1930년대 음반레이블들, 오케, 빅터, 콜럼비아 등이 보인다.
탁성록은 대중음악가
4·3학살자 탁성록이 대중음악가였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인간 이성이 마비된 냉혈한 학살자가 인간감성에 호소하는 음악을 했다는 것이 너무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콜롬비아 레코드사 전속의 대중가요 작곡가였으며 ‘탁성록 경음악단’을 이끌고 진주 등지에서 콩클대회가 열릴 때마다 출연활동을 했던 예술가였다.
이처럼 대중음악가였던 탁성록은 음악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해군군악대 창설에 참여하면서 국군장교로 특채되었던 것이다.
‘꽃같이 그리던 그 얼굴 더듬고/ 봄 하루 외로이 지내는 내 설음/ 언제나 또다시 네 이름 새겨서/ 다 묵은 추억에 이 밤을 세울까// 마음에 내 고향 가버린 옛날을/ 노래에 취하여 미처나 버릴까/ 내 노래 찾아// 사랑도 떠나고 봅꽃도 저버려/ 밤마다 맺히는 눈물의 곡절에/ 마음의 장식도 쓸쓸히 마쳐서/ 이 세상 뱃길을 내 홀로 떠나리// 이슬에 깊은 밤 네 모양 사모해/ 풀잎을 헤매여 내 노래 찾으리/ 내 노래 찾아’-노래가사 「어둠의 세상」(탁명록 편곡/ 팽환주 작사)
「어두운 세상」의 원곡은 저 유명한 'Gloomy Sunday'이다. 헝가리 노래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듣고 자살을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노래이다. 「어두운 세상」이 녹음된 해는 1937년이고, 노래를 부른 사람이 바로 탁성록이다. 원래 가수는 아니고, 주로 작곡과 편곡 쪽으로 활동을 했고, 이 곡이 정말 마음에 들었었는지 이 곡 한 곡만 녹음을 남겼다. 1930년대 초반 곡들을 보면 편곡이 모두 일본 사람으로 되어 있고, 연주한 악단도 '일본 컬럼비아 관현악단', '일본 컬럼비아 재즈악단'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데, 「어두운 세상」을 보면, '리갈 문예부 편곡', '리갈 관현악단' 연주로 되어 있다.
‘수양버들 피리에 봄도 늙는데/ 가야금 줄에 하소하던 논개의 죽은 넋이/ 칠백 리 남강 물결 속에 목메어 우는 듯/ 촉석루 무슨 말 할 듯 야속해 웁니다.// 수양버들 피리에 봄도 늙는 듯/ 허물어진 서장대 달빛만 밝게 비치네/ 칠백 리 남강물결위에 그림자 지우며/ 천만년 풀지 못한 설움에 젖었네’ - 「논개의 노래」 노래가사(탁성록 작사/작곡)
「논개의 노래」는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논개의 마음을 남강과 촉석루에 반영하여 그린 음악작품이다. 진주시민의 애향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작되었던 ‘진주의 노래’ 중의 하나로 탁성록이 작사 및 작곡하였으며, 우판용이 노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눈을 피해 가면서 민족적인 애수와 서러움을 노래한 진주지역의 대중가요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가요작곡에서는 이재호(李在鎬), 탁성록(卓星錄), 이봉조(李鳳祚), 백영호(白映湖), 이한필(李漢弼) 등과 가수로는 남인수(南仁樹) 등이 있다.
다음은 「광야의 달밤」 노래가사이다.
‘끝없는 광야의 지평선에서/ 갈밭 속을 불어오는 깊은 가을 찬바람/ 광야에 달이 뜨며는 눈물만 흘러/ 가고져 하는 그린 내 공향은 육로 이천리// 지나간 그 시절 하도 그리워/ 오늘밤도 홀로 누워 옛노래를 부르네/ 광야에 달이 뜨며는 꿈길을 밟아/ 가고져 하던 그린 내 고향을 다녀오는 몸’ -노래가사 「광야의 달밤」 (이하윤 작사/ 탁성록 작곡)
다음은 「유랑의 곡예사」 노래가사이다.
‘팔다리 피곤하다 이슬도 차다/ 흘러가는 신세라 한숨 무거운데/ 고향 그린 무리들 눈물만 흘리고/ 밤 깊은 이 거리 노래만 처량쿠나’-「유랑의 곡예사」(이하윤 작사/탁성록 작곡)
그 외 탁성록이 발표한 노래들은 대중가요 「제주도 아가씨」(부평초 작사/탁성록 작곡), 대중민요 「낙동강의 애상곡」(이하윤 작작/ 탁성록, 천지방웅, 유종섭 작곡), 유행가 「애수의포구」(이하윤 작사/탁성록, 인목타희웅, 김인숙 작곡) 등이 있다.
▲ 김관후 시인·소설가.
‘동백꽃 피는 달빛에 잠든 섬/ 물결에 자라난 제주도 아가씨들/ 뒷모양 긴댕기 초록치마에/ 섬노래 부르면 고깃배 돛 우에 물새가 우네// 동백꽃 피는 안개에 잠든 섬/ 물결에 떠도는 제주도 아가씨들/ 업수건 옥색깃 분홍저고리/ 섬 속의 긴긴 밤 달아래 모여서// 동백꽃 피는 노래에 잠든 섬/ 물결에 깃드린 제주도 아가씨들/ 저우대 저멀리 시집간다면/ 뱃머리 붓잡고 상산과 이별을 섧다고 우네’- 노래가사 「제주도 아가씨」 (부평초 작사/탁성록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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