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8

은근히 5.16 쿠데타를 원했던 미국 이재봉 2018

은근히 5.16 쿠데타를 원했던 미국


이재봉의 평화세상
1996년부터 원광대에서 주로 미국정치와 평화연구 북한사회와 통일문제 등을 강의해왔고 1999년부터 <남이랑 북이랑 더불어 살기위한 통일운동>을 전개해왔다. 2014년 현재 원광대 사회대학장 및 한중정치외교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쓰거나 번역한 책으로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요한 갈퉁 지음) <두눈으로 보는 북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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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2018-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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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외교문서에 없는 5.16 쿠데타 기록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글쓴이 : 이재봉 날짜 : 2018-05-26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1)

1. '5.16쿠데타' 명칭에 관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즉각 정부를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는다는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한 것이다. 아울러 1년 전의 '4월 혁명'은 '4.19의거'로 깎아내렸다.



'5.16혁명' 또는 '5.16군사혁명'이 '쿠데타' 또는 '군사정변'라는 올바른 명칭을 갖게 된 것은 한 세대가 흐른 뒤였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펼치면서 '사월혁명'과 '5.16쿠데타'를 복원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5.16군사정변'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저항과 반동도 일어났다. 1997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 생기면서다. 1979년 죽은 박정희의 인기가 전직이든 현직이든 어느 대통령보다 훨씬 높았고, 박정희 독재 아래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인제 대통령 후보까지 박정희와 닮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5.16쿠데타의 주역으로 박정희의 조카사위이자 박근혜의 사촌형부인 김종필은 "5.16이 쿠데타나 혁명이냐"는 질문에 "영어로는 쿠데타고 우리말로는 혁명"이라는 명언 겸 궤변(詭辯)을 남겼다.



그는 1961년 미국의 중앙정보국 (CIA)을 본떠 지금의 국가정보원인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제1대 부장을 지내고, 1963년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이름을 합친 민주공화당을 만들어 제1대 당 대표 (당의장)를 맡았으며, 1970년대 초 박정희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고,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오른 특이한 인물이다.



박근혜는 2007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아버지의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치켜세웠다. 201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선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했다가 부정적 여론이 일자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킨 결과를 가져왔다"며 물러서기도 했다.



이런 박근혜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자 '쿠데타'가 사라지고 '혁명'이 되살아났다. TV 방송에서 '군사혁명'이란 말이 나왔다. 총리나 장관 후보들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야당 의원들이 '5.16이 쿠데타인지 혁명인지' 물으면, 후보들은 답변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교육부장관 후보들도 그랬고, 교수 출신 장관 후보들도 소신 없긴 마찬가지였다.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관련해 2017년 12월 구속 기소된 이병기 전 국가정보원장이 2014년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5.16을 쿠데타라고 소신껏 답변했다가 청와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는 사실이 2018년 재판 과정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www.ko.wikipedia.org






2. 5.16쿠데타에 관한 미국 정부 자료와 미국의 역할에 관한 연구



5.16쿠데타에 관한 미국 정부의 외교문서는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자료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외교문서집의 한국 부분에 1961년 4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다. 5.16쿠데타에 관한 미국의 역할을 자세히 밝힐 수 없게 된 것이다.



국무부가 30여 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비밀 분류에서 풀어 펴내는 외교문서집은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 결정과 외교활동에 관한 "철저하고 정확하며 믿을만한" 공식적인 역사 기록이다.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취지로 펴내는 것이다. 당시 기록을 공개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고칠 수는 없다. 그러나 국익을 해칠 수 있거나 관련자의 신변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문서는 부분적으로 내용을 삭제하기도 하고 통째로 빠뜨리기도 한다.



특히 중앙정보국은 매우 민감하고 보안을 지켜야 할 기록을 쉽게 공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월혁명과 미국의 개입'을 보여주는 자료의 한국 부분에서는 국무부 역사편찬실이 요구한 문서 가운데 1.2%가 비밀 해제되지 않았고,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을 다룬 의 한국 부분에서는 5.9%의 문서가 공개 보류된 배경이다.



이런 경우엔 사건 전후의 문서를 바탕으로 추정하거나 사건 관련자들의 회고록과 증언 등을 보조 자료로 삼아 조금이라도 더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다. 물론 사건 관련자의 회고록이나 증언에는 잘못된 기억이나 의도적 왜곡이 곁들여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런 탓인지 5.16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나 대응 전략을 다룬 연구결과가 많이 출판되지 않은 듯하다. 먼저 정치학자 김세진이 1971년 미국에서 (한국 군사혁명의 정치)라는 책을 펴냈다. 5‧16쿠데타에 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분석을 담고 있다.



쿠데타의 배경을 설명하며 미국의 역할에 관해 1970년 무렵까지 널리 통용되던 두 가지 견해를 간단하게 소개한다. 첫 번째 견해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의 동의 없이는 군사쿠데타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지원했으리라는 한국 지식인들의 추리다. 두 번째 견해는 미국이 주한미군사령부를 통해 5.16쿠데타를 진압하려 했지만 윤보선 대통령의 반대로 어쩔 수 없었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이다.



언론인 이상우는 1984년 펴낸 <제3공화국 외교비사>에서 미국이 "한국의 정치과정을 규정하는 단순한 요인의 하나가 아니라 한국의 운명 그 자체를 결정지어 온 배경"이라며, "해방 후 역대 한국정권의 흥망기에도 결정적인 작용을 해온" 미국의 역할을 취재기자의 눈으로 살펴본다.



다양하고 풍부한 취재자료를 이용해 긴박하게 펼쳐졌던 1961년 5월 16일 전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추적하고 있다. 첫째, 미국이 한국에서 어떤 형태의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았지만 누가 언제 일으킬지는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린(Marshall Green) 주한 미국 대리 대사와 매그루더(Cater B. Magruder) 주한 미군사령관이 장면 정부를 지지하며 쿠데타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셋째, 장면 총리는 잠적해버리고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진압을 반대하는 가운데 이한림 제1야전군사령관은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넷째, 5월 17일 아침 매그루더는 구체적인 쿠데타 진압 작전을 세우고 주한 미8군에 임전 태세를 갖추도록 했지만, 그날 밤 워싱턴으로부터 작전을 취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케네디 (John F. Kennedy)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 책임자들이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쿠데타 주동자들의 정체와 그들의 목표를 궁금해하며, 특히 공산주의 활동에 관련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적 배경에 의혹을 품었다.



그러나 쿠데타 주동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반공 친미적"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쿠데타가 비합헌적이지만 미국 정부에 적대적 정권이 들어서지 않으리라고 판단했으며, 이미 한국의 대세가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해 쿠데타를 인정하고 말았다.



정치학자 손호철은 1991년 펴낸 <한국정치학의 새 구상>에서 "5.16쿠데타를 재조명"했다. 실바(Peer De Silva) 당시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이 쿠데타 음모계획을 제보 받아 미국대사관과 한국정부에 알렸으나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증언한 내용 등을 바탕으로 5.16쿠데타의 발발에 미국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분석한다.



언론인 조갑제는 <월간 조선> 1991년 12월호에 '미국대통령 기밀문서 속의 박정희와 케네디'라는 글을 발표했다. 1980년대에 비밀 해제된 1960년대의 미국정부 기밀문서들을 바탕으로 미국이 5.16쿠데타 모의를 사전에 탐지하지는 못했지만 사후에 신속하게 대응한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이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의 지도력에 회의를 갖고 "망해가는 정부"와 운명을 같이 하지 않겠다는 계산을 재빨리 내렸다고 주장한다.



정치학자 박명림은 1996년의 공저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에서 '제2공화국 정치균열의 구조와 변화'라는 글을 통해 "미국의 소극적 방임 또는 무개입"이 5.16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외교문서집을 근거로 미국이 늦어도 1961년 4월 박정희와 이범석이 각각 주도하는 쿠데타 음모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박정희는 1960년 2월부터 쿠데타를 준비했고, 사월혁명 이후 수차례나 쿠데타를 기도했으며, 이러한 쿠데타 음모가 서울에서는 "널리 알려진 소문난 비밀"이었는데 미국이 이를 몰랐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박정희를 지속적으로 주시하고 추적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경고하거나 저지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언론인 권영기는 <월간 조선> 1996년 12월호에 '장도영, 쿠데타 음모 알고도 장면 총리에게 은폐'라는 글을 발표했다.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외교문서집, 실바의 1978년 회고록, 장면의 1966년 증언, 장도영의 1984년 회고록, 박정희의 1961년 증언, 김종필의 1986년 증언 등을 토대로 5월 16일 전후의 상황을 추적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중앙정보국은 1961년 4월 장면 정부를 뒤엎으려는 2개의 쿠데타 음모가 추진되는 것을 파악했다. 하나는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이, 다른 하나는 이범석과 민족 청년단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특히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는 한국군부와 학생 그리고 개혁가들의 지지를 받고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둘째, 장도영은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를 훤히 알고 실바와 자주 만나 이에 대해 의논하는 한편, 장면에게는 고의로 쿠데타 정보를 은폐(隱蔽)하고 그에 대한 수사를 방해했다. 셋째, 미국은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날 주한미군사령관 지휘 하의 진압작전은 내정간섭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사실상 쿠데타를 인정했다.



재야 사학자 김상구는 최근 2017년 12월 <5.16청문회>를 펴냈다. "누구나 알고 있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쿠데타"라는 부제가 붙은 760쪽의 방대한 저서다. 프롤로그에서 중앙정부국장을 지낸 덜레스(Allen W. Dulles)가 "내가 재임 중 중앙정보국의 해외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이 혁명(5.16쿠데타)"이라고 말한 대목을 소개하며, "미 군부 정보기관의 지원 아래 5.16쿠데타가 진행되었고, 쿠데타 후 CIA, 미 국무성, 백악관이 승인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미군은 한국 현대사에 깊숙이 개입해왔다. 모스크바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한국전쟁과 정전, 사월혁명과 민주당정권의 출범과 몰락 등은 대개 미군부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5.16쿠데타도 마찬가지다"라고 결론 내린다.



위에서 살펴보듯,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비슷한 자료를 갖고도 조금씩 다른 주장이나 분석을 내놓았다. 대체로 학자들은 역사를 이론적 틀에 꿰어 맞추려 하기 때문에 숲을 보려는 측면이 강하고, 언론인들은 역사를 사건 중심으로 파헤치려 하기 때문에 나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다고 할까. 필자는 국무부가 공개한 비밀 외교문서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5.16쿠데타와 미국을 역할'을 좀 더 깊이 파헤쳐보고자 한다.





글로벌웹진 NESROH 칼럼 ‘이재봉의 평화세상’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lj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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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5.16 쿠데타를 원했던 미국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2)


글쓴이 : 이재봉 날짜 : 2018-05-26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3. 사월혁명 이후 5.16쿠데타까지 한국의 상황과 미국의 대응



(1) 민족통일운동과 반미감정

1960년 7.29 총선에 따라 들어선 장면 내각과 미국을 가장 곤란하게 만든 것은 4월혁명의 영향으로 불붙은 민족통일운동과 반미감정의 확산(擴散)이었다. 1960년 6월 재미동포 김용중과 일본에서 귀국한 김삼규가 통일 논의에 불을 붙였다.

이 가운데 김삼규는 1948년부터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내며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다 1952년 일본으로 쫓겨가 평화통일문제를 연구해온 터였다.

7.29 총선을 계기로 진보 정당과 사회단체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된 통일 논의는 곧 언론과 문단 및 학원으로 폭넓게 확산되었다. 대부분의 통일론은 자주와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교류나 중립화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 자주는 외세의 배격을 의미했고 이의 핵심은 주한미군 철수였기 때문이다.

1960년 9월 3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만들어졌다. 11월부터는 대학생들도 통일 논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장면은 11월 4일 정부 정책과 다른 통일운동에 대해 선도책을 펴되 과격한 행동은 법에 따라 처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국무부는 다음날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통일을 달성한다는 결의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혁신세력과 학생들의 통일 논의는 중단되지 않았다.

11월 16일에는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학내 분규와 관련해 미국인 이사장과 총장 서리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외치며 미국대사관 앞에서 반미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나라와 학원의 민주화는 달러가 보증해 주지 않는다"며 "달러가 가져오는 노예근성"부터 막아야 한다는 결의문까지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운동은 날로 확산되었다. 1961년 초까지 전국 거의 모든 대학교과 20여 개 고등학교에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었다. 사대당을 비롯한 혁신세력은 여전히 한반도 중립화통일을 주장하거나 남북교류를 촉구했다.

19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 최초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을 불러왔다. "양키 고우 홈!"이란 구호도 등장했다. 진보적 정당과 사회단체 그리고 대학생들은 이 협정이 한국의 경제적 예속(隷屬)을 제도화하며 미국이 한국 내정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도록 이끄는 불평등 조약이라며,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이 협정의 즉각 철회와 비준 거부를 요구했다. 이와 아울러 주한미군부대 종업원들은 2월 중순부터 한미행정협정 (SOFA) 체결을 촉구하는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2) 장면 정부에 대한 미국의 불만




1960년 8월 19일 총리로 인준된 직후 윤보선 대통령(왼쪽)과 악수를 하고 있는 장면 총리
www.ko.wikipdia.org

자주를 내세운 통일운동은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이익에 전적으로 배치되었고, 반미감정의 확산은 미국에 긴장과 불안을 안겨주었다. 미국 정부는 미국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며 미국의 정책에 우호적인 장면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자주적 통일운동과 반미감정의 확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그에게 회의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의 정세 불안이 지속되면 혁명 세력이 진출하고 사회주의 세력이 강화할 수 있으리라 우려하면서, 지도력과 결단력이 부족한 장면이 한국의 정치안정과 미국의 안보이익을 지켜줄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면의 지도력에 관한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됐다. 매카노기는 장면이 우유부단(優柔不斷)하며 무능하다고 평가하며, 장면 정부가 여러 가지 면에서 취약하고 민주당이 과거의 자유당처럼 부패해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매카노기는 주한미국대사 임기를 마치면서 1961년 4월 11일 한미경제협정 및 한미행정협정 문제에 따른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을 국무부에 보고했다. 미국이 장면의 지도력과 관련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장면이 성격상 강력한 지도자가 아닌데 그의 스타일을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미국은 그가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지속적으로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카노기는 "특히 이러한 도발적인 시기" 또는 "준 비상시"에 장면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평가하며, 그에 대한 미국 관리들의 자문이 더욱 강력하게 행해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 대한 원조를 담당한 미국 국제협력국(ICA) 기술원조 프로그램 책임자 휴 파알리 (Hugh Farley)는 백악관에 제출한 "1961년 2월의 한국 상황"이란 보고서에서 당시의 한국을 "병든 사회"로 단정했다. 한국사회 전반에 "뇌물과 부패와 사기"가 만연한 가운데 정부의 부패 때문에 4월혁명이 완결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한국 군부가 "미국의 치밀한 지도 아래" 정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최근의 반미데모와 관련해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적극 간섭할 것을 건의했다.





(3) 쿠데타 음모와 미국의 대응



4월혁명 직후인 1960년 6월부터 한국에서 다양한 쿠데타 소문들이 나돌았다. 미국은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장면 집권 3개월 만에 군부에 의한 정권교체를 막연하게나마 원했던 것이다.



1960년 11월 22일 중앙정보국, 국무부,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3군통합 합동참모본부의 정보기관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한국에 대한 전망 보고서는 당시엔 군사쿠데타가 성공할 것 같지 않다고 믿었다. 한국군부가 민간정권을 대체하려면 한국 상황이 더 악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알리도 앞에서 소개한 "1961년 2월의 한국 상황"이란 보고서에서 미국의 입장은 군사쿠데타나 "위험하고 가능성이 희박한" 극좌 혹은 극우 세력의 결합 말고는 장면 정부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것 같다고 했다. 미국의 정보 책임자들과 대한 원조 책임자 모두 장면 정권의 교체를 바랐던 것이다.



한편, 중앙정보국은 늦어도 1961년 4월 박정희가 주도하는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4월 21일부터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본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덜레스 국장은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에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의 한국 부분에 1961년 4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는 것과 겹치는 대목이다.





주제 : 1961년 4월 21일부터 26일까지 중앙정보국의 한국 쿠데타 관련 보고



(1줄 미만 삭제) 중앙정보국이 박정희 소장에 의한 한국에서의 쿠데타 계획에 관해 4월 21일부터 다음과 같이 보고 했음.



4월 21일 : (1줄 미만 삭제) 한국정부를 뒤엎으려는 두 개의 쿠데타 중 하나는 2군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고 있음. 다른 하나는 이범석과 민족청년단원들이 주도하고 있음. 계획은 사단장들을 포함해 한국육군 전체에서 논의되고 있음. 육군 지도자들은 현 정치인들이 부패하고 나약하다고 보며 군부가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피해 받아온 상황을 그들이 초래하거나 방치했다고 믿음.



4월 21일 : (1줄 미만 삭제) 군사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요약. 명백한 위협이 있음. 그러나 정치가 더 안정되고, 폭력과 사회혼란이 없으며, 경찰력이 강해지면 쿠데타 시도는 저지될지 모름.



4월 23일 : (1줄 미만 삭제)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쿠데타를 논의하고 계획하는 중요한 집단이 있음. 그들은 대부분 거칠고 조급하며 단호할 뿐만 아니라 신속하고도 폭력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판단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믿음.



4월 23일 : 이 음모는 육군과 학생 그리고 개혁가들이 지지하고 있음. 지도자는 박정희 장군으로 보이는데 6관구사령관 서종철 장군도 가까운 지지자임. 군부 지지자들에 대해 상세하게 나와 있음.



4월 24일 : 군부 음모에 대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견해. 박정희를 체포하고 싶지만 증거가 불충분함. 체포가 쿠데타를 촉발하게 될지 모른다고 믿음. 이범석과 민족청년단이 쿠데타를 지지할지 모른다고 믿음.



4월 25일 : 한국 육군방첩대가 쿠데타를 수사하고 있음. 만약 쿠데타가 4월 26일 시도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좋은 때를 기다릴 것임. 장도영에 따르면, 장면은 4월 24일까지 쿠데타를 모르고 있지만, 한 신문발행인이 4월 25일 그에게 알려줄 계획임.



4월 25일 : (1줄 미만 삭제) 4월 24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1시간 동안 만남으로써 쿠데타에 관한 정보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 자발적으로 제공되었음.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즉시 보고될 것이며, 그러면 매그루더는 아마 장면과 이 일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음. 장면은 박정희가 자신에게 일주일 전에 얘기했다고 밝혔음. 장면은 쿠데타가 즉시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말함.



4월 26일 : 장면 총리는 육군내의 불만 집단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소문을 알고 있음. 이러한 소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상황이 결코 위험하지 않다고 믿음. 그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직무 수행에 만족함. 장도영이 강력하고 유능하며 미군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믿음. 그는 장도영을 2년 임기 내내 유임시키려고 계획함.





이와 관련해 당시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이었던 실바는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국지부는 쿠데타가 일어나기 며칠 전 지부 요원과 가까이 지내는 박정희의 측근 참모를 통해 알았다. 나는 매카노기 대사에게 알렸지만, 그는 이 보고를 가늠하지 못하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며 장면에게 알리도록 했다. 나는 출처를 대지 않고 장면에게 거사 날짜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군사쿠데타가 계획되고 있다고 알렸다. 그는 이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군사쿠데타에 관한 다른 소문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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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3)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글쓴이 : 이재봉 날짜 : 2018-05-26 (토) 04:44:43

1년만에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장면총리


4. 5.16쿠데타 발발과 미국의 대응










장면 총리(왼쪽)와 윤보선 대통령 www.ko.wikipedia.org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은 그날 상황을 분석해 렘니처 (Lemnitzer) 합참의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경 매그루더 사령관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장도영은 미군 헌병들이 한국해병대를 막아주도록 요청했지만 매그루더는 거절했다.



매그루더의 요청으로 장도영이 6시 30분경 그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장도영은 자신이 쿠데타군의 일원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지만,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쿠데타군과 협상하기를 원했다.



장도영은 군사령관들이 쿠데타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해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했으나 한국군 부대를 동원하기는 꺼려했다. 장도영은 박정희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대통령에게 자신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해 계엄령을 선포하도록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매그루더는 10시 18분 미8군 공보처를 통해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모든 병력이 합법적인 장면 정부를 지지하기를 유엔군사령관 직권(職權)으로 요구했다. 한국군 수뇌들에게는 통치권을 즉시 정부 당국에 반환하고 군내 질서가 회복되도록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해주도록 요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그린(Green) 주한미국대리대사는 유엔군사령관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미국이 합법적인 한국정부를 지지한다고 명백하게 밝힌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매그루더의 성명에 이한림 제1군사령관은 한국정부에 충성하겠다고 발표했다.



10시 30분경 장도영은 윤보선 대통령과 집에 연금된 국방부장관을 방문했다.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 및 쿠데타 저지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국방부 장관도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 동원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11시 15분 최경록 제2군사령관이 매그루더와 통화하면서 자신은 정부에 충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시간으로 16일 아침 렘니처는 매그루더에게 보낸 답신에서 캐나다를 방문하고 있는 케네디 대통령이 매그루더와 그린의 성명을 승인할 것인지 문제라며 한국 내정에 지나치게 휘말리지 말고 더 이상의 성명은 피하라고 충고했다.



국무부도 워싱턴 시간으로 15일 아침 5시 21분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과 매그루더가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에 그린 대리대사가 동의했다는 사실을 주한미국대사관으로부터 보고받았다. 그리고 워싱턴 시간으로 16일 밤 10시 45분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한국에서 어떠한 이데올로기 문제가 개입되지 않았을지라도, 쿠데타는 한국의 안정과 명예를 침해할 것이기 때문에 한미 양국의 이해에 반한다는 것이 국무부의 입장이다.



그러나 대통령과 군부 지도자들이 쿠데타 진압을 이상할 정도로 꺼려하고, 총리와 장관들은 숨어버렸기 때문에 장면 정부가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것 같지 않다. 지도자들의 무기력과 일반인들의 무관심이 장면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무부는 기다려보자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한국정부가 스스로 일어서길 기대하며, 앞으로의 전망에 거스르는 행동은 피할 것이다. 나아가 미국이 어쩌면 '패배한 내각(lost cabinet)'의 운명과 함께 한다는 인상을 더 주지 않을 것이다."



국무부가 주한미국대사관에 이처럼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충고한 것은 매그루더 사령관과 그린 대리대사가 전날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고 발표한 성명에 케네디 대통령이 불만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케네디는 그린이 자신의 재량권을 행사한 것은 승인했지만 더 이상의 논평은 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매그루더는 한국 시간으로 5월 17일 오전 11시 40분 렘니처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미국 육군방첩대가 길거리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40%가 쿠데타를 지지하고, 20%는 지지하면서도 시기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며, 40%는 반대한다. 장도영은 정부에 충성한다고 말하면서도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단호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중적이라는 징후(徵候)는 많다. 그는 서울의 변두리까지에도 병력 동원하기를 꺼린다. 그는 적어도 쿠데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을 갖고 있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입으로는 헌법 준수를 말하면서도 쿠데타를 정적인 장면을 제거하고 새 정부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고려하는 것 같다.



요약하자면 모든 권력자들은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최소한 반대는 하지 않는 것 같다. 반미나 친공 감정의 증거는 없다. 실제 지도자 박정희는 과거에 공산주의에 물들었고 이승만 정부에서는 공산주의자로 형을 받았던 강력한 장교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데 협력했고, 반공주의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쿠데타 동료들 중에서도 공산주의자나 반미주의자로 알려진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이한림의 제1사단은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병력이다. 그의 부대는 명령대로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장면이나 매그루더가 쿠데타 진압을 요청하면 그는 수행할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총리가 한국군들로 하여금 쿠데타를 진압하도록 한다면 매그루더는 그를 지지하도록 할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장 또는 국방부장관이나 합참의장이 반대해도 매그루더가 이한림에게 쿠데타 진압을 명령할 수 있다. 그러나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정부를 세우더라도 정부를 이끌 사람이 없고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매그루더는 제1사단에 쿠데타를 진압하도록 오직 그의 직권으로만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듯 장면은 4월혁명의 발발에 힘입어 미국의 기대와 지지를 받고 총리가 되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미국으로부터 외면당했다. 반면에 반공 친미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미국의 승인과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앞에서 밝혔듯, 내가 이 글의 주요 자료로 참고하고 있는 5.16쿠데타에 관한 미국정부 외교문서집엔 5.16 군사쿠데타를 앞두고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다. 이 점을 유념하며 '미국'을 적어도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으로 나누어 그 역할을 분석해보겠다.

글로벌웹진 NESROH 칼럼 ‘이재봉의 평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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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은 CIA의 ‘가장 성공적인’ 해외 공작?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4) 


글쓴이 : 이재봉 날짜 : 2018-06-01 

앞에서 거듭 밝혔듯, 미국정부 외교문서집인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63, 제22권'엔 5.16 군사쿠데타를 앞두고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다. 쿠데타 모의 및 준비 기간이랄 수 있는 1961년 4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의 외교문서에 대한 비밀을 전혀 해제하지 않은 것이다.

국무부 외교사 연구팀은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 국가안보위원회 등 대외정책을 다루는 부서에서 만든 기밀 외교문서에 대해 30여 년이 지나면 공개 여부를 검토한다.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취지로 공개하지만, 국익을 해칠 수 있거나 관련자의 신변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은 제외한다.

이 경우엔 어느 문서의 어떠한 부분에서 얼마의 분량에 대해 비밀을 해제하지 않는지 명시하는 게 보통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소개했듯, 앨런 덜레스 (Allen Dulles) 중앙정보국장이 1961년 5월 16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비밀 보고서에 괄호를 달아 "1줄 미만 삭제" 등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5.16쿠데타 직전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의 문서 전체를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 그 무렵 한국에서 급박한 정치 상황이 전개되면 서울의 주미한국대사관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워싱턴의 국무부와 중앙정보국 본부 앞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전문을 보내곤 했는데 34일간의 문서를 모두 비밀에서 해제하지 않은 것이다.



이야말로 미국이 5.16쿠데타에 적극적이고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얼마나 극심하게 개입(介入)했으면 쿠데타 구상이나 준비에서 발발까지 특정 문서의 특정 부분이 아니라 한 달 남짓 주고받았을 수십 통의 전문 가운데 단 한 건의 문서조차 공개하지 못하겠는가.



1960년 4월혁명에 의해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들어선 정부를 1년 뒤 폭력적이고 불법적으로 뒤엎은 군사쿠데타를 미국이 지원하거나 주도했다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자유와 민주를 앞세우는 미국의 위선을 드러냄으로써 불러올 국익 훼손을 막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리라는 뜻이다.

한편,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중앙정보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가 1964년 5월 BBC와 인터뷰하면서 자신이 중앙정보국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으로 5.16 쿠데타를 꼽은 것은 특이하다.




Allen Dulles
이하 사진 www.en.wikipedia.org


중앙정보국이 1947년 창설된 직후부터 특히 1950년대 '해외 비밀공작 황금기'에 요인을 암살하거나 쿠데타를 부추겨 정권을 전복(顚覆)시킨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공개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5.16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분석해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미국은 장면 정부가 전복되기를 원했다. 그 무렵 국무부와 주한미국대사관이 주고받은 전문에 따르면, 장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미국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지만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나약한 지도력은 세계적으로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 전후 한국을 강력한 '반공 보루'로 만들려던 미국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은 늦어도 1960년 6월부터 군사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960년 11월, 중앙정보국, 국무부, 국방부 등의 정보기관들은 "군부가 민간정권을 대체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한국 상황이 상당히 악화해야 하는데 지금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보고했다.



1961년 3월, 한국에 대한 원조업무 책임자 휴 파알리는 "뇌물과 부패와 사기"로 "병든 사회"에서 한국군부가 "미국의 치밀한 지도 아래" 정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군사쿠데타 외에는 장면 정부에 대한 대안이 없는 것 같다고 백악관에 보고했다.



셋째, 중앙정보국은 5.16쿠데타를 은밀하게 지원했고, 주한미군은 쿠데타를 진압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늦어도 1961년 4월부터 쿠데타 음모를 파악하면서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중앙정보국과 국방부는 쿠데타 주도자와 지지자들의 명단과 성향까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앨런 덜레스 중앙정보국장은 1961년 5월 5일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한국의 불안한 정황(情況)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있었는데도 쿠데타에 대한 보고를 하지 않다가,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때까지의 정보를 한꺼번에 보고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5월 16일 새벽 3시경 쿠데타가 시작될 때부터 자신의 직권으로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었지만, 쿠데타를 진압해달라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면서 7시간이나 지난 10시 18분 미8군 공보처를 통해 모든 미군병력은 합법적인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윤보선 대통령이 반대하고 장면 총리가 숨어 버렸기 때문에 병력동원을 자제했다는 변명을 덧붙였다.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옹호할 수 없었기에 부린 억지였다. 매그루더 사령관의 입장에 동의하며 미국이 합법적인 한국정부를 지지한다고 밝힌 그린 대리대사의 성명도 위선(僞善)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16일부터 3일간 계획으로 캐나다를 국빈방문하고 있었기에 쿠데타에 대한 중앙정보국장의 보고는 백악관 국방담당보좌관을 거쳐 캐나다로 전달되었다. 대통령이 5월 16일부터 워싱턴을 비울 계획이 오래 전부터 잡혔기 때문에 중앙정보국이 쿠데타 주도자들과 거사 날짜를 그 날로 잡았으리라는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대통령이 반대하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벌어 상황을 뒤집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마침 케네디는 매그루더와 그린의 위선적 성명에도 내정간섭의 모습을 보이지 말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미국 대통령도 장면 정부의 교체를 내심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중앙정보국장이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으로 5.16쿠데타를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1961년 케네디대통령이 덜레스국장에게 '내셔널 시큐리티'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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