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7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박찬승 회장

“6·10으로 항일 학생운동 본격화…‘100년 기념비’ 세울 터”



“6·10으로 항일 학생운동 본격화…‘100년 기념비’ 세울 터”
[짬]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박찬승 회장
강성만기자수정 2025-11-06 

박찬승 회장이 인터뷰 뒤 사업회에서 발간한 ‘6·10만세운동 사료집’ 3권을 앞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강성만 선임기자

“사업회에서 지난달 24일 7번째 학술대회를 했는데요. 알차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처음 학술대회를 할 땐 내용이 별로 없었거든요. 사업회가 그간 6·10만세와 관련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사를 모은 자료집을 3권 발간한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9월5일 사단법인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 회장에 뽑힌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말이다. 나종일 초대회장과 박 교수 등 서울 중앙고와 중동고 동문과 유족 중심으로 2019년 꾸려진 사업회는 1년 만에 일제 강점기 3대 국내 독립운동으로 꼽히는 6·10만세운동의 국가 기념일 지정을 이뤄냈다. 2021년 첫 정부 주도 기념식이 열렸다.

사업회는 출범 이후 매년 6·10만세운동 주제로 학술대회를 했고 2023년부터는 당시 신문 기사를 묶은 자료집을 출간해왔다. 올해 말 시대일보 보도와 당시 검찰·경찰 문서 등을 모은 네번째 자료집을 낼 계획이다. 자료집 발간은 박 회장과 제자들이 맡고 있다.

사업회는 내년 6·10만세운동 100년을 맞아 학술대회를 좀 더 규모 있게 하고 만세운동이 있었던 공공부지에 기념비도 세울 계획이다.

지난 27일 서울 건대입구역 근처 연구실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10일 순종 인산일(장례일)에 연희전문과 중앙고보·중동학교 등 학생들이 장례 인파 속에서 독립 만세를 외친 사건이다. 이 운동으로 현장에서 학생 200여명이 체포되었지만 일제는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기 위해 대부분 석방해 11명만 옥고를 치렀다.

반면 이 운동을 기획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일제의 대응은 달랐다. 고려공산청년회(공청)에서 천도교 등 민족주의자들과의 항일 협동전선 구축을 위해 6·10만세를 기획하고 실행 책임까지 맡은 권오설 공청 책임비서는 만세운동 이틀 전 체포돼 일경의 잔혹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1930년 4월 옥사했다. 연희전문 학생으로 권오설의 집안 동생인 권오상도 만세운동 뒤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받고 후유증에 시달리다 불과 28살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3·1운동을 계승해 학생들 중심으로 독립 만세를 외친 점이죠. 한국인이 여전히 독립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한 게 가장 중요하죠.”

박 회장에게 6·10의 가장 큰 의의를 묻자 나온 답이다. “당시 천도교의 최린과 동아일보 계열을 중심으로 독립 대신 자치 운동으로 옮겨가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독립이 안 되니 차라리 자치운동 쪽으로 방향을 바꾸자는 거죠. 아일랜드도 그랬고 대만도 자치 운동을 하고 있다면서요. 이런 흐름에서 학생들이 우린 독립을 원한다고 못을 박았죠. (6·10) 1년 뒤 설립된 신간회도 자치 운동을 막기 위한 의도가 컸어요.”

그는 이어 “6·10 이후 학생운동의 조직화가 본격화했으며 이는 3년 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6·10 뒤 학생들이 독서회 이름으로 비밀결사를 만들어 사회주의 등 사상 학습을 하고 동맹휴학도 본격화합니다. 1927년과 28년이 동맹휴학의 피크(정점)였죠.”

그가 사업회에 참여한 데는 중앙고 동문이라는 학연이 작용했다. 그는 1972년 이 학교에 입학했다. 6·10만세 때 재학생 넷이 구속된 중앙고는 1960년대부터 학교에서 6·10만세 기념식을 열어왔고 1983년 교정에 기념비도 세웠다.

“2018년 여름에 당시 김종필 중앙고 교장 선생님이 동문인 역사 전공 교수들에게 연락을 해왔어요. 6·10만세운동 기념식을 중앙고에서만 여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정부 차원에서 기념식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이 요청 뒤 그와 사학자 주진오, 사회학자 조희연 등 동문 교수들이 나서 첫 학술대회를 열었고 이어 정부와 국회를 움직여 2020년 말에 국가기념일 지정을 이뤘다. “북한은 50년대부터 일찍이 6·10만세를 기념일로 지정했어요. 우리는 사회주의자들이 6·10에 많이 참여해서 그런지 그런 논의가 별로 없었죠.”

순종 장례일에 중앙고보 학생 등 결행
현장에서 200여명 체포되고 11명 옥고

2019년 중앙고 동문 등으로 사업회 세워
국가기념일 지정 이뤄내고 학술대회도
당시 언론 보도 모은 자료집도 3권 내
“6·10 가장 큰 의의는 독립 주장으로
송진우 등 자치론에 못박은 점이죠”

사업회는 설립 이후 매년 학술대회를 열어왔다. 가장 큰 성과를 묻자 그는 “6·10만세의 준비와 전개 과정이 훨씬 더 자세히 밝혀진 점”이라며 설명을 이었다.

“이번 학술 대회에도 권오설이 체포된 시점이 지금껏 알려진 7일이 아니라 8일 새벽 4시라는 논문이 제출되었어요. 우리가 낸 신문기사 자료집 등을 근거로요. 권오설과 권오상 등 6·10 관련자 다섯이 고문을 심하게 당해 경찰을 고소하는 등 사회적 파장이 컸다는 점을 밝힌 논문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일본 변호사가 조선에 와서 총독부와 경찰에 항의하고 일본 사회주의 계열 정당 노동농민당이 성명까지 발표해 고문 수사를 비판했더군요.”

앞으로 더 밝혔으면 하는 점이 뭐냐는 말에는 이렇게 답했다. “권오설이 체포되고 격문도 다 압수된 상황에서 공청 외곽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일부 간사들이 8일과 9일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6·10만세운동을 이끄는데요. 이 과정이 아직은 불분명해 더 규명할 필요가 있어요.”

‘민족주의 우파의 실력 양성 운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동북아역사재단이 2020년부터 내는 일제침탈사 총서 편찬위원장도 맡고 있다. 그간 연구총서 46권, 교양총서 40권이 나왔고 자료총서는 70권 이상 발간했다. 연구총서 중 하나인 ‘조선총독부의 조사와 통계’(서호철·2024)는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올해 월봉저작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 지배 전반을 학술적으로 처음 정리하는 이 총서 발간의 최초 제안자가 바로 그다. “뉴라이트 연구자들이 2019년 낸 ‘반일 종족주의’가 많이 팔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사실 우리는 해방 이후 한번도 일제 시대를 학술적으로 정리한 적이 없어요. 예전에는 연구 능력이 없어 못 했으나 이젠 연구 실적도 축적되었으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봤죠. 그래야 (‘반일 종족주의’ 같은) 이상한 책도 안 나오고, 설사 그런 책이 나와도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는 연구총서 1권인 ‘일제 식민지 조선지배의 성격’(2023)을 공저했다. 이 책을 위해 공저자들과 함께 일제의 식민 지배 성격을 영국과 프랑스 등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 정책과 비교 연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소수의 자국민을 보내 식민지를 간접 통치한 반면 일본은 70만명을 조선으로 보냈어요. 이 가운데 30만명이 관료나 경찰, 교사 등 통치 인력입니다. 그들이 조선에서 권력과 일자리 등 경제 이권을 다 가져갔어요. 자연히 조선 사람은 식민지 인으로서 차별받고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죠.”

그는 한국전쟁 전후 마을 단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살핀 책 ‘마을로 간 한국전쟁’(2010 초판, 2025 수정증보판)으로 2011년 한국출판문화상도 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군과 경찰의 민간인 학살에 초점을 맞추는 기존 연구 방향에서 벗어나 민간인들이 좌우로 나뉘어 학살에 가담한 실태를 파고들었다.

한국전쟁 전후 왜 그렇게 많은 민간인이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그는 “전쟁 전 사회 갈등이 심한 상태에서 갑자기 내전이 터진 탓”이라고 답했다.

“사회 갈등 중 가장 큰 것은 양반과 평민, 백정 등 신분 갈등이었고 그다음은 지주와 소작인 갈등이었죠. 신분제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당시에도 사람들 머릿속에는 신분 의식이 남아 있었어요. 일제시대 들어선 특히 지주와 소작인 갈등이 심해졌어요. 지주와 마름, 소작인 위계 체계가 강해졌죠. 부재지주가 늘면서 마름의 존재가 더 부각되었고 소작료는 더 올랐죠. 더구나 사람들 교육 수준은 낮았고요.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전쟁, 그것도 내전이 터지니 복수심이라고 하는 인간의 본능이 마구 터져 나왔어요. 남과 북의 국가권력은 자기들 목적을 위해 그들을 이용했고요.”

그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의 출발은 이승만 정권의 국민보도연맹원 처형”이라며 덧붙였다. “국민보도연맹원 처형 이후 좌익의 우익에 대한 처형, 우익의 좌익에 대한 처형으로 이어졌죠. 국군과 인민군이 교대되던 두 차례의 치안공백기에 가장 많은 희생이 발생했죠.”

민간인이 좌우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는 비극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지난 민주화 운동 역사를 무시할 수 없어요. 수십년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 의식이 상당히 높아졌어요. 지금 한국인은 한국전쟁 전후 사람들과 완전히 달라요. 교육 수준도 굉장히 높아졌어요. 이번 내란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보듯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과, 관철 의지나 역량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지역사나 마을사 연구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쓸 때 여러 마을을 돌며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구술증언을 들었다.

왜 마을사 연구가 중요할까? “서양이나 일본을 보면 성(도시) 중심 역사이지만 우리는 달라요. 한양은 물론 달랐지만 지역을 보면 읍성엔 향리(아전 등 하급 관리)들이 주로 살고, 양반과 평민들은 주로 성 밖에서 살았어요. 지역사회 역사와 문화의 중심엔 유력한 양반마을과 평민마을들이 있었어요. 이 마을들의 네트워크와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게 바로 지역사입니다. 우리 전통문화도 다 마을에서 이뤄졌어요.”

인터뷰 끝에 지난 한국 근현대사 공부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게 뭔지 물었다.

“우리 근현대사의 특징은 한마디로 하면 시련과 극복의 역사입니다. 시련이 거셌지만 잘 극복을 해왔습니다. 또 끊임없이 뭔가에 도전하고 성취를 해왔어요. 이 점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이 지금의 위치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죠. 저는 미래의 한국사도 비관보다는 낙관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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