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召天)은 없다
미주뉴스앤조이
입력 2024.10.25
개신교권에서는 죽음을 부고하면서 언제부턴가 소천이라는 정체 불명의 말을 쓰기 시작했다. 가톨릭에서 선종(善終)은 '착하게 살고 복되게 생을 마친다'는 뜻을 가진 선생복종(善生福終)에서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따라 죽음을 일컫는 가톨릭만의 용어로 자리잡았다. '선생복종'은 이탈리아의 선교사 로벨리가 1652년 베이징에서 간행한 한문 교리서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에서 나온 말이다. 개신교권이 선종처럼 ‘뭔가 있어 보이는’ 용어를 찾다가 소천을 채택한 듯 한데 일단 말이 안되는 단어다. 이탈리아 선교사도 아는 한문 문법을 모르는 작명이다.
강희자전(康熙字典)은 중국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의 칙명으로 편찬한 한자사전이다. 1716년에 완성된 이 사전에는 약 49000자와 그 글자들이 조합된 단어들이 나와있다. 여기에 나오지 않는 단어는 없는 단어다. 근대화 과정에서 들어온 낯선 단어들을 주로 일본에서 한자어로 조어했다. 예를 들어 물리, 화학, 민주주의 이런 단어들이 새롭게 만들어졌으므로 강희자전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소천은 18세기 이후에 들어온 단어에도 없다.
18세기 이후 들어온 한자어 어휘는 이한섭이 지은 ‘일본어에서 들어온 우리말 어휘 5,800’에 들어있다. 선종을 대체할 말로 굳이 ‘소천’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면 ‘소천을 받았다’ 는 편이 낫다.
기독교인에게는 명복을 빈다는 말도 옳지 않다. ‘명복(冥福)’이란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다. 불교 용어여서 옳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하고 어긋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죽음은 저승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이므로 받을 복과 상호 모순이다. 그런 점에서 ‘천국환송예배’도 신학에 맞지 않는 말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예수 재림시 이루어지므로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의 현장에서 천국 환송은 유가족 위로용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의 현장에서 종교적 표현을 쓰고 싶으면 차라리 ‘별세(別世)’를 쓰는 편이 좋다.
누가복음 9장의 ‘변화산상’이야기에서 예수와 모세, 엘리야가 나눈 말 중에 별세가 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31절)에서 별세가 사용되었다. 헬라어로는 Exodus다. 구약의 출애굽도 의미하고 죽는다는 뜻과 함께 출발하다는(depart)뜻도 있으니 딱 별세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작가의 책 ‘작별하지 않는다’의 영어제목은 ‘We do not part’다. Depart가 Part에서 나왔듯이 엑소더스도 탈(脫)을 의미하는 접두사 EX와 길, 여행을 의미하는 Hodos가 합친 단어다. 새로운 길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뜻의 ‘별세’, 아름답지 않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작가의 책 ‘작별하지 않는다’의 영어제목은 ‘We do not part’다. Depart가 Part에서 나왔듯이 엑소더스도 탈(脫)을 의미하는 접두사 EX와 길, 여행을 의미하는 Hodos가 합친 단어다. 새로운 길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뜻의 ‘별세’,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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