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최근 수정 시각: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박완서(정치인)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대한민국의 소설가 박완서 朴婉緖|Park Wan-suh | |
출생 | |
사망 | |
본관 | |
직업 | |
학력 | 경성매동공립국민학교 (졸업) 숙명여자중학교[6년제]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 / 중퇴) 서울대학교 (국문학 / 명예박사) |
배우자 | 호영진 (1925년 - 1988년; 사별) |
자녀 | 1남 4녀 |
종교 | |
데뷔 | 1970년 《나목》 |
수훈 |
1931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반남 박씨 집안의 1남 1녀 중 둘째로 출생했다. - 오창공파 부: 泳魯 조부: 胄陽
박완서가 3살 때인 1934년에 아버지가 맹장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빈 자리를 크게 느끼지 않고 자랐다. 특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완서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일본식 음독으로 보쿠엔쇼라고 불린 적은 있을지언정 이름을 고치는 일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8]
하지만 딸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던 어머니의 강력한 요구로, 1938년 개성에서 경성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 덕분에 동네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소학교부터 경성의 명문학교에 다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딸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던 시대인데도 어머니가 박완서의 교육에 열성을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어머니의 외사촌자매들은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았는데, 어머니는 어린 시절 자기와는 다르게 학교에 다니는 그 친척들을 무척 부러워했기 때문에 자기 딸만큼은 신교육을 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박완서의 아버지의 사망과 관련된 사연이 그 두 번째 이유인데, 사실 아버지의 사인인 맹장염은 그 시절 의학 수준으로도 수술만 받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런데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박완서의 할아버지가 병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침과 한약만으로 치료하기를 고집하다가 끝내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은 전부 시가(媤家)의 고루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치를 떨었고, 자식들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해방 1년전인 1944년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다음 해에 일제의 소개령으로 인해 개성으로 이사하여 호수돈고등여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고향으로 가 보니 어렸을 때 놀던 친구들이 위안부로 잡혀갈까봐 모두 서둘러 결혼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한다. 경성에서 살 때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성 학교와 지방 도시 학교 간의 환경적인 괴리가 꽤나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개성에서 살던 중 해방을 맞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숙명여자중학교[6년제]를 다니게 된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소설가 한말숙으로, 졸업 이후에도 절친한 사이를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박완서의 반 담임 교사가 소설가 박노갑 이었기에 문학적으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노갑은 그 시기의 어린 학생들이 쓰기 쉬운 감성적인 문장을 지양하고 사실적이고 경험이 실린 글을 쓸 것을 강조했는데, 훗날 박완서는 정작 그런 말을 들었던 고등학생 때는 스승인 박노갑의 소설을 읽으면서 참 재미가 없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 뒤 1950년 6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한 달도 못 되어서 6.25 전쟁이 발발한다.[10] 전쟁이 일어난 직후에는 서울이 조선인민군의 점령 아래에 있게 되었지만 박완서네 가족은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8월까지는 학교도 계속 다녔다. 당시 박완서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지만, 상황을 지켜보면서 점차 회의를 느끼고 학교에도 출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쟁으로 오빠와 숙부를 잃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가장으로서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에 들어선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이후 같은 건물을 사용한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일하다 같은 동화백화점 측량기사였던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인 호영진과 1953년 결혼했으며, 1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결혼한 뒤로도 독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글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8년 열린 박수근의 유작전을 보고 그에 대한 증언의 욕구가 치솟으면서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된다.
박완서가 3살 때인 1934년에 아버지가 맹장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빈 자리를 크게 느끼지 않고 자랐다. 특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완서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일본식 음독으로 보쿠엔쇼라고 불린 적은 있을지언정 이름을 고치는 일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8]
하지만 딸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던 어머니의 강력한 요구로, 1938년 개성에서 경성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 덕분에 동네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소학교부터 경성의 명문학교에 다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딸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던 시대인데도 어머니가 박완서의 교육에 열성을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어머니의 외사촌자매들은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았는데, 어머니는 어린 시절 자기와는 다르게 학교에 다니는 그 친척들을 무척 부러워했기 때문에 자기 딸만큼은 신교육을 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박완서의 아버지의 사망과 관련된 사연이 그 두 번째 이유인데, 사실 아버지의 사인인 맹장염은 그 시절 의학 수준으로도 수술만 받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런데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박완서의 할아버지가 병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침과 한약만으로 치료하기를 고집하다가 끝내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은 전부 시가(媤家)의 고루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치를 떨었고, 자식들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해방 1년전인 1944년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다음 해에 일제의 소개령으로 인해 개성으로 이사하여 호수돈고등여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고향으로 가 보니 어렸을 때 놀던 친구들이 위안부로 잡혀갈까봐 모두 서둘러 결혼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한다. 경성에서 살 때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성 학교와 지방 도시 학교 간의 환경적인 괴리가 꽤나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개성에서 살던 중 해방을 맞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숙명여자중학교[6년제]를 다니게 된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소설가 한말숙으로, 졸업 이후에도 절친한 사이를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박완서의 반 담임 교사가 소설가 박노갑 이었기에 문학적으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노갑은 그 시기의 어린 학생들이 쓰기 쉬운 감성적인 문장을 지양하고 사실적이고 경험이 실린 글을 쓸 것을 강조했는데, 훗날 박완서는 정작 그런 말을 들었던 고등학생 때는 스승인 박노갑의 소설을 읽으면서 참 재미가 없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 뒤 1950년 6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한 달도 못 되어서 6.25 전쟁이 발발한다.[10] 전쟁이 일어난 직후에는 서울이 조선인민군의 점령 아래에 있게 되었지만 박완서네 가족은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8월까지는 학교도 계속 다녔다. 당시 박완서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지만, 상황을 지켜보면서 점차 회의를 느끼고 학교에도 출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쟁으로 오빠와 숙부를 잃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가장으로서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에 들어선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이후 같은 건물을 사용한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일하다 같은 동화백화점 측량기사였던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인 호영진과 1953년 결혼했으며, 1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결혼한 뒤로도 독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글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8년 열린 박수근의 유작전을 보고 그에 대한 증언의 욕구가 치솟으면서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된다.
처음에 제가 시작한 거는 소설이 아니라 전기였어요. 박수근 전기를 써야겠다. 투고하게 된 것도 처음부터 <여성동아>였던 게 아니에요. 여성동아에서는 7월달에 여류장편소설 마감이 있고, 또 <신동아>가 있지요. 지금은 교양지도 많지만 그때 신동아가 아주 고급 교양지였습니다. 거기서는 논픽션 공모를 했어요. 그것이 5월이 마감인데, 이듬해 1969년이었을 거예요. 논픽션은 기럭지가 길지 않아요. 여류 장편은 1,200매 이상이어야 되는데 이거는 300, 400매만 해도 되고. 그래서 저기다 내야지 하고 쓰기 시작했어요. 써 보려고 하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는 거예요. 그냥 PX에서 그런 일 있었고, 같이 차를 마시면서 어딜 사냐, 창신동 살고.. 이런 얘기 외에는. 쓸 거라곤 나 같은 거한테 그렇게 막 취급받고 화가로서는 우중충한 데 앉아서 그리면서 얼마나 모욕스러웠을까, 고거 원고지 10장도 안 되는 거예요. 논픽션이면 그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다 있어야잖아요. 그런데 아는 것도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쓰다가 빗나가면서 내가 상상한 걸 보탤 적이 있어요. 그럴 때는 즐겁게 써져요. 원고지에다가 쓸 때니까 하루 대여섯 장만 써야지 했는데, 20장도 써지는 날이 있어. 보면 막 내가 보태는 거야. 고 다음날 계속해서 쓰려고 어제 거 읽어 보면, 이건 아닌 거예요. 진짜만 추리고 나면 뼈대만 남고. 말보다는 거짓말을 보태니까 잘 써진다 싶어요. 거짓말을 시키는 게 내 소질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쪼끔 어려운 말로 하면 상상력이죠. 사실에다 상상력을 보태야지 사실의 뼈대만 갖고 쓰는 건 난 도저히 재미가 없구나.
그런데 만약 논픽션에 냈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당선이 됐다가도 취소가 되는 거 아니에요? 거기 규정이 있어요. 논픽션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잖아. 그러면 허가받은 거짓말이라는 건 뭐냐. 픽션이 나에게 맞는구나. 아, 거짓말을 보태니까 이렇게 즐겁고. 쓰는 게 즐거워야 되잖아요? 그래 갖고 쓰던 걸 아주 파기를 해 버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날짜도 좋더라고. 내가 그 해, 1970년 초였을 것 같애요. 5월달에 낼려고 쓰던 거를 2,3월 됐을 때 다 찢어버리고는 느닷없이 소설로 바꿨어요. 그거는 1,200장이나 되고 마감은 7월이었습니다. 그렇게 안 나가던 붓이 방향 전환을 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빨리 써지는 거예요.
그렇게 써낸 글이 바로 박완서의 데뷔작,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나목>이었다. 실로 대단한 점은 처음 쓰는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습작도 퇴고도 없이 단 한 번에 장편소설 분량을 주욱 써 낸 글로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박완서는 당시 글을 쓰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첫째는 상금 50만 원을 타서 남편한테 나도 돈 벌어왔다고 자랑하고 싶다는 것과, 둘째는 딸을 잘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한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는 것. 고생만 하고 막상 공모에서 떨어지면 창피하니까 자식들 몰래 학교 간 뒤나 밤에 주로 글을 썼는데, 졸릴 때 자신을 격려해 준 것이 바로 그 50만 원과 어머니 생각이었다고 한다.
질문자: 처음 써 보는데 1,200매를 다 쓸 수가 있었어요, 선생님?
박완서: 그러믄요. 네.
질문자: 습작을 안 하셨잖아요?
박완서: 습작 안 해도 책 많이 읽으면 돼요.[11]
박완서는 그 때까지만 해도 부끄러운 기억이었던 PX 생활이 오히려 작가로서 이름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등 자신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가져다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다양한 작품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전쟁 당시의 상황을 다룬 나목과 목마른 계절, 중산 삶을 다룬 도시의 흉년과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작품을 비롯해 억압받는 여성 문제를 다룬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어진 욕망의 응달, 독립투사와 친일파의 자손 문제를 다룬 오만과 몽상, 자신의 인생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이자 대표작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을 발표했다. 말년의 작품들은 그 동안 갈고닦아 온 날카로운 안목과 글솜씨의 정수가 그득한, 이른바 노년문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을, 81년 '엄마의 말뚝 2'로 이상문학상을, 90년과 91년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상과 이산문학상을, 93년 중앙문화대상을, 같은 해에 '꿈꾸는 인큐베이터'[12]로 현대문학상을, 94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동인문학상을, 95년 '환각의 나비'로 한무숙문학상을, 97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대산문학상을, 99년 '너무도 쓸쓸한 당신'으로 만해문학상을, 2000년 인촌상을, 01년 '그리움을 위하여'로 황순원문학상을, 06년 호암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전쟁 때문에 졸업하지 못했던 모교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제의하여 받아들였다. 서울대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7번째. 박완서의 인사말 자녀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아들 위로 딸이 4명 더 있는데, 그 사람들 중 맏딸은 수필가 호원숙, 셋째 딸은 서울대 의대 호원경 교수다.
2008년 촛불시위 당시에 시위대와 정부 양쪽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양쪽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케이스.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정부를 믿는다고 발언하였고,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하여는 정부가 잘 설명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2011년 1월 22일, 경기도 구리시 자택에서 담낭암 투병 중 향년 79세로 사망하였다. 평소 자신이 죽은 후 찾아오는 가난한 문인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 당부했다고 한다. 묘는 남편과 아들이 묻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2011년 10월 20일, 탄생 80주년을 맞아 구글 두들이 만들어졌다.
이후 다양한 작품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전쟁 당시의 상황을 다룬 나목과 목마른 계절, 중산 삶을 다룬 도시의 흉년과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작품을 비롯해 억압받는 여성 문제를 다룬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어진 욕망의 응달, 독립투사와 친일파의 자손 문제를 다룬 오만과 몽상, 자신의 인생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이자 대표작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을 발표했다. 말년의 작품들은 그 동안 갈고닦아 온 날카로운 안목과 글솜씨의 정수가 그득한, 이른바 노년문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을, 81년 '엄마의 말뚝 2'로 이상문학상을, 90년과 91년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상과 이산문학상을, 93년 중앙문화대상을, 같은 해에 '꿈꾸는 인큐베이터'[12]로 현대문학상을, 94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동인문학상을, 95년 '환각의 나비'로 한무숙문학상을, 97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대산문학상을, 99년 '너무도 쓸쓸한 당신'으로 만해문학상을, 2000년 인촌상을, 01년 '그리움을 위하여'로 황순원문학상을, 06년 호암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전쟁 때문에 졸업하지 못했던 모교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제의하여 받아들였다. 서울대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7번째. 박완서의 인사말 자녀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아들 위로 딸이 4명 더 있는데, 그 사람들 중 맏딸은 수필가 호원숙, 셋째 딸은 서울대 의대 호원경 교수다.
2008년 촛불시위 당시에 시위대와 정부 양쪽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양쪽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케이스.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정부를 믿는다고 발언하였고,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하여는 정부가 잘 설명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2011년 1월 22일, 경기도 구리시 자택에서 담낭암 투병 중 향년 79세로 사망하였다. 평소 자신이 죽은 후 찾아오는 가난한 문인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 당부했다고 한다. 묘는 남편과 아들이 묻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2011년 10월 20일, 탄생 80주년을 맞아 구글 두들이 만들어졌다.
본래는 무교였으나 1984년에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다. 1988년 5월 11일, 남편이 63살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하고, 같은 해 8월 31일 아들이 사고[13]로 25살의 나이에 요절했다.[14] 이후 큰 슬픔에 빠져 묵주를 집어던졌다고 한다.[15] 따라서 이 때의 절망은 그야말로 극심했으며, 큰딸의 회고에 의하면 아들을 앗아간 절대자에 대한 분노로 불교로 개종하겠다고 박완서가 펄펄 뛰었다고 한다. 이 때 쓴 일기 묶음이 그녀의 절망과 고통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한 말씀만 하소서〉[16]. 글 중 일부 세례명은 앞에서 봤듯이 '정혜 엘리사벳'[17]. 살아생전에 아주 독실한 신자였다고 하며, 종교가 같은 동료 작가 최인호 등과 함께 생전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보에 자신의 신앙칼럼을 틈틈이 기고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박완서/작품 목록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 나목 (1970)
- 목마른 계절 (1971~1972)
- 도시의 흉년 (1975~1979)
- 휘청거리는 오후 (1976)
- 욕망의 응달 (1978~1979)
- 살아 있는 날의 시작 (1979~1980)
- 오만과 몽상 (1980~1982)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1982~1983)
- 서 있는 여자 (1982~1983)
- 미망 (1985~1990)
-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8] (1989)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92)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1995)
- 아주 오래된 농담 (1999~2000)
- 그 남자네 집 (2004)
-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1974) - 1976년 출간된 첫 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세모>, <어떤 나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부처님 근처>, <지렁이 울음소리>, <주말농장>, <맏사위>, <연인들>, <이별의 김포공항>, <어느 시시한 사내 이야기>, <닮은 방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재수굿>, <카메라와 워커>, <도둑맞은 가난>, <서글픈 순방>, <겨울 나들이>, <저렇게 많이!>의 18편의 단편과 콩트 <다이아몬드>가 수록되어 있다.
- 도둑맞은 가난 (1975)
- 배반의 여름 (1976) - 1978년 출간된 2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어떤 야만>, <포말의 집>, <배반의 여름>, <조그만 체험기>, <흑과부>, <더위먹은 버스>, <상>, <여인들>,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낙토의 아이들>, <꿈과 같이>, <공항에서 만난 사람>, <집보기는 그렇게 끝났다>의 13편의 단편과 콩트 <화랑에서의 포식>이 수록되어 있다.
- 엄마의 말뚝 (1980~1991) - 3편으로 된 연작이자 1982년 출간된 3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엄마의 말뚝 1>, <엄마의 말뚝 2>,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우리들의 부자>, <천변풍경>, <육복>, <추적자>, <침묵과 실어>, <내가 놓친 화합>, <황혼>의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 그 가을의 사흘 동안 (1980)
- 꽃을 찾아서 (1986) - 1986년 출간된 4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꽃을 찾아서>, <재이산>, <아저씨의 훈장>, <저녁의 해후>, <비애의 장>, <어느 이야기꾼의 수렁>, <해산바가지>, <울음소리>, <애보기가 쉽다고?>, <무서운 아이들>, <저물녘의 황홀>,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의 1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 저문 날의 삽화 (1987~1988) - 5편으로 된 연작이자 1991년 출간된 5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로열 박스>, <무중>, <소묘>, <초대>, <저문 날의 삽화 1>, <저문 날의 삽화 2>, <저문 날의 삽화 3>, <저문 날의 삽화 4>, <저문 날의 삽화 5>,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가>, <우황청심환>, <엄마의 말뚝 3>,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1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 꿈꾸는 인큐베이터 (1993)
-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1993)
- 그 여자네 집 (1997)
- 너무도 쓸쓸한 당신 (1997) - 1998년 출간된 일곱 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마른 꽃>, <환각의 나비>, <참을 수 없는 비밀>,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너무도 쓸쓸한 당신>, <그 여자네 집>, <꽃잎 속의 가시>, <공놀이하는 여자>, <J-1 비자>의 9편의 단편과 콩트 <나의 웬수덩어리>가 수록되어 있다.
- 그리움을 위하여 (2001)
- 친절한 복희씨(2006) - 2007년 출간된 8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그리움을 위하여>, <그 남자네 집>, <마흔아홉 살>, <후남아, 밥 먹어라>, <거저나 마찬가지>, <촛불 밝힌 식탁>, <대범한 밥상>, <친절한 복희씨>, <그래도 해피 엔드>의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 기나긴 하루 (2012) - 사후에 출간된 마지막 소설집으로, 말년에 발표된 단편들인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빨갱이 바이러스>,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가 수록되어 있다.
- 마지막 임금님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
- 나의 아름다운 이웃
- 한 말씀만 하소서 - 1994년 출간 6번째 작품집의 표제작으로, 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와 함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가는 비, 이슬비> <티타임의 모녀>, <꿈꾸는 인큐베이터>, <오동의 숨은 소리여>의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10주기 추모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맏딸 호원숙 작가)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미출간 원고 수록 에세이, 2024년 발간)
'한국 문단에 박완서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선생님은 아실까요. 아이 다섯을 키우던 전업주부가 마흔의 나이에 등단하여 한국 문학의 거목으로 우뚝 솟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지요. 선생님은 40년 동안 끊임없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써 오셨습니다. 예순에도, 칠순에도, 여든이 되실 때까지도 영원한 ‘현역’이셨습니다. 감히 그만큼 훌륭해지고 싶다는 말은 못해도 박완서 선생님만큼 오랫동안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슴에 품은 후배 작가들이 저 말고도 참 많습니다. (중략) 재미와 뼈대가 함께 있는 주옥같은 소설들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박완서’라는 크고 높고 따뜻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산골짜기를 흐르던 시냇물과, 산새들의 지저귐, 또르르 발밑을 굴러가던 도토리의 빛깔을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언제든 찾아가 기대고 싶은 우리 문학의 가장 중요한 기둥.
지치고 길을 잃었을 때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펼치면 안쪽에서 찰랑찰랑 천천히 차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여전한 생생함으로 힘을 보태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학사 쪽에서, 여성 문학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선언한 작가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물론 그녀 이전에 여성 문학가가 없는 건 아니지만[20]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은희경, 공지영, 배수아, 김애란, 김숨, 황정은, 편혜영, 신경숙, 한강 등 여성 문학가들의 등장이 이루어지기 전의 시대에는 월등히 여성 문학가보다는 남성 문학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자전적인 세계 의식이 문학에 녹아 들어간 <나목>으로 등단한 이후 그녀는 남편과 아들이 사망하였을 당시에 잠시 절필했던 때를 제외하고 매년 쉬지 않고 집필 활동을 했다.
박완서의 글은 자전적인 체험 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쓰인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전부의 문학이 그런 것은 아니나, 작가 자신의 일생을 바꿀 정도로 가장 강렬한 경험이었던 6.25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유독 많다는 점을 들어서 '소설'이라기보다는 자전적 회고에 가까운 '수필형 소설'이라는 평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의 작품 활동을 지나치게 한쪽 방향으로 보는 시각으로, 박완서라는 작가는 자전적 체험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인 '가족'을 통해 시대와 국가,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을 날카롭게 해부해낸 작가라는 게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6.25에 대한 자전적 체험 뿐만 아니라, 익히 알려진 분단국가로서의 현실, 가부장적 가정 구도, 전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반공주의, 여성, 중산층 등 6.25 전후를 비롯하여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아래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예리하게 관찰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품을 접하기 전, 박완서라는 작가 본인의 넉넉한 이미지나, 주제 의식, '여성작가'의 작품이니 지나치게 감성적일 거라는 생각을 가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섬세한 감성과 더불어 사람들 내부의 욕망과 이기심과 같은 굴곡진 인간상에 대한 메스 같은 날카로운 묘사에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겉으로는 풍요롭고 넉넉한 물질과 안락하고 안정적인 삶을 구가하는 80~90년대의 중산층 사람들의 내면에는 그 안정적 삶을 구가하는 것으로 현실의 두려움과 내적인 비틀림을 억누르고 감추려고 하는 면모가 있으며, 그들 내부에는 다양한 욕망과 인간군상이 녹아들어 있음을 적나라하고 탁월하게 묘사한다. 동시에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단지 정당화하거나, 혹은 부정적으로만 그리지 않고, 담담하면서 섬세한 필치로 사회 내부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이라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면을 보인다.
익히 알려진 장편뿐만 아니라, 단편에서는 작가의 이러한 시각들이 잘 드러난다. 다만 작가가 자신의 눈에 비친 세계라는 작품 속 시각에 철저히 입각하여 작품을 전개하기에, 이를 회고와 체험의 범위 안쪽으로만 생각하기 쉬워서 위와 같은 평가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는게 타당할 듯 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나'와 오빠가,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자녀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출세시키려고 마음먹은 어머니에 이끌려 어머니와 같이 서울로 이사를 가고(남편이 서양식 병원에 가지 않고 기존 전통적인 치료를 고집하다가 죽은 영향도 컸을 것이다.), 나와 오빠를 성공시키기 위해 (특히 '나'를 구세대적인 여성상과 반대쪽에 위치하는 '신여성'이 되게 하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는 어머니와 서울에서 사춘기를 보내며 성장하는 나와 오빠, 일제 강점기에서 겨우 살아남았으나 6.25에 의해 오빠가 죽고 고향은 이제 갈 수 없게 된 박완서의 자전적인 경험은 박완서의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6.25는 여전히 박완서의 소설에서 계속 살아 숨쉬고 있으며, 분단이라는 거대한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맞서고 거역하려는 모습이 계속 묘사된다. 일제강점기와 6.25, 해방과 분단, 봉건문화와 근대 신문화, 구여성과 신여성, 농민과 노동자 등 한민족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 중 하나인 근대화 - 일제강점기 - 6.25 - 분단세대의 혼란스럽고 다채롭던 시대상과 가치관이 박완서의 소설에서 살아숨쉬고 있으며, 아직 6.25의 영향으로 통일이 되지 않고 분단 상태인 오늘날까지에도 이러한 시대상과 가치관들은 박완서의 소설에서 사라지지 않고 빛을 발한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쭉 이어져 오고 있는 정서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박완서 작가 자신이 소설은 이야기라는 믿음을 가지고 쓰고 있기 때문인지 '-다우' 라는 어미형을 쓰기도 하며[21], 서술자가 청자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짜여진 소설[22]도 존재한다. 또한 대다수의 소설은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페미니즘적을 논하기 이전에 그녀의 글은 여성으로서의 세계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근래의 글에서는 여성이기 이전에 어머니라는 존재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크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등지에 작품 일부가 수록되었다.[23]
- 박완서는 인공 치하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과 강의를 계속해서 들었고, 북한을 찬양하는 강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를 완전히 바꾸는 사건이 있었으니, 아버지 없이 커온 그녀에게 있어, 머리도 좋고 공부도 많이 해 '영웅'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그녀의 우상이었고 각별했던 친오빠[24]가 북한의 의용군에 끌려가는 변고를 당했다. 부상을 입고 탈주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가족들이 남아있던 서울로 돌아왔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한다. 결국 오빠의 조카들과 늙은 어머니를 먹여살리기 위해 남겨진 올케와 박완서가 가장이 된다. 박완서가 겪었던 공산주의 지배 하에서의 고난은 이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공산주의의 인간성(개성)의 말살에 대해 비판하는 등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는 계기가 된다.'이십 대에 코뮤니스트가 아니면 하트가 없다'는 말마따나 오빠는 코뮤니스트였는데 막상 전쟁의 참상을 겪더니 모든 인텔리들이 그렇듯이 코뮤니즘에 회의를 느껴 사상적 방황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의용군으로 끌려나가더니 928 때 도망쳐서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더군요. 그런데 피해망상증과 공포로 정신이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았어요(육체도 허물어졌지만). 그러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오발 사고로 총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지요. 나는 아버지가 일찍부터 안 계셨기 때문에 단 한 혈육인 오빠에게 많이 의지하고 살았는데, 아, 참으로 끔찍했어요. 오빠의 생각들로 지금도 가위눌리고, 하도 악몽을 꾸니까, '써버리면 악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지' 하고 좀 써버리려고 해도 너무 가까운 사람이어서인지 잘 써지지가 않아요.
- 나목으로 등단하였을 당시의 나이는 39세. 그 전까지는 전업주부로 살며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몰래 집필했다고 한다. 집에서 일기를 쓰는 모습도 본 적이 없던 자식들은 어머니의 등단 소식에 매우 놀랐지만 이내 응원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원고를 받았던 기자도 40세의 전업주부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을 믿지 못해 직접 찾아와 본인이 썼는지 증명하라고 해 집필 당시 적어둔 메모 등을 보여주어 증명했다고 한다.
- 출판사 쪽에서는 근래 보기 드문 성실한 작가로 소문났었다. 그리고 특별한 이윤을 취하지 않는 작가로도 알려졌다. 물론 과도한 인세를 요청한 모 작가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이야기이겠지만, 네임밸류에 비하면 과도한 인세 요청은 잘 하지 않고 오히려 집필에 신경 쓴 편이라서, 출판계에서 박완서의 평은 좋다.
- 그 나이 작가로는 드물게 일찍부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업했던 작가이기도 하다.
- 가수 이적과도 인연이 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이적이 용돈을 군것질에 몽땅 탕진하고, 어머니께 이를 무마하고자 시 한 편을 집필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이를 보고 감동하여 이 시를 다시 박완서에게 보내었고, 그녀도 중학생이 어떻게 이런 시를 썼냐며 감탄했다고 한다. 다음은 그 시의 내용의 일부다.습한 얼굴로
AM 6:00이면
시계같이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호돌이 보온 도시락통에 정성껏 싸
장대한 아들과 남편을 보내놓고
조용히 허무하다.
(중략)
- 엄마의 하루
- 2010년대 후반 들어 대학교 대나무 숲에 가난을 간증하거나, "가난이 스펙이다"라고 말하는 등의 망언이 올라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에 대해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의 문구가 올라와 일침을 가하곤 한다."부자들이 가난을 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에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 선배 작가 박경리와 친분이 깊어서 박경리의 장례식에서 울면서 조사를 읽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다. 등단하고 얼마 후 박경리와 알게 되었지만 같은 세대인데도(박경리가 박완서보다 5살 많음)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자신은 막 등단한 신인인데 박경리는 이미 유명한 작가라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대상으로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과 아들을 연달아 잃고 슬픔에 빠져 집에서만 지내던 때, 친분이 있던 출판계 인사들이 찾아와 싫다는 사람을 잡아끌고 다짜고짜 강원도 원주에 있는 박경리 집으로 데려갔다.[26] 그 무렵 다른 사람들은 박완서를 보면 으레 위로의 말을 건네곤 했는데, 극심한 절망감에 빠져있던 박완서는 그런 위로의 말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박경리는 어설픈 위로의 말 같은 건 하지 않고 직접 농사지은 채소로 밥을 차려주며 많이 먹으라는 말만 했다. 박완서는 그런 박경리의 태도에 오히려 큰 위로를 받아 울면서 밥을 먹었고 그 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 다른 문인과의 교류도 상당히 잦고 정부와 문인 협회 등에서 보내주는 여행 등에 자주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1] 사진작가 김종구가 찍은 사진으로, 박완서 본인이 이 사진을 좋아해 서재에 걸어두기도 했다. 장례식 당시 영정사진으로 쓰였다.[2] 호적상 생일은 10월 20일이지만 9월 15일이 진짜 생일이라고 본인의 구술집을 펴내며 밝혔다.[3] 現 개성시 개풍구역 묵송리[4] 25세손 '서(緖)' 항렬이다.[6년제] 5.1 5.2 당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전인 6년제 구제중학교 과정이다.[6] 생전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장례식 역시 천주교 식으로 치러졌고 이후 천주교 용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앙 문단 참조.[7] 1998년 보관문화훈장을, 2003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8] 의외로 당시 교사들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닦달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10] 1950년은 6월에 입학을 하도록 한 유일한 해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4월 신학기제였는데, 해방 후 미군정 시기 미국식으로 9월 신학기제가 실시되었다. 이후 9월 신학기제가 실정과 맞지 않아 다시 4월 신학기제로 돌아가기로 결정되었는데, 학년도를 5개월을 단축해야 하는 무리한 점이 있어 과도기적 조치로 1950년에는 6월에 입학하도록 한 것이다.[11] 이상 두 부분은 2012년 출간된 '박완서: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1931~2011'을 인용했다.[12] 남아 선호 사상과 80-90년대의 여아낙태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13] 교통사고는 아니라고 한다. #[14] 박완서에게는 딸만 넷을 얻고서야 태어난 아들로 각별히 귀한 자식이었던 호원태는 당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마취과 레지던트 과정에 있었다. 왜 당시 비인기과였던 마취과를 선택했냐는 박완서의 질문에, 마취과 의사는 환자가 잠들어 있는 동안만 환자를 돌보고 환자가 깨어나면 떠나기에 환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기 어려워서 쓸쓸한 느낌이 있고 자신은 그 쓸쓸함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고 한다.[15] 박완서는 남편이 사망하기 전부터 이미 부부가 함께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은 상태였다.[16] 미사 중 영성체 전 기도문이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다.[17]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축일 9월 20일)은 성 정하상 바오로의 여동생으로,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한국 103위 순교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세례명까지 같이 부르려면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이라고 하면 된다.[18] 아들의 요절 이후 발표한 작품이다. 미혼모가 어린 아들의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아들의 친부와 그의 가족들과 싸우는 이야기인데,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혈육의 정에 대한 묘사가 매우 절절하다.[19] 특히 그 중에서도 주인공의 모친이라는 양반이 가장 문제이다. 이 사람은 과연 친모인 게 사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주인공도 듣는 앞에서 대놓고 전화 통화로 막말을 지껄이는 정신나간 모습을 보였는데, 다른 집들이나 동창들은 전부 애가 하나 아니면 둘인데 본인만 셋인 게 창피해 죽겠다면서 전화로 애도 듣는 자리에서 이딴 뒷담화를 까면서 떠벌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그 전화를 한 날이 어버이날이었는데, 형과 누나와 본인 모두 아침에 카네이션을 달았는데, 주인공 본인이 건넨 카네이션은 휴지통에 버려져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더 이상 삶의 가치를 못 느낀 주인공은 이전에 두 명의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본인도 투신자살을 하러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그 곳에 피어난 민들레 한 송이를 보고는 희망을 얻고 본인의 결심을 철회하고 귀가했으며, 그런 주인공을 보고 엄마가 그제서야 펑펑 울면서 안아 주면서 뒤늦게나마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20] 대표적으로 한국문학계의 대모 박경리 선생이 있다.[21]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여자네 집.[22]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23] 그런데 정작 박완서 작가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이 교과서 등지에 인용되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른바 수능, 진학 문제풀이의 용도로 문학 작품의 심오한 이해 없이 이용되는 것을 경계한 것. 오죽하면 작품을 칼로 재단하는 것 같다는 투의 발언도 한 적이 있다. 비슷한 사례로 김영하와 이외수가 있다. 이외수는 자신의 작품을 문제로 낸 것을 풀었는데 맞는 답이 거의 없었다고.[24] 전쟁 이전 좌파적 사상에 잠시 발을 담근 적이 있다고 한다.[25] 남편이 무능하거나 신경질적이게 나오거나, 아예 별거하거나 고인인 경우가 있다. 특히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이에 대해 갈등했다가 모성애의 관점으로 해결하는 내용이 많다.[26] 박경리도 박완서와 똑같은 슬픔을 체험한 인물이었다. 6.25때 남편을 사실상 잃었고(정확히는 실종), 아들은 당시의 열악한 시대상에 따른 의료 사고로 일찍 떠나보낸 것이다. 박경리의 초기 단편인 <불신시대>는 그러한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쓰여졌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