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7

소용돌이 속에서 (마를린 고리스, 2009) : 네이버 블로그

소용돌이 속에서 (마를린 고리스, 2009) : 네이버 블로그
영화

소용돌이 속에서 (마를린 고리스, 2009)

풍뎅이

2011. 6. 1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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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쓰던 글의 냄새가 난다. 울컥울컥하는 감정을 듬뿍 담고 싶었는데 정작 나오는 글은 촌스럽다. 이 글을 쓰는게 슬프고 즐거울 줄 알았는데, 감정을 언어화시키는 건 무척 힘들고 내 감정을 한참동안 직시하는 것도 무척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성영화제 상영작인데 미개봉에 파일도 구하기 힘들어서 안타깝다. 다시 보고 싶음.

소용돌이 속에서 (마를린 고리스, 2009)




1. 들어가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는 틈이 있다. 우리는 종종 이것의 존재를 잊는다. 개념들을 통해서 세계를 매끈한 무엇으로 감각하고, 자동성을 자율성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때때로, 이 ‘틈’이라는 것은 우리 삶의 균형을 뭉개면서 내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세계의 실재인 이 틈과 만나는 순간, 우리는 휘청거린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1995)으로 우리에게 여성주의의 풍요로움을 보여준 마를렌 고리스 감독은 『소용돌이 속에서』(2009)에서 바로 이 ‘틈’에 관해 이야기한다. “말은 생각을 정복하지만 글은 그 생각을 지배한다.”1)라고 이야기했던 벤야민을 상기하면서, 나는 내 언어 속으로 ‘틈’의 기억들을 밀어 넣는 지금의 행위가 다시 나의 생각을 지배해주길 기대한다. 없었던 일들처럼 휘발되는 순간적인 감각들이 이 글쓰기 행위 속에서 부활하길 바란다. 그렇게 다시 짜여진 내 감각중추가 나를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만들길 원한다. 거대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실천의 시작일 것이다. 실천은 내 감각에서부터 시작된다.



2. 여백에 관해 말한다는 것

1934년 소련, 당서기 키로프의 암살사건을 빌미로 스탈린의 대대적인 정치 숙청이 진행된다. 지식인들은 비밀경찰조직인 내무인민위원회로 소환되어 취조를 당하고, 충실한 당원이자 지식인으로서 편안한 삶을 누리던 카잔 대학 노문학과 교수 예브게니아 긴즈부르크(이하 제냐) 역시 트로츠키주의 조직일원으로 의심받는다. 제냐의 남편은 없는 죄도 그냥 인정하라고 그녀를 설득하고, 아이들의 존재도 그녀의 자아비판을 추동하지만, 그녀는 거짓 자백을 거부하며 끝까지 충실한 당원으로 남으려고 한다. 대부분의 당원들이 자아비판을 행하고 동료를 고발하며 살아남는데 반해, 그녀는 명백한 사실들을 언급하며 끝까지 자신을 변호한다. 지젝이 지적하듯, “사실 사회주의의 공식적 이데올로기에 ‘진지한’ 믿음을 가진 자가 냉소적인 사람보다 잠재적으로 훨씬 더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반체제 인사가 되어버리니까 말이다.”2) 그녀의 당에 대한 충실성에 관료들은 오히려 당혹스러워한다. 왜 트로츠키주의적 혁명관을 이야기하는 논문을 심사에서 통과시켰냐는 관료들의 물음에, 그녀는 그 논문이 통과된 이후에 스탈린 동지의 혁명관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스탈린 동지의 혁명관을 당시로서는 알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고 답변한다. 명쾌한 이 답변은 그녀를 보호하지 못한다. 오히려 제냐를 위험분자로 만들 뿐이다. 제냐는 마치 카프카의 소설 『소송』의 주인공처럼 끊임없이 뛰어다니며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따라서, 영화의 서두에 삽입된 뜬금없는 장면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어떤 여학생의 작문과제를 돌려주면서 제냐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여백을 남겨둬야지. 중요한 건 그 안에 있어.” 이 작품은 역사의 명백한 ‘사실들’이 아니라, 바로 이 ‘여백’에 진실이 있음을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스탈린 치하에서 1800만 명이 유배나 징계를 당했고, 그 중 500만 명이 죽었다. 이 숫자들은 어쩌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당시 소련의 격동기를 겪었던 예브게니아 긴즈부르크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이 어마어마한 희생자들의 숫자 속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기입되어 있는지를 증언하려고 노력한다. 제냐라는 한 인물의 놀라운 서사가 허구가 아닌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 어떤 드라마보다 놀라울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보잘 것 없는 온전한 현실 사이에 무한한 여백이 존재하고 있음을, 혹은 그저 ‘구조적 폭력’으로 치환했던 상황들의 비참함이 무한한 여백임을, 이 영화는 자각하도록 만든다. 끝내 유배 10년형을 선고받는 제냐가 긴 시간동안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망가지지 않고 스스로를 지탱해가는 모습을 따라가 보자.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제냐라는 한 인물 위로 겹쳐지는 지금의 무수한 제냐들이다.

3. 피해자의 형상을 벗어나기

제냐는 죽지 않았음에 기뻐하며 유배 10년형을 받아들이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도살장의 동물처럼 다루는 상황들과 맞닥뜨린다. 그녀가 강제노역을 해야 하는 공간은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만연하며, 누군가 죽더라도 그 죽음이 의미화 되지 않는 곳이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유령들의 장소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한다. 강간에 저항할 것인지, 빵을 얻기 위해 성폭행에 동의할 것인지, 동료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묵인할 것인지, 나를 짐승처럼 다루는 간수들 앞에서 내가 그들과 동등한 인간임을 증명하길 포기할 것인지. 강제 수용소와 같은 죽음의 공간에서도 이렇게 끊임없는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것이다. 희망은 스탈린 치하에서 징계를 당했던 1800만 명의 사람들을 ‘폭력의 희생자들’로 명명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전쟁터 같은 삶 속에서도 스스로 도살장의 짐승이 되길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 현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슈비츠 경험을 소설로 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수용소의 지옥을 폭로해 보라’는 생존자들의 요구에 어리둥절해하는 15살 소년 죄르지를 묘사하려고 애쓴다. 죄르지는 1년간 강제수용소 생활을 겪고 나와서 친족들과 재회하는데, 친족들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왔다’고 표현하는 데 대해 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을 느낀다. ‘우리는 희생자’라고 외치는 어른들을 앞에 두고, 죄르지는 생각한다. “어째서 이런 반항심이, 어째서 이런 불쾌감이 드는 것일까?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나는 점점 더 흥분하고 감정에 북받쳐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나는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추었다)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3) 죄르지의 말들은 소설 속 어른들을 향한 것임과 동시에 작가 자신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구성하는 작업의 일부이기도 하다. 죄르지, 혹은 임레 케르테스는 홀로코스트를 나치의 온전한 책임으로 돌리고 유태인을 ‘순수한 피해자의 형상’으로 구성하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이제 ‘유대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그 단계들을 밟기 전까지는 유대인이라는 것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선전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다른 피란 없다.”4)라고 죄르지는 말한다. 홀로코스트의 경험 이전, 죄르지가 유대인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은 스스로를 ‘그저 보통의 인간’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수용소 기간을 거쳐 죄르지에게 비로소 기입되었다. 그에게 이 정체성에다 피해자의 형상까지 덧씌워지는 것은 ‘보편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를 피해자로 명명하고 가해자의 책임을 물어가는 작업은 ‘보편적인 인간 권리의 실현’이라는 취지로 진행되지만, “피해자 쪽에는 사람들이 화면 위로 보여주는 흉측스러운 동물이 있다. 구조자 쪽에는 의식과 정언명령이 있다”5) 는 바디우의 지적대로, 이러한 분열은 언제나 같은 사람들에게 같은 역할만을 맡긴다. ‘피해자화’는 보편적 주체를 실현하기 위해서 오히려 보편적 주체로서의 인류라는 전제를 기각하는 모순점을 내포한다.


 
 제냐의 끊임없는 선택가능성은 죄르지의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선언을 연상시킨다. 제냐는 어느 곳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음을 몸으로 웅변한다.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거짓자백을 강요하는 관료들 앞에서 그녀는 육체적으로 무력하다. 생명을 겨우 부지할 수 있을 만큼의 끔찍한 식사와 씻을 수 없는 환경, 계속되는 취조로 그녀의 정신과 몸은 망가져간다. 그러나 유령처럼 창백하게 말라가는,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제냐를, 문장들이 지탱해준다. 그녀는 좁고 어두운 감옥에서 불안에 떨면서도 읊조린다. “신께서 주신 내 몸, 아무도 해칠 수 없네. 나는 강하고, 크고, 아름답다…….” 예술은 취조실 안에서도, 강제 수용소로 향하는 짐승 우리 같은 기차 안에서도, 영하 40도 이하의 노역장에서도 그녀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준다. 그 불가사의한 힘은 “그것이 예술의 작품이 아닌 한에서 자율성의 감각중추 속에 참여”6)하는 예술의 속성으로부터 나온다. 영화의 초반, 여전히 당의 주요 인사였던 시절의 제냐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말한다. “여러분들은 젊어서 좋겠어요. 아직 읽고 감동받을 작품들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잖아요. 나는 이미 다 읽어버렸죠.” 이때의 제냐의 언급 속에서 예술은 ‘현재’의 삶을 등지고 흘러가버린 쓸쓸한 향수로 묘사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맨몸으로 수용소에서 십여 년의 삶을 시작하게 된 제냐에게 예술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예술은 예술행위들을 식별하고, 그 식별을 지각방식들, 감응하는 형태들 그리고 특정한 이해 가능성의 형태들과 일치시키는 식별체제들 안에서만 존재”7)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읊조리는 문장들은 스스로를 쓰레기나 짐승으로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이 강제하고 분배하는 감각들을 온 몸으로 거부하도록 주술처럼 작동한다. 예술은 제냐의 감각중추를 끊임없이 새로 짜는 과정 속에서 예술로서 존재한다. 이 예술의 카테고리는 무한정 넓어지며, 풍미 좋은 빵은 푸쉬킨의 시와 동일한 것이 된다.


강제수용소에서 제냐는 독일인 의사 안톤을 만나게 된다. 다정한 의사인 안톤을 그저 ‘적당수의 노동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친절을 베푸는 기만적인 의사놈’으로 생각했던 제냐는, 그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죄수에 불과하고 아내와 자식들을 전쟁 속에서 잃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제냐에게 안톤은 호감을 느끼고, 그녀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의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황량한 시베리아의 수용소 안에서, 안톤은 제냐에게 푸쉬킨의 책을 선물하고 제냐는 배급받은 헌 옷 더미에서 빨간 원피스를 건져내 입는다. “사랑은 세계의 법칙들에 의해서는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8)이기에, 엄혹한 공간 속에서도 피어난다. 우연적인 사건으로서의 사랑은 단순한 만남의 황홀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을 충실하게 구축해 나간다.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져 죽음을 기도했던 제냐는, 안톤과의 사랑을 통해 비로소 이렇게 독백한다. “죽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삶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삶을 재발명하는 사랑을 통해, 그녀는 “피해자의 정체성과는 합치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저항 같은 것으로 표상되는 미증유의 노력”속에서 가축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한다.

둘의 관계는 발각되어, 안톤은 다른 수용소를 배정받게 된다. 누가 언제 출소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둘은 기약 없이 헤어지지만, 그들은 가상으로서의 영화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재회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몇 마디 문장들로 이 실화는 요약된다. 그들은 둘 다 출소하고, 다시 만난다. 제냐는 몇 년 뒤 완전히 복권하고, 그들은 아이를 입양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이 해피엔딩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자체가 이렇게 강렬하고 극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에, 기만적이거나 진부하기보다 놀랍고 감동적이다. 우리에게도 운명 같은 사랑이 다가오거나, 푸쉬킨의 문학으로 감각중추를 재구성하거나, 풍미 좋은 빵 한 조각에 희열을 느끼거나, 폭력 속에 위치한 타자를 위해 몸을 던지는 순간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이 실화는 증언한다. 이 비루하고, 평범하고, 극적인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삶 속에서, 혹은 야만적인 자본주의 아래 끊임없이 무기력해질 뿐인 삶 속에서 말이다.


4. 오늘의 제냐들

결코 상황에 귀속되지 않는 주체적 인간, 그 인간이 가지는 무한성을 이 『소용돌이 속에서』라는 영화에 투영해 사유했던 이유는, 이런 현실 때문이다. 올해 여성의 날 집회에서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활동가의 발언을 들었다. 수수료 삭감 반대로 시작한 그들의 투쟁은 회사의 일방적인 단체협약 파기나 조합원 해고 등 도저히 협상지점을 찾을 수 없게 하는 사측의 행태로 천 이백일을 넘겼다. 대부분이 여성 활동가인 그 사업장은 지나온 천 이백일의 시간동안 사회적 무관심, 생계유지의 어려움, 회사에서 고용한 용역깡패의 모멸적 언행, 노골적으로 회사 편을 드는 경찰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내 삶으로 침입해 들어온 틈의 기억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사측이 고용한 용역들은 성폭력적인 언행을 일상적으로 내뱉는다고, 발언자는 말했다. “용역은 저희에게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수치스러워 하도록……. ‘내가 어제 너네 엄마 무덤을 파고 너희 엄마를 따먹었는데.’” 울음을 삼키는 발언자의 침묵이 한참동안 머물렀고 우리는 모두 숨을 죽였다. “‘너네 엄마 몸에서 물이 줄줄 나오더라.’” 혹은 이런 기억이다. 삼성 LCD나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을 하다 장시간 노동과 화학약품 대량노출로 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에 걸린 노동자들의 목소리들에 관한 기억. 삼성은 역학조사 결과 자신들 책임이 아니라고 발뺌하며 무수한 죽음들 앞에서 사과 없이 알량한 합의금을 던져주거나 단호한 무시로 일관해왔다. 우연히 아르바이트로 녹취를 풀기 위해 접했던 그들의 목소리는 내 삶의 균형을 뭉갰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 20대 청춘을 철저하게 직군 분리된 삼성의 생산직 노동자로 보냈던 사람들이, 식물처럼 병실에 누워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화사하게 옷을 차려입고 친구들과 뛰어놀던 사람들이 이젠 혓바닥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인터뷰어가 하고 싶은 말을 요청하자 그 산재 노동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삼성. 안,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으깨어진 발음을 돌려 들으며,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녹취를 했다. 병실에서, 젊은 청춘이 빚더미를 짊어진 채 망가진 기계처럼 멈춰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믿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쓰레기가 되지 않을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조차도, 우리는, 누구든, 지금 바로 여기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간절하게. 이게 삶의 보편적인 가능성이라는 걸 믿고 싶기에, 『소용돌이 속에서』의 제냐는 나에게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비관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준다. 재능은 여전히 싸움중이다. 혜화동 본사 앞에서 고립되어 싸우던 그들은 시청으로 농성장을 옮겨 더 많은 연대단위들과 소통한다. 언론이 방송해주지 않아도 트위터로 소식을 알리고, 농성장 침탈에 연대를 요청하고, 함께 고기를 먹자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상처받은 순간과 그들이 기쁜 순간과 그들이 사유하는 순간을 공유한다. 삼성의 산재 노동자들에게 반올림을 비롯한 각종 운동단체들이 연대한다. 때로는 산재 노동자 본인이, 때로는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삼성을 엎어버리겠다고 일어난다. 누군가는 두리반에 관해 말하고, 누군가는 쌍용차에 관해 말하고, 누군가는 현대차에 관해 말하고, 누군가는 이화여대의 청소용역노동자들에 대해 말한다. 학생이, 시간강사가, 시인이, 영화감독이, 뮤지션이, 어떤 사람이, 움직이고 발설하고 자판을 누르고 퍼 나른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희망버스가 떠나고, 폭도 운운하는 부르주아 언론에 우리는 야유한다. ‘피해자의 형상’ 속에는 이런 주체성들이 있고, 비참함 속에는 이런 아름다움들이 있다. 명백한 사실들이 부과하는 감각을 거부하고, 여백 속의 주체성과 아름다움을 감각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지금의 삶을 보다 완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제니 시인의 적확한 표현을 빌려,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지구의 회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나의 여백을 믿는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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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작가의 기법에 관한 13가지 명제」김영옥, 윤미애, 최성만 공역, 도서출판 길, 2007, 99p


2) 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한보희 옮김, 새물결, 2008, 144p


3) 임레 케르테스, 『운명』, 박종대, 모명숙 옮김, 다른우리, 2002, 288p


4) 위와 동일. 288p


5) 알랭 바디우, 『윤리학』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 20p


6) 자크 랑시에르, 「미학혁명과 그 결과.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뉴 레프트 리뷰』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09


7) 위와 동일.


8)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조재룡 옮김, 길, 2010, 42p

9) 이제니, 「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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