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1

Vladimir Tikhonov 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청년 김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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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Tikhonov
3 h ·
<정치 탄압에 희생된 고려 혁명자, 1934-38년> 제16권에서 '유교적 사회주의자' 김규열의 최후 관련을 확인했습니다. 일단 취조 문서에서는 그는 자신을 '유림의 아들'이 아닌 '빈농의 아들'로 소개합니다. '유교'까지 끌어들이면 유리할 게 없었던 건 뻔했습니다. 그는 1933년11월27일에 체포됐습니다. 1934년3월27일에 총살형이 언도되고 1934년5월21일에 형이 집행됩니다. 1989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명예가 사후적으로 복원됐습니다. 혐의는 같은 '일제 밀정'이었습니다. 일단 국내 활동 시기의 그의 보스 격이었던 서울파의 이영부터 쏘련의 비밀경찰들이 '일제 첩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경쟁 정파인 화요회의 흑선전이 주효한 부분은 있었을 듯합니다. 거기에다 박열 사건에 한 때에 연루되었던, 공산주의자가 된 아나키스트 김중한이 쏘련에 망명했을 때에 김규열과 그 부인 박신우/아니샤는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쏘련 비밀 경찰들이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을 불신했으며, 김중한의 조선 탈출의 경위가 시원치 않다고 하여 그를 '일제 밀정'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를 도와준 김규열도 결국 그렇게 엮여 '일제 첩자'가 되어 황천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한때에 근우회의 열성적 활동가이었던 그의 부인 박신우/아니샤는 5년형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이 정치 탄압의 광란 속에서 과연 살아 남았을까요? 나중에 자료를 뒤져 이 부분도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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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청년 김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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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청년 김규열
조선공산당 분열 상징하는 사상논쟁을 최익한과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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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
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청년 김규열
조선공산당 분열 상징하는 사상논쟁을 최익한과 벌이다
제1309호
등록 : 2020-04-21



1933년 소련 정치보위부 경찰에게 체포된 뒤 찍은 김규열 사진. 초췌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임경석 제공
외국 유학을 마친 김규열(金圭烈)은 국내로 돌아왔다. 1926년 가을 무렵이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3년간의 정규 교육과정을 졸업한 뒤였다. 고국을 떠난 지 3년6개월 만이었다. 1890년생이므로 귀국할 때 조선 나이로 37살이었다. 어느덧 청년기가 저물고 있었다.



전조선청년당대회 대표로 모스크바 유학

모스크바 유학은 1923년 3월 열린 전조선청년당대회 덕분이었다. 3·1운동 이후 조선 청년의 의식을 사회주의 방향으로 바꾼 획기적인 집회로 손꼽히는 이 대회는, 코민테른과 연계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김규열은 대표자 3명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 업무를 마친 뒤 공산대학 진학을 희망한 그는 다행히 입학 허가를 받았다. 공산대학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정치학, 유럽·동양 혁명사, 러시아공산당사, 세계노동조합운동사, 군사교육, 유물사관, 정치경제학, 레닌주의, 당조직론 등의 과목을 이수했다. 두터운 유교 고전학 소양에 더해 최첨단 사회주의 사상을 익힌 준비된 혁명가가 탄생했다.

귀국길에는 8살 연하의 젊은 아내 박아니시야가 동행했다. 연해주 동포 2세 출신인 아니시야는 공산대학에 함께 있던 학우이자 사상 동지였다. 사랑을 불태우던 두 젊은이는 혼인하기로 했고, 졸업 뒤 진로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둘은 두만강 하류 조선~중국~러시아 3국 접경지대를 몰래 넘었다. 연해주 연추에서 북간도 훈춘으로, 거기서 다시 함북 국경지대로 잠입해 들어왔다.1

김규열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회주의운동에 복귀했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은 급격한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두 차례 대규모 검거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집행부가 교체되고 있었다. 김재봉과 강달영이 이끌던 옛 집행부 구성원들은 투옥되거나 외국 망명길에 올랐고, 그를 계승한 김철수 집행부가 당의 면모를 새롭게 하던 때다. 새 집행부는 당외 사회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에 호응해 당 밖의 사회주의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 구성원이 차례로 입당했다. 1차로 1926년 11월 140명이 입당했다. 이듬해 3월 2차로, 나머지 인사 100여 명이 조선공산당에 들어왔다. 이때 ‘서울파’인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이 해체됐고, 조선 사회주의운동 대통합이 실현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은밀히 회자되던 ‘통일공산당’이 출현했다.






1922~23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 학생 명단 속의 김규열, 16번이다. 4번에 박아니시야도 보인다. 재학 중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 임경석 제공
반지하에 활동 범위 두고 필봉을 휘두르다


김규열은 이 흐름을 탔다. 자신을 파견했던 서울파 사람들과 보조를 같이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활동 범위를 ‘반지하’ 상태에 두기로 결정했다. 반지하 상태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회운동단체에는 전혀 가입하지 않고 비밀 영역에서만 활동하되, 일상적인 경제·문화 영역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개 사회운동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는 필명 ‘김만규’를 내걸고 종횡무진 필봉을 휘둘렀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간신문과 저명한 진보 잡지 <조선지광>이 김규열의 문필 활동 무대였다. 그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기고문에서 민족통일전선단체 신간회 설립을 위해 조선의 모든 사상단체를 해체할 것을 주장했다. 신간회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전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라는 상설적인 합법 노동자정당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다. 1926년 하반기부터 1927년 상반기 조선공산당이 견지한 핵심 정책이었다. 김규열은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날카로운 이론가였다.

아내 아니시야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니, 남편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박신우(朴信友)라는 조선식 이름으로 공개 사회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신우’는 러시아 이름 ‘아니시야’와 소리가 비슷해서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 무대는 근우회였다. 사회주의와 기독교계 여성이 주축으로,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였다. 러시아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고등교육까지 이수한 박신우는 당시 조선 여성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고학력 인텔리였다. 근우회 발기총회와 창립총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집행부로 선출됐다. 선전조직부 상무위원을 했다.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맡는 직책이었다.

김규열에게 논적들이 생겼다. 그가 기고한 정치 논설에는 반론이 따라붙었다. 보기를 들면, 사상단체 해체를 주장한 그의 논설에 잡지 <이론투쟁> 1927년 4월호가 반론을 폈다. <이론투쟁>은 일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펴내던 사회주의 매체다. 필명 좌목군(佐木君)을 쓰는 사람과 최익한(崔益翰)이라고 실명을 밝힌 두 논객이 김만규(김규열)의 견해를 공박했다. 이 중 최익한에게 눈길이 간다. 그는 김만규를 가리켜 ‘속학적 혼합형’의 절충주의라고 몰아세웠다. 논의 수준이 낮고 사상단체와 정당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흐릿한 견해라는 비판이었다. 한 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최익한은 1928년 1∼2월 일간신문에 기고한 연재 칼럼에서도 같은 비판을 되풀이했다.2

김규열과 최익한, 둘의 논쟁은 사적인 말다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내부 소용돌이를 반영했다. 당시 통일공산당 내에선 새로운 분열의 움직임이 있었다. 파벌 청산을 내세우는 신진 사회주의자들이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선공산당 내부에 만들었다. 당내 당이었다.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결속을 지향하는 비밀 혁명단체 내에선 허용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비밀단체는 영문 이니셜을 따서 ‘엘엘당’ 혹은 ‘엠엘당’으로 불렀다. 엠엘당은 당내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다. 구성원이 하나둘 당 중앙에 진출했다. 1927년 9월에는 기존 당 집행부를 해산하고 그들만으로 새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일종의 당내 쿠데타였다. 이 사건으로 통일공산당은 두 그룹, 엠엘당과 비엠엘당으로 분열됐다. 엠엘당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는 ‘서상파’라고 했다. 과거 서울파와 상하이파 공산그룹에 속했던 사람이 다수라는 뜻이었다.



김규열과 최익한, 친밀하면서도 이론적으론 대립

김규열과 최익한의 논쟁은 바로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분열을 상징했다. 최익한은 엠엘당의 중요 인물이었다. 당의 분열을 야기한 9월 새 집행부의 한 사람이었다. 김규열은 엠엘당의 전횡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더 나아가 1927년 12월 서상파 사람들만으로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두 사람의 개인적 인연을 살펴보자. 둘은 1927년 시점에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가로서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사실은 친밀한 사이였다. 공통점도 많았다. 김규열이 나이로 7년 위였으나 그것이 둘의 우정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유교 지식인 출신의 사회주의자였다. 보기 드문 사례였다. 청소년기에 유교 고전학에 침잠한 경력을 공유했다. 전남 구례 출신인 김규열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택주의 훈도 아래 전통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엄격한 성리학자였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농민군에 맞서 전통질서를 옹호하는 민보군을 조직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3·1운동 때는 유학자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3

김규열은 26살 되던 1915년, 아버지 지시를 받아 경남 거창군의 저명한 유학자 면우 곽종석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김규열은 거기서 최익한을 처음 알게 됐다. 경북 울진 출신 최익한도 면우 문하에 들어온 젊은 유교 지식인이었다. 둘은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교분이 두터웠다. 김규열은 1917년, 1919년 두 차례 최익한을 초청해 구례 화엄사를 유람하고 구례·남원 일대의 저명한 유학자 집을 함께 방문했다. 그뿐인가. 스승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됐을 때도 행동을 같이했다. 대구감옥의 노스승을 수발하기 위해 대구 시내에서 함께 유숙했다. 스승이 감옥에서 병을 얻어 6월22일 출옥할 때까지 그랬던 것 같다.4

그해 여름, 두 사람은 함께 상경하기로 결심했다. 뒷날 작성한 경찰 신문기록에는 신학문을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돼 있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 다 그해 가을과 겨울에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을 보면 말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최익한은 독립군자금 모집 혐의로 체포돼,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옥중에 갇혔다. 김규열도 다르지 않았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겨울,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했음이 확인된다. 비밀결사는 임시정부 파견원과 은밀히 연계해, 불온 인쇄물을 제작·배포했다. 김규열은 그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받았다. 1919년 12월 체포돼, 1922년 3월 출옥했다.5

두 사람은 옥중 생활과 외국 유학을 거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최익한은 도쿄 와세다대학을 통해, 김규열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통해 잘 준비된 혁명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본 유학과 소련 유학의 차이는 둘의 이론적·정책적 입지에 편차를 가져왔다. 두터운 우정과 상호 이해가 있었음에도, 둘은 서로 다투는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적 대표자라는 상극의 자리에 서게 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오게페우 특별부 제1과장 전권대리 바산고프, ‘김규열 심문조서’ , 1933년 11월29일.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 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736쪽, 2019년.

2. 최익한, ‘사상단체해체론’ , <이론투쟁> 1927년 4월호, 32쪽(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第5卷, 東京, アジア問題硏究所, 1983). 최익한, ‘1927년 조선 사회운동의 빛(4)’ , <조선일보> 1928년 1월30일치.

3. 김봉곤, ‘호남 지역의 파리장서운동’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0, 24~30쪽, 2015년.

4. 송찬섭, ‘일제강점기 崔益翰(1897-?)의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활동’ , <역사학연구> 61, 2015년.

5. 경성복심법원, ‘판결, 大正9年刑控 제701호, 702호’ , 1920년 12월4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1466~1469쪽, 1977년.


Sunghwan Jo한해를 돌아보며: 지구학과의 만남, 지구인문학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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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 
<한해를 돌아보며: 지구학과의 만남, 지구인문학의 출발>
내가 '지구학'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건 2019년에 이병한 선생과 <개벽파선언>을 연재하면서부터이다. 그때는 '개벽학'에 빠져 있어서 '지구학'이 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2020년 1월 18일, 허남진 박사와 대화 중에 '지구인문학'이라는 말이 나왔다. 2년 뒤의 연구소 방향을 고민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4월, 본격적으로 '지구인문학스터디'가 시작되었다.
그때 1997년에 나온 울리히 벡의 <지구화의 길>을 읽었다(원제는 What is Globalization?). 거기에서 처음으로 '지구성'(globality)이라는 말을 배웠다. 내친김에 1986년에 나온 <위험사회>도 읽었다. 거기에서 "위험의 지구화"(globalization of risk) 개념을 접하고, 울리히 벡의 가치를 알았다. 두권의 책 덕분에 '세계화'와 '지구화'의 차이를 알았다. 둘다 원어는 globalization이다.
그리고 1988년에 나온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을 읽다가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 개념을 접했다. 내친김에 2000년에 나온 <위대한 과업>도 읽었다. 그리고 토마스 베리의 '지구학 신자'가 되었다.
여름에는 2013년에 나온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었다. 13번째 스터디 책인데, 가히 '인류학'이야말로 이 시대 인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학의 언어가 수학으로 이루어졌다면 인문학의 절정은 인류학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8월 26일, 대망의 첫 발표 기회가 주어졌다. "COVID-19 대학연구소의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로 열린 원광대학교 교책연구소 연합포럼이다. 부총장님을 비롯하여 각 연구소 소장님들을 대상으로 한 발표였다. 이날 허남진 박사와 <코로나시대의 지구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40분 동안 발표를 하였다. 기업으로 말하면 새 상품을 선보이는 무대였다. 하지만 법학과 교수님 앞에서 <지구법>을 언급하고, 서양철학 교수님 앞에서 <신유물론>을 말해야 하는 조심스런 자리이기도 했다.
우리는 90년대 이래로 서양에서 대두된 Global Studies와 토마스 베리 등이 말하는 Globalogy 와의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전자가 지구화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이라면 후자는 인문학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지구인문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으며, 동학이나 원불교와 같은 개벽학도 지구인문학에 다름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맨 앞에 앉아 계셨던 전정환 부총장님이 맨 먼저 박수를 쳐주셨다.
그리고 10월말, 이날 발표를 보완해서 대망의 첫 논문이 나왔다. 제목은 <지구인문학의 관점에서 본 한국종교 - 홍대용의 "의산문답"과 개벽종교를 중심으로>. '종교'를 강조한건 투고한 저널이 우연히 종교분야였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발표때 언급한 홍대용에 한 챕터를 할애하였다. 그의 <의산문답>은 실로 "한국철학에서의 지구인문학 1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고를 보내고 다음날 링겔을 맞았다.
그 사이에도 지구인문학 스터디는 계속되었다. 9월에는 최한기의 <지구전요> 강독이 추가되었다. 홍대용이 한국철학에서의 지구인문학 1호라면, 최한기는 2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전요>는 국내에 번역이 없기 때문에 한문에 능하신 김봉곤 교수님이 번역을 하고, 최한기로 학위를 한 야규 마코토 박사가 해설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9월 2일 첫날 강독에는 박맹수 총장님도 참석하셨다. 강독이 끝나자 모두들 탄성을 질렀다. "지구학과 한국학의 만남"이자 "최한기 지구학 연구의 최강팀"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스터디때 읽은 <지구전요> 서문과 세계종교 부분은 <다시개벽>에 번역문을 싣기로 했다.
그리고 2020년을 하루 앞둔 어제, 2017년에 나온 클라이브 해밀턴의 <인류세> 전반부를 읽었다. 우리가 지구인문학의 대부로 생각하던 토마스 베리와 차크라바르티를 비판하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과연 경제학을 전공한 사회과학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스 베리에 대한 비판은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차크라바르티에 대해서는 꼼꼼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문제의 차크라바르티의 <역사의 기후>를 영어와 한글로 읽기 시작했다. 앞부분만 읽었는데 뜻밖에도 생태학과 지구학의 개념적 차이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2020년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예년과 다름없이 원고, 수업, 강연, 발표, 업무로 쫓긴 1년이었지만, 올해의 핵심은 단연 연구였다. "대학은 연구하는 기관이다."는 말은 일본에서 6년 동안 지도교수님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이런 얘기를 들을 기회가 없다. 한국 대학에서 주로 듣는 얘기는 취업, 영어, 등재지 등등... 우리가 여전히 외국 유학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런 풍토에서 새로운 학문이나 철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수운이 말했듯이 "사근취원(捨近取遠)"하는 관성을 버리지 않는한 "다시개벽"은 일어나지 않는다.
- 2020년 12월 31일 새벽 상주선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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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방일 의원들의 낯 뜨거운 ‘징용공’ 표현

[기자의 눈] 방일 의원들의 낯 뜨거운 ‘징용공’ 표현

[기자의 눈] 방일 의원들의 낯 뜨거운 ‘징용공’ 표현
입력 2019.08.09 04:40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해법 모색을 위해 일본을 찾은 서청원(오른쪽) 무소속 의원이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 뉴오타니호텔에서 자민당 소속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일한의원연맹 회장과 오찬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야 5당 의원 10명으로 구성된 국회 방일단이 지난 1일 1박2일간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데 대해 ‘성과 없이 왔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 일본 집권당의 2인자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과의 면담이 불발됐기 때문이다. ‘빈손 외교’를 자처했다고 꼬집는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게 실망해야 할 대목은 다른데 있다. ‘용어 사용’에 신중하지 못한 점이다. 방일단 의원들이 ‘징용공’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여기엔 여야가 따로 없었다. 단장을 맡았던 서청원 무소속 의원, 더불어민주당 맏형이었던 김진표 의원, 진보정당 대표였던 이정미 정의당 의원 모두 기자회견에서 징용공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징용공은 일본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쓰는 ‘강제동원’, ‘강제징용’과 큰 차이가 있다. 일본이 ‘강제’란 표현을 쓰지 않는 건 ‘징집된 노동자’란 뜻을 강조해 합법적 절차에 따라 모집했다는 의미다. 그 과정에 불법은 없었다고 정당성을 부여한다. 일본 포털사이트엔 ‘징용공 소송문제’로 검색되기도 하는데, ‘일본기업의 모집에 의해 노동한 그 유족들의 소송문제’라며 제3자의 시각으로 풀어놨다. 일본 정부의 책임은 없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전문가는 예전부터 징용공이란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해 왔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일본정부는 ‘징용’을 1944년 이후 국민징용령에 따른 것이고, 국제법상 강제노동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의미로 쓰고 있다. 징용이란 말이 1944년 이후 징용령에 따른 것만 의미하거나, 1930년대 말부터 이뤄진 ‘할당모집’과 ‘관 알선’은 강제가 아니라는 오해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대법원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사건’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김진표 의원은 기자들의 질문에 “결국 징용공 문제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고, 서청원 의원은 “일본 대표들이 똑같이 (한국이) 징용공 문제에 대한 배상 약속을 저버렸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정미 의원은 “지금 발생한 징용공 문제도”라고 언급했다. 국제적으로도 강제징용, 특히 강제동원이라고 일부러 표현하는 게 맞다. 외교에서 글자 하나가 갖는 의미와 파급력을 따져봐야 했다.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이 지난달 10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에서 대법원 판결을 거듭 ‘징용공 판결’이라고 했다가 위성곤 민주당 의원으로부터 지적을 받은 사례를 왜 몰랐을까.

단어 하나 잘못 사용한 걸 지적하는 게 과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적지’에 가서 상대 측 ‘책임회피 프레임’에 장단을 맞춘 무지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류호 정치부 기자 ho@hankookilbo.com

촛불 정권, 일본과 숙명적 갈등에 빠져들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촛불 정권, 일본과 숙명적 갈등에 빠져들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촛불 정권, 일본과 숙명적 갈등에 빠져들다

등록 :2020-11-03 17:21수정 :2020-11-04 02:38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09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3년8개월 만에 승소 판결을 얻어낸 2018년 10월30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피해자 이춘식(오른쪽)씨가 소감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일본의 우려를 받아들여 대법 판단에 개입한다는 것은 촛불의 염원을 받아안은 문재인 정부가 사법 적폐에 가담한다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 판결은 매우 복잡미묘한 ‘내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대법 판결의 결론은 2005년 이후 한국 정부가 지켜온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2018년 9월18~20일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다”는 약속을 받아낸 문재인 대통령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한-미 정상회담과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평양공동선언의 성과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문 대통령은 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나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진전된 합의가 있었다” “이제 북한의 핵 포기는 북한 내부에서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공식화됐다”고 말했다. 트럼프 역시 “2차 미-북 정상회담을 머지않은 미래에 하게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문 대통령의 26일 유엔 총회 연설은 한국인들이 오매불망 염원해왔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향한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 찬 감동적인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은 오랜 고립에서 스스로 벗어나 다시 세계 앞에 섰”다며 “북한이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이끌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판을 벌여줬으니 이제 북이 세계 앞에서 비핵화 의지를 재확인할 차례였다.

초미의 관심 속에 이뤄진 리용호 외무상의 29일 유엔 총회 연설은 한국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리 외무상은 “(6·12) 조-미 공동선언이 원만히 이행되려면 수십년 동안 쌓아온 불신의 장벽을 허물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조·미 두 나라가 신뢰 조성에 품을 들여야” 하는데도 “미국의 상응하는 화답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에 대한 북의 결론은 “그러한 상태에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먼저 핵무장을 해제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에 요구할 ‘상응조처’의 내용을 밝혔다. 리 외무상은 2017년 말 이후 북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멈추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며, 그에 비해 “(유엔) 제재 결의는 해제되거나 완화되기는커녕 토 하나 변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결국, 북한이 원한 것은 ‘종전선언’이란 정치적 선언이 아닌 향후 경제개발을 위해 꼭 필요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의 해제’였다. 영변 핵시설과 유엔 제재를 맞바꾸려는 북한의 시도는 다섯달 뒤 ‘하노이 노 딜’이란 파국을 불러오게 된다.

리 외무상의 연설이 이뤄지기 나흘 전인 25일 뉴욕에서 한·일 정상이 만났다. 이 무렵 일본은 한국에 말 못 할 불만을 쌓아두고 있었다. 첫째 이유는 한국이 한·미·일 3각 공조를 통해 북한이 진심으로 핵을 포기하도록 압박하는 대신 유화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역사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2·28 합의를 무력화했을 뿐 아니라, 곧 나오게 될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우려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일본 총리관저 자료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문 대통령에게 “징용공 문제에 대해 우리 나라의 기본적 입장에 기초해 다시 한번 문제 제기를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지만, 청와대 자료에는 12·28 합의의 결과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소개돼 있을 뿐이다. 이튿날인 26일 이뤄진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한국은 대법 판결에 대한 우려를 전하는 고노 다로 외무상의 발언을 생략한 채 “2주 뒤로 다가온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발표 20주년을 맞아 실질 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확인했다”고 언급하는 데 그쳤다. 이는 정부가 대법 판결에 대한 일본의 깊은 우려를 의도적으로 무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은 일단 불만을 눌러 참았다. 남북이 주도하는 ‘대화의 흐름’이 70여년간 이어진 동아시아의 전후 질서를 단숨에 허무는 상황이었다. 이 움직임이 이어지는 한 일본은 국익에 치명적인 해가 될 ‘재팬 패싱’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대화 흐름에 동참해야 했다. 아베 총리는 26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의) 납치, 핵·미사일 문제를 해결한 다음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목표로 한다는 (2002년 9월 평양선언에서 밝힌) 일본의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북한이 가진 잠재성을 풀어내기 위한 조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은 한국의 ‘의도적 무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는 2016년 말 ‘촛불 집회’란 거대한 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의 숙명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의 공백’을 통해 아이들의 죽음의 절규에 대응할 의사도 능력도 없음을 스스로 입증한 무능한 이들이었고, 12·28 합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망각하겠다는 아베 정권의 손을 들어준 불의한 이들이었다. 사법부도 마찬가지였다. 양승태의 대법원은 ‘상고법원 설치’란 대법원의 숙원 사업과 강제동원 피해배상 판결을 교환하려 한 ‘사법 적폐’의 소굴이었다. 대법원 기획조정실이 2015년 3월26일 작성한 ‘상고법원 관련 BH(청와대) 대응전략’이란 문건을 보면, 청와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 대해 청구기각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기대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묘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언급대로 대법원은 이춘식(96) 할아버지 등 원고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재판에 대한 2012년 5월 원고 승소 취지 파기환송 판결의 최종 결론을 무려 6년 넘게 미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일본의 우려를 받아들여 대법 판단에 개입한다는 것은 촛불의 염원을 받아안은 문재인 정부가 사법 적폐에 가담한다는 것과 같았다.

마침내, 10월30일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이춘식씨 등 4명이 일본제철(판결 당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일본 기업이 원고들에게 1억원씩을 배상해야 한다는 원심을 확정했다. 이 판결의 핵심은 1965년 한·일이 맺은 청구권 협정은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위안부 문제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까지 포괄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부부가 이혼해 재산분할(청구권 협정)을 끝냈다 해도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실이 있다면 그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은 남아 있다는 논리였다. <한겨레>는 이튿날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을 ‘‘재판거래’로 지체된 정의…징용피해자, 하늘서 웃을까’로 달았다.

그러나 이 판결은 매우 복잡미묘한 ‘내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대법원의 결론이 2005년 이후 정부가 유지해온 입장과 배치됐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만들어진 민관 공동위원회는 2005년 8월26일 한·일이 아직 해결하지 않은 ‘반인도적 불법행위’의 범위를 △위안부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 △원폭 피해 등 사실상 3개 문제로 한정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권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보상 문제는 한국 정부가 자체 예산으로 해결하고 남은 3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일본 정부와 외교 교섭을 벌인다는 방침을 유지해왔다. 대법 판결의 핵심은 이 ‘반인도적 불법행위’의 범위를 강제동원 문제 전반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이로써 모든 강제동원 문제가 ‘미해결의 과제’가 되고 말았다. 물론, 2005년 정부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강제동원은 일제의 불법적 한반도 지배 과정에서 발생한 정신적·물질적 총체적 피해”라는 논리로 일본에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을 뿐(<「국무총리실 한일수교회담문서공개 등 대책기획단 활동」 백서>, 42~43쪽), 원고들이 한국 법원에서 ‘최종 승소’한다는 것까진 예상치 못했다.

일본은 이 판결이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쌓아온 양국 관계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사안이라 판단했다. 대법 판결이 나온 직후인 30일 오후 4시21분 아베 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강제동원 문제는 “1965년 일-한 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 이번 판결은 국제법에 비춰 봐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고노 외무상도 이수훈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법의 지배가 관철되는 국제사회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판결”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뒤, 잇따른 담화에서 “극히 유감이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난제’인 만큼 정부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응이 필요했다.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는 판결 당일 “판결과 관련된 사항들을 면밀히 검토”할 것이며 “제반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부의 대응 방안을 마련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틀 뒤인 11월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두번째 북-미 정상회담이 눈앞에 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조만간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일본이 눈을 빼고 기다리던 대법 판결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연내 답방은 끝내 무산됐고, ‘면밀히 검토’한다던 정부의 대응 방안도 해를 넘기도록 나오지 않았다.

※ 10회에선 한-일 간 신뢰의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린 ‘해상자위대의 위협비행 및 한국 해군의 레이더 조준’ 사태를 다룹니다.




길윤형 ㅣ 통일외교팀 팀장.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등을 썼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8381.html#csidx374470b939bed72bbe86f124795c717

[톡톡일본] "징용공은 고수입" 유튜브로 퍼지는 역사 왜곡 | 연합뉴스

[톡톡일본] "징용공은 고수입" 유튜브로 퍼지는 역사 왜곡 | 연합뉴스:



"징용공은 고수입" 유튜브로 퍼지는 역사 왜곡

송고시간2020-06-21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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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원 기자


군함도 역사 왜곡한 산업유산정보센터는 빙산의 일각



일본 정부는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이 유네스코 세게 유산에 등재될 때 징용을 비롯한 역사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약속했으나 최근 공개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은 약속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진합성, 일러스트 (군함도 사진: 이재갑 작가)]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징용 현장인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일본 산업시설을 소개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센터)가 공개된 지난 일요일 도쿄의 한국 언론사 기자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산업유산정보센터 입구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기자들은 제한된 전시 내용을 최대한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센터 측은 기자들을 따라다니며 사진 촬영을 제지하는 등 뭔가를 감추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전시물은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했다'는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하고 있었다.


징용을 포함한 역사 전반을 알리겠다고 약속해 놓고 뒤통수를 친 셈이라서 한국 정부는 도미타 고지(田浩司) 주한일본대사를 불러 강하게 항의했다.



도미타 고지(田浩司) 주한 일본 대사가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로 초치돼 항의를 받은 후 외교부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문제는 역사 왜곡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센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크고 작은 역사 왜곡 내용이 인터넷을 타고 계속 확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튜브에서 일본어 '징용공'(徵用工)을 검색어로 넣으면 '한국인이 말하는 징용공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조회 수 85만을 넘어 2위에 올라 있다.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소개한 영상 속 남성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나 징용 피해자들의 증언과 동떨어진 설명을 일본어로 늘어놓는다.



조선인 징용 피해자의 존재를 기재하지 않은 군함도 안내 팸플릿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징용 피해자가 "애초에 모집공(모집한 공장 노동자)이었다"며 "재일한국·조선인이 자주 입에 담는 '강제 연행에 의해 억지로 일본으로 끌려왔다'는 주장인데 이것도 종군 위안부(일본군 위안부)의 거짓말에 비견되는 날조"라고 주장한다.

또 "당시 순사가 월급 45엔, 그리고 징용공 모집공은 월급 50엔, 덧붙여 말하면 위안부는 월급 300엔"이었다며 "상당히 고수입의 직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한 모집공이며 오히려 당시 조선인은 불만을 얘기할 수 없는 훌륭한 대우를 받았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유튜브에서 한국어로 '징용'이라고 검색하면 징용 피해자의 증언 등이 조회 수 상위에 오르는 것과는 대비된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징용 현장인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에 남아 있는 건물 [연합뉴스 자료사진]

일반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가 운영하는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사이트에도 징용의 가혹한 실상을 감추는 자료가 줄줄이 게시됐다.

이 사이트는 "군함도에 대한 오해가 서적, 신문, TV, 영화 등 미디어를 통해 세계에 퍼지려고 하고 있다"며 군함도에 살았던 여러 주민의 증언을 유튜브와 연계해 실었다.

하시마에서 출생했다는 재일 한국인 2세 스즈키 후미오(鈴木文雄, 한국명 김형도, 1933∼2019)는 자신이 하시마에 살 때 "귀여움을 받았다"고 인터뷰 동영상에서 말한다.

도쿄 소재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소개된 군함도

[산업유산정보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하시마에서 조선 출신자가 알몸으로 노예 노동을 해야 했다. 달아나면 탐조등으로 비추고 추격당했다. 소년이 부당하게 일 시킴을 당하고 채찍으로 맞았다. 학대당했다. 감옥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지적에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반응한다.

이어 만약 그런 것이 있었더라면 재미로라도 보러 갔을 것이고 감옥이 있었다면 녹슨 창살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라며 징용 피해자에 대한 가혹행위가 마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일본어 '징용공(徵用工)'을 검색어로 넣어 유튜브를 검색한 결과, 조회 순 정렬 화면 [유튜브 검색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스즈키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오장'(伍長)이라는 직책을 맡아 부하를 몇 명 두고 있었다.

그의 부친과 징용 피해자와의 지위는 매우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즈키는 "하시마에서 나간 것은 내가 2학년, 3학년이므로 딱 (태평양) 전쟁이 시작하고 나서"라고 말하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하시마를 떠난 그가 얼마나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파악했는지, 기억이 명확한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군함도로 징용된 피해자인 최장섭(2018년 별세) 씨는 2017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면이 바다인 하시마에서 '감옥생활'을 3년간 했다"면서 "속옷만 입고 탄광 밑바닥에서 작업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참혹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한 바 있다.



징용 피해자인 최장섭 씨가 2017년 7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징용 당시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사이트는 이런 점을 고려했는지 "증언자의 기억에 근거한 것이며 사실이 모호한 점이 포함된 것에 유의해달라"고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주민들의 증언을 활용해 징용 피해자들이 증언한 가혹한 현실을 부정하는 셈이다.

고령의 징용 피해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 역사를 왜곡하는 콘텐츠가 더욱 활개를 칠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sewonlee@yna.co.kr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 일본인이 쓴 솔직한 한국 ‘징용 판결’ 비판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 일본인이 쓴 솔직한 한국 ‘징용 판결’ 비판


자유통일강대국코리아 (역사/외교)

자유통일강대국코리아 (역사/외교)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 일본인이 쓴 솔직한 한국 ‘징용 판결’ 비판
한 애한파 일본인의 쾌도난마 한국 대법원 ‘징용 판결’ 비판 ... 합리적인 한국인이라면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징용공 문제 해결 방안 담겨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등록 2020.12.15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이른바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라는 역사적 판결로서 일본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을 제소한 한국의 원고 네 사람에게 해당 피고 회사의 배상을 명령했다. ‘징용 판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원고들은 일제시대 당시 징용공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원고들 중에서 실제 징용공이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책은 이처럼 일제시대 징용공 문제와 관련 우리들이 원천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실관계부터 바로 잡으며 시작한다.


원 저자인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모라로지연구소 및 레이타쿠대학 교수는 1977년부터 한일 양국을 넘나들며 각종 교류활동을 해왔고 이제는 어지간한 한국인보다도 한국어를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친한파(親韓派)’를 넘어 ‘애한파(愛韓派)’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를 넘어서 징용공 문제로 극한 대치로 치닫고 있다. 양국의 국민감정도 이제 더 나빠질 수가 없을 정도다. 이에 그는 일단 자신의 ‘제 2의 고향 사람들’에게 징용 문제와 관련 자신의 ‘제 1의 고향 사람들’의 입장부터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전하는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오직 진실만이 두 고향 사람들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게 선(善)을 믿는 그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온 작품 중 하나가 이번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 한국어판(원제 : ‘날조된 징용공 문제(でっちあげの徴用工問題)’)이다.



▲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 한국어판 표지



한국의 입장이 있듯이 일본도 일본의 입장이 있다


이 책은 서두에서 한국의 ‘징용 판결’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판결에 대한 비판이지만, 전문적인 내용은 최대한 피했기에 수월하게 읽힌다. 니시오카 교수에게 ‘징용 판결’은 무엇보다도 일단 국제법 위반이다. 어디까지나 한국 내 사법 판결 내용을 두고서 한국의 기관이나 기업이 아닌, 아예 다른 법질서를 적용받는 국가인 일본에 강요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징용 문제는 양국 간에는 한일국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 협정’(이하 한일협정)으로 공식적으로 종결됐다. 국내법이 국제법(조약)에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에 한국이 징용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다시 일본에게 제기하겠다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양국 국교의 파기를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한국인들이 인식해야 한다고 니시오카 교수는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이 문제는 절대로 일본의 특정 정권이 수용하거나 수용할 수 없거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일본 통치시대’는 유감이나, 그 자체를 불법화해서는 곤란하다


니시오카 교수에게 있어서 한국 ‘징용 판결’의 가장 결정적 무리수는 바로 그 법리에 ‘일본 통치불법론’을 가져온 부분이다. 언급했듯이 원고들은 징용공이 아니었다. 1944년 9월, ‘징용’ 이전에 1939년부터 ‘모집’ 또는 ‘관알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실상의 자발적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이에 한국 대법원은 이들을 어떻든 ‘강제징용’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으려고 일본 기업에 배상을 명하고자 일제시대 전체를 아예 불법화해버린다. 하지만 니시오카 교수는 이런 법리가 동원되는 경우의 파장을 한번 예상해보라고 한다. 만약 일제시대 전체가 공식적으로 불법화되어버린다면, 당시 일제의 시책을 어떤 식으로건 따랐던 당시 조선반도 출신 사람들은 모두가 나름의 배상을 요구할 공식적인 권리를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 일본으로서는 아예 한해 국가총생산 전체를 한국인들에게 위자료로 내주더라도 아마 배상이 완료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1910년의 한일병합 조약이 불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측의 정치적 주장일 뿐, 현재 국제사회에서 국제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도 전혀 아니다. 식민지 배상이라는 것 자체가 그 어떤 나라들에서도 국제법상의 전례가 없다. 결국, 한국이 이 문제를 일본에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면 남는 방책은 사실상 무력 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한일 양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이에 니시오카 교수는 일본인으로서 일제시대가 현 한국인들에게 분명 불행한 시대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하지만, 한국이 어떻든 한일협정 때 관련 일정한 대가를 얻어내고 국가발전을 위해 쓰기도 한 만큼, 이제와 일제시대 전체를 불법화하는 것만큼은 한국인들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한일 간 미래지향적 관계를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1) 당장에 한국과 일본은 북조선과 중공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고,
(2)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법치라는 공통의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3) 무역이나 투자로서도 강한 상호결속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가. 

양국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과거사는 과거사의 문제로서 각국이 스스로 정리를 해야 한다. 물론 과거사에 대한 양국의 입장, 시각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제법까지 뒤엎는, 과거사에 대한 양국의 정색은 양국의 현재와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일기본조약이 무시된다면 일본이 한국에 청구해야 할 재산권은 더 많다


니시오카 교수는 일제시대 청산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커다란 오해 문제도 하나 지적한다. 한국인들은 징용 문제로 대표되는, 일본에 대해서 어떤 재산상의 막대한 채권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이 청구권이 이전 군사 정권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처리되었으며, 문민 정권에서 이 문제가 바로잡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나 이 청구권 문제가 정말로 군사 정권에서 비정상적으로 처리되었는지는 논외로 하고, 니시오카 교수는 만약 과거 한일협정을 이제와 뒤엎겠다면 당시에 포기된 일본의 한국에 대한 막대한 청구권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국가의 청구권은 아니더라도 개인의 청구권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식, 한국 사회가 이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집착한다면 이는 한국인들에게 오히려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일본은 국제법상 과거 조선반도에 남겨두고 간 공장, 가옥 등 부동산을 비롯 여러 재산권이 있었지만 한일협정 때 국교정상화를 위해서 결국 이를 완전히 포기했다. 상식적으로도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의 각종 재산이 많았겠는가, 조선인들의 각종 재산이 많았겠는가. 양국의 국민들이 당시의 권리를 양국의 법정에 이제부터 마구 요구하기 시작한다면 그게 궁극적으로 한국이 좋은 일이겠는가, 일본이 좋은 일이겠는가.


‘징용’이 아닌 ‘전시동원’


책 후반부에서 니시오카 교수는 본격적으로 ‘전시동원’의 실태를 들여다본다. ‘징용’이 아니라 왜 ‘전시동원’인가. 사실 ‘징용’은 조선인들에게는 1944년 9월 이후에 적용됐으며, 실질적으로는 채 6개월도 추진되지 못했던 일이다. 지금 많은 한국인들은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에 건너가게 된 계기가 오직 일제의 공권력에 의한 ‘강제연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한일병합 이후 당시 조선반도의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실제로 종전 당시 200만 명에 달했던 일본 거주 조선인들 중에 80% 가 아예 ‘전시동원’과도 전혀 무관하게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었을 정도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부터가 이미 ‘조선인 강제연행’설의 엄청난 오류를 보여준다.


조선에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는 거대한 흐름은 당시 자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부정도항자’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5년 동안 무려 110만 명이 일본으로 이주를 요구했고, 물밀듯한 요구에 이중 6할은 결국 불허가 되기도 했다. 그런 속에서 1930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에서 발각된 부정도항자가 조선으로 송환된 경우만 3만 4천명에 이른다. 소위 ‘전시동원’은 이런 거대한 이주 흐름의 1할 밖에 되지 않았으며, ‘전시동원’도 법적 강제력이 수반된 ‘징용’은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시동원’에 있어서 ‘모집’은 1939년부터, ‘관알선’은 1942년부터, ‘징용’은 1944년 9월부터다. 심지어 이 시기에서조차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완전히 자발적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60% 였다. 즉, 일본에게 있어선 ‘전시동원’이란 어차피 조선에서 일본으로 쏟아지고 있었던 노동력을 전쟁 수행에 필요한 산업에 효율적으로 배치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을 뿐, 애초 일본으로 건너갈 의사가 없는 조선인들을 마구 색출하여 ‘노예사냥’을 하듯 끌고 간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게 니시오카 교수의 결론이다.



▲ 저자인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왼쪽), 역자인 이우연 박사(오른쪽)



조선인 전시노동자의 수기, 사상 최초 번역 공개!


그렇다면 일본으로 건너간 노동자들은 과연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노예노동’에는 종사했을까. 이 역시 절대 사실이 아니다. 니시오카 교수는 ‘전시동원’ 중에서도 가장 강한 법적 강제력을 갖고 있었다는 ‘징용’과 관련 조선인 노동자 둘의 수기를 공개한다. 한국에서는 사상 최초로 번역 공개되는 내용이다. 먼저 히로시마 도요공업에 징용됐던 정충해 씨의 경우다. 정 씨는 회사 기숙사에서 1인 당 2첩의 큰 방에다가 신형 침구를 제공받았다. 전시 식량난 속에서도 삼시 세끼를 보장받았고, 140엔의 급료를 받았다(당시 순사 초임이 45엔, 병사가 10엔). 저녁식사 후에 잔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도박을 즐기는 경우도 있었다. 수기에는 정 씨 본인이 일본인 전쟁미망인과 밀회를 즐기는 내용까지 나온다.


다음은 요됴시카단듀테츠 공장에 징용됐던 가네마야 쇼엔 씨(창씨개명)의 경우다. 가네야마 씨는 동료와의 말다툼으로 인해서 징용으로 끌려갔던 원 작업현장에서 탈주를 한다. 탈주 이유가 작업현장의 열악함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네야마 씨는 이후 자유노동자가 되어 일본내 이런저런 작업현장을 전전한다. 허나 그는 그런 속에서도 고액의 임금을 받았고 또 고가의 물건을 구입했음을 고백한다. 전시지만 가네야마 씨는 담배도, 막걸리도 쉽게 구했다. 5일에 한번 씩 소고기를 먹기도 했다. 이런 일제시대 징용공들의 모습이 과연 한국인들이 인식해온 ‘노예노동’의 모습과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점이 있는가.


일본 지식인의 의견이지만 합리적인 한국인이라면 수용할 수밖에


왜 징용공 문제와 관련 한일 양국에 커다란 오해가 만들어졌고 또 이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가. 니시오카 교수는 책 후기에서 이 문제를 정리한다.
(1) 먼저 일본 내 반일 언론, 학자, 운동가가 좌우파 권력투쟁의 일환으로서 거짓으로 일본의 과거사를 공격한다.
(2) 다음에는 한국의 반일좌파가 여기에 휘말려서 덩달아 일본의 과거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3) 일본 외교 당국은 한국의 공격에 대해서는 외교상 문제를 들어 굳이 반론을 하지 않는데 이에 거짓은 더욱 확산된다.
(4) 마지막으로 한일 반일좌파는 공동으로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도 일본을 공격하며 사태를 아예 수습불능에까지 이르게 한다. 바로 이것이 이번에 한국 대법원이 법리로도, 사실로도 완전히 엉터리인 ‘징용 판결’을 내려서 한일 양국 국교를 파탄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든 반일 캠페인 형성의 일반적 과정이다. 위안부 문제로는 가장 극명하게 이 과정이 진행됐었다. 북조선, 또는 중공의 사주를 받는 것으로 보이는 일부 반일좌파 일본인들의 선동에 한국인들이 거듭 놀아나며 오히려 자국의 국익을 해치는 일, 과연 앞으로도 계속되도록 내버려둬야만 할까. 이를 막으려면 불편하더라도 한일 양국에서 누군가는 이제 진실을 얘기해야만 한다. 징용공 문제는 특히 진실수용 그 자체가 문제의 해결방안이나 다름없다.


“한국을 대등하게 보는 ‘애한파’ 일본인이 한일의 역사인식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 잘 알게 될 것이다. 본서에 자세하게 쓴 것처럼 거짓말에 기초한 반일 캠페인을 하고 있는 일본의 ‘반일’ 학자나 활동가는 한국에서 ‘양심 있는 일본인’이라고 칭찬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를 저해하고 한국을 대등하게 보지 않는 반한(反韓)세력이다. 아무쪼록 본서를 읽고 한국의 분별 있는 독자들이 과연 누가 한일 우호의 적인지를 깊이 생각해 준다면 정말로 기쁘겠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




* 본서는 12월 16일(수)부터 예약판매를 시작하며, 12월 24일(목)에 정식출간됩니다.

2020-12-30

[톡톡일본] "징용공은 고수입" 유튜브로 퍼지는 역사 왜곡 | 연합뉴스

[톡톡일본] "징용공은 고수입" 유튜브로 퍼지는 역사 왜곡 | 연합뉴스

"징용공은 고수입" 유튜브로 퍼지는 역사 왜곡
송고시간2020-06-21 08:07 공유 댓글 글자크기조정 인쇄
이세원 기자이세원 기자
군함도 역사 왜곡한 산업유산정보센터는 빙산의 일각
일본 정부는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이 유네스코 세게 유산에 등재될 때 징용을 비롯한 역사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약속했으나 최근 공개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은 약속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진합성, 일러스트 (군함도 사진: 이재갑 작가)]
일본 정부는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이 유네스코 세게 유산에 등재될 때 징용을 비롯한 역사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약속했으나 최근 공개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은 약속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진합성, 일러스트 (군함도 사진: 이재갑 작가)]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징용 현장인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일본 산업시설을 소개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센터)가 공개된 지난 일요일 도쿄의 한국 언론사 기자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산업유산정보센터 입구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산업유산정보센터 입구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기자들은 제한된 전시 내용을 최대한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센터 측은 기자들을 따라다니며 사진 촬영을 제지하는 등 뭔가를 감추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전시물은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했다'는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하고 있었다.


징용을 포함한 역사 전반을 알리겠다고 약속해 놓고 뒤통수를 친 셈이라서 한국 정부는 도미타 고지(田浩司) 주한일본대사를 불러 강하게 항의했다.

도미타 고지(田浩司) 주한 일본 대사가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로 초치돼 항의를 받은 후 외교부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도미타 고지(田浩司) 주한 일본 대사가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로 초치돼 항의를 받은 후 외교부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문제는 역사 왜곡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센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크고 작은 역사 왜곡 내용이 인터넷을 타고 계속 확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튜브에서 일본어 '징용공'(徵用工)을 검색어로 넣으면 '한국인이 말하는 징용공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조회 수 85만을 넘어 2위에 올라 있다.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소개한 영상 속 남성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나 징용 피해자들의 증언과 동떨어진 설명을 일본어로 늘어놓는다.

조선인 징용 피해자의 존재를 기재하지 않은 군함도 안내 팸플릿 [연합뉴스 자료사진]
조선인 징용 피해자의 존재를 기재하지 않은 군함도 안내 팸플릿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징용 피해자가 "애초에 모집공(모집한 공장 노동자)이었다"며 "재일한국·조선인이 자주 입에 담는 '강제 연행에 의해 억지로 일본으로 끌려왔다'는 주장인데 이것도 종군 위안부(일본군 위안부)의 거짓말에 비견되는 날조"라고 주장한다.

또 "당시 순사가 월급 45엔, 그리고 징용공 모집공은 월급 50엔, 덧붙여 말하면 위안부는 월급 300엔"이었다며 "상당히 고수입의 직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한 모집공이며 오히려 당시 조선인은 불만을 얘기할 수 없는 훌륭한 대우를 받았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유튜브에서 한국어로 '징용'이라고 검색하면 징용 피해자의 증언 등이 조회 수 상위에 오르는 것과는 대비된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징용 현장인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에 남아 있는 건물 [연합뉴스 자료사진]
일제 강점기 조선인 징용 현장인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에 남아 있는 건물 [연합뉴스 자료사진]

일반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가 운영하는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사이트에도 징용의 가혹한 실상을 감추는 자료가 줄줄이 게시됐다.

이 사이트는 "군함도에 대한 오해가 서적, 신문, TV, 영화 등 미디어를 통해 세계에 퍼지려고 하고 있다"며 군함도에 살았던 여러 주민의 증언을 유튜브와 연계해 실었다.

하시마에서 출생했다는 재일 한국인 2세 스즈키 후미오(鈴木文雄, 한국명 김형도, 1933∼2019)는 자신이 하시마에 살 때 "귀여움을 받았다"고 인터뷰 동영상에서 말한다.

도쿄 소재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소개된 군함도
도쿄 소재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소개된 군함도
[산업유산정보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하시마에서 조선 출신자가 알몸으로 노예 노동을 해야 했다. 달아나면 탐조등으로 비추고 추격당했다. 소년이 부당하게 일 시킴을 당하고 채찍으로 맞았다. 학대당했다. 감옥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지적에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반응한다.

이어 만약 그런 것이 있었더라면 재미로라도 보러 갔을 것이고 감옥이 있었다면 녹슨 창살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라며 징용 피해자에 대한 가혹행위가 마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일본어 '징용공(徵用工)'을 검색어로 넣어 유튜브를 검색한 결과, 조회 순 정렬 화면 [유튜브 검색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일본어 '징용공(徵用工)'을 검색어로 넣어 유튜브를 검색한 결과, 조회 순 정렬 화면 [유튜브 검색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스즈키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오장'(伍長)이라는 직책을 맡아 부하를 몇 명 두고 있었다.

그의 부친과 징용 피해자와의 지위는 매우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즈키는 "하시마에서 나간 것은 내가 2학년, 3학년이므로 딱 (태평양) 전쟁이 시작하고 나서"라고 말하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하시마를 떠난 그가 얼마나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파악했는지, 기억이 명확한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군함도로 징용된 피해자인 최장섭(2018년 별세) 씨는 2017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면이 바다인 하시마에서 '감옥생활'을 3년간 했다"면서 "속옷만 입고 탄광 밑바닥에서 작업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참혹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한 바 있다.

징용 피해자인 최장섭 씨가 2017년 7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징용 당시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징용 피해자인 최장섭 씨가 2017년 7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징용 당시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사이트는 이런 점을 고려했는지 "증언자의 기억에 근거한 것이며 사실이 모호한 점이 포함된 것에 유의해달라"고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주민들의 증언을 활용해 징용 피해자들이 증언한 가혹한 현실을 부정하는 셈이다.

고령의 징용 피해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 역사를 왜곡하는 콘텐츠가 더욱 활개를 칠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sewonlee@yna.co.kr

명자꽃 운명에 맞선 당당한 도전 문혜성 지음 | 매직하우스 | 2020년


명자꽃 운명에 맞선 당당한 도전
문혜성 지음 | 매직하우스 | 2020년 07월 17일 출간
총 4 중4 10.0 (리뷰 1개) 
eBook : 10,000원
정가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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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리뷰 (4)
쪽수 424쪽
크기 152 * 224 * 27 mm /763g 판형알림

이 책은 문혜성의 자서전이다.
저자소개
문혜성서울 종로구 원서동에서 1941년 출생.
창덕여고 1959년 졸업.
서울문리사범대(명지대전신) 가정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 일본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국영기업 KCC에서 근무.
KMC PT실 근무.
종로 동진의원 PT실 개업.
Restaurant ZOOM 경영.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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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 여자로 남고 싶다

어느 날 소녀 가장에게 주어졌던 행운과 행복이었던 결혼과 남편을 꼭 움켜쥐고 안 놓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남겨진 과제에 매달려 손에 땀을 쥐며 숨차게 달려왔지만, 한숨 돌리니 내 나이 벌써 팔십 고개가 되었다. 꿈꿔온 것들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내세울 것 없는 그냥 그런 아줌마, 할머니로 나이 먹고 있지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어디에서든 무슨 일이든 멋지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리고 모두의 추억 속에 ‘멋쟁이 여자’로 기억되고 싶다.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막을 수도 역류할 수도 없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의 여정 앞에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즈음이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가서 그 순간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돈보다 더 귀중한 남은 시간을 좀 더 아끼며 살아갈 것이다. 인생에서도 지독한 그리고 몹시 시린 추위의 겨울은 지나가고 반드시 봄이 온다, 그리고 지루하고 긴 여름은 또 찾아올 테니까. 고즈넉한 산책길을 혼자 걸으며 사색이라는 사치스러운 것도 한번 해 보고 싶다. 그렇게 살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조용한 여행지에서 둘만의 한가로움을 즐기며 행복한 여생을 보내면서, 아이들에게 고생 안 시키고 오래 앓지 않고 며칠만 아프다 자는 듯 가기를 기도해 본다.
종합검사 예약으로 며칠 운동을 못 나가니 동료들이 나의 소식을 궁금해했다. 다시 만나는 아침, 반가운 얼굴로 손잡고 안부를 건네며, 땀 흘린 운동 후의 커피 한 잔, 오가는 대화 속에 피우는 웃음꽃과 어울려 나누는 즐거운 시간. 함께 나이 먹어가는 친구가 때로는 가족이나 애인보다 소중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진솔한 친구가 한 명쯤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하지 않나. 새벽마다 우리 부부 건강을 진심으로 기도해주는 조용한 친구 한미자가 있어 나는 무한 행복하다. 실로 인생에 있어서 의미 있는 순간은 사소하고 조용한 이런 것들이 아닐까? 그러니 내게 남은 시간을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그런 환상의 순간순간들을 만끽하며 천천히 또박또박 그리고 꾸준하게 남은 삶의 마무리를 엮어가고 싶다. 오늘 건강하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내일 아침에도 일찍이 아침 운동을 나가련다.
명자꽃, 해마다 이른 봄 진한 녹색의 잎사귀 사이로 수줍은 듯 숨어 곱게 피는 꽃, 화려한 노란 꽃술을 품고 선명한 꽃빛마저 살짝 감추며 은은한 향을 뿜어내는 명자는 신뢰, 겸손의 꽃말을 갖고 있다. ‘명자꽃’ 믿음과 사랑과 행복을 함께하며 여든 해의 나를 엮어 놓은 명자의 지난날을 읽어 주신 모든 분과 ‘명자꽃’을 극찬해주신 꽃을 아는 시인 백승훈 님께 감사와 행운의 소망탑을 드린다.
마지막으로, 60년 전 내 가슴에 사랑을 묻어두고 홀연히 애처로이 억울하게 떠나가신 우리 엄마와 나에게 사랑만 깨우쳐주고 사랑과 미움의 영혼을 들고 그리움의 여운만 남긴 채 안타깝고 애석하게 요절하여 별이 된 당신에게 이 글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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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8 프롤로그

14 1장 쌀 침대 위에서 세상을 만나다

16 01 이보시오, 운전수 양반!
21 02 갓 스물 보석 같은 새색시가 양로(養老)가정에
24 03 큰 발을 물려주신 여성기독교의 선구자(진 외할머니)
28 04 시대의 한량이자 사업가 증조부
33 05 Noblesse Oblige를 행하고 요절하신 멋쟁이 할아버지
42 06 혜성(慧星), 쌀 침대 위에서 세상과 만나다
49 07 지체높고 못 말리는 어린 상전

54 2장 전쟁 중에도 마냥 즐거웠던 학교생활

56 08 똑소리 나는 서울 다마내기
60 09 엄마는 어쩜, 그리도 용감하셨을까?
66 10 공평한 체벌이 야속했던 날의 아름다운 교훈
72 11 신이 내린 하숙집 아줌마
82 12 논두렁에 찢어버린 대학합격증

92 3장 나에게 끝없는 사랑만을 주셨던 분들

94 13 얼마나 더 살면 엄마를 잊을 수 있을까?
102 14 사십 갓 넘어 혼자되신 아버지
118 15 시대를 잘못 만났던 우리 삼촌

128 4장 이대로 죽을 수야 없지 않은가?

130 16 보인 스님! 제발 저를 좀 받아주세요...
136 17 방황을 버리고 온 나에겐
138 18 엄마 없는 곳에선 난 아무것도
146 19 억울한 당좌사고, 참담한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
149 20 한땀 한땀 꿰듯 일어나 보자
152 21 취직의 행운은 대학 입학까지
161 22 다시 미뤄둔 학사의 꿈
166 23 아버지는 집행유예
169 24 쌈닭 같던 새엄마, 천성 고운 딸 미경
173 25 아버지 동기간 유복녀 은옥 고모

180 5장 소처럼 함께 한 그곳에 커다란 행운이

182 26 성큼 다가와 처녀 가장을 불하한 털보
193 27 암울함을 털어 던진 화려한 결혼식
198 28 행복으로 가득했던 나날들
208 29 우리 둘째가 기형아라니…
214 30 여보! 이삼일 검사받고 나올 테니
221 31 내가 지금 무슨 일인들 못 할까
224 32 결혼하면 사표 내던 시절 아이 엄마가 JOB을!
228 33 아픔과의 마지막 투쟁으로 지쳐가는 남편
231 34 아빠 말 잘 터 엄마 말 잘 터
236 35 신이시어! 당신 정말 너무하십니다
250 36 내 삶의 동력이 되어준 동생들

266 6장 다시 찾아온 절망 속에서의 극복

268 37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일
274 38 나는 매사에 독한 사람
277 39 다시 꺾인 일본 유학의 꿈, 그러나…
281 40 또 한 번의 좌절, 그리고 극복
286 41 기형을 극복한 둘째 아들
295 42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시련과 오점
299 43 친구 배려로 일본학과에 편입
304 44 일사불란하게 오늘도 달린다
308 45 아킬레스건 수술 32세 가장의 죽음
311 46 뒤늦게 도박으로 치른 비싼 수업료
320 47 재혼이라는 과감한 용단
337 48 너희들 기르는 낙으로 살았단다

352 7장 텅 빈 세상 나와 부딪혀 날 밝혀준 인연들

354 49 스승을 버리고 제자를 택하신 선생님
357 50 진형 언니, 꿈에라도 한번 봤으면
363 51 내 친구 Volker Braun과 Anne Marry
374 52 1995년 4월의 유럽
381 53 내 친구 고인기
383 54 이시가와겐(石川縣)의 데라쿠보(寺久保)
388 55 동서의학 최 실장님
391 56 한국어 사랑
396 57 2017년 윤달에 한 일
399 58 Patrick McMullan 신부님과 Lydia
407 59 내 80년 세 번의 사랑 중 첫사랑

413 에필로그

418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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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영(전 평촌고등학교 교장)
책 명을 명자꽃으로 정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름자가 들어있어 친숙하고 정겨울 뿐만 아니라 그 꽃의 빛깔로부터 밝고 선명함을 느끼게 되고 꽃말이 지니는 신뢰 겸손의 의미와 명자꽃의 산뜻함도 친구를 연상... 더보기
박부자(전 단국대 교수)
친구의 사무실은 동창들의 사랑방이었고 사정이 어려워진 친구들, 외국에서 고국을 방문하는 친구들은 그의 집에서 유했고, 절친의 배신 후에도 이런 보살핌은 이어지고 이제 다사다난했던 일들은 잔잔한 복으로 바뀌어 아름다운 노년을 ... 더보기
손공자(실버넷TV 편집 기자)
매사에 부지런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다해내는 능력있는 여성이고 앞서가는 탁월함을 지닌 멋을 아는 멋쟁이였고, 몸이 아파 병치렐 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총정리하는 생활수필을 남길 술 아는 자랑스러운 친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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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엄만 가끔 말씀하셨다. 그 시절에 딸을 낳고 으스댔다고…. 그렇게 양가 모두가 처음 맞는 손녀였다. 외할아버지는 갈수록 점점 더 흉포해지는 왜정 치하에서 싹싹 긁어가는 공출을 피해갈 수 없었고 더욱이 딸이 해산할 그때는 한참 보릿고개이다 보니 출산 후 쌀밥도 제대로 못 먹일 것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두 분만 아시는 비밀의 두꺼운 요를 만들어 놓으셨다고 한다. 특수제작품인 그 요 속엔 물론 푹신한 흰 솜 대신 하얀 쌀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러니 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두꺼운 쌀 침대에서 태어난 것이다.

본문 중에서 46p

3살, 6살, 9살의 우리 삼 남매는 자고 나면 항상 다른 집에 있었다. 한번은 우리 집 머슴살이를 하던 한 서방네 다락에서 셋이 앉아서 자고 있었다. 벽장이 너무 좁아 셋을 누일 수도 없었는가 보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쌀밥을 자주 먹을 수 있었던 건 엄마의 기막힌 기지와 배짱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어 알았지만, 그때 우리 집에 쌀 넣어 두는 광(안방 뒤에 윗목 측엔 뒷마루 아랫목 측엔 오시이레라고 하는 마루방이 있었는데 우리는 쌀 광으로 썼던 것 같다)은 물론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지만, 광의 마루 밑이 부엌 찬장 밑과 연결되어 있던 것이다. 엄마는 그 부엌 찬장 밑을 파고 들어가 쌀 광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고, 쌀가마마다 조금씩 표시 나지 않게 쥐가 파먹은 것 같이 쌀을 꺼내 오셨다. 정말 그 배짱이 대단하지 않은가? 우린 그렇게 엄마의 기지로 굶주리지 않고 쌀밥을 먹으며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본문 중에서 62p

엄마! 울 엄마! 사십 년도 못 채운 짧은 생을 살다 홀연히 훌쩍 세상에서 떠나버리신 우리 엄마! 난 엄마 딸로 태어나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엄만 나의 전부였고, 나를 위해선 뭐든 하셨던 엄마는 열아홉 살이나 먹은 딸에게 유산 사실도 숨기시며, 생리대까지 빨아주셨던 분, 우리 다섯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살다 가신 우리 엄마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고 마음씨까지 천사 같았다. 엄마는 그렇게 짧게 살다 떠나시려고 그리 모습도 아름답고 마음씨도 순결하고 곱고 선량하게 태어나시었나 보다.
본문 중에서 94p

밥은 굶어도 먼저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건 또 엄마의 뜻일 거라고 생각하니 패기가 생겼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내가 좀 더 독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셋째 혜정에게 양해를 구했다. 내년에 오빠를 먼저 고등학교에 보내고 너는 한해 뒤에 중학교에 들어가도록. 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을 희생해준 셋째. 지금도 셋째 혜정이는 내 가슴 한구석에 앙금이 되어 아픔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집안을 챙겨놓고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본문 중에서 138p

이사를 하기로 했다. 남편의 문패를 처음 달아 놓고 그이와 함께 드나들었던 대문. 집안 곳곳에 그이의 체취로 가득한 그 집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복덕방에 집을 내어놓자 반듯하고 향이 좋아 금방 팔렸다. 새집을 구해 이사했다. 모든 것을 잊고 마음을 잡아 새롭게 시작하려 한 그 집도 남편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하는 그런 집이었다.

본문 중에서 271p 닫기
출판사 서평
이 책을 만들면서 나는 내내 나의 큰누이를 생각했다. 큰누이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동생들을 늘 보살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구로공단에 취업해서 10여 년을 동생들의 학비와 집의 생활비를 보탰다. 문혜성 저자의 네 동생을 비롯한 가족에 대한 헌신은 참으로 대단했다.
어려서는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평탄대로를 걸었지만, 시대를 초월한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 사업의 몰락과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실질적인 소녀 가장이 되어서 동생들의 뒷바라지와 자신의 학업을 힘겹게 감내해야 했다.
가난과 고통, 절망을 끝내게 해줄 것만 같았던 행복한 결혼생활은 셋째 아이를 얻기도 전 남편의 7년여의 병상생활과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또다시 혼자서 아이 셋의 학업과 생계를 지켜야 하는 궁지로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작가는 정말 눈물겨운 노력으로 아이들 셋을 모두 대학 이상 보내며 훌륭한 일꾼으로 키워낸다. 이 정도의 성공 스토리는 사실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의 누나 엄마의 공통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내 누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을 편집하면서 나는 작가가 서술한 솔직하고 대담한 내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이 자서전을 ‘생활 에세이’라고 말한다. 보통 이런 글은 자신과 자신 주변에 얽힌 밝고 좋은 면만 부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가는 비록 자신의 가족사에 얽힌 부분이라 할 지라고 개별 인물에 대한 과감한 평가는 읽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까지 만든다. 이런 걸 다 써야 하나 하면서.
하지만 부끄러운 일들을 숨기면서 자랑하고 싶은 것만 쓴다면 그것이 과연 한 사람의 80년 인생을 정리하는 생활 에세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자신은 물론 자신과 교감했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솔직하고 과감한 서술이야말로 자서전을 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화자찬의 생활 에세이가 아니고 때론 긴장감이 흐르는 장면에 대한 서술 덕분인지 이 책을 읽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 80년의 풍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던 민초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이 책을 읽는다면 작가의 동생들과 자녀들 그리고 이런 훌륭한 분을 할머니로 둔 손자손녀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와 더불어 한 시대를 살았던 친구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난 시간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자신 있고 과감하게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작가의 용기와 포기 없는 도전이 살아온 삶의 자세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앞으로도 자서전을 집필하고자 하는 많은 분도 문혜성 작가처럼 가감 없는 솔직한 서술로 자서전이 결코 재미없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역사와 삶의 일부를 기록하는 문학작품으로 인식하며 써 주길 바란다.
아름다운 지구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모두가 인생의 주인공이다. 자신이 주인공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관점과 시점에서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 자서전이 아닐까. 다시 한번 작가의 용기와 적지 않은 분량을 너무나 훌륭하게 집필한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작가 문혜성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는 듯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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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r**ia 2020-08-07 22:00:33 총 4 중4 구매 유용해요
소설같은 자서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소설같습니다.
이 책도 희극과 비극이 씨줄과 날줄이 짜여져서 아름다운 천을 만들어 내듯 한 사람의 생애가 그렇게 보여지는 듯 합니다

무엇보다 지치지 않는 열정과 우정이 크게 느껴집니다
80년의 삶을 반추하고 고백하듯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글을 읽으며 어느때는 눈물도 나고 공감도 되고 부럽기도 했답니다.

물론 제가 이런 상황을 만났다면 이렇게 살아내지 못했을겁니다
참 대단한 어머니이시고 형제이시고 이웃이시네요

저자님의 어머니께서 6.25 동란 때 자식을 살리기 위해 양쪽진영을 왔다갔다하셨다는 대목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 때에 살아 남은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그러지 않았을까 싶네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는 그 어머니의 그 딸 이십니다. 용기와 지혜와 결단력까지
80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우리의 현재와 미래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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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꽃 kk**dol8 | 2020-08-14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그때의 경기도 동탄은 아주 시골이었고,오산역에서 내려서도 8km 이상을 걸어가야 하는 산간벽촌이었다.손녀 손자들까지 우리 식구 모두를 이끌어야 하셨으니...지금도 난 우리 할아버지의 용단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과수원집으로 이사하던 날,엄마는 짐 트럭이 신작로에 멈춰 서자 앞으로 살 집을 건나다보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않을 정도로 기가 막히셨다고 했다. (-35-)그런데 그날 그렇게 집에 안 간 것이 얼마나 천만다행이었는지 모른다.그날 통학 열차에서 생선을 실은 트럭과 달리는 열차가 크게 충돌했는데 그 칸이 바로 여학생 칸이었다.여학생들 몇 명이 사망했다.생선과 범벅된 여학생들의 사고 상황이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다.그러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렇게 그날도 언니는 언니 생일파티로 나를 위험한 곳에 안 가도록 해주었다. (-79-)해방직후 중학 5년을 졸업할 무렵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늘 불안하여 종로경찰서에 근무하는 엄마의 육촌동생 손종아 아저씨에게 부탁하여 늘 비상대비까지 했다고 한다.그러나 삼촌은 근본이 나쁘지 않아 누구를 때리거나 못된 행동은 하지 않았다.시절이 해방 후 격동기라 정국은 어수선했고 젊은 혈기에 사상 등을 논하면서 각종 모임을 하니 어른들이 더 불안했었던 것 같다. 결국 1946년 할아버지는 식구를 동탄으로 이끄시는 커다란 결단을 내리셨다. (-120-)자초지종을 들으신 아버지는 너무 좋아하시며 "너도 이제 결혼적령기이고 무엇보다 부부연이란 일생에 그리 여러 번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라고 하시며 "그간 네가 고생한 보람으로 집안도 안정되고, 성원도 군에 가고, 아이들도 컷으니 이젠 아버질 믿고 동생들을 맡기고 그 사람 의견을 따르도록 해라."라고 하셨다. (-186-)당시 40세 정도의 김영삼 씨는 너무 멋있는 훈남이었다.약간 이국적인 느낌도 있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외모에 몸짓이나 제스처가 아주 멋져 보였다.그 해 제6대 대통령 선거가 67년 5월 3일이고 이어서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어 김영삼씨는 몸시 바빳다.겸사겸사해서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몇 명의 선후배에게 인사를 함께하고 왔던 것이었다. (-200-)저자 문혜성의 본명은 문명자였다. 일본식 이름 속에는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일본에 의해 시작된 미국의 진주만 공격이 있었던 해, 1941년 7월 17일 음력 유월 스무사흗날, 지금의 종로구 돈화문 옆 현대사옥 자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소학교를 다니던 해,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부농이었던 문씨 집안에서 성장한 저자는 전쟁이하 암울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1946년 가족 전체를 가까운 허허벌판 동탄 인근으로 모두 옮기게 되었다.할아버지 주도의 가족 대이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시대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공산당을 무찌르자고 외쳤던 반공 교육 때문이었고,그로 인해 화가 집안에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한편 이 책에는 저자의 불행도 엿볼 수 있었다.저자의 엄마는 임신 휴유증으로 마흔이 되는 해에 엄마는 돌아가시게 되었다.그 과정에서 스스로 엄마의 역할을 도맡아 하였고, 집안을 일으키는 소녀 가장이 되어야 했던 그 지난날의 고통과 시련,고난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인생을 개척하게 되었다.자신과 가족을 함께 챙겨야 한다는 그 의무감 속에서 창덕여고를 졸업하였고, 자신의 뜻에 맞는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저자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강인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즉 집안의 책임과 의무에서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하였고, 비로서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사회에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이 책은 바로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였다.물론 저자처럼 부농은 아니었지만, 이 책을 통해 6.25 동란 전후의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을 상기시킬 수 있게 되었다.소위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1946년,할아버지의 의지에 따라서 가족 대이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대가 웃어른을 우선시하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이다. 소위 보수주의 적인 가정 속에서 성장한 저자가 결혼이후,스스로 사회에 나가서 자신만의 삶을 개척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으며, 저자 스스로 자신의 인생의 꽃을 피워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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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꽃 ne**orea21 | 2020-08-14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역사는 도도히 흐른다.국가의 역사이건 도시의 역사이건 아니면 개인의 역사이건 도도히 흐르는건 어쩔 수 없는 운명같은 것이다.그러나 국가나 도시의 역사 보다는 개인의 역사를 들여다 보는것이 어쩌면 시대를 더욱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동인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물론 어떤 의미로든 새로운 역사는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기 마련이고 사람들 역시 그런 상황에 젖어 살기
마련이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국가나 도시는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지만 개인의
역사는 온전히 역사의 진실로 기록될 수 있기에 우리는 어쩌면 자서전이나 개인의 평전을 기꺼이 환영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 "명자꽃" 은 지나치게 똑부러지고 똑똑했던 그러나 명자꽃 같던 아이의의 성장과 삶의 과정을 녹록치 않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물론 저자의 이야기로 말미암아 고개를 꺄우뚱 하게되는 경우도 있지만 80년 세월의 역사는 현실 세계의 우리가
갸우뚱 거릴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해야 한다.인간은 우매한 동물이다. 실제로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음만으로 이해 한다고 말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물론 심층적으로 고민하고 상대의 아픔을 진실로 동병상련의 마음처럼 이해한다면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말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게 바로 우리의 진실이자 현실임을 생각하면 팔순의 저자가 생각하고 살아왔던
생의 고락과 환희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기에는 어줍잖은 느낌이 분명 존재한다고 하겠다.
 
삶과 죽음의 행진곡, 행진곡이라면 환희에 찬 행진곡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끊어짐 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로의 행진곡을 생각하면 삶과 죽음은 인간에게 행진곡과 같은 의미를 전해 준다고 하겠다.저자의 삶에서 마주하는 삶과 죽음의 행진곡 역시 수많은 우여곡절들이 얽히고 ̄혀 있음을 볼 때 역시
죽음 보다는 삶의 환희를 노래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마땅한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살아 있음에 지난 세월의 모든 일들을 회고하며 삶의 희노애락을 전해줄 수 있는 마음의여유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저자 자신의 삶의 고락과 환희도 후손들에게는 삶의 자양분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일이다.팔순의 저자가 밝히는 삶의 시간이 그냥 허투루 살아온 삶이 아니듯 우리의 곁에 존재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삶을 다시금 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일으켜 준다.저자의 이야기 속에 끊이지 않는것이 바로 가족의 역사이고 그들의 삶이며 죽음이고 보면 우리 역시 자신을
둘러 싼 조상과 부모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한다는 철들은 의식을 갖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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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했던 인생이셨어요.. wa**ku | 2020-08-14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젊은 시절 기차 안에서 백발의 할머니가 조용히 돋보기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던 저자는 자신도 저 나이에 저렇게 평화로운 얼굴로 책에 얼굴을 묻으며 나이들길 원했었지만 책에 남긴 기록을 보아 파란만장했던 인생이셨다.  



프로필 사진을 보면 멋지게 연세드신 인자하신 모습이다. 모두의 가슴에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나 기억들은 어떨까? 따뜻? 엄숙? 각자마다 다른 성품을 가지신 어르신이실 것이다. 저자 문성례는 고3 시절에 어머니를, 결혼후 34살에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 동생 넷과 아버지를, 아들둘과 딸하나를 먹여살리면서 그 시절 드물게 대학까지 나오셨고 초창기 물리치료사로 활동하시고도 아직 활기차게 살아가시는 팔순의 노익장이시다.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라는 테레사 수녀의 말을 인용하면서, 찰나의 불꽃같은 인생, 자랑하며 내세울 것 없이 살아온 그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의 일들을 만추하듯, 굴곡 많은 한 여자가 주어진 많은 것들을 잃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무거운 십자가를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포기보다는 실패하더라도 다시 달려들어 오로지 목표한 바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보려 했다. 언제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셨고 가족, 친지, 친구들과의 희로애락의 긴여정을 자서전이라는 인생의 발자취의 활자로 남겼다. 



프롤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Autobiography(자서전)'라는 거창한 말보다 저자가 살아온 'Life Essay'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면서, 철없이 놓쳐버린 엄마와의 가슴 아픈 이별, 요절하는 남편을 못 잡고 보내며 남긴 몸과 같은 자식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울고 웃게 하는 가족들과의 흘러간 추억들을 모두 담아보았단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인자하신 할머님이 옛날 이야기를 조곤조곤해주시는데 평안함과 안타까움을 느꼈고, 긴 인생을 살아오신 모습이 강물 흘러가듯 아름다웠다.  



명자꽃의 꽃말인 겸손과 산뜻함이 저자를 연상케한다는 친구의 말처럼 친숙하고 정겨울 뿐만 아니라 그 꽃의 빛깔로부터 밝고 선명함을 느끼게 하는 인생, 그 모든 국면들 하나하나가 다 놀라운 삶의 경의를 표하게 한다. 언제나 열정이 넘치고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온 아름다운 인생, 열심히 사셨어요. 존경스럽습니다.



톱픽,  
나 살았을 때 자주 내려와! 나 죽으면 헛거여.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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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꽃 le**2001 | 2020-08-06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명자꽃이라고 하면 인기가 많거나 아름다운 꽃이라는 꽃말이 있는 것처럼 글속의 여인은 참 곱고 아름다웠나봅니다.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용기를 내야하고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처음 명자꽃이라고하여 한여인이 사랑을 받고 행복해 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여인으로서의 물질적 정신적인 행복한 삶을 통하여 성공한 한 여인의 삶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6.25라는 전쟁을 겪었고 또한 박정희대통령의 군사정부를 맞고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현재의 삶으로 이어졌지만 저자의 삶 베이비부머세대인 한 사람으로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 부분이 순간 순간 느껴볼 수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엄격하고 권위적인 통제속에서 사랑을 받고 성장했던 삶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나 일제시대를 살아온 어르신이라면 권위적이고 엄격한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사고방식속에서 여성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자는 어릴적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했고 사랑을 듬뿍받은 것이 책속에서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가정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부모의 사업이 망하고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성인이 되기전에 소년 소녀가장이 되어 남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시절 그는 일과 공부를 힘겹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하다보니 가난과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한 구석 결혼하여 둘째 아들까지 낳고 셋째 아이를 낳기전 남편의 병 수발과 죽음을 통하여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어려운 시간을 견디어 내어 세 아이를 대학까지 공부를 하게 하였고 그 다음 자기의 인생을 살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당시 여인들 엄마나 누나 장녀등은 자기 자신보다 아들을 위해 사는 삶이 여인의 삶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자는 우리 나라 6.25전쟁과 경제개발등을 통하여 사업을 하고 성공을 하여 자신의 멋진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본이 되게 하였다는 것이 너무나 존경스럽고 대단다하고 생각됩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베이비부머세대인 저로서 5.16혁명때 출생하여 경제개발의 성자을 거친 세대로써 저자의 삶을 조명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남자로 태어나서 살아갈 수 있었다면 대우받고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리라 물론 요즘 세대의 남자와는 입지가 다르지만 우리 나라의 많은 여성들은 남성을 위해 살아가야 했고 고통과 무시등을 참아내야하던 시절 그 많은 시간을 견디어 내고 지금의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에 한 사람의 여성으로 존경을 표합니다.
요즘처럼 편안하고 대우만 받으려고 하고 나만을 아는 개인주의 이기주의에서 저자의 삶 고달프로 힘들었으나 잘 살아왔구나하는 자부심이 클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을 통하여 저의 어린 삶을 비교해보았고 예전의 시대를 비교하면서 읽어볼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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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imonies | Australia Yearly Meeting

Testimonies | Australia Yearly Meeting

Testimonies

A meeting, listening to a speaker.

What is a testimony?

Quakers are agreed on particular orientations of action, called testimonies, which guide personal and corporate behaviour. They help identify what Quakers hold precious. These are all aspects of Love, the Spirit in practice. They describe the relationship of Quakers to the world and are considered in depth in this we can say

The word testimony is used by Quakers to describe a witness to the living truth within the human heart as it is acted out in everyday life. These testimonies reflect the corporate beliefs of the Society, however-much individual Quakers may interpret them differently according to their own light. They are not optional extras, but fruits that grow from the very tree of faith.
                     - Quaker Faith and Practice, Britain Yearly Meeting 1994, 23.12

There are a number of testimonies that Friends try to live by.

Simplicity

A simple lifestyle freely chosen is a source of strength.
                      - Advices and Queries, no. 41, Britain Yearly Meeting 1995

Friends believe simplicity should be a way of life. It allows them to concentrate on seeking the Truth and avoid being distracted by worldly materialism. 

Jenny Spinks approached her Regional Meeting with her leading to speak to Australian Friends about the Testimony of Simplicity, and living simply. She wrote an article about this concern:

'Our culture encourages us to consume more and more. This makes us poorer spiritually by depleting the quality of our connections with each other, the earth and the spirit. These connections are what bring us greatest fulfilment.'

Read Jenny's full article, written in 2000, Quakers and Their Simplicity Testimony.

Peace

Bring into God's light those emotions, attitudes and prejudices in yourself which lie at the root of destructive conflict, acknowleging your need for forgiveness and grace. In what ways are you involved in the work of reconciliation between individuals, groups and nations?
                   - Advices and Queries, no.34, Australia Yearly Meeting

The Quaker Peace Testimony is the testimony most frequently associated with Quakers. Peace is seen by Quakers as far more than a rejection of warfare. In the silent meditation and prayer of the Quaker Meeting for Worship, and in our search in daily life for that of God in all other people, Quakers have sought to develop an ethos which puts love of our fellow human beings into practice.

Integrity

Integrity is a condition in which a person's response to a total situation can be trusted: the opposite of a condition in which he or she would be moved by opportunist or self-seeking impulses.
                      - Kenneth C. Barnes, 1972, quoted in About Quakers, AYM 2004

Early Friends found that their experience of living in the Light caused them to examine themselves and avoid deceit. Truthful dealings with all comers became a way of life for them.

Are you honest and truthful in all you say and do? … Taking oaths implies a double standard of truth; in choosing to affirm instead, be aware of the claim to integrity you are making.
                     - Advices and Queries, no. 37, Britain Yearly Meeting 1995

Friends became renowned for their honesty. Many early Friends were entrusted with people's money and established financial institutions, such as Barclay's Bank in England which began as a Quaker bank.

Community

As I settled into meeting, aware of the people in the room already and sensing those who entered after me, I had a wonderful sense of coming home. I knew this was a place where I was valued, and could be nurtured.
                    - Anna Wilkinson, 2000, this we can say 

When we take the risk of sharing our inward spiritual lives, it is an affirmation of the seeking process and a gesture of respect and trust in others, It enriches the faith and understanding of our community and helps to strengthen our services and outreach to the world. 
                    - Helen Bayes, 2003, this we can say

Equality

How can we make the meeting a community in which each person is accepted and nurtured, and strangers are welcome? Seek to know one another in the things which are eternal, bear the burden of each other's failings and pray for one another. As we enter with tender sympathy into the joys and sorrows of each other's lives, ready to give help and to receive it, our meeting can be a channel for God's love and forgiveness.
​                    - Advices & Queries, no. 20, Australia Yearly Meeting

Friends (Quakers) believe there is that of God in everyone [and in the natural world]. That means in the eyes of God, everyone is equal. Quakers have therefore worked for equal rights for all men and women, regardless of race, creed or sexual preferences.

Earthcare

The Light in all your consciences…will let you see Creation, and the Goodness thereof, and will teach you how to use it, and order it in its place…and how to do good with it, so that there will be no Want in creation, nor Cry of oppression; but the Hungry will be fed and the naked clothed, and the Oppressed set free; and here is the blessing restored to the Creation.
​                    - James Parnell (aged 17), 1665

At Yearly Meeting 2007, Quakers took a first step towards outlining an Australian Quaker commitment to 'walking softly over the Earth'. This was further discussed at Standing Committee in July 2007, and the authors were asked to bring a Statement on Earthcare which was accepted at Yearly Meeting 2008, as a statement of a Quaker commitment to caring for the Earth.

These first thoughts stand as an indicator of a Quaker commitment to caring for our environment —

  • We affirm the Spirit in all things — all creatures, the waters, the air and the earth itself.
  • We open ourselves to learn from the Spirit in the whole of creation for it is the source of our wisdom and truth.
  • We acknowledge the need to replace our culture of domination and exploitation with a culture of community.
  • We affirm that our true community is with all life on this planet.
  • We acknowledge that our use of resources is threatening the survival of other species and damaging the health of ecological communities and the planet as a whole.
  • We acknowledge human-induced climate change as a result of our population and our personal and corporate consumption.
  • We acknowledge that time is limited, and we are called to inform ourselves, boldly discerning the way forward to act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to heal and care for the earth.
  • We seek to engage with the wisdom of Indigenous peoples and affirm our responsibility to ensure that generations to come inherit a healthy planet.
  • We affirm that Quakers desire to strengthen their witness of caring for the Earth and we are inspired to act as guided by the Spirit.
     

You can also find out more about the ways Friends are committed to Earthcare as a concern that has arisen from testimony.

Is The Economist left- or right-wing? | by The Economist | The 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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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ponses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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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on E

over 3 years ago (edited)


I used to like the economist but now realise how neoliberal it is in economics to the point where you’re trapped in groupthink. The fact Southern Europe can be allowed to have a whole generation of the young that may never be gainfully emplo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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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itry strakovsky

over 3 years ago


Y’all are pretty much center-left by American standards and center-right by European. I really love the quantative elements of the narratives your publication puts forth. I don’t find calling your pub “globalist” and walking away particula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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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H Jossey

over 3 years ago (edited)


“True progressivism” ‘neither left nor right' ‘just do what works' are things the fascists used to say.

Obama didn’t have a classical liberal bone in his body. Universal health care and no gun rights are pure government control over the individual.

Keep fooling yourself b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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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Neuro

over 3 years ago


Radical Centre? That’s laughable. Ross Perot thought he was a radical centrist.

Your paper espouses deregulation and privatisation as a good in the face of abject failures around the glove. It also likes Private Public Partnerships, even if it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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Çağrı Mert Bakırcı

over 3 years ago



We like free enterprise and tend to favour deregulation and privatisation. But we also like gay marriage, want to legalise drugs and disapprove of monarchy.

You know there is already a word for this, right? Libertarians? It is not “radical centrism”. You can’t be “radical”, if you are at the “center”.

You don’t reconcile anything… You want the corporations to rule the nation while giving s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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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Dumisa

over 3 years ago


A plausible attempt to appear neutral and thus playing it safe. I understand you want to protect your image. But I’m not convinced. You can’t be center. Either left or right. To me you are left and occasionally will side with the right on less controversial iss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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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phaestus

over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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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about neither? How about sticking to facts and gagging your editors ideological bias whatever what would be. When you put gay rights(I intentionally pick a universality because you can’t “reported on” opinion and values) with drug legalisation(another no-brainer fact wise this time, and any value judgement is ideological), you stop being…



John S. Rundin

over 3 years ago


Ha, ha, ha!

You’re right 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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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e Brovernik

over 3 years ago


Glob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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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highlight

Is The Economist left- or right-wing?
Neither. We consider ourselves to be in the “radical centre”


The 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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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27, 2017 · 3 min read





Corbynista, or Faragesque?

Some readers, particularly those used to the left-right split in most democratic legislatures, are bamboozled by The Economist’s political stance. We like free enterprise and tend to favour deregulation and privatisation. But we also like gay marriage, want to legalise drugs and disapprove of monarchy. So is the newspaper right-wing or left-wing?


“Where there is a liberal case for government to do something, The Economist will air it”

Neither, is the answer. The Economist was founded in 1843 by James Wilson, a British businessman who objected to heavy import duties on foreign corn. Mr Wilson and his friends in the Anti-Corn Law League were classical liberals in the tradition of Adam Smith and, later, the likes of John Stuart Mill and William Ewart Gladstone. This intellectual ancestry has guided the newspaper’s instincts ever since: it opposes all undue curtailment of an individual’s economic or personal freedom. But like its founders, it is not dogmatic. Where there is a liberal case for government to do something, The Economist will air it. Early in its life, its writers were keen supporters of the income tax, for example. Since then it has backed causes like universal health care and gun control. But its starting point is that government should only remove power and wealth from individuals when it has an excellent reason to do so.


“We reconcile the left’s impatience at an unsatisfactory status quo with the right’s scepticism about grandiose redistributive schemes”

The concepts of right- and left-wing predate The Economist’s foundation by half a century. They first referred to seating arrangements in the National Assembly in Paris during the French Revolution. Monarchists sat on the right, revolutionaries on the left. To this day, the phrases distinguish conservatives from egalitarians. But they do a poor job of explaining The Economist’s liberalism, which reconciles the left’s impatience at an unsatisfactory status quo with the right’s scepticism about grandiose redistributive schemes. So although its credo and its history are as rich as that of any reactionary or revolutionary, The Economist has no permanent address on the left-right scale. In most countries, the political divide is conservative-egalitarian, not liberal-illiberal. So it has no party allegiance, either. When it covers elections, it gives its endorsement to the candidate or party most likely to pursue classically liberal policies. It has thrown its weight behind politicians on the right, like Margaret Thatcher, and on the left, like Barack Obama. It is often drawn to centrist politicians and parties who appear to combine the best of both sides, such as Tony Blair, whose combination of social and economic liberalism persuaded it to endorse him at the 2001 and the 2005 elections (though it criticised his government’s infringements of civil liberties).

When The Economist opines on new ideas and policies, it does so on the basis of their merits, not of who supports or opposes them. Last October, for example, it outlined a programme of reforms to combat inequality. Some, like attacking monopolies and targeting public spending on the poor and the young, had a leftish hue. Others, like raising retirement ages and introducing more choice in education, were more rightish. The result, “True Progressivism”, was a blend of the two: neither right nor left, but all the better for it, and coming instead from what we like to call the radical centre.

The 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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