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자아 비판]
좌파는, 그들이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의 산물들입니다. 그 사회의 유기적 일부분이죠. 좌파는 그 소속 사회를 바꾸려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경우에는 그 사회의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는 많은 특징들을 이미 공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러시아 혁명의 보수화/타락을 '스탈린'이나 '스탈린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게 아주 쉽지만, 1920년대 소련 공산당 내부의 좌우파 격론에서 스탈린주의적 보수파가 '다수'의 지지를 받았던 것도 엄연히 사실입니다. 결국 스탈린주의의 길로 가게 된 그 당시의 러시아의 좌파인 공산당은, 제1차 대전과 내전을 거친 당대 러시아 사회의 수많은 후유증들을 그대로 공유했습니다. 인명 경시부터 '무력 제일주의'에 대한 확신, 아니면 '근대'와 '개발'에 대한 맹목적인 맹신까지요. 스탈린 내지 스탈린주의에 모든 탓을 덮어씌우는 건 쉽지만, 그 당시와 같은 사회, 그 당시와 같은 당의 인적 구성상으로는 스탈린 같은 지도자가 결국 내부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입니다. 그 출신 사회의 많은 특징들을 그대로 공유하는 것은 한국 좌파에서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운동권' 이론가들 중에서는 유독 서울대 등 '명문대' 비중이 높았던 거나, '운동권' 안에서 선후배 관계가 철저히 서열적인 거나,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총체적 맥락과 궤를 같이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좌파가 만약 소속 사회와 정말 질 다른 집단이 되자면 좌파의 '자성'부터 필수적일 것입니다. 오늘날 좌파로서 자성하고 자아 비판해야 할 부분들은, 제가 보기엔 예컨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의 미래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궁극적인 미래상이란, 서로 자유롭게 협동하면서 생산과 분배의 과정을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직접 생산자의 무권력 사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로의 길은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단계들로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요? 과거의 좌파는 '생산력의 국유화/사회화'를 강조해왔는데, 이 부분은 오늘날 좌파는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요? 일면으로는 예컨대 삼성전자가 이씨 왕조의 통제를 받는 것보다는 '국민 기업'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에 아마도 대부분의 좌파는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국민 기업'을 운영할 정부의 관료나 임원진은 이씨 왕조 정도나 그 이상으로 신자유주의적일 거라는 것도, 그야말로 안봐도 비디오입니다. 철도공사를 위시한 '공기업'들이야말로 비정규직 양산 등 신자유주의 견인차 역할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공기업'이 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면 그 경영에 이사회의 3분의 1을 차지할 노동자 대표들이 참여한다면 과연 달라질까요? 물론,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반대할 좌파 역시 없을 것입니다. 대찬성이죠. 그런데 독일의 경험으로 봐서는, 이사회로 가서 '경영자'의 일부가 된 노동자 대표가 신자유주의적 관료 되는 것도 그렇게 많은 시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용 형태와 원하청을 불문하여 '모든' 노동자와 생태, 환경, 그리고 소비자들의 이해 관계를 두루 다 고려하는 기업 사화화의 방식은 과연 뭘까요? 우리가 '사회주의'를 이야기하자면 이런 현실적 고민부터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둘째, 우리에게 '혁명' 같은 단어는 신성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미래의 '사회주의 혁명'은 과연 어떤 모습을 것인가요? 과거의 혁명처럼, '민주 집중제'로 운영되며 방대한 비합법/(유사)군사 조직을 가진 '혁명 전위 정당'이 결정적 순간에 폭력 수단을 써서 집권을 하는 것을, 지금으로서 적어도 산업화된 사회에선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국가의 통제 기능도 엄청나게 강화됐지만, 신자유주의가 경쟁의 주체로 길러낸 인간들로서도 지하 혁명 사업에 평생을 바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어느 (준)주변부 국가에서 이런 정당이 이런 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더라도, 러시아와 중국의 경험을 이미 아는 우리로서 집권에 성공한 '혁명 전위 정당'의 관료들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다시 편입하기를 욕망하는 순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일국 사회주의'를 시도할 것인지도 대체로 압니다. 나라의 크기와 인구 밀도, 자원의 규모에 따라 약 30년 (중국)부터 70년 (소련) 정도죠. 세계 체제로부터의 각종의 압박부터 내부적 계급 분화까지 생각해보면, 그것보다 더 장기적인 '일국 사회주의' 실험은 현실적으로 힘들 것입니다. 그러면 '철의 규율'을 가진 '전위 정당'의 일국적 집권이 아닌, 국제적이며 과정의 차원에서도 보다 더 민주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길이 무엇일까요? 역시 사회주의를 책임있게 논하자면, 그런 고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셋째, 만약 우리의 미래상과 우리의 혁명이 일국적이지 않고 국제적이라면, 우리가 이 한 가지를 뚜렷이 파악해야 합니다. 이런 '세계 혁명'의 과정에서는 이미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의 소비의 수준은 떨어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여태까지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개발이 안된 지역들에게 우리 자원의 상당부분을 배분해주고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총생산량을 하향조절하게 되면...미안하지만, 전기를 펑펑 쓰고 매일씩이나 음식 배달 시키고 아니면 노르웨이처럼 대부분의 국민이 일년에 2-3회 비행기를 타고 외국 나들이를 하면서 즐기는 삶은 마감돼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유한 나라들의 사회주의자들은, 세계 기후 위기의 해결과 콩코나 마다가스카르의 의료 시설 증축 등을 위해서 스스로의 소비의 향락을 자제할 각오가 돼 있는, 그야말로 '의식화된 신인간'들을 길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 '의식화된 신인간'들은, '사회주의가 되면 여러분들의 소비 수준은 떨어지더라도 이게 인류와 지구로서 큰 발전이 되겠다'는 우리의 솔직한 말을 듣고서 우리에게 표를 던져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게 과연 현실적으로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역시 '사회주의'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시도라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회주의자입니다. 즉, 시행착오들이 많더라도 대기업과 은행들이 사회화되기를 바라며, 제가 더 이상 아이들을 데리고 지중해 지역에 가서 휴가를 보내는 게 불가능해지더라도 노르웨이의 자원들이 콩고나 마다가스카르와 무상으로 공유되길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구와 인류에 도움이 된다면 소련 시절처럼 36평방키터 아파트에서 다시 거주하고 매일 값싼 감자나 흑빵을 주식으로 먹으면서 여생을 보낼 자신은 있습니다. 이미 그런 삶을 해봤기에 별로 두렵지도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행복감 같은 걸 느낍니다. 그러나 솔직히, '소비 욕망 자제'를 모토로 할, 새로운 혁명을 노르웨이 인민들에게 호소력있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후 위기 상황 속에서는 아마도 '생산, 소비의 자제'를 이야기하기가 쉬어지겠지만, 그래도 자본주의가 여태까지 만들어낸 다수의 대중 심리를 바꾸는 게 절대 간단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득력 있게 이런 이야기하자면, 제가 위에서 언급한 부분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고민이 필요할 것 같고, 이런 고민들의 부족에 대한 자아 비판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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