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31

The Japanese Discovery of Europe, 1720-1830: Revised Edition (9780804706698): Donald Keene: Books

The Japanese Discovery of Europe, 1720-1830: Revised Edition 
 Donald Keene: Books

Top customer reviews

Grey Wolf

4.0 out of 5 starsExcellent detail, great informationDecember 23, 2013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The Japanese Discovery of Europe is said to be rather dated, but the story that unfolds is one of a desire to learn, fighting against the strictures of court and shogunate that said Western knowledge was, on the one hand, wrong, and on the other hand dangerous. So-called Dutch learning would eventually revitalise Japanese science but it would be a long haul, and many of the early advocates would be imprisoned or exiled, if not worse. The immediacy of the Russian threat on Japan's borders is very interesting to read about in this early period, adding another weapon to conservatism's arse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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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en O. Murray

VINE VOICE
5.0 out of 5 starsclassic history of ideasApril 15, 2002
Format: Hardcover

This is an expansion and revision of a book from early (1954) in the career of the great Columbia Japanologist Donald Keene. It surveys "the growth and uses of Western learning: in late-18th and early 19th-century Japan. The primary figure Keene writes about is Honda Toshiaki (1744-1821). 

74 of the books 246 pages are a translation of parts of Honda's <i>Secret Plan for Managing the Country</i> and <i>Tales of the West.</i>

Keene provides a fascinating account of Japanese views of what Europe might be like based on emerging understanding of European knowledge and technology. Before American gunships forced Japan open and the Meiji "restoration" embarked on a program of rapid industrialization (and militarization), there was a base of thought on trying to adapt what seemed useful from the west in ways compatible with Japanese conceptions of the essence of Japaneseness. 

Keene's classic book provides valuable background to understanding the rapid "modernization" and militarism of the late-19th-century (with successful wars with first China, then with Russia just before and just after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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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Green

4.0 out of 5 starsIf you ever wanted to know...March 1, 2006
Format: Paperback

If you even wanted to know how the Japanese saw themselves as a county and as a people in relation to the Europeans and other citizens of the world during the height of the Age of Enlightenment in Europe, this is the book to pick up and read. Donald Keene offers a respectful, insightful, and tenored work that explores in detail the relationship that the Japan of the time period had with the Dutch traders and other foreigners who brought with them new and exciting inventions and ideas. 

The proselytizing Portuguese pushed their rugged brand of Catholism, eventually getting them kicked out. The empire making Russians had territory just North of Japan's main island. Though written in the mid 1960's Keene stirs clear from putting the Japanese and the Europeans on pedestals of influential superiority, which gives this book it's enduring qualities. As I read it. I got the sense that all of the players (countries) involved were acting and reacting to the world in which they lived.

Among some of the major historical figures, Honda Toshiaki, one of the original rangaku (Dutch culture in Japan) scholars, along with Otsuki Gentaku, Shiba Kokan, Sugita Genpaku, and others are mentioned in Keene's informative book as big men in Japan's pivotal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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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 그의 삶에서 예수가 부활했다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 그의 삶에서 예수가 부활했다



그의 삶에서 예수가 부활했다

조현 2018. 03. 30
조회수 2006 추천수 0

1일은 부활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 언제까지 부활을 기념만 할 것인가. 오직 그런 부활을 신화니 기념일로만 박제화한다면, ‘그리스도’는 만우절의 거짓이 된다. 믿는다는 것과 삶의 불일치, 자본주의에서 더욱 벌어지는 그 간극이 그 거짓신앙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피흘림,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려는 이들이 이땅에 있었다. 우리 곁에 온 예수였다. 우리 곁에 머물렀던 참그리스도인 9명의 삶이 <사랑하며 춤추라>(신앙과지성사 펴냄)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예수의 삶을 살아낸 어른들의 이야기’란 부제가 붙었다.




  •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 성자적 의사 장기려, 
  • 풀무원공동체의 창설자 원경선, 
  •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 김용기, 
  • 광주의 여성운동 대모 조아라, 
  • 원주의 헌신적 선교사 나애시덕, 
  • 거지와 고아들의 아버지 황광은, 
  • 고난의 삶의 대변자 권정생, 
  • 맨발의 성자 이현필
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나 이들 가족 혹은 제자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9명의 각자의 저자로 나서 그 감동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살려냈다.




 발문을 쓴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는 “지난 세기 이 척박한 땅에 태어나 한 세상 살다 떠난 그들의 삶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 내면의 어둠이 조금씩 스러진다”며 “그들의 삶과 실천은 온통 욕망 주위를 맴돌며 사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을 환기시키지만, 새롭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일깨운다”고 했다. 추천사를 쓴 김상근 목사(한국방송공사 이사장)는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간 분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밝혔다. 또 김신일 박사(전 부총리,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는 “작게라도 흉내 내며 조용하고 진실하게 예수를 따르자”고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눈물의 감동만 주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택한 고난과 헌신, 사랑이 얼마나 큰 삶의 기쁨, 특히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기쁨의 자장으로 끌어올리는지를 보여준다. 일화 한토막씩을 통해 그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본다.

 

 ◇대천덕(양혜원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저)

 경제와 영성을 연결한 예수원 철학의 중심에는 코이노니아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것을 대신부님은 ‘물만두 신학’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물만두는 다른 음식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만두에는 껍질이 있지 않습니다? 껍질은 밀가루로 만든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별 맛이 없습니다. 껍질 속에 고기가 있는데 만두의 참맛은 만두소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껍질이 없으면 속에 든 고기가 다 풀어지기 때문에 껍질로 꼭 싸주어야 합니다. 껍질이나 소나 둘 다 필요합니다.”

 대신부님은 경제 정의와 성령의 은사를 연결시키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 은사가 많았는데도 병든 자들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드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라고 대신부님은 설명한다. 기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누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나눔을 해야 하나님도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교인들이 서로 나우어 주고 서로에 대하여 진실한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코이노니아는 믿는 사람들이 서로 자원하여 물질을 나누는 것이고 이러한 만두 껍질이 있어야, 만두소, 곧 하나님의 능력인 고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대신부님은 이것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가르치셨다.

  

◇장기려(지강유철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저)

 선생의 다른 인간됨은 어떤 사람을 거지, 대통령, 행려병자 등 그가 가진 권력·돈·신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생은 평양에서든 부산에서든 자기 집에 구걸 온 거지와 겸상했다. 겨울에는 입고 나갔던 코트를 거지에게 벗어주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복음병원장 시절, 사택에 숨어들었던 도둑이 책이라도 갖다 팔면 돈이 될까 싶어 가지고 나가려다 선생에게 들켰다. “젊은이, 그 책 가져가면 고물 값 밖에 더 받겠소? 그러나 나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라오. 내가 그 책값을 쳐 줄테니…”하며 돈을 주고 놓아 주었다.

 선생이 6·25전쟁 이후 고집을 부리며 무료 병원을 계속한 것이나, 부산대학교 뒤편 창고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았던 것은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산 간질환자들의 모임을 알고 평생 그 회장직을 놓지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정부보다 10년이나 먼저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던 것, 그리고 몇 년 뒤 보사부 장관이 영세 사업자를 위한 의료보험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23만 명의 회원을 둔 의료보험조합을 ㅁ나들 수 있었던 것 또한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그런 선생에게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든 거지든 행려 병자든 모두가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원경선(원혜영 국회의원·원경선의 아들 저)

 전 세계 인류 중 4분의 1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과 2초에 1명꼴로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결심하면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사림이다. 곧 국제기아대책본부에 가입했다. 정농회 회원들, 기독동신회 교인들, 풀무원 회도도 적극 동참케했다. 아버지는 풀무원 회사의 직원들을 교육할 때마다 나에게 갈비탕 두 그릇 사 줄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했다. 사람들은 다 손을 들었고 아버지는 그들에게 갈비탕 두 그릇 값인 만 원씩을 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마련한 기금들이 보태져 에티오피아로 전해졌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 모임을 갖기만 하면 자식들은 물론 손자들에게도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얼마를 내놓을 것인가를 적어내라고 했다. 귀가 뜨일 때마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자란 손자들은 월급을 받을 나이가 되자 자동이체로 통장을 등록하고 다달이 일정 금액을 기부하게 되었다.

  

◇김용기(김장생 연세대 인문예술대학 교수 저)

 가난안농장에서의 공동체의 일과는 새벽 4시에 김용기의 차남 김범일이 치는 개척의 종과 함께 시작된다. 개척의 종은 매일 세 번씩 10차례를 친다. 첫 번째 종은 육체의 종이다. “육체의 잠을 깨자. 육체의 잠이 들면, 나태와 빈곤의 늪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종은 정신의 종이다. “정신의 잠을 깨자. 정신의 잠이 들면, 주권을 빼앗기게 된다.” 세 번째 종은 영혼의 종이다. “영혼의 잠을 깨자. 영혼의 잠이 들면, 하나님을 빼앗기게 된다.”

 기상 후 애국가를 4절 까지 부르고, 4킬로, 8킬로, 12킬로 구보를 한다. 구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정신 개척’, ‘우리는 젊다’, ‘역사는 부른다’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 7시부터 아침식사 전까지 아침기도회를 한 후 식사를 한다. 가난안농장에서의 식사는 구호로 시작을 한다. “먹기 위하여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하여 먹자.” 주식은 고구마였고 음식은 조금이라도 남길 수 없었다. 치약은 3미리, 비누는 남자 2번, 여자 3번만 사용한다. 저녁 10시까지 노동은 계속 된다. 생일이나 회갑 또한 이곳 가나안에서는 없다.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고 기쁜 일임으로 매일매일을 새로이 태어나는 자세로 살아야지 일 년에 한번 생일상을 차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회갑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허례허식이 된다며 자신부터 생일이나 회갑을 없앴다.

 

 ◇조아라(유성희 한국 YWCA 사무총장 저)

 여성으로 조아라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26세에 남편을 잃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살기에도 조아라의 인생은 벅찬 것이었다. 자신의 아이들은 뒷전에 두고 버려진 아이들을 챙기느라 분주했던 조아라는 평생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둘째 아들이 장로 장립을 받던 날, 조아라는 직접 안수를 하면서 울고 말았다. 기쁘면서도, 서럽고 힘들었던 세월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이 땅의 수고를 모두 마친 후 그녀가 자신의 방에 남긴 것은 평생 사용했던 낡은 재봉틀과 구석구석 닳은 가방 한 개와 손수 만들어 입었던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조아라는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품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싸다. 우리도 조아라처럼 살 수 있을까. 조아라를 닮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조아라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어렵더라도, 무섭더라도,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해야 한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물러서지 말아라.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섭섭해하지 말아라. 묵묵히 네 길을 가면 하나님은 늘 동행해 주신다.”

 

 ◇나애시덕(최종수 미 연합감리교회 은퇴목사)

 나애시덕은 2003년 케이비에서 텔레비전이 <인물현대사>에 선정한 유일한 외국인이다. 어느 감리교 목사가 자기 교인 한 사람을 입원시키기 위하여 자기 교인 한사람을 입원시키기 위하여 엑스레이 사진을 가지고 와서 독실한 감리교인이니까 꼭 입원시켜 달라고 나 선생님에게 부탁하였다. 그런데 나 선생님은 뜻밖에도 불교신자였던 환자를 먼저 입원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감리교 목사는 대단히 화가 났다. 이 목사가 나 선생님에게, “당신은 감리교에 충성스럽지 못하다”라고 항의하면서 화를 냈다. 감리교인 대신에 불교신자를 먼저 입원시키다니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때 나 선생님은 “요양원에서 누가 먼저 입원해야 하느냐는 흉부 엑스레이가 보여주는 병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엑스레이 사진에는 감리교인, 비교인의 표시가 없지요!” 나 선생님은 고국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하여 항상 마음 아파했다.

 

 ◇황광은( 김정호 후러싱제일교회 담임목사 저)

 황광은은 거지들 고아들과 늘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당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정신을 길러줬다. 그것이 삼동 사업이었다. 종로 네거리 뒷골목에 원래가 변소였던 자리를 개조해 살 집을 마련하고,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지냈다. 여름에는 심한 냄새가 났었고 겨울에는 또 견딜 수 없을만큼 추웠다. 추운 겨울에도 고아들과 함께 거기서 잤고, 냄새나는 여름에도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훗날 와이엔시에이 총무를 지낸 현치호씨의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거기 음식을 한 끼도 먹지 않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데 그걸 어떻게 먹고 앉아 있습니까. 그러나 광은은 그 고약한 냄새나는 곳에서 보기에도 지저분한 음식을 함께 먹곤 했었지요. 아무튼 천성이 아니고는 못 할 일이었습니다.”

  

◇권정생(이철지 전 종로서적 대표 저)

 이오덕 선생은 권정생 선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조그만 교회 한쪽에 있는 부속 건물의 방 한칸을 빌려 자취를 하고 있는 그는 내게 모든 신상 얘기를 해 주었다. 그는 한 해 동안 총 수입이 4천5백 원으로 살았다고 했다. 4천 원은 원고료 수입이고 5백 원은 어느 낯선 할머니가 주고 갔다는 것이다. 신춘문예 시상식도 못 갔단다. 입을 옷도 여비도 없었고, 건강 때문에도 갈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다만 동화를 쓰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듯한 이 작가가 깜박거리는 목숨의 불을 간신히 피워 가면서 40년 가까운 반생을 온갖 신체적 물리적 또 정신적 고통 속에서 얼마나 처절한 생활을 하여 왔는가 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 민족의 온갖 불행을 한 몸에 지니고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후 어느 가을날에 그의 토담집을 다시 방문했다. 권 선생은 그의 표현대로 불쌍하게 떨어진 낙과를 주워 모았다면서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일행들은 흠집 난 곳을 피해 가며 맛있게 먹었다. 먹성이 안 좋은 편이라 주저하는 내겐 먹어보라는 흰소리도 하지 않았다.

 방 한구석에는 흰쌀밥 담은 양재기가 놓여 있었다. 그 밥을 셋으로 구분하고 한쪽은 ‘누렁이’ ‘꾸구리’ 몫, 다른 한쪽은 ‘생쥐’ 몫, 또 다른 한쪽은 ‘당신’것이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이 없다.

 

 ◇이현필(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저)

 이현필은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현필이 한국전쟁 중 설립한 동광원에서는 언님(동광원의 수녀)들이 출가 전 낳은 아이들을 고아들 속에 넣어 함께 키웠다. 자기 자식들과 고아들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먹는 것도,입는 것도 똑같이 키웠다.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었다. 그때 아이들이 오는대로 받다보니 먹이고 재우는 아이들이 정원을 몇배나 넘는 600명이 넘었다. 제대로 허가받은 고아원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많아지자 광주시청에서 아이들을 모두 다른 고아원으로 분산시켰다. 가까운 데로 보내면 아이들이 다시 찾아온다며 멀리 순천과 목포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 아이들이 절반 이상이 돌아왔다. 걸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을 빼고는 대부부의 아이들이 며칠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동광원을 걸어 찾아왔다. 고아들을 자식처럼 대하는 그곳이 배곯더라도 그 어떤 곳보다 좋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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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救國)’의 불이 새롭게 타오르는 ‘강남금식기도원’ : 목회/신학 :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



‘구국(救國)’의 불이 새롭게 타오르는 ‘강남금식기도원’ : 목회/신학 :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




‘구국(救國)’의 불이 새롭게 타오르는 ‘강남금식기도원’
송경호 기자 입력 : 2016.08.13 20:00

강남에서 기도의 산으로…제2의 사역 펼치는 김성광 목사


▲경기도 청평에 위치한 강남금식기도원에는 한국교회의 내로라하는 목회자, 신학자, 부흥사 등과 함께 하는 ‘100만명 구국통일 기도축제’가 한창이다. 원장 김성광 목사(강남순복음교회)가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송경호 기자


“10만교회 부흥, 선진한국, 기독교국가 남북통일” 1년 365일 24시간 강남금식기도원장 김성광 목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주요 메시지다. 어느새 고희(古稀)를 맞이한 그이지만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일생을 불살랐던 느헤미야처럼,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회복을 소원하는 그의 마음은 열정적인 사명으로 충만하다




모두가 더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지어 도시 중심으로 모여들 때 그는 과감하게 기도의 산으로 사명의 근거지를 옮겼다. 그동안도 그래왔지만 교회와 나라를 바로세우고 선진한국, 통일한국을 위한 ‘구국(救國)’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위해 사명을 다하고자 함이다.



경기도 청평에 위치한 강남금식기도원은 요즘 뜨거운 성령의 불이 꺼질 틈이 없다. 한국교회 대표 목회자들과 함께하는 ‘100만명 구국통일 기도축제’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이는 김성광 목사가 강남구 대치동에 있던 교회를 천호동으로 작게 이전하고 선택한 최우선이자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강사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충만하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동길 박사(연세대 명예교수), 피종진 목사(남서울중앙교회 원로), 김진호 목사(전 감리교 감독), 오관석 목사(하늘비전교회 원로), 고용수 박사(전 장신대 총장), 정장복 박사(전 한일장신대 총장),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오성춘 박사(장신대 초빙교수),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김인환 박사(감신대 이사장) 등 70명에 달하는 강사진들이 쉴 틈 없이 영력의 메시지를 전한다.


김 목사가 경기도 청평에 쓰러져가는 우사를 개축해 강남금식기도원을 설립한 게 1983년. 그 쓸모없던 땅이 30여년 만에 연간 1백만 명에 달하는 기도의 일꾼들이 찾아오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기도원으로 변모했다. 실패와 절망, 질병과 가난에 빠진 수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다시금 행복을 찾고 든든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변화되었다.




▲강남에 있던 교회를 정리한 뒤 구국기도회를 최우선의 사역으로 정한 김성광 목사(좌측). 순복음 교단에서 ‘신앙의 어머니’로 불리는 모친 최자실 목사는 그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최자실 목사와 그의 사위인 조용기 목사 그리고 젊은 시절의 김성광 목사가 함께 한 모습 ⓒ 김성광 목사 제공


오래전부터 김 목사는 교회사적 수도원 제도와 기독교 영성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장신대와 연세대에서 영성신학에 대한 박사과정을 마쳤다. 1980년대 성장이 크게 둔화되어 갔던 한국교회의 분위기와 총체적인 위기해 처했던 당시 국내 정치 상황에서 김 목사는 초교파적인 기도처가 절실하다는 소명이었다. 교파를 초월한 제직의 영성훈련으로 교회의 내적, 외적 성숙을 통해 나라를 선진국화해 통일해야 한다는 철학이 강남금식기도원의 설립 배경이다.


김 목사에게는 그의 모친이자 순복음 교단에서 ‘신앙의 어머니’로 불리는 故 최자실 목사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할렐루야’라고 외쳐 ‘할렐루야 아줌마’로도 알려진 최 목사는 늘 “살면 전도요, 죽으면 천국”을 외치며 세계선교의 복음 전파자로서의 삶을 일생의 사명으로 여기며 살았던 인물이다.


40세의 늦은 나이에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만난 조용기 목사와 함께 성도 5명을 이끌고 서울 대조동에서 천막교회를 시작한 일화는 유명하다. 대조동 천막교회는 오늘날 전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로 성장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전신이다.


6.25 전쟁 후 가난으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불어넣은 최 목사는, 나중에 사위가 된 조용기 목사와 함께 한국과 전 세계를 돌며 놀라운 성령운동에 불을 지폈다.


13세 초등학교 나이에 집에서 가족과 시작된 대조동 천막교회에서부터 참여한 김 목사는 일관되게 목회자와 신학자의 길을 걸었고, 경제 중심지인 강남에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를 세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선진 국가의 진로를 제시했다


모친의 이름을 딴 ‘오산리 최자실 금식기도원’에서 부원장으로 있으며 작은 기도처를 국내 최대 규모의 기도원으로 발전시킨 그는 ‘금식과 기도’로 한국교회의 부흥과 민족의 구원을 위한 금식기도처가 강남에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해 모친과 함께 청평에 강남금식기도원 세웠다.


김 목사는 기도원의 기원을 초대교회에서 찾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 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 받은 이후, 권력으로 타락하면서 교회의 부패가 급격히 시작됐다. 교회가 대형화 하면서 돈이 많아지자 지도층의 부패가 빨라졌고, 수도원은 이로부터 교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번성했다.


김 목사는 긍정적인 믿음과 축복의 메시지를 통해 낙심하는 성도들에게 희망과 믿음을 주고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한다는 분명한 목회철학을 갖고 있다. 국가와 개인의 삶은 긍정적인 신앙 안에 세워져야 하며 국가는 말씀과 정의에 입각해 정치하고 선진국이 되어 세계선교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신념이다.



▲경기도 청평에 위치한 강남금식기도원의 모습. 구국기도의 핵심 장소인 식물원 예배당(우측)과 베데스다 성전. ⓒ크리스천투데이 DB



▲강남금식기도원의 사랑숙소(좌)와 기도굴 ⓒ크리스천투데이 DB


강남금식기도원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금식기도를 통한 기적의 체험으로 21세기 영성을 이끌어가는 기독교인들을 양성한다. 김 목사는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 있으므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성공의 기본”이라며 “수많은 성도들이 문제를 갖고 기도원에 찾아 금식과 기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 받고 기쁨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기도원의 홈페이지에는 이같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통해 영육간에 고침과 치유를 받은 성도들의 간증이 수시로 올라온다.


특히 김 목사는 “교회는 성도들에게 구원받고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올바른 국가관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천만 민족복음화, 10만교회 선진한국, 기독교국가, 남북통일’이라는 중장기적 목표아래, 강남금식기도원은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정치와 사회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성숙된 신자로 거듭나도록 이끌고 있다.


기도원의 하루는 오전 5시 새벽기도회를 시작으로, 11시 오전예배, 오후 3시 성령대망회, 오후 7시 저녁예배, 오후 11시 30분 철야기도회가 쉬지 않고 진행된다. 연중무휴, 24시간 기도회도 사명 있는 교역자들로 진행되고 있다.


김 목사는 “하루에 3번씩 무릎 꿇고 기도한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천사로 지켜 보호하신 것처럼 환란과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회개 기도하면 도우시고 축복하시고 죽을병도 고쳐 주시고 환란에서 구해주신다”며 “나아가 이 시대가 처한 상황은 한국교회가 기도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시대적 사명’을 앞에 놓고 함께 기도하자”고 강조했다.


기도원 홈페이지 www.kangnampm.or.kr/kor
기도원 연락처 031-584-1001(내선133)

金正恩の電撃的訪中|コラム|21世紀の日本と国際社会 浅井基文のページ

金正恩の電撃的訪中|コラム|21世紀の日本と国際社会 浅井基文のページ

金正恩の電撃的訪中

2018.03.30.
<舌を巻く金正恩外交>
金正恩が自ら「電撃的」と表現(人民大会堂宴会での演説)したとおり、金正恩の今回の訪中劇は世界に電気ショックを与えました。私ももちろんその一人です。金正恩がこの若さ(34歳前後)でこれほど壮大な国際的布石を打つとは、「本当に恐れ入りました」と言うほかありません。外交を生業とした経歴を持つものとして、金正恩の外交手腕には胸がわくわくする興奮を覚えます。おそらく外交にかけては世界でも一、二を競うだけの自信を持っているはずの習近平も、金正恩の外交手腕の鮮やかさには敬意すら抱いただろうと推察します。それほど見事な訪中劇の実現でした。それだからこそ、「われわれの電撃的な訪問提議を快く承諾し、短期間にわれわれの訪問が成功裏に行われるようにするために傾けた習近平総書記同志と中国の党と国家の指導幹部同志たちの真心と手厚い配慮」(金正恩の宴会での演説)となったのでしょうし、そういう最大級のもてなしをした習近平及び中国に対して、金正恩は「私は深く感動し、それについて非常に有り難く思っています」と素直に真情を吐露したのでしょう。
 他方、冷静に考えてみると、金正恩はICBM発射実験に成功したときに、「米国の対朝鮮敵視政策と核威嚇が根源的に一掃されない限り、われわれはいかなる場合にも核と弾道ロケットを協商のテーブルに置かないし、われわれが選択した核戦力強化の道からたった一寸も退かない」という発言を行った時点で、対米核デタランスを構築後は外交攻勢に出ることを考えていたと見ることが可能(3月15日付コラム参照)であり、外交攻勢の対象には中国が含まれていることも理の当然だったわけです。中国は一貫して朝鮮との対話を働きかけてきたのですから、金正恩としてはタイミングの問題だけ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
<劇的な中朝関係改善の実現>
 金正恩が「電撃的な訪問提議」を行ったことは、中国の批判をものともせず核ミサイル開発に邁進してきた金正恩政権に対する批判を強め、安保理制裁決議の厳格履行を強めてきた中国にとっても、暗雲を一気に吹き飛ばし、金正恩に対する疑念をも払拭するに足る大きな出来事だ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そのことは、私のフォローしてきた限りでは、近年中朝関係をほとんど真正面から扱ってこなかった人民日報がそのWSで立て続けに論評(人民網評)を出したこと(29日だけで5本)、さらに人民日報海外版も中国国際問題研究院国際戦略研究所副所長の蘇暁暉署名文章「半島平和と中国の努力は不可分」(29日)を掲載したこと、また新華社WSも28日付で評論員という重みのある文章「世界の発展の大勢と中朝関係の大局をがっちりつかむ」及び29日付で新華網評「大勢及び大局の中で中朝関係の発展を把握する」を連続して出していることから確認することができます。いうまでもなく、環球時報は28日付け及び29日付で社説を掲載しました。
 しかも、習近平と金正恩との首脳会談において、金正恩が「両国の老世代指導者たちがもたらし、強化し、発展させてきた朝中親善の貴重な伝統を継承して、発展する時代の要求に即して新たな高い段階に引き上げようとするのは朝鮮労働党と政府の確固たる決心である」、「習近平主席をはじめ中国同志たちにたびたび会って友誼をいっそう厚くし、戦略的意思疎通、戦略・戦術的協同を強化して、朝中両国の団結と協力を強固に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述べたこと(朝鮮中央通信発表文)、また、宴会での演説の中では「私の最初の外国訪問の地が中華人民共和国の首都となったのはあまりにも当然のことであり、これは、朝中親善を代を継いで命のように大切にし、受け継いでいくべき私の崇高な義務でもあります」という中国側の心を溶かすに足る"殺し文句"を発し、「長きにわたる共同の闘争において互いに血と生命を捧げながら緊密に支持、協力してきた朝鮮人民と中国人民は、実際の生活を通じて、自分たちの運命は互いに切り離す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体験し、河一つを隔ててつながっている兄弟的隣国である両国にとって、地域の平和的環境と安定がどれほど大切であり、それを獲得し守っていくことがどれほど高価なものであるかを痛感しています」という中朝"血盟関係"を確認するに等しい発言を行ったこと(同)は、中国の金正恩に対する評価を大きくプラスの方向に転換させることになったと思います。金正恩の他者感覚も相当なものです。
 そもそも、中朝関係が冷却した最大の原因は、朝鮮半島の非核化を前面に押し出す中国と、それを"無視"して核ミサイル開発(対米デタランス)確立に邁進してきた金正恩・朝鮮との対立にありました。しかし、金正恩の対外戦略を見るに、彼としては、まずは対米核デタランスを構築して対米交渉ポジションを固める(それまでは中国の言うことには耳を貸さない)、その上で対等平等の立場で米朝交渉に臨む(米朝平和協定及び米朝国交正常化と朝鮮非核化とのグランド・バーゲン)とともに、対米交渉ポジションをさらに確かなものとする意味合いも含めて南北関係及び朝中関係の改善を図るというグランド・デザインを持っていたことが理解されます。
中朝関係冷却化の最大の原因であった朝鮮半島非核化問題に関する彼我の立場の対立に関して、今回の首脳会談において、金正恩が「金日成主席及び金正日総書記の遺訓に基づき、半島の非核化実現に力をいたすことは終始変わらない我々の立場だ」、「南朝鮮とアメリカが善意で我々の努力に応え、平和で安定した雰囲気を作り出し、平和実現のために段階的、同歩的な措置をとるのであれば、半島非核化問題は解決を得ることができる」(中国外交部WSによる発表文。朝鮮中央通信は言及せず)と明言したことにより、中朝関係冷却化の原因も解消されました。中国としては、金正恩の以上に述べたグランド・デザインを正確に認識し、朝鮮半島非核化の最終的実現に対する金正恩の真意・アプローチもしっかりと受け止めることになったと思います。金正恩の述べた「段階的、同歩的な措置をとるのであれば、半島非核化問題は解決を得ることができる」とは、中国が一貫して提起してきた「ダブル・トラック同時並行」による問題解決方式に金正恩がお墨付きを与えたに等しく、中国としては満額回答を得た思いでしょう。習近平夫妻が釣魚台国賓館養源齋という格式の高い歴史的な場所で金正恩夫妻をもてなしたのもうなずけます。
 ちなみに、非核化に関する金正恩の発言が朝鮮側発表文には含まれていないことから、金正恩の真意は疑ってかかる必要があるという"ためにする"議論を行う人のために一言すれば、金正恩は平壌への帰途において習近平に感謝電を送り、その中で「このたびの対面と会談の過程で、互いの関心事となっている問題においてあなたと見解の一致を見たことを満足」と述べています。「互いの関心事となっている問題」とは朝鮮半島の非核化に他なりません。中国が金正恩の非核化問題に関する発言を中国側発表文で明らかにすることについては、金正恩の了承を取り付けた上でのことであることは間違いありませんから、感謝電における「見解の一致」とはそのことを指していることも見やすい道理です。
<環球時報社説>
 中国側の金正恩訪中に対する評価の高さを窺う材料として、3月28日付の環球時報社説「友好を伝え受け継ぐことは中朝がともに受益する大戦略」(要旨)を紹介します。私がこれまでこのコラムで紹介してきたように、環球時報は冷え切った中朝関係の現実を踏まえ、いわば突き放して中朝関係を位置づける姿勢を強めてきました。そういう"過去"を知るものからすると、「おいおい、そこまで豹変するの?」とからかいたくなるほどの内容です。それだけ、金正恩の電撃的行動に対する中国側の驚きと喜びが凝縮して反映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しょう。朝鮮でも、金正恩訪中の模様が45分間にわたって繰り返し放映されているようですが、中朝関係の劇的な改善は、私たちでは想像できないほどの安堵と高揚感とを両国社会に与えていることが伝わってきます。
 金正恩が25日から28日まで中国を非公式に訪問し、習近平の熱のこもった接待を受けた。両首脳は極めて率直かつ誠意のある友好的な会談を行った。その内容は、中朝の伝統的友好に対する高い評価、それを不断に伝え、受け継いでいくとともにさらに発展させるという願い、半島非核化という目的の実現、半島の平和と安定を擁護すること等重要な事柄に及んだ。習近平・金正恩会談が行われたことは世界に驚きを与え、その成果は世界を驚愕させた。
 今回の首脳会談が中朝友好関係の新しいページを開いたことは間違いないことだ。
 中朝は隣国だが、普通の隣国ではない。過去の一世紀以上にわたり、我々はともにアジアにおける多くの苦難を経験し、唇と歯が寄り添い合い、休戚をともにするだけではなく、鮮血をともに流し、両国は尋常ではない友誼をうち固めてきた。
 外部世界は、中朝を利益共同体と見なすのが常であり、東北アジアの複雑な地縁政治環境の中で、中朝間の歴史的伝統的紐帯及び現実の政治的経済的紐帯は広く重視されてきただけではなく、多くのパワーが情勢を見る際の角度及び方法に対して影響を与えてきた。
 風雨にさらされてはきたが、中朝友好関係の基本的要素は牢固として揺り動かされるものではない。
 第一に、中朝は相互に尊重し合い、互いに平等であり、しかも両国関係は両党関係によって導かれており、中朝友好関係という建物は政治的基礎がしっかりとして端正である。中国の党、政府及び社会の主流は一貫して朝鮮人民の政治的選択を尊重し、朝鮮の独立自主精神を尊重し、他の国々が朝鮮の国家制度に干渉する企みに断固反対してきた。両国友好の基礎は深く厚く、相互の友好協力の発展の前途は広々としたものがある。
 さらに、歴史と地縁とによって中朝の普通一般ではない戦略的な親しさと密度及び利益の結びつきとが形成され、両国の先人指導者が心を込めて育んだことによってこの戦略的親近さは大いに異彩を放っている。東北アジアの主題は不断に移ろっているが、中朝友好の両国にとっての重要さはいかなる時期においても真実であり続けている。事実が証明するとおり、中朝が友好関係を維持し、発展させることは両国がそれぞれの利益及び互いの共通の利益を擁護する上での大戦略である。
 中朝が友好関係を維持することはまた、地域全体に対してプラス・エネルギーを提供し、東北アジアの戦略的安定を促進する。そのことは各国をさらに安心させるとともに、地域のバランスを増大することに役立ち、マイナスの動きを取り除く。
 鴨緑江両岸が親戚のように日常的に往来することは国際社会全体の支持があるべきであり、そのことは、半島が膠着から和解と繁栄に向かう上での大きな牽引力を提供するだろう。予見しうる将来にわたり、中朝友好関係は間違いなく半島情勢が緩和と安定を保つことに手助けとなるチャンネルであり、半島の平和に本当に関心があるさまざまなパワーが大切にし、支持するに値するものである。
 国際場裏では、中朝関係に干渉し、これを破壊しようとするパワーが常にあり、北京と平壌との友好に対してさまざまなレッテルを貼り、中朝関係を歪曲するデマをまき散らしている。しかし、中朝関係の根の深さは彼らの想像を遙かに超えるものであり、今回の首脳会談はこれらの勢力が中朝国家関係を認識する際の座標を改めて確立させることになるはずである。半島の平和と安定を心から願う世界のパワーならば、今日彼らが見届けている中朝関係を歓迎するものと信じる。
 中朝の伝統的友誼を不断に発揚させ、広め、両国人民の根本的な利益に奉仕させ、地域全体の平和と安全のために奉仕させよう。双方の友好関係は必ずや今後大局を安定させ、不断に前に向かって発展するだろうことを確信する。
 朝鮮はここ数年、国家の独立自主をうち固めてきただけではなく、経済社会建設の領域においても不屈であり、少なからぬ進歩を獲得している。かつて肩を並べて戦った中朝両国人民は、安全と繁栄を築いていく上でもパートナーであるべきである。

알라딘: NL 현대사 -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알라딘: NL 현대사 -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NL 현대사 -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박찬수(저자) | 인물과사상사 | 2017-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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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1980~1990년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반독재.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운동이 활기를 띄었다. 대학생을 비롯한 '운동권' 청년들이 이러한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그중에서도 NL(민족해방 노선)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학생운동의 주류로 떠올라 변혁의 물결을 이끌었다.

지금은 'NL'을 북한과 관련해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 무렵까지 NL은 민주화운동 또는 진보적인 재야운동의 큰 흐름을 통칭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NL 현대사>는 바로 이 시기 운동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진 NL의 성쇠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한다.





들어가는 말

제1부 NL의 등장
1 NL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2 세 동지의 엇갈린 운명
3 광주는 달랐다
4 구호가 엇갈렸다, 경찰도 헷갈렸다
5 “이제 집은 해체된다”

제2부 NL 전성기와 전대협
1 극우 총장이 불 지핀 주사파 논쟁
2 민족주의, 거대한 블랙홀
3 해방전사여, 음주와 흡연을 절제하라
4 독재정권이 모두에게 남긴 상처
5 구국의 강철대오
6 대중은 사라지고 이념만 남았다
7 평양에서 보낸 ‘팩시밀리 편지’
8 그날 밤 베를린의 술집에서
9 늦봄의 마지막 편지
10 NL 교과서
11 운동의 성공은 진정성에 달려 있다

제3부 갈등과 분열
1 불신의 싹을 틔운 평양 방문
2 시대착오적인 전위조직
3 변절과 모색 사이
4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
5 “나는 프락치가 아니다”
6 ‘열사의 시대’는 갔다
7 패권주의와 피해의식
8 ‘NL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9 전설적인 대중활동
10 진보정당 역시 대중정당이다
11 뉴라이트의 탄생





P.22~23 : 비로소 팸플릿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졌다. 해방 이후 오랫동안 금기로 여긴 ‘북한’이란 벽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먼 훗날의 과제로 여기던 반제국주의 투쟁과 통일운동을 지금 당장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반제국주의는 ‘반미’라는 훨씬 구체적인 형태로 가시화했다. 이전의 학생운동과 전혀 다른 새로운 조류의 출현이었다.

P.77~78 : “주사파와 우리식 사회주의가 제한된 학생들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다. 북한은 학원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까지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학생들은 사상적 방황을 하다가 주사파에 말려든다. 베이징에서 김일성대학 학생회장을 만난 일이 있는데, 남한 학생들의 공산화는 시간문제라고 호언했다. 일부 학생은 남조선 해방을 위해 가을에 또 이슈를 만들어 나올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반대와 미군 기지 반납 서명운동을 벌일 것이다. 북에서 이미 지시를 했다. 내가 증거를 갖고 있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북한 사노청,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학생들은 팩시밀리를 통해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

P.126 : 1990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전대협은 여당과 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올랐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나 대기업보다 앞선 순위였다. 수만 명의 학생이 일사불란하게 ‘구국의 강철대오’를 외칠 때, 전대협은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1년 분신정국과 강경대 사망사건을 정점으로 영향력이 꺾였고, 1996년 전대협 후신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급격히 퇴조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무엇이 학생운동의 결정적인 후퇴를 가져왔을까? 학생운동의 조직과 영향력 확대에 기여했던 NL 사조는 어떤 질곡으로 작용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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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7년 12월 1일자





저자 : 박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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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NL 현대사>,<청와대 vs 백악관> … 총 3종 (모두보기)
소개 :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제5공화국 시절인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그 무렵 수많은 학생이 그랬듯이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강제 징집되어, 동부전선 육군 7사단의 최전방 GP에서 군 생활을 했다. 제대하고 복학해보니 학교가 온통 ‘NL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1989년 3월 『한겨레』에 입사한 후, 사회부와 국제부를 거쳐 정치부에서 주로 정당과 청와대 취재를 담당했다. 1992년부터 1997년, 2002년, 2007년 대선을 직접 취재했고, 2004년에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국 대선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그 경험을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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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NL은 어디로 갔을까?

대한민국에서 1980~1990년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반독재?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운동이 활기를 띄었다. 대학생을 비롯한 ‘운동권’ 청년들이 이러한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그중에서도 NL(민족해방 노선)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학생운동의 주류로 떠올라 변혁의 물결을 이끌었다. 지금은 ‘NL’을 북한과 관련해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 무렵까지 NL은 민주화운동 또는 진보적인 재야운동의 큰 흐름을 통칭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NL 현대사』는 바로 이 시기 운동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진 NL의 성쇠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한다.

강철서신의 등장에서 뉴라이트 논란까지…….
한국 사회를 뒤흔든 NL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1986년, 김영환이 ‘강철’이라는 가명으로 쓴 6편의 팸플릿이 대학가를 휩쓴다. 훗날 ‘강철서신’이라 불리는 이 팸플릿에서 그는 먼 훗날의 과제로 여기던 반제국주의 투쟁과 통일운동을 지금 당장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랫동안 금기로 여긴 ‘북한’이란 벽을 뛰어넘으려 한 것이다. 이후 NL 사조는 기존 학생운동의 중심인 ‘언더서클’ 해체를 유도하고 주도권을 잡는다. 민족주의?대중노선?품성론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전대협을 결성해 대중조직과 활동가조직을 하나로 모으면서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이념 지향성이 강한 활동가들이 학생회를 장악하고 점점 대중과 멀어지면서, 전대협과 그 후신인 한총련은 힘을 잃어버렸다. 결국 1996년 8월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쇠퇴하고 만다. 학생운동에서 보인 NL의 패권주의와 PD의 피해의식은 훗날 정파 갈등으로 이어져 민주노동당 분당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은 1991년 평양 방문 후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에 실망하고, 일단의 무리와 함께 집단 전향한다. 그가 ‘안기부 프락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운동권 내부의 의심은 여기서 비롯했다. 이후 김영환은 북한민주화운동에 투신하고, NL 전향파 중 일부는 ‘뉴라이트’란 이름으로 새로운 운동을 모색한다. 뉴라이트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국가주의 보수와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극우 이미지를 피해가지 못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 파문 이후 ‘친일’, ‘독재 미화’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점점 추락하고 만다.
저자는 “NL이 과거의 잘잘못을 공개적으로 성찰하지 않고 격동의 시기를 지나쳐온 점”이 가장 아픈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NL을 입에 올리기조차 힘든 ‘뜨거운 감자’로 만들어버렸다. 1990년대 학생운동의 퇴조와 통일운동 협소화에 NL은 어떤 책임이 있는지, 이제는 냉철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 책은 강철서신의 등장에서 반독재 투쟁, 광주 학살과 반미운동, 문익환 목사와 통일운동,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과 한총련, 공안기관의 감시와 프락치, 구학련, 민혁당, 민주노동당 내 정파 갈등과 통합진보당 해산, 전향파와 뉴라이트의 역사교과서 논란까지, NL 사조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발자취를 더듬는다.

누군가에게는 기억으로 남고,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

몇 년 전 논란이 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관련 뉴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 용어가 있었다. NL, PD, RO……. 학생운동이 쇠퇴한 이후 대학을 다닌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약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끄는 주도층인 ‘86세대’, 즉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다. 이들을 이해하려면 학생운동과 NL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좋든 싫든 모두가 NL의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NL 사조는 어떻게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을까? ‘주사파’가 북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주사파가 어떻게 NL 운동권 전체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을까? 민주주의는 무엇이고 통일은 무엇인가? 신념에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가? 목숨을 걸고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 중 많은 수가 왜 극단적인 전향을 택했을까? 그토록 가치를 부여하며 매달린 일에서 어렇게 쉽게 등 돌릴 수 있는가? 도대체 NL의 뭐가 문제기에, 진보 진영 내부에서조차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걸까?
자유, 민족, 노동, 겨레, 통일……. 취업전선에 내몰린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다소 거리가 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과는 전혀 다른 독재정권 시대, 많은 사람의 신념과 열정이 우리 사회의 변혁을 이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에는 항상 NL이 있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직간접적으로 NL을 경험한 세대가 다양하고, 이제껏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도 많다는 뜻이다. 이 책은 그들의 여러 목소리를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그 시대를 살면서 NL을 직접 겪은 이들이 이름을 밝히거나 익명(匿名)으로 인터뷰에 응하고 자료를 제공했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에 근접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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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을 북과 엮어보려는 우파의 기획이 한심한 이유. 제도권 리버럴을 주사파로 묶어 보려는 시도는 둘의 간극과 지하에서 암약한 진성(?) NL을 모르기 때문임. 아님 모르고 싶거나.
ㅣ 2018-01-20 l 공감(2) ㅣ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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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8편




NL 현대사 깐도리 ㅣ 2018-01-30 ㅣ 공감(8) ㅣ 댓글 (0)


나는 최루탄을 체험해 본 적도 없고, 198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마주하는 것이 때로는 조심스럽고, 피상적으로 다가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궁금했다. 민노당이 해체하고, 진보당과 통진당으로 분리되었던 이유, 그 사람이 탄핵인용되기 전 통진당 대표 이정희에게 모멸감이 섞인 말을 듣고 난 이후 통진당이 해체된 그 뒷 배경이 알고 싶었다. 지금 보수 우파로 활약하고 있는 운동권인사 이재오와 김문수가 왜 보수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여전히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한채 놓여져 있으며, 아직 많은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현재 ,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한국근현대사적인 의미, 더 나아가 이 책이 또다른 줄기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나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또다른 책들이 궁금하였고, NL 주사파이며, 지금 현재 북한 민주화 운동가로 변신한 김영호ㅘㄴ씨가 쓴 강철서신과 NL 주사파에 대한 또다른 궁금증이 채워지고 있다.


지금 386 세대가 대학생 때 운동권 학생이었던 시절을 다루고 있다. NL 계열과 PD 계열로 나누고 있으며, 책의 대부분은 우리가 주사파로 기억되고 있는 NL 계열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가 볼 수 있다. 특히 북향하면 간첩으로 몰리던 30년전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 안기부가 그들을 붙잡아 고문했던 흔적들이 자세히 나오고 있다. 이제 고인이 되었던 김근 태의원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으며 , 운동권 인사이기도 하였다. 책에서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바로 얼마전 대법원 판결을 받았던 이석기 통진당 국회의원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한국외대 졸업생이며, 82학번이다. NL 계열 운동권학생이다. 하지만 통진당에서 그가 비례대표 1번이 될 때 까지 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고, 그가 통진당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를 민주화 정권의 시작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김영삼 정부는 우리가 말하는 열사가 소멸되는 과정이며, 김대중 정부 이후 열사는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서 열사란 독재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며, 희생의 상징이다. 수많은 대학생이 민주화 과정에서 분신자살하였고, 그것이 민주화의 토대가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도구를 가지리 않았던 것이며, 우리가 열사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 이은 유관순, 전태일 두 사람 뿐이다.


뉴라이트에 관한 이야기, 세월호 참사 이후 뉴라이트가 우리 사회에 부각되었다. 그들을 극우보수라 부르고 있으며, 극우보수 단체들은 자신의 힘을 앞세워 유가족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뉴라이트는 NL 계열 주사파가 전향하여 만들었으며, 저자는 이념 문제에 있어서 극과 극은 통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즘 민주당을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는 변OO 또한 노무현 지지나에서 보수로 바뀐 대표적인 존재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 민청련이나 전대협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지만, 이념은 여전히 현존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갈등과 충돌의 또다른 원인이 된다. 1990년대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광우병 반대 시위에서 그들이 숨어있으며, 2017년 촛불집회는 운동권 스타가 아닌 시민이 주도하는 평화로운 촛불집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패러다임과 마주하고 있다.

NL 현대사 soon ㅣ 2017-12-21 ㅣ 공감(0) ㅣ 댓글 (0)




이 책은 박찬수 한겨례 논설위원의 저서로 지난해 <한겨레> 토요판에 15회로 연재했던 기사를 보강해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80년대 중반 한국의 학생운동 진영에서 제기된 이념 논쟁. '사회구성체 논쟁'이 8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진영에서 본격화되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한국의 학생운동은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오랜 기간 한 나라의 저항운동을 주도해왔다?.

학생운동은 특정 정치적 격변기에 사회 모든 구성원의 요구가 정치사회 민주화로 집약되어 나타나는 상황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집약 혹은 대표하여 시위, 농성과 같은 공식화된 정치과정으로 외부의 집합적 행위를 통해서 정치사회의 민주화라는 구성원들의 요구를 표출한 행동들의 묶음이다


1987년 6월 항쟁이후 학생운동. 1980년대 들어서 한국의 학생운동은 정치 변혁의 요구를 집약하여 자신의 임무로 삼고, 쁘띠부르주아로서 자신의 고유한 이해보다는 민중과 민족이 해결해야 할 총체적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하여 이념적으로는 민주-민족-민중-계급 담론으로 발전시켰다. 학생운동의 이러한 성격은 동시대 혹은 이후 진행된 한국의 민주화 운동, 민중운동, 시민운동, 제도 정치활동으로 발전되었다.

의 주류로 떠올라 변혁의 물결을 이끌었던 NL은 이후 학생운동이 쇠퇴하였지만 NL의 영향력은 아직도 한국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 조직이다.


80년 후반부터 30년간 한국의 사회변혁운동을 이끌어온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은 NLPDR의 약자이다. NLPDR의 뜻은 민족해방 민주혁명이다. NL들계열들은 한국의역사를 미국에 종속된 변경의 역사, 제국주의 속방으로 치부하고 있다. 또한, NL계열의 경우, 민족의 독립. 즉, 미제국에 대한 대한민국의 독립과 더불어 북한과의 통일로써 진정한 '통일 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위기의 원인은 정치?경제 변화의 영향도 크지만 학생운동 진영 내부의 문제까지도 세세하게 다룬 책이라 자료로도 가치가 매우 높은책이라 생각한다..








NL 현대사 빙혈 ㅣ 2017-12-19 ㅣ 공감(5) ㅣ 댓글 (0)


NL은 "민족 해방"의 약칭입니다. 민족 해방은 한때 반미 사조와 공산 혁명의 기치가 젊은이들을 휩쓸었던 중남미, 혹은 그외 제3세계에서 흔히 접하던 구호이자 표어이지만, 한국처럼 저리 간략히 연원 모를 두 알파벳 두문자로 약칭하는 예는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외국인에게 들려 주면 무슨 소린지 모를 것입니다. 허나 웬만큼 의식과 양심을 지닌, 특정 연령대 이상인 한국인들에게는 이 간단한 두 글자 안에 온갖 곡절과 사연이 모두 담긴 듯 다가오겠습니다.

1990년대 학번들만 해도 이 NL은 낯선 애크로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알긴 아는데 별로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 경이원지의 대상이라고 할지. 그러나 80년대 학번 세대들께 반독재 투쟁이란 불가침의 성역이자 영원한 죄의식, 마음의 빚을 상기시키는 비밀의 주문이었듯, NL은 침노되어서는 안 될 최후의 요새이자 도덕성과 권위 가득한 비밀의 아지트처럼 여겨졌고, 때로는 외경을 넘어 공포감마저 자아내는 본산의 상징이었습니다. 1990년대는 시대의 풍조가,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180도로 달라졌기 때문에(투쟁에서 향락, 가벼운 감상과 소비), 따지고 보면 같은 캠퍼스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었던 두 세대가 정작 그 청춘기들의 색채에는 판이하게 다른 물을 들였다는 게 신기합니다.

NL로 한국 현대사 코드를 모두 설명할 수야 당연히 없겠지만, 또 현 문재인 대통령의 행적이나 신조를 두고 NL과 유의미한 연결을 짓는 건 다분히 무리이지만(세대가 다릅니다. 개인으로서 사후 공감을 할 수야 있겠지만), 여튼 비서실장부터 해서 1980년대 후반 전대협 의장 등 화려한 커리어를 지닌 인사들이 정권 핵심부에 대거 포진해 있으니, 이상하게도 시대의 대세가 전면 교체되었건만 아직도 음지에 계속 묻혀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이 NL에 대해, 쓴소리는 쓴소리대로, 온당한 재평가는 재평가대로 뭔가 이뤄져야만 할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아주 포괄적이지는 않지만) 당시의 궤적과 현재의 자취를 이처럼 책 한 권으로 되짚어 보는 작업은 의미가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 생각으론 이 정도 책의 세 배 분량이 할애되어야 온전한 조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운동권 출신 인사(현재는 대부분 시민사회단체 중진들로 활약하는 이)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그 나름 큰 기대를 품고 "상경"하여 거물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만나 보면 지나친 엘리트주의와 차가운 대접에 환상이 깨어졌다는 말을 책이나 강연 등에서 여러 번 접합니다. 이 NL의 전성시대라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운동권 문화, 풍조"와는 너무도 다른 구조와 흐름이 지배했음을, 이 책을 읽고서야 바르게 상기할 수 있습니다. 기억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 제 편할 대로 왜곡되어 정작 그 기억의 담지자마저 당혹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서클(언더)의 종막"이라든가, 8대니 5대니 하는 "패밀리"들이 노선과 이념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은 마치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혹은 그 반대편의 멘셰비키 파벌과의 살벌한 내부 투쟁을 연상케 합니다. 물론 칼과 총의 부림을 일삼는 난동이 아니라, 논리와 대의의 향방을 놓고 벌이는 일대 결전이지만 말입니다.

"일체의 종파주의를 금지한다." 사상의 자유와 분기, 진화, 발전은 다양한 입장의 차이를 인정할 때에만 아름다운 맹아와 결실이 가능한 법인데, 마치 북에서 김일성이 갑산파 독재를 확립할 때 쓰던 살벌한 구호 같아서 영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물론 그들 엘리트 지도부로서는 전두환 체제의 폭거와 극악한 탄압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단일 대오를 구축하여 투쟁 역량을 강화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겠으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튼 관악 집(서울대 관악캠퍼스를 뜻합니다) 곳곳에서 벌어진, 운동 노선과 조국의 갈 길을 놓고 최고의 젊은 지성들이 집결하여 벌어진 논쟁과 고민이란 그 자체로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책의 부제 중 한 어구로 쓰이기도 했지만,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 씨는 한때 NL의 정신적 지주 중 한 분으로 널리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랬던 분이 직접 북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에는 그 입장에 극적 선회가 이뤄져 찬반 양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죠.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한데 박노해 시인의 경우도 "1990년대에 태어났다면 서태지가 되었을 것이다." 같은 발언을 보수 매체와의 인터뷰(이게 메시지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속에서 하는 바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여튼 과거 혹심한 권위체제의 탄압 속에서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소중한 일생을 망치거나 귀한 몸 걸레짝이 될 각오를 하고(그 당시 책에 나오는 표현이더군요) 목숨 건 투쟁을 벌인 이들의 공적은 존중되어야 하며, 안기부의 칠성판과 써니텐 세트가 다 없어진 지금 맘 편하게 입만 갖고 할 수 있는 민주화 운동의 난이도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책에는 서강대 박홍 총장(당시)에 대해서도 긴 언급이 있습니다. 이분은 사실 1990년대 중반에 화제가 된 인물인데, 한겨레 등 진보 매체에서는 날마다 그의 발언을 놓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으며, 반대로 보수 언론에서는 구국의 소신파라며 열렬하게 칭송했죠. "주사파"라는 단어를 대중에게 코인시킨 계기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책에서도 지적하듯 사노맹은 PD 계열이지 NL(그토록 대립하던)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 팩트 인식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게 확실합니다. 이 박 총장의 당시 발언과 행적이 과연 보수진영에 도움이 되긴 했는지, 반대로 희화화와 풍자의 대상이 되어 이후 90년대 학번이 사회로 본격 편입한 후 좌편향하는 데 일조를 했는지는 살펴봐야 할 과제입니다. 당시에는 주로 서강대생들을 중심으로 "빠콩" 같은 멸칭이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는 등, 그리 호의적인 분위기가 못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첵에는 역사 공부의 텍스트로써 1980년대에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이후 1990년대에는 소위 "다현사"가 널리 읽히게 된 배경도 밝히고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책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만 <해방 전후사...>는 논문 모음이기 때문에 필자의 입장도 천차만별이라 어떤 일관된 관점이 부족합니다. 대신 독자가 알아서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지적인 맛이 있죠. 반면 다현사는 한 명의 저자가 선명한 주제를 제시해 가며 결론을 명확히 찍어 놓고 쓴 책이라서 "엘리트 중심이 아닌 대중적인 호응"을 얻어냈다는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게도 되었습니다.

이른바 "품성론" 분석도 지금 보면 흥미롭기 짝이 없습니다. 본디 (소위)주체사상에서 품성론이란 방계 논의나 여담에 지나지 않는데, 김일성에 대한 맹종을 강요하는 주체사상의 본론에는 시큰둥하던 이들이, 인간의 도리와 바른 범절, 의리를 중시하는 이 품성론에 대해서만은 열렬한 호응을 보내어서, 뜻하지 않게 NL의 세 확산에 도움이 되었다는 뒷이야기입니다. 오해에서 비롯하긴 했어도, 정말로 북에서 고안한 주체사상이 "풍성론"에 큰 방점을 찍은 품격 높고 포용적인 체계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마 북도 행복해지고 남에서 제한적으로 그에게 동조했던 이들도 훨씬 떳떳하고 뿌듯했을 텐데 말입니다.

NL과 PD의 대립은 현재진행형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에서 벌어진 모 사건 과잉수사 이슈를 놓고, NL에서는 PD 측이 도와주지 않았다며 내내 서운함을 표시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조직문화를 놓고도, PD 쪽은 다분히 서유럽식 사민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NL은 한국적인(?) 의리와 연공 서열을 중시하는, 투박하고 획일적인 색채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중론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특정 젊은 세대 전체를 휘감고 장악했던 이 두 사조와 (현재적) 실재가, 어떻게 발전적, 변증법적으로 화해와 통합을 이룰지, 아니면 과거의 미숙한 에고에 갇혀 시대에 뒤떨어져가며 사멸할지는 그들의 쇄신 노력에 달렸다 하겠습니다. 역사의 선택이 전자 쪽이라야, 그들 자신이나 밖에서 관찰하는 국외자들에게나 "해피 엔딩"이 아닐까 생각해 보네요.


한국의 격동의 현대사를 알기 위해서 saengsan ㅣ 2017-12-19 ㅣ 공감(0) ㅣ 댓글 (0)


NL 현대사

제목 그대로, NL이 한국의 현대적 상황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격동의 80년대, 나 역시 그 현장에 있었다.

하지만, 복판이 아닌 주변인.

어느 쪽에 포함되지도 않으면서, 또 어떻게 보면, 양쪽에서 빠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80년의 광주 때에는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지만, 친한 친구들 가운데는 겪은 친구들이 두 명 정도 있었다.

이후 대학교에 진학하여, 5월의 항쟁에 항상 최루가스를 맡아야 했고,

군 제대 후, 복학 전에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6.29를 경험했다.



치열한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직접적으로 뛰어들만한 용기는 없었다.

왜냐하면 주변에는 거기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NL이니 PD니 하는 명칭들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정확한 정의나, 그들이 주장했던 내용들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었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오십의 중반에서, 이제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끄는 NL에 대해서 비록 지난날의 이야기지만, 내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정리를 해 준 책이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나름대로 객관성을 기하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느 한 부분에 대해 주관성을 띄지 않으려는 저자의 치열한 투쟁.



하지만, 또 그 조직이 방대해서 솔직히 집중이 되지 않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야말로 현대사라고 하는 명칭에 맞게 NL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대학가와 학생운동에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방대한 내용을 사실적으로 밝히기 위해 열심을 낸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고, 오늘이 없는 내일이 없다‘

오늘 한국의 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나간 NL의 시대를 살펴봐야 한다.

학교와 직장을 다니면서, 정확히 알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여기에 NL현대사와 함께 하면,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 정치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그들의 발자취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임에 분명하다.



비록 미완성된 부분도, 배신과 반목의 길을 어쩔 수 없이 갈 수 밖에 없는 형편에도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상황에서, 다시 그 시대의 인물들이 이제 다시 중추적인 상황에서 살아가고 투쟁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지난 역사들이 재생산되어 다시 반복되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지난간 격동의 한국을 경험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한 번 대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NL 현대사 불새 ㅣ 2017-12-18 ㅣ 공감(0) ㅣ 댓글 (0)


NL 현대사



NL을 돌연 등장했다. 시대의 흐름에서 나온 자연스런 태생이라고 볼 수 있겠다. NL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운동의 엘리트적 그리고 전위적 운동방식에서 대중노선으로 변화를 꾀했던 일은 민주와 열기와 성공적으로 결합했다.

NL은 우리와 밀접하다.

강철서신에서 촉발된 거대한 변화! 그 변화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된다. 군사독재시절 당시에는 고문이 성행했다. NL로 활동하던 운동권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까지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어지럽던 시기 광주는 달랐다. 광주민주화운동의 굵직굵직한 일들은 알지만 광주 민주화운동의 시적이나 첫 반미운동에 대해서는 미처 몰랐다. 신군부에 대한 분누와 미국에 대한 배신감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양키 고 홈! 이런 말은 순화시키면, 미국의 배척하거나 멀리하는 모든 일들이 포함될 것이다. 미국은 해방 이후 한국에 절대적인 영향일 끼쳐오고 있고, 이런 사실에 미국의 탓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할 것이다.

과거와 현실은 항상 충돌한다. 운동권의 변천사는 우리나라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일어났다. 책은 그 갈등에 대해 객관적이면서도 선명하게 콕콕 집어서 알려준다. 한겨례 신문기자로 활동한 저자의 이야는 신문에서 볼 수 있는 뉴스와 비슷하다. 최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빼기 위서일 듯 하다. 그래야 읽는 사람들이 저자의 주관적 생각에서 벗어나 사실적으로 역사에 일어났던 일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념의 시대, 이념의 충돌!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TV에서 많이 들었던 전대협에 이처럼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줄 어릴 때는 몰랐다. 대학교에 보내놓았더니 데모만 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철없었던 것인지 이제는 안다.

국가를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열정을 불태웠던 분들이다. 그분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가 없을 지도 모른다.

감사한다.

그런데 NL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여러 변화를 하였고, 여러 갈래로 나뉜다.

어디가 본류이고, 어디가 지류인지 논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뉴라이트가 보여주는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변질이 보여주는 문제!

대중은 사라지고 이념만 남는다. 아쉬운 일이다. 정통을 이으면서 더욱 발전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시대정신과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NL의 변질을 목격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나중에 기억할 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사들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