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17

김구 - 나무위키 6. 평가

김구 - 나무위키



6. 평가
6.1. vs 이승만
6.2. 진보와 보수진영의 평가
6.3. 미국의 평가
6.4. 가장 무난하여 존경을 받게 된 인물?
6.5.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민족 영웅?
6.6. 친일 인사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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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가[편집]

6.1. vs 이승만[편집]



라이벌로 비추어지는 이승만을 아주 높게 평가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김구의 평가가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이 압도적인 평가는 자료와 실증에 입각한 것 보다는 이미지적인 것에 가깝기 때문에 그다지 객관적이지는 않다.

해방정국 시절 김구의 맹동적인 행보나(송진우 암살설이며…) 임시정부 시절의 좌익 사냥에 대해선 대중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김구가 맹렬한 반공주의자였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또한 뒤에도 나와있지만 이승만의 대통령 이후의 행적이 너무나도 막장이어서 김구가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이승만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외교론에 의존한 독립운동을 주장하여 자주성이 없다는 평을 듣는 데 반해[57] 김구는 자주적이다 소리를 듣는데 당장 김구가 줄을 대었던 것이 중화민국장제스 총통과 그의 처남인 쑹즈원 등이다. 이승만이 미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자주성이 없고 김구가 중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자주성이 있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의문이다. 이승만도 국내진공작전에서 OSS의 협조를 얻어 조선인 무장세력을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일을 추진하는 등 무장독립에도 지원을 했으며 항일단파방송 사건 때 광복군의 활약상을 선전하는 방송을 하기도 했다. 김구가 임시정부 말엽에 마련한 한국광복군 역시 그리 자주적 군대는 아니었다. 한국광복군은 장제스의 입김이 굉장히 강해 장제스의 허가 없이는 교전을 할 수도 병력을 늘릴 수도 없었다. 서방 연합국은 장제스가 김구를 지원하는 것을 중일전쟁 종전 이후 장제스가 한국을 괴뢰국화하려는 술책의 일환으로 보았기 때문에 장제스가 광복군을 키우지 못하게 압박했고 이에 장제스는 광복군을 강하게 통제하며 규모를 제한했다. 장제스는 오랫동안 임정이 한국 독립세력의 대표라고 볼 수 없다고 여겨 정식국가로 승인도 안해줬다. 그래도 장제스가 한국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봤을 때 퍼주기만 하고 마오쩌둥의 손에 대만으로 쫓겨나게 되어 한국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해서인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독립 지원만 거나하게 해주고 그걸로 얻어내려던 건 모두 날린 셈.

그럼에도 이승만의 독립운동이 더 크게 비판받는 것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단체를 두고 권력싸움을 한 것[58]과 더불어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 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으로 해석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분노했으며 특히 강경파인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았다."고 분노했으며 이외의 독립운동가들도 이승만의 행동을 단순히 외국에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서 매국노의 행위로 보아 "우리가 다른 나라에 위임통치 받으려고 죽어라고 독립운동 한거냐?"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비판 여론은, 당시의 국제 정세와 국제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떨어지는 것이라 오해했기 때문에 나온 비판이다. 연세대 연구 등에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현재야 국제연맹이 공기취급을 받지만 이승만이 인식한 그때의 국제연맹의 위상은 지금과 달랐으며 김규식도 같은 내용을 파리에서 청원한 바가 있다. 자세한 것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 문서 참조.

이외에도 김구에 비해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박한 이유는 대통령 재임 시절의 삽질인 반민특위 문제, 6.25 사변 때의 추태, 부정부패, 대량학살, 독재, 3.15 부정선거로 인한 하야로 현대에 그 평가가 최악으로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백범 김구 VS 우남 이승만”

두 사람의 노선들 자체는 모두 독립운동에 필요한 것이었으니 어느 한쪽 노선만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것은 지양하도록 하자.[59]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조화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와 별개로, 해방 직후 김구의 정치력에 관련한 비판도 못지 않다. 이철희 소장은 한 인터뷰에서 진보진영이 대체로 높게 평가하는 김구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정치력 만큼은 이승만을 좀 닮을 줄 알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승만은 많은 과오를 남긴 대통령이었지만 적어도 정치력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대단히 노회하고 탁월한 보스의 모습이었으며[60] 그래서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이 이루려 한 소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는 것.

6.2. 진보와 보수진영의 평가[편집]

"내 마음 속의 지도자"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했다."
ㅡ 노무현 전 대통령[61]
"김구 선생은 독립투사였고 절세의 애국자였지만 정치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신탁통치를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시한부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ㅡ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60쪽[62]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에서 김구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편이며, 위의 두 전직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양 진영 내부에서도 평가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진보 쪽 중에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는 NLPDR이나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에서는 일평생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싸웠다는 점과 해방후에도 적극적으로 친일 인사를 등용해 이들을 인력 풀로 활용한 이승만과 달리 그들을 배척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사실 김구 역시 해방 후 정계 활동과정에서 일부 친일 행적을 보이는 인사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구의 경우는 귀국 초에 장제스의 중국계 지원으로 정치자금을 끌어모을 시도를[63] 했을만큼 해외 인맥을 구축한 상태였으며, 상해의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명망이 매우 높았다. 무엇보다 1대 국회에 임정 세력의 참여율이 낮았던 관계로, 이승만처럼 대놓고 반공세력으로 변신한 친일 세력 및 그 자금을 끌어들이는 무리수를 굳이 둘 필요가 없었다. 비록 2대 국회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일부 친일인사를 쓰긴 했어도,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산한 것과 같은 후세에 지탄받는 정치적 언행(言行)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던 것.

김구를 극우인사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적어도 중도좌파 성향의 약산 김원봉을 상해로 끌어들이는 포용력은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는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을 내세운 김규식과 함께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면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거나 동참했던 다른 우익인사들과도 노선을 달리하였다. 당대의 대표적 극우 인사였던 장개석과 항일투쟁을 하면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백범의 사상적 성향에 대해 단정짓는 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진보 진영쪽에서는 박노자를 비롯한 진보신당민중민주주의 계열이나 강정구같은 인물들이 임시정부 법통론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 적 있으며, 김구에 대해서도 과격민족주의 등 오점을 거론하며 김구를 백색테러범이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김구 청문회>라는 책까지 내놓으면서 김구를 "친일파가 만든 민족 영웅"이라며 매우 강하게 비판한 적도 있다.[64]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김구의 임정 시절이나 해방정국의 과격한 행동이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대중들의 기대만큼 우호적이지는 않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대놓고 첩과 총잡이를 거느리며 반대파들을 암살했다고 깠다.
보수 쪽에서도 

민족주의, 반일을 내세우는 쪽은 김구를 매우 고평가하며 박정희 시절에는 박정희가 이승만을 싫어했던 것도 있어서 대대적인 푸쉬를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자유경제원 등을 비롯한 뉴라이트 계열의 이승만 옹호파는 김구의 단일선거운동이 김일성등의 정치선전에 이용당했다며 비난하고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은 과로 보며 최근까지도 김구를 폄하하고 상대적으로 이승만을 추켜올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두고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까니 알고보면 중도라는 사람도 있으나 양쪽에서 까는 것과 까이는 인물의 정치 성향은 아무 상관도 없다. 이게 중도인 이유면 히틀러는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이 사이좋게 깠으니 중도인 좋은 사람인가? 또한 이용당했으니 자신을 이용한 사람과 같은 정치성향이었던 것이 아니냐면서 김구를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한 공산주의자라고 까는 쪽도 있는데[65] 역시나 상관없다. 나치에게 이용당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프로이센 귀족과 우익 지도층은 히틀러의 나치당과는 성향이 아주 먼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역시나 잘 모르지만 나치는 극좌적인 성격도 강했으며 노동자 권익 운동에도 동참해서 총선에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사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좌우 대립이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며, 거기에 주변에는 4개 강대국, 북한이라는 해괴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좌파와 우파가 다소 특이하게 자리잡았다. 타 국가에선 우파는 민족주의, 좌파는 사회민주주의 계열을 띌 때, 한국에선 우파는 국가주의+권위주의, 좌파는 사회민주주의+민족주의 등으로 다소 복잡하다. 때문에 같은 진보 진영이라 해도, 같은 보수 진영이라 해도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 현대사에서 활약한 인물들에 대한 평이 상당히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6.3. 미국의 평가[편집]

해방 정국 당시 38선 이남을 장악하던 미군정에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었던 김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정명강간(精明强幹)한 중심인물을 영수로 하고 그의 영도에 절대복종하여 정성단결 되는데서만 우리의 독립은 완성될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서도 얼마던지 그 예를 찾을 수 있으니 의대리(意大利)의 무소리니, 독일(獨逸)의 히틀러, 토이기(土耳基)의[66] 게말파샤, 중국의 장개석, 아라사(俄羅斯)의 스타린 등이 이 각기(各其) 유일무이한 영수가 되여 그의 지도하에 당세는 발전되고 국가운명을 보장하고 있다[67]. 강적을 상대로 하여 일장혈전(一場血戰)을 경(經)하고 우리의 자유를 획득할 중임을 자부하는 우리는 일개 강유력(强有力)한 당과 정명강간(精明强幹)한 영수의 영도가 없어서는 될 수 없다.

— 엄항섭[68], <한민> 창간호(1936년 3월 1일자), '아독립운동(我獨立運動)의 동향(動向)
특히 미군정은 김구를 무자비(ruthless)하고, 부도덕한(unscrupulous) 인물이이며 이해하기 힘든 인물로 묘사하였다.[69] 별명도 난폭하다는 의미의 "블랙 타이거(Black Tiger)"로 붙였을 정도.
백범에서 흑범으로 여기에 더해 미군정은 1945년 송진우 암살 당시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고, 미군정 외에도 미국에서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 용의자로 봤다. 대표적으로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의 기원》에 이러한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1947년 12월 8일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현장에서 검거된 박광옥과 배희범은 각각 현직 군정청 경찰관과 현직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한독당의 당원이기도 했다.[70]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에 따르면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

6.4. 가장 무난하여 존경을 받게 된 인물?[편집]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나온 바와 같이 3.1운동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의 법통, 불의에 항거한 민주주의 이념, 평화통일 이념에 가장 부합하는, 쉽게 말해 '대한민국 헌법적 가치'에 부합하는 인물 중 하나로 김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해방정국에서 배후로 의심받은 수많은 백색테러(대표적으로 장덕수, 송진우 암살) 혐의에서 자유롭다고 할 때의 얘기다. 평화통일은 물론이고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의 상호 존중과 공존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김구의 해방정국 행보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김구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폭력의 사용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평화통일의 상징이 된 김구와 실제의 김구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

이는 그중 독립운동가였던 일부 피해자에 대해 '죽어서 기쁘다'는 취지로 발언했다는 의혹, 1946년 3월 당시에는 북한의 분리를 준비하기 위해 활동한 조직도 아니었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부에 대한 암살을 시도한 사실, 그 간부의 가족들이 피살당한 사실 등에서도 드러난다. 게다가 극우적인 입장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죽이려한 걸 쉴드 친다고 할지라도 그 가족까지 희생될 개연성이 높은 방법으로 공격을 하여 무고한 가족을 죽게만든 것은 옳지 못한 것임에 틀림 없다. 가족까지 몰살될 가능성이 높은 방식으로 공격한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인 '자기책임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6.5.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민족 영웅?[편집]

김구에게 민족적 영웅이란 이미지를 만든 것은 박정희의 군사정권 작품이란 주장이 있다. 실제로 김구의 차남 김신은 군사정변 당시 공군참모총장으로, 5.16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박정희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백범 김구를 적극적으로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남산에는 백범광장을 조성하고, 1962년에는 김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1등급)을 수여했다.[71]

김신은 1962년 예비역 공군 중장으로 예편하고[72], 주 중화민국(대만) 대사로 부임해 무려 8년 동안 이례적으로 장기간 재임했다. 당시 중화민국은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겐 미국 다음 가는 맹방이었다. 1971년 귀국한 김신은 대통령의 권유로 공화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낙선한다. 하지만 그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 추천으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및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

거기에 이승만 정부의 잔재를 지워내고 북한과의 대립상황을 이용해 정통성 쌓기에 몰두하던 군사정권에게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이자 (북한과의 대립상황에 한민족 한개의 정부라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극렬한 민족주의자이며 반공주의자에 임정의 법통성도 갖춘 김구만큼 띄워주기에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것. 이렇게 보면 일견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민족영웅이 맞는 것 같기도 하겠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김구는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민족영웅이다"라는 주장 또한 기존의 김구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주장이다. 박정희가 집권은 커녕 일개 군인에 불과했던 1940년대에 김구는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 상당수로부터 민족 영웅으로 대우받았고 개중에는 국부로 여기는 이들도 존재했을 정도로 명망있는 인사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집권 이전인 1960년에 상영된  아아 백범 김구 선생이라는 제목의 기념 영화,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대회 당시 사회자가 김구를 '국부'로 소개하자 김구 스스로 나서 "국부는 이승만 박사 한 분 뿐이다."라고 해명한 일화,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조문객이 최소 200만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추산된다는 사실 등 김구가 1940년대에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충분히 인기 높고 명망있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여럿 남아있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영웅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과장이 섞인 표현이라 봐야 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백범 김구가 당대에도 이미 민족 영웅으로 대접받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후대에 군사정권의 필요에 의해 과장과 미화가 덧씌워졌고 그로 인해 과대평가된 면모가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6.6. 친일 인사 등용[편집]

김구 본인은 친일 행위를 한 바 없으나, 해방 후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규합하고 정치 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친일 인사들을 받아들인 사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백범일지를 윤문한 이광수[73][74] 경교장을 제공한 최창학, 한독당과 김구의 자금원이였던 방응모 등이 있다.

먼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광수가 1947년에 발행된 국사원본 백범일지의 문장을 윤색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울러 김구 연구자인 도진순에 의하면 <나의 소원>의 작성에 이광수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 퍼졌던 아름다운 나라라는 개념을 차용한 흔적이 존재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따라서 대중적으로 문화강국론에 대하여 긍정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에 우려가 된다는 입장을 제기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사 다음으로 최창학은 일제강점기 '금광왕'으로 불렸던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일본광업(주)에 시가 800만원(현재 가치로 약 9600억원)이라는 가격을 받고 금광을 팔아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었고 이후 경성(서울)에서 대지 1700평과 건물 290평에 달하는 2층 양옥 저택인 죽첨정을 건설했다.

그리고 일본 육군에 전투기 8대를 헌납했으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상무이사와 친일단체인 임전보국단의 이사를 역임했다. 해방 직후 최창학은 미군정의 강압으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자신의 저택인 죽첨정을 바쳤으며 그 이름도 경교장으로 바뀐 뒤 정치적인 사안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인사들이 집결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아시아경제 기사 마지막으로 방응모[75]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조선일보가 복간된 1945년 11월 25일 이후부터 꾸준하게 김구에 대한 일관적인 찬사를 보내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잠시 한국독립당(1920년)의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제기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론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 동시 선거를 김구가 반대하자 강력한 비난을 쏟아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디어오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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