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30

역사학자 임지현, 그리고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Victimhood nationalism : 네이버 블로그

역사학자 임지현, 그리고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Victimhood nationalism : 네이버 블로그

존경해온 역사학자 임지현 교수님을 어제야 비로소 처음 직접 뵈었습니다. 오래된 책 『우리 안의 파시즘』(2000)도 가져가서 사인을 받았지요. 최근에 내신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2016)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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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배송돼서 어제 미처 가져가지 못했고... ^^ 좌우 진영 막론하고 민족주의가 신성시되는 한국에서 그 성역에 균열을 내온 임지현 교수는 국내 에서 늘 소수자의 위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해외에서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 인 팰그레이브 맥밀란 Palgrave Macmillan 학술총서 시리즈에 그가 지적하고 개념을 정립해온 '대중 독재 Mass dictatorship' 가 포함됐고 그가 공동편집자로 참여했습니다.

또한 그가 지그문트 바우만 의 '세습적 희생자의식 Hereditary victimhood'를 발전시켜 만든 용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혹은 국 가주의) Victimhood nationalism'는 외국 학계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더군요. 
'우리야말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민족이니 우리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정당화된다'는 식의 희 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어느 나라에나 나타나는데, 임교수가 공부한 한국과 폴란드가 아주 대표적인 예죠.

아래 링크한 네이버 캐스트 강연에 보면 여러 재미있는(그리고 씁쓸한) 에피소드가 나오는 데...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자가 누구냐는 설문에서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보다도 폴란드인이 라고 했다는군요. 임교수에 따르면 국가 등 정치권력은 이러한 피해의식의 집단기억을 필요에 따라 부추깁니다. 이렇게 모든 나라들이 서로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강화할 때 어떤 일이 닥칠지는 뻔합니다. 하지만 그걸 넘어선 인류의 연대도 있다고 임교수는 이야기하지요. 

아래 강연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기관이 젊은이들의 민족의식을 북돋우고자 나치 시절 게토에 갇혀 벽 너머로 항의하는 유대인 젊은이들 영상을 보여줬답니다. 그런 데,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거기서 오히려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분리장벽 너머로 항의하던 모습을 연상하더랍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기관은 '어, 이게 아닌데' 하며 그 영상을 거둬들여 버렸답니다. 이 것은 국가 등 정치권력이 민중의 희생자의식 집단기억을 조종하고 통제하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동 시에 인류에게는 역지사지의 유비가 가능하다는, 그로 인한 이해와 화해가 가능하다는 희망도 보여 줍니다. 

요즘은 미국, 영국 등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하긴 좀 민망하지 않을까' 싶은 나라들까지 나서서 '그 동안 우리는 손해봤다'면서 자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임지현 교수님의 '희생 자의식 민족주의' 이론은 더욱 강하게 다가옵니다. 빨리 논문을 바탕으로 한 단행본이 나와 세계 인 문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 책 준비 중이라고 하시더군요.

아래 네이버 캐스트 강연은 정말 좋으니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 우리 사고를 지배하는 강력한 민족주의 프레임에서 우리를 꺼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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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109985&rid=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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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교수는 지구화 시대에 “국가 권력이 기억의 정치에 개입하는 방식”을 살펴본 끝에 “국경을 넘는 밑으로부터의 기억의 연대 가능성”을 짚어본다. 먼저 “기억을 재현하는 ‘서사적 틀’로서의 민족 서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독점 사업자로 나서려는” 국가의 시도, 즉 ‘기억의 국민화’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다양한 역사적 실례를 들어 적시하면서 “국민국가를 단위로 한 집단 기억”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대신 “국경을 넘는 21세기의 연대 방식으로 기억의 연대”의 필요성을 제언하는데 서로 다른 기억들끼리 “공생하고 같이 갈 수만 있다면, 오히려 개별적 기억의 차이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하고 미래를 도모하는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열린연단 강연 (윤리 6강) –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임지현 : 기억의 세계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적 기억에 개입하고 싶어 하는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2차 대전 이후의 세계사적 관점에서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굉장히 정치적으로 기억의 프레임들이 짜이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냉전 체제에서 소련의 영향권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이른바 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 서유럽 혹은 미국이 저질렀던 범죄 행위는 결사적으로 기억하는 반면에 소련이라든가 스탈린주의 범죄라든가 혹은 적군(赤軍)이 저질렀던 범죄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어버리게 되고 반대로 서유럽에서는 오히려 연합국의 공습이라든가 혹은 제국주의가 가했던 침략이라든가 그러한 가해 행위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소련이라든가 적군, 스탈린주의의 범죄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기억하는 식입니다. (…)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은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성노예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불가역적 해결을 표방한 합의도 한국과 일본의 국가 권력이 현재 동아시아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초국적) 공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기억에 개입하고자 하는 욕망의 한 표현이 아니었는가 생각이 됩니다.

[강연] 지구화 시대 국가주의와 기억의 정치 - 기억의 탈영토화와 재영…
열린연단:문화의 안과 밖
4,7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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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C 특별강연 -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 식민지의 기억' (임지현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EDq2-oiIDmA

Inter-University Center at SKKU
60 subscribers
* 본 영상의 강의는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HK)연구소의 지원으로 실시되었습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어떤, 답답한, 지적 교착 상태가 있다. 일본 내각의 신사참배, 수정주의 교과서, 정신대 문제 등 ‘현재화된 과거’의 다양한 문제들이 불거질 때마다, 이 교착 상태는 더 굳어지는 느낌이다. 민족을 경계로 나누어진 이 대치선은 더 강화되는 경향마저 보인다. 민족국가 단위의 세계질서가 지배적인 한 불가피한 측면도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경계가 아니다. 정작 답답한 것은 우리의 인식 틀이 그 경계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실천을 규정하는 것이 ‘현실’ 그 자체라기 보다는 ‘인식된 현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선은 그 인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한다. 현실을 인식하는 틀이 바뀔 때 실천의 방식이 달라지고, 그것이 다시 현실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역사학의 인식 틀에 대한 문제 제기야말로 ‘담론적 실천’의 첫 걸음이겠다.
사실상 식민주의의 과거에 접근하는 한․일 양국 역사가들의 문제의식은 대체로 민족을 경계로 고착된 전선에 갇혀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서로의 문제의식과 연구가 상호 침투하여 전선의 교착상태를 돌파하기는커녕, 완강하면서도 끈질긴 이 민족적 ‘진지전’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생산기지로서 존재해왔다는 것이 더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듯이, 그것은 제국 대 식민지라는 ‘아픈 과거’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후 혹은 전후 60년, 과거를 인질 삼은 그 60년의 ‘아픈 현재’가 낳은 산물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과거에 대한 학문적 질문자로서가 아니라 ‘아픈 현재’를 낳은 정치적 공범자로서의 동아시아 역사학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 임지현, ‘세습적 희생자’ 의식과 탈식민주의 역사학
‘Hereditary Victimhood’ and the Postcolonial Historiography in East Asia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 식민지의 기억
■ 임지현 교수 - 서강대 사학과
시간: 8월 5일 금요일 오후 1시
장소: 성균관대 육백주년기념관 4층 408호
주최: Inter-University Center at SKKU국제한국학센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HK연구소
사회: 황호덕 성균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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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
2 years ago
좋은 강연 감사합니다!!

2


yg- kim
yg- kim
1 year ago
무슨 강의가  이랗게 영어가 많이 나오는지...유식한다는 뜻인가..~?못들겟음~~

손민석 임지현 피해자 내셔날리즘 반일정서 기억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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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4 hrs  · Shared with Public
임지현에 의하면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 사망한 중국인은 약 1,500만명정도이고, 인도네시아가 약 400만명, 베트남에서 약 200만명, 말레이시아에서 12만 5천명, 필리핀에서 12만명정도가 죽었다고 한다. 인도에서도 2차세계대전으로 18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존 다우어에 의하면 동전쟁으로 조선인은 원폭피해자까지 합쳐도 7만명정도가 사망했다. 고통의 정도를 숫자로 표시하기 어렵겠으나 상대적으로 적은 인명피해를 겪은 건 분명해 보인다. 물론 브루스 커밍스가 문학적으로 표현했듯이 전세계가 불타고 있을 때 역사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였던 한국인들에게 역사는 한국전쟁이라는 더 큰 파국을 준비해두었지만.. 그런데 일본제국주의로 인한 피해 정도를 따진다고 한다면 36년동안 혹은 그 이전의 식민화 과정에서 겪었던 피해까지 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비교대상이 된 지역들도 대부분 식민화 과정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겪었기에 그부분까지 포함해도 그다지 차이가 없을 것 같기는 하다만. 임지현은 이를 두고 스스로를 일본 제국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라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적 자체는 동의하는데 임지현은 그뒤로 숫자상의 비교가 희생자 의식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논한다는 점에서 약간 모순적이지 않나 싶다.
-피해의 위계를 세우는 행위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 위계를 이용해 한국인의 희생자 의식을 비판한다는 모순을 범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숫자가 주는 어떤 효과도 분명히 있다. 희생의 위계가 숫자로 표현되니 확연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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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uke Lee
피해가 큰 다른 국가들에게 당시 조선은 또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전쟁 참여로 본다면 또 가해의 입장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물론 그게 강제 징집에 가까웠다고 하겠지만) 여튼 민석님 덕에 이런 짧은 글을 통해서도 많이 배웁니다.
 · Reply · 4 h
손민석
제가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가해의 모습이 더 정확했다고 봅니다. 저는 마르크스를 공부하면서 되려 친일파에 너그러워졌는데요, 근대국가 내부에서 민족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유별나게 반발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의 영역에 참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아 보여서 걱정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정치의 과잉과 그 반대극단인 정치의 금지가 동시에 작동하는 과정이라 봐요.
 · Reply · 4 h
Luke Lee
손민석 이런 게 온전히 학문(?)의 영역에서만 이야기된다는 게 안타깝죠.
 · Reply · 4 h
손민석
이관식 근데 뭐 학문에서도 잘 논의되는지는.. 내부 분위기는 여전히 민족주의적인 게 강해서..
 · Reply · 4 h
Luke Lee
손민석 뜬금없지만 아래의 댓글들이 흥미롭군요. ㅎㅎ
 · Reply · 3 h
손민석
이관식 하하. 흥미로우시다니.
 · Reply · 3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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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jai Jung
임지현 쌤의 인식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한국의 피해는 1905년부터 2020년까지 계속된 거라고 봐야죠. 특히 한국전쟁의 피해가 절대적이었고. 한국전쟁을 어떻게 식민지배와 떼어서 볼 수 있을까요? 게다가 분단은 너무도 뼈아프죠. 덕분에 자주성을 상당히 상실한 상태인걸요.
 · Reply · 4 h
손민석
분단의 책임을 일본이 어느정도 져야 한다는 것과 한국전쟁의 피해의 책임이 일본에게 귀속된다는 건 엄연히 다른 층위의 주장입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조선 지도부의 결정은 왜 그 피해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되는 건가요? 그리고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었음에도 지정학적인 요인과 정치적 이익 등을 고려하여 휴전선 인근에서 전쟁을 계속하며 희생을 늘린 한국 지도부의 책임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의 책임도 일본이 져야 하는 건가요? 분단은 국내의 정치지도자들의 미숙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 이뤄졌는데 왜 그 과정에 하나의 주체로서 참여했던 일본만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나요? 지나칠 정도의 단순화와 그것이 아니면 유지되기 어려운 반일정서는 제대로 된 현실인식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 Reply · 4 h
Hojai Jung
손민석
전쟁을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 따로 떼어놓고 보면...남북전쟁에서 일본이 개입할 여지가 없죠. 물론, 제가 한국전쟁과 분단의 책임이 전적으로 일본이 져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저의 짧은 코멘트 속에 어디에 모든 책임이 일본에 귀속된다는 표현이 있나요?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이 연결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다시 한번 읽어보시죠.
그러면, 한반도의 통일은, 남한과 북한이 합의하면 되는 사안일까요? 그러면 일본은 왜 계속 방해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사건이 하나하나 따로 떼어지지 않습니다. 한국전쟁의 민간인 학살의 책임이 일본은 아닙니다. 하지만 비극의 기원을 따라가보면, 중국, 서양세력, 일본, 못난 조선까지 다 튀어나오겠지만, 한국전쟁의 가장 이전의 체제인 식민지배에 비중이 조금 더 높을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반일정서라고요? 너무 넘겨 짚으시는 것 아닌가요? 너무 표현이 거치시네요.
 · Reply · 4 h
손민석
Hojai Jung 말씀하시는 게 계속 충돌하시는데요, 일본제국주의의 책임이 첫문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본이 개입할 여지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면 왜 둘째 문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비중이 더 높은 정도"가 되는 건가요? 둘이 상충한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비극의 책임에 일본이 개입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책임의 정도가 낮은데 왜 비극의 기원의 책임을 일본이 다른 사건들보다 "비중이 더 높을 정도"가 되는 건가요? 정리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한국전쟁의 가장 이전의 체제"는 식민지 체제가 아니라 "미군정체제"가 아닌지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한국 정치체제는 일본 총독부 - 미군정 - 대한민국 순으로 이어집니다. 말씀하신 기준이라면 미군정에게 분단과 한국전쟁의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미군정과 소련군정 시기를 생략하고 곧바로 식민지배로 점프하게 되는건지요? 또 이 군정기간 동안에 남북한의 정치적 지도자들의 행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식민지배와 무관하게 남북한 정치지도자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전쟁이 났을 수도 있는 건데 무슨 근거로 식민지배가 가장 비중이 높다고 생각하시는건지 말씀해주신 바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마지막으로 저는 현재를 "자주성을 상당히 상실한 상태"라 인식하시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말씀하시는 "자주성"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와닿지 않네요. 한반도의 통일은 당연히 다른 주변국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집니다. 독일도 동독과 서독이 둘이 합의해서 이뤄졌나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통일도 둘만 합의해서 이뤄졌나요? 그나마 합의로 통일한 남예멘과 북예멘의 통일도 전쟁을 치뤘고 소련의 쇠퇴 속에서 가능했습니다. 당연히 국제적으로 주변국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과정입니다. 베트남도 독일도 예멘도 모두 자주성을 상실한 상태인가요? 주권의 제한이라는 표현은 제가 알기로 굉장히 애매한 개념입니다. 유럽 나토 체제 속에서도 그러면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들이 모두 군사주권을 제한당하는 꼴입니다. 하다 못해 개인이 둘만의 합의로 결혼을 하려고 해도 주변 지인들의 무수한 간섭과 조언 등을 받습니다. 그걸 모두 자주성의 상실이라 표현할 수 있을지요. 저는 의문입니다.
1905~2020년까지 한국이 일본에게 피해를 받았다고 인식하는 것만큼 강한 반일정서가 또 있나요? 넘겨짚었다는 말씀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피해도 있지만 일본으로부터 이익을 받은 것도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100년이 넘는 기간을 피해가 "계속"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두고 일본에 긍정적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중립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생각되고요. 반일정서가 아니면 설명이 안되는데 달리 설명하실 표현이나 주장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 Reply · 3 h
Hojai Jung
손민석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알겠습니다. 남한의 입장에서만 보면, 한국이 피해를 본것 보다, 일본으로부터 이득을 본게 더 많겠죠.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으로부터 이득을 본 것 보다 피해를 본게 훨씬 더 많겠죠. 그냥, 저라는 사람은 "남북한 통합 관점"에서 일본을 본거고, 손민석 선생의 경우는 남한의 관점에서만 본 것 같네요. 잘 알겠습니다.
 · Reply · 3 h · Edited
손민석
Hojai Jung 그렇군요. 선생님께서 쓰신 '한국'이라는 표현을 저는 남한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남북한 통합의 관점이라 하시니 말씀하신 바가 이해가 됩니다. 반일정서와는 결이 다른 것이었네요. 제 표현이 거칠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남북한의 통합의 관점에서 볼 때 일본 정부의 외교행위가 미국 등에 비해 유달리 부정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저도 의문의 여지를 갖고 있습니다만 그리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Reply · 3 h
Hojai Jung
손민석 아...네....한가지만 추가로 달면, 저는 반일주의자이기도 하면서 친일주의자이기도 한데요, 그게 날카롭게 분리되지가 않습니다. 누가 저를 반일주의자로 몰면 저는 "친일"이 되고, 누가 저를 친일로 몰면 "반일"로 돌변하고 합니다. 사실, 상당수 지식인 따라쟁이들이 저 같은 포지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이라는 것을 그냥 모더니티나 제국주의로 치환해도 상관은 없는데, 현대성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완전히 탈출할 수 있는 식민지 지식인이 있을런지요?? 저는 없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나 베트남전쟁이나 요즘에는 아시아의 근대화의 관점에서 연결된 사건으로 보는 관점이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비극이기는 하죠....우리야 다들 비극을 통해 남겨진 빛의 자식들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6.25를 하나의 사건으로 따로 떼어서 책임을 논하는게 조금은 어색해 보입니다. 어찌보면 일어날 사건이 일어난 게 아닐가 싶기도 하고요. 거기서 나타나는 인간군상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비난을 하는 것 보다는, 그것과 연결된 사건들의 관계성에 대해서 탐구하는게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이 빠지지 않는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20세기 21세기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극복할 대상이자 연구할 대상이긴 한 것 같습니다.
 · Reply · 3 h
손민석
Hojai Jung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별달리 이견이 없습니다. 제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거기서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것에 비해 더 크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고, 선생님은 그렇다고 보신 점에서 차이가 생겼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근대성의 확장이 중국혁명 - 조선혁명 - 일본혁명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연쇄라는 반작용 속에서 상호작용하다가 미국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의해 기존의 제국주의 질서가 붕괴되면서 생긴 틈을 메우려다 생긴 사건이 분단과 한국전쟁이라 봅니다. 단순히 누구 하나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게 아니지요. 복합적으로 보아야겠습니다만 한국 분단의 책임에는 세계적 냉전에서 소련이 미국보다 더 큰 책임을 지는 것과 반대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고 일본제국의 책임은 상대적으로 작다고 봅니다. 한국인 지도자들의 문제도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만은 국제질서의 교체보다는 적다 봅니다.
 · Reply · 3 h

Hojai Jung
손민석 밥 먹고 왔는데, 그냥 저도 공부하는 셈 치고 제 생각을 정리하면, 저는 NL출신은 아니지만 통일이 너무나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오히려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인식하게 되긴 했습니다. 그런데 통일의 과정을 전략적으로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일본과 힘으로 대등해지는게 어찌보면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의 기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4대 주변강국의 동의가 필요한데, 그 4차방정식 수준의 동의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거든요. 때문에 그 개입자 수를 줄이는 방법이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은 들더군요, 자연스레 일본을 하나 빼는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겠더군요.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통일에 호불호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어떻게든 일본 먼저 극복하면 미중갈등 속에서 확률이 더 높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2019년의 반일흐름이 생각보다 효과적인 작용을 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손 선생의 생각은 완전히 다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요....에효...어려운 문제긴 하네요.
 · Reply · 2 h
손민석
Hojai Jung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저는 한반도의 통일은 역사적으로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지향했던 중립화 정책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지정학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중립화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의 동의와 협조가 필수적이라 봐서요. 일본을 배제한다고 해서 일본의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이번에도 볼턴 회고록에 나왔듯이 미국의 결정 과정에 개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북조선이 얼마나 동의할지도 의문스럽고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아 누가 옳다 그르다의 영역은 아니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도 하나의 방안으로 고민해볼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 Reply · 2 h
Hojai Jung
손민석 일본과 힘으로 대등해지는게 인구구조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섬나라 일본의 특성상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끊을 일도 아니긴 합니다...다만...일본을 이기겠다는 표현은,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한반도 주도의 통일을 하겠다는 의지인 셈이라, 저는 그게 정답이 아니더라도, 최초의 사건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 Reply · 2 h

손민석
김영규
나라별 식민지배의 역사도 다르고, 한국의 경우 징용 문제도 있지 않을까요? 가령 필리핀에서도 일본이 징용을 하려 했지만 행정력이 딸려서 실패했다고 들었고,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수많은 인원들을 징용해서 많이 목숨을 잃었다고도 알고 있지만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한다는 대의 아래에 일본제국의 노동력 징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만의 경우에는 토착 전염병을 옮기는 모기로 인해서 한국만큼 일본인들이 정착해 살지 못하기도 했고 일본의 존재가 중국 정부의 영향력을 밀어낸 측면도 있어 대만인들에게는 일본의 지배가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측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의 지배에 불만을 느낀 대만 엘리트들은 중국으로 이탈할 수 있는 옵션이 있었지만 한국에는 그런 옵션이 없었기 때문에 더 큰 반감을 느끼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담론 역시 민족주의적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민족간 “피해의식”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나타나는 “피해의식”의 차이를 민족성보다는 역사적인 조건을 통해서 찾았어야 하지 않았나 궁금하네요. 문외한의 의견입니다ㅠㅠ
 · Reply · 4 h
손민석
한국의 경우에도 친일파라 지칭되는 집단들이 적극적으로 징용, 징병 등에 참여하면서 일본제국의 전쟁수행에 참여했으니 그런 건 별로 변별점이 되지 않을 것 같고요. 오히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강력하게 주입받은 게 더 크다고 봅니다. 대만 같은 경우에는 장제스의 국민당 때문에 나타나는 내부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보고요. 임 선생이 그런 역사적 조건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이분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피해자 의식,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는 '희생자 의식'이 실제 역사적 사건과 별개로 어떻게 자가발전하면서 현대를 규정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라서요.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지적하는 게 왜 민족주의적인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 Reply · 3 h
김영규
손민석 무례한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이 된다는 인식 때문에 일본의 징용에 협조했다고 해서 수카르노를 친일파라고 손가락질 하는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문제있는 역사인식이 어떤 역사적 혹은 우연적 환경 속에서 발생한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면, 혹시 그 피해의식을 가진 민족이 원래 그런 성질을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아닌가 하여 넘겨짚고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쉽게 답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제가 직접 책을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Reply · 3 h
손민석
김영규 아닙니다. 무례하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편하게 말씀주시는 게 저도 제 생각을 점검해볼 수 있어 오히려 더 도움이 됩니다. 친일파와 같은 '협력자' 부류에 대한 각 사회의 입장은 굉장히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는 자치론자들을 친일파의 범주, 즉 협력자의 범주에 넣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대만의 경우에는 자치론과 자치운동 자체가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규정되어 실제 탄압받기도 해서 독립운동사의 범… See more
 · Reply · 3 h
김영규
그렇군요... 계승의식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흥미롭네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 Reply · 3 h
손민석
김영규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현재의 입장에서 기억을 소환한다고 봅니다.
 · Reply · 3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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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의 <기억전쟁>을 읽다가 드는 생각 메모.

 어떠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 혹은 평가는 단순히 그 역사적 사실의 진실성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 기억을 자신의 구성요소로 삼고 있는 하나의 '정치적 서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예컨대 5.18 광주에 북한군 침투설이 사라지지 않은 건 실증이 부족해서 혹은 역사적 사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386세대를 규정하는 광주항쟁을 부정해야 본인들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정치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실관계 여부가 얼마나 중요할까.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한 민족공동체의 '기억'이란 그 내부의 다양한 계급적, 계층적 구성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서사와 긴밀하게 연결된 일종의 이데올로기라 생각한다. 
그 이데올로기의 구성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파편화된 증거들에 기초하여 다른 민족공동체와의 학술적인 대화를 통해 혹은 학술공동체 내부의 자정을 통해 나름대로 객관화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정치적 서사로부터 일정한 자율성과 거리를 유지하게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정치적 영역, 정치 서사를 아예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바로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역사해석의 장이라 생각한다. 북한군 침투설이든 뭐든 그런 사례라 생각하는데, 임지현은 이 정치적 투쟁의 장을 가해자와 희생자의 구도로 너무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피해자라 규정이 이미 끝난 이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끝까지 다 읽고 판단해야겠으나 일단 생각 정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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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좌파, 그들은 누구인가 - 1] 한국좌파의 철학적 토대와 전략 上 김은회

대한민국 좌파, 그들은 누구인가 - 미래한국 Weekly

대한민국 좌파, 그들은 누구인가 1] 한국좌파의 철학적 토대와 전략 上
 김운회 동양대 교수 승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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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한국좌파의 철학적 토대와 전략 上

이른바 ‘좌파의 세상’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좌파는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사회를 보다 도덕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진보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좌파는 이념적으로 갇혀 있다. 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오늘을 확보했던가.

 미래한국이 상하 연속기획으로 묻고 답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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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람시는 사회주의 계급혁명은 하나의 사건, 혹은 일련의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변해가는 하나의 유기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사람들의 의식개혁은 사회구조 개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좌파에게 영향을 준 대표적인 좌파 사상가로는 그람시와 알튀세르(알튀제)를 들 수 있다. 여기에 남북관계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하여 주체사상이 깊이 개입되어, 한국 좌파들의 사상적 기저에는 ‘그람시 이론 + 알튀세르 이론 + 주체사상’ 등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조절주의 등의 고급이론들이 나타난 반면, 한국 좌파들은 주체사상의 영향으로 매우 교조적인 좌파의 행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론적인 경향으로 보면 그람시의 이론은 주로 혁명의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좌파 모두가 적극 활용하고 있다.

다만 알튀세르의 고급이론은 좌파의 고급 지식인들이 선호해 교조적이고 무식한 주사파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좌파 고급 지식인들은 알튀세르나 ‘조절주의 이론’ 등을 토대로 체제를 비판하고, 민자통(민주, 자주, 통일) 운동을 강조하는 주사파는 보다 직접적으로 감성적으로 체제 전복을 시도하는 것이 한국 좌파의 현주소다.

그러나 민자통 운동세력이 사실상 전체 좌파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우파가 좌파 고급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이유는 우파 지식인들이 이 개념 자체를 이해할 정도로 성숙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 좌파 고급 지식인들은 적화통일이 되면 ‘反공화국 종파 반동세력’으로 가장 극렬하게 숙청 대상이 되겠지만,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면 현실적 좌파운동에서는 항상 연합하여 결국은 주사파 운동에 협력하고 있다.

한국 좌파의 가장 큰 불행은 종북 주사파(NL)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좌파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트로츠키, 그람시, 알튀세르, 북한의 주체사상 등을 신봉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대부분의 사상들이 ‘잡사상’이라 하여 사라지고 주체사상이 주류를 형성했다.

북한이 60년 이상 강력한 대남혁명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한국의 좌파들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주사파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세력들은 좌파에서 소외된 까닭이다.

따라서 한국의 좌파 진영은 현재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보다 다차원적이고 시대정신에 부합한 ‘진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올드좌파 프레임’에 갇힌 ‘친북세력’ 또는 ‘종북 단체’ 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앞으로 모든 언론들은 이 ‘진보’라는 말을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부분에 대한 정리를 하지 않고 현재의 한국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

한국 좌파에게 영향을 준 대표적인 좌파 사상가로는 그람시와 함께 알튀세르를 들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인 알튀세르는 마르크스 사상에 구조주의적 해석을 제시해서 사멸 직전의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시킨 현대 공산주의자로 평가된다. 198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은 그의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한 그람시,루카치 등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고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좌파가 가진 내면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람시와 알튀세르의 이론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그람시의 ‘진지론’과 헤게모니 투쟁에서 패배한 우파

태생적 불행과 고난의 대명사 그람시는 혁명적 변혁의 창출에 있어서 ‘의식(意識)’의 역할을 주장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이다. 그람시는 서유럽의 자본주의가 매우 견고하다고 인식했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각종 여론기관을 통하여 지배층(부르주아)들의 힘과 동의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유지되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부르주아가 이 같은 문화적인 ‘헤게모니(hegemony)’와 연대(連帶)를 유지하는 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그람시는 봤다.

마르크스나 레닌도 마찬가지지만, 그람시를 포함한 이들 좌파 이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체제 전복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고 이른바 혁명의 성공 후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가령 한국이 적화된 후, 이들의 사고는 남북 좌파의 사회주의적 정의 실현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대한민국의 발달된 자본주의적 프레임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지금도 이른바 좌파 일부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보면 사회주의 혁명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이 점은 필자가 여러 차례 지적한 부분이지만, 다시 간략히 요약해 본다.

무엇보다 먼저 현대의 국제시장으로부터 유리된 사회주의가 성립하려고 하면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서로 협조해 일종의 경제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주의 경제는 경제적 잉여(economic surplus)에 의한 구상무역제(求償貿易制)를 바탕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주변 사회주의 국가의 상부상조가 없으면 경제체제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북한이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에 이내 ‘고난의 행군’의 늪에 빠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설령 한국에 사회주의 혁명이 이뤄진다고 해도 그 경제는 얼마 가지 않아서 ‘바나나 공화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또 사회주의 혁명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자본이 광범위하게 이탈하고 많은 주요 인적 자원 또한 해외로 빠져 나가기 때문에 경제가 붕괴 상황까지 가게 된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가 제대로 성립하려면 노동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다르다.

세계 노동시장에서 노동의 대립은 자본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측면이 있다. 어느 국가든지 해외직접투자(FDI)를 유치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쓰는데 그것은 자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람시는 마르크스 레닌이즘의 맹목적인 추종보다는 보다 현실에 맞는 전략과 이론의 개발이 필요하고 여러 가지의 다양한 변혁의 시도들도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그는 경제를 포함하면서 정치, 문화, 사회적 관계, 이데올로기 등을 연결 짓는 ‘관계의 앙상블(ensemble)’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는 정부를 전복시키기에는 레닌주의적 혁명 전위대보다는 일상적 사회현실과 연결된 ‘대중정당’이 더 적합하다고 역설했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1980년대 이후 각종 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좌파 진지들이 구축되었지만 민노총, 민변, 참여연대 등이 전체 사회운동을 주도할 때까지는 세력이 미약했다. 2000년 들어서 PD 중심의 민노당이 창당되자, 급진 주사파(이하 NL)는 군자산(충북 괴산)에 모여 ‘정치판에 뛰어들 것’을 결의(2001)했다.

이 때의 문건이 <군자산의 약속(맹약)>인데, 대중 정당을 통해 정권을 잡고,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후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이룬다는 계획이 정리되어 있다. NL은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을 지지했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조국통일의 대사변기(6·15 남북정상회담)를 맞았다”하여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람시는 사회주의 계급혁명은 하나의 사건 혹은 일련의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변해가는 하나의 유기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사람들의 의식개혁은 사회의 구조개혁과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람시는 물리적 혁명만큼이나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중시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점은 알튀세르의 견해와 용어만 다를 뿐 크게 다르지 않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베트남 공산당은 정치전으로 몰아서 군사전의 약세를 역전시켰다. 이것은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성공적으로 장악한 사례다.

현재 한국 우파는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지속적으로 상실하고 있다. 이에 대한 세련된 대응 논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그 동안 보수 정부나 우파가 주장하는 논리나 정책은 오히려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안보적으로 정말 심각한 위기 상황인데도 국민들은 반응도 하지 않는다. 실제로 국가안보가 풍전등화의 상황인데도 바른정당의 일부 의원조차도 ‘종북몰이’를 한다고 자해(自害) 공격을 하는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다.

좌파의 진지를 파괴하는 것이 핵심

그람시는 교육, 언론, 법, 대중문화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서 국가기구에 의한 물리적 강제력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시민사회 내에서 획득되는 ‘대중의 동의’를 통해서 계급에 의한 지배가 이뤄진다고 봤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려면,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념적 헤게모니를 국가로부터 탈취해 와야 하고 이를 위해 교육, 언론, 학계, 예술,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 진지(陣地)를 구축하여 대항 이데올로기를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유명한 ‘진지론(陣地論, war of position)’이다.

현재 한국의 좌파 진지들은 수백 개 이상으로 매우 견고하게 구축됐다. 현재로서는 우파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기점으로 수많은 좌파 진지들이 구축되었는데 이는 좌파 정권의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북한의 대남 전술적·전략적 성공이기도 하다.

그 동안 좌파 정권은 여러 형태로 진지 유지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한 반면, 우파 진지는 오히려 경제적 토대를 지속적으로 상실하고 급기야 바른정당에서는 전경련 해체라는 자해(自害) 논리로 무장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문제는 이 진지들을 어떤 방식으로 인지하고 파괴하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진지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도록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해 공격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좌파 정권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 자체적인 실정(失政)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또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와해시키는 방법 등이 있다.

예를 들면 사드 문제에 있어서도 결국 미·중 간의 외교적 실패가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이외에도 대책 없는 원전 포기, 비현실적이고 오히려 자연파괴적인 신재생에너지 문제, 가뭄과 홍수에 무대책인 채 악의에 찬 4대강 사업 왜곡 문제, 비정규직 문제, 합리적 이성을 상실한 개성공단 재개 문제, 독일과 달리 좌파 정권에 비협조적이며 귀족화된 민노총과 좌파 정부의 갈등 등이 지속적으로 좌파 정권의 발목을 잡을 것이니, 이 때를 놓치지 말고 적극 공략해야 한다.

그람시는 전략론으로 ‘기동전(機動戰, war of movement)’과 ‘진지전’ 개념을 사용했다. ‘기동전’이란 1917년 러시아와 같이 피아(彼我)로 구분하는 두 개의 세력이 정면 대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좌파는 ‘기동전’은 적합하지 않고 이보다는 점진적이고 전면적인 ‘진지전’이 적합하고 ‘기동전’은 ‘진지전’의 일부여야 한다고 봤다. 그람시는 진지전이야말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일한 교전 방식이며 기동전은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에 한해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한국의 경우, 기동전은 두 가지의 경우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외부적으로 북한이 주체로 북한은 미군 철수 이후에는 언제든지 기동전이 가능한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으로 군부 내에 침투해 혁명의 만조기(그람시의 표현으로는 ‘유기적 위기’)에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현재 좌파 정권이 다소 온건하고 실용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보면, 굳이 내부적인 기동전을 구사할 이유는 없다. 다만 온건 좌파 정부 또는 우파 세력들이 ‘급진 주사파 또는 종북세력의 준동을 어떤 방식으로 물리적으로 통제하는가’가 관건이다.

‘기동전’의 성공 여부에 관해, 그람시는 ‘유기적 위기(organic crisis)’ 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유기적 위기’란 기존의 지배계급이 장기간 치유가 어려운 구조적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때는 기동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 유기적 위기의 대표적인 경우가 광우병 사태, 한미 FTA 반대, 효순·미선 사건, 세월호 사건 등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효순·미선 양이 훈련 중인 미군 전차에 사망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하자 진지에 대기하고 있던 좌파 세력들은 총공세를 단행하여 전국적으로 수백 회의 촛불시위를 하여 전국을 마비시켰던 것을 들 수 있다. 급기야 미국 부시 대통령까지 나서서 2번이나 공개 사과를 했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거짓 정보의 확산 등으로 과격한 정치전으로 귀결됐다. 또 다른 예는 2015년 민노총 한상균의 주도로 벌어진 ‘민중총궐기’인데, 이 때의 시위는 7만 명 규모로 경찰 기동대와 충돌로 115명의 기동대원이 부상하고, 기동대의 대형 차량도 습격해 50대가 파손되는 등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53개의 좌파 단체가 참여했지만, 주력은 민노총과 전교조였다. 여기에는 범민련(조국 통일 범민족 연합)의 남측 본부도 가세하였다.

범민련의 전략 목표는 한일 간의 관계를 이간하고 한미일 안보·경제 협력 관계를 파괴해 미일 제국주의의 축출을 통한 한국내의 친북 정권을 수립해 북한 주도로 통일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 축인 전교조는 결성 당시(1989)에는 비합법이었지만, 김대중 정부가 일단 합법화했고 다시 불법(2013)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전교조는 현재까지도 교육 내용이나 인사·예산 학교의 설립·폐지 등 결정에 절대적인 권력을 불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위험한 세력이다.

<통일뉴스> 보도(2016.9.20)에 따르면 2017년 박근혜 하야 투쟁을 이끌었던 ‘2016년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2016년 민중총궐기 12대 요구안’을 발표했다.

12대 요구안에서 ‘민주주의’ 부문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국정원 해체가 포함되어 있고, ‘자주평화’ 부문에서는 대북적대정책 폐기, 5·24조치 해체, 한반도 사드(THAAD) 배치 반대, 한미일삼각군사동맹 중단 등이 세부 사항으로 나열되어 있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국정원 해체는 북한이 제시하는 ‘민주’의 강령적 과제에 포함된 것들이고 대북적대정책 폐기와 5·24조치 해제 등은 북한이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하는 단골 메뉴다.

남북 관계가 파탄에 이른 것은 금강산 관광객 사살, 3차 서해교전, 핵실험, 천안함 폭침 사건, 연평도 포격 도발 등 북한의 대남적대노선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 관계를 무시하고 무작정 대한민국 정부를 향해 대북 적대정책을 폐기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의도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다. 총궐기투쟁본부에는 대법원으로부터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단체도 포함되어 있는데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가 이에 해당한다.

북한은 항시 기동전이 준비된 국가이고, 그리고 북한은 한국에 대한 정치적 개입은 당연한 의무이자 역사적 사명으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이제 그람시에 더해서,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사생활로 유명한 알튀세르는 한국 좌파에 어떤 그림을 그렸던가.

마르크스는 다소 ‘경제결정론’적 시각으로 국가는 자본에 의해 종속되어 자본가 계급이 만들어 낸 제도적 지배기구라고 봤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폭력혁명을 통해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자본주의 국가나 정치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는 점에 주목했다.

알튀세르의 국가관과 호명이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을 심화시켜 60년대 후반 ‘이데올로기적 억압기구로서의 국가’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즉 국가를 ‘억압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구분하고 이 가운데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계급투쟁의 장이라고 강조했다.

먼저 ‘억압적 국가기구’는 지배 질서에 저항하는 세력이나 사상을 물리적으로 제압하는 것으로 정부, 군대, 경찰, 법원, 감옥 등이 여기에 해당하고 이것들은 물리력 즉, 폭력을 통해 기능한다.

다음으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국민들의 사고 방식이나 신념, 가치관, 더 나아가서 감성의 차원까지도 지배함으로써 지배적 사회 관계를 유지해 가는 기제이다.

알튀세르는 자본주의에 있어서 보다 효과적인 재생산 기제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부분은 그람시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의 세련된 프랑스 버전처럼 들리기도 한다.

알튀세르는 국가는 반드시 자본주의적인 생산수단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요소가 있고, 자본주의적인 국가가 유지되는 방식에 있어서 ‘자본’이 아닌 상부구조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이론화 한 것이다. 즉 상부구조가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자동적으로 전환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알튀세르는 ‘호명(呼名)이론’을 제시했다. 호명이론은 ‘객체의 주체화 이론’으로 자본에 대한 국가연구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호명이론을 쉽게 이해해 보자.

가령 최고의 아이돌 스타가 자동차 TV 광고에 나와서 눈웃음을 치며 “이 차는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속삭인다면 피지배계층은 이 사회의 주체도 아니고 별로 중요한 존재도 아니지만 그 ‘당신’이라는 말로 인해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일까?”하는 식으로 가치를 스스로 주체적으로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객체에 불과한 존재가 마치 주체처럼 인식하면서 이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문화 이데올로기’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피지배계층이 스스로 자신을 사회의 ‘주체’라 인식함으로써 지배-피지배 계층은 유지되며 국가는 계속 자본주의 상태로 존속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비자본계급으로 자본주의사회의 객체나 대상에 불과한 피지배계급들이 스스로 주체라고 믿는 것은 이 같은 ‘이데올로기의 효과’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호명이론은 ‘문화 이데올로기론’의 시발점이 된다.


알튀세르의 이론들과 객체의 주체화로의 왜곡이 자본주의의 본질 중의 하나라는 주장이 유럽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줌에 따라서 북한의 이른바 주체사상도 관심을 받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김운회 동양대 교수

임지현(역사학자) - 나무위키



임지현(역사학자) - 나무위키



임지현(역사학자)

최근 수정 시각: 2020-06-22 02:33:04


분류
한국의 역사학자
서강대학교 출신

일상적 파시즘의 문제 제기는 지금까지 한국의 비판 세력이 겨냥해 왔던 정치적 파시즘 혹은 제도적 파시즘의 극복 그 자체만으로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임지현. 《우리 안의 파시즘》[1]

독재민주주의의 반의어인가. 국민의 다수가 ‘독재’의 지배방식을 지지한다면, 그 독재 체제는 독재인가? 민주주의인가? 다수에 반하여 소수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면, 그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 밑으로부터 ‘국민’ 다수의 동의 아래 소수를 타자화하고 억압하는 다수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
(중략)

다수파 민주주의의 문제를 직시하고 18세기 자코뱅주의의 국민주권론을 넘어서서 소수자타자를 포용하는 소수자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상을 21세기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임지현. 트럼프주의, 대중독재 시대의 새로운 도래




출생
1959년

학력
서강대학교 사학과 학사,석사,박사

1. 개요2. 성향3. 여담4. 저서5.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한국의 진보적 역사학자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역사학도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포스트모던 역사학자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연구활동하다 2015년 1학기부터 모교인 서강대학교로 돌아와 강의를 하고 있다. 폴란드사를 전공했고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매우 능해서 학계의 초빙을 받아 폴란드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는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 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국내 역사학자중에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얼마 안되는 역사학자들중 한 사람이다. 세계 3대 인명사전 중 하나인 '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 2014년 판에 등재 될 정도.[2] 단 서양사 전공자이다보니 한국사의 구체적인 부분에는 민족주의 역사학자들로부터 반박도 있는 편이다. 특히 한국사 전공자들에게는 그닥 환영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임지현 교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한국사에서 주체가 같은 동류로서의 의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2. 성향[편집]
포스트모던 역사학자답게 모더니즘 역사학이 만들어낸 국사의 해체를 비롯하여 여러 근대적인 역사 담론에 대한 재구성을 꾀하고 있다. 국가주의, 내셔널리즘을 해체하자고 주장하는데... 거의 아나키스트나 다름없다. 물론 뉴라이트의 탈민족주의 담론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뉴라이트식 탈민족주의 담론도 '근대주의'에 기반해 있다고 비판한다.[3]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에 부정적인 시각을 취하거나 "소수자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등 여러모로 진보 성향을 띄고 있다.[4]

그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전체주의적 사고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다. 그런 것들을 종종 "일상적 파시즘"이라고 칭하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급한 건 '경제 성장'이나 '정치 개혁'이 아닌 사회문화적 파시즘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포스트식민주의 계열에서는 민족주의 및 민족주의 사학 비판에 있어 비슷한 입장이나, 학문적인 맥락이나 근본적 견해가 다르다고 한다. 이쪽의 경우 탈근대적인 포스트구조주의의 맥락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점 등에서 그러한 듯.

3. 여담[편집]

입시때 사학과를 지망하자 어머니가 땅을 치고 말렸다는 일화가 있다. 딱히 그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대학 재학 중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방황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술을 아주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일제 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자 고려공산당의 주축 중 한명이었던 임원근의 손자라고 한다.

문재인 정부의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다.#
4. 저서[편집]

  1.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
  2.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3. 대중독재(전3권, 편저)
  4. 적대적 공범자들
  5.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6. 우리 안의 파시즘
  7. 기억 전쟁

5. 같이 보기[편집]

사회적 소수자
안티내셔널리즘
진보주의


[1] 그의 포스트모던적 성향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2] 나머지 2개는 미국 인명정보기관과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의 인명사전
[3] 애초에 당연한게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모더니즘, 즉 근대주의와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사조로써 등장한 것이라 근대의 산물인 내셔널리즘을 해체해야 한다고 하며 탈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인데 한국 뉴라이트들은 탈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 전근대인 조선을 부정하고 식근론으로 대표되는 근대주의를 강하기 내세우기 때문.
[4] 다만 성향과는 별개로 진보언론 뿐 아니라 보수언론인 동아일보 계열에 속하는 신동아에도 칼럼을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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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유학 보낸 그들을, 나라가 버렸다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6.30 03:11
[박종인의 땅의 歷史]
[218] 갑오년 조선 관비유학생 甲午年 朝鮮 官費留學生





교복을 입은 청년들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맨 앞줄 가운데에 실크해트(silk hat)를 쓴 사람이 보인다. 의화군(훗날 의친왕) 이강으로 추정된다. 둘째 줄 왼쪽에는 흰 한복을 입은 여자가 한 사람 보인다. 이름은 김란사(金蘭史)다. 이 사진은 김란사 후손인 독립운동 연구가 김용택이 서울대 도서관에서 찾아낸 사진이다.

사진 위쪽에는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라고 적혀 있다. 아래에는 '건양 원년 1월 6일 공사관 내 촬영'이라고 적혀 있다. 건양 원년은 1896년이다. 그해부터 조선은 양력(陽曆)을 썼다. 이 학생들은 1894년 시작된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일본으로 파견된 관비(官費·국비) 유학생이다.

사진을 찍고 한 달 닷새 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그날 개혁 정부 총리대신 김홍집은 청계천에서 맞아 죽었다. 아관파천 이후 이 조선 학생들 유학 생활은 만신창이가 됐다. 귀국 후 인생도 뒤죽박죽이 됐다. 정쟁(政爭)과 무책임 한가운데에 내버려진 조선의 마지막 기회 이야기.

갑오정부의 유학 구상

1894년 청일전쟁이 터지고 조선에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다. 일본 힘으로 개혁을 하려던 김홍집 정부는 그해 11월 부임한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주선으로 관비 유학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에 앞서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또한 의학·상업·군사 유학생을 계획 중이었다.(1893년 10월 31일 '윤치호일기') 게이오대 설립자인 일본 석학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이들 교육 실무를 준비했다. 1895년 2월 학부대신 박정양이 유학생 모집 공고를 걸었다. 양반가 자제 114명이 선발됐다.


이미지 크게보기1895년 김홍집 정부에서 일본으로 보낸 국비 유학생 모임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 단체 사진. 촬영 날짜는 1896년 1월 6일이고 장소는 주일 조선 공사관이다. 앞에서 둘째 줄 왼쪽의 한복 입은 여자는 훗날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김란사(金蘭史)다. 가운데 실크해트를 쓴 사람은 당시 일본 유학 중이던 의화군(훗날 의친왕) 이강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발행한 국한문 혼용 잡지 ‘친목회 회보’ 2호는 ‘1월 6일 수요일 오전 10시 의화군 전하와 공사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잔치를 열었다’고 적고 있다. 유학생들은 촬영 한 달 뒤인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터지며 정부 지원이 축소되거나 끊겨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조선으로 송환됐다. 이후 인생은 저마다 파란만장하고 기구했다.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김용택


박정양이 이들에게 말했다. "일신의 사사로움을 잊고 나라를 사랑하여…"('친목회 회보'1, '학부대신 훈시') 이들은 1895년 4월 2일 내부대신 박영효 배웅을 받으며 한복 차림으로 일본으로 출발했다. 한 달 뒤 2차로 선발된 유학생 26명이 일본에 도착했다.(박찬승, '1890년대 후반 관비 유학생의 도일 유학', '근대교류사와 상호인식1',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2001, p80) 두 달 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군주에게 보답하고 국민에게 베풀어 동아시아의 존안(尊安)을 도모하라"고 이들을 격려했다.('친목회 회보'1호, 1895년 윤5월 14일 '친목회일기')

가난한 한 나라가 교육 예산(12만6752원)의 31%(4만426원)를 들여 총명한 청년들을 부강한 옆 나라로 보냈다.(1895년 11월 15일 '일성록') 완결되면 나라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혁명적인 기획이었다. 이에 맞게, 유학생들은 이듬해 전원 신식 복식으로 갈아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게 끝이었다.

아관파천과 유학생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인 무리에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터졌다. 4개월 뒤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했다. 갑오 정권 실권자들은 민씨 살해 배후자로 낙인이 찍혔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길거리에서 맞아죽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이후 조선 정부는 학비 지원과 중단을 반복하며 주일 공사관과 유학생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공식 훈령은 '종전과 동일하게 학업에 열중하라'였다. 변함없었다.(1896년 2월 21일 '마이니치신문', 마스타니 유이치, '갑오개혁기 도일 유학생 파견 정책의 전개와 중단 과정', 한국사학보 56호, 2014) 하지만 이들은 어느새 '역적의 손에 의해 파견된 유학생'(유학생 어담 회고록)이며 '망명 한인들과 접촉한 불온한 사람들'('일본 외무성 기록', 메이지 33년 12월 8일 '재마산 영사가 아오키 외무대신에게', 이상 박찬승, 앞 책 재인용)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대실패로 끝난 유학 프로젝트

1896년 4월 7일 갑신정변 주역 서재필이 미국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해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독립신문은 유학생 지원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김기주, '아관파천 후 한국정부의 유학정책', 역사학연구 34권, 2008)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뿐 아니라 서양 문명 각국에 신분 고하를 막론한 유학생 100명 파견 계획을 세웠다.(1898년 12월 7일 '독립신문') 이 사실이 보도되고 18일 뒤 정부는 '민권(民權)'과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를 전격 해산시켜 버렸다. 유학생 계획은 전면 중단됐다.


1918년 김란사가 미국 강연 때 한인 모금을 통해 기부한 서울 정동제일교회 파이프오르간. 원래 악기가 6·25 때 파괴되고 이후 복원한 악기다.


지원이 끊긴 일본 유학생들은 '학비를 지원받지 못해 사방이 빚이었고, 끼니를 때우느라 진 빚에 공관이 창피함은 물론 외국에 수치스러울 정도였다.'(각사등록 근대편 '학부래거문' 1899년 8월 3일 '외무대신 박제순이 학부대신 민병석에게 보내는 조회') 일본 유학생에 대한 지원은 빚 상환 차원에서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1903년 2월 전면 송환령이 내려지며 중단됐다. 밀린 유학 비용은 귀국 명령 14개월 뒤에야 최종 청산됐다.

유학생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정부 지원이 끊긴 가난한 나라 국비유학생'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유학생 18명은 1900년 현지에서 대한제국 육군 참위 사령장을 받았다. 봉급은 지급받지 못했다. 그리고 유학을 계속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학비 지급 또한 없었다. 불만을 품은 이들은 망명 중이던 유길준과 쿠데타 계획을 세우다 적발됐다. 1904년 체포된 쿠데타 미수자 7명이 참수(斬首)형을 받았다. 1명은 곤장 100대형을 받았다. 고종 정권과 망명 인사들 정쟁의 희생자였다. 유학생 가운데 6명은 귀국을 거부하고 '친목회' 자금을 들고 미국으로 도주했다. 12명은 사립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변하진, 신해영, 어용선은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1898년 이들은 박영효를 장관으로 추천했다가 역적으로 몰렸다. 같은 유학생 오성모도 함께 체포돼 참수됐다. 변하진은 옥사했다. 처형을 면한 신해영은 일본에서 병사했다. 그가 만든 인쇄소 보성사는 훗날 기미독립선언서를 찍었다. 함께 체포된 안국선은 진도로 종신유배형을 받고 1907년 풀려났다. 이후 그는 고종 정권을 비판한 '금수회의록'을 저술했다.

그녀, 김란사


최초의 관비 여자 유학생 김란사(金蘭史·1872~1919). 3·1운동 직후 북경에서 의문사했다.


김란사는 여자였다. 이미 관비유학생이 파견되기 전 남편 하상기와 함께 일본 유학 중이었다. 유학생이 온다는 소식에 김란사는 당시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자신도 포함시켜달라고 청원했다.(각사등록 근대편, '학부래거문'1·4, 1895년 윤2월 '여학생 김란사 관비유학생 대우 조회') 석 달 뒤 청원이 통과됐다.

김란사는 게이오에서 관비로 학업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에서 문학사를 취득했다. 미국에서는 의친왕 이강과 교류했다. 그리고 돌아와 이화학당 교사가 되었다. 기숙사 사감, 교감 격인 총학사도 맡았다. 1916년 순회강연을 떠나 정동제일교회에 파이프오르간 설치 기금을 모았다.

1918년 설치된 그 파이프오르간 송풍실에서 유관순과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찍었다. 3·1운동 9일 뒤인 1919년 3월 10일 김란사는 중국 북경에서 동포들과 식사를 한 후 급사했다. 사람들은 그녀 행적으로 보아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심옥주, '이화학당 총교사 김란사와 유관순', 유관순연구소 학술대회, 2018) 1995년 대한민국정부는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그들

이미 나라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많은 유학생이 귀국하고도 취직하지 못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냉대받던 유학생들은 대거 통감부 체제 관료로 변신했다. 요컨대, '조선 측 유학생 정책은 실패했고, 일본의 조선 유학생 정책은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박찬승, 앞 책, p128)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 유학생은 5년 만에 1000명을 넘었다. 1872년 청에서 미국으로 보낸 국비 유학생은 120명이었다. 일본 유학생들은 정부 지원 속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정부·민간 요직에 취직했다. 청나라 유학생은 10년 뒤인 1881년 '서양에 물들었다'며 전원 소환됐다. 그들이 귀국하고 14년 뒤인 1895년 조선 정부는 일본으로 관비 유학생 140명을 보낸 것이다.〈2019년 4월 17일 '박종인의 땅의 역사 161: 청나라 조기유학생 유미유동(留美幼童)과 청일전쟁' 참조〉

일본은 실리(實利)로 청년들을 보냈고, 청은 이념(理念)에 매몰돼 그들을 소환했다. 조선은 희한할 정도로 맑고 순수한, 정치 논리였다. 청·일·한 3국 무대인 동아시아 질서 재편 과정은 정확하게 그 순서대로 진행됐다. 대조선인 유학생도 대조선도,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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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은(103204law****)2020.06.3009:28:16신고김홍집과 함께 군중들에 살해당한 가능성이 큰 인물은 정병하이다.
찬성1반대0댓글
최상은(103204law****)2020.06.3009:14:18신고어윤중은 한양 길거리에서 군중의 손에 맞아죽은 것이 아나라 고향 보은으로 피신하던중 용인에서 원한을 품고 있던 향반이 보낸 머슴들에 살해되었다.
찬성3반대0댓글
최상은(103204law****)2020.06.3009:05:45신고청일전쟁은 1895년4월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따라서 최초의 대일관비 유학생은 그 직후인 같은달 26일에야 보무도 당당하게 일본으로 출발하였을 것이다.
찬성0반대0댓글 (1)
변재광(lonesta****)2020.06.3008:29:44신고망하는 나라는 다 망하는 이유가 있다. 남에 의해 망하기전에 스스로 이미 망한 경우가 많다. 그때는 망하는 짓 하면서도 망하게 될줄 몰랐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들 생각엔 잘못된 역사 바로잡고 평화 어쩌고 하면서 뭐 굉장한 개혁 하는것 같지만 세월 지나고 보면 서서히 나라 망하게 하는짓이었다는것을 본인들이 아닌 후손들이 속 터지는 심정으로 깨닫게 될것이다.
찬성41반대1댓글
이원열(cys0****)모바일에서 작성2020.06.3007:41:28신고내몸에 병이들면 병탓을 하는 어리석음 보다. 내가 섭생을 바르지 못한 과거의 무절제한 나를 먼져 탓을 해야 발전이 있지. 무조건 남탓이나 하고 병탓이나 하고 타인의 선의에만 기대고자 하며 그렇지 못하면 분노부터하는 것은 퇴보의 삶이다. 반일팔이들.OOOO들.문재인팔이들. 퇴보가 뭔지 알기나 할까?
찬성37반대0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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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30/2020063000112.html

알라딘: 밥상 아리랑 - 북녘에서 맛보는 우리 음식 이야기 김정숙

알라딘: 밥상 아리랑

밥상 아리랑 - 북녘에서 맛보는 우리 음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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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쪽
123*187mm
365g
ISBN : 9791196585952
=================
책소개
도쿄에 조선대학교가 있다. 주로 재일 동포들이 다닌다. 학생들이 때마다 평양으로 '단기연수'를 간다. 글쓴이 김정숙이 학생들을 이끈다. 김정숙은 조선대학교 생활과학과 영양학 교수이자 재일조선인 2세이다. 아버지 고향이 제주도다. 생활과학과에서는 주로 음식을 연구한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평양 단기연수에서 북한 음식을 맛보고 조리 실습을 한다.

저자가 10년 넘게 북한을 다니면서 맛본 요리와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국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본어로 출판한 《朝鮮食紀行(조선식기행)》에서 북한과 재일조선인 관련 정보를 대폭 보강했다. 인류학자 차은정 교수가 번역하고 디렉팅했다. 책 뒤에 김정숙과 차은정의 대화-분단과 통일 사이에서 재일조선인을 묻다-가 실려 있다.

===========

목차


1부 냉면이 아니라 온면?
백두산 감자 - 군감자와 농마국수
처음 본 맛에 푹 빠지다 - 옥수수 막걸리
냉면이 아니라 온면? - 옥수수 온면
아깝잖소! - 풋콩
콩의 원산지는 조선 - 콩 요리
미식가의 행복 - 간장
날것입니까? - 깻잎절임
조국에서 조리 실습 - 서재각
세 손가락의 마법 - 명태양념찜, 청포묵, 두릅나물
그리움이 가슴에 남는 맛 - 온반
평양 4대 요리 가운데 가장 귀한 - 대동강숭엇국
본고장에서 손수 만들어 먹다 - 평양냉면
평양의 풍물시 - 대동문에서 있은 일
면 요리에 분투하다 - 소면
좌측에 가도 먹을 수 없어요 - 잣죽
강한 향이 식욕을 돋우다 - 향채 요리
화려한 장식, 진화하는 데커레이션 - 장철구평양상업종합대학
조선을 대표하는 음식 - 떡
북조선 사람들의 독특한 먹는 스타일 - 쌈
너무 맛있어서 한술 더 뜨다 - 김치
훌륭한 일품요리 - 국

2부 놀라운 맛에 감동하다
3억 년의 고대어를 먹다 - 철갑상어 요리
고급 요리를 저렴한 가격에 - 자라 요리
금강산의 특산물을 먹는 즐거움 - 조개 요리
차가워진 몸을 따뜻하게 데우다 - 금강산 섭죽과 가물칫국
이제부터 우리에게 맡겨 주세요 - 해금강 해산물 요리
어떻게라도 들어가고 싶었던 전문 식당 - 메깃국
놀라운 맛에 감동하다 - 쏘가리 요리
체력의 원천 - 추어탕
정상들의 만찬 - 대동강수산물식당
가깝고도 먼 조선과 일본의 조리법 - 육회와 생선회
배가 터질 때까지 먹겠습니다 - 삼계탕
호사스러운 맛 - 신선로
회전 초밥 아니고 회전 전골 - 매운맛의 향연

3부 달콤하고 멋진 평양의 밤
평생 먹고도 남을 양을 배불리 먹다 - 송이버섯
금강산에서 찾은 뿌리 - 도라지와 더덕
생약의 왕다운 위엄 - 고려인삼
면역력을 키우는 ‘만능 약’ - 오미자주스
달콤하고 멋진 평양의 밤 - 칵테일바
스포츠계의 새바람 - 영양 음료
‘료리축전’으로 보는 오늘날의 북조선 - 태양절료리축전

저자와의 대화 -분단과 통일 사이에서 재일조선인을 묻다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평양호텔 레스토랑에는 으레 감자 요리가 테이블에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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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정숙 (지은이)

1969년 일본 도쿄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이 제주도 조천면 신흥리다. 3살 때, 18살 언니가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에 가서 평양외국어대학에 입학했다. 언니는 지금 평양 선교구역에 살고 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우리학교’를 다니고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뒤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영양화학과에 연구생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조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논문을 제출해 생물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대 생활과학과 영양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8년부터 2년에 한 번씩 조선대 학생들과 함께 북한을 방문해 유명 요리사들로부터 조리 교육을 받는다. 때때로 언니와 일가친척을 만나러 북에 가기도 한다. 이 책은 그가 북한에서 직접 맛본 음식과 만난 사람들 이야기다. 더불어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이야기이기도 하다. 접기


최근작 : <밥상 아리랑>

차은정 (옮긴이)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규슈대학교 한국연구센터 방문연구원과 히토쓰바시대학교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2016)이 있으며, 《지구화 시대의 문화정체성》(조너선 프리드먼, 공역),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오카모토 유이치로), 《숲은 생각한다》(에두아르도 콘), 《부분적인 연결들》(메릴린 스트래선), 《부흥문화론》(후쿠시마 료타, 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최근작 :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빨간소금



출판사 제공
책소개



평양 4대 요리?

홍콩에 ‘4대 천왕’이 있다면, 평양에는 ‘4대 요리’가 있다. 평양을 대표하는 ‘평양 4대 요리’는 무엇일까? 바로 평양냉면, 대동강숭엇국, 녹두지짐, 온반이다.
평양냉면은 ‘평양’ 하면 떠오르는 대표 음식이다. 옥류관의 평양냉면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충격적인(?) 실체가 밝혀진 바 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평양냉면 덕후들의 기대와는 달리 칡냉면 같은 색깔과 진한 맛을 뽐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양냉면의 이데아를 찾는 일은 무의미해 보인다. 남과 북이 갈라져 살아온 세월만큼 평양냉면도 각자의 처지에 맞추어 변했을 테다. 면 위에 오이, 소고기, 배추김치, 돼지고기, 배, 닭고기, 달걀, 파, 실고추를 순서대로 쌓은 고명의 높이가 7cm에 달한다는 것도 안 비밀!
먼 옛날 추한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옥에 갇혔다. 청년의 연인은 추운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을 청년을 애달프게 생각해 지짐을 얹은 흰 쌀밥에 따뜻한 국을 부은 음식을 만들었다. 이 음식을 먹은 청년이 “이 맛있는 음식을 대체 뭐라고 부르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순간적으로 따뜻한 밥이라는 뜻에서 “온반”이라고 대답했다. 그 후 평양 지방의 결혼식에는 사랑하는 젊은 남녀의 이야기가 담긴 온반이 잔치 음식으로 나온다고 한다. 글쓴이는 북한에서 직접 온반을 맛보고 나서 “뭔지 모르게 그리움이 가슴에 남는 맛이다. 저 멀리 기억 저편에 잠자고 있는 미각을 깨우는 듯했다”라고 평했다. 음식은 위로를 준다. 차별과 배제 속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인 글쓴이에게 온반은 분명 위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평양 4대 요리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대동강숭엇국’이다. 숭어를 끓이면 나오는 황색 기름으로 맛과 향을 내는 매우 간단한 요리다. 북한에서는 국빈이나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자주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대동강숭엇국’에서 ‘대동강’을 떼고 그냥 ‘숭엇국’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양식에 의존한다. 대동강에 서해갑문이 생긴 뒤로 바닷물과 민물을 오가는 기수어인 숭어가 바다에서 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고, 서해갑문에 기수어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따로 냈지만 그 길을 지나는 숭어들이 얼마 없어서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책에는 평양 4대 요리를 비롯해 50여 가지에 달하는 북한 음식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자기정체성과 ‘영양학 교수’라는 전문성을 살려 쓴 음식 이야기

일본 도쿄에 조선대학교가 있다. 주로 재일 동포들이 다닌다. 학생들이 때마다 평양으로 ‘단기연수’를 간다. 글쓴이 김정숙이 학생들을 이끈다.
김정숙은 조선대학교 생활과학과 영양학 교수이자 재일조선인 2세이다. 아버지 고향이 제주도 조천면 신흥리다. 3살 때, 18살 언니가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에 가서 평양외국어대학에 입학했다. 언니는 지금 평양 선교구역에 살고 있다. 글쓴이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우리학교’를 다니고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뒤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영양화학과에 연구생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조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논문을 제출해 생물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대 생활과학과 영양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조선대학교 생활과학과에서는 주로 음식을 연구한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평양 단기연수에서 북한 음식을 맛보고 조리 실습을 한다. 때때로 언니와 일가친척을 만나러 북에 가기도 한다. 이 책은 그가 십 년 넘게 북한을 다니면서 직접 맛본 음식 이야기다. 더불어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쓴이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자기정체성과 ‘영양학 교수’라는 전문성을 살려 북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일상 요리를 소개한다. 바로 이런 대목. “일본에서는 보통 연두부라고 해서, 콩물이 들어 있는 두부를 팩으로 포장해서 판다. 나는 이걸 사다가 순두부찌개를 곧잘 끓여 먹는다. 물론 한국의 요리법을 참조한다. 그러니까 나는 북조선에서 한민족의 두부 맛을 느끼고, 일본의 두부를 사다가 한국의 요리법으로 요리해 먹는다. 내 두부 요리 하나에도 재일 동포의 역사가 담겨 있다.”
책 뒤에는 글쓴이 김정숙과 인류학자 차은정의 대화, ‘분단과 통일 사이에서 재일조선인을 묻다’가 실려 있다. 이 책에 미처 담지 못한 재일조선인으로서 글쓴이의 삶과 가족사, ‘우리학교’와 ‘민족교육’의 현황과 의의, 조선대 학생들의 단기연수의 의미, 그리고 한반도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조선대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대화를 통해 글쓴이를 비롯해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북한의 오늘, 오늘의 북한 사람들

이 책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점이 ‘오늘을 사는 북한 사람들’ 이야기다. 글쓴이는 서문에서 “‘음식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북조선을 전하고 싶다, 조선 음식은 북조선과 우리를 강고하고 확실하게 연결하는 수단이다’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러한 생각을〈조선신보〉(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 중앙상임위원회 기관지)에 연재하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밥상 아리랑》의 바탕이 되는《朝鮮食紀行(조선식기행)》은 이 <조선신보> 연재를 묶은 책이다.《朝鮮食紀行》을 최초로 읽은 한국인인 차은정 교수가 번역 출판을 제안했을 때도 “음식을 통해 북조선 사람들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흔쾌히 동의했다. 몰론 한국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본어로 출판한 《朝鮮食紀行》에서 북한과 재일조선인 관련 정보를 대폭 보강했다.
우선 북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눈길을 끈다. 출판을 목적으로 찍은 사진들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정색하지 않고 찍은 북한과 북한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정겹다. 또한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들도 있다. 1959년에 요리, 의복, 관광 등의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장철구평양상업공합대학’, 평양 최초의 대형 시장인 ‘통일거리시장’, ‘6·9룡복기술고급중학교’ 학생들, 2019년 평양면옥에서 열린 ‘태양절료리축전’ 등.
북한 사람들의 생활을 엿보는 재미 또한 새롭다. 평양 대동문에서 노래방 비디오 촬영을 하는 연기자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는 사람들, 면츠유에 들어갈 술을 부탁했더니 청주 대신 평양소주를 사다 주는 가이드, 회전전골 집에서 1인용 전골을 만들어 먹는 손님들, 평양역 앞 ‘역전식당’에서 그리움을 달래는 귀국자들(귀국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귀국한 재일조선인). ‘어딜 가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에 놀라면서 미소 짓게 된다.
어쩌면 이제 ‘가깝고도 먼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북한일지 모른다. 같은 언어를 쓸 뿐 남한 사람이 북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와의 대화’에서 밝힌 차은정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사실 북한과 남한, 재일조선인 뿐만 아니라 해외의 수많은 동포들은 한민족의 문화적 토대를 공유하지만 그 떨어진 세월만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같이 살아야 하고, 그랬을 때 우리가 다른 삶과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에 대해 선생님의 자세는 해학적입니다. 그냥 웃긴 겁니다. 참 웃기다. 그냥 웃으면 되는 겁니다. 차이를 해소할 필요도 없고 너 다르고 나 다르다고 나눌 필요도 없고 그냥 웃으면 되는구나, 이런 걸 배웠습니다. …… 우리가 통일을 지향하면서 당장은 조금씩 교류를 해 보자는 사람들이 막상 교류할 때 느끼는 어떤 차이의 장벽 앞에서 ‘아, 이렇게 가볍게 웃으면 되는구나’하는 그런 것을 말해 줍니다. 이 책이 그저 북한 음식에 대한 정보만을 주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을 겁니다.” 접기


평점 분포

10.0



책을 읽으면서 북한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마치 다른 세계를 보는 듯 해서 흥미로웠습니다. 북한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북한 입문서로 추천합니다!!
전자임 2020-04-15 공감 (0) 댓글 (0)




[마이리뷰] 밥상 아리랑
조국과 민족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재일조선인 교수의 음식 에세이. 유쾌하고 즐겁다. 유머러스하다. 이런 동포들과 함께 만드는 것이 통일이라면, 한 번 주역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 있는 이야기들이다.
일본 또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이윤 논리에 의해 희생되거나 희소한 음식들이 사회주의 북한에서는 보편적으로 살아 있는 것도 많은 듯. 북한 사회의 키워드 자력갱생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음식에도 또한 투영되어 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여러 음식들을 맛나게 소개하고 식욕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장르의 성격에 충실하다. 백두산 군감자, 평양의 철갑상어, 칵테일 평양 스카이는 특히 맛보고 싶다. 책 덕분에, 콩과 떡과 쌈을 앞으로 한동안 많이 먹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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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rgy flow 2020-04-08 공감(12) 댓글(0)



밥상 아리랑
@the_book_chon 감사합니다

아리랑]

북녘에서 맛보는 우리 음식 이야기








‘재일조선인’이라는 자기정체성과 ‘영양학 교수’라는
전문성을 살려 쓴 음식 이야기와 더불어
북한의 오늘, 오늘의 북한 사람들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음식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북조선을 전하고 싶다. 조선 음식은 북조선과 우리를 강고하는 확실하게 연결하는 수단이다'

(p5)

'생활 속의 음식문화'

늘 저자의 아버지는 음식을 앞두고 품평하기 일쑤였는데

일일이 지적하고 시비를 거는 모습처럼 보였던 그 행동이

지금에 와서는 '따질 필요도 없는 자잘한 것'이

저자를 받쳐주는 토대 즉 '소중한 삶의 자산'임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50여가지의 음식을 소개하며 때로는 익숙한 한국음식처럼

그러면서 북한 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저자는 '우리'는 '제일 조선인'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북한보다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되어서

기행문처럼 쉽게 읽혀질 수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착각을 하면서 읽어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다.



숯에 구워먹는 백두산의 군감자처럼 나 어릴적 추억이 소환되고

옥수수막걸리(강냉이 막걸리)의 맛이 상상되며 입속에 군침이 고이고

콩나물은 조선민족의 발명식품이라 소리에 웃음짓고

깻잎김치를 통해 우리가 한 민족이었다는 거슬 떠올렸다.



다양한 간장의 종류, 고추장에 절인 깻잎 주먹밥은 기회가 될때

집에서 만들어 보고 싶었다.



3가지 테마로 걸쳐 음식 및 음식과 관련된 학교 대회등을

그들의 일상을 조금은 맛보았다면



분담과 통일사이에서 재일 조선인에게 묻다라는 부록속에

저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해야하는 일



무엇보다도 민족교육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평양 4대 요리 (평양냉면, 대동강숭엇국, 녹두지짐, 온반)


























이 책은 다른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가 통일을 지향하면서 당장은 조끔씩 교류를 해 보자는 사람들이

막상 교류할 때 느끼는 어떤 차이의 장 벽 앞에서

'아, 이렇게 가볍게 웃으면 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로 서로 웃어보자는 따뜻함이 느끼게 된다.



나는 우리나라에 대한 민족성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는지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본 도서는 북촌카페의 도서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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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아주매 2020-05-0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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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아리랑

북한과 같은 한반도에 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오랜 분단의 현실 때문에 점점 여러 가지가 다른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밥상 아리랑>은 북한의 음식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 남한은 오래전부터 서양의 문화가 들어와 식생활에서도 서구화되어 있고 사람들의 입맛 역시 서구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에 비해 북한은 아직까지 전통적인 조리방식이나 조리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2008년부터 2년에 한 번씩 도쿄의 조선대학교 생활 과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북조선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렇게 북한의 식문화와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옥수수를 이용한 음식이 맛있는데 학생들은 북한에 가기전부터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 지역산 감자를 주재료로 한 농마국수가 질겨 실망을 했다. 그 다음에 맛본 것이 옥수수 막걸리인데 쌀 막걸리보다 단연 좋았다. 그 뒤로 옥수수가 들어간 온면을 먹게 되는데 냉면이라고 하면 차가운 여름 음식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옥수수 온면으로 즐기기도 한다. 옥숙수의 단맛 때문에 먹는다고 하는데 면은 도톰하고 평평해서 국물과 함께 후루룩 먹기에 좋았다고 한다.




저자와 학생들은 북한을 여행할 때 모든 북한 여행자들이 그렇듯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여행을 한다. 그러나 저자와 학생들은 오래전부터 조선료리협회를 방문하고 요리 실습도 한다. 조선료리협회의 서재각 건물에서 모두 12가지의 요리를 실습했다. 평양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의 요리사가 직접 실습 감독관이 된다. 학생들을 위해 천천히 말을 하지만 교포 3세대 아이들은 평양말을 완벽하게 알아듣지는 못한다. 이런 아이들은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조선의 문화와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일본내에서 조선학교는 수업료도 비싸고 취직도 어렵다. 게다가 일본 사회에는 아직도 조신인,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깊게 남아 있다. 이런 시대에 젊은이들은 국적을 포기하기도 하고 한국말을 버리기도 한다. 북한의 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일 중에 하나는 아무래도 그 지역 특산품을 맘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먹은 음식은 대부분 북한 현지에서 바로 수확해 요리해서 먹는 음식들로 맛있을 수 밖에 없었다. ​

리나 2020-05-1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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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평소 음식에 관심이 많고 북한음식에 대해 궁금증이 많아서 읽어 본책이다. 북한 음식 하면 #평양냉면 과 온면을 가장 좋아한다.

홍콩에 ‘4대 천왕’이 있다면, 평양에는 ‘4대 요리’가 있다. 평양을 대표하는 ‘평양 4대 요리’는 무엇일까? 바로 평양냉면, 대동강숭엇국, 녹두지짐, 온반이다.

평양냉면은 ‘평양’ 하면 떠오르는 대표 음식이다. 옥류관의 평양냉면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충격적인 실체가 밝혀진 바 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평양냉면 덕후들의 기대와는 달리 칡냉면 같은 색깔과 진한 맛을 뽐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김정숙 씨는 일본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 생활 과학과 영양학 교수이자 재일조선인 2세라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10년 넘게 북한을 다니면서 맛본 요리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평양 4대 요리’ 가운데 하나인 온반을 북한에서 직접 맛보고 “그리움이 가슴에 남는 맛이다”라고 평했다.

저자의 말처럼 음식은 위로를 안겨준다. 차별과 배제 속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에게 온반은 큰 위로가 됐을 것이다.

“일본 에서는 보통 연두부라고 해서, 콩뭏에 들어 있는 두부를 팩으로 포장해서 판다. 나는 이걸 사다가 순두부찌개를 곧잘 끓여 먹는다. 물론 한국의 요리법을 참조한다. 그러니까 나는 북조선에서 한민족의 두부 맛을 느끼고, 일본의 두부를 사다가 한국의 요리법으로 요리해 먹는다. 내 두부 요리 하나에도 제일 동포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이 책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본어로 출판한 북한과 재일조선인 관련 정보를 대폭 보강했다.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이 ‘오늘을 사는 북한 사람들’ 이야기다.

북한의 오늘을 담은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한민족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들어 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남북이 분단되어 있지만 북한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마치 다른 세계를 보는 듯 해서 흥미로웠다.

북한을 잘 모르는 사람들, 북한 ���� 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 책속으로:

사실 북한과 남한, 재일조선인 뿐만 아니라 해외의 수많은 동포들은 한민족의 문화적 토대를 공유하지만 그 떨어진 세월만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같이 살아야 하고, 그랬을 때 우리가 다른 삶과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밥상아리랑 #통일 #북한 #음식 #빨간소금 #책 #글 #추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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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jice 2020-05-0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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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없이 북한을 이해하기 좋은 책


평소 북한에 관심이 있었으나, 그들의 문화 특히 식생활에 대해 알고 싶어 책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우선 책 표지가 한지 느낌이 나서 우리나라의 고유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책을 읽으면서 북한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마치 다른 세계를 보는 듯 해서 흥미로웠습니다. 북한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북한 입문서로 추천합니다.
전자임 2020-04-1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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