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3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2): 우리가 아는 역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2): 우리가 아는 역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1,400년 이슬람권의 역사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2): 우리가 아는 역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by 대체로 무해함 katib 2019.09.24


1. 꾸라이쉬 부족이 무역을 하긴 했을까?




지난 글에서는 이슬람의 사회경제적 기원 가설, 즉 무역 중심지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메카에서 이슬람이 일종의 사회 개혁 운동으로 등장했다는 통념의 문제점을 소개했다. 패트리샤 크론은 이 가설을 뒷받침할 사료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며 메카 무역에 대한 기존의 통념은 실제 역사적 증거보다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가 변화 없이 항상 같은 상태로 존재했다는 잘못된 가정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남부 아라비아의 예멘이 '행운의 아라비아'로 불리며 지중해 지역에 몰약과 유향 등 사치품을 활발히 교역했던 시절은 로마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서기 1세기 경, 즉 이슬람이 일어나가 약 500년 전이었다. 그러나 많은 현대 연구자들은 서기 1세기 아라비아의 상황을 서기 6세기의 아라비아와 비슷하다고 가정함으로써 메카 무역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냈고, 이 신화는 여러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와트와 로댕송이 메카 무역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무로부터 지어낸 것일까? 그러나 무슬림들이 남긴 기록에는 이슬람 이전 꾸라이쉬 부족이 상업과 무역에 종사했다고 언급된다. 특히 무함마드의 증조부인 하쉼(Hashim)이 메카에 기근이 돌자 낙타 대상을 이끌고 시리아로 가 대량의 밀을 수입해와 메카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처럼 와트와 로댕송이 과장은 했을지언정 아예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이슬람 이전 꾸라이쉬 부족의 무역과 하쉼에 대한 무슬림들의 기록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면 어떨까? 크론의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기원』 은 바로 우리가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와 무함마드의 생애, 초기 무슬림 공동체의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사료인 무슬림들의 기록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2. 무엇이 진짜인가?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와 무슬림 공동체의 초기 역사를 보여주는 사실상 유일한 동시대 사료는 바로 코란이다. 꾸라이쉬 부족의 상업 활동에 관한 최초의 언급 역시 코란 106장, "꾸라이쉬의 장(Surat Quraysh)"에 나타난다. 꾸라이쉬의 장은 총 4절로 구성된 매우 짧은 장이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한국어 번역은 최영길의 『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을 참고했다.




1. 꾸라이쉬 부족의 보호 (일라프, īlāf)를 위해

2. 하나님께서는 무역상으로 하여금 겨울과 여름에 안전하게 여행하도록 하였느니라

3. 그러므로 그들은 이 집의 주님만을 경배해야 하느니라

4. 주님께서는 그들을 굶주림에서 배불려 주시고 공포로부터 안전케 하여 주시니라




이게 다다. 꾸라이쉬 상인들이 어디를 오가며 교역했는지, 무얼 사고 팔았는지, 얼마나 많은 이익을 거두었는지 위 4줄의 문장은 그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한국어 번역에 나타난 "무역상"은 그저 번역일 뿐, 코란 본문에는 그저 "꾸라이쉬 부족의 여행"이라고만 명시되어 있을 뿐 상행위나 무역, 대상을 의미하는 단어나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 꾸라이쉬 상인들의 무역 활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실은 코란 본문이 아니라 후대 무슬림들이 "꾸라이쉬의 장"을 해석하며 남긴 주석에 토대를 둔다.




문제는 후대 무슬림들이 이 구절에 대해 남긴 주석과 해석이 다양하며 때로는 서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꾸라이쉬 부족들은 겨울과 여름, 어디로 무엇을 위해 여행했을까? 어떤 학자들은 추운 겨울에는 해안을 따라 더운 여름에는 내륙을 따라 시리아로 갔다고 말한다. 최영길의 번역본에는 꾸라이쉬 부족이 여름에는 시리아로 겨울에는 예멘으로 갔다고 말한다. 또다른 사람들은 반대로 여름에 예멘으로 겨울에 시리아로 갔다고 말한다. 일부는 시리아와 예멘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 아나톨리아 반도, 이라크까지 갔다고들 한다. 이 모든 해석이 다 맞을 수는 없다. 고속도로와 자동차라도 있지 않는 한 계절에 시리아를 가는 동시에 예멘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주석가들마다 꾸라이쉬 부족이 언제 어디로 여행을 떠났는지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다면, 대체 누구의 해석을 믿을 수 있을까?1




3절에서 코란은 여행과 신에 대한 경배를 연결하고 있다. 여행과 경배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도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어떤 학자들은 신의 가호 덕분에 꾸라이쉬 부족이 생필품과 식량을 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신의 은총 덕분에 다른 부족들과 외부 상인들이 메카로 찾아오게 만들어 꾸라이쉬 부족이 고되고 험한 여행을 하지 않아도 식량을 공급받고 메카에 머물면서 신을 경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꾸라이쉬 부족은 그렇다면 여행을 한 것인가, 하지 않은 것인가? 신이 꾸라이쉬 부족을 굶주림에서 구했다는 4절은 꾸라이쉬 상인들이 외부에서 식량을 수입해왔다는 말일까 아니면 외부 상인들이 메카로 찾아와 식량을 공급했다는 뜻일까?2




꾸라이쉬 부족의 "보호", 즉 "일라프"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다. 메카에서 시리아로 가는 길에 살던 부족과 꾸라이쉬 부족 사이의 안전 보장 협정이라는 해석, 또는 꾸라이쉬 부족의 보편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약속이라는 해석, 꾸라이쉬 부족이 메카에 머물 수 있도록 여행의 어려움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한다는 해석, 꾸라이쉬 부족이 살던 메카의 안전 보장이라는 해석, 꾸라이쉬 부족이 성지 카바의 주민이었기에 존경과 보호를 받았다는 해석 등등 이 "보호"가 무엇을 말하는 지도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심지어 이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3 만약 "일라프"라는 개념이 정말 아랍 무슬림들과 코란 주석가들에게 친숙한 개념이었다면 이 단어의 정확한 발음과 의미에 관한 다양하고 상반된 해석은 무엇 때문인가? 오히려 아랍 무슬림에게 꾸라이쉬의 "일라프"라는 개념은 들어보지 못한 낯선 무언가였기에 이러한 혼란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4




한 예로, 이븐 알 칼비(Ibn al-Kalbi, 819년 사망)는 무함마드의 조상인 하쉼이 시리아로 가 아랍 전통 요리를 바쳐 비잔틴 제국의 황제의 환심을 샀다고 말한다. 그 덕분에 하쉼과 꾸라이쉬 부족은 비잔틴령 시리아에 천과 가죽을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으며, 시리아와 메카 사이 살던 부족들과 보호 조약("일라프")를 체결했다. 이후의 그의 세 형제들은 각각 페르시아, 예멘, 에티오피아로 가 같은 무역 허가를 얻어냈고, 이들 덕분에 메카는 부유해졌다.5




반면에 이븐 하빕(Ibn Habib)이 인용하는 기록은 완전히 반대 이야기를 전한다. 심지어 이븐 하빕이 전하는 이야기의 출처는 이븐 알 칼비의 아버지인 알 칼비다. 이븐 하빕, 즉 알 칼비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메카 꾸라이쉬 부족은 1년에 두 번 시리아 또는 시리아와 예멘을 오가며 교역했다. 그러나 오랜 여행으로 꾸라이쉬 부족이 신에게 예배할 시간과 여유를 내지 못하자 신은 그들에게 무역과 여행을 중단하고 메카에 머물러 신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그 대신 신은 아라비아의 다른 부족들이 메카로 찾아와 식량을 공급하게 만들었다. 이븐 알 칼비가 말하는 페르시아, 시리아, 예멘, 에티오피아를 아우르는 꾸라이쉬 부족의 거대한 교역망은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는 사라진다. 도대체 어떻게 부자(父子)가 같은 사건을 두고 이렇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6




이처럼 후대 무슬림들은 코란 106장을 서로 다르게 때로는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이 모든 해석들을 받아들인다면 꾸라이쉬 부족은 시리아로, 또는 시리아와 예멘으로, 또는 시리아와 에티오피아로, 또는 시리아와 에티오피아와 예멘으로, 또는 시리아와 에티오피아와 예멘과 이라크로 여행했다. 또한 여름에 시리아로 겨울에 예멘으로 간 동시에 여름에는 예멘으로 겨울에는 시리아로 갔다. 신은 꾸라이쉬 부족이 해외에서 식량을 수입할 수 있도록 여행을 떠나게 만든 동시에 외부 상인들이 메카에 찾아오게 만들어 꾸라이쉬 부족이 여행의 짐을 덜고 오직 신만을 경배하는 데에 집중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꾸라이쉬 부족이 여행을 떠났다는 말인가 그러지 않았다는 말인가? 대체 언제 어디로 가서 거래했다는 말인가? 후대 무슬림들이 제시하는 수많은 상반된 해석은 우리를 혼란에 빠지게 할 뿐, 이슬람 이전 꾸라이쉬 부족의 무역 활동에 대해 그 어떤 분명하고 명확한 그림을 보여주지 못한다.




크론은 질문을 던진다. 무슬림들이 남긴 코란 해석과 주해가 혼란만을 준다면, 과연 이 기록들을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와 무슬림 공동체의 초기 상황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사적 자료라고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기록들을 통해 실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무슬림들의 기록을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와 초기 무슬림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로서 신뢰할 수 있을까? 크론의 답은 "아니오"다.7 크론은 코란 구절을 둘러싼 자세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기록이 코란에 언급되지 않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사료가 아니라 코란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창작된 내용에 가깝다고 본다.8




꾸라이쉬 부족의 교역을 포함하여 무함마드의 생애, 초기 무슬림 공동체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함마드가 고아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코란에서는 무함마드가 고아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크론이 묻듯이 "무함마드는 (후대 무슬림들이) 코란을 부연 설명하는 과정에서 고아가 된 것은 아닐까?"9 바히라(Bahira)라는 기독교도 수도자가 어린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 역시 유명하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특별한 지위를 예언한 사람은 기록에 따라 다르다. 어떤 기록에서는 아라비아의 이교도 예언자가, 다른 기록에서는 에티오피아 기독교도가, 또다른 기록에서는 유대교 랍비가 예언했다고 나온다. 심지어 무함마드가 바히라 - 또는 이름 모를 기독교도 수도자 - 를 만난 장소도 기록에 따라 다르다. 무엇이 진짜인가?10 우리는 부족 사이의 상호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메디나 사람들이 끝없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받아들이고 이슬람으로 받아들였다고 알고 있다. 이는 이븐 이스하크(Ibn Ishaq, 767/768년 사망)가 남긴 무함마드의 전기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븐 이스하크는 동시에 무함마드의 헤지라 직전 메디나 사회가 이븐 우바이라는 인물의 강력한 권위 아래 복종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븐 이스하크는 헤지라 직전 메디나가 권력 공백에 따른 정치적 혼란 상황이라고 설명하는 동시에 메디나 사회가 한 명의 강력한 통치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말한다. 무엇이 진짜인가?11 우리에게는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전하는 사료들을 교차검증할 다른 자료가 없다.




정말 드물게도 무슬림들의 기록과 교차검증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 외에 존재하는 역사적 자료들은 오히려 무슬림들의 전통적 기록이 지닌 신뢰성을 더욱 의심하게 만든다. 1956년 팔레스타인의 키르바트 알 미르드라는 곳에서 7세기 중반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파피루스 조각이 하나 발견되었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 파피루스 조각에는 바드르 전투의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파피루스 기록은 무슬림들이 "무하람 달(즉 이슬람력 1년의 1월)로부터 14달이 지난 뒤" 바드르라는 곳으로 향했으며, "무하람으로부터 18달이 지난 뒤 바드르에서 만났다"라고 전한다. 무하람을 포함하여 계산하면 사파르(이슬람력 2월) 달에서 주마다 1월(이슬람력 5월) 사이, 무하람을 빼고 계산하면 라비 1월(이슬람력 3월)에서 라잡(이슬람력 7월)이라는 날짜가 나온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전통적 해석은 코란 2장 214절과 2장 181절이 바드르 전투를 의미하는 구절이며 따라서 전투는 라마단(이슬람력 9월)에 일어났다고 본다.12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에 살이 더 붙기도 한다. 이븐 이스하크는 카라르(Kharrar) 지역을 약탈한 무슬림 원정대를 다루면서 매우 단편적이고 간략한 정보만을 제공한다. 지휘자가 누구였고, 몇 사람이 참여했으며 적과 만나지 않고 돌아왔다라는 이야기가 다이다. 그러나 그보다 약 60년 뒤에 활동했던 알 와끼디(al-Waqidi, 823년 사망)는 더욱 자세한 정보를 전한다. 그는 카라르 약탈이 이루어진 날짜와 원정 목적과 방식, 전략 등 이븐 이스하크가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세부사항을 말해준다. 훨씬 더 앞선 시대에 활동하던 이븐 이스하크도 모르던 정보를 와끼디는 대체 어디서 얻어낸 것일까? 와끼디가 무언가 새로운 자료를 찾아낸 것일까? 이야기꾼들이 과거의 간략하고 단순한 이야기에 새로운 정보와 주제, 내용을 덧붙인 결과는 아니었을까?13 크론은 8세기와 9세기에 살았던 무슬림 학자들 또한 무함마드가 활동하던 시대에서 약 1,300년이 지난 21세기에 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함마드의 시대와 단절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14




무함마드의 생애와 초기 무슬림 공동체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료라고 우리가 믿고 있었던 무슬림들의 기록 - 코란 주석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기기록을 포함하여 - 은 이처럼 신뢰할 수 있는 사료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 크론의 결론은 분명하고 충격적이다. 크론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까지 1차 사료로 간주해온 무슬림들의 전통적 기록 모두는 사실 듣는 이들에게 특정한 감정적 효과를 불러 일으키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15따라서 기록이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후대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면 그 기록 위에 세워진 이스람의 기원과 형성 과정에 대한 기존의 통념 역시 역시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3. 그러면 이슬람의 등장 배경과 원인은 무엇인가?




크론이 보여준 대로 뚜렷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메카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이슬람의 기원을 설명하는 원인이 될 수 없다면 대체 이슬람의 등장 배경과 원인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아라비아 반도 전체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일까? 크론은 책의 마지막 장을 할애하여 그녀 나름의 가설을 제시한다.




이슬람은 경제적, 환경적 제약으로 인해 안정된 국가 체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여러 부족들이 끝없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며 대립하던 사회에서 나타났다. 따라서 이슬람의 기원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 특히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에 존재하던 종교관의 맥락 내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크론의 논지이다.16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의 다신교 신앙은 내세의 구원이나 사회 정의 또는 피조물에 대한 신의 사랑과 같은 추상적 가치를 추구하던 종교가 아니었다. 아랍인들은 숭배의 대가로 신들이 물질적 풍요와 번영, 전쟁에서의 승리와 같은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혜택을 베풀기를 기대했다. 따라서 신이 자신들의 기원에 응답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원래 믿던 신을 버렸고, 더욱 발전된 의학을 지닌 기독교도 수도사들이 베푸는 의료 혜택을 누린 아랍인들은 조상의 신들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따라서 이슬람은 상당수 아랍인들에게 어떤 종교적인 충격이나 영적인 혼란 없이도 확산될 수 있었다.17





<아라비아 남부에서 발견된 아랍 다신교의 신상>


출처: http://wathanism.blogspot.com/2013/04/totemism-animism-and-spirits-in-pre.html




아랍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코란과 무함마드의 신은 아랍인들에게 정복과 군사적 승리를, 아랍인들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국가를 약속했다. 무함마드의 활동은 이처럼 처음부터 정치적이었고, 무함마드의 계시를 받아들임은 곧 그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함을 의미했다. 크론은 무함마드가 "사회 개혁자도 영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인물도 아닌, (아랍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을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설명한다.18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은 서로를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같은 집단으로 보았지만 정치적으로는 하나로 응집되지 않은 채 다양한 부족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무함마드는 모든 아랍인의 조상이자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의 신이야말로 아랍인의 진정하고 유일한 신이라고 주장하며 그리고 아랍인들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국가라는 전망을 제시하여 아랍인을 하나로 결속하는 데 성공했다.




오랜 세월 갈등과 충돌이 끝없이 반복되던 역사 속에서 약탈과 정복, 군사적 승리는 아랍 부족들의 핵심 생존수단이자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았고, 이슬람의 신이 요구한 지하드의 개념은 기존에 존재하던 아랍 부족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에 단순한 약탈을 초월하는 강력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19 무함마드는 그가 새로 세운 공동체에 대한 정치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에게 물질적 혜택을 계속해서 제공해야 했고 따라서 정복은 필수였다. 그를 따르던 아랍 부족들 또한 정복과 승리와 약탈을, 전리품과 부를 원했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신은 그들에게 정복을 명령했다. 크론은 묻는다. "이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가?"20




그렇다면 왜 하필 7세기에 무함마드라는 지도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왜 하필 아랍 부족의 통일과 군사적 성공이 7세기에 일어나고 가능했던 것일까? 크론은 바로 6세기 말과 7세기 초 전례 없는 수준에 도달했던 외세의 영향과 침투, 개입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이르러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력은 동부 아라비아 반도와 예멘 그리고 시리아 사막에서 헤자즈까지 이르렀으며, 비잔틴 제국 또한 시리아 사막을 통해 서부 아라비아에 손을 뻗치는 동시에 동맹인 에티오피아를 통해서는 예멘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론은 "근대에도 아라비아 반도가 이처럼 외세의 영향력에 잠식된 적은 없었다"21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슬람은 침투해오는 외세에 맞서 그들 고유의 가치와 정체성, 문화를 지켜내기 위한 아랍인들의 저항이었다.22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6세기 말과 7세기 초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전쟁이 가져온 여파는 아라비아에도 닿았고

페르시아는 특히 아라비아의 해안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ile:Pre_Islamic_Arabia.PNG




7세기 아라비아에서 나타난 예언자가 무함마드 혼자는 아니었다. 무함마드 외에도 아라비아 중부의 야마마(Yamama)에서는 무사일리마(Musaylima)가, 예멘에서는 아스와드(Aswad)가 나타났으며 북동부 아라비아의 바크르 븐 와일 부족 사이에서는 사자(Sajah)와 같은 '예언자'들이 나타났다. 크론은 이들이 모두 페르시아의 영향력이 강력한 지역에서 활동했음에 주목한다. 이들 역시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의 지배에 맞서 아랍인의 '독립'을 추구한 지도자들이 아니었을까? 코란에 분명히 나타나는 유대교의 영향은 비잔틴 제국에 깊은 반감을 지니고 있던 유대인들이 무함마드의 '저항 운동'에 끼친 영향을 보여주는 근거는 아닐까? 또한 크론은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에 도전한 주요 적들이 무사일리마, 아스와드, 사자 등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신의 계시를 받았음을 주장하는 '대립 예언자'였음에 주목한다. 전통적 다신교 신앙을 따르던 사람들의 저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전통적 신앙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고 쇠퇴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아라비아의 '대립 예언자'들 또한 무함마드의 방식을 모방하여 지배하고자 한 정치 지도자들이 아니었을까?23




그러나 결국 최후의 승자는 무함마드였다. 그가 가져온 계시와 지도, 그리고 승리와 독립, 번영의 약속 아래 결집한 아랍인들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고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시리아와 이라크를 아우르는 거대한 아랍 제국을 세우게 된다. 아랍 정복자들의 확산과 함께 그들의 신앙 역시 중동 각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이슬람이 중동의 지배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슬람의 등장과 성공을 가져온 원인은 메카 무역이 아니라 바로 외세의 침투에 맞서 주체성과 독립을 지켜내고자 한 아랍인들의 민족적 각성이었다.

4. 반응, 비판과 영향




도발적인 주장에는 늘상 그러하듯이, 크론의 파격적인 주장은 학자들 사이에서 상반된 반응을 일으켰다. 일부는 강하게 비판한 반면 다른 학자들은 크론의 논리적 치밀함과 설득력 있는 사료비판의 손을 들어주었다.




크론의 저작을 평한 학자들 대부분은 메카 무역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큰 중요성을 지니지 않았다는 크론의 주장을 수용한다. 크론이 보여준 치밀한 사료 분석과 엄밀한 방법론, 명료한 논리는 쉽게 반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이클 보너(Michael Bonner)는 크론의 방법론이 이슬람의 기원에 대한 기존의 통념이 얼마나 취약한 역사적 기반 위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고 강조하며 크론의 연구가 "몽고메리 와트의 예언자 전기 이래로 이슬람의 기원에 대해 논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24 이프티카르 자만(Iftikhar Zaman) 또한 학계가 메카 무역에 대한 기존 관점을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프레데릭 팍스톤(Frederick Paxton), 도날드 리틀(Donald Little), 칼 패트리(Carl Petry), 존 완스브로(John Wansbrough) 역시 비슷한 견해를 드러냈다.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 이후 제랄드 하우팅(Gerald Hawting), 조나선 버키(Jonathan Berkey), 다니엘 브라운(Daniel Brown)와 같은 현대 연구자들은 메카 무역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흔들어 놓은 크론의 연구를 거론하며 무역과 경제적 성장 그리고 메카 사회의 변화와 이슬람의 등장을 연결짓는 와트와 로댕송의 가설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25 여전히 전통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프레드 도너(Fred Donner) 역시 "1970년대 이후의 연구는 동물 가죽이나 식량과 같은 평범한 일상 용품이 주로 거래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서술을 덧붙이고26 추천 도서를 소개하는 책 말미의 부록에서도 "메카가 국제 사치품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와트의 가정은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의 결정적인 도전을 받았다"고 명시한다.27






크론이 비판을 받는 부분은 메카 무역에 관한 논의보다는 그녀가 제시한 이슬람의 기원에 대한 가설이다. 메카 무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크론의 결론에 동의하는 학자들도 이슬람이 "아랍인의 민족적 각성"이 가져온 결과라는 그녀의 가설에는 비판적이다. 특히 자만은 그녀가 택한 방법론 상의 모순을 지적한다. 크론은 무슬림들이 남긴 기존 기록의 신뢰성을 전적으로 의심하는 동시에 무함마드의 활동과 이슬람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다시 무슬림들의 기록에 의존한다.28 초기 무슬림들이 보여주는 호전성과 정복 전쟁과 승리, 전리품에 대한 열망 역시 크론이 그렇게 비판하던 무슬림들의 전통적 사료, 즉 후대 무슬림들의 시각과 그들이 살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기록에 나타나는 내용이 아니던가? 자만과 마찬가지로 프레데릭 팍스톤(Frederick Paxton) 또한 크론 역시 그녀가 그렇게 비판하던 무슬림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기록의 부재와 불분명함 속에서 설득력 있는 - 또는 있어 보이는 - 설명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한다.29




20세기 아라비아 베두윈들의 모습을 통해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의 종교관을 설명하는등 아라비아 사회를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은 고정적 실체로 간주하는 크론의 관점 역시 자만의 비판 대상이다. 실제로 크론은 신앙을 물질적 혜택과 직접적 도움과 결부하는 20세기 아라비아 베두윈들의 종교관을 7세기 아랍인들의 신앙에 대한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인용한다.30 패트리는 이슬람의 확산과 성공을 영적 각성이 주는 호소력과 영향력을 배제한 채 아랍인들의 물질주의적 종교관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제기한다.31




한편 도날드 리틀(Donald Little)의 비판 대상은 크론의 어조와 서술 방식이다. 크론의 연구가 초기 이슬람 역사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책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는 크론의 서술 방식에 아랍과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엿보인다고 비판한다. "신은 아랍인에게 다른 이의 여인과 아이들, 그들의 땅을 약탈할 권리가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명령했다. 지하드는 복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무함마드의 신은 아라비아 부족의 호전성과 탐욕을 숭고한 종교적 덕성의 반열에 올려두었다."32같이 무분별하고 지나치게 공격적인 서술이 불필요한 자극이라고 평가한다. 리틀이 보기에 이런 서술 방식은 의도를 분명히 전달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자극하기보다는 감정적인 논쟁과 분란, 특히 무슬림 독자들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무분별한 서술이다.33




휴 케네디(Hugh Kennedy)는 더욱 비판적이다. 그는 메카와 시리아 사이 무역이 이루어졌다는 정황 증거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 비록 서평에서는 그 정황 증거가 무엇인지 말해주지는 않지만 - 메카-시리아 무역의 존재 가능성을 원천 부정하기보다는 어떻게 무역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경제사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무슬림 사료에 대한 크론의 회의적 입장을 "역사적 허무주의"라고 비판한다. 케네디가 보기에 무슬림들이 남긴 기록은 여전히 이슬람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사료다. 연구자에게 필요한 태도는 사료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치밀한 분석이지 사료를 완전히 내다버리는 극단적인 자세가 아니다.34 이슬람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론만큼이나 도발적인 주장으로 유명한 완스브로는 꾸라이쉬 상인들이 시리아까지 가서 식량과 가죽을 파는 장사가 과연 합리적으로 가능했겠느냐라는 크론의 주장에 대해 경제적 동기 외에도 외부 지역과의 접촉 유지 및 상인들의 대외적 위신 강화와 같은 문화적 동기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그는 메카가 종교 중심지도 상업 중심지도 아니었다는 크론에 대해 고대 중동에서 종교활동과 상업활동이 결합되는 사례가 존재함을 들어 메카에서도 종교활동와 상업이 공존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35




흥미롭게도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은 아랍어로도 번역, 출판되었다. 번역자인 아말 무함마드 알 루비(Amal Muhammad al-Rubi)는 당연히도 크론의 주장에 매우 비판적이다. 애시당초 그녀는 "어떻게 학문 연구라는 명목으로 서구의 왜곡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아랍 이슬람 정체성을 공격하는지" 아랍 독자들이 알아야 한다는 판단 하에 번역했다고 밝힌다.36 특히 루비는 이슬람 이전 메카가 성지도 순례지도 아니었다는 크론의 주장이 무슬림 사료를 오독하거나 오역한 결과라고 비판한다.37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 출판 이후 등장한 다양한 평가 가운데 크론은 로버트 버트램 세르진트(Robert Bertram Serjeant)의 서평에만 반응을 보였다. 이는 세르진트의 서평이 욕설만 겨우 쓰지 않았을 뿐 매우 감정적이고 격렬했기 때문에 그리고 크론이 스스로와 다른 학자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그의 서평에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루비와 마찬가지로 세르진트는 아랍어 사료를 오독 및 오역한 크론이 메카 꾸라이쉬 부족이 사치품을 교역하지 않았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고 비판하며 꾸라이쉬 부족이 실제로 비단을 교역했다고 추론한다.38 이 과정에서 세르진트는 크론이 고전 아랍어 문헌을 참고하면서 현대 아랍어 사전인 한스 베어(Hans Wehr)를 참고한 것 아니냐고 비난하기까지한다.39




세르진트의 서평에 대해 크론은 세르진트가 꾸라이쉬 상인들이 비단을 거래했다고 "추론"할 뿐 실제 비단을 거래했음을 보여주는 어떠한 사료적 증거도 없음을 지적하는 등 세르진트의 '오역' 지적에 대해 그녀가 제시한 해석의 타당성을 주장한다.40 (두 사람은 메카가 성지가 아니었으며 꾸라이쉬 부족은 성지를 지키는 신성한 보호자로서 여겨지지 않았다는 크론의 주장에 대해서도 길게 논의하나 그 내용을 여기에서 소개하기에는 너무 길고 복잡해지므로 생략한다.) 그러나 크론의 반박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역사가(historian)와 아랍학자(Arabist)의 구분이다. 크론은 세르진트와 같이 아랍어 독해능력을 바탕으로 아랍어로 된 사료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일부 사소한 실수나 오류는 충분히 교정될 수 있다고 믿는 아랍학자와 사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비판적 시각과 교차 분석을 통해 검증하고자 하는 역사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41 크론의 말을 옮기자면 "아랍학자는 역사적 사실을 알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역사가는 사료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기 전에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접근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42






크론이 보기에 세르진트와 같은 아랍학자들의 실수는 그녀와 동시대의 이슬람학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많은 이슬람학 연구자들은 무슬림들의 전통적 사료, 무슬림들의 시각과 기억을 벗어나 비판적으로 접근하기보다 그저 무슬림들의 시각과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라고 개탄하는 크론은 아랍과 무슬림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고 그들의 가치를 대변하려는 시각이 사료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엄밀한 문헌 비평과 분석, 그리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통념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목적으로 하는 역사가들의 연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43

이처럼 오늘날 이슬람에 대한 논의는 특히 민감한 주제다. 크론의 연구를 "아랍 무슬림 정체성과 역사를 왜곡하려는 서구의 편향된 시각"로 비난한 『메카 무역과 이슬람의 탄생』의 아랍어판 역자의 언급이 보여주듯이, 이슬람 신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무함마드의 생애와 초기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항상 '반이슬람주의'나 '서구우월적인 오리엔탈리즘'과 결부될 위험이 존재한다. 특히 크론처럼 사료의 비판적 해석과 엄밀한 분석을 통해 이슬람 역사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집어버리는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는 '반이슬람주의'의 꼬리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세르진트에게 답하면서 크론이 말했듯이, 사료와 통념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역사 연구의 기본이다. 학문은 본질적으로 이슬람을 음해하고 비난하는 시각과 무관하다 - 물론,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악의적으로 이용될 수는 있다. 따라서 그러한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크론을 비롯하여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제기한 도발적인 해석을 간간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한 인간 공동체 사이 사이에서 탄생한 이슬람이라는 문화적 결실과 그 역사적 궤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1,400년간 이슬람과 무슬림이 거쳐온 모험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한 그들의 과거를, 그들이 거쳐온 길과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도전과 그들이 살아나가야 했던 상황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들의 현재 모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랍과 이슬람과 무슬림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그 어떤 변호보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무슬림 공동체가 거쳐온 역동적인 변화와 대응의 과정이야말로 내게는 더욱 장엄하고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참고문헌




Al-Rubi, Amal Muhamamd, "Muqaddimah al-Mutarjimah." In Tijarat Makkah wa Duhur al-Islam, written by Patricia Crone, 9-25. Cairo: Al-Majlis al-'Ala lil-Thaqafah,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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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ner, Michael. Review of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by Patricia Crone; Muhammad's Mecca: History in the Quran by W. Montgomery Watt. International Journal of Middle East Studies 22, no. 3 (August 1990): 337-339.

Brown, Daniel. A New Introduction to Islam, 3rd edition (Hoboken: John Wiley & Sons, 2017).

Crone, Patricia. "Serjeant and Meccan Trade." Arabica 39, no. 2 (July 1992): 216-240.

Donner, Fred. Muhammad and the Believers at the Origins of Islam. (Cambridge and London: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10).

Hawting, Gerald. "The Rise of Islam." In A Companion to the History of the Middle East, edited by Youssef M. Choueiri, 9-27. Malden: Blackwell Publishing, 2005.

Kennedy, Hugh. Review of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by Patricia Crone. Review of Middle East Studies 22, no. 1 (July 1988):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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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xton, Frederick. Review of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by Patricia Crone.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48, no. 3 (August 1989): 574-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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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jeant, Robert Bertram.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Misconceptions and Flawed Polemics," review of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by Patricia Crone.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10, no. 3 (July - September 1990): 472-486.

Wansbrough, John. Review of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by Patricia Crone.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52, no. 2 (1989): 339-340.

Zaman, Iftikhar. Review of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by Patricia Crone. Journal of Islamic Studies 6, no. 1 (January 1995): 92-95.




각주








Crone, Meccan Trade and the Rise of Islam, 205-206. [본문으로]
위의 책, 206-208. [본문으로]
위의 책, 208. [본문으로]
위의 책, 212. [본문으로]
위의 책, 109-110. [본문으로]
위의 책, 110-111. [본문으로]
위의 책, 210-211. [본문으로]
위의 책, 213. [본문으로]
위의 책, 214. [본문으로]
위의 책, 219. [본문으로]
위의 책, 217. [본문으로]
위의 책, 226-227. [본문으로]
위의 책, 223-226. [본문으로]
위의 책, 226. [본문으로]
위의 책, 215-218 [본문으로]
위의 책, 237. [본문으로]
위의 책, 238-241. [본문으로]
위의 책, 237. [본문으로]
위의 책, 241-245. [본문으로]
위의 책, 244. [본문으로]
위의 책, 246. [본문으로]
위의 책, 247. [본문으로]
위의 책, 248-249. [본문으로]
Bonner, 339. [본문으로]
Hawting, 23; Berkey, 43; Brown 29. [본문으로]
Donner, 36-37. [본문으로]
위의 책, 241. [본문으로]
Zaman, 94. [본문으로]
Paxton, 575. [본문으로]
Crone, 앞의 책, 239; Zaman, 94. [본문으로]
Petry, 189. [본문으로]
Crone, 앞의 책, 245. [본문으로]
Little, 388. [본문으로]
Kennedy, 55. [본문으로]
Wansbrough, 340. [본문으로]
Amal Muhammad al-Rubi, 12. [본문으로]
위의 글, 15-24. [본문으로]
Serjeant, 473, 479. [본문으로]
위의 글, 478. [본문으로]
Crone, "Serjeant and Meccan Trade." 220. [본문으로]
위의 글, 237-238. [본문으로]
위의 글, 238. [본문으로]
위의 글, 239-2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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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hanuur 2019.10.23 14:27 신고더보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다른 비판들도 나름대로 수긍이 가지만, 특히 자만의 비판이 제일 날카롭다는 생각이드네요. 차라리 ‘알 수 없다’는 결론에서 멈추고 위태로운 가설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책의 완성도가 오히려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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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harmlessmostly.tistory.com/33?fbclid=IwAR1sQdkQ7-rMrCKUii-eyFGvlqh7mfjZ9iyBIEPrR15ewqoTTX9QL7erkfw [대체로 무해함: 아랍, 중동,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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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후원' 아시아평화 미래재단 설립 추진
송고시간 | 2019-10-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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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하는 손봉호 아시아 평화 미래 재단 설립 준비위원장(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16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일 갈등완화 및 아시아 평화를 위한 '아시아 평화 미래 재단' 설립 추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손봉호 재단준비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2019.10.16 uwg806@yna.co.kr

(서울=연합뉴스) 장우리 기자 =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돕고 아시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민간 차원의 후원 재단이 만들어진다.

'아시아 평화 미래 재단'(가칭) 설립준비위원회는 1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재단 설립 계획을 밝히고 시민 참여를 촉구했다.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억울하게 고통을 당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사회 정의에 어긋난다"며 "일본 정부의 마땅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조금씩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도왔으면 한다"고 설립 취지를 밝혔다.


재단 후원금은 ▲ 한국과 동남아 국가의 강제노역 피해자 지원 ▲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고통받은 희생자 지원 및 추모비 건립 ▲ 일본 정부의 과거사 사죄·배상 촉구 ▲ 아시아 국가 청소년 및 대학생 간 교류 협력 프로그램 운영 등에 사용될 예정이다.


준비위원회는 또 2000년 나치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위해 독일 정부와 기업이 '기억·책임·미래(EVZ) 재단'을 설립한 사례를 언급하며 일본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박철순 부위원장은 "재단은 순수성과 투명성이라는 원칙하에 운영될 것"이라며 "재단은 정부와는 무관한 민간 활동"이라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 ‘한반도 평화구상’ 베를린 연설 상세보기|새소식주 콩고민주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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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재인 대통령 ‘한반도 평화구상’ 베를린 연설
작성자 주DR콩고대사관
작성일 2017-08-09



<쾨르버 재단 초청 연설> 2017년 7월 6일

존경하는 독일 국민 여러분,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하얼젠 쾨르버 재단 이사님과 모드로 전 동독 총리님을 비롯한 내외 귀빈 여러분, 먼저 냉전과 분단을 넘어 통일을 이루고, 그 힘으로 유럽통합과 국제평화를 선도하고 있는 독일과 독일 국민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독일 정부와 쾨르버 재단에도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얼마 전 별세하신 고 헬무트 콜 총리의 가족과 독일 국민들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대한민국은 냉전시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외교로 독일 통일과 유럽통합을 주도한 헬무트 콜 총리의 위대한 업적을 기억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이곳 베를린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 화해·협력의 기틀을 마련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 곳입니다. 여기 알테스 슈타트하우스(Altes Stadhaus)는 독일 통일조약 협상이 이뤄졌던 역사적 현장입니다.

나는 오늘, 베를린의 교훈이 살아있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새 정부의 한반도 평화 구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독일 통일의 경험은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은 우리에게 통일에 대한 희망과 함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통일에 이르는 과정의 중요성입니다. 독일 통일은 상호 존중에 바탕을 둔 평화와 협력의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줬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이 과정에서 축적된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통일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동서독의 시민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 협력했고 양측 정부는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했습니다. 비정치적인 민간교류가 정치 이념의 빗장을 풀었고 양측 국민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 나갔습니다.

동방정책이 20여 년간 지속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일관된 정책이 가능했던 것은 국민의 지지와 더불어 국제사회의 협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유럽에 평화질서가 조성될 때, 그 틀 안에서 독일의 통일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추고, 때로는 국제사회를 설득해서 튼튼한 안보를 확보하고, 양독 관계에 대한 지지를 보장받았습니다. 빌리 브란트 총리가 첫 걸음을 뗀 독일의 통일과정은 다른 정당의 헬무트 콜 총리에 이르러 완성되었습니다. 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정당을 초월한 협력이 이어져 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우리 국민들에게 베를린은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함께 기억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고, 분단과 전쟁 이후 60여 년간 대립하고 갈등해 온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의 길로 들어서는 대전환을 이끌어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국제협력도 추진해 나갔습니다. 그 기간 동안 6자회담은 북핵문제 해결 원칙과 방향을 담은 9·19 성명과 2·13 합의를 채택했습니다. 북미 관계, 북일 관계에도 진전이 있었습니다. 나는 앞선 두 정부의 노력을 계승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의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담대한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한반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북핵 문제입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며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로 이틀 전에 있었던 미사일 도발은 매우 실망스럽고 대단히 잘못된 선택입니다. 유엔 안보리 결의를 명백히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를 정면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모처럼 대화의 길을 마련한 우리 정부로서는 더 깊은 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의 이번 선택은 무모합니다. 국제사회의 응징을 자초했습니다. 북한이 도발을 멈추고 비핵화 의지를 보여준다면,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받을 수 있도록 앞장서서 돕겠다는 우리 정부의 의지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나는 북한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지 않기를 바랍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와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한반도 비핵화는 국제사회의 일치된 요구이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절대 조건입니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결단만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지금이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고, 가장 좋은 시기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점점 더 높아지는 군사적 긴장의 악순환이 한계점에 이른 지금, 대화의 필요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기 때문입니다. 중단되었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본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최근 한미 양국은 제재는 외교적 수단이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한다는 큰 방향에 합의했습니다. 북한에 대해 적대시 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천명했습니다. 북한의 선택에 따라 국제사회가 함께, 보다 밝은 미래를 제공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한미 양국은 또한, 당면한 한반도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남북관계 개선이 중요하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통일 환경을 조성함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주도적 역할을 지지했고, 남북대화를 재개하려는 나의 구상을 지지했습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도 같은 공감대를 확인했습니다. 이제 북한이 결정할 일만 남았습니다. 이제 북한이 결정할 일만 남았습니다. 대화의 장으로 나오는 것도, 어렵게 마련된 대화의 기회를 걷어차는 것도 오직 북한이 선택할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북한이 핵 도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더욱 강한 제재와 압박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의 의지를 북한이 매우 중대하고 긴급한 신호로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촉구합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이제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이끌기 위한 우리 정부의 정책방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평화입니다. 평화로운 한반도는 핵과 전쟁의 위협이 없는 한반도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잘 사는 한반도입니다. 우리는 이미 평화로운 한반도로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남과 북은 두 선언을 통해 남북문제의 주인이 우리 민족임을 천명했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보장을 위한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습니다. 경제 분야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의 협력사업을 통해 남북이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가자고 약속했습니다. 남과 북이 상호 존중의 토대 위에 맺은 이 합의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절실합니다. 남과 북이 함께 평화로운 한반도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으며,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위적인 통일을 추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통일은 쌍방이 공존공영하면서 민족공동체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통일은 평화가 정착되면 언젠가 남북 간의 합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입니다. 나와 우리 정부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평화입니다.

둘째,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하겠습니다. 지난 4월, '전쟁 위기설'이 한반도와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은 세계의 화약고와도 같습니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시급히 완화해야 합니다. 남북한 간의 무너진 신뢰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교류와 대화를 모색해 나갈 것입니다. 북한도 더 이상의 핵도발을 중단해야 합니다. 우발적인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군사관리 체계도 구축해 나가야 합니다. 보다 근본적인 해법은 북핵 문제의 근원적 해결입니다. 북핵 문제는 과거보다 훨씬 고도화되고 어려워졌습니다. 단계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우리 정부는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북한의 안보, 경제적 우려 해소, 북미 관계 및 북일 관계 개선 등 한반도와 동북아의 현안을 포괄적으로 해결해나가겠습니다. 그러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북한이 핵 도발을 전면 중단하고, 비핵화를 위한 양자대화와 다자대화에 나서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셋째,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해 나가겠습니다. 1953년 이래 한반도는 60년 넘게 정전 상태에 있습니다. 불안한 정전 체제 위에서는 공고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남북의 소중한 합의들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거나 깨져서도 안 됩니다. 평화를 제도화해야 합니다. 안으로는 남북 합의의 법제화를 추진하겠습니다. 모든 남북 합의는 정권이 바뀌어도 계승돼야 하는 한반도의 기본자산임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구조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종전과 함께 관련국이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합니다. 북핵 문제와 평화체제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으로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하겠습니다.

넷째, 한반도에 새로운 경제 지도를 그리겠습니다. 남북한이 함께 번영하는 경제협력은 한반도 평화정착의 중요한 토대입니다. 나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핵 문제가 진전되고 적절한 여건이 조성되면 한반도의 경제지도를 새롭게 그려나가겠습니다. 군사분계선으로 단절된 남북을 경제벨트로 새롭게 잇고 남북이 함께 번영하는 경제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끊겼던 남북 철도는 다시 이어질 것입니다. 부산과 목포에서 출발한 열차가 평양과 북경으로, 러시아와 유럽으로 달릴 것입니다. 남·북·러 가스관 연결 등 동북아 협력사업들도 추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남과 북은 대륙과 해양을 잇는 교량국가로 공동번영할 것입니다. 남과 북이 10·4 정상선언을 함께 실천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세계는 평화의 경제, 공동번영의 새로운 경제모델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비정치적 교류협력 사업은 정치·군사적 상황과 분리해 일관성을 갖고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남북 간의 교류협력 사업은 한반도 모든 구성원의 고통을 치유하고 화합을 이루는 과정이자 안으로부터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남북한에는 분단과 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헤어진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 고통을 60년 넘게 치유해주지 못한다는 것은 남과 북 정부 모두에게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에 가족상봉을 신청한 이산가족 가운데 현재 생존해 계신 분은 6만여 명, 평균 연령은 81세입니다. 북한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분들이 살아 계신 동안에 가족을 만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어떤 정치적 고려보다 우선해야만 하는 시급한 인도적 문제입니다. 분단으로 남북의 주민들이 피해를 보는 일들도 남북한이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북한의 하천이 범람하면 남한의 주민들이 수해를 입게 됩니다. 감염병이나 산림 병충해, 산불은 남북한의 경계를 가리지 않습니다. 남북이 공동대응하는 협력을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민간 차원의 교류는 당국 간 교류에 앞서 남북 간 긴장 완화와 동질성 회복에 공헌해 왔습니다. 민간교류의 확대는 꽉 막힌 남북관계를 풀어갈 소중한 힘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민간교류를 폭넓게 지원하겠습니다. 지역 간의 교류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인간 존중의 보편적 가치와 국제 규범은 한반도 전역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북한 주민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와 함께 분명한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아울러, 북한 주민들에게 실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인도적인 협력을 확대하겠습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나와 우리 정부는 이상의 정책방향을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남북이 함께 손을 잡고 한반도 평화의 돌파구를 열어가야 합니다. 먼저 쉬운 일부터 시작해 나갈 것을 북한에 제안합니다.

첫째, 시급한 인도적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입니다. 올해는 '10·4 정상선언' 10주년입니다. 또한 10월 4일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추석입니다. 남과 북은 10·4 선언에서 흩어진 가족과 친척들의 상봉을 확대하기로 합의한 바 있습니다. 민족적 의미가 있는 두 기념일이 겹치는 이 날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개최한다면 남북이 기존 합의를 함께 존중하고 이행해 나가는 의미 있는 출발이 될 것입니다. 북한이 한 걸음 더 나갈 용의가 있다면,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 성묘 방문까지 포함할 것을 제안합니다. 분단독일의 이산가족들은 서신왕래와 전화는 물론 상호 방문과 이주까지 허용되었습니다. 우리도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많은 이산가족이 우리 곁을 떠나기 전,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합니다. 만약 북한이 당장 준비가 어렵다면 우리 측만이라도 북한 이산가족의 고향 방문이나 성묘를 허용하고 개방하겠습니다. 북한의 호응을 바라며, 이산가족 상봉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 적십자회담 개최를 희망합니다.

둘째,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여 '평화 올림픽'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2018년 2월,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에서 100km 거리에 있는 대한민국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됩니다. 2년 후 2020년엔 하계올림픽이 동경에서, 2022년엔 북경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됩니다. 우리 정부는 아시아에서 이어지는 이 소중한 축제들을 한반도의 평화,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계기로 만들 것을 북한에 제안합니다. 스포츠에는 마음과 마음을 잇는 힘이 있습니다. 남과 북, 그리고 세계의 선수들이 땀 흘리며 경쟁하고 쓰러진 선수를 일으켜 부둥켜안을 때, 세계는 올림픽을 통해 평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세계의 정상들이 함께 박수를 보내면서,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시작을 함께 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에 대해 IOC에서 협조를 약속한 만큼 북한의 적극적인 호응을 기대합니다.

셋째, 군사분계선에서의 적대행위를 상호 중단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에서는 총성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양측 군에 의한 군사적 긴장 고조상태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남북한 무력충돌의 위험성을 고조시키고 접경지역에서 생활하는 양측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입니다. 올해 7월 27일은 휴전협정 6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을 기해 남북이 군사분계선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한다면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의미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넷째, 한반도 평화와 남북협력을 위한 남북 간 접촉과 대화를 재개하는 것입니다. 한반도 긴장 완화는 남북한 간의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당국자간 아무런 접촉이 없는 상황은 매우 위험합니다. 상황관리를 위한 접촉으로 시작하여 의미있는 대화를 진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나아가 여건이 갖춰지고 한반도의 긴장과 대치국면을 전환시킬 계기가 된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습니다. 핵 문제와 평화협정을 포함해 남북한의 모든 관심사를 대화 테이블에 올려놓고 한반도 평화와 남북협력을 위한 논의를 할 수 있습니다. 한 번으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북한의 결단을 기대합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독일은 한국보다 먼저 냉전을 극복하고 통일을 달성했지만 지금은 지역주의와 테러, 난민 문제 등 평화에 대한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나는 독일이 베를린의 민주주의와 평화공존의 정신으로 새로운 도전들을 극복하고 독일 사회와 유럽의 통합을 완성해 나갈 것을 믿습니다. 대한민국도 성숙한 민주주의의 힘으로 평화로운 한반도를 반드시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베를린에서 시작된 냉전의 해체를 서울과 평양에서 완성하고 새로운 평화의 비전을 동북아와 세계에 전파할 것입니다. 독일과 한국은 평화를 향한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양국은 언제나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연대할 것입니다. 인류의 더 나은 삶, 세계의 더 좋은 미래를 향해 굳세게 함께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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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대통령, 10.4 선언 10주년 기념식 연설문
작성일 2017-09-26조회수 11114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10.4 정상선언 1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회담의 준비위원장이었던 저도 이 자리에 서게 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10년 전, 남북의 두 정상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했습니다.

그 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었다면, 남북관계가 지금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날 도라산역에서 노무현 대통령께서 회담의 성과를 설명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남과 북의 그 벅찬 합의와 감격으로부터 평화의 한반도를 다시 시작하고픈 마음, 간절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10.4 정상선언은 한반도의 평화지도였습니다.

한반도에서 전쟁과 반목의 역사를 걷어내고, 평화와 공동번영의 새로운 지도를 그려나가자는 남북의 공동선언이었습니다.

남북관계의 기본이 상호존중과 신뢰의 정신임을 분명히 했고, 한반도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남북 간 협력을 위한 군사적 보장과 신뢰구축 조치와 함께, 북핵문제 해결까지 합의했습니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다양한 경제협력을 통해 우발적인 무력충돌의 가능성까지 원천적으로 없애고

평화 번영의 길을 남북이 함께 개척하는 담대하고 창의적인 접근에도 뜻을 같이 했습니다.

저와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신북방정책 역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10.4 정상선언은 노무현정부에서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역대 정부의 노력과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7.4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통일의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대내외에 천명했습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통일의 원칙에 합의한 이 정신은 노태우 대통령의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으로 이어졌고, 그 모든 성과들을 계승하고 포괄하면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담아

노무현 대통령의 10.4 정상선언이 이뤄졌습니다.

이렇게 10.4 정상선언은 역대 정부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오랜 세월 한 걸음, 한 걸음씩 힘들게 진척시켰던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10.4 정상선언이 이행되어 나갔다면 현재 한반도 평화 지형은 크게 변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10.4 정상선언을 비롯한 역대 정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고,

남북관계는 박정희 대통령의 7.4 남북공동성명 이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남북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갈수록 고도화되어 우리뿐 아니라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엄청난 비용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합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도발에 대해 국제사회는 유례없이 함께 분노하며 한 목소리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할 때까지 제재의 강도를 높이고 단호하게 압박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국제사회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핵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이 전세계를 상대로 핵으로 맞서려 해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할 것입니다.

그와 함께 분명한 것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여정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국제사회도 평화적 해결원칙을 거듭거듭 확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민의 안전과 평화적인 상황관리가 우선입니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과정에서 군사적 억지력을 확보하는 한편,

지나치게 긴장을 격화시키거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지 않도록 국제사회와 협력할 것입니다.

북한에게도 여전히 기회는 열려 있습니다.

여러 번 밝혔듯이 북한이 무모한 선택을 중단한다면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의 발전을 도울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고 남북관계가 주춤거릴 때마다 누구보다 우리 국민들의 걱정이 클 것입니다.

촛불혁명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꿈꾸고 남북관계에서도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길 기대했던 만큼, 국민들은 안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를 넘어서야 10.4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촛불을 들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도 지금 위기 상황입니다.

여야 정치권이 정파적 이익을 초월하여 단합하고 국민들께서 평화라는 오직 하나의 목표로 마음을 모아주시면,

우리는 늘 그래왔듯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현실이 될 것이며, 10.4 정상선언은 여전히 살아있는 합의로 숨쉬게 될 것입니다.



10.4 정상선언 합의 중 많은 것은 지금도 이행 가능한 것들입니다.

특히 평화, 군비통제 분야에서 합의한 군사회담의 복원은 남북 간의 긴장완화를 위해 시급히 이뤄져야 합니다.

인도적 협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이산가족 상봉은 더 이상 늦출 수 없습니다.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당국에 촉구합니다.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고, 10.4 정상선언의 정신으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남과 북이 함께 10.4 정상선언이 여전히 유효함을 선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노무현재단 회원 여러분, 고뇌 속에서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던 노무현 대통령님이 그립습니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신 분입니다. 언제나 당당했고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군사분계선을 직접 걸어서 넘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되고 점차 금단의 선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0.4 정상선언은 금단의 선을 넘는 수많은 국민들에 의해 반드시 이행될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국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알라딘: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



알라딘: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 - 10.4 남북정상선언
김만복,백종천,이재정 (지은이)통일(도서출판)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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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양장본
455쪽
150*220mm
592g



책소개
10.4 남북정상선언을 중심으로 살펴본 책이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기획, 추천 및 성사를 위해 함께 협력하고 회담에 직접 배석한 저자들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고자 집필한 책이다. 관련 시대적 배경에서부터 대북 특사파견, 선언 도출, 협의 과정, 내용 및 그 의미 그리고 10.4 남북정상선언 평가까지 총망라하여 다룬다.


목차


책머리에

제1부 '10.4 남북정상 선언'의 시대적 배경
1. 국내정세와 한반도 주변정세
2. 북한 내부정세
3. 북한의 대남동향
4. 북한의 대외관계
5. 북핵문제
6. NLL (북방한계선) 문제
7. 참여정부의 대북정책
8. 주변 4강의 대한반도 정책
9. '10.4 남북정상선언'의 역사적 당위성

제2부 대북 특사파견에서 선언 도출까지
1. 정상회담 개최 합의과정
2. 정상회담 연기 및 준비과정
3. 정상회담에 임한 우리의 자세
4. 정상회담 진행 경과

제3부 협의 과정ㆍ내용 및 그 의미
1. 한반도 평화.번영.통일 의지 천명
2. '6.15 남북공동선언'의 적극 구현
3. 상호존중과 신뢰의 남북관계 전환
4. 군사적 적대관계의 종식,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 추진
5. 정전체제 종식을 위한 종전선언 추진 협력
6.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한 공동노력
7.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
8. 투자장려.기반시설확충.자원개발 추진
9.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 설치
10. 개성공단의 공고한 발전
11.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12. 안변.남포 조선협력단지 건설과 농업.보건.환경 협력
13.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상 격상
14.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 발전
15. 백두산 관광실시와 백두산-서울 직항로 개설
16. 베이징 올림픽에 남북응원단이 경의선열차 이용.참가
17. 인도주의 협력사업 추진
18. 자연재해.재난 발생시 상부상조
19. 국제무대에서의 협력강화
20. '10.4 남북정상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총리회담 개최
21.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

제4부 '10.4 남북정상선언' 평가
1. '10.4 남북정상선언'의 역사적 의의
2. '10.4 남북정상선언'의 한계
3. '10.4 남북정상선언'의 과제
4. '10.4 남북정산선언'에 대한 비판과 답변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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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만복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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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통일전략연구원 원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건국대학교 법학 석사
국민대학교 법학 박사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남·북·미·중 4자회담 대표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차장
국가정보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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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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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정치학 석사
미국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국제정치학 박사
육군군사관학교 교수 부장
세종연구소 소장
대통령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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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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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현 경기도 교육감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
토론토대학교 신학 박사
성공회대학교 총장
제16대 국회의원
국민참여당 대표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수석부의장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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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단 뉴스를 보고 구매했습니다.. 아직도 유신시대 같네요.
은하철도의밤 2015-10-19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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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을 기억하며...
비니 2015-10-12 공감 (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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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부터 판매중단한다고 해서 부랴부랴 사려고 들어왔다가. 알라딘은 20일에 배송된다고 해서 다른곳에서 주문함.....중단조치로 많은분들이 못살것 같은데...... 안타깝다
호랑이띠띠띠 2015-10-17 공감 (2) 댓글 (1)












1.









[중고]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 - 10.4 남북정상선언
김만복, 백종천, 이재정 (지은이) | 통일(도서출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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