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30

왜 미국은 한국과 '핵공유'를 꺼려할까?[정욱식 칼럼]

왜 미국은 한국과 '핵공유'를 꺼려할까?[정욱식 칼럼]

왜 미국은 한국과 '핵공유'를 꺼려할까?[정욱식 칼럼]
입력2023.04.29.

[정욱식 칼럼] 美 "워싱턴 선언, 사실상 핵 공유 아냐"

"우리 국민이 사실상 미국과 핵을 공유하면서 지내는 것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4월 27일 한미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이에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이 핵 자산에 대한 정보와 기획, 그에 대한 대응 실행을 누구와 함께 공유하고 의논한 적이 없다"며 "새로운 확장억제 방안이고 그래서 더 강력하다고 자신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냥 매우 직설적으로 말하겠다. 우리가 워싱턴 선언을 사실상 핵공유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에드 케이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국장이 같은 날 한국 특파원단과의 브리핑에서 '한국 정부는 워싱턴 선언을 사실상 핵공유라고 설명하는데 이런 설명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내놓은 답변이다. 윤석열 정부의 설명을 즉각 반박한 셈이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2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한 호텔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럼 케이건은 왜 핵공유가 아니라고 말한 것일까? 공유는 어떤 물건을 같이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있을 때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미국이 핵무기를 다른 나라와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통제는? 케이건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입장에서 핵공유에 대한 정의는 핵무기의 통제(control of weapons)와 관련됐는데 워싱턴 선언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점을 매우 분명히 하고 싶다."

자연스럽게 이런 반문이 떠오를 수 있다. '미국은 나토 회원국들과 핵공유를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나토식 핵공유를 한국과 맺지 않는 것은 한국을 중시하지 않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미국이 한국과 핵공유를 꺼려하는 이유와 관련해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거론한다. 하지만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다르다. 비핵화 공동선언은 남북의 합의이고, 그래서 이 선언은 미국 핵무기의 한반도 재배치를 포함한 핵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다.

그럼 미국은 왜 한국과 핵공유를 마다하는 것일까? 나토와 한국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정전협정과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떠올리면 된다. 미국이 유럽의 나토 회원국에 핵무기를 배치한 시점은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토 회원국들과의 협의를 거친 결과였다. 그 이후 12년간의 논의를 거쳐 '핵공유 협정(nuclear sharing arrangements)'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을 통해 나토 비핵 회원국들도 나토 차원의 핵정책과 기획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 것이다.

미국은 한국에도 1950년대 후반부터 핵무기를 대거 배치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그 숫자가 1천개 가까이 치솟기도 했다. 그런데 왜 미국은 한국과 핵공유 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을까? 정전협정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협정에는 '신무기 반입 금지' 조항이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한 사실을 공개하고 한국과 협정을 체결하면 정전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셈이 되고 만다. 그래서 미국은 처음에는 몰래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했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를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신무기 반입 금지' 조항이 사실상 유명무실화되고 북한의 핵 고도화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만큼, 한미가 '나토식 핵공유'를 추진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상 불가능하다. NPT 때문이다.

NPT 1조에선 핵보유국은 핵무기에 대한 "관리를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어떠한 수령자에 대하여도 양도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있다. 2조에선 비핵국가가 핵무기의 "관리를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어떠한 양도자로부터도 양도받지 않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 나토의 핵공유 협정은 어떻게 이 조항들을 피해간 것일까? 나토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핵공유 협정이 1966년에 체결된 만큼, 1970년에 발효된 NPT의 소급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동맹의 핵보유국들이 그들의 핵무기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와 관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핵국가에게 핵무기 통제 이전을 금지한 NPT 1조 및 2조와 부합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논리는 NPT 발효 이후 나토가 이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미국의 확장억제 강화를 담은 '워싱턴 선언'에는 한국이 NPT의 의무를 준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한국이 독자적인 핵무장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다름 아닌 표현이다. 하나 더 있다. 한미가 NPT 회원국인 만큼, 나토식이든, 그 어떤 식이든 핵공유 협정을 맺는 것은 사실상 불가하다는 미국의 의사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빈손' 방미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워싱턴 선언이 '사실상의 핵공유'라고 치켜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wooksik@gmail.com)

‘매드 경연장’에 뛰어든 한반도…기후정의 위한 군축을

‘매드 경연장’에 뛰어든 한반도…기후정의 위한 군축을

‘매드 경연장’에 뛰어든 한반도…기후정의 위한 군축을
입력2023.03.25. 오후 9:37
[한겨레S] 정욱식의 찐 안보
신냉전과 기후위기
지난 9일 북한이 단거리탄도미사일(SRBM)을 발사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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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는 냉전을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수만개의 핵무기로 무장한 미국과 소련이 ‘나를 건들면 너도 죽는다’며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생존을 의존했다. 공교롭게도 줄임말이 매드(MAD)다. 최근 들어 냉전 시대의 ‘미친 짓’이 부활하고 열기도 더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적대감과 짝짓기가 냉전을 방불케 하고 군비경쟁이 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이에 기후위기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미 여러차례 경종이 울렸음에도 주요국들은 기후위기 대처를 뒷전으로 미루고 편협하고도 단기적인 이익 추구에 매몰돼 있다. 보다 못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해 3월 “화석연료 중독이야말로 상호확증파괴에 해당된다”며 인류가 “몽유병자처럼 기후재앙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일갈했다.


탄소 배출국 미·중, 경쟁적 군비지출

이처럼 글로벌 복합위기의 양대 축은 전쟁을 머금고 군비경쟁을 격화시키는 ‘신냉전’과 실존적 위협으로 성큼 다가온 ‘기후위기’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돌이키기 힘든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군비경쟁은 막대한 탄소를 배출하면서 기후위기 대처에 필요한 자원의 낭비와 국제협력의 저해를 초래하고 있다. 또 악화된 기후위기는 분쟁의 주된 원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위기는 불평등과 저성장 등 다른 위기로도 이어진다. 이는 거꾸로 신냉전과 기후위기에 대한 통합적인 시각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가 집계한 2021년 세계 군사비는 2조1천억달러를 돌파했다. 냉전 시기 화폐가치를 환산해도 군비지출이 가장 컸던 1980년대 중반보다 약 5천억달러가 많다. 그런데 앞으로 세계 군사비 상승폭은 더욱 가팔라질 전망이다. 세계 양대 군비지출 국가인 미국과 중국이 경쟁적으로 국방비를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 이래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국방비를 늘려온 중국은 올해에도 약 2400억달러를 국방비로 책정했다. 이는 전년도보다 7.2% 늘어난 것이고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5%)보다도 높다. 미국은 중국과의 격차를 더 벌리겠다고 작심한 듯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국방비를 끌어올리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2024년도 국방예산안은 무려 8860억달러에 이른다.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이마저도 적다며 더 끌어올리자고 한다. 국방비 규모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 미국 의회는 행정부가 제출한 국방예산안에서 2022년에 250억달러, 2023년에 450억달러를 증액한 바 있다. 이러한 미국 내 분위기를 감안할 때, 2~3년 안에 미국 국방비는 1조달러를 돌파할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이처럼 미·중이 군비증강에 혈안이 된 이유는 서로를 사실상 주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 때 고개를 들기 시작한 ‘대중 봉쇄론’은 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면서 초당적인 전략으로 굳어졌고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는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이 “전면적인 봉쇄”를 추구하고 있다며 경계심을 강화하고 있다. 이 와중에 1년을 넘긴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결시킬 방안도, 글로벌 복합위기의 중핵으로 떠오른 기후위기 대처도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세계 양대 경제대국이자 군비지출 국가이며 탄소 배출국인 미·중에 ‘뭣이 중한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매드 경연장’ 한반도

이뿐만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들로 재무장을 자제했던 독일과 일본도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착수하고 있다. 냉전기에도 없었던 이들 나라의 군사대국화는 신냉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요구한다. 한국도 밀리지 않는다. 20년 사이에 우리나라 국방비는 무려 3배가 껑충 뛰었고 그 결과 3년 연속 세계 6위의 군사강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도 틈만 나면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다. 이 밖에도 많은 나라들이 군비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군비경쟁은 기후변화에도 치명적이다. 우선 군사활동 자체가 막대한 탄소를 배출한다. 연구자들은 세계 군사 부문의 탄소 배출량이 전체 배출량의 5~6%를 차지한다고 분석한다. 이를 뭉뚱그려 국가별 탄소 배출과 비교하면 인도 다음으로 많은 전체 4위 수준이다.

또 폭등하는 군사비는 기후위기 대처에 필요한 소중한 자원의 낭비를 수반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의 기후변화 대처를 돕기 위해 매년 1천억달러의 기후금융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이 약속은 한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군비증강에 탕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냉전이 격화하면서 기후위기 대처를 위한 국제협력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미·중이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면서도 기후변화 대처에는 협력을 다짐하지만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어떨까? 가히 ‘매드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미 동맹과 북한은 극단적인 언어와 최강의 무력시위를 동원해 상대방에게 절멸의 두려움을 안겨주려 한다. 전쟁이 터지면 한-미 동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한은 ‘대한민국’을 지도상에서 없애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곳은 한반도가 유일하다. 한·미는 공식 문서를 통해 북한이 핵을 쓰면 “북한 정권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라는 위협을 하고 있고 북한은 핵무기 사용 조건을 세세하게 공개하고 있는데, 이 역시 다른 지역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한-미 동맹과 북한의 의도는 상대방에게 최대의 두려움을 안겨줘 전쟁을 억제하겠다는 데 있다. 하지만 전쟁불사론에 기대어 전쟁을 예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결코 정상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매드의 원조 격인 미국·소련은 다양한 대화 채널이라도 있었지만, 한-미 동맹과 북한 사이에는 마땅한 소통 구조도 없다. ‘한반도식 매드’가 더 불안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양쪽이 무기와 장비를 동원해 벌이는 훈련이 막대한 탄소를 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수시로 전개되고 있는 미국 전략폭격기 1대가 1시간 동안 내뿜는 탄소는 자동차 1대가 7년 동안 배출하는 양과 비슷하다. 한·미 해병대가 벌이는 쌍룡훈련에 참가한 미국의 강습상륙함 마킨아일랜드함(4만2천t급)이 연료를 완충해 이를 다 소비하면 자동차 10만대가 배출하는 탄소와 비슷한 양이 나온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딸과 함께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미사일의 화염 속에는 탄소가 잔뜩 들어 있다. 지도자들이 미래 세대를 ‘냄비 속의 개구리’로 만들면서 미래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세계를 신냉전으로 부르는 것이 적합하냐는 반론도 나오지만, 적어도 군사 문제에 있어서는 냉전보다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근의 군비경쟁은 냉전기보다 더 심각해지고 있고, 이 와중에 유럽에선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냉전기에도 있었던 군축 조약이나 담론이 오늘날에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데탕트 등 ‘군축 가능’ 역사가 증명

냉전기의 ‘매드’는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일은 벌이지 말자는 인간 이성의 최저치에 대한 호소로 이어졌다. 경쟁은 하더라도 전략적 안정이라도 취하자는 것이었고, 군비통제와 군축 조약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1970년대 미-소 데탕트 시대를 연 전략무기제한협정(SALT)과, 탄도미사일방어체제를 사실상 금지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 그리고 유럽 탈냉전의 시작점이었던 헬싱키 프로세스와 다양한 군축 조약, 핵무기 감축 시대를 연 중거리핵전력(INF) 조약과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 조약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실 끝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사상 최악의 군비경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2023년 세계 군사비는 2조3천억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추세로 볼 때, 세계 군사비는 2030년에는 3조달러 안팎에 달할 전망이다.

그렇다면 기후변화 대응에 필요한 비용은 어느 정도 될까? 영국·이집트 정부의 공동 의뢰로 작성된 보고서를 보면, 중국을 제외한 개발도상국들의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2030년까지 매년 2조달러에서 2조8천억달러가 필요하다고 한다. 개발도상국들이 이러한 천문학적 비용을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만큼, 선진국들이 매년 1조달러를 지원해야 한다고도 한다.

큰돈이지만 선진국들 중심으로 비상한 결단을 내리면 불가능한 액수도 아니다. 세계 군사비를 내년부터 2030년까지 2조달러 수준으로 동결하고, 이를 예상되는 군사비 증액과 비교하면, 7년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예산이 5조달러에 육박한다. 이 돈을 기후위기 대처에 사용하면 인류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참고로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 중반 세계 군사비는 1조6천억달러였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1조1천억달러까지 떨어졌다. 군축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평화연구소장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를 전공했다. 조지워싱턴대 방문학자로 한-미 동맹과 북핵 문제를 연구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핵과 인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등 다수의 책을 썼다.

[단독] 건설노조 간부들 줄줄이 구속영장...민노총은 탄원 릴레이 - 조선일보

[단독] 건설노조 간부들 줄줄이 구속영장...민노총은 탄원 릴레이 - 조선일보

[단독] 건설노조 간부들 줄줄이 구속영장...민노총은 탄원 릴레이

조합원 채용 강요하고 금품 요구한 혐의
민노총 “합리적 교섭벌이다 안타깝게 발생” 탄원
주형식 기자
입력 2023.04.30



부산 남부경찰서가 지난 2월 13일 업무방해 및 금품갈취 등 혐의로 부산 동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지역본부 건설노조 사무실에서 확보한 압수물을 옮기고 있다./뉴시스

검찰이 최근 전국 각지 민노총 산하 건설노조 지부장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으로 30일 파악됐다. 금품 요구나 채용 강요 등 건설현장 비리에 초점을 둔 노동조합 수사가 점차 확대되는 모양새다.

검찰은 지난 26일 민주노총 산하 전국건설노동조합 부울경건설지부 석현수 지부장에 대해 공동공갈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경찰은 노조가 “복지기금을 내지 않으면 운송을 거부하겠다”고 압박해, 부울경 지역 업체 40여곳에서 3년간 10억 상당을 받아낸 것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민노총은, 복지기금과 관련해 지난해 5월 부산시의 중재로 레미콘 업체들과 임금단체협약 맺었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석 지부장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는 다음달 2일 열릴 예정이다.

또 검찰은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김정배 지부장, 양회동 지대장, 이양규 전 부지부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들은 건설사에게 조합원 채용을 강요하고, 현장 간부의 급여 등을 요구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건설노조 강원 건설지부는 “조합원을 최대한 고용하게 하고, 건설사와 교섭이 결렬됐을 경우 투쟁을 하는 것은 통상적인 노조 활동인데 이를 불법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건설노조 간부 15명이 이미 구속됐고 1000여명에게 소환장이 발부된 상태로 전해졌다.

검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민노총은 조직적으로 탄원서 릴레이를 펼치며 적극 대응하고 있다. 현재 민노총은 각 조직원들에게 탄원서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민노총이 전국 조직원들에게 배포한 부울경건설지부 석현수 지부장에 대한 탄원서엔 “석 지부장은 오랜 노력을 통해 건설업체들과 원만하고 합리적인 교섭과 협의의 공간을 마련하였고, 부산울산경남지역 건설현장을 일하기 좋은 현장으로 만들어왔다. 본 사건도 이러한 과정에서 안타깝게 발생한 것”이라고 적었다. 강원건설지부 간부에 대한 탄원서 요청서엔 “상기인들은 건설회사가 현장에서 불법과 편법을 일삼으며 이익의 극대화만을 꾀하는 구조에서 외면되는 건설기능공의 생계와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지켜내고자 활동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5년간 이룬 성취 순식간에 무너져…허망" | 연합뉴스

문재인 "5년간 이룬 성취 순식간에 무너져…허망" | 연합뉴스

문재인 "5년간 이룬 성취 순식간에 무너져…허망"

송고시간202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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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연 기자기자 페이지


다큐멘터리서 언급…"잊혀지고 싶다는 뜻 밝혔으나 끊임없이 현실정치로 소환"

영화 '문재인입니다'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정수연 기자 =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음 달 개봉하는 자신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5년간 이룬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졌다"고 언급했다.

문 전 대통령은 18일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를 통해 일부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문재인입니다'에서 인터뷰를 통해 "5년간 이룬 성취, 제가 이룬 성취라기보다 국민들이 대한민국이 함께 성취한 것인데 그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 허망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는 윤석열 정부를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전 대통령은 "자연인으로서 잊혀질 수 없는 것이지만 현실 정치 영역에서는 이제 잊혀지고 싶다는 뜻을 밝혔던 것인데 끊임없이 저를 현실정치로 소환하고 있다"면서 "그 꿈도 허망한 일이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끊임없이 현실 정치 속에 소환하게 되면 결국은 그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동료 최수연 씨는 같은 인터뷰에서 "어떤 때는 당신도 5년 하고 내려왔지만 지금 내가 어느 지점에 있나 생각을 하는 때가 있는 것 같다"며 "그렇게 밤잠을 설쳐가며 (국정운영을) 했던 게 어느 순간 바닥을 치는 게 보이니 본인은 너무 허무하고, 이렇게 가는 건가 생각을 하시는 날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문재인입니다'는 다음 달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다.

이 영화를 만든 이창재 감독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를 대통령으로 끌어올린 노사모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선보인 바 있다.

[한국(인)의 마음(의 병)] <친일 민족반역자>라는 말을 쓰거나 그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 Facebook

 [한국(인)의 마음(의 병)] <친일 민족반역자>라는 말을 쓰거나 그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 Facebook



[한국(인)의 마음(의 병)] <친일 민족반역자>라는 말을 쓰거나 그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병들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애국>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기는 한국을 위해서도, 본인 자신들을 위해서도 좋지않다고 생각한다.
- 이런 사람들이 <평화운동>을 한다고 한다니.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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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달래 오라” - 강효백 교수>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나라의 국가와 국화를 새로 지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애국가는 일제에 부역한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이며 가사 또한 일본의 시가 같은, 왜색이 짙은 내용으로 적절치 않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무궁화 또한 차라리 일본의 국화로 더 맞을 법한 꽃으로 우리 나라를 상징하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평소 페북을 통해 이를 널리 알려오신 강효백 교수님께서 방대하고 깊은 연구의 결과물인 <일본 무궁화 가라 한국 진달래 오라>(2023, 하움출판사)를 출간하셨습니다. 이에 강 교수님의 저서를 페친님들께 긴히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과거사 사죄 요구가 ‘무릎 꿇리는’ 일인가

과거사 사죄 요구가 ‘무릎 꿇리는’ 일인가



과거사 사죄 요구가 ‘무릎 꿇리는’ 일인가
독일은 2000년 ‘기억·화해·미래 재단’ 기금 조성, 2006년까지 약 6조원 배상
정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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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3.04.29 09:09



1970년 12월7일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나치 정권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위령탑에 헌화한 뒤 무릎을 꿇고 추모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또 ‘말’이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방문에서 앞서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내놓은 말이 거센 논란을 부르고 있다. 대통령이 하지 않아도(때로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하고, 이를 해명하려 대통령실을 비롯한 여권이 내놓은 말이 문제를 더욱 키우는 건 이 정부 소통의 특성으로 굳어진 듯싶다.
‘어리석음’은 누구의 것인가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 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는데 100년 전에(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미셸 예희 리 <워싱턴포스트> 서울·도쿄 지국장이 2023년 4월25일 오전 소셜미디어에 “번역상의 오류에 대한 의문과 관련해, (인터뷰) 녹음 파일을 교차 확인했다”며 올린 내용이다. 전날 보도된 윤 대통령 인터뷰 내용에 대해 국민의힘 쪽에서 나온 ‘번역상의 오류’란 주장에 대한 반박성이다.

“안보협력이 긴요한 상황에서 (일본이) 무릎 꿇지 않으면 두 나라 관계 개선 절대 안 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나라를 위해 (한-일 관계 개선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는 점을 말을 한 것이다.”

같은 날 미국 현지에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내놓은 해명도 논란을 키웠다. 그는 한-일 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10월8일 일본 의회에서 한 연설 일부(“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를 인용했다. 하지만 해당 연설문 전체를 보면, 김 전 대통령이 지적한 ‘어리석음’의 주체가 대통령실 관계자의 주장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제 한·일 두 나라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를 맞이했다. 과거를 직시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것은 인식된 사실에서 교훈을 찾고 보다 나은 내일을 함께 모색한다는 뜻이다. 일본에게는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고….”
대부분 여전히 현재진행형

“100년 전 일”을 문제 삼는 건, 그 ‘일’ 대부분이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2023년 3월6일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해법으로 제시한 ‘제3자 변제안’이 대표적이다. 과거사 문제의 법적 쟁점 연구에 천착해온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 요구를 ‘무릎 꿇으라’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강제동원 배상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쪽은 되레 이 판결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런데도 정부가 일본 쪽 책임을 대신 떠맡았다. 그러니 무릎을 꿇은 건 한국 정부다. 혹시 윤 대통령은 일본이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윤 대통령이 언급한 유럽 사례도 한-일 관계에 견줄 수 없다. 강제동원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다. 독일 ‘기억·책임·미래 재단’의 자료를 종합하면, 1939~1945년 독일과 나치군 점령 지역에서 각각 약 1300만 명씩 모두 2600만 명가량이 노예노동·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나치 패망 뒤 ‘반파시즘’을 내건 서독 정부는 애초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 책임을 부인했지만, 1950년대 초부터 이스라엘과 서유럽의 옛 점령국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직간접적 배상에 나섰다. 1990년 통독 이후 폴란드에 5억마르크, 벨라루스·우크라이나·러시아 등에 총 10억마르크를 지급함으로써 냉전 시절 배제됐던 동유럽 강제노동 피해자에 대한 배상 노력도 기울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독일 기업에 대한 피해자들의 집단소송이 이어지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총리는 취임 직후인 1998년 말부터 범경제계 차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기금 조성을 추진했다. 독일 정부와 경제계는 애초 20억~30억마르크로 책정한 기금 규모를 80억마르크까지 늘렸지만, 피해자 쪽 거부로 협상 결렬 위기로 내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1999년 12월 독일 일간 <타게스차이퉁>이 기금 참여를 거부한 267개 기업 명단을 공개하자, 이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독일 기업계와 미국 정부의 직접 협상으로 100억마르크(약 52억유로)를 배상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기억·책임·미래 재단’이다.

“나치 정권 시절 만연했던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으로 심각한 불의를 야기했다. 독일 기업은 나치의 불의에 가담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 금전만으론 불의와 인간적 고통을 진정으로 보상할 수 없다. …관련 법이 지나치게 늦게 입법됐다는 점에서 연방의회는 정치적·도덕적 책임을 인정한다. 피해자들이 당한 불의를 후세도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 책임을 지자, 과거·현재·미래를 위해”

2000년 8월2일 독일 연방의회가 통과시킨 ‘기억·책임·미래 재단 설립에 관한 법률’ 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독일 기업과 정부가 각각 50억마르크씩 부담(제3조 2항)해 재원을 마련하고, 운영은 독일 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이사회(27명)가 맡기로 했다. 특히 대독유대인청구권회의와 신티·로마족(이른바 ‘집시’) 중앙위원회 등 피해자 단체와 6개 피해국, 유엔난민기구 대표도 이사회에 참여하도록 했다.

출범 뒤 재단은 2006년까지 98개국 166만 명에 이르는 피해자에게 모두 44억유로(약 6조4669억원)를 배상했다. 피해자 단체 쪽에도 따로 2억7천만유로(약 3968억원)를 지급했다. 배상 절차를 마친 이후엔 미래세대 교육과 희생자 추모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재단의 누리집(stiftung-evz.de) 첫 화면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나치의 불의로 인한 희생자를 기리며. 우리 책임을 지자. 모두 함께 과거, 현재, 미래를 위해. 공평한 존엄과 모두의 권리를 위해.”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2023-04-29

Opinion | Yoon Suk Yeol's State Visit: U.S. Backing of Far-Right Leader Bad for South Korea | Common Dreams

Opinion | Yoon Suk Yeol's State Visit: U.S. Backing of Far-Right Leader Bad for South Korea | Common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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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YOON SUK YEOL




South Korean President Yoon Suk Yeol and President Joe Biden arrive for a joint press conference in the Rose Garden of the White House on Wednesday, April 26, 2023 in Washington, D.C. President Biden is hosting President Yoon on his first visit to the United States as the two nations have reached a nuclear weapons agreement.
(Photo: Kent Nishimura / Los Angeles Times via Getty Images)


Yoon Suk Yeol's State Visit: U.S. Backing of Far-Right Leader Bad for South Korea



With the support of Washington, President Yoon has pursued extreme hawkish policies directly against South Korea's national interests.


SIMONE CHUN
Apr 27, 2023Common Dreams

South Korea's far-right President Yoon Suk Yeol, who was elected by a narrow margin of 0.7% last year, is in Washington, D.C. this week for a state visit at the invitation of President Biden.

According to the New England Korea Peace Campaign, Boston Candlelight Action Committee, and Massachusetts Peace Action, which are preparing to hold a protest on Friday, April 28th in Cambridge, Massachusetts, during Yoon's visit to Harvard, "Since entering office, Yoon's right-wing administration has expanded costly and provocative U.S.-ROK military exercises, heightened tensions with North Korea, rolled back workers' rights, threatened to abolish the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has taken many other actions to undermine struggles for peace and justice in South Korea."

Indeed, backed by Washington, President Yoon has pursued extreme hawkish policies directly against South Korea's national interests.

Washington's endorsement of Yoon and its support for his new National Security State directly contravenes the majority of South Korean public opinion.

Yoon's state visit comes at a time when South Korea is experiencing unprecedented crises on the political, economic, and national security fronts as a consequence of the Biden Administration's unrelenting pressure on South Korea to join the U.S. anti-China bloc.

Moreover, domestically, Yoon has installed a new National Security State, which experts refer to as the "republic of prosecution."

His administration is engaging in a massive political witch hunt of his opponents, arresting key top officials of the previous Moon administration, and targeting the opposition Democratic Party and progressive political leaders.

Yoon is using South Korea's national-security laws and red-baiting rhetoric to crack down on unions and those who are working for peace and unification.

For example, on January 28 of this year, Jeong Yu-Jin, Director of Education of the Gyongnam Progressive Alliance and a mother of two, was arrested on charges of being a North Korean spy, an allegation she has steadfastly denied. Having been arrested, detained, and forced to make a false confession without access to an attorney, she engaged in a 40-day hunger strike in detention, which she only ended after 300 Koreans joined her hunger strike in solidarity. Although the hunger strike severely harmed her health, she remains steadfast and is preparing for her trial, with her greatest fear being that her two children remain without the care of their mother indefinitely.

Yoon's eagerness to prove his administration's worth as a linchpin in Washington's new Cold War in Asia means that there will be more repression and prosecution such as this. Washington is backing a repressive political regime under an extreme far-right president whose inexperience in foreign policy and disregard for political norms is ushering in a new era of domestic and international uncertainty and risk for South Korea.

Washington's policies run directly counter to the sentiments of the majority of South Koreans, who strongly support balanced foreign relations with Russia and China, meaningful reconciliation with Japan, and peace with North Korea.

According to recent polls, 80% of Koreans oppose the degree to which Yoon has capitulated to Washington's imposition of its anti-China policy on South Korea.

Washington's endorsement of Yoon and its support for his new National Security State directly contravenes the majority of South Korean public opinion.

According to recent figures, the Yoon administration has an abysmal 19% public approval rating.

While the purpose of Yoon's state visit is to prove his relevance to U.S. imperial ambitions in Asia, Washington's increasingly heavy-handed management of its one-sided relationship with South Korea is causing it to lose the battle for the hearts and minds of the South Korean public.



Our work is licensed under Creative Commons (CC BY-NC-ND 3.0). Feel free to republish and share widely.


SIMONE CHUN
Dr. Simone Chun serves on the Steering Committee of the Alliance of Scholars Concerned About Korea and is a member of the Korea Policy Institute and the Korea Peace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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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warns of serious danger over US-South Korea deterrence deal - BBC News

North Korea warns of serious danger over US-South Korea deterrence deal - BBC News

North Korea warns of serious danger over US-South Korea deterrence deal

Published
3 hours ago

IMAGE SOURCE,REUTERSImage caption,

Kim Yo-jong holds a senior role in North Korea's power hierarchy, and is reported to have influence on leader Kim Jong-un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s powerful sister has warned that a recent US-South Korean deal will lead to a "more serious danger".

Kim Yo-jong said North Korea's nuclear deterrent "should be brought to further perfection", state media reported.


The US agreed to deploy nuclear-armed submarines to South Korea and involve Seoul in its nuclear planning to counter nuclear threats from the North.

In return, South Korea agreed to not develop its own nuclear weapons.

The deal - known as the Washington Declaration - was announced this week during President Joe Biden's talks with his South Korean counterpart Yoon Suk-yeol's in the American capital .

Referring to the agreement, Ms Kim said: "The more the enemies are dead set on staging nuclear war exercises, and the more nuclear assets they deploy in the vicinity of the Korean peninsula, the stronger the exercise of our right to self-defence will become in direct proportion to them."

She warned that the move would "only result in making peace and security of North-East Asia and the world be exposed to more serious danger".

Ms Kim holds a senior position in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Workers' Party of Korea, and is reported to have influence on her brother.

President Biden hailed the deal, saying it would strengthen the allies' co-operation in deterring a North Korean attack.

President Yoon said the agreement marked an "unprecedented" commitment by the US to deter attacks and protect allies by using nuclear weapons.


China warned against "deliberately stirring up tensions, provoking confrontation and playing up threats".


Under the deal, the US will make its defence commitments more visible by sending a nuclear-armed submarine to South Korea for the first time in 40 years, along with other assets, including nuclear-capable bombers.

The two sides will also develop a Nuclear Consultative Group to discuss planning issues.

Politicians in Seoul have long been pushing Washington to involve them more in planning for how and when to use nuclear weapons against North Korea.

Concern has been rising on both sides about the nuclear threat posed by North Korea. Pyongyang is developing tactical nuclear weapons that can target South Korea, and refining its long-range weapons that can reach the US mainland.

The US already has a treaty obligation to defend South Korea, and has previously pledged to use nuclear weapons if necessary. But some in South Korea have started to doubt that commitment and call for the country to pursue its own nuclear programme.


Watch: During the visit, Mr Yoon treated Mr Biden to a rendition of American 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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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를 빨갱이라고 하는 김문수 --- - 문재인을 빨갱이라고 하는...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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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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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남남갈등] 문재인 정부를 빨갱이라고 하는 김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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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을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은 김문수 만이 아니겠지만, 누가 나에게 김문수 특강을 보라고 보내주었다. 김문수는 소위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인물. 본인은 자기를 중도라고 생각하는 듯.
- 1부와 2부하여 1시간 정도인데 화면에 나오는 요약을 스크린쇼트로 커피하여 모아 두었다. 다시한번 검토해보기 위해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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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문수 특강 1부] "제가 좌익에선 서열이 굉장히 높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eBmDCO9J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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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문수 특강 2부] "사람들이 저를 보고 극우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riPxYCgkmg&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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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문수 문재인] 구글 검색을 해보면
https://www.google.c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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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문수는 누구: 김문수/인생 나무위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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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19대 대선 불출마와 이후
어거지에 가깝게 친박에 들붙는 행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9대 대선에는 불출마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유한국당 경선에 참여할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14] 친박 행보로 지지를 얻었다면 지지자들의 후원금으로 금전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금전문제로 불출마한다는 말은 결국 정말로 금전을 후원해 주는 지지자가 없다는 뜻이다. 친박부대들도 돈 날리기는 싫었나 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바른정당에 합류하거나, 민주계 겸 비박계로서 끝까지 소신을 갖고 갔으면 비록 현직이 전혀 없는 상태이지만 그래도 다음 선거에서 충분히 재기할 수도 있었던 인물인데, 이처럼 뜬금포로 친박 행보를 펼치며 결국 대중들한테 밉상으로 찍히고[15] 정작 소소한 친박 돌격대장 지분은 김진태가 모두 가져가버려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 인생도 박근혜와 함께 망했다고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는 사실상 근황도 잘 안 잡힌다. 정부 출범하자마자 친박집회 참석해서 "문재인 정부 타도"를 외쳤다는 것만 근근히 보도되곤 한다. 2018년 1월 8일 조갑제 TV와의 인터뷰에선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신이상자라는 막말까지 곁들여 여전한 디스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정책과 관련해 문 대통령을 김정은의 기쁨조라고 발언해 논란과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고영주 시즌2
3.3.1.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8년 3월에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후보군이 무주공산에 가까운 자유한국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물망이 잡혔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 나름 이름값 있는 인물이라지만 옆동네 광역단체장인 경기도지사를 2번이나 역임했고, 현재 대구로 내려가 있는 인물인지라 뜬금없다는 반응이 상당하다.
현실적으로 당선 가능성은 높지 않은데, 20대 총선때도 대구 수성 갑에서 김부겸에게 완패했고, 현재 옆동네인 대구 북구 을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내려와 있는 상황이라 자신은 대구에서 설 자리를 잃었기에 서울시장 출마를 바탕으로 지역구를 서울로 옮기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새누리당에서 같이 있었던 정태근 전 의원이 제기하기도 했다. # 원래 지역구인 부천 소사는 자신의 보좌관 출신인 차명진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어 돌아가기 좀 그렇고.
게다가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는 선거를 치를 돈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19대 대선 불출마 이유에서 보듯 선거를 치를 돈 자체가 없는 그에게 서울시 전체를 유세하며 다닐 돈이 있는지는 과연 미지수다. 자유한국당 중앙당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이 점을 특히 정두언 전 의원이 인터뷰에서 지적했다.
오죽하면 당시 더불어민주당에서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치뤘던 우상호 의원은 김문수를 비판하면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김문수가 했던 '대구 수성갑에 뼈를 묻겠다'라는 발언을 인용하며 '이미 뼈를 묻으신 분이 서울에는 살만 올라왔나'라고 비꼬았다. 이 발언 때문에 뼈가 다 대구에 있다며 순살문수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게다가 상대는 3선을 노리는 새누리당 킬러 박원순에다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중도+중도보수 진영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안철수인지라 상당한 고전이 예상된다.
4월 11일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공식 출마 선언을 하였다.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우파적인 발언을 했다.
5월 1일 노동절 기념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당시 노래는 그대로 따라 불렀지만 팔을 흔들지는 않았다. 일단 가사는 아는 모양. 하기사 80년대 노동계 대표나 다름없던 사람이니 당연히 알 것이다.
5월 30일, 6월 7일 두 차례의 토론회에서는 기대보다는 선전했다는 평이 많다. 판넬을 많이 사용해서 "판넬왕"이라는 별명이 새로 생겼다(...). 수치화된 자료를 앞세운 논리를 무기로 삼은 안철수에 비해 김문수는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시각자료에 집중을 한 모양이다. 7일 토론에서는 안철수에게는 큰 공격을 안하고 김종민과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이날 안철수와 함께 박원순이 또 다시 털리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박원순의 "빚이 많은 건 청백리" 드립을 탄생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 논의가 상당히 오갔다고 알려졌지만 안철수 측의 일방적 사퇴 요구가 이어지자 6월 6일, 선거를 완주할 의사를 분명하게 내비쳤다.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 종료후 발표된 출구조사에서 박원순 후보의 55.9% 득표 예측에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뒤지는 21.2%의 지지율의 2위 낙선이 예측되었으며 52.8% : 23.3%로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애시당초 목표가 안철수를 이기고 2등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꽤나 선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에서도 민주당세가 특히 강한 관악구, 안철수의 전 지역구인 노원구 2곳에서 근소하게 밀린 것을 제외하면 서울 전 지역에서 안철수를 누르면서 지난 대선에서 서울 3위를 기록하며 자유한국당이 앞으로 수도권에서 3등으로 밀리는게 아니냐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 대구 수성갑에서의 패배로 정치인생을 마무리했다면 텃밭에서조차 참패한 몰락한 거물정치인의 이미지로 기억되었겠지만 당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에 요청에 따라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들어 명확한 보수색을 어필하며 자유한국당의 서울 2위를 탈환해내면서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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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문재인 정부 측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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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박교수님, 그사람 저보다 대학 2년 선배이고, 입만 열면 레닌 스탈린 찾던 사람인데,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완전히 자기 부정했지요, 이제는 신경쓸 가치도 없는 인간으로 전락했습니다.


Sejin Pak

이종구 보수 관중 앞에서 인기를 얻기위해 점점 과격한 식으로 말하는 듯합니다.




지성수

김문수는 잘 아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든 하면 너무 열심히 하다가 빠지는 경향이 있었어요.






2023-04-28

Three Visions of Prewar Japan Lecture 18 Mark J. Ravina

Understanding Japan: A Cultural History

Mark J. Ravina

Three Visions of Prewar Japan Lecture 18

In this lecture, we’ll discuss Japan’s road to World War II, but we will not look at that road purely in terms of battles, treaties, and major events. Instead, we’ll look at the lives of three important individuals, each of whom offered a distinct perspective on Japan’s place in the world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se individuals are 

Nitobe Inazo, Shidehara Japanese democracy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 although from somewhat different perspectives. 

Ishiwara, by contrast, was a diehard militarist. 


We can understand the fate of Japanese democracy and Japan’s road to war by 1862, just a few years before the beginning of the Meiji Restoration. He was educated largely in the United States and converted to Christianity. Nitobe’s great accomplishment was representing Japan to the world through his writings and through international organizations, such as the League of Nations. Nitobe’s approach to the world might be

Nitobe studied at Tokyo University, Johns Hopkins, and Halle University in Germany. After completing

educator with deep connections to the West, including an American wife.


his academic work, he returned to Japan and became a professor at Sapporo Agricultural College.

Nitobe’s connections to the West were part of what drove him to write Bushido: The Soul of Japan. Nitobe was interested in establishing ethical and moral tradition, leading people to be stalwart, brave, honest, dutiful, generous, and so on. His book was eccentric, but it was quite popular in the West.

In part because of Nitobe, Japan was seen as progressive and civilized in the West, and this favorable view was one reason that the United States and Britain were supportive of early Japanese colonial efforts in Taiwan and Korea. In essence, Japan was seen as bringing progress to backward places. Moreover, in staking a claim British and American interests.

But then, in 1905, the West’s perspective began to change. The British and Americans were delighted so long as Japan was building a colonial empire at the expense of Russia, but after 1905, it looked as though the Japanese Empire might clash with European and American ambitions. The period between 1905 and 1918 was tense because Japan was now an imperial power, but it was unclear where it sat in the pecking order of great powers.

In the wake of World War I, Nitobe saw an opportunity for Japan to participate in a multinational effort to shape a peaceful and democratic world order. This vision of Japan’s role was bolstered by a surge in idealism and antiwar sentiment.

We’re all familiar with the institutions and agreements that emerged from the generation of postwar idealists: the Paris Peace Conference, the Permanent Court of International Justice, the League of Nations, and the Kellogg-Briand Pact, in which the signatories pledged not to use war to resolve disputes; both the United States and Japan signed the treaty.

Lecture 18—Three Visions of Prewar Japan


In East Asia, postwar optimism produced one of the world’s 1921–1922 Washington Naval Conference. The great naval powers in East Asia—Japan, Great Britain, and the United

one another’s rights to trade in China and would support essence, the great powers agreed that they would compete economically but not militarily.

Nitobe was fully supportive of these military and economic agreements, but unfortunately, by 1929, his idealism faced a serious challenge in Japan. Such men as Ishiwara Kanji were trying to agreements of the Washington Naval Conference.

Japan at the Washington Naval Conference, was similar in orientation to Nitobe, but Shidehara was far more pragmatic. If

Shidehara had married into one of the most powerful business of Mitsubishi. Thus, Shidehara, whether he was serving as foreign of peace through mutual respect; instead, he argued for peace in terms of a business plan.

For example, Shidehara believed that Japan might be able to conquer and hold part of China, but whatever parts Japan did not control would probably boycott Japanese exports. If, instead, Japan helped China establish a stable and independent government, t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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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businesses, including Mitsubishi, would have access to the entire Chinese market.

This attitude also explains why Shidehara pressed for arms control: A naval arms race with the United States and the United Kingdom would be expensive. Shidehara believed that Japan shouldn’t undermine a chance to dominate a huge emerging market by starting an arms race it couldn’t afford.

Shidehara was remarkably committed to a strong China, more so than either the United States or the United Kingdom. We see an example of this in the so-called Nanjing Incident.

In March of 1927, the armies of the Chinese Nationalists and the Chinese Communists together retook the city of Nanjing from a local warlord, Zhang Zongchang. In the process, the soldiers attacked foreigners in Nanjing, including businessmen, diplomats, and teachers.

In response, the United States and United Kingdom sent warships and began attacking Chinese troops with machine guns and high explosives. Japan was asked to join an expedition to reestablish order, but Shidehara, who was then foreign minister, refused. He argued that while foreign troops should protect their own residents, they needed to let Chiang Kai-shek get control of his own army. Foreign intervention would likely make matters worse.

Clearly, Shidehara’s policies were based on peaceful competition for Chinese consumers, rather than military competition for Chinese territory. But even when Shidehara was at the peak of his power as foreign minister, such militarists as Ishiwara Kanji regarded him as weak and dangerous. Starting in 1929, Shidehara’s world gradually unraveled.

Beginning in October 1929, stock markets from New York to London to Tokyo fell and, with them, all optimistic talk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trade.

Lecture 18—Three Visions of Prewar Japan


In the face of economic crisis, the United States implemented strict import restrictions. U.S. trading partners retaliated with tariffs of their own, and world trade collapsed. Shidehara’s vision of relying on free access to large markets in China,

Ishiwara Kanji was a graduate of the Japanese Army War College, where he lectured in military history from 1925 to 1928. During that period, he developed an apocalyptic doctrine that featured a coming World War III between Eastern and Western civilizations, this war would be between Japan and the United States.

Ishiwara observed that military mobilization was growing increasingly extensive over time and that this expansion was erasing the line between civilian and soldier. He predicted that armies would soon be targeting their enemies’ civilian populations using amazing new weapons, including bomber aircraft.

1929. With the end of the Russo-Japanese War, Japan had won control of key railroad lines in Manchuria. The Japanese army there (the Kwantung Army) was supposed to protect those rail lines, but

The Japanese army in Manchuria also had a long tradition of insubordination, even ignoring direct orders from Tokyo, and Ishiwara raised that insubordination to a new level. In 1931, with the helped organize the invasion of Manchuria and the creation of a new puppet state, Manchukuo.

The army’s actions had not been approv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or even discussed in a cabinet meeting; in fact, w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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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wantung Army had accelerated its plan. The creation of Manchukuo

Such men as Shidehara knew that the army could not be forced to give up territory, and it did not help that back in Tokyo, rightwing extremists were beginning to eliminate their opponents. These groups were a mix of military men and civilians, and they were commonly both anti-communist and anti-capitalist.

Amidst the despair of the Great Depression, these extremist groups became increasingly brazen. They shot one prime minister in 1931 and killed another in 1932; a remarkable number of elected civilian politicians died because they were deemed either too complicit in opposition.

Ishiwara’s creation of Manchukuo ended Nitobe’s and Shidehara’s vision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China insisted that Manchukuo was a puppet state and demanded a League of Nations investigation. When the league commission reported that Manchukuo was an illegitimate state, Japan quit the league.

The invasion of Manchuria closed off the alternative paths proposed by Nitobe and Shidehara, ended Japanese reliance on multinational agreements, and made clear that the U.S.-Japanese rivalry in the perhaps open war. It was certain that for the moment, at least, Ishiwara’s militaristic vision had won the day.

In the aftermath of the invasion, Nitobe was devastated. At a Japanese delegates struggled painfully to explain their nation’s actions in Manchuria. Soon after the meeting, Nitobe collapsed from pneumonia and died shortly thereafter.

The Japanese army did not know what to do with Ishiwara. He was intelligent and charismatic, but he was also consistently insubordinate and so thoroughly enthralled by his own vision of Japan’s future that he was unable to compromise. He was moved around in the army and forced into early retirement in 1941. He died in 1949 at age 60.

Shidehara survived World War II, and his views were vindicated. One of his last public acts would shape Japan to this day: the inclusion of an antiwar clause in the nation’s postwar constitution. With this clause, Shidehara’s prewar vision of Japan was written into law: Japan would be an economic superpower, not a military superpower.

Suggested Reading

Howes, ed., . Nitobe, Bushido.

  1. 2.

Questions to Consider

What factors explain the collapse of Japanese internationalism in the 1930s? How are these connected to global trends?

How did domestic and international forces combine to promote Japanese militarism?


니토베 이나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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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토베 이나조

니토베 이나조(1862-1933)

니토베 이나조(일본어新渡戸稲造1862년(분큐 2년) 9월 1일 ~ 1933년(쇼와 8년) 10월 15일)는 일본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동했던 사상가이자 농업 경제학자, 교육가, 외교가, 정치가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로는 《무사도》가 있으며 일본 화폐 5000엔(円)권(1984~2007년 발행)에는 한때 그의 초상이 실려 있었다. 그는 당시에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국제주의자였고,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생애[편집]

니토베 이나조는 1862년에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숙부한테 도쿄에서 공부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들여 상경하여 공관의숙이라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다가 13살에는 도쿄영어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그 곳에서 사토 쇼스케(후 홋카이도제국대학 초대 총장)을 만나 서로 많이 교류를 하게 됐다고 한다. 그 후, 사토 소스케는 그 당시 유일하게 학사호를 받을 수 있던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에 1기생으로 입학하게 되고, 니토베 이나조는 2기생으로서 삿포로농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삿포로농학교 졸업 후, 제국대학(현 도쿄대학)에 진학한다. 하지만 당시 삿포로농학교에 비해 도쿄제국대학의 수준이 상당히 낮은 것에 실망하게 되어 1년도 안 되어서 자퇴하고,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입학. 그 후, 독일의 할레대학교(현 할레-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삿포로농학교 교수에 취임하고, 몸 상태가 안좋아져 퇴직하고 부시도를 썼다. 그 후, 대만총독부에서 기술직으로 임명되었다. 퇴직 뒤, 교토제국대학 교수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겸임 제1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도쿄여자경제전문학교, 도쿄식민무역어학교 등 여러 학교의 교장으로 지냈다.

와세다대학버클리 대학교스탠포드 대학교컬럼비아 대학교, 제네바대학교,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해버포드 대학교, 브라운 대학교버지니아 대학교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객원교수 및 명예교수를 지냈다.

또한, 도쿄여자대학을 창립한 초대 학장이며, 삿포로에 엔유야간학교(遠友夜学校)를 창립하였고, 도쿄여자경제전문학교(東京女子経済専門学校) 초대 교장, 제일고등학교(第一高等学校) 교장, 도쿄식민무역어학교(東京植民貿易語学校) 교장, 타쿠쇼쿠대학 학감, 츠다주쿠대학(津田塾大学)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20년에서 1926년까지는 국제연맹 사무차장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에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주도인 빅토리아시에서 고인이 되었다.

5000엔 지폐[편집]

니토베 이나조가 새겨진 5000엔 지폐

니토베 이나조는 원래 5000엔 지폐의 인물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초창기에 쇼토쿠 태자 초상화를 사용해 오던 것을, 쇼와 59년(1984년)에 니토베 이나조로 변경하였다. 그 이후 헤이세이 16년(2004년) 이후로는 히구치 이치요로 초상화가 바뀌었다.

학문과 사상[편집]

  • 그는 1880년대 중반 존스 홉킨스 대학원에서 허버트 백스터 애덤스(Herbert Baxter Adams)에게 국제정치학을 배우며 스스로 계몽된 사회라고 자부하던 나라들이 내세우던 야만인을 문명화해야한다는 사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본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문명국 대열에 합류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1885년 삿포로에 사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를 밝혔다. 그는 토마스 아놀드(Thomas Anold)가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삿포로의 아놀드 박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포부를 전했다.
  • 그는 일본의 식민정책연구를 통해서 당시 일본인들에게 식민지 정책과 제국에 관한 지식을 가르쳤다. 니토베가 일본에서 개척한 이 학문분야는 일본이 시행하고자하는 국제 정책에 대해서 일반 국민들과 공직에 진출하려는 젊은 관료들이 꼭 공부해야할 분야였다. 그의 연구를 통해서 일본에서 '보호국'이나 '병합'과 같이 일본제국을 규정한 국제용어들이 학문적으로 설명되고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1910년 한국 병합무렵 도쿄의 대학과 직업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에서는 모두 식민 정책 분야를 가르쳤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한일병합이 제국주의 정치라는 보다 넓은 국제적 문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배웠다. 이렇게 함으로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치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일본제국도 식민지를 통치한다는 상식을 전파했다.
  • 그는 1910년 도쿄대학에서 식민정책과목을 가르칠 때 항상 칠판에 "식민지화는 문명을 전파하는 일이다"라는 글귀를 써넣고 강의를 시작했다. 니토베는 한국인들이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자신을 개화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았다.
  • 또한 그는 1932년 일본의 만주침략을 논리적으로 옹호했으며, 여름 동안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일본의 행동을 설명했고 미국 CBS 라디오 방송에서 많은 미국 청중을 대상으로 일본의 행동을 정당화했다.[1]
  • 제1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지내며 항상 학생들의 엘리트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게 했다고 한다. 즉 학문을 배우는 것 보다는 실행에 옮기는것을 중시하게 하는 등, 인격형성의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
  • 그는 생전에 특히 사회적 약자, 여성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도쿄여자대학쓰다주쿠대학, 도쿄여자경제전문학교 등 여러 여자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장직을 맡았다.
  • 특히 그는 유럽권 국가처럼 식민지를 단순히 경제적 자원으로 취급하는 방식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문명국으로서 식민지 주민의 이익을 중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학교나 병원 등을 설립하여 식민지를 위해 선진 문물, 문명을 전파하고 근대화를 시키는 것으로 계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언[편집]

이 상에는 완전무결한 것도 없고, 전혀 쓸모없는 것도 없다. 우리의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결점이 있고 우리가 증오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장점은 있다.

그 외[편집]

니토베 이나조의 가장 유명한 저서로서, 부시도(Bushido: The Soul of Japan)가 있다. 1900년에 집필되었으며, 서양인 친구에게 "서양에서는 종교 교육에 의해 도덕 교육이 이루어지는 반면에 일본은 어떤 방식으로 도덕 교육이 이루어지냐?"라는 질문에,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귀국하여 니토베 이나조는 일본의 전통적인 사무라이의 정신이었던 부시도(武士道, 무사도)가 그에 상당하는 개념이라는 내용의 책을 집필했다. 영어로 된 이 책은 일본 최초의 전세계 베스트셀러 책이 되었으며, 후에 일본어로 번역이 되었다.

각주[편집]

  1.  일본의 한국식민지화, 292-299, Alexis Dudden저, 홍시수 역, 늘품플러스, 2013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