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1

[손민석] 일본은 귀속재산 때문에 한국에 배상할 필요가 없다? : 역사관의 중요성에 관하여 by 혁명읽는사람 -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일본은 귀속재산 때문에 한국에 배상할 필요가 없다? : 역사관의 중요성에 관하여
항상 그렇듯이 역사관의 중요성에 대해 이대근 선생의 연구를 예시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좌파들이 독자적인 역사관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귀속재산을 중심으로 한국 경제사를 재구성하는 이대근 선생의 학문세계에 대한 소개를 겸하였습니다. 귀속재산 문제는 한일관계, 한국의 고도성장, 식민지기에 대한 평가 등의 여러 주제들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이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얼룩덜룩하게 새겨진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주변국의 영향을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일지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개인의 정체성은 그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며 어떤 경험을 누적해왔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하나의 집단 혹은 국가공동체까지도 그러하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있어 역사인식이 지니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정치학자는 역사관을 놓고 벌어지는 좌우 간의 이념적 투쟁은 한 민족공동체의 정신세계에서의 헤게모니를 쟁취하려는 다툼이라 규정하였는데 납득이 가는 주장이다. 특정한 이념과 정체성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적 집단이 국가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보편화하려 시도할 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역사교과서에 자신들의 이념적 입장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지난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시기에 현행 역사교과서를 비판하며 자신들의 이념에 맞게 개정하려는 시도는 모두 좌절되었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는 역사관이 지니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한국은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를 포기하였고 일본 또한 귀속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두 청구권이 상쇄되어 행사하는 것이 포기되었기 때문에 한일협정을 통해서 들어온 자금의 성격은 "경제지원금"이라는 게 이대근의 해석이다. 일본 정부 측은 이러한 법리 해석에 기초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기에 위안부, 징용공 등을 문제삼아 일본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 시민사회의 흐름에 대해 이대근은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뉴라이트, 다시 말해서 보수 진영 측의 인사로 분류되는데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체결하고도 한국의 민족감정을 거스르지 않으려 배상을 받아왔다는 식의 잘못된 선전을 하여 이후의 역사적 경로를 어긋나게 해버렸다고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있어 일본과 미국의 영향력은 중국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근대화에 실패하였다고 하여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입장은 궁극적으로 중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연결되고, 반대로 식민지기와 권위주의 체제 및 한국의 보수세력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일본과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연결되고는 한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들이 하나의 역사관의 형태를 지녀 특정한 정치집단을 뒷받침하는 세계관으로 확장될 때, 더 나아가서 한 국가공동체의 정신세계를 구성하게 될 때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의 현실을 규정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된다."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일본은 귀속재산 때문에 한국에 배상할 필요가 없다? : 역사관의 중요성에 관하여 by 혁명읽는사람 -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일본은 귀속재산 때문에 한국에 배상할 필요가 없다? : 역사관의 중요성에 관하여

0. 역사관의 충돌은 민족공동체의 정신세계에 대한 헤게모니 다툼이다

 한 개인의 정체성은 그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며 어떤 경험을 누적해왔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하나의 집단 혹은 국가공동체까지도 그러하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있어 역사인식이 지니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정치학자는 역사관을 놓고 벌어지는 좌우 간의 이념적 투쟁은 한 민족공동체의 정신세계에서의 헤게모니를 쟁취하려는 다툼이라 규정하였는데 납득이 가는 주장이다. 특정한 이념과 정체성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적 집단이 국가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보편화하려 시도할 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역사교과서에 자신들의 이념적 입장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지난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시기에 현행 역사교과서를 비판하며 자신들의 이념에 맞게 개정하려는 시도는 모두 좌절되었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는 역사관이 지니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식민지기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분명 역사교과서의 서술방식에 따라 주조되었다. 그에 따르면 조선후기 사회경제의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의 맹아가 형성되었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해 근대로의 이행에 실패하고 시민화되었다. 이후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견지하여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다. 이러한 묘사에서 기존의 식민지기에 있었던 사회경제적 변화는 긍정적인 묘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수탈과 착취로 점철되어 독립운동의 역사적 당위를 입증하는데 사용될 것을 목적을 언급된다. 다시 말해서 식민지기의 자본주의 발전은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발흥과 그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배경적 의미로 제한된다.

뉴라이트 운동을 이끈 경제사학자 안병직의 전공이 식민지기 경제사였다는 점은 이런 맥락에서 음미해볼 만하다.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입증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민족해방운동사 서술 방식에 대한 경제사의 반발이라는 맥락도 있을 것이다. 경제사적 맥락이 강조되는 데는 한국 자본주의의 중진자본주의화라는 현실변화의 흐름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의 중진자본주의화에 대응하여 식민지기의 경제사가 재해석되는 흐름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안병직을 중심으로 한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경제사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이 가한 파괴적인 효과가 너무나도 엄청났기 때문에 매번 저평가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사의 입장에서도 과연 식민지기의 조선인 인적자본의 개발과 산업화가 이후의 1960년대의 대질주로 이어졌다면 1950년대의 파괴와 경제적 영락을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었고 이것이 식민지기 경제사의 의미를 일정한 정도로 제한하는 역할을 하였다. 안병직과 함께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창립한 이대근이 역설적이게도 1950년대 경제사 연구를 주도하던 학자였고 그 입장에서 식민지기 경제개발의 의의를 낮게 평가하던 입장이었다는 점은 역사인식의 전환이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다는, 다시 말해서 "실증"의 강력한 제한을 받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1. 귀속재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나오게 된 학술적 배경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esangmansa74&logNo=220599556884&view=img_12
이와 같은 입장은 교과서에도 잘 반영되어 있어 식민지기 경제개발의 직접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는 귀속재산에 대한 한국인들의 주된 비판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귀속재산의 상당부분이 유실되었다는데에 있다. 식민지기의 경제적 성과가 1960년대 이후의 한국 근대화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갖지 못한다는 비판은 꽤나 효과적이다. 그러한 주장을 펼친 사람이 이대근이었는데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이대근은 40여년 동안의 경제사 연구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180도 바뀌었다. 지금 그는 귀속재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그것이 1960년대 이후의 한국의 경제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역사를 단절로 파악하지 않고 연속의 차원에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대근의 과거의 논리로 현재의 그의 입장을 비판하는 것은 난처한 지점이 있다. 이대근 자체가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근의 논리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대근이 역사적 단절을 중시하도록 했던 "실증"의 제한력은 상당히 강력하다.

이대근은 주변부자본주의론-종속이론의 입장에서 한국전쟁과 1950년대 한국의 자본축적 방식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학위논문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자신의 연구의 전사(前史)인 식민지기 경제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했다. 과문하여 더 이른 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대근의 최초의 귀속재산 연구가 1983년 미군정과 귀속재산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꽤나 오랫동안, 실상 거의 20여년에 걸쳐서, 식민지기 경제개발의 성과는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었으며 그것보다는 오히려 전후에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적 질서로 한국이 편입(=주변부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전후 한국의 고도성장의 주요한 계기였다고 주장하였다.

당대의 한국의 경제개발에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던 반(反)종속을 표방하며 식민지기 조선의 사회구성을 "식민지반봉건사회"로 보던 한국 경제(사)학계의 주요한 흐름의 중심에 이대근이 있었다. 까치출판사에서 출간한 경제사 세미나인 <한국자본주의>, <세계자본주의> 등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 주변부 자본주의 이론에 기초하여 한국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동향까지 포괄하려 했던 거시적인 기획이었다. <한국자본주의론>에서 이대근과 총론을 쓴 이헌창은 한국 경제사의 전개가 봉건사회 - 식민지반봉건사회 - 주변부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겪었다고 도식화했다. 이대근은 이러한 입장은 후에 박현채를 중심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대립하며 사회구성체 논쟁을 낳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대근은 진보진영에 속한 학자였다. 예컨대 이대근은 안병직 등의 식민지기 경제사 연구에 함께 하면서도 그것의 의의를 제한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89년의 집단연구에서도 식민지기 경제개발의 결과에 해당하는 귀속재산의 모습을 추적하여 한국전쟁을 통해 식민지 개발의 물적 유산의 상당수가 망실되었으며, 그로 인해 전후의 한국의 고도성장은 식민지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기보다는 자신이 학위논문에서 주장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농업을 희생시키는 방식의 새로운 축적 모델을 도입하는 과정 속에서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식민지기 경제개발을 한국 고도성장의 역사적 기원으로 삼지 않고 미국 중심의 전후 질서로의 편입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그는 그것에 대단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일본식 경제패턴의 미국식 경제패턴으로의 변화과정 속에서 1960년대 이후의 한국형 고도성장을 이끈 수출지향적 정책이 펼쳐질 기반이 마련됐고, 그 과정에서 농민과 농업의 대규모 몰락 및 중소기업의 희생이 나타났다고 본다. 농업과 농민의 희생 위에서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이뤄졌던 것이다.

그런 그의 입장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1980년대 중후반 이후 중동 지역에 자주 외유를 다녀오면서부터였다. 민족주의적인 견지에서 외국 자본에 의한 종속과 수탈로 인해 경제개발을 못한다는 종속이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그의 눈에 중동 아랍인들의 모습은 상당히 부정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외국인을 배척하는 민족주의적 폐쇄성과 경제적 자유를 강하게 억제하던 아랍의 모습에 그는 점차로 자본에는 민족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입장이 변화하면서 식민지기 경제개발에 대한 그의 입장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가시적으로 표출된 게 바로 2002년이었다.

2002년 삼성경제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행한 1950년대 연구에서부터 그의 입장이 크게 변화하였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의뢰를 받았다고 하여 그가 자본에 자신을 팔아넘겼다는 식으로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그는 1998년 외환위기에 대한 분석을 할 때부터 삼성경제연구소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 이대근이 입장을 곧바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이대근은 2002년 당시 조심스럽게 한국전쟁으로 인한 물적 유산의 상실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이동한 산업시설 및 부산 등의 지역에 잔류한 산업시설 그리고 전후복구 과정에서의 귀속재산의 향방 등의 물적 조건 외에도 입지선정, 수입자재 등의 광범위한 분야를 검토한 뒤에 그는 식민지기 개발의 유산이 생각만큼 그렇게 크게 파괴되지 않았으며, 설사 물적인 피해가 있다 하더라도 미국의 지원과정에서 그것들 대부분이 미국식 제도, 기계 등으로 대체되지 않고 식민지기에 도입한 것들의 복구로 이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식민지기 경제개발이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 결합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지원은 일본이 만들어놓은 틀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그의 주장은 점점 더 식민지기 경제개발을 높게 평가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스탈린의 생산관계 중시론을 비판하며 생산관계의 변혁, 다시 말해서 혁명론을 부정하고 생산력의 증대가 역사발전의 주요한 동력이라는 마르크스의 생산력 발전론이 옳다는 선언을 하며 생산력 발전(=경제성장)을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산력주의로 입장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그는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모든 요소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민족주의라 주장하였다. 생산력 발전을 축으로 역사발전의 진보를 측정하기 시작하며 민족주의는 그러한 역사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재평가되었던 것이다. 

2. 귀속재산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의 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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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식민지기는 이전과 달리 대단히 밝은 모습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그것이 외국 자본에 의한 것이든, 식민지적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든 한국의 식민지기의 경제성장은 동시기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대근의 입장이 집약된 책이 바로 <귀속재산 연구>(이숲, 2015)이다. 이 책은 단순히 귀속재산만을 다룬 게 아니라 귀속재산의 형성부터 1960년대 그것의 해체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실상 한국의 경제사의 큰 맥락을 귀속재산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대근에 따르면 한국의 귀속재산의 규모는 정확한 추계는 어렵지만 일본의 미군사령부에서 미일 합동으로 일본인들이 국외에 두고 온 재산 실태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조선에 두고 간 재산은 대략 52억 달러로 추계되었다. 이는 총 해외 일본인 재산(219억 달러)의 약 24%를 차지하는 금액이었다. 또한 해방 직후 한국의 전체 국부에서 귀속재산은 80~85%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말은 뒤집어서 말하자면 일본인들이 차지했던 부의 크기가 그만큼이나 엄청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에 민족착취와 수탈의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대근은 그런 관점보다는 그것이 이후의 역사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에 집중한다.

이 책은 여러 논쟁적인 주제들을 건드리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한일협정 당시의 대일청구권자금에 관한 이대근의 해석이다. 그에 따르면 한일협정을 통해 국내로 유입된 자금의 성격은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에 대한 "배상금"이 아니라 "경제협력지원금"이다. 왜냐하면 한일협정 당시 일본은 귀속재산의 처리에 관한 한국의 입장을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대근에 따르면 한국이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자 일본 측은 과거 한반도에 놓고 온 일본인 '민간인'들의 재산, 즉 귀속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함으로써 사실상 "역(逆)청구"를 시도하였다. 일본인들은 귀속재산이 엄연히 민간인의 사유재산이었으며 민간인의 사유재산을 미군정이 몰수하여 한국 정부에 무상으로 양도한 조치는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체결된 육전조규(陸戰條規)가 그 법적 근거였다.

이에 따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점령군이 점령 지역의 민간인의 생명, 사유재산 등의 본질적인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또한 이 규정 자체를 미국이 주도하여 통과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스스로가 이 규정을 위반하였기에 그것을 돌려달라는 일본의 요청이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는 게 일본의 입장이었다. 본래라면 미국에게 따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체결 과정에서 이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몫으로 넘겨버렸다.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그 사후처리 과정까지도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책임을 전가해버리고 본인은 뒤로 빠져버린 것이었다. 한일협정은 바로 이 식민지배의 문제와 전후 처리를 마무리하는 조약이었으며 결국 한일 양국은 격한 토론 끝에 독도 문제를 비롯하여 귀속재산, 식민지배 청구 등의 예민한 문제들을 더 이상 꺼내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한국은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를 포기하였고 일본 또한 귀속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두 청구권이 상쇄되어 행사하는 것이 포기되었기 때문에 한일협정을 통해서 들어온 자금의 성격은 "경제지원금"이라는 게 이대근의 해석이다. 일본 정부 측은 이러한 법리 해석에 기초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기에 위안부, 징용공 등을 문제삼아 일본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 시민사회의 흐름에 대해 이대근은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뉴라이트, 다시 말해서 보수 진영 측의 인사로 분류되는데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체결하고도 한국의 민족감정을 거스르지 않으려 배상을 받아왔다는 식의 잘못된 선전을 하여 이후의 역사적 경로를 어긋나게 해버렸다고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이대근의 주장 자체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일본 정부는 이 지점에서 대단히 일관성 있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그것의 변경을 시도하는 측은 한국 진보파들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다소 문제가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근은 식민지배의 부당함에 대한 한국 측의 일관성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한국 정부는 이승만 정부 이래로, 아니 그 이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부터 일관되게 일본의 한일병합은 불법적 행위이며 한국의 주권적 계보는 대한제국에서 조선총독부를 거쳐 미군정과 대한민국으로 이관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이라는 흐름 속에서 이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한국 측의 입장을 근대적 법체계로만 제한하려는 흐름은 민족자결권이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에 기초하여 형성되었으며, 일본제국주의는 그것을 억압하였기에 합법성을 지닌 정치체제일 수 없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주장이다.

3. 한국의 경제개발의 공로자는 일본인가 미국인가?

 이처럼 이대근은 한국 경제사의 흐름을 귀속재산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의 형성과 처리라는 맥락에서 살펴본다. 그의 주장에는 분명 동의할만한 지점도 많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은 아마도 이대근을 '친일파'라 규정하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대근이 끝내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를 긍정하는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전전의 식민지기 경제개발과 전후의 고도성장 모두 일본과의 관계로 환원하여 설명함으로써 미국의 기여를 상당히 낮게 평가하고 있다. 전후 미국식 질서로의 편입을 부정적으로 보고 혁명 혹은 세계체제로부터의 이탈(=생산관계의 변화)을 지향하던 "혁명적" 경제사학자는 생산력주의로 돌아선 뒤에도 여전히 미국식 질서로의 편입을 온전히 긍정하지 못하고 식민지기에 대한 긍정으로 넘어가버렸다.

 이 지점에서 앞서 우리가 논의를 시작했던 민족공동체의 정신세계에서의 헤게모니에 관한 논의로 잠시 돌아가보자면, 한국의 현대사는 미국과 일본의 강한 영향력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한국인들은 이 둘을 부정하고 심지어는 증오하기까지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국가를 '근대' 그 자체로 보고 숭배하고 무조건적인 추종을 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정체성에는 일본과 미국의 영향이 마치 흉터처럼 얼룩덜룩하게 새겨져 있다. 한국인이 자신의 역사를 회고할 때, 특히나 자신의 성공의 기원을 탐색할 때 일본과 미국 그 둘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하는 점은 그가 지금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어떠한 대안을 내세우고 있는가와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식민지기 경제개발의 중요성은 이렇듯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재평가되는 것이다.

이대근은 세계자본주의가 미국 중심의 패권적 질서에서 복수의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리저널리즘'(regionalism)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본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미공동체,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한 유럽공동체, 그리고 동아시아의 한중일이 세계자본주의를 형성하는 세 가지 주요한 축이라는 게 이대근의 이해이다. 그는 나머지 두 지역공동체와 달리 동북아 한중일 삼국은 하나의 정치공동체의 형성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리저널리즘'의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조차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아세안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까지 포괄하는 경제권을 형성할 것인지, 아니면 한중일 간의 연합만을 추구할 것인지 등등의 문제에 대해서 논하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비(非)경제적 요소, 즉 민족주의, 국가주의 등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게 이대근의 진단이다. 삼국 간의 경제적 통합이나 연관성은 계속 커지는 것과 궤를 같이 하여 정치적 대립의 정도도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아 지역공동체의 형성을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미공동체와 유럽연합에 대항하려면 결국 중국과 일본 간의 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 중일 간의 우호적인 관계의 수립과 중국 내부의 지역분권화, 한반도 분단문제의 해결 등을 조건으로 할 때 비로소 한중일의 지역공동체가 수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역질서의 변동에서 중국과 일본이 가장 주요한 행위자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대근은 기존의 역사인식에서도 미국보다도 일본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보다 강조하는 듯하다. 한국의 적대적인 '반일 민족주의'의 역사적 근거를 앞서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한국이 일본을 적대시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한 식의 반일민족주의는 동북아의 지역공동체의 형성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렇다면 일본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은 왜 없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대근이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인 이상 자국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에 더 직접적으로 칼을 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대근은 이처럼 한중일 간의 지역적 공동체의 수립이라는 그의 현실인식에 맞춰 일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한국의 여러 성취들을 일본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 귀속재산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일본과 미국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이라는 국가의 역사를 귀속재산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면서 그는 미국의 영향력을 일부러 도외시하고 일본의 영향력만을 거의 일방적으로 강조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귀속재산 연구도 완전하지 못하고 혼란을 겪게 된다. 한국 경제성장의 역사적 기원은 일본인가? 미국인가? 그의 귀속재산 연구와 1950년대 경제사 연구의 최종판이라 할 수 있는 <귀속재산 연구>는 곳곳에서 서로 모순되는 언술들이 나타난다. 이대근은 자신의 이런 모순을 "귀속재산 부문은 비록 해방 후 그 생산력 기반이 무척 파괴/훼손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규모 면에서나 생산력 수준에 있어, 그것이 계속 국유/국영체제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민영화되었거나 간에 한국경제를 이끌어갈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이대근, 2015 : 587)로 해소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연구서에는 귀속재산의 파괴와 유실을 무려 1, 2단계로 나눠서 파악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연구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엄청난 파괴가 있었으나, 그렇게 심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이대근, 2015 : 560)이라는 모순적인 결론을 내놓을 정도의 혼란에 빠져 있다. 그는 한국 고도성장의 역사적 기원을 식민지기로 보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미국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거나 긍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도출된 결론이라 보아야 할 듯하다.

그의 최종적인 결론은 앞서 본 과거의 입장과 완전히 상반된다. 한국경제성장의 기반을 미국식 세계질서로의 편입과 미국의 원조,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 '귀속재산' 간의 조합에서 찾던 다소 균형잡힌 시각에서 전쟁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존속된 귀속재산과 미국의 지원만큼이나 중요했던 "청구권 자금" 간의 결합에서 찾는 일본편향적인 시각으로 완전히 전환하게 되었다.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을지언정 미국식 패턴을 중시했던 미국편향적 시각에서 미국식 패턴의 도입을 가능하게 했던 일본식 패턴의 유산을 강조하던 균형적 시각을 거쳐, 미국식 패턴보다도 일본식 패턴의 존속과 그것을 기능하게 했던 박정희 시기의 청구권자금의 유입을 강조하는 일본편향적 시각으로의 완전한 전환이 이뤄졌다. 이러한 전환을 가능케 하였던 그의 현실적/정치적 인식의 변화 또한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한다. 그가 상정하는 새로운 지역질서에는 미국이 배제되어 있다.

4. 이대근의 연구를 넘어 새로운 역사관으로

 앞서 지적하였듯이 이대근의 주장을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고 매도하는 것으로 넘겨버릴 수는 없다. 이대근이 보여주는 '모순'을 한국의 진보진영 또한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예컨대 귀속재산 연구에서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김기원의 <미군정기의 경제구조>는 어떤가? 김기원은 식민지기 경제개발의 성취가 대단하다는 점을 전제로 그것이 현대 한국 재벌의 모태가 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해방 직후의 노동자 계급의 공장경영과 조직화를 미군정이 폭압적으로 억압하면서 그 이후의 한국 경제의 패턴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이 지점에서 김기원은 과거의 이대근과 마찬가지로 식민지기 경제개발과 한국 현대의 재벌 문제를 부정적인 입장에서 통시적으로 연결시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공개적인 언술에서 식민지 경제개발의 성취는 곧잘 무시된다. 김기원 또한 그가 자신의 학위논문을 적었던 1980년대라는 시대적 조건 때문이겠지만 식민지기 경제상황에 대한 서술을 대부분 수탈, 착취, 반봉건적 토지소유 등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식민지반봉건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있어 일본과 미국의 영향력은 중국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중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버릴 것인가? 그에 따라 그 사람의, 더 나아가 그 민족공동체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근대화에 실패하였다고 하여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입장은 궁극적으로 중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연결되고, 반대로 식민지기와 권위주의 체제 및 한국의 보수세력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일본과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연결되고는 한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들이 하나의 역사관의 형태를 지녀 특정한 정치집단을 뒷받침하는 세계관으로 확장될 때, 더 나아가서 한 국가공동체의 정신세계를 구성하게 될 때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의 현실을 규정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된다.

지금까지 이대근이라는 노(老)경제사학자의 연구를 중심으로 하여 역사관과 세계관의 중요함에 대해 논의를 해보았다. 이대근의 입장에 동조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을 수 있다. 귀속재산을 중심으로 하여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를 다룬 그의 주장은 대체로 동의할만한 것이다. 이대근의 주장이 옳았기에 한국이 일본에게 청구권 행사를 통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문재인 정부 때도 실패하였고 윤석열에 와서는 아예 식민지배의 '도덕적' 책임마저 부정해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윤석열 정부에 비판적인 인식을 지닌 이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단순히 윤석열을, 이대근을, 한국의 보수우파들을 "친일파"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이 사태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역사관이 지니는 실질적인 효과를 고려하면서 어떠한 세계관으로 주변국과의 미래를 그려낼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로 글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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