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 전문가 장부승 일본 간사이외대 교수
“트럼프 입만 보는 외교로는 일본 못 이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19-08-21 10:00:02
● 장기전 되면 작은 나라 한국 불리
● ‘한국에 1차 책임’ 이구동성 日 언론
● 용기도 힘도 없으면 일본 이기지 못한다
● 아베 총리 개인 문제로 보면 안 돼
● 경제 조치 아닌 군사안보 조치
[홍중식 기자]한일 갈등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모든 사회현상이 그렇지만 국제정치라는 현실을 제대로 해석하고 바라보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사고의 틀이 요구된다. 숨 가쁜 상황일수록 긴 호흡으로 주변 환경을 보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하다.
국제관계 전문가 장부승 박사는 15년간 외교관(2000~2015) 생활을 했고, 2014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미국 랜드(RAND) 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일본 오사카 간사이외국어대 교수로 있다.
그는 일본의 이번 수출 규제를 경제 보복 차원이 아니라 “한미일 안보 공조 체제에서 한국을 내치려 하는 정치적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일관계를 단지 양자관계만으로 보면 안 된다. 거대한 국제 질서의 역학관계를 토대로 봐야 한다”고 했다. 방학을 맞아 한국에 머물고 있는 그를 8월 8일 서울에서 만났다.
-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 생각을 아는 게 급선무인 것 같다. 일본 언론이 이번 사태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한국 일본 여론 간 온도차가 크다. 일본 언론계 양대 산맥이라고 할 아사히신문과 요미우리신문은 각각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입장에서 일본 여론을 주도한다. 걱정되는 것은 요미우리, 아사히, 주니치/도쿄, 마이니치, 닛케이, 산케이를 6대 일간지라고 할 때 각자 성향에 따라 일본 정부 조치를 비판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하지만 일차 책임은 한국에 있다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거다.
일본은 합법적 공산당이 존재할 만큼 이념적 스펙트럼 폭이 넓은 나라다. 외교는 물론 어떤 정책 사안에 대해 좌우 언론이 이구동성인 경우는 드물다. 더구나 사운(社運)을 걸다시피 할 정도로 아베 총리에 비판적인 아사히신문마저 ‘징용 문제만큼은 한국 대법원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 꼬인 데는 문재인 대통령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더니 일본 기사 스크랩 파일을 펼쳐 보였다.
日, 이구동성 한국 비판 드문 일- 대표적인 기사들을 소개하면.
“발행부수 900만 부로 1위인 요미우리의 8월 3일자 사설은 이번 일을 보는 중도보수 일본인들의 생각을 잘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수출 관리가 여러 면에서 불충분했고 신뢰관계도 붕괴됐다. 이번 조치는 수출 제한이 아니라 일본의 수출관리체제의 변화로, 한국 측으로서는 사무(행정) 부담이 늘어날 수 있지만 한국에만 적용되는 조치가 아니다. 만약 한국이 다시 화이트리스트(수출우대)에 포함되기를 원한다면 수출 관리를 잘하면 된다’라는 주장이다.”
- 일본 기업 입장은 어떤가.
“아직은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대다수다. 내각에서 수출 규제조치 결정을 한 다음 날인 8월 3일자 아사히신문에는 대상 품목인 불화수소와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감광액) 등 반도체 소재를 생산하는 회사 관계자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 스미토모화학 관계자는 해당 기사에서 ‘이번 규제 품목은 생산품의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미칠 영향은 크게 없다’고 전한다. 반도체 소재를 생산하는 세계적 기업인 신에쓰화학공업(信越化學工業) 관계자는 ‘전체 수출에서 한국 비중은 극히 일부여서 현재까지는 문제가 없다’면서도 제2차 조치가 발동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한국 측 고객사들과 긴밀히 연락 중’이라고 했다. 일본 기업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번 조치가 자유무역 질서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고 들었는데.
“일본에선 높다고 보긴 어렵다. 아사히신문조차 찬반양론으로 다루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8월 3일자를 보면, ‘누가 봐도 징용 문제 보복 아니냐? 정치 문제를 비즈니스에 관여시켜서는 안 된다’는 비판적 주장 옆에 똑같은 비중으로 ‘당연한 조치이고 조용히 진행시키면 된다. 일본 국내법상 수출관리운용 문제일 뿐이므로 한국이 관여할 바 아니다’라는 주장을 싣고 있다. 일본 내 좌파나 중도 진영 일부에서 ‘아무리 그래도 자유무역을 지켜야 한다.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처럼 하면 안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역시 ‘사태의 일차적인 잘못은 한국에 있다’고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아베 왜 이러나’ 아닌 ‘일본 왜 이러나’
[홍중식 기자]- 아베 총리가 노리는 건 뭔가.
“국제정치에서 지도자가 무슨 생각과 의도를 갖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아베 총리 개인 의도로 보는 건 단편적 인식이다. 한일관계는 이 정부 들어 갑자기 나빠진 게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해 아키히토 일왕에게 사과를 촉구한 것부터 관계 악화의 씨앗이라고 봐야 한다. 당시 이 대통령 발언에 대해 일본인 대다수는 아키히토 일왕이 전쟁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국민 통합과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자하고 착한 할아버지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갑자기 옆 나라 대통령이 오래전에 사과하라니까 진보 보수 막론하고 ‘그건 아닌데’ 하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장 교수는 “기름을 부은 건 박근혜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에 오른 일”이라며 말을 이었다.
“미국에는 물론이고 일본에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가져다 줬다. 상당수 일본인이 한국은 저런 독재자들과, 다시 말해 선거도 제대로 안 하는 지도자들과 같이 갈 수도 있는 나라구나 하는 인식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더구나 독재자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다른 나라 독재자들과 함께 서 있다니. 그 상징성도 컸다.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이렇게 지난 정권을 거치면서 차곡차곡 쌓여 현 정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서 위안부 합의 파기나 징용 배상 판결과 그 이후 대응이 결정적 방아쇠가 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베의 속뜻은 뭔가’ 식의 질문이나 ‘노(NO) 아베’ 같은 구호는 국제정치를 지극히 국내정치적 시각, 소위 개인 차원의 레벨 1에서만 보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레벨 2, 국제체제 차원의 레벨 3도 같이 봐야 한다. 이 점에서 ‘아베 왜 이러나’를 묻지 말고 ’일본 왜 이러나’로 바꿔 물어야 한다.”
- 그렇다면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고 본다는 건데.
“아베 총리 임기가 2년 정도(2021년 9월 말) 남았는데 차기에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호전되기 쉽지 않으리라 본다. 7일자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집권당 2인자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이 한국에서 온 방일의원단과의 만남을 회피한 후에 ‘여기서 타협하면 나중에 또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의 말을 곱씹어보면, ‘한국이 같은 문제를 계속 들고나온다. 이건 단순히 돈이나 일시적 타협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품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일본은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 돈이나 일시적 타협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일관계를 뿌리에서부터 재구성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말이라 생각한다.”
-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닌가(웃음).
“현재를 제대로 보려면 과거의 연원을 살펴야 한다는 말은 여기에도 해당된다. 한일관계를 한일 양자관계로만 보면 안 된다. 항상 미국과의 관계, 국제정치의 구조라고 하는 틀 속에서 통으로 봐야 한다.”
그의 설명은 1965년 청구권협정과 함께 이뤄진 한일수교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미일 구도에서 한국 내치겠다는 의도“한일수교는 미국 냉전 전략의 일환이었다. 소련을 방어할 최전선인 한국 경제를 부흥시킬 투자 최적임자는 일본밖에 없음을 미국은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을 민주주의국가로 발전시켜 강하게 만들면 일본도 이득이고 미국도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한미일 안보 틀은 이렇게 한미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냉전이 끝나면서 ‘안보동맹’이란 가치가 퇴색하자 미국과 일본은 ‘가치동맹’이라는 새로운 구호를 만들어 한국과 일본을 묶는 전략을 짠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만든 오부치 총리는 자민당 보수 본류의 적자(嫡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인데 민주투사 김대중을 극진히 환대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러시아를 염두에 두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강조했겠지만, 일본 전략가들은 중국은 물론 미국에도 휘둘리지 않는 아시아의 축을 만들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 한일관계는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2009년에 전후(戰後) 일본 정치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다. 야당인 민주당이 단독 집권한 것이다. 이때 총리가 한국에도 자주 오고 무릎 꿇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준 대표적 친한파 하토야마 유키오다. 우리는 하토야마의 손조차 제대로 잡지 않았다.
일본 입장에서는 지난 20여 년간 한국을 향해 ‘가치동맹’이나 ‘아시아 동맹’같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새로운 협력 틀을 구축하려 시도해봤지만 다 잘 안 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 냉전이 끝나고 팍스 아메리카나로 불리는 미국 1극 체제가 다져지나 했더니 지금은 미·중 갈등이라는 ‘신냉전’ 시대다. 국제 질서가 다시 요동치는 형국이다.
“모두 알다시피 계기는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다. 지난해 기준 중국의 명목 GDP(국내총생산)가 미국의 3분의 2까지 따라왔다. 구매력으로 따지면 이미 미국을 넘어섰다. 향후 10년간 연평균 성장률을 대략 중국 5%, 미국 2%로 예상한다면 2030년을 전후해 명목 GDP 기준으로 중국이 미국을 능가할 것이다.
미국은 19세기말 이후 자국보다 경제 규모가 큰 나라를 상대해본 적이 없다. 과거 독일이나 일본은 기초 체력이나 경제 규모 면에서 상대가 안 됐다. 인구도 압도적으로 많고 경제 규모까지 더 큰 나라(중국)의 등장은 미국인들에게 지난 120년 역사를 통틀어 초유의 사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 외교 전략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미국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작아지는 상황에서 중국 하나 상대하기도 버거운데 왜 잘 먹고 잘사는 아시아 유럽까지 지켜주느냐, 이것이 지금 미국인들의 불만이다.
트럼프는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걸고 일본, 인도, 호주와 함께 중국 견제 망을 짜고 있다. 일본 전략가들의 머리도 복잡하다. 이런 미국의 변화를 세밀하게 읽어가며 대응책을 짜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요동치는 세계 질서 속 일본의 대전략
6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 이 자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 세 번째)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 세 번째)은 ‘무역전쟁 휴전’에 합의했지만 양국의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AP=뉴시스]- 일본의 대응은 뭔가.
“한마디로 미·중 양다리 외교, 좋게 말해서 ‘유연한 외교’를 지향하고 있다. 중국은 일본에도 가장 큰 도전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오로지 미일동맹만 염두에 두고 트럼프 앞에서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행동한다고 보는 것은 ‘겉’만 보는 거다.
일본은 중국과도 친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수치가 직접투자다. 중국의 대일본 직접투자는 2015년 이후 증가세로 돌아섰다. 반면 한국에 대한 투자는 2015년 이후 감소세다. 아직까지 절대 액수로 치면 한국 투자(2017년 6억6000만 달러)가 일본 투자(4억4000만 달러)보다 많지만 변화 추이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15년만 해도 각각 13억2000만 달러, 2억4000만 달러였다.
일본은 중국이 안보 측면에서는 위협이고 도전이지만 경제 측면에서는 협력 파트너라는 점을 동시에 보고 있다.”
- 그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당연하다. 세계 정치경제의 구조 자체가 요동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어느 한쪽을 100% 적으로 돌리거나 100% 친구로만 보는 경직된 사고로는 작금의 어려운 시대를 헤쳐나가기 힘들다. 일본은 미국에도 이중적이다. 돈만 아는 트럼프 대통령이 동북아에서 완전히 발을 빼는 상황까지 대비하고 있다. 미국 없이 중국과 맞대결할 경우를 대비해 물리적, 법적 대응 기반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미국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도 경계하고 있다. 트럼프 요구를 무조건 다 들어줘야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란 호르무즈 해협에 자위대 함선을 보내달라는 미국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이란과 사이가 좋다. 원유 수입도 많이 해왔다. 그런데 미국 때문에 이란과 전쟁을 한다? ‘노(NO)! 미국의 용병이 되지 않겠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다.
지금 일본은 미·중 갈등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숨 쉴 공간, 자율성 확보를 가장 중요한 외교 전략으로 보고 있다. 중국과도 척지지 않고 미국에도 무조건 ‘예스’가 아니라 지나치다고 생각되면 정중히 ‘노’를 외치겠다는 전략이다. 사실, 일본의 군비 팽창과 해외 파병 확대를 열렬히 원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자위대가 자신들의 충직한 대리인이 돼 미군 역할을 나눠 맡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질문할 틈도 없이 속사포처럼 말을 빠르게 쏟아내던 그에게 이 대목에서 비집고 들어갔다.
- 일본이 군국주의 부활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헌법은 왜 바꾸나.
그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군비 팽창은 일본보다 중국이 더 걱정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8년 10월 14일 일본 사이타마현 육상자위대 아사카 훈련장에서 열린 자위대 사열식에서 자위대의 존재를 헌법에 명시하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2017년 5월 아베 총리가 바꾼 헌법개정안은 기존 자민당안과 다르다. 기존의 헌법 9조 1항, 2항은 유지한 채 자위대를 군대로 명기하는 3항을 추가한 것뿐이다. 현재 자위대가 사실상 군대 역할을 하고 있는데 기존 헌법 9조에 따르면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위헌이라는 결론밖에 안 나오니 그걸 해소한 것이다.
자위대 해외 파병은 사실 미국이 오랫동안 일본에 요구해온 것이다. 유엔 헌장상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집단적 자위권이 허용되니 일본도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라는 것이고 일본은 오랫동안 헌법 9조를 내세우면서 이를 거부해왔다. 그런 상황이 2015년 안보법제 개편과 함께 바뀐 것이다. 다만, 새 안보법제를 읽어 보면 집단적 자위권 사용 조건이 매우 복잡하고 애매모호하게 돼 있다. 명확하게 해놓으면 미국이 함께 나가 싸우자고 할 때마다 따라 나가야 할 것 아닌가? 문은 열어놓되 조건은 두루뭉술하게 해둠으로써 자율성을 확보한 것이다.
한국 일각에서는 일본이 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가능국가로 만들어 한반도를 다시 침공할 것처럼 주장하는데 정말 현대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낡아빠진 상상력이다. 일본이 그렇게 전쟁이 하고 싶어 혈안이 돼 있는 거라면 왜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에 자위대를 보내 달라는데도 거부하겠나.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면 미국이나 중국이 가만있겠나. 이 대목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 뭔가.
“자꾸 일본이 군사대국화한다고 지적하는데 일본 국방비는 우리랑 엇비슷하다. 반면 중국 국방 예산은 일본의 5배가 넘는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지난해 군사비 지출이 일본이 466억 달러로 9위, 우리가 431억 달러로 10위다. 중국은 2500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2위이며 일본의 5배가 넘는다.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일본의 군비 지출 증가율은 연평균 0.8%였다. 우리는 연평균 4.4%(2010~2017년)였다. 중국은 7%, 8%씩 늘었다. 일본의 군비 팽창은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중국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가? 정상적 군사전략가라면 일본과 중국 중 어느 나라가 더 큰 군사 위협인지 자명한 것 아닌가.”
- 다시 한일관계로 돌아오자. 이번 조치가 일본의 미·중 양다리 외교와 무슨 관계가 있나.
“현재 한일 갈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본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 뭔지, 거기서 한국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했지만 일본 지도자들은 지난 20여 년간 한국과 새로운 협력 틀을 모색해보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고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일본의 외교관, 지식인, 언론인들을 만나면 ‘한국과는 뭘 해도 안 된다, 새로운 협력 틀을 만들 수 없다, 우리도 지쳤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이번 수출 규제는 이쯤에서 한국에 부여해온 특수 지위를 철회하고 한국을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 중간에 있는 국가 정도로 대우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한 것이라 본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의 조치가 구조적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큰 틀에서 종합적 이익을 판단해 대응해야 한다.”
- 일본으로서는 여러 조치가 있을 텐데 왜 수출 규제를 택했을까.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반 소지를 피하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수출 금지는 아닌데 심사권을 확보하는 거니까 자기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한 것이다. 2015년 외교안보법제를 통과시킬 때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지만 언제 어떻게 행사할지는 자신들이 정한다는 식과 똑같다. 수출 규제 심사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우리는 전혀 모르지 않는가.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에게 시그널을 보내 불안하게 만들겠다는 것. 그러면서 절대로 공식적으로 징용 문제 보복이라는 이야기는 안 할 것이다. 수출관리체제 운용상의 문제이고 국내법에 관한 문제라는 입장에서 한발도 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중국도 사드 때 그랬지만 안보와 경제를 링크시킨다고 절대 이야기 안 한다.”
- 수출을 금지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과도한 공포심을 갖는 것 아닌가.
”화이트리스트에 넣었다가 빼는 경우는 별로 없다. 거듭 말하지만 단순히 수출관리 문제가 아니라 큰 틀의 안보 구조에서 우리를 밖으로 밀어내겠다는, 즉 경제 위협이 아니라 안보 위협으로 봐야 한다. 일본이 당장 대규모 수출금지를 단행하면 경제적으로 문제가 커질 것 아닌가. 자기들도 피해를 볼 것이고 다른 나라도 비판의 목소리를 올릴 것이고. 다목적 측면에서 나온 조치다.”
- 이미 싸움은 벌어졌다. 어떤 방책이 있을까.
“몇 가지 안을 곰곰이 따져보자. 우선 WTO에 제소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더욱이 미국이 WTO체제 자체를 아예 깨부수려는 상황이란 것도 우리에겐 불리하다. 강제력 있는 결정을 내리는 최종심 역할을 하는 상소위원 정족수 7명 중 미국이 신규 위원 임명을 보이콧해 현재 남아 있는 사람이 세 명뿐이다. 이 중 두 명도 연말에 임기가 끝난다. 사건 심리를 위한 최소 정족수가 세 명인데 연말부터는 심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대선에 맞춰 WTO 탈퇴를 선언할 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WTO 자체가 이처럼 붕괴 위기로 내몰리고 있는데 무조건 ‘제소’만을 외쳐서는 여론전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자는 주장도 있다.
“안보리는 과거 방대한 식민지를 운영했던 구 제국주의국가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다. 그들은 식민지 문제에 대해 불법성 인정은커녕 사과도 한 적이 없다. 현재 한일 갈등의 핵심이 식민지 불법성 문제인데, 이 문제를 안보리에 들고 가서 강대국들을 설득하려 하면 별 호응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한일 양자 협상으로 풀어야 하나.
“일본은 돈을 더 나눠 내는 정도로 타협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협상이 재개된다면 아마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해석이 뭐냐고 물어올 것이다. 만약 대통령이 종전 입장대로 ‘대법원 판결 그대로’라고 하면 일본은 더는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타이밍을 놓쳤다- 그러면 어떤 대응이 남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저쪽이 하는 대로 우리도 똑같이 하는 것이다. 잘못된 대응은 아니다. 하지만 장기화되면 약자에게 불리하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소재) 안 팔면 우리도 (반도체) 안 팔면 되지 하는데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동북아 산업 생산의 분업 구조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다. 하나의 제품 생산 공정이 여러 나라에 쪼개져 있거나 동일한 소재가 여러 나라를 왔다 갔다 하며 가공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복잡한 산업 연관 고리 중 어느 한 부분이 충격을 받을 경우, 당구로 비유하자면, 스리쿠션, 포쿠션을 먹고 어떤 부메랑이 돼 우리에게 돌아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경제 규모가 작은 나라가 입는 체감 대미지(damage)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장기전 소모전으로 가면 작은 나라가 불리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 인간의 삶도 그렇지만, 국제관계란 게 상식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걸 설명하는 국제관계 이론이 ‘미친놈 전략’, 즉, 광인(狂人) 전략이다. 상대방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미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상대를 떨게 만드는 전략들이다. 싸움에서는 의미가 있다. 여당 내 일각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깨자, 일본을 관광 금지국으로 지정하자 식의 주장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도 광인전략의 일환이다. 단점은 리스크가 크고 단기 전술이란 점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타이밍이 안 좋아 보인다.”
- 타이밍?
“일본과 각을 세워 진검승부를 하려면 우선 후방, 즉 북한과의 관계를 사전에 잘 관리해놓았어야 했다. 우리 나름의 핵 억지력을 갖고 있다든지 북한과 협력을 제도화한다든지 등 조치가 필요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진전된 게 뭐가 있나? 북한은 사흘이 멀다 하고 미사일을 쏴대고 있다. 개성공단, 금강산도 꽁꽁 묶여 있다. 현 상황을 보고 있으면 문재인 대통령에게 안타깝고 답답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의 화살이 현 정부로 향했다.
“대통령이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해 ‘대법원 판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건 국가 지도자가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한다. 대법원 판결이 맞다는 신념이 있다면 과거 정부 해석은 지금 와서 보니 잘못됐고 게다가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으니 이참에 1965년 청구권 협정을 다시 해석하자고 먼저 제안했어야 했다. 대법관들이 대한민국 국가원수인가? 국가 지도자라면 정정당당해야 한다. 국민 전체를 대변하는 사람 아닌가. 외교정책을 대법원에 등 떠밀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
- 민족 감정을 부채질하는 것도 문제 아닌가.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가 민족 감정을 감안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 여론에는 분명 ‘감정’도 포함돼 있다. 5100만 국민이 다 이성적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문제는 그것만 내세우면 안 된다는 거다. 일본을 이길 구체적 방책을 내놓아야 한다. 위안부 합의 파기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은 파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다들 파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메시지가 모호하면 협상 테이블에서 우리 입장을 밀고 나갈 수가 있을까.”
- 지도자의 결기를 말하는데 결기의 바탕에는 ‘현실적인 힘’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구조적 측면의 고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싸움이 과연 다른 파급효과까지 고려한 싸움이냐고 묻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일본과 동해상에서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해군력이 일본 해상 자위대보다 압도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게 가능할까. 우리 국방예산(431억 달러)이 일본(466억 달러)의 92%에 달하는데 우리 해군은 왜 이리도 열세인가? 우리는 북한을 상대하는 한미일 안보 구조 안에서 육군을 맡는 분업 구조였기 때문이다. 해공군은 주일 미군기지와 미군 태평양사령부 중심이고. 이게 우리에게 놓인 제약인 동시에 안보 틀이다. 우리가 정말 일본과 한판 붙을 생각이라면 이런 구조적 제약부터 타파했어야 했다. 사실 지금 우리에게 더 큰 위협은 일본보다 미국이다.”
일본보다 미국이 더 큰 위협장 교수는 이 대목에서 “현 정부 외교는 트럼프 입만 바라보고 있다”며 다시 한숨을 토해냈다.
“트럼프가 세계무역체제를 박살 내고 여기저기서 다자안보체제를 흔들고 있다. 자기 이익만 극대화하려는 미국, 이것이 우리에게 닥친 근본적인 제약과 도전이다. 우리에게도 돈만 받아가고 미국 자동차 많이 사주면 된다는 식으로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외교는 생각이 너무 경직돼 있을 뿐 아니라 용기도 없어 보인다. 트럼프 입만 쳐다보고 있으면 한반도의 구조적 질곡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진보진영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욕하지만 그는 거제도수용소에 한국군 헌병대를 보내 강제로 반공포로를 석방시킨 사람이다. 당시 미국, 영국 등 유엔군 쪽 지도자들은 이승만의 행태에 분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승만은 오히려 한미안보동맹도 얻어냈다. 국가 지도자라면 그 정도 결기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미친 척하고 개성공단 금강산을 다 열든지, 아니면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유세 때 약속했던 대로 핵 잠수함을 만들든지. 근데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
트럼프는 계속 ‘내 허락 없이 남북관계 꼼짝 못한다. 한국은 우리한테 돈만 내’, 거칠게 말하면 이런 식 아닌가. 방위비를 6조 원 가까이 내라고 하는데 그럴 돈이면 차라리 우리가 핵 잠수함을 만들겠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 트럼프 입만 쳐다보고 남북관계는 한발도 전진하지 못한 채 미국의 청구서만 날아오고 있다.
최근 국회 운영위에서 정의용 안보실장, 노영민 비서실장이 한일 갈등과 관련해 “미국 중재 요구할 생각 없다”고 했는데 7월에 김현종 국가안보실2차장,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에 왜 보냈나. 미국 가봐야 별 도움 되는 이야기가 안 나오니까 이제야 ‘중재 요구할 생각 없다’고 하는 것 아닌가.”
그는 이 대목에서 “지금이야말로 외교의 유연성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이데올로기, 민족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이 지각 변동의 시대에 큰 위기를 맞는다. 우리로서는 일단 북한의 현실적 위협을 막아내는 게 안보의 최우선이다. 일본이 밉다, 밉다 해도 핵심적 국가 이익을 위해 단기적으로는 협조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대처해야 한다.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 버리는 것도 엄청난 용기다. 일본도 입장이 있는데 갑자기 무릎 꿇겠는가. 미국을 향해서도 우리 주관을 보여줘야 한다. 일본에 대한 증오심에 눈이 가려 큰 것을 못 보고 있다. 북한이 수소폭탄 100발 만들어도 미국이 가만있으라면 우리는 그저 가만있을 것인가? 북한은 지금 한미 양국을 다 시험하면서 한미 간 틈을 계속해서 벌리려 하고 있다.”
- 중국 러시아가 영공을 넘나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미일 구조 약화라는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중·러는 한미일 구조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하면 계속 단계를 높여가며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이번 것은 전투기 정도가 아니라 폭격기였다. 그것도 사전 계획하에 합동훈련을 한 것이다. 엄청난 안보위기였다. 그런데 위기를 느끼기는커녕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영공 침범 안 했다’면서 ‘영공’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마치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해줬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외교 안보를 개그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러시아는 독도 영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일고의 관심도 없다. 자신들의 영역 확장을 위해 한미일의 의지력을 테스트해볼 뿐이다. 러시아는 다른 나라를 상대로도 영공을 침범해놓고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강대국들은 원래 그렇게 안면몰수하고 나온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간 한미일 틀 안에서 미국, 일본만 상대하다 보니 폭격기와 미사일로 찍어 누르는 강대국의 노골적인 태도를 직접 겪어본 일이 별로 없다. 이제 미국의 고립주의가 더 강화되고 일본과도 그냥 일반적인 보통의 국가 관계로 전환돼 한미일 구조가 흔들흔들하면 그런 강대국의 노골적인 위협에 정면으로 맞서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이라도 더는 미국 눈치만 보지 말고 남북관계 개선을 독자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한다. 동시에 북한이 갖는 안보위협으로서의 현실 역시 그대로 인정하고 북한 도발 억지를 위한 독자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한미일 구조에 의존하는 게 싫다면 독자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북한도, 중국도, 러시아도, 미국도, 일본도 우리를 우습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홀로 설 수 있는가?
[홍중식 기자]그는 마지막으로 브레진스키의 말을 소개했다.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고 브레진스키 박사는 2017년 작고하기 전인 2012년 출간한 ‘전략적 비전(Strategic Vision)’이라는 저서에서 지정학적으로 위기에 처한 8개 국가 중 하나로 한국을 지목했다. 그러면서 향후 미국 국력 쇠퇴와 함께 한국은 고통스럽지만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라고 했다. 중국과 함께 갈 것인가(Going with China), 일본과 함께 갈 것인가(Going with Japan), 아니면 홀로 갈 것인가(Going alone).
지금 우리는 일본과 같이 가려 하나? 아니면 북한과 군사동맹국인 중국과 함께 갈 건가? 둘 다 아니라면 직면한 군사·정치 위기를 홀로 헤쳐나갈 준비와 각오가 돼 있는가?
물론 겁먹을 필요는 없다. “혼자 서야 한다면 혼자 선다(If we have to stand alone, we stand alone)”는 당당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 홀로 헤쳐나갈 힘과 전략적 유연성을 갖고 있는가? 이 중대한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신동아 2019년 9월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19-08-21 10:00:02
● 장기전 되면 작은 나라 한국 불리
● ‘한국에 1차 책임’ 이구동성 日 언론
● 용기도 힘도 없으면 일본 이기지 못한다
● 아베 총리 개인 문제로 보면 안 돼
● 경제 조치 아닌 군사안보 조치
[홍중식 기자]한일 갈등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모든 사회현상이 그렇지만 국제정치라는 현실을 제대로 해석하고 바라보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사고의 틀이 요구된다. 숨 가쁜 상황일수록 긴 호흡으로 주변 환경을 보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하다.
국제관계 전문가 장부승 박사는 15년간 외교관(2000~2015) 생활을 했고, 2014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미국 랜드(RAND) 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일본 오사카 간사이외국어대 교수로 있다.
그는 일본의 이번 수출 규제를 경제 보복 차원이 아니라 “한미일 안보 공조 체제에서 한국을 내치려 하는 정치적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일관계를 단지 양자관계만으로 보면 안 된다. 거대한 국제 질서의 역학관계를 토대로 봐야 한다”고 했다. 방학을 맞아 한국에 머물고 있는 그를 8월 8일 서울에서 만났다.
-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 생각을 아는 게 급선무인 것 같다. 일본 언론이 이번 사태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한국 일본 여론 간 온도차가 크다. 일본 언론계 양대 산맥이라고 할 아사히신문과 요미우리신문은 각각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입장에서 일본 여론을 주도한다. 걱정되는 것은 요미우리, 아사히, 주니치/도쿄, 마이니치, 닛케이, 산케이를 6대 일간지라고 할 때 각자 성향에 따라 일본 정부 조치를 비판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하지만 일차 책임은 한국에 있다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거다.
일본은 합법적 공산당이 존재할 만큼 이념적 스펙트럼 폭이 넓은 나라다. 외교는 물론 어떤 정책 사안에 대해 좌우 언론이 이구동성인 경우는 드물다. 더구나 사운(社運)을 걸다시피 할 정도로 아베 총리에 비판적인 아사히신문마저 ‘징용 문제만큼은 한국 대법원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 꼬인 데는 문재인 대통령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더니 일본 기사 스크랩 파일을 펼쳐 보였다.
日, 이구동성 한국 비판 드문 일- 대표적인 기사들을 소개하면.
“발행부수 900만 부로 1위인 요미우리의 8월 3일자 사설은 이번 일을 보는 중도보수 일본인들의 생각을 잘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수출 관리가 여러 면에서 불충분했고 신뢰관계도 붕괴됐다. 이번 조치는 수출 제한이 아니라 일본의 수출관리체제의 변화로, 한국 측으로서는 사무(행정) 부담이 늘어날 수 있지만 한국에만 적용되는 조치가 아니다. 만약 한국이 다시 화이트리스트(수출우대)에 포함되기를 원한다면 수출 관리를 잘하면 된다’라는 주장이다.”
- 일본 기업 입장은 어떤가.
“아직은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대다수다. 내각에서 수출 규제조치 결정을 한 다음 날인 8월 3일자 아사히신문에는 대상 품목인 불화수소와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감광액) 등 반도체 소재를 생산하는 회사 관계자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 스미토모화학 관계자는 해당 기사에서 ‘이번 규제 품목은 생산품의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미칠 영향은 크게 없다’고 전한다. 반도체 소재를 생산하는 세계적 기업인 신에쓰화학공업(信越化學工業) 관계자는 ‘전체 수출에서 한국 비중은 극히 일부여서 현재까지는 문제가 없다’면서도 제2차 조치가 발동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한국 측 고객사들과 긴밀히 연락 중’이라고 했다. 일본 기업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번 조치가 자유무역 질서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고 들었는데.
“일본에선 높다고 보긴 어렵다. 아사히신문조차 찬반양론으로 다루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8월 3일자를 보면, ‘누가 봐도 징용 문제 보복 아니냐? 정치 문제를 비즈니스에 관여시켜서는 안 된다’는 비판적 주장 옆에 똑같은 비중으로 ‘당연한 조치이고 조용히 진행시키면 된다. 일본 국내법상 수출관리운용 문제일 뿐이므로 한국이 관여할 바 아니다’라는 주장을 싣고 있다. 일본 내 좌파나 중도 진영 일부에서 ‘아무리 그래도 자유무역을 지켜야 한다.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처럼 하면 안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역시 ‘사태의 일차적인 잘못은 한국에 있다’고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아베 왜 이러나’ 아닌 ‘일본 왜 이러나’
[홍중식 기자]- 아베 총리가 노리는 건 뭔가.
“국제정치에서 지도자가 무슨 생각과 의도를 갖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아베 총리 개인 의도로 보는 건 단편적 인식이다. 한일관계는 이 정부 들어 갑자기 나빠진 게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해 아키히토 일왕에게 사과를 촉구한 것부터 관계 악화의 씨앗이라고 봐야 한다. 당시 이 대통령 발언에 대해 일본인 대다수는 아키히토 일왕이 전쟁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국민 통합과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자하고 착한 할아버지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갑자기 옆 나라 대통령이 오래전에 사과하라니까 진보 보수 막론하고 ‘그건 아닌데’ 하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장 교수는 “기름을 부은 건 박근혜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에 오른 일”이라며 말을 이었다.
“미국에는 물론이고 일본에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가져다 줬다. 상당수 일본인이 한국은 저런 독재자들과, 다시 말해 선거도 제대로 안 하는 지도자들과 같이 갈 수도 있는 나라구나 하는 인식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더구나 독재자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다른 나라 독재자들과 함께 서 있다니. 그 상징성도 컸다.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이렇게 지난 정권을 거치면서 차곡차곡 쌓여 현 정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서 위안부 합의 파기나 징용 배상 판결과 그 이후 대응이 결정적 방아쇠가 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베의 속뜻은 뭔가’ 식의 질문이나 ‘노(NO) 아베’ 같은 구호는 국제정치를 지극히 국내정치적 시각, 소위 개인 차원의 레벨 1에서만 보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레벨 2, 국제체제 차원의 레벨 3도 같이 봐야 한다. 이 점에서 ‘아베 왜 이러나’를 묻지 말고 ’일본 왜 이러나’로 바꿔 물어야 한다.”
- 그렇다면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고 본다는 건데.
“아베 총리 임기가 2년 정도(2021년 9월 말) 남았는데 차기에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호전되기 쉽지 않으리라 본다. 7일자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집권당 2인자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이 한국에서 온 방일의원단과의 만남을 회피한 후에 ‘여기서 타협하면 나중에 또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의 말을 곱씹어보면, ‘한국이 같은 문제를 계속 들고나온다. 이건 단순히 돈이나 일시적 타협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품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일본은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 돈이나 일시적 타협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일관계를 뿌리에서부터 재구성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말이라 생각한다.”
-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닌가(웃음).
“현재를 제대로 보려면 과거의 연원을 살펴야 한다는 말은 여기에도 해당된다. 한일관계를 한일 양자관계로만 보면 안 된다. 항상 미국과의 관계, 국제정치의 구조라고 하는 틀 속에서 통으로 봐야 한다.”
그의 설명은 1965년 청구권협정과 함께 이뤄진 한일수교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미일 구도에서 한국 내치겠다는 의도“한일수교는 미국 냉전 전략의 일환이었다. 소련을 방어할 최전선인 한국 경제를 부흥시킬 투자 최적임자는 일본밖에 없음을 미국은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을 민주주의국가로 발전시켜 강하게 만들면 일본도 이득이고 미국도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한미일 안보 틀은 이렇게 한미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냉전이 끝나면서 ‘안보동맹’이란 가치가 퇴색하자 미국과 일본은 ‘가치동맹’이라는 새로운 구호를 만들어 한국과 일본을 묶는 전략을 짠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만든 오부치 총리는 자민당 보수 본류의 적자(嫡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인데 민주투사 김대중을 극진히 환대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러시아를 염두에 두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강조했겠지만, 일본 전략가들은 중국은 물론 미국에도 휘둘리지 않는 아시아의 축을 만들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 한일관계는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2009년에 전후(戰後) 일본 정치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다. 야당인 민주당이 단독 집권한 것이다. 이때 총리가 한국에도 자주 오고 무릎 꿇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준 대표적 친한파 하토야마 유키오다. 우리는 하토야마의 손조차 제대로 잡지 않았다.
일본 입장에서는 지난 20여 년간 한국을 향해 ‘가치동맹’이나 ‘아시아 동맹’같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새로운 협력 틀을 구축하려 시도해봤지만 다 잘 안 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 냉전이 끝나고 팍스 아메리카나로 불리는 미국 1극 체제가 다져지나 했더니 지금은 미·중 갈등이라는 ‘신냉전’ 시대다. 국제 질서가 다시 요동치는 형국이다.
“모두 알다시피 계기는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다. 지난해 기준 중국의 명목 GDP(국내총생산)가 미국의 3분의 2까지 따라왔다. 구매력으로 따지면 이미 미국을 넘어섰다. 향후 10년간 연평균 성장률을 대략 중국 5%, 미국 2%로 예상한다면 2030년을 전후해 명목 GDP 기준으로 중국이 미국을 능가할 것이다.
미국은 19세기말 이후 자국보다 경제 규모가 큰 나라를 상대해본 적이 없다. 과거 독일이나 일본은 기초 체력이나 경제 규모 면에서 상대가 안 됐다. 인구도 압도적으로 많고 경제 규모까지 더 큰 나라(중국)의 등장은 미국인들에게 지난 120년 역사를 통틀어 초유의 사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 외교 전략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미국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작아지는 상황에서 중국 하나 상대하기도 버거운데 왜 잘 먹고 잘사는 아시아 유럽까지 지켜주느냐, 이것이 지금 미국인들의 불만이다.
트럼프는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걸고 일본, 인도, 호주와 함께 중국 견제 망을 짜고 있다. 일본 전략가들의 머리도 복잡하다. 이런 미국의 변화를 세밀하게 읽어가며 대응책을 짜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요동치는 세계 질서 속 일본의 대전략
6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 이 자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 세 번째)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 세 번째)은 ‘무역전쟁 휴전’에 합의했지만 양국의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AP=뉴시스]- 일본의 대응은 뭔가.
“한마디로 미·중 양다리 외교, 좋게 말해서 ‘유연한 외교’를 지향하고 있다. 중국은 일본에도 가장 큰 도전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오로지 미일동맹만 염두에 두고 트럼프 앞에서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행동한다고 보는 것은 ‘겉’만 보는 거다.
일본은 중국과도 친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수치가 직접투자다. 중국의 대일본 직접투자는 2015년 이후 증가세로 돌아섰다. 반면 한국에 대한 투자는 2015년 이후 감소세다. 아직까지 절대 액수로 치면 한국 투자(2017년 6억6000만 달러)가 일본 투자(4억4000만 달러)보다 많지만 변화 추이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15년만 해도 각각 13억2000만 달러, 2억4000만 달러였다.
일본은 중국이 안보 측면에서는 위협이고 도전이지만 경제 측면에서는 협력 파트너라는 점을 동시에 보고 있다.”
- 그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당연하다. 세계 정치경제의 구조 자체가 요동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어느 한쪽을 100% 적으로 돌리거나 100% 친구로만 보는 경직된 사고로는 작금의 어려운 시대를 헤쳐나가기 힘들다. 일본은 미국에도 이중적이다. 돈만 아는 트럼프 대통령이 동북아에서 완전히 발을 빼는 상황까지 대비하고 있다. 미국 없이 중국과 맞대결할 경우를 대비해 물리적, 법적 대응 기반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미국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도 경계하고 있다. 트럼프 요구를 무조건 다 들어줘야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란 호르무즈 해협에 자위대 함선을 보내달라는 미국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이란과 사이가 좋다. 원유 수입도 많이 해왔다. 그런데 미국 때문에 이란과 전쟁을 한다? ‘노(NO)! 미국의 용병이 되지 않겠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다.
지금 일본은 미·중 갈등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숨 쉴 공간, 자율성 확보를 가장 중요한 외교 전략으로 보고 있다. 중국과도 척지지 않고 미국에도 무조건 ‘예스’가 아니라 지나치다고 생각되면 정중히 ‘노’를 외치겠다는 전략이다. 사실, 일본의 군비 팽창과 해외 파병 확대를 열렬히 원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자위대가 자신들의 충직한 대리인이 돼 미군 역할을 나눠 맡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질문할 틈도 없이 속사포처럼 말을 빠르게 쏟아내던 그에게 이 대목에서 비집고 들어갔다.
- 일본이 군국주의 부활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헌법은 왜 바꾸나.
그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군비 팽창은 일본보다 중국이 더 걱정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8년 10월 14일 일본 사이타마현 육상자위대 아사카 훈련장에서 열린 자위대 사열식에서 자위대의 존재를 헌법에 명시하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2017년 5월 아베 총리가 바꾼 헌법개정안은 기존 자민당안과 다르다. 기존의 헌법 9조 1항, 2항은 유지한 채 자위대를 군대로 명기하는 3항을 추가한 것뿐이다. 현재 자위대가 사실상 군대 역할을 하고 있는데 기존 헌법 9조에 따르면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위헌이라는 결론밖에 안 나오니 그걸 해소한 것이다.
자위대 해외 파병은 사실 미국이 오랫동안 일본에 요구해온 것이다. 유엔 헌장상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집단적 자위권이 허용되니 일본도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라는 것이고 일본은 오랫동안 헌법 9조를 내세우면서 이를 거부해왔다. 그런 상황이 2015년 안보법제 개편과 함께 바뀐 것이다. 다만, 새 안보법제를 읽어 보면 집단적 자위권 사용 조건이 매우 복잡하고 애매모호하게 돼 있다. 명확하게 해놓으면 미국이 함께 나가 싸우자고 할 때마다 따라 나가야 할 것 아닌가? 문은 열어놓되 조건은 두루뭉술하게 해둠으로써 자율성을 확보한 것이다.
한국 일각에서는 일본이 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가능국가로 만들어 한반도를 다시 침공할 것처럼 주장하는데 정말 현대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낡아빠진 상상력이다. 일본이 그렇게 전쟁이 하고 싶어 혈안이 돼 있는 거라면 왜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에 자위대를 보내 달라는데도 거부하겠나.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면 미국이나 중국이 가만있겠나. 이 대목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 뭔가.
“자꾸 일본이 군사대국화한다고 지적하는데 일본 국방비는 우리랑 엇비슷하다. 반면 중국 국방 예산은 일본의 5배가 넘는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지난해 군사비 지출이 일본이 466억 달러로 9위, 우리가 431억 달러로 10위다. 중국은 2500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2위이며 일본의 5배가 넘는다.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일본의 군비 지출 증가율은 연평균 0.8%였다. 우리는 연평균 4.4%(2010~2017년)였다. 중국은 7%, 8%씩 늘었다. 일본의 군비 팽창은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중국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가? 정상적 군사전략가라면 일본과 중국 중 어느 나라가 더 큰 군사 위협인지 자명한 것 아닌가.”
- 다시 한일관계로 돌아오자. 이번 조치가 일본의 미·중 양다리 외교와 무슨 관계가 있나.
“현재 한일 갈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본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 뭔지, 거기서 한국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했지만 일본 지도자들은 지난 20여 년간 한국과 새로운 협력 틀을 모색해보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고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일본의 외교관, 지식인, 언론인들을 만나면 ‘한국과는 뭘 해도 안 된다, 새로운 협력 틀을 만들 수 없다, 우리도 지쳤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이번 수출 규제는 이쯤에서 한국에 부여해온 특수 지위를 철회하고 한국을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 중간에 있는 국가 정도로 대우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한 것이라 본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의 조치가 구조적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큰 틀에서 종합적 이익을 판단해 대응해야 한다.”
- 일본으로서는 여러 조치가 있을 텐데 왜 수출 규제를 택했을까.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반 소지를 피하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수출 금지는 아닌데 심사권을 확보하는 거니까 자기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한 것이다. 2015년 외교안보법제를 통과시킬 때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지만 언제 어떻게 행사할지는 자신들이 정한다는 식과 똑같다. 수출 규제 심사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우리는 전혀 모르지 않는가.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에게 시그널을 보내 불안하게 만들겠다는 것. 그러면서 절대로 공식적으로 징용 문제 보복이라는 이야기는 안 할 것이다. 수출관리체제 운용상의 문제이고 국내법에 관한 문제라는 입장에서 한발도 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중국도 사드 때 그랬지만 안보와 경제를 링크시킨다고 절대 이야기 안 한다.”
- 수출을 금지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과도한 공포심을 갖는 것 아닌가.
”화이트리스트에 넣었다가 빼는 경우는 별로 없다. 거듭 말하지만 단순히 수출관리 문제가 아니라 큰 틀의 안보 구조에서 우리를 밖으로 밀어내겠다는, 즉 경제 위협이 아니라 안보 위협으로 봐야 한다. 일본이 당장 대규모 수출금지를 단행하면 경제적으로 문제가 커질 것 아닌가. 자기들도 피해를 볼 것이고 다른 나라도 비판의 목소리를 올릴 것이고. 다목적 측면에서 나온 조치다.”
- 이미 싸움은 벌어졌다. 어떤 방책이 있을까.
“몇 가지 안을 곰곰이 따져보자. 우선 WTO에 제소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더욱이 미국이 WTO체제 자체를 아예 깨부수려는 상황이란 것도 우리에겐 불리하다. 강제력 있는 결정을 내리는 최종심 역할을 하는 상소위원 정족수 7명 중 미국이 신규 위원 임명을 보이콧해 현재 남아 있는 사람이 세 명뿐이다. 이 중 두 명도 연말에 임기가 끝난다. 사건 심리를 위한 최소 정족수가 세 명인데 연말부터는 심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대선에 맞춰 WTO 탈퇴를 선언할 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WTO 자체가 이처럼 붕괴 위기로 내몰리고 있는데 무조건 ‘제소’만을 외쳐서는 여론전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자는 주장도 있다.
“안보리는 과거 방대한 식민지를 운영했던 구 제국주의국가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다. 그들은 식민지 문제에 대해 불법성 인정은커녕 사과도 한 적이 없다. 현재 한일 갈등의 핵심이 식민지 불법성 문제인데, 이 문제를 안보리에 들고 가서 강대국들을 설득하려 하면 별 호응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한일 양자 협상으로 풀어야 하나.
“일본은 돈을 더 나눠 내는 정도로 타협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협상이 재개된다면 아마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해석이 뭐냐고 물어올 것이다. 만약 대통령이 종전 입장대로 ‘대법원 판결 그대로’라고 하면 일본은 더는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타이밍을 놓쳤다- 그러면 어떤 대응이 남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저쪽이 하는 대로 우리도 똑같이 하는 것이다. 잘못된 대응은 아니다. 하지만 장기화되면 약자에게 불리하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소재) 안 팔면 우리도 (반도체) 안 팔면 되지 하는데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동북아 산업 생산의 분업 구조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다. 하나의 제품 생산 공정이 여러 나라에 쪼개져 있거나 동일한 소재가 여러 나라를 왔다 갔다 하며 가공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복잡한 산업 연관 고리 중 어느 한 부분이 충격을 받을 경우, 당구로 비유하자면, 스리쿠션, 포쿠션을 먹고 어떤 부메랑이 돼 우리에게 돌아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경제 규모가 작은 나라가 입는 체감 대미지(damage)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장기전 소모전으로 가면 작은 나라가 불리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 인간의 삶도 그렇지만, 국제관계란 게 상식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걸 설명하는 국제관계 이론이 ‘미친놈 전략’, 즉, 광인(狂人) 전략이다. 상대방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미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상대를 떨게 만드는 전략들이다. 싸움에서는 의미가 있다. 여당 내 일각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깨자, 일본을 관광 금지국으로 지정하자 식의 주장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도 광인전략의 일환이다. 단점은 리스크가 크고 단기 전술이란 점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타이밍이 안 좋아 보인다.”
- 타이밍?
“일본과 각을 세워 진검승부를 하려면 우선 후방, 즉 북한과의 관계를 사전에 잘 관리해놓았어야 했다. 우리 나름의 핵 억지력을 갖고 있다든지 북한과 협력을 제도화한다든지 등 조치가 필요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진전된 게 뭐가 있나? 북한은 사흘이 멀다 하고 미사일을 쏴대고 있다. 개성공단, 금강산도 꽁꽁 묶여 있다. 현 상황을 보고 있으면 문재인 대통령에게 안타깝고 답답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의 화살이 현 정부로 향했다.
“대통령이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해 ‘대법원 판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건 국가 지도자가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한다. 대법원 판결이 맞다는 신념이 있다면 과거 정부 해석은 지금 와서 보니 잘못됐고 게다가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으니 이참에 1965년 청구권 협정을 다시 해석하자고 먼저 제안했어야 했다. 대법관들이 대한민국 국가원수인가? 국가 지도자라면 정정당당해야 한다. 국민 전체를 대변하는 사람 아닌가. 외교정책을 대법원에 등 떠밀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
- 민족 감정을 부채질하는 것도 문제 아닌가.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가 민족 감정을 감안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 여론에는 분명 ‘감정’도 포함돼 있다. 5100만 국민이 다 이성적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문제는 그것만 내세우면 안 된다는 거다. 일본을 이길 구체적 방책을 내놓아야 한다. 위안부 합의 파기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은 파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다들 파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메시지가 모호하면 협상 테이블에서 우리 입장을 밀고 나갈 수가 있을까.”
- 지도자의 결기를 말하는데 결기의 바탕에는 ‘현실적인 힘’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구조적 측면의 고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싸움이 과연 다른 파급효과까지 고려한 싸움이냐고 묻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일본과 동해상에서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해군력이 일본 해상 자위대보다 압도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게 가능할까. 우리 국방예산(431억 달러)이 일본(466억 달러)의 92%에 달하는데 우리 해군은 왜 이리도 열세인가? 우리는 북한을 상대하는 한미일 안보 구조 안에서 육군을 맡는 분업 구조였기 때문이다. 해공군은 주일 미군기지와 미군 태평양사령부 중심이고. 이게 우리에게 놓인 제약인 동시에 안보 틀이다. 우리가 정말 일본과 한판 붙을 생각이라면 이런 구조적 제약부터 타파했어야 했다. 사실 지금 우리에게 더 큰 위협은 일본보다 미국이다.”
일본보다 미국이 더 큰 위협장 교수는 이 대목에서 “현 정부 외교는 트럼프 입만 바라보고 있다”며 다시 한숨을 토해냈다.
“트럼프가 세계무역체제를 박살 내고 여기저기서 다자안보체제를 흔들고 있다. 자기 이익만 극대화하려는 미국, 이것이 우리에게 닥친 근본적인 제약과 도전이다. 우리에게도 돈만 받아가고 미국 자동차 많이 사주면 된다는 식으로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외교는 생각이 너무 경직돼 있을 뿐 아니라 용기도 없어 보인다. 트럼프 입만 쳐다보고 있으면 한반도의 구조적 질곡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진보진영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욕하지만 그는 거제도수용소에 한국군 헌병대를 보내 강제로 반공포로를 석방시킨 사람이다. 당시 미국, 영국 등 유엔군 쪽 지도자들은 이승만의 행태에 분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승만은 오히려 한미안보동맹도 얻어냈다. 국가 지도자라면 그 정도 결기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미친 척하고 개성공단 금강산을 다 열든지, 아니면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유세 때 약속했던 대로 핵 잠수함을 만들든지. 근데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
트럼프는 계속 ‘내 허락 없이 남북관계 꼼짝 못한다. 한국은 우리한테 돈만 내’, 거칠게 말하면 이런 식 아닌가. 방위비를 6조 원 가까이 내라고 하는데 그럴 돈이면 차라리 우리가 핵 잠수함을 만들겠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 트럼프 입만 쳐다보고 남북관계는 한발도 전진하지 못한 채 미국의 청구서만 날아오고 있다.
최근 국회 운영위에서 정의용 안보실장, 노영민 비서실장이 한일 갈등과 관련해 “미국 중재 요구할 생각 없다”고 했는데 7월에 김현종 국가안보실2차장,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에 왜 보냈나. 미국 가봐야 별 도움 되는 이야기가 안 나오니까 이제야 ‘중재 요구할 생각 없다’고 하는 것 아닌가.”
그는 이 대목에서 “지금이야말로 외교의 유연성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이데올로기, 민족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이 지각 변동의 시대에 큰 위기를 맞는다. 우리로서는 일단 북한의 현실적 위협을 막아내는 게 안보의 최우선이다. 일본이 밉다, 밉다 해도 핵심적 국가 이익을 위해 단기적으로는 협조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대처해야 한다.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 버리는 것도 엄청난 용기다. 일본도 입장이 있는데 갑자기 무릎 꿇겠는가. 미국을 향해서도 우리 주관을 보여줘야 한다. 일본에 대한 증오심에 눈이 가려 큰 것을 못 보고 있다. 북한이 수소폭탄 100발 만들어도 미국이 가만있으라면 우리는 그저 가만있을 것인가? 북한은 지금 한미 양국을 다 시험하면서 한미 간 틈을 계속해서 벌리려 하고 있다.”
- 중국 러시아가 영공을 넘나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미일 구조 약화라는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중·러는 한미일 구조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하면 계속 단계를 높여가며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이번 것은 전투기 정도가 아니라 폭격기였다. 그것도 사전 계획하에 합동훈련을 한 것이다. 엄청난 안보위기였다. 그런데 위기를 느끼기는커녕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영공 침범 안 했다’면서 ‘영공’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마치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해줬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외교 안보를 개그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러시아는 독도 영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일고의 관심도 없다. 자신들의 영역 확장을 위해 한미일의 의지력을 테스트해볼 뿐이다. 러시아는 다른 나라를 상대로도 영공을 침범해놓고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강대국들은 원래 그렇게 안면몰수하고 나온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간 한미일 틀 안에서 미국, 일본만 상대하다 보니 폭격기와 미사일로 찍어 누르는 강대국의 노골적인 태도를 직접 겪어본 일이 별로 없다. 이제 미국의 고립주의가 더 강화되고 일본과도 그냥 일반적인 보통의 국가 관계로 전환돼 한미일 구조가 흔들흔들하면 그런 강대국의 노골적인 위협에 정면으로 맞서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이라도 더는 미국 눈치만 보지 말고 남북관계 개선을 독자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한다. 동시에 북한이 갖는 안보위협으로서의 현실 역시 그대로 인정하고 북한 도발 억지를 위한 독자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한미일 구조에 의존하는 게 싫다면 독자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북한도, 중국도, 러시아도, 미국도, 일본도 우리를 우습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홀로 설 수 있는가?
[홍중식 기자]그는 마지막으로 브레진스키의 말을 소개했다.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고 브레진스키 박사는 2017년 작고하기 전인 2012년 출간한 ‘전략적 비전(Strategic Vision)’이라는 저서에서 지정학적으로 위기에 처한 8개 국가 중 하나로 한국을 지목했다. 그러면서 향후 미국 국력 쇠퇴와 함께 한국은 고통스럽지만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라고 했다. 중국과 함께 갈 것인가(Going with China), 일본과 함께 갈 것인가(Going with Japan), 아니면 홀로 갈 것인가(Going alone).
지금 우리는 일본과 같이 가려 하나? 아니면 북한과 군사동맹국인 중국과 함께 갈 건가? 둘 다 아니라면 직면한 군사·정치 위기를 홀로 헤쳐나갈 준비와 각오가 돼 있는가?
물론 겁먹을 필요는 없다. “혼자 서야 한다면 혼자 선다(If we have to stand alone, we stand alone)”는 당당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 홀로 헤쳐나갈 힘과 전략적 유연성을 갖고 있는가? 이 중대한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신동아 2019년 9월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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