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0

전국 시대의 일본 대표는 4명의 소년들! 「텐쇼 송 유럽 소년 사절」의 천국과 지옥 | 와카루 web

전국 시대의 일본 대표는 4명의 소년들! 「텐쇼 송 유럽 소년 사절」의 천국과 지옥 | 와카루 web


문화
2020.12.16
전국 시대의 일본 대표는 4명의 소년들! 천정견 유럽 소년 사절의 천국과 지옥

고바야시 세이





천정견 유럽 소년 사절이란?기독교에 매료되어
예수회와는
세미나리오의 하루 시간 일정
소년들이 본 천국
소년들에게 습격당한 절망과 지옥각각의 종말
믿음이 그들에게 가져온 것

필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죄송하지만, 네덜란드에 몇 년 생활했을 무렵에 기독교를 배우려고 한 적이 있다.
개종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기독교란 무엇인가? 라는 개인적인 의문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다.

거기까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땅에서의 생활 속에서 보이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뿌리깊었다. 사람들의 감각, 사고방식, 행동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라는 존재를 모르면 이 사람들의 사고회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흔들며 깨달은 것은 사실이다. 그 정도 종교라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 무엇이라면 인생까지 크게 좌우한다.

전국시대의 일본에는 그런 기독교의 가르침을 한 몸에 받고 키워졌고, 실제로 바티칸에까지 향한 네 명의 소년들이 있었다. 천정견 유럽 소년 사절(텐쇼켄 오쇼넨시세츠)이다.
그리스도인 다이묘와 선교사의 정치적 의지 하에서 가혹한 도유럽을 견디며 귀국 후에는 쇄국으로 돌진하는 일본 속에서 박해당하면서 끝까지 신앙에 충실했던 그들의 본 천국과 지옥은 어느 같은 것이었는가.

천정견 유럽 소년 사절이란?

오오무라 시가에서 나가사키 공항으로 건너가는 미노시마 오하시의 근원에 남만의 의상을 입은 덴쇼보 유럽 소년 사절 현창상이 있다.

이 동상의 모델이 된 천정견 유럽 소년 사절은 일본 최초의 유럽 방문단이다. 멤버는, 이토 맨쇼, 치요이시 미구엘, 나카우라 줄리안, 하라 마르티노, 파견 당시는 불과 13~14세, 모두 카톨릭의 세례를 받고, 아리마 하루신의 용서를 얻고, 히노에 성하에 세워진 세미나리오에서 배우는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왜냐하면 이 세미나리오는 그리스도인 다이묘라고 불리는 양가의 자식과 그 연인의 아이들 밖에 입학할 수 없었고, 당시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교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엘리트 소년들은 비행기도 없고, 선박 여행의 생존율은 50%라고도 불렸던 이 시대에 하루바루 바티칸을 목표로 무사히 도착할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을 둘러싸고, 실로 8년의 세월을 들여 귀국했다. 많은 왕족과 교류해, 로마 교황조차 속견한 그들은, 어떤 의미 이 시대의 영화의 정점을 다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귀국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도요토미의 세상이며, 키리시탄 박해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에 매료되어

원래 이 시도는 예수회의 존재 없이는 말할 수 없다. 일본에 기독교를 가져온 것은 예수회이다. 예수회는 그 무렵에는 아시아로 세력을 넓히고 있어 마카오와 인도의 고아를 장악한 이들이 다음으로 향한 것은 일본이었다.

1549년에 프란시스코 자비엘이 가고시마에 상륙.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들은 종교뿐만 아니라 무역이라는 ‘금이 되는 나무’도 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무렵의 일본은 전국 시대라고 불리는 전란의 세상이었다. 게다가 그 후, 오다 노부나가가 군림한 것도 컸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노부나가는, 남만풍의 의상을 입고, 헌상되는 드문 것을 사랑으로, 그것을 가져오는 기독교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색을 느끼고 김책에 시달리는 규슈 지방의 다이묘들이 그 반짝임에 매료되어 기독교로 개종해 나가는 것도 당연한 흐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미조성(현재의 나가사키현 오무라시)의 영주 오무라 준타다는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위해 요코세포를 개항한 후에 기독교로 개종. 또한 후쿠다와 나가사키를 개항해 예수회에 나가사키와 모기의 토지까지 기진하고 있다.

그런 그리스도인 다이묘에게 두껍게 보호된 예수회는 안토에 이어 히노에에 기독교 신부(사제)를 육성하기 위한 학교를 창설, 기독교를 보다 일본에 정착시키려고 했다. 세미나리오에서 배우는 아이들은, 그런 쌍방의 생각을 일신에 받는 희망의 별이며, 이상적인 샘플이었던 것이다.

예수회와는

예수회가 개설한 학교에는 10세부터 18세의 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리오 외에 분고의 부내에 개교된 콜레지오가 있었다. 코레지오는 세미나리오를 졸업하고, 또한 사제(신부)로서의 적성이 있다고 인정된 아이들이 진학할 수 있는 장소에서, 지금의 세상에서 말하면 대학과 같은 것일까.

소년들이 배우는 세미나리오라고 해도 그 내용은 전국시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다. 소년들은 라틴어로 대화를 하고, 기독교 교리, 음악을 배우고, 나중에 일본에서 포교를 하기 위해 서양뿐만 아니라 일본의 고전 등도 배웠다. 그 중에서도 예배에 빠뜨릴 수 없는 음악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플루트나 오르간 등을 연주해, 성가를 라틴어로 노래한다. 가끔 오다 노부나가도 방문해 소년들의 오르간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고도 한다.
세미나리오의 하루 시간 일정

2011년, 미나미시마바라시에서 약 400년 전의 수업을 재현하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 자료에 의한 전 기숙제 세미나리오의 하루는 이런 느낌이다.

4:30 기상, 수도자와 아침 기도 
5:00 다다미 청소(미사 성제, 규정기도)
6:00~7:30 학습
30~9:00 라틴어 암기. 교사 방문, 숙제, 설명을 받는다. 상급생은 하급생의 공부를 본다.
9:00~11:00 식사, 휴식
11:00~14:00 일본어, 습자, 작문 연습 
14:00~15:00 음악, 합창, 악기 연습
15:00~16:30 라틴어, 작문, 강의나 낭독
16:30~17:00 자유시간
17:00~19:00 저녁, 휴식
19:00~20:00 라틴어 복습
20:00 양심의 규명, 저녁기도, 취침

참고:전국시대의 르네상스~400년전의 수업을 재현~|미나미시마바라 뉴스

오로지 배우는 날들, 같은 곳인가. 이러한 교육을 최대 130명 정도의 소년들이 받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10년제의 코레지오에 이르러서는, 문법·수사학·변증론·산술·천문학·기하학·음악학의 7학과를 배웠다고 한다. 그 시대의 일본이라도, 코레지오의 학문 레벨은 유럽의 대학에 필적하는 내용이었다고 하기 때문에, 전국의 세상의 일본에 있어서 벌써 글로벌한 인재를 낳고 있던 것이 된다.
소년들이 본 천국

예수회 순찰사(포교처의 시찰을 하는 역할을 가진 선교사) 바리냐노는, 일본인의 지성의 높이, 고결함, 진지함에 감탄해, 이것을 기독교 본산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것을 하면 추가적인 포교의 지원, 즉 로마 교황 등으로부터 자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 것이다.

사절단 일행을 실은 배는 마카오, 말라카, 고아 등을 경유하면서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목표로 했다. 폭풍을 만날 뿐만 아니라 심한 배취와 이질, 식량의 부패나 해적에 습격당하는 등, 행정은 고난을 극복했지만 어떻게든 혼자 빠지지 않고 리스본에 도착. 나가사키를 떠나 실로 2년 6 개월 의 월일을 요했다고 한다.

기독교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축복을 준 동방의 세 박사의 에피소드가 있다. 흑발 소년들은 바로 그 동방의 세 박사처럼 각지에서 환대를 받았다. 리스본의 에볼라 대성당에서는 이토 만쇼와 치요이시 미구엘이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고, 이어지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펠리페 2세에 속견.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상륙했을 때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실로 300명의 병사를 호위로 맞이하게 향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사교계 데뷔도 하며 이토 만쇼가 피렌체 토스카나 대공비인 비앙카 공비와 춤을 추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치요이시 미구엘

이토 맨쇼

로마에 들어간 소년들은 무사히 바티칸에서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속견해 각각 오오토모 소네,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준타다의 명대로서 서장을 맡기고 역할을 한다. 당초 나카우라 줄리안은 병 때문에 고령이었던 교황에게 위험하다고 여겨져 결석이 되어 버렸지만, 그 후 무사히 속견을 허락받고 있다. 바로 아래에도 두지 않는 대우였던 것이다.

이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소년들을 속 견해 곧 고령을 위해 붕괴해 버리지만, 그 후 즉위한 시스트 5세의 대관식에도 그들은 참렬을 허용되고 있다. 이때 말에 걸린 4소년의 모습은 바티칸 도서관의 시스트 5세 방의 천장화에도 그려져 있어 어떻게 그들이 환대를 받고 명예를 받았는지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후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받아 귀족에게까지 늘어놓고 있다.

그런 많은 빛나는 공적을 가지고 1590년 6월 그들은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했다. 출발시는 13세 전후였던 그들도 8년의 세월을 거쳐 21~22세의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어 알 수 있는 지식과 자존심으로 얼마나 미래에 대한 꿈에 가슴을 부풀려 주었다 납치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리스도교박해'라는 지옥의 날들이었던 것이다.
소년들에게 습격당한 절망과 지옥

그들이 귀국한 일본은 노부나가의 시대가 끝나 도요토미의 세상이 되었다. 귀국의 이듬해에는 4명이 갖추어져, 바리냐노와 함께 쇼라쿠 제로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속견, 유럽으로부터 가져온 악기를 연주했다. 만쇼가 바이올린, 미구엘이 체인바로, 마르티노가 하프, 줄리안이 루트를 연주, 히데요시는 3번이나 앙코르를 할 정도로 매우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나카우라 줄리안

하라 마티노

그러나 기독교를 사법으로 혐오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미 그들의 귀국 3년 전에 반천련 추방령(배틀렌 가까이 시금치·국내 기독교 선교사를 국외로 추방하는 법령)을 발포하고 있었다. 게다가 비호자이기도 한 오토모 종린이나 오오무라 준타다 등의 기독교 다이묘도 벌써 죽고 있어, 기독교를 비호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국외로 도망칠 수밖에 없고, 배움의 장소는 박해되어 간다. 1597년 나가사키에서 일본 26성인으로 불리는 신자와 6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처형되어 1614년 에도 막부가 기독교 그 자체를 금지하는 금교령을 내고 교회의 파괴를 명령했다. 같은 해에는 세미나리오와 코레지오도 소멸한다. 게다가 1633년에는 제1차 사슬 국령이 내려져 그만큼 일본을 석권한 기독교는 아라시처럼 사라진다.

그런 가운데, 당연히 그들이 무사한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은 처형되고, 어떤 사람은 일본에서 박해되고,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버릴 때까지 따라잡아간다.
각각의 종말

여기서 4명이 마지막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자.

정사였던 이토만쇼는 3년간 마카오 유학을 거쳐 사제가 된다. 포교 활동을 계속하지만 박해 속에서 신체를 부수고, 43세로 사망. 교회에 묻히지만 금교령에 의한 교회의 파괴로 무덤도 망가졌다고 한다.

하라 마르티노는 한때 코레지오의 원장에게까지 추천될 만큼 신앙을 깊게 하고, 자신의 어학과 유럽에서 가져온 활판 인쇄기를 살려 양서의 번역자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1614년에 에도막부가 발포한 금교령에 의해 마카오에 추방, 15년 때를 보내 두 번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시신은 현재 마카오 관광지로 유명한 상파울루 교회에 발리냐노와 함께 장사되고 있다.

나카우라 줄리안은 1614년 금교령 때 추방령을 따르지 않고 일본에 잠복해 포교활동을 계속할 길을 택한다. 백성의 옷을 입고 밤에 신자의 집을 찾아 걸어 잠복하는 신자들을 계속 격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1632년 드디어 잡히고 투옥되어 기교를 당하는 것의 목을 세로로 흔들지 않고 일년 후인 1633년에 구멍을 뚫는 고문 끝에 64세의 생애에 막을 내린다. 처형장에서 줄리안은 관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 나는 로마를 본 나카우라 줄리안 신부이다!
"
사절단 중에서는 처음으로 기독교에서 칭호를 받은 순교자가 되었다.

또 하나의 정사였던 치요이시 미구엘은 유일하게 기교한 멤버이다. 1601년에 예수회를 탈퇴, 치요이시 키요사에몬이라는 속명으로 바꾸어, 사촌 형제인 오무라 요시아키에게 오무라 번사로 봉사했다. 왜 그가 기교로 달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설에는 유럽에서 본 노예제도에 대한 불신감이나 예수회에의 반발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희전에 "기독교포교는 이국의 침략수단, 기교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하며, 실제로 바티칸에까지 갔던 그가 기교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박해를 가속시켰다고 의 견해도 있는 것 같다. 그 후에도 기독교를 버린 배신자로 암살당할 것 같게 되고, 나아가 니치렌종으로 개종했을 것이 불교도로부터도 이단 취급되어 쫓기는 등, 처분자처럼 외로운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덧붙여 오랜 세월, 무덤의 장소조차 불명했지만, 2003년에 이키력(이키리)에서 그의 묘비라고 생각되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믿음이 그들에게 가져온 것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처음에는 빛나는 미래에 대한 지표로, 그 후는 생명까지 대체할 수밖에 없는 발판으로 완전히 다른 가치관으로 변화해 갔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를 유일무이로 키워지고 고도로 이끌린 소년들에게는 이 낙차는 바로 지옥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것일까.

어제까지 믿었던 것이 오늘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다. 여기까지 진역이 아니어도 이런 일은 불행히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그럴 때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만약 그들이 현대 사회처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비록 지옥에라도 구원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고 :
텐쇼 송 유럽 사절 마츠다 히로이치 저 (임천 서점)
세계사 속 텐쇼 센 유럽 사절 이카와 켄지 저 (요시카와 히로후미칸)


감수·이미지 제공: 오무라시 역사 자료관
고바야시 세이
인터넷 여명기부터 IT 업계에서 다양한 업무에 관여한다. 많은 WEB 미디어나 컨텐츠 제작을 경험한 것으로부터 라이터에. 현재는 오운드미디어의 SEO지원에 관련된 회사원이기도 하다. 과거에 네덜란드에 4년, 홍콩에 3년 반 생활한 경험이 있어, 호기심이 다할 일이 없는 것이 고민. 프라이빗에서는 평상시부터 기모노를 애용해, 평상시 기모노 연구가를 자칭. 일상에서 기모노를 입는 사람을 늘리고 싶은 야망을 몰래 SNS 등으로 발신 중. 맛있는 술에 눈이 없다. https://www.daily-kimono.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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