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경성모던
2023.04.14 03:00
입력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식민지 조선의 중산층과 부자에게 빵은 낯선 식료품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1927년 9월7일자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아침에는 밥 대신에 우유와 빵을 먹고 가겠다고 한다”는 사연과 함께 “식빵의 좋고 나쁜 것을 아는 법”을 다루었다. 조선의 라디오 방송과 신문과 잡지는 식빵·샌드위치·프렌치토스트·토스트샌드위치 만드는 법, 빵에 잼·버터·우유·커피·홍차 등을 곁들여 한 끼 제대로 먹는 법을 싣고 또 실었다. 이런 정보는 대도시 유복한 가정의 주부와 학생에게 쓸모 있는 정보였다. 부잣집 도련님은 ‘빵투정’도 했다. 반찬 시원찮은 밥상 앞에서 벌이는 밥투정과 매한가지다. 샐러드나 맛난 잼 또는 버터가 있어야 제대로였다. ‘조선의 수부(首府)’ 경성(京城), 일본말로 게이조(けいじょう) 한복판에서 커피와 토스트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때우는 회사원이 등장하는 소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오늘날의 서울 풍경 그대로다. 여기까지가 요식업, 영화, 연속극, 문학 등이 식민지 풍경을 ‘레트로 디자인’으로 축소/재현하는 원인이겠다. ‘경성’ ‘모던’을 내건 식당, 식민지 조선의 선남선녀가 ‘런치’를 먹겠다고 경성을 누비는 장면도 쓸 만해서 썼겠다. 하지만 빵과 샌드위치와 토스트샌드위치의 식도락을 즐긴 조선 사람은 극소수였다. 빵은 서민대중이 쉬이 누릴 수 있는 먹을거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에서 제빵제과자업을 독점한 일본인 종사자는 조선인을 허드렛일에만 부렸다. 기술 전수는 없었다. 오히려 만주로 간 조선인, 일본에 들어간 조선인에게 어쩌다 기술 습득의 기회가 생겼다. 이들이 해방 후 한국 제빵제과의 1세대를 이룬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제빵제과의 시작은 해방 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방은 제빵제과의 역사에서도 해방이다. 그러고 보니 ‘개벽’ 1925년 새해 특집의 한 꼭지가 가슴을 콕 찌른다. 나무꾼에서 식모, 지게꾼에서 공장 노동자에 이르는 노동자를 인터뷰한 이 꼭지에는 종로 네거리의 엿장수 최성오의 목소리 또한 실렸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더구나 우리 엿장수들은 그놈의 왜떡, 양과자 바람에 다 죽게 되었습니다. (중략) 음력정초면 강정 같은 것을 만들어도 엿을 사 가고, 세찬으로도 사 가며 (중략) 따라서 엿방도 많고, 엿장수도 많이 있더니 근래에 외국 과자, 떡 등속이 나온 뒤로는 아주 아니 팔립니다. (중략) 아무튼 왜떡, 양과자 등쌀에 못해먹겠습니다.”
‘못해먹겠다’로 다가 아니라, 엿장수는 제빵제과에 조선 기술자가 껴들 수 없어 울분이 끓었다. 그때 엿이 양과자를 만날 틈, 전통 한과가 새 기술과 경영의 측면에서 제빵제과를 감각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교실에서 제빵제과를 익힌 여학교 출신들은 산업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그간 만들고 먹어온 한과의 일상은 산업과 관계를 맺는 데서 식민지 시기 내내 실패했다. 일상에 잇닿은 산업은 ‘재조선(在朝鮮)’ 일본인이 장악하고, 허드렛일뿐인 조선인에겐 내일을 꿈꿀 여지가 없다. 제빵제과 역사에서도 식민지 시기는 껄끄럽다. 보이는 게 다인 ‘레트로 디자인 경성’에는 아무래도 신뢰가 안 간다.
식민지 조선의 중산층과 부자에게 빵은 낯선 식료품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1927년 9월7일자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아침에는 밥 대신에 우유와 빵을 먹고 가겠다고 한다”는 사연과 함께 “식빵의 좋고 나쁜 것을 아는 법”을 다루었다. 조선의 라디오 방송과 신문과 잡지는 식빵·샌드위치·프렌치토스트·토스트샌드위치 만드는 법, 빵에 잼·버터·우유·커피·홍차 등을 곁들여 한 끼 제대로 먹는 법을 싣고 또 실었다. 이런 정보는 대도시 유복한 가정의 주부와 학생에게 쓸모 있는 정보였다. 부잣집 도련님은 ‘빵투정’도 했다. 반찬 시원찮은 밥상 앞에서 벌이는 밥투정과 매한가지다. 샐러드나 맛난 잼 또는 버터가 있어야 제대로였다. ‘조선의 수부(首府)’ 경성(京城), 일본말로 게이조(けいじょう) 한복판에서 커피와 토스트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때우는 회사원이 등장하는 소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오늘날의 서울 풍경 그대로다. 여기까지가 요식업, 영화, 연속극, 문학 등이 식민지 풍경을 ‘레트로 디자인’으로 축소/재현하는 원인이겠다. ‘경성’ ‘모던’을 내건 식당, 식민지 조선의 선남선녀가 ‘런치’를 먹겠다고 경성을 누비는 장면도 쓸 만해서 썼겠다. 하지만 빵과 샌드위치와 토스트샌드위치의 식도락을 즐긴 조선 사람은 극소수였다. 빵은 서민대중이 쉬이 누릴 수 있는 먹을거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에서 제빵제과자업을 독점한 일본인 종사자는 조선인을 허드렛일에만 부렸다. 기술 전수는 없었다. 오히려 만주로 간 조선인, 일본에 들어간 조선인에게 어쩌다 기술 습득의 기회가 생겼다. 이들이 해방 후 한국 제빵제과의 1세대를 이룬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제빵제과의 시작은 해방 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방은 제빵제과의 역사에서도 해방이다. 그러고 보니 ‘개벽’ 1925년 새해 특집의 한 꼭지가 가슴을 콕 찌른다. 나무꾼에서 식모, 지게꾼에서 공장 노동자에 이르는 노동자를 인터뷰한 이 꼭지에는 종로 네거리의 엿장수 최성오의 목소리 또한 실렸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더구나 우리 엿장수들은 그놈의 왜떡, 양과자 바람에 다 죽게 되었습니다. (중략) 음력정초면 강정 같은 것을 만들어도 엿을 사 가고, 세찬으로도 사 가며 (중략) 따라서 엿방도 많고, 엿장수도 많이 있더니 근래에 외국 과자, 떡 등속이 나온 뒤로는 아주 아니 팔립니다. (중략) 아무튼 왜떡, 양과자 등쌀에 못해먹겠습니다.”
‘못해먹겠다’로 다가 아니라, 엿장수는 제빵제과에 조선 기술자가 껴들 수 없어 울분이 끓었다. 그때 엿이 양과자를 만날 틈, 전통 한과가 새 기술과 경영의 측면에서 제빵제과를 감각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교실에서 제빵제과를 익힌 여학교 출신들은 산업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그간 만들고 먹어온 한과의 일상은 산업과 관계를 맺는 데서 식민지 시기 내내 실패했다. 일상에 잇닿은 산업은 ‘재조선(在朝鮮)’ 일본인이 장악하고, 허드렛일뿐인 조선인에겐 내일을 꿈꿀 여지가 없다. 제빵제과 역사에서도 식민지 시기는 껄끄럽다. 보이는 게 다인 ‘레트로 디자인 경성’에는 아무래도 신뢰가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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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의 문헌 속 ‘밥상’피 묻은 빵과 저급한 사과를 잊지 않겠다“잊지 않겠습니다”라니. 사람이 잊지 않는다니. 영원하자던 사랑의 맹세마저 잊을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은 암송해서, 그려서, 써서, 녹음·녹화해서, 기록이라는 행위를 해왔다. 본격적인 기록물은 따로 문헌이라 일컬어 애지중지했고, 문헌을 문헌답게 쓰자고 문헌정보학이라는 학문의 체계까지 만들어냈다. 그러고도 잊는다. 잊기, 망각은 인간의 벽이 아니라 조건이다. 그래서 자꾸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아득인다. 별다른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호명하며 되풀이해 아득이는 수밖에는. 그래서 다시 냉정하게 아득인다.경향신문ㅣ2022. 12. 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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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의 문헌 속 ‘밥상’운수 좋은 날“선술집은 훈훈하고 땃땃하였다. 추어탕을 끓이는 솥뚜껑을 열 적마다 뭉게뭉게 떠오르는 흰 김, 석쇠에서 뻐지짓뻐지짓 구워지는 너비아니구이며 제육이며 간이며 콩팥이며 북어며 빈대떡…. 이 너저분하게 늘어놓인 안주 탁자, 김 첨지는 갑자기 속이 쓰려서 견딜 수 없었다.” 현진건(1900~1943) 소설 <운수 좋은 날>(1924)의 한 장면이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오늘따라 운수가 좋았다. 승객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덕분에 앓아누운 아내가 사흘을 조른 ‘설렁탕 국물’ 한 그릇을 마련하고도 남을 만큼 주머니가 찼다. 허기가 질 대로 진 김 첨지는 선술집에 들러 되는 대로 요깃거리를 골라잡았다. “배고픈 이는 우선 분량 많은 빈대떡 두 개를 쪼이기로 하고 추어탕을 한 그릇 청하였다.” 김 첨지는 허겁지겁 빈대떡을 먹어치운 뒤, 추어탕 한 그릇을 순식간에 물같이 들이켰다. 막걸리도 곁들였다. 석쇠에 얹어 구운 떡은 ‘쭝덕쭝덕 썰어’ 먹어 치웠다. 요기를 마친 김 첨지는 잊지 않고 설렁탕을 사 들고 귀가한다. 하나 아내는 주검인 채였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김 첨지는 오열하지만, 이제 설렁탕 따위 무슨 소용인가.경향신문ㅣ2022. 09. 30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하릴없는 한마디“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음식에 부친 프랑스 문인 브리야사바랭(1755~1826)이 남긴 한마디이다. 먹방 영상이 자주 써먹는 말이기도 하다. 이 한마디의 설득력은 예부터 대단했다.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1804~1872)는 이 문장을 철학서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독일어 문장 “Der Mensch ist, was er ißt”로 번안했다. 이는 다시 영어권으로 번져 영어 격언 “You are what you eat”를 낳았다. 곧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라는 뜻이다. 읽는 눈에도, 소리 내 읽는 입속에서도, 듣는 귓가에도 쟁쟁한 한마디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제대로 살피기가 그리 만만치는 않다. ‘먹는 게’ 곧 ‘너 또는 나’라니, 잘 먹으면 잘 산다는 말인가. ‘잘 먹다’는 또 무슨 뜻인가, ‘잘 산다’는 또 무슨 뜻인가 하는 물음까지 따라오면 다시 무슨 답을 준비해야 할까. 문득 떠오르는, 인당수에 몸 던지러 가는 날, 심청이 아버지 심학규에게 올린 이별의 아침상 장면이 이렇다. “심청이 들어와 눈물로 밥을 지어 아버지께 올리고, 상머리에 마주 앉아 아무쪼록 진지 많이 잡수시게 하느라고 자반도 떼어 입에 넣어 드리고 김쌈도 싸서 수저에 놓으며, ‘진지를 많이 잡수셔요.’ 심 봉사는 철도 모르고, ‘야, 오늘은 반찬이 별로 좋구나. 뉘 집 제사 지냈느냐?’ ”경향신문ㅣ2022. 09. 02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오랜 친구 같은 먹을거리, 들깨한여름 잎들깨가 한창이다. 이즈음 깻잎이 뽐내는 풀빛은 붉은 꽃에 못잖고, 그 내음은 고급 분갑에서 뿜는 분내며 값비싼 향수병에서 피어나는 향내에 못잖다. 들깨의 고향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동남아시아, 인도의 고원, 히말라야, 중국 남부, 한반도 등이 다 그 원산지로 거론된다. 아무려나 들깨는 아득한 예부터 한반도에 뿌리를 내렸다. 고고학 성과를 참고하면 안산·고성의 신석기시대 유적, 논산·부여·아산·천안·김천의 청동기시대 유적 등에서 들깨 및 들깨 재배의 흔적이 확인된다.경향신문ㅣ2022. 08. 05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국수를 찾아서국수의 계절이다. 익숙하고 친근한 이 사물의 조리 원리에는 재미난 구석이 꽤 있다. 국수의 전제는 곡물의 가루 또는 다양한 식물의 전분에 물을 더해 친 반죽이다. 이 반죽에서 길거나 짧게, 넓거나 좁게, 가늘거나 굵게, 각지거나 원만하게, 별별 형상으로 가락을 내면 일단 식료품으로써 국수가 된다. 순 국숫발만을 일컫는 한국어는 ‘사리’이다. 이렇게 낸 식료품을 주재료로 한 음식이 또한 국수이다. 사람들은 차거나 따끈한 국물에 말아, 짭짤한 양념이며 매콤한 양념장을 얹어 국수 한 그릇을 완성한다. 만두는 국수의 하위분류에 들어간다. 만두란 늘이거나 편 반죽이 전제이기 때문이다.경향신문ㅣ2022. 07. 08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알고 먹으면 더 맛있는 우유1883년 조선은 미국으로 외교 사절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한다. 일행 가운데 최경석(崔景錫·?~1886)은 다른 무엇보다 미국의 농장·농기계·가축에 푹 빠져들었다. 조선에 돌아온 최경석은 고종을 설득해 1884년 농무목축시험장을 세운다. 새 농업 시험의 터전이 이렇게 태어났다. 최경석은 1885년 저지(Jersey) 품종 젖소까지 조선에 도입한 듯하다. 본격적인 낙농업을 꿈꾸었다는 뜻이다.경향신문ㅣ2022. 06. 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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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의 문헌 속 ‘밥상’함부로 떠들지 말라조선 왕실의 밥상은 누가 어떻게 차렸을까? 함부로 답하기 어렵다. 다만 문서를 더듬어 윤곽이나마 그리는 수밖에 없다. 먼저 궁 안 음식 업무의 중심에 사옹원(司饔院)이 있다. 그 아래 총주방인 수라간(水刺間), 일상의 끼니를 차리는 외소주방(外燒廚房), 술이 있는 제2주방인 내소주방, 과자 등 간식류를 맡은 생물방(生物房)이 소임에 따라 움직였다. 궁 밖에서 큰 연회가 열리면 임시 주방인 조찬소(造饌所)를 열어 음식을 차렸다.경향신문ㅣ2022. 05. 13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명란과 우크라이나, 그리고 평화“한국인은 바다를 내륙 깊숙이 끌고 들어와 살아왔다. 오늘도 그렇다.” 인류학자 오창현 교수(국립목포대)의 이 한마디는 장을 보거나 밥상을 차리거나 늘 새삼스럽다. 그렇지, ‘깊숙이’지! 한국인의 바다는 내륙 뱃길이 끊겼다고 끊기지 않는다. 한국인의 바다는 말에 실려, 말도 못 갈 길이라면 사람의 등에 실려 깊은 골로 들어가고, 높은 산에 올랐다. 두메산골에서도 새우젓 두어 달걀찜 찌고, 젓갈 넣어 김치 담갔다. 구실아치한테서도 잊혀진 화전민도 미역국은 끓였다. 누구에게나, 간 질러 맛 들였거나 잘 말려 갈무리한 수산물 한 입씩은 돌아갔다. 온갖 젓갈, 말리거나 염장한 바닷말, 굴비며 간고등어가 있는 밥상, 말린 가자미·장어·대구·가오리·졸복·멸치·오징어 등등에 얽힌, 이루 다 주워섬기기 어려운 그 ‘깊숙이’의 면면한 일상이 현대 한국형 냉장·냉동 수산물과 그 유통을 낳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산골 가던 말짐과 등짐은 오늘 어디에 있는가? 원양과 바다와 내륙을 잇는 냉장·냉동 탑차와 활어차와 수족관에 깃들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오늘이나 예전이나, 그 물목이 무엇이든 출발은 바다의 노동이다. 그 생산의 풍경은 또한 문학 안으로 훅 치고 들어오곤 했다.경향신문ㅣ2022. 04. 15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서양제과의 어렴풋한 그림자, 가수저라“가수저라(加須底羅)는 깨끗한 밀가루 한 되와 백설탕 두 근을 달걀 여덟 개로 반죽하여 구리냄비에 담아 숯불로 노랗게 되도록 익힌다. 대바늘로 구멍을 뚫어 불기운이 속까지 들어가게 하여 만들어 꺼내서 잘라 먹는데, 이것이 최고의 상품이다.” 이덕무(1741~1793)가 엮은 일본 지리지 <청령국지>, 그리고 그의 손자 이규경(1788~?)이 엮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한 문단이다. 둘 다 일본의 음식 정보를 갈무리하며 쓴 내용이며, 둘 다 18세기 일본의 백과전서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속 가수저라, 곧 카스텔라 항목 그대로다. 일본을 가본 적 없는 이덕무와 이규경이 남긴 가수저라 기록은 조선 후기에 떠돌던 중국 및 일본 경유 서양 제과의 어렴풋한 그림자일 테다. 서유구(1764~1845) 또한 <임원경제지>에 가수저라를 실었고 실제로 구워보기도 한 듯하다. 그렇다면 서유구가 구워 낸 그것의 물성과 풍미가 어땠을까? 알 수 없다. 서유구가 쓴 밀가루, 설탕, 달걀의 품질과 품위는 미궁이다. 설탕이 들어간 달걀의 거품에 잇닿은 제과 기술을 얼마나 이해하고 해냈는지도 미궁이다. 본격적인 오븐도, 16세기 나가사키에서 나온 카스텔라 전용 소형 오븐인 ‘히키가마(引き釜)’도 없이, 솥 또는 노구솥 또는 쟁가비나 벙거짓골쯤을 붙들고, 어떤 불을 어떻게 썼는지는 알 수 없다.경향신문ㅣ2022. 03. 18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역사가 가득 찬 감자“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은 가을이 되면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의 채마 밭에 감자며 배추를 도둑질하러,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복녀도 감잣개나 잘 도둑질하여 왔다.” 평양 출신 김동인이 1925년 발표한 소설 ‘감자’의 한 구절이다. 이 감자는, 그런데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이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3월부터 햇감자 나오기 시작해 사철 감자를 만날 수 있지만 두 세대 전만 해도 감자는 하지감자가 다였다.경향신문ㅣ2022. 02. 18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옥수수의 변신은 무죄옥수수의 고향은 아메리카이다. 북부 안데스 또는 멕시코 일대를 그 원산지로 추정한다. 옥수수는 오늘날 밀, 벼와 함께 세계 3대 식량작물에 드는 귀중한 자원이다. 사람도 먹지만, 절반 이상이 온 지구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 그만큼 잘 자라는 작물이란 말이다. 옥수수는 조선 후기에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 조선의 문헌에는 옥미(玉米), 옥촉서(玉蜀黍), 옥수수미(玉穗穗米) 등으로 기록되었고 해방 이후 ‘옥수수’가 자리를 잡는다. 1690년 간행된 한조(漢朝) 대역 어휘집 <역어유해(譯語類解)>는 ‘玉薥薥(옥촉촉)’을 표제어로 잡고 한어음은 ‘유슈슈’로, 조선어음은 ‘옥슈슈’로 달았다. 1776년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이 엮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는 ‘옥촉서(玉薥黍, 옥슈슈)’를 표제어로 하고 “(옥수수는) 다섯 가지 빛깔이 있다. 봄에 비옥한 땅에 심고 (…) 쪄서 먹을 수 있으며, 죽을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아서 율무보다 낫다”라고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조선 의주와 중국 북경 사이의 벌판에 수수 또는 옥수수가 빽빽이 들어서 장관을 이루었다. 그러니 중국을 다녀온 조선 사람의 기행문 속에서 옥수수 이야기를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추위가 심하면 몸도 녹일 겸, 벌판의 가게에 들어가 옥수수국수를 사 먹는 장면도 보인다.경향신문ㅣ2022. 01. 21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진공의 계절“조기는 평소에 먹는다. 그런데 나는 민어가 아무래도 조기만 못한 것으로 안다.” “가을 보리밥, 고추장, 집장이 내 입에 맞는가 보다.” “송이, 생전복, 새끼꿩고기, 고추장,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이렇다면 입맛이 아주 늙은 것도 아니다.” 이상은 조선왕 영조가 각각 40세, 64세, 74세에 자신의 식성에 대해 한 말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보인다.경향신문ㅣ2021. 12. 24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된장찌개에 담긴 ‘유정과 무정’“노파의 만드는 장찌개는 그다지 맛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파는 자기가 된장찌개를 제일 잘 만드는 줄로 자신하고 또 형식에게도 그렇게 자랑을 하였다. 형식은 그 된장찌개에서 흔히 구더기를 골랐다. 그러나 노파의 명예심과 정성을 깨뜨리기가 미안하여, ‘참 좋소’ 하였다. 그러나 ‘참 맛나오’ 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이 ‘참 좋소’로만 족하였었다.”경향신문ㅣ2021. 11. 26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노래로도 꽃피운 ‘고등어 사랑’“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동남해역의 한 어시장을 걷다 남들도 모르게 읊조리고 말았다. 어른 팔뚝만 한 당당한 몸통에 유선을 그리며 매끈하게 빠진 몸, 그리고 형형한 눈빛과 어울린 등허리의 빛나는 푸르름이라니. 시르죽어 널브러진 뼘가웃짜리 내륙 어물전의 고등어에 댈 게 아니다. 이즈음 통영과 포항 사이 바다에서 나는 고등어란 ‘헌걸차다’는 한국어, ‘아름답다’는 한국어를 어디에 써야 할지를 일깨우는 존재다. 1983년 나온 김창완의 ‘어머니와 고등어’는 여전히 힘이 세다.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하는 노랫말이 다시 귓속에 쟁쟁하다. 당대 대중의 노래 속에서도 헤엄쳐온 이 물고기는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이미 중요한 수산자원으로 등장한다.경향신문ㅣ2021. 10. 29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떠오른 분식, 사라진 밀밭통계만 한 문헌도 없다. 한강 이북과 강원도 지역에서 벼 수확이 시작된 즈음에 숫자를 더듬는다. 2021년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양곡소비량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가구 부문의 1인당 쌀 소비량은 57.7㎏으로 2019년 소비량 59.2㎏보다 2.5% 감소했다. 이는 역대 최저치이며 1990년 소비량 119.6㎏에 견주어 절반 수준이다. 이를 다시 1인당 하루 쌀 소비량(평균)으로 따져보면 158.0g, 그러니까 하루에 밥 한 공기 분량의 쌀을 먹는 정도라는 뜻이다. 이렇게 먹고 어떻게 사나? 어떻게라니, 여러분의 짐작대로다. 밀가루가 있다. 2019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1인당 밀가루 소비량은 34.2㎏이다. 1965년도의 11.5㎏에 견주어 세 배쯤 뛴 셈이다. 최근의 밀가루 연간 소비량은 약 200만t으로 추산한다(한국제분협회).경향신문ㅣ2021. 10. 01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돈 전(錢)자도 따라왔던 ‘전어’“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전어나 듬뿍 썰어 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 달라 하자/ 바다는 떼 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 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스레 익어/ 제 몸속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경향신문ㅣ2021. 09. 03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그 남자네 집’의 민어와 굴비“다행히 월급날은 쉬 돌아왔고 계절 따라 제철 음식도 새록새록 했다. 복(伏)이 들자 시어머니는 민어 먹을 때라고 귀띔을 했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 속 한 구절이다. 이 소설은 허구와 자전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나’가 느낀 첫사랑의 두근거림, 두근거림만으로 못 이긴 환멸, 월급날이 있는 다른 남성과 이룬 혼인, 피로와 우울이 감도는 시집살이, 일탈, 출산, 회한의 순간순간이 발휘하는 흡인력은 텔레비전 연속극 못잖다. 이야기가 서울, 1950년대를 따라 펼쳐진다. 그러느라 서울깍쟁이들의 요란한 음식문화도 펼쳐진다. 복 들자 민어라 했다. 시어머니는 민어를 이렇게 다루었다. “민어의 몸은 횟거리와 찌갯거리, 그리고 구이용으로 나누어졌다. (…) 애호박 썰어 넣고 고추장 풀고 끓인 민어찌개 맛은 준칫국과는 또 다른 달고 깊은 맛이 있었다.”경향신문ㅣ2021. 08. 06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여름철 입맛 돋우는, 냉국무더위에 숨이 막힌다. 애오라지 냉국 한 사발 들이켜고 싶다. 물 많이 잡아 삼삼하게 담근 여름김치도 고맙지만 대접 한가득 담긴 냉국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어, 시원타!’를 외치는 여름날의 맛, 그 관능은 어떤가. 한국인의 여름에 아로새긴 이 음식은 과연 언제 태어났을까? 무어라 단언하기 어렵다. 그저 문헌과 민속자료를 따라갈 뿐이다. 20세기 전반의 어휘부터 재밌다. 그때는 조선어 매체마다 사물의 이름, 어휘의 선택을 두고 극심한 혼란을 겪을 때다. 예컨대 같은 음식의 이름을 놓고 칼국수, 제비국, 밀국수가 표준 경쟁을 했다. 수제비는 밀수제비, 뜨적제비 등과 경쟁했다. 그러다 남은 표준어로 ‘수제비’를, 북은 문화어로 ‘뜨더국’을 택해 오늘에 이른다. 냉국도 그랬다. 그때에는 ‘냉국’과 함께 ‘생갱(生羹)’ ‘찬국’, ‘창국’이 나란히 쓰였다. 이윽고 1938년 문세영(1888~?)이 엮은 <조선어사전>에 ‘냉국’이 대표 표제어로 오르면서 ‘찬국’은 냉국 뒤로 물러났다. 오늘날 북의 문화어에서는 ‘랭국’이다.경향신문ㅣ2021. 07. 0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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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의 문헌 속 ‘밥상’묵묵은 곡물의 낟알, 나무의 열매, 식물의 뿌리 또는 덩이줄기의 녹말에서 앙금을 받아, 풀을 쑤어 굳힌 음식이다. 메밀, 도토리, 녹두, 동부, 옥수수, 고구마, 밤, 고사리, 칡, 올방개 등은 그동안 한국인이 이용해온 묵의 재료이다. 박대, 상어, 장어 등의 생선껍질을 고아 굳힌 음식도 묵이라 이른다. 이는 생선의 콜라겐을 이용한 것이다. 네발짐승이나 조류에서 온 콜라겐도 묵과 같은 먹을거리가 된다. 우족이나 돼지족이나 닭발을 가지고 만드는 ‘족편’ 동아리의 음식 또한 원리는 박대묵 등과 같다. 우뭇가사리 같은 해조류의 카라기난과 알긴산을 잘 다루어도 묵이 된다.경향신문ㅣ2021. 06. 11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도미아차, 이러다 도미 맛도 보기 전에 이 봄이 이울지도 모른다. 계절의 감각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봄날은 이제 내게 얼굴만 보여주고 손 한 번 쥘 틈 없이 총총 떠나는 계절이 된 듯하다. 이 판에 도미를 바라 입맛을 다시는 형이하학이 방정맞긴 하다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 바닷물고기가 또한 도미이다. 한국인의 입말과 한국어 사전에서 ‘도미’는 도밋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일체를 이르는 말이다. 요컨대 참돔·먹돔(감성돔)·붉돔·황돔·혹돔·줄돔·군평선이 등등이 다. 도미라는 동아리에 들되 일반적으로 도미라고 하면 ‘참돔’을 가리킨다.경향신문ㅣ2021. 04. 16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딸기‘Enjoyed the strawberries and cake well enough.’ 미국 밴더빌트대학교의 조선인 유학생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한 모임에 나가 ‘딸기와 케이크를 만족할 만큼 즐겼다’. 1890년 3월15일 그가 영어로 써서 남긴 일기 속 한 장면이다. 윤치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난생처음 딸기를 만났다. 북미의 넉넉한 가정이 손님에게 딸기에다 케이크며 아이스크림을 곁들여 대접한 덕분에 이후로도 딸기를 즐길 기회는 더 있었다.경향신문ㅣ2021. 03. 19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쑥봄은 봄나물이다. 설 지났다고 추위가 가실 리 없다. 꽃샘추위가 남아 있음을 모두 잘 안다. 그래도 사뭇 길어진 해 아래 새싹이 언뜻 비치고 나면 삽시간에 봄이 번질 테다. 아직 산나물은 이르다. 새싹은 볕이 곱게 들어와 앉는 들에서부터 움튼다. 쑥은 이때의 전령이다. 쑥은 겨울 막바지에 이미 머리를 살짝 내밀고, 어느새 덜 풀린 땅을 풀빛으로 물들인다. 그 봄기운을 음식으로 옮기는 방법이 문헌 곳곳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19세기 말 쓰인 <시의전서(是議全書)> 속 ‘애탕’ 항목은 봄노래처럼 경쾌하다. “세말춘초(연말과 새봄 사이)에 움 돋는 쑥을 뜯어다 깨끗이 다듬고 씻어 한 줌만 다진다. 소고기는 한 줌 부피가 되게 다져 쑥 다진 것과 합하여 기름장·양념을 갖춰 넣어 주물러서 밤만큼 환(丸·완자)을 만든다. 계란은 깨어 풀어 놓고, 장국이 팔팔 끓거든 환에 계란을 묻혀 넣는다.”경향신문ㅣ2021. 02. 19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생활의 한 토막“승재와 계봉이는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내려, 바로 빌딩의 식당으로 올라갔다. 계봉이도 시장은 했지만, 배가 고프다 못해 허리가 꼬부라졌다. 모처럼 둘이 마주 앉아서 먹는 저녁이다.” 1930년대 말에 쓰인 채만식(1902~1950)의 소설 <탁류> 속 어느 장면이 각별하지 않겠는가마는 음식이 있는 풍경 또한 못잖다. 식민지 현실이라든지 사실주의 같은 말은 잠시 접어두자. 최인호(1945~2013)에 앞서 성취한 빌딩 배경 연애는 덤이다. 고향을 떠난 젊은 남녀는 서울에서 드디어 서투나마 연인 관계로 접어든다. 함께 나눈 밥상의 추억은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곡절을 압도했다. 둘은 이제 저녁을 먹으며 로맨티시즘을 연마하는 중이다. “둘이 다 같이 군산 있을 적에 계봉이가 승재를 찾아와서 밥을 지어 준다는 게 생쌀밥을 해놓고, 그래도 그 밥이 맛이 있다고 다꾸앙쪽을 반찬삼아 달게 먹곤 하던” 추억―“그런 이야기를 해가면서 둘이는 저녁밥을, 한 끼의 저녁밥이기보다 생활의 즐거운 한 토막을 누리었다.”경향신문ㅣ2021. 01. 15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짬뽕한국어 초마면(炒碼麵), 일본어 챤폰(攙烹), 중국어 자후이몐(雜燴麵). 짬뽕을 동아시아 사람에게 써 보이자면 어떤 한자와 어휘가 좋을까? 한·중·일 세 나라 말과 한문에 능한 공부꾼들이 머리를 맞댔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꽁꽁 묶어라’를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라’로 받아썼다는 글방 농담이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중문판 안내문은 알파벳 ‘Jjamppong’으로 미봉하고 말았다. 2020년 9월19일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한국화교화인연구회가 주최한 ‘군산화교 학술 웨비나-학교에서 짬뽕까지 군산화교 다시 읽기’의 막후가 이랬다.경향신문ㅣ2020. 12. 18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라면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2020년 10월 말 기준, 한국 라면의 수출이 5억달러를 넘어섰다(잠정). 아닌 게 아니라 라면은 이제 한국인의 일상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 음식이다. 아울러 대문자 ‘케이(K)’를 접두어로 할 만한 사물이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라면의 의의를 이렇게 쓰고 있다. “(전략) 특유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다는 점에서 감히 라면은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단이 각별히 다가오는 소이는 한국 라면사가 두 세대, 곧 60년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경향신문ㅣ2020. 11. 20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굴’의 계절이 온다“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바다에) 살어리랏다// 나마자기(나문재)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고려 사람의 노래 ‘청산별곡’의 한 구절이다. ‘구조개’는 굴만을 이르기도 하고, 굴과 조개를 아울러 이르기도 한다. 한반도 신석기시대 이래의 일상을 켜켜이 간직한 유적인 조개무지에도 굴껍데기는 흔하다.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온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도 재밌다. 서긍에 따르면 고기는 힘 있는 자들이 먹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수산물이 만만했다. 더구나 “굴과 대합은 조수가 빠져도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힘껏 거두어들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실로 고려 백성들은 ‘구조개’를 먹고살았던 것이다. 조선 사람 허균도 <도문대작>(1611)에다 굴 이야기를 남겼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함경남도, 강원도 바로 위 해역의 굴(石花)은 대단히 큰데 서해안의 씨알 작은 굴의 맛에는 못 미친단다. 이어 동해안의 석화(윤화·輪花)는 씨알 굵은 놈이 맛이 달다고 썼다. 미식에 눈뜬 사람들에게 굴은, 그 산지를 비교해 음미할 만한 식료였다.경향신문ㅣ2020. 10. 23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육개장이즈음이면 모락모락 김 피어오르는 국솥부터 머릿속에 삼삼하다. 콩나물국·북엇국·두부찌개·김치찌개·동태찌개·설렁탕 등이 절로 연상되는 순간, 내가 한국인임을 실감한다. 육개장이 빠질까. 거듭 데워도 맛이 덜 빠지는 미덕이 있는 이 음식에 대한 기록은 일찍이 시작됐다. 유득공(1748~1807)의 <경도잡지>와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에 보이는 ‘구장(狗醬)’, 곧 개장국이 육개장의 원형이다. 당시에는 개고기 장국에 파와 후추 또는 초피를 써서 맛을 냈다. 당시에는 찜과 국의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홍석모에 따르면 구장은 시장에서도 많이 팔았다.경향신문ㅣ2020. 09. 18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밥은 바빠서 못 먹겠고…술만 술술 넘어간다”장타령꾼의 장타령 또한 소중한 문헌이다. 저 노랫말이 보통 사람의 일상과 마음속에 자리한 술이라는 사물의 인상과 위상과 위력을 한마디로 압축하므로. 장꾼의 한잔뿐이랴. ‘왕좌의 게임’에 얽힌 거대한 한잔도 있다. 고려 시인 이규보(李奎報, 1169~1241)가 쓴 고구려 건국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 속의 한잔은 건국의 시초가 된 잔이다.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는, 인간의 세계에서 처음 마주친 여인 유화를 유혹할 적에 술을 동원했다. 황금 동이에서 따른 한잔이야말로 하룻밤 사랑의 중개자였다.경향신문ㅣ2020. 08. 21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토마토“여름 과실 중의 여왕.” 1930년대 한 조선어 매체가 토마토에 붙인 말이다. 당시 토마토는 감처럼 생긴 한해살이 식물이라 해서 ‘일년감’, 밭에서 난다고 해서 ‘땅감’으로 불렸다. 토마토는 그때에도 채소보다는 과실 대접을 받았다. 17세기에 조선으로 들어와 붙은 이름 또한 ‘남만시(南蠻柹)’다. ‘시(柹)’가 곧 ‘감’이다.경향신문ㅣ2020. 07. 24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삼계탕1856년 유월, 양반 이우석(李愚錫, 1829~1903)이 아버지께 하루 세 차례 ‘인삼계고(人參鷄膏)’를 달여 올렸다. 이우석이 50년간 쓴 일기인 <하은일록>에 따르면 이우석은 어머니께도 ‘삼계’를 올린 적이 있다. 자신은 하루 다섯 차례 삼계를 고아 모조리 마신 적이 있다. 그 동생도 하루 세 차례 삼계를 ‘복용(服)’한 적이 있다. 몸이 허하다 싶을 때, 허한 몸이 설사와 복통에 시달릴 때의 처방이 인삼계고 또는 삼계고였다. 말 그대로 삼과 닭을 고아서 뽑은 되직한 진액(膏) 형태의 약이다.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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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의 문헌 속 ‘밥상’참외“수박을 귀족적이요 부르주아적이라 할 것 같으면 참외는 평민적이요 프롤레타리아적이다.” 1928년 7월 발간된 ‘별건곤’ 제14호를 넘기다 웃음이 터졌다. 여름이면 무더기로 쌓이는 과채에 무슨 이런 어마어마한 소리람. 꼭지의 제목은 게다가 ‘참외로맨스’. 이에 따르면 참외는 과채의 ‘왕’이다. 역대 문헌을 펴면, 그렇게 쓸만해서 썼음이 여실하다. 한국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 기자 우스다 잔운(1877~1956)은 이렇게 썼다. “조선인이 연중 가장 즐겨 먹고 무섭게 먹어대는 것은 참외이다. (중략) 길을 걸으면서도 먹고,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도 먹는다. 참외는 시중 어디서나 판다. 조선인은 여름에 참외로 살아가는 것이다.”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 1629~1714)은 사당에 올릴 여름 제물로 앵두·보리·수박·참외를 손꼽았다. 이응희(李應禧, 1579~1651)는 일찍이 참외(眞瓜)의 ‘참(眞)’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가슴 씻는 시원함, 금빛 속살, 꿀 같은 단맛의 매력을 노래했다. 여름철의 진짜배기란 뜻이다.경향신문ㅣ2020. 05. 29 03:0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멸치“우리집 김치 맛은 어제오늘로서 간단하게 이뤄진 것이 아니다. (중략) 외할머니의 정결한 손끝으로부터 비롯되어진 것이다. (중략) 우리 전라도에서는 김치를 담글 때 새우젓을 쓰지 않고 멸치젓을 사용한다.”(경남매일신문 1968년 11월27일자) 천경자(千鏡子·1924~2015) 화백이 40대에 남긴 글이다. 천 화백은 한국에 해외여행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기어코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나갔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기 싫은 예술가가 사증을 받기 위해 당국에 발휘한 건 기지(奇智)였을까, 의지(意志)였을까. 천 화백은 종군화가 신분으로 베트남 땅을 밟기도 했다. 아무튼 김치는 남다른 삶을 산 인물의 고향이 전남 고흥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천 화백에게 김치는 “어떤 전통적이고 감각적인 맛”이었다. “멸치젓에 갓만 넣고” 담근 갓김치는 그 가운데서도 강렬한 추억이었다. 그리고 천 화백이 느낀 ‘우리집 김치’ 맛의 열쇠인 멸치젓은 한국 음식문화사에서 최근 100년의 산물이다.경향신문ㅣ2020. 04. 30 21:22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봄물김치물김치 한 사발이 간절한 즈음이다. 짭짤하면 짭짤한 대로 삼삼하면 삼삼한 대로 김칫국물 한 사발을 목구멍에 왈칵 넘기고 나면, 그 기분 좋게 쩡한 간질임에 사람의 오감이 새로워질 것만 같다. 처지고 쭈그러졌던 몸과 마음이 주저앉은 자리를 그대로 박차고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다. 물김치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켜고서 ‘세상의 나쁜 기운아 물렀거라, 내가 간다!’ 소리라도 한번 지르고 싶다.경향신문ㅣ2020. 04. 02 20:5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미나리“순무, 무와 상추/ 푸른 미나리, 흰 토란에 붉은 차조기/ 생강·마늘·파·여뀌로 오미를 갖추어/ 잘 데쳐서는 국 끓이고 담그기는 김치(菹)라네.” 조선 문인 서거정(1420~1488)이 노래한 채마밭 풍경이 그저 소담하다. 평화로운 일상이란 이런 법이지 하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가운데 미나리는 새봄의 맛을 대표하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친숙한 채소다. 워낙 한반도 어디서나 잘 자라 일찍이 텃밭이며 습지에 심어졌고, 상하귀천 모두의 국·나물·김치가 되어주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미나리는 도시 근교 농업과 맞아떨어졌다. 박지원(1737~1805)은 오늘날 왕십리의 무, 석관동의 순무, 서소문 밖의 가지·오이·수박·호박, 연희동의 고추·마늘·부추·파·염교, 청파동의 미나리, 이태원의 토란을 가장 환금성 높은 서울 채소로 손꼽았다. 1831년 청나라를 다녀온 한필교(1807~1878) 일행은 낯선 음식에 질려 먹는 타령 하던 끝에, 팔뚝만 한 무, 희디흰 배추 줄기, 청파동의 미나리로 김치를 담가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듣고 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마치 눈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는 듯”했단다. 아,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경향신문ㅣ2020. 03. 12 20:47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명태겨울 생태탕, 동태찌개의 맛이란 아련한 추억이다. 북엇국, 황태국은 어떤가. 이 모두가 명태(明太·Alaska Pollack)에서 온다. 생태는 잡은 그대로의 명태이다. 급속 냉동한 것이 동태, 그냥 말리면 북어, 얼다 녹으며 노랗게 부풀도록 말리면 황태다. 나라가 동강나자 동해안의 실향민은 미시령과 대관령 아래에서 황태 문화를 이어갔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해상의 밀수를 통해 북의 명태가 남으로 오고, 남의 곡물이 북으로 갔다고도 한다. 나라는 갈라졌어도 명태 문화는 이어졌다. 그만큼 명태가 한국인의 일상에서 소중한 식료라는 뜻이겠다.경향신문ㅣ2020. 02. 20 20:30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방어초대형 고등어인가도 싶고, 앙증맞은 다랑어인가도 싶은 바닷물고기 방어의 계절이다. 방어는 일찍이 기록된 수산자원이다. <세종실록> 19년(1437) 기사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요긴한 수산자원으로 대구·연어·방어를 손꼽았다. 1670년경 쓰인 <음식디미방>은 청어 백 마리에 소금 두 되를 뿌리고 땅에 묻어 삭히는 청어젓갈을 기록하면서 똑같이 담그는 방어젓갈을 부기했다. 조선의 박물학자 서유구(1764~1845)가 쓴 어류학서 <난호어목지>에도 ‘방어’ 항목이 있다. 방어를 동해 특산으로 보되, 함경도에서부터 오늘날의 경상도 연안까지를 주산지로 꼽았다. 같은 책의 ‘멸치’ 항목도 재밌다. 이에 따르면 동해의 멸치가 방어에 쫓겨 엄청난 규모로 해안으로 몰려올 때엔 그 형세가 바람 불고 물결 이는 것과 같다. 어부는 이런 현상을 보고 방어가 온 줄 안다. 큰 그물로 에워싸 잡으면 온 그물이 다 멸치로 차는데 거기서 방어는 골라내고, 멸치는 삼태그물로 건진다. 실제로 방어의 중요한 먹이는 전갱이, 정어리, 고등어, 멸치 등이다. 이런 등속을 잡아먹으며 살지다 겨울에 기름기가 절정에 달한다. 회를 뜨면 깔끔한 등살에서부터 기름진 배꼽살까지 그 맛과 질감이 다양하다. 뱃살·목살(가마살)·담기골살(지느러미의 줄기를 받치는 부위)·꼬리살 등 칼 쓰기에 따라 다양한 부위가 나온다.경향신문ㅣ2020. 01. 30 20:41
- 고영의 문헌 속 ‘밥상’눈물 젖은 떡국“떡국을 끓여 놓고.” 약 100년 전인 1926년 2월, 세 차례에 걸친 동아일보의 설 기획 제목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새해 떡국을 끓여놓고도 온 가족이 모이지 못할 사정이 늘고 있었다. 땅 없는 농민과 빈민이 고향을 등지고 팔도의 도시로 흩어졌다. 일본, 만주, 중국, 러시아로, 더 멀게는 하와이, 캘리포니아, 유카탄반도, 쿠바 등지로도 흩어졌다. 극소수 조선인 부자의 여행이나 유학을 빼고는 다 살자고 발버둥치다가 생긴 이산이었다. 식민지 특유의 이산도 있었다. 일제에 맞선 이들의 옥살이가 낳은 이산이 그것이다.경향신문ㅣ2020. 01. 09 20:53
- 직설떡국떡국, 이 조촐하고 우아한 음식이 언제부터 한국인의 새해 명절에 깃들었을까. 알 길이 없다. 문헌을 뒤지면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며 홍석모(洪錫謨,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속에 오늘날과 비슷한 떡국이 등장한다. 조선 후기 문인들이 기록한 소고기 바탕의 장국에 끓인 떡국은 방신영이나 조자호 등 식민지 시기에 활동한 음식 연구자들의 음식책 속에서도 이어졌다.경향신문ㅣ2019. 12. 11 20:56
- 직설뭉클한 김치“된장찌개, 깍두기, 장김치 같은 것도 시골 가서는 서울 것 같은 것을 먹을 수 없다. 외국에 간 사람이 자기의 가족보다 서울의 김치깍두기 생각이 더 간절하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식민시기의 인기 잡지 ‘별건곤(別乾坤)’ 1929년 제23호 ‘경성(京城)명물집’ 꼭지의 한 문장이다. 된장찌개에서 김치깍두기마저 서울식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가령 떡이라면 “서울의 떡 중에 색절편(오색삼색으로 색깔을 낸 절편)은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찬란한 떡이다”라고 할 만큼 서울 향토색이 그때까지 음식에 남아 있었다. 지역 김치가 떠올라 꺼낸 소리다.경향신문ㅣ2019. 11. 13 20:46
- 직설검색창 속 ‘선지’“(전략) 고려 말기의 중국어 회화교본인 <노걸대(老乞大)>에 술 깨는 국이라는 뜻의 성주탕(醒酒湯)이 나온다. 이것이 해장국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육즙에 정육을 잘게 썰어 국수와 함께 넣고 천초(川椒)가루와 파를 넣는다’고 되어 있어 얼큰한 오늘날의 해장국과 그 기본이 같다.”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포털사이트에서 ‘해장국’을 검색하면 요식업 가맹사업자의 광고부터 나온다. 광고에 깔린 ‘지식백과’를 클릭해 들어가면 위 문단이 ‘정보’의 맨 처음이다. 해장국을 파는 업체나 가게에서는 여기에 기대 ‘<노걸대>에 나오는 해장국’을 앞세운 광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주탕’ 세 글자 빼고는, 없는 소리다. 저 문단은 낭설이다. 우선 이 책의 편찬과 출판의 연대기부터 들여다보아야 한다. <노걸대>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되기 시작한 중국어 학습서로 <번역노걸대>(1517), <노걸대언해>(1670), <중간노걸대언해>(1795) 등이 전해온다. ‘노걸대’는 중국인을 뜻하는 말인데 나중에는 만주어 학습을 위한 <청어노걸대>, 몽골어 학습을 위한 <몽어노걸대>까지 나왔다. 중국어 외의 어학서에서 노걸대를 빌린 것이다. 이 가운데 <노걸대언해>에 ‘성주탕’이라는 어휘가 딱 한 번 나오고, 성주탕을 언해(諺解)해 ‘술깨오는탕’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끝이다. 조리법은 나오지 않는다. 천초(초피)와 소금으로 양념을 해가며 고기볶음을 하면서, 남의 음식에 타박도 하는, 절로 웃음이 나는 장면이 <청어노걸대>(1765)에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해장국은 없다. 이것으로 끝이다. <노걸대언해> 속 성주탕과 오늘날의 해장국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성주’는 ‘술을 깨다’라는 뜻이다. 옛 동아시아에서 자연스러운 말이고, 흔히 쓴 어휘일 뿐이다.경향신문ㅣ2019. 10. 16 20:59
- 직설국·탕·찌개와는 다른 일품 국물요리 ‘전골’따끈한 국물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한국인의 밥상에는 온갖 국물 음식이 오른다. 안 보이면 섭섭하다. 유럽과 아메리카 사람들이 끼니마다 와인·맥주·탄산수를 곁들이고, 중국과 인도, 서남아시아며 아프리카 곳곳의 사람들이 끼니마다 차 없이는 못 산다면, 한국인에게는 국탕·찌개·전골이 있다. 저들의 주식인 빵·찐빵·난이란 덤덤하기 이를 데 없다. 탕면 빼고는, 국수는 뻑뻑하다. 맹물만으로 부족한 저작(咀嚼)과 목넘김을 돕느라, 시거나 달거나 쌉쌀하거나 특유의 풍미를 띤 와인·맥주·탄산수 또는 차를 마실 수밖에 없다. 나란히, 한국인에게는 짠맛 위에 복합적이면서 풍성한 풍미를 세운 국물이 고맙다.경향신문ㅣ2019. 09. 18 20:40
- 직설음식과 일상의 말너무 세다. 급하다. 거칠다. 한마디 한마디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고 날카롭다. 표현과 수사가 구구절절 극으로 치닫기만 한다. 침소봉대(針小棒大)가 기본값이 되고 나니 양두구육(羊頭狗肉)에도 둔감해지고 말았다. 음식을 둘러싼 말글 말이다. 음식 또는 미식이 업인 사람들의 말글뿐 아니라, 일상 속 음식에 잇닿은 말글이 오늘 대개 그렇다. 장삼이사들이 살아가는 골목, 일터가 되는 길거리, 매일의 반찬거리를 대느라 돌아다니는 시장 여기저기 내걸린 음식의 말글이 어느새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런 것이다. 닭갈비집의 모든 재료는 닭갈비의 고향 춘천에서 공수하고, 팥빙수집 팥은 기가 막히게들 정선, 경주, 나주, 신안 등 팥 주산지에 자리한 큰아버지네 또는 외삼촌네서 농사 지은 팥을 직접 공수해 쓴다고들 한다. 부모님의 시골 텃밭에서 쌈거리를 공수하는 백반집과 한정식집이 어느 동네에나 넘치게 있다. 심지어 내 텃밭을 두고 영업한다는 고급 음식점에서는 ‘방금 텃밭에서 공수한 채소’를 쓴다고도 한다.경향신문ㅣ2019. 08. 2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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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설민어해마다 이때면 특정 주제에 따른 ‘원고 청탁’이 돌아온다. 엉겁결에 받은 전화, 대뜸 ‘복날 먹는 거’로 써 달라는 말이 건너왔다. 그 ‘먹는 거’ 가운데 ‘민어’는 이미 정한 바였다. ‘이열치열’로 기둥 세우고, ‘반가 음식’에 ‘복달임’으로 벽 치고 지붕 인다는 속내를 바로 알아챘다. 갸우뚱하다 답했다. “복달임의 핵심은 지역과 공동체의 휴식, 온열질환 예방을 위한 땡볕 피하기예요. 지혜는 그런 데 있어요. 오로지 먹는 소리면 복달임의 참모습을 말할 틈이 없죠. 휴일의 휴식에 별미 있으면 더 좋겠죠. 삼복 중의 식재료와 음식이 다 복달임이 됩니다. 민물잡어가 그중 만만했고, 잘 익은 과일, 과채가 오히려 청신합니다. 있는 대로 수박, 참외 나누어 먹고 버무리나 개떡쯤이 휴식의 별미로 넉넉했어요.”경향신문ㅣ2019. 07. 24 20:58
- 직설민족주의 이전의 ‘민족성’“벌써 7년 전 과거가 되었다만은 (…) 조선의 요리 독립까지 잃어버리는 것을 구경했다. (…) 장유(醬油)라는 것이 우리나라 간장을 동화시켜 가지고 소위 선일융화(鮮日融和)를 실현시켰다. (…) 고추장, 김칫국 몇 가지가 하도 어이가 없는 듯이 한구석에 박혀 있는 꼴이라고는 적막해서 볼 수 없었다.” 동아일보 1923년 3월3일자에 실린 김재은의 회고다. 7년 전이니 1916년이다. 기미년 만세 시위가 터지기 3년 전이다. 기고자는 “사랑”과 “근심” 때문에 글을 썼다는데 고추장, 김칫국이 한구석에 처박히듯 조선 음식이 처량해진 내력을 돌아보매 이렇다. 일식 전골인 스키야키는 고급 조선요릿집에서 신선로를 진작에 “구축(驅逐)”했다. 스키야키가 밥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일식 절임인 복신지(福神漬·후쿠진즈케)가 따라붙었다. 후쿠진즈케라는 “들척지근한 물건”이 조선의 짠지를 “정복”했다. 후쿠진즈케는 일제 군대의 급양이 서양식으로 바뀐 가운데서도 지급된 일식 반찬이다. 또한 양과자는 다식을 대신하고, 정종은 조선의 소주를 “병합(倂合)”해 전횡을 다했다. 그러고는 장유, 곧 일식 간장인 쇼유가 맛 설계의 바탕인 조선의 간장을 동화함으로써 선일융화, 곧 조선 사람의 일본인화가 실현되었다. 선일융화를 뒤이은 통치 구호가 ‘내선일체(內鮮一體)’다. 1936년 부임한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내세운 바다. 먹어 들어가는 쪽에서야 융화네, 한 몸(一體)이네 못할 소리가 없겠지만, 실제로는 한쪽의 절멸을 바라는 수작 아닌가. 1910년 나라 망한 지 6년 만에 조선의 미각 상상력도, 음식도 적막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하는 쪽에서 볼 때에는 한 역사 공동체 절멸의 징후였다.경향신문ㅣ2019. 06. 26 20:37
- 직설카스텔라와 카스테라 사이에서일본사에서 천정(天正) 시대, 그러니까 서기 1573~1592년 사이에 나가사키로 처음 들어왔다. 중개자는 포르투갈 사람들이었다. 그 조리 방법은 이렇다. 달걀, 설탕, 밀가루, 꿀, 맥아당(조청), 우유 등을 섞어 뻑뻑한 반죽을 만들어 나무틀에 붓는다. 틀은 일본에서 구하기 쉬운 삼나무 계통 목재를 쓰면 그만이다. 반죽은 오븐에 넣고 구워야 한다. 번듯한 유럽식 오븐을 당장 만들기 어렵다면? 쓰던 아궁이 또는 화덕을 손보아 대류열을 가둘 공간을 확보하면 그만이다. 대단한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원리를 파악해, 내가 구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쓸모 있는 사물을 만들어 내는 솜씨 또는 그 결과를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한다. 브리콜라주로 조리의 한 고비를 넘기면 결과를 기대할 만하다. 한 시간쯤 불 조절에 주의해 잘 구우면 맛난 과자가 완성된다.경향신문ㅣ2019. 05. 29 20:43
- 직설빙수“여보, 일어나 빙수나 한 잔 자시오. 좀 속이 시원하여질 테니. 이제 울으시면 어짜요? 다 팔자로 알고 참아야지. 나도 젊어서 과부 되고 다 자란 자식 죽고… 그러고도 이렇게 사오. 부모 없는 것이 남편 없는 것에 비기면 우스운 일이랍니다. 이제 청춘에 전정(前程·앞길)이 구만리 같은데 왜 걱정을 하겠소. 자 어서 울음 그치고 빙수나 자시오. 배도 자시구.”경향신문ㅣ2019. 05. 01 20:49
- 직설이방인냉면“봄바람이 건 듯 불어 잠자던 모란대에 나무마다 잎 트고 가지마다 꽃피는 3, 4월 긴 해를 춘흥에 겨워 즐기다가 지친 다리를 대동문 앞 드높은 2층루에 실어놓고 패강(浿江, 대동강) 푸른 물 따라 종일의 피로를 흘려보내며 그득 담은 한 그릇 냉면에 시장을 맞출 때!” 식민지시기의 인기 잡지 ‘별건곤’ 1929년 12월호에 실린 평양냉면 예찬의 한 대목이다. 오늘날의 한국어로 풀어 써도 바로 읽기가 만만찮다. 요컨대 봄바람 살랑 부는 봄은 생명이 움트는 봄의 정취에 취해 대동강 푸른 물 따라 놀기 좋은 때이며 “가득 담은 한 그릇의 냉면”의 제철이라는 소리다. 여기서 평양냉면을 수식하는 한마디는 “사시명물(四時名物)”이다. 곧 봄여름가을겨울의 냉면 맛이 다 따로 있으니, 사계절이 다 이유 있는 냉면의 제철이라는 뜻이다.경향신문ㅣ2019. 04. 03 21:09
- 직설천의 얼굴을 지닌 음식 ‘비빔밥’“골동(骨董)요?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고미술품 또는 우아한 소품이란 뜻이 있지요. 그런데 자질구레해서 무어라 분류하기 어려운 옛날 물건이라는 뜻도 있어요. 골동에서 ‘예술적 가치’나 ‘우아함’이 빠지면 엿이랑 바꾸어 먹을 폐품에 가까운 고물이죠.” 새봄, 새순 올라오는 철이라 그런가. 비빔밥 이야기를 해달라는 분도 부쩍 늘었다. 어떤 분들은 비빔밥에다 굳이 오색오미, 오방색의 철학, 한식의 도(道) 등등 넘칠 지경의 수사(修辭)를 이미 깔고 물어온다. 이때 비빔밥의 한자 표현인 ‘골동반(骨董飯)’이 비빔밥의 가치와 우아함을 단박에 드러낼 마법의 어휘로 보이기도 하나 보다. 아마도 ‘골동’이란 말이 훈련된 취향과 점잖은 취미의 후광을 뿜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그 후광이 너무 세, 골동품과 고물 사이가 아주 좁다는 점은 또 생각지 못할 수도 있긴 하겠다.경향신문ㅣ2019. 03. 06 21:08
- 직설한국인은 돼지고기를 사랑한다?“ ‘한국인의 돼지고기 사랑’ 운운할 에피소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자주 접할 수 있고, 게다가 상대적으로 싼 식료를 결국 사랑하게 되긴 하겠지요.” 설까지 지났다. 제대로 기해년(己亥年)이다. 12지의 동물로 치면 돼지의 해다. 그래서인가, 돼지와 돼지고기에 관해 묻는 전화며 이메일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한국인은 돼지고기를 사랑한다’를 똑 떨어진 명제로 삼는 분들을 겪다가 굳이 위와 같은 답변까지 따로 준비하게 되었다.경향신문ㅣ2019. 02. 06 20:23
- 직설컵밥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심노숭’“농부가 매일 먹는 것이라고는 조밥에 나물 반찬에 지나지 않는다. 몹시 힘들여 별식을 만들어 봐야 뭉텅이로 썬 떡에 형편없이 싱거운 술이다. 귀공자가 이 모습을 보고 비웃는다. ‘이렇게 하찮은 것을 먹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을까?’ 부잣집은 하루 식비로 일천전(錢)을 써 기린을 삶아 죽 끓이고, 용을 썰어 젓갈 담근 듯한 천태만상의 기이하고 야릇한 음식을 밥상에 벌여 놓는다. 시골에서 글깨나 읽은 사람이 이 모습을 보고 탄식한다. ‘저렇게 사치를 부리니 어찌 망하지 않을까?’”경향신문ㅣ2019. 01. 09 20:51
- 직설100년 전 ‘문자 먹방’“그대로 척 들어서서 ‘밥 한 그릇 주’ 하고는 목로 걸상에 걸터앉으면 1분이 못 되어 기름기가 둥둥 뜬 뚝배기 하나와 깍두기 접시가 앞에 놓여진다. 파양념과 고춧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가지고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도무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으며 무엇에다 비할 수가 없다.” 식민지 시기의 인기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 1929년 12월호에 실린 ‘문자먹방’ 가운데 하나다. 이 잡지는 조선 기생과 할리우드 배우를 아우른 연예계 이야기, 통속적인 흥미를 살살 긁는 뒷골목 애정 비화, 섹슈얼리티를 자극적인 양념으로 삼은 풍문과 얄궂기 이를 데 없는 괴담과 추문을 적절히 요리할 줄 아는 잡지였다. 먹는 소리, 문자먹방에서도 발군이었다. 음식을 자주 다루었고, 집중력이 있었다. 고릿적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식민지 대도시의 풍경에, 일상의 풍속에, 연애하는 남녀의 산책길에, 밤 산책에, 당대 보통 조선 사람이 일평생 갈 일 없는 나라 이야기에, 어떤 상황에든 곧잘 먹는 이야기를 가져다붙였다. 일상의 음식을, 일상의 감각에 스며들도록 했다.경향신문ㅣ2018. 12. 12 20:46
- 직설별미뿐만이 아닌 겨울2018년 입동(入冬)이 벌써 지나갔다. 소설(小雪)과 대설(大雪)도 휙 지나갈 테지. 전통사회의 일상 감각에서 입동은 바야흐로 겨울이 바라보이는 때다. 입동이란 ‘겨울에 들어서다’가 아니라 ‘이제 곧[立] 겨울[冬]이다’ 하는 뜻이다. 본격적인 겨울은 소설 즈음에 시작된다고 느꼈고, 대설 즈음에 한겨울을 실감했다. 이윽고 동지(冬至)가 되면 한 해가 이울었다.경향신문ㅣ2018. 11. 14 20:51
- 직설국탕따끈한 국 한 사발이 간절한 계절이다. 국자, 탕자 돌림 음식과 한국인의 식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아닌가. 더구나 쌀쌀해지는 데에야. 세상에 자식을 낸 모든 어머니와 세상에 온 모든 아들딸을 위로하고 축하하는 미역국, 일상생활의 푸근한 벗 콩나물국, 젖산 발효의 미덕을 쥐고 따듯함을 더한 김칫국, 농민과 노동자의 한여름을 위로한 추어탕, 국물 내기의 기본기를 환기하는 곰탕과 설렁탕, 바닷바람과 바다의 날빛을 아우른 북엇국, 해안 주민의 오랜 친구인 김국과 매생이국, 채소와 고기가 손잡은 미각이 한 사발 비우는 내내 상승하는 소고기뭇국과 육개장 등등 국탕 한 그릇과 맞물린 추억 한 조각 없는 한국인은 드물리라. 이쯤만 나열하고도 미안하다. 이루 다 손꼽기 어려운 채소, 나물, 고기, 수산물이 다 국탕으로 변한다. 주재료와 부재료의 갈마듦도 다채롭다.경향신문ㅣ2018. 10. 17 20:53
- 직설명절고기“제 생업은 땔감 장사입니다. 이번 매서운 겨울 추위에 땔감을 지고 나르던 튼튼한 소가 갑자기 빙판에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조선 후기의 공문서 서식 모음이자 공문서 작성 참고서인 <유서필지(儒胥必知)>의 한 대목이다. 민원인은 “우러러 호소”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소를 잡게 해달라는 것이다. 관아는 다리 부러진 소는 잡되, 가죽은 관아에 바치고 고기는 팔아 송아지를 사라고 처분한다. 바로 뒤로 아픈 사람을 위해 소를 잡게 해달라는 청원서가 예시되어 있다. “의원은 ‘반드시 우황을 복용하고서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금(牛禁) 주금(酒禁) 송금(松禁)의 세 가지 법은 실로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라 감히 우황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금은 소 도축 금지령이고, 주금은 금주령, 송금은 벌목 금지령이다.경향신문ㅣ2018. 09. 19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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