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0

덴쇼유럽파견사절 소년단의 파견

나가사키를 걷다 5


덴쇼유럽파견사절 소년단의 파견
by보현Apr 19. 2023


일본의 선교 책임자인 토레스 신부에 이어 새로운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계속 입국해 왔다. 포르투갈과의 거래를 위해 예수회와 손잡는 다이묘들도 늘어났다. 교회는 전란으로 어지러워진 사회를 구제하기 위하여 빈민구제사업을 확장했다. 1556년에는 후나이에 병원을 개설하여 외과 치료를 시작하면서 의료 사업을 확장한 결과 구호를 받은 서민층의 입교가 많아졌다. 그리하여 1580년에는 신자수가 1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교세 확장에는 예수회의 동인도 순찰사 발리냐노의 역할이 컸다. 이탈리아 출신인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버금가는 열렬한 전도사였다. 수학, 물리, 철학,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 선교사 발리냐노가 1579년 일본에 도착하여 일본에 서양학문과 문물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면서 기독교를 전도했다. 그의 제자 중에 명나라에서 중국 전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마테오 리치가 있다.

발리냐노의 대표적 업적을 들자면 1580년 나가사키를 오무라 영주로부터 이양받아 예수회의 근거지로 만든 것이다. 예수회의 포교 방침은 현지에서 사제와 수도자를 육성해, 방인 전도사의 힘으로 포교 활동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 방침에 따라 그는 신학교 설립에 매진했다. 예수회의 초등교육기관인 세미나리오 두 곳과 고등교육기관인 콜레지오 한 곳, 예수회원을 양성하는 수련원인 노비치아트 한 곳 등 4곳을 채 3년이 되지 않는 기간에 설립한 것도 발리냐노의 업적이었다. 그는 또 인도관구에 속해 있던 일본교회를 분활하여 일본대교구로 승격시키고(1580년) 이를 세 교구로 나누어 포교체제를 정비하였다. 초대 감목대리(監牧代理)에는 코엘료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발리냐노의 최대의 업적은 덴쇼소년사절단을 로마에 보내 교황을 알현케하므로서 서방세계에 일본 교회의 존재를 알린 일일 것이다. 더불어 일본도 인도나 유럽의 존재를 각인하는 계기를 만든 일일 것이다.




발리냐노는 선교사업에 많은 자금을 사용했다. 그는 주변으로부터 '일본 교회를 발리냐노가 파산시킨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활발한 전교사업을 벌였다. 그래서 발리냐노는 일본에서의 포교 자금을 로마 교황이나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지원받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방안으로서 일본의 소년들을 유럽으로 파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 소년들에게 유럽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의 영광과 위대함을 알리고 증인으로 삼는 부가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나이 어린 소년들을 선택한 것은, 향후 장기간에 걸친 기독교 포교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절은 일본 국왕을 대신하여 파견해야 하나 발리냐노는 나가사키의 오무라 스미타다와 분고(豊後)의 오토모 소린, 그리고 히젠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같은 기독교 다이묘들의 이름을 빌렸다. 오토모 소린 측의 사자로 이토 만쇼(伊東マンショ)가 선택됐고, 아리마 하루노부의 사자로 치지와 미겔(千々石ミゲル)이, 오무라 스미타다의 사신으로는 하라 마르티노(原マルティーノ)와 나카우라 줄리안(中浦ジュリアン)이 선택됐다.

이 소년들은 아리마(有馬)의 세미나리오에서 공부하고 있던 소년들이었다. 이 세미나리오는 아리마 하루노부가 거주하던 히노에성 아래에 설치되어 있었다. 아리마 하루노부는 시마바라(島原)의 영주로서 오무라 스미타다의 조카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무라 스미타다는 시마바라(島原)의 아리마 하루즈미(有馬晴純)의 둘째 아들이었다. 장남이자 큰형이 아리마 가문을 이었는데 그의 아들이 아리마 하루노부였다. 그는 1576년, 삼촌인 오무라 스미타다와 같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발리냐노 신부의 요청에 부응하여 예수회의 초등교육기관인 세미나리오를 히노에성에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1582년 2월 20일, 기독교인 다이묘들의 편지를 가진 소년들을 태운 배가 발리냐노와 함께 나가사키항을 출항하였다. 이때만 해도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오다 노부나가의 지지가 확고할 때였다. 이들은 험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585년,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을 알현하였다. 일본 최초의 유럽 파견단인 덴쇼유럽사절단은 지도 신부들을 당황스럽게 할 정도로 대단한 흥행과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유럽에서 일본은 ‘황금의 땅 지팡구’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마르코폴로가 원나라를 방문하고 쓴 ‘동방견문록’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국의 왕은 순금으로 만든 궁전에 살고 있다고 소개하였는데, 이는 대항해시대를 맞아 모험가들이 미지의 세계로 출항하게 하던 원인이 되었다. 콜롬버스도 항해를 나설 때 동방견문록을 소중히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런 신비한 나라에서 어린 소년들이 자신들이 가토릭교도임을 천명하며 가톨릭 국가들을 방문해왔으니 온 유럽이 호기심과 자부심으로 들끓었음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일본을 떠난 후 4개월 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권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고 그들이 조국을 떠난 지 8년만인 1590년 일본에 돌아왔을 때 일본의 선교 환경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덴쇼유럽파견소년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

16세기 말, 범선을 타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여행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사절단으로 뽑힌 소년들의 가족들은 이 항해에 적극 반대했으나 소년들은 종교심으로 반대를 이겨내었다.

1582년 2월 20일, 나가사키를 출발한 그들은 동중국해를 남하하던 중 폭풍우에 시달리다 3월 9일 겨우 마카오에 도착했다. 날씨 때문에 마카오에 잡혀있었던 그들은 그해 12월 31일 마카오를 떠나 해적에 습격당하는 등의 재난을 겪으면서, 이듬해 2월 6일 말라카에 도착했다. 이후 스리랑카의 콜롬보에 기항했다가 장마로 발이 묶여 있다가 간신히 인도의 고아에 도착한 것이 1583년 11월 20일이었다.

그곳에서 발리냐노와 소년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발리냐노가 인도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소년들의 항해에 더 이상 동참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소년들은 동요하였으나 발리냐노가 그들을 타일러 메스키타 신부들이 일행은 이끌기로 하였다.

그들은 고아를 떠나 1584년 5월 10일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을 북상하여 1584년 8월 11일, 리스본에 도착하였다. 나가사키를 출발한 지 2년 6개월만이었다. 도중에 만쇼는 이질로 죽을 뻔하였고 미겔은 열병에 걸려 중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네 명의 소년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들이 포르투갈을 거쳐 스페인으로 향할 때 소년 사절단은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과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펠리페 2세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다. 펠리페 2세는 교회 지도자들과 영주들에게 연락하여 동방에서 온 이 특별한 손님들을 특별히 다뤄 달라고 부탁하였다.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펠리페 2세는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재화에 둘러싸여 유럽 최고의 부자 군왕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가톨릭 교회 수호자의 역할을 앞장서서 맡고 있었다.

이후 사절단은 1584년 10월 20일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들어갔고 11월 14일, 당대 최고의 권력자 펠리페 2세를 알현하였다. 펠리페 2세는 이들을 포옹하며 파격적인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왕의 배려로 수도원, 박물관, 도서관 등 스페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곳들을 방문했다. 처음으로 유럽의 거리 모습과 성당, 궁전 건물을 본 소년들의 놀라움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후 소년 사절단은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서 1584년 11월 26일 마드리드를 떠나 1585년 3월 22일 밤,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도착한 바로 다음 날 곧바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와의 알현의식이 거행되었다. 알현의식은 어마어마하게 거창하게 치러졌다. 소년단 일행은 로마교황청 국경에서부터 300명의 병정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로 행진했다. 열병에 걸린 줄리안을 제외하고 이토 만쇼, 치지와 미겔, 하라 마르티노 세 사람은 왕과 제후의 사절을 따라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행진했다. 세 사람의 좌우에는 각각 대주교가 따르고 그 뒤를 헤아릴 수 없는 귀족들이 기마를 타고 따라왔다. 200여발의 축포가 쏟아졌고, 소년들은 외국의 제왕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며, 교황을 알현했다. 소년단의 방문에 감명을 받은 교황은 그들에게 일본 포교 사업에 막대한 지원금을 약속했고, 소년들에게 서양식 양복과 모자, 구두, 외투를 선물했다.

당시 소년 사절단은 70일간 로마에 체류했는데, 당시 사절들의 유럽 순방 모습은 수많은 책자에 실려 유럽 각지에서 출판되었다.



1586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인쇄된 덴쇼 소년 시절단의 초상, 가운데는 메스키타 신부




당시 소년 사절단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종교개혁으로 개신교 세력이 반기를 드는 마당에 미지의 동방국가에서 가톨릭 신자임을 내세우는 젊은이들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가톨릭 측은 고무됐다.

교황을 만난다는 애초의 목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년단은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교황은 물론 국왕, 제후, 귀족으로부터 수여받은 거액의 금과 은, 산과 같은 선물을 싣고 그들을 실은 배는 1586년 4월 12일 리스본을 출범하여 인도 고아로 향했다. 그 배에는 메스키타 신부가 구입한 구텐베르크 인쇄기와 활자들도 실려 있었다.

배는 폭풍우와 좌초 위험을 뚫고 1586년 7월 7일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간 후 1587년 5월 29일, 드디어 고아에 도착하였다. 발리냐노 신부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한 소년단을 맞이해야 했다.

덴쇼 소년사절단의 가장 큰 의의는, 서양 세계에 일본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렸다는 것이다. 소년단의 유럽 방문은 이후 교체된 일본의 정권하에서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일본이 세계 정세에 민감하게 움직이고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구텐베르크 인쇄기에 의해 일본은 동아시아 최초로 서양식 활판기술을 도입하여 책을 찍게 되었다.

소년사절단이 유럽에서 열렬한 환대를 받고있는 사이에 일본 정세가 변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고 권력자로 바뀐 상태였고 그는 기독교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발리냐노는 소년 사절단에 대한 비판을 피할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소년 사절단이 고아에 1년 가까이 머문 데에는 이러한 복잡한 정세가 놓여 있었다.

발리냐노는 인도 부왕이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사절단을 편성하기로 하였다. 자신이 정사가 되고 이토 만쇼 등을 수행원으로 하는 사절단이었다. 이로써 덴쇼 소년사절단은 기독교 다이묘의 사절이 아니라 포르투갈, 인도 부왕의 사절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8월 11일 마카오에 들어갔을 때 히데요시가 예수회 선교사를 추방하는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을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소년사절단을 지원했던 오무라 스미타다와 오토모 소린이 연달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들은 또다시 마카오에 1년 10개월을 머무르며 예기치 못한 사태를 타개할 묘책을 강구하였다.

이들은 나가사키에 입항한 포르투갈선 선장을 교토에 보내 히데요시와 교섭해 인도 부왕의 사절 수행원으로 이들이 귀국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고 그래서 1590년 6월 23일에야 마카오를 떠날 수 있었다.



덴쇼 소년 사절단의 행로




1590년 7월 21일, 소년 사절단이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 위해서는 7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히데요시를 달래야 했던 발리냐노는 덴쇼 소년단과 함께 교토의 히데요시의 거처로 달려가 황금장식을 붙인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밀라노산 백색 갑주 2벌, 모두 은으로 된 매우 훌륭한 장식이 붙은 커다란 검 두 자루, 진귀한 두 자루의 총포, 야전용 천막 한 세트, 유화, 아라비아산 말 두 마리 등을 선물로 바쳤다. 보답으로 히데요시는 발리냐노에게 커다란 쟁반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은 100매, 다른 쟁반에는 솜을 둔 비단 옷 4벌이 들어있었다. 또 그를 수행한 예수회 사제들에게도 똑같이 은과 비단 옷을 선물했다. 히데요시는 소년 사절단은 말석에 앉혀 애써 그들을 무시했다.




흥분과 격정의 순간은 지나가고 네 소년도 일상 생활을 맞게 되었다. 소년 사절단 4명은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나 네 사람의 전도는 순탄치 않았다. 나가사키의 오무라 스미타다와 분고(豊後)의 오토모 소린, 그리고 히젠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같은 기독교 다이묘들의 이름을 빌렸다. 오토모 소린 측의 사자로 이토 만쇼(伊東マンショ)가 선택됐고, 아리마 하루노부의 사자로 치지와 미겔(千々石ミゲル)이, 오무라 스미타다의 사신으로는 하라 마르티노(原マルティーノ)와 나카우라 줄리안(中浦ジュリアン)이 선택됐다.

분고 출신의 이토 만쇼는 1608년 사제가 된 후 오구라 교회와 야마구치에서 선교하다 고향인 사이토시까지 갔다. 이후 시모노세키와 나카츠로 다니다가 1612년 나가사키로 돌아온 만쇼는 너무 지쳐 메스키타와 마르티노의 기도 속에 선종했다. 그의 나이 43세때였다.

오무라 스미타다의 사자로 유럽에 갔던 하라 마르티노도 160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마르티노는 소년들 중에서 라틴어를 가장 잘 습득했으며, 언어에 강점을 보여 번역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설파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토 만쇼가 죽고 2년 후인 1614년 11월, 마카오로 추방되어 두 번 다시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1629년 마카오에서 병사했다. 향년 60세. 마카오 성당의 지하에 스승인 발리냐노와 함께 묻혔다.

소년 사절단 4명 중 가장 두드러진 선교 활동을 펼친 것은 나카우라 줄리안이었다. 만쇼와 마르티노와 함께 사제로 서품된 줄리안은 교토나 하카타에서 포교 활동을 계속했고, 마르티노가 마카오에 추방된 후에도 일본 국내에 잠복하여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20여년간 잠복 생활을 하던 그는 1632년 체포되어 1633년 10월 18일, 니시자카 언덕에서 구멍에 거꾸로 매달린 형으로 고통스럽게 순교하였다. 형장에 들어서면서 "내가 로마로 갔던 나카우라 줄리안 신부이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그의 나이 65세였다. 줄리안은 2008년 11월 14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므로서 소년 사절단 중 유일하게 복자품에 오른 인물이되었다.

4명의 사절단 중에서 가장 대척점에 선 사람이 치지와 미겔이었다. 아리마 하루노부의 사자로 유럽에 갔던 그는 귀국 후 아마쿠사의 코레지요에서 공부를 계속 하였는데, 몸이 약했던 탓인지 공부에 뒤쳐지기 시작하였고 결국 마카오로 가는 신부 시험에서 불합격한 것을 계기로 예수회를 퇴회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촌인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아래로 들어가 기독교(가톨릭) 신앙을 버렸다. 이교도로서 나가사키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나 그의 말년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시마바라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덴쇼사절단의 네 소년상을 그렸다.




16세기 말 유럽에 파견되었던 소년사절단의 8년간의 여행은 이후 일본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쇼군들은 쇄국정책을 펼치며 사무라이에 의한 통치체제를 수백년간 유지하였지만 결코 바깥세계의 동태에 대해 눈감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인도로 가겠다고 우리나라에 길을 열어달라고 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사건을 뚱딴지같은 이유라고 생각했었는데, 발리냐노를 통한 소년단 사건을 보면서 히데요시의 욕망이 여기서부터 싹튼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리냐노가 인도와 일본을 오가며 보여준 인도를 향한 길이 히데요시에게 인도를 향한 욕망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마치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일본의 무모함이 이미 히데요시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시마바라 교회에 앉아 덴쇼소년사절단의 네 소년의 모습이 그려진 스테인드 글라스를 바라보며 세계는 어떤 끈으로 연결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년
유럽
선교 댓글
보현출간작가


40년간 교단생활을 마치고 가정으로 돌아온 아마추어 작가입니다. 인생 후반기를 독서하고 글쓰고 꽃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고 싶은 할맵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