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6

[ ‘나가사키의 종’(1949)] < 더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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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아내를 담은 양동이를 안고
기자명 더뷰스
입력 202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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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방 발견했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검은 덩어리를.... 그것은 탈대로 타버리고 남은 아내의 골반과 요추였다. 곁에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의 사슬이 남아있었다.



더뷰스 공부 : 나가이 다카시의 수필 '로사리오의 사슬'을 읽으며

내가 결혼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삼 년째 되는 해였는데 당시 조수로서 월급이 사십원이었다. 만주사변 당시로 물가는 싼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사십원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아내로부터 불평을 들은 적이 없다. 새옷 한 번 사주지 않았다. 극장에 간 일도 없다. 둘이서 요리집으로 외식을 하러간 일도 없다. 오락이라고 해보았자 일년에 한번 바다에 간 정도뿐이다. 나는 매일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고 아내는 살림에 전념하고 있었다.

월 사십원의 생활은 칠년간 계속됐다. 가족의 옷은 전부 아내의 수제품이었다. 내 양말에서부터 와이셔츠에 이르기까지 한땀한땀 정성을 쏟아 만든 것이었다. 그걸 보고 연구실의 아가씨가 "선생님은 낮에도 사모님에게 안겨 있군요"라고 했다.

아내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프랑스제 입술 연지도 이탈리아제 향수도 손쉽게 살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거리에는 유한마담이라고 불리는 계급의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시대였다. 식량도 썩어나도록 풍부했다.

아내는 갠 날엔 거름통을 메고 밭에서 일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바느질이랑 뜨개질로 일손을 놓지 않았다. 마을의 부인회 연합반장의 바쁜 역할도 해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나의 아내로서의 임무, 반 미치광이의 시중도 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한 가지 새로운 연구에 착수하면 나라는 인간은 변해버린다. 연구테마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버린다. 며칠씩 도서관에 틀어박혀 선인들의 업적을 조사한다. 카드를 만든다. 그걸 정리해서는 나의 새로운 방법을 구상한다. 실험장치를 만든다. 드디어 실험에 착수한다. 몇 개월만에 결과가 나온다. 그걸 정리하여 논문을 쓴다. 교정을 본다.

이런 수순인데 그러는 동안에는 연구 이외의 것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를 걸어오면 대답은 한다. 밥이 나오면 먹기는 한다. 아이가 울면 노려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내가 대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스쳐 지나가는데 모르고 지나친 일이 두 번 있었다고 한다. 뒤에 아내에게서 그 말을 듣고 "저런!"하고 놀랐다.

그럴 때의 나는 허공을 쏘아보면서 입속에서 무언가 중얼중얼하기 때문에 어쩐지 무섭다고 한다. "마치 몽유병자를 간호하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아내가 말한 적이 있다.

꼭 의논해야할 집안일이 생겨도 말을 못하고, 남편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도 없고, 두뇌를 쓰므로 특별요리를 만들어야 하고, 자칫 방심하고 있으면 넥타이도 잊어버리고 뛰쳐나가기 때문에 몸에 걸치는 일상사도 신경을 늦출 수가 없고, 방안에 가득히 늘어놓은 조사카드, 노트, 참고서, 사진, 휴지 등등 치워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알 수가 없고, 저녁 귀가 시간을 일정하지 않고...이런 남편의 시중을 용케도 아내는 연약한 팔로 해낸 것이다.

이런 아내의 노고에 대해서 내가 보답한 것은 겨우 잡지에 실린 내 논문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남들 같으면 소파에 편안히 기대고 파이프를 피우면서, 혹은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대충대충 읽는 시늉이나 하는 잡지를 아내는 단정하게 고쳐앉아 정중히 받들고난 다음에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었다.

잉크냄새 나는 활자가 내 이름을 찍어놓은 그 페이지, 그것은 전문용어로 가득 차 읽어도 이해 못하는 문장이다. 그것은 몇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것이지만 그 속에 남편의 생명이 마치 가다랭이포처럼 깎여 들어차 있는 것을 아는 아내는 눈시울까지 적시면서 읽어가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 나는 아내 대신 어린 것을 안고 어르면서 잠시 가슴 속에 온천물이 솟아나는 것 같은 생각에 잠겨 있다.

우리 집의 행복한 시간, 그것은 일요일 아침 모두 함께 성당에 미사 참례하러 가는 때였다. 나는 큰 아이 손을 끌고 아내는 작은 아이를 업고 밭둑길로 언덕 위 빨간 벽돌 성당에 간다.

종각에서는 우리를 부르는 종소리가 맑고 부드럽게 울려퍼진다. 저 집에서도 이 집에서도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나와서 같은 길에 합류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비쳐드는 아침햇살의 물결 속에 앉아서 내 목소리도 아내의 목소리도 더듬거리는 어린 것 목소리도 옆자리에 앉은 늙은 농부의 탁한 목소리도 하나가 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를 참미해 올렸다. 그런 행복한 날은 이제 나에게는 오지 않는다.

나의 교우는 매우 적었다. 모두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학자들이었다. 어느 여름밤이었다. 내가 좁은 마당, 돌에 앉아서 달빛을 받고 있으려니까 해부학과의 나카무라 조교수가 한손에 부채를 들고 훌쩍 찾아왔다.

그는 내 앞에 있는 돌에 걸터앉자마자, 도룡뇽 알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것이 우리 집 평상에서의 화제였다.

그는 처녀생식의 실험을 하고 있었다. 작년에 참개구리 알의 실험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알의 어느 극을 백금침으로 가볍게 콕콕 찔러주면 그것이 정충 진압과 같은 자극이 되는지 알은 정상적으로 분할을 시작하고 차츰 성장하여 정상적인 개구리가 되었다. 금년에도 그것을 도룡뇽의 알로 실험을 하고있는 중이었다. 그것에 성공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포유류로 해보고 싶은 것이다.

아내가 들통에 우물물을 길어왔다. 그 안에 토마토가 떠 있었다. 나카무라군은 왼손에 토마토를 올려놓고 오른손에 오이를 쥐고 그걸 난자와 정자로 가정하여 바짝 갖다댔다가 떼었다가 하면서 계속 설명을 하면서 덥썩덥썩 베어먹었으므로 어느 틈에 난자도 정자도 위장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좁은 뜰을 향해 나 있는 안방에서 셔츠에 다림질을 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카무라 군이 안방에다 대고 말을 걸었다.

"사모님, 머지않아 아이를 낳는데는 남편이 필요없을 것 같아요."

그랬더니 아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럴까요?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부부의 목적이 아이를 낳는 일만은 아닐텐데요."

나카무라 군은 이 대답을 듣고 빙긋이 웃었다.

나는 조교수가 되어 월급이 백원으로 올랐다. 아내는 그래서 겨우 마음을 놓았다. 머지 않아 아이가 소학교에 다니게 되므로 사십원으로는 난감할 처지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극구경 같은 걸 갈 여유는 생기지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나는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몰두하고 있던 방사선에 피폭되어 백혈병에 걸리고 말았다. 남은 목숨이 앞으로 몇 년 되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은 날 나는 신뢰하고 있던 아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선후책을 생각하자고 말했다. 그때 아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듣고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 아내가 믿음직스러워 기뻤다. 이런 운명은 아내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아내라면 내가 죽은 뒤에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 나처럼 방사선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로 만들어주겠지. 나는 사후의 근심 없이 연구의 마지막 마무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아내는 더욱 깊은 애정을 가지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병세가 차츰 진행하여 공습경보가 내려 무거운 철모를 쓰거나 하면 다리가 비틀거릴 정도였다. 한번은 아내에게 업혀서 출근한 일도 있었다.

8월8일 아침 아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출근하는 나를 배웅했다. 조금 가다가 나는 도시락을 잊은 것이 생각나 집에 되돌아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현관에 엎드려 울고있는 아내를 본 것이다.

그것이 이별이었다. 그날 밤은 방공 당번이어서 연구실에서 묵었다. 다음날인 9일. 원자폭탄이 내 위에서 폭발했다. 나는 상처를 입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환자들의 구호에 바빴던 다섯 시간 뒤 나는 출혈로 밭에 쓰러졌다. 그때 아내의 죽음을 직감했다-라고 하는 것은 아내가 끝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대학까지 1킬로미터니까 기어서 와도 다섯 시간이면 올 수 있다. 설령 중상을 입었더라도 목숨이 있는 한은 기어서라도 기어코 나의 안위를 물으러 와주었을 아내였다.

사흘째, 학생들의 사상자 처리도 일단락되었으므로 황혼 무렵 집에 돌아갔다. 온통 잿더미였다.

나는 금방 발견했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검은 덩어리를.... 그것은 탈대로 타버리고 남은 골반과 요추였다. 곁에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의 사슬이 남아있었다.

불에 탄 양동이에 아내를 주워담았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걸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갔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려 저녁 해가 비치는 잿더미 위에 같은 모양의 까만 뼈가 점점이 보였다. 내 뼈를 머지않아 아내가 안고갈 예정이었는데...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 가슴에 안긴 아내가 바스락바스락 인산석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있는 거라고 들었다.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1909~1950) 수필 '로사리오의 사슬' 
(홍성숙 선생 번역, 1998년 을유문화사 '세계의 명수필' 중에서)




나가이 다카시 교수가 '로사리오의 묵주'를 손에 감고 기도를 하고 있다. 원폭에 맞은 뒤 뼛가루만 남은 아내가 차고 있었던 바로 그것.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

1945년 8월 7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틀 뒤인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폭 2발을 떨어뜨렸다.

이날 나가사키 의대 조교수 나가이는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700m 떨어진 곳에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나가이는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병원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사흘이 지난 뒤에야 1킬로미터 떨어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무너져 내린 집의 부엌쯤에 골반뼈와 요추뼈만 남은 아내를 만난다. 그녀가 걸고 있는 로사리오 사슬이 그 옆에 떨어져 있다. 그는 담담히 이 풍경을 그리고 있다. 나가이 교수는 이후 늘 그 사슬을 손에 감고 기도를 하곤 했다.

로사리오(Rosario)란 말은 ‘장미화관’, ‘장미 꽃다발’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이며 묵주(默珠), 혹은 묵주의 기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묵주는, 구슬이나 나무알을 열 개씩 구분하여 여섯 마디로 엮은 염주형식의 것으로 십자가가 달려있는 물건이다. 이를 사용하여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묵주의 기도라 한다. 로사리오의 길은, 묵주기도를 하며 묵상하고 걷는 길을 말한다. 아내는 그 로사리오 사슬을 만지며 남편이 다시 건강해지는 기적을 빌었을 것이다.

아내를 잃고 난 뒤 남편이 손에 감고 있던 로사리오 사슬이 떠올리게 했을 풍경이 수필 속에 들어가 있다. "우리 집의 행복한 시간, 일요일 아침 모두 함께 성당에 미사 참례하러 가는 때였다. 나는 큰 아이(세이치) 손을 끌고 아내는 작은 아이(카야노)를 업고 밭둑길로 언덕 위 빨간 벽돌 성당에 간다. 종각에서는 우리를 부르는 종소리가 맑고 부드럽게 퍼진다. 저 집에서도 이 집에서도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나와서 같은 길에 합류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비쳐드는 아침 햇살의 물결 속에 앉아서 내 목소리도 아내의 목소리도 더듬거리는 어린 것 목소리도 옆자리에 앉은 늙은 농부의 탁한 목소리도 하나가 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를 찬미해 올렸다. 그런 행복한 날은 이제 나에게는 오지 않는다."
그날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은 7만3천884명이고, 부상자는 7만4천909명으로 공식 집계(1945년 12월말 집계)됐다. 당시 나가사키의 인구는 24만명 정도였다.



시한부 삶 남편을 생각하며, 몰래 울고 있었던 아내

나가이는 방사선 치료 연구를 하다가 피폭되어 만성 골수 백혈병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아내에게 얼마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다.

원폭이 떨어지는 날 아침에 잊고온 도시락을 찾으러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내가 울고 있었던 건, 시한부 삶을 사는 남편을 생각하며 몰래 오열하고 있던 것이었다. 막상 남편 앞에서는 걱정을 끼칠까 울지도 않던 그녀였다.

나가이는 아내를 묻고 다시 대학병원으로 돌아가 구호활동에 전념한다. 그날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은 7만3천884명이고, 부상자는 7만4천909명으로 공식 집계(1945년 12월말 집계)됐다. 당시 나가사키의 인구는 24만명 정도였다.

이 때의 상황을 기록해놓은 일지들은 1945년 10월 '구호대활동보고서'라는 기록물로 출판되었다. 당시 원고를 검열했던 미국 국방성은 이 책의 출판을 한 동안 금지하기도 했다. 나가이가 이 책을 낸 이유를 이렇게 새겨놓았다.
나가사키(長崎) 원폭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는, 1945년 8월9일 투하된 원자폭탄 모형.



원폭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기에 불장난을 하는 것

“그만 두라, 멈춰라, 전쟁만큼은 하지 말아다오. 사람들은 원자폭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불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진상을 그대로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곧바로 연필을 잡고 나가사키 최후의 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기록했다.”

이 기록물은 이후 다시 정리하여 ‘나가사키의 종’(1949)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 원폭 피해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의사의 시각에서 씌어진 기록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한국에는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영화와 노래로도 제작되었다.

인류가 처음으로 직접 경험한 원자폭탄의 재앙. 그 피해 당사자로서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최초의 작가인 나가이는, 이후의 인류에게 글이 무엇이며 문학이 무엇인지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헬렌 켈러는 그를 보기 위해 나가사키에 찾아오기도 했다.
나가이가 지어 거주했던 집필실 '여기당'



집필실 '여기당(如己堂)'

백혈병 증세가 악화하자 그는 병원 일을 그만 두고 요양을 위한 집을 짓고 거기에서 집필을 했다. 그 집에는 '여기당(如己堂, 뇨코도)'이란 현판을 걸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如己愛人) 는 성경 말씀을 딴 것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라는 책을 남겼다. 자신의 두 아들 세이치와 카야노에게 주는 형식으로 쓴 글들이다.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세이치야. 카야노야. 비록 마지막 두 명이 남아 비난이나 폭력을 당하더라도, 굳건히 ‘전쟁을 필사반대한다’고 외쳐다오. 비겁자라고 멸시당하고 배신자라고 두들겨 맞는 한이 있어도 그런 뜻을 버려선 안된다."

나가이는 1950년 5월3일 세상을 뜬다. 방사능 피폭 후유증으로 얻은 백혈병으로 투병한지 5년만이었다. 일본정부는 그에게 국가표창과 나가사키 명예시민증을 주었다. 장례는 폐허가 된 우라카미 교회에서 치러졌고 2만 여명의 추도객이 몰렸다.

나가사키엔 일제히 종이 울렸다

영결식이 끝난 뒤 모든 교회와 성당, 사찰이 일제히 종을 울렸다. 그 전해에 나온 책의 제목인 '나가사키의 종'이 그의 죽음 뒤에 일제히 울린 셈이다.

그는 제9조1항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기로 결의한 조항' (일본은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육해공군을 보유하지 않는다)때문에 일본헌법(1947년 제정)은 평화헌법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환기했다. 목숨을 걸고 이 평화헌법을 지켜달라고 당부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잿더미 아내가 속삭인 말을 떠올린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더 이상 죽은 자가 미안해 하게 해선 안된다.

더뷰스 핫리뷰어 이빈섬 isom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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