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7

[손민석] 한국인이 바라본 중국 신해혁명의 모습은 어떨까? by 혁명읽는사람 - 얼룩소 alookso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한국인이 바라본 중국 신해혁명의 모습은 어떨까? by 혁명읽는사람 - 얼룩소 alookso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한국인이 바라본 중국 신해혁명의 모습은 어떨까?

 배경한의 <동아시아 역사 속의 신해혁명>(한울, 2013)에 관한 추천의 글을 적어보았다. 이 책은 한국의 중국사 연구의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게 해주는 책으로 내 개인적인 공부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친 저작이라 한번쯤 이렇게 소개하는 글을 적으려 했다. 이 글을 읽고 배경한 선생의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으로 이 글의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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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84488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쪽은 민두기 선생(이하 존칭생략)과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신해혁명과 국민당혁명을 화두로 삼아 청말 개혁 및 개혁주체세력으로서의 신사계층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논의를 점점 확장시켜나갔다. 신사계층에 대한 민두기의 연구에서부터 축적된 역량이 주로 신해혁명과 국민당 관련 주제에서 크게 드러난다. 신해혁명에 관한 민두기의 연구는 그의 제자 배경한으로 이어지며 확장되고 있다. 그렇기에 배경한의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두기의 학술세계를 간략하게나마 제시해야 한다.

1. 민두기의 학문세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8054
민두기의 연구틀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민두기 선생의 신해혁명론을 관통하는 큰 축은 국가와 지방 간의 대립이다. 민두기의 신해혁명론은 1972년에 쓴 <중국근대사연구>에 실린 청말의 강정(江浙, 강소성과 절강성)에서 발생한 반(反)제국주의 혹은 (한족 중심의) 내셔널리즘적 성향의 저항운동을 분석하는 논문에서 시작된다. 이 운동은 철로 사업을 위한 영국의 차관도입과 그에 대한 청왕조의 지지에 대항하여 나타난 신사계층이 중심이 된 지역주의 세력의 조직된 저항이었다. 이 논문을 계기로 민두기의 학문세계는 중국의 전통과 근대를 '단절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신사계층을 중심에 두고 "연속적"인 과정으로 파악하게 된다. 이후에 나오는 민두기의 제자들의 여러 학위논문들 또한 신사계층이 중심이 된 지역주의가 각 지방의 계층, 계급적 특색, 지역적 특색, 외국과의 관계, 청왕조와의 관련성 등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그 복잡다단한 과정을 신해혁명 및 국민혁명과의 연결 속에서 고찰한다.

민두기의 신해혁명론은 당대 중국과 일본 학계를 풍미하고 있던 "신해혁명=부르주아 혁명론"을 논파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사계층에 기반한 전통과 근대의 연속적 과정 속에서 나타난 공화주의 혁명의 일환으로 파악하는 민두기의 입장에서 볼 때 부르주아혁명론은 당대 일본의 중국근현대사 연구가 마르크스주의 운동이라는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강하게 묶여 있다는 증거로 보였다. 민두기의 신해혁명론은 1911년 시작된 신해혁명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919년 5.4운동에 의해 실질적인 내용이 채워져 1924년 국민혁명에 이르는 상당히 긴 기간에 걸친 변화과정을 묶는 개념이다. 그 내용들도 상당히 흥미롭지만 역시나 핵심축은 '신사계층-지역주의-군벌-국민혁명'이라 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신해혁명론의 사례연구에 해당하는 양주 지역에서의 신해혁명의 전개에 관한 연구에서 민두기는 신해혁명 당시 양주 지역의 여러 사회적 집단들이 신사계층을 중심으로 지역군벌들과의 협력 속에서 치안을 유지하며 혁명을 수행했다고 본다. 즉 신사계층과 무력을 보유한 지역군벌집단 간의 연합정권이 신해혁명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후의 혁명의 진전 속에서 지역적 군벌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국민혁명의 필요성이 요구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방분권적인 신사계층 및 그들과 결탁한 군벌세력을 통합하는 거대한 군사혁명 겸 중앙집중화의 경향성이 나타나야 한다.

이처럼 혁명이 제도화되어 입헌적 공화정의 건설로 이어지는 과정 전체를 민두기는 중앙집권과 분권이라는 화두로 추적하며 심화시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민두기의 신해혁명론의 핵심에는 신해혁명이 마르크스주의적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공화혁명'이라는 것이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인의 관점에서 이 '신해혁명=공화혁명'은 아시아, 주요하게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이웃의 한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중국의 공화혁명이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제국주의에 가했을 충격은 지금도 충분히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천황제 군주정, 군국주의, 제국주의, 지주제, 재벌 등의 독점자본주의 등을 구성요소로 하는 일본제국주의에 중국의 공화주의 혁명은 일본의 아시아로의 확장에 대항하는 주변부로 파급될 충분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민두기의 제자 배경한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한반도의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의 공화주의 혁명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또 반대로 중국의 공화주의 혁명을 이끈 국민당 세력은 한반도를 어떻게 인식하였는지에 천착한다.

민두기는 신해혁명을 두 단계로 나누어 파악한다. 1단계로는 아시아 공화주의 혁명의 기점으로 1911년 신해혁명이 강조된다. 1911년의 신해혁명을 통해서 '일단은' 공화정이 제도로서 성립되었지만 곧바로 쑨원의 죽음,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 등의 여러 복잡한 상황을 거치며 일정한 정도로 공화정이 형해화되어버린다. 민두기는 껍데기만 남아버린 신해혁명의 성과가 실질적으로 회복되는 2단계가 바로 1919년의 5.4운동이라 주장한다. 1911년의 신해혁명이 공화정이라는 형식을 갖췄다면, 1919년의 5.4운동은 그것의 실질적인 내용을 충족시켰다. 민두기는 이런 신해혁명론에 근거하여 중국 국내에서 1911년의 신해혁명과 1919년의 5.4운동을 거쳐 제도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과 함께 대외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 등에 영향을 미쳐 확산되어가는 과정을 통합적으로 고찰한다. 

민두기는 공화주의 혁명과 그것의 전파 및 중국국내에서의 제도화라는 화두 외에도 이 공화주의 혁명이 제도화되어 정착되었다 할 때 그것을 구체적으로 운영할 "자유주의 세력"의 중국화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1970년대 자유주의 지식인 호적(胡適)의 문집을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된 그의 호적 연구는 상당히 재밌는 지점이 많다. 중국의 자유주의 실험의 실패라는 관점을 호적이라는 대표인물을 통해 설명하는 과정에는 현대 중국사의 전개를 바라보는 그의 입장이 녹아 있다. '강력한 국가의 건설-부국의 추구-균등의 구현'이라는 중국근현대사의 전개과정을 그는 청말의 신사계층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신해혁명론을 거쳐 호적에 대한 연구로 통찰해낸다.

2. 민두기의 제자인 배경한의 연구세계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8/11/20/2018112000150.html
민두기의 제자인 배경한의 주요한 관심사는 쑨원과 중일전쟁이다. 배경한의 모든 저작과 연구를 세밀하게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배경한이 민두기의 신해혁명론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켰는가를 논해보자면 역시나 민두기의 관점은 다소 일국주의적인 측면이 강한데 반해 배경한은 아시아적 관점을 중시한다. 이렇게 말하면 민두기보다 배경한을 높게 평가하는 말이 될 수 있기에 민두기의 연구의 축적을 계승하여 확장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생각된다.

배경한에게 있어 신해혁명은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 혁명이면서 동시에 만주족의 지배에 대한 한족의 민족혁명이기도 하다. 2천년 넘게 이어진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정을 전복하는 공화주의 혁명이면서 동시에 만주족 등의 이민족 지배에 대항하여 한족 중심의 중화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민족혁명이라는 지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기존의 만주족의 청왕조가 다스리던 군주제 중심의 동북아 지역질서가 공화주의 혁명 속에서 붕괴하게 되자 지역적 차원에서 '주권의 공백'이 생긴다. 한족의 민족혁명은 당연히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지배 하에 놓여 있던 티베트, 몽골 등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로 이어진다. 주권의 공백을 채우려는 한족의 노력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주변부 민족들의 저항 간의 괴리가 신해혁명의 모순이라는 것이 배경한의 주요한 논지이다. 이 괴리를 국민혁명이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가? 다시 말해 주권의 공백을 어떠한 방식으로 채우려고 신해혁명의 연속으로서의 국민혁명이 지향했는지에 대해 배경한은 아시아적 관점에서 접근하며 설명하려 노력한다.

한족 중심의 중국 내셔널리즘의 형성 과정은 앞서 민두기가 제시한 공화혁명의 1, 2단계를 거치며 공화정이 제도화되는 것과 함께 단순한 반만(反滿) 의식에서 벗어나 반(反)제국주의로 심화되어 간다. 다시 말해서 국내의 봉건적 질서에 대한 저항이 국내의 봉건적 질서와 결탁하여 중국의 주권을 제약하고 있는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이어지며 확장되었다. 배경한은 이 과정을 쑨원과 그의 두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장제스-왕징웨이라는 인물적 관점과 함께 중국인이 아닌 "아시아인"의 반제국주의 운동으로서의 '중일전쟁'이라는 사건사적 관점을 엮어서 파악하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중국의 공화주의 혁명은 군주정과 제국주의적 질서가 지배하던 세계정세에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변혁적인 성격을 지닌 사건이었으며, 이것을 타도하려는 천황제 중심의 일본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은 어찌보면 필연적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다룬 배경한의 역작이 <장개석 연구>와 <왕징웨이 연구>이다.

먼저 배경한의 왕징웨이 연구는 친일매국정권인 왕징웨이 정권을 공화주의 혁명의 아시아에서의 전개 과정이 일본제국주의와 상호작용하며 나타난 중국 민족주의의 또 다른 한 정치적 유형으로 바라본다. 이미 티모시 브룩과 같은 중국사 연구의 대가가 중국 친일파 연구를 통해 어느정도 축적한 관점이기도 하지만 배경한의 연구가 지닌 특색은 민두기의 신해혁명론과의 접합 속에서 왕징웨이의 사상을 친일파로의 전환까지 포함하여 하나의 총체로 파악하려는데 있다. 중일전쟁이라는 파국적이고 영구적인 전쟁 속에서 한족을 구하고자 하는 왕징웨이의 민족주의가 친일로 드러났다는 것에만 주목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일종의 '전향'이 신해혁명 이후에 이어져온 공화혁명의 연속 속에서 "반공주의"와 "평화건국운동"이라는 논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며, 그 논리를 매개로 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동아연맹론과 엮일 수 있었다.

일본제국 또한 중국과의 끝을 모르는 전쟁 속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논리를 만들려고 고민했으며 그것이 일전의 아시아주의와 엮여 동아연맹론으로 체계화되어 간 과정은 공화주의 혁명이라는 맥락과 얽히며 왕징웨이 정권의 탄생이라는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물을 낳았던 것이다. 일본제국의 실질적인 지도 하에 들어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국방의 공동화, 경제의 일체화, 그리고 '정치독립'"이라는 표어는 파국적인 중일전쟁을 끝내고 공화주의 혁명의 완수로서의 국가건설을 꾀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기는 하나 의미있는 것이었다.

배경한에 따르면 군사력 우위의 건국전략을 내세우는 장제스는 파멸적인 일본제국주의와의 전쟁을 끝낼 평화협정에 큰 걸림돌이었다. 강력한 군사력에 기초한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건설하려는 장제스 노선과 화평을 내세우며 설사 일본에 의존적일지라도 "정치적 독립"의 전제로 새로운 동북아 국제질서를 꾀하는 왕징웨이 간의 국가건설에 있어서의 노선 대립이라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배경한은 왕징웨이의 노선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 권력기반 자체가 군사력과 정치력으로 차이가 났던 장개석과 왕징웨이의 대립이 중일전쟁이라는 파국 속에서 분열되어 나타났으며, 이러한 분열은 쑨원 사후의 국민혁명의 진행 과정상 나타나는 필연적인 일이었다는 게 배경한의 기본 논지이다. 넓게 보자면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형성에 중일이 연합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그 주도권을 중국이 지닐 것인지, 일본이 지닐 것인지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고 그 입장 차이는 다시 국가건설의 전략 차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노선대립에는 기존의 중화질서 안에 포섭되어 있던 여러 민족들의 정치적 독립에 관한 입장이 반영되어 있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매개로 친중정부를 한반도에 세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에서 분명 기존의 중화질서의 재현을 지향하고 있었다. 왕징웨이가 한족 중심의 중국국가의 생존을 전제로, 일본과 중국의 영도 하에 아시아 전민족의 연합과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투쟁을 이어가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의 전통 계승자로 자신을 내세웠던 것과 겹치면서도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왕징웨이의 반공주의적 입장 또한 쑨원의 생전부터 시작된 소련 코민테른과의 상호작용이 주요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국민혁명의 연속 속에서 나타난 변화라는 배경한의 논지는 확실히 민두기의 신해혁명론이 좀더 발전적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이다.

다소 길게 정리했지만 민두기-배경한의 신해혁명에 관한 일련의 연구는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이들은 현재의 중국공산당에 대해 어찌됐든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공산당이 겪고 있는 난점의 역사적 기원을 1911년의 신해혁명 이후의 상황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고 생각된다. 배경한은 중국이 청왕조의 붕괴 속에서 나타난 주권의 공백과 민족문제를 여전히 해결하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중국에 대한 다소 비판적인 인식의 근원은 중화질서에 포섭되었던 민족 중 하나인 "한국인의 시각"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3. 한국인의 신해혁명 연구를 바라보며

 개인적으로 민두기의 연구로부터 역사이론의 체계화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신사계층의 전개가 신해혁명과 "아시아에서의 국가건설"의 한 유형으로서의 국민혁명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민두기는 많은 통찰을 준다. 더 나아가 공화주의 혁명의 전파라는 관점은 내가 곧잘 주장하는 "아시아의 미국" 주장이나 "공화주의 혁명의 선봉이자 전위국가로서의 한국" 주장의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나는 받아들이고 있다. 배경한의 연구는 그러한 공화주의 혁명의 전파가 낳을 수 있는 난제를 현대 중국의 민족문제와 엮어서 아시아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의 민두기 학파가 보여주는 중국에서의 공화혁명론은 학술적으로 여전히 의미있는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쪽 그룹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배척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민두기는 신해혁명의 정치적 주체가 지주계급에 가까운 신사계층이라는 이유를 들어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부르주아 혁명의 대명사인 '프랑스 대혁명'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부르주아 계층의 규모는 프랑스 자본주의의 미발달로 인하여 적었다. 지주계급이었던 귀족층이 부르주아화 되어 있었다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지적은 이 지점에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부르주아가 적었음에도 부르주아 혁명이라 말하는데는 결국 토지의 상품화의 진전과 노동력에 대한 인신적 지배를 정당화하던 봉건적 유제가 최종적으로 해소되었다는 점에서 찾아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근대국가로의 이행의 요소가 어느 정도 있었는지 유무를 가지고 판단해야 하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2단계의 혁명 과정을 거쳤지만 신해혁명도 중국을 근대 사회로 전환시킨 부르주아 혁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의 의미를 '이미' 존재하는 부르주아 집단이 주체가 되어 추동했다는 좁은 의미로만 파악하게 된다면 부르주아가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근대를 맞이하게 된 대부분의 비유럽 지역들은 부르주아 혁명을 겪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주장하면서 시민혁명의 부재로 인해 비유럽 지역의 역사적 전개 속에서 여러 '왜곡'이 나타났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유럽의 역사를 보편적 경로로 상정하였을 때만 성립할 수 있는 주장으로 각국의 역사적 특질을 고려한다면 개별적인 역사적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근대국가의 성립, 자본주의의 도입 등의 여러 보편적 요소를 기준으로 판별하는 것이 구체적인 역사적 특질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불필요한 정치적 의식이 연구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 연장에서 지방과 중앙 간의 관계를 축으로 보면서 중국적 특질을 강조하는 이들의 입장에도 동의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미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로마사 논고> 등의 저작을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주(州) 형태로 지방분권화 되어 있던 권력체들을 포섭하여 어떻게 하나의 중앙집권화된 통일적 국가체제로 주조해낼 것인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방과 중앙 간의 관계는 비단 중국사만의 특질이 아니라 근대로의 이행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히려 중국적 특질이라 한다면 전제군주정이 '국민당 혁명'과 같은 '혁명적 전복'을 통해서만 무너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럽적 경로가 봉건적 영주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군주'가 점차로 다른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빼앗으며 통일적 국가를 형성하였다면, 아시아적 경로는 전제국가의 형태로 이미 통일되어 있던 영역권 내에서 신사계층이 군벌세력과 결탁하여 복수의 지역공동체로 붕괴, 해체되었던 것에서 다시금 국민당 혁명과 같은 형태의 내전을 거쳐 통일적 국가체제로 귀결되는 과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미묘한 차이점을 민두기의 신사계층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론화 할 수 있다. 

이렇듯 몇몇 지점에서 의문이 있지만 민두기에서 배경한에 이르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의 신해혁명사 연구는 그 학문적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배경한의 <동아시아 역사 속의 신해혁명>을 추천하는 글을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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