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31

아리랑 축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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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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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촬영된 아리랑 축제.

아리랑 축제는 평양직할시릉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한 축제이다. 2달동안 개최되는 아리랑 축제는 매스 게임과 각종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이때에는 수천명의 선수와 댄서들이 이날에는 행사를 벌인다. 2002년 처음 시작됐으며 2009년에 잠시 중단됐다가 2010년에 재개됐다.[1] 아리랑 축제의 대표적인 연출자는 피바다가극단 총장 김수조이다.[2] 유엔아동기금(UNICEF)은 혹독한 훈련으로 체제 선전과 외화벌이에 동원되는 아동학대의 중지를 촉구하였다.
각주[편집]

이동↑ 권헌익·정병호, 《극장국가 북한: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창비, 2013, 67쪽.
이동↑ 김두환 기자 (2010년 12월 1일). “北집단체조 `아리랑' 연출 김수조 사망”. 연합뉴스. 2010년 12월 5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외부 링크[편집]
BBC News article from 2002: [1]
Account by Western visitor: [2]
Strangest Show on Earth - Guardian 2005: [3]

조선혁명박물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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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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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박물관
조선혁명박물관(朝鮮革命博物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에 위치한 박물관이다. 1972년 4월 김일성 주석의 60번째 생일에 맞춰 현재의 위치로 옮겨 개관하였다. 박물관 앞에는 만수대대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박물관 정면에는 백두산을 소재로 한 길이 70m, 높이 12.85m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관내[편집]

일제 강점기 시대였던 1930년대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투쟁 시대부터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하기까지의 조선 혁명의 사진 패널 등 자료가 소장, 전시되어 있다.
1948년 개관 당시에는 총론실과 전시실 93개 및 부대시설이 들어서 있었지만 1991년 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50번째 생일에 맞춰 전시실 7개가 증설되었고 현재는 전시실 100개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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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대혁명전시관


당창건사적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조선미술박물관
조선민속박물관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조선혁명박물관
분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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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직할시의 관광지
도시별 박물관

농장들사이에 사회주의경쟁​을 벌리게 하시여

농장들사이에 사회주의경쟁​을 벌리게 하시여









함주군 동봉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시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농업부문에서 본보기단위들이 생산에서 전변을 일으키고 그것을 일반화하여 농업부문전반에서 알곡생산을 늘이도록 하기 위하여 서해안지대의 여러 농장들사이에 경쟁을 벌리도록 하시고 이 경쟁을 동해안지대에로 확대하여 농장들사이에 사회주의경쟁을 힘있게 벌려나가도록 하시였다.








※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98(2009)년 4월 당, 국가경제기관 책임일군들과 하신 담화 《알곡생산에서 혁신을 일으켜 식량문제를 해결하는것은 현시기 사회주의경제건설에서 나서는 가장 절박한 과업이다》와 이해 6월 당, 군대, 국가경제기관 일군들과 하신 담화 《김일성민족의 위대한 정신력으로 강성대국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혁명적대고조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올리자》를 비롯한 여러 로작들에서 농사에 모든 력량을 총동원, 총집중하여 알곡생산에서 대혁신을 일으켜나갈데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금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과 재령군 삼지강협동농장, 룡천군 신암협동농장, 태천군 은흥협동농장이 사회주의경쟁을 하고있습니다. 함주군 동봉협동농장도 그 협동농장들과 사회주의경쟁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현시기 인민생활을 높이는데서 기본은 식량문제, 먹는 문제를 푸는것이며 농업전선은 모든 력량을 총동원, 총집중하여 대고조의 불길을 세차게 지펴올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경제전선의 하나이라고, 사회주의강국의 대문은 금속, 전력과 함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서부터 열어나가야 한다고, 식량문제를 남에게 의존하여 해결할수는 없다고 하시였다.







ㅡ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농사에서 대혁신을 일으키기 위하여 시범단위를 잘 꾸리고 알곡증산을 위한 경쟁을 벌려 좋은 경험들을 창조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95(2006)년 12월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을 전국의 본보기로, 시범단위로 내세워주시였다.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98(2009)년 10월과 주체99(2010)년 3월을 비롯하여 여러차례에 걸쳐 이 협동농장을 찾으시여 미곡협동농장이 사회주의선경으로 전변된데 대하여서 만족을 표시하시였으며 농업성과 황해북도농촌경리위원회에서 농장을 잘 도와주어선군시대의 본보기농장으로 꾸려놓은데 대하여 치하하시면서 앞으로도 이 농장을 잘 도와줄데 대하여 이르시였다.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에 새로 건설한 살림집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어 룡천군 신암협동농장과 재령군 삼지강협동농장들을 전국의 본보기단위로 내세워주시였다.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96(2007)년 6월 룡천군 신암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시면서 이 농장이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과 경쟁해보라는 믿음의 교시를 주시였으며 며칠후에는 황해북도의 책임일군에게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과 룡천군 신암협동농장, 재령군 삼지강 협동농장이 서로 경쟁을 벌리면서 알곡증산을 위한 더 좋은 경험을 창조해나갈데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룡천군 신암협동농장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현지지도는 농업근로자들의 혁명적열의와 생산의욕을 더욱 높여주어 나라의 농업생산을 한계단 더 높이 끌어올리는데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력사적인 현지지도였다.








※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97(2008)년 7월 태천군 은흥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시면서 농장의 농사정형을 료해해보시고 농장을 경쟁에 참가시키심으로써 경쟁을 서해안 벌방지대뿐아니라 중간지대까지 확대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믿음과 기대에 고무된 4개 농장의 농업근로자들은 이때부터 알곡생산을 늘이기 위하여 더 이악하게 노력하였으며 온 나라 농장들에서는 미곡과 신암, 삼지강, 은흥협동농장들의 성과와 경험을 적극 따라배우기 위한 투쟁이 힘차게 벌어졌다.



ㅡ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알곡생산을 늘이기 위한 경쟁을 동해안에로 확대해나가도록 하시였다.



주체98(2009)년 2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함경남도에 대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다가 함주군 동봉협동농장을 찾으시였다.








※ 연혁소개실에서 농장에 깃든 어버이수령님의 령도업적을 감회깊이 회고하시고 상점에 들리시여 매대마다 자체로 생산한 콩으로 짠 기름이며 고추장과 간장 그리고 도에서 자력갱생하여 만든 생활필수품들이 꽉 들어찬것을 보시고 제것이 좋다고 만족을 금치 못하시는 위대한 장군님께 농장의 녀성관리위원장은 지난해 국가알곡생산계획을 115%로 넘쳐 수행했다고 긍지높이 보고드리면서 2012년에 가서는 전해보다 정보당 수확고를 1.4배로 장성시키겠다고 말씀드리였다.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농사를 잘 짓자면 구체적인 타산과 방도가 있어야지 주관적인 욕망만 가지고서는 안된다고, 동봉협동농장에서 총동원하여 논밭에 자급비료를 많이 낸다고 하여도 당해에 알곡생산이 쑥 올라가지 않는다고, 빈말공부나 하여가지고서는 알곡생산을 늘일수 없다고 일깨워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동해지구와 서해지구 협동농장들사이의 경쟁을 할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함주군 동봉협동농장이 알곡증산의 앞장에 선 서해지구의 4개 협동농장들과 사회주의경쟁을 벌리라고, 동해지구 협동농장들은 서해지구 협동농장들을 공격하고 서해지구 협동농장들은 방어하는 식으로 경쟁을 하는것이 좋다고, 협동농장들사이에 경쟁을 하여야 서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이악하게 노력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그를 위한 구체적인 방도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동봉협동농장을 동해안농사의 본보기창조에로 불러일으키시였다.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98(2009)년 6월 동봉협동농장을 또다시 찾으시여 농장실태에 맞는 경작체계를 확립하며 지대별특성에 맞게 두벌농사를 힘있게 밀고나갈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농장에서 잘하면 사회주의경쟁에서 1등을 할수 있다고, 가을에 가서 동봉협동농장에서 올해농사를 잘 지었다는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겠다고, 동해안농사의 본보기를 창조하리라고 믿는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전투적호소는 동봉협동농장 농업근로자들의 경쟁열의를 북돋아주고 서해안의 앞장선 농장들과의 사회주의경쟁에 당당히 참가하여 겨루어보겠다는 승벽심을 한층 고조시켜주었다. 이리하여 농장에서는 주체98(2009)년에 최고수확년도를 돌파하는 기적을 이룩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정력적이며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온 나라 협동농장들사이의 알곡증산경쟁이 힘있게 벌어져 나라의 알곡생산을 늘여나가는데 적극 이바지하게 되였다.



※ 일화: ❖ 도전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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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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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祖國解防戰爭勝利紀念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에 있는 군사 박물관이다.
개요[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정의하는 한국 전쟁에서 '미제국주의에 ​​승리'한(정전 협정에 의해 한반도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 김일성의 업적을 기념하는 군사·전쟁 박물관이다. 1953년 8월 17일에 조국해방전쟁기념관으로 개관했다. 그 후 '승리'의 이름을 딴 1974년 4월 11일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남북한의 기념박물관



남북한의 기념박물관





홈페이지 | 주간프로 | 통일문화산책
남북한의 기념박물관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6-11-11



북한은 한국전쟁 시기 황해남도 신천 지역에 주둔한 미군이 만행을 저질렀다며 관련 자료를 신천박물관을 통해 전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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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박물관은 일반적인 것이고 기념박물관은 어떤 것을 기념하려고 세운 특별박물관이지요. 박물관은 목적하는 바를 알리려고 역사유물 등을 통해 눈에 호소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지요.

남북한에는 각기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독립기념관과 조선혁명역사박물관입니다. 통일문화산책 오늘도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두 기념박물관의 성격과 역할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채욱 선생: 네. 남쪽의 독립기념관은 나라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그냥 독립기념관입니다. 이름을 지을 때 독립운동기념관, 광복기념관, 민족기념관, 겨레의 집 등등이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독립기념관으로 정해졌지요. 당연히 한국을 대표하는 기념박물관이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부칠 필요가 없는 거지요. 북쪽의 박물관은 조선혁명박물관입니다. 처음에는 국립중앙해방투쟁박물관이란 이름이다가 1960년 8월에 지금의 이름으로 됐습니다.

박물관과 기념박물관은 어떻게 다릅니까?

임채욱 선생: 박물관은 일반적인 것이고 기념박물관은 어떤 것을 기념하려고 세운 특별박물관이지요. 박물관은 목적하는 바를 알리려고 역사유물 등을 통해 눈에 호소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지요. 눈에 호소한다는 것은 그림, 사진, 자료, 유물 같은 것으로 볼거리를 꾸며서 교육시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념박물관은 한 국가나 정권이 국민에게 특별히 정한 어떤 것을 눈에 호소해서 알리려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에 일반 박물관과는 다른 특별박물관이라 할 수 있지요.

남북한의 기념박물관이 특별한 어떤 것을 알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임채욱 선생: 그것은 국가의 정통성이나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기념박물관은 그러니까 정통성이나 정당성을 교육적인 볼거리로 꾸며서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보여주려 하는가요?

임채욱 선생: 독립기념관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보관, 전시 함으로서 대한민국은 일본 제국주의와의 독립전쟁 결과로 수립되고,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정통성을 가진 정부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으로 세워졌지요. 반면에 조선혁명박물관은 김일성과 그를 따른 항일혁명군의 투쟁역사를 널리 알리려고 세웠던 박물관으로 전시물의 많은 부분이 김일성에 집중돼 있는 편이지요.

그럼 남북한의 기념박물관인 독립기념관과 조선혁명박물관은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과정을 한 번 알아볼까요? 먼저 독립기념관을 말해 주세요.

임채욱 선생: 독립기념관은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는데 북한보다 많이 늦은 1987년 8월에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세우자고 논의가 시작된 것은 북한과 마찬가지로 광복 직후부터였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현시키지를 못하다가 1975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활동하면서 민족박물관 설립 필요성을 정부에 건의했고 마침 1982년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 편찬을 하게 돼서 이른바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지요. 교과서 파동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것을 왜곡되게 그들 교과서에 실은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이 갖춰져 있다는 이른바 식민사관이란 것을 근거로 교과서를 쓴 것이지요. 이에 우리 우리나라 국민은 격분했고 이를 계기로 정부와 민간이 합심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기념관 설립을 추진한 것입니다.

다음은 북한 혁명박물관은?

임채욱 선생: 북한은 정권이 수립되기도 전인 1948년 8월 1일 평양 중구 역에 혁명박물관을 세웁니다. 이 박물관은 김일성의 발기로 세워지는데 김일성이 보관하던 이른바 혁명관계 자료들 외에는 별 자료가 없어서 1955년 8월이 돼서야 개관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61년 1월 김일성 광장 동쪽에 좀 더 넓혀서 재개관을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1972년 4월 김일성 60회 생일을 맞아 만수대 언덕 넓은 터로 다시 이전합니다. 현재 만수대 언덕에 있는 이 박물관은 5만 평방미터로 커졌고 부지 넓이만 해도 24만 평방미터나 됩니다. 물론 북한 지역 어디에든 있는 김일성 동상은 여기에도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혁명사상을 알게 하고 그들이 현명하게 통치를 잘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느끼게 하고 공산주의 덕성이 이렇다는 것을 몸에 배이게 교양시키고 있지요. 이른바 혁명전통교양을 시키는 것이지요.

꾸며 놓은 전시물을 어떤 방식으로 해 놓았습니까?

임채욱 선생: 독립기념관은 7개의 전시관이 있는데, 민족전통관, 근대민족운동관, 일제침략관, 3.1운동관, 독립전쟁관, 임시 정부관, 대한민국관 등입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국난극복을 한 사례를 살펴보고 서양의 도전 앞에 겪는 민족의 시련을 본 다음, 일제가 우리나라를 어떻게 침략했는가를 살펴보면서 3.1운동과 독립전쟁을 어떻게 치뤘는지, 그 결과 상해에 임시정부를 어떻게 세우고 그를 계승한 대한민국 건국은 어떻게 이뤄졌는가를 알게 합니다. 상해임시정부 계승론이 대한민국 정통성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조선혁명박물관입니다. 혁명박물관은 혁명시대별로 나눠진 혁명관이 있고 조국통일관이 있고 일본동포관, 수령관 등을 포함해서 100개의 전시실이 있습니다. 혁명관의 시대별로 구분돼 있다고 했는데, 이른바 항일혁명투쟁시기로부터 시작해서 북한 정권이 세워지던 전후와 6. 25전쟁이 있던 시기를 거쳐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만든다고 하던 시기, 사회주의 완전승리를 이룩하는 시기 등등으로 돼 있습니다.

그럼 남북한은 독립기념관과 조선혁명박물관과 같은 기념박물관을 통해 정통성 확보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뤄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물론 남북 각각은 기념박물관이 바라는 바의 목적을 이뤄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통성문제는 분단된 남북한에는 한 쪽이 확보하면 다른 쪽은 가질 수 없는 제로섬 게임이나 마찬가집니다. 한국의 임시정부 법통성론이나 북한의 혁명전통론은 결국 남북한 주민의 선택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정통성을 위한 남북한 기념박물관의 역할은 통일될 때까지 여전히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신천군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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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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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신천박물관 안에 세워진 사백어머니묘와 백둘어린이묘. 신천군 사건 당시 희생된 자들의 무덤으로 소개된다.

신천군 사건(信川郡 事件)은, 한국 전쟁이 벌어진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3만 5천여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신천 학살 혹은 신천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북한에서는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른다.

민간인 학살 자체는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학살의 주체를 두고 북한 정부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대한민국 학계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서로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북한 정부는 신천군 사건의 주체를 미군으로 지목하며, 학살 현장에 신천박물관을 건립, 자국 체제 유지를 위한 반미교육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써먹고 있다.


목차
1개요
2신천군 사건의 본질
2.1북한측 주장의 의문점
2.2공산주의에 맞선 자유주의 우파 항쟁?
2.3좌우대립으로 인한 학살
3신천군 사건을 다룬 매체
4각주
5참고 자료
6같이 보기
7외부 링크
개요[편집]

한국 전쟁 휴전 1년 전인 1952년, 국제 사법단체로 공산주의 계열의 NGO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의 조사위원회는 북한 정부의 요청으로 북한 땅을 방문, 평안도황해도, 강원도 등 북한 지역을 돌며 ‘코리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1] 조사위원회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의 이른바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한 조사 작업을 증거수집에 천착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고, 1952년 3월 31일에 작성한 보고서의 ‘제4장 대량학살, 살해 및 기타 잔혹행위’에서 이들은 황해도 신천의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2월 7일, 미군이 철수하기 직전, 해리슨(신천 미 점령군사령관)은 그의 휘하에 있던 미군 부대와 이승만의 원군 장교들에게 철수는 ‘일시적’이며 ‘전략적 이유’에 따른 것이라 말하고 주민들에게 미군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지시하라고 명령했다. ‘남아 있는 자는 모두 실질적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원자폭탄이 투하될 것이다.’ 그는 모든 ‘빨갱이’ 지지자들을 섬멸할 것을 지시했다. 모든 인민군 병사의 가족들과 부역자 가족들은 빨갱이로 간주되었다. 그의 명령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날 신천군 원암리의 창고 두 군데에서 900명의 남녀 학살이 발생했다. 건물 안에는 어린아이들도 200여 명 있었다. 미군들은 이들의 옷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창문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던졌다. 건물 안에 있던 한 여성이 자신의 두 아이를 창 밖으로 밀어냈다. 한 아이는 총에 맞았지만 한 아이는 도망쳤다. 어머니는 불에 타 죽었다. 해리슨과 다른 장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2]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서 작성한 해당 보고서를 들어 북한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간 미군이 점령한 황해도 신천군에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 예하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신천군 한 군에서만)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무려 약 3만 5천여 명,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음을 주장하였고[3] 희생자 대부분은 좌파 운동가들의 가족이었다고 주장하였다.

2001년 11월,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에서는 황해도 신천군에서 한국 전쟁 중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 59구의 유해가 새로 발굴됐다고 보도했다.
신천군 사건의 본질[편집]

신천박물관 경내의 방공호. 북한측은 이곳에서 미군이 900명의 신천 주민들을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북한측 주장의 의문점[편집]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에 의한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6.25 동란)은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은 북한군(조선인민군)을 몰아내고 서울을 수복, 38선을 넘어 북진이 시작되었고 조선인민군은 패퇴를 거듭했었다. 국군과 유엔군, 특히 미군 각 부대는 이 과정에서 북한 정권의 본거지 평양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 불이 붙었고 덕분에 정작 신천군에는 그리 오래 주둔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학살을 주도한 미군의 지휘관으로 지목하는 '해리슨'이라는 미군 중위가 실제 당시의 미군 명단에서 그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부터 북한이 주장하는 미군 주도에 의한 학살설은 근거가 흔들린다.

당시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신천군 사건을 주도, 감독한 것으로 지목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미8군 부사령관으로 한국에 와 있었던 윌리엄 켈리 해리슨으로, 보고서는 그가 신천군에서의 학살을 주도했으며 그것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두도록 명령했다고 했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고, 윌리엄 켈리 해리슨(William Kelly Harrison) 본인은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는 했지만 정작 신천군 사건 당시에는 신천에 있지도 않았음이 확인되었다.[4] 아울러 윌리엄 켈리 해리슨 본인은 자신이 신천에서의 학살 주동자로 지목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5] 신천박물관에서는 이후로도 계속해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를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홍보하고 있다.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주의 우파 항쟁?[편집]

한국에서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신천군 사건의 본질은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에 쫓겨 패퇴하던 인민군이 신천군에 남아 있던 지주, 자본가, 기독교인 등 우파 성향의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한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우파 민간인들이 인민군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 신천군 출신으로 6.25를 겪었던 실향민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들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조선노동당과 인민군에 맞선 자유주의 우파 지하조직과 신천 군민의 저항이자 반공투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유엔군이 국군을 도와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자,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군은 지주, 성직자, 교사를 포함한 우파 세력들을 처형했다. 유엔군이 서울 수복하기 직전에도 "교직자를 모두 살해하라"는 지령을 내려, 50여 명의 신부와 60여 명의 목사를 납치하여 서울 근교에서 총살시켰던 적이 있으며, 박천군(博川郡)에서는 교회당 같은 종교시설은 유엔군이 포격하지 않는다며 피난민들을 모이게 해놓고 폭격을 가해 많은 사람들이 몰살당하는 일도 있었다.[6][7]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에 쫓겨 달아나던 조선공산당이 마지막 발악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며 지하로 숨어들었던 북한 출신의 우익 청년들이 10월 13일을 기해 '반공 봉기'를 일으켜 국군의 북진에 호응했다는 것이다. 국제연합 한국유격군, 흔히 구월산유격대(九月山遊擊隊)로 알려진 이들 반공청년단 조직은 구월산(九月山)을 거점으로 강화(江華)에서 신의주(新義州), 속초(束草)에서 주문진에 걸치는 한반도 중북부 각지에서 국군을 도와 전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이와 관련해 국제연합 한국유격군전우회와 신천 10.13반공의거동지회가 존재하며, 2010년에는 신천 10.13 반공 의거 제60주기 추도식이 대전광역시국립현충원 현충탑에서 거행되기도 했다.[8] 현충원에는 당시의 전사자 309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우대립으로 인한 학살[편집]

황해도 신천군 지도

신천군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 정황상 근거가 부족한 북한측의 미군 주도설을 배제하고, 현재까지 확인된 증언과 연구 성과를 통해 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신천군 사건의 본질이 북한의 주장처럼 미군의 개입이나 일부 우파가 증언하는 것과 같은 북한 정권의 조작(남한에 대한 책임 전가 같은), 내지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자유주의 투쟁으로써보다는 해방 공간이라는 특수성, 그리고 전쟁이라는 대혼란 속에 격화된 좌우 대립으로 빚어진 동족간 학살이라는 것이다. 2004년에 한국의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에서는 신천군 사건은 미군의 학살 개입과는 상관없이 신천군 내의 기독교 우파 세력과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당시의 공산 좌파 세력간의 알력이 북한 정권에서 시행한 토지개혁을 매개로 격화, 파멸적인 비극으로 치달았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당시 황해도 지역의 복잡한 역학 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 신천군을 비롯해 평야 지대인 황해도 지역은 대표적 곡창 지대의 하나로써 광복 직후 지주와 소작인, 좌우익간의 갈등이 적지 않게 나타났고,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면서 토지개혁을 둘러싸고 좌우 대립과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공산주의적 원칙을 내세운 조선공산당의 토지개혁 과정에서 많은 우익 인사들이 월남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앞두고 선발대로 고향에 복귀했고, 신천군에 남아있던 좌익 활동가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특별한 정치적인 의사와 상관없이 남아있었을 뿐인 민간인들마저 부역자로 몰려 무차별적인 학살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2002년 4월 21일에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망각의 전쟁 - 황해도 신천 사건"에 따르면 중공군이 들어온 이후 유엔군이 남쪽으로 물러가기 직전에 우익에 의한 마지막 학살이 있었다. 결국 신천군 사건은 해방 전후의 좌-우 대립과 갈등, 그리고 6.25 전쟁 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맞물려 터진 비극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9]
신천군 사건을 다룬 매체[편집]회화
피카소한국에서의 학살》(1951년작) -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던 피카소의 이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신천군에서 벌어진 학살이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리고 1년 뒤에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 의해 북한 지역에서의 학살 상황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고 신천군 사건과 관련된 보고서가 작성되었다.소설
《손님》(2001년) - 황석영의 장편소설로 신천군 사건을 기독교 우파좌파간의 사상 대립과 대결이 폭력으로 악화된 끝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소설 속 등장 인물인 류요섭 박사의 모델이자 실제 황석영의 친구이기도 한 재미교포 목사 류태영은 이를 부정했다.[10]다큐멘터리
MBC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57회 「망각의 전쟁, 신천군 사건」(2002년 4월 21일 방영) - 본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MBC 방송의 조준묵 프로듀서는 북한의 주장처럼 신천군 사건이 미군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신천 지역에 꾸려진 반공 청년단을 이승만 정부가 북진하면서 묵인"했고 신천군 사건은 ‘좌우 대립의 결과’로 일어난 비극적 학살극이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11]
각주[편집]

이동↑ “Report on U.S. Crimes in Korea” (PDF). 2013년 10월 2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5월 26일에 확인함.
이동↑ 민족21
이동↑ 비극’ 좌우대립설 설득력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이동↑ “The Truth About the Sinchun Massacre”. 2012년 3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3월 8일에 확인함.
이동↑ Facts Forum vol. 4, no. 6 (1955), p. 5
이동↑ 박완신 《평양에서 본 북한사회》도서출판 답게, 2001, 197페이지
이동↑ 남한에서도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전쟁 초기에 경찰과 육군특무대, 서북청년단이나 대동청년단 등 우익 단체에 의해, 각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크고 작은 죄수들이나 보도연맹원 등 좌익 운동 가담 경력자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명된 자들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재판도 거치지 않고 학살한 사례가 있다(보도연맹 사건 항목 참조). 다만 신천군 사건과는 달리 보도연맹 사건에는 미군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일부 확인되었다.
이동↑ 현충뉴스 - 국립현충원 공지
이동↑ 김성보 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닷컴, 2004, p.91~p.93.
이동↑ 민족21
이동↑ ‘신천 비극’ 좌우대립설 설득력 : 사회 : 인터넷한겨레
참고 자료[편집]
김성보 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닷컴, 2004년
Jong-yil Ra "Governing North Korea. Some Afterthoughts on the Autumn of 1950".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40, No. 3 (Jul., 2005), pp. 521–546 doi:10.1177/0022009405054570 - 중국조선족 사학자 라정일의 논문.
박완신, 《평양에서 본 북한 사회》도서출판 답게, 2001년
같이 보기[편집]
구월산 유격대
신천군
신천박물관
제노사이드
한국 전쟁
황해도
외부 링크[편집]
망각의 전쟁 - 황해도 신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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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 나무위키



전쟁기념관

최근 수정 시각: 2018-10-31 03:10:41


상위 문서: 대한민국의 관광 명소


戰爭紀念館
War Memorial of Korea
홈페이지


1. 개요2. 상세3. 비판
3.1. 수구적인 역사관3.2. 고증오류4. 관람료5. 야외 전시병기6. 같이 보기7. 교통8. 그 외


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에 위치한 국립 박물관.[1] 1990년대에 육군본부충청남도 계룡대로 이전하면서 잉여가 된 부지에 지은 박물관이다. 대중교통 중에 지하철삼각지역 12번 출구를 이용하면 빠르게 접근이 가능하다.[2] 전쟁기념관 바로 남쪽 건너편에 대한민국 국방부가 있다.

사실 명칭에 메모리얼이 들어가서 기념은 맞지만 어감상 추모에 가까운 기념이다. 그러나 '어떤 뜻깊은 일이나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함'이 기념의 뜻이라 실생활의 용례와 실제 뜻과의 괴리가 초래한 탓에 생긴 소모적인 논쟁이다. 그래도 논란이 많아서 전쟁박물관으로 명칭 변경이 계획되고 있다.

박물관 부지는 대한민국 육군 제7보병사단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처음 창설된 위치이기도 하다. 야외전시장 한켠에 기념비들이 남아 있다. 박물관 앞 광장에는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원한 16개 지원국과 대한민국 육군/해군해병대/공군 예하 부대들의 깃발들이 걸려 있다. 모든 부대는 아니고, 한국전쟁 당시 참전 부대들 위주이다.

2. 상세[편집]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 무기 박물관이라 그런지[3][4] 외국인 관람객들도 많다.[5] 의외로 일본 고등학교 등에서 단체 관람을 오는 경우도 많은 편. 응? 중국인, 서양인 관람객도 많다. 실제로 가 보면 한국인 관람객들보다 과거 우리를 괴롭히던 일본, 중국 출신의 관람객(주로 여행업체나 학생들의 단체관광)이 더 많은 경우도 많다. 서양인의 경우 바로 옆에 용산 기지가 있어서인지[6] 주한미군이나 그 가족, 동료들끼리 관람 오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정훈교육 차원에서 단체 관람을 오는 대한민국 군인 아저씨(…)들도 자주 목격 가능하다. 또 미군이 아닌 타국 군인이 군복을 입고 오는 것도 가끔 볼 수 있다.

이름 그대로 한국 관련 전쟁들이 메인 테마인 박물관으로 야외에는 각종 항공기, 장갑차량, 화포가 전시되어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구석기부터 시작하는 각 시대 전쟁 관련 유물관과 더불어 한국전쟁 관련 전시관, 베트남전 관련 전시관, 한국군의 발전사 전시관, 방위산업체 관련 전시관이 존재한다.

단순 유물 뿐만 아니라 영상 기록물이라든지, 혹은 현장 재현 셋트라든지 하는 것들도 많다. 특히 영상 기록물의 경우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다양한 버전의 나레이션을 탑재하고 있다. 영상 기록물의 경우 한국전쟁 당시의 것들이 상세한데 한국전쟁 때의 영상물을 보는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사진 촬영과 등재에 제한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무위키에 등재된 일부 무기 관련 위키란에 전쟁기념관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다. 전시물들이 플래시에 손상되거나 하는 그런 물품들이 아니므로 필요하면 플래시를 터트려도 된다. 야전에서 굴리라고 만든 게 플래시 따위에 손상될 리가 없다 물론 주변 사람들 생각하면서 터트리자. 외부에 전시된 전차들의 상당수는 피격의 흔적이 남아있다. 표면에 소총탄을 맞은 것으로 보이는 자글자글한 흠집들은 물론 간신히 튕겨낸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상처에다 일부 전차들은 엔진룸 쪽으로 포탄이 들어간듯한 깨진 구멍도 보인다. 한번 살펴보면서 찍는것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고대 전쟁사 구획을 다루는 1전시실 리모델링이 진행되어 2016년 12월 재개장하였다.
3. 비판[편집]

3.1. 수구적인 역사관[편집]


국방부에서 만든 기념관이라서 상당히 수구적인 역사관이 담겨있다. 아예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6.25 전쟁때 남침했다는 사실은 몇번씩 강조하지만, 전시실에서 북한군의 남침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기 위해 사이렌과 함께 "서울 시민 여러분, 북한군이 기습 남침하였으니 즉시 서울 시내에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와 같은 내용의 경보 방송이 나왔었는데 실제로는 저런 방송은 없었다. 오히려 서울을 사수하는 중이니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였다. 195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는 고증오류인지라 더 이상 방송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민군의 잔혹행위, 학살은 강조하지만 국군과 미군의 민간인 학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5.16 군사정변은 아예 혁명으로 써놓았다.

해외파병실에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에 대해 설명해주는 영상[7]에서 통킹만 사건을 가리켜 북베트남군이 미 해군 구축함을 격침시킨 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공격만 받았지, 격침은 안 당했다. 만약 당했으면 북베트남군이 잘했다기 보다는 미군이 졸전을 했다고 할 수 있을정도다.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써 싸운 시위는 아예 반정부 시위로 기록되어 있다. 베트남전에 대해 국군의 문제고엽제문제는 나오지도 않는다.

북한의 대남 도발사도 설명하지면서 전두환 시기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도 설명하지만, 5.18 민주화운동은 아예 언급조차 안된다.
3.2. 고증오류[편집]


한국에서는 유일한 군사 관련 종합박물관이며 동시에 아시아 최대의 군사박물관이다. 다만 아무래도 자료 및 물건을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현대 전쟁 관련 물품들을 위주로 하는 탓에 고대나 근대 전쟁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 수은갑의 경우,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아 실제로는 정상적으로 입을 수 없고 찰 엮기도 잘못되었다. 그래도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전쟁유물 역시 중앙박물관에 준하는 수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외의 오류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IL-10 공격기가 전투기쪽에 분류가 되어있다.




6.25 전쟁 당시 중공군북한군이 사용한 모신나강 소총의 탄약 구경을 '7.62mm 나토탄'이라고 표기해 놓았다가 수정되었다 사실 7.62mm 구경으로 쓰이는 탄의 종류가 어느정도 있지만, 모신나강 소총의 제원은 과거 기록이나 교범을 뒤적여보면 나올 수준의 기초적인 오류다.




한 네티즌이 전시된 남부 권총모델건이라는 의혹을 제기하자 권총을 바꾸지 않고 권총을 뒤집어서 다시 전시해 놨다.(...) 이외에도 전시된 M16A1 소총 중 일부는 몸체 오른쪽에 나사구멍이 즐비한 것이 훤히 보여서 비비탄총인 티를내고 있다. 비용문제나 실물을 구하기 힘든 문제로 모형을 사용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 나사구멍을 막아놓고 도색하는 성의를 보여줬어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국군에 흔하디 흔한 M16소총을 못 구해 프롭건을 진열했다는 게 말이나 되나. 어차피 박물관에 전시할 것이라면 예비군 훈련으로 굴리다 나온 폐급이라도 프롭건보다는 나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플래툰(잡지) 기사에 따르면 전쟁기념관 수장고에는 현재는 희귀해진 M16A1의 극초기형 XM16E1 실물, 부산 조병창에서 카피생산한 한국제 M1911 권총 실물 등 귀중한 실물들이 많이 있는데 그동안 학예사 인력 부족으로 제대로 정리작업을 못하고 있었다 한다....




6.25 전쟁실에 전시된 에티오피아군 군복에 부착된 부대마크가 대한민국 공군 제19전투비행단마크다.




6.25 전쟁실에서 상영중인 'OPERATION CROMITE'[8] 초반 인천 시가지를 향해 포격하는 군함 중 타이콘데로가급이 등장한다. 그리고 후반의 인천 시가지 전투에서는 국군 전차로 T-34 전차가 나온다. 북한의 T-34를 국군이 노획해 운용하기도 한 적이 있다고 하지만, 이지스 순양함이 6.25전쟁시기에 등장하는 것은 완벽한 고증오류다.[9]




F-15K를 다룬 4D 영상물에서 등장하는 F-15K는 BVR교전[10]을 안하고 바로 WVR 교전으로 돌입하며 적기(MIG-29)가 발사한 적외선 미사일을 회피 기동으로 피해버린다.플레어 따위는 장식입니다. 높으신 분들이 그걸 몰라요물론 나중에 가서 뿌리기는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미사일을 회피 기동으로 피해 문제지 사실 근접 공중전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법은 없지만, F-15K 를 비롯한 대다수의 현대 전투기들은 전투기에 레이더가 없다면 없는게 이상한 상황이기에 95%의 공중전 상황은 BVR로 시작하게 된다[11]




이건 딱히 고증 오류는 아니지만 북한군 장비를 전시해 놓은 실내 전시관에 있는 T-34 전차는 포탑이 뒤로 180도 돌아가 있다. 즉 주포가 후방을 향해 있다. 덕분에 일반인들이 앞뒤를 착각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간혹 벌어진다. 오 여기가 앞이구나 실외에 있는 동형 전차는 주포가 제대로 전면을 향해 있는 것을 보아하면 전시 공간 부족으로 포탑을 돌려놓은 것 같다. 사실 전시 공간이 그렇게 비좁은 것도 아니라 차량을 살짝만 뒤로 빼면 포신을 앞으로 돌려놔도 충분한 전시 공간이 나오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포탑을 뒤로 돌려놓은 이유는 불명. 지방의 유적지에 기념물로 배치된 차량에서도 가끔 그런 목격담이 있다. 이거는 사실은 주포를 전면으로 해놓고 오래동안 있다보면 기어가 마모되어 주포가 밑으로 툭 떨어지는 경우가 간간히 있어서 안전상의 이유로 그렇게 해놓은 것인데, 이런 지적이 자주 나와서 최근에는 주포를 전면으로 해놓고 기어를 고정해놓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중국제 56식 보총을 AK-56으로 표기해 놓았다. 56식 소총, 혹은 중국제 AK-47 복제품 둘 중 하나로 표기해야 맞다.




한국군 발전사 전시관에 전시된 포항급 초계함의 모형은 PCC-761 김천함인데, 김천함은 대함 미사일이 없음에도 설명의 무장란에는 하푼이 탑재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모형에도 미사일 발사관은 보이지도 않는다. 이건 뭐… 참고로 김천함은 3차선이며 대함 미사일이 탑재된 포항급은 2차선(엑조세)과 4,5차선(하푼)이다. 마개조해서 어뢰 발사관에서 미사일이 나가나? 하지만 대부분의 관람객은 모를 터이다. 함급 설명과 함정 설명을 섞어버린 모양인데, 더한 게 많아서 이 정도는 약과.




참수리급 고속정이 전시되어 있는 곳 근처에 59식 전차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T-59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12][참고로][14]



합동상륙에 전시되어 있는 모형 중에 아메리카급 강습상륙함이 있다! 영상에는 나오는 군대는 한국군만 나오는데도 말이다. 위의 타이콘데로가급 구축함 사격과 마찬가지로, 고증에 신경을 쓰지 않은 부분. 사실, 군복무한 밀덕이라면 알겠지만 한국군 장교의 이 쪽 군사교양수준은 의외로 일반인보다 크게 낫지 않다. 그냥 저냥 매일 매일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뺑이치느라 그런 데 관심 가질 짬이 없는 직장인이다.




실내 전시관에 전시되어있는 북한군의 76.2mm 곡사포 M-1942(ZiS-3)의 최대 사거리가 13,300km 로 되어 있다. 영어 설명에서만 이렇게 쓰여 있고 한국어 설명에서는 최대사거리가 13,300m라고 제대로 써져 있다.이로써 ICBM이 개발되기도 전에 소련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추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한 오타. 윤영하급 76km함포 기사와 마찬가지로 자주 보는 것인데 너무 뻔해서 알아보기 쉬운 게 다행. 문제라면 제보를 받고도 안 고치는 철밥통들. 바탕색 페인트로 덧칠하거나, 프린터로 인쇄한 종잇조각을 5만원짜리 코팅기계로 비닐코팅한 다음 본드로 붙여도 해결될 걸.




M1911 탄입대와 M1 카빈 탄입대를 구분 못하고 전부 권총 탄입대로 전시해놓는 오류가 은근히 자주 보인다. 특히 유엔군 전시관 쪽에 자주 보이는 편. 양옆으로 좀 더 넓적한게 카빈 탄입대. 감수하는 분들 약주 한 잔 씩 하셨나..




간첩선 격침 전적을 가진 알루엣 헬기를 전시했는데, 보수하며 킬마크를 지웠다가 항의를 받고 다시 그려넣었다. 전시물이므로 가동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 지 내부 부품을 들어내는 것은 전쟁기념관이 없던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관리를 편하게 하겠다고 페인트 떡칠을 한 게 고증무시는 기본이고 아예 이음매를 구별할 수 없게 해놓은 것들이 보여서 밀덕으로서는 참 눈이 괴로운 전시물이 많다.




그 외의 고증 오류, 맞춤법 오기, 시대를 역행하는 표기법, 일관성 없는 표기는 박물관급 전시관답지 않게 엄청나게 많은 편이다. 머스킷 소총을 전시해 놓은 설명문에도 어느 전시품에는 '머스킬', 어느 전시품에는 '머스켓', 제일 심한 경우엔 British Musket(브리티시 머스킷)을 '부리티시 뮤'(도중에 글자가 잘려 있다.)라고 적어놓은 경우까지… 부비츄랩은 평범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 수준으로 보인다. 더욱이 근현대 파트는 대부분의 오류가 어느정도 심도있게 연구하는 밀덕 몇 명이 하루만 투닥거리면 수정가능한 수준이라 더더욱 욕을 먹고 있다. 이는 언론에서도 이를 보도한 바 있다.[15]

4. 관람료[편집]


박물관 무료 개방의 일환으로 2010년부터 전면 무료 개방을 하니 참고하자. 아시아 최대의 전쟁 박물관이 무료라는 점에서 외국인들이 놀라곤 한다. 여행지 사이트의 후기에서도 자주 언급되는편. 다만 다른 국가들의 박물관 입장료를 생각하면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들도 제시되고 있다.

초반에는 무료 입장이라도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받아야 했지만, 2011년 이후로 표 없이도 들어갈 수 있다. 물론 무료 입장은 상설전시관 한정. 특별전이 벌어지는 기획전시실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16] 참고로 특별전시는 전쟁과는 상관없는 전시를 하는 경우가 많으며 세계사나 고고학이나 문화관계 등. 시간과 돈에 여유가 있거나 기획전시실에서 전시하는 테마에 관심이 있을 때 들어가 보자. 입장료가 비싸보이긴 하지만, 원래 그게 있던 나라 박물관 대신이라 생각하면 엄청 싼 이색적인 전시회가 종종 있다.

또한 기념품 판매소와 서점이 있어서 대한민국 국방부가 찍어내는 공식 전쟁사 책들을 구입할 수도 있다.
5. 야외 전시병기[편집]



육상병기

M4A3E8 셔먼
M46 패튼
M47 패튼
M48A2C 패튼
Type 59
SU-100
T-34/85 Type.1944
M36 잭슨
BM-13 카츄사
M56 스콜피온
K1 전차
LVTP-7
M113A1
KM900
K200
Type 63
M110 자주곡사포
T-8 90mm 대전차포
M114A1
M115 8인치 곡사포
M167 발칸
152mm ML-20 곡사포
4.5인치 로켓포
M107 175mm 자주포




해상병기

참수리호 357정[17]
3인치 함포
Mk30 5인치 38구경 함포
Mk2 40mm 2연장 함포
Mk4 40mm 4연장 함포
Mk4 20mm 단연장 대공포
Mk20 20mm 2연장 대공포




군용기

B-52
C-119
T-37
F-86F 세이버
F-4 팬텀
T-41B
L-19
C-46
F-5A
S-2
MIG-19
U-6A
AH-1J



기타

MGM-52 랜스
호크 대공미사일
6. 같이 보기[편집]



육군박물관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부속


국립전사박물관 - 대한민국 육군부사관학교 부속#


쿠빙카 전차 박물관 - 러시아


소뮤아 전차 박물관 - 프랑스


앵발리드 - 프랑스


애버딘 전차 박물관 - 미국


문스터 전차 박물관 - 독일


보빙턴 전차 박물관 - 영국


제국 전쟁 박물관 -영국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 북한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 - 북한


7. 교통[편집]



서울 지하철 4호선 & 서울 지하철 6호선 - 삼각지역 12번 출구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 전쟁기념관 정류장 : 110A, 421, 740, 용산03
8. 그 외[편집]



전시관 주변 광장에는 분수대를 포함하여 인근에서 찾기 힘든 넓은 광장이 잘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주말에는 조깅이나 가족단위로 쉬러 나온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2010년 8월 한국군 발전사 전시관의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다. 여기 가면 사격체험같은 자잘한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영점 사격 외에도 실거리 사격이나 전술사격등이 가능하지만 관리인분들이 어린이용이라고 잘 안시켜주신다. 현역 예비군이 견착하고 거치 사격해도 옆에서 막 난사하는 백인 꼬맹이보다 안맞는 신묘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2012년 3월에 6.25전시실 제1관의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고 그와 동시에 추모전시실이 공사에 들어갔다.




상술하였듯이 2010년부터 입장료를 받지 않는 무료 개방 정책을 실시하였다고 하나 이것이 박물관에 좋은 것 만은 아니다. 관람객들에게 5000씩 받던 입장료를 철폐하고 그 대신 남는 공간에 각종 행사를 유치함으로써 박물관의 수익구조 개선을 꾀하는 구조인데 이는 확실히 박물관 운영 개선의 효과는 있으나 그 이전부터 있었던 전쟁사 박물관으로서의 품위는 많이 떨어진 상태. 매표소가 있는 곳부터 처음 전시실에 들어가는 곳까지 각종 전시의 현란한 광고판이 늘어서 있는 것은 박물관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과는 물론이고 들어오는 외국인도 어리둥절해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성격으로 기념관 안에 새로 생긴 카페만 2군데![18]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미친듯이 짜증과 어그로를 유발하는 초딩들이다게다가 그 "남는 공간"도 원래는 뭔가를 전시했던 장소라 원래 있엇던 전시물은 어디론가 이전 됐다는 이야기다. 대표적으로 팬텀기 조종석 같은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볼수 없다.

하여간 이런 조치와 함께 차례대로 여러 전시실 및 외장 공사를 하는 데 이런 공사를 할 때마다 박물관 전시물의 질과 양은 확실히 계속 떨어지고 있다.[19] 2010년 한국군 발전사 공간의 업그레이드를 하면서 기존에 따로 할당되어 있었던 해병대 관련 전시관은 완전히 없어져 전시관 수가 1개 줄어듦과 동시에 그 공간은 임대하여 박물관의 수익으로 들어오게 했으며, 또 2012년의 공사는 박물관 주변의 벽을 없애고 공원형 박물관을 만들어 시민에게 공개한다는 명목으로 벽을 없애고 나무를 많이 심은 것은 좋은데… 바깥에 전시되어 있던 수많은 무기들은 모두 철거되어 박물관으로서의 특색은 더 이상 찾기 힘들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가면 여기가 공원인지 박물관 앞인지 제대로 알 수 없을 정도.




참수리 357호를 재현한 모형역시 대대적인 공사가 이루어져 전사자들의 유품 전시관과 제1연평해전,제2연평해전을 다룬 영상물들이 설치되었다.[20]




서울 및 경인지역 사회복무요원 이라면, 사회복무요원 소양교육 기간 중에 프로그램이 어떻게 짜이냐에 따라 아예 안 올수도 있지만, 현장체험학습으로 이 곳을 오는 경우가 많다. 주 목적은 당연히 6.25 전쟁 관련 기념관 탐방. 그리고 다들 흔들림 없는 확고한 멸공의 정신을 가슴속에 새기고 힘찬 발걸음으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다른 교육날보다 집에 더 일찍 갈 수 있다는 조기귀가의 정신을 가슴속에 새기고 힘찬 발걸음으로 돌아간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 주인공이 첫 등장하는 인질극이 촬영된 곳도 이곳이다. 아예 이토 히로부미가 세운. '이토 회관'으로 나온다.




고바야시 모토후미제2차 한국전쟁 후기에서 동양최고의 군사박물관이라고 했다.




2012년 6월 25일에는 평화의 광장에서 6.25 전쟁 62주년 기념식이 개최되었다. 6.25참전유공자, 해외참전교포, UN참전국용사, 모범장병, 전.의경, 의무소방원, 3부요인 및 각계인사, 시민 등 4,000 여명이 참석했고 KBS에서 생중계되었다.




정문 주변 조형 재배치 때문에 자리가 밀린 일부 견인포 실물 전시품은 헬기 야외전시장 뒷편 미군기지 인근 벽에 설명도 없이 전시되었다. 개중에는 KH-179나 구 일본군에서 사용하던 나름 레어한 무기도 있다. 전쟁 기념관 내부 전시실 중축 덕분에 일부 전시품은 실내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4층에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부속 연구실들이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대한민국 국군의 역사를 정리하여 연구, 보존하는 기관으로 대한민국 국방부직할기관이다. 이 곳에 위원장으로 백선엽장군의 사무실이 있다.




최근엔 어느한 밀덕이 일본에서 채집해온 항아리 수류탄을 기증하는 용자짓을 해서 화제가 되고있다.기증하면 나전칠기세트와 증서를 준다고 #




플린트 락 머스킷의 작가이자 밀덕녀 알파캣은 배멀미로 바다에 가지 못하자 친구를 끌고 이곳에 가는 기행을 보였다.




몇몇 대포,야포 속에는 관광객이라쓰고 무뇌아라 읽는다들이 두고간 쓰레기가 가득하다.




152mm ML-20SU-100의 경우 1992년불가리아에서 사온 것이다.#, ##




T-34 85의 경우 미국 혹은 출처가 불명확하고 이외에도 다수의 유물들이 전쟁 중 썼던 것인지 혹은 쓰지 않고 단순히 기종만 같은 것인지는 유물 카드에 적혀있되, 전쟁 중 썼던 것은 별로 없다고 한다. 단, 63식 수륙양용 경전차는 국군 노획품이라고 한다.




여기서 드라마 여왕의 교실(MBC)의 봉사활동 오러온 학생들인 마여진고나리오동구, 은보미, 심하나, 김서현등을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이 자원봉사 청소하러 온 장소로 나타난다. 그리고 또한 여기서 에피소드 7화에서 고나리가 지금까지 모든 악행을 본인의 입으로 자백받은 장소로 등장한다!!!




진에어 스타리그 2011의 결승전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M46 패튼, R5 헬리콥터, C-119 수송기, F4 전투기의 경우 91년도에 주한 미군이 전시용으로 무상으로 준 것이다. #




2014년 12월 3일 전쟁기념관 외부에 위치해있던 전통혼례 예식장이 사라지고, 새로 어린이박물관이 개장 되었다.




2016년 12월 말 다시 일부분을 재구성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현대 파트 부분제발 이번엔 고증오류 좀 고쳐라




2012년 1월 부터 네이버 지도에서 로드뷰와 뮤지엄뷰를 제공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남구 UN기념공원 인근에 제2전쟁기념관 건립이 추진 중이나 기존에 있던 공원(유엔평화공원) 상당 부분을 없애고 지어지는것이 알려지면서 인근 주민들이 반대하고 있다.



[1] 엄밀한 의미에서 국공립 박물관에는 속하지 않는다. 국방부나 문체부가 직속으로 관할하는 전시기관이 아니고 국방부 산하의 기타공공기관인 전쟁기념사업회가 운영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정식 분류상으로는 사립박물관이란 어정쩡한 스탠스에 처한 것이 현실이다. 이는 국가보훈처가 산하에 두고 있는 독립기념관도 마찬가지인데, 후자는 기재부에서 지정한 준정부기관이라 일정 측면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존재한다.[2] 버스로는 110번, 421번, 740번으로 연계가능하다. 아니면 100번, 150번, 151번, 152번, 500번, 501번, 502번, 504번, 506번, 507번, 605번, 750번, 751번, 752번을 타고 삼각지역에서 내려서 걸어와도 된다.[3] 단순히 보관하는 물건 수량으로만 따지면 육군박물관도 만만치 않지만(한 예로 민승기 씨의 책의 경우 육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이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것보다 많다.), 여기는 일반적인 박물관하고는 좀 거리가 있다. 일단 방문부터 단체는 일주일 전에 예약이 필수며, 관람도 안내요원의 안내 하에 하루에 3차례(오전 10시, 오후 2시와 3시)만 가능하다. 다만 개인의 경우 별도의 입장절차 없이 자유롭게 관람 가능하다.[4] 그런데 북한이 2012년 4월 개관한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의 사진을 보면 엄청나게 넓은 홀 안에 실물 전차들, 심지어는 엄청난 장포신의 곡산자주포가 실내 전시되어 있고 천장에 실물 MiG-21, 23 전투기가 매달려 전시되어 있는 등 전쟁기념관보다 더 규모가 클 가능성이 높다. 폭풍호 항목에 사진이 있으니 참조 바람. 그런데 아무리 크다고 해도 외국인 관광객이 자유롭게 갈 곳이 아니라서 얼마나 가기나 할까 어차피 거기에 서방권 무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서방제가 취향인 사람은 한국에 와야 한다[5] 실제로 트립어드바이저 같은 여행지 사이트 평점의 경우 호평 일색이며 서울소재 관광지 순위로도 서울메트로 (...), 북한산국립공원 다음인 3위를 차지하고 있다.[6] 말 그대로 바싹 붙어있다.[7] 해외 파병실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8]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4D 입체영상[9] 타이콘데로가 전투함은 1980년대부터 운용된 전투함이다. 그리고 이지스 시스템의 개념자체가 1960~70년대 대함미사일의 위협이 증가하면서 등장한 개념이다.[10] BVR전투(시계 외 전투). 말 그대로 눈 밖의 먼 거리에서 레이더를 통한 미사일 교전을 의미한다.[11] 공대공 전투에 중점을 둔 전투기들이 전면 레이더 반사값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이런 경우다. 정면의 적기의 포착을 막으려면 전면 레이더 반사값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12] 현재는 오타수정됨[참고로] T-59라는 이름은 BAE 호크의 제식명칭이다.[14] 다만 이런 오류는, 외국에서 Type이라고도 쓰는 것 처럼 외국에서 표기를 그대로 옮긴 것 때문에 잘못 기재한 것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K1전차도 첫 공개때는 88전차라고 불렀는데, 88식 전차라고는 안 불렀음에도 외국에서는 Type 88이라고 한 때 부르기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15] 해당 기사를 쓴 기자는 이 문서를 보고 기사를 쓰게 됐고, 평소 위키니트라고 밝혔다[16] 대표적으로 인체의 신비전.[17] 레플리카. 진짜는 2함대에 전시되어 있다.[18] 1층과 2층.[19] 틀린말이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국군 발전사 전시관인데, 과거의 전시관은 발전사 외에도 각군의 작전과 상황을 잘 설명해놨는데 현재의 전시관은 그런거 없다 대부분의 자료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어가거나 아예 언급도 안하는 경우가 태반이다.[20] 다만 좀 까여야할게 하나 있는데 참수리 357에 전시된 전사자의 신분증은 주민등록번호가 모자이크 처리되었있는 반면 국군발전실에 전시된 신분증은 주민등록번호는 그대로 노출되었다.무슨 지거리야

Opinion | 트럼프의 겁나는 대북한 전략 - The New York Times



Opinion | 트럼프의 겁나는 대북한 전략 - The New York Times



Opinion
트럼프의 겁나는 대북한 전략



By Nicholas Kristof
Oct. 24,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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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북한의 선전 포스터:“이 땅에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미국도 결코 무사치 못할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평가에 따르면, 미국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첫날에만 백만 명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한다.

내가 3명의 뉴욕타임스 동료와 함께 5일간의 북한 방문을 마친 후, 그러한 핵전쟁이 정말 무서울 정도로 상상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위협이 역효과를 내고 김정은 자신의 선전과 군사동원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북한은 자신의 핵무기가 방어용이고, 약자를 괴롭히는 미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그들의 공식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트럼프의 말들을 이용해왔다. 그리고 북한 관리들은 트럼프의 허풍을 그들 자신의 허풍을 위한 구실로 이용한다.

“미국 트럼프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였다”고 북한 육군 중령 황명진이 내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의 최고 지도자가 우리에게 명령만 내리면, 우리는 즉시 미국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한 전형적인 선전 그림에는 한 강한 북한 군인이 인상이 험상궂은 금발 미군의 얼굴을 밟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침략자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쓰여있다.

김정은은 약하게 보이거나,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북한 관리들은 그들의 군사동원과 (미국과의) 대화 또는 화해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트럼프의 위협을 계속해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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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국을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다는 현 트럼프 행정부의 공격적인 발언 때문에 현재로는 우리는 그 어떤 대화의 시작도 생각할 수 없다”고 리용필 북한 외무성의 고위 관리가 말했다.
Image북한의 선전 포스터:“침략자들에게 죽음을!”

이번 방문을 통하여 나는 트럼프의 전략 전체가 일련의 근본적이고 위험한 오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 오해는 제재를 가하고 전쟁에 대해 말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추정이다. 나를 비롯해 이번 뉴욕타임스 취재진과 대화를 나눈 모든 북한 관리들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국의 정보 계통 전문가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지난번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북한은 핵무기를 그들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재가 북한에 고통을 주고 있다는 징후를 목격하기는 했다. 사업가들이 중국이 무역을 엄중 단속하는 것에 대해 불평했고, 휘발유 가격은 2배로 올랐으며, 전기도 제한배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전이 심지어 수도인 평양에서도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태양 전지판이 더 흔해지고 있고, 김정은은 제재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자유화하려고 움직이고 있다. 협동농장들은 개인 농지 사용을 더 많이 허용하고 있고, 공장 관리인들도 이제 이윤 창출에 대한 더 큰 책임과 재량권을 갖고 있으며, 노상 장마당도 이전보다 더 용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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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지배계층)들이 겪는 제재의 고통도 수도 평양에서의 생활에 약간의 재미를 불어넣는 김정은의 계획으로 완화되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평양에 사는 것은 고사하고 평양을 방문하기 위해서도 특별 허가가 필요하다). 북한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전체주의 국가이지만, 놀이공원, 수상 공원, 스키장과 북한판 씨월드(Sea World)인 돌고래 쇼도 있다. (나는 마지막 부분에 대형스크린을 가득 채운 미사일 사진들이 나오기 전까지 정말 이 돌고래 쇼를 즐겼다.)

한국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 따르면, 북한의 경제개혁은 G.D.P. 성장에 도움을 줘 북한은 작년에 오랜 경제침체 후 3.9%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 성장률은 작년 미국의 1.6% 성장률의 2배 이상이다.

두 번째 오해는 중국이 북한의 행동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항상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과장해왔다. 김정은은 시진핑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 일부러 엇나가는 행동을 해왔으며, 중국 관리들은 이런 일이 이번 달 중국의 제19차 공산당 당대회 기간 중 북한이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을 함으로써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북한은 심지어 중국의 북한 문제 담당 핵심인물인 콩쉬안유(중국의 6자회담 대표)의 방문을 허가하는 것도 거절해왔다. “우리는 콩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구태여 여기까지 와서 그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 북한 관리가 경멸조로 내게 말했다.

미국의 세 번째 오해는 북한 정권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추정이다. 그리고 속이 빤히 보이는 공갈이 이 붕괴 사태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한다. 1990년대 초 내 아내와 나는 뉴욕타임스 도쿄 특파원이 되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도쿄 특파원이 되면 북한과 북한의 임박한 붕괴를 취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북한의 붕괴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 언젠가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내일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말라. 그리고 북한의 경제개혁이, 그 아무리 대단하지 않더라도, 북한 정권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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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실제로 유엔 제재를 통해 북한에 경제적 압력을 가중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고통은 더 심해질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부터 이라크까지 그랬듯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국제관계의 최악의 실수 중 하나는 현실이 아닌 희망사항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이 바로 지금 이곳에서 아주 위험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솔직히 말해 트럼프의 전략은 나를 겁먹게 한다.

연설과 트위터를 통해 트럼프는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으며 군사 옵션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있다. 하지만 그가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북한의 비핵화 목표는 달성 불가능하고, 중국의 대북 압박 전술도 비현실적이며, 북한 정권이 취약하다는 전제는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전쟁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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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북한에 갔는가



By Nicholas Kristof
Oct. 2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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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북한을 건국한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의 초상화가 북한 수도인 평양에 있는 한 빌딩에 걸려있다. 이 김씨 왕조의 3번째 통치자가 현재 북한을 이끌고 있다.CreditCreditJonah M. Kessel/The New York Times


나의 최근 5일간의 북한 방문 이래, “거긴 왜 가냐?”고 묻는 비판론자들의 비난을 접해왔다.

첫째,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너는 불필요하게 너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고 김정은이 너를 붙잡아 두면 그에게 협상카드를 주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적의 영토에 들어간 멍청이 언론인 때문에 신경을 써야만 하겠는가?’

둘째,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북한에 가면, 너 자신도 세계 역사상 가장 철저한 전체주의라고 인정한 국가의 대변인이 될 뿐이다. 북한이라는 나라는 속은 썩어있고 이를 감추기 위해 겉치레만 하는 나라이고, 너는 그런 나라의 선전을 전달하는 “쓸모있는 바보”가 되는 것이다.’

솔직히 다 타당한 주장들이다. 그러니 이 기회에 서로 솔직한 토론을 해보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의 북한 취재 뒷이야기들을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북한 비자를 받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북한 비자를 받으려 시도했을 때도 북한 외교관들과 길고 민감하며 까다로운 협상을 거쳤다. 그리고 물론 내 아내와도 협상을 해야 했다.(이건 불평이 아니다. 만약 내 아내가 나에게 적극적으로 북한에 가라고 했다면, 아마 나는 걱정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뉴욕타임스 기자 4명은 북한 비자를 발급받았다. (우리 취재진의 북한 방문을 다룬 비디오가 현재 제작 중입니다. 주목해주세요) 비자 발급 후 곧 미 국무부 승인을 받았고 동시에 북한 방문에 유효한 특별 미국 여권을 발급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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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베이징에서 매일 운항하는 삐걱거리는 러시아 항공기를 타고 가는 것이다. 기내 엔터테인먼트는 북한군 오케스트라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영상인데 이 영상 중간중간에는 미사일 발사 장면이 끼어있다.

우리가 북한에 도착한 순간부터 북한 외무성 담당 직원 2명이 계속 우리를 호송했고 우리를 외무성이 경비, 관리하는 주택 단지 안에 묵게 했다.

우리를 담당하는 북한인들은 항상 정중했으나 나의 이전 북한 방문 때는 없었던 위협적인 징후가 이번에는 있었다. 미국인 3명이 현재 북한에 억류 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얼마 안 된 지난 8월, 북한은 한국인 기자 2명과 이 기자들의 소속 언론사들에 대해 궐석 재판으로 사형 선고했다. 그들의 쓴 글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는 북한 외무성이 우리가 북한에 오는 것을 반대했던 북한 군부나 보안기관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격리시키고 호위하고 있다는 강한 암시를 보내 불안했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융통성 없이 통제되는 나라이다. 공개적인 반대도 없고, 종교와 시민사회도 없으며 그 누구도 정부에 불만을 표시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람들과의 대화는 분명 북한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일반 북한인들은 포스터를 훔친 죄로 평양에 구금돼 있다가 식물인간 상태로 미국에 돌려보내진 다음 며칠 후 사망한 오토 웜비어라는 미국인 학생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나라를 파괴하겠다는 트럼프의 협박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북한 정부는 북한 주민들이 트럼프의 협박에 대해 알기를 원하고 있고, 그러한 협박은 김정은이 제국주의자인 미국의 공격으로부터 조선을 지켜준다는 김정은의 국수주의적 주장을 떠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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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한 나라 현장 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 나라의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그 나라가 행사하는 권력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선전을 주입하기 위해 각 가정의 벽에 달려있는 스피커, 모든 성인이 달고 다니는 김씨 일가의 초상화 브로치, 매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정전, 하지만 또한 국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징후들, 김정은에 대한 트럼프의 개인적 공격에 대해 북한 관리들을 특별히 분개하게 하는 존엄성을 중시하는 유교 사상, 나의 지난 2005년 방문 이래 더 강경해진 북한의 태도, 그리고 북한은 미국과의 핵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승자로서 우뚝 부상할 것이라는 기이한 자신감까지.

한 공장에서 우리는 “정치 학습”을 하는 북한 노동자들을 우연히 만났다. 그들은 하루에 2시간씩, 그리고 토요일에는 거의 온종일 정치 학습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에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미국인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한 여인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런 다음 방 안에 있던 북한 사람들이 저절로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이 말을 미국인들 앞에서 했다는 게 좀 이상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북한을 방문하면 북한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북한 밖에서 북한인들은 때때로 로봇처럼 여겨진다. 북한인들을 직접 만나보면, 그들도 웃고, 작업을 걸고 연애하며, 걱정하고, 사랑하며, 다른 사람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한 북한군 간부가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억세게 악수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그렇게 세게 악수한 것이 나에게 겁을 주고 양키 제국주의자들에게 북한인들은 근육질의 슈퍼맨이라는 것을 전달하려고 그랬는지 물었다. 그는 당황한 듯이 웃었고 인터뷰를 끝냈을 때는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나는 수백만 명이 죽을 수도 있는 끔찍한 대재앙이 될 수 있는 전쟁의 위험에 대해 우리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북한을 떠났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북한 내에서 취재, 보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간단히 말해, 취재현장에 직접 가보는 것을 대체할 방법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이라크 전쟁을 바로 앞두고 터득했어야 했던 교훈이다. 그때는 현장에서보다 위싱턴에서 늘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위주의 취재와 보도가 이루어지는 경향이 다분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생명이 걸려있고, 공식적인 대화 채널(통로)이 없을 때는, 언론이 때때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경고를 전달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위험을 주의 깊게 따져봐야 한다. 물리적 위험과 선전원들에 의해 이용될 위험 전부를. 그리고 이러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라크 전쟁 발발 전날 밤에 그랬던 것과 같이 우리 미국 대통령이 전쟁을 향하여 무턱대고 내달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가슴 내려앉는 기분이 내 몸 깊숙한 곳에서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이럴 때 언론인들이 할 일은 비록 아무리 불완벽하더라도 밖으로 나가 취재하고 밤중에도 경보를 울리려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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