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5

말 못하는 것들의 눈물이 낭자하다 – 시사IN



말 못하는 것들의 눈물이 낭자하다 – 시사IN




말 못하는 것들의 눈물이 낭자하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지음, 문학동네 펴냄
고영직 (문학평론가) 2011년 03월 29일 화요일 제184호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지음문학동네 펴냄
고고학도 시인 허수경의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은 우리들 일그러진 마음의 생태학에 관한 시적 격문(檄文)이다. 허수경의 시는 “구멍을 뚫어야 지속되던 문명”(‘오후’)의 파괴성과 불모성을 성찰하고 사유하는 동시에, 우리 안의 견고한 마음의 관료주의를 탄핵하는 일종의 산문시의 전략을 구사한다. 당연히 시의 행간에는 이름 없는 것들의 슬픔과 말 못하는 것들의 눈물이 낭자하다.


13쪽 분량의 장시 ‘카라쿨양의 에세이’를 보라. “오늘 먼동이 틀 무렵 우리는 비명을 들었다./그 소리는 날카로운 고드름 가위가 되어 바람을 오려대고 있었다. 폭력에 대해서 아무런 항거도 할 수 없는 한 포유류가 질러대는 소리였다.” 오비스 아리에스라는 학명을 가진 카라쿨양(洋)의 목소리로 인간의 탐욕성을 술회하는 이 산문시의 처연하기 짝이 없는 살풍경을 나는 차마 정시(正視)하지 못하겠다.

무례한 세상 향해 생태적 공공감정 회복 촉구

구제역 파동으로 300만 마리 이상의 소·돼지가 영문도 모른 채 생매장을 당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동물들의 억울한 죽음을 ‘살처분’이라는 불손한 말로 정당화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도 예의를 저버린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그날 기찻길에 놓여 있던 시체였는지도”(‘기차역에 서서’) 같은 시적 진술들을 읽는 일은 그래서 몹시 고통스럽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무례한 태도는 결국 우리 자신마저 하나의 사물로 취급하려는 시선의 폭력을 내면화하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아니겠는가. 허수경 시인은 이처럼 무례한 세상과 무례한 문명을 향해 생태적 공공감정(public feeling)의 회복을 온몸으로 환기하고 촉구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문명 혹은 문화의 반달리즘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시사IN 윤무영허수경 시인은 현재 독일에서 고고학과 고현학을 동시에 넘나드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 ‘산벚을 잃고’ ‘나의 도시’ ‘글로벌 블루스 2009’ 같은 시들은 이 시집의 가편(佳篇)이라 할 만하다. “더 이상 위로가 될 자연의 별은 없었네/ 더 이상 위로가 될 너가 없는 것처럼 울었네”(‘산벚을 잃고’)라는 도저한 상실감과 유폐 의식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5년에 한 번 본에 있는 영사관으로 가서 패스포트를 갱신하는 “자발적인 유배”(‘글로벌 블루스 2009’)의 삶을 선택한 시인의 사유가 낯선 땅에서 더 고독했으므로 더 깊어졌음을 이 시집은 명백히 증명한다. 전 세계를 타향으로 생각하는 시인의 경지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시집 곳곳에 사막과 황무지의 이미지가 일종의 사태(沙汰)를 이루는 것도 시인의 이러한 근원적인 탈향의식과 무관하지는 않을 터이다. 즉, 허수경의 시는 “난민의 일기장”(‘슬픔의 난민’)인 셈이다.



시인은 현재 독일에서 고고학과 고현학을 동시에 넘나드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문명의 기억과 미래를 동시에 투시하려는 시인의 작업이 유토피아에 대한 냉소를 의미하는 디스유토피아(disutopia) 프로젝트를 진정으로 넘어설 수 있기를! 그래서 허수경의 시를 읽는 우리들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외쳐야 할지 모른다. 에브리바디 샤우팅, “인류!/사랑해/울지 마! 하고”(‘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이토록 뜨겁고 강렬한 시의 향연에 당신 또한 부디 동참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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