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27

평화공존의 시대는 과연 오는가 | YES24 블로그

평화공존의 시대는 과연 오는가 | 기본 카테고리2003-02-2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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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저
이룸 | 200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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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북한의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방문한 북한 방문기이다. 십수년이나 더 지난 과거의 북한방문기가 지금와서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긴, 그때랑 지금이랑 엄청 변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무너졌으며, 김일성 주석도 사망했고, 금강산 관광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왕회장이 소떼를 몰고 넘어가기도 하였고, 무엇보다도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상봉이 있었다. 정말로, 격세지감이다. 문익환 목사가 북한에 갔다가 귀국해서 연행되던 장면, 북한에 넘어가던 임수경씨의 모습과 북한에서의 모습들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우리가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일성은 소련의 꼭둑각시로 김성주라는 본명을 항일투사였던 '김일성 장군'의 이름으로 속여먹고 해방 후 북한에서 세력확장을 꾀하다가 통일전선전술로, 경쟁파벌이었던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등을 숙청하여 북한을 자신만의 동토의 왕국으로 만들었으며, 3대 혁명 소조 운동을 주창하여, '천리마 운동' '새벽별 보기 운동' '천삽 뜨고 허리 펴기 운동' 등 선동적인 구호로 인민들을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들은 5호 감시제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살고 있으며 매일 강냉이죽으로 겨우 끼니를 연명하고 살고 있다. 대충 요약한, 내가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배웠던 북한의 실상이다. 그래서, 불쌍한 북한 주민들을 빨리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며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과 손을 잡고 평화통일을 어서 빨리 이루어야 한다고 배웠고, 반공글짓기 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정말 우리가 배운대로라면 북한에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세기가 바뀐 후 우리에게 드러나는 북한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다. 매일 강냉이죽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어찌 저리 고울 수 있을까? 아시안게임에 왔던 응원단들은 또 어떻고? 미국의 역사, 러시아 혁명사, 프랑스 혁명, 영국의 권리장전, 일본의 메이지 유신, 손문의 삼민주의, 중국 홍군의 대장정 까지 외국의 역사는 잘 알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우리의 동포들에 대해 눈과 귀를 닫고 살아왔다.

이 책은 기행문 형식인 1부 - '사람이 살고 있었네' 와 대담 형식인 2부 - '통일을 위해 문학의 길을 걷다 보면 어디나 조국이었네' 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에서는 북한에서 직접 만났던 사람들과 주민들에 대한 체험을, 2부에서는 북한과 관련된 광범위한 토론을 담았다. 무엇보다도 인상깊었던 것은 '작가' 황석영의 스케일이다. 그리고, 황석영이 말하는 '김일성 주석' 에 대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황석영은 "글이란 것은 어떤 사람이 산 것만큼 나온다." 라고 한다. 동감한다. 책상 머리에 앉아 자의식이나 나불거리는 작가들의 소설과 탄광을 소재로 한 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 1년 동안 직접 탄광 광부 생활을 했던 작가들의 소설은 분명히 다르다. 황석영 역시, 자신을 '분단시대의 작가'로 규정하고 통일을 위해 글을 계속 써나갈 것이다 라는 자신의 결심에 따라 구속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올바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방북을 한 그의 방문기가 힘을 가지는 것은 그의 삶의 올바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작년 연말에 가장 위대한 작가로 선정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소설가 황석영 "평화열차 타고 평양 방문 추진중"

소설가 황석영 "평화열차 타고 평양 방문 추진중"

한국일보 | 2009.04.13 03:09
올 여름 성사 목표 유라시아 작가 6명과 함께… 당국과 논의 진행중
소설가 황석영(66)씨가 열차를 이용한 북한 방문을 추진하고 있다.
황씨는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올해 여름 성사를 목표로 '유라시아 작가 평화열차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프로젝트는 황씨가 유럽과 아시아의 저명 작가들과 6량의 열차에 동승,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평양을 거쳐 경의선으로 서울에 도착한다는 구상이다.
지난해부터 이 프로젝트를 추진해 온 황씨는 "정부 당국에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계획안을 제시했으며,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우리 정부는 남북간의 긴장이 완화되는 시기를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며 "다른 일로 방북한 인사를 통해 북측에도 이같은 계획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국내 문학ㆍ출판계 관계자들도 "황씨가 지난해부터 '평화열차 프로젝트'의 후원자 물색 등 활발한 물밑작업을 진행해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계획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북한의 로켓 발사 등으로 경색된 남북관계 때문이다. 황씨는 "북측도 방북 인사를 통해 지금은 그런 행사를 논의할 계제는 아니지 않느냐, 관계 정상화 때까지는 쉽지 않다는 의견을 전해왔다"며 "하지만 '흥정은 붙여라'는 말처럼 계획 추진은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로켓 발사로 남북관계가 악화됐지만 조만간 북미 대화가 시작되고 남북관계도 급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황석영씨는 분단 이후 남한 작가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소설가다. 1989년 3월 민예총 대변인 자격으로 평양축전이 열리던 북한을 방문, 34일 간 머무르며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 등을 만났고 이후 일본 독일 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1993년 4월 귀국과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돼 4년 1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방문기와 동족상잔의 아픔 극복 등의 메시지를 담은 장편소설 <손님> 등을 발표했다.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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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에 발탁된 황석영의 붉은 프로필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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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에 발탁된 황석영의 붉은 프로필

1) 위장취업 제1기생인 손학규는 2006년11월24일 한국발전연구원에서 이런 강연을 했다.

“저는 실제로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직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소설가 황석영씨와 같이 구로동 수출공단에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제가 거기에 취직을 하려고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이 사회를 뒤엎을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공장에 취직해서 다니다가 친구에게 들킬 형편이 되어서 다른 공장을 찾고 있던 중에 박형규 목사님께서 노동운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 빈민운동이라고 해서 청계천 판자촌에 가서 살았습니다. 지금 뉴라이트의 기수가 되어 있는 김진홍 목사님도 같이 일을 했습니다.”

2) 님을 위한 행진곡, 산자여 따르라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한 노래로 윤상원과 그보다 한 해 전인 79년 겨울 연탄가스로 숨진 그의 여인 박기순과의 영혼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두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발표되었다. 전남대 선후배 사이로 들불야학에서 만난 두 사람은 1982년 2월 망월동 묘역에 합장되어 부부의 연을 맺었고, 님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5월18일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불려졌다. 영혼으로 맺어진 부부가 함께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에서 황석영이 내용을 따다가 작사를 했고, 여기에 김종률이 곡을 붙인 것이다

3)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 김대중과 나란히 황석영이 바친 전태일 헌시가 있다

4) 2003년10월 송두율의 변호인을 자처하고 나선 또 다른 인물, 황석영씨!“송두율이 후보위원이라면 북에서 편한 일생을 보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겠느냐”.
반공닷컴  http://bangong.co.kr/)  http://bangong.ca.to/)

5) 범민련은 1988년 남한의 운동권 인사의 제의와 북한조국통일위원회의 화답으로 북한, 남한, 해외동포로 구성되는 통합단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한의 대남사업에 활용되는 전위조직에 불과하다. 이들은 1989년 문익환, 임수경, 문규현의 밀입북으로 고무되어 1990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 남측 대표로 황석영이 참가한 가운데 첫 출범식을 가졌다. 이들은 1990년대 들어 운동권의 투쟁 노선이 민주화에서 통일 운동으로 변화함에 따라 맞춰진 조직이며, 이런 이유로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자가 대단히 많다. 한편, 범청련은 밤민련의 청년단체로 남측 대표는 한총련이 맡고 있다. 이 단체와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조용술(목사,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공동본부장),
이해학(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
조성우(범민족대회 사무처장),
이창복(凡民聯실행위원장, 全民聯 공동의장, 全國聯合 상임의장),
김희택(凡民聯 준비위원, 全民聯 사무처장),
권형택(凡民聯 사무처 차장),
김희선(서울민협 의장),
김종식(全大協의장, 한양大 총학생회장),
한철수(全大協산하 학추위 위원장, 경희大 총학생회장),
허동준(중앙大, 全大協 대변인),
하태경(서울大, 서총련 조통위 연대사업담당),
손성표(고려大 서총련 사무국계열부문 담당),
김시몽(목포대 전 총학생회장)
신현욱(한양大全大協의장 수행비서),
박순경(목원대 명예교수, 凡民聯 남측본부 결성준비위 부의원장),
전창일(凡民聯 남측본부 조직위원),
홍근수(향린교회 목사),
김재용(한양大 총학생회장, 韓總聯 의장),
김병삼(韓總聯 조국통일위원장, 연세大 총학생회장),
황석영(소설가), 
허현준(凡靑學聯 부의장, 전북大 회계4),
김세원(凡民聯 남측본부 光州전남연합 창립준비위원장),
오병윤(민주주의 민족통일 光州전남연합 사무처장),
김양무(凡民聯 중앙정책실장),
강희남(凡民聯 의장),
이종린(凡民聯 부의장),
전창일(凡民聯 부의장),
강순정(凡民聯 부의장),
안희만(凡民聯 간사),
황인성(凡民聯 집행위원장, 全國聯合 상임집행위원),
조성우(민족회의 정책위원장),
강재우 (凡民聯 남측본부 의장),
신창균(凡民聯 남측본부 상임고문),
유근삼(凡民聯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의장),
정민주(凡靑學聯 남측대표, 인천대 건축3),
이혜정(凡靑學聯 남측대표, 가톨릭대 회계2),
박용모(법명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공동의장),
민경우(凡民聯 남측본부 사무처장),
이종린(凡民聯 남측본부 의장),
이천재(凡民聯 상임부의장) 등이다.

이들은 지금도 주로 운동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민주주의민족통일 全國聯合(약칭 全國聯合), 통일연대, 민족문제연구소, 凡民聯 등의 단체에서 그 이름을 볼 수 있다. 한 편, 소위 원로라 일컬어지는 의장단들은 모두 1960년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출신들이다.

범민련, 범청학련 관련 통일운동 구속사건
 
국가안전기획부는 1993년 5월 6일, 작가 황석영씨가 지난 89년 3월 20일 처음 북한에 들어간 이래 모두 5차례에 걸쳐 방북했고 김일성 주석을 7차례 만나 고려연방제 등을 논의했으며, 북한의 대남 공작기구인 통일전선부의 활동지침에 따라 조국통일 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그 전위조직으로 활동하는데 앞장서 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4월 27일 미국에서 입국한 황씨를 구속한 뒤 1차 구속기간이 이날 만료됨에 따라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부터 구속기간 연장을 허가받아 그의 방북 행적 및 조국통일 범민족연합(범민련) 가담 활동내용 등을 계속 조사했다. 서울형사지법 합의25부(재판장 량삼승부장판사)는 5월 25일 수차례 북한을 방문, 국가기밀을 누설하고 범민련 해외본부 결성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무기징역이 구형된 소설 장길산의 저자 황석영피고인(49. 본명 황수영)에 대해 이례적으로 형량을 낮춰 징역 8년에 자격정지 8년을 선고했다.

6) 위키백과: 1943년생, 1989년 3월 북조선의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방북했다.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예술원 초청작가로서 1991년 11월까지 베를린에 체류했다. 이때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신동아》와 《창작과 비평》에 게재했다. 1993년 4월에 귀국했을 때 방북사건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98년 3월에 석방됐다.



2009.5.1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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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자를 위대한 리더십이라고 포장하지 말라 | 발길따라 가는 몽골이야기

약탈자를 위대한 리더십이라고 포장하지 말라

카테고리 : 몽골 이모저모 | 작성자 : 파도
2012년 11월14일, 징기스칸 생일이라며 갑자기 없던 휴일이 생겼다. 신문을 찾아보니 대충 이런  짤막한 내용이 씌어 있다.

“매년 음력 겨울 첫째 달 첫째 날이 징기스칸의 생일임이 확실하고 그의 탄생 850주년을 맞아 올해 11월14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매년 양력으로 시행할 것을 국회에서 의결하였다.”

이것은 뭐 난수표식 표현이다. 음력 겨울 첫 달의 첫째 날이라… 언듯 생각하면 음력 1월 1일인데, 11월 14일은 어디서 왔는가 궁금하다. 따져보니 올해 11월14일은 음력 10월1일이고 따라서 추운 이곳의 겨울철 첫 달의 첫째 날이 맞다.

(사진 : 징기스칸 초상, 몽골국립박물관) 

징기스칸의 생일에 대하여 어디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 시대를 묘사한 몽골비사나 기타 사료를 가지고 학자들이 연구 유추한 결과 음력 10월 1일이라고 확신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1162년에 태어났다고 하니 2012년이 850주년인 셈이다. 물론 이마저도 정확하진 않고 유력한 의견일 뿐이지만 말이다.

기록이 전무했던 그 시절의 몽골족은 야만족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기원전에도 중국은 한자를 사용했고 로마도 큰 역사뿐 아니라 음식, 목욕탕, 노예제도등 자질구레한 내용까지 라틴문자를 사용해 모두 기록하던 때였으니 말이다. 몽골전통문자라는 파스파는 후대 쿠빌라이칸의 지시에 따라 13세기 후반에 나왔으니 그나마도 다행이긴 하지만 그 당시 아시아 전역에서 쓰인 흔해 빠진 한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록까지 없다는 것에 답답한 생각이 든다.

한족과는 철천지 적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의 장점은 문화, 군사전략, 인종, 종교까지도 수입하고 포용하던 징기스칸의 정복정책을 보았을 때 한자를 배척했다기 보다 표의문자를 수용할 정도의 정신세계로 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사진 : 동쪽을 주시하는 징기스칸 동상, 울란바토르 동쪽 90km위치)
(2008.12월 촬영, 지금은 주변이 관광단지화 되어 있고 동상의 허리쯤 출입구가 있어서 말머리위로 올라가면 전망대 역할을 함. 전망대 입장료가 외국인에게 1만원 가량)

최근에 와서 전세계적으로 징기스칸의 리더십을 본받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며 교수며 리더십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주로 떠들고 다닌다. 나는 여전히 이런식의 추종에 대하여 비판하는 입장이다. 무엇을 본 받자는 것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징기스칸을 칭송해야하는 이유로 
  –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고,
  – 오늘날의 지구촌을 가능케 한 서막을 열었고, 
  – 유라시아의 광대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고,
  – Global Comunication Network(오늘날의 Internet)을 만들었다
고 한다.

가히 징비어천가 수준이다. 아무리 찍어 붙일게 없어도 그렇지 정복의 결과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을 마치 인류를 위한 저런 고귀한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살륙을 하고 침략을 한 것처럼 말한단 말인가?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저항하다 가마솥에 통채로 삶기고, 허리가 부러지는 처형을 당하고, 문화재가 불타고, 여자들이 전리품으로 바쳐지고 하였다.  그들이 정복한 곳은 이런 야만적 침탈이 예외없이 일어났다. 그 시절 그들의 본질은 침략과 약탈만이 핵심가치인 약육강식의 야만인이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지구촌, 자유무역지대, 글로벌 네트워크 따위의 기상을 품었다고 해설하는게 말이 되는가.

‘징기스칸의 위대한 리더십’이란 것을 보자.

  1. 동서 8,000km의 유라시아 제국을 150년간 통치한 경영자
     – 다민족 다종교국가 건설, 법치에 원칙
  2. 전투때 마다 매회 새로운 전략 전술 기술로 타고난 전략가이자 정보전의 대가
    – 적의 기술을 벤치마킹
  3. 믿음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진정한 리더십의 소유자
    – 불우한 처지의 이웃을 측근으로 삼아 가족처럼 대했고 적조차도 자기편으로 만듬
  4. 항상 도전적이고 혁명적인 사고를 계속
    – 닫힌사회는 망하고 열린사회는 흥한다.

상기의 것을 리더십이라 우기고 굳이 이름을 달아야 한다면 약탈리더십이나 조폭리더십 정도 되겠다. 침략의 결과로 얻은 것을 되돌려 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큰 땅을 통치한 것이고, 모두 죽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종교와 민족을 놔둔것이다. 그나마 네번째 도전적이고 혁명적인 사고를 계속했다는 점은 배울만하겠다. 그러나 이것 하나 가지고 위대 운운하는 것은 구차하다. 그리고 첨언 되어있는 ‘닫힌사회는 망한다’는 뜻은 자신들이 침략을 하려는데 항복하지 않고 성문을 닫은 국가에게 하는 경고 아니었던가. 

징기스칸 사후의 일이니 관련도 없지만 그를 칭송하는 주저리 설명을 읽다보면 이런말도 나온다. 몽골이 세계를 정복후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간이 왔고, (황송하게도)고려와의 30년전쟁 후 자주권을 인정했다는 거다. 그랬을까? 그들이 고려를 어찌 생각하는지 지도를 보자.

(사진 : 몽골제국 침략도, 몽골국립박물관)

그들의 역사에는 분명히 1218년 징기스칸 생전에 고려를 정복하고 복속한 것으로 나온다. 항몽전쟁을 한게 1231~1270년 이니 완벽한 역사왜곡이라 하겠다. 이는 다른 외국사이트를 봐도 같다. 우리만 아니라고 형제의 국가이고 자주권을 가졌다고 하는 꼴이 우습지 않은가. ‘忠’으로 시작하는 왕의 호칭이 이미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몽골은 다른 나라도 정복후 현지인을 그대로 지도자로 내세웠다. 그것과 고려의 것이 무엇이 다르다는 건가 말이다.

고려가 몽골과 형제관계를 맺었고 자주권이 있었다 것을 백보 양보해 조금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과 연대도 다른 징기스칸의 위대한 리더십이 무슨 연관이 있는데, 응? 왜 요따구 설명이 리더십항목에 같이 들어가느냐 말이닷!

전두환을 보라. 그 역시 믿음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진정한 리더십의 소유자다. 혼란한 정세를 안정시키고 신출귀몰한 광주사태, 1212사태 등 전략과 전술을 타고난 지도자이며 도전적이고 혁명적인 사고를 계속하였다. 위 논리대로하면 전두환은 모두가 숭상하고 배워야하는 리더십을 가진 것이다. 김일성도 마찬가지지… 기념관 하나 세워서 위대한 리더십을 배우자고 해봐라. 사람들에게 뺨을 한대씩 맞아서 반나절이면 뼈가루가 날리지 않을까한다. 

(사진 : 활을 쏘는 몽골기병, 몽골국립박물관)

징기스칸은 불세출의 영웅임에 틀림없다. 외부인에게는 그의 약탈과 침략 성공에서 소소하게 배울점은 분명히 있고, 몽골인에게는 야만족을 일시에 세계적 통치민족으로 만들어준 그를 국가와 민족의 영웅으로 받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만이다.

누군가를 칭송하고 본받아야 한다면 위대한 업적과 위대한 사상이 중첩되었을 때 그러하다. 그에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2만의 (국보급)여자를 상납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침탈당했던 피해 당사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위대한 리더십이니 하는 말장난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저 역겹다.


   
카테고리 : 몽골 이모저모

About 파도

직장일로 인해 몽골에서 생활한 적이 있고 지금은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의견이나 관심있으신 분들 언제나 환영합니다. 글과 사진은 퍼가셔도 좋은데 출처를 꼭 명기하시길 요청드립니다.

18 THOUGHTS ON “약탈자를 위대한 리더십이라고 포장하지 말라

  1. Jen. 
    *나폴레옹이 옆나라 들에게 피해를 줬지만 프랑스인들은 자랑
    스런 역사로 보고 있고, 독일은 비스마르크를 통해 프랑스 황제
    의 항복과 파리 점령을 통해 복수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1차대전,2차대전으로 또 프랑스는 독일에 큰 피해를 또
    입게 되고,이런 역사의 앙금은 아직까지 해당 국민의 의식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런던을 몇년간 공습해서 폐허로 만든 독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영국인(잉글란드인인 잉글리쉬)도 수백년간 핍박을 받은
    아일랜드인(아이리쉬)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됩니다.
    .
    단순히 한 나라를 무너뜨린 사람은 영웅으로 칭하지 않기에 수
    를 무너뜨린 당의 이연, 당을 멸한 주전충,원을 멸한 주원장 등
    이 영웅이 되지는 않으나 2천년 전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800년
    전의 징기스칸 처럼 여러 나라을 정벌하여 수많은 국가를 괴롭
    힌 사람은 영웅으로 취급되는게 일반적인 역사인 것 같습니다.
    .
    *지금 당장은 내세울게 별로 없는 몽골민족에게 징키스칸은 자
    부심과 자존심으로서, 주변민족을 괴롭힌 약탈자나 깡패라는
    평가에 몽골인 그 누구도 절대 동의할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몽골인은 당연히 그를 칭송하는게 맞을 겁니다. 제가 그 입장이라도 그러겠죠.
      .
      저의 비판은 한국내 주창되는 징기스칸리더십에 대한 것입니다. 그를 위대한리더십의 화신으로 모시기에는 우리의 피해의식이 남아있다는 의미였습니다.
      .
      그리고 그런 주장내용이 설득력이 부족함을 지적한 것이구요. 징기스칸리더십이 배워야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의 반론도 환영합니다. 본 발제의 목적은 토론입니다.
    • Jen. 
      하던 일이 있어서 서둘러 댓글 올리다가 몽골사람들 얘기만 하고 끝냈군요.
      일본과 관계된 것은 임진왜란이나 그 이전 역사까지 따지는 한국인들이지만,고려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몽골인에게 당한 피해에 대해서 까지 생각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을거 같은데요.
      제 개인적으로는 징기스칸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평가
      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만 그의 리더십을 빙자해서 미화하는 건 반대합니다.
  2. 파도님, 혹시 잭 웨더포드가 쓴 징기스칸 책을 읽어 보셨는지요?
    만일 읽어 보셨다면 그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리셨는지 궁금합니다…
    • 잭 웨더포드가 징기스칸에 대한 책을 쓴게 한국어로 2권정도 나와있군요. 저는 그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서평이나 책소개를 보니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 듯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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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약간은 도발적인 저의 발제문에 대해 반박할 내용이나 다른 생각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지적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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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런 내용은 여러측면이 있으니 의견이 분분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사실관계를 잘못알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구요.
  3. 흥미있는 글입니다.
    몽골에 계시면서 느끼게 되신 것인지요? 아니며 한국에 계실때의 경험이 중첩 되면서 느끼시게 된 소감(?)을 글로 쓰신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
    재미있겠도, 한국에서 2000년 쯤인가 몽골 붐을 일을 킨 사람은 김종래 조선일보 기자 였습니다. 그리고 조갑제의 이메일은 mongol@chosun.com 입니다. 칭기스칸이 미국 매체에서 밀레니엄 맨으로 칭송(?) 되기 전부터 신라+북방민족+몽골에 관해 조갑제씨는 많은 관심이 있었나 봅니다.(과거 월간조선의 신라 및 기마병 이야기 참조)
    칭기스칸은 우리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약탈자이고 침략자인데 왜 한국에서 까지 칭송을 하는가 하는 도발적(?)인 내용으로 읽혀지는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1. 몽골진출….
    칭기스칸을 좋아하는 부류 중에 또하나는 일본 이란 것을 아시지요?
    일본은 만주와 몽골을 두고 그렇게 가지고 싶어했고, ‘추진’ ‘진취’ 로
    젊은 이들을 만주로 보냈다고 합니다. (사료 만주철도사, 단행본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중)
    그리고 근대에 들어 100년도 전 부터 일본의 신식 대학교에 몽골어학과를 개설하고 각종 조사 연구를 실시하였지요. 물론 할힌골 전투(일본식으로 노몬한전투)에서 깨져서 몽골 진출은 실패하였지요, 훗날 패전국으로 몽골에 전쟁 배상금을 물어주었고 몽골은 이돈의 일부로 GOBI 캐시미어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일본군 포로들은 UB와 시베리아로 끌려와 각종 아름다운(?) 건축물을 UB에 남겼지요. (그중에는 한국인 징병도 있었다는 기록이…)
    (이평래 교수 연구논문과 단행본 20세기 한몽관계사에 수록)
    2. 몇년전에…
    이전에도, 지금 포스팅 같은 내용의 논의가 있었습니다.
    (진중권인가……… 황석영의 알타이 문화연대 를 비판하면서)
    일본은 러일전쟁시 ….일본의 해군은 러시아 제국 함대와 전투를 앞두고 너무 무서워 과거 임지왜란의 영웅이던 이순신 장군의 제단을 만들고 싸움에 이기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일본인의 특성이지요, 적도 나의 영웅으로 또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포스팅된 글을 읽고 나니….이 두가지가 떠오릅니다.
    칭기스칸이 태어나 살았다는 ‘다달’ 이란 지역을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숲과 나무가 울창한땅… 그곳에서 숲속에서 사냥을 하고 양과 염소를 키우던 유목민을 칭기스칸 집안 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역사에 남게 된 사람들은 결국 칭기스칸과 그의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좀 짧았지만) 어린 테무진은 잘 살아 보겠다고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습니다. 잔인했겠지요. ……
    몽골인들중에도 칭기스칸을 잔인하게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 누군가에게는 침략자…누군가에게는 본받을 것이 있는 사람….
    잭 워더포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단지 칭기스칸만을 가르킨 말은 아니고 ‘몽골’ 이란 이야기, 그리고 세계사에 남긴 것들로 …)
    몽골, 인류가 경험한 가장 멋진 모험….
    대모험 시대에 가능했던 이야기지만…ㅎㅎ
    • 본 발제글은 몽골에 살면서 최근에야 가진 시각입니다. 이전부터 한국에서 징기스칸리더십 얘기가 나왔을 때는 배울점이 많다고 생각했었고 나름대로 심취한 적도 있었습니다.
      영웅이 위대하다고 악행까지 위대하다 말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피해자적 역사의식이랄까 하는 반대의 생각이 좀 생겼다고 해야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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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갑제씨가 몽골이란 이메일 아이디를 쓸 만큼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대표적인 우파 지식인이죠. 그의 논리는 매우 날카롭고 빈틈이 없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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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고비캐시미어의 설립취지가 전쟁배상금이었나요? 처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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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저는 아직도 징기스칸이 왜그리 침략에 몰두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일종의 집착이며 피를 한번 본 사람의 악마적 본능이 아닐까 합니다. 침략의 결과 대단히 긍정적 요인이 있었다는 현상에 대하여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일 뿐이며 행위자체가 칭송받을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런 기준은 과거라고 면피될 수 없는 보편적 사상이기도 합니다. 침략의 결과가 긍정적이기만 한게 기준이면 과학을 일으키고 군사전략을 발전시킨 히틀러도 칭송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만주복 
        몽골의 영토확장과 끊임없는 전투는
        인간에게 선과 악이 있다면 악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투영한 결과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세력은 커지고 유목만으로는 유지가 어렵게 되었던 징기스칸…..
        충성을 유지시키는 방법으로 현대적인 생산기술이 없었기에 징기스칸이 어렸을때 부터 보아왔던 정복지를 충복들에게 나눠주는 형태…
        그래서 배신의 싹을 원천봉쇄하는 정권유지책…정복지의 물질과 여자는 단지 고기한점 던져주는 ….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였을을 것이며….
        커다란 쾌락을 맛본 군중은 더 큰 쾌락을 위하여…
        초인적인 충성과 전투력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결국 유목민의 특성과 야만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이러한 야만들은…
        그동안 수없이 수도없이 반복되었지만…
        모두 다 역사에 기록되어 진것이 아니였고…
        빙산의 일각처럼 몽골 징기스칸의 행적은 …..
        이것을 고스란히…..
        영화의 다큐처럼….
        역사적인 그림자를 우리에게 드리우고 있다…
  4. 잘 읽었습니다.
    그러니 신기한 일이지요… 누군가에는 영웅, 누군가에는 원쑤…
    지금 몽골에서 칭기스칸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몇 이나 있을까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거나
    보드카에도….돈에도….나와 있는 영웅…으로…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특별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도 있으니…더욱 신기한 일입니다.
    (참, 예전엔 조갑제씨와 함께 일했던 적이 있습니다…조갑제의 몽골 사랑+신라사랑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요. )
    일본 방식의 영웅만들기….는 아쉽지만…한반도와 몽골의 역사적 관계를 생각해 보면 우리도 가만히 있기는 힘들겠지요.
    떨어져 있던 시간과 역사보다, 함께 했던 시간과 역사 그리고 공간이 더 많았을 ..몽골과 한국…이라고 어떤 다큐멘터리에선 이야기 하더군요…
    그럼, 좋은 하루되세요..
    ps, 간만에 몽골에 살고계신 분들중에 수준있는 글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기회가 된다면 출처명기하고 동 블로그를 인용+알리고 싶습니다.
  5. 사이하나 
    확실히 징기스칸은 약탈자죠. 생존하기 어려운 자연환경 속에서 당연히 사람들은 맹수나 야수와 같이 변할 수 밖에 없고, 통칭 북방기마유목민족에 대한 중국의 두려움은 이이제이라는 수법으로 나타나… 생존하기 위해선 자연과 싸우고 사람과 싸워야하는 세상에서 징기스칸은 태어났죠. 그런 상황에서 징기스칸의 약탈과 정복과 지배는 그들 민족을 영원한 싸움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낸 거죠. 배신을 밥먹듯이 하던게 당연하던 그 시기에 그토록 충성을 받고 말이 달릴 수 있는 곳 모두를 정복했다는 것은 그만한 리더십이 있다는 거고… 거기에는 배울점이 있죠. 물론 그걸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겠죠. 그가 가치를 두던 것과 여러가지 관념들을 분석해서 현대에 적용하는 것일 뿐…
    그외에 몽골의 신화나 전설 등등은 흥미가 가는데…
    참 그것보다… 일본에서는 징기스칸이 일본 본토사람이라고 주장하던
    데 그게 얼마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고 몽골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생각
    하는지 궁금하네요. 미나모토 요시츠네라던가?
    • 징기스칸이 일본 사람이라는 건 처음 듣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그런주장이 있긴 있네요. 일본만화에 그렇게 주장하는게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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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고 후대에 그려진 것이라 상상도 수준이겠지만 징기스칸 초상을 보면 북방계 특유의 얼굴에다 수염도 매우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족하고는 형상이 매우 다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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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그의 탄생에 관련해서 몽골이 아닌 외부에서 태어나 들어왔다는 어떤 근거나 추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관계가 잘 나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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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아니면 말고라지만 그런 얘기 지어내는 일본 사람들 정신감정이 필요할 듯 합니다.
  6. 무익한 종 
    아주 재밌게 읽었고 또 공감합니다.
    오늘 너무도 분명하여 이견의 소지가 없어 보이는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도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면 그 인물의 존재와 행적에 대한 의미가 재해석 되고 재평가 되면서 별별 해괴한 소리들이 다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죠.
    아직은 김일성을 연구하고 배우자 했다가는 적어도 한국인들에게는 뺨을 맞다가 “반나절이면 뼈가루가 날리”는 (이부분에서 빵터짐. ㅋㅋㅋㅋㅋ) 것이 맞겠다 싶지만, 1200 년이 지나면 또 모를 일이 되겠다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도적은 도적이고, 침략자는 침략자일 뿐인데 참 인간은 묘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본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요. 당장 눈 앞의 것도 결국은 자기 해석이란 렌즈를 통해야 이해가 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어떤 가치를 수반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죠.
    징기스칸의 리더십을 배우자는 분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가치가 더욱 소중했을 수도 있고요.
    • 무종님, 방문을 환영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당시엔 극악의 행동도 점점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는 현상은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좋은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7. SK Lee 
    당시 칸에게는 .. 전쟁하고 정복하는 것 자체가 삶의 전부였고..
    휴머니즘이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겠죠.
    “적 왕의 목을 베고 그의 아내를 취하는 기쁨”을 최고의 목표로 삶고..
    뭐 따지고 보면…
    유럽 열강의 식민지 개척 이나..
    지금 미국의 대외정책이나…
    자신의 기쁨을 최우선하는 목표는 변함이 없고.. 그 수단만 효율, 세련화 시킨 것 아닐까요?
    • 유목민족은 정착하면서 주위와 잘 지내야 하는 농경민족과는 삶의 개념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약탈은 생존을 위한 절대善이 되었고 적의 여자를 거두는 것은 ‘약탈의 기쁨’이란 의미도 있겠지만 약자인 여자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취수혼이 대표적 사례인데 유독 유목민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