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23

국가책임 이해 못하는 ‘뒤틀린 법 논리’ : 정치일반 : 정치 : 뉴스 : 한겨레

국가책임 이해 못하는 ‘뒤틀린 법 논리’

등록 :2016-02-19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1월2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국제인권기준과 유엔 권고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묻는 유엔 청원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1월2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국제인권기준과 유엔 권고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묻는 유엔 청원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토요판] 뉴스분석 왜?
김창록 교수가 박유하 교수에게
▶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연구자들의 기고를 싣고 있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소개한 길윤형 <한겨레> 기자의 기사에 이어 “강제연행론은 물론 인신매매론도 ‘법적’ 책임에만 구애하는 한 법을 어기지 않는 공간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문학)의 주장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을 논한 글을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보내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수많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 ‘성노예’를 강요한 국제법 위반의 범죄에 대해 일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책임은 범죄에 대한 것이기에 법적 책임이며, 일본이라는 국가가 져야 하는 것이기에 국가책임이다. 일본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실 인정, 사죄, 배상, 진상규명, 위령, 역사교육, 책임자 처벌을 해야 한다. 이것이 지난 사반세기 동안 거듭 확인되어온 상식이다.
‘청구권협정’의 본질
1980년대 말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1990년대 초부터 스스로 나서서 피해자임을 밝힌 할머니들이, 거리에서 강연장에서 법정에서 호소한 것이 바로 그 법적 책임이다. 1994년의 국제법률가위원회 보고서, 1996년의 유엔 인권위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년의 유엔 인권소위 맥두걸 보고서, 2001년의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최종 판결문 등이 거듭 확인한 것이 바로 그 국가책임이다.
1990년대 초 일본 정부의 첫 반응은 “민간의 업자”가 한 일일 뿐이므로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92년에 증거자료가 공개되자, 곧바로 정부 대변인인 가토 관방장관이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했다. 이후 실시한 자료 조사와 피해자 증언 청취를 토대로 1993년에는 고노 관방장관이 담화를 발표했다. ‘고노담화’는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했고, “관헌 등이 직접 가담”했으며, “강제적인 상황 아래에서의 가혹한” 생활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특히 한반도에 대해서는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구조적인 강제성이 작동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강요했다고 명시했다. 이것은 일본의 법적 책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은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었다고 우겼다. 대신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국민기금’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이 아니라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국민기금’은 ‘도의적 책임은 지겠지만 법적 책임은 결코 질 수 없다’는 진정성 없는 태도 때문에 다수의 한국인 피해자들에 의해 거부되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게다가 한국 정부는 2005년에 한일회담 관련 문서를 전면 공개하면서 일본 정부와는 정반대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11년에 헌법재판소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의 해석상의 분쟁을 해결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2012년에 대법원은 조약에 관한 최종해석권을 가진 기관으로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느 쪽 주장이 타당한 것일까? 일본 정부의 주장은 애당초 무리였다. 한·일 양국 정부 모두가 인정하듯이, ‘청구권협정’은 영토의 분리에 따른, 다시 말해 하나였던 지역이 둘로 나뉜 데 따른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 은행에 조선인이 든 예금을 일제의 패망으로 그 은행이 일본으로 돌아가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일상적인 금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로서는 199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인정했으므로 그 이전에는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일본 정부의 주장은 결국 문제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1965년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애당초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업자책임 매달리는 ‘제국의 위안부’
누가 업자에게 책임 없다고 하는가
본질은 국가책임이라는 것뿐이다
그 본질 부정하다보니 박 교수는
업자 책임이 알파요 오메가라 주장
일본 정부도 보상한 적 없다는데
“보상한 것 틀림없는 사실” 우겨
일본 정부보다 한걸음 나간 셈
제국주의가 강요한 조약 내세워
‘협력자’ ‘가해자’ 지위 강요하나
모든 길은 ‘업자’에게로 통하다
일본은 결코 잘못을 한 나라가 아니라는 신념으로 뭉친 일본의 우익에게 그것은 매우 불쾌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노담화’를 형해화시켜 법적 책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그 상황을 벗어나려 했다. 그런 그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한반도의 경우 ‘강제연행’의 증거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일제강점기의 한반도에는 구조적인 강제성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강제연행이 필요 없었고, 강제연행을 했다는 불법사실을 기록한 공문서는 애당초 존재하기 어렵고, 게다가 일제의 수많은 공문서가 소각·폐기되었으며, 애당초 문제가 ‘연행’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강제연행의 증거는 없다. 그래서 협의의 강제성이 없었다. 그러니 강제성이 없었다’라는 거듭된 논리 비약을 통해 범죄가 아니라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정부가 발견한 자료에서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드러내는 기술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2007년 아베 내각의 각의 결정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지난해 12월28일 박근혜 정부는 바로 그 아베 내각과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에 합의해버렸다. 일본 정부가 인정한 사실은 기껏해야 20년 전의 ‘국민기금’ 수준이고, 강제성이라는 면에서는 1993년의 ‘고노담화’보다 훨씬 후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되로 받고 말로 줘 버렸다. 그래서 가해국인 일본의 정부는 무대에서 내려와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떠들며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피해국인 한국의 정부는 그 도발에 대해 정면 대응은 하지 못한 채 오히려 자국의 피해자와 시민들이 반대하는 재단을 어떻게든 설립하겠다며 전에 없던 갈등을 만들어내는 참담한 광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법적 책임이 핵심이라는 사실, 아베의 일본이 그것을 형해화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기도해왔다는 사실을 옳게 챙기지 못한 외교 참사의 결과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이러한 ‘법적 책임’을 뒤틀고 있다. 많은 이들에 의해 지적되었듯이, 부분의 전체화, 예외의 일반화, 자의적인 해석과 인용, 극단적인 난삽함, 근거 없는 가정에서 출발한 과도한 주장 등등, 수많은 문제점으로 가득 찬 <제국의 위안부>는 이미 학술서로서의 기본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책이다. 하지만 그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뒤틀린 법 도그마’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조선인 위안부는 적국의 여성과는 달리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 속에서 애국을 한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그들이 “제국의 일원” “국민”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그 근거는 1910년의 이른바 ‘병합조약’이 “양국 합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조약이 강박에 의해 체결된 것이기 때문에 애당초 무효라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오불관언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청구권협정을 통해 일본은 보상을 했고 한국은 권리를 소멸시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 스스로 보상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1965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의 권리를 소멸시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한국 정부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공식 입장은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명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은 채 한국의 행정부와 사법부가 “부정확한 정보”에 휘둘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의 모든 길은 ‘업자’에게로 통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업자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업자의 책임’에 매달린다. 하지만 과연 누가 업자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는가! 책임의 본질은 일본의 국가책임이라고 하는 것뿐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그 본질을 부정하려다 보니 업자의 책임이 알파요 오메가라고 주장한다. ‘위안소’를 기획하고 관리한 일제의 큰 불법에는 눈감고, 말단의 실행 행위에 가담한 업자의 작은 불법에만 매달린다. 심지어 ‘업자’가 ‘군속’이라고 하면서, 다시 말해 일제의 국가기관이라고 하면서, 책임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물어야 한다고 우긴다. 이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일본의 국가책임임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애써 부인하려고 한 결과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문학)가 지난 6일치 <한겨레> 토요판에 기고한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문학)가 지난 6일치 <한겨레> 토요판에 기고한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줄기 부정하니 잎사귀만 둥둥 떠다녀
물론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는 문학자일 뿐 법학자가 아니다. 그러니 법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법 이해에 터잡은 과도한 주장이 면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10년 조약은 강박에 의해 체결된 것이기에 애당초 무효이며, 1965년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인데도, 이렇다 할 근거 제시 없이 일본 정부와 마찬가지의 주장을 펴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일본 정부 스스로 보상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보상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우기니 일본 정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
저자는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면서 자신은 끝없이 ‘뒤틀린 법 도그마’에 빠져들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가 강요한 조약을 내세워 ‘성노예’ 피해자에게 “협력자” “가해자” “무의식적인 제국주의자”라는 지위를 강요한다. 일제가 식민지‘법’에 따라 한 일이니 문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식민 지배, 국가주의, 남성 중심주의, 근대자본주의, 가부장제가 문제라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제시한, 그 자체로서는 타당한 주장은 법적 책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업자의 책임’으로 왜소화되어 버린다. 그렇게 잎사귀를 강조하느라 줄기를 부정하다 보니 잎사귀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괴이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범죄를 저질렀으면 인정하고, 사죄하고, 배상하고, 진상규명하고, 위령하고, 역사교육을 하고, 처벌해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다. 일본 정부는 그 상식의 토대를 허물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 정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위치에 서 있다. 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한 ‘뒤틀린 법 도그마’에 사로잡혀서.
<제국의 위안부>가 만들어낸 불필요한 소란, 이제 그만 끝내는 것이 옳다.
김창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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