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31

반일(反日)에 취한 나라 > News Insight | (사)국가미래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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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反日)에 취한 나라
기사입력 2019-07-31 17:05:00
김병주 |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애주가들 속풀이에는 해장국이 으뜸이다. 해장국이라면 명태국, 명태라면 두들겨야 제 맛이 우러난다. 술꾼인양 자주 이성을 잃고 실언해야 성공하는 정치권에 요즘 단골메뉴가 있다. 일본에서는 혐한(嫌韓), 한국에서는 반일(反日)이다. 두들겨 감성팔이하면 지지도가 올라간단다.
모 법관이 “애국”하는 심정으로 내린 강점기 징용 배상 판결이 있자, 일본은 보복으로 한국에 대한 수출 화이트리스트 제외조치를 결정하고 8월초 곧 실행에 옮길 예정이다. 한국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 맞대응하고, 온건한 목소리를 친일파로 매도해 함구시키고 있다. 반도체의 소재·부품인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등은 국내 대체생산이 곧 가능하다지만, 우리 수출 주종품 반도체의 앞날이 험난해 보인다. 일본의 일차 보복을 요행히 넘긴다 해도, 앞으로 자동차 축전지의 소재, 공작기계(선반 등) 연이어 수출제한 품목을 확대, 파상적으로 압박해올 것으로 보면 향후 앞날에 먹구름이 짙다.

정부는 일본에 대한 교역에서 연간 200여억 달러 흑자를 벌고 있었으니 손해가 큰 쪽은 오히려 일본이라고 지적하지만 돈보다 정치계산을 앞세우고 있는 게 일본이다. 1965 한일 협정 당시 청구권 문제가 일괄 해결되었음에도, 이후 위안부 보상 문제, 사죄의 진정성 여부 등 구실로 빈번히 문제 잡히기에 지쳤다는 게 일본 측 입장이다. 현재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중이나 중재경과가 한국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나오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일본의 외교역량을 보면 그러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세치 혀나 트위터 글로 애국자 행세하며 의병 봉기를 말하고, 죽창가를 노래하면 영전하는 세태이다. 의병이라면 죽창, 농기구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운동(1894년 발발)을 말하는가? 동학군은 정읍 황토현 마루(4월)의 승리로 기세등등한 것도 잠시, 공주 우금치에서 결정적 패전(11월)을 당한다. 2만여 명의 농민군이 정부군 2천 명과 일본군 200여 명 연합군에 비참히 무너진 것은 부실한 전략과 신무기 게트링 기관총의 위력 때문이었다. 동학봉기를 빌미로 조정의 요청이 있자 청군과 일군이 한반도 진출기회를 잡고 점차 국권을 상실하는 길을 밟게 되었다는 것이 역사이다. 동학운동이 국내 정치사회 사정으로 보면 명분이 있었으되, 약육강식의 국제정치 현실에서는 나라를 먹잇감으로 만드는 지름길을 닦았다는 것이 냉철한 역사교훈이다.

세계경제 가치창조 사슬은 기술, 소재, 부품, 반제품, 완제품 시장 등 얼키설키 이어져 있어 마디마디 접속이 원활해야 한다. 가뜩이나 보호무역 풍조가 팽배한데 우리 스스로 단절의 구실을 제공할 까닭이 없었다.

세계 각국 어디를 가든 이웃나라끼리 매사에 사이좋은 나라는 없다. 크고 작은 일로 아웅다웅하지만 정작 전쟁까지 가지 않고 서로 참고 사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백전백승이 최선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 적의 싸울 의욕을 꺾는 것이 최선이다”(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전국시대 손자(孫子) 병법 구절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도 죽창 들고 나서자고?

일본은 국토도 몇 배 넓고 인구(1억 2천만)도 우리(5천만)보다 많다. 이미 2차 대전시 국산 항공모함을 운용한 나라이다. 현재 이름이 자위대일 뿐, 신무기로 무장한 해군, 공군은 한국군보다 강하다. 우금치에서 맞닥뜨렸던 게틀링 기관총의 충격을 벌써 잊었는가? 우리 힘은 아직 미흡하고, 설사 충분하더라도 전쟁은 극력 피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를 노리는 북방국가들과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요즘 자칭 애국자들은 일본과의 군사기밀보호협정(GSOMIA)폐기를 주장한다. 지난 7월 25일 발사한 북한 탄도미사일의 발사거리와 착지점을 정확히 알게 된 것도 일본의 군사정보제공 덕분이 아니던가? 적과 우방을 바로 알고, 다소 이견이 있는 우방이라도 적보다는 가깝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한·미·일 세 나라의 군사동맹이 우리 안보를 지탱하는 힘이다.
현재 시국에서 반대파 인사들을 “토착왜구”로 몰아 반일을 부채질하는 것이 이치(理致)로는 어불성설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기발한 “프레임”일 수 있다. 올가미에 씌워질까 겁나 야당도 군말 없이 동조하고 있는 형국이니까. 집권 세력 시각에서는 이대로 가면 내년 총선 결과도 이미 기울어진 듯 보인다. 친일 “프레임”의 또 하나 노림수는 경제정책 실패 책임 돌리기다. 예상했듯이 문정부의 간판 “소득주도성장”효과가 가물가물하다. 7월 25일 한국은행 발표 경제성장 실적치에 따르면 2분기 경제성장률이 1.1%로 전분기(마이너스 0.4%)에 비해 다소 호전된 듯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정부가 돈 푼 덕분이었다.

정부 부문 성장기여도가 프러스(正)로 돌아섰으나 민간 부문기여도는 마이너스(負)로 돌아섰다. 설비투자가 전분기 엄청난 감소의 기저(基底)에서 다소 반전(2.4%)했으나 민간소비는 여전히 미미(0.7%)했다. 최근 세수감소 추세를 고려하면 재정지출 확대의 경기부양도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정부여당이 목매달고 있는 추경예산도 내용을 보면 경제 활성화와 거리가 있다. 소득주도 성장, 재정주도성장은 국가채무 피라밋 쌓아올리기로 귀착된다. 여의치 않으면 일본 탓으로 돌리면 된다. 일본의 경제보복이란 프레임을 씌우면, 경제실패 책임도 면피하고 총선도 이길 수 있으리라.

정치외교문제는 문 대통령과 아베 수상이 나서서 풀어야 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청와대 무시하기에 대해 문대통령은 묵묵부답했다. 잘도 참는다. 그 인내의 절반이라도 대일본 관계에서 보여주면 대일관계는 개선될 듯싶다. 개인차원의 징용 배상 문제를 정부예산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가? 고민해볼 일이다. 혀끝, 손끝이 아니라 심장 깊숙이 우국충정이 박동하고 있다면 때로는 한 발 물러서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용기 있는 지도자의 애국행위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몰이성(沒理性)으로 몰아가려 한다. 누가 술꾼이고, 누가 멀쩡한 사람인가? 일본 서점가에서 혐한 제목 서적이 종류가 즐비하고 매상도 높은 반면, 국내 책방에는 반일 타이틀이 빈약하고 인기도 별로이다. 우리 국민이 상대적으로 일본을 잘 극복하고 있다는 징표이다. 두 나라는 싫든 좋든 이웃나라임을 대다수 국민은 알고 있다.

상대방이 억지를 부릴 때 이성을 되찾도록 인내하고 설득해야 한다. 정부가 일본과 북한을 대하는 자세에서 크게 다른 차이를 보인다. 북한에게는 “이제 그만!” 할 때가 지난 지 오래다. 퍼주고도 뺨맞기에 이골이 난 무골호인? 그것은 바보의 별칭일 뿐이다. 여야 구별 없이 대통령에 대한 그런 능멸을 바라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작금 농산물교역 관련 한국의 WTO 개도국지위를 박탈하자는 미국의 제의 소식을 접한다. 농민단체의 반미운동 촉발이 우려된다. 반일, 그것은 반미의 예행연습일 수 있다. 선동선전 꼬드김에 명정대취(酩酊大醉) 부화뇌동(附和雷同) 말고 깨어있는 국민이어야 나라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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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포커스 :: 일본이 적입니까? - 반일 민족주의의 발흥을 경계한다2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포커스 :: 일본이 적입니까? - 반일 민족주의의 발흥을 경계한다2
정세초점 | 2019.07.31

일본이 적입니까?
반일 민족주의의 발흥을 경계한다2
사회진보연대


‘한국이 적입니까’

7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와다 하루키를 비롯한 일군의 일본 지식인집단이 “한국이 적입니까”라는 제목의 서명운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일본이 식민지배를 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한국과 대립하더라도 특별하고 신중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대전제로 삼는다. 그러면서 “일한청구권협정은 양국관계의 기초로 존재하고 있는 만큼 존중받아야 한다”면서도, “하지만 아베 정권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사례로 2015년 체결된 ‘한일위안부합의’를 드는데, 그 역시 한일청구권협정의 불완전성을 일본이 인정한 셈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 합의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며 한국이 이미 재단 해산을 결정했다는 사실도 명기한다.) 또한 한국도 노무현정부에서도 법률을 제정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실시한 만큼, 한국과 일본 쌍방이 납득할 만한 타협점을 찾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지 않겠는가 주장한다. 이는 2000년대 이후에도 한국정부가 스스로 보상책임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실 1960년대 한일교섭이 진행될 당시, 일본에서도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운동 중에는, ‘우파’적인 흐름의 표현으로 ‘어업, 독도문제에서 한국에 지나치게 양보했다’라든지, ‘싼 임금으로 혹사시킬 수 있는 한국노동력 때문에 일본 노동자가 고생한다’, ‘일본인 한 명당 3,200엔의 혈세로 박정희 정권을 구제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그 ‘좌파적’ 흐름에서는 한일협정이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를 단죄하는 정신으로 체결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뚜렷하게 등장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서명운동도 한일협정에 대한 일본 내 좌파적 비판이 담겼던 정신을 계승하는 한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 시점에 이르러, 양국이 한일협정을 매개로 하여 지난 시기 형성된 한일관계라는 큰 틀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곧 각국 민중은 적대적, 배타적 민족주의의 흐름을 경계하고, 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합의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일본 서명운동 페이지 캡쳐
(https://peace3appeal.jimdo.com/)

그렇다면 ‘일본이 적입니까’

사회진보연대는 지난 7월 11일 <반일 민족주의의 발흥을 경계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20일 지난 현시점의 상황은 어떠한가?

7월 30일 자 한겨레에 실린 <대중문화로 번진 일본 불매운동>이라는 기사를 보자. 케이블TV 프로그램은 수개월 전 약속된 일본 음악인의 출연을 취소시키고, 교육방송 ‘세계의 명화’에서는 일본영화 편성을 방영 직전 바꾸었다. 유튜브 방송에서는 일본 화장품을 소개했다는 이유로 진행자가 사과해야 했고, 예술의 전당에서는 어떤 관객이 일어서서 일본인 연주자를 향해 일본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외쳤다.

내가 한국에서 일본상품을 구입하거나, 일식당에 가려고 할 때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는 일종의 ‘자기검열’이 시작된 단계다. 나아가 그런 행동을 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데 내가 동참하지 않는 것마저 신경쓰이기 시작한다면 이제 ‘상호검열’이 시작되는 셈이다. 한겨레의 기사를 보면, 현재는 최소한 ‘자기검열’이 시작된 단계다. 이러한 분위기가 더 맹렬해져 상호검열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게 된다면 반일 민족주의의 맹목성은 더 이상 어떤 구속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현재와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아마도 조국 전 민정수석의 발언일 것이다. 7월 20일 조수석은 2012년,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부정, 비난, 왜곡, 매도하는 “한국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지난 7월 11일 사회진보연대의 글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이 “자신에 동조하지 않는 국내 개인, 집단마저 적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글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바로가기) 불과 10일 후, 바로 정확히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발언이 청와대 민정수석의 입을 통해 나왔다. 청와대에서 이른바 ‘문심’, 즉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대변한다는 민정수석의 강경한 발언은 반일 민족주의적 흐름이 고조되는 데 분명한 확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 출발하자

반일 민족주의가 발화점을 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무언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 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지난 20세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인식을 총체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겠으나, 일단 이번 글에서는 이번 사태의 직접적 발단이 된 한일청구권협정과 민간/개인청구권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지난 7월 11일 글에서는 이 문제를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번 기회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박정희 정부와 ‘민간청구권 보상’

기실 피징용자 보상 문제의 기본 방향은 민주당 장면 정부가 진행하던 한일교섭에서 그 틀이 잡혔다. (5·16 군사쿠데타 직전인 1960년 5월 10일 한일교섭) 이때 한국 측은 보상대상으로서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으로 범위를 확대했으며, 이 보상은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일본 측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일본정부의 보상을 말하는가”라고 질문했고, 한국 측은 “국가로서 청구하며 개인보상에 대해서는 한국 국내에서 조치하겠다”고 답변했다. 즉 정부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포함하는) 개인 보상금을 받아서 국내에서 이를 집행하겠다는 기본 틀이 이미 장면정부 당시 설정되었다는 뜻이다.

실제 한일청구권협정을 타결한 박정희 정부는 1965년 12월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출했다. 196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1970년대까지 국민소득을 배가시키고 이를 위해 청구권자금을 공평하게 사용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민간청구권 문제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야당이 이에 문제제기하면서, 결국 1966년 2월에 공포된 법은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 필요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고만 명기했다. 1967년 두 번째로 대선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재선되면 곧 보상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71년 1월에 이르러서야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증거자료 수집을 위한 법률이었고, 보상을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이때 신고대상 중에는 피징용자와 관련된 것은 △우편저금, 진체저금, 우편연금(곧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군인·군속·노무자로 소집·징용되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망한 자라는 항목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에서 1975년부터 2년에 걸쳐 보상금이 지급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단 신고기간이 너무 짧았고 확실한 증거서류를 구비한 신고만 접수했다. 또한 이 기간에 지급 청구를 하지 않은 경우, 그 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간주했다. 그 결과, 예를 들어 인명관계 신고수리가 8,910명이었는데, 한일교섭 당시 박정희 정부가 사망자를 77,603명으로 제시했던 것에 비해서 너무 적은 수치였다. 또한 보상액수도 너무 적은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컸다. 전반적으로 보아, 어떤 이유든 간에 박정희 정부가 피해실태를 철저히 조사할 의사나, 보상할 의사가 크게 부족하지 않았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와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노무현 정부는 2004년 2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입법했고, 여러 과정을 거쳐, 2007년 12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리 자문기구로 구성된 <민관공동위원회>의 2005년의 검토 결과,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는 결론은 지난 글에서 이미 인용한 바 있다.)

그 1조는 이 법이 “국가가 태평양 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급함으로써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그렇다면 왜 보상금(또는 위자료)이 아니라 ‘위로금’이라는 표현을 썼는가? 이는 한국정부가 이미 1975년에 시행한 보상으로 인해, 정부의 법적 보상 의무는 없지만, 그 보상이 불완전, 불충분하였다는 것을 정부가 인정하여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이에 대해 위로금 또는 지원을 보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기존 보상을 보충하는 인도적 지원으로, 보상의 성격을 담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법적 보상은 아니라는 복잡한 논리 구조를 동반했다.

그렇다면 2007년의 ‘지원’은 1975년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신고자 수가 크게 늘어나 22만 건 이상의 신고를 접수해, 11만 건에 대해 지원이 이뤄졌다. (현재까지 대략 6,000억 원 이상의 지원금이 지급되었다.) △사망자뿐 아니라, 생존자, 부상자, 미수금 피해자를 지원대상에 포함시켰다. (생존자는 위로금 2,000만 원, 부상자는 위로금 1,000만 원, 생존자에게는 연간 80만 원의 의료지원. 미수금은 1엔당 2,000원으로 환산) △ 유족범위가 후순위 유족인 형제, 자매로 확대되었다. △정부의 적극적 조사로 피해자의 입증 책임이 경감되었다.

노무현 정부 ‘희생자 지원’의 이면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만사형통이었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없는 논란도 동반되었다. 첫 번째,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다. 왜 이런 일이 있었나? 애초 정부와 국회 행정자치위가 합의한 원안은 생존자에 대한 지원으로 매년 50만 원의 의료지원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이 생존자에게 500만 원의 위로금을 추가 지급하라는 내용의 수정안을 본회의에 제출하여 통과된 결과,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당시 정부 당국자는 거부권 행사의 이유로, 수천억 원대의 추가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며, 특히 생환 후 사망한 분들과 형평성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실제 생환 후 사망자의 유족에게도 위로금을 지급할 경우, 재정투입이 조 단위로 증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는 노무현 정부의 거부권 행사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그 후, 생존자 위로금은 다시 삭제되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2월에야 다시 법안이 통과되었다.

또 하나의 논란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문제였다. (국내 징용에는 ‘일반징용’과 이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의 ‘현원징용’이 포함된다. 현원징용은 조선총독부가 중점산업으로 인정한 공장의 현직노동자를 고용장에서 그대로 징용하는 방식이다. 즉 기존 공장에서 계속 일하되 이직이나 퇴사가 금지되는 셈이다. 여기에 연간 연인원 수백만 명에 이르는 근로보국대나, 징용령 이전 시기부터 존재하던 ‘관 알선’ 노동자도 포함된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불거진 이후로, 최근이라고 말할 수 있는 2019년 7월 11일에도 서울행정법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가 외교부장관을 상대로 보상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을 각하했다. 이미 2011년 2월 헌법재판소는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을 제외하는 게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국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법을 제정해 국내 강제동원자들도 진상을 파악하고 피해자로 지정해 희생을 기리는 조치를 한 점 등을 고려하면 국가의 지원이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전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5년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등 대책기획단>은 국내 동원을 지원대상에서 제외했는데, 그 근거는 △국내강제동원은 연인원 650만 명으로 대상자 수가 너무 많아 정부의 재원에 문제가 있다는 점. △한일협상 당시 일본에 요구한 보상범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사실 여기서 제시한 두 가지 쟁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2007년의 지원법의 불가피성을 재확인하든, 아니면 그 미흡함을 인정하고 새로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든 무언가 판단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역대 한국정부가 취한 조치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미룬 채, 모든 문제를 일본 측에 미루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스스로 되돌아보자

일본 지식인계에서 일본 자신에 대한 비판과 자성을 촉구하며 사회운동의 흐름을 형성하려고 노력한다면, 현 시점에 한국에서도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의 절규를 시종일관 외면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보자. 한국 정부와 한국인은 무엇을 했던가.

2007년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당시, 우리는 이 법률 제정의 역사적 함의에 대해 명확히 인식했던가. 다시 말해, 1975년의 보상 이후에 한국 정부가 추가적인 지원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우리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인가. 당시 법률제정 이면에도 다양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는 그 문제들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한 논의가 필요했다. 만약 2007년 지원책에도 미흡한 측면이 있다고 인식한다면, 우리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현재의 한일 갈등을 파해하는 외교적 합의점의 도출도 가능하다.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포커스 :: 반일 민족주의의 발흥을 경계한다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포커스 :: 반일 민족주의의 발흥을 경계한다



정세초점 | 2019.07.11

반일 민족주의의 발흥을 경계한다
사회진보연대


정치의 경제화: 동아시아에서 무역제재가 민족주의의 무기가 되고 있는가

지난 7월 3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대한 수출규제 보복을 즉시 철회하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경제교류에 정치대립을 끌어들이면, 한일관계에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 그 핵심적 근거였다. 중국은 센카쿠/다오위다오 분쟁을 계기로 희토류의 대일수출을 중단했다. 미국 트럼프정부는 안보를 근거로 중국에 대한 관세인상을 단행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에서 무역제재가 민족주의의 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은 ‘역사 문제’라는 폭발적인 이슈를 안고 있다. 어느 누구라도 상대국과 상대국민을 배척하는 민족주의적 정서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일 수 있다. 어느 한 편에서라도 불길이 타오르면 다른 편에서는 더 큰 맞불을 붙여야 한다는 정서가 들끓는다. 나아가 배타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은 자신에 동조하지 않는 국내 개인, 집단마저 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곧장 ‘민족의 배신자’,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어버린다. 예를 들어 일본산 제품의 불매운동을 주창하는 논자라면, 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신자로 취급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한 번 폭발하여 정치적 분위기를 장악하게 되면, 누구도 이를 쉽게 제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의 경제화, 곧 무역이 민족주의의 공격무기가 되어버린다면, 무역전쟁은 피할 수 없고, 그 결과는 상호파괴일 뿐이다. 즉 모두가 패배자가 된다는 뜻이다.

정치의 사법화: 사법부가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 주체인가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판결이다. 대법원은 일본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첨예한 외교사안이 어떻게 대법원의 판결에 좌우되는 상황이 되었는가. 과연 사법부가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려진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 당시인 2005년 8월 26일에 개최된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보도자료를 보면, 정부는 이해찬 국무총리 주재로 민관공동위원회를 개최하고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의 효력범위를 논의했다. 이때 정부는 “한일협상 당시 한국정부는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 간 무상자금산정에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이라고 정리한 바 있었다.

이를 해석해 보면, 한일청구권 협정에 대해 역사적으로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한일청구권 협정을 외교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점을 인정하는 측면이 있다. 즉 한일청구권 협정이라는 현실을 우리만의 주관적인 해석으로 부정할 수는 없고, 그 현실 토대 위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현 정부의 전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노무현 정부 당시, 총리였던 이해찬 씨는 지금 여당의 당대표이고,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민관합동위 위원이기도 했던 문재인 씨는 지금 한국의 대통령이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에 그러한 입장을 공식적으로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고 사태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부와 여당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사법부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의 의도적 방기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공익과 관련된 재판인 경우,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도 제출을 요청할 수 있다. 미국도 외교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연방대법원이 국무부의 의견을 듣는 ‘법정조언자’ 제도가 존재한다. 고도로 정치적인 사안인 외교적 사안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이 정치적 판단에 비해 우월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아니, 오히려 고도로 정치적인 사안일수록, 국민의 정치적 대표자들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한다. 외교적 사안마저 사법부의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은, ‘정치의 사법화’의 극단적 형태이며, 실제로는 정치의 소멸이다.

여당이 나서서 반일 민족주의를 조장하는가?

[출처: 매일경제신문]

이처럼 여당과 청와대의 책임이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수출제재가 단행되자, 더불어민주당의 <일본 경제 보복 대책 특위> 위원장, 최재성 의원은 “의병을 일으킬 만한 사안”이라고 발언했다. 이는 마치 국민적인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거나, 정부 차원에서 대응보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신호를 주기 쉬운 표현이었다. 여당 특위장이 이렇게 신중하지 못한 발언부터 내놓는 현실을 보면, 여당이 이번 사안을 여당 지지세력의 집결을 위한 정치적 소재로 활용하는 데 우선적 관심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2005년 <민관공동위>는 1975년 한국 정부, 즉 박정희 정부가 피해자 보상을 불충분하게 행한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규정했다. 즉 지난 정부의 잘못을 짚으며, 한국 스스로 자성해야 할 바가 있다고 말한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여당과 정부는 현 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지, 자성해야 한다. 또한 여당이 먼저 나서서 반일 민족주의를 조장하며,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듯한 태도를 우리 사회운동은 규탄해야 한다.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포커스 :: 오늘날 일본의 노조탄압 현장에 갔다오다 - 2019년 건설노조 방일단 기록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포커스 :: 오늘날 일본의 노조탄압 현장에 갔다오다 - 2019년 건설노조 방일단 기록



노동보다 | 2019.07.29

오늘날 일본의 노조탄압 현장에 갔다오다
2019년 건설노조 방일단 기록
소영호(건설노조 조직국장)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되던 시기에 일본에 갔다. 아베 정권 아래에서 우익세력이 발호하고 반한 감정이 커졌다는 소식도 들었다. 걱정스럽게 일본 땅에 도착했지만 일본의 시민들은 한국인들에게 친절했고, 일본의 동지들을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전국건설노동조합(이하 ‘건설노조’)는 일본의 전일본건설운수연대노조(이하 ‘연대노조’)와 교류를 하기위해, 7월 4일(목)부터 7일(일)까지 일본에 방문했다.

건설노조와 연대노조의 교류

연대노조는 1965년 전국자동차운수노동조합까지 뿌리가 올라가는 오래된 노동조합니다. 1984년 전일본건설산업노동조합과 간사이지구레미콘지부가 조직을 통합하여 현재의 연대노조가 된다. 레미콘, 트럭 운수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으며, 업종별 지역별로 기업횡단적인 지부를 설치한다. 도쿄, 시즈오카, 오사카, 교토 등 17개 도도부현(광역행정단위)에 8개 지부 약 3,000명의 노동자들이 소속되어 있다. 상급단체가 없는 독자 노조이다.

연대노조의 중심에는 레미콘 운수노동자들이 있다. 일본의 레미콘 업체는 영세업체가 대부분이다. 레미콘 업체는 대기업인 건설사(거래처), 시멘트제조업체(구입처)에 끼어 덤핑판매를 강제당했다. 이에 노조는 산업정책으로 레미콘업체들을 중소기업협동조합으로 조직화하고, 가격 적정화 정책과 투쟁을 펴며 레미콘 산업의 구조를 바꾸는데 일조한다. 이러한 산업평화정책을 쓰며 노동자들의 정규직화와 최저연봉보장을 약속받았고, 계속하여 투쟁을 하고 있다.

건설노조와 연대노조는 매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교류를 한다.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레미콘 노동자들이 노조(건설운송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여의도 도끼만행과 같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당시 일본의 연대노조 동지들은 함께 레미콘을 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의 동지들에게 투쟁을 지원했고, 그 후 교류가 시작되었다. 2002년부터 시작된 교류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계속되는 공안탄압

그런 연대노조가 심각한 탄압을 받고 있다. 이미 70여 명의 동지들이 구속되었다 풀려나기를 반복했으며, 아직도 12명의 동지들이 구속되어 있었다. 일본에 방문할 때마다 환대를 해준다는 느낌을 주는 동지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공안탄압의 영향 등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게다가 오사카의 노조 건물인 학동관의 센터장님이 우리가 오는 날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러야 하고, 공안탄압에 대응하며 우리를 맞이해야 하는 상황.

둘째 날인 7월 5일부터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직접 본 일본의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오전에 교토로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일본의 동지들이 웅성거렸다. 경찰버스들이 노조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차를 돌려 다시 노조 건물로 갔을 때는 무장경찰을 포함해 60여 명의 경찰들이 압수수색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극우신문인 산케이 신문이 이를 취재하기 위해 함께 왔다.

공안탄압 이후 압수수색이 비일비재하여 더 가져갈 자료도 없다고 했다. 산케이 신문은 연대노조가 폭력적인 노조라는 취지의 보도를 일삼는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모습을 보이면 더욱 악선동을 할 것이 분명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함께 가던 몇 명의 일본 동지들이 내려서 경찰에 대응을 했다.


산케이신문을 대동해 압수수색을 하는 일본 경찰들

우리는 간사이레미콘지부의 타케 위원장과 유까와 부위원장의 재판이 있는, 교토지방법원으로 향해야 했다. 연대노조 동지들뿐만 아니라 각 시민단체 회원들까지 모여 있었다. 재판을 방청하는데 좌석 제한이 있고, 사측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서 재판 때마다 많이 온다고 한다. 일본 동지들의 배려로 건설노조 방일단은 모두 재판을 방청할 수 있었다. 수갑이 채워지고 포승줄에 묶인 두 명의 동지가 나타났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는, 동지들을 구속한 이유가, 사측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위협을 가했고 공갈협박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증거는 제출할 필요가 없다고 읽어갔다. 노조 측 변호사의 거센 항의가 이어졌고, 방청석에서도 참지 못하고 야유를 했다. 젊은 판사는 별다른 답을 하지 못하고 묵묵부답으로 앉아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이렇게 재판이 이어졌다.

재판이 끝나고 두 명의 동지는 다시 수갑과 포승줄에 묶여 감옥으로 돌아갔다. 법원의 공무원들은 건설노조 투쟁조끼를 입지 못하게 하고, 주변 건물을 찍는 것을 제지했다. 기가 차지도 않는 현장에서 판사와 공무원들을 쏘아보는 것만으로 항의를 해야 했다. 그래도 구속된 두 명의 동지가 한국에서 동지들이 왔다고 하니 크게 힘을 받았다고 전해들었다.

공동 항의행동에 나서다

셋째 날인 7월 6일 오전에는 나라 현에 있는 요시다 레미콘 공장에 방문했다. 나라 현 2개의 레미콘 공장에서 6명의 조합원이 해고되었다고 한다. 연대노조 동지들은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정규직화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잘리고 해고되고 있다. 공장 건너편에서 구호를 외치고 발언을 하고 있으니, 사측 직원이 캠코더로 우리를 찍었다. 한국 같았으면 바로 욕이 튀어나오고, 달려가서 카메라를 막고, 공장 사무실에 쳐들어갔을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몇 년을 감옥에서 썩을지 모른다.

오후에는 오사카 부 경찰본부에 대한 항의 행동을 했다. 유명한 오사카 성 옆에 으리으리하게 솟은 경찰본부 건물. 그 아래 연대노조를 비롯하여 지역의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평화단체 등 60여 명이 모였다. 함께 구호를 외치고 발언을 하며 항의를 이어갔다. 연대노조는 자신들의 노동조건 향상에만 갇혀 활동하는 노조가 아니다. 일본의 사회이슈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평화행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일본 정부에 찍혔다. 한편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는 연대노조의 탄압상황에 함께 대응할 수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고 했다. 함께 하는 세력들이 많지 않으니 정부와 자본은 더 쉽게, 더 함부로 탄압을 가한다.

오사카 경찰 항의 방문

전후 최대의 노동탄압

마지막 날에 있었던 간담회에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동지들 상당수도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상황이었다. 구속 사유 중에는 이러한 것도 있었다. 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회사에 취업증명서를 요구했다. 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조합원이 정규직화를 요구하자, 회사의 날인이 찍힌 취업증명서를 요구하는 게 공갈협박이라는 것이다. 현재 일본 경찰의 조직범죄대책과가 사건을 맡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날 간담회

한 사람에게 여러 개의 사건을 적용하며,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다시 구속시키는 일들도 많다. 재판에서 보았던 타케 위원장도 그런 사례였다. 한편 구속되었던 사람들끼리 만나지 않고, 통화하지 않는 것이 보석의 조건이라고 한다. 조합원 가족들을 찾아가 회유하고 협박하기도 한다. 우호적이었던 지역의 레미콘공장 협동조합들이 배신하기도 했다. 조합원들이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탈퇴자도 많은 상황이다. 이러한 대규모의 노조 탄압은 전후 최대의 규모이다.

탄압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연대노조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연대노조는 일본 내에서 평화운동세력, 각종 시민단체, 지역 노동조합들과도 꾸준히 연대를 실천한 노동조합이다. 일본사회의 우경화와 군국주의 정책이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고, 투쟁을 하는 세력들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연대노조의 동지들도 처음에는 오사카에서 G20을 치루기 위해 실시하는 일시적인 탄압으로 보았으나, 그 강도가 점점 심해지자 탄압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또한 노조탄압은 2017년 강행 추진된 일본의 ‘생각을 처벌하는 법’, 공모죄의 시범 케이스이기도 했다. 연대노조의 간부들이 통화하고 회의한 것을, 폭력행동을 일으키기 위한 사전 공모로 보고 처벌하기도 했다.

일본 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하는 투쟁

한국의 건설노조도 수차례 공안탄압을 받아왔다. 노조를 불온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운동세력들에 대한 탄압과 언론 통제가 심했다. 일본의 동지들은 우리에게 ‘공갈 친구’라고 농담을 하며 함께 싸우자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필자는 현재 일본의 상황과 같은 노조 탄압을 겪은 적은 없다. 70~80년대 노동운동을 다룬 역사책에서나 보았을 법한 장면들을 일본에서 보게 되었다. 게다가 언론 통제로 인해 이런 탄압이 벌어지는 것을 일본 대다수의 시민들이 모르고 있다고 한다.

지금 한국과 일본은 외교 갈등이 고조되며 무역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불매운동, 혐한시위처럼 대중적으로도 감정이 악화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을 양국의 지배계급이 이용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친일·매국노” 낙인찍기를 하며, 경제·외교정책의 무능·실패에 대한 자기반성 없이 지지율만 높이는 데 혈안이다. 또한 삼성·이재용 봐주기, 특별연장근로 등 노동개악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 일본 아베 정부 역시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군사대국화를 추구하고 있고, 이를 반대하는 평화운동, 노동운동을 억압하면서 우익세력이 발호하고 있다. 한일 갈등이 무역전쟁으로 이어지면 그 결과는 상호파괴이고 자본과 지배계급은 양 국의 노동자들에게 그 부담을 전가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멈출 수 있는 것은 한일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밖에 없다. 아베정권의 노조탄압에 맞서고 있는 일본 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하는 투쟁을 한국에서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동지들은 11월 한국의 노동자대회에 오겠다고 약속했다. 남아있는 동지들이 걱정된다. 같이 어울렸던 동지들 중에 또 누군가가 구속될지 모른다. 함께 싸우며 현재의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Italy granted UN sanctions exemption to fund Food Security Office in Pyongyang | NK News - North Korea News



Italy granted UN sanctions exemption to fund Food Security Office in Pyongyang | NK News - North Korea News



July 3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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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y granted UN sanctions exemption to fund Food Security Office in Pyongyang
Over 1 million euros to be transferred for Italian firm’s technical support


Colin Zwirko
July 30t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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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 Security Council (UNSC) committee in charge of sanctions on North Korea has granted a humanitarian exemption allowing the transfer of funds into the DPRK for an Italian company’s work in food-related matters.

The funds will be used for international and local staff as well as operating costs inside the country at the European Commission (EC)-funded Food Security Office (FSO) in Pyongyang, for work by the firm Agriconsulting Europe SA (AESA).

Documents included with the latest exemption — which appeared online on Monday — state that Brussels and Rome-based AESA has received a tender or grant from the EU to “[provide] technical support for food-related matters to the DPRK,” operating out of the FSO.

The exemption is notable: it is the first listed under the “Humanitarian Exemption Requests” page of the UN 1718 Sanctions Committee site this year which exempts the transfer of money instead of goods or items to be used in aid projects.

The letter, dated July 1 and addressed to Italy’s Permanent Representative to the UN Maria Angela Zappia, states that “no goods or materials are to be transferred to the DPRK” under the exemption.

Italy appears to have made the initial request, said to have been dated June 3, on behalf of the FSO and AESA’s Rome office.

Beyond stating AESA will provide “technical support for food-related matters,” precise details of projects in North Korea now possible with the new access to funds were not included in the exemption documents.

Agriconsulting’s Italian website states that the organization offers services in farm management, public administration and development programs, land and environmental monitoring, information systems management, and sustainable development, among other areas.

Details of the funds, however, were provided, with the amount to be transferred into North Korea for local use totaling 1,060,000 euros for the period of March 2019 to February 2022, according to the letter’s annex.

The money will cover staff salaries and fees for locals, international employees’ out of pocket expenses and apartment rental fees to be paid to the North’s General Services Bureau (GSB), and other costs to various local providers.

It includes 192,000 euros to be paid to seven local support staff members over the three-year period until 2022, each receiving around 9100 euros per year.

The document uploaded by the UN also shows that over 200,000 euros will go towards living costs of the international team members and support staff.

These consist of a “key expert” team leader and member to both stay for most of the duration, as well as “AESA backstopping and support staff” with shorter stays.


North Korean state media and international organizations have been sounding the alarm in recent months over possible drought and efforts to boost agricultural production and food security | Photo: KCNA

In addition, 314,000 euros are allocated for operating a fleet of four vehicles in the country, with costs expected to be paid to the Korean General Insurance Company and “fuel stations and local dealers for spare parts.”

Another 50,000 euros will be used to purchase two new second-hand vehicles in the DPRK, according to the annex.

Costs listed are explicitly for expenses while in the DPRK, with the document stating that the total value of the AESA contract awarded by the EU is 2.4 million euros.

It is unclear how the funds will be transferred, as there is currently no operational banking channel due to sanctions, following the breakdown of a channel previously exempted which allowed a Russian bank in principle to move funds from a German bank on to Pyongyang.

In lieu of electronic transfers, large cash bundles would have to be carried by organization representatives into the country – a method which has attracted harsh criticism of sanctions from aid workers in the past for being dangerous and causing a range of issues.

NK News has reached out to both the FSO in Pyongyang and AESA offices in Europe for further details of the logistics of the project.

The humanitarian exemption is the first from the UN committee in over a month, and follows almost two-dozen exemptions this year after major criticisms that sanctions were hampering aid work.

But despite the flurry of exemptions, NK News understands that aid organizations remain frustrated with administrative burdens caused by the lengthy exemption process and the looming possibility of U.S. secondary sanctions.

In an example specifically related to funding issues due to the lack of a banking channel, Finnish NGO Fida International pulled out of operations in the DPRK last month, stating that continued U.S. sanctions pressures “make the financial services related to North Korean projects impossible.”

Edited by James Fretwell

Featured image: Eric Lafforgue

[VOA 뉴스] “유엔, 대북지원단체 ‘자금 이전’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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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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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가 유럽연합 EU 식량안보사무소의 자금 이전에 대한 제재 면제 신청을 승인했습니다. 지금까지 북한 반입이 허가된 물품과 프로그램은 최소 1천 4백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함지하 기자가 보도합니다. (영상취재: 김선명 / 영상편집: 이상훈)

Hojae Lee - 평신도가 예수(부처)를 살려 내자 : 성인聖人으로 하루살기 1. 인류의 고전인 경전텍스트,...



(5) Hojae Lee - 평신도가 예수(부처)를 살려 내자 : 성인聖人으로 하루살기 1. 인류의 고전인 경전텍스트,...







Hojae Lee
25 July at 04:58 ·



평신도가 예수(부처)를 살려 내자 : 성인聖人으로 하루살기

1. 인류의 고전인 경전텍스트, 사서오경, 대장경, 성경, 꾸란경, 도교의 경전인 도장 등은 일점일획을 절대시하는 문자 숭배의 시대를 거쳐 인간이성의 발달과정을 거쳐 철저히 해체되어 비신화화/역사화되면서 경전의 위상은 추락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여기에 1990년 초, 동유럽과 소련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후쿠야마는 “역사는 종언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지구촌은 민주주의의 경제적 이데오로기인 자본주의로 급속히 재편된다. 더불어 옛날 그 빛나던 종교경전의 위력은 과학의 도전으로 응전의 용기를 잃고 있으며, 경전의 정신을 담지하던 성전과 경전의 말을 전하던 직업종교인은 ‘자본’의 도전에 '오합지졸'이 되는 형국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종말이 아니고 종교 종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2. 성경을 포함한 경전텍스트는 건물성전 유지와 직업종교인의 생계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인간과의 대화집이다. 어느 경전이나 ‘나’의 문제를 적어놓은 일기이다. 경전은 인간(나)의 실패사와 이 실패를 고난을 통해 절대존재와 ‘궁극적 인간’과 ‘궁극적 구원의 길’을 가는 나의 승리의 희망찬가이다. 경전이 요구하는 것은 경전을 읽는 나 자신’이 그렇게 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의 삺, 석가의 삶, 공자의 삶 등등

3. 오늘! 우리는 경전이 말하는 그 궁극적 인간으로 하루만이라도 살아보자. 원래 제목을 ‘성인으로 살기 하루 프로젝트’로 하려다가 세상에 하도 프로젝트성 이벤트가 많아 평이한 제목으로 달아보았다.

4. 이런 측면에서 직업종교인의 사명은 한평생 신도를 모아서 굶어죽지 않게 갈증나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신도에게 설교나 설법을 하는게 아니다. 직업종교인은 신자가 스스로 예수처럼 살고, 부처처럼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건물성전은 비게 만드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교회가 늘어날수록 죄인은 많아지고, 사찰이 많아질수록 중생은 늘어난다. 향교에는 소인이 득실하고, 회사에는 가난한 노동자가 더욱 많다. 즉 종교의 목적은 모든 인간이 죄인과 소인과 중생의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나 창조적 진화의 완성체인 예수와 같은 사랑의 화신체, 더 나아가 풍류체가 되어야 한다. 병원의 목적은 모든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 병원문을 닫는 것이다. 일상생활에게 의사가 병자에게 약을 줄때 어떻게 주나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다.

5. 변찬린의 안목으로 역사적 성인은 우리와 동질의 인간이었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미리 간 ‘인간’에 불과하였다. 그는 이렇게 직시한다.

예수도 측간厠間에 웅크리고 앉아 구린 똥을 누었다.
공자도 지어미와 방사房事하여 범부凡夫 리(鯉)를 낳았다.
세존世尊도 밥을 얻어 자시고 신음하시다 열반했다
노자老子도 무명無名의 보배로움을 잠시 잊으시고 오천 마디의 흔적을 남겼다.
우리와 무엇이 다르랴?

예수라고 밥안먹었겠는가. 빵드셨나? 김치나 된장찌게는 안드셨을 테고, 옷도 입으셨을테고, 백인미남으로 영화에 나오는 성스러운 얼굴이 아닌 얼굴이 약간 가무잡잡한 중동형 얼굴이시구, 키는 어느 정도 되셨을까? 그리고 예수는 직장에 나가서 돈 벌지는 않았을 테고 등등등. 예수가 33년 동안 보통 인간의 자리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는 자리까지의 생애 가운데 여러분이 어느 한 지점을 설정해 오늘하루 그렇게 살아보시라. 십자가에 또 못박혀 피흘리지는 마시고(!!!), 빈 동굴 만들어 그 속에서 삼일만에 부활한다고 기괴한 행동하지 마시고

오늘 하루 좋은 생각하고,무심했던 이웃에게 안부하고, 식사량도 조금 줄여서 생명을 아껴보고, 즐거운 얼굴로 이웃과 인사하고, 직장에서 더 활기차게 일하고...., 예수가 지금 우리의 입장에 있다면 이 보다 더한 빛나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각 자의 자리에서 성인으로 살아보기 해 보자. 제주 한달 살기보단 오히려 성인살이 운동을 해 보자.
나는 성인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나의 세계는 그렇게 재편된다. 내가 성인으로 살아가면 예수의 십자가는 빛날 것이다.

6. 류영모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예수를 신앙이 대상이 아닌 ‘선생이자 스승’으로생각하고, 정양모 신부는 류영모를 ‘동방의 성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함석헌을 원로 신학자이자 목사인 김경재는 기독교 백년의 인물로 ‘함석헌과 김재준’을 언급하고 있다. 축 시대의 성인의 역사적 흔적이 아득하다면 가까이 더구나 같은 국적의 위의 사람들을 인간적인 ‘존경감’의 표시이상은 하지 말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보는 거다.

'7. 우리는 모두 예수, 석가, 공자, 노자를 우리가 범접하지 못하는 신앙대상의 경지에 올려놓고, 우상숭배하기 바빴다. 어제의 과오는 ‘지금’털어버리고 오늘 하루 2019년 7월 25일은 우리도 ‘성인과 같이’가 아니고 성인으로 살아보자. 만약 예수와 석가, 공자와 노자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면 그들은 우리의 신앙대상조차 될 수 없다. 곰곰히 생각해 보라.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와 타락 인간의 입장에서 구도하여 궁극적 인간의 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지 않았나. 신앙은 예수로 살아야 예수와 같은 친구로 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지 자기도 못하는 것을 신자에게 말하며 예수를 우상숭배하여 살아서 죄인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 간다’는 것은 성경에 없다. 있으면 밑에 댓글다시라. 이는 불교도 유교도 마찬가지이다.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그 도道’를 우리가 같으면 되는 것 아닌가.

8. 소위 성인의 말씀이 적혔다는 경전은 우리가 그렇게 살 때에 경전의 의미가 되살아나는 것이지, 성인을 (마음속으로) 신앙대상으로 우상화하는 즉시 자신은 죄인으로 중생으로 소인으로 살면서 경전의 의미는 직업종교인이 종교장사하는 영성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지금도 감리교의 영성상품, 장로교의 영성상품 등 수백 개 교단의 영성상품이 구매자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누가 성인聖人의 머리를 디디고 그를 초극할까 ?
고성古聖들은 그 문하에서 배운 후생後生이 스승을 떠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자성自性을 개발하여
지인至人으로 돌면突變하기를 바라고 있다.
참 사람은 낚시를 던지지 않는다
참 사람은 그물을 짜지 않는다
참 사람은 함정을 파지 않는다.
소인小人들이 배운 것은 무성한 잎파리와 꽃
소인小人들이 포식(飽食)한 것은 꼬리와 껍질뿐
소인小人들은 낚시를 삼키고 그물에 걸려들고 함정에 빠진다.
옛 님들은 소인들이 스승을 배신하고 팔아 먹고
곡사曲士로 전락하여 아세阿世할 것을 환히 알고 있다.
환히 알고 있으면서 소인들과 대화하고 가르치는 뜻은
무리 중에서 스승을 앞 질러 갈 참 사람을 기다림이니
누가 이 크신 비밀을 알겠는가 ?
고성古聖들은 뒤에 오실 빛나는 후생後生을 기다리고 있다.
소인들의 작희(作戱)에 대도大道가 가리워 질 때
옛 성인의 문하門下에서 참 사람이 일어나
스승을 구해 내고 대도大道를 밝히 드러낸다
이런 사람을 지인至人이라 한다.

(변찬린의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9. 빛나는 오늘! 우리 모두 오늘 하루만큼은 '성인으로 살기'하여 하루성인으로 거듭납시다.

Hojae Lee - 자본신앙과 제국학문주의에 포섭된 한국 사유체계



(5) Hojae Lee - 자본신앙과 제국학문주의에 포섭된 한국 사유체계 1. 우리는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수 있다....







Hojae Lee
28 July at 07:33 ·



자본신앙과 제국학문주의에 포섭된 한국 사유체계

1. 우리는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수 있다. 다원적 종교주의가 펼쳐지는 지구촌에서 과연 한국, 한국인, 한국 종교문화의 세계사적 사명은 무엇일까? 잘 알다시피 한국의 학문세계는 교수, 학자 등 직업지식인에 의해 형성된다. 하지만 고등교육기관의 평가시스템, 연구재단의 연구과제 선정과 연구기간 등은 세계적인 담론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다학제를 말하지만 다학제적인 논문은 기존 학문권력에 의해 게제하기가 그리 쉽지 않고, 이를 평가기관에서 온당히 인정받을 수 없는가. 일 년에 수 편의 논문을 쓰게 만드는 논문 양산기계로기능하는 직업지식인에게 세계적인 담론을 만들어내라는 것은 가혹한 처사이다.

2. 철학자, 신학자, 를 포함한 인문학자가 한국 사회의 ‘인문학의 위기’를 부르짖는 것은 같은 인문학자로서 어불성성이다. 인문학은 한 사회와 시대의 사유체계를 제시하고 형성해 가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다. 즉, 한국 사회의 병폐인 자본권력과 학문권력, 자본신앙과 건물종교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이런 지식생태계가 조성된 것은 지식인이 자기 역할을 방기하였기 때문이다. 해외유학을 다녀온 직업지식인이 늘 수입학문과 안테나학문을 하며 생긴 폐단가운데 하나 아닌가.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사유체계로 하여야 한다는 이 당연한 문제에 대해 교수 등 직업지식인, 신학자, 불교학자 등 직업종교인은 분발하여야 한다. 교육기관에 몸담고 있는 직업정치인도 시각조정을 해야 한다.

3. 단적인 예로 2008년 세계철학대회가 서울에서 열릴 때 한국 철학자로 내세운 이는 유영모와 함석헌이었다. 강단 철학자 가운데 한 명도 없고, 그 많은 철학박사 가운데 한 명도 내 세울만한 이가 없었다, 이것이 당시 한국 철학계의 사정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철학을 정규과정으로 개설하여 수업하는 대학이 몇 군데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철학하면 독일철학이고, 중국철학이지, 한국철학은 중국철학의 아류로 생각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신학은 독일신학이고, 근본신학을 비롯하여 웨슬리신학과 바르트신학, 틸리히신학 등 서구신학이지 한국의 신학이 어디 있는가? 기장의 민중신학을 예를 들면 감신대, 총신대, 장신대 등에서 다른 교단 소속의 신학자도 같이 연구하면 어떤가? 또한 김흡영의 ‘도의 신학’을 동료 신학자가 거론하여 토론하고, 논쟁하고, 대안을 제시’하여 거대한 담론을 형성하면 세계적인 신학으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다. 안타까울 시간 조차 없다.

4. 만약 세계 그리스도교 대회가 개최된다면 한국 그리스도교계에서는 누구를 내세울 수 있인가? 만약 세계 불교대회를 열린다면 누구를 한국의 불교인물로 내 세울 것인가? 세계 유교대회를 주관한다면 누구를 내세울 수 있는가? 우리는 특정 전문영역에서 학문적 권위를 가진 인물아래 우리의 담론을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용기있는 연구작업은 지속되어야 한다. 앞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미안한 얘기이지만 ‘없다’. 이렇게 단언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세계 종교와 철학 대회가 열리면 주최측이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게 ‘한국 종교, 한국인이 이해한 한국인의 신학, 철학,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 주소를 보라. 한국에서 한국인이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죄다 남의 나라 학문을 수입하고, 번역하고, 좀더 진취적 이라도 하더라고 외국 사유체계를 표준으로 ‘비교’하고 우리에게도 있다는 식의 제국주의 학문에 불과한 작업을 하고 있다.

56. 주체적 신앙과 학문은 ‘나’의 문제의식으로 새로운 주제의 발굴을 통하여 이를 보편화하는 것이다. ‘나와 한국, 세계’라는 공속관계에서 끊임없이 주체적인 학문의 자세가 없는 상황에서 형성된 담론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종교 환경에서 잉태된 종교담론과 다원적 종교 환경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한국의 종교문화, 심지어 제국주의와 냉전의 산물 등이 온전히 축적되어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는 한국 학문계는 세계적인 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적지이지 않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서구학자는 늘 선생이고 한국의 학자는 늘 학생의 입장에 불과한 것이 솔직히 우리의 현실아닌가 자성해 보아야 한다. 선생이 과제를 제출하면 정답을 찾기에 바쁜 학생학자의 몰골이 우리 학문계의 모습이 아닌가. 언제 청출어람靑出於藍이 이루어질 것인가?

6. ‘나의 문제의식’이 텍스트가 되어 내가 태어난 학문적 전통(콘텍스트)과 세계 학문의 흐름(콘텍스트2)이 합류하고 교류되어야 한다. 세계적인 문제를 오롯이 안고 있는 한국이 세계적인 사상을 창출해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시점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호통재라! 수천 년 불교전통에서 원효, 의상 등 수 명을 제외하고 현대에 그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지 못하고 밥그릇 싸움하는 불교사태를 보라. 수천 년 전통의 유교전통에서 퇴계, 율곡, 다산을 빼고 어디에 세계적인 유학자가 있는가? 이백 년이 갓 넘었지만 서구 신학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서구 신학의 대리전이 벌어지는 이런 신학계의 풍토를 보면 암울하기 짝이 없다.

7. 과문인지 모르지만, 조동일의 『한국문화통사』, 김상일의 한철학 연구, , 이기상, 신승환의 “우리 철학하기” 등에서 우리 학문의 희망을 본다. 또한 전호근의 『한국 철학사』 김성환의 『우주의 정오』, 최민자의 학문작업 등이 돋보인다. 특히 최근에 ‘개벽학’이라는 한국학 담론을 선도하는 중견학자 조성환, 한국 역학과 고대 한민족의 문화적 시원을 추적하는 이찬구, 한국의 종교적 사유체계를 사전으로 편찬작업중인 윤승용 등에서 한민족의 희망을 본다. 이외에도 더 많이 있다.

8 오늘 부족한 이 페북글을 읽으시는 페북친구들은 종교와 성별, 나이와 학력을 불문하고 한국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구촌 합류시대에 ‘나를 망각한 세계화, 한국을 잊어버린 사고는 누구를 위한 공부인가? 누구를 위한 삶인가? 주체적 신앙과 생각마저도 ‘나’가 하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주구이고 괴뢰이고 종의 삶을 사는 것 아닌가?
* 예를 들면 기독교인이라면 에덴의 창세기만큼 한민족의 단군신화를 묵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평화의 창세기인 한민족의 단군신화와 타락의 창세기인 이스라엘의 타냑을 동일한 '이해지평'에서 읽는 거시적인 안목을 길러야 한다.

9. 나부터 분발하자!
나부터 각성해 본다!
나를 해체하고 새롭게 태어나 역사의 가을에 열매를 맺는
빛나는 혼으로 한민족이 거듭나는 큰 꿈을 페북친구들과 꾸어본다.


07 그들은 왜 천황의 품에 뛰어들었나 : 책과 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그들은 왜 천황의 품에 뛰어들었나 : 책과 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그들은 왜 천황의 품에 뛰어들었나

등록 :2007-02-15 19:30수정 :2007-02-1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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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의 사상> 나카무라 미쓰오 등 지음. 이경훈·송태욱 등 옮김.이매진 펴냄·1만6500원


‘근대의 초극’ 논리로 서양정신 부정하고
일본정신 중심으로 세운 ‘대동아전쟁’ 사상 묶음


일본 우익의 뿌리는 깊다. 일본 파시즘의 창시자 기타 잇키가 대작 <일본개조법 대강>을 펴낸 것이 이탈리아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의 정권 장악 이듬해인 1023년이었다. 1936년 2월 26일 일단의 파시스트 청년장교들은 기타 잇키를 사상적 대부로 삼아 쿠데타를 감행했다. 장교들의 거사는 실패로 끝났고, 일본은 군부 중심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유사파시즘적 군국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체제에 반감을 느꼈고 더러는 냉소했다. 사태를 일변시킨 것은 2차세계대전의 발발, 더 결정적으로는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의 발발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 항공대가 진주만을 난타했을 때, 수많은 지식인들이 ‘의식의 혼돈상태’에서 빠져나와 천황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좌익 지식인들의 전향도 잇따랐다. 일본이 세계사의 주역이 되었다는 것, 영·미로 대표되는 서구에 대항해 새로운 세계상을 펼쳐보이게 됐다는 것을 이들은 벅찬 감격으로 확신했다.

이들이 느낀 감격의 내적 논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으로 꼽히는 것이 ‘근대의 초극’과 ‘세계사의 입장과 일본’이라는 좌담이다. 태평양전쟁기에 일본의 일급 지식인들이 몇 차례에 걸쳐 대좌한 결과를 모은 두 문헌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역사의 전개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일본의 억압적 체제와 일본이 주도한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나아가 어떤 논리에 기대어 그 체제와 전쟁에 열광했는지 생생하게 알려준다. <태평양전쟁의 사상>은 이 별도의 좌담을 하나로 묶어 옮긴 책이다.

‘근대의 초극’이란 말하자면 이들의 논리를 요약한 시대적 명제였다. 1942년 7월 월간 <문학계>가 주최해 그해 9월과 10월에 연재한 이 좌담회는 ‘지식계의 통일전선’이었다. 사상의 뿌리가 서로 다른 ‘<문학계> 그룹’, ‘일본 낭만파’, ‘교토학파’가 모여 군국주의 체제의 침략전쟁을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총력전 체제 아래서 사상의 전선에서 벌이는 전쟁, 곧 사상전의 하나가 이 좌담회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서구가 이루어낸 자유주의·진보주의·자본주의, 요컨대 근대문명의 모든 성과는 극복돼야 할 대상, 척결돼야 할 병폐였다. 태평양전쟁은 단순히 영·미세력의 격파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문명이 초래한 인간 정신의 질병에 대한 근본 치료”였다. 그러므로 미국에 대항한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서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는 해방전쟁이었다.

교토학파의 대표 학자들의 좌담을 모은 ‘세계사의 입장과 일본’ 편은 ‘근대의 초극’ 편의 논리를 좀더 세밀하게 펼치고 있다. 이들은 발전이나 진보라는 개념을 근대 유럽 특유의 것으로 규정하고, 그런 근대적 역사인식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근대의 단선적 진보사관으로 보면, 일본은 서구를 뒤쫓는 후발국가의 지위에 설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양 지성이 구축한 역사의 도식을 부정하는 곳에서 진정한 세계사가 시작된다고 선언한다. 이들은 일본 정신을 중심으로 한 동양 정신을 서양 정신에 대립시키고, 태평양전쟁을 “반역사적인 힘에 대한 역사적 생명의 싸움”이라고 규정한다. 이 싸움의 끝에서 ‘대동아공영권’이 펼쳐진다. 이들은 ‘이에(家·집안)의 윤리’에 입각해 일본이라는 주체의 지도적 지위를 이야기한다. 집안에서 부모가 자식을 지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듯, 서양을 타파하고 세운 대동아공영권에서 일본이라는 가장이 동양의 다른 민족들을 이끌어 주체로 만들어야 하며, 이것이 일본에 할당된 특수한 역사적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모든 논리는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군국주의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로 귀결한다.

이들이 전개한 ‘근대초극론’은 오늘의 눈으로 보면 탈근대주의의 한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고 근대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탈근대론의 핵심 논점 가운데 일부이기도 하다. 근대의 폐해에 대한 극복의 논리가 침략과 지배와 파괴에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의 좌담은 상기시켜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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