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8

(2) 이찬수《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

(2) 이찬수






이찬수
7 September 2018 ·



"일본 평화개념사" 논문을 쓰다가 읽게 된 책,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로버트 실젠 지음, 서정민.홍이표 옮김, 신앙과지성사,2018 )...

우리말 번역서에서는 가가와 도요히코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간디, 슈바이처와 함께 동시대 3대 성인으로 추앙받은 인물,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선구적 사회학자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그리고 생활협동조합 운동의 아버지로 치열하게 살다간 한 인간..." 읽어보니 다 맞는 말 같다.

간디나 슈바이천가 유명한 건 다 아는데, 이미 1930년대 구미에서는 가가와가 간디나 슈바이처 급으로 존경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미 노벨평화상 후보로 두번이나 오르기도 했고.. 그의 활동 영역과 수준이 남달랐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을 모르고 있었다니, 좀 부끄러웠다. 한국의 누구와 비교하면 좋을까. 일단 함석헌이 떠오른다.


아래는 내 관심사에 따라 요약해본 가가와 도요히코 소개글이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는 특히 실천적인 면에서 돋보인다. 가가와는 계급, 인종, 종교, 국적 등을 차별의 수단으로 삼을 때 폭력이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증폭된다고 보았다. 가난한 노동자, 농민을 위한 사회활동과 협동조합운동, 빈민을 위한 주택과 병원 설립 활동 등을 통해 근대 일본의 인간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가령 1921년 일본 고베시의 인구가 63만 명이던 시절, 3만5천명의 지역 노동자들을 규합해 비폭력적 대규모 파업을 주도하는 등 노동쟁의에 앞장서기도 했다. “재화를 존경하는 사회를 변화시켜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취지였다.(p.159.)

가가와는 무엇보다 협동조합운동을 처음으로 조직하고 활성화시켜 세계 최대의 서민복지 생협인 ‘코프고베’로 키웠으며, 1930년대 미국 협동조합 지도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가가와 평전의 저자 로버트 실젠(Robert Schildgen)은 그의 실천의 동력을 “심오한 신비주의”(profound mysticism)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을 인간, 창조물, 창조자에 대한 가가와의 비밀스러운 애정과 경의의 표현이었다고 요약했다.(p.12.)

무엇보다 인간 평등사상에 기반한 반전, 비폭력, 반군국주의적 입장을 늘 강력하게 외쳤다. 1954년 미국이 태평양에서 핵실험을 했을 때,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반전을 외치고 반핵 운동을 도모했다.

평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패전 후 성립된 이른바 ‘평화헌법’(특히 헌법9조)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앞으로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헌법 9조를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는 시종일관 전쟁 포기 조항을 옹호하면서 전쟁 포기 선언이 세계평화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 보았다. 세계의 정치적 갈등을 일본이 중재해야 한다면서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품었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세계정부 혹은 ‘세계연방’의 수립을 꿈꾸었고, 세계를 ‘하나의 몸(one body)’으로 만들기 위한 국제적인 경제협동조합운동을 주창하기도 했다.

그는 줄곧 세계정부에 대한 희망을 견지했지만, 안전보장이사회가 주요 열강들에 의해 좌우되는 UN에 대해서는 점차 기대를 점차 접었다. 그러면서도 세계연방 혹은 세계정부의 성립에 대한 기대는 늘 주장하고 견지했다.

작가, 설교자, 정치고문, 사회복지사, 행동주의자의 삶을 살았던 가가와는 이미 생전에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미 1930년대 미국에서는 그의 헌신적 사회활동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서, 1939년 가가와, 간디, 슈바이처를 주 내용으로 『Three Trumpets Sound』가 출판된 것은 그 증거이다.

가가와가 간디 및 슈바이처와 동급으로 평가된 것은 가가와의 인생 자체가 전쟁과 군국주의에 용감하게 저항하는 평화적 삶으로 점철되지만, 무엇보다 비폭력주의에 기반해 빈민 및 농민과 함께 해온 노동운동의 정신과 그 영향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진작에 세계적으로 알려져, 1949년 가가와가 회의 차 유럽여행을 했을 때 노르웨이에서는 수만 명의 군중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회의장에 몰려들었고, 독일의 교회들에서도 수많은 군중이 몰렸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환영과 기대를 받았다.
그 기초에는 평화주의가 있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 십년동안 평화의 세계 질서(world order of peace)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에 집중했다. 그는 평화로운 세계 정부를 꿈꾸었다. 그에게 세계 평화는 신앙의 근간인 사랑을 통해 발현되는 정의의 구체화였다. 생시에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올랐던 그는 이런 유언을 남기고 타계했다: “교회를 건강하게 해주세요. 일본을 구원해주세요. 세계에 평화가 오게 해주세요.”(p.499.)

그의 평화 지향적 삶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 때 기독교인이자 동시에 애국자가 될 수 있다며 천황을 두둔하기도 하고, 일본을 아시아 해방을 위한 전쟁 영웅이자 서양 제국주의에서 아시아를 지키는 수단으로 간주하기도 했다.(pp. 342-354; pp. 388-398)
이로 인해 평화주의자들 사이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실천가이자 평화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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