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31

1907 손민석 조선왕조의 재정제도

 손민석

손민석
38 mins ·

동학농민운동을 연구하는 학자가 일본과의 전쟁 운운한다. 앞으로 제국주의와의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말인가? 미치겠다. 다른 어떤 학자는 ‘신新정한론’이 일본의 입장이라고 한다. 일본이 한국을 다시 정벌하려는데 쉽지가 않아서 고민이라 한다. 정말 미치겠다. 이런 분들 글을 읽으면서 공부를 했으니.. 내 수준이 낮은 건 다 선학들 탓이야!

손민석
16 hrs ·

조선왕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다보니 조선왕조 얘기를 많이 하게 된다. 모든 것들이 다 얽혀 있다. 조선왕조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개입하여 운영하는 재정의 범위가 매우 좁았다. 예컨대 조선왕조는 고려왕조가 국가안보에 실패하였다는 것을 명분삼아 왕조교체를 단행했음에도 고려왕조와 달리 군인들에게 군인전을 지급하지 않아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군복무에 대한 대가로 토지를 지급하지 않고 봉족이라는 노동력을 붙여주었는데, 그 결과 조선왕조 자신의 재정부담은 줄일 수 있었지만 정작 군역을 담당하는 농민들은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몰락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렇게 몰락한 양인들은 양반의 예속민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양인이 줄어들고 노비가 팽창함에 따라 조선왕조의 군사력 자체가 약화되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태도는 재정제도 전반에 걸쳐 관찰된다. 현물재정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왕조의 재정운영은 중앙의 왕실과 관청에 대한 상납에만 관심이 있고, 지방재정의 운용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거의 자율적으로 관행에 맡기기 일수였다. 단적인 예가 바로 지방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향리에게 지급되는 토지나 녹봉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작 중앙의 관청 또한 경비나 관원, 하인 등에 대한 인건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기에 이를 충당하기 위해 정해진 공물보다 더 많은 양을 수취하여 나눠가졌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는 자신이 정당하게 지불해야 할 비용을 내지 않고 그것을 지방이나 농민 등에게 전가시켰으며 그에 따라 지배계층 간의 거대한 상납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중앙의 관리와 지방의 관리는 비공식적인 수입 루트를 통해 연결되는 선물경제로 삶을 영위했으며,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거대한 부패 네트워크를 통해 지배계층으로 재생산되었다. 명재상이라는 황희 정승은 대신들에게 선물을 보내지 않은 지방 관원을 처벌하도록 임금에게 청하였다. 그 지방 관원의 선물은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일지 생각해본다면 그를 명재상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러한 부패의 정점에 조선왕실이 있었다. 왕실은 중앙재정 등이 대동법에 의해 재편되는 와중에도 시장을 통해 무언가를 구매하기보다 공인을 통해서 공물을 상납받는 걸 택하였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전국 각지에서 수취한 쌀을 오사카 시장에서 풀고 필요한 각종 물자를 구매하여 전국적인 시장유통망을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기여했던데 반해서 조선왕실은 시장화의 진전에 맞서며 끝까지 현물납부를 고수하였다. 조선후기 시장이 발달하고 양반 - 노비제가 해체되면서 다소 상황은 나아지지만 조선왕실이 존재하는 한 조선왕조의 이런 특질은 끝까지 남아있게 된다.

조선왕조는 언제부터 이러한 재정구조와 사회지배를 갖게 되었을까. 
나는 그 계기가 김성우의 연구가 지적하듯이 연산군 때부터라 생각한다. 연산군 시절부터 재정이 비대해지기 시작하고 순식간에 10배나 증가하였다. 재정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는 재정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양반 - 노비제의 확장과 그에 따른 양반사족들의 이해관계 요구에 맞춰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비중을 낮게 하고 대신 공물 수취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국가수취제도를 바꾼다. 대규모 토지경영을 행하는 양반보다 양인을 수취할 것을 택한 것이다.

그 부담은 상당해서 양인들을 대규모로 몰락시킨다. 토지 1결에 4두에서 6두를 납부했던 지세와 달리 공물은 대동법의 실시로 토지 1결에 약 12두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체되는 걸로 봐서는 아마 3배 정도 차이가 났던 것 같다. 대동법으로 공물 부담이 줄었다고 하니 아마 3배 이상 차이났을 것이다. 그렇게 막대한 공물 수취로 재정을 충당하는 대신 지세를 낮게 하여 양반 - 노비제가 팽창할 수 있는 계기를 조선왕조는 제공해주고 있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군역은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하지 못해 군사력의 약화와 농민의 몰락을 초래하였는데, 정작 조선왕조는 이 군역을 통해서 인민들을 신분제적으로 편성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 무렵 조선왕조는 양천제로 되어 있었지만 군역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양반계층이 성취함에 따라 사회적으로는 양반 대 다른 계층들이라는 구도로 계급적, 계층적 구별이 생겨난다. 양천제라는 틀은 조선왕조 끝까지 유지되는 것 같지만 사회적으로는 양반이 특권계층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들 양반은 그렇게 군역을 통해 계층과 계급을 공고하게 하면서 노비를 통한 농장경영을 영위한다. 조선왕조는 이들 양반의 이해관계가 많이 반영된 행동을 취한다.

이렇게 팽창한 양반 - 노비제는 17세기 이후 이앙법의 보급, 시비법의 발달 등으로 생산력 발전에 따라 소작이 늘어나자 점차로 해체되기 시작한다. 

국제관계에서도 명이 무너지고 청이 들어서면서 조선왕조와 양반들은 자신들이 중화를 계승했다는 소중화 사상을 펼치지 시작하고, 그에 따라 점차로 조선왕실은 양반사족을 억누르며 왕의 황제화를 추구하게 된다. 북벌 등을 위해 재정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던 조선왕조는 점차로 대민 장악을 강화하기 시작하고 소농의 발전이 맞물리면서 기존의 조선왕조 특질과는 다른 국가로 국가 능력 자체가 한층 업그레이드 되기 시작한다. 지방에서 행정력의 침투는 강화되고 수령에 의한 향촌사회 지배가 보다 강력해진다.

이렇듯 조선왕조는 전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조선 초의 이념이 실현되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조선왕조 왕실과 전제국가는 여전히 그러한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어느정도 추동하는 주체이기도 했다.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려왕조의 등장과 13~17세기까지의 양반 - 노비제의 발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가 남아 있다.


손민석
Yesterday at 02:15 ·



조선왕조는 너무 어렵다. 오늘 굉장히 많은 시간을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지인과 대화를 했다. 이제 그만! 이라고 할 때까지 했다. 아직도 모르겠다. 

인신지배에 기초한 노예제 사회라 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에도, 
토지지배에 기초한 농노제 사회라 보기에도 부족하고 모순점이 많은 나라. 
공부를 하면 할수록 너무나도 폐쇄적이고, 너무나도 후진적인 국가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 서글플 때가 많다.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문물을 수입해 조총을 들고 오기 전에 조선왕조는 일본에 여러 사람을 보냈지만 끝내 그 서양에서 동양으로 나아가는 세계사적 흐름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가 당시에는 임란이었고, 몇 세기 지나서는 망국이었다. 조선왕조는 서양의 대포와 배를 보고도 유교적 수양을 열심히 하면 알아서 교화될 것이며, 조선의 교통과 산세가 험해 쳐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자연을 극복한 유럽 문명의 힘과 세계사적 전개에 무지했던 조선사회를 보면 서글플 때가 많다.

내 핏줄들이 살았고 사는 곳이 좀더 보편의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계사의 흐름과 시대 변화의 원리를 몰라 전쟁과 망국에 이른 역사가 참 나를 서글프게 한다. 세계사의 전개에서 한 발 비켜선 사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많은 이들이 그에 경각심을 느꼈으면 좋겠다.



손민석
Yesterday at 01:49 ·



내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중국 수당왕조의 조용조는 기본적으로 균전제와 함께 가면서 토지를 지급하는 대신 노동력을 군사로 채용하는 방법의 수취 방식이다. 즉 부병제라는 제도 속에서 조용조와 균전제가 통합되면서 서로 주고받는 형식으로 군사제도가 형성되어 있다.

반면에 조선왕조의 군역제는 국가의 양인지배에 기초하여 하등의 교환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노동력의 제공에 상응하는 토지지급, 조용조의 면제 등이 없고 대신 태어날 때부터 무조건적으로 양인에게 부여되는 형식을 지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양반과 같은 신분은 군역에 면제되어 있는 특권을 지닌다. 특권신분인 양반을 제외한 양인신분은 국가에 연 2필의 군포를 납부해야 하는데, 이것이 18세기 영조대에 이르러 균역법의 실시에 따라 1필로 감해지다가 나중에 19세기 고종대의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동포법의 실행으로 사실상 형해화되어 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된다. 부여되는 범위도 개인에서 추상적인 공동체로 넘어가서 사실상 인신지배가 18세기 초부터는 형해화되기 시작한다.


재밌게도 이러한 형식은 역시나 노비제의 전개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공노비의 경우 정기적으로 신공을 납부하는 역제에서 포납제로 전환된 뒤에는 양인과 마찬가지로 점차 포의 부담을 경감해주는 방향으로 가다가 종국에는 공노비제 자체가 혁파되기에 이른다. 사노비의 경우 마치 양인이 국가에 역을 제공하는 것처럼 똑같이 연 2필의 포를 그 주인에게 제공하였다. 다만 여기서는 비, 즉 여성 예속민도 마찬가지로 역의 대상이었기에 노비 신분의 역 부담은 양인의 그것에 비해 한층 가혹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어찌됐든 조선왕조의 군역 부여는 토지 등의 상응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무조건적이고 신분제적이며 위계적인 관계로, 국가 - 양인(혹은 - 노비) = 양반 - 노비는 모두 동일하게 역을 부담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국가에 군역을 납부하지 않는 대신 양반에게 역을 지불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노비에게 아무것도 수취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노비는 부세 등의 납부와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 또한 지니고 있는 존재였다.

국가가 인민을 지배하는 형식과 똑같이 양반이 노비를 지배한다. 그리고 국가의 인민지배 방식이 재편되는 와중에 양반 - 노비제가 크게 발전한다. 조선왕조는 기존의 수당왕조와 마찬가지로 부병제에 기초한 균역법 - 조용조 체제에서 시작하였으나 곧 그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하면서 인민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하고 군사제도도 보법으로 바꿔버린다. 보법으로의 변화에서 핵심은 역시나 기존의 토지의 다과를 기준으로 군역을 부과하던 체제에서 인신을 기준으로 군역을 부과하는 것에 있다. 고려왕조나 수당왕조와 달리 조선왕조에서의 군역은 토지의 다과와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러한 군역부과 방식은 많은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군역을 피하던 관인이나 지방세력가들, 즉 다시 말해서 농장을 경영하는 세력가들에게 군역을 지움으로써 군사동원체제를 안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왜 그런데 그렇게까지 강력한 인신지배에 기초하고 있는가. 중세적 군제는 유럽의 것이든 아시아의 것이든지와 상관없이 모두 토지경영으로부터 분리된 귀족집단=무인武人에 의해 편제된다. 송나라 이후의 중국이 그러하였고 유럽에서도 기사 집단의 존재가 그러하였으며, 일본 막부 체제 또한 그러한 병농분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는 이러한 병농분리가 사실상 상당히 진행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분명히 조선왕조는 전세, 공물, 요역 등의 수취에 있어서는 토지지배의 체제로 남아 있지만 군역의 경우에는 이상할 정도로 인신지배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인다. 군역의 의의가 작은 것도 아니다. 군역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몰락하였으며, 그런만큼이나 군역에 대한 저항은 국가에 대한 저항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부질없이 자신의 양물을 잘라 관아에 항거하던 19세기 농민의 모습은 내게 조선왕조라는 체제 하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농민의 투쟁 형태이다.

유럽의 역사도, 일본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도 모두 인신지배에서 토지지배로 이행하며 병농분리가 나타나는데 왜 조선왕조는 유독 인신지배를 강고하게 유지하는 형태로 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보이지가 않는다. 결론은 고려왕조보다도 후퇴한 체제라는 것인데, 그렇게 보자면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에 있어서 농민의 경영 능력의 성장이나 사적소유권의 발달, 그리고 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국가수취체제에서의 토지가 차지하는 비중의 증대 등을 설명하기가 곤란해진다. 대체 뭐라 설명해야 하는가.


손민석
Yesterday at 00:31 ·



아이고야 정말 모르겠다. 조선전기의 노비제의 확장은 분명 세조 연간에 이뤄지는 일련의 호구개혁과 보법의 실행에 따른 부담의 증가로 소농이 대거 몰락하면서 주호 - 협호 관계로 재편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 사회구성을 대체 무엇이라 보아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수건의 연구를 참고하면 조선시대 지배신분인 양반은 13세기 이후 고려 말기에 지방 군현공동체의 수장층이 상하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어, 15세기 이후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해 16~17세기 사림정치를 영위하며 그 전성기에 돌입하게 되고, 동시에 중앙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사족의 지배가 향소와 향안을 중심으로 하여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데.. 이 사족들의 향촌지배가 18세기 이후 수령 등에 의해 부정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런 13~18세기 양반제의 발달은 역시나 노비제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한다. 다시 말해서 13~18세기 양반 - 노비제의 발달이 한국 중세를 규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축인데..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분명 노예제적 관계이다. 농업경영을 행하고 있던 노비라 할지라도 만약 주인이 부르면 양반가에 들어가 노역을 담당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서 생산수단인 토지와 노동력인 노비 간의 결합관계는 주인인 양반의 자의에 의해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농노제적 관계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노예적 관계라 보게 된다면 대체 그때까지 발전한 생산력과 사적 소유권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미야지마의 선구적인 연구에 의하면 15세기를 전후한 한국사회는 분명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이전 시대의 휴한농법이 극복되면서 연작농법이 성립하고 농사직설로 대표되는 조선초기의 집약적 농법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노동력=농민과 생산수단=토지 간의 결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결합관계의 강화에 따라 농민의 사적 소유도 상당한 수준으로 공인되고 하층의 농민경영에서까지 이러한 결합형태가 보편적으로 성립할 정도였다. 15세기의 양인자작농 체제는 바로 이러한 발전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15세기의 이 양인자작농의 발전과 양반 - 노비제의 발전은 동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양인자작농 체제의 성립과 양반 - 노비제의 발전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30~40%에 달할 정도로 많은 노비제가 형성되는 과정을 어떻게 정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아보아도 만족할만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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