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8

알라딘: 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알라딘: 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eBook] 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은이)메디치미디어201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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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00자평(23)리뷰(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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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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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병권 저자는 비정규직, 장애인, 불법 이주자, 재소자, 성매매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의 곁에서 철학을 함께 고민해온 현장 인문학자다. 이 책의 제목에서 ‘하녀’는 권력의 테두리 속에서 ‘법’ 없이 사는 것을 자랑삼아온 소시민을 뜻한다. 도대체 하녀에게 철학과 인문학 따위가 무엇인가? 철학은 ‘참 한가한 일’ 아닌가? 저자는 “철학자라면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도 의미 있는 철학을 해야 한다. ‘하녀’도 철학을 통해서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새로움’의 공부다. 자기계발과 위로의 인문학이 체제에 편입하기 위한 공부라면, 철학은 나의 생각을 점거했던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부수는 공부다. 준비가 필요 없는, 당장 시작하는 공부다. “공부를 위한 공부는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36꼭지 글을 통해서, 철학으로 개인과 사회의 삶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지 제시한다. 그리스 신화부터 현대 철학의 중요한 개념들, 형제복지원을 통해 본 ‘시설 사회’ 문제 등 당대 사건들까지 아울렀다.


목차


프롤로그 - 철학자와 하녀 그리고 별에 관한 이야기

1장 철학은 지옥에서 하는 것이다
천국에는 철학이 없다 / ‘곁에 있어 줌’의 존재론 / 초조함은 죄다 / 갈림길과 막다른 길 /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하라

2장 배움 이전에 배움이 일어난다
힘을 보라 / 바로잡아주는 사람과 깨뜨려주는 사람 / 공부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 우리는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구경꾼의 맘속에서 일어난 혁명/ 배움 이전에 일어난 배움

3장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한 켤레의 실내화 / 소유와 빈곤 / 사소한 것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하다 / 영혼에 남겨진 신체의 흔적
금욕과 탐욕 / 지금 이대로라도 시작할 수 있다

4장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곤경에서 자유를 본 화가 / 길 잃은 양이 되라 / 철학자의 파문 / 멋대로 원망하라, 나도 용서하지 않겠다
굴복보다는 커피를 택한 이들 / 저항의 가치

5장 우리는 자본주의 수용소에 살고 있다v
해석노동과 공감의 능력 / 원자력으로부터의 전향 / 고흐의 발작과 죽음 사이에서 / 수익모델로서의 인간 수용소
우리는 시설사회에 살고 있다

6장 야만인이 우리를 구한다
당신의 놀람과 나의 놀람 / 저항하는 존재는 말소되지 않는다 / 어느 게이 활동가의 정치적 장례식
한국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사람 / 너는 애국시민을 원하니? 나는 야만인을 기다린다 / 역사를 향해 쏜 총탄

에필로그 -옳은 말은 옳은 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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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7 철학이 일상의 삶과 무관하게 저 하늘의 별만을 보는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이 지적하듯 철학은 한가한 일이나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떠받드는 현실 감각 역시 그들 자신을 빈민으로 양산하는 현실에 대한 추인追認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노예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 것이다. - 프롤로그
P. 7 서로 조롱하고 적대하면서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불행하다면, 역설적이게도 각자의 구원은 서로에게서 오는 게 아닐까. 삶의 절실함과 대면하면서 철학자는 새로 철학을 배우고, 앎의 각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삶을 새로 살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현실에는 둔감했던) 위대한 탈레스를 재치 있게 조롱했던 총명한 하녀가 어느 밤 다락방 창문을 열고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 프롤로그 접기
P. 20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을 잃은 지옥에서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음을, 아니 모든 것을 잃었기에 오히려 인간이 가진 참된 것이 드러난다는 걸 철학은 말해준다. 깨달음은 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철학이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 천국에는 철학이 없다 접기
P. 25 하지만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을 고상한 미사여구 정도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힘들고 힘든 시절, 바로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젠 지쳤다’며 운명의 줄을 놓아버리고 있다. 신문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뭔가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그래서 떠올린 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가진 원초적 선물이 필요하다. 곁에 있어주자. 나를 너에게 선물하자. - ‘곁에 있어 줌‘의 존재론 접기
P. 41 공부하는 이들은 시끄러운 곳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지만, 아마도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를 얻는 것에 있을 것이다. 세상과 거리 두기를 할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거리두기를 해야 하며, 세상에서 벗어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공부일 것이다. -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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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고병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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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사회사상과 사회운동에 늘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왔다. 오랫동안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생활했고 지금은 노들장애학궁리소 회원이다. 그동안 『화폐, 마법의 사중주』,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생각한다는 것』,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1991년에 처음 우리말 번역본으로 읽었다. 그 시절 한국은 민주주의 열망이 불붙던 시기다. 어느덧 30여 년이 지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아직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으며, ‘그 달라지지 않은 것’을 사유하고자 다시 『자본』을 읽어야 하는 시대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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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추방과 탈주 (큰글자책)>,<묵묵>,<공포의 집> … 총 6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철학은 지옥에서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위로와 도피의 인문학은 침몰했다 -
현실을 바꾸는 힘을 주는 ‘현장 인문학’이 필요하다

당장 오늘과 내일, 나와 가족의 생존이 걱정되는 마당에 철학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문학이 무슨 소용일까? 《철학자와 하녀》의 저자 고병권은 “철학은 지옥에서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비정규직, 장애인, 불법 이주자, 재소자, 성매매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의 곁에서 철학을 함께 고민해온 현장 인문학자다.
이 책의 제목에서 ‘하녀’는 권력의 테두리 속에서 ‘법’ 없이 사는 것을 자랑삼아온 소시민을 뜻한다. 도대체 하녀에게 철학과 인문학 따위가 무엇인가? 철학은 ‘참 한가한 일’ 아닌가? 저자는 “철학자라면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도 의미 있는 철학을 해야 한다. ‘하녀’도 철학을 통해서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새로움’의 공부다. 자기계발과 위로의 인문학이 체제에 편입하기 위한 공부라면, 철학은 나의 생각을 점거했던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부수는 공부다. 준비가 필요 없는, 당장 시작하는 공부다. “공부를 위한 공부는 필요하지 않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은 36꼭지 글을 통해서, 철학으로 개인과 사회의 삶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지 제시한다. 그리스 신화부터 현대 철학의 중요한 개념들, 형제복지원을 통해 본 ‘시설 사회’ 문제 등 당대 사건들까지 아울렀다. 개인적인 경험과 일상적인 에피소드 속에 철학적인 질문과 명제들을 자연스럽게 녹이는 인문학자 고병권 박사의 장점이 잘 드러난 책이다.

◆ 주요 내용

대재난 속에서도 곁에 있어주는 당신이 있기에 ‘가능성’은 있다
국가나 사회의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가난한 이들은 ‘별수 없이’ 하지만 또한 ‘놀랍게도’ 삶의 공동체를 일구어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옥 같은 현장에서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이 낙원이라면 철학은 존재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저자의 생각을 좇다 보면, 세상을 안정적인 대상으로 놓고 개인의 처세만 강조하는 철학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인문학자 고병권에게 있어서 철학은 ‘박식함’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힘들고 힘든 시절, 적잖은 사람들이 ‘이젠 지쳤다’며 운명의 줄을 놓아버린다. 저자는 뭔가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가진 원초적 선물이 필요했다.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철학은 거창한 게 아니다. ‘초조함이 죄악’이라고 말한 카프카의 말뜻처럼, 곧바로 반응하지 않고 주변과 옆 사람을 충분히 살펴보자는 것이다.

영리한 노예, 성공한 노예가 되지 않는 길-철학에서 만난다
이 책은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을 바꿀 힘은 없다고 느끼는, 무력감에 빠진 마이너리티들에게 ‘철학’이란 도구를 안겨준다. 가난한 사람과 철학자는 서로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안양 교도소에서 철학을 강의하게 됐을 때, 한 재소자는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저자는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를 조롱했던 트라케의 하녀를 떠올렸다. 탈레스는 땅만 보는(현실 문제만 잘 해결하는) 하녀를 무시했고, 하녀는 하늘만 보는(현실에서 동떨어진) 탈레스를 조롱했다. 그러나 둘 다 옳지 않다. 탈레스는 하녀에게 의미 있는 학문을 해야 한다. 하녀도 눈을 들어 밤하늘의 별을 바라봐야 한다. 다른 세상을 인식하게 되면, 그간 물질과 권력에 순종했던 태도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할 수 힘이 자라난다.
니체는 “철학은 자발적으로, 얼음이 덮인 높은 산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많은 학자들이 품고 있는 도피 욕망, 즉 번잡한 현실을 피해 조용히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뒤엎는다. 사람의 길을 제시하는 인문학이라면, 지옥 같은 일상에서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참된 철학은 현실이 중단된 곳, 즉 누구도 뛰어들고 싶지 않아 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지금의 현실과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재료가 있기 때문이라고 고병권은 말한다. 그 속에서 철학 하는 사람은 성공에 성마르지 않고, 영리한 지름길이 아닌 우직하지만 에두른 길을 걸어간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느라 앞만 바라보며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철학이다.

사회적 약자들, 형제복지원 같은 시설, “지금 여기의 문제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난 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장애인들의 시위 현장에서, 성매매 여성의 쉼터에서 철학을 강연했다. 파업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해석 노동’의 문제를 생각하는 등 고병권은 현장에서 철학의 ‘소재’들을 만났고, 그로 인해 그의 철학에 의미가 더해졌다.
더 나아가 저자는 ‘5장 우리는 자본주의 수용소에 살고 있다’에서 형제복지원 등의 시설 문제를 제기한다.
이미 형제복지원 문제는 표면화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 시설 내에서 벌어진 인간 이하의 행동들에 격분했고, 이런 일들이 버젓이 행해졌다는 데 경악했다. 그런데 저자는 ‘시설’을 민주화 과정에서 벗어난 예외 공간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회적 약자 등의 문제를 ‘여기’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의 문제로 보는 시각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누군가를 어떤 식으로든 격리하고 별도로 관리 통제해야 하는 사회는, 미셸 푸코가 말한 시설 사회이다. 그런 시설을 통하지 않고서는 ‘함께’ 사는 방법이 마련되지 않은 사회이다.
시설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시설과 수용소에 더 많은 사람을 가둘수록 민간 운영주체는 돈을 벌어들인다. 거기서 가장 추악한 자본주의의 민낯이 드러난다.

철학 공부를 위한 준비란 필요하지 않다
위대한 철학자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서로 이견을 보인 지점이 있다. 데카르트는 진리탐구를 하기 전에 ‘방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지만, 스피노자는 그런 식이면 무엇을 알기 위한 방법, 또 그 방법을 위한 방법 등 계속 준비만 하다가 끝나버린다고 반박했다. 저자는 스피노자에게 동의한다. 앎을 생산하기 위한 선행조건 같은 것은 없다. 수영법을 배우기 전에 물에 들어가 조잡하게라도 수영을 시작한 뒤에 우리는 수영법을 알게 된다.
가진 것이 자갈과 나뭇가지뿐이어서 아직 공부를, 철학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것은 공부를 늦추는 핑계일 수는 있어도 공부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아니다. 공부란, 어떤 방법을 알아내서 단번에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철학에 대해서 막연하게 두려움을 가진 이들에게 힘이 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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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이라고 다 괜찮은건 아니지만, 많이 읽힐 때 그럴만하다고 `완전 수긍`되는 책이 있기는 하다.
이 책은 별 여섯개 짜리다.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단발머리 2014-08-23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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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더 봐야겠다. 쉽게 잘 읽히는 미덕이 있다. 새로운 생각과 관점을 배울수 있었다. 근데 한 두주 지나고 나니까 머였지 무슨 내용이었더라... 생각이 끊기네...
푸코리 2015-01-2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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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게 어려울거라 생각했던 철학을 왜 해야 하는지, 왜 지금이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철학은 따로 있는 게 아니더군요.
물숲 2014-11-3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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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읽음으로 그치지 않고 생활과 함께 할 수 있는 책이라서 실용서보단 이 책 한 권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홀릭 2015-04-2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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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도 재밌다
스파이디 2014-12-0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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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반대말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다




예전에 한창 들뢰즈 원전 스터디를 할 때였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멤버 중 한 명이 갔다 왔다고 했다. ‘수유너머’라고 했다. “수유리에 있는 거야? 저 잘났다는 사람들끼리 모여 오래 가겠나?”하며 피식 비웃는 척 했지만 속으론 몹시 부러웠고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이 책을 보고서야 ‘수유너머’가 해체됐다는 걸 알았다. 고병권의 말대로 수유의 해체를 부끄러워하기 보단 수유가 1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역량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리라. 수유라는 이름은 없어졌지만 수유는 우리에게 꽤나 성실하고 유능한인문학자를 선물로 주었다. 고병권, 고미숙, 이진경, 등등.



“ 어느 날 철학자 탈레스는 별을 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하녀가 깔깔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탈레스는 하늘의 것을 보는 데는 열심이면서 발치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고병권은 하녀를 ‘가난한 사람’의 기표로 차용한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철학자와 가난한 사람의 ‘변증법적 일깨움’을 모색한다.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을 잃었기에 오히려 인간이 가진 참된 것이 드러난다는 걸 철학은 말해준다. 깨달음은 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철학이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정여울이 인용한 윗 문장 때문에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가볍게 읽으려했으나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생각거리들을 던져주었다.



‘곁에 있어줌’의 존재론



며칠 후 한 스님을 뵐 기회가 있어 꿈 이야기를 했다. “저는 관음보살이 부러워 죽겠는데 지장보살께 잡혀서 한 대 맞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관음보살은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 회장 같은 분입니다. 정말로 가진 게 많지요. 그것을 모두 나눠줍니다. 글 이름만 부르면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게 없지요.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곁에 있어 줍니다.”



힘든 사람 옆에서 위로한답시고 누가 봐도 현명한 소릴 하느니 차라리 묵묵히 옆에 있어주는 게 더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독일어에서는 ‘무엇이 있다’는 말을 ‘Es gibt ~’라고 한다. 여기서 ‘gibt’라는 동사는 ‘주다’라는 뜻의 ‘geben’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있음’이 곧 ‘줌’이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이다.



초조함은 죄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죄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 카프카, <죄, 고통, 희망 그리고 진실한 길에 관한 성찰>



고병권은 신화 속의 인물들의 예를 들어 그들의 비극이 초조함에서 연유되었다고 말한다. 아크리시오스 왕은 페르세우스의 원반에 맞아 죽고,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의 칼에 죽는다.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정권들의 초조함도 흔히 몰락을 자초한다. 부마사태가 가라앉지 않자 박정희는 초조했다. 부산, 마산 시민 백 만명 정도 죽이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라던 차지철의 계획을 듣고서야 마음이 흡족했다. 오늘날 청와대, 집권 여당, 검찰, 경찰 역시 초조하긴 마찬가지다. 온갖 SNS, 카톡을 훔쳐보거나 언로에 재갈을 물리고, 경찰들은 부자감세로 부족해진 세수를 메꾸기 위해 지금 이순간도 실적 올리기에 급급해 병실에 누워 죽어가는 국민이 숨을 쉬건 말건 목젖을 찌를 만큼 우리들 입속에 음주 측정기를 쑤셔 박는다. 수치가 안 나온다고? 나올 때까지 불게 하면 된다. (죽으면 좆 되는데. 실적 쾅 인데, 하긴 호갱들이야 널렸으니)



"철학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의 정신적 위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피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스스로가 초조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달 카드 값은 막을 수 있을까, 월세는 낼 수 있을까’ 매일 이런 일차원적인 고민만을 하고 있으니 초조하지 않을 리가 없다. 초조함을 지울 순 없겠지만 이 책을 읽은 이상 조금 덜 초조해하지 않을까



갈림길과 막다른 길



루쉰이 북경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제자 쉬광핑은 군벌과 결탈한 총장에 맞서 싸우는 학생들의 대표였다. 쉬광핑은 스승이자 후에 연인이 될 루쉰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루신은 자신 역시 쓰디쓴 현실을 위로해줄 ‘설탕’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므로 “백지 답안지를 내는 수밖에 없겠다”고 고백한 후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철학을 참고하라고 말한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쉽게 부딪히는 난관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갈림길, 즉 기로에 서는 겁니다. 갈림길 앞에서 묵적(묵자) 선생은 슬피 울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면 결코 울며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우선 갈림길 입구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잠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내가 갈 길을 정하여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 자비로운 이를 만나면 그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지언정 결코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역시 앞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호랑이를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호랑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호랑이가 꼼짝 않고 서서 가지 않으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나무에 허리띠로 몸을 묶어서 설령 그대로 죽는다 해도 호랑이가 내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나무가 없다면? 그러면 별수 없지요. 호랑이에게 통째로 삼켜진다 한들 어쩌겠어요.



두 번째 난관은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완적(위나라 시인)은 통곡을 하며 돌아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막다른 길 또한 갈림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헤쳐 나가야지요. 온통 가시덤불로 뒤덮여 도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길은 아직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나는 이 세상에 본디 막다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운 좋게도 이제껏 그런 난관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던 것 같군요.”



- 루쉰, <루쉰의 편지>



고병권의 충고 : 그러니 당신이 길을 걷다가 난관에 봉착했다면 한숨 자는 것도 괜찮다. 애초에 먼 길을 갈 것이라고, 좀처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면 말이다.



수익모델로서의 인간 수용소



나는 이 책을 통해 미국의 교도소가 민영화되었다는 걸 알았다. 1983년에서 세워진 미국 최대의 민영교도소가 된 미국교정기업CCA, Correctinons Corporation of America은 1990대 후반 뉴욕 증권시장에서 수익률이 가장 높은 미국 5대 기업에 3년 연속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펜실베니아 주에선 두 명의 판사가 소년 교도소인 ‘피에이 차일드 케어’로부터 260만 달러의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었다. 두 판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교장을 놀렸다는 이유로 소년을 1년 넘게 소년원에 수감시켰다. 빈 건물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혹은 월마트에서 시디 한 장 훔쳤다는 이유로 소년들은 장기 수감되었다.




신자유주의 정권은 법치를 강조한다. 한국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와 아무 관련성이 없다. 법치란 ‘법이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다스려짐’을 뜻한다. ‘형제 복지원’은 신자유주의라는 옷을 입고 이 땅에서 ‘민영교도소’로 부활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보곤 치를 떨었다. 신자유주의가 진리라 주장하는 자본가와 집권여당, 판, 검사의 이익이 맞아떨어진다면 얼마든지 이 나라에선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닐까.





이외에도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다가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나처럼 이 책에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런지도.





“광기의 반대말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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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10-13 공감(50) 댓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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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 그때 왜 그랬어요. 네 ?






















목사님 ! 그때 왜 그랬어요, 네 ?





영화 << 달콤한 인생 >> 에서 이병헌이 보스에게 묻는다. " 그때 왜 그랬어요 ? 말해봐요, 네에 ? "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중고교 학창시절을 통틀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은 " 선생이 학생을 무시무시하게 폭행한 사건 " 이었다. 가해자는 미션스쿨'에서 성경 과목을 가르치는 교목(목사)이었고 피해자는 내 친구'였다. 전라도 허벌나게 먼 곳에서 상경한 녀석이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웠는지 3년 내내 신문을 돌렸던 친구'였다. 친구는 목사가 휘두른 주먹에 정신없이 맞아서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였다. 수업 시간에 친구가 목사에게 던진 질문이 발단이었다. " 예수님은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걱정하시며 스스로 헐벗고 굶주리셨는데, 예수님의 삶을 따른다는 목사님들은 왜 하나같이 뚱뚱한가요 ? "



우리는 엉뚱한 질문에 까르르 웃었다. 당시 얼굴에 기름이 번지르르르르르르했던 교목은 친구를 교단으로 불러냈다. 그의 눈동자에서 살쾡이 같은 표독스러운 눈빛이 감지되었다. " 좆됐구나, 시바 ! " 나는 웃음을 삼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교목은 김득구가 되어서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흥분한 교목이 말했다. " 내, 내내내내내내가 예수님 하면 예, 예예예예수님인 거야. 알아, 이 씹떼끼야 ! 무, 물물물론 기도하고 회계하며 고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게 목회자의 고난 ! 고행 ! 고독한 운명이지만, 이... 씹떼끼 ! 목사가 개개개개게을러서 뚱뚱한 게 아니야 ! 내, 내내내가 말하지만 기도하지 않은 자에겐 내일의 태양은 떠오르지 않아 !!!!!!!!!!!!!!!!!!!!!!!!!!!!!!!!!!!! " 뭐, 대충 이런 상황극'이었다.



그날 성경 수업에서 그가 가르친 것은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가 아니라 < 네 이웃을 샌드백처럼 쳐라 > 였다. 방과 후, 친구는 아픈 몸을 이끌고 신문을 돌려야 했다. 내가 누군가 ! 아픈 친구를 돕는다는 목적으로 친구 일을 도왔다(그가 쪽지에 적어준 주소를 바탕으로 신문을 50부 정도 돌렸다). 왜냐하면 그날이 바로 신문보급소 월급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가 고맙다며 짜장면'을 사줬다. 맛, 있었다 ! 헤헤. ( 지금도 나는 그 친구가 땀 흘린 대가로 사준 그 짜장면 맛을 잊지 못한다. )







그는 신앙이 깊은 신학생'이었다. 성격도 밝고 명랑했으며 순수한 영혼을 가진 베르테르였으며 부모가 상당한 부자'였다. 고르고 하얀 치아는 그가 부잣집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동성에게는 좋은 친구였고, 이성에게는 좋은 교회 오빠였다. 결혼 정보업체 < 듀오 > 에 의하면 그는 신랑감으로써 90점이었다( 반면 나는 마이너스 1000점이었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모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 할까 ? 그 친구는 " 고기 " 를 과도하게 좋아했다. 점심 시간에 삼겹살을 구워먹는 건 일상에 가까웠다. 심지어 아침에도 고기를 구워먹는다고 했다. 나는 그런 그가 매우 이상했다. 과도한 육식 애호 식성 때문이 아니다. 그가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육식-제일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고기를 과도하게 좋아하는 식성은 마치 진중권과 변희재를 하나로 묶은 짝패만큼 이상한 조합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너는 천국에 가기 위해 기독교인이 되었지 ? - 응 ! 너는 고기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지금 이 순간에도 고기 생각하면 침이 고일 거야, 맞지 ? - 응 ! 그렇다면 너는 천국에 입주하면 안 돼 ? - 읭 ??!! 내가 내세운 논리는 간단했다. " 천국에는 고기가 없다 ! " 천국에서 소를 키울 수는 있다. 하지만 소를 죽일 수는 없다. 천사가 식욕을 채우기 위해 소를 죽인다 ?! 천국 시민인 천사가 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쇠망치를 들어 소 머리를 내려친다 ? 맙소사, 그런 일은 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만약 당신이 천국에서 살고 싶다면 반드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이다. 내가 말했다. " 천국이냐 고기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 " 그는 내 말을 듣고 나서 곰곰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환하게 웃었다. " 조까 !! " 천국에 입주하면 안 되는 사람은 비단 육식-제일주의자뿐만이 아니다. 철학자도 천국에 가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고병권은 << 철학자와 하녀 >>라는 에세이'에서 " 철학은 지옥에서 하는 것이다 " 라고 단언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깨달음은 천국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철학이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삶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 20쪽 )



천국은 풍요로운 곳이다( " 다만... 고기만 없을 뿐이다, 시바 ! " ). 하지만 지옥은 철학을 배울 수 있는 좋은 배움터'다. 어마어마한 억만장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위해서는 풍요를 버려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상속을 포기했던 인물이다. 그는 < 배부른 돼지가 되느냐 > 아니면 <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느냐 > 에서 소크라테스를 선택했다. 이 책은 철학에 대해 말하지만 전혀 어렵지 않다. 쉬운 표현으로 어렵지 않게 말한다. 그는 니체의 << 이 사람을 보라 >> 에 나오는 문장을 소개하며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요약한다. " 이 사소한 사항들은 이제껏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졌던 것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여기서 바로 다시 배우는 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 104쪽 ) "



그 옛날, 내 친구는 교목에게 왜 그토록 맞았을까 ? 성난 들짐승의 발톱처럼 사나워진 교목은 왜 이성을 잃고 폭력을 휘둘렀을까 ? " 목사님 ! 말해봐요, 그때 왜 그랬어요 ? " 내가 그 사건을 통해 배운 것은 "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관대하지만 진실을 말할 때는 불같이 화를 낸다 " 는 점이었다. 인간은 진실'보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진실은 쓰고 거짓말은 달콤하다. 우리가 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철학은 거짓말을 싫어하고 참말을 좋아하게 만드는, 인간 교정 프로그램이다. 칸트가 떠올린 계몽된 사람이란 " 박식한 사람이 아니라 용감한 사람이다. '감히' 따져 묻고 '감히' 알려고 하는 의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 "이다. 그래서 그는 " < 감히 알려고 하라 > 를 계몽의 구호로 삼았다. ( 80쪽 ) "



지금 생각해 보면 : 인간 샌드백이 되어 죽도록 맞았던 내 친구는 칸트가 말한 계몽된 사람'이었다. 그는 공부는 못했지만 용감했다. '감히' 따져 묻고, '감히' 알려고 했다. 반면 미션스쿨 젊은 교목은 양아치에 가까웠다. 목사가 불같이 화를 냈던 이유는 명확하다. 내 친구의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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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28 공감(28) 댓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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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삶 그자체 ~!《철학자와 하녀》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살다보면, 깨달음이 너무 늦게 도착할 때가 있다. 이상은의 노랫가사처럼 지나고 나서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젊음이었고 사랑이었다. 삶이라는 것이 딱 그렇다. 그때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뒤통수를 치는 횟수가 많아지는 것이 인지상정의 인생인지도. 어쩌면 인생에 완벽함을 기대하는 것은 오만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여 늘 쫓기듯 살면서 ‘삶’에서 찾아오는 후회와 함께 찾아오는 깨달음이란 놈 앞에 자유로운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철학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 항상 현실의 문제가 도드라져 보여 마음이 차분해지게 되는 것 같다. 거리의 철학자라 불리는 고병권은 <철학자와 하녀>에서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이 철학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라고. 지옥 같은 삶에서 필요한 것이 정말 철학일까?









철학자가 하늘의 별만 보고 가다가 우물에 빠졌다. 별을 보느라 바로 앞의 우물을 보지 못한 철학자를 보며 하녀는 비웃는다. 세상의 모든 지식를 가졌을지라도 당장 자기 앞에 있는 우물을 보지 못하는 철학자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안다 할지라도, 눈 앞의 장애물을 보지 못하는 지식은 필요없는 지식 즉, 죽은 지식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하녀의 비웃음과는 달리 철학자는 그런 하녀가 더 한심해 보일 수도 있다. 먼 하늘의 별이 품고 있는 지식의 원천을 알리 없는 무식한 하녀가 삶의 원대한 뜻을 어찌 알까싶기도 하다. 하녀는 눈 앞의 우물(실존)보다 무한 정신세계(현학적 유희)를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테니까. 이렇게 시작된 철학자와 하녀의 동상이몽으로 '철학' 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들을 수 있게 된다. 가난한 사람에게 현학적 허세와 비현실적 몽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철학이 현실에서 실용가능한 지혜로서 통용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일상에서의 철학', '가난한 이들이 껴안을 수 있는 철학','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한다.










나는 철학이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철학은 다르게 느끼는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다르게 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가난한 이들이 껴안을 수 있는 철학이며, 가난한 이들이 철학자에게 선사하는 철학에 대한 좋은 정의라고 생각한다.





니체가 어지러운 세상에 자발적으로 살아가길 원했던 것처럼 , 참된 철학은 현실이 중단된 곳, 즉 누구도 뛰어들고 싶지 않아 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 저자. 저자는 이러한 현실, 이 지옥이라 불리우는 현실에서 도피처로서의 학문이 아닌 지옥같은 세상에서 필요한 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한다. 척박한 삶에서 건져올리는 철학 한 줄이야말로 참된 공부이며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라 한다.










공부란 자신이 가진 미약한 것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앎을 생산하고 더 나아가는 것이지, 어떤 방법을 알아내서 단번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따로 없고 진리가 가는 길이 진리의 방법이다. 그리고 공부란 그 길을 스스로 내면서 나아가는 일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게 내면에 고착되어 왔던 프레임의 세계가 너무 강해 '다름'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것을. 저자의 말처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라지만, 내면이 견고해지지 않으면, 삶에서 '다름'을 추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인문학이 점차 현학적이 되어버리면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인문학의 위기설 가운데 사회학을 전공한 인문학자 고병권의 《철학자와 하녀》는 현학적 유희나 비현실적인 몽상이 아닌, 삶에서의 리얼리티가 바탕이 되는 '앎'의 철학을 말한다. 철학의 뿌리는 바로 이러한 '현실'의 리얼리티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삶' 그자체이다. 아무리 밤하늘의 별이 아름답다 한들 당장 먹고 살 빵과 물이 없다면 삶은 영속되지 않을 것이고, 빵과 물이 있다해도 별의 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모른다면 영혼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천착하고 관조할 줄 아는 삶을 최고의 삶이라 했듯이 삶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좋은 삶을 향한 철학적 추구이다. 삶의 리얼리티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문학의 정신일테니까...... 아. 이제야 알겠다. 삶에서 깨달음이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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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隱청은 2014-07-15 공감(1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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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조금 더 낮은 세계로 임해야





철학이 일상의 삶과 무관하게 저 하늘의 별만을 보는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이 지적하듯 철학은 한가한 일이나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떠받드는 현실 감각 역시 그들 자신을 빈민으로 양산하는 현실에 대한 추인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노예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대립하는 곳에서는 철학도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다. 철학은 기껏해야 현학적 유희이거나 비현실적 몽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현실 논리를 재빨리 추인함으로써 영리한 노예, 성공한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서로 조롱하고 적대하면서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불행하다면, 역설적이게도 각자의 구원은 서로에게서 오는 게 아닐까. 삶의 절실함과 대면하면서 철학자는 새로 철학을 배우고, 앎의 각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삶을 새로 살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위대한 탈레스를 재치 있게 조롱했던 총명한 하녀가 어느 밤 다락방 창문을 열고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거창한 물음에 역시나 거창하게 혹은 선문답처럼 대답을 내어놓을 이들은 역시나 철학자들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혹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처럼 분위기 잡고 썰을 풀어나가면 뭔가 있어보이는 듯한 이 물음. 소크라테스가 어쩌고, 플라톤이 어쩌고, 공자, 맹자, 노자 타령을 늘어놓아야 왠지 있어보이는 듯한 느낌. 어느 순간에 우리는 '철학하고 앉아 있네'란 욕 아닌 욕을 듣게 마련이다. '철학하고 앉아 있네' 이것은 과연 욕인가? 역시나 여기에 담긴 의미는 쓸데없는 헛소리를 짓거리는 이들에 대한 비하를 담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철학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 하다.



나름 문학에 종사하는 나에게 문학 또한 이 철학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가 어쩌고 소설이 어쩌고, 시를 쓰고 자빠졌고, 소설쓰고 자빠졌네는 욕에 다름 아닌 현실. 결국 여기에는 '불필요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철학이라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 일상과는 저멀리 떨어져있어 하등의 쓸모를 갖지 못하는 현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미개하고 무식하여 그 쓸모를 알지 못하고 멀리하고 있다고 탓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렇다고만 할 수 있을까? 무식한 우리들의 탓일까?



고병권은 이 책에서 이런 물음에 답하려 한 듯 하다. 무식의 하녀만의 탓이 아니라는 다정한 대답이 나온다. 일종의 양비론을 펴고 있다. 일상을 저버리 철학과 철학자도 나쁘고, 철학을 버리고 사는 일상의 하녀도 나쁘다. 일상과 철학의 조화를 바라고 추구하는 듯하다. 그래! 좋게 보면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다. 일상의 철학, 이름하여 실용철학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고병권의 의견에 일부분 반대한다. 어찌 하녀를 탓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철학자를 탓해야 옳다. 그들이 남겨놓은, 고병권의 말대로 일상을 저버린 철학을 탓해야한다. 그들의 철학이 우리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기에 그것은 쓸모 없음으로 우리 하녀와 같은 이들에게 인식되었고, 괜한 소리를 짓거리면 '철학하고 앉아 있네'란 수모를 당해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일상을 포용한 철학, 일상을 변화시키는 철학을 철학자들이 먼저 내어놓는다면, 우리 하녀와 같은 이들은 어느 순간에 모두다 이 철학을 하고 앉아 있을 것이다. 왜? 이 철학이 우리 삶에 이렇게 필요하니 말이다.



고병권은 <철학자와 하녀>에서 이러한 일상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 일상과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삶의 장소에서 발견한 철학, 저 높은 곳에서의 고담준론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짧게나마 직접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짧막한 글에서 느끼는 바가 많다. 내 머리속에 명쾌함을 심어주는 표현도, 금과옥조같인 메모해두고 두고두고 보고 싶은 글귀도 많다.



그러나 고병권의 이 글은 우리 일상에 복무하는 철학일까? 과연 실용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무지의 하녀들이 이 글을 읽고 철학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가 보는 일상은, 그가 겪은 경험은, 그가 돌아본 세계는 아마도 대다수의 하녀들이 보지 못한 곳, 가지 못한 곳, 겪지 못한 경험일 뿐이다. 더 낮은 세계로 임해야 하지 싶다. 별은 3개 반 정도만 주고 싶었다. 그러나 반개는 없어서 인심쓰고 4개를 준다. 그가 낮은 세계의 철학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별 반개를 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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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14-07-29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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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는 것...




제목은 어떤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유명한 철학자 탈레스가 별을 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진다.

그것을 본 하녀가 그를 비웃는다. "탈레스는 하늘의 별을 보는 데는 열심이면서 발치 앞의 것은 알지 못한다."



이 책은 고추장이 어떤 사보에 다달이 적어두었던 꼭지들을 모은 책이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대한민국의 철학자들에게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소재의 제공처일는지 모르겠다.

어찌 그 지나간 사건 사고들에서 얻은 깨달음들이,

구태의연하고 옛스럽지 않고, 마치 오늘에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새로운 것인지...



그리하여, 이 책의 철학은 '가난한 자, 낮은 자'들이 '깨달음'을 얻는 철학에 대하여 쓴다.

현학적이고 박식해 보이는 철학이 아닌 것이다.

'하녀'의 철학에 대하여 쓴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블리주(책무)는 한번도 가져본 적 없이 사회의 권력층에 앉은 노블하지 않은 노블리스들이...

요즘 '하녀'들을 <백정> 내지는 <미개한 백성> 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참 잘 지은 제목이다.



요즘은 뉴스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도를 닦에 만든다.

이것이 나라입니까? 물을 것도 없다.

이것은 나라도 아니다.

저것이 정부입니까? ㅋㅋ 슬프면서도 웃긴다. 하는 짓거리가...

역사는 되풀이 된댔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유신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 애비는 비극으로, 딸은 희극으로...



철학은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단 하나의 지식이나 정보도 달리 보게 만드는 일깨움(9)



이 말은 철학을 정의하는 훌륭한 말인듯 싶어 적어 둔다.

흔히 철학은 세상을 보는 시선, 시각으로 정의하기 쉽지만,

그것은 학문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나 정보의 늪에서 나름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필터링이 철학인 셈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30)



조선의 권력자들은 탐관오리들에 있었고,

일제 강점기엔 친일파에 있었고,

군사 독재 시기엔 정경유착의 재벌에 있었고,

이제 국가독점 자본이 세계 경제에 재편되는 시기엔 국가와 재벌의 유착이 고착되는 데 있다.

(국가 조직이 선거를 조작하고, 교회는 자본의 힘으로 선거를 획책하고, 자본은 언론까지 장악하는 복합체)



한 번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지나면서 처절한 배신감을,

전쟁시기 이승만의 만행으로 죽어간 수십만을 보면서 생존의 처절함을 몸소 겪어온 사람들에게는

세포 알알이 들어찬 두려움의 유전자가 불안감에 떨게 만든다.



절대로 '빨갱이', '종북', '좌빨'에 들면 안 된다는 초조함을 조장하는 사회인 것이다.

국가의 예산으로 있지도 않은 '보수' 알바들을 동원하여 '맞불집회'라는 쑈를 벌인다.

어떤 조직의 힘이 뒷받침 된 것인지 '보수논객'이란 이름으로 트위터에서 막말을 한다.

아직도 여전히 불안감으로 초조한 나날을 살아가기를 권력은 바라는 것.



초조해하지 않아야 한다.

쉽지 않은 말이다.


요즘들어 '외부세력'이란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왜 이해당사자도 아닌데 끼어드느냐고 말한다.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구경꾼들의 맘속에 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개인을 넘어 인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일이 아닌데도 아파하고 고통을 무릅쓰는 그것 때문이다.(76)



청와대 뺀질이가 그랬다.

'순수 유가족'이 아니면 나대지 말라고...

그 뺀질이는 모르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 아프고,

그래서 고통을 무릅쓰고라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어깨를 겯는 사람의 마음을...



신자유주의 정부는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이때 정부가 표방하는 것이 법치주의다.

정부가 법을 지키자는 강조는

<시장 자체의 실패(사회적 양극화, 빈곤층의 확대)에서 파생하는 여러 사회적 문제를

공안의 시각에서 해결하려고 한다는 데 있다.(181)



미국의 월 스트리트에서, 한국의 광화문에서,

영국의 런던 한복판에서,

아주 사소한 법을 어겼다고 경찰들은 몽둥이를 들고 채증을 하고 '법치'를 떠들어 댄다.

그 이유가 참 명확하게 적혀있다.



그런데, 법을 지키려면 좀 제대로 지킬 일이지,

겁을 주려고 해산하는 시민들을 연행해서 불편하게 만들고,

카메라 수십 대로 불법 채증을 하고, 심지어 유가족을 미행하는 사찰을 하고,

(하긴, 국가의 사찰이란 불법을 저지르고는 내부고발자를 아주 비참하게 만든 역사가 3년 전에 있었지)

자기들은 명찰을 반드시 달아야 한다는 법을 어긴다.



소수자들은 많은 경우

사회에서 식별되지 않도록 자신을 스스로 말소한다.

그리고 다수자들의 목소리를 제 것인 양 그 누구보다 열심히 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말소는 정반대의 사실을 덮고 있다.

다수자가 자행하는 말소의 폭력 아래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역으로 자신을 말소하는 것이다.(206)



한국에서 '빨갱이'가 된다는 것은 26년 감옥생활을 해서 나름 장기수라고 뻐기던 만델라가,

한국 감옥에 와 보고 자기는 얼마나 잔챙이인지를 깨닫게 할 정도로 무서운 일이다.

3,40년 정도 돼야 장기수인 나라가 이 나라이니, 만델라는 한국에서는 장기수 축에도 못 드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 는 증명으로 교회를 그토록 열심히 다녔나보다.

헌금을 내고, 군경가족이 아니면 '골'로 가서 학살을 당했던 역사를 떠올리며,

아직도 '좌빨', '종북'이라고 손가락질하면 가슴 한켠이 먹먹하고 서늘하다.



'전라도 홍어'라는 비아냥을 일삼는 인간 말종들을 사회가 정화하기는커녕,

아직도 광주는 '폭도'와 '사태'의 어느 지점에서 머물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금지와 행사에 대통령이 불참하는 날들은,

다시 세상을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도'들로 몰아 소수자로 지목하려 드는 셈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소수자 아님을 증명하려 애쓸 것을 바라는 의도가 다분하다.



인문학 강연도 많고 책도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말들은 모두가 쓰고 버리는,

심지어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상품처럼 되었다.

"높이 오를 생각이라면 그대들 자신의 발로 오르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구원해달라며 찾아온 이들에게 던진 말이다.(252)



결국 말은 힘이 없다는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단결된 힘만이 힘겹게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자유를 말하는 것은 피의 냄새를 맡는 일이며,

고독한 혁명을 견디는 일이라고 김수영이 말했다.



이 책은 생활 속에서

도대체 세상이 왜 이따위인지 날마다 투덜대며 신경질이 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물론, 이 책을 읽는 일보다는,

길가에서 서명이라도 한 번 더 하고,

광장에 나가서 노란 팻말이라도 한 번 더 드는 일이, 더 철학적인 일임은 자명하다.

그런 것을 이 책은 일러준다.





푸른 하늘을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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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4-05-28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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