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의 김구 발언에 관해 간단하게 적어보았습니다.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김구와 김규식이 김일성한테 이용당했다?
“백범 김구가 김일성의 통일전선 전략에 당했다”는 태영호의 발언에 대해 진보진영 측으로 분류되는 인사들도 서슴치 않고 "이용당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하는 발언을 하는 걸 보고 약간 좀 실망스럽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한 논쟁적 합의는 이미 1980~1990년대에 마무리 된 걸로 알고 있다. 이러한 평가를 뒤엎으려는 시도는 200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화된 뉴라이트 운동에서 이뤄졌다.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했던 한국의 보수우파들은 김구와 김규식이 기껏해야 북조선에 이용당하지 않았는가, 하는 주장을 펼치면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옹호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판해야 비로소 이승만을 정당화하고 옹호할 수 있다는 이들의 논리는 김구와 김규식이 결국 김일성에게 이용당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과 함께 북조선도 이미 1945년 이후부터 단독정부 수립을 꾀하였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분단의 책임이 이승만이 아닌 북조선에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https://contents.premium.naver.com/.../230331230801815zj
기본적으로 김구와 김규식이 김일성에게 당했다는 주장은 여러 전제조건들을 전제하고 있다. 예컨대 이러한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와 별개로 북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용당했다고 가정해야 한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북조선 자체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통일적 권력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조선 내부에도 좌파 계열의 민족주의 세력이 존재하였을뿐만 아니라 김일성과 갈등, 대립하면서 남측과의 연대를 통해 독자적인 세력화를 하려는 집단들이 존재하였다. 북조선의 입장에서도 남북협상 직전까지 "민족반역자"라 비난했던 이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는 상황이 달가웠을 리가 없다. 이외에도 김구와 김규식이 실제로 가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등등 여러 복잡한 논의들이 순식간에 소거되어 버린다.
과문해서 모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국내의 어떤 한국사 연구자도 김구와 김규식이 북에 일방적으로 이용당했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들이 평양행이 지닌 어떤 위험성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아마 보수우파들에게 이 말은 곧 국사학계가 "좌경화"되어 있다는 증거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예컨대 1948년 3월 31일 남북연석회의 개최에 관한 북측의 서한을 받은 김구와 김규식은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응을 공개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김구를 비롯한 남측의 우익 인사들은 북조선의 주장에 동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김구의 경우만 하더라도 모스크바 3상 결정을 반대했던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북조선은 거듭해서 비판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의 행위를 비난한 북조선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반발감이 컸다. 그렇기에 김구와 김규식은 북이 제안한 남북연석회의 자체보다도 곧이어 개최될 4김회담과 남북지도자협의회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김규식은 남북연석회의에 병을 핑계로 아예 불참해버렸으며, 김구 역시 22일 회의에서 잠시 인사만 하고 퇴장해버렸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측에 있을 때부터 자신들의 참여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고 있었기에 막상 가서도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자신들이 어느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남북지도자협의회 등을 선호하였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측은 어떻게든 김구와 김규식을 자신들의 일정에 맞춰 끌고 가려고 했지만, 김구와 김규식은 그것을 끝까지 거부했으며 결국 지도자협의회에서 정치회담을 통한 정부수립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북은 이러한 합의를 지키지 않고 아예 김구와 김규식이 빠진 상태에서 제2차 지도자협의회를 강행하였고 결국 김규식은 대한민국 정부 참여 노선을 택했으며, 김구는 조국전선 결성 제의를 받고는 제도권 정치 무대로 복귀해버렸다.
그렇게 김구와 김규식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북협상노선은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홍명희를 비롯한 중간파들이 조국전선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계승되었다. 이들은 좌파 사회주의자들의 헤게모니 하에서도 어떻게든 남북의 통일전선 정신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이들 중간파의 구성에 대해 이신철은 대부분이 좌우합작운동으로서의 신간회 운동에 참여했던 경력이 있었으며 1930년대 혁명적 노농운동에 참여했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간파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운동에 익숙한 집단이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세력적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이신철의 <북한 민족주의 운동연구>(역사비평사, 2008)에 따르면 이들 조국전선의 기반은 결국 남한에서 진행되던 빨치산 투쟁, 다시 말해서 남한의 유격 역량에 기초한 것이었다. 남한 유격 역량에 기초한 통일전선 운동으로서의 중간파의 조국전선 활동이 끝내 이승만 정부의 유격대 토벌 작전에 의해 좌절되었을 때 남은 통일 방안은 전쟁뿐이었다. 중간파를 비롯한 조국전선은 남한 유격대의 붕괴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노동당 세력이 한국전 수행에 관한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낸 시점에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조국전선을 비롯한 재북 민족주의 세력은 한국전쟁 와중에 납북된 남측 인사들을 충원하여 나름대로 이후로도 계속해서 북조선 내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지만, 한국전쟁 와중에 벌어진 우익 측의 민간인 학살 등으로 인해 조국전선의 '순결성'이 문제시되는 등의 여러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남측에서 4.19 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한번 힘을 얻었지만 끝내 북조선의 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전략의 논리에 포섭되며 재북 민족주의 세력은 끝내 소멸하였다.
조만식에서부터 출발하는 재북 민족주의 세력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과의 지난한 상호작용 및 투쟁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부침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북 민족주의 세력은 통일전선 등을 활용하며 나름대로의 세력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김구와 김규식의 우익적 민족주의의 평양행은 이런 세력 기반의 확충이라는 차원에서 독해되어야 한다. 김구와 김규식도 북측 사회주의 세력의 헤게모니 행사에 저항하다 끝내 이탈하였지만, 그들과 함께 올라갔던 남측의 민족주의 세력들은 조국전선으로 재편되며 내부에서 거듭해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려 노력하였다. 즉 이들 재북 민족주의 세력은 '통일운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세력화를 꾸준히 시도하였지만 냉전의 정착 과정에서 중간파와 민족주의 세력의 이러한 시도가 자리할 곳은 없었다. 결국 북조선의 조선노동당 중심의 남한 적화 전략 속에서 민족주의 계파의 통일운동이 해소되며 재북 민족주의 세력 또한 소멸하게 되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시도는 격화되고 있던 냉전적 상황에서 어떻게든 그것을 되돌려보기 위한 민족주의 세력의 나름의 노력으로 독해되어야 한다. 이 둘도 자신들의 시도가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과 북조선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갈라진 상황에서 전쟁 외에 통일을 이룰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김규식은 잘 알고 있었다. 중간파의 조국전선은 남한 측의 빨치산 투쟁에 나름대로 희망을 걸었지만 그것이 형해화된 뒤에는 결국 김일성과 박헌영의 조선노동당이 이끄는 인민군이 직접 남한을 침략하는 방식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이르는 과정 속에서 북조선의 민족주의 운동과 그것의 남측과의 상호작용이라는 맥락 속에 김구와 김규식의 통일운동 및 좌우합작운동을 놓지 않는다면 김구와 김규식은 태영호의 말처럼 냉전적 논리에 사로잡혀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한 어리석은 존재로만 이해될 것이다.
진보진영의 여러 역사학자들이 과거 1980~1990년대에 북한 바로알기 운동 등을 펼치면서 기존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냉전적 이해를 교정하려 시도하는 와중에 오히려 '역편향'에 빠지게 된 경우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김구와 김규식의 마지막 시도를,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향해 "민족반역자"라 비난을 퍼붓던 북조선과 대화하겠다는 시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민족주의적 열정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후에 벌어질 한국전쟁이라는 대파국이 너무나도 끔찍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결과가 너무나도 끔찍하기에 반대로 평화를 향한 김구와 김규식의 마지막 투쟁이 그만큼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최초의 전쟁 이론가인 투키디데스는 그의 명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글귀일 "전쟁은 난폭한 교사이다"라는 말을 케르키라의 내전을 다루면서 말하였다.
"전쟁은 난폭한 교사이다. 그리하여 도시들에 잇달아 내란이 발생했다. ... 만용이 충성심으로 간주되고, 신중함은 비겁자의 핑계가 되었다. 절제는 남자답지 못함의 다른 말이 되고, 문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엇 하나 실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게 되었다. 충동적인 열의는 남자다움의 징표가 되고, 등 뒤에서 적에게 음모를 꾸미는 것은 정당방위가 되었다. 과격파는 언제나 신뢰받고, 그들을 반복하는 자는 의심을 받았다."
전쟁의 참혹함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던 남북한의 민족주의자들을 "김일성에게 이용당했다"는 말로 매도하는 태영호의 발언은 투키디데스의 신랄한 묘사 속에서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은 난폭한 교사이다." 우리는 이 교사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은 인간이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헤겔의 통찰은 오늘도 돋보인다. 더 많은 이들이 평화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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