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0

400년전 유럽을 방문한 일본 사절단 이야기 : MLBPARK

400년전 유럽을 방문한 일본 사절단 이야기 : MLBPARK


뻘글400년전 유럽을 방문한 일본 사절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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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번호 202010100048461003 | 2020-10-10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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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유럽의 교류는 16세기 중반쯤 부터 이루어졌습니다.
명나라와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 규슈에 표류했고 그때 조총이 전파되었죠.
1549년에는 에스파니아 선교사 사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해 처음으로 선교를 시도했는데 이때 4명의 일본인 청년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중 베르나르도라는 세례명을 가진 일본인 젊은이는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리스본에서 수도사가 됩니다. 하지만 장기간 여행으로 인해 병을 얻어 포르투갈에서 선종하고 맙니다.
한편, 유럽에 최초로 건너간 조선인은 '안토니오 코레아'란 소년입니다. 그는 나가사키에 노예로 잡혀왔는데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그를 피렌체로 데려가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첫번째로 유럽에 사절단이 간 것은 1582년 2월입니다.
이때 4명의 소년이 포르투갈 무역선을 타고 유럽을 방문하는데, 이 사절단을 '덴쇼 소년 사절단'이라고 합니다.
소년 사절단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들이 13~14세 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회 신부 발리냐노가 기획했고 규슈 지역의 크리스천 다이묘들이 후원했습니다.
발리냐노는 일본 소년들이 직접 유럽을 경험하고 돌아와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얘기하고 일본내에 포교도 하길 원했습니다.
이들은 인도, 아프리카를 돌아 2년 반만에 리스본에 도착했고, 1585년 3월에 토스카나 대공국의 프란체스코 1세를 알현한 후 로마로 입성합니다.


-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를 영접하는 일본의 소년 사절단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일본 소년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지만, 얼마안가 선종하고 맙니다.
이 소년들은 새 교황의 대관식에도 참석했다고 하는데, 유럽의 기준으로 볼때 이 대관식 참석은 큰 영예와 환대였다고 합니다.
당시 유럽은 동아시아와의 무역과 기독교 포교에 관심이 매우 컸고, '황금의 나라 지팡구'로 알려진 일본과의 관계 강화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1585년 유럽 전역에 일본 관련 서적만 48종이 나왔다는 기록도 있으니, 당시 유럽에선 이미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겠죠.
일본인 소년 사절단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스페인국왕도 만나고 온 유럽에서 대접을 받고 1590년 일본으로 활판인쇄기와 서양악기, 해도 등을 들고 돌아옵니다.
소년들이 일본으로 돌아왔을때는 이미 20살을 넘은 성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절단의 의미는 단순히 일본인들이 직접 유럽을 보고 왔다는 점을 넘어, 일본이 중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세계와 교류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서양과 일본의 서로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일본은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독교를 탄압하긴 했지만 얀 요스틴과 윌리엄 애덤스를 외교 무역 고문으로 삼고 네덜란드, 영국과 무역을 추진하는 등 서양과의 교역에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히라도에 네덜란드 무역상관의 설립허가를 막부로부터 얻었으며, 동인도 회사측은 약스 스벡스를 첫 상관장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1612년, 센다이의 다이묘 다테 마사무네는 유럽에 무역 허가서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하기로 합니다.

사절단이 유럽에 가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했는데, 마사무네는 스페인 사람인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와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의 도움을 받아 유럽식 갤리온을 모방한 "산 후안 바티스타"호를 건조했습니다.
이 배는 배수량 기준 500톤에 전장이 55m라고 하니 굉장히 큰 배였죠.
그리고 하세쿠라 츠네나가와 루이스 소테로를 사절단 단장으로 삼아 이 배를 유럽으로 보냅니다.



- 하세쿠라 츠네나가와 산 후안 바티스타호

이 배에는 막부에서 보낸 사무라이 10명, 센다이번 출신 사무라이 12명, 일본인 상인과 선원, 하인등 120명,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 40명이 탔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당시 세계 최강국 스페인과 로마교황청과 정식 외교 관계를 맺고 무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포르투갈 선교사의 주도로 포르투갈 배를 타고 유럽을 방문한 소년 사절단과는 달리 이번에는 막부가 정식으로 서양과 교역을 하기 위해 직접 배를 만들어 사절단을 보낸 것이죠.
센다이 다이묘의 주도로 움직였지만 사실 막부에서 지시를 내렸고 배를 건조할 기술자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재밌는점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인도-아프리카를 돌아 유럽으로 가는 루트가 아닌, 태평양을 건넜다는 겁니다.
이미 마젤란이 항해한지 100년이 지난 시점이고 필리핀과 멕시코에 식민지가 있는 스페인에게는 이미 중요한 루트였겠지만 말이죠.
사실 사절단을 보내기 3년전에 다케다 쇼스케라는 기술자를 중심으로 윌리엄 애덤스의 자문을 받아 멕시코를 다녀온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태평양을 건넌 최초의 일본인들입니다.
덕분에 대규모 사절단을 태평양 루트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이죠.

당시 조선의 경우는 서양과는 교역할 생각이 없었고, 필리핀 까지 표류했다 돌아온 기록은 있어도 직접 건조한 배로 유럽을 갔다거나 태평양을 건넜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1613년 10월 28일 쓰키노우라항을 출항한 산 후안 바티스타호는 1614년 1월 25일 멕시코 아카풀코(Acapulco)에 도착합니다.
멕시코의 스페인 당국은 이들을 환대하였으며, 이들은 아카풀코에 자신들의 배를 정박시키고 육로로 멕시코 시티를 지나 베라크루스(Veracruz) 항에 도착해 스페인 선박으로 갈아탑니다.
이때 쇼군이 준 선물을 어떻게 배분할지를 놓고 사무라이들과 배를 함께 탄 스페인의 비스카이노 무리들 사이에 싸움이 붙어 칼부림도 있었다고 합니다.
비스카이노가 심한 부상을 입었고, 스페인 당국은 일단 평화롭게 문제를 풀자고 무기를 회수하고 소동을 끝냈습니다.
베라크루스 항을 떠난 배는 쿠바의 아바나 항에 도착했습니다. 사절단은 아바나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1614년 10월 5일, 아바나를 출발한 배가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Sanlúcar de Barrameda)라는 스페인의 작은 항구도시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세비야로 옮겨 성대한 영접을 받고 1615년 1월 30일, 마드리드에 도착해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합니다.

하세쿠라는 펠리페 3세를 만나 영주 다테 마사무네의 서신을 전달하고 조약 체결을 제의했습니다.

이때 하세쿠라는 펠리페 3세의 개인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고 펠리페 프란시스코 하세쿠라라는 유럽식 이름도 받았습니다.

사절단은 스페인을 여행한 후 스페인이 마련해준 프리킷함을 타고 로마로 갑니다.
당시 기상 조건이 좋지 않아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상트로페(Saint-Tropez)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프랑스 지방영주들의 영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인들이 일본인들의 젓가락 사용과 부드러운 화장지로 코를 풀고 버리는 것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은 것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1615년 11월, 사절단은 로마에 도착해 드디어 바오로 5세를 알현합니다. 1615년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황청에서 심문을 받던 해였죠.

하세쿠라는 교황에게 스페인과 통상조약을 맺을것이며 일본에 가톨릭 사제도 보내달라는 서신을 제출합니다. 이 서신은 지금도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교황은 통상조약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지만, 사제를 보내는 것에는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원로원은 하세쿠라를 명예 로마 귀족과 시민으로 인증했고 하세쿠라는 이 인증서를 일본에 가져갑니다. 이 서류는 센다이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 로마 교황을 만나는 일본 사절단

1616년 4월, 사절단은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펠리페 3세를 다시 알현했는데 결국 통상조약에 관해서는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스페인이 보기에 사절단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표가 아니라 센다이 영주 다테 마사무네의 대표로 봤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때 다테 마사무네가 자신을 왕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스페인은 이미 누가 일본의 지배자인지 알고 있었기에 일국을 대표하는 사절이 맞는지 의문을 품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멕시코와의 무역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만 얻은채 사절단은 1616년 6월 세비야를 출발해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한편, 이때 사절단 일행 중 6명의 사무라이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스페인에 잔류합니다.

이들의 후손들이 세비야 근처 코리아 델 리오(Coria del Rio)라는 마을에 아직도 살고 있으며, 하폰(Japón) 또는 자폰(Xapon)이란 성을 아직도 쓰면서 일본인의 후손임을 자부합니다.



- 스페인 코리아 델 리오에 있는 하세쿠라 츠네나가의 동상

출항한지 7년만인 1620년에 사절단이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왔을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독교 탄압을 강화하기 시작하던 때였고, 결국 1624년 스페인, 포르투갈의 무역선 출입을 금지시키는 쇄국정책을 펴게 됩니다.

다만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로를 설치해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일부 허용하기는 했습니다.

일본인은 이제 국외항해를 할 수 없게 되었고, 함께 배를 탔던 루이스 소테로는 결국 화형당해 순교했습니다.

이후 일본이 다시 유럽에 사절단을 보낸 것은 이로부터 250년이 지난 1862년입니다.

이 사절단이 분큐 사절단이고, 이를 통해 일본은 개항하고 메이지유신이 일어납니다.

리플4

모모의시간2020-10-10 04:08IP: 47.148.*.50" 2년 반만에 리스본에 도착했고"
오늘날 화성 가는것보다 더 오래 걸림.....또 시간이 흘러 수백년후가 되면 화성도 당일치기로 갈수 있을듯

요기요2020-10-10 04:18IP: 121.172.*.249하... ㅅ 진짜.
조선의 조상들은 참...

상준표2020-10-10 06:45IP: 211.54.*.233이런거보면.. 독립한게 더 대단해보이네.. 국력 차이가.. 어마어마


ㅋㅇㅈ2020-10-13 14:37IP: 211.253.*.34조선은 본인들도 서양과의 교역에 관심이 없었지만 애초에 서양측도 조선이란 나라와의 교역에 관심을 가질 만한 물품이 없어서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도 한몫하죠. 일본은 전국시대 당시에는 서양에 황금향 지팡구 전설같은 루머가 퍼질 정도로 금광 개발이 일시적으로 활성화됐었고 에도 시대에는 이와미 은광이라는 세계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대형 은광을 보유한 나라였기 때문에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쳐도 꾸준히 교류를 시도할 만큼 서양에게 교역할 가치가 있는 나라였으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입지 및 자원의 차이 탓이 더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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