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0

[북한 탐방기]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1) -




[북한 탐방기]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1) - 뉴스페이퍼
재미동포 교사 이금주의 따끈따끈한 북한이야기(1)

이금주 매사추세츠 한국평화운동 공동의장
승인 2019.08.15 01:56


평화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평화에 대한 열망이 나를 평양으로 보냈다. 보스턴-서울-심양-평양. 평화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는 한반도 땅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보스턴에서 서울과 심양을 거쳐 나를 평양으로 실어 날랐다. 머나먼 여정이었다. 어쩌면 물리적 거리보다 더 먼 것은 정서적 거리일 것이다. 대한민국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 30대 후반에 미국으로 이주해 살아 온 나. 이제 곧 발을 내딛을 전혀 새로운 세계. 안전에 대한 신뢰는 있다. 하지만 나의 가슴은 콩당콩당 뛰기 시작했다. 몇분 후면 곧 해외동포들의 평화에 대한 열망을 전할 멀고도 가까운 북한의 수도, 평양에 도착한다.

아주 특별한 이번 여행의 시작 무렵, 긴장감과 설레임이 교차되었던 나의 감정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감동과 희망으로 바뀌었다. 이제 꿈결같은 여행을 마치고 부모님이 계시는 휴전선 이남의 땅으로 돌아간다. 서울에서 평양. 육로로 3시간 가는 거리를 중국을 경유해 비행기를 갈아타고 9시간 걸려 돌아간다. 평화협정이 맺어져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날, 기차로 평양을 부모님을 모시고 남편, 아이와 함께 올 날을 상상해 본다.

이주일 전이었다. 중국 심양에서 고려항공 여객기에 탑승했다. 고운 여승무원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손짐을 올리는데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가방을 올리다가 놓칠뻔 해 승무원의 몸에 살짝 가방이 닿았다. “죄송합니다” 승무원에게 사과했다. “일 없습니다” 라고 승무원이 대답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몇번 듣다보니 맥락상 “괜찮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북한식 표현을 비행기에서 하나 배웠다. 아직도 어여쁜 승무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햄버거가 기내식으로 나왔다. 먹방에 대한 촬영병이 도져, 승무원에게 햄버거 사진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안 됩니다”라고 단호히 사진촬영 금지임을 말한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이유가 있겠지” 속으로 생각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 이 곳의 규칙을 존중하고 따르면 된다.

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분단된 조국의 다른 한편에 첫 발을 내딛으며 나의 가슴은 떨렸다. 잘 알려지지 않는 세계에서 이제 7박8일을 지내게 된다. 설레임과 긴장감이 교차되는 묘한 감정이다. 드디어 평양이다. 내가 평양에 왔다.
심양공항에서 출발하는 평양행 고려항공 비행기

내가 처음 만난 평양

입국심사다. 20대 후반의 남성심사관이었다.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이다.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내 정보를 보고 재미동포 선생님이라고 나를 칭한다. 내가 하는 평화운동에 대해 관심이 많다. 어떤 활동을 하는지 이것 저것 묻는다. 호의에 가득한 관심이 역력하다. 이번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 묻는다. 인민들이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지를 묻는다. 솔직히 대답했다. 내 생각은 어떤지 묻는다. 다른 정책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반도 평화에 관해 처음으로 북과 대화한 대통령이고 그의 그런 외교적 노력은 좋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대화가 한반도 평화에 대한 북미관계, 미국내의 여론, 나의 평화운동으로 이어졌다. 20분 정도대화한 것 같다. 이미 다른 줄의 입국심사는 다 완료. 친절한 정세 토론을 마치고 입국심사가 끝났다. 세관을 통과하자 두명의 남성, 안내원과 기사가 나를 반갑게 맞는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평양 도심으로 가는 길

평양에 도착하자 마자 공항에서부터 따뜻한 환대와 친절을 체험했다. 이런 따뜻함은 나의 긴장감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이런 따뜻함은 7박8일 내내 이어졌다. 수줍은 듯이 웃는 우리 북녘 동포의 표정. 나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선뜻 내주는 호의. 온정을 느꼈던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마지막 날, 평양을 떠날 때 가장 가슴에 남는 건 따뜻한 북녘동포의 정이었다.

아주 특별한 여행 문수물놀이장에서 더위를 식히는 평양 시민들

일주일 전에 북한을 다녀왔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올리고 남한에서는 한미군사훈련을 하는 때에 북을 다녀왔냐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리라. 7박8일의 방북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의 무사귀환에 남편, 아들, 부모님과 동생들은 안도하며 축하해 주었다. 방북기간 동안 나를 많이 걱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에 가득 담고 가족에게 돌아 왔다.

내가 부모님과 동생들이 있는 남한으로 돌아왔다는 것 만으로도 북한이 위험한 곳이 아님을 어느 정도 입증한 셈이다. 정말 북이 위험한 곳이었다면 나의 여행은 끔찍했을 것이며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북한 여행은 새로운 발견과 감동으로 가득한 즐겁고 편안한 여행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계시는 인천으로 돌아와 남한에서 며칠 남은 고국방문 일정을 마무리하고 있다.

나의 방북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북한에 가고 싶었다. 오랫동안 북한은 금단의 땅이었다. 남한을 생각하면, “북한 방문” 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이 걸리지 않을까 여전히 걱정하는 분위기다. 북한을 생각하면, 보통 대중들에게는 통제된 사회, 자유가 없는 사회, 그래서 여행이 불가한 나라로 이해되기 쉽상이다. 그런 북한을 방문하고 싶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다.

나는 미국 보스턴에 사는 교포다.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2003년에 미국에 이주하여 16년째 보스턴에 살고 있다. 15살 난 아들을 둔 엄마다. 중학교에서 이주민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하다. 이런 미국사는 평범한 교포 아줌마인 내가 왜 그 위험한 북한에 갔을까? 궁금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종종 보스턴 커먼에서 보스턴 시민들과 만나 나의 고국인 한국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미국 상하원 의원과 그 보좌관들을 만나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도록 평화협정을 지지해 달라고 촉구한다. 나는 스스로를 시민평화운동가라고 부른다.

작년 평창 올림픽 이후 한반도에 새롭게 움트기 시작한 평화의 싹은 8천만 우리 한국인들의 가슴에 통일에 대한 부푼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 작년 4월27일에 역사적인 남과 북 지도자들의 판문점회담과 선언이 있었다. 이어 6월 12일에 싱가포르에서 북한과 미국의 지도자들이 만나 싱가포르 공동선언이라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내게 이 평화모드는 일생일대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로 여겨졌다.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이 엄청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분단으로 두동강이 난 조국의 평화와 남북의 화해를 위해 해외동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스턴 커먼에서 시민들에게 평화협정 지지를 호소하는 필자

한반도 평화를 위해 미국을 움직이자 한국전쟁종식과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미의원 방문활동

미국인들은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한국의 평화에 대해 그리 관심이 높지 않다. 한반도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과 전세계의 지지가 필요한데 말이다. 특히, 1953년 정전협정의 당사자 중 하나인 미국의 동의없이는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수 없다.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지지가 절대적이다. 우리 재미한인들이 미국인, 미국을 움직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한반도 평화에 대해 뜻을 함께하는 한인들과 모임을 꾸렸다. 그것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보스턴 행동(Korea Peace and Unification Action of Boston)”이다. 이 모임은 보스턴 지역 미국인 평화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매사추세츠 코리아평화운동(Massachusetts Korea Peace Campaign)”이라는 한국전쟁종식과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한인과 미국인의 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나는 이 단체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월 캘리포니아 의원 로 카나는 한국전쟁 종식과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하원에 제출하였다. 나는 “매사추세츠 코리아평화운동”의 동료들과 함께 상하원의원과 지역유권자들을 찾아 다니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로 카나 의원의 결의안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하원의원은 지역구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된다. 재선을 바라는 의원들은 지역구 주민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지역주민으로부터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로 카나 결의안에 지지 서명을 많이 받아야 의원들을 움직일 수 있다.
낮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 후에는 주부와 한 아이의 엄마로서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고국의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해 나갔다. 주중에 힘들게 시간을 내어 의원사무실을 방문해 의원이나 보좌관들을 설득했다. 주말에도 쉼없이 집회와 시위, 평화행진 등을 조직해 지역대중들을 만난다. 8천만 겨레의 소원인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다. 녹녹치 않은 이민자 생활 속에서도 고국의 평화를 위해 뭔가 한다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다. 평화운동을 하다 보면 종종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보스턴 시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던 집회를 소개하겠다. 미국인들은 전통적 가치를 존중 한다. 특히, “가족”의 의미를 소중히 여겨 가족이 격리되는 상황에 대해서 매우 가슴 아파한다. 작년 멕시코 국경에서 발생했던 불법이주민 어머니와 아이의 격리 수용은 미대중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6월 29일 미 전역에서 트럼프의 “가족 분리” 정책에 대한 반대 집회가 대대적으로 있었다. 보스턴에서도 이 “반가족분리” 시위에 맞춰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한반도의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집회를 가졌다.
미국 CBS뉴스에 보도된 한반도평화를 위한 집회

한반도에는 분단으로 헤어져 70년 가깝게 만나지 못 하는 가족들이 수십만명이다. 나의 가족사를 이야기 했다. 황해도가 고향이신 부모님은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넘어 오신 후 한번도 고향땅을 밟아보신 적이 없다. 아직도 “이북 고향에는 먼 친척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죽기 전에 고향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늘 말씀하신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 그들의 가슴에 울림이 있었다. 나는 이산가족의 재결합과 자유로운 왕래를 위해 평화협정은 꼭 필요함을 강조하였고, 많은 시민들과 언론으로부터 관심과 지지를 얻었다. 보스턴 글로브에서 우리 평화집회의 전체 과정을 취재하고 기사도 실어 주었다. 우리 단체의 평화운동은 NBC, CBS, PBS, 보스턴글로브 등의 주요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의 평화에 대한 염원과 목소리가 미디어를 타고 미대중들에게 전달되었다. 미국사회에 한반도 프로세스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이렇게 활동하는 가운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지지를 얻어 내는데 큰 장벽에 부딪혔다. 그것은 미의원들, 주요언론, 미대중의 북한에 대한 편견과 불신이다. 북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며 반인권적인 국가’ 인데, 그런 북을 어찌 믿고 평화조약을 체결하냐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인들이 평화를 바라는 것은 안다. 이산가족이 다시 만나고 왕래하는 것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북을 신뢰할 수 없기에 협상의 파트너로, 평화프로세스의 협력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정치인들과 대중의 반북의식과 반북정서는 평화로 가는 길에 큰 장애로 작용하였다.
평화협정 지지 요청을 위해 프레슬리 하원의원과 면담

북한에 간다고? 그 위험한 곳에? 왜?

북에 대한 편견의 배경은 무엇인가? 왜곡된 정보일 가능성은 없는가? 북의 지도자의 인격이나 의도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이 건설적인 협상에 도움이 되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 우리가 아는 북한의 모습이 다가 아닐 수 있다”, “나는, 우리는 얼마나 북에 대해 알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이 맞는지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북에 가 봐야겠다.”라고 말했더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게 위험한 곳을 왜 가?”였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다. 북에 대한 편견과 불신이 남과 북이, 그리고 북과 미국이 평화로 나아가는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런 현실을 깨뜨리는 것이 평화운동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평범한 해외동포가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조국, 북한. 이런 노력과 움직임이 많아진다면 분단의 장벽은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서 허물어지고 현실의 분단의 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다녀온 사람이 사진과 영상으로 북한을 말한다면, 설득력이 높을 것이다. 남과 북, 북과 미국의 평화협상은 교착상태에 직면해 있다. 지도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민간이 나서서 화합과 교류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의 방북이 남과 북, 그리고 재외동포와 북의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고 남북평화와 화합의 분위기를 촉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방북을 계획하였다.

덧붙여, 그동안 나보다 앞서 북에 다녀와 북의 실상을 알린 분들이 있다. 신은미 씨, 진천규 씨, 로창현 씨 등이다. 신은미 씨는 북한 여행 경험을 솔직하게 말했다는 이유로 종북몰이의 희생양이 되어 큰 정신적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다. “북한 바로 알기”의 선구자적 입장에서 신 씨가 보여준 헌신과 노력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먼저 북한을 방문한 분들이 남긴 정보와 자료는 내가 주저없이 방북을 결심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의 보고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은 존재하지 않음을 믿었다. 적어도 북한이 안전하며 치안이 확실한 사회라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본격적인 방북 준비에 돌입했다.

방북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나?

북한을 갈 수 있는 방법을 여러 통로를 통해 알아보았다. 먼저, 북한에 가려면 북한당국으로부터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한다. 나는 미국 영주권자이기에 트럼프 행정부의 여행금지 조치에 해당되지 않는다. 북한으로부터 비자를 발급 받으면 방북이 가능하다.

가는 교통편을 알아봐야 한다. 북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용이한 방법은 중국을 통해 비행기로 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심양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평양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는 중국의 북경과 심양 두 곳에서만 있다. 즉, 항공편으로 평양에 가려면 반드시 이 두곳 중 한 곳을 거쳐야 한다. 나는 서울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서울발 항공편과 평양행 항공편의 연결이 가장 편리한 심양을 택했다.

그 다음, 평양행 항공권 구입이 필요하다. 나는 미국의 재미동포연합을 통해 북한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에 방북 의사를 전달했다. 비자발급, 항공권구입, 여행일정 등 모든 준비와 절차는 재미동포연합과 해외동포원호위원회에서 맡아서 해 주었다.

아는 것 만큼 보이는 법이다. 미리 북한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읽어두었다. 방북계획서를 세우기 전에 방북경험이 있는 분들과 이메일과 전화로 충분히 대화하고 필요한 사전지식을 얻었다. 이런 사전 준비와 해동위의 세심한 배려가 “한반도 평화 운동을 위한 북한 바로 알기” 라는 나의 방북 목적을 최대한 실현하는 여행일정을 가능케했다.

내가 가장 관심있는 부분은 북한주민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70년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따로 떨어져 살아 온 우리다. 최근 북을 다녀온 방문자나 기자들에 의해 북한 주민들의 생활이 일부 알려지긴 했으나, 북한은 여전히 나에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계이다. 북녘동포들의 삶이 너무 궁금했다. 대북제제로 주민들의 생활이 어렵다고 들었다. “주민들의 삶은 어떠할까? “우리 북녘동포들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으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우리네 삶과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같을까? “ 많은 질문들이 머릿 속에 쏟아져 나왔다.

나는 여러 해 교직에 몸담은 교사이기에 북한의 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초,중,고, 대학교의 각급학교를 방문하고 교사와 학생들을 만나고 싶었다. 희망방문지로 북녘 동포들의 일상을 이해하고 경험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공공시설, 교육시설, 문화시설 등을 상세히 요청하였다. 애육원, 육아원, 평양교원대학, 김책공대, 문수물놀이장, 능라유원지, 중앙동물원, 자연박물관, 평양지하철,병원, 약국 등 평양의 일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을 일정에 넣었다. 또한 개성과 평양의 역사유적지도 방문 일정에 포함하였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사람 사는 북한

7월31일에서 8월7일에 나는 북한에 머물렀다. 남한과 미국에서는 북의 미사일과 방사포 발사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북에서는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남한을 향한 비난도 없었다. 북한에선 자신들의 무기를 테스트하는 거라고 했다. 가족이 얼른 돌아오라고 계속 SNS 메시지를 보냈다. 미사일 때문에 난리라고 했다. 이런 시기에 북한에 있으면 위험하다며 나에게 당장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평양의 분위기는 가족의 우려와는 전혀 달랐다. 대동강 주변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평양시민,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평양 거리를 산책하는 연인, 방학에도 김책공업종합대학에 나와 공부하는 학생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길을 재촉하는 직장인들, 모든 게 평화로웠다.
방학 중 공부하러 나온 김책 공대 학생들

그곳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북한은 없었다. 7박8일간의 북한 방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무시무시하게 무서운 북한의 모습은 보지 못 했다. 그냥 사람사는 곳이었다. 모두 내가 보스턴에서 서울에서 흔히 보던 사람 사는 모습이었다. 우리네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 가는 곳. 그곳이 북한이었다. 내가 머물렀던 평양은 한여름 더위를 물놀이장을 찾아 달래고, 하루의 피로를 맥주 한잔에 씻으며, 길을 걸으며 바쁘게 통화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였다.

나는 북한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한 핏줄을 나눈 형제”임을 실감했다. 같은 언어를 쓰며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심성을 지닌 북한 동포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가 그들이었고 그들이 우리였다.

혹자는 그럴 것이다. 7박8일의 짧은 시간에 그것도 여행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북한 사회를 보고 이해할 수 있냐고. 그러나, 우리는 북에 대해 언론이나 제도교육을 통해 교육받고 듣기만 했다. 우리는 바로 눈앞에서 오감으로 생생하게 느끼는 북을 경험하지 못 했다. 생동하는 평양거리, 그 거리에서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실제 평양시민들을 보지 못 했고 그들과 두손 맏잡고 온기를 느끼며 대화해 보지 못 했다. 제도교육과 보수언론을 통해 전해 들어 알고 있는 북과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느끼는 북은 하늘과 땅 차이다.
손선풍기를 들고 청춘거리를 걷고 있는 연인들

나는 여행자였다. 하지만 7박8일을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북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추억을 가슴 속에 담아 왔다. 가서 직접 보고 체험하기 전에는 알지 못 한다. 직접 체험한 나의 7박8일 간의 북한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것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평양 시민들-부흥역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을 다녀왔다. 해외동포들의 평화에 대한 열망을 전하며 민족의 하나됨을 위한 여행이었기에 그러하다.사람사는 냄새 풀풀 나는 평양의 거리, 개성의 거리도 너무 아름다웠다, 또한 짧은 만남, 짧은 대화였지만 같은 동포끼리 정을 나눈 여행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경험과 추억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나의 이 소중한 체험을 알리고 공유해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를 하나가 되어 남과 북의 끊어진 혈맥을 잇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

이 특별한 여행 경험을 독자와 나누고 싶다. 내가 보고 체험한 북녘 땅과 북녘동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하고 싶다. 어쩌면 분단의 장벽은 저 휴전선으로 가로 막힌 물리적인 장벽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장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북을 마주대 할 때, 우리는 진정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열어 갈 수 있을 것이다. 70년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헛되어 낭비할 수 없다. 평화를 막고 있는 우리 의식 속에 있는 분단의 장벽을 이제는 허물어야 한다. 북에 대한 인식이 전환이 필요한 때다. 우리의 형제를 제대로 모르고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배척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

이제부터 독자들은 나와 함께 7박8일의 여행을 떠난다. 나의 7박8일의 여정에 동행해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을 간접 체험하게 될 것이다. 생생한 북녘동포들의 모습, 살아 숨쉬는 평양과 개성, 판문점의 모습을 전할 것이다. 이제 나와 함께 평양으로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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