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8

동양포럼/ 인간존엄성과 노년의 자기실현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동양포럼/ 인간존엄성과 노년의 자기실현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동양포럼/ 
인간존엄성과 노년의 자기실현
동양일보
승인 2020.02.23

김용해 서강대학교 교수
김용해 서강대학교 교수

[동양일보]1. 인간존엄성의 함의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대한민국 헌법 10조).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어질 수 없다.”(독일 기본법 1조 1항). 대한민국 헌법 10조와 독일 기본법 1조 1항의 예에서 보듯이, 현대 각국의 헌법의 기본조항에서 선언된 인간존엄성은 인권의 근거로 이해되며, 모든 국민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인간존엄성 개념은 오늘날 인간존엄성 이념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인간은 ‘대자적 자기목적(Selbstzweck fuer sich)’일뿐 아니라, ‘즉자적 자기목적(Selbstzweck an sich)’이다.(R. Spaemann, Das Natuerliche und das Vernuenftige, 1987) 자기목적임을 스스로 주장하거나, 자기와 연고가 있는 사람이 청구할 수 있다는 측면(대자적 자기목적)에서뿐 아니라, 스스로 또는 연고자가 주장할 수 없거나 주장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자기목적성(즉자적 자기목적)을 갖는다는 말이다.

칸트는 “네가 인간성을 너의 인격에서든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여기고, 어떤 경우에도 단지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라.”(GMS, B 52 이하)는 정언명법을 세웠는데, 이것이 인간의 자기목적성을 지칭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국가의 수단이 될 때도 있겠지만, 그 경우라도 동시에 그가 목적자체임을 인정하고 행하라는 뜻이다.

둘째로 인간은 존엄성에 관한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혹은 그 밖의 신념, 국가적 사회적 출신, 재산 혹은 그 밖의 조건들의 차이에 따라,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 즉 모든 인간은 존엄에 있어서 평등하다.(유엔 인권 선언문 2항; B. Schueler, “Die Personwuerde des Menschen als Beweisgrund in der normativen Ethik” 참조) 사회 안에서의 역할과 인격의 완성도에 따라 향유하고 있는 존엄성에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본래적 의미의 인간존엄성은 인간에 따라서 그 어떤 차이도 없다.

셋째로 인간존엄성의 존중은 윤리적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규정근거이지만, 충분한 규정근거이지는 않다.(위의 Schueler 책 참조) 인간은 윤리적 행위에 있어서 자유로운 자기규정과 책임성 때문에 존엄성을 지닌다. 이런 의미로 인간존엄성은 행위 이전에 이미 소유한 것으로, 동시에 행위를 통해 완성시켜가는 의무로 윤리적 선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존엄성을 선과 악의 규준자로, 전통적 의미로 보자면 마치 인간본성(natura humana) 혹은 올바른 이성(recta ratio)처럼 간주할 수 있다.(위의 Schueler 책 참조)

인간이 존엄하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인간존엄성은 단지 정치적, 법적 선언인가, 아니면 인간학적 근거를 갖는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본성에 대한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인간존엄성의 근거를 그리스도교, 회교 등 신 관념을 가진 종교의 전통에서는 ‘신의 모상(imago dei)’, ‘인격(persona)’으로, 불교 등 자연종교에서는 ‘불성(Buddha-dhatu)’, 신과 인간을 일체적으로 파악하는 동학 천도교에서는 ‘인내천(人乃天)’ 등의 표현으로 관련짓고 있다. 이를 종합하여 보편언어로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존엄성은, 인간이 존재자로 자신의 한계와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고 절대 실재(또는 전체 실재)와의 합일을 통해 — 절대 실재와 관계를 맺고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절대 실재에 맞갖은 태도와 결단으로 ―, 절대 실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두 개의 영역, 한편으로 과거로부터의 인류의 유산과 다른 한편 미래로 향한 창조적 개방성을 고려하면서 자기의 의미와 가치를 파악하고, 계속 발전시키는 것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아 자신을 실현시키려 노력하는, “종교적 실존”에 그 근거를 갖는다.(종교religion의 어원이 re-ligare<다시 결합하다>는 설을 채택하여 인간이 절대적 실존과의 간극을 인식하고 다시 재결합하려 노력하는 실존이라는 의미로 나는 이를 ‘종교적 실존’이라 부른다. 이는 종교를 믿는지 아닌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실존적으로 절대 실재 또는 전실재全實在와의 관계 회복의 과정(종교적)에서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인간존엄성은 절대적 실재, 또는 전실재와의 관계에서 근원되기 때문에, 자기 밖의 어떤 존재자, 어떤 다른 인간에게로부터 박탈당할 수는 없고, 다만 침해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타인에 의해 자기 존엄성을 탈취당할 수 없지만, 자기 스스로 자기 존엄에 반하게 행동할 수 있고, 따라서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존엄을 잃을 수도 있다. 예컨대 자기 고유한 존재의 존엄성을 스스로 존중하지 않거나 양심의 내적 소리를 따르지 않고, 그에 반해서 행동을 하면 자신이 분열되고 자신의 존엄성을 억압하게 된다. 그리하여 절대적 실재로부터 소외된다. 이 사실은 ‘실존적 의무’의 의미를 부각시킨다. 절대적 실재에 대한 의무감 내지 경외감 없이는, 즉 존재 일반에 대한 예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성, 그리고 다른 존재와 관계에서의 정의감이 없이는 인간은 자기 고유한 존엄성을 의식할 수도, 유지할 수도, 성취할 수도 어렵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절대적 실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 절대적 실재가 스스로를 계시하는 다른 존재자들에 대한 관계까지도 경외의 마음으로 개방하는 것을 뜻하며, 바로 이것을 나는 인간의 ‘실존적인 의무’라 부른다. 이 ‘실존적 의무’는 인권과 관련하여 나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타인의 그것도 인정해야 할 ‘규범적 의무’를 포함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과는 다르다. ‘실존적 의무’는 절대적 실재와 의식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에 대한 감사함으로 발생하고 자각되고 근거 지어진다면, ‘규범적 의무’는 자기 인권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정의 관념에서 근거 지어진다.

인간이 실존적 의무와 이로부터 파생하는 완성으로부터 오는, 전취된 영광을 의식하면 ― 동시에 양심의 깊은 곳에서 절대자로부터 부름을 받는데 ― 그는 자신의 존엄성에 근원을 둔 실존적 과제에 투신하고자 의지가 발동하기 시작한다. 이 실존적 과제는 인간 존엄성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반대로 과제를 수행했다고 해서 존엄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실존적 과제의 준비성으로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요구뿐만 아니라 타인과 사회의 지배적 기관, 특히 국가와 국제기구들에 대한 요구가 발생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요구에서는 자기의 이기적 자아를 넘어 개방하고, 전실재에 직면하여 진실하며, 가치 추구에서 발생하는 긴장 속에서도 실존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각 개인들에게 요청되는 구체적 의무들이 문제가 된다.

이 요구는 특별히 윤리와 종교가 다루는 당위와 의무에 속한다. 실존적 의무가 국가에 요구하는 형태는 국가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자신의 타고난 권리, 즉 소위 기본권과 인권 등을 보장해야 할지, 국가가 이 권리들을 위해서 자신의 행동 가능성을 얼마나 제한해야 할지의 물음과 관련된다. 국가에 대한 요구들은 국제법과 여러 형태로 헌법에 편입된 기본법에서 수용되어 있고, 사회적 관계 안의 개인 상호간의 인권적 요구들은 각각의 국가의 기본법과 형법에서 인간의 의무 형태로 다루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 때문에 인권을 요구할 수 있는 배경이다. 국제인권기구들에 의해 보장되고 발효된 권리들 중에는 생명의 권리, 적절한 삶의 수준을 보장받을 권리, 고문을 비롯한 부당한 처우에 대한 보호, 사상과 언론 및 표현의 자유, 이동의 자유, 자기 결정의 자유, 교육에 관한 권리, 그리고 정치, 문화에 참여하고 향유할 권리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실존적 의무의 성실한 실행 없이 그저 인권에 대한 요구만을 통해서는 그의 존엄과 실존적 완성을 이룰 수 없다. 요컨대 인간의 존엄성은 실존적 의무에 놓여 있기에 인간에게 인권은 이 의무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으로 귀속된다. 인권은 따라서 인간 존엄성을 위한 필요조건이며 충분조건은 아니다.(김용해, 『인간존엄성의 철학』, 2015, 참조)



2. 대한민국의 인간존엄성의 현황



1) 국민의 존엄성

앞에서 언급한대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대한민국 헌법 10조에서 규정한다. 헌법은 우선 대한민국 국민에게 존엄성을 부여하고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기본법은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어 질 수 없다.”(독일 기본법 1조 1항)고 규정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독일 국가로부터 존엄성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인간의 존엄의 가치가 국민이라는 범주 안에 주어지고 있어 외국인이 보호 밖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실제로 사회문화적으로 외국노동자, 이주민들에 대한 인권 상황이 아직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2) 양심의 자유

국민으로서의 의무가 인권의 핵심가치인 양심의 자유보다 더 우선하는 경향을 사회문화적으로 보이고 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병역의무의 양심적 거부를 인정하고 법제화하도록 했으나 아직 제도화가 완성되지 못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3) 실존적 의무감은 빈약한 반면 인권 내지 권리 주장은 강하다.

말머리에서 인간존엄성의 양면, 즉 실존적 의무와 인권이라는 측면을 언급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급속한 변화와 함께 윤리적 기초였던 전통도덕이 무너지고 인권과 복지 등 민주주의로 나아가면서 실존적 의무 측면보다 인권 측면이 훨씬 더 부각되고 있어 보인다. 동료 인간에 대한 예의, 생명과 환경에 대한 경외감,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성 그리고 다른 존재와 관계에서 공정과 정의감보다는 자기 존재의 존중과 권리만을 주장하고 있다. 자기 양심과 유리된 거짓주장과 거짓뉴스, 자기존재를 분열시키고 부메랑의 보복에 시달리면서 혐오발언과 배제전략을 쓰고 있는 정치, 승자독식과 갑을 관계의 착취경영에 시달리는 사회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3) 차이와 차별의 혼돈

남성과 여성을 생물학적 성차이로 결정할 것인가, 성정체감이나 감정에 기준을 둘 것인가도 문제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성감수성에 따라 신체적 성전환을 꾀하여 안정감을 얻은 트랜스젠더가 될 수 있는데, 법적으로 성의 변경을 인정하고 있지만, 사회정서는 받아들이지 못한 점은 인권과 인간존엄성의 문화가 아직 미흡하다는 평가를 낳는다. 또한 성소수자, 즉 LGBTAIQ라 불리는 수많은 성적 경향성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도 자기결정권을 바탕으로 행복 추구적 인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이것은 차이의 문제의 단적인 예에 불과하고 차이에서 사회적 차별을 받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며, 이들에게도 행복을 누리고 자아실현의 길을 인정하라는 주장을 존중해야 한다.

4) 이주민, 이주노동자의 인권침해뿐 아니라, 아동과 여성의 인권에 있어서도 차별하는 문화와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혼인율, 출산율이 지극히 낮고 이혼율이 높은 이유의 배경에 남녀차별이 문화가 있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3. 노인의 존엄성과 자기실현



1) 노년기의 상실 그리고 상실감

(1) 상실: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되는 것, 어떤 것이 완전히 없어지거나 사라지게 되는 것(네이버 국어사전 2020). 가정, 일, 지위 등 가치를 가지는 것이 변화하거나 의미가 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실질적 상황도 상실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건강, 역할, 경제, 관계의 영역에서 상실을 체험한다.

첫째, 노인들은 건강의 상실을 경험한다. 외모의 변화, 외적 변화는 개인의 자아상에 타격을 준다. 노인들은 노화와 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고 생리적 노화를 억제할 수 없다. 육체의 쇠퇴는 모든 면에서 소극적으로 만들고 경제적 부분에도 직접적 영향을 주고 사회적 역할도 감소하게 만든다.

둘째, 노인들은 역할의 상실을 경험한다. 직업 활동을 통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심리적 기능들을 상실하면서 자기 존재가치를 잃어버린 느낌, 심리적인 좌절을 겪는다. 핵가족화와 유연 가족화의 시대변화로 가족 내에서의 연장자로서의 노인들의 지위와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이렇게 사회와 가정에서의 역할 상실은 노인들이 자신의 지지기반을 잃게 만들고 사회적 가정적 일체감을 상실한 채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도록 하여 인생에 대한 부정적 자아상 또는 인생에 대한 회의와 후회로 불행한 노후를 보낼 가능성으로 내몬다.

셋째, 노인들은 경제적 상실을 경험한다. 강제 정년, 명예퇴직, 노후대책이 없는 은퇴 등으로 노인들의 경제적 빈곤은 심하다. 현재의 노인층은 전통적 가족 공동체를 이루며 부모와 조부모를 돌보다가 급속한 산업사회의 가족 변화로 인해 자녀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 세대이기에 위기가 더욱 클 가능성이 있다. 노인들은 경제적 기능의 상실뿐 아니라 경제적 지원이 소홀함에서 오는 기대감의 상실도 경험하고 있다.

넷째, 노인들은 관계의 상실을 경험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타인에 대한 의존성이 커지게 되는데 사회활동의 폭이 좁아지는 노인에게는 관계 상실이 생활만족도의 저하로 이어진다.

상담 심리학의 연구보고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건강과 역할 상실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커진다.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교육 기간이 많을수록 상실감은 덜 느낀다. 사별하거나 혼자 살 경우가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경우보다 건강영역에서 상실감을 더 느끼고, 경제적 수입이 없는 경우가, 있는 경우보다 건강과 역할 영역에서 상실감을 더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남. 경제 형편은 어려울수록 모든 영역에서 상실감을 더 느끼는 것으로 나타남. 건강, 경제 영역에서 여자가, 역할 영역에서는 남자가 더 높은 상실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남. 배우자 사별로 혼자 사는 노인이 기혼, 동거를 유지하는 노인에 비해 상실감이 더 크게 나타남. 상실은 우울, 스트레스와는 비례적 상관관계, 낙천성과는 반비례적 상관관계가 있다.



(2) 노년기의 상실감

상실은 객관적 현상이지만 상실감은 상실로부터 느끼게 되는 주관적인 부정적 감정으로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후의 느낌이나 감정상태, 즉 무력감, 슬퍼함, 분노, 불안, 우울, 좌절, 식욕상실, 허망감, 실패감, 울기, 수면장애 등이다. 이것이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울증으로, 더 나아가 자살욕구와 자살행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상담심리학에서 보고한 내용을 바탕으로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년에도 계속 탐구하고 배우는 기회를 갖고, 가정과 사회 공동체 안에서 관계와 역할을 증진하며, 경제적 안정을 기반이 된다면 행복한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들은 위로와 격려 받을 곳을 찾거나, 자녀 또는 젊은 세대들이 버르장머리 없다고 탓하기보다, 노년의 상실과 상실감의 상태를 관대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삶 안에서 배운 인내와 사랑의 마음으로 지혜롭게 노년기의 자기실현에 매진해야 한다.



2) 노인의 존엄: 실존적 의무와 인권 차원

앞에서 나는 인간존엄성의 근거가 관계적 인간성, 소통적 인간성에 두었다. 죽는 순간까지 우리의 지성과 의지는 더욱 깊고 넓은 지식과 지혜를 찾고 더욱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지향한다. 인간의 관계적 실존은 따라서 한 사람이 한 종교에 어떤 형태로 소속되어 있는가에 있지 않고, 그가 생명본능을 초월하는 의식, 절대자에 의해 불림을 받은 도덕성 그리고 생명의 놀라운 선물 안에 내재하고 있는, 전실재와 관계를 맺는 데에 있다. 여기서 전실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자연 생태환경과의 관계, 가족, 친족 및 친구, 동료와의 관계, 더 나아가 사회정치적 문화적 관계, 인류공동체의 이상적 이념과의 관계, 윤리적 종교적 가치와의 관계가 다 포함된다. 이런 의미로 상실의 객관적 상황 속에서도 상실감 안에 매몰되기보다 눈을 나 밖으로 돌려 타자에게 향하는 것이 중요하다. 친구와 동료 인간, 자연, 특히 자녀와 손자들에게 눈을 돌린다. 인생을 살아온 넉넉한 관대함으로 감사함으로 자녀 또는 손자들을 지지하고 격려한다. 전화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전화를 걸어 축하해주거나, 식사 약속을 잡고 실제로 만나 그들의 삶을 격려한다.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보다 자녀와 손녀들의 현재 이야기를 경청하고 칭찬하며 지지한다.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랑과 존경은 저절로 따라 나온다. 허세와 체면을 부리기보다 진실하고 겸손하며 너그러움이 노인의 덕이다.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어 인생을 관조적으로 보면서 과거의 성찰을 통해 얻은 지혜를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되,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들을 시키거나, 하도록 주입하지 않는다. 돈에 집착하지 않고 지혜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기꺼운 마음을 유지한다. 이제까지 세상에서 주역으로 살아온 삶에 감사하고, 그동안 내색 한번 하지 않은 아내의 또는 남편의 헌신에 보답하고자 집중한다. 세밀한 감정과 사소한 실천에 더욱 민감해지도록 노력한다.



3) 노년의 자기실현

인간은 죽을 때까지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마음을 더욱 고상하게 고양시키며, 사랑을 더욱 깊이 실천함으로써 삶의 신비를 깨달아 간다. 자기실현이란 자기만의 인생여정의 고유한 빛깔과 특성을 가지고 완성시켜 간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양면을 지닌 인격으로 살아간다. 자아실현이란 육체적 정신적 성장의 단계별로 에너지 작용이 다르게 나타나 그 양상이 변화한다. 한 살 때에는 감각에, 세 살 때는 근육에, 여섯 살이 되면 1차 성징의 발달과 함께 정체성 형성에 에너지가 집중된다. 12세 때부터 외부의 활동의 관찰이 세밀해지고, 18세가 되면 추상적 사고와 논리적 추론 등 정신 내적 능력이 증가한다. 이때까지의 역할은 부모의 자녀로서의 역할을 한다. 30세 전후에 신체와 정신의 발달은 최고조에 이르고, 결혼하고 60세까지는 자녀의 부모 역할을 한다. 50세 후부터 부모의 부모 역할을 하다가 70세에 이르면 자녀의 자녀 역할, 즉 다시 아이처럼 힘이 쇠약해지고 신체와 정신의 결함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이를 자기실현과 관련해서 세대별 과제를 정리한다면 20대는 내가 직접 일해 보는 것에, 30대는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에 집중한다. 40대는 홀로서기를 시도하면서 더욱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50대는 제2의 숨결로 일하는 시기인데,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새로운 삶의 태도가 생긴다. “요즈음 나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고”, 60대에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70대는 자신의 인생을 관조하고 회상하며 영적 유산을 생각한다. 80대는 이제 사랑을 통합하고 승리의 월계관을 두르기 시작한다. 몸은 피골이 상접하지만 살아내고, 인내한 인생이 아름답고, 고맙고 대견스럽다.

대체로 자녀의 부모에서 부모의 부모로 바뀌는 시점에 인생이 재탄생한다고 한다. 갱년기라 부르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만 하지만, 새로운 생명력을 발견하고 성인인 내가 성인인 나를 교육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관해서는 재교육이 필요하다. 내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이 통합하는 시기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비록 신체적 기능은 혼미해지더라도 인간의 정신적 영적 성장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환난과 고통, 어려움을 통해서 “정신적 성장”은 계속된다. 아무런 도전도, 갈등도, 마찰도 없으면 쭉정이 벼이삭처럼 인간의 영혼도 성장이 없다. 폭풍우와 벼락, 천둥이 있어야 벼이삭이 알차게 영근다. 이것들이 벼의 영혼을 흔들어대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년의 인간은 자녀들에 의존하거나 그들의 덕을 보며 지내기보다 삶의 본질로서 주체적, 자발적, 자율적, 창조적, 공동체적인 삶을 계속 추구하며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실천할 수 있다. 후손과 미래 세대를 위해 격려와 지지를 보내고, 관대함과 사랑을 남겨주는 것보다 더 소중한 유산은 없을 것 같다.



레비나스의 타자에서 보는 김영미 박사의 코멘트



김영미 박사: 존엄(尊嚴, dignity)이란, 한 개인은 가치가 있고, 존중받고 윤리적 대우를 받는 권리를 타고났음을 나타냅니다. 같은 의미로는 인격, 인권 등이 있는데, 우리가 인간답게 산다고 말할 때는 존엄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은 삶의 뜻을 스스로 깨달은 자로 존엄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존엄성이란 사람이 극한상황에도 잃지 않는 마음이고, 나와 타자가 서로 존엄하는 상호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존엄은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형성되는 내면의 나침반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존엄에 대한 외부의 나침판도 필요해서,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인식을‘자신의 내부에서 관계로서의 존엄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보다‘인간다움’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 이후의 문학에 나타난 공동체의 특성을‘내부성의 공동체’와‘외부성의 공동체’로 나눌 수 있어요. 내부성의 공동체가‘우리’라는 집단주의적 성격의 공동체라면 외부성의 공동체는 이질적인 것의 출현에 의해 항상 재구성되는 공동체로 개념화되었습니다. 이때 외부성의 공동체가 레비나스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공동체와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대해 문학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기차에 대하여>, 나희덕 시인의 <품>, <거리>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두 시인은 위 작품을 통해 나의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나의 타자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성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공동체 안에 나와 타자가 소통하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공동체의 억압을 무장해제할 때 더 많은 구성원들이 공동체 속에서 행복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공동체에 대한 상호관계에 주목한 현대철학자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의 분리를 강조합니다. 여기서의 분리는 소통과 반대되지 않고, 분리 가운데에서의 소통에 주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의 사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각자의 존엄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름답게 사는 길이란 것에 있습니다. 존엄을 잃어버린 시대에 존엄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김용해 교수: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레비나스가 구상한 공동체에서의 개념인‘비대칭성’으로 시적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설명하셨는데, 이때 비대칭성이란 상호관련에서 어떤 의미인지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김영미 박사: 현상학적 전통의 관점에서 후설과 사르트르가‘의식’에, 하이데거가 ‘존재’에 몰두하여 현상학을 발전시켰다면, 레비나스는‘타자’라는 개념을 그 중심에 끌어들였습니다. 즉 타자성의 철학입니다. 그에 의하면 주체적 자아중심의 사고는 필연적으로 폭력성을 동반한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의 존재를 인식해야 하고,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여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레비나스의‘비대칭성’을 차용했는데, 이때 나와 타자의 관계는 타자 앞에 응답해야 할 위치에 있을 뿐입니다. 이때‘윤리’와‘책임’은 인간다운 삶과 관련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레비나스가 타자성의 인지를 통해 진정한 인간다움을 말하고자 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유주의가 상호성과 그 형식상 평등성을 강조하는데 반해, 레비나스는 타자의 우위를 주장하는 비대칭성을 말합니다. 즉 타자는 나에게 통합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 우위성을 갖는 윤리적 기반에서 비롯된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때 타자에 대한 응답은, 그들에 대한 인정은 진정한 사랑과 겸애의 실현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레비나스의 철학은 인간의 고통과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여 이웃과 타인에 대한 연대를 강조한 것으로, 오늘날 진정으로 요구되는 철학적 사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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