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절도 안 돼 살인자가 되어버린 남자
[청죽통한사⑩] 박정희 시대 도시 빈민
사회
노수빈 안치용 신다임(sustainability)
20.12.22 08:32ㅣ최종 업데이트 20.12.22 08:32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편집자말]
▲ 기자들과 경찰에 둘러싸인 채 현장 검증을 하고 있는 박흥숙. 박흥숙은 사건 직후 서울로 가던 중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중앙정보부에 신고하고 본인도 자수했다. 박흥숙이 신고한 사람은 진짜 간첩으로 밝혀졌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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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2월 24일 청년이 죽었다. 청년은 사형수였다. 수감번호 885번. 그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상고 끝에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집행일을 기다리며 광주교도소에서 2년째 복역 중이었다. 죄명은 살인이었다. 1977년 4월 20일 청년은 공무원 4명을 쇠망치로 때려 살해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곤 행방이 묘연해진 그를 찾기 위해 경찰은 현상금을 내걸었다.
지난한 수사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청년은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제 발로 중앙정보부를 찾아갔다. 살인, 총포화약류단속법 위반, 산림법 위반, 건축법 위반. 1977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청년에게 제기된 혐의다. 그는 자신의 혐의를 순순히 인정했다. 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저지른 범행을 깊이 뉘우치며 말했다.
"나의 죄는 백번 죽어도 사죄할 길이 없습니다."
스물셋 청년이 저지른 잔혹한 살해 행위가 세간에 알려졌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회 인사가 그를 위한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구명운동에 참여한 인사는 60여 명이 넘었고 1, 2심 기간 재판부엔 각계에서 온 진정서가 70여 통이나 접수되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청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람을 4명이나 무참히 때려죽인 처사는 쉽게 용서받을 수 없었다. 가족의 설득으로 결정한 항소 역시 기각되었다. 이듬해 5월에 열린 대법원 상고심 공판에서도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렇게 청년은 수감번호 885번이 되었다.
사형선고에도 불구하고 1980년만 넘기면 청년이 죽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됐다. 통상적으로 사형 집행은 3년 이내에 이루어지므로 3년을 넘기면 사형을 면할 수 있다고 청년도 기대를 품었다. 그를 위한 구명운동 역시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1980년 12월 24일 오후 6시 마지막 입방이 완료되자 청년은 흥분된 목소리로 수감 동료들에게 외쳤다.
"형님! 몸도 기분도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안도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녁 9시가 되자 교도소 교무과 직원 두 명이 청년을 찾아왔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박흥숙, 나와!"
철거반원이 집에 불을 지르고 어머니를 밀어 넘어뜨리는 장면을 보고 우발적으로 그들을 살해해 사형수가 되었던 스물셋 청년 박흥숙.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1980년 12월 24일 눈이 펑펑 내리던 그 밤 그는 불귀객이 되었다.
무등산 타잔
▲ 박흥숙이 평소 체력 단련을 열심히 했던 것은 열악한 산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 mbc
1980년 12월 24일 청년이 죽었다. 청년은 사형수였다. 수감번호 885번. 그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상고 끝에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집행일을 기다리며 광주교도소에서 2년째 복역 중이었다. 죄명은 살인이었다. 1977년 4월 20일 청년은 공무원 4명을 쇠망치로 때려 살해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곤 행방이 묘연해진 그를 찾기 위해 경찰은 현상금을 내걸었다.
지난한 수사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청년은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제 발로 중앙정보부를 찾아갔다. 살인, 총포화약류단속법 위반, 산림법 위반, 건축법 위반. 1977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청년에게 제기된 혐의다. 그는 자신의 혐의를 순순히 인정했다. 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저지른 범행을 깊이 뉘우치며 말했다.
"나의 죄는 백번 죽어도 사죄할 길이 없습니다."
스물셋 청년이 저지른 잔혹한 살해 행위가 세간에 알려졌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회 인사가 그를 위한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구명운동에 참여한 인사는 60여 명이 넘었고 1, 2심 기간 재판부엔 각계에서 온 진정서가 70여 통이나 접수되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청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람을 4명이나 무참히 때려죽인 처사는 쉽게 용서받을 수 없었다. 가족의 설득으로 결정한 항소 역시 기각되었다. 이듬해 5월에 열린 대법원 상고심 공판에서도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렇게 청년은 수감번호 885번이 되었다.
사형선고에도 불구하고 1980년만 넘기면 청년이 죽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됐다. 통상적으로 사형 집행은 3년 이내에 이루어지므로 3년을 넘기면 사형을 면할 수 있다고 청년도 기대를 품었다. 그를 위한 구명운동 역시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1980년 12월 24일 오후 6시 마지막 입방이 완료되자 청년은 흥분된 목소리로 수감 동료들에게 외쳤다.
"형님! 몸도 기분도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안도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녁 9시가 되자 교도소 교무과 직원 두 명이 청년을 찾아왔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박흥숙, 나와!"
철거반원이 집에 불을 지르고 어머니를 밀어 넘어뜨리는 장면을 보고 우발적으로 그들을 살해해 사형수가 되었던 스물셋 청년 박흥숙.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1980년 12월 24일 눈이 펑펑 내리던 그 밤 그는 불귀객이 되었다.
무등산 타잔
▲ 박흥숙이 평소 체력 단련을 열심히 했던 것은 열악한 산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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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근육과 날쌘 몸놀림으로 이른바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청년 박흥숙.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광주시 양동에서 철물공장 노동일을 하면서 사법고시를 준비한 평범한 도시빈민이었다. 가난하지만 성실했던 이십 대 청년은 왜 하루아침에 잔악무도한 살인자가 되었을까.
1954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흥숙은 일찍이 아버지와 형을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과 살았다. 구멍가게를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리는 어머니 밑에서 초등학생 흥숙은 성적도 성품도 준수한 아이였다.
그러나 부친의 사망 이후 흥숙을 제외한 가족은 가난에 쫓겨 광주로 이주했고 그는 홀로 초등학교를 마치기 위해 영광군 군서면에 남아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으나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영광중학교에 수석 합격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도 광주에 먼저 가 있던 가족과 합류하여 상점 점원,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며 돈을 벌러 다녔다.
학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은 흥숙은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검정고시를 위한 독학을 시작해 합격한다. 그러나 열정만으로 학업을 이어가기엔 가난이 지독했다. 흥숙보다 먼저 광주에 도착했던 가족은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의 여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광주 시내에 가정부로, 모친은 전북 내장사에 가서 식모로 일하는 형편이었다.
그는 가난 때문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무시한 채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흥숙은 흩어진 가족이 같이 살 수 있도록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무등산 덕산골에 무허가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건물은 흔히 상상하는 집이라기보다 방 1개와 부엌 1개로 이루어진, 돌을 얼기설기 이어 붙인 움막에 가까운 것이었다. 흥숙은 밥을 굶으면서 외롭고 힘들게 집을 만들었다. 그 무허가 건물은 흥숙과 가족을 위한 안식처이자 정착의 장소였다.
그러나 '무허가 건물'은 말 그대로 허가받지 않은 철거대상일 뿐이었다. 당시 그의 무허가 건물이 있던 이른바 무당골에는 원래 20여 채의 무허가 건물이 있었는데 수차례에 걸친 철거 끝에 흥숙의 움막집을 포함한 4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광주시는 예정대로 흥숙에게도 철거 계고장을 보내왔다. 여러 차례 철거 계고장이 날아왔지만 아무도 철거 이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 철거민이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그는 시내로 나가 방을 구해보고 천막 칠 곳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마땅한 거처를 찾지 못했다. 사건은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잇따른 철거 계고를 무시하며 살던 1977년 4월 20일 발생했다.
당시 신문에서 보도했듯 광주시 동구청 철거반장 오종환은 직원 6명을 데리고 횃불을 밝힌 채 망치로 집들을 부수며 올라왔다. 마침내 철거반원들이 도착하자 어머니 심씨는 세간을 모두 밖으로 꺼냈다. 흥숙도 철거를 받아들인다는 듯 순순히 응했다. 가재도구가 빠져나오자 철거반원 가운데 누군가가 집에 불을 지르라고 말했고 이에 흥숙은 "기왕에 뜯을 집이니 지붕에 쳐놓은 천막이나 상하지 않도록 걷고 나서 불을 지르라"라고 외치며 곧장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는 지붕을 덮고 있던 1만 5000원짜리 천막이라도 건지고 싶었다.
▲ 2005년 5월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편에서 소개한 사건 직후 현장 모습 ⓒ MBC
탄탄한 근육과 날쌘 몸놀림으로 이른바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청년 박흥숙.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광주시 양동에서 철물공장 노동일을 하면서 사법고시를 준비한 평범한 도시빈민이었다. 가난하지만 성실했던 이십 대 청년은 왜 하루아침에 잔악무도한 살인자가 되었을까.
1954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흥숙은 일찍이 아버지와 형을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과 살았다. 구멍가게를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리는 어머니 밑에서 초등학생 흥숙은 성적도 성품도 준수한 아이였다.
그러나 부친의 사망 이후 흥숙을 제외한 가족은 가난에 쫓겨 광주로 이주했고 그는 홀로 초등학교를 마치기 위해 영광군 군서면에 남아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으나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영광중학교에 수석 합격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도 광주에 먼저 가 있던 가족과 합류하여 상점 점원,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며 돈을 벌러 다녔다.
학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은 흥숙은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검정고시를 위한 독학을 시작해 합격한다. 그러나 열정만으로 학업을 이어가기엔 가난이 지독했다. 흥숙보다 먼저 광주에 도착했던 가족은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의 여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광주 시내에 가정부로, 모친은 전북 내장사에 가서 식모로 일하는 형편이었다.
그는 가난 때문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무시한 채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흥숙은 흩어진 가족이 같이 살 수 있도록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무등산 덕산골에 무허가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건물은 흔히 상상하는 집이라기보다 방 1개와 부엌 1개로 이루어진, 돌을 얼기설기 이어 붙인 움막에 가까운 것이었다. 흥숙은 밥을 굶으면서 외롭고 힘들게 집을 만들었다. 그 무허가 건물은 흥숙과 가족을 위한 안식처이자 정착의 장소였다.
그러나 '무허가 건물'은 말 그대로 허가받지 않은 철거대상일 뿐이었다. 당시 그의 무허가 건물이 있던 이른바 무당골에는 원래 20여 채의 무허가 건물이 있었는데 수차례에 걸친 철거 끝에 흥숙의 움막집을 포함한 4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광주시는 예정대로 흥숙에게도 철거 계고장을 보내왔다. 여러 차례 철거 계고장이 날아왔지만 아무도 철거 이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 철거민이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야 했다. 그는 시내로 나가 방을 구해보고 천막 칠 곳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마땅한 거처를 찾지 못했다. 사건은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잇따른 철거 계고를 무시하며 살던 1977년 4월 20일 발생했다.
당시 신문에서 보도했듯 광주시 동구청 철거반장 오종환은 직원 6명을 데리고 횃불을 밝힌 채 망치로 집들을 부수며 올라왔다. 마침내 철거반원들이 도착하자 어머니 심씨는 세간을 모두 밖으로 꺼냈다. 흥숙도 철거를 받아들인다는 듯 순순히 응했다. 가재도구가 빠져나오자 철거반원 가운데 누군가가 집에 불을 지르라고 말했고 이에 흥숙은 "기왕에 뜯을 집이니 지붕에 쳐놓은 천막이나 상하지 않도록 걷고 나서 불을 지르라"라고 외치며 곧장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는 지붕을 덮고 있던 1만 5000원짜리 천막이라도 건지고 싶었다.
▲ 2005년 5월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편에서 소개한 사건 직후 현장 모습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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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반장은 불을 지르지 않겠으니 내려오라고 그를 설득했고 지붕에서 내려온 흥숙은 며칠 전 공부방으로 쓰려고 만든 구덩이가 걱정되어 잠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 사이 철거반은 불을 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잔재물을 모두 없애기 위해 집에 불을 놓았다. 집에 불이 붙자 흥숙의 어머니는 그동안 푼푼이 모아 천장에 숨겨 둔 돈 30만 원을 찾으려고 뛰어들다 철거반원들의 제지로 돈을 구하지 못하고 실신한다.
사태를 뒤늦게 파악한 흥숙은 덕산골의 다른 집을 철거하고 돌아오는 철거반장에게 자신이 일전에 만든 사제 총(딱총)을 발사하며 도망친 철거반원들을 모두 모이게 하라고 위협했다. 그는 철거반원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모두 뒤돌아보게 한 후 철거용 쇠망치로 뒤통수를 내려쳐 4명을 살해했다. 반나절도 되지 않은 시간에 흥숙은 가난한 철거민에서 잔혹한 살인자가 되어버렸다.
사건 직후 흥숙은 현장을 달아나 서울행 열차를 탔으나 이틀만인 22일 중앙정보부에 자수했다. 하루아침에 잔혹한 살인자가 된 청년을 광주 시민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흥숙의 성실하고 순진한 성정과 그가 처한 사정에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 광주YMCA 이사인 안성례를 중심으로 서명 작업과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이 구명에는 박순척, 김옥길, 오지호 등 63명의 사회 인사가 참여했다.
1977년 7월 열린 첫 재판부터 1978년 5월 대법원 상고심까지 흥숙의 사정에 동감한 여러 인사의 구명운동과 탄원서 제출이 있었지만 끝내 그는 사형을 피할 수 없었다. 재판부가 밝혔듯 "공무집행 중인 공무원을 4명이나 무참히 때려죽인 처사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다.
무너진 아파트, 끔찍한 '신'도시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사건이라기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추진해 왔던 고도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소외된 도시빈민의 무주택 문제가 빚어낸 사건이자 대책 없이 진행된 행정상의 횡포가 부른 참극이었다."
흥숙의 구명운동에 참여한 어느 인사의 진단이다. 흥숙의 범죄를 지켜보며 그가 발견한 이면의 사회상은 무엇이었을까. 흥숙의 범죄와 그의 삶 그리고 죽음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대한민국 도시 개발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4년생 흥숙이 1960~70년대를 거쳐 청년이 될 동안 대한민국의 도시 역시 성장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도시 거리는 전재민(戰災民)과 고아 부랑아 등 '목적지 없이 방황하는 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서울은 대다수의 전재민이 몰려 과잉도시화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서울로 올라온 이들은 구걸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도시 주변부에 천막을 쳐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 이들이 모여 형성된 천막촌과 판잣집은 식민지 도시빈민의 '토막민촌(土幕民村)'이 변형된 형태였다. 이와 같은 무허가 불량주택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주택난은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만성적 문제가 되었다.
도시빈민 문제는 전재(戰災)가 어느 정도 잦아든 1960년대에서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이농민의 수는 갈수록 증가했으며 그 결과로 도시빈민과 하층노동자가 대규모로 양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집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국가 주도의 돌진적 산업화를 추진한 것과 관련이 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경제개발의 효과가 가시화하기 시작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촌향도(離村向都)는 더욱 가속되었다. 그러나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도시로 상경한 이들 대부분은 과잉인구로 인한 심각한 주택난과 교통난을 겪으며 하층노동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전남지역은 서울로 인구가 집중됨에 따라 전체 인구가 현저하게 감소했지만, 주요 도시인 광주시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따라서 광주 역시 서울만큼 심한 도시화 문제를 겪었다. 광주에 전입한 사람 대부분은 전남 농촌 출신이었고 전출과 전입인구가 전체 인구의 45~53%에 이르렀으며 그들 중 상당수가 도시빈민층에 편입되었다.
서울과 지역의 주요 도시들은 매년 급증하는 인구에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에 '대도시 인구집중 방지책'을, 1970년에는 '수도권 인구의 과밀집중억제에 관한 기본지침'을 내놓았다. 이 인구집중 방지책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10년을 계획기간으로 삼고 서울·부산·대구와 같은 대도시의 기능 중 교육·상업 등을 부근의 중소 도시로 분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러한 정부 정책의 시행에 앞서 혹은 시행과 함께 1966년 이후 도시 경관 미화 목적으로 무허가 불량주택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철거가 시작되었다.
'시민아파트 사업'과 '광주대단지 사업'은 이러한 배경에서 서울의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야심 차게 내놓은 대책이었다. 그러나 도시빈민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려는 취지로 등장한 정부 정책들은 역설적으로 도시빈민을 도시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서울시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 동을 공급해 9만 가구를 입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에 따라 1971년 영동지구 사업계획이 발표되었고 1973년에는 이 지역이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시민아파트는 처음부터 심각한 안전 문제를 안고 있었다. 시민아파트를 시공한 33개 건설업체는 대부분 부실업체였으며 이 업체들은 아파트가 들어설 부지에 대한 정밀한 측량이나 지질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건물을 지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시민아파트는 부실 설계, 지반 취약, 자재 부족 등의 심각한 안전 문제를 태생적으로 안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한 달 평균 소득이 1만 원 이하에 불과한 불량주택 거주자들이 시민아파트에 실제로 입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당시 서울시가 발표한 아파트 건설 계획에 의하면 시민아파트 입주 시 부담금은 15만 8000원이었다. 도시빈민을 위한 아파트는 결국 부동산 투기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서울시가 입주권 매매를 금지했지만 단속할 행정력이 부족했기에 입주권 매매는 공공연히 일어났다.
시민아파트 사업은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33명이 사망하면서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사임하고 이후 계속 안전 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이 사업의 전면 백지화를 지시함으로써 중단되었다.
▲ 와우아파트 붕괴 현장 ⓒ 국가기록원
시민아파트 사업과 동시에 정부는 인구 분산을 목적으로 신도시 계획(광주대단지사업종합계획)에 착수하여 최초의 신도시인 광주대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 이 사업은 서울 중심부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지금의 성남시 수정구‧중원구) 일대 약 350만 평에 1968년부터 1973년까지 6년에 걸쳐 총 56억 원을 투자하여 인구 35만 명을 수용하는 신도시를 세우는 계획이었다.
특히 수용 인구 가운데 27만 8000명의 인구를 서울로부터 도시빈민을 받아 충당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1971년 8월까지 2만5627세대 12만4356명이 철거‧이주하여 광주대단지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신도시' 광주대단지에는 도시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기반시설조차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 심각한 식량난, 의료문제 그리고 치안 문제 등으로 이주민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주 당시 서울시가 약속한 일자리 제공은 지켜지지 않았고 자체적인 생산‧고용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이주민은 생계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일을 찾아 한 시간 반 거리나 떨어진 서울을 매일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사실상 방치에 가까운 수준으로 정부는 대단지 문제들을 모른 척했고 이주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이주민들은 결국 1971년 8월 10일 적게는 3만 명, 많게는 6~7만 명이 모여 박정희 정권 최초‧최대의 도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정권과 행정당국의 무성의하고 졸속한 철거민 정책 그리고 성급한 분양계획 추진과 높은 분양가격 등에 의해 촉발되었다.
봉기는 발생한 지 6시간 만에 양택식 서울시장이 이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기로 발표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사후 대책은 매우 미봉적이었다. 토지매각가격 인하 요구는 수용되었으나 광주대단지의 태생적 문제점인 열악한 환경의 개선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 '광주대단지'로 조성된 1970년대 성남시 모습 ⓒ 성남시
도시빈민이 소외되는 모습은 당시 전남 광주에서도 반복되었다. 광주에서 최초로 시행한 도시 계획은 1962년 제정된 도시계획법에 따라 1967년 이뤄진 '도시계획재정비'였다. 이에 따라 1972년 광주시는 도시의 무질서한 확장을 막고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무등산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개발제한구역을 설정했다.
따라서 광주시는 그 안에 사는 18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자 했으며 초기엔 주민들의 자발적인 이주를 독려했지만 호응이 없자 강제 철거를 감행했다. 이른바 '무등산 타잔 사건'이 발생하기 5년 전인 1972년 도립공원 계획이 수립되어 도시공간에 대한 개발과 관리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흥숙의 거처인 덕산골에 대한 철거 역시 입안되었다.
나중에사 모든 사실을 알았지만 당장 이사 갈 여유도 없었고, 참, 피와 땀의 결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고생 고생 그 고생을 해서 지은 집을 차마 내 손으로 부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당국에서도 지난 겨울 1차 계고 당시까지는 집을 지은 지 5∼6년이 지나도록까지 말 한 마디 없었으며 우리들도 그처럼 그런 산골에까지 계고장이 나오리라고는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예전에 미처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다고 자진 철거하라는 당국 명령을 받고 이를 묵인하여 그냥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었으며 그 마을 모두가 그렇듯이 시내로 나가 방을 알아도 보았고, 또 어디 적당한 곳에 (천)막 칠 자리라도 없나 하고 몇 날을 두고 찾아 돌아다녀 보기도 하였다. (중략) 추위에 떨고 가난에 떨어야 했던 그 산골에서는 이 혹독한 추위가 해풍해지도록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다.
- 박흥숙 최후진술 중
'무등산 타잔 사건'의 배경 역시 1970년대 도시정책의 특징인 재개발과 철거정책, 무허가 정착지의 확산 때문이었다. 흥숙이 최후진술에서 밝혔듯 철거 계고장은 계속해서 날아왔지만, 다른 대안이 없던 이 가족들에게 이주 대책은 전무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흥숙 가족은 온전한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곳에서 날아오는 계고장을 애써 모른 척하며 하루하루를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하라면 하고, 안 되면 되게 하고
군사정권은 집권과 동시에 행정질서화의 열망에 사로잡혔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전 국가 상황을 부패와 정치 무능이 만연한 시대로 규정하면서 국가 개조를 위해 사회 전 영역에 걸친 새 질서 확립의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했다. 이후 사회를 단일한 규율 질서에 포섭해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대규모 경제‧사회 정책이 속속 시행되었는데 이러한 면모는 공간개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현대도시'를 위해 군사정권이 요구한 자세는 '하라면 하고', '안 되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 목표 달성이었으며 이를 위한 '빠른 속도'는 당연한 전제였다. 한순간에 집을 잃은 철거민의 허망함이나 방치된 공간에서 가난과 질병에 죽어가는 빈민의 삶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수많은 졸속 정책은 애초부터 그곳에 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근대화의 이상을 상징하는, 모던하고 세련된 도시 공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의 가속화를 통해 도시가 개발되는 동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위험의 일상화를 견뎌야 했다.
▲ 2005년 5월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편. 당시 박흥숙이 재판정에 들어서는 모습. ⓒ MBC
흥숙은 "반 넋이 나가버려 초점 잃은 눈으로" 허물어진 움막을 지켜보던 어머니와 "허물어진 담장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 발을 동동 구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타까이 허둥대는" 다른 철거민들의 "불쌍하고 가엾은"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서고, 이가 갈리는" 순간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그와 같은 도시빈민이 견뎌야 했던 일상이었기에 그는 외면할 수 없었다.
흥숙의 삶은 군사정권이 근대화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외면했던 도시빈민의 현실이다. "방 한 칸 의지할 데가 없어서 남의 집 변소를 들여다보고 남의 집 처마 밑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은 국가에 의해 집에서, 도시에서, 대한민국에서 '추방된' 여러 삶의 일면이다.
"철거하러 오는 사람도 우리와 같은 서민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짓인데 그 사람들을 욕하지 말라"며 철거반원에 적대적이지 않았던 그가 한순간에 무고한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자기 파멸의 길로 접어든 비극은 그와 같은 도시빈민을 타자로 규정하고 방치하여 결국 배척한 군사정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흥숙이 미필적 고의 상태에서 선택한 살인은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면서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야기하며 윤리적 파국을 초래했다. 그의 삶의 방식은 분명 도시하층민의 생존방식에 해당하지만 개별적 분노의 표출에 머물렀기에 공동체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의 선택은 도시공간에서 비정상적 삶을 영위한 분열된 도시하층민의 어느 정도 '불가피한' 또는 운명적 행위였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그를 영웅이라고 볼 수는 없겠고 부당한 죽음에서 두드러지게 비명을 질러댄 대표적인 희생양이자 그 시대의 상흔이라고 정의해야 하지 싶다.
글
- 노수빈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 안치용 :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신다임 :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졸업.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이 있지만 요즘은 특히 식물에 빠져 몬스테라 키우기에 열심이다. 글로써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자 지망생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 단행본
김원,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 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 현실문화연구, 2011.05.31.
2. 논문
박홍근, <1960년대 후반 서울 도시근대화의 성격 – 도시빈민의 추방과 중산층 도시로의 공간재편>, <민주주의와 인권>, 전남대학교5.18연구소, 2015.08.
김동춘, <1971년 8.10 광주대단지 주민항거의 배경과 성격>, 공간과 사회
유경남, <1970-80년대 무등산 개발사업과 그 내파(內破)>, <지방사와 지방문화>, 역사문화학회, 2013.05.
3. 기사
<연내 아파트 81동 건립>, 조선일보, 1971.02.25.
<사제총 위협 무허촌 철거반원 4명 피살>, 경향신문, 1977.04.21.
이정환, <우리가 무엇 때문에 나라를 위해 싸우는가 – 박흥숙 자필 최후 진술 전문>, 오마이뉴스, 2016.02.05.
#도시 빈민 #박흥숙
철거반장은 불을 지르지 않겠으니 내려오라고 그를 설득했고 지붕에서 내려온 흥숙은 며칠 전 공부방으로 쓰려고 만든 구덩이가 걱정되어 잠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 사이 철거반은 불을 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잔재물을 모두 없애기 위해 집에 불을 놓았다. 집에 불이 붙자 흥숙의 어머니는 그동안 푼푼이 모아 천장에 숨겨 둔 돈 30만 원을 찾으려고 뛰어들다 철거반원들의 제지로 돈을 구하지 못하고 실신한다.
사태를 뒤늦게 파악한 흥숙은 덕산골의 다른 집을 철거하고 돌아오는 철거반장에게 자신이 일전에 만든 사제 총(딱총)을 발사하며 도망친 철거반원들을 모두 모이게 하라고 위협했다. 그는 철거반원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모두 뒤돌아보게 한 후 철거용 쇠망치로 뒤통수를 내려쳐 4명을 살해했다. 반나절도 되지 않은 시간에 흥숙은 가난한 철거민에서 잔혹한 살인자가 되어버렸다.
사건 직후 흥숙은 현장을 달아나 서울행 열차를 탔으나 이틀만인 22일 중앙정보부에 자수했다. 하루아침에 잔혹한 살인자가 된 청년을 광주 시민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흥숙의 성실하고 순진한 성정과 그가 처한 사정에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 광주YMCA 이사인 안성례를 중심으로 서명 작업과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이 구명에는 박순척, 김옥길, 오지호 등 63명의 사회 인사가 참여했다.
1977년 7월 열린 첫 재판부터 1978년 5월 대법원 상고심까지 흥숙의 사정에 동감한 여러 인사의 구명운동과 탄원서 제출이 있었지만 끝내 그는 사형을 피할 수 없었다. 재판부가 밝혔듯 "공무집행 중인 공무원을 4명이나 무참히 때려죽인 처사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다.
무너진 아파트, 끔찍한 '신'도시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사건이라기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추진해 왔던 고도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소외된 도시빈민의 무주택 문제가 빚어낸 사건이자 대책 없이 진행된 행정상의 횡포가 부른 참극이었다."
흥숙의 구명운동에 참여한 어느 인사의 진단이다. 흥숙의 범죄를 지켜보며 그가 발견한 이면의 사회상은 무엇이었을까. 흥숙의 범죄와 그의 삶 그리고 죽음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대한민국 도시 개발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4년생 흥숙이 1960~70년대를 거쳐 청년이 될 동안 대한민국의 도시 역시 성장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도시 거리는 전재민(戰災民)과 고아 부랑아 등 '목적지 없이 방황하는 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서울은 대다수의 전재민이 몰려 과잉도시화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서울로 올라온 이들은 구걸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도시 주변부에 천막을 쳐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 이들이 모여 형성된 천막촌과 판잣집은 식민지 도시빈민의 '토막민촌(土幕民村)'이 변형된 형태였다. 이와 같은 무허가 불량주택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주택난은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만성적 문제가 되었다.
도시빈민 문제는 전재(戰災)가 어느 정도 잦아든 1960년대에서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이농민의 수는 갈수록 증가했으며 그 결과로 도시빈민과 하층노동자가 대규모로 양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집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국가 주도의 돌진적 산업화를 추진한 것과 관련이 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경제개발의 효과가 가시화하기 시작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촌향도(離村向都)는 더욱 가속되었다. 그러나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도시로 상경한 이들 대부분은 과잉인구로 인한 심각한 주택난과 교통난을 겪으며 하층노동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전남지역은 서울로 인구가 집중됨에 따라 전체 인구가 현저하게 감소했지만, 주요 도시인 광주시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따라서 광주 역시 서울만큼 심한 도시화 문제를 겪었다. 광주에 전입한 사람 대부분은 전남 농촌 출신이었고 전출과 전입인구가 전체 인구의 45~53%에 이르렀으며 그들 중 상당수가 도시빈민층에 편입되었다.
서울과 지역의 주요 도시들은 매년 급증하는 인구에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에 '대도시 인구집중 방지책'을, 1970년에는 '수도권 인구의 과밀집중억제에 관한 기본지침'을 내놓았다. 이 인구집중 방지책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10년을 계획기간으로 삼고 서울·부산·대구와 같은 대도시의 기능 중 교육·상업 등을 부근의 중소 도시로 분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러한 정부 정책의 시행에 앞서 혹은 시행과 함께 1966년 이후 도시 경관 미화 목적으로 무허가 불량주택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철거가 시작되었다.
'시민아파트 사업'과 '광주대단지 사업'은 이러한 배경에서 서울의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야심 차게 내놓은 대책이었다. 그러나 도시빈민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려는 취지로 등장한 정부 정책들은 역설적으로 도시빈민을 도시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서울시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 동을 공급해 9만 가구를 입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에 따라 1971년 영동지구 사업계획이 발표되었고 1973년에는 이 지역이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시민아파트는 처음부터 심각한 안전 문제를 안고 있었다. 시민아파트를 시공한 33개 건설업체는 대부분 부실업체였으며 이 업체들은 아파트가 들어설 부지에 대한 정밀한 측량이나 지질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건물을 지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시민아파트는 부실 설계, 지반 취약, 자재 부족 등의 심각한 안전 문제를 태생적으로 안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한 달 평균 소득이 1만 원 이하에 불과한 불량주택 거주자들이 시민아파트에 실제로 입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당시 서울시가 발표한 아파트 건설 계획에 의하면 시민아파트 입주 시 부담금은 15만 8000원이었다. 도시빈민을 위한 아파트는 결국 부동산 투기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서울시가 입주권 매매를 금지했지만 단속할 행정력이 부족했기에 입주권 매매는 공공연히 일어났다.
시민아파트 사업은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33명이 사망하면서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사임하고 이후 계속 안전 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이 사업의 전면 백지화를 지시함으로써 중단되었다.
▲ 와우아파트 붕괴 현장 ⓒ 국가기록원
시민아파트 사업과 동시에 정부는 인구 분산을 목적으로 신도시 계획(광주대단지사업종합계획)에 착수하여 최초의 신도시인 광주대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 이 사업은 서울 중심부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지금의 성남시 수정구‧중원구) 일대 약 350만 평에 1968년부터 1973년까지 6년에 걸쳐 총 56억 원을 투자하여 인구 35만 명을 수용하는 신도시를 세우는 계획이었다.
특히 수용 인구 가운데 27만 8000명의 인구를 서울로부터 도시빈민을 받아 충당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1971년 8월까지 2만5627세대 12만4356명이 철거‧이주하여 광주대단지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신도시' 광주대단지에는 도시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기반시설조차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 심각한 식량난, 의료문제 그리고 치안 문제 등으로 이주민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주 당시 서울시가 약속한 일자리 제공은 지켜지지 않았고 자체적인 생산‧고용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이주민은 생계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일을 찾아 한 시간 반 거리나 떨어진 서울을 매일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사실상 방치에 가까운 수준으로 정부는 대단지 문제들을 모른 척했고 이주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이주민들은 결국 1971년 8월 10일 적게는 3만 명, 많게는 6~7만 명이 모여 박정희 정권 최초‧최대의 도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정권과 행정당국의 무성의하고 졸속한 철거민 정책 그리고 성급한 분양계획 추진과 높은 분양가격 등에 의해 촉발되었다.
봉기는 발생한 지 6시간 만에 양택식 서울시장이 이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기로 발표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사후 대책은 매우 미봉적이었다. 토지매각가격 인하 요구는 수용되었으나 광주대단지의 태생적 문제점인 열악한 환경의 개선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 '광주대단지'로 조성된 1970년대 성남시 모습 ⓒ 성남시
도시빈민이 소외되는 모습은 당시 전남 광주에서도 반복되었다. 광주에서 최초로 시행한 도시 계획은 1962년 제정된 도시계획법에 따라 1967년 이뤄진 '도시계획재정비'였다. 이에 따라 1972년 광주시는 도시의 무질서한 확장을 막고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무등산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개발제한구역을 설정했다.
따라서 광주시는 그 안에 사는 18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자 했으며 초기엔 주민들의 자발적인 이주를 독려했지만 호응이 없자 강제 철거를 감행했다. 이른바 '무등산 타잔 사건'이 발생하기 5년 전인 1972년 도립공원 계획이 수립되어 도시공간에 대한 개발과 관리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흥숙의 거처인 덕산골에 대한 철거 역시 입안되었다.
나중에사 모든 사실을 알았지만 당장 이사 갈 여유도 없었고, 참, 피와 땀의 결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고생 고생 그 고생을 해서 지은 집을 차마 내 손으로 부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당국에서도 지난 겨울 1차 계고 당시까지는 집을 지은 지 5∼6년이 지나도록까지 말 한 마디 없었으며 우리들도 그처럼 그런 산골에까지 계고장이 나오리라고는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예전에 미처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다고 자진 철거하라는 당국 명령을 받고 이를 묵인하여 그냥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었으며 그 마을 모두가 그렇듯이 시내로 나가 방을 알아도 보았고, 또 어디 적당한 곳에 (천)막 칠 자리라도 없나 하고 몇 날을 두고 찾아 돌아다녀 보기도 하였다. (중략) 추위에 떨고 가난에 떨어야 했던 그 산골에서는 이 혹독한 추위가 해풍해지도록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다.
- 박흥숙 최후진술 중
'무등산 타잔 사건'의 배경 역시 1970년대 도시정책의 특징인 재개발과 철거정책, 무허가 정착지의 확산 때문이었다. 흥숙이 최후진술에서 밝혔듯 철거 계고장은 계속해서 날아왔지만, 다른 대안이 없던 이 가족들에게 이주 대책은 전무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흥숙 가족은 온전한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곳에서 날아오는 계고장을 애써 모른 척하며 하루하루를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하라면 하고, 안 되면 되게 하고
군사정권은 집권과 동시에 행정질서화의 열망에 사로잡혔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전 국가 상황을 부패와 정치 무능이 만연한 시대로 규정하면서 국가 개조를 위해 사회 전 영역에 걸친 새 질서 확립의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했다. 이후 사회를 단일한 규율 질서에 포섭해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대규모 경제‧사회 정책이 속속 시행되었는데 이러한 면모는 공간개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현대도시'를 위해 군사정권이 요구한 자세는 '하라면 하고', '안 되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 목표 달성이었으며 이를 위한 '빠른 속도'는 당연한 전제였다. 한순간에 집을 잃은 철거민의 허망함이나 방치된 공간에서 가난과 질병에 죽어가는 빈민의 삶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수많은 졸속 정책은 애초부터 그곳에 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근대화의 이상을 상징하는, 모던하고 세련된 도시 공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의 가속화를 통해 도시가 개발되는 동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위험의 일상화를 견뎌야 했다.
▲ 2005년 5월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편. 당시 박흥숙이 재판정에 들어서는 모습. ⓒ MBC
흥숙은 "반 넋이 나가버려 초점 잃은 눈으로" 허물어진 움막을 지켜보던 어머니와 "허물어진 담장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 발을 동동 구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타까이 허둥대는" 다른 철거민들의 "불쌍하고 가엾은"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서고, 이가 갈리는" 순간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그와 같은 도시빈민이 견뎌야 했던 일상이었기에 그는 외면할 수 없었다.
흥숙의 삶은 군사정권이 근대화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외면했던 도시빈민의 현실이다. "방 한 칸 의지할 데가 없어서 남의 집 변소를 들여다보고 남의 집 처마 밑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은 국가에 의해 집에서, 도시에서, 대한민국에서 '추방된' 여러 삶의 일면이다.
"철거하러 오는 사람도 우리와 같은 서민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짓인데 그 사람들을 욕하지 말라"며 철거반원에 적대적이지 않았던 그가 한순간에 무고한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자기 파멸의 길로 접어든 비극은 그와 같은 도시빈민을 타자로 규정하고 방치하여 결국 배척한 군사정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흥숙이 미필적 고의 상태에서 선택한 살인은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면서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야기하며 윤리적 파국을 초래했다. 그의 삶의 방식은 분명 도시하층민의 생존방식에 해당하지만 개별적 분노의 표출에 머물렀기에 공동체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의 선택은 도시공간에서 비정상적 삶을 영위한 분열된 도시하층민의 어느 정도 '불가피한' 또는 운명적 행위였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그를 영웅이라고 볼 수는 없겠고 부당한 죽음에서 두드러지게 비명을 질러댄 대표적인 희생양이자 그 시대의 상흔이라고 정의해야 하지 싶다.
글
- 노수빈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 안치용 :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신다임 :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졸업.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이 있지만 요즘은 특히 식물에 빠져 몬스테라 키우기에 열심이다. 글로써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자 지망생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 단행본
김원,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 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 현실문화연구, 2011.05.31.
2. 논문
박홍근, <1960년대 후반 서울 도시근대화의 성격 – 도시빈민의 추방과 중산층 도시로의 공간재편>, <민주주의와 인권>, 전남대학교5.18연구소, 2015.08.
김동춘, <1971년 8.10 광주대단지 주민항거의 배경과 성격>, 공간과 사회
유경남, <1970-80년대 무등산 개발사업과 그 내파(內破)>, <지방사와 지방문화>, 역사문화학회, 2013.05.
3. 기사
<연내 아파트 81동 건립>, 조선일보, 1971.02.25.
<사제총 위협 무허촌 철거반원 4명 피살>, 경향신문, 1977.04.21.
이정환, <우리가 무엇 때문에 나라를 위해 싸우는가 – 박흥숙 자필 최후 진술 전문>, 오마이뉴스, 2016.02.05.
#도시 빈민 #박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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